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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제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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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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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이 승하한 것은 기유년(己酉年) 유월(십 이 년 전―흥선의 나이 한창 장년인 서른을 겨우 넘은 때)이었다.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덟 살 때에 보위에 오른 헌종은 십 오 년 간을 지존의 위에 있다가, 보수 이십 삼에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승하한 헌종께서는 왕제(王弟)도 왕자(王子)도 없었다. 뿐더러 헌종의 아버님 익종(翼宗)께도 동기가 없고, 또 그 아버님 순조도 외로운 몸이었다. 헌종의 증조한아버님 정종께야 몇 동기가 있었을 뿐, 그 다음 순조 때부터 삼 대째는 겨우 대(代)만 끊이지 않고 내려왔다. 그런지라, 헌종 재세시에도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야 칠촌숙이나 팔촌형제지, 그보다 더 가까운 혈기는 없었다.

헌종이 아직도 이십 삼의 청년이기 때문에, 친척 중에서 따로이 동궁을 책립하지도 않고 왕자 탄생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런지라, 이 삼천리의 강토는 지배자를 잃음과 동시에 새로운 지배자가 누가 될지도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다. 승하한 헌종의 칠촌숙이나 팔촌형제 가운데서 선왕이 영립이 될 것이었다. 흥선도 헌종의 칠촌숙이었다.

이 때에 헌종의 한아머님 대왕대비 김씨(숙종비)가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 들였다. 상감 없는 지금에 있어서, 김 대비는 종실의 어른이요, 따라서 이 나라의 어른이었다. 나라로 보자면 상감 대리요, 종실로 보자면 사당 받들 후계자를 지정할 권리를 잡은 이는 김 대비 밖에 없었다. 대왕대비의 부름에 영중추 조 인영(領中樞 趙寅永), 판중추(判中樞), 좌의정 김 도희(左議政 金道喜) 등이 희정당(熙政堂)에 들어왔다. 상감을 갑자기 잃고 그 후계자까지 못 가진 신하들은 목이 메어서 발(廉) 뒤에 있는 대왕대비께 호소하였다.

『신등이 무록(無祿)하와 이 봉척지통을 만났읍니다. 나라에는 잠시도 용상을 비일 수 없사오니 하교 계오시기를 바라옵니다.』

비록 친히 당신의 소생은 아니지만, 가꾸고 기른 애정을 끊을 수가 없는 김 대비는 목이 메어서 잘 말을 이루지를 못하였다. 발 안에서 대비의 무슨 하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너무 작고 어읍 상반(語泣相半)이기 때문에 신하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 대의 임금을 섬기고 이제 바야흐로 또 네 대째의 임금을 섬기게 된 노신 정 원용이 무릎걸음으로 조금 나갔다.

『대비전마마! 막중막대한 일이옵니다. 봉사교청(奉辭敎請)뿐으로는 안 되겠사오니 언교(諺敎)를 내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윽고 발 뒤의 대왕대비에게서 언교가 나왔다. 미리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도승지 홍 종응(都承旨 洪鍾應)이 받아서 폈다.

『영묘(英廟)의 혈맥은 금상(今上)과 강화(江華)에 있는 원범(元範)뿐이라, 이에 종사를 부탁하도록 정하노라.』

그리고 「원범」이란 이름 곁에 ×지제삼자(×之第三子)라 주가 달렸는데, 맨 윗 자는 잘 알아볼 수가 없이 되었다. 대신들은 돌려 보았다. 돈인이 다시 물었다.

『대비전마마! 광(廣)자의 변이 무슨 변이오니까?』

『구슬옥 변에 넓을 광!』

―강화 이광(李珖)의 셋째아들 원범으로 이 종실의 후계자를 삼는다―하는 것이었다.

즉일로 원범을 덕완군(德完君)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노신 정 원용을 시켜서 강화로 가서 신왕 덕완군을 모셔오게 하였다. 즉 현 상감 철종―당시의 보령 십 구. 종실 공자지만 영락되고 영락되어서 강화도에서 초동(樵童)으로 지내던 노총각―

세 임금을 먼저 보내고 네 번째의 임금을 봉영하러 늙은 재상 정 원용은 도승지 홍 종응(洪鍾應)과 몇 시위 장사들을 인솔하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강화도에서 겨우 농사를 짓고 새를 베어다가 보리밥이나 굶지 이러고 지내던 전계군(全溪君) 댁에서는, 조정의 백발 재상이 장사를 인솔하고, 앞으로 연(輦)을 모시고 왔는지라, 망지소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족으로 태어났다가 잘못하다가는 역모로 몰려서 화를 보기가 쉬운 시절이라, 이 뜻 안 한 관원들의 행차에 모두들 숨고 뛰고 야단하였다. 동리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멀리 모여서 서로 수군거렸다. 이 삼천리 강산의 최고 지배자의 위에 오르게 된 원범은,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때 새를 베러 뫼에 올라가 있었다.

