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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제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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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

[편집]

신유년에서 임술년에 걸쳐서 정치의 타락은 극도에 달하였다.

태조 건국한 이래 근 오백 년 간, 이 때만큼 정치적으로 타락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 권도를 잡은 김씨 일문은, 자기네의 세력을 그냥 유지하기 위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자기네들의 지금 권세의 근원되는 상감께 후사가 아직 없고, 그 위에 건강은 나날이 쇠약하여 가는지라, 언제 세상이 뒤집힐지 알 수 없으므로, 뒤집히기 전에 넉넉히 준비하여, 뒤집힌 뒤에도 낭패가 없게 하려고 전력을 다하였다.

세상은 어수룩하였다. 세상은 그들의 내막을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그들의 세력이 천만 년이나 가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일을 그들에게 힘입으려 하였다.

김 병기는 날래고 꾀 많은 사람이었다.

병기의 집에 드나드는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원모(元某)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병기는 특별히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원모는 사람됨이 착하고 꾀 없는 사람이었다. 꾀만 있는 사람이면 병기에게 그만큼 총애도 받는지라, 벌써 누만의 재산과 권력을 얻어 잡았을 것이로되, 직하고 꾀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구차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병기로서 마음에만 있으면 원모를 어떤 고을의 수령쯤으로나 보내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병기는 원모의 인물됨을 잘 아는지라, 수령으로 보낼지라도 역시 꾀 없고 직한 원모는, 구차히 멋적게 지내기나 헐 것을 짐작하므로 그냥 버려 두었다.

어떤 날, 병기의 집에 무슨 연회가 있어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있을 때였다. 병기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원 아무개, 원 아무개!』

불렀다. 그리고 들어온 원모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쳤다. 원모는 가까이 이르렀다.

중인이 보는 앞에서 병기에게 친히 불리어서 가까이 가는 것만 해도 여간한 우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병기는 원모의 귀를 끌어다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였다.

『여보게, 내 오늘 밤 자네 자당 찾아가네.』

음담이었다.

마음이 직한 원모는 벌컥 성을 냈다.

『대감, 그게 무슨 말씀이오? 철 없는 소리를……』

얼굴을 검붉게 하여 가지고 원모는 소매를 떨치고 그만 제 집으로 돌아갔다.

원모가 돌아간 뒤에 병기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하인을 연하여 원모의 집에 보내서 노염을 끄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모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 소문이 퍼졌다.

―병기가 많은 사람 앞에서 원모를 가까이 불러서 귓속말로 무슨 부탁을 하였다. 그러매 원모는 그것을 거절하고 돌아갔다. 돌아간 원모를 병기는 연하여 하인을 보내어 달랬다. 그러나 원모는 종내 듣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었다.

그 다음부터 가난하고 직한 원모의 집에는 매일 「청대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병기의 청을 거절하고, 또한 거절당한 병기가 도리어 미안해하는 것을 보매, 원모는 병기에게 여간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라―이런 견해 아래서 원모의 집은 「청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장마당같이 되었다.

이리하여 김 병기는 귓속말 한 번으로, 고지식하고 돈벌 줄 모르는 원모를 저절로 앉아서 돈이 생기게 하여 주었다.

이것은 병기의 슬기로운 성격을 말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또한 당시 병기―뿐만 아니라, 김씨 일문의 세도가 얼마나 당당하였는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김씨 일문의 일거 일동의 반향은 이만하였다. 진실로 밝은 하늘조차 흐리게 할 만한 세도였다.

당시의 정계(政界)가 얼마나 타락하였는지, 여기 몇 개의 에피소우드로써 그 상황을 말하여 보겠다.

함경도 사람 홍 순필―서울 올라와서 물을 지고 있었다. 순필이의 동생도 역시 형과 같이 물을 져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나이가 스물, 얼굴이 예쁘장스럽게 생겼다. 그 동생이 우물에서 늘 물을 긷는 동안에, 어느덧 나주 합하 양씨(영의정 김 좌근의 애첩) 집 하인과 사귀게 되었다. 사귀게 되자 그 집 행랑에도 놀러 다니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음탕한 양씨의 총애까지 사게 되었다. 동생이 양씨의 총애를 사게 된 얼마 뒤에 형 되는 홍 순필은 함경도 어떤 고을의 수령을 배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어젯날까지의 물장수는 당당한 현령이 되어, 양씨의 주인 하옥 김 좌근에게 이끌리어 상감께 사은 숙배를 하러 입궐을 하였다.

몸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을 입기는 하였다. 양씨며 하옥에게 말을 많이 들었거니, 꼴은 되었건 안 되었건 곡배(曲拜)를 드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이 장관이었다.

『노형이 나랏님이오? 처음 뵙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함경도 아무 데 사는 홍 순필이라는 사람이오.』

이 현령은 상감과 통성명을 한 것이었다.

