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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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연분이란 말을 믿습니까. 아마 새로운 교육을 받으신 이들은 연 분이라면 미신이라고 비웃으시겠지요. 나도 그러한 미신은 비웃어 버리고 싶읍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연분이라고 밖에 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읍니다. 내가 지금 말씀하려는 내 생애의 일분도 연분이라고 밖에는 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의 말을 빌면 인생의 모든 일이 다 인과라 합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또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여러분만이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이 다 모두 인연이라 합니다. 몇 만년 몇 십만년 몇 천겁 몇 억천 겁 소위 몇 천억 아승지겁(阿僧祗劫)전부터 쌓은 인이 맺혀서 오늘날의 과를 이룬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가만히 인생의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면 모두 인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읍니다. 더우기 나 같은 사람 모양으로 파란 많고 기구한 일생을 보내는 사람은 가만히 생각하면 내 일생이 다 알 수 없는 무슨 신비한 인연으로만 된 것 같읍니다. 나는 이 인생의 향기라는 조그마한 책이 그중에서 몇 가지를 뽑아 이야기도 하겠지마는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내가 당한 인연 중에도 가장 신비한 인연입니다.

인연 중에 남녀의 결합에 관한 것을 연분이라고 부르는 듯하므로 나는 이 이야기를 연분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아시려니와 도리어 「첫사랑」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마땅할는지 모릅니다마는, 위에 말한 이유로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열 다섯 ― 그렇습니다. 내가 열 다섯 살 적 일이라고 기억합니다. 나는 동경으로 공부를 갔다가 (그때는 조선에는 오늘날 모양으로 학교가 없었던 옛날입니다.) 무슨 사정이 있어 잠깐 고향으로 돌아 왔을 적 일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부모도 다 돌아 가시고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으므로 혹은 친척의 집으로, 혹은 친구의 집으로, 혹은 이삼 일, 혹은 사오일씩 묵으며 돌아 다녔읍니다. 그러다가 S라고 하는 내 고모님 댁에 가서 정월 한 보름 명절을 쉬게 되었읍니다.

고모님 댁에는 사내 아이는 어린 것 하나 밖에 없으나, 딸은 커다란 것이 셋이나 되고, 또 그 집이 이 동네에서는 제일 잘 살고 큰 집이므로 동네 색시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열 사흩날 밤부터는 잔치집 모양으로 웅성웅성하였읍니다. 꽃 같은 처녀들이 모두 다홍치마나 분홍치마를 입고 치렁치렁 땋아 늘인 전판 같은 머리에는 구자판과 진주를 단 댕기를 드리고, 하얀 버선에 새 신들을 신고 모두 빨갛게 얼굴이 흥분이 되어 무어라고들 지껄이면서 안마당과 뒤 울안에서 웃고 뛰는 것이, 외롭게 자란 내게는 말할 수 없이 기뻤읍니다. 나는 마치 오랫동안 찬 바람을 쏘이고 얼다가 훈훈한 방에 들어 온 사람과 같이, 스스로 졸리는 것같이 마음이 즐거웠읍니다. 내가 뒤 울안 담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아가씨들이 뛰노는 것을 볼 때에 나를 처음 보는 아가씨들은 이따금 힐끗힐끗 나를 치어다 보고는 수줍은 듯이 달아났으나, 장난에 흥이 나고 내 낯도 점점 익어감에 따라 뛰어 지나가는 바람에 치맛자락으로 내 몸을 스치는 것도 꺼리지 않게 되었읍니다. 더구나 내 누이들이 내게 와 매어 달리는 것을 보고는 좀 나이 어린 아가씨들은 살짝 손을 내 몸에 대이게도 되었다.

『어딧 장차? 전라도 장차 어느 문으로? 동대문으로.』

하고 아가씨들은 동그랗게 손을 마주 잡고 한 아가씨가 피하고 한 아가씨가 그 피하는 아가씨를 붙들려고 따라다니는데, 손들을 잡은 아가씨들이 팔을 들어 쫓기는 사람을 보호합니다. 그리고는 비단을 찢는 듯한 소리로 연해,

『어딧 장차? 전라도 장차 어느 문으로? 동대문으로.』

하고 빙글빙글 돌아 갈 때에 부드러운 달빛이 어여쁜 얼굴의 혹은 이쪽을, 혹은 저쪽을 비추이고 가다가는 눈들이 그 달빛에 반짝반짝합니다.

