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1장~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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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戊戌)년 이월 초이틀이었다. 정월부터는 봄이라 하되 이름이 봄이지, 이월 중순까지도 날이 춥기가 여간이 아니었다. 아침 저녁은커녕 낮에도 혹혹 쏘는 바람이 나뭇등걸에서 노래하고 있었다. 길이며 뜰에 널린 나무 부스러기이며 종이 조각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날 운현궁 안의 공기는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무슨 커다란 수심이 있는 듯이, 하인들이 동으로 서로 분주히 왕래하며, 구석마다 모여서 무엇이 근심스러운 듯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오정이 지나면서부터는 하인들의 수선거리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연하여 밖으로 심부름을 나가는 하인들이 있었다. 대궐이며 각 궁이며 권문들에게도 연하여, 혹은 대감 혹은 청지기들이 운현궁으로 왔다.

밖의 싸늘한 바람은 더욱 강하여졌다. 펄펄 종이 조각들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햇빛도 그 바람에 흔들리는 듯하였다. 휙휙거리는 바람 소리도 꽤 강렬하여, 뜨뜻이 불을 땐 방 안에서라도 그 소리만 들어도 추위를 느낄 만하였다.

그런 심한 바람 가운데서도 무엇이 분주한지 무엇이 근심스러운지, 하인들은 방 안에 들어가지도 많고 뜰을 수군거리며 왕래하였다.

문득―

안에서 곡성이 울려 나왔다.

『아이고―아이고!』

한 마디에 시작된 그 곡성은 삽시간에 퍼졌다. 내전 사랑 할 것 없이 그 곡성은 삽시간에 전파되어 온 궁내가 곡성으로 화하였다. 궁밖으로 모여든 많은 백성들이 궁문 밖에서 근심스러운 얼굴로 손을 읍하고 서 있었다. 궁에서 사람이 나올 때마다 백성들은 무슨 말이라도 나올까 하여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스러운 소식, 듣기 싫은 소식, 그러나 또한 십중 팔구는 반드시 나올 소식을 그들은 겁 먹은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귀에도 그 궁 안에서 나오는 곡성이 들렸다.

『운명하셨다!』

누구의 입에선가 이런 말이 나왔다. 모두들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들의 깨끗한 옷이 더럽힌다 하지 않고 땅에 꿇어 앉았다.

『가셨구나!』

『대감 가셨구나!』

궁 안에서 시작된 통곡성은 밖에서도 화창되었다.

이 날이 조선 근대의 괴걸이요, 유사 이래 어떤 제왕이든 감히 잡아 보지 못하였던 「절대」적 권리를 손에 잡고 이 팔도 삼백여 주를 호령하며, 밖으로는 불란서, 미국, 청국 들을 내려 누르고, 안으로는 자기의 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친 흥선 대원군 이 하응(興宣大院君李昰應)이 별세한 날이다.

조선 오백 년 역사에 있어서 조선을 사랑할 줄 알고, 왕가와 서민, 정치가와 백성, 웃사람과 아랫사람의 지위를 참으로 이해한 단 한 사람인 우리의 위인 이 하응이 그 일생을 마친 날이다.

『우―위!』

내일 모레면 섣달 그믐이라는 대목이었다.

어떤 길 모퉁이에서 한 취객이 큰길로 나왔다.

『우―위!』

꽤 깊은 밤이었다. 큰길이라야 당시의 장안의 길은 그다지 크지를 못하였다. 게다가 허투루 내버린 물이 모두 얼어서 미끄럽기가 짝이 없었다.

『취하는군!』

꽤 취한 모양이었다. 걸음걸이가 그야말로 이보 전진 일보 후퇴였다. 한 걸음 나가서는 팔짱을 찌르고 몸의 중심을 잡으며 한참씩 서서 있고 하였다.

근본은 양반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행색이 초라하기가 짝이 없었다. 해어진 도포, 떨어진 갓, 어느 모로 뜯어 보든지 한 표랑객에 지나지 못하였다.

개가 한 마리 따라오면서 짖었다. 마치 물고 늘어지려는 듯이 그에게 달려들면서 짖었다.