어진 상감이었다. 그 위에 전생을 초라히 지난 상감이었다. 상감은 이 무지를 관대히 보았다. 그리고 쓴웃음만을 웃었다. 당신의 전생을 생각하여 순필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면의 책임자인 영의정 하옥 김좌근이 가만히 볼 수가 없었다. 유사 이래로 고금 동서를 무론하고, 국왕과 통성명을 한 유일인인 홍 순필을 하옥은 황황히 끌고 도로 나왔다.

임지(任地)에 부임을 함에 임하여, 이 현령은 다시 상감께 하직을 고하러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들어갈 때는 이전의 망신을 미루어, 하옥은 끈끈히 홍에게 말을 주의시켰다.

임금께는 상감이라 하여야 하는 것이며, 자기를 가리켜서는 신이라 하여야 하는 것이며, 온갖 말에 지극히 존경하는 말을 써야 한다고 누누이 일러 주었다. 이리하여 다시 입궐한 때였다.

얼마 전에 창피를 당한 이 현령은, 이번은 그 날의 실패까지 모두 회복하려고 잔뜩 마음을 벼르고 들어가는 참, 하옥이 절하기 전에 먼저 덥썩 절을 하고 주저앉았다.

『여봅쇼 상감, 며칠 전에는 진실로 안 됐사와요. 그 때 내―아니―저……』

말이 막혔다. 「신」을 잊었다. 그, 저, 한참을 어물거렸다. 무슨 발에 신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미투린지 갖신인지 버선인지를 잊었다. 그래서 한참 어름거리다가,

『버선이 그만 알지를 못 했사와요.』

하여 버렸다.

상감도 알아 듣지 못하였다. 하옥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 장면은 어름어름 지났다. 이리하여 무사히 하직을 고하였다. 이 현령이 대궐에서 나와서 자기의 동생에게 한 술회―

『임금에게는 저를 기껏 낮추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나」라지를 않고 「버선」이라고 기껏 낮추 한단 말이로다.』

이러한 조제 남조의 방백 수령들이 팔도 삼백 주로 퍼져 나갔다. 그들에게 선정(善政)이 있을 까닭이 없다. 이 땅의 옛 말의 대부분이 무지한 원님의 넌센스한 정사를 비웃음에 있음이 그 근원이 여기 있다. 진실로 전무후무한 수령 조제 남조의 시대였다.

강생(姜生)이라는 사람과 옥생(玉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같은 고을에서 같이 배우며 자란 젊은이었다. 얼마만큼 배운 뒤에 이제는 배움을 중지하고 벼슬이라도 하기로 하였다.

『난 내 고을 수령 노릇을 하겠네.』

『나도 내 고을서 하겠네.』

같은 고을서 자란 두 사람이 제각기 제 고을의 수령을 별렀다. 그들이 경쟁을 하다시피 벼르기만큼, 그들의 자란 고을은 부읍(富邑)이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꼭 같은 목적을 가지고 묏산자 보따리를 하여 지고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한 사마이 앞에 돈 만냥씩 지녀 가지고―

『누가 먼저 성공하나 어디 봄세.』

이렇듯 경쟁이 시작되었다.

강생은 어떻게 어떻게 하여 김 병기에게 가까이할 기회를 얻었다. 그 동안에 옥생은 역시 어떻게 어떻게 하여 김 여기의 아버지의 애첩 나합 양씨에게 가까이할 기회를 얻었다. 병기에게 가까이한 강생은 병기에게 드나들 동안 병기의 인물을 알았다.

교만하고 혈기 있고 뽐내기를 즐겨하고 체면을 매우 지키면서도, 또한 아첨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는 병기의 인물을 알아본 강생은, 병기가 알 듯 모를 듯이 뇌물을 드리며 알 듯 모를 듯이 아첨을 하며, 이리하여 얼마를 지내는 동안, 병기에게 사랑을 받게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러한 얼마 뒤에 강생은 목적하였던 바와 같이 자기의 고향의 군수를 벌었다.

이러는 동안, 옥생도 또한 목적하였던 바와 같이 양씨의 마음까지 사게 되었다. 옥생이 양씨의 마음을 산 지 얼마 뒤부터, 양씨는 하옥 대신에게 밤마다 옥생을 모군 군수로 시켜 달라고 졸랐다. 양씨의 청이면 아무 것이라도 듣는 호인 하옥 대신은, 양씨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그러마고 승낙을 하였다.

이리하여 양씨에게 승낙을 한 하옥은 자기의 아들 병기를 불렀다. 그리고 옥생을 모군 군수로 임명되도록 주선을 하라고 명하였다.

병기는 딱하였다.

강생을 모군 군수로 임명시킨 지 불과 사오 일인데, 이제 또 다른 사람을 주선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는 병기는, 유유낙낙하고 물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군에는 현재 군수가 있다. 그런데 병기는 강생을 보내기 위하여 그 군수를 「수령이 심하여 민원이 크다」는 구실로써 파면하도록 죄상을 하여 그렇게 꾸민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또한 옥생을 어떻게 임명하도록 운동하나?

