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제22장
二十二
[편집]『아, 아! 지붕에 걸리련다. 옳다! 넘어섰다.』
겨울 바람이 꽤 강하게 부는 날이었다.
재황 소년은 사랑뜰에서 연을 올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 형 재면이 서서 올라간 연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소년의 뺨과 손등은 찬 바람 때문에 새빨갛게 되었다. 그러나 연줄을 통하여 손에 감각되는 탄력에 온 정신을 붓고 일심불란 올라가는 연을 어르고 있었다.
『어디 튀김을 주어 보아라.』
빙긋이 웃으면서 형 재면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 말에 응하여 소년이 튀김을 주니, 벌써 지붕 위 꽤 높이 올랐던 연은 춤을 추면서 아래로 거꾸로 내려왔다.
『어타! 어타!』
『어디 나좀!』
『좀 있다가요.』
손을 내미는 형을 피하면서 소년은 줄을 더욱 풀어 주었다. 거기 따라서 연은 하늘로 향하여 춤을 추며 올라갔다. 문득 밖에서 꽤 많은 인마의 두선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인마는 분명히 흥선 댁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들은 그다지 관심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오는 사람이 고귀한 사람일 것 같으면 당연히 벽제의 소리가 있을 것이어늘, 그렇지도 않고 숙숙히 이 집으로 들어오는 인마거니, 그다지 소년들의 흥미도 끌지 못하였다.
중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하늘에 높이 오른 연만 바라보던 소년은, 한 순간 중문 편으로 눈을 돌렸다가 그리로 들어오는 꽤 점잖은 사람 하나를 흘낏 보고는 도로 눈을 연으로 돌렸다. 소년에게 있어서는 지금 하늘 끝 닿은 데로 오른 연밖에는 다른 것은 관심되는 것이 없었다.
중문으로 앞서서 들어온 것은 도승지 민 치상이었다. 도승지의 인도로 뒤를 따라 들어온 것은 영의정 김 좌근이었다.
한 걸음의 길을 갈 때라도 반드시 평교자에 몸을 싣고 다니던 김 좌근이지만, 오늘 신왕을 봉영하러 옴에 그는 도보로써 지팡이도 짚지 않고 온 것이었다. 인마가 들어오는 기수에 정침 안에 있던 흥선이 쪽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민 치상이 댓돌 위에 올아서서 청지기를 부르려 할 때에는 흥선은 벌써 손을 맞으러 대청에 나선 때였다.
『영감 어떻게 오시오.』
여전한 깨어진 갓, 군데군데 꿰맨 도포였다. 그러나 그 얼굴과 태도에는 어젯날의 때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졌다.
흥선의 물음에 응한 사람은 민 치상이 아니고 김 좌근이었다. 좌근은 댓돌 아래로 가까이 와서 손을 읍하고 허리를 굽히며, 공손한 어조로 말하였다.
『오늘 대왕대비전마마의 어명으로써 대감의 둘째도령님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군을 하옵고, 익종 대왕의 대통을 승계하시와 대위에 오르시게, 영의정 김 좌근이 봉영차로 왔읍니다.』
흥선은 눈을 감았다. 안 감으려야 안 감을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감정의 격발―튀어나려는 통곡―이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하여 눈을 힘있게 감았다.
하옥도 자기의 할 말만 한 뒤에는 입을 봉하고, 머리를 수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이전에는 초개만큼도 아니 여기던 흥선의 앞에(일찌기 상감의 앞에서도 이렇듯 굽혀 본 일이 없는) 허리를 굽히고서―
한참 뒤에 흥선이 비로소 눈을 떴다. 동시에 입도 열었다.
『수고허오.』
위연히 내어던진 한 마디의 대답이었다. 그런 뒤에 발을 그 자리에서 떼었다.
『자, 어머님께 들어가서 하직을 고합시다.』
벌써 오냐를 할 수 없는 존귀한 아드님의 손목을 이끌고 흥선은 내실로 들어갔다.
아직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는 소년은, 아버지의 명으로 걷어 놓은 연을 아까운 듯이 힐끗힐끗 보며 손목을 잡혀서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 지존께 절을 하시오. 오늘부터는 팔도 삼백여 주인의 지존이시외다.』
부인은 눈을 들었다. 그 비슷한 말을 일찍부터 흥선에게 못 들은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일이 이르리라고는 뜻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에 있어서도 오히려 의심스러운 얼굴로 지아버니를 우러러보았다.
