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제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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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三[편집]

『이게 무슨 술 따르기냐?』

탁! 기생이 들어 바치는 술잔을 병기는 쳐 버렸다. 술은 좌우편으로 헤치며, 잔은 웃목으로 달아났다. 일족의 몰락, 눈 앞에 걸린 무서운 문제 때문에, 병기는 술을 먹어도 취하지를 않았다.

흥선 댁 도령의 승통―뒤이어 결정된 대운군의 의주―그 뒤를 따라서 대원군의 섭정 결정―전광석화와 같이, 그러나 또한 명쾌한 솜씨로 처리된 이번의 사건 뒤에 숨은 흥선군의 위력이라 하는 것을 병기는 비로소 알았다. 한 가지가 진행되고 두 가지가 진행될 동안 처음에는 단지 우연한 행복이 흥선에게로 떨어지거니 이만큼 보았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그 뒤에서 움직인 흥선의 거대한 손을 병기도 알았다.

김문 가운데서도 병기는 가장 노골적으로 흥선을 모욕하던 사람이었다. 자기의 모욕에 참다 참다 못해서 돌아서서 흔히 눈물을 짜 내던 과거의 흥선을 생각한 때에, 병기는 자기의 일족―적어도 자기뿐은 흥선이 권세를 잡기만 하는 날이면 당장에 그 보복을 받을 것을 예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감, 약주 안 드시고 무슨 생각을 하세요?』

기생이 다시 술을 부어서 권할 때에, 병기는 이번에는 나무람이 없이 받아 마셨다.

『자, 또 부어라!』

『네……』

또 한 잔―

『자, 또 부어라! 열 번만 연거푸 부어라!』

연하여 따르는 술을 연하여 열 번을 받아 마셨다.

『야 옥주야!』

『네?』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었다.』

『네? 대언군? 대언군이 뭐오니까?』

『상감의 아버님―흥선군의 작은도령이 나라님이 되셨다.』

『네? 참말이세요? 그럼 계월이한테 한 턱 잘 받아야겠구만요?』

―한 턱 아니고 백 턱이라도 받아라. 이 거대한 변화를 너희들은 단지 한 턱 받을 사람쯤으로 아느냐? 이 가련한 동물아―

―그렇다! 내일 운현궁을 찾아 가 보자. 어차피 몰락할 신분이거니, 내일 운현궁을 찾아서 대원군의 심중을 한 번 진맥해 보자. 아직 상감의 즉위식도 들지 못하고, 따라서 정식으로 섭정의 지위에도 서기 전에 이 편에서 먼저 그를 찾아서, 그 의향을 진맥해 보고, 그가 손을 쓰기 전에 먼저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자.

진퇴의 길, 여기 대하여 병기는 자진하여 흥선 대원군을 찾아 보기로 결심했다.

어젯밤까지도 발 아래로도 보지 않던 흥선이로되, 오늘날은 이 나라의 생살 여탈권을 한 손에 잡은 권위의 정이었다. 저 편에서 무슨 행동을 취하기 전에 먼저 이 편에서 찾아서, 그 때의 경우를 보아서, 만약 머리를 수그릴 필요가 있으면 숙일 것이고, 숙인대야 쓸 데가 없으면 고요히 자기의 운명에 복종할 것이고―이렇게 마음먹고 병기는 이 위급한 마당에 흥선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옥주야!』

『네?』

『너도 이제부터는 흥선군께 수청을 들어야겠구나?』

어제까지 총애하던 기생들조차 내일부터는 자기를 버리고(전날 그렇게 눈 아래로 깔보던) 흥선에게로 달려갈 것을 생각할 때에는, 병기는 질투 비슷한 감정조차 일어나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영창에 달빛이 비치었다. 만월의 밝은 빛―그것은 마치 장차 빛나려는 흥선의 빛을 예언하듯이 교교한 빛을 영창 위에 던지고 있다.

흥선 댁―운현궁에 병기의 방문, 이것은 과연 의외의 일이었다.

병기가 운현궁에 흥선을 찾은 때는 흥선은 의복을 정제하고 단연히 아랫목 보료 위에 앉아 있을 때였다.

『아, 대감이 이런 누추한 집에를 어떻게 행차하시오?』

벌써 말투도 이전과 달랐다.

『이번의 경사를 축하하러 왔읍니다.』

『감사하외다. 우연히 굴러온 복―흥선에게는 너무 과하외다. 자, 날이 추운데 이리 내려와 앉으시오.』

흥선과 병기는 대좌하였다.

병기는 푹 머리를 수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흥선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천려 만사, 가슴에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렴인지 눈까지 굳게 감고 있었다.

드디어 흥선이 눈을 떴다.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몸을 틀어서 문갑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꺼내었다.

『대감!』

『불러 계십니까?』

『이것을 대감께 선사하리까?』

명랑한 웃음 아래서 흥선은 문갑에서 꺼낸 물건을 병기에게 내밀었다.