수단은 한 가지밖에는 없었다. 이제 취소는 못할 노릇―강생을 또한 파면하고 옥생을 임명하도록 할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모군 군수 강모는 수령이 심하와 민심이 동요되옵고, 그대로 방치하였다가는 불상사가 생길 줄로 아뢰옵니다.』

예궐을 하여 이렇게 상감께 아뢸 때는, 병기의 등에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이리하여 강생은 파면이 되었다. 돈 만 냥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병기를 알아 가지고 운동한 강생은, 원하던 바대로 군수를 얻어 하기는 하였지만, 하여금 씨에게 운동한 옥생에게 밀려서 닷새 만에 파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강생은 임지(任地)를 향하여 출발을 한 뒤였다. 군수에 임명이 되기가 바쁘게 어서 금의환향을 하고자, 강생은 이튿날로 고향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었다. 자기의 직이 파면된 것은 알지도 못하고―

서울서 이미 파면된 강생은, 그런 줄도 모르고 호호탕탕이 여행을 계속하였다. 하루 바삐 금의로 환향을 하여 뽐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또한 내려가는 길에 거드럭 거리며 산천 유람도 하고 싶었다. 이리하여 강생은 이 고을 정자에서 하루, 저 고을 누각에서 이틀, 놀아 가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거의 다달았다. 한 놈의 사령은 길을 앞서서 신관 사또의 부임을 보하러 달려 갔다.

그러나 달려 갔던 사령은 부시시 도로 돌아왔다. 신관이 벌써 어제 부임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강생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구관이 아직 있다면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자기 이외에 신관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강생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떤 협잡배놈이 자기 이름을 도적해 가지고 못된 일을 하는 것이어니 그리고 또 이렇게 밖에는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호령 호령해서 배행하는 하인놈들을 모두 먼저 보내서,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흉한을 잡아 가두라고 한 뒤에, 가마를 몰아서 고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는 사실 벌써 신관이 부임을 한 것이었다. 강생이 멋이 들어서 산천 유람을 하면서 천천히 내려오는 동안, 옥생은 길을 채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생은 임지에 도착도 하기 전에 벌써 구관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사태를 짐작하는 옥생은, 머리 관속에서 분부를 하여 구관 사또를 영문에 맞았다.

『구관 사또 행차요―』

위세 좋게 영문으로 달려 들어오던 강생의 행차가 이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

옥생이 벙글벙글 웃으며 강생을 동헌에 맞았다. 먼저 부임한 신관이 지금 부임하러 오는 구관을 맞는 것이었다.

신관이자 또는 구관인 강생을 환영 겸 송별하는 성대한 연회가 그 고을 강변 누각에 열렸다. 마지 못하여 거기 출석한 강생의 얼굴에는, 연하여 싱거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강형, 미안할세!』

『아니, 그럴 것 없지!』

자기도 역시 구관을 몰아 보내고 이 곳으로 온 강생인지라, 옥생뿐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강생은 깨달은 바 있었다. 벼슬의 욕망이 앞설 때에는 돌아볼 여유를 잃었거니와, 지금 이렇게 되고 보매, 현재의 벼슬의 허황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강생은 그 고을을 떠나서 산골로 이사 갔다. 자기의 발잔등을 밟고 앞서 온 옥생이 또한 며칠이나 군수 노릇을 하다가 남에게 자리를 앗기울지, 그것을 생각해 보매, 지금 좋다고 덤비어 대는 옥생이 도리어 가련해 보였다.

이리하여 수령 방백들의 채변이 무상하였다.

조제 남조의 방백!

지위의 보장이 없는 수령!

조세 남조의 수령 방백이라 할지라도 한 군데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 곳 지리 풍속에 익어져서, 혹은 후일에는 명관이 될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흘이 멀다 하고 갈아 내는지라, 명관도 생기지 않을뿐더러, 명관이 있다 하더라도 명관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할 도리가 없다.

그런지라, 많은 돈을 써서 수령의 자리를 산 그들은, 자기가 부임하여 있는 (언제 갈릴지 모르는) 짧은 기간 안에 자기의 밑전을 뽑고, 그 위에 얼마간 더 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인부를 차고 부임하는 수령 방백들은, 부임하기가 무섭게 벌써 돈 긁어 올릴 방법을 도모한다. 천 년 묵은 여우와 같은 관속들은 이런 수령들의 고문으로는 또한 능한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별별 기괴한 학정은 전개되어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제 남조의 방백 수령들이, 도임해 있는 짧은 기간 안에 자기의 밑천을 뽑기 위하여는, 어떤 수단을 취하며 어떤 방법을 취하나?

무론 그 수단 방법에 있어서는 일정하지 않다. 여기 그 한두 가지의 이야기를 적어 보자. 평안도 어떤 촌에 돈냥이나 가지고 있는 과부가 하나 있었다. 혈혈 단신의 과부였다. 다만 그의 남편이 적지 않은 재산을 남기고 죽었으므로 그것으로 생활만은 부족 없이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 집에는 개를 한 마리 치고 있었다. 집 지키기 겸, 가족 겸, 동무 겸 하여, 꽤 종자도 좋은 개 한 마리를 치던 것이다. 그 개는 몸집은 희고 발은 누러므로 황발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애지중지하였다.

