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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제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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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

[편집]

『최 찬시, 상감마마께옵서 불러 계시오.』

계해년 십 이월 초 여드렛날, 내관(內官)방에서 동관들과 한담을 하고 있던 내시 최 만서는, 나인의 전령으로 황급히 옷깃을 바로잡고 대조전(大造殿) 동온돌(東溫突)로 가서 읍하여 영을 기다렸다.

『만서냐? 좀―좀……』

섣달 초순부터 상감은 환후가 심상하지 못하여, 모두 경계들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부름으로 말미암아 만서가 등대했을 때는, 상감은 든든히 모는 의대를 차리고 금침 위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상감마마, 등대하왔삽니다.』

『응, 만서냐? 좀 부액할 내관을 몇 불러라.』

『어디 납시오니까?』

『뜰이라도―너무 적적해서……』

만서는 내시청에 연한 전령줄을 흔들어 불렀다. 그리고 몇 사람의 내시가 협력을 하여 상감을 부액하여 뜰로 산보를 나섰다.

혹혹 쏘는 바람이 추녀 끝에서 노래를 하는 겨울날이었다. 댓돌에 나서는 참, 상감은 찬 바람에 혹 하니 느끼었다.

『상감마마, 바람이 차옵니다.』

『응, 차다.』

『도로 듭시면……』

그러나 상감은 뜰을 향하여 발을 옮겼다. 환후가 중하여 누워 있던 상감이라, 허공을 짚는 것과 같은 걸음으로 내관들의 부축을 받은 채, 왼편 익각을 끼고 돌아서 차차 중희당 앞으로 돌아갔다.

중희당 앞에까지 이르러서 상감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중희당을 바라보았다. 선왕 헌종이 승하한 전각이었다.

잠시 중희당을 바라보다가 부액한 내관을 돌아다보았다.

『내 나이 서른 셋, 의롭고 괴롭게 삼십여 년을 보냈구나!』

『상감마마, 무슨 하교시오니까?』

『……』

상감은 다시 용안을 들었다. 그리고 고목이 울창한 비원 쪽을 한참 뜻 없이 바라보았다. 자유로운 강화도의 초동 생활에서 궁으로 들어와서, 그 이래 괴롭고 구애 많은 십 사 년 간의 생활을 추억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비원만 바라보다가 용안을 만서에게로 조금 돌렸다.

십 사 년 간을 한결같이 상감께 등후한 만서는, 용안에 나타난 표정으로 어의를 짐작하였다.

『상감마마, 매화틀(便器)을 묘오리까?』

상감은 고요히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 사람의 내관이 매화틀과 뒷목을 가지러 내조전 쪽으로 달려갔다.

그 달려가는 내관의 뒷모양을 바라보다가, 상감은 차차 차차 몸을 그 자리에 종그리었다. 다음 순간 상감은 내관들에게 부액을 받은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상감마마! 상감마마!』

『내가 임! 임……』

『상감마마!』

『임종이로다!』

『상감마마!』

『대조전……으로, 그리고 정승(정 원용)을 불러라.』

이것이 상감에게서 나온 최후의 말이었다.

내관들이 망지소조하여 상감을 쓰러안아다가 대조전 동온돌에 모신 때는, 상감은 벌써 그 의식을 잃은 뒤였다. 누구 손 쓸 틈이 없었다. 중하던 환후가 오늘 약간 차도가 있는 듯하여, 내관들에게 부액을 받아서 뜰로 나섰다가 거기서 승하를 하였는지라, 남기고 싶은 말씀 한 마디 남길 기회가 없었다. 급보로 입궐하였던 대신들이 내전으로 달려 들어온 때는, 상감은 아직 맥은 약간 동하였지만 모든 의식을 잃은 뒤였다.

승후방에 있다가 상감의 승하한 것을 안 조 성하는, 가슴이 덜컥하여 어찌하여야 할지 두서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성하는 승후방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금호문으로 향하여 달음질쳤다. 그러나 금호문까지 채 미치지 못하여 발을 돌이켰다. 처음에는 이 흉보에 겸한 길보를 흥선군에게 먼저 알리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서로 조 대비께 먼저 가서 대비께 알리고 그 분부를 받아야 할 것이므로, 발을 대비전으로 돌이킨 것이었다.

『대비마마, 상감마마께옵서 승하하옵셨읍니다.』

성하가 숨을 허덕이며 달려 들어와서 이렇게 아뢸 때 대비는 안색까지 변하며,

『그게 무슨 말이냐?』

고 재쳐 물었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그 사이 환후가 좋지 못하였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로되, 본시 약한 상감인지라, 이렇게 급변하리라고는 뜻도 안 하였던 일이었다. 오늘날이 언제 있을 줄을 예기하고, 흥선과 밀약을 맺은 지도 벌써 이 년 반, 밀약은 맺었지만 천명이 아닌 이상에는 어쩔 수 없는 오늘을 대비는 마음 조급히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성하가 자기의 아는껏 비교적 상세히 아뢸 동안, 대비는 눈을 힘 있게 감고 말 없이 듣고 있었다. 그 동안에 승전빛(承傳色)도 달려 와서 방금 대조전에서 생긴 크나큰 비극을 대비께 아뢰고, 어서 바삐 대조전으로 출어하기를 재촉하였다. 상감 승하한 이 날에 있어서도, 임시로나마 이 종실의 권세를 잡고, 안으로는 사직을 받들고 밖으로는 임금을 대리하여, 대신들에게 명령하고 지휘할 사람은 이 종실의 가장 어른되는 조 대비 한 사람 밖에는 없었다. 아직 침의대도 갈아 입지 못했으니, 갈아 입고 대조전으로 나간다고 승전빛을 돌려보내고 고요히 눈을 뜰 때는 대비의 꽤 주름살이 잡힌 눈에도 나란히 광채가 섰다.