『영상이 봉영차로 와서 사랑에서 기다리고 있소이다. 어서 의대를……』
『대감!』
이 지아버니를 우러러보는 부인의 눈에는 그득히 눈물이 괴었다.
그것은 환희의 절정의 눈물일까? 그렇지 않으면 애석의 눈물일까? 일찍이 종가에 시집을 와서 조선 왕실의 많고 많은 비극을 다 아는 부인이매, 사랑하는 아들의 장래의 운명을 근심하는 눈물일까?
『야 명복아! 이리 온.』
그리고 가까이 이른 소년을 부인은 힘을 다하여 쓰러안았다.
『야, 명복아!』
『왜 그러세요, 어머님!』
『어머님……어머님……재황아! 너한테 어머님 소리를 듣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로구나. 다시 한번 불러 다고.』
소년은 손을 들었다. 어머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만져 보았다.
『어머님, 왜 우세요?』
『아니로다. 우는 것이 아니로다. 너는 오늘부터는 나라의 나랏님! 네가 그렇게 되니 너무도 기뻐서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구나.』
나라님? 나라님은 대궐에 계신 분이다. 소년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미리 준비하였던 새 옷을 바꾸어 입고 복건을 쓰고 천담포를 입은 이 소년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부모께 하직을 고하였다.
그 때는 벌써 흥선군의 둘째도령이 신왕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때문에, 흥선의 집 근처에는 백립 백의의 무리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소년이 흥선에게 인도되어 안에서 나올 때는, 신왕을 모실 연(輦)은 벌써 안문 밖에 등대되어 있었다.
신왕의 보련―영의정 김 좌근이 도보(徒步)로서 딱 곁에 붙어 서고, 도승지 민 치상이 그 뒤에 달리고, 시위 장사며 관원들에게 호위된 이 연은, 소년의 생장한 경운동 흥선 댁을 뒤로 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여 떠났다.
해지고 덜민 옷을 갈아 입지도 않은 흥선과 흥선 부인은, 자기네들의 아드님이요, 또한 지금은 이 나라의 지존이 된 소년의 연을 중문 밖까지 전송하였다.
『하늘이여, 신왕의 위에 복을 내려 주십사. 영원하도록 복을 내려 주십사.』
고요히 고요히 축수하는 이 중로(中老)의 부부의 눈가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흥선 댁에서 돈화문까지―그 길 가에는 벌써, 새 임금을 맞으려는 무리가 하얗게 늘어섰다.
어린 임금을 모신 보련 곁에는, 백발의 영의정 김 좌근이 딱 붙어 서서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일찍이 「개똥이」라는 소년으로의 이 신왕과 만날 같이 연을 올리며 돈치기를 하던 동리의 소년들은, 펄펄 뛰면서 연하여,
『개똥아!』
『명복아!』
『재황아!』
부르면서 행차를 어지럽게 하였다. 많은 백의군들은 신왕의 용안을 절하고자 서로 앞을 다투어 헌화하였다.
멀지 않은 거리였다. 그러나 좌우편에 구름같이 모여든 무리들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의장병사들은 뭉치와 막대를 휘두르면서 길을 방해하는 무리들을 헤치고 있었다.
문득 한 소년이 구경군들 중에서 뛰쳐 나왔다. 그리고 보련을 향하여 달려왔다. 보매 그것은 연 동무였다.
『웬 놈이냐? 비켜라!』
달려 오는 소년에게 향하여 의장병사의 뭉치가 한 번 날아갔다. 동시에 소년은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가만!』
늠연히 울린 신왕의 음성에 보련은 그 자리에 섰다. 곁에 붙어서 가던 좌근이 보련 쪽으로 돌아섰다.
『무슨 하교가 계시오니까?』
『저 애 이마에서 피가 흐릅니다.』
『네, 길을 어지럽게 하는 소년이길래……』
신왕은 용안을 들었다. 어리지만 영특함과 자애심이 사무친 용안이었다.