일변 피한 가족들을 도로 데려 오고, 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 오고, 그들에게 오늘 조정에서 재상이 이리로 오게 된 까닭을 알리고 이해시키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설명하여 주어야. 이 청천벽력 같은 길보를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몸만 벌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집안 사람들이 겨우 오늘의 행운을 이해하고 동리 사람들도 겨우 눈치채서, 이 가난하고 또 가난하던 이씨 댁이 오늘부터는 대원군 댁이 된다고 서로 눈을 둥그렇게 하고 수군거리며, 가족들은 어서 산으로 가서 오늘의 주인공을 찾아 오라고 야단할 때에, 이런 괴변(?)도 모르는 행운의 총각은 새를 한 짐 하여 지고 유월 염천에 땀을 벌벌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시위 장사가 문 밖에 늘어섰고, 뜰에는 백발의 재상이 역시 높은 관원을 데리고 서 있으며, 가족들은 한편에 모여서 욱적거리는 양에, 이 총각은 서먹서먹하여 들어서면서 샛짐을 벗어 놓고 몰래 도로 피하려 하였다. 그것을 먼저 발견한 것이 전계군 부인이었다.

『원범아, 이리 오너라.』

지금은 아무리 어머니라도 휘(諱)를 감히 부를 수 없는 지존임에도 불구하고, 향속에 젖은 부인은 습관대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정 원용이 그 편을 보았다. 짐작이 갔다. 원용은 멀리서 그 총각께 절하고 가까이 가서 그 앞에 엎디었다.

『전하! 판중추 신 정 원용(判中樞臣鄭元容)이 봉영차로 왔읍니다.』

총각은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다.

어려서 천자문을 좀 배우다가 가세가 가난하기 때문에 학문도 중지하고 아직껏 초동으로 지낸 총각은, 오늘의 일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저―나―소인은……』

무엇이라 대답은 했지만 아무도 알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짐작하건대 총각 자신도 몰랐을 것이었다. 이 총각에게 오늘의 행운을 이해시키기는 매우 힘들었다. 더구나 붙들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계상(啓上)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더욱 힘들었다. 그것을 겨우 노력하여 이해하게 하고, 이 총각에게 천담포(淺淡袍)를 입히고 복건(幅巾)을 씌워 가지고, 정원용이 그 곁에 배종을 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신왕은 뭇 종친이며, 문무 백관의 출영으로 돈화문으로 하여 빈전(殯殿)에 돌아서 대행왕의 영해를 모셨다.

사흘 뒤에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즉 철종―대행왕의 칠촌숙이요 흥선의 육천동생이었다. 어린 왕께 대한 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왕의 보령 십 오까지로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감께 있어서는 그 예를 취할 수가 없었다. 즉위가 보령 십 구 때였다. 그 생장과 환경이 너무도 낮아서, 정사는커녕 우중의 의식에도 너무나 앎이 없었다. 그런지라, 보령 십 구 세의 상감께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승지 김 문근(承旨金汶根)의 따님, 김 병학의 종매(從妹)를 왕비로 책한 것은 즉위한 지 이태가 넘어 지난 신해년 구월이었다.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중지된 것은 즉위한 지 사 년째(만 삼년나마)되는 임자년 섣달이고, 계축년 정월부터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유년에 즉위하여서 신유년까지 만 십 이년간, 왕비를 맞은 지 만 십 년 간, 친정을 한 지 만 구 년 간 한낱 강화의 초동으로부터 팔도 삼백여 주의 통수자로 올랐지만, 그것은 철종에게 있어서는 결코 행복된 일이 아니었다. 보리밥과 굳은 채소에 젓은 총각의 위에는 국왕으로서 수라는 너무 기름져서 잘 소화가 되지를 않았다. 매일 산으로 벌로 새 베러 다니던 총각의(안일한) 궁중 생활은 너무도 평안하여 체력이 나날이 줄었다. 대신들이 가져다 바치는 책은 골치 쏘기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화 총각으로서 갑자기 보위에 오른 상감은,

―이것은 왕자로서의 당연한 의무거니.

여기고 싫다고 하는 뜻을 나타내지도 못하였다. 소화는 잘 안되지만 보리밥보다 맛있는 음식, 안일한 생활, 아리따운 비, 빈, 상궁 나인―이러한 가운데서 철종의 거간을 나날이 쇠약하여 갔다.

강화의 초동으로 보위에 오른 철종인지라, 오랜 수양으로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자기 비판안」과 「자제력(自制力)」을 못 가졌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리따운 궁녀며 향그러운 술이며 맛있는 음식인지라, 당신의 건강이 그 때문에 쇠약해 가고 두뇌는 몽롱하여 가는 것을 짐작은 하지만 나날이 더욱 침혹하였다. 당신의 위에 만약 의외의 행운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 일생을 강화도에서 보냈더면, 여생의 한편 모퉁이에는 이런 환락경이 있다는 것도 짐작도 못 하고, 흙과 먼지에 싸인 일생을 보낼 뻔하였는지라, 느지막이 만난 이 행운을 즐기고 또 즐겼다.