『성하야!』

『네?』

『얼른 흥선 댁에 다녀오너라.』

『네……』

『가서 잠깐 내전까지 들어와 주십사고……』

『네.』

이리하여 성하를 내보낸 뒤에, 대비는 최씨를 불렀다. 그리고 갈아 입을 의대를 가져오라 분부하였다. 최씨는 분부에 의하여 즉시 옷을 가져왔다. 그러나 대비는 곧 갈아 입으려 하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한 지금이었지만, 오늘 일을 위하여 의논하여 둔 흥선의 지혜를, 대비는 지금 힘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갑자기 다닥친 일이거니, 어떻게 처치를 해야 하며 어떻게 사건을 진행을 시켜야 할지, 흥선과 한마디의 의논을 하고 싶었다. 그 때문에 시간을 보내려 부러 옷도 곧 갈아 입지 않고 꿈질거리고 있었다.

승전빛은 연하여 대비전으로 달려 왔다. 갑자기 당한 이 일에, 재상들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종실의 어른되는 대비의 처단을 받들고자, 승전빛을 들여보내서 대비의 출어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방책이 아직 서지 못한 대비는, 이제 나간다 이제 나간다 하여 승전빛을 모두 그냥 돌려 내보내고 하였다. 귀를 기울이면, 겨울 바람 소리에 섞여서 궁인들의 애곡성도 벌써 여기까지 들려 온다. 그것을 들으면서 대비는 천천히 옷을 갈아 입으며, 어서 흥선이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이 종실의 최고 권위인 대비―공공히 흥선을 불러서 계획을 세울지라도, 뉘라서 머리를 가로 저을 사람이 없는 신분이었다.

가마를 몰아 가지고 흥선 댁으로 달려 간 성하는, 누구를 부르지도 않고 대짜로 흥선의 정침으로 뛰쳐 들어갔다.

『대감!』

『어?』

흥선으로는 희귀한 일―무슨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흥선은 이 침입한에게 눈을 크게 하였다.

『대감! 국상 났읍니다. 어서 납세요.』

흥선은 눈을 성하에게로 굴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오히려 온화한 음성이었다.

『전하께서 대조전서 승하하셨읍니다. 어서 대비마마께 들어가 뵙고……』

흥선은 알아 들었다. 한 순간 몸을 흠칫하였다. 그런 뒤에 자기의 흥분을 삭이렴인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잠시 앉아 있다가. 흥선은 고요히 몸을 일으켜서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였다.

『그래서 대비마마께서 나를 부르시던가?』

『네, 어서 잠시 들어오십사고……』

『알았네. 나는 안 들어가는 편이 낫겠지. 공연한 오해를 살 필요가 없으니깐―대비마마께 들어가서 어보(御寶)를 얼른 간수하시라고―다른 손이 닿기 전에 어서 간수하시라고―나는 내일이고 모레고 조용히 들어가 뵙겠네.』

성하는 눈을 들어서 흥선을 보았다. 그러나 들던 눈을 도로 곧 아래로 떨어뜨렸다. 아랫목에 단정히 앉아 있는 그 인물―그것은 그 사이 늘 성하와 함께 술을 먹고 색항에 출입을 하던 그 흥선이 아니었다.

거대한 충동이 그의 마음에 생겼을 지금에 있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이 인물―지금 마음 속에는 어떤 배포를 꾸미고 있길래, 이런 비상한 경우에 다른 사람 같으면 순간을 유예하지 않고 대비께 달려갈 이 때에, 자기는 내일이나 모레쯤 들어갈 테니, 어서 다른 것은 그만두고 어보나 간수하기를 부탁하고 있나?

성하가 흥선의 집에서 나와서 다시 대궐로 들어가려고 몸을 가마에 실을 때에, 저 편에서 한 무리의 소년들이 연을 날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보매, 그 가운데는 흥선의 둘째아들 재황 소년도 바야흐로 자기의 다홍치마를 올리려고 얼레를 어르고 있는 즈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지금 연을 올리려고 애를 쓰고 있는 그 소년의 위에, 이제 수삼 일 내로 떨어질 거대한 운명의 그림자를 생각할 때에, 성하는 멀리서나마 뜻하지 않고 그 소년에게 허리를 굽혔다.

―올리십시오. 하늘 끝까지 올리십시오. 지금 바야흐로 올라가려는 당신의 운명과 같이, 높이 높이 하늘 닿은 곳으로!

다시 대궐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가마에 몸을 싣고 성하는 몸을 틀어 가면서, 소년들의 노는 양을 돌아보면서 속으로 축수하고 축수하였다.

다시 금호문 밖에서 가마를 버리고 대궐 안으로 들어서매, 대조전이며 그 익각에서는 남녀의 곡성이 은은히 들려왔다. 대조전 댓돌 위에는 변을 듣고 달려 온 재상들의 신발이 어지러이 놓여 있고, 내관들이 분주히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것을 곁눈으로 보면서 단숨에 대비전까지 들어가 보매, 대비는 성하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하여 벌써 대조전으로 나간 뒤였다. 성하는 대조전으로 돌아서 나왔다. 승후관인 자기로도 들어갈 기회가 없을까 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누르면서 대조전을 두고 빙빙 돌고 있었다.