『그게 무엇이오니까?』

『호박갓끈!―사 년―오 년 전인가, 대신 생신연에 내가 대감께 빌러 들어갔을 때에, 대감은 내게 안 빌려 주셨지만 오늘은 내가 하나 대감께 선사하리까?』

병기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그러나 이런 막다른 곳에 임하여 병기는 자기의 호담한 성격을 회복하였다. 병기는 여기서 한 번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허! 만약 대감께 오늘날이 있을 줄 그 때 알았더면, 천 백 개의 갓끈이라도 드렸을 것을, 병기 불민해서 선견의 명이 없기 때문에 오늘 대감께 이런 조롱을 받습니다.』

이 대답에 흥선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도리어 병기의 이 대답을 장쾌하게 여기는 듯이 병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병기가 말을 이었다.

『대감! 오늘은 나 같은 몰락인은 대감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주시는 갓끈을 감사히 받겠읍니다.』

흥선의 얼굴에서 차차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엄숙한 기분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흥선이 입을 열었다.

『대감!』

『네?』

『사사 감정으로 일국의 정사를 좌우해서는 안 될 일―내가 대감께 대해서 품은 사혐이 적지 않을 줄은 대감도 짐작하시겠지요?』

『처분만 기다리옵니다.』

『안심하십시오. 사혐으로 정사를 좌우할 흥선이 아니외다. 지금 조야를 둘러 보아야, 국가 다난하고 인재 부족한 이 때에, 대감 같은 인물을 거저 버려 둘 수 없으니, 아무 근심 말고 기다리시오. 무재 무력한 흥선이 이제 장차 국사를 조리할 때에는 대감 같은 인재의 협력이 없어야 어찌 다하리까? 아무 염려 마시고 하회 있기만 기다리시오.』

의외의 말에 병기는 눈을 들어 흥선을 쳐다보았다. 온화하고도 엄숙한 표정―아직껏의 전례로서 한 개의 세력이 서게 되면 먼젓번의 세력은 반드시 박멸을 시키는 것이어늘, 자기의 맞은편에 단연히 앉아 있는 이 인물(어제까지도 한 개의 비루한 인물로 밖에는 보지 않던)은, 어떤 심산을 가졌길래 적지 않은 위협을 진 자기에게 대하여 이런 관대한 처분을 내리나?

이 집 문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역시 별다른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병기지만, 갑자기 자기의 마음에서 생겨 나서 자라는 흥선에게 대한 위포와 존경의 염을 병기는 스스로 금할 수가 없었다.

『대감!』

이윽고 병기가 눈을 흥선에게로 굴릴 때에는, 병기의 얼굴에는 공손의 표정이 뚜렷이 나타났다.

『무엇이라 올릴 말씀이 없읍니다. 그러나 대감께서는 그렇듯 관대히 마음을 잡수시지만, 대비전마마께서 어떤 처분을 내리실지 알 수 없읍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 사이 권력을 천단하고 조 대비께까지 감히 하지 못할 짓을 함부로 한 그들인지라, 대비가 자기네의 일족에게 대하여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잘 알았다.

흥선이 빙긋이 웃었다.

『대감도 꽤 소심하시오.』

그렇게 소심하면 어떻게 이전과 같은 대담한 일을 하였느냐는 풍자였다.

『대감, 생각해 보시오. 섭정은 이 나 흥선이외다. 아무리 대비전마마라도 섭정을 넘어서서 처분을 내리시지 못하실 줄은 대감도 짐작하실 바, 무슨 별다른 걱정을 하시오?』

『그렇지만……』

대비에게서 명령이 내릴 때에도, 능히 거기 거역하고 자기네를 보호하여 줄 수 에 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아무 근심 말고 흥선을 믿으시오. 든든한 배를 탄 것같이 마음을 턱 놓고 흥선만 믿으시오. 아직껏은, 대감네들은 흥선을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흥선은 대감네들이 생각하시는 바와는 좀 달라서, 인정의 움직임을 볼 줄 아는 사람이외다. 행하지 못할 일을 장담할 경박한 사람이 아니외다. 흥선이 한 번 장담한 이상에는, 그럴 만한 자신이 있기에 하는 일이니깐 대감의 운명을 내게 맡기고 얼마만 더 기다리시오.』

무슨 자신이 있는 것과 같이 이렇게 장담하는 흥선을, 여기는 거의 하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우러러보았다.

