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제3장
三
[편집]신유년(辛酉年) 정월 초하룻날 아침 해가 불그스름히 동녘 하늘에 솟아올랐다. 이날 흥선은 일찍이 깨었다. 초라한 무명 옷이나마 깨끗이 갈아 입고 소세를 한 뒤에, 집안 아랫사람들에게 세배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맏아들 재면이 들어와서 세배를 하고 나갔다. 그 뒤에 그의 사랑하는 둘째아들 재황(載晃)이 들어왔다. 열 살 난 소년―얼굴은 고치와 같이 타원형으로 예쁘게 생기고 총명한 눈이 반짝이는 소년이었다. 명절이라고 역시 새 옷을 깨끗이 입은 소년은 들어와서 아버지에게 절을 하였다. 흥선은 소년을 굽어 보았다. 흥선의 얼굴에는 명랑한 미소가 떠올랐다.
"응, 개똥이(재황의 애명)냐? 금년에는―금년에는……"
흥선은 말을 주저하였다. 눈자위가 다시 미소가 흘렀다.
"금년에는……"
또 한 번 뇌어 보았다. 그런 뒤에 지극히 작은 소리로,
"등극을 하셨다니 치하드리옵니다."
한 뒤에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소년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장래 숱한 고난을 겪고 숱한 비극을 겪은 뒤에 태조 적부터 면면히 물려 내려온 사직의 소멸까지 친히 눈으로 보고, 왕자로서 능히 겪기 어려운 가지가지의 일을 다 보아야 할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소년이었다. 영특한 눈, 총명스러운 눈으로 잠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한 말은 듣지를 못한 것이었다.
"재황아!"
"네?"
"좀 가까이 온!"
소년은 무릎 걸음으로 아버지의 앞에까지 다가앉았다.
자기의 앞에 다가앉은 아들의 손을 아버지는 잡았다. 그리고 잠시 아들의 얼굴을 굽어보다가 그 눈을 조금 더 떨어뜨려서 자기의 손에 잡혀 있는 조그만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을 굽어 볼 동안 흥선은 몸을 떨었다. 이 자기의 손 속에 잡혀 있는 작다란 손―이 손은 능히 장래 이 나라라 하는 것을 긁어잡을 손이 될 것이냐?
돌아보건대, 지금부터 십이년 전, 헌종이 갑자기 창덕궁에서 승하하였을 때, 하마터면 자기에게 굴러왔을는지도 모르는 그 행운이, 이제 장래에 이 소년의 위에 떨어질 날이 올 것인가?
이 작다란 손이 대보를 잡을 손이 언제 올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몽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혹은―혹은……
"재황아!"
"네?"
"네 이 손은 큰 손이로다."
소년도 얼굴에 자랑스러운 듯한 웃음을 띠었다.
"차손이 손보다 큽니다."
"차손이?"
"네, 교동 사는―열 다섯 살이라도 제 손보다 작아요."
"그렇지! 차손이―장손이―김가, 이가 할 것 없이 네 손이 가장 큰 손이라."
그리고 자기를 쳐다보는 소년을 환희와 긴장으로 찬 마음으로 굽어보았다.
―큰 손이다. 팔도를 잡을 손이다. 삼백 주를 흔들 손이다. 삼천리를 덮을 손이다. 이 아비를 사닥다리 삼고 기어 올라가서 아비의 상투를 잡을 손이다.
아아, 그런 날이 장차 올 때가 있을 것인가? 온갖 것의 위에 올라설 그 날이 이제 올 것인가?
흥선은 소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소년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준 뒤에 다시 제 손을 들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새로 빗기는 하였으나 장난 때문에 거칠고 또 거친 머리였다.
"재황아! 오늘이 이 해의 첫날이니, 금년 신수를 위해서 내 네게 두어 마디 물어볼 말이 있다."
"네."
아무런 말이든 대답하겠읍니다 하는 뜻이었다.
"왕자(王者)의 덕은 무엇이냐?"
"서민을 궁휼히 여기는 것이올씨다."
"또?"
"또……"
소년은 머리를 기울였다.