수심과 슬픔으로 찬 대조전에 대비의 임어―재상들이 좌우편으로 갈라 앉은 가운뎃길로 대비는 여관 몇 명을 거느리고 고요히 걸어서 영해의 침두에 가서 앉았다. 준비하였던 발이 대비의 앞에 늘이어졌다.

대비의 임어와 동시에 한 바탕의 곡성이 다시 울렸다. 대비도 영해의 앞에 꿇어 앉았다. 그리고 여관과 함께 대행왕의 천추를 곡하였다. 이윽고 대신들을 향하여 앉은 때에는 대비의 얼굴에는 약간 흥분의 빛이 나돌았다.

전내는 다시 조용하여졌다. 뒤에서 이전에 총애를 받은 많은 비빈들의 느끼는 소리만 은연히 들렸다. 이러한 가운데서 대비의 말이 고요히 울렸다.

『망국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망극하다고 그저 가만히 있지 못할 일이니, 일의 처리를 차비하여야겠소. 정 돈녕(정 원용) 대감은 선왕 헌종께서 승하하옵신 때에도 원상(院相―임금 승하한 뒤에 임시로 대소 정사를 맡아 보는 벼슬)으로서 일을 처리한 경험이 있으니 이번도 일을 보아 주시오.』

발을 통하여 보이는 늙은 재상 정 원용은 영을 복종한다는 뜻으로 머리를 땅에 대었다.

『그리고……』

거대한 씨름이었다. 지금부터 십 사 년 전 대비의 사랑하는 아드님 헌종이 승하한 때에 대비 당신이 경험한 쓰디쓴 일을 바야흐로 김씨 일문에게 내려 씌우려는 대비는, 당신의 마음을 누르고 또 눌렀지만, 마음에 일어나는 흥분을 더 감추기는 힘들었다.

『어보(御寶)는 내가 임시 맡아 둡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 어보를 맡는달사 무엇에 쓰리마는, 어보는 하루도 버려 둘 수 없으니 내가 맡아 둡시다.』

대비는 여관을 돌아보았다.

『어보를 모셔라.』

여관이 가져다 바치는 어보를 손으로 더듬어 받으면서, 대비는 발을 통하여 김씨 일문의 동정을 내다보았다.

임금의 승하를 곡하고자 들어왔던 김씨 일문은, 대비에게서 어보의 한 마디가 나올 때에, 분명히 대비의 예기한 이상으로 놀라는 모양이었다. 공손히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그들이, 그 순간 겁먹은 듯한 눈으로 발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대비는 더듬어서 어보를 양 손으로 받들었다. 그런 뒤에 무릎 앞에 놓았다. 김문을 대표하는 영의정 김 좌근이 드디어 한 마디 하여 보지 않고는 못 견디었다.

『대비전마마!』

『?』

『나라에는 하루도 상감 안 계실 수 없사오니, 거기 대한 하교 계오시기를 바라옵니다.』

『너무도 창황 중의 일이라, 나도 미리 생각한 바가 없고 대신들도 역시 그럴 터이니, 닷새 동안을 잘 생각해서 닷새 뒤에 의논을 하도록 합시다. 그 동안은 무식하나마 이 노파가 대리를 보리다.』

무법한 하교였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 이 나라를 대표하는 국모(國母)의 한 마디―뉘라서 감히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원상, 전후의 일을 착오 없도록 수고하시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대비는 여관에게 눈짓하여 어보를 받들어 앞세우고, 다른 여관들의 부축을 받아 당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어보를 받들고 돌아가는 이 대비의 양을 김씨 일가들은 모두 닭 쫓던 개 모양으로, 눈이 퀭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임금의 붕어를 통곡할 줄도 잊어버리고, 마치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이리하여 국왕의 권위를 자랑하는 옥새는 대왕대비 조씨의 손으로 들어갔다.

즉일로 국상은 반포되었다. 비록 재위 중에 후세에 남길 만한 특별한 시경은 없었으나, 십 사 년 간을 삼천리 강토에 군림하였던 임금의 붕어에 대하여, 온 국민은 흰 갓과 흰 옷과 흰 신으로 조의를 나타내었다.

그 날 밤 차디찬 동북풍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흥선도 백립을 마련해 쓰고 대비께 뵈려고 대궐로 향하였다.

금호문까지 이르러서 거기서 나오는 김 병기의 행차와 마주쳐서, 얼른 외면을 하고 그저 지나가 버렸다. 아직 장래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찰나에, 대궐 문에서 병기를 만났다가는, 약빠른 병기에게 기수를 채이고, 기수를 채이면 일이 어떻게 뒤집힐는지 알 수 없으므로 피하여 버린 것이었다.

혹혹 쏘는 찬 바람에 팔짱을 깊이 찌르고, 금호문을 지나서 대궐 담을 끼고 거의 사원전 앞에까지 갔다가 다시 금호문 쪽으로 돌아서서 왔다. 그러나 흥선이 바야흐로 궐 안에 들어가려 할 때에, 궐에서는 또한 무리의 사람이 밀려 나왔다. 비껴 서면서 보니 왕비의 오라버니되는 병필이었다.

『음, 재수 없군!』

두 번이나 들어가려다가 들어가지 못한 흥선은 드디어 발을 돌이켰다. 재수 없는 이 밤은 그냥 지나고, 밝은 날 다시 틈을 얻어서 들어가서, 천천히 대비와 선후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집으로 발을 돌이켰다. 거대한 운명의 열매는 지금 자기의 눈 앞 삼 척 되는 거리에 늘어져 있다. 이제는 손만 한 번 내밀면 넉넉히 딸 수가 있다.

