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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 농촌의 풍경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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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도 어지간히 빠릅니다. 아이들의 버들피리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건만 벌써 그 봄은 언제 왔더냐는 듯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초록치마를 길게 드리워 입은 씩씩한 여름철이 닥쳐왔습니다.

시절이 바뀜을 따라서 사람들이 느끼는 바 정서도 가지각색으로 변하는 셈인지, 어디인지 봄은 심란하게 맞았더니 반대로 이 여름은 즐겁고 기쁘게 맞는 듯싶습니다.

여름…… 더구나 농촌의 여름은 농민들에게 있어서 1년 중 가장 긴장될 때입니다. 그들의 생명선이 이 여름 한철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분네들은 여름철 들면서부터는 잠 한잠을 마음놓고 자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농민들의 그 애쓰는 것을 본다면 우리가 항상 먹는 쌀알이 무심히 보이지를 않고 따라서 우리 같은 기생충이란 모두가 넙적 엎드려 죽어야 마땅하게 생각되지요. 아차 탈선이 됩니다. 이런 푸념은 다른 기회로 미루고……

지금은 어슴푸레한 황혼입니다.

저 서천 하늘가에는 붉은 노을빛이 몇 갈래로 찢겨 길게 그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는 검푸른 산이 마치 병풍 친 것처럼 구불구불 돌아서서 긴장되었구요. 그 뒤로는 어린애의 눈 같은 그렇게 귀여운 별들이 방긋방긋 웃고 있습니다.

저녁 후인 나는 뜰에 나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보다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산으로 기어올라 갔습니다.

여기에 올라서 보니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이 실경이란 도저히 붓끝으로 그릴 수 없습니다.

눈이 아물아물하도록 펴나간 저 푸른 벌! 그 속으로 반듯반듯 빛나는 작은 시내며 이 산 모퉁이 저 산 모퉁이 끝에 다정스레 붙어 앉은 농가들, 그리고 들을 건너 깃을 찾는 새무리들은 푸른 하늘가에 높이 떴습니다. 그 날개까지도 파랗게 보이죠. 낮이 저들에게 있어서 엄한 아버지라면 밤은 저들에게 자애스러운 어머니일 것입니다. 그 평화스러운 품안에 안기어 차츰차츰 잠들어가는 저 푸른 벌, 누가 감히 저들의 고운 꿈을 깨칠 수 있으랴.

이제야 농민들은 들로부터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살았다 꺼지는 담배불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보입니다.

그들의 솜같이 피로해 풀려진 몸, 멀리서도 빤드러미 보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과도히 일을 하고도 호미 조밥조차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신세이외다.

나의 앞뒷집이 농가이기 때문에 저들의 일상생활은 샅샅이 알고 있습니다.

저렇게 늦게 들어와 가지고는 조밥이나 밀죽이나 정 어려운 사람네는 도토리 같은 것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는 그만 피로함에 못 이겨 아무 데나 쓰러져 잡니다. 어디 옷을 벗어보고 이불을 펴보겠습니까.

부인들은 그나마 잠조차도 못 얻어 자는 것이 이 농촌의 부인들입니다. 하루 종일 남편과 같이 일을 하고도 밤이 되면 빨래질해서 옷 꿰매느라, 내일 아침 먹이 ── 조를 찧어 밥을 만들며 밀을 갈아 죽 쑬 준비를 하기에 그 밤을 새우는 것은 거의 늘 되다시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 달이나 밝을 때 혹 밤중에 변소에 나왔다가 보면 옆집 부인은 바늘을 든 채 일감을 떨어뜨리고 벽을 의지하여 잡니다. 그러다가도 무엇에 놀라 다시 바늘을 놀리다가는 금새로 또 졸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무슨 정이 화끈 일어나는 것을 나는 날마다 느낍니다. 그들의 눈물겨운 생활이란 도저히 붓끝으로 그려낼 수 없습니다.

이 밤 그들은 전날과 같이 그런 일을 되풀이하면서 배고픈 밤을 또 지나야 할 것입니다. 농가를 휩싸고 굽이굽이쳐 흐르는 저녁 연기, 아마도 밀죽을 끓이거나 도토리 삶거나 하는 저 연기일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이 밤에도 살이 오르느라 우적우적 자랄 것이언마는……

남빛보다도 더 푸른 하늘에는 어느덧 별들이 수없이 깔리었습니다. 그리고 온 사방은 새삼스럽게 고요합니다. 따라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냇물소리가 졸졸졸 합니다.

나는 이슬을 촉촉히 맞고 서 있음을 발견하자 곧 발길을 돌려 내려왔습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농부들은 죽 나와 앉아 농사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서는 모깃불이 향불같이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집집 마당에서 빨갛게 움직이는 다림불이며 채마밭에 하얗게 널린 다림질할 옷들, 어느 것 하나 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지붕 위에는 박꽃이 이슬을 맞아 피어납니다. 어린애들은 각기 박꽃을 꺾어 들고 신발소리를 죽이며 그림같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박꽃에 와 앉는 풍이라는 나비를 잡아 들고는 좋아라고 깡충깡충 뛰며 이러한 노래를 어울려 부르는 것입니다.

풍아 풍아
네 꽃은 쓰고
내 꽃은 달다

이 노래를 따라 나는 문득 나의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그때에 우리들도 저 노래를 불렀거니 하는 그리운 추억과 함께 저 노래는 누가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 불시에 일어납니다.

자라나 어른이 되면 잊어버리는 그 노래. 아마도 그 노래는 어린이들 자신이 풍을 잡기 위한 꾀가 노래화하여 된 모양입니다. 그 노래를 입속으로 외워 보면 볼수록 어린이들의 그 천진한 감정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혹은 내 그릇된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노래를 잊어버린 지 몇 해 동안에 나의 한 일이란 무엇이었던가?

시르르 소리를 내며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 옵니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먼 들에서 곡식대 비비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옵니다.

농부들의 말을 들으면 이 바람에 곡식들이 살이 오르고 곡식알이 여문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곡식에 한해서 뿐만 아니라 온 만물이 살 오르는가 싶습니다. 앞이마를 덮은 내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립니다.

살 오른다는 이 바람! 농촌이 아니고서는 금을 준대도 얻어보지 못할 이 바람은 가난에 쪼들려 여윌 대로 여윈 농민들에게 아낌없이 쏟아져 흐르고 또 흐릅니다.

못 입고 못 먹는 저들이언만 이 바람에는 용기를 얻는가도 싶습니다.

그들의 되는 대로 쓰러져 자는 꼴이 보입니다. 담뱃대를 입에 문 채로 팔을 베개 삼아 혼곤히 잠들었습니다.

동리 아이들의 떠들던 소리도 끊어지고 꺾어가지고 놀던 꽃만이 마당에 허옇도록 떨어져 있습니다. 마치 초겨울을 연상할 만치 그렇게…… 그리고 멀리 들리는 개구리소리가 자장가로 화하여 그들의 숨소리를 따라 높았다 낮아집니다.

밤은 깊었습니다. 아직도 그치지 않고 들리느니 부인들의 절구소리…… 뒤이어 나타나는 것은 하나 둘의 반딧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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