좀 있다가 대궐에 들어가서 대비께 뵙고 병기의 사건을 주선하기를 흥선은 병기에게 약속하였다. 그 대신으로 병기가 돈 십만 냥만 희생하여 용동궁(龍洞宮―조 대비 사무궁―본시는 동궁 사무궁)에 부치라는 것을 권고할 때에, 병기는 혼연히 이를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겁고도 증오와 반감으로 찬 마음으로 흥선의 집을 찾았던 병기는, 거기서 나올 때는 그 불쾌한 기분을 다 삭였다, 그리고 가볍게, 흥선에게 대한 존경과 애모의 염을 가득히 품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병기는 여기서 아직껏 자기네들의 상식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온전히 타입이 다른 인물을 보았다. 동시에 그 인물이 바야흐로 펴려는 커다란 손을 보았다. 사람의 감정으로 말하는, 아직껏의 전례로 말하든, 당연히 원심을 품고 자기네를 박멸하기에 온 힘을 다 하여야 할 흥선이, 그와는 단연 반대로 도리어 나아가서 대비께 알선까지 하여 자기네들을 구원해 주려는 것을 볼 때에, 병기는 거기서 단순히 「관대심」이라든가 「동정심」이라든기 「온정주의」라든가 하는 것 밖에,

「사사로운 위혐보다는 더욱 큰 사업이 이 세상에 있으며, 그 사업을 위하여서는 구구한 사혐은 잊어버려야 한다.」는 위대한 마음을 보았다.

그 흥선의 큰 마음을 보고, 돌이켜서 아직껏의 자기네들의 단지 사욕 채움을 위한 암투며 살육이며 책동 등을 생각할 때에, 병기는 스스로 얼굴이 훅훅 다는 것을 금치 못하였다.

본시 어리석지 않은 병기―어리석지 않기에 또한 흥선은 그 인물을 아끼어 사혐을 모두 잊고 병기의 조명(助命)을 대비전에 품하려 하는 것이다―는, 이제 바야흐로 펴려는 흥선의 거대한 날개를 오히려 많은 호기심과 존경의 염으로 바라보고, 흥선으로서 병기를 부르기만 하면, 부족하나마 한 팔의 힘을 돕기를 아끼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병기와의 약속을 이행하고자, 오후에 흥선은 대궐에 들어갔다. 지금의 회견은 가난한 종친과 대비와의 회견이 아니었다. 섭정 국태공 대원군 저하(邸下)와 대왕대비전하 조 씨의 회견이었다.

『대감, 김가들을 어떻게 처치하시렵니까?』

벽두에 대비께서 김씨에 대한 말이 나왔다. 대비에게 있어서도 원한 사무친 김씨 일문, 「김씨」도 아니요, 「김가」였다.

『네, 거기 대해서도 어떤 하교가 계시올지 듣잡고자 입내하였읍니다.』

대비는 한 순간 말을 끊었다. 준비하였던 말을 꺼내려는 예비 행동이었다.

『한 가지 길―대감, 그 사이 김가들한테 수모를 받은 생각을 하면 치가 떨립니다. 왕실의 계통이 얼마나 존엄한 것이관대, 외람되이 김 수근, 김 좌근배(金洙根金左根輩)가 주둥이를 디밀어서……』

십 사 년 전, 인손이를 제해 버리고 대행왕을 강화에서 모셔 온 일에 대한 노염이었다. 흥선은 황공히 머리를 조았다.

『황공하옵니다.』

『또 이 하전 옥사에, 소위 대비(헌종 홍씨)가 몸소 금부에 옥초를 보았다니,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고 담이 서늘해집니다.』

『황공하옵니다.』

『이런 흉적을 대감께서 잘 처분하셔야겠소이다. 고 혜당 김수근(故惠堂金洙根)은 관을 꺼내어 참시(斬屍)를 하고 병학, 병국은 절도에 원배를 보낼 것이고, 하옥 김좌근은 선마마(선조비 김씨)의 동기이니 삭관이나 하고 생명은 그냥 두지만, 병기는 파양 원배(破養遠配) 후에 사사(賜死)를 하는 것이 지당할 줄 생각합니다.』

당연한 처분이었다. 이전과 같으면 이러한 처분은 당연한 것으로서, 지금 김씨 일문들도 그만한 각오는 하고 있을 것이었다.

듣기를 끝내고 흥선은 한참 있다가야 머리를 들었다.

『대비전마마!』

흥선의 눈에는 눈물이 그득히 괴었다.

『지당하신 처분이옵니다. 마마의 흉중도 모르는 바가 아니옵니다. 신도 김씨들에게 대해서 마마께 지지 않는 원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옵니다. 그러나 마마……』

눈에 그득히 눈물을 머금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뚝뚝한 어조로 말하는 흥선의 말에는 진심미가 있었다.

『김씨 일문을 극형에 한달사, 대비마마 생존 중에는 태산과 같이 동요가 없겠읍지만, 마마 천세 후의 일을 생각할 때에는 신은 가슴이 저리옵니다. 지금 궁중 부중을 막론하고 모두가 김씨들에게 신세진 자들…천 명이고 만 명이고 그 종자를 잔멸시키자면 여니와, 그렇지 못하면 불행히 마마 천세하오신 후에는 누가 김씨의 남은 뿌리를 대적하리까? 주상 전하도 전하려니와, 마마의 애질(愛姪) 성하, 영하(寧夏)는 그 때 누구를 힘입으오리까. 마마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지만, 후일의 성하, 영하를 생각합셔서 관대한 처분 계시오기를 바라옵니다.』

반박할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흥선이 다시 가로막았다.