아리따운 후궁의 부어 올리는 푸른 술에 약간 취하여 과거를 회상할 때에는, 철종께는 지나간 날의 초동 생활이 마치 꿈과 같았다. 만약 과거의 그 때가 꿈이 아닐 것 같으면 현재가 필시 꿈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생활의 사이에는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너무도 넓고 큰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옛 말에나 나오는 생활과 같은 안일한 생활의 십여 년 간, 이전 강화에서 단련된 총각의 건강은 없어지고, 지금은 약하디 약한 몸이 되었다. 용상에서 일어나다가 그냥 혼도하여 모셨던 신하들로 하여금 망지소조하게 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신하들과 무슨 의논을 하다가 그냥 정신을 잃은 일도 간간 있었다.

노염, 비애, 환의―경우를 가리지 않고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이런 감정들 때문에 돌발적으로 행한 기행(奇行)―아니 괴변도 적지 않았다. 혹은 어린애같이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

대궐에서는 이러는 사이에도 여러 번 아기의 탄생이 있었다. 그러나 탄생한 아기는 모두 수가 짧았다.

나날이 체력이 쇠약하여 가는 임금의 앞에서 권신들은 또한 암투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쇠약하고 너무도 무규칙한 생활을 하는지라, 언제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날지 예측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승통자(承統者)가 없는 임금인지라,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나는 날에는, 승통자 영립문제로 한번의 분규가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 상감의 척신이자 또한 권신인 김문(金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히 고려해야 할 처지였다.

불행히 상감이 승하하는 날에는 그 승통자를 지정할 권리는 오로지 대왕대비 한 분에게 있다. 아무리 권문 김씨일지라도 「진주 종반 이씨」의 가문의 사자(嗣子)에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종반 이씨」의 가문에 사자되는 분이 또한 마땅히 이 나라의 지존이 될 분이다. 그러므로 현 상감 승하한 뒤에 신왕 영립에 대하여는 아무리 척신이요 권문인 김씨 일파일지라도 용훼할 권리가 없다.

이런지라, 김씨 문에서는 여기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대왕대비로서 엉뚱한 종친을 신왕으로 지적하여 놓으면, 김문의 세력에 큰 흔들림이 생길 뿐만 아니라, 잘못 하다가는 멸족의 참화를 볼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불행히 현 상감이 승하하고 그 뒤에 영립되는 신왕이 김씨 일문을 밉게 보는 분이면, 김씨 일문의 오늘날의 권세는 하룻밤 사이에 꺾어져 버릴 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 불행을 피하고 자기네의 권세를 자자손손이 누려 먹기 위하여는 여기서 비상한 수단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택한 방법이 소위 이 하전 역모 사건(李夏銓逆謀事件)이었다.

도정(都正) 이 하전은 종친 가운데 꿋꿋한 사람이었다. 선조(宣祖)의 아버님인 덕흥 대원군의 정통 후계자(장손 줄기)인 이 하전은, 마음이 굳고 활달하고 그 정치안이 또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다른 종친들이 모두 시정에 숨어 버리거나 낙향을 하여 버릴 동안, 이 하전은 그냥 가운데 버티고 권문 김씨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뿐더러 선왕 헌종이 승하하고 그 승통자가 없어서 종친 회의가 열렸을 때에 신왕의 후보자로 꼽히었던 사람이었다. 권 돈인(權敦仁)은,

『이 분이야말로 이 삼천리의 지배자로서 가장 적당한 분이다.』

고 역설하여, 하마터면 이십 오대의 조선 국왕이 될 뻔한 사람이었다.

불행히 그 때의 대왕대비 김씨의 의견 때문에 강화의 초동이 새 왕으로 영립되고, 이 하전은 여전히 그냥 종친의 한 사람에 지나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 때의 신왕이던 현 상감이 승하하는 날에는 새 승통자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하전은 김씨 일문의 방자를 미워하는 사람이며, 마음 꿋꿋한 사람이며, 김씨 일문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인지라, 이 하전이 여차하는 날에는 김씨 일문은 근본적으로 망하여 버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거기 대한 대책으로 김씨 일문에서는 손을 먼저 걸기로 한 것이었다. 화근을 미리 없이 하여 한을 천추에 남기지 않도록 하려 함이었다.

『제 계획이 제일일 줄 압니다.』

이렇게 말하며 얼굴에 날카로운 미소를 나타낸 것은 김병필(金炳弼)이었다.

―김씨 일문의 회의였다.

좌장 격으로 하옥 김좌근이 있었다. 부원군 김 문근은 몸이 편하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였다. 하옥의 양사자 김병기며, 김 병학, 김 병국, 김 헌근, 생질 남 병철 모두 한 좌석에 모였다.

그들의 의논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먼 곳에 하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가까이는 이 일족 이외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이 하전에 관한 의논을 하는 것이었다.

병학은 좀더 기다려 보자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니 갑자기 말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병필이 맹렬히 반대하였다. 오늘 내일 미루어 가다가 여차하는 날에는 땅을 두드려도 번복하지 못할 일이니, 의논이 시작된 이 기회에 결말을 내자는 것이 병필의 의견이었다.