그 까닭으로 그 동리에서는 그 집을 가리켜 황발이네 집이라고 하였다. 사내 주인이 없고 다른 일가가 없는지라 흔히 있는 예대로 그 집에 기르는 개의 이름을 따서 그 집을 황발이네 집이라 일렀다.

재산이 넉넉하여 그 근처에 토지도 많은지라, 그 집은 그 근처에서는 꽤 유명한 집이었다. 「황발이네 집, 황발이네 집」하여 소문난 집안이었다. 황발이네 집이 돈냥이나 있다는 소문이 그 고을 원님에게 들어갔다.

읍내의 부민을 샅샅이 고르던 원님은, 이 황발이네 집을 놓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곧 나라에 상계하였다.

『소관의 관내에 황 발이라 하는 한 기특한 백성이 있사와 여사여사하고 여사여사한 일을 하여 표창할 만하오니, 황발이에게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합시면 성은(聖恩)이 이 위에 없겠나이다.』

하는 상계였다.

이리하여 모군 모동에 사는 황 발(黃潑)이에게 선공감 가감역을 시킨다는 직첩이 내리게 되었다.

한 개의 희극은 전개되었다. 군속들이 나라의 직첩을 받들고 풍악이 자지러지게 황발이의 집으로 왔다. 그리고 황발이의 기특한 행동이 위에까지 달하여, 선공감 가감역을 시키라는 분부가 내렸다는 말을 전하였다.

불러 보니 황발이는 사람이 아니고 한 마리의 개였다.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제 「황발이는 사람이 아니요 개」라고 도로 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군속들은 연지구지하였다. 그런 뒤에 한 가지의 방책을 안출하였다.

황발이의 집에 언젠가 도적이 든 일이 있는데, 그 때 황발이가 몹시 짖어서 도적은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군속들은 이 소문을 캐내어 가지고, 이것을 구실삼아 어리석은 과부를 속였다. 이 황발이의 기특한 소문이 나라까지 올라가서 성은(聖恩)이 금수에까지 미쳤다는 기괴한 결론을 빚어 낸 것이다.

이러한 기괴한 말은 과부를 몹시 기쁘게 하였다. 재산은 있으나 미천하던 자기의 집안이, 이제는 개의 덕으로 이 근린의 당당한 명문이 되려니 하였다. 그래서 흔연히 벼슬을 받기로 하였다.

상납전(上納錢) 팔천 냥, 중비(中費) 삼천 냥을 지출하였다. 그리고 황발이는 가감역이 되었다.

그 뒤부터는 과부는 개에게 비단 옷을 지어 입히어 가지고 자랑스러이 늘 나다녔다. 그 뒤부터는 그 집을 뉘라서 감히 황발이네 집이라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당한 「황 감역(黃監役)의 댁」이었다.

이 양반 개는, 그 뒤 몇 해를 더 살다가 늙어 죽었다. 개는 죽은 뒤에도 그 집은 역시 「황 감역의 댁」이라 불렀다.

성은이 금수에게까지 미친 것이었다.

××감사 모는 재임 일곱 달 동안에 수십만의 재산을 만든 사람이었다.

당시의 방백들이 행한 온갖 일을 다한 뿐 아니라, 지혜 많은 그는 그의 독창적 취재법까지 발명한 것이었다.

관내의 부민들을 모두 긁어 먹는데, 혹은 벼슬을 갖다 씌워 주고 상납전을 벗겨 먹고 중비를 받아 먹으며, 혹은 명목 없는 죄를 씌워 가지고 잡아다 옥에 가두고 뒤를 두드려서 뇌물을 받아 먹고, 혹은 한협으로 받아먹고―이런 별별 짓을 다 하여 벗겨 먹을 대로 벗겨 먹기는 하였는데 아직도 먹지 못한 부민들이 많았다.

너무도 자꾸 벼슬을 시키거나 잡아다 가두기도 어색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연구한 끝에 한 가지의 묘책을 안출하였다.

가사는 어떤 날 한 부민(富民)을 불렀다. 그리하여 첫째로는 그 백성이 덕이 많음을 칭찬하고, 그런 뒤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나라에서는 이즈음 재정도 곤핍하고 강기도 매우 퇴폐되었으므로, 그 진흥책으로 각 곳에 덕 있고 재간 있는 재산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골라서 벼슬을 시키기로 하여, 그 가운데는 당신도 끼었으니, 치하 드리노라―이런 뜻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좀 상세히 변역하자면, 「나라에서는 재정이 곤핍하여 지금 재산 있는 백성들에게 벼슬을 팔려는데, 당신도 그 축에 끼었다.」하는 뜻이었다.

벼슬을 하나 하자면 상납전이라 중비라 하여ㅡ적어도 이삼 만냥은 걸린다. 그래서, 백성은 감사에게 재쳐서 얼마쯤이나 들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감사는 미리 조사한 바 그 백성의 재산이 합계 삼만 냥쯤 되는 줄을 짐작하면,

『아마 못해도 이만 오천 냥은 걸리겠소.』

대답하였다.