『마마, 흥선은 자기의 힘을 아옵니다. 흥선의 앞에선 김씨들은, 봄날의 눈과 같이 자멸의 길을 취할 밖에는 다른 길이 없사옵니다. 관대한 처분이 계실지라도 김씨 일문은 스스로 몰락이 될 것이옵니다. 마마께서 흥선을 믿읍시고 흥선에게 대권을 주신 이상에는, 흥선의 말씀을 좇으시와 관대한 처분이 계시오면, 한 편으로는 마마의 덕을 김씨에게 내리심이 되오며, 또 한 편으로는 후일의 덕행의 표본이 될 것이오매, 잠시 노염을 잊읍시고 놔대한 처분 줍시기를 바라옵니다.』

이 이치 정연한 흥선의 의견에는 대비도 더 반대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대비가 말하였다.

『그럼 김가에게 대해서 대감은 어떤 처분을 주실 의향이외까?』

『신의 소견으론 이렇게 했으면 좋을까 하옵니다. 신 본시 낙척 시대에 병학, 병국 형제의 신세를 적지 않게 졌읍니다. 금수도 또한 은혜를 알거든 만물의 영장이 어찌 잊으오리까? 신의 면을 보셔서 병학, 병국 형제를 그냥 관에 머물러 두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하옥 김 좌근은 아무리 순원왕후마마의 동기로되 무능한 노물에 지나지 못하옵고, 그 위에 하옥의 배후에는 독부 양씨가 있사오니, 실직(實職)을 깎으시고 원로의 열(元老列)에나 그냥 두는 편이 좋을까 생각하옵니다. 또 혜당은 이미 죽은 사람을 참시나 해서 무얼 하리까? 막론하시옵소서. 또 병기는……』

흥선의 얼굴에는 빙긋이 미소가 돌았다.

『신, 병기에게 대해서는 잊지 못할 원혐이 있읍니다. 병기의 재간으로 보자면 공위(公位)에 두어도 부족이 없는 인물이로되 신의 사혐 또한 잊기 어려우오니, 당분간은 관을 깎고 고향 여주로 내려가 있게 하였다가, 기회를 보아서 중경(개성)이나 강화(江華)나 광주(廣州)나 어느 중요한 곳의 유수(留守)쯤으로 보내오면, 덕은 덕대로 베풀고, 인물은 인물대로 쓰고, 원혐은 원혐대로 갚는 최상지책이 아닐까 하옵니다.』

예사로이 하는 말이로되, 음성이 굵은 흥선의 말인지라 전각이 드렁드렁 울리었다.

『대감 좋으실 대로 헙시오.』

대비는 이렇게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취임을 안 하였지만, 이미 작정된 섭정 국태공―흥선의 의견은 이젠 대비의 권병으로도 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대감 맏도령도, 무슨 요긴한 자리를 하나 마련하셔야겠구료.』

『네, 승후관 한 자리나 마련되면 다행일까 하옵니다.』

이것은 대비에게는 의외의 대답이었다.

『승후관이란? 그래도 그럴 듯한 자리를 하나……』

『그 애 본시 명민하지 못하와, 높은 자리에 두면 도리어 자리를 더럽힐 근심이 있읍니다. 전하의 동기라고 자격이 없는 높은 지위를 맡기는 것은 정사를 흐리게 하는 일―흥선이 섭정으로 있는 동안은 일호도 사사의 정의로써 사람을 좌우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이것은 벌써 옛날부터 생각한 바옵니다. 만약 그 애가 마마의 애질 성하만큼만 명민할 것 같으면, 자식에게 대한 어버이의 마음이 왜 높이 등용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이후 대비가 무리하게 사람을 추천할 때가 있으면 그 때에 대한 방비선인 동시에, 또한 재래의 관습을 깨뜨려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자기의 정견을 대비께 내어 비침이었다.

대비의 조카 성하를 상당한 자위에 등용하겠다는 것을 약속하여, 흥선은 대비의 마음을 얼마만큼 흡족하게 하였다.

김 좌근, 병학, 병기, 병필 등 김족의 지금의 거대한 재산은 모두 학정에서 얻은 것이니, 속죄하는 뜻으로 매명에 몇십만 냥씩 거두어 상납하게 할 터이니, 용동궁에 붙여서 대비의 사용에 쓰라고 하여, 대비의 마음을 물질적으로도 흡족하게 하였다.

대비께 하직을 하고 창덕궁에서 나올 때에, 흥선은 지금 바야흐로 커 가는 자기의 위력을 새삼스러이 통절히 느꼈다.