당시의 각 종친이며 권문들에게 '시정의 한 무뢰한'으로 알려져 있는 흥선은, 자기의 사랑하는 둘째아들을 데리고 집에서는 늘 왕자의 걸을 길과 왕자의 덕을 가르친 것이었다. 열 너덧 살부터 벌써 거리에 나서서 세상의 쓰고 단 온갖 경력을 다 맛본 흥선은,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본 바에서 짜낸 정치관과 도덕관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문자에게 생긴 것이 아니고 많은 경험이 낳은 것인지라, 가장 철저한 종류의 것이었다.
"또―잊었느냐?"
"또―저―가만 계서요. 저, 저, 네 알겠읍니다. 그―저……"
하며 머리를 기울이는 소년에게 대하여 흥선은 깨쳐 주었다.
"편중 편애(偏重偏愛)를 삼갈 것이다."
"네. 저도 생각은 났는데 미처 뭐랄지 말이 나오지를 않아서……"
"음, 그리고 또 있다."
"네."
"또 뭐냐?"
"……"
"처권(妻權)에 눌리지 말 것이다."
"네?"
소년은 알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년이 알아 듣지 못한 것이 흥선에게는 도리어 다행이었다. 가슴 속에 맺히고 또 맺힌 불만 때문에 불끈 그 말이 입 밖에 나오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그런 말은 지금 가르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소년이 알아 듣지 못한 것을 다행히 여기는 흥선은 자기의 말을 속여 버렸다.
"처세에 밝아야 한다. 그리고 또 있다."
"네―"
"또 자기의 자격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가장 웃사람이고, 따라서 만인의 표본이 돼야 할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한다. 또 남을 눈 아래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호령할 만한 사람이나 호령할 만한 일이 있을 때는 호령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소년은 무슨 필요로 자기가 이런 학문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기야 집안이 왕실의 친척인지라, 종친된 자는 반드시 배워 두어야만 하는 것이거니 이만큼 알아 두었다. 만약 이런 장면을 당시의 권문 척신들이 보았으면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었다. 단지 한 투전군이요 주정군이요 주착 없는 인물로 알아 오던 흥선이 자기의 집에서는 자기의 둘째아들을 옆에 놓고 왕자의 덕이라는 것을 강술하는 줄을 알면, 흥선도 목이 열 개라도 당하지를 못할 것이었다.
표면 세상이 침을 붙이는 창피한 짓을 예사로이 하며 권문집 생일날이며, 제삿날은 반드시 잊지 않고 기신기신 찾아 다니는 흥선은, 집안에 있어서는 남이 예측하지도 못할 규칙바른 가장이며 자애와 엄격을 가진 지배자였다.
무식한 아버지의 아래에서 아무 배움이 없이 길러난 줄로 세상에 알려져 있는 고종이, 후일 무서운 패력으로써 이 삼천리를 지배하고 지도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끊임없는 지도와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야인으로 길러난 맏아들은 할 수 없이 내버려 두고, 흥선은 이 둘째아들의 훈도에 전력을 다하였다. 남이 모르는 애, 남이 알았다는 큰일이 날 애를 쓰고 또 썼다.
가묘(家廟)의 다례(茶禮)가 끝난 뒤에 소년은 뜰로 나왔다. 꽤 추운 겨울날이로되, 바깥에 단련된 소년에게는 그다지 영향되지 않았다. 장난꾸러기의 소년―소년은 앞으로 돌아와서 새벽부터 벼르고 벼르던 연을 날렸다.
알맞추 부는 바람에 연은 소년의 손을 떠나서 둥실둥실 하늘로 올라갔다. 그 연이 꽤 높이 올라서 얼른 보면 알아보지 못하리만큼 되었을 적에야 흥선은 사당에서 나왔다. 어두운 사당에서 나온 흥선은, 눈이 부신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연을 올리는 아들을 본 흥선은, 소년의 손에서 연 달린 줄을 따라서 하늘 높이 너울거리는 연을 잠시 보고 있다가 사랑으로 들어갔다. 막 정침으로 들어가려다가 흥선은 청지기의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어 번 발로 마루를 쿵쿵 울렸다. 그 소리에 응하여 청지기가 나왔다.
흥선은, 뒷짐을 지고 머리를 수그린 채 대령한 청지기에게 대하여는 아무 말도 없이 잠시 서 있다가 그냥 휙 발을 도로 떼었다. 그러나 한 발자국 떼고 두 발자국 떼고 세 발자국째 떼려다가, 그는 다시 고즈너기 돌아섰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향하여,
"좀 있다가 이 주부(李主簿)가 오시거든 내 침방으로 모셔라. 그 밖에는 아무 놈……"
흥선은 허투루 나오려던 말을 얼른 도로 삼켰다.