부민에게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이만 오천 냥을 내고라도 어떤 고을 수령이라도 되면 밑천 뽑을 길도 있겠지만, 감사의 말하는 벼슬은 명예직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 벼슬을 한달사 혹은 뽐내기는 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생활은 파멸이 되고 말 것이다.

백성은 제 집으로 돌아가서부터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 나라에서 벼슬을 주신다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 벼슬을 하면 이튿날부터는 굶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나라에서 주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이리하여 누워 있는데 어떤 날 호방(戶房)이 이 백성을 찾아왔다.

여기서 상의(商議)는 거듭되었다. 백성은 자기의 진심을 토로하였다. 벼슬은 고맙지만 벼슬을 하면 그 날부터 굶어야 할 지경이니, 이 딱한 사정을 어찌하리까고 사정하였다.

호방도 매우 동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호방도 머리를 수그리고 한참 생각한 뒤에, 이 난경을 모면할 묘책을 하나 강구하였다. 즉, 지금 사또는 나라에서도 매우 세가로서, 사또가 잘 주선하면, 혹은 그 벼슬을 모면 할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며칠 뒤에, 이 백성은 호방에게 삼천 냥의 뇌물과 감사에게 만 냥의 뇌물을 바치고, 그 벼슬을 모면하기로 하였다.

그 뒤부터 감사는 관내의 부민들을 차례로 불러서 이 「말 벼슬」을 시켰다. 그리고 벼슬 모면비로서 그 백성의 재산의 약 절반쯤씩을 거두어 올렸다.

마달잇벼슬―

『이제는 마달이가 없느냐?』

벼슬을 마달 사람―즉 「마달이」였다. 이 마달이를 차례로 들추어 내서 이 감사가 긁어 올린 재산이, 재임 일 곱 달 동안에 육십여 만 냥이었다. 눈 뜬 사람의 코를 베는 것과 다름이 없는 교묘한 정책이었다.

군포(軍布)라 하는 것이 있었다.

첨정(簽丁―지금 이름으로 微兵)은 상민들의 의무제였다. 상민으로 태어난 이상에는 첨정에 뽑힐 의무가 있었다.

먼저 군적(軍籍)에 등록이 된다. 그런 뒤에는 붙들리어 가서 병대에 복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 집안에 장정이 첨정에 나가게 되면, 그 뒤는 그 집안은 호구지책이 없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모면하는 방책으로 일정한 세반을 관가에 바치고 피하는 것―말하자면 첨정 모면비가 「군포」였다.

군포는, 베 두 필이든가, 돈 넉 냥이든가, 쌀 열 두 말이든가, 이러한 것이 원 제도였다.

그러나 첨정의 제도에 일생에 한 번이라든가 일 년에 한 번이라든가 하는 제한이 없었다. 이 점을 악관들은 악용하였다. 그 집안이 돈냥이나 있는 백성이면, 일년에 두 번 세 번 첨정에 넣었다.

뿐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일정한 액수를 작정하여 제정한 바이지만, 차차 흐리게 되어서, 되는 대로 그 집안의 재물을 압수하여 가게 되었다. 소고 말이고, 반닫이고 무엇이고를 막론하고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거두어 갔다.

그 위에 첨정에는 나이의 제한이 없었다. 이것 역시 악관들의 이용하는 바가 되었다. 늙은이, 어린애를 막론하고 돈냥이나 있는 집안에 사내라고 생긴 것이 있기만 하면 군포를 징수하였다.

무론, 억지로라도 피하려면 피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어린애게 무슨 군포냐고 억지로 거절하려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절하였다가는 이 뒤에 반드시 무슨 다른 벌이 그 집에 내렸다. 그리고 그 때 내리는 벌은 군포 징수의 몇 곱이 되는 혹독한 종류의 것이다.

그런지라, 뒤가 무서워서 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이 악제도에 복종하는 것이다. 「불알이 원수」라는 유명한 속담이 이 때 생겨난 말이었다. 그것 있기 때문에 이 곤경을 겪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집에 사내가 나면 그것을 관가에는 감추어 두었다.

놀라운 악정이었다. 상납미(上納米)를 벗겨 먹는다. 환곡미(還穀米)를 속여 먹는다. 경주인(京主人), 영주인(營主人)이 가운데서 잘라 먹는다. 그 고을에 좀 낡은 정자나 누각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각호에 얼마씩 거두어서 벗겨 먹는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핑계를 만들어 내어 가지고는 벗겨 먹는다.

당시에 있어서 가장 업적(業績)이 많았다는 수령 방백은, 가장 많이 벗겨 먹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상관이 벗겨 먹노라면 그 수하에 달린 많고 많은 속관들이 또한 그만큼 벗겨 먹는 것이었다. 한 상관이 십만 냥을 벌었다 하면, 속관들이 먹은 것까지 합하면 이십 만냥은 넘을 것으로서 백성의 곤란은 그만큼 컸다.

이렇게 오중 육중 칠중 팔중으로 벗기우는 백성들은, 이 학정 아래서 허덕허덕 그들의 삶을 계속하였다. 한 마디로 크게 고함도 치지 못하였다. 고함을 칠지라도 들어 줄 위(上)가 없는 가련한 백성들이었다.