제 속 가진 사람으로는 능히 참을 수 없는 온갖 수모요 멸시를 쓰다 하지 않고 받아 오면서, 얼굴에 나타나지 않는 비굴한 웃음을 억지로 웃어 가면서 지난 십 여 년의 날짜의 기억이, 벌꺽벌꺽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본시 어버이에게 받아서 타고난 조급한 성미, 노염 많은 성미―이것을 모두 감쪽같이 감추고, 자기의 인격을 가식하느라고 쓴 그 애는 얼마나 컸던가? 지금 이 노력의 열매는 바야흐로 익었다. 자기의 일거수면 넉넉히 따서 주머니에 넣을 수가 있다.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김 병기에게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받고도, 억지의 웃음으로 자기의 감정을 속이지 않을 수 없던 과거―생각하면 얼굴에 피가 솟아오르는 노릇이었다. 불끈 쥐어지는 주먹을 슬며시 도로 펼 때마다, 남 모르는 피눈물을 얼마나 속으로 흘렸던가? 그러나 그 때에 용하게 참은 덕택으로 자기의 생명을 곱게 보전하여, 이제 영광스런 열매를 눈 앞에 보는 오늘을 맞게 되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서 어두운 거리를 걸을 때에 흥선은 추위도 감각하지 못하였다. 습관상 팔짱은 깊이 찔렀으나, 쏘는 바람도 그의 속까지 침범하지 못하였다.

눈을 들어서 둘러 보매, 새까만 밤의 장막에 감추인 고요한 장안―지금 한 임금을 잃고 새 임금(누구인지 지금은 짐작도 가지 않는)을 맞으려는 장안―그 아래는 무수한 창생이 겨울의 아랫목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위에 복을 주고 그들을 위해 안락을 줄 자는……』

아아! 어제까지도 자기의 술친구요 투전 동무이던 이 시민들―수백 년 간의 악정 때문에 머리를 들 기운도 없는 이 백성들―이 친구, 이 시민, 이 백성들에게 복을 주고 안락을 줄 자는, 그들의 이해자요 또한 가까운 장래에(십상 팔구) 이 나라의 왕의 왕이 될 자기 밖에는 없다.

겨울의 혹독한 바람을 받고 그 때문에 찡그러지려던 흥선의 얼굴은 도리어 이 때에 빙긋이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멀리서 헛개 짖는 소리가 났다.

조 대비와 흥선의 밀의―

대비는 흥선의 내어 놓은 종이를 받아 들고 묵묵히 보고 있었다.

『대비전마마, 아드님을 두시고도 절사(絶嗣)가 되오신 익종 대왕의 대를 이번 기회에 부활시키도록 하시옵소서.』

대비의 지아버님 익종의 대를 부활시키자는 데 대하여 대비에게 이의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흥선이 내어놓은 계통표를 묵묵히 보고 있지만 대비에게도 적이 희색이 나돌았다.

『마음을 굳게 잡수십시오. 무론 김문에서는 반대가 있을 것이옵니다. 반대로 적지 않는 반대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지만 대비마마의 하교는 지금에 있어서는 국명―뉘라서 끝까지 거역은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대비의 입이 비로소 열렸다.

『나도 무론 내 힘껏은 하겠지만, 대감도 든든히 준비하시고 장사(壯士)라도 몇 십명 마련했다가, 여차하는 날에는 틀림이 없도록 하시오.』

흥선은 반대하였다.

『아니옵니다. 장사의 힘을 빌어서야 될 일이면 신은 본시부터 마음도 내지 않겠읍니다. 마마께옵서만 마음을 강하게 잡수시면 평온리에 넉넉히 될 일―왜 구태여 그런 준비까지 하겠읍니까?』

『그래도 김가들이 그냥 반대를 하면?』

『아니옵니다. 다른 분을 추대한다면 혹은 김씨들은 굉장히 반대하올지도 모르지만, 신은 김씨들에게 수모는 받았을지언정 김씨들이 신을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깐 종실의 다른 분을 추대하는 것보다는 신을 오히려 쉽게 볼 테니깐 극력 반대는 안 하오리다.』

이 날에 있어서 이 말 한 마디를 장담하기 위해서 그 사이 받은 비웃음과 수모―그 모든 것을 여기서 한 마디 펴 놓을 때는, 흥선은 마치 체기가 내려가는 것같이 가슴이 시원함을 느꼈다. 여인의 몸으로서 지금 이 나라의 온 권세를 한 손에 잡은 대비는, 흥선의 코치에 그저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리하여 모든 일은 흥선의 의견대로 진행되었다. 그 사이 십여 년 간을 몽상과 같이 닦고 또 닦았던 흥선의 계획은 차차 실현되기 비롯하였다.

대궐에서 조 대비와 흥선의 밀의를 거듭할 때에, 김씨 문중에서도 또한 김씨로서 회의가 열렸다.

살아 있었으면 당연히 이 회의의 어른이 될 영은 부원군 김 문근(金汶根)은 불행히 작년에 별세를 하여 그 자리에 못 오고, 영의정 김 좌근, 그 아들 김 병기, 조카 병학, 병국, 병필, 병덕, 일족 김 흥근 등이 모인 이 좌석에는 김 좌근이 좌장이 되어 회의라 열렸다.

일가붙이의 막다른 골목―지금 자기네들의 발 아래 뚫린 커다란 구렁텅이를 들여다보며 그들은 전전긍긍히 의논하였다.