"누가 오시든 간에 대감은 문안 나가시고 안 계시다고 돌려 보내라."
하였다. 그 '누구든'이란 말의 한계를 똑똑히 몰라서 청지기가 어릿거릴 때에 흥선은 거기 대하여.
"상감이 거동하셨더라도 없다고 그러란 말이다."
하고는 획 정침으로 향하여 사라져 버렸다. 이 주부라는 것은 이 호준(李鎬俊)을 가리킴이었다.
일찍이 흥선이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로 있을 때에 호준은 흥선의 아래 주부(主簿)로 있었다. 호준의 사람됨이 강하고 직하고, 어디인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호담함이 있었으므로 흥선은 그를 매우 총애한 것이었다. 아첨과 간교함으로써 모든 것을 꾸며 가는 이 세상에 있어서, 벼슬을 달가와하지 않고 자기의 절을 굽히지 않는 호준의 성격은 불우 낙척의 경우에 있는 흥선에게 공명되는 점이 많았다. 그러기 때문에 호준을 매우 사랑하여 자기의 서(庶)딸과 호준의 아들 윤용(允用)과 약혼을 하여 사돈의 의를 맺었던 것이었다.
어제―섣달 그믐날―흥선은 부러 호준의 집까지 찾아가서 무슨 당부를 한 일이 있었다. 오늘 세배에 겸사하여 호준은 어제 당부한 일에 대한 회답을 가지고 올 것이었다. 흥선은 정침으로 들어왔지만 마음이 내려앉지 않는 듯이 안절부절 웃목 아랫목으로 거닐고 있었다.
아랫목 보료 위에까지 내려와서 그냥 주저앉을 듯이 어름거리다가는 도로 뒷짐을 지고 웃목을 향하여 거닐고, 웃목에서 주저하다가는 다시 아랫목으로 향하여 내려오고, 이렇듯 몹시 마음이 불안한 듯이 거닐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예사롭지를 못하였다. 어떤 일 때문에 한껏 긴장된 것이 분명하였다. 밖에 발 소리가 나면 그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하였다. 내다보아서 그것이 기다리던 사림이 아니면 청지기가 돌려 보내기까지 그는 역한 눈으로 그 손을 흘기고 하였다.
비록 주착 없는 인물이며 가난한 주정뱅이로되 명색이 종친인 그에게는, 몇 사람이 새해의 문안을 드리러 왔다. 그러나 흥선에게 영을 들은 청지기는 오는 사람마다 그냥 돌려 보내고 하였다.
이렇게 한참을 정침에서 초조히 기다리다가 흥선은 침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침방으로 들어와서 귀찮은 듯이 보료 위에 번뜻 몸을 던진 흥선은, 문갑 서랍을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골패쪽을 꺼내어 쫙 방닥에 폈다. 그런 뒤에 익은 솜씨로 쪽을 저었다. 골패쪽은 상쾌한 소리를 내며 저어졌다.
―패를 떼어 보자!
투전군으로서 잡기에는 상당한 수완을 가지고 있는 흥선은, 패를 떼는 데도 자기가 발명한 자기 독특의 패떼기의 법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 패였다. 한 쪽씩 한 쪽씩 죄어 나가서 거의 떨어질 듯이 보이다가도 필경은 떨어지지 않고 하였다. 자기가 발명한 패떼기라, 골패쪽을 잡을 때마다 그것을 떼어 보고 하였지만, 흥선의 아직껏의 경험으로는 그 패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껏의 경험으로 좀체 떨어지지 않는 패인지라, 일종의 기괴한 기대를 가지고 그 패를 떼어 보곤 하는 것이었다.
오른손으로 골고루 패를 저은 뒤에 그는 그 가운데서 스물 다섯 쪽을 떼어서 다섯 줄로 지어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의 쪽들을 젖혀 보았다. 젖혀놓은 쪽들을 잠시 굽어 보고 있다가, 흥선은 손을 펴서 그 가운데 있는 준오를 집었다.
―준오! 이호준, 호준, 준오, 준호……준오가 떨어지면 호준이 길보를 가져온다.