그 사이의 빈곤 때문에 영양 불량으로 장작개비같이 빼빼 마른 자기의 손을 관복 소매 밖으로 내밀어 물끄러미 굽어 볼 때에, 흥선은 이제 이 장작개비 같은 손아귀의 안으로 들어올 거대한 그 무엇을 생각하고 빙긋이 웃었다.

대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흥선은 영초 김 병학의 집을 찾았다.

흥선에게 대하여 그다지 혹독한 일은 한 일이 없으나, 역시 김족의 한 사람으로 전전긍긍히 처분만 기다리고 있던 영초는 망지소조하여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맞았다.

『대감! 이전 대감의 은혜를 갚을 날이 오늘에야 왔소이다.』

흥선이 영초에게 허리를 굽히며 이렇게 말할 때에 영초는 땅에 머리를 조았다.

이전과 같은 「상갓집개」가 아니요, 지금 웃사람의 지위로서 이 집을 찾을 때에 흥선은 감개 무량하였다.

『대감! 이젠 어느 설 때 보내 주신 세찬―그 날의 은혜는 흥선 죽을지라도 잊을 수가 없소이다.』

내일 모레면 섣달 그믐이라 대목께, 팽경장의 집에서 참지 못할 수모를 받고 쫓겨 나와서, 갈 데가 없어서 바람 찬 종로의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지나가던 영초에게 발견이 되어 영초의 집으로 끌려 가서 적지 않은 대접도 받았거니와, 더구나 많은 전곡을 보내 주어서 무사히 과세를 하게 한 그 날의 고마움은 흥선의 마음에 아로새겨져서 잊지 못할 일이었다.

『원한은 기억할 필요가 없으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외다. 그 날의 은혜 이제 갚을 날이 있으리라.』

흥선은 감연히 이렇게 말할 때에, 영초는 황공하여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였다.

여기서 흥선은 영초에게, 김문에 대한 조 대비의 처분을 말하여 주었다.

―조 대비는 김문에게 대한노염이 매우 커서 모두 극형을 엄명하였지만, 겨우 주선을 하여서―

一, 김 좌근은 영의정을 사퇴하고 단지 상신에 머물러 있을 것.

一, 병기는 당분간 근신하는 뜻으로 시골이라도 내려가 있으면 장차 다시 부를 기회가 있을 것.

一, 병필은 실직을 사퇴할 일.

등등으로 낙착이 된 것을 말하고, 병학, 병국의 형제는 이전의 은혜도 있으니, 조정에 머물러서 흥선 자기를 협찬해 줄 것을 아울러 부탁하였다.

전대 미문의 은전(恩典)이었다. 이런 관대한 처분을 뜻도 하지 않고 있던 병학은, 혼연히 이 은전을 자기네의 일족에게 알게 하여, 대감의 주선이 덕을 보답하기로 약속하고, 아울러 우둔하지만 대감의 앞에서는 견마의 노를 아끼지 않기를 맹세하였다.

길까지 따라 나오면서 전송하는 영초와 작별을 하고 흥선은 다시 교군에게 명하여 조 두순의 집으로 갔다.

『이번 주상 전하 영립에 대하여 많이 노력하심을 감사하러 왔읍니다.』

이렇게 흥선이 인사할 때에, 근엄한 조 두순은 자리를 물러 앉아 절하며 국태공 흥선군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대비의 어의로 영의정 김 좌근은 퇴직을 하고 그 뒤를 조 두순이 올라서서 영상의 직을 받기로 내정되었으니, 그만큼 알아 두고 그 준비를 하여 두라고 부탁하였다.

모든 일은 이제 명년(갑자년) 정월 주상 전하의 즉위식이 지난 다음에야 구체적으로 결정이 될 서이지만, 지금 내정된 것으로 그만큼 되었으니 그렇게 알아 두라는 것이었다.

조 두순의 집에 서나와서는 정 원용의 집에도 잠시 들렀다. 그리고 거기서도 주상 전하 영립의 공로를 감사하고 정 원용의 아들 기세(基世)는 대비의 분부로 병조판서로 내정이 되었으니 그만큼 알아 두라고 당부하였다.

흥선이 원용의 집에서 운현궁으로 돌아온 때는, 겨울의 짧은 해가 다 가고 꽤 어두운 때였다.

불안(不安)의 계해년 섣달이었다.

상감이 갑자기 승하였다. 그 후사가 없었다.

누구? 누가 될까?

모두들 이러한 마음으로 하회를 기다릴 동안, 의외 천만으로 흥선의 아드님이 이십 육대의 조선 군주로 옹립이 되었다.

이 의외의 일에 딱 벌렸던 입이 닫히기도 전에 뒤따라 더욱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흥선이 섭정이었다.