이 하전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 명을 금부로 잡아다가 독한 국문을 가한 후에, 그들이 토사하였다는 구실로서 이 하전을 없이하여 버려서 화근을 미리 씻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하옥은 이 의논에 자기의 의견은 말하지 않았다. 얼굴에 호인다운 미소(이런 긴한 회의에 있어서도 하옥은 호인다운 미소뿐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나타내는 것이다)를 띄고 잠자코 조카들의 격론을 듣고 있었다. 병국이 병학의 편을 도와서 천천히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겠다 하면, 남 병철은 병필의 의견에 찬동하여 즉시 결행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두 가지의 의논이 서로 타협되지 못하고 그 재단을 좌장 하옥에게 구하게 되었다. 호인다운 미소로써 의논을 듣고 있던 하옥은 자기의 아들 병기를 돌아보았다.

『네 의견은 어떠냐?』

자기 아버지와 같이 먹먹히 듣고만 있던 병기가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는지는 지금 미리 짐작할 수가 없읍니다. 혹은 이 도정이 그냥 있더라도 아무 관계도 없게 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불행히 재미 없는 일이 생길 때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하전을 없이했다고 우리에게 불리한 일은 없을 테니, 없이하여 손해 없고, 그냥 두었다가는 혹은 불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이 하전, 결행해 버리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합니다.』

병기의 의견이 병필에게 가담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왕족 이 하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 뒤에 다른 왕족들에 대하여도 그들은 물색하여 보았다. 물색하는 가운데는 흥선의 이름도 나왔다. 그러나 흥선의 이야기가 나온 때는 이 척신 일동은 그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시정의 무뢰한―술 잘 먹고 투전 잘 하고 생일집 잘 찾아 다니는 흥선과, 「장래의 국왕」과의 사이에는 너무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흥선을 영립하게 되면 재미있겠읍니다.』

『용상 앞에 막걸리 병을 가져다가 놓고……』

『정전에 투전판을 차려 놓고……』

『하하하하!』

『하하하하!』

이리하여 종친들의 위에 엄중한 검토의 눈을 붓고 있는 김씨 일문도, 흥선에게뿐은 감시의 눈을 던질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이름은 종친이라 하나, 흥선의 인격은 그들의 눈에는 너무도 비루하게 보였으므로 종실의 강아지에게까지 경계의 눈을 붓는 김씨 일문에서도, 흥선군 이 하응에게뿐은 절대의 안심을 느끼고 있었다.

용산서 친한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다가 이 하전은 참변을 만났다.

배에서는 한창 연락이 벌어졌을 때에, 수십 명의 나장(羅將)이 강 언덕에 나타나서 이 놀잇배를 불렀다.

그들은 이것이 무슨 오해거니 하였다. 아무 죄도 없는지라, 나장에게 불릴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사공을 재촉하여 그냥 모른 체하고 배를 저어 갔다.

이 그냥 달아나는 배를 나장들은 다른 배를 얻어 타고 쫓아왔다. 그리고 배가 맞닿게 되자 나장들은 이 배에 난입하였다.

『웬일이냐? 무슨 일이냐?』

하전은 무례한 나장들에게 귀공자답게 고요히 호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명이다! 왜 도망하느냐?』

이리하여 사공을 재촉하여 다시 배를 갖다 대었다.

배가 언덕에 닿으매 나장들을 지휘하던 금부당상이 가까이 이르렀다. 그 금부당상까지 출장을 한 모양을 보고 하전은 비로소 일이 심상하지 않은 줄을 알았다.

하전은 직각하였다. 자기 몸뿐 아니라, 자기 때문에 자기의 친구들까지 무서운 죄명에 직면했음을―

한 사람 한 사람 배에서 내리는 사람마다 오라로 결박을 지었다. 다만 하전은 종친의 한 사람이라는 명색 때문에 결박만은 면하였다.

『무슨 일이냐?』

『어명이올씨다. 우리는 모릅니다.』

『누구를 잡으라는 명이냐?』

『도정 이 하전과 및 같이 의논하는 역적을 모두 잡으라는 명이올씨다.』

하전은 결박진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죄명은 역모(逆謀)였다. 역모에 대한 벌은 극형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죄 없는 자기가 이런 죄명을 쓰게 되었는지는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자기와 함께 배를 타고 봄날의 하루를 즐기던 밖에는 아무 죄도 없는 친구들도, 당연히 「하전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를 쓸 것이었다.

안 하였노라고 변명을 하여도 쓸데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에는 고요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박진 친구들을 돌아보다가 하전은 빙그레 미소하였다. 가슴에 엉긴 피를 속이는 미소였다.

『사태는 글렀네. 내세에서나 다시 만나세. 나하고 사귄 죄일세. 그 사죄도 내 내세에서 함세.』'친구들에게는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나장에게,

『나는 집으로 간다. 어명이면 승지를 보내라.』

하고 그 곳서 발을 떼었다. 거기서 나장에게 잡힌 친구들을 작별하고 지나가는 가마를 하나 잡아 타고 돌아오는 동안, 하전의 마음은 자기로도 어찌하여야 할지 분간하지 못하였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그의 앞에서 어릿거릴 따름이었다. 피할 수 없는 그 그림자―그것은 단지 자기가 왕족의 한 사람이며 왕족 가운데 좀 두드러진 인물로 생긴 때문에 받지 않을 수 없는 쓰디쓴 잔이었다. 왕족으로 태어났거든 바보가 되거나, 지금의 권신들한테 머리를 땅에 대고 아첨을 하거나 하여야 할 것이어늘, 그렇지 못한 죄밖에는 아무 죄도 없었다.