왼편 머리에 있는 첫 쪽을 먼저 죄어 보았다. 골패쪽에 익은 흥선의 손은 그 귀사기를 만져 볼 뿐으로서 그것은 백륙임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 치우고 왼편 아랫 귀의 쪽을 집었다. 그것은 아삼이었다.
이리하여 한 쪽 한 쪽 죄어 들어갈 동안, 유희적 기분으로 시작한 이 놀음이 차차 그의 마음을 긴장시키기 시작하였다. 다섯 쪽 줄고 여섯 쪽 줄고―이렇듯 패쪽이 줄어 들어갈 동안, 이 변변치 않은 놀음에서 받는 기괴한 긴장 때문에 패를 죄는 그의 손끝은 조금씩 떨리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스물 다섯 쪽이던 것이 열 다섯 쪽으로, 열 세 쪽으로, 열 두 쪽, 열 한쪽으로 줄어 들어갔다. 그러나 흥선이 이미 골라 놓은 준오의 짝인 한 개의 준오는 나오지 않았다. 남은 패는 다섯 쪽이 되었다. 네 쪽이 되었다. 세 쪽이 되었다. 드디어 두 쪽까지로 줄어 들어갔다. 두 쪽을 남겨 두고 흥선은 담배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담배를 붙여 물었다.
이제 두 쪽이다. 그 두 쪽 가운데 아래쪽이 아니면 위쪽은 무론 준오인 것이다. 아래쪽이라 하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 위쪽이 준오라 하면, 아직껏 떨어져 보지 못한 패가 여기서 비로소 떨어지는 것이었다. 담배를 붙여 문 뒤에 흥선은, 마치 쥐를 잡은 고양이 모양으로 잠시 남아 있는 두 개의 골패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렇게 잠시 골패쪽을 굽어보고 있다가, 흥선은 와락 달려들어서 아래쪽을 획 집어서 웃목으로 내어던졌다. 골패쪽이 웃목으로 날아 가는 동안 골패쪽에 익은 흥선의 눈은 그 쪽에 아래 새겨 있는 붉은 점을 보았다. 그러면 그 쪽도 준오는 아니었다. 흥선은 한 개 남아 있는 그 쪽을 들쳐 보지 않았다. 그리고 장침에 번 듯 몸을 누이고 말았다.
들쳐 볼 필요가 없었다. 다른 쪽이 죄다 준오가 아닌 이상에는 남은 쪽이 준오일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흥선이 몸소 그 패떼기를 발명한 이래, 떼어 보기 몇십 몇백 번―아직껏 한 번도 떨어져 본 일이 없던 것이 오늘 비로소 떨어진 것이었다. 길보인지 흉보인지 이제 이를 회보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에―
이 호준이 흥선 댁에 온 것은 그 날 날이 이미 어두운 뒤였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 하여 마지막에는 역정을 내어 청지기를 불렀다.
"호준이는 둘째 두고 호준이 아비가 와도 없다고 그래라."
고 명령을 한 뒤에도 한참을 더 있다가야 호준이가 겨우 흥선 댁을 찾아왔다.
대감께서 '호준이 아비가 와도 안 만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아침녘부터 진일을 그렇듯 초조하게 기다리던 것을 아는지라, 청지기는 들어와서 호준이가 온 것을 알게 하고,
"안 계시다고 그냥 보내오리까?"
하고 여쭈어 보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이제는 결만 잔뜩 난 흥선은 안석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계시기는 왜 안 계셔? 계시지만 만나지 않는다고 나가서 그래라."
이것이 몸을 일으키면서 청지기에게 내린 흥선의 호령이었다. 청지기는 그러겠노라는 뜻으로 허리를 한 번 굽히고 도로 나갔다.
그러나 나간 청지기가 명령대로 호준에게 전하려 할 때에, 흥선은 다시 큰 소리로 청지기를 불렀다.
"일껏 왔는데 잠깐만 만나 볼테니 이리로 모셔라."
아까의 명령은 급히 취소하여 버린 것이었다. 청지기의 인도로 호준은 흥선의 침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해의 문안으로 먼저 절을 하였다.