위로는 삼공 육경으로부터 아래로는 말청의 천리(賤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백성을 좋은 봉(鳳)으로 여기고 벗겨 먹기만 위주하지, 굽어 보고 보호하여 주려는 어진 상관을 못 가진 이 가련한 백성들은, 숨 한 번 못 쉬며 숨이 박혀서, 가들의 가늘고 참혹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백성의 위에는 아직껏 인군(仁君)이 임하여 본 적이 적었다. 여러 분의 명군은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임금은 진실로 드물었다. 놀랄 만한 문치(文治)의 업적을 남긴 세종이며, 국토 확장에 그 거둠이 적지 않은 세조며, 모두 현군이며 명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런 분들의 큰 업적까지라도 겨우 향대부의 위에까지 미쳤지, 그 이하의 백성에게까지 미친 적이 적었다. 그런지라, 이 나라의 백성들이 자기네의 통치자에게 가지는 바 관념은 지극히 모호하고 약한 것이었다.

옛날 단종이 선위를 하고 세조가 등극할 때에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고 이 방계(傍系)의 임금―좀더 혹심하게 말하자면 탈위한 새 임금을 묵묵히 맞고 그 아래 공손히 복종한 백성이었다.

그로부터 세 대 더 내려와서 제 구대의 임금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오른 뒤의 일이었다.

연산군은 무론 많은 선비를 죽였으며 음탕한 일을 많이 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이씨 수백 년 간에 연산군보다 더 많이 선비를 죽이고 더 많이 황음하였던 임금이 없는 바가 아니다. 더구나 연산군의 그 모든 정도에 어그러진 행동은, 어떻게 보자면, 횡사한 당신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행동으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연산군의 아드님이 그 다음의 위를 잇고―이리하여 전면히 내려왔으면, 연산군은 지금은 연산군이 아니라 무슨 종(宗)이든가 무슨 조(祖)로서 역사상에 뚜렷이 여러 가지의 업적이 특필되었을 것이다. 왜? 연산군은 정당한 왕통이거니, 연산군을 배반하는 사람은 당연히 역적일 것이다.

그러나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연산군 제위 십 이 년 뒤에 성 희안(成希顔), 박 원종(朴元宗) 등이 의논을 하고 임금을 폐하기를 도모하였다. 말하자면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는 역모였다. 그리고, 그 일이 성공이 되어 진성군(晋城君)이 영립되어 신왕이 되었다. 소위 중종(中宗)의 반정이었다.

일이 성공이 되었기에 무론 「반정」이라 하는 빛 좋은 명색이 붙었다. 만약 실패로 돌아가기만 하였더면 역모로 모두 함몰했을 것이다.

이 놀랄 만한 역모의 성공에 대하여서도, 이 백성은 눈 까딱 아니 하고 방관하였다. 역모가 실패로 돌아갔을지라도 이 백성은 역시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왕위는 왕족이 잇(繼)는 것―

이런 평범한 생각으로서 백성은 이 변동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이 사건도(역사의 이면이 증명하는 바에 의지하건대) 결코 연산군의 실정을 들추어 낸 것이 아니고, 단지 재상들의 권력 다툼에 연산군이며 중종 대왕이며는 그 한 역할을 맡은 바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몇 대 더 내려와서 또한 광해군(光海君)의 사건이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같이 황음하지도 않았다. 단지 신하들을 지배하기에는 시대가 험악했기 때문에, 그의 재위 십 오 년 간은 대북(大北)과 서인(西人)의 굉장한 당쟁(黨爭_으로 종시하다가, 이 당쟁의 결말로서 소위 「인조(仁祖)의 반정」이 생기게 되었다. 말하자면 몇 대 전의 「중종의 반정」과 꼭 마찬가지로, 놀라운 역모 사건이 여기서 또 다시 성공이 된 것이었다. 선왕을 위하여 떨구어 군(君)으로 강봉하고, 종친 중의 한 사람이 위에 오른 것―말하자면 왕위 찬탈이었다.

그러니 이 때의 왕위 찬탈에 있어서도, 이 나라의 백성은 역시 이전 연산군의 때와 꼭 마찬가지로 아주 냉담한 태도로 나왔다.

인조의 반정은 곧 뒤를 이어서 또한 이괄(李适)의 난이 있었다.

인조의 반정에 그 일등공은 이 괄에게 있었는데, 그는 논공행상(論功行賞) 때에 일등공에 들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 거기 불평을 품었었는데, 그 가운데는 또한 이간하는 무리까지 있어서, 이 괄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나라에 등장을 들었으므로, 그 때문에 나라에서는 이 괄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이 괄은 비로소 자유행동을 취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몰아 가지고 일사천리의 세로 서울을 짓부쉈다.

