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유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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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마음, 보는 각도를 따라서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극치에 달하면 같은 세계를 하나는 지옥으로 보고, 다른 이는 극락으로 보고 또 다른 이는 텅빈 것으로 보는 것이다.

농촌의 여름도 그러하다. 이것을 즐겁게 보는 이도 있고 괴롭게 보는 이도 있고 또 고락이 상반으로 보는 이도 있다. 어느 것이 참이요 어느 것이 거짓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와 그가 보는 각도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다. 여름의 농촌을 유모어의 마음으로 유모어의 각도에서 보는 것도 한 보는 법일 것이다.

초복을 앞 둔 어떤 날, 선선한 아침이었다. 나는 소를 개울가에 내다 매고 방에 앉아서 뒤꼍 옥수수에 붉은 솔이 늘어진 것이 꼭 등에 업힌 어린애와 같다고 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그것이 어린애 같았다. 옥수수 대는 어린 것이 잠이 깰세라 하고 고이고이 업고 있었다. 다리아의 자주빛, 보라빛, 원추리꽃의 노란빛, 호박꽃, 오이꽃도 노랗고, 인제는 벌써 옛날이어니와 복숭아꽃, 살구꽃도 붉거나 분홍이었다. 꽃들의 이런 빛과 처녀나 새아기들 의 분홍치마 노란 저고리나 다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고 빙그레 웃고 있을 때에 삼각산과 불암산이 차례로 스러지고 문재 봉우리에 뽀얗게 비가 묻어 들어왔다.

「저 건너 갈뫼봉에 비가 묻어 들어온다.

우장을 허리에 더르고 기심매러 갈가나.」

는 언제 들어도 우리의 농촌 정조다.

비는 소리를 내고 왔다.

<소!>

나는 개울가에 맨 소를 생각하였다. 이 비를 맞혀도 좋을까, 이렇게 선선한데. 소를 금년 처음 맨 나는 소의 습성을 잘 알지 못하였다. 여름비를 좀 맞는 것이 좋을 것도 같고 찬비를 맞는 것이 고 통일 것 같기도 하였다.

그의 코 안 꿰인 조상들이야 비도 맞고 한데 잠도 잤겠지마는 수백 대를 외양간에서 살아온 그는 조상적 기운을 많이 잃어서 찬 비에 못 견딜는지 모른다.

나는 마침내 소를 끌어 들이기로 결심하고 대단히 큰일이나 하러 가는 사람 모양으로 빗발을 뚫고 긴 방죽을 걸어서 개울가로 갔다. 소는 시름없이 풀을 뜯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말은 못하나 반가운 것이었다.

나는 말뚝을 뽑고 바를 사려들었다.

『이랴!』

하고 소를 끌려다가 보니 비는 그치고 말았다. 어느 틈에 동쪽 하늘은 훤하게 열렸다. 나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하늘을 휘 둘러 보고는 싱거운 듯이 웃었다. 그러고도로 말뚝을 박아 놓고 집으로 향하였다. 소는 또 한번 고개를 들어서 나를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이웃 벗이 내 꾀죄죄 흐르게 젖은 꼴을 보고 빙글빙글 웃으며,

『어딜 비 맞고 갔다 오슈?』

하고 물을 때에 나는 말없이 웃었다.

강아지와 소와는 의좋은 사이는 아니다. 강아지라고 다 그런지는 모르지마는 우리집 놈은 소를 못 견디게 구는 것으로 큰 재미를 삼는다. 소가 외양간에 들어오면 우리 강아지 오요는 소 곁으로 달려가서 한바탕 앙앙거리고 짖는데 소는 우선 그것부텀이 싫어서 머리를 내어두르고 발을 구른다. 그러면 강아지는 더욱 신이 나서 앞으로 뒤로 배 밑으로 뱅뱅 돌며 짖기도 하고 무는 시늉도 한다. 그래도 소는 커단체지에 한참은 눈을 껌벅거리고 참고 있다. 그러나 소가 가만히 참고 있어서는 강아지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었다. 강아지는 모든 수단을 다해서 소를 성을 내어놓고야 말 작정이다. 그는 더욱 짖고 더욱 빨리 뛰어 돌아가다가 마침내는 고삐를 물어나꾸채고 꼬랑지를 물고 늘어진다. 이에 소는 잔뜩 골이 나 고약이 올라서 꼬리를 두르고 발을 구르고 받는 동작을 한다. 그러나 강아지는 좁은 외양간에서 그 체대 한 소가 자유로 용맹을 쓸 수 없는 것과, 아무리 받는댔자 제 편이 더욱 민첩해서 얼른 피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소를 못 견디게 굴고 놀려먹는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런 일이 반복되노라면 강아지가 발이나 꼬랑지를 쇠발에 밟히는 일도 있고 고삐에 매달렸다가 쇠 이마에 얻어 받기는 수도 있다. 그때에는 강아지는 깡이 깡이하고 우는 소리를 하고 그 우는 소리를 들으면 소는 갑자기 가여운 생각이 나는 모양이어서 얼른 발을 들어 주고 또 킁킁 강아지를 맡아 준다.