그는 비틀거리던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초라한 옷, 작다란 몸, 어디로 보아도 시원치 못한 이 취객은 자기에게 드리다가 달려드는 개를 굽어 보았다. 객을 짖던 개는 그 취객이 돌아서므로, 따라오던 걸음을 멈추고 뒷다리를 버티고 이제라도 취객의 목을 향하여 올라뛸 듯한 자세로서 잠시 마주 보았다. 취객은 개를 돌아보았다. 돌아볼 동안 아직껏 비틀거리던 그의 몸이 멎었다. 그는 자기에게 달려드는 개를 호령을 할지 어를지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이 주저하는 양을 개는 알아보았다. 잠시 뒷다리를 버티고 겨누고 서 있던 개는, 한 소리 지르며 취객의 몸을 향하여 올라뛰었다. 순간이었다. 취객은 몸을 비꼈다. 자기가 몸을 비끼기 때문에 올라뛰다가 도로 떨어지는 개에게 향하여 그의 호령이 내렸다.

『요 망할 강아지!』

놀랍게 우렁찬 음성이었다. 그 초라하고 왜소한 취객이 어디서 그런 우렁찬 소리가 나는가 의심할 만큼 놀라운 소리였다. 대지가 울리었다. 하늘까지 울리는 듯하였다. 그 우렁찬 소리에 놀란 것은 그를 물려고 달려들었던 개였다. 개는 이 우렁찬 소리에 위압되어 힐끗 그를 향하여 돌아는 섰지만, 잠시 멍하니 그 취객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개는 취객을 쳐다보았다. 취객은 개를 굽어보았다. 잠시 개를 굽어보고 있던 취객은 오른편 발을 들었다가 땅을 쿵 하니 내려 찧었다.

『지리 가!』

한 마디의 호령이나마 이 취객에게 위압된 개는 즉시 복종하였다. 개는 잠시 더 취객을 쳐다보다가 슬며시 꼬리를 내려 끼고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여음과 같이 두어 마디 더 킹킹 짖어 보면서 골목으로 돌아갔다.

『망할 놈의 강아지, 남의 술을 다 깨우는군!』

취객은 그 개 때문에 취기가 깨는 것을 애석히 여기는 듯이, 기다랗게 숨을 한 번 쉰 뒤에 다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곳서 발을 떼었다.

『우―위! 백설이 만건곤하니……』

아까 어느 기생집에서 기생이 부르던 노래를 코로 흥얼거리면서 얼음진 대지를 비틀비틀, 어둠 가운데로 사라졌다.

―낙척 시대의 흥선군 이 하응(李昰應)이었다.

후일에 조선 팔도 삼백 주를 호령하던 대원군―당시의 한 가난한 종친에 지니지 못하는 흥선군 이 하응은 취한 걸음을 비틀비틀 옮겼다. 향하는 곳은 경운동 자기의 집이었다.

왕족의 한 사람으로 흥선도 자라서는 봉군(封君)이 되어 「군」이라는 명칭은 붙어서 흥선군이라는 명색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세력 없고 그 위에 당시의 권문(權門)인 김씨 일족이며 그 밖 권도가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리의 무뢰한들과 짝하여 술이나 먹고 투전이나 하러 다니는 그는, 어디로 보든지 한 개의 표랑객이지, 왕족으로 보이지 않았다. 단지 때때로 뜻 없이 호령을 할 때나, 혹은 무슨 마음에 맞지 않는 일 때문에 획 돌아서고 말 때에 그의 무서운 위압력이, 걸핏 보아서 범인(凡人)이 아닌 그림자가 눈 밝은 사람에게는 보이는 뿐이었다. 가난한 종친, 권세 없는 왕족―이 주정뱅이 공자는 어두운 밤바람 찬 거리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기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레가 그믐이라, 떡쌀이나 있나?』

물론 없을 것이었다. 떡쌀은커녕 내일 아침 조반쌀이 있을지 없을지도 의문이었다. 아침에 부인에게 꼭 좀 마련하여 오란 당부를 단단히 받고 나온 흥선군은, 나오다가 어떤 술 친구를 만나서 술 친구가 끄는 바람에, 부인의 당부도 잊어버리고 어떤 기생집에서 진일을 술로써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부인의 당부는 잊었던 것이었다. 술 때문에 얼마만큼 마음이 호젓하게 된 그였지만 발이 집에 가까워짐을 따라서 흥그럽던 마음이 차차 무거워졌다. 그리고 마음의 무거움음 발로 전염되어 발의 걸음도 차차 무거워졌다.