그 죄 때문에 지금 자기의 위에 임한 잔―그것은 너무도 과한 잔이었다. 억지로 씌우는 잔인지라, 피할 길도 없다. 이 잔은 너무도 잔혹한 잔이었다.

송구히 설렁거리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하전은 가마를 몰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영문을 모르는 자기를 맞는 가인들이며 가족들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하전은 하인을 시켜서 관복을 내다가 갈아 입고 급급히 그의 그림자를 가묘(家廟) 안에 감추었다. 선조 대왕의 아버님 덕흥 대원군과 영전에 가문의 위급을 봉고할 사손(嗣孫)의 지위로서―

『이전에 임금이 될 뻔하고 못된 그 벌충을 하기 위하여 이 하전은 부량한 장사들을 모아 역모를 의논하였다. 도당들은 모두 잡았다. 하전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명을 기다린다.』

사건은 이렇게 만들게 되었다.

이 이 하전을 두고 권신들 가운데서는 하전의 처치에 대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하전의 친구들을 금부로 잡아다가 때리고 두들기고 별별 악독한 고문을 다 하여, 소위 토사라 하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역모를 하였소이다. 이 하전을 추대하기로 하였읍니다. 용산서 거사의 의논을 하다가 잡혔읍니다.』

이만한 토사를 만들어 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처형에 있어서 원배를 보내자, 사약(賜藥)을 하자, 멸족(滅族)을 하자, 여러 가지의 의논이 났다.

이제 왕통 승계자가 작정되기까지의 기간을 이 종친 중의 위물(偉物)인 하전을 경이원지하여 먼 곳에 정배를 보내자는 의논이 가장 세력이 있었다. 자기네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 하전에게 역모의 죄명은 씌웠으나나, 뻔히 죄 없는 줄 아는 하전을 극형에까지 처하기는 그들도 좀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대하여 김 병필이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화근을 없이하는 기회에 철저히 없이할 것이지, 그런 뜨뜻미지근한 방책은 쓸 것이 아니라고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리하여 의논이 분분한 뒤에, 드디어 두 가지의 의견의 가운데를 취하여 역적 이 하전에게 사약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재단을 구하러 영의정 하옥 김 좌근이 배알하였다.

관복을 갖추고 황황히 입궐 배알한 하옥이,

『덕흥 대원군의 사손 도정 이 하전이 역모를 했사옵니다.』

이렇게 계달할 때에, 상감은 안석에 몸을 의지하고 몽롱히 하옥을 건너다 볼 따름이었다. 재위 십 이 년 간 아직 한 가지도 새 일을 못 기억하는 상감은, 덕흥 대원군이 누구이며 이 하전이 누구며 역모가 무엇인지 똑똑히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용산서 수상한 장정 몇 명이 무슨 밀의를 하옵는 것을 금부에 잡아다가 국문을 했더니, 의외에도 역모를 하던 것이 탄로되옵고 수괴는 이 하전이옵니다.』

상감은 비로소 이 하전이라는 인물이 못된 일을 하다가 잡힌 것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흥, 그 놈 잡아다가 매를 쳐야겠소그려? 곧 잡아 오도록 하시오.』

자리가 불편한 듯이 연하여 비비적거리며 왕은 이렇게 하교하였다.

『그래서 신들이 의논하온 결과, 이 하전이 아무리 역천의 죄를 지었삽기로, 덕흥 대원군의 자손이매 선성(先聖)의 공을 보아, 멸족까지는 과심하옵고 사약을 하옵는 것이 지당하올까 하옵니다.』

『그렇지! 옳은 일이외다. 매를 칠 수가 있소? 사약―약을 주면 그것을 먹고 죽겠다. 하하하하! 그 약이 몹시 쓰오?』

『역적 이 하전도 전하의 관대한 처분에 감읍할 것이옵니다.』

『감읍하여야지요. 대감, 이 하준이―하전이?―를 보시거든 감읍하라고 그러서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만수무강하옵소서.』

―이리하여 봉명 승지는 그 하나는 약원(藥院)으로 약을 짓기를 명하러, 또 하나는 금부 도사에게로 하전의 최후를 감시하기를 명하러 갔다.

좀 뒤에 금부 도사와 의관은 구슬픈 사명을 띠고 하관들을 거느리고 도정의 댁으로 갔다.

『―더럽히지 않았읍니다. 아직 더럽힌 일이 없읍니다. 가문의 명예, 소손(小孫) 저의 대에서는 조금도 더럽힌 일이 없읍니다. 지금 이것을 이대로 소손의 사자(嗣子)에게 물려 주옵고, 소손은 대대의 조선(祖先)이 계신 나라로 가고자 하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가묘에 마지막 봉고를 하는 하전―

사모 관복 품대, 도정(都正)의 정장(正裝)으로서 하전은 최후의 봉고를 하였다.