『나는 오늘부터 이 나라의 상감이라지요?』
『네……』
『왕은 그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옛날 성현이 가르쳤읍니다. 저 애를 일으켜 주십시오. 그리고 또 병사들에게 일러 주시오. 다른 사람들도 몽치로 쫓지 않도록 일러 주십시오.』
이 너무도 숙성한 하교에 좌근은 뜻하지 않고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그런 뒤에 배행하는 도승지 민 치상을 불렀다.
『배관하는 서인들에게 난폭한 일을 하지 말라는 분부가 계시오니, 그대로 전하게.』
이 뜻을 민 치상이 큰 소리로 외칠 때에,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와 하니 함성을 지르며 신왕의 자비심을 찬동하였다. 이로부터 길은 더욱 더디게 되었다. 신왕을 맞으려는 군중은 이 신왕의 고마운 전교를 듣고, 모두 함성을 지르며 길 가운데로 어지러이 들어와서, 용안을 절하고자 우러렀다.
『우리 나라님!』
『우리 상감님!』
이 소년왕께 대하여 모두 「우리」라는 관사를 붙여 가지고, 환희의 함성을 지르며 따라를 왔다. 돈화문까지 이르매, 뭇 종친들이며 원로 대신들은 모두 예복을 갖추고 제 이십 육대의 임금을 맞으러 돈화문 밖에 열을 지어 서 있었다.
보련은 이 맞이하는 종친들이며 대신들의 절을 받으며 돈화문으로 들어가서 인정전을 왼편으로 끼고 돌아서 빈전(殯殿)인 대조전으로 들어갔다.
대조전 서온돌에는 벌써 대왕대비 조씨며, 왕대비 홍씨며, 대행왕비 김씨가, 새로 된 상감을 맞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뭇 여관들은 새 임금을 절하러 모두 문을 방싯이 열고 겹겹이 둘러서서 그 틈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소년 신왕은 마주 나온 재상 정 원용의 앞잡이로 대행 군주의 재궁(梓宮)을 모신 동온돌로 들었다. 그리고 이십 육대의 군주로서, 선행 대왕의 영해에 절하였다.
환영의 기쁨과 선왕께 대한 애통으로 뒤섞인 대궐―그 안에서 궁인들은 분주히 왔다갔다 하였다.
『아기씨마마!』
신왕이 당신께 와서 절할 때에, 조 대비는 늙은 얼굴에 명랑한 미소를 띄었다.
『자, 이리로 가까이 와서 앉읍시오.』
신왕은 대비의 지시하는 자리에 가 앉았다. 조 대비는 손을 내밀어서 소년왕의 수장(手掌)을 잡았다.
『마마, 무슨 생입시오?』
『금년에 열 두 살이옵니다.』
소년왕은 그 영특한 안정을 치뜨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참 영특도 합시오. 마마, 이제부터는 나를 어머니라 부릅시오. 나는 오늘부터는 마마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외다.』
그의 사랑하는 아드님 헌종이 임종시에 두어 번 불러 본 이외, 어머니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고 오십여 년의 생애를 보낸 조 대비에게 있어서는, 「어머니」란 말은 꿈과 같이 즐겁고도 눈물겨운 말이었다.
『원상!』
대비는 발 밖에 대령하고 있는 정 원용을 불렀다.
『여기 대령하왔읍니다.』
『흥선군을 대원군(왕의 私親)의 친호)으로 하고 흥선군 부인을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으로 봉하고―그 수속은 다 하셨겠지요?』
『하비대로 하왔읍니다.』
『흥선군 사택은 운현궁(雲峴宮)으로 궁호를 내리고……』
『네……』
『그 밖에 또 무슨 의견이 없읍니까?』
『대비전마마, 한 가지 계청하올 말씀이 있읍니다.』
『무엇이오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 나라에는 아직껏 생존한 대원군이 없사와, 그 선례 고빙할 바가 없사오니, 지금 주상전하의 생친되시는 흥선 대원군을 어떤 형식으로 대우하여야 하올지, 거기 대한 하교가 계시오기를 바라옵니다.』
이야말로 어려운 문제였다. 조 성하가 사이에 나서서 흥선군과 대비의 사이에 왕래한 결과, 이 문제의 해결책도 다 내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과연 대신들에게 무사히 통과가 될는지 의문이었다. 아직껏 역사상에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는지라, 지금 여기 갑자기 생겨난 생존한 대원군의 격식 문제는 난문제 중의 난문제였다.