『우―위! 취하는군!』

타성으로 다시 한 번 트림을 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아까 개의 사건과 차차 가슴을 무겁게 하는 근심에 취기도 꽤 깨었다.

금옥낭청에 운학선은 바라지 않는 바다. 그러나 종친 공자로서 쌀 걱정, 설 지낼 걱정까지 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게 어찌된 세상이냐? 태조의 거룩한 피를 물려받은 자기로서, 어디 개뼈다귀인지 알 수도 없는 외척들에게 눌리어서 감히 머리도 들지를 못하니 이것이 무슨 세상이냐?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도 이제는 바르게 되었다. 추위도 막기 겸, 비틀거리는 걸음에 중심도 잡기 겸, 깊이 팔짱을 찌르고 머리를 가슴에 묻고 길을 걷던 그는 활개를 펴고 머리까지 높이 들었다.

『화무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느니―』

시조라 할까 노염의 부르짖음이라 할까, 이 때 그의 입에서 나온 이 소리는 해석할 자 없었다.

명문 민씨의 가문에 태어난 부인은 짜증을 부린다든가 바가지를 긁는다든가 그런 여도(女道)를 벗어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설을 지낼 쌀이 떨어진 집안의 주부로서 화평한 얼굴은 할 수가 없었다.

술이 취하여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는 흥선을 부인은 미소로서 쳐다보았다.

『어디서 잘 잡수셨구료?』

마음의 모든 불평과 불안은 「여덕(女德)」이라는 커다란 보자기로 싸고 온순과 인종이란 미덕으로써 장식한 귀여운 마음씨였다.

여기 대하여 흥선은 부끄러운 듯이 외면을 하여 버렸다. 그 미안을 감추기 위하여,

『어, 취하는군!』

하면서 추운 듯이 몸을 한 번 떨었다.

부인이 물었다.

『나가셨던 일은 마음대로 되셨습니까?』

결기 있던 흥선이었다. 부인에게 이런 채근을 받을 때에 이전과 같으면,

『되고 안 되는 것을 여편네가 참견할 것이 아니오.』

하고 튀겨 버릴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오기 전부터 벌써 꽤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흥선은 힐끗 곁눈으로 부인을 한 번 본 뒤에,

『내일 되겠소. 날도 춥기도 하고.』

하면서 한 번 너털웃음을 웃었다.

내일이라 말은 하였다. 그러나 흥선에게는 내일이 아니라 열흘을 연기할지라도 과세 준비를 할 플랜이 서지를 않았다.

김모 민모 홍모 조모 이모, 지금의 세가요 지금의 금만가인 수 없는 사람의 이름과 형지가 어른어른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갔지만, 그 아무한테도 가서 지금 자기의 궁경을 호소할 곳이 있음직도 안했으며, 호소할 지라도 그 호소에 얼마만큼이라도 동정하여 줄 사람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부인에게 향하여 내일이면 되리라고 너털웃음으로 넘겨 버리기는 하였지만, 그 내일 일이 딱하기 가이 없었다. 모일이 딱하고 기막힌 흥선은 다시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어서 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이튿날, 이 파립혜의의 공자의 모양은 다시 거리에 나타났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구박을 받는 이 공자는, 그래도 행여 구박하지 않는 고마운 세가가 하나 있지 않나 하여, 대목의 바람 찬 거리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각 척신과 세가며, 노론, 소론, 남인, 북인(戚臣, 勢家, 老論, 少論, 南人, 北人)의 틈에 끼어서 돈 없고 세력 없는 이 공자는 기침 한 번을 크게 할 수가 없고, 아무리 굶어 죽는다 할지라도 어디 가서 쌀 한 되를 청하여 볼 집이 없었다. 그러나 섣달 대목을 당하여 몰려올 빚쟁이도 피할 겸 부인에게 맹세도 한 체면상,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과세의 준비를 좀 해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날이다.