신왕 인조는 놀라서 신하들을 거느리고 공주로 피하고 서울은 이 괄의 세력 범위 아래 들어갔다. 서울에 입성을 한 이괄은 선조의 열째 아드님이요 선왕 광해군의 동생되는 흥안군(興安君)을 모셔서 왕으로 추대를 하고 새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일이 여기서 그쳤으면 무슨 「흥안군의 반정」이라 하고, 인조는 그 이름조차 역사상에 올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괄의 반정(혹은 반란)에 대하여도 이 나라의 백성은 아주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또 임금을 추대하게 되거니 이쯤 생각하고 열심히 신왕 환영의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주로 난을 피한 인조의 신하들이 군사를 몰아 가지고 다시 왕위 회복의 난리를 일으켰다. 이 난리에 있어서 이 괄 일파가 이겼으면 「인조의 반란」이라 일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 괄이 참패를 하여 서울을 내어 버리고 달아나다가, 이천(利川)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죽은 바 되고 다시 인조 복위의 세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 괄의 것은 「반정」이 아니고 「반란」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머리가 어지럽도록 왕위가 변동될 동안도, 이 나라의 백성은 아주 무관심히 이를 보았다.

―웃사람은 웃사람.

―우리는 우리.

이렇게 갈라 붙이고 거기 대하여 참견을 하든가 간섭을 하든가 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자기네의 조반과 저녁에 분주하였다.

이 백성의 의견을 듣자면, 웃사람은 웃사람이요, 자기네는 아랫사람이거니, 무엇이든 명령을 하면 복종할 것이요, 또한 웃사람대로 존경을 하면 그뿐이지, 서로 아무 유기적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껏 자기네들을 사랑해 주는 인군(仁君)을 가져 보지 못한 이 백성에게는 웃사람에게 대하여는 당연히 바쳐야 할 존경의 염밖에는, 친애라든가 애모라든가 하는 관념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자기네 집 광의 쌀 항아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기네들의 쌀 항아리들을 긁어 가는) 웃사람에게 대하여 친애의 염이 생겨날 까닭이 없었다.

그런지라, 이 백성에게 있어서는 웃사람의 심부름꾼인 수령 방백들에게 대한 관념도 아주 담박한 것이었다. 웃사람의 심부름꾼이라 하는 노릇이거니 한다. 이 이상 별다른 관념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유복종」―이것이 이 백성의 유일의 모토였다. 하라는 대로 하고―하기 싫으면 몰래 피하고―그뿐이지, 소위 거역을 하여 보지 않았다.

이 순하고 근하고 직하고 온화한 국민은, 몸이 비록 역경(逆境)에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단지 팔자로 돌려 버리고, 웃사람에게 대하여서는 절대 복종으로 종시하였다. 지금의 이 놀라운 학정의 아래서도 이 백성들은 연하여 자기의 팔자를 혀를 차며 조반과 저녁에 분주하였다. 누구를 원망하든가 불복을 한다든가 거역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 순량한 백성이다.

그러나 온순함에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웬만한 곤란은 모두 팔자 소관으로 단념하여 버리는 이 백성이로되, 참을 수 없게까지 곤란이 심해질 때는 드디어 들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임술년(壬戌年) 이월에는 진주에서 드디어 민요가 일어났다. 백성들은 모두 몽치와 대창을 가지고 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진주 이방을 박살하고 병사 백 낙신(白樂辛)을 잡아 내려고 돌아다녔다. 백 낙신의 횡포가 너무도 심하여, 이 온량한 백성으로도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 보도가 조정에까지 이르른 때, 조정에서는 망지소조하였다. 아무런 짓을 하더라도 그냥 참는 이 백성의 이번의 봉기는, 궁중만 놀라게 하였을 뿐 아니라, 대신들도 어쩔 줄을 모르도록 놀랐다. 부호군 박 규수(副護軍朴珪壽)를 안핵사(按?使)로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시켰다.

그런데 이 안핵사가 조정에 들어오기 전에 사월에 전라도 익산에서도 또 민요가 일어났다.

수천의 군중은 군청으로 달려 가서 군수 박희순(朴希淳)을 찾아 내려다가 찾지 못하고, 그 대신 박의 어머니를 찾았다. 박의 어머니를 찾아 낸 군중은 옷을 모두 찢어서 벌거벗기고 물과 비(?)를 가지고 박의 어머니의 하문(下門)을 닦으면서,

『이 구멍이 못되어서 못된 자식을 낳았다.』

고 야단들을 하였다.

이 보도가 조종에까지 들어온 때는 어진 상감도 종래 당신의 노염을 감추지 못하였다. 재상들 앞에서도 하고싶은 말씀도 못하고 어릿어릿하기만 하던 상감도, 이 때 뿐은 영의정 김 좌근을 힐책하였다.

『수상, 이게 웬일이오니까? 어제는 진주, 오늘은 익산 백성에게 죄가 있는지, 방백 수령에게 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일이오니까? 모두 내가 불민한 탓일까?』

여기 대하여 좌근은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부호군 이 정현(副護軍李正鉉)을 안핵사로 즉시 파견을 하였다.

그런데 그 사월달에 또 경상도 개령(開寧)에 민요가 일어났다. 개령과 때를 같이하여 전라도 함평(咸平)서도 또한 민요가 일어났다.