『거기 대해서는 내일 원로 대신들이 다시 희정당에 모여서 좋도록 의논을 하기로 합시다.』
『또 한 가지, 주상 전하는 아직 연치가 유충하시매, 선례에 의지해서 대비전마마께오서 수렴청정을 하시올지, 혹은 어떤 다른 방식을 취하올지, 거기 대한 하교도 계시오기를 바라옵니다.』
『거기 대해서도 내일 함께 의논을 하도록 합시다.』
『즉위의 어절차는 어떻게 하오리까?』
『그것은 선례에 의지해서 하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대략은 모두 내일로 미루기로 작정하였다.
그 날 밤, 자리에는 들어갔지만 조 대비는 머리에서 일고 잦는 수 없는 망상 때문에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는 흥선의 도령을 영립하였다. 몸은 비록 대왕대비로서 이 종실의 어른의 지위에 있었으나, 이전부터 삼 대째 내려온 뻗고 또 뻗은 김씨들의 세력에 눌려서, 마음에 있는 일 한 가지도 뜻대로 해보지 못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조카 성하조차, 겨우 승후관이라는 변변치 못한 지위에 머물러 두었는데, 이제 바야흐로 그 모든 김씨의 세력을 꺾어 버리고, 당신의 새 세력을 뻗칠 것을 생각하매, 야심 만만한 조 대비는 그 망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 때 세도가 너무도 크더니, 너희들도 꺾일 날이 있구나.』
이전 이 하전 때의 겪은 억분까지 한꺼번에 떠올라서, 김씨 일문에 대한 증오 때문에 대비의 마음은 새삼스러이 어지러웠다.
김문에서도 이 밤 또 다시 중대한 회의가 열렸다. 이미 흥선 댁 도령이 보위에 오른 이상에는, 거기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다시 긴급한 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한 가지 있읍니다.』
무거운 눈을 치뜨며 이렇게 말한 사람은 김 병기였다.
『아직 한 가지의 길―나라에는 두 임금을 둘 수가 없으니까 흥선군은 당연히 신위(臣位)에 두지 않을 수가 없겠읍니다. 지금 보건대 만조 백관이며 자사 녹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흥선군에게 심복을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읍니다. 그러니깐 흥선군을 신위에만 두게 될 것 같으면 그다지 무서울 일도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병기는 어디까지든지 흥선을 멀리 하기를 주장하였다. 여기 대하여 병학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였다.
『흥선은 본시 현문과의 교제가 적고 매일 사귄다는 친구가 대개는 시정의 부랑자들이매, 흥선군이 어떤 권세를 잡는다 해도 그 권세를 그냥 보전하기 위해서, 혹은 우리 일문의 편으로 가담하지는 않을는지요? 더구나 대왕대비전께서는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조 성하, 조 영하, 그 밖 한두 사람밖에는 없으니깐, 이제부터라도 흥선군과 사귀기만 하면 혹은 흥선군은 우리들의 사람이 될지도 알 수 없읍니다.』
의논은 여러 가지로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흥선과 다시 결탁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은 흥선으로 하여금 단지 임금의 생친으로서의 위의를 보전할 만한 명목을 주고, 운현궁에는 홍마목(紅馬木)을 세워서 그 출입의 자유를 금하고, 일체로 정사에는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몇 가지의 의견을 묵묵히 듣고 앉았는 하옥은 머리로는 아까 낮에 신왕을 봉영하러 흥선 댁을 찾은 때의 일을 다시 회상하였다.
영의정인 하옥 자기가 허리를 굽히고 국왕의 생친으로서의 흥선에게 경의를 표할 때에, 흥선은 의연히 다만 한마디,
『수고하오.』
할 뿐이었다. 그 말투 그 태도는 웃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태도에 틀림이 없었다. 뿐더러, 그 때 흥선의 미간(眉間)에 나타나 있던―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기색―아직껏은 흥선으로 미루어서 하옥이 그 때 그 말을 전하면 허둥지둥 두서를 차리지 못할 줄만 알았더니, 흥선의 그 때의 태도는 가장 당연한 일을 만난 듯이, 조금도 낭패하는 기색이 없이 소년을 부르러 뜰로 내려섰다.