―사람의 종자는 거리에 우글우글하되 나 갈 곳은 없구나!

거리를 둘러 보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쁜 듯이 왕래를 하며, 벽제 소리 요란하게 저편 앞에는 어떤 세가의 행차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이 공자의 입가에는 쓴웃음의 자취가 스치고 지나갔다. 얼마를 거리를 헤매고 있던 이 공자의 작다란 몸집은, 그 날 낮 좀 지나서 권문 팽 경장(彭景長)의 집 사랑에 나타났다.

『대감, 그간 무양하시오?』

인사를 하는 체면상 흥선의 얼굴에는 미소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안 하지 않을 수 없는 창피하고도 괴로운 말 때문에 그의 미소의 뒤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두세 문객을 앞에 앉히고 아랫목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있던 경장은, 힐끗 눈을 굴려서 흥선을 바라보았다. 검은자위보다도 흰자위가 많은 눈찌였다. 무엇하러 왔느냐는 표정이었다. 그 경장의 흰 눈자위에 향하여 다시 한 번 미소하여 보이지 않을 수가 없는 흥선이었다. 흥선은 또 한 번 미소하였다.

『에이, 날도 지독히 춥게 되었읍니다.』

하면서 손을 비비며 웃목에 종그리고 앉았다.

지벌로 보아서 거기 있는 문객들은 당연히 흥선보다 아랫사람이매, 들어오는 흥선에게 대하여 당연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세가 팽 판서의 문객인 그들의 눈에는 , 가난하고 세력 없는 이 공자는 사람으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한 번씩 힐끗 돌아본 뒤에는 모두 흥선에게는 등을 지고 말았다.

팽도 무론 흥선을 대척하지 않았다. 두 번째 인사에 대하여 한 번의 대답도 안 하였다. 그리고 차디찬 일벌을 다시 한 번 흥선의 위에 던진 뒤에 둘러앉은 문객들과 아까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책망을 하지 않았겠소? 아 참, 어이가 없어서……』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좌우간 팽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사뭇 우스운 듯이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둘러앉았던 무리들도 이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들 있었다. 웃목에 종그리고 앉은 이상 이제 일어서서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이미 앉은 이상 이제 일어서서 다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앉았자니 누구 하나 자기를 대척하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경솔히 앉았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아니, 이 집에 들어온 것―그보다 더 앞서서 누구의 힘을 입으려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이러한 냉대를 받을 것은 당연히 예측이 될 것이어늘 구구히 남의 집을 찾을 생각을 내었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다시 일어설 수도 없고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된 흥선은, 자기의 거취를 찾지를 못하고 다시 아랫목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팽과 그의 문객들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아까의 이야기를 그냥 계속하였다. 때때로 팽이 웃었다. 그러면 문객들은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 하였다. 그다지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팽이 웃기만 하면 문객들은 이 세상에 다시 없는 우스운 이야기인 듯이 방바닥을 두드리며 웃고 하였다.

웃목에 웅크리고 앉은 가난하고 세력 없는 공자 흥선의 가슴은 타는 듯하였다. 오래 겪어 온 모멸(侮蔑)이며, 경험하고 또 경험한 수치도, 너무 받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모멸에 대하여는 거의 신경이 마비된 흥선이로되, 오늘은 유난히도 가슴 쏘았다. 일어서려 일어서려 몇 번을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거저 일어서기도 너무 싱거웠다. 여기서 일어서려면 땅을 한 번 차고 발을 한 번 구른 뒤에 왜가닥하니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었다. 그러나 몸은 아무리 왕가의 피를 받은 흥선이로되, 권도로서 도저히 팽의 뒤천보를 따를 수 없는 그는 그것은 할 수가 없었다. 도로 나가려도 나갈 만한 빌미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아랫목에서는 한 토막의 이야기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팽이 앞에 놓였던 기다란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그러매 그의 앞에 있던 한 문객은 황급히 담배를 담아 바쳤다. 유황 성냥을 황급히 화로에 긋는 사람도 있었다. 한 대의 담배에 대하여 경쟁하듯이 제각기 팽의 심부름을 하였다.