이런 경우에 임하여 언제든 기묘한 꾀를 내어서 난국을 타개하는 재간을 가진 김 병기도 이 날뿐은 아무 의견도 내지를 못하였다.

『자, 말들을 하게. 어떻게 했으면 좋은가?』

김 좌근이 허연 머리를 들면서 이렇게 의견을 물었지만 거기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 그 사이에 자기네의 세도를 자제삼아, 종친이라도 종친에게는 모두 원한을 진 자기네의 일이었다. 대행왕에게 아드님이라도 있으면이어니와, 그렇지 못한 지금에 있어서 어느 종친 한 사람, 자기네 일족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이 있을 까닭이 없다.

혹은 생질이 되며, 혹은 외손자가 되는 정당한 왕자가 없고, 종친 가운데서 누구를 모셔 오지 않으면 안 될 지금에 있어서는, 그들은 자기네의 입으로 지정할 만한 적당한 사람을 가지지를 못하였다. 서로 묵묵히 다른 사람의 입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들은 자기네 일족의 몰락을 분명히 직각하였다. 순조 대왕의 대로부터 지금까지 삼 대째 보름달과 같이 빛나는 영화에 취하여 있던 그들은, 지금 자기네의 앞에 이른 몰락의 구렁텅이를 보았다.

『아버님!』

드디어 병기가 입을 열었다.

『결과를 기다릴 밖에는 도리가 없겠읍니다. 대왕대비전의 일존에 달린 것이매, 여기서 이렇다 저렇다 하면 무얼 하겠습니까? 결과를 보아서 어떡허든 선후책을 강구하여야지 그 밖에는 도리가 없겠읍니다.』

『만약 대비마마께서 어느 분을 추천하느냐는 하문이 계시면?』

『그 때는 누구든 종실 중 왕자의 덕을 가진 분을 한 분 추천할 따름이올씨다.』

『그게 누구냐 말이다?』

『생각하고 연구해 보겠읍니다.』

이렇게 대답은 하였다. 그러나 이 좌석에서 가장 이번의 일에 마음 태우는 사람은 병기였다. 김문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또한 어린 만큼 교하고 혈기 많은 병기는, 따라서 가장 종친들에게 미움 살 일을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 날의 회의는 아무 결론도 얻지 못하고 흐지부지 산회를 하게 되었다. 누구 그럴 듯한 종친을 한 사람씩 마음에 먹어 두었다가, 이제 열 사흗날 대비의 앞에서 회의가 열릴 때에 추천을 하기로 작정을 하고 제각기 헤어졌다.

나올 때에 병기가 병학을 붙들었다.

『형님!』

『?』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읍니다. 몰락이올씨다. 요행 생명이 부지되면, 시골로 피해서 학이나 희롱하며 여생을 보냈지, 더 생각하고 연구할 나위가 없읍니다.』

거기 대하여 병학도 탄식하였다.

『잘 생각했네. 그렇지만 생명이 부지될지 어떨지 그것부터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천명―인력으로는 무가내하올씨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 듯한 병학을 버려 두고 자기의 행차로 달려갔다.

『재황이 좀 불러 오시오.』

흥선이 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부인은 종에게 분부하였다. 잠시 뒤에 한길에서 연을 날리고 있던 재황 소년은, 얼굴과 손등이 새빨갛게 되어 가지고 연과 얼레를 든 채 들어왔다.

『부르셨에요?』

『오냐, 거기 앉아라.』

소년은 아버지가 지시하는 자리에 앉았다. 자기가 지시한 자리에 앉은 소년을 흥선은 한참 동안을 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님, 왜 부르셨에요?』

그러나 흥선은 역시 말 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이 소년의 위에 바야흐로 떨어지려는 커다란 운명을 생각할 때에, 흥선은 기쁘다기보다도 놀랍다기보다도 오히려 송구하였다.

『부인!』

『네?』

말하여 주고 싶었다. 말은 목젖에까지 와서 돌아왔다.

―얘는 내일 모레면 삼천리 강토의 지배자가 될 애 외다.

목젖까지 나와 도는 이 말을 흥선은 꿀꺽 삼켰다.

『얘게 맞게 천담포, 복건, 모두 지어 두었겠지요?』

『네, 지어는 두었읍니다.』

지어는 두었지만 언제 쓸 것이오니까 하는 뜻이었다.

흥선은 의아하여하는 부인을 버려두고 이번엔 소년에게 향하였다.

『야!』

『네?』

『한 마디 묻는다.』

『네.』

『내가 네게 무엇이 되느냐?』

『아버님이올씨다.』

흥선은 이번은 손을 들어서 부인을 가르켰다.

『저이는?』

『어머님.』

아아! 이 소년의 입에서 아버님 소리를 들을 날도 이제 며칠이나 남았나? 이 소년에게 향하여 오냐를 할 날도 이제 며칠이나 남았나?

가까운 장래에는 「하시오」로도 당하지 못할 귀한 몸이 될 소년이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흥선은 그 영화를 축복하면서도 또한 한편으로는 마음에 일어나는 적막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야, 나는 너의 아버지, 저이는 너의 어머니지만, 아버지고도 아버지가 안 되고 어머니고도 어머니가 못 되는 수도 있다. 알아 두어라.』

소년은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 못하였다. 의아한 듯이 아버지를 우러러보았다. 그 소년의 눈을 피하면서 흥선은 담뱃대를 끌어당겨서 담배를 담았다. 영특한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뛰어 나와서 화로에 성냥을 그어 대었다. 아들이 그어 대는 담배를 힘있게 빨면서, 연기 틈으로 아들의 고치와 같은 타원형의 예쁘장스런 얼굴을 볼 때에, 흥선의 마음에는 더욱 적적함이 더하였다.