이 때부터 하옥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한 가지의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흥선의 이중 인격이었다. 아직껏 비굴한 웃음을 얼굴에 띄워 가지고 기신기신 권문을 찾아다니던 것은 단지 흥선의 호신책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흥선 댁에 떨어진 행운은 그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요, 그 사이 십여 년 간을 세밀한 주의 아래 계획하고 진행시켜 온 일의 오늘날의 성공이 아닐까? 더구나 이 하전 역모 사건이라 하는 것도 무론 구체적으로 빚어 내기는 자기네 일문에서 한 노릇이지만, 그로부터 사오 일 전에 흥선이 하옥을 찾아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다가,
『전하 천추하시는 날에는 아마 대개 이 도정이 보위에 오르게 되겠지요?』
이런 한 마디를 던져서, 그것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자기네는 부랴부랴 이 하전 역모 사건이라는 것을 빚어 내었다. 그것이 우연한 암합이면 모르지만, 그것 역시 흥선의 세밀한 계획의 일단이라 할진대, 그 추단력, 그 지력, 그 통찰력은 사람으로서 능히 추측하기 힘들도록 놀라운 인물이다.
대원군을 불신례(不臣禮)로 대우할 것.
운현궁에는 홍마목을 세워서 궁에 입하려면 대궐의 허락을 맡도록 할 것.
대원군의 지위의 임금의 아래, 대신의 위에―대군(大君―王嫡子)과 동렬에 두고, 그 출입에는 삼군의 군사로 호위하게 할 것.
기린 흉배(麒麟胸背)에 옥대(玉帶)를 정복으로 할 것.
일체 정치에 간섭하지 않게 하고, 단지 임금의 생친으로서 존경하게 할 것.
―흥선 대원군의 금후 대우에 대하여 이렇게 작정하기로 의논을 하였다. 이리하여 이 밤의 회의를 끝내었다. 그리고 원상 정 원용과 좌상 조 두순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서, 내일 대비 어전 회의 때에 틀림없이 이대로 결정을 짓기 위하여, 이미 밤도 깊었으나 하옥이 몸소 정 원용과 조 두순을 찾기로 하고 그 밤은 헤어졌다.
길의 순서에 의해서 하옥의 탄 평탄자가 바야흐로 조 두순 댁 솟을대문 앞에 놓이려 할 때에, 대문이 삐그덕하니 열렸다. 그리고 그리고는 웬 사람이 하인에게 좌초롱을 들리고 나왔다.
조 대비의 조카 조 성하였다. 하옥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벌써 흥선의 손이 조 두순에게 펴진 것을 직각하였다.
『대감, 어떻게? 밤도 깊었는데……』
근엄하기 짝이 없는 조 두순의 책상 앞에 자리를 잡으면서 하옥을 맞았다.
『밤도 깊었지만 내일 희정당에서 열릴 중대한 어전 회의 때문에 그 의논을 좀 하러 왔읍니다.』
두순은 눈을 굴려서 좌근을 쳐다보았다.
『어떠한 의논이오니까?』
『다름이 아니라, 내일 일에 대해서 대감의 의견을 좀 알아보고서……』
『의견……우리에게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대왕대비전마마의 하교가 계오신 대로 시행할 따름이지, 신자(臣子)가 외람되이 무슨 의견을……』
당찮은 말이라는 뜻이었다.
하옥은 말머리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대감 홀로의 의향은 어떠시오니까?』
두순은 머리를 숙였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끊어서 똑똑히 대답하였다.
『방금도 대비전마마께오서 승후관 조 성하를 보냅셔서 물으시기에 이렇게 붕답했읍니다. 흥선 대원군은 주상전하의 생친이시매, 허수로이 대접은 못할 것이로되, 또한 나라에는 두 임금을 둘 수가 없으니, 좋도록 처분이 겝시사고……』
『그 밖에는?』
『그 밖에는……』
말을 끊고 두순은 다시 생각하였다. 한참 생각한 뒤에 두순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대감은 흥선 대원군을 어떻게 보십니까?』
『?』
『무서운 지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혼자의 생각으로는 내일 어전 회의에서 대비전마마께 흥선 개원군의 섭정을 간원하려고 합니다.』
하옥은 입을 딱 벌렸다. 흥선의 손은 벌써 이 근엄 착실한 조 두순까지 긁어 잡은 것이었다. 어느 틈에? 그것은 알 수 없으나, 하옥은 여기서 맹연히 일어서는 거인의 그림자를 분명히 직각하였다. 눈을 감은 때는 천하가 요동을 할지라도 아는 체도 안 하지만, 한 번 눈을 뜰 때는 좌충우돌 천하를 위복시키는 무서운 위력을 보았다.
