약수 (강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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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경하여 신병에 특별한 효과를 얻지 못한 나는 6월 중순에 일로(一路) 삼방(三防)으로 보따리를 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이 삼방협(三防峽)에 짐을 푼 지도 벌써 10여 일이 넘었는데 문득 『인문평론(人文評論)』에서 부탁한 원고가 생각나서 이에 붓을 들기로 하였다.

최근 3년째 신병으로 인하여 나는 오로지 투병을 일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고, 그래서 자연 붓과 멀어졌기 때문에 그 상(想)이 여간 무디지 않은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허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래간만에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겼으니 어디 붓끝을 다듬어보기로 하자.

어떤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는 길로 컵 한 개만을 들고 천진동(天眞洞) 약수터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는 바로 산아래 숲속이라 그럴까, 어인 일인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조금 적적하다. 그러기에 나는 여기를 더 좋아해서 아침이면 으레 이곳을 찾는 것이다.

안개가 자욱하다. 사람들도 자고 또 새들도 자는지 이 누리는 나무숲으로 빼듯할 뿐 고요하였다. 들리느니, 냇물소리가 돌돌 구르고, 간혹 얘기소리가 끊일 듯 이어간다. 호! 하고 크게 숨을 내뿜었다. 들여 쉬면 안개송이가 사이다처럼 한 입씩 기어들곤 하였다.

언뜻 보니 떡갈나무 잎에 숨어 하늘이 비단필인 양 드리웠고 달이 산허리에 가만히 기대섰다. 여전히 누구를 고대하는 것 같다. 어제밤보다는 애수를 조금 잃은 듯했으나 대신에 땅 치면 쟁그렁 쇳소리를 낼 것 같다.

나는 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한 컵 쭉 들여 마시고 나니 심신이 아울러 날아갈 듯한 가벼움에 쌓여 가만이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벅찬 가슴을 붙안고 약수터를 벗어나 천천히 걷기로 하였다.

쳐다보니 앞산이 하늘에 닿았고, 그 산을 덮어 떡갈나무 참나무 오리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밤나무 소나무 등이 그 자리를 다투었고, 그 사이를 안개가 벌레처럼 날아다닌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어 나는 숨차게 걸어본다. 비록 조그만 돌이지만 고산(高山)에 있노라 그런가, 검푸른 엄격한 빛을 띄우고 옹글차게 버티고 앉았다. 몇천 년 아니 몇만 년 동안을 예서 살아왔을꼬? 나도 이 바위돌처럼 여기서 살고 싶어진다. 안개가 내 몸에 비단옷처럼 휘어 감긴다. 산뜻하고도 매끄러운 감각이 내 머리끝에서부터 고무신 코에까지 휘휘 드리운다.

길가 이름 모를 긴 풀잎에 이슬이 산딸기처럼 무르익었고 어깨 위를 어루만지는 나뭇잎에서 생선 비린내가 후끈거린다.

냇물은 귀밑에서 돌돌거린다 . 아니 발 아래서 사물거린다. 그 소근거리는 소리에 입김이 섞여 있는 듯, 휘끈 돌아보게 된다. 척척 휘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헤치고 푸른 바위 밑을 돌아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돌돌 굴러내린다. 아침이라 맑음을 더해서 푸른 리본을 달고 다팔거린다. 우악스레 큰 놈, 얄밉게 도드라진 놈, 미욱스레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섰는 놈, 이러한 바위돌들을 얼리고 달래면서 언제나 그 아미에 겸손한 웃음을 띠우고 흘러내린다.

원컨댄, 세속에 티묻은 이 몸과 맘을 저 샘물에 씻어버리고저. 나는 가만히 앉아 물을 쥐어본다. 다정하면서도 차디차다. 손끝을 베어갈 듯한 매움이 들어 있다. 그 속에 산내음새 오이내같아…….

달은 어느덧 처녀처럼 깜빡 숨어버리고 새소리 요란해져서 이 동리가 번화해진 듯하다. 여기 그 누가 꽃을 심어놓았던가. 향내가 흐뭇하게 어리운다. 돌아보니 나뭇잎에 반만큼 나타난 꽃송이가 이제 산 뒤에 숨어버린 그 달을 닮았어, 꼭 닮았어. 아마 달의 따님인지 모르지.

산은 그 윤곽을 뚜렷이 허공에 내어던지고 있다. 이제 처음이건만 오래 사귄 구면처럼 반갑고 낯익어서 무어라고 말을 건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다. 그 위에 휘황한 햇빛이 솩 드리었고 남빛 하늘이 촐랑촐랑 뛰어놀고 있다. 나는 가만히 두 손을 한데 모으며 눈을 감는다.

6월 25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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