그 날, 아이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려서 흥선은 다시 내실로 들어가서 부인에게 자기의 지금 계획하는 커다란 음모(?)를 말하였다. 부인은 깜짝 놀랐다. 반신반의하였다. 너무도 의외의 말인지라, 부인으로서는 얼른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그 말이 과히 엉터리 없는 말이 아닌 줄 짐작이 갈 때에, 부인은 기뻐하기 전에 먼저 탄식하였다.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착하고 어진 부인은 이런 경우에 임하여서도 자식의 위에 임한 영화보다도 먼저 자식의 안위를 근심하는 것이었다.

종가의 며느리로 들어온 부인은, 아직껏 역사상에 왕위 때문에 흘린 많고 많은 피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는 것이었다. 불행한 왕위보다는 안온한 빈공자(貧公子)의 생활이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더욱 달가왔다. 국상이 반포된 이래 조성하는 여간 분주하지 않았다.

벼슬이 승후관에 있으며 임금 없는 지금은 좀 한가할 것이로되, 별다른 임무를 진 성하는 잠시도 엉덩이를 붙일 겨를이 없었다.

하루에도 두 번, 세 번씩 흥선 댁에서 대비께로, 대비께서 흥선 댁으로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러는 동안, 차차 성하는 흥선을 알았다. 그 기괴한 인격과 기괴한 성격을 보고, 이런 가운데도 흥선 본래의 면목이 따로 있나 하고 반의로 지내던 성하는, 이번에 비로소 흥선 본래의 면목을 보았다. 아직껏 권문들에게 대하여 그렇듯 비굴한 웃음을 웃어가면서 부회하던 흥선이, 사건이 한 번 뒤집히게 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떠한 권력, 어떠한 세도도 모두 초개같이 보았다.

『대비께 이렇게 가서 여쭈게. 그리고 또 이렇게 이렇게 합시사고 여쭈게.』

각각으로 변하여 가는 동태에, 새로 새 지휘를 연하여 하며, 거기 대하여 만약 성하의 입에서 시의 권문들을 꺼리는 말이라도 나오면,

『천작이 막여일봉(千雀莫如一鳳)이라, 내게 심산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게.』

하고 퉁겨 버렸다.

일변 대비께로, 혹은 원상 정 원용에게로, 또는 좌의정 조 두순(趙斗淳)에게로 흥선의 전갈을 받아 가지고 갔다 올 때마다 성하는 흥선의 심산(心算), 흥선의 궁리가 놀랍게도 정확히 들어가 맞는 데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편지인지는 모르지만, 흥선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좌의정 조 두순을 찾을 때, 성하는 무론 조 두순에게서 좋은 대답이 있을 줄은 뜻도 안 하였다. 근엄하기 짝이 없고 흥선 같은 영락된 인물은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을 두순인지라, 흥선의 편지를 받을지라도 내버리지 않고 펴 보기나 하면 상의 상이거니 이만큼 생각하고 갔더니, 조 두순은 펴 볼 뿐 아니라 두 번, 세 번을 다시 보고 그리고 한참을 머리를 숙이고 생각한 뒤에,

『대감께 가거든 염려 맙시사고 여쭈오.』

하고 흔연히 승낙하였다. 이렇게 자기의 사랑에 들여박혀 성하를 내세워서 좌우편으로 운동해 나아가는 일이로되, 일호의 착오도 없이 순조로이 진행되는 것을 볼 때에, 성하는 흥선의 놀라운 통찰력과 지력에 경복하였다.

성하는 여기서 잠든 사자의 일어남을 보았다. 비로소 앞다리를 뻗치며 기지개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 사자가 한 번 포함성을 지르며 일어날 때에, 쇠잔한 이 삼천리 강토는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이었다.

그것은 빛나는 나라일 것이다. 부강한 백성일 것이다. 가멸은 강토일 것이다. 그리고 위와 아래가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평화의 왕국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장래의 빛나는 나라와, 그 때 이 잠에서 깨어난 사자 아래서 활동을 할 자기를 생각해 볼 때에, 젊은 성하의 마음은 누르려야 떠오르는 흥분을 온전히 눌러 버릴 수가 없었다.

흥선 댁에서 대궐로, 대궐에서 원로들의 댁으로, 엉덩이를 붙일 겨를이 없도록 돌아 다니는 성하로되, 그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어서 날이 지나서 정식으로 신왕이 결정되고, 그뒤에 또한 전무(前無)한 제도―국왕의 사친(私親)의 섭정(攝政)의 날이 나타나기를 마음 조이며 기다렸다.

이리하여 꿈결같이 닷새가 지나고 드디어 열 사흗날이 이르렀다. 대비의 앞에서 새 왕을 결정할 중대한 회의를 여는 날이었다.

창덕궁 희정당―대왕대비 어전 회의―

발 뒤에는 오늘의 절대 권리자 조 대비가 여관 여섯 명을 거느리고 임하였다.

순원왕후와 대행왕비의 두 분 김씨의 일문을 대표하는 김 좌근, 감 흥근, 김 병기, 김 병덕, 김 병필, 김 병학, 김 병국의 모든 김족이며, 헌종비 홍씨를 대표하는 홍 순복이며, 원로로 정 원용, 조 두순 등, 그 밖에 흥안 소년 한 사람이 끼어 있는 것이 이채였다. 조 대비의 조카 성하였다.

