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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제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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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

[편집]

낡은 것은 다 물러가고 새로 잡히는 갑자년 정월 초이튿날―

이전 같으면 비록 정월이라 할지라도 몇 사람의 종친이나 술 친구밖에 찾는 사람도 없던 흥선의 집이로되, 이제는 섭정 태공의 거궁으로서 초하룻날 이른 아침부터 이튿날 저녁인 이 때까지, 문안 오는 무리가 뒤를 따라 이르렀다.

그것을 대충 치르고, 흥선은 내실로 들어갔다.

흥선이 내로 들어설 때에, 마침 웬 처녀가 하나 와 있다가 황급히 발치로 물러 앉았다.

흥선은 아랫목에 자리를 잡으면서 처녀를 바라보았다. 낯 익은 처녀였다.

『저 애가 누구더라.』

부대 부인이 거기 대하여 대답하려 할 때에, 흥선은 자기의 기억 가운데서 그 처녀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오오, 민 생원 댁 처자로구나! 그렇지?』

『네.』

부대 부인과 처녀가 동시에 대답하였다.

처녀는 민 치록의 딸―얽은 소녀였다.

『음, 너 몇 살이더라?』

『새해에 열 네 살이 잡힙니다.』

『천애의 고아―적적하지 않느냐?』

소녀는 적적한 미소를 얼굴에 띄었다.

『어떠냐? 너의 오빠(양오라비 민 승호―부대 부인의 동생)와의 사이의 의는 좋으냐?』

『네, 퍽 귀여워해 주십니다.』

『그러려니!』

흥선은 잠시 말을 끊고, 이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영특한 소녀의 눈찌―비록 한두 점의 얽은 자리는 있으나, 얌전하고 슬기롭고 영리한 얼굴이었다.

『글도 배우느냐?』

『네, 오빠한테 소학도 다 떼고……』

『그리고?』

『이즈음 「좌씨전(左氏傳)」을 조금씩 읽습니다.』

『좌전을 읽는다? 그래 알아보겠더냐?』

『모를 것이 너무 많아서, 오빠께 꾸중을 늘 듣습니다.』

흥선은 담뱃대를 끌어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 모금 뻐근하니 빨고, 그 푸른 연기와 얼굴 앞에 어리는 가운데로 흥선의 말이 새어 나왔다.

『계집이란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온순해야 하느니라. 승호를 양오빠로 여기지 말고 친동기로 섬겨라. 천애의 고아 승호―한 사람밖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지 않으냐? 어 참, 계집으로 태어난 이 아깝군!』

부대 부인이 흥선의 말에 응하였다.

『집안을 얘기 통 혼자 도맡아 살핀답니다그려. 아직 다른 집 계집애 같으면 각시놀이나 하고 있을 나이에……』

『영특하게 생겼소.』

『기박하고 가련한 팔자를 타고났지. 양가로는 친척도 있지만 친편으로는 제일 가깝대야 육촌 칠촌이지, 가까운 일가도 없이 불쌍한 아이외다.』

『응, 자주 오빠와 함께 집에 놀러 오너라.』

그러나 입으로는 이런 말을 하나, 흥선은 속으로는 이 소녀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까운 일가도 없다. 참 가엷어라!』

혼잣말 비슷이 이렇게 한 번 더 중얼거리고 다시 생각난 듯이 담배를 빨았다.

그 소녀는 밤에야 양오라비 승호와 함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대 부인은 소녀가 타고 갈 가마까지 빌려 주었다.

흥선의 둘째도령―지금은 감히 그 휘(諱)조차 부를 수가 없는 지존은, 어렸을 적에 벌써 김 병문(金炳聞)의 딸과 혼약을 맺었다.

흥선의 불우한 시대에 혼약을 한 것이었다. 즉, 김 병문의 딸은 장래의 흥선의 며느리요 재황의 아내가 될 처녀였다.

그러나 지금 지위가 변하여서, 흥선은 대원군이 되고 재황은 지존이 된 오늘에 있어서는, 좀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조선의 아직껏의 큰 폐단의 하나는 왕비의 친척의 방자였다. 더구나 흥선과 사돈한 집안은 그렇지 않아도 몇 대를 내려오면서 집안의 딸을 대내로 들여보내고, 그 세력이 이미 하늘을 찌를 듯한 김족의 한 사람이다.

내심으로 이 문제에 머리를 앓고 있던 흥선은 여기서 한 얌전한 처녀를 발견하였다. 집안은 부끄럽지 않는 양반의 집안이었다. 영특하고 슬기롭게 생긴 처녀였다. 학문에 있어서도 벌써 「좌씨전」을 읽는다 하니, 여인으로서는 과하면 과하지 부족함이 없었다. 그 위에 가장 두통거리되는 「가까운 일가」가 없는 처녀였다.

밤에 흥선은 그 소녀의 일신상에 대하여 부대 부인에게 끈끈히 물었다. 그 묻는 태도가 너무도 끈끈하므로, 부인이 이상히 생각하고 왜 그렇게 묻느냐고 반문을 하매, 흥선은 다만 웃어서 스러져 버리고 말았지만, 한참 뒤에 흥선은 스스로 다시 그 문제를 내었다.

『그 규수를 중전(中殿)으로 삼도록 하면 어떨까?』

여기 대해서 부대 부인의 의아하다는 눈치를 흥선은 위에 던졌다.

『벌써 사돈한 댁이 있지 않습니까?』

『김 병문 말이오?』

『네.』

『있기는 있지만……』

시원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있기는 있지만―김―김씨가―김문이―김가가―불길해……』

『불길해도 할 수 없지요. 사세가 그런 것이야……』

그러나 흥선은 부인같이 간단히 단념하지를 못하는 모양으로 연하여 머리만 기웃거리다가,

『좌우간 부인!』

하고 찾았다.

『네?』

『그 규수를 간간 놀러 오라시오. 그리고 그 인품이며 사람됨을 좀 유심히 보아 두시오.』

한 뒤에 말을 끊으려다가 다시 이어서,

『그 규수가 아니라도 김가는 좋지 못해. 있는 김가들도 꺾어야 할 판에, 새로 새 김가를 들여다 놓으면 마찬가지지. 김가 세상이 또 되게……』

―이리하여 후일 국태공과 민 중전의 악연은 여기서 그 실마리가 맺어졌다.

가까운 일가가 없다고 안심하고 모셔 들였던 이 소녀는 후일 시아버님 국태공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동성 동본이면 모두 일가라 하고 끌어들였다.

영특하고 슬기로운 성격은 단지 대궐 안의 여주인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손을 길게 펴서 여자다운 능란한 외교술을 농락하여, 그의 위대한 시아버님을 거꾸러뜨린―민 중전과 국태공과의 악연은 여기서 이렇게 맺어졌다.

흥선의 활달하고 밝은 눈으로도 여자의 세 치 마음 속은 능히 꿰어 보지 못하여, 천추에 원한을 남긴 서투른 짓을 하였다. 「일가가 없는 양반 집 딸」이라 하는 미끼가 흥선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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