그 족보로 따지자면 당당한 종실의 공자지만, 영락되고 영락되어, 기생집 아랫목이나 지키고 투전판이나 찾아다니던 흥선이었다. 그 흥선이 한 번 뛰어서 국태공이 되고 두 번 뛰어서는 왕의 왕이 되었다.

그 너무도 급속한 변화에 누구 한 사람 크게 반대하여 볼 겨를이 없었다. 너무도 의외의 변화에 반대성을 올리려고 할 때에는, 벌써 한 걸음 더 뛰어 올라가서, 반대성이 이르지도 못할 높은 자리에서 위연히 굽어 보는 흥선이었다.

한 번 뛰고 두 번 뛰어서, 이런 높은 지위에 올라갔거니, 그 첫 행정으로서 원한 많은 김씨 일문을 잔멸시키려니, 누구든 이렇게 믿었다.

그러나 흥선의 김씨 일문에게 대하여 한 손가락도 대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까닭?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장래의 일격을 준비하는 예비 행동인가?

혹은 섭정공의 세력으로도 김문의 힘은 능히 꺾지 못함인가?

무거운 기분에 잠긴 계해년 섣달이었다.

아직 국왕의 즉위식도 들지 못하였다. 따라서 흥선도 정식으로 섭정의 자리에 서지 못하였다.

흥선은 일체로 침묵을 지켰다.

그런지라, 다만 불안에 싸일 뿐, 누구라 장래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흥선으로서 만약 이제도 보통인의 생활을 했으면, 그 생활로 미루어서 장래를 추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너무도 변화 많은 생활을 보낸 사람이라, 그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하늘밖에는 알 이가 없었다.

김문뿐 아니라 정부의 백관은 모두 전전긍긍하였다. 이제 이 해가 지나고 새 해, 흥선이 섭정의 위에 정식으로 앉게만 되면, 어떻게 세상이 뒤집힐지 알 수가 없으므로 마음을 놓을 사람이 없었다.

위로는 의정부 삼공에서부터 아래로는 자사차역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인사 변동이 없었다.

전례로 따져 보자면, 한 개의 세력이 꺾이고 다른 세력이 들어설 때에는, 한 번 뒤집어 놓은 듯이 모두 변하였는지라, 지금 한 사람의 이동도 없는 것이 더욱 무시무시하였다.

단지 승후관 조 성하가 정삼품 통정대부 우승지(正三品通政大夫右承旨)로 승차하고, 상감의 백형 재면이 새로이 승후관으로 임명된 뿐, 영의정 김 좌근 이하 한사람도 아직 이동이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안정」 때문에 모두 모이면 수군수군하였다.

돌아가는 말로서는, 이제 상감이 등극하고 대원군이 정식으로 취임하게만 되면 당일로 김씨 일문의 수령 삼십여 명을 한꺼번에 참하라는 밀령을 대비에게서 받고, 흥선은 극비밀리에 그 준비를 하고 있다 하여, 가이나 불안한 공기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어제까지는 한 개의 거리의 부랑자에 지나지 못하던 흥선의 지금 일동 일정 일거수 일투족은 온 조야의 주의의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흥선은 흥선으로서 아무 의견도 입 밖에 내지 않고 다만 정관하고 있었다. 섭정 태공의 자리를 정식으로 잡는 날을 고요히 기다리며―

흥선 댁―아니 지금은 운현궁―에는 차차 사람의 출입이 빈번하여 갔다.

이전의 술 친구, 기생집 동무, 투전 친구들도 모두 새 옷을 구해서 떨쳐 입고 운현궁을 찾아와서 하의(賀意)를 올렸다.

원로 대신들도 남녀도 연하여 운현궁 문에 드나들었다. 이전에는 한낱 부랑자로 인정하고 자기 집으로 찾아올 지라도 들이지 않던(지벌과 가품을 자랑하는) 명문 거족들도, 모두 서로 앞을 다투어 운현궁으로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처하여 그들을 응대하는 흥선의 태도―그것은 과연 보는 사람의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폐의 파립―얼굴에는 늘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먹을 것을 만나면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달려들던 흥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흥선은 어떤 사람인가?

『하하하하! 내가 무얼 하오?』

호기롭게 그가 소리쳐 웃을 때는, 그 웃음 소리는 능히 만인의 머리를 숙어지게 하였다.

야위고 창백한 얼굴이지만, 한 번 그 눈을 크게 뜰 때는 등골로는 소름이 쭉 끼쳤다.

천연히 구비된 위풍―일조 일석에 배우거나 스스로 짓지 못할, 그것은 왕자의 위엄이었다.

눈을 고요히 감고, 고요한 말로 하는 한 마디의 명령이라도, 앞에 있는 사람은 마음이 송구하여져서 저절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위풍―그것은 결코 배우거나 연습하여서 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본시 그런 천품을 타고 나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위엄이었다.

대사가 결정된 이후에는 한 번 흥선을 찾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흥선에게 복종하기를 맹세하였다.