조 두순에게서 달가운 대답을 듣지 못하고 하옥이 다시 평교자를 달려서 원상 정 원용의 집으로 가매, 하옥보다 먼저 정 원용을 찾고 지금 방금 돌아가려는 조 성하가 하인을 앞세우고 원용의 집에서 나오는 즈음이었다.
좌근은 원용을 찾지 않고 교자를 돌이켰다. 성하가 먼저 다녀간 뒤에 이제 원용을 찾는대야 쓸데없는 것은 아까 좌상에게 미루어 경험한 바였다. 만월을 우러러보며 자기 집으로 평교자를 달리는 동안, 이 노상의 입에서는 연하게 장탄식이 나왔다.
이튿날 흥선 대원군의 위계에 대한 중대한 회의를 앞하여, 흥선은 직접 대궐에 들어가서 한참을 조 대비와 밀의한 바가 있었다.
낮쯤하여 희정당에서 회의가 열렸다.
『대원군의 의주에 대해서 대신들의 의견이 있으면 어디 말씀해 보시오.』
발 뒤에서 대비가 대신들을 내다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글쎄올시다. 아직껏 우리 나라에 생존한 대원군이 없었사오매 전거할 바를 알지 못하겠읍니다.』
정 원용의 대답이었다. 원용의 말을 이어서 좌근이 아뢰었다.
『신의 의향을 계상하겠읍니다. 나라에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으매, 아무리 전하의 생친이시라 하지만, 역시 신하의 반열에 들 밖에는 없을까 하옵니다. 그러나 또한 부자의 의라 하는 것은 인륜의 본의오매, 어버이되는 사람으로서 아드님께 북면해서 절하라 하는 것도 인륜에 어그러진 일이 아니올까 하옵니다. 그러니깐 대원군은 임금은 아니요, 신하도 아니므로서, 운현궁 안에 모시옵고 홍마목을 세워서 이를 대접하옵고, 임금의 사친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내수사(內需司)에서 조도품을 운현궁에 조달하옵고, 주상 전하께서는 매달 한 번씩 운현궁에 납셔서, 사친께 대한 효성을 표하옵고, 그 계제는 대군(大君)과 같이 하옵고, 주상 전하의 사친으로 하여금 일체 정치 문제에 간섭하지 않게 하오면, 첫째로는 인자로서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사올 것이오며, 둘째로는 나라에 두 임금을 두지 않게 될 것으로서, 신의 의향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이 아닐까 하옵니다.』
『좌상의 의향은?』
『영상의 의향도 그럴 듯하옵니다마는 요컨대 대원군은 임금이냐 신하냐 하는 한 가지의 문제밖에는 없을 줄로 아옵니다. 주상 전하께오서 이미 익종 대왕께 출사를 오신 이상에는, 아무리 사친이라 하여도 벌써 그 인연은 끊어졌사오매, 역시 신하의 예로 대우하지 않으면 안 될까 하옵니다. 인자의 도리로서 생친께 추배를 받을 수 없사오니, 단지 추배하지 않고 칭명하지 않고, 위계는 삼공의 위에 두어서 명분을 밝히는 것이 지당하지 않을까 하옵니다.』
조 두순의 의견은 좌근의 의견을 반대하는 것인지 찬성하는 것인지, 아주 막연하여 잘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대신들께 다른 의향은 없소이까?』
대비가 다시 물을 때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김씨 일문의 의견은 좌근이 이미 대표하여 말하였으며, 다른 의견은 조 두순이 말하였는지라, 별다른 의견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어느 편으로 기울어질지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섣불리 자기의 의견을 말하기를 모두 꺼리었다.