<내가 너를 죽이려는 생각은 아니다.>

하는 것 같은 눈이 된다.

이렇게 한번 되게 혼이 나면 강아지는 외양간에서 뛰어 나와서 궁이를 새에 두고 소와 마주 보는 위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밟히거나 받혀서 아픈 것이 나을 만하면 강아지는 또 버릇없는 장난을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소를 끌고 나가면 강아지도 따라온다. 소게 풀을 뜯기면 강아지는 또 고삐에 매어달리기, 꼬랑지를 물고 늘어지기를 시작하거니와 그중에도 가장 소가 화를 내이는 것은 강아지가 방금 풀을 뜯고 있는 소 주둥이를 슬적슬 적 스치고 연해 왔다갔다는 것이다. 소는 이것도 몇 번은 참고 여전히 풀을 뜯지마는 하도 강아지가 성가시게 굴면 그만 눈이 뒤집히는 모양이어서 흥 소리를 치며 강아지를 받는다.

<흥, 네 따위헌테 받힐 낸 줄 알고.>

하는 듯이 강아지는 재빨리 몸을 피해서 얼른 뒤로 돌아 쇠꼬리를 물고 네 발을 버틴다. 소는 한 번 한숨을 쉬고는 또 풀을 뜯는다. 좁은 외양간에서 나 한 번 만나자 하고 벼르는 모양이었다.

우리 소와 강아지는 이 모양으로 벌써 석달째나 살았다. 그리의 좋은 친구는 아니나 역시 피차에 정은 든 모양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강아지는 유모어를 알건마는 소는 그것을 모르는 일이었다.

셰퍼드와 포인터의 트기인가 싶은 우리 강아지가 황소를 어리석은 놀림감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요는 젖 떨어진지 며칠 아니하여 우리 집에 온 즉시부터도 오줌 똥을 잘 가리어서 꼭 울타리 밖에 나갔다. 그런데 우리 소는 여섯 살이나 나이를 먹어서 벌써 어른이언마는 선 자리에서 오줌을 누고 똥을 싸서 자리를 어지러 놓고는 그 위에 펄썩 드러누웠다. 그래 그 커다란 볼기짝과 배때기가 밤낮 온통 똥투성이었다. 코를 꿰어서 고삐에 얽매우고 외양간에 갇힌 몸이니 뒤를 보러 울타리 밖에까지는 못 나가더라도 한편 구석으로 꽁무니를 돌려 댈 수는 있지 아니한가. 그것을 보고 우리 다섯 달된 강아지가 못난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은 허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마는 소의 편에서 보면 강아지란 하잘 것 없는 미물이다. 고것이 감히 소의 앞에 버릇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귀엽게 본다면 몰라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기운으로 보든지 용기로 보든지 소는 능히 호랑이와 싸워서 이기는 맹수다. 불행히 땅 껍데기의 변동으로 독립한 생활을 못하고 사람의 집에 붙어서 사는 신세가 되었거니와 포로된 영웅일지언정 항복한 노예가 아니란 것은 개개로 콧도리를 꿰인 사실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

천하의 소 치고는 어느 소 한 마리도 코를 꿰이지 아니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비루한 자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소의 기개로 주인을 보고 꼬리를 치고 멀쩡한 어금니를 두고도 사람의 손발을 곱게 핥는 강아지를 볼 때에는 새김질할 때가 아니고도 아니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소는 죽도록 일하여서 사람을 벌어 먹이고도 마침내는 떡메로 골사대기를 맞아서 죽어 피와 살을 사람에게 먹히운다. 그러나 사람에게 항복하여 그 귀염을 받는다는 개도 필경은 올개미를 쓰고 혀를 떼어 물지 않는가.