팽은 담배를 붙여 물었다. 삼등초(三登草)의 푸르른 연기가 한 순간 그의 얼굴을 감추었다. 그 연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렬 때에 팽은 비로소 흥선에게 향하여 첫 말을 던졌다.

『아 참, 대감 언제 오셨소?』

흥선이 온 것을 이제사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마음이 이리 끓고 저리 끓던 흥선이었다. 그러나 오랜동안의 그의 습관으로 그의 얼굴에는 이 때에 비굴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 왔읍니다. 날도 몹시 차게 되었읍니다.』

팽의 얼굴에 어리어 돌던 연기가 사라졌다. 두 번째의 연기가 다시 그의 얼굴을 덮었다. 그 가운데서 팽의 두 번째의 말을 던졌다.

『이즈음 어떠시오? 방에 불이나 때구 살으시오? 아이구 얼어서 면상이 모두 허옇게 부었군.』

지근한 모멸(侮蔑)의 말이었다. 흥선의 얼굴에는 칵피가 피어 올랐다. 숨까지 딱 막히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노염을 눌렀다. 그리고 그 팽의 말에 달려 늘어졌다.

『대감,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오. 이즈음 곤란하여 참 죽을 지경이외다.』

『참 그럴 걸! 내 좀 돌려 드릴까?』

『네, 그러면 고맙겠읍니다.』

『얼마나? 한 두어 번이면 될까?』

팽은 좌우를 둘러 보았다. 좌중 문객들에게서 돈을 수렴하려는 눈치였다. 문객들은 눈치가 빨랐다. 팽이 둘러 보는 기수에 제각기 얼른 꺼내려는 주머니를 뒤졌다. 한 문객이 팽의 앞에 돈 두 돈을 웃음과 함께 공손히 바쳤다. 팽은 그 돈을 받았다. 한 닢 두 닢 세어 보았다. 그런 뒤에 웃목에 있는 흥선에게 향하여 스무 닢의 엽전을 뿌려 던졌다.

『과세나 잘 허우.』

아랫목에서는 집이 무너져 나갈 듯이 웃는 소리―

흥선은 눈과 코와 귀가 모두 아득하여졌다. 아랫목에서 여러 사람이 크게 웃는 소리가 마치 십 리 밖에서 나는 소리같이 작다랗게 들렸다. 흥선은 일어섰다뿐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여 문을 열자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의 등을 향하여 웃음 소리가 또 한번 굉장히 울렸다.

『퉤!』

입을 벌리기조차 추운 겨울날이었다. 바람이 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극도의 분노와 불쾌 때문에 입의 침이 죽과 같이 걸게 된 흥선은, 연하여 얼어붙은 땅에 침을 뱉으며, 어디인지 자기로도 목적이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쌀? 과세? 그런 문제는 이제는 생각도 않았다. 어디 개뼈다귀인지 알지도 못하는 팽 경장에게 수모를 받고, 거기 모여 있는 하향 천인들에게 웃기운 것이 분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놈들을!』

아아, 마음대로 하자면 뼈를 갈아 먹어도 시원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뻔히 자기로서는 어찌하지 못할 일임을……

이런 때에 임하여 이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다 겪고 또 겪은 흥선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상감께는 가까운 혈기가 안 계시다. 상감 승하하신 뒤에는 이 팔도 삼백 주의 어른이 될 분은 당연히 종친 중에서 골라 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아, 장래에 만약 그런 날이 생긴다면―자기에게는 아들이 있다. 종친 중의 한 사람인 자기에게는 장래 이 나라의 통치자로서 아무 부끄러움이 없을 훌륭한 아들이 있다. 그 때―만약―만약……

팽? 김? 민? 이? 이 세상에 두려울 자 누구랴. 지금 자기를 이렇듯 수모한 팽도 그 날에는 땅에 코를 끌면서 자기에게 절하리라.