호준이가 문으로 들어올 동안―그리고 또한 문안을 하는 동안―흥선은 몸을 일으키고 눈을 들어서 먼저 호준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았다. 당부하였던 긴한 일에 대하여 호준은 어떠한 표정을 가지고 돌아왔나―말로써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써 그 대답을 들으려 하였다.
그러나 호준의 얼굴에는 별다른 아무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날이 몹시 차집니다."
추운 듯이 손을 비비며 호준은 먼저 이런 말을 하였다. 불혹(不惑)을 넘은 흥선이었다. 온갖 마음과 몸의 고생을 다 겪은 흥선이었다. 그러나 흥선의 마음은 이 유유히 날씨의 인사부터 하자는 호준의 태도 때문에 초조하였다. 그가 호준에게 부탁한 일이 심상하지 않은 일―그 대답의 좌우를 보아서는 혹은 운명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늘,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준의 태도는 너무도 유유하였다.
한가로이 날씨의 인사를 하는 호준의 낯을 흥선은 마땅치 못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로라도 쬐라는 뜻으로 화로를 가리켰다.
"아마 무척 기다리셨지요?"
호준의 두 번째 말이었다.
"아니, 나도 어디 나갔다가 인제야 막 돌아온걸."
무슨 필요로 이런 거짓말을 하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흥선은 이렇게 말하고 몸을 천천히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흥선은 호준에게 부탁하였던 일이 혹은 틀려 나가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보았다. 만약 마음대로 되었을 것 같으면 이렇듯 호준이 그 말머리를 유유히 꺼낼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호준은 흥선을 따라서 몸을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었다. 다시 말이 끊어졌다.
흥선이 호준에게 부탁하였던 것은 다른 일이 아니었다. 새해의 문안을 핑계삼아서 조 대비께 가서 뵙기를 호준에게 그 알선을 당부한 것이었다. 흥선은 비록 종친이라 하나, 세력 없고 돈 없는 종친으로서, 궁중에서는 벌써 잊어버린 존재였다. 설혹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한 부랑자로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흥선은 남의 알선이 없이는 대비께 가서 뵐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궁실의 어른이요 종실의 가장되는 조 대비는 오십을 눈 앞에 바라보는 초로(初老)였다. 경인년(庚寅年) 오월 초엿새날 그의 사랑하는 지아비님되는 익종(翼宗―당시 세자)을 잃은 때는 그의 인생의 꽃동산을 겨우 내다본 스물 세 살 되는 해였다. 그로부터 반 오십년 간, 위로는 시어머님되는 순조비(純祖妃)를 모시고, 아래로는 아드님되는 헌종(憲宗)을 거느리고 외로운 공규를 지켜 내려온 것이었다.
기유년(己酉年) 유월 초엿샛날 그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드님인 헌종이 승하를 한 뒤에도 위로 시어머님을 모신 그는 신왕 영립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할 권리도 없이 뜻에 안 맞는 신왕을 묵묵히 맞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사년(丁巳年) 팔월, 그의 시어머니되는 순조비 김씨(純祖妃金氏)조차 하세하자 조 대비는 이 궁실의 어른이 되었다.
상감 철종 한 분밖에는 남인(男人)이 없는 궁실이었다. 역대의 군주가 모두 일찍이 승하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남은 대비, 왕비, 귀비, 상궁, 나인 등 여인만 가득히 차 있고, 남인이라고는 상감 한 분뿐이었다. 이러한 궁실에 조 대비는 그 어른이었다. 위로는 거리끼는 아무 권력도 없고 아래로는 상감 및 많은 여인을 거느린 대비는, 현 궁실의 가장이었다. 궁실의 동태를 종묘에 고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어른이었다. 비록 정치에는 간섭할 권리가 없으나, 종실의 움직임에 관하여는 절대의 권리자이며, 다른 사람의 용훼를 허락하지 않는 최고 권력자였다.
인생의 꽃동산을 겨우 들여다본 때부터 반 오십년 간을 시어머님 순조비를 모시고 인종(忍從)이라 하는 덕을 두터이 쓰고 지내 온 그인지라, 그의 마음 속에 어떤 배포가 있는지는 뉘라서 알 사람이 없었다. 흥선이 이호준을 통하여 조 대비께 가까이 하고자 함은 궁실의 어른되는 조 대비의 환심을 사서, 장래 입신상 무슨 도움이라도 얻고자 함이었다.