소를 순하다고 하고 어리석다고 하고 말 안 듣는다고 한다. 순한 듯한 것은 단념하고 참는 까닭이다. 어리석은 것은 지혜를 쓸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 「어디어」같은 말을 알아듣는 것만 해도 소로서는 수치다. 훼절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양보라고 할까. 강아지와 같이 주인의 집지기가 되고 노리개가 되는 그런 영리함은 소의 겨레가 취하지 않는 배다. 개는 미친 뒤에야 비로소 조상 적 자유와 위신과 용기를 발휘하지마는 소는 미래 영겁에 포로의 생활을 달게 받을 것이다. 오줌을 어디서 싸거나 똥 위에 주저앉거나 그런 것을 염두에 둘 소는 아니다. 대장부 소절에 구애않는다는 것이다.

『개는 제 주인을 알아도 소는 몰라본다고? 흥.』

소는 이렇게 코웃음할 것이다. 소는 일찍 어느 사람에게 고 충성을 맹세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호의를 보일 때에도 굽실거릴 것도 없는 동시에 비록 십년 묵은 주인이라도 잘못하면 받아 넘길 자유를 보류한 것이다.

소는 불평가다. 더우기 여름에 그러하다. 일은 고되어 목은 멍에에 터지고 등은 채찍에 부었다. 적이 한가하게 되어 개울가 풀판에 누워 쉴 만하면 물 것이 덤빈다. 생물 치고 물것이 없는 것이 없지마는 아마 물것 단련을 가장 많이 하는 이는 소일 것이다. 적어도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낮에는 등에와 여러 종류되는 파리에게 뜯기고 밤이면 모기에게 뜯긴다. 시험조로 여름날의 그의 몸을 보라. 온통 두드러기 천지니 이것은 다 물것에게 피를 빨린 자국이다. 또 사람으로 이르면 이나 벼룩이 같은 물것이 털 하나에 하나씩이라 할 만하게 들어 박혀서 그를 가렵게 하는 것이다. 그가 천지에게 받은 물것 막는 법은 꼬리와 목을 둘러서 몸에 붙는 파리 따위를 쫒는 것, 또는 피부를 푸르르 떨리는 것이 있고 가려울 때에는 혀로 핥는 치료법이 있다. 그러나 쫓으면 오고 쫓으면 오는 등에와 파리의 떼를 이로 다 쫓으려면 소의 머리와 꼬리를 비행기의 푸로펠러 모양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내어 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운명으로 돌리고 꾹 참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눈에 수십 마리, 몸에는 수백 마리 큰 놈, 작은 놈, 중간 놈, 파리가 붙어도,

<그래, 마음껏 뜯고 빨아라.>

하고 한숨을 쉬며 새김질을 하고 있다. 호랑이나 사자라도 받아 넘길 뿔과 기운이 있건마는 뿔에도 발에도 안걸리는 파리떼, 모기떼를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는 입정한 중 모양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서 멀리 지평선에 피어 오르는 저녁 구름 봉우리를 바라본다. 그는 콧도리와 물것이 없고 부드러운 풀 많은 개울가를 가진 극락 세계를 염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원한의 빗을 받아내고야 말려고 찐득찐득하게도 덤비어들고 파고드는 적은 원혼들은 그에게 극락의 꿈을 허하려 아니하여 저녁때가 될 수록 채무지불기일의 최후를 일각을 다투고 그 아프고도 가렵게 하는 주둥이를 살에다가 박는다. 소는 참다 참다 못하야 벌떡 일어나서 네 굽으로 땅을 차서 흙바래를 구름과 같이 일으키며 영각을 하고 날뛴다. 고삐가 끊어지거나 콧도리가 튕겨지거나 땅아 부서져라, 하늘 아 무너져라 하고 그는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이 몸을 들었다 놓는다. 거기는 무서운 분노와 저주가 있다. 그러나 천지는 그가 반항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혀서 땅에 돋는 풀을 뜯고 인과의 사슬이 한 마디 한 마디 넘어가기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