추위도 감각하지 못하였다. 자기가 걷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분노와 망상 때문에 흥선은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 땅만 내려다보며 연하여 퉤 퉤 침을 뱉으며 걸었다. 이 망상에 빠져서 제정신을 못 차리는 흥선의 귀에 그의 분노를 더욱 돋구려는 듯이 저편 길 모퉁이에서 벽제 소리가 요란히 나기 시작하였다.

『물렀거라 비껴라! 에―이놈들, 모두 앉거라!』

그 요란스럽고 호기 있는 벽제 소리로 미루어, 어떤 권문의 행차인 것이 짐작되었다. 아직껏 깊이 머리를 가슴에 묻고 걷던 흥선은 그 머리를 번쩍 들었다. 분노에 불붙는 눈자위였다. 작은 몸집이나마, 초라한 행색이나마, 그 흥분된 눈을 치뜰 때에는, 그 눈에는 장래 이 삼백여 주를 호령한 운현 대감 이 하응의 위엄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어떤 놈―이 벽제 소리 요란히 지나가는 놈은 또 어떤 놈이냐? 마주 서서 욕하고 꾸짖을 신분은 못 되나마, 하다 못해 백제 소리를 향하여서라도 노염의 눈을 던져 보자는 것이었다.

행차는 가까워 왔다. 대제학(大提學) 김 병학(金炳學)의 행차였다.

『자, 추운데 이 아래로 쑥 내려오시지요.』

대제학 김 병학의 사랑, 권하는 사람은 주인 병학이요, 권을 받는 사람은 파립폐의의 흥선이었다. 팽에게 받은 수모 때문에 머리가 거의 혼란하게 되었던 흥선은, 또한 이 뜻하지 않은 병학의 호의에 경이의 눈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이 방에 불 더 때라. 자, 대감 담배나 붙이시오. 여보게, 대감께 얼른 담배 붙여 올리게.』

사면을 지휘하여 흥선을 환대하려는 눈치가 분명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방에 불까지 더 때라고 야단이었다. 흥선은 눈을 들어서 병학을 바라보았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수모와 멸시만 받는 이 공자는, 병학의 환대와 호의가 고맙기보다 오히려 무시무시하였다. 눈을 부릅뜨면 해라도 그 빛을 흐리게 할 만한 병학으로서, 아무 돌아볼 곳이 없는 자기에게 이런 호의를 쓴다는 것이 흥선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기적이었다. 흥선은 잠시 병학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의 명령에 의지하여 공손이 바치는 담배를 흥선은 받아서 피웠다. 가난에 가난을 거듭한 몇 해, 수수밭 귀퉁이에 심었던 상담배에나 익은 흥선의 입에는 좀 과히 독한 성천초(成川草)였다. 재채기가 나려 하였다.

『대감, 이 즈음 어떠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내 살림이 곤궁할 것은 너희들이 번히 아는 바가 아니냐? 내 쓴 갓을 보아라. 내 입은 옷을 보아라. 휘늘어진 비단 옷에 싸인 병학을 흥선은 대답 없이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러나 대답 없는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였다.

―걱정 마오. 당신네의 덕분에 잘 사오. 딸 잘 둔 당신네 집안보다는 조상 잘 둔 우리 집안은 좀 못 하기는 하지만 굶지는 않소.

흥선은 입이 비로소 열렸다.

『조상이 막혀(莫如)딸이라―대감은 이런 상문자 아시오?』

비틀어진 미소 아래서 새어 나온 물음이었다. 병학은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시정의 무뢰한 가운데 섞여서 시민들의 상말과 속담과 재담과 해학에 능한 이 타락한 공자의 기상천외의 질문은, 명문 김 병학에게는 알지 못할 말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하고 흥선의 얼굴을 바라본 뒤에 씩 웃고 말았다. 흥선의 입가에 떠돌던 비틀어진 미소는 드디어 홍소로 변하였다.