이 패기, 이 위력, 이 압력, 이 지배력, 이 통찰력 이래 반항을 하거나 대항을 할 만한 용기를 가져 본 사람이 없었다.

흥선의 이 위력과 압력을 봄에 따라서, 현하의 정계의 암류(暗流)는 더욱 불안하고 무시무시하였다. 한 번 손을 들 때에는 어떤 일이든 결행할 만한 흥선의 위력과 담력을 차차 이해함에 따라서, 장래에 생겨날 참극을 생각하고 모두 전전긍긍하였다.

조 성하는 만날 운현궁을 떠나지 않고 흥선을 모셨다.

흥선의 도령이 보위에 오르기만 하면, 좀더 높은 자리를 예상하고 있던 성하가, 겨우 정삼품에 머문 것은 약간 불만하기는 하였지만, 흥선의 인물을 이미 안 성하는 표면에까지 그 불평을 나타내지 않았다. 장래 자기의 수완만 있으면 얼마라도 올라갈 길이 남아 있으며, 더구나 흥선이 자기의 맏아들도 겨우 승후관의 지위에 갖다놓고, 서자 재선(庶子 載先)은 그냥 야(野)에 머물러 두게 함에 비추어서 자기의 정삼품이라 하는 지위에 불평을 말할 수가 없었다.

성하도 고요히 기다렸다. 어서 이 며칠 남지 않은 계해년이 다 가고, 새 해가 이르러서 눈을 뜬 사자의 포함성을 들어 보고자―

어떤 포함성이 나오나, 그 사이 십 수 년 간을 은인하고 은인하여 가면서, 닦고 라고 궁리하고 세운 이 사자의 계획은 어떤 것인가고―그 때의 빛나는 우렁찬 날을 생각할 때에, 젊은 성하는 가슴이 들먹거리는 것을 금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또한 그 우렁찬 날에 한 개의 역할을 맡아서 할 사람임을 생각할 때에, 희열과 만족감과 긍지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계해년은 고요히 고요히 저물어 흘러갔다.

그 며칠 사이에 소위 「속죄(贖罪)하기 위한 상납」이라는 명목으로서 김씨 일문에서 내어 놓아서, 흥선의 손을 통하여 용동궁에 갖다가 붙인 금액이 합계 구십여 만 냥이었다.

그 어떤 날 흥선은 갑자기 하옥 김 좌근을 찾았다.

『대원군 전하께서 행차하셨읍니다.』

하인이 이렇게 아뢸 때는, 하옥은 양씨의 집 내실에서 양씨와 마주 앉아서 시골로 내려갈 의논을 하고 있던 때였다.

하옥은 허둥지둥 일어섰다.

『무얼 하러 왔을까?』

이전 같으면 흥선 따위는 올지라도 눈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을 하옥이로되, 지금은 몸을 벌벌 떨면서 황황히 일어나서, 양씨에게는 눈짓을 하고 사랑으로 뛰쳐 나왔다.

『대감께 주상 전하 옹립에 대한 감사를 드리러 왔읍니다.』

이렇게 말할 때에 흥선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너무나 명랑한 미소였는지라, 호인 하옥은 이것을 조소(嘲笑)로 알지 못하였다.

『천만에, 대감 어떻게 이런 누추한 집에를 왕림하셨읍니까?』

『네, 대비전마마의 하교가 곕셔서……』

하옥은 눈을 들어서 흥선의 얼굴을 우러러보았다.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과 같은 심정으로―

『어떤 하교오니까?』

여기 대해서 흥선은 즉시 대답치 않았다. 머리를 수그리고 말하기가 매우 거북한 듯이 두어 번 코를 울렸다.

그런 뒤에야 입을 열었다.

『대비전마마꼡서, 대감 작은마마(양씨)를 불러 곕시는데요.』

의외의 말이었다. 하옥은 낭패하였다. 머리를 들었다가 도로 수그렸다. 수그렸다가 도로 들었다.

『왜 부릅시는지 알 수 없겠읍니까?』

『글쎄올씨다―한데 대감 이상한 말을 묻습니다마는, 대감 댁 작은마마가 그―저……』

말하기가 매우 거북한 모양이었다.

『언제, 그…저…그 대감께 폭행을 한 일이 있습니까?』

하옥은 번쩍 머리를 들었다. 대답은 못하였다. 망지소조하여 들었던 머리를 좌우로 휘둘렀다. 대답은 못 지하였지만, 그런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순원왕후 전하의 동기되시는 귀인께 외람되이 하향 전비가 폭행을 했다고, 대비전마마의 노염이 여간 크지 않습니다.』

엉뚱한 거짓말을 지어서 하옥을 위협하는 흥선이거니, 속으로 하옥의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꼴이 우습기가 짝이 없었다.

『대감, 살려 줍시오.』

몇 마디의 위협을 더 받은 뒤에 하옥의 입에서는 드디어 탄원성이 나왔다.