중종(中宗) 때부터 군가(軍家)를 갈라져서 덕흥 대원군의 대에서 선조 대왕을 왕실로 바칠 뿐, 명예 있는 종친의 일가로 전면히 내려온 대대의 위패 앞에 꿇어 앉은 하전의 눈 좌우에는 눈물이 흘렀다.

사당에서 정침으로 돌아온 때는 하전의 마음은 얼마만큼 가라앉았다. 그가 청지기에게 대궐서 봉명 승지가 오거나 금부도사가 오면 여니와, 그 밖에는 집안 사람이라도 방에 들이지 말라고 엄명한 뒤에 사후의 처리에 착수하였다.

유훈을 썼다.

유언을 썼다.

서류를 전부 정리하였다.

사후를 위한 정리가 죄 끝난 뒤에 하전은 비로소 내실로 들어갔다.

예복을 갖춘 채로 내실로 들어오는 하전을 의아한 눈으로 부인이 우러러 볼 때에, 하전은 아랫목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부인!』

『네?』

『조선 봉사, 후손 양육―어려운 일이외다. 잘 맡으시오.』

『네?』

부인은 영문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 의아하여 쳐다볼 뿐이었다.

『역모에 몰렸소이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종친, 종친 가운데도 꿋꿋하게 태어난 이의 가족은 언제든 조마조마하여 이런 일이 오지나 않을까 하고 조심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급격히 이를 줄은 꿈도 안 꾸었던 부인은, 이 청천의 벽력 같은 한 마디에 잠시도 입만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겨우 이 무서운 비극이 이해될 때에, 와락 달려들면서 통곡을 시작하였다.

『아이고 나으리! 이 일이 웬일이서요?』

그러나 통곡하는 부인을 도정은 고즈너기 밀었다.

『벌써 십 이 년 전에 당했을 일이외다. 십 이 년 간을 더 살았으면 넉넉지 않소?』

왕의 물망에 올랐던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십 이 년 전 헌종 승하했을 때에 왕의 물망에 올랐던 도정은 그 때 왕이 못 된 이상에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산 것은 횡수였다. 부인의 통곡에 대하여 하전은 이렇게 고요히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망극한 일에 부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그냥 통곡할 때에 하전은 몸을 피하여 일어섰다.

『뒷일은 맡으시오. 피할 수 없는 길이외다. 금부도사가 오기까지 나는 산 송장이오, 유언 유훈은 정침 문갑 서랍에 들어 있소.』

하고는 듯 몸을 빼어서 사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요히 아랫목에 앉았다.

밖에서는 나비―혹은 풍뎅이인지가 한 마리 방 안으로 날아 들어 오려는 문창을 뚱뚱 두드리고 있었다. 때때로 날아서 저편까지 갔다가는 다시 문창으로 돌아와서 창을 두드리고 하였다.

―무얼 하러 이 방에 들어오려느냐?―

하전은 고요한 마음으로 나비―풍뎅이인지―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한 사람의 낭패는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죽음」이라 하는 상서롭지 못한 사명을 띠고 금부도사의 일행이 도정 댁에 이르렀을 때는 하전은 금부도사의 일행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때였다.

목숨을 뺏을 독약이 한시 바삐 온 몸에 퍼지게 하기 위하여 방에는 불을 처때어서, 웃목까지 발을 들여 놓기가 힘들도록 뜨거웠다. 아랫목 두터이 깐 보료는, 속에서 타는 내까지 났다. 그 위에 이 하전은 도정의 정복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양을 달일 숯불도 마루에 준비되어 있었다.

청지기의 인도로 죽음의 사자의 일행이 들어오는 것도 하전은 눈 까딱하지 않고 고요히 맞았다.

문 밖에서 부글부글 약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바야흐로 죽음의 길을 떠나려는 하전과, 그 죽음을 감시할 금부도사와, 죽음을 판단할 의관은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방이 너무도 덥기 때문에 그들의 이마에서는 구슬같은 땀만 뚝뚝 떨어졌다.

드디어 약은 다 졸았다. 다 존 약을 앞에 받아 놓은 뒤에야 하전은 비로소 금부도사에게 한 마디 물어 보았다.

『내 친구들은 다 어떻게 되었소?』

금부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알 일이지만 궁금해서 물었소. 아마 새남터로 갔겠지요?』

거기 대해서도 금부도사는 침묵으로 응하였다.

하전은 질문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아직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약 그릇을 한 번 굽어 본 뒤에, 몸을 고즈너기 일으켜서 북향 사배하였다.

북을 향하여 절한 뒤에 도로 몸을 제자리에 바로하고, 약이 뜨거운지 어떤지를 새끼손가락을 넣어 둘러서 짐작을 본 뒤에, 고요히 약 그릇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독을 푼 그릇을 쳐들 때에도 하전은 손도 떨지 않았다. 이미 피할 수 없는 길인 줄 각오한 이상에는, 깨끗이 자기 위에 임한 괴로운 잔을 받기로 결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관복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로 약을 든 하전은 눈을 고요히 감고 입을 그릇에 갖다가 대었다. 꿀꺼덕 꿀꺼덕 꿀꺼덕! 세 번 소리를 내어서 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릇을 도로 고요히 놓은 뒤에 도사에게,

『복명하오.』

침착한 소리로 말한 뒤에 자기의 몸이 어지러이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침과 사방침을 좌우편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이리하여 하전은 고요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와 역모를 같이 하였다는 죄목으로 금부에 잡힌 친구들은 그 전날 벌써 가지각색의 악형을 다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성종(成宗)의 비 한시(韓氏)는 불행히 성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세하였다. 후궁으로 있던 윤씨(尹氏)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였으므로, 성종은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윤씨의 몸에서 난 왕자가 후일의 연산군(燕山君)이었다.