몸은 한 개의 승후관에 지나지 못하나, 오늘의 최고 권위자인 조 대비의 조카며, 흥선과 대비에게 중대한 역할을 맡은 성하는, 대비 임어와 함께 대비의 뒤를 따라서 들어온 것이었다. 같은 외척이요, 헌종의 외사촌 동생이요, 종실의 어른 조 대비의 조카로되, 김씨 일문의 세력에 눌려서 겨우 승후관 한 자리로써 명맥을 보전하여 오던 성하는, 오늘은 조 대비의 일족을 대표하는 당당한 척신의 한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임한 것이었다.

『대왕대비전마마, 막중막대한 일이옵니다. 마음에 계오신 대로 하교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원상 정 원용이 끓어 엎디어 아뢰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먼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읍시다.』

냉정한 대비의 말이었다.

오십까지 시어머님 대왕대비 김씨를 섬기며 자기의 온갖 감정을 감쪽같이 감추기에 단련된 조 대비는, 이런 때에 임하여서도 냉정한 한 마디를 먼저 던져 보았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대신들의 의향은 즉시 나오지 않았다. 무론 어떠한 의향은 있을 것이로되, 국면이 어떻게 전환될지 예측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덜컥 자기의 의견을 먼저 말하기를 꺼리었다. 다른 사람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면 거기 반대를 하든가, 찬성을 하든가 하여 비로소 자기의 의향을 말할 예산으로, 모두 묵묵히 남의 입만 바라보았다.

이번엔 조 두순이 아뢰었다.

『대왕대비전마마, 이 일은 신 등의 의향뿐으로 결정하지 못한 중대한 일이옵니다. 마마의 심중에 곕신 대로 하교해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잠시 있다가 겨우 입을 연 때는, 오십이 훨씬 넘은 대비의 얼굴에도 약간 붉은 흥분이 돌았다. 이제는 수속상 대신들의 의향을 물었는지라, 남은 것은 대비 당신의 의향을 말할 과정이었다. 말을 꺼낼 때는 대비는 음성조차 약간 떨렸다.

『대신들의 의향이 그러니, 그럼 내 뜻을 말하리다. 국정이 어지럽고 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금, 한 때도 국왕 없이는 지내지 못할 테니, 흥선군 이 하응의 둘째아들 재황이를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서, 이미 절사된 익종 대왕의 대통을 부활하게 하도록 하시오.』

청천의 벼락이었다. 순서를 따지자면 대신들이 의향을 내고, 대비는 단지 그 결정만 할 것이어늘, 여기서 대비는 나아가서 그 승통자를 지정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 지정이 다른 사람도 아니요, 종실 친척 중 가장 영락되어 사람의 대접을 받지도 못하는 흥선군의 아들이었다.

대신들 가운데 감정의 동요가 분명히 일어났다. 그것을 대표하여 김 좌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왕대비전마마, 흥선군은 대행왕 전하의 육촌 백씨로서 그다지 먼 종친은 아닙지만, 그 집안이 너무도 영락돼서 임금의 친가로서는 혹은 좀 부적당하지 않을까 하옵니다.』

이 말에 대하여 대비가 대답하기 전에 가로 뚫고 나선 것은 조 성하였다. 격식으로 말하자면 대신들의 의논에 어디 뛰어들 자격이 못 되지만, 오늘의 중대한 역할을 맡은 성하는 격식을 무시하고 뛰쳐들었다.

『영상 합하!』

어디 감히 부르지도 못할 명사를 부르면서 성하는 한 무릎 앞으로 나왔다.

『재산이 없으면 가정이 영락되는 것은 정한 이치―영락되었다고 그 사람의 본질까지 더럽는 바가 아니올씨다. 대행왕 전하께서도 본시는 강화서 한미한 생활을 합신 일은 대감도 모르시는 바가 아니겠읍니다. 흥선군의 둘째 도령으로 만약 왕자의 그릇이 못 된다 하면 모르거니와, 생활이 영락되었으니 좋지 못하다는 것은 일국의 수상의 말씀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대답한 말에 얼굴까지 검붉게 하고 성하를 노려 본 것은 하옥 김 좌근의 아들 병기였다.

『여보!』

「이놈」이라 부르지 않은 것은 병기의 최대 관용이었다.

『당신은 웬 사람이기에 이 좌석이 무슨 좌석이라고 외람되이 주둥이를 놀리오?』

『나 말씀이오?』

이 때의 성하는 벌써 「소인」이 아니었다.

『나도 대감네들과 마찬가지로 외척의 한 사람―』

『외척? 외척이라도 이 좌석은 대비전마마와 재상들이 중대한 의논을 하는 좌석―잡인이 섞이지 못할 좌석이니 냉큼 나가오.』

그러나 성하는 대척하지 않았다.

『나도 대비전마마의 분부로써 오늘 이 좌석에서 한 마디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오.』

차차 격론으로 되어 가려는 것을 발 안의 대비가 말렸다.