연달아 일어나는 이 민요에 조정에서도 어찌하여야 할지 그 방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진주 사건은 병사 백 낙신을 고금도(古今島)에 정배를 보내어 이렁저렁 결말을 짓고, 익산 사건은 군수 박희순을 벌을 하여 이렁저렁 결말을 짓기는 지었다. 그런데 그 해 동짓달에 함경도 함흥에도 또 사건이 생겼다. 민요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문제가 적지 않게 벌어져서 안핵사로 호군 이 참현(李參鉉)을 파견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서 계해년 정월에는 제주도(濟州島)에서 또 민요가 일어났다. 일 년이 못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여섯 번의 사건이 생겨난 것이었다. 위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다만 유유복종하던 이 온화하고 순한 백성의 속에도, 정도가 넘는 학정에 대하여는 맹렬히 반항하는 끊는 피가 있었던 것이다. 존경하면서도 또한 반항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네들의 기괴한 운명과 환경을 탄식하면서도, 이 백성들은 분수가 넘는 학정에 대하여는 드디어 반항을 하였다.

반항할 줄을 모르는 백성이 아니었다. 오직 착하고 어질고 순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 대하여는 눈을 꾹 감고 참아 두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참다 참다 못하여 정 참을 수가 없게 되는 때에야 비로소 반항을 시험하여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순간 반항하여 본 뒤에는 또 다시 방관자의 태도로 돌아서고 마는 백성들―

이 일 년이 못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여섯 군데서나 분요가 일어난 일 때문에 당시의 정부의 주인인 김씨 일문은 쩔쩔매었다. 백성과 집권자의 사이의 의가 이렇듯 좋지 못하니 이 것이 웬일이냐고, 상감은 연하여 김 좌근에게 꾸중을 하였다.

그것은 전대 미문의 일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한 곳에서 민요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책임이 적지 않거늘, 여섯 군데서나 일어난 것은 정치가 얼마나 퇴폐하였는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바로서, 그의 전 책임은 정부의 요로자가 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팔도 삼백여 주에 내보낸 방백 수령들은 모두 김씨 일문의 세력 아래서 나갔는지라, 그 책임 문제는 더욱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씨네들은 연하여 머리를 모으고 회의를 하였다. 자기네들에게도 짐작이 안 가는 바가 아니어서, 이대로 버려 두었다가는 삼백여 주가 한 군데도 떼지 이러고 모두 한번씩 들고 일어설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자기네들의 세력에 흔들림이 기지 않을까 하여 내심 공황 중에 있던 그들이라, 이 민요 문제는 어떡허든 삭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회의를 거듭한 결과 그들은 한 가지의 방책을 얻어 내었다.

백성들이 분요를 일으킴은 오랫동안 한 사람의 학정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학정이 그냥 계속된다 치더라도 학정하는 사람만 연하여 바꾸어서, 오늘은 이 사람의 학정, 내일은 저 사람의 학정, 모레는 또 다른 사람의 학정―이렇듯 학정하는 인물만 갈아 대면, 백성들은 누구에게 반항을 하여야 할지 분간하지를 못할 것이다. 즉, 갑 군수의 학정에 견디지 못하여 반항을 하여 보려고 서로 수군거릴 동안에, 갑 군수를 벌써 갈려서 다른 곳으로 가고 을 군수가 오게 되며, 또 병 군수로 갈리듯―이렇게 끊임없이 군수를 갈아 대기만 하면, 반항의 상대자를 얻지 못하여 백성들은 분요를 일으키지 못하리라, 이런 방책을 세우기로 하였다. 선정하는 사람을 보내서 어지러운 세태를 정돈시키려 하지 않고, 어지러움은 어지러움대로 두고 백성들이 들고 일어설 기회만 없게 하도록 방책을 세운 것이었다.

가뜩이나 잦던 수령들의 체변이 더욱 잦게 되었다.

조선 역사에 있어서 그 때만큼 지방관의 변동이 많은 때가 과거에 없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 고종 황제 때에, 민 중전을 배경으로 민씨 일파의 매관 매작 때에 또한 그 때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과거에 있어서는 그 때같이 변동이 잦던 때가 없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갈아 대었다. 신관의 환영연을 준비할 동안은 벌써 그 뒤에 다른 신관이 부임을 하여, 환영 준비를 하던 신관은 벌써 구관이 되어 버리고―그 새 신관도 또한 그렇고, 이렇듯 눈이 뒤집힐 지경으로 체변되었다.

그런지라, 많은 밑천을 들여서 수령 자리를 산 그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최대 스피이드로 긁어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임하러 내려가는 도중에서부터 벌써 착수를 하여, 부임하는 그 날부터 긁어 올리기를 시작하고 하였다.

녹아나는 자는 백성들뿐이었다. 그러나 김씨들의 예측과 같이 분요는 일으킬 겨를이 없었다. 일으키려면 벌써 다른 수령이 부임하게 되므로, 행여 이번이나 이번이나 하면서 이 놀라운 학정을 감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달아서 일어나는 각 곳의 민요는 이리하여 좀 머츰하여졌다.

제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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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