윤씨는 시기심이 많고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서, 왕도 더 볼 수가 없어서 드디어 윤씨를 폐하고 사사(賜死)를 하려고, 그 의논 때문에 신하들을 전정(殿廷)으로 불렀다.

그 때의 재상 허 종(許琮)은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던 도중에, 시간도 좀 이르고 하므로 자기의 누님 댁에 들렀다. 그리고 누님에게 지금 입궐하는 까닭을 말하였다. 그러매 누님은 허 종의 말을 다 듣고 생각한 뒤에 허 종에게 향하여 한 가지의 비유로서 말하였다.

―어떤 집의 하인이 주인의 명령으로 마님(주인의 마누라)을 죽였다. 하인은 주인의 영을 충실히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주인의 아들(주인의 아들이면 또한 마님의 아들이다)을 섬기게 될 때에도 그 하인은 새 주인에게 총애를 받을까?

이 누님의 현명한 비유에 허 종은 깨닫는 바 있었다. 그래서 누님 집에서 나와서, 입궐 도중 돌다리를 건널 때에 부러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하고, 그것을 핑계삼아 입궐하지 않았다. 따라서 윤씨 폐비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위에 오른 뒤에, 연산군은 어머님 윤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때 그 회의에 열석하였던 재신을 전부 살육할 때에, 허 종은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덕으로 화를 면하였다. 사직골에 있는 종침교(琮沈橋)가 즉 허 종이 부러 낙마한 다리다.

왕실의 후사에 관한 의논에는 누구든 용훼하기를 꺼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용훼하여 자기의 의견이 성공되는 날이면 이어니와, 실패에 돌아가는 날에는 그의 몸에는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이를 것이었다.

허 종의 사건은 한 기묘한 예에 지나지 못한다. 영사를 뒤적이자면 종친의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낸 사람은 지극한 영화를 보든가 지극한 참화를 보든가, 극단에서 극단에의 운명을 반드시 보았다.

이 하전이 역모로 몰려서 해를 본 뒤에도, 거기 대하여 비평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침묵을 지켰다.

정당한 승계자가 없는 상감인지라, 장래를 예측할 수가 없으매, 누구나 거기 대한 비판을 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비판하였다가 후일 어떤 일을 겪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종친 가운데서는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신하들 가운데서도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모두들 그 사건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이런 사건에 대하여 비평이라는 것은 금물이었다. 비평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들 그런 사건이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듯이 분주히 그 날의 저녁을 준비하고, 내일 아침의 조반감을 준비하였다. 모른 체하는 이상의 상책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이 하전의 역모 사건은 적지 않은 사람의 희생자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비평도 듣지 못하고 무사 평온한 가운데 처결되었다.

그들의 근친들이 남몰래 통곡을 하고, 남몰래 억울하다고 가슴을 몇 번씩 두드릴 뿐이었다.

그 일을 결행한 권신들도 자기네들의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비평을 꺼리고 침묵을 지켰다. 그들도 많은 말을 하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표면은 한 번의 비평도 받지 않고 무사히 전 국면이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종친들의 가슴에 부어진 커다란 반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귓결에 듣고 종친의 한 사람인 흥선은 가슴이 서늘하여, 상세한 내막을 들을 용기도 없이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무론 없지 못할 일이었다. 김문의 방자함을 짐작하고 종친들의 무력함을 짐작하는 흥선은, 스스로 가슴의 피가 끓는 것을 죽여 가면서, 한낱 바보로서의 행동을 계속하였다. 이 하전이 권문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행동을 보고서, 흥선은 반드시 오늘날이 있을 줄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급기 그 일을 당하고 보니, 흥은 가슴이 서늘하고 치가 떨려서, 거리에서 상세한 후보를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집으로 달려 돌아온 흥선은, 신발도 벗는 둥 마는 둥 점침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도 안절부절 손을 비비며 서 있다가,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 모양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의관도 그냥 한 채로, 마치 누구한테 쫓기듯 내실로 허둥지둥 들어오는 흥선의 모양에 부인이 놀라서 일어섰다.

『대감, 왜 이러세요?』

『도정이 역모에 몰렸소. 목릉 참봉 이 하전이가……』

역모―

종친에게 있어서는 이렇듯 놀라운 명사가 없었던 것이었다. 부인의 안색도 순간에 창백하게 되었다.

『이 일을 어쩝니까? 그래 누구누구가 걸렸읍니까?』

『자세히는 못 들었소. 윤 승지, 홍 참판 몇몇 사람이 들었다는 듯합니다.』

『그래……?』

우리는 그 축에 끼지 않았습니까 하는 뜻이었다.