잠시 침묵이 계속 된 뒤에 대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가지의 의견을 들었소이다. 두 가지의 의견이 다 일리가 있는 것으로서, 어느 편을 취하고 어느 편을 버리기가 어려운 일이외다. 그러니 그 두 의견을 잘 절충해서 이렇게 하도록 하면 좋을 줄 생각합니다. 대원군은 주상 전하의 사친이매, 북면해서 신하로서 섬길 수는 인륜상 힘든 일이니, 추배하지 않고 칭명하지 않고 신사(臣仕)하게 하자는 좌상의 의견을 채용하고, 대원군이 아무리 신렬(臣列)에 있다 하되 주상 전하의 시친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임금의 사친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그 출입에는 삼군영의 병사를 두어서 시위하게 하며, 운현궁장(雲峴宮庄)을 마련토록 하고, 쌍초선을 받고 대궐 출입에는 남여를 타고 내관이 부액을 해서 전에 오르고, 그 위계는 대군의 위에 두고, 그 복제는 기린 흉배에 옥대를 쓰게 하고, 이것은 영상의 의견을 좆기로 합시다.』
조참(朝參)에는 대원군의 자리를 대신의 위에 따로 정할 것. 임금의 사친에 대한 예로서 운현궁 밖에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울 것.
삼공 이외에는 영내(楹內)에 같이 앉지 못할 것―등등 대원군의 의주에 관하여는 대략 결정이 되었다.
의주는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자격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은커녕 말도 나지 않았다. 이 자격 문제야말로 그 사이 흥선이 온갖 수단을 다 써 가면서 전후 좌우로 운동한 것이다.
은인(隱忍) 십여 년, 이제 바야흐로 떨어지려는 복덩어리를 온전히 붙들기 위하여는, 대원군의 자격 문제가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만약 흥선으로서 단지 왕친이라 하는 허명이나 탐하고, 일신상의 영화만을 꾀하려면 지금 여기서 결정된 그 의주는 그의 그런 야심뿐은 넉넉히 만족하게 하고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야심이 단지 자기의 일신상의 안일에 있지 않고, 자기의 커다란 손을 이 나라의 국정상에 펴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흥선에게 있어서는, 허영은 오히려 우스운 것이었다.
「왕의 생친의 섭정」
아직껏 전례가 없는 이러한 명목을 붙들고자, 일변으로 정 원용, 조 두순 등 원로 대신을 달래고, 위로는 이 결정권을 잡은 조 대비께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승낙을 얻은 것이었다.
대원군의 의주에 관해서는 대략 결정이 된 후에 이 전각 안은 잠시 고요하여졌다. 대원군의 의주가 너무도 어마어머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 발안자(發案者)인 조 두순도 오히려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라에는 두 임금을 두지 못한다 하나, 지금 결정된 의주로 보자면, 대원군의 대우도 또한 임금께 그다지 지지 않았다.
『아, 참 또 한 가지……』
잠시 침묵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이렇게 말하는 조 대비의 낯에는 분명히 흥분의 기색이 있었다. 무슨 의외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려는 것에 틀림이 없다.
『주상 전하가 유충합실 때에는 옛날 예로 말하자면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격식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한 노파―국사 다난(國事多難)한 이 때에, 나같은 무식한 노파가 청정을 하느니보다는, 전하의 생친 대원군이 섭정을 하는 것이 어느 편으로 보든간 상책일 테니깐 그렇게 하도록 마련하시오.』
드디어 터져 나왔다. 대비의 입에서 한 마디가 나오면 나오느니만큼 더욱 높아 가는 대원군의 지위였다. 이 전대 미문의 하교에, 원로 대신들은 미처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김 좌근이 먼저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좌일보 우일보로서 그의 사활이 작정되는 위급한 마당이매, 생명을 걸어서라도 반대하려고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 때는 벌서 때가 늦었다. 한 마디의 거탄을 내어 던진 뒤에 대비는 재쳐,
『별다른 이의(異議)가 없는 모양이니 그렇게 작정하도록 하시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파, 내전에서 주상전하의 어장성이나 보고 즐기고 있겠소이다.』
말을 채 맺지도 않고 여관들을 거느리고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어느 누가 반대를 한다든가 이의를 제출할 틈도 없이 혼자서 방안하고 혼자서 작정한 뒤에, 전광석화와 같이 내전으로 몸을 피하여 버렸다.
『몰락이다! 몰락이다!』
대비가 내전으로 들어간 뒤에 좌근은 혼자서 중얼중얼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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