이호준은 특별히 조 대비께 가까운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호준에게는 사위되는 조성하(趙成夏)가 있었고, 조성하는 조 대비의 친조카되는 사람이요, 또한 조 대비의 총애를 매우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결련결련하여 흥선은 호준을 통하여 조성하를 사이에 두고 조 대비께 가까이 하여 보고자 한 것이었다. 오늘 새해의 문안으로 당연히 조 대비께 가서 뵈일 기회를 알선하고자 함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시정에 드나들어서 귀인이 경험하지 못할 별별 경험을 다 겪은 흥선은 깊은 궁중에서 쓸쓸한 오십 년 간을 보낸 조 대비를 충분히 기껍게 하고, 따라서 그의 총애를 얻을 만한 자신은 있다. 그래서 더욱 호준의 회보를 초조히 기다린 것이었다. 잠시 좌우로 허리만 건들거리던 호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기다리실 줄은 알았지만 성하가 저녁때가 돼서야 겨우 나왔읍니다."
"오늘 들어갔더랍디까?"
"네."
"그래?"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느냐고 흥선은 눈으로 물었다.
"그 말씀은 대비께 조용히 드려야 할 터인데, 원체 오늘이 초하루라 분주하기 때문에 진일을 기다려서 저녁때야 겨우 조용한 틈을 얻어서 뵈었답디다."
"그래서?"
"그래……"
호준은 눈을 굴렸다. 그 눈으로 흥선을 바로 보았다. 호준의 눈자위에는 미소가 흘렀다.
"대감, 한턱 잘 하셔야 하겠읍니다."
한 턱 하라는 것은 성공하였다는 뜻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성공하였다는 것은 대비께서 흥선을 인견하겠다는 승낙이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미소를 띠고 자기를 바라보는 호준의 눈을 마주 볼 동안 못마땅하다는 듯이 찌푸리고 있던 흥선의 얼굴도 차차 펴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도 차차 미소가 나타났다.
"한턱 하라시면 언제든 하기야 하지. 하여간 성하는 어떤 회보를 가지고 왔읍디까?"
"초나흗날 저녁에 별저(別邸)에서 안견하시다고―"
"초나흗날?"
흥선은 손을 꼽아 보았다.
"내일, 모레, 글피―글피로구먼?"
"네, 글피―그런데 그 날은 대감도 새 옷을 한벌 장만하셔야 합니다."
"왜?"
"그럼, 그 옷으로 대비께 뵈러 가시겠습니까?"
옷이라 하는 것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는 흥선은, 고소를 하면서 자기의 옷을 굽어 보았다. 명절이라고 깨끗한 옷은 옷이지만, 술주정군의 옷이라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것을 기운 자리가 있었다. 고소로서 자기의 해진 옷을 굽어 보고 있던 흥선은 그만 픽 하고 웃었다.
"별로이 새 옷은 없을걸―새 옷이 있으면 한 벌 좀 주시구료."
"달라시면 드리기야 하겠지만 대감께는 맞지를 않을걸요?"
"왜? 클까?"
"크지요."
"크면 좀 높이 입으면 그 뿐이지―"
"도포도?"
"도포는 안으로 단을 꺾어 넣고―내게는 특별히 새 옷이라고 없을 테니까. 명절이라 갑자기 가음을 마련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있대야 돈도 없고……"
호준이 토를 바쳤다. 그것을 흥선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자기의 주머니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주머니에서 흥선의 주머니답지 않게 돈 소리가 절럭절럭 났다.
"호! 대감 주머니에 돈 있을 때도 있읍니다 그려."
"일 년에 하루 이틀쯤이야 있지. 영초의 세찬이외다. 불알 두 쪽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석파(石坡)지만, 무얼보자고 이런 걸 보내는 고마운 인생도 있거든. 그래 내 영의정을 시켜 주마 그랬구료. 하하하하!"
흥선은 유쾌한 듯이 장침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면 소인도 대감께 진곡이나 좀 보낼게, 하다 못해 호판(戶曹判書) 하나라도 시켜 주십시오."
"호판은커녕 많이만 보내면 우의정 하나는 시켜 주리다."
"대감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나? 나야―대원군."
농담에서 시작하여 말이 여기까지 미칠 때에, 흥선의 얼굴에는 적적한 듯한―그러나 엄숙한 기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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