『우리야 무사허지.』

아아, 이런 때에 무사하다고 장담을 할 보장을 얻기 위하여, 혀를 깨물고 피눈물을 쏟은 적이 몇십 몇백 번이나 되나? 상갓집 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래도 얼굴에 개가죽을 씌우고 그냥 기신기신 권문들을 찾아 다닌 것은, 이런 때의 방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옇든 이 일을 어쩝니까? 그럼 도정 잭은 멸족이겠구료?』

『아직 모르겠소.』

『아이구! 가슴이 서늘해.』

『요 다음은……』

흥선은 여기서 기다랗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뉘 차롈까?』

『맙시사, 하느님! 너무도 심하시외다.』

생후 사십 년―부인이 흥선을 안 지 이십 유여 년, 오늘같이 낭패한 흥선을 부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겁에 뛴 커다란 눈을 좌우로 두르며 앉지도 못하고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창망한 경우에서 흥선은 문득 자기의 둘째아들을 생각하였다.

『이 애, 작은애는 어디 갔소?』

『저 방에서 글 읽나 보이다.』

흥선은 소리를 높여서 소년을 불렀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여 온 소년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글을 읽고 있었읍니다.』

『무슨 글이냐?』

『「좌씨전(左氏傳」이올씨다.』

『내버려라! 나가 놀아라! 건넛집 행랑애들과 돈치나 해라. 글은―글은……』

아아 무엇보다도 목숨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글? 「좌씨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시키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떨립니다.』

『에익! 고약한! 천도도 너무도……』

흥선은 말을 끊었다. 너무도 억하기 때문에 목이 메려 하였다. 그것을 부인에게 속이기 위하여 흥선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였다. 그런 뒤에 이 너무도 기막히는 일에 가슴이 답답한 듯이 주먹을 들어서 자기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흥선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소위 공모자들은 서소문 밖에서 참하였다. 이 하전에게는 사약을 하였다. 이러한 「이 하전 사건」의 후보(後報)를 가지고 흥선을 찾은 사람은 조 대비의 조카 조 성하였다.

이런 비상시에 종친 중의 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그 일이 드러나서 후일 어떤 박해를 받을는지, 그것은 예측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하는 흥선을 찾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찾은 것이었다. 이 때는 흥선은 한때의 흥분을 다 삭이고 그의 평온을 회복한 뒤였다.

『종친 중의 인물이 또 하나 없어졌네.』

성하가 가져온 후보를 듣고 한참 뒤에 흥선이 한 말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더 있다가 그 말을 보태어서 토하는 서이 말하였다.

『마지막 인물―인제는 종반에는 인물은 없다. 김씨의 세상이다. 안심하고 잘들 놀아라.』

『?』

성하는 힐끗 흥선을 쳐다보았다. 이젠 종친에는 인물이 없다. 마음대로 놀아라 하는 흥선의 말이 성하에게는,

『종반에 너희가 모르는 「인물」이 여기 또 하나 있다.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는 것과 같이 들렸으므로―

성하는 흥선을 찾았다.

『대감!』

『?』

『그분의 원죄를 울릴 북은 없겠읍니까?』

『없겠지! 올리려면 채가 부러지겠지.』

『그 분의 원사를 조상할 술은 없겠읍니까?』

『없겠지! 헛죽음이겠지!』

『대감!』

『왜?』

『하나 여쭈어 보겠읍니다. 만약 종친 중에 김문에서 알지 못하는 「인물」이 있으면, 이번의 불상사를 다행으로 여기겠습니까, 불행으로 여기겠습니까?』

무슨 깊은 뜻을 머금은 듯한 성하의 질문에, 흥선은 낭패한 표정으로 대하였다. 성하가 자기의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만약 다른 「인물」이 있다손 치면, 이번의 불상사는 그분에게는 도리어 경쟁자 하나이 없어져서, 장래 목적을 달하기에 좀더 가능성이 많아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깐 그런 분이 있다 하면 이번의 불상사가 그 이에게는 도리어 복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흥선은 알아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가 성하의 말에 분명히 낭패하였음을 나타내었다. 성하의 말이 분명히 그의 마음을 찌른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를 못하겠네.』

『대감? 이번의 불상사가 대감께 있어서는 도리어 전화위복의 격이 아닙니까? 장래의 기약에 한층 더 가능성이 많아지지를 않았습니까?』

그러나 흥선은 알아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이며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담배를 담으며 성하에게,

『아까운 인물―마지막 인물이 없어졌다. 인제는 종친 중에는 천치나 부랑자나 헌놈밖에는 남지를 않았다. 쓸 인물은 하나씩 하나씩 다 없어지고…… 여보게 성하, 나도 인물 못나기가 되려 다행일세 그려! 잘났더면 견디어 배기질 못할걸. 자네는 조문(趙門)에 태어나길 잘했지. 자네가 이문(李門)에 태어났더면 이번은 자네 차례일세. 다행이야.』

한 뒤에 싱겁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잘났다 못났다 말이나 말게,

잘나기 못나기는 보기 탓이지.』

잡가 한 마디를 코로 흥얼거리면서 담배를 붙여 물었다. 성하는 멍하니 흥선을 우러러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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