그중에 특별히 목소리 고운 처녀가 있어 항상 「어딧 장차!」를 먼저 내는데 그 「어딧 장차」하는 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이 맑고 고웁니다. 고 처녀는 모인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모양이라, 치마의 분홍빛도 극히 연하고 저고리 빛도 희다시피 연한데 두 소매에 남 끝동만이 달빛에 이상히 눈에 뜨입니다. 팔을 드는 모양하며 몸을 놀리는 모양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하여, 그의 몸이 내 앞으로 가까이 올 때마다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림을 깨달았고, 그도 남달리 나를 보는 듯하였읍니다. 그가 내 앞을 지나서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내 앞에 오기까지는 마치 봄이 가고 여름 가을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는 듯하였읍니다.

이렇게 얼마를 놀다가 아가씨들은,

『우리 조아질(공기 놀이) 하자!』

하고 모두들 방으로 뛰어 들어 가는데 나만 섰던 자리에 멀거니 서서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방 안에서 자깔자깔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읍니다.

나는 그 목소리 고운 처녀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합니다. 미칠 것 같이 그립습니다. 지금 그 처녀가 방 안에 들어가 있는 줄은 확실히 알건마는 어디 몇 만 리인지 모르는 곳으로 달아나듯하고 만일 달아났으면 저 하늘 위 달나라로 날아 올라 간 것 같읍니다.

이때에 내 누이 되는 아이가 뛰어 오더니,

『오빠! 왜 안 들어오우? 왜 이러구 섰수? 한 사람이 모자라는데 오빠 우리편 되유.』

하고 나를 잡아 끕니다. 번뜻 보니 저편 그늘에는 그 목소리 고운 색시가 섰읍니다. 아마 나를 끌 양으로 둘이 나와서 내 누이를 보내고 자기는 형편을 살피는 모양입니다. 나는,

『싫다! 사내가 누가 조아질을 해!』

하고 아니 끌릴 양으로 떡 버티고 섰더니 누이가 냉큼 뛰어 들어 가서 그 색시를 청빙해 옵니다. 그 색시는 감히 말을 붙이지 못하나 간청하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달빛에 비추인 그 얼굴! 참으로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웁니다. 나는 더 거절할 용기가 없이 끌려 들어갔읍니다.

나는 처음에 그 색시와 한편이 되었으나 그 색씨는 수가 세고 나도 수가 세기 때문에 세 번을 곱잡아 우리편이 이기니, 저편에서,

『싫어! 편 다시 짜!』

하고 항의를 합니다. 처음에 내가 사내라 잘못할 줄 알고 잘하는 사람과 한 편에 끼었던 것이 의외에 내가 잘하는 것을 볼 때에 저편이 놀란 것입니다.

나는 기실 그중에서 제일 수가 높았읍니다. 내가 「알바꾸기」같은 어려운 것을 실수 없이 잘할 때에 그 색시는 반쯤 입을 벌리고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치어다 봅니다. 그때의 내 기쁨은 실로 비길 데가 없었읍니다. 만일 내가 수가 낮아서 그 색시 편을 지게 했더면 얼마나 면목이 없을까?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왕이 되었읍니다. 내가 마지막 차례가 되어 저편보다 떨어진 것을 혼자 다 따라잡고도 힘이 남아 다 이기어 버리고는 공깃돌을 방바닥에 놓을 때에는, 그 색시는 아직은 내 손김으로 따뜻한 돌을 정다운 듯이 사르르 쥐면서 나를 보고 방그레 웃어줍니다.