『성하, 잠시 조용해라. 김 찬성도 조용하고……자, 수상의 의향을 들었으니 이번은 원상의 의향을 들어 봅시다.』

사 대의 임금을 먼저 보내고 지금 오 대째의 임금을 맞으려는 백발 재상 정 원용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대왕대비전마마의 하교에 대하여 신이야 어찌 다른 의견이 있사오리까? 분부대로 거행할 따름이옵니다.』

『그럼 좌상의 의견은?』

『신도 어찌 다른 의견이 있사오리까? 대왕대비전마마의 하비(下批)는 신으로서는 용훼(容喙)하지 못하는 법이오니 처분대로 거행할 따름이옵니다.』

흥선의 편지로써 벌써 마음이 돌아선 조 두순은, 대비의 말에 이의를 제출하는 김 좌근을 도리어 잘못하였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은 어디 좌찬성의 의견을……』

『신은 반대하옵니다. 우리 나라에 본시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사온데, 흥선군의 둘째도령을 영립하오면 흥선군의 대우를 어떻게 하겠읍니까? 왕 이상의 존위는 없는 바오매, 왕도 아니며 신하도 아닌 흥선을 마련할 자리가 어떻게 되겠읍니까? 더구나 흥선군은 허튼 바탕에 드나들고 허튼 사람들과 교제를 하와, 명문답지 못한 언행이 많으와 왕친으로서의 재목이 못 되는 인물이옵니다.』

사활의 분기선이었다. 만약 흥선의 둘째도령을 영립하고 흥선으로서 권세를 잡게 하였다가는, 자기의 지위는커녕 생명까지 위태로운 병기는 악을 써 가면서 반대를 하였다. 김문의 군자(君子)인 유관 대신 김 흥근(遊觀大臣金興根)이며, 그 아들 병덕이며, 흥선과 비교적 가까이 사귄 병학, 병국의 형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차례로 의견을 다 물은 뒤에 대비는 고요히 입을 열었다.

『여러 원로 대신들과 의견은 다 들었소이다. 혹은 가하다 하고 혹은 부하다 해서 대신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못하나, 의견을 물은 것은 단지 참고하고자 물은 뿐, 승통에 대해서는 내 이미 마음으로 작정한 바이니 그리 아시오. 흥선군 이 하응의 둘째도령 재황을 익성군으로 봉해서 익종 대왕의 대통을 잇도록!』

최후의 거탈은 드디어 던져졌다. 재상들에게 그 가부를 묻는다면 이어니와, 이미 대비가 스스로 작정하였다 하는 이상에는 움직일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이 거탄은 김문의 권세로써도 어찌하지 못할 종류의 거탄이었다.

정 원용이 한 무릎 앞으로 다가 앉았다.

『대왕대비전마마, 분부는 받자왔읍니다. 그러나 구전뿐으로는 후일의 증빙이 되지 못하니, 언교(諺敎―한글교서)를 내려 줍시기로 아뢰옵니다.』

대비는 여관을 돌아보았다. 한 사람의 여관이 조금 발을 들었다. 언교를 싼 붉은 보를 받들고 있다. 다른 여관이 발 아래로 그것을 내밀었다. 미리 준비되었던 것이었다. 도승지(都承旨) 민 치상(閔致庠)이 무릎걸음으로 나아가서 언교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원상 정 원용에게 바쳤다.

『흥선군의 둘째아들을 익성군으로 봉하여 익종의 대통을 잇게 하라.』

재상들이 차례로 언교를 본 뒤에, 도승지 민 치상이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읽었다.

『대비전마마, 틀림이 없사옵니까?』

『없소이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언교는 이미 내리고, 그 언교가 도승지의 손으로 넘어간 이상에는 이젠 움직일 수 없는 일이었다.

『원상!』

발 안의 대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대령하왔읍니다.』

『이젠 대통도 결정되었소이다. 용상 맡으실 분을 어서 모셔 오도록 그 차비를 대시오.』

『즉시 거행하겠사옵니다.』

이젠 대사가 결정된 자리에 앉아서, 조 성하는 눈을 굴려서 전내를 살펴보았다. 정 원용, 조 두순 등 원로 대신은 단지 어명을 복종한다는 엄숙한 표정만 나타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금 눈을 더 굴려서 영의정 김 좌근을 보매, 백두의 이 재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을 검붉게 하고 묵묵히 방바닥만 굽어보고 있었다. 병기는 나이가 젊으니만큼 분명히 그의 얼굴에서 흥분과 절망의 그림자를 감추지 못하였다. 연하여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품이 마음에 커다란 불안이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일찍이 이런 중대한 회의에 참여하여 보지 못한 성하는, 적지 않은 흥분과 호기심으로써 둘러보았다.

―당신네들의 몰락이외다. 당신네들의 세도가 한 천 년 갈 줄로 믿었읍니까? 여름 날 한 떨기의 꽃, 시들 날이 있을 줄을 몰랐읍니까?

이윽고 대비는 여관들을 거느리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대비가 돌아간 뒤에는 재상들은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다만 도승지 민 치상의 지휘로 사관(史官)이 오늘의 경과를 기록하느라고 분주히 붓을 놀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영상!』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정 원용이었다.

『네?』

좌근이 흠칫하여 대답하였다.

『자, 봉영의 차비를 댑시다. 대감이 민 승지를 데리고 흥선군 댁에 가셔서, 익성군을 모셔 오십시오.』

『네……』

대답은 하였으나 기운 없는 대답이었다.

『민 승지! 영감은 수상을 모시고 흥선군 댁으로 가도록 차비하게.』

그리고 이번은 훈련대장 김 병국을 돌아보았다.

『대장! 대장은 어서 나가서 익성군을 봉영할 의장병을 준비하도록 마련하시오.』

금년에 나이 여든 하나―그 육십여 년을 벼슬을 산 늙은 재상 정 원용은, 이런 경우를 당하여 일호의 착오없이 지휘를 하여 원상인 자기의 직책을 다하였다.

이리하여 신왕을 맞을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제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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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