그렇다고 그에게는 전혀 부드러운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병아리가 그의 누운 등에서 걸어다닐 때에 그는 귀여움을 느껴서 꼬리로 쳐버리지는 않는다. 어린애가 제 고삐를 끌고 갈 때에 그는 버티고 서려 아니한다. 암소를 볼 때에 일어나는 애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직 굴레도 아니 쓴 송아지가 엄매 엄매 부를 때에는 그는 귀를 솔깃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부드러운 감정을 쏟을 데도 없고 때도 없다. 까만 옛날 엄마의 젖에서 떨어져서 소 장사의 손에 들어가서부터는 평생이 고독의 생활이다. 외양간에 누웠거나 들에 나가서 풀을 뜯거나 언제나 혼자다. 만일 우뢰 번개 치고 폭풍우 날치는 날 그가 개울가에 고개를 번쩍 들고 혼자 누워 있는 양을 본다면 그것이 그의 평생을 상징하는 대표적 경계다. 그는 수도자다. 그는 참는 바라밀을 닦고 있다. 어쩌다가 인자한 사람을 만날 때에 그는 자비의 설법을 듣는다. 그 설법은 말로가 아니요 행동으로다. 가려운 데를 긁어 줄 때에, 풀 많은데로 옮겨 매어 줄 때에, 땀을 흘리며 꼴짐을 지고 들어오는 이를 볼 때에 그는 자비의 빛을 보고 몸과 마음이 누긋해진다. 이 빛에 비추어진 세계는 물것 등살에 네 굽을 놓아 흙바래를 일으키거나 무지하게 때리고 사정 없이 부려먹는 주인을 받아넘길 때의 세계와는 딴 모양의 세계다.

암소에게는 새끼를 떼우는 슬픔이 있거니와 황소에게는 그것은 없다. 그 대신에 새끼에게 젖을 빨리고 그 배틀한 몸을 핥아 주는 낙이 없다.

한 여름 일도 끝나면 가난한 주인은 대개 소를 팔아버린다. 이래서 육칠월 이면 소 값이 뚝 떨어진다. 굴레며, 장식 있는 관자끈이며, 풍경이며, 이런 것은 다 벗기고 짚으로 꼰 굴레에 허름한 고삐를 갈아 매면 소는 제가 이집을 떠나는 줄을 안다. 어른 주인은 주판만 생각하지마는 아낙네 주인과 아이들은 정들인 소를 떠내보내는 것을 섭섭히 여겨 준다. 소는 또 한 번 인정이라는 것을 느껴서 마음이 누긋해진다. 그렇지마는 다시 돌아보도록 안 잊히는 주인 집 편안한 외양간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다. 그는 주인이 끄는 대로 끌리고 모는 대로 몰려서장으로 간다. 어떤 집 어떤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고? 뚱뚱한 푸주집 주인의 손으로 팔려 간다면 앞날이 며칠 아니 남은 것이요, 만일 어떤 농가로 간다면 김장밭 보리밭부터 갈기를 시작할 날이 또 며칠 안 남았을 것이다.

<어디를 가면 대수냐.>

하는 듯이 팔려가는 소는 앞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는 이 동네에 들어 오던 때와 다른 것은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것뿐이다. 그는 맨몸으로 왔다 가 맨몸으로 나가는 것이다. 아마 다시 이 동네나 이 주인의 손에 돌아올 기약은 없을 것이다.

쌍동이 할아버지는 언제나 일터에 나갈 때에 테 없는 헌 맥고모를 쓴다.

그 만든 제로 보아서 전쟁 전 것이 분명하다. 비가 오나 볕이 나나 늘 테 없는 맥고모다. 멀리서 보아도 이것으로 그를 알아볼 수가 있다. 그는 수염이 노랗고 살은 까맣고 술을 좋아하나 주정하는 일이 없는 노랑이다. 그는 자수 성가하여 금년에도 논과 밭을 샀다. 이웃간에서는 인색하고 이약하다는 평을 듣는다.

박 생원은 일하러 다닐 때에는 테 없는 중절모를 눌러 쓴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그는 이것을 쓴다. 뙤약볕에 연장질을 할 때에도 그의 머리에는 이 테 없는 중절모가 있다. 그는 여름에 쓰려고 겨울 동안 이 겨울모자를 싸 두는 모양이다.

박 생원은 아들이 없는 늙은이다. 그는 술은 입에도 아니 대나 담배는 좋아하고 땔나무를 할 때에도 푸른 가지는 아니 건드린다. 이웃간에 착한 노인으로 이름이 났다. 그는 마치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한 사람 모양으로 도무지 욕심이 없고 또 근심도 없다. 언제나 벙글벙글 웃는 낯이다. 지금 세상에 이런 사람을 존경할 사람은 많지 않지마는 그를 시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착한 이가 왜 못 살까.』

사람들은 이렇게 그를 애석하는 한편으로 착한 자에게 복이 온다는 성인들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근거로 삼는 모양이다. 「못 산다」는 것은 「잘 산다」의 반대로 가난하단 말이다.