마침내 편이 갈려서 나는 그 색시와 딴 편이 되었읍니다. 딴 편으로 갈리는 것이 슬펐으나 딴 편 되기 때문에 자리가 바꾸어져서 내가 그의 곁에 나란히 앉게 된 기쁨은 여간이 아니었읍니다. 비록 피차에 옷이 여러 겹이 가리웠더라도, 무릎과 어깨가 슬쩍슬쩍 스칠 때에는 둘의 몸에서 뜨거운 불길이 확확 건너 가는 것 같았읍니다. 처음에는 몸의 어떤 부분이 마주 닿으면 놀라는 듯이 깜작깜작 피하였으나, 얼마 아니하여 다리와 다리가 혹은 옆구리와 옆구리가 마주 닿더라도 장난에 취한 듯이 모르는 체하였읍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방안의 공기가 식어 조아질 하는 손등과 손가락이 싸늘하게 식을 때에 마주 닿은 어깨며 옆구리며 다리는 불덩어리와 같이 뜨거웠읍니다.

여 봅시오, 젊은 사람의 몸은 분명히 불덩어립니다.

이 모양으로 나는 취한 듯이 꿈을 꾸는 듯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으나, 다른 아이들은 밤이 깊은 줄을 깨달았는지 모두 피곤한 듯 졸리는 듯한 얼굴로 조아질에도 흥이 깨어진 듯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좀 먹고 하나씩 다 집으로 돌아 가게 되었는데 나는 커단 밤나무 숲 있는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가야 할 그 목소리 고운 색시를 바라다 주게 되었읍니다.

달은 퍽 기울어져서 앞 벌판에는 시커먼 산 그림자가 누웠는데 발 밑에서 빠득빠득하는 언 눈 소리가 싸악싸악하는 치마 소리와 함께 들립니다. 그 색시는 빠른 걸음으로 뒤는 안 돌아 보고 상곰삼곰 가더니, 고개 마루터기에 이르러 우뚝 서서 뒤에 따라 오는 나를 돌아 보며,

『인제는 가셔요.』

합니다. 그러나 나는 대답이 없이 우뚝 섰읍니다. 굵다란 밤나무 그림자가 그 색시의 몸에 어릿어릿합니다. 나는 숨만 헐덕거리고 꼼짝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 색시는 벙그레 웃는 낯으로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그 싸늘한 손을 들어 잠깐 내 손을 만지고는 무엇에 깜짝 놀란 사람 모양으로 눈 위에 빠득빠득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제 집을 향하고 뛰어 달아납니다. 그는 달빛이 환하게 비추인 사래 긴 밭을 지나 저편 소나무 모여선 언덕 밑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집 사립문으로 스러지자 쿵하고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가 나고는 이내 잠잠하여집니다. 다만 빨갛게 등잔불이 비친 창이 보일 뿐입니다.

나는 정신 잃은 사람 모양으로 우두커니 섰었읍니다. 무슨 귀한 것을 갑자기 잃어 버린 것도 같고 대가리를 문지방에 부딪친 사람처럼 뗑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일생에 맛보지 못하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는 듯하였읍니다.

나는 다시는 그를 맞나 주지 못하고 다시 동경으로 갔읍니다. 그러나 나의 마음 속에서도 그의 양자가 여간해 사라지지를 아니하였읍니다. 밤에 잠깐 본 얼굴이라 가만히 생각하여도 그 얼굴 모습도 분명히 생각이 아니 나지마는 그래도 그립습니다. 나는 그의 얼굴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도리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다 그에게로 돌렸읍니다. 그래서 차디찬 하숙방에서 혼자 그를 생각하는 것이 일변 설우면서도 일변 즐거웠읍니다.

그러나 오 년 지나고 육년이 지나는 동안 차차 그의 생각은 잊어 버려지고 말았읍니다. 다만 가끔 가다가,

『어딧 장차.』

하고 달 아래서 분홍 치맛자락을 나풀나풀 하던 인상이 일종의 옛날옛날 기억 모양으로 희미한 향기를 가지고 피어 오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생의 전생부터 무슨 연분을 가진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삼사 시간 밖에 만나 본 일이 없건마는 그는 나에게 기쁨을 주었고, 내 어린 영혼을 흔들어 주었고, 삼사년 동안 내 외로운 영혼의 동무가 되어 주었고 일생에 나의 가슴 속에 깨끗한 향내가 되어, 두고두고, 나의 일생을 향기롭게 하는 사람이 되었읍니다. 이것이 어찌 인연이 아니겠읍니까.

나는 이제 그를 만나기를 원치 아니합니다. 나는 어렸던 어떤 해 한보름 달빛 아래의 그를 영원히 잃어 버리고 싶지 아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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