『대감만 믿습니다. 대비전마마께 잘 말씀드려서, 모면하도록 해 줍시사. 대감만 믿습니다. 아무런 노릇이라도 대감 처분대로 할게―』

이리하여 여기서는 한 개의 상의(商議)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상의는 하옥이 십만 냥, 양씨가 이십만 냥을 용동궁에 상납을 하고, 그 대신 벌을 모면시키도록 주선하기로 낙착이 되었다.

『대비전마마! 하옥 김 좌근이 용동궁에 삼십만 냥을 상납하겠다 하옵니다. 김가의 행실을 보자면 괘씸하기 짝이 없으되, 훗날을 생각합셔서 이것으로 좌근의 죄는 용서해 줍시기를 바라옵니다.』

흥선이 삼십만 냥의 어음을 대비의 앞에 내어놓고 이렇게 빌 때에, 대비도 명랑히 웃으면서 이를 승낙하였다.

피비린내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흥선은 이편 저편으로 돌아 다니며 알선하였다. 만약 흥선의 알선만 없었더면, 김씨들은 모두 참몰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동안 조 두순, 김 병학 형제 등은 자주 운현궁에 왔다. 그리고 조 두순이나 김 병학이 온 때는 흥선은 조 성하까지 멀리 하고 밀실에서 의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결과로 정부 대신들도 대략 작정이 되었다.

영의정 조 두순(領議政 趙斗淳)

우의정 김 병학(右議政 金炳學)

좌의정 결원(左議政 缺員)

삼공은 이러하였다. 그 아래로는 또한 이와 같았다.

이조 판서 김 병학 겸섭(吏曹判書 金炳學 兼攝)

―후에 이 의익(李宜翼)이 정식으로 맡음.

호조판서 김 병국(戶曹判書 金炳國)

병조판서 정 기세(兵曹判書 鄭基世)

선혜당상 이 승보(宣惠堂上 李升輔)

좌포도대장 이 여하(左捕盜大將 李景夏)

우포도대장 신 명순(右捕盜大將 申命純)

금위대장 이 장렴(禁衛大將 李?濂)

어영대장 이 경우(御營大將 李景宇)

총융사 이 방현(總戎使 李邦玄)

그 밖에 각조의 참판 이하로는 남인과 북인과 소론을 많이 기용하기로 하였다. 아직껏 정부의 요로에 선 사람은 모두 노론파(老論派)로서, 소론?남민?북인은 모두 낙척하여 겨우 그 날 그 날의 생명이나 유지해 가던 것이었다.

흥선은 이 실의(失意)의 남인?북인 가운데서 인재를 추려 내어서 당연히 정부의 요직에 가져다 놓기로 하였다.

『주상 전하 즉위의 예가 지난 뒤에 발표할 것이지. 그 전까지는 대감의 마음에 깊이 잡수시고 발설하지 마시오.』

흥선은 조 두순에게 이렇게 당부하여 두었다.

남인?북인뿐 아니라 정부의 요직에는 절대로 오를 자격이 없던 중인, 관속들도 많이 등용하기로 내정하였다.

소론이며 남인, 북인은 역시 양반의 꼭지인지라 별 말이 없었지만, 중인, 관속들을 등용하는 데 대해서는 격식을 존중히 여기는 두순은 반대의 뜻을 표하였다.

그러나 두순의 반대쯤으로 굽힐 흥선이 아니었다.

『인재면 상놈일지라도 높이 쓸 것이고, 무능하면 임금의 형일지라도 승후관 이상은 주지 않는 것이 내 주장이외다.』

얼굴에 미소를 띄고 이렇게 말할 때는 조 두순도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모든 준비는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화살은 이미 메어졌다.

줄도 당겼다. 이제는 손을 놓아 준다는 과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성하, 어떤가? 옷이란 무서운 것―폐의 파립 때의 흥선과 금옥 탕창의 흥선과 보기에도 좀 다르지?』

하하하하 웃으면서 이런 농담을 던지는 흥선의 양 눈썹 사이에는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어서, 앞에 있는 자로 하여금 저절로 위압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천 희연, 하 정일, 장 순규, 안 필주―소위 천하장안의 네 사람은 벌써 일찍이 흥선의 영을 받고 시골로 제각기 헤어져서 내려갔다. 각 방백 수령들의 행장을 비밀리에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이전 낙척 시대에는 기생방 친구―권세를 잡은 지금에 있어서는 심복 궁리였다. 이리하여 장래의 일격을 준비함에 추호도 미비함이 없도록 만반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폭풍우를 준비하는 여름날 저녁과 같이 고요하고도 움직임이 없는 외양이었지만, 그 속에서는 장래 세상을 놀라게 할 무서운 폭풍우가 가장 규칙적으로, 가장 계획적으로, 가장 정세하게 착착 진행이 되고 있었다.

제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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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