「재봉이」는 서양 여자의 겨울 모자와 같은 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는 아직 삼십 전 청년이다. 떡 벌어진 어깨에 제 손으로 걸었다는 지게를 지고 한 편 팔꿈치에 작대기를 비스듬히 끼고 벙글벙글 웃는 그의 모양은 청춘의 힘의 화신이다. 머리에 얹은 서양 부인의 모자도 용사의 투구와 같아서 척 어울린다.

그는 무슨 일이나 다 잘하고 해도 남의 삼 갑절은 한다. 자갈을 채판에 퍼 담는 일을 할 때에는 장 장군이라야 삼백원을 번다는데 그는 능히 오백원어치를 하고도 석양에 길게 목청 좋은 소리를 뽑는다. 어디서 목청 좋은 소리가 들리거든 보지도 말고 묻지도 말고 그가 인 재봉으로 알라.

그는 아내와 딸이 있다. 옹솥 하나, 사발 둘, 숟가락 둘로 세간을 난 그는 삼년만인 금년에는 오백평을 샀다.

『작년에 병으로 수술만 안 했으면 밭 천 평이나 샀을 게야요.』

하고 그는 웃는다.

임 생원은 무르팍 나간 양복바지를 입고 쇠고삐를 끌었다. 그는 감은 테 있는 말짱한 파나마를 쓰고 비를 맞으며 소에게 풀을 뜯겼다. 마치 발만 벗고 비만 맞으면 농부가 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는 도시에서 쫓겨나서 할 줄 모르는 농사를 해 보려는 망계를 내인 늙은이다. 그는 아직 소에게 하는 말을 못 배워서,

『앗아! 아, 안돼!』

이 모양으로 사람의 말을 하면서 쇠고삐에 매달렸다. 소는 한입 물어 뜯은 콩잎을 물고 모가지를 길게 빼고 턱을 쳐들었다. 소가 웃는다는 것이다.

소가 파나마 쓴 그에게 「네나 내나 딱한 신세다.」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덕관이 할아버지라는 노인이 흙 묻은 잠방이를 무르팍까지 걷어 올 리고 찾아왔다. 그는 모자를 쓰는 대신에 깎은 머리가 덥수룩하게 자라서 마치 아이녀석 같다. 초면 인사를 하고 보니 그가 그였다. 우리 논에 대는 차례가 된 봇물을 대고 돌아만 서면 따돌리던 그 늙은이다. 그의 논에는 어젯밤 밤새도록 대고 난 뒤였다. 그는 도리어,

『내 논에 먼저 대고 다음에 당신 논에 대면 피차에 좋을 것 아니요?』

하고 그가 물을 따돌리는 것을 내가 가만 두지 않았다고 승강이를 하러 온 것이었다. 이 노인이 왼장을 치고 마루 끝에 올라 앉아서 따지는 품이 대단히 불온하였다.

아따 지난 일이야 『, 할 수 있소? 내년부터는 이 논에 실컷 대신 뒤에 내 논에 떼어 돌려 주시구려.』

이렇게 나는 말해버렸다. 이 노인과 시비곡직을 따져야 쓸데 없다고 나는 생각한 때문이었다.

내 말에 덕관이 할아버지는 입을 딱 벌리고 한참이나 멍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 하두 의외여서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같은 뜻의 말을 하였다. 그제야 알아들은 듯이 벌떡 일어나며,

『우리 가십시다. 내가 영감을 꼭 술을 한 잔 대접해야 하겠소. 만나 보니 좋은 양반이로구먼 그래. 자 갑시다.』

하고 나를 끌다시피하였다.

나는 이 동네에 온 후로 처음 술집에를 가서 잔뜩 이 늙은이에게 막걸리 대접을 받았다. 그는 거나해서 신세타령까지 하였다. 한 아들은 서울 어느 회사에 고원으로 다니고 손자는 좌익의 한 투사였다. 작은 손자는 금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하였고 자기는 사무한신으로 술이나 먹고 다니면 고만일 팔자였다. 입으론 이렇게 말하건마는 이 늙은이 노는 때는 없었다. 가래질도 나가고, 특별히 가물 때 물 싸움에는 맹장이었다.

『논 이웃도 이웃이라는 거요. 우리 사이좋게 지냅시다.』

하고 말끝을 번쩍번쩍 드는 말투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 말하였다.

<평화는 내가 지는 데서 온다.>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혼자 웃었다.

『지고 살자.』

하는 것이 썩 훌륭한 인생관인 것 같았다. 아내가 들으면,

『또 못난 소리 하오.』

하고 펄쩍 뛸 소리다.

(丁亥七月十七日[정해 칠월 십칠일]思陵[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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