『하하하하! 조상이 막여 딸이라― 하하하하, 하하하하!』

폭발된 노염 띤 홍소였다. 처치할 곳 없는 분노를 홍소로서 처치하려는 것이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대감 모르시는구료. 우리 같은 상놈이나 알지 대감이 어떻게 그런 문자를 아시겠소?』

체기가 내려가는 것같이 흥선의 가슴은 얼마만큼 시원하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웃고 있는 객과, 눈을 둥그렇게 하고 있는 주인―이 방에는 잠시 이상한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에 가득 부어……』

『자 대감, 잔을 드세요.』

기생이 부르는 권주를 따라서 병학은 흥선에게 술을 권한다. 흥선은 잔을 들었다. 연거푸 마셨다. 또 먹고 연거푸 먹었으나 취기는 도무지 돌지 않았다. 아니, 취기가 돌지 않았다면 어폐가 있다. 취기는 돌았으나―취기가 곧기 때문에 정신은 더욱 똑똑하여갔다. 공복에 독한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머리는 여간 어지럽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세 가지의 생각이 엉기어서 돌아갔다. 팽의 집에서 받은 수모―그 기억이 더 확대되어 그를 괴롭게 하였다. 잔을 들다가도 그 잔을 도로 놓고 킁킁 코를 울리곤 하였다.

병학의 이 환대가 또한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아무 환대 받을 까닭이 없다. 자기는 아무리 종친이라고 하나 세력 없고 돈 없고―시정에 배회하는 한낱 부랑자요, 저편 쪽은 나는 새라도 떨굴 만한 세력가이어늘, 무슨 까닭으로 오늘 이렇게 자기를 환대하나? 아까도 어떤 그렇지 못할 손님이 온 것도 「일이 있어 못 만나겠다」고 그냥 돌려 보내고 자기를 환대를 하니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문제도 그의 머리를 꽤 어지럽게 하였다.

세째는 자기의 가사 문제였다. 아까는 팽에게 대한 분노 때문에 거기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으나, 술 때문에 머리가 사면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그에게는, 지금 그 가사 문제가 머리에 걸리어 돌아갔다.

집을 나올 때에 부인은 중문까지 따라 나오면서 그를 바래 주었다. 점잖은 집 부인이라, 그 뜻을 입 밖에까지 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꼭 좀 마련하여 오라는 당부에 틀림이 없는 것은 흥선도 잘 알았다. 그러나 어디서? 이제는 어디 가서 말해 볼 용기도 없었다. 바로 굶어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다시는 거기 대하여 입을 뗄 수 없었다. 이렇게 입을 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또한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지 않으면 또 안 될 일이었다.

병학에게 말하여 볼까, 이렇듯 자기를 환대하는 것을 보면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호의를 가지고 있다치면 팽과 같이 자기를 망신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술 기운도 합하여 좀 용기를 얻은 흥선은, 몇 번을 이렇게 마음먹고 입을 열려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급기 입을 열려면 차마 벌려지지를 않고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기가 짝이 없는 흥선은 그 분풀이라는 듯이 연하여 술만 공격하였다. 병학은 끊임없이 권하였지만 병학이 권하기 전에 흥선은 잔을 들고 하였다.

『대감 어떠세요?』

병학이 이렇게 물을 때에 흥선은 방금 받은 잔을 땅하니 상에 놓으며, 취기를 한꺼번에 토하고 머리를 번쩍 들었다.

『나 늘 먹는 막걸리보다는 맛이 좀 낫소.』

하구 무엇을 살피는 듯이 사면을 한 번 둘러 본 뒤에 주인을 찾았다.

『대감!』

『네?』

『한참 앉아서 보아야 지금이 대목인데 이 댁에는 빚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대체 대감은 빚을 안 지셨소? 혹은 지고도 받으러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소?』

병학은 눈을 크게 하였다. 그 뒤에 눈을 삼박거렸다. 이 질문을 그냥 웃어 버릴지 혹은 변명이나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 것이었다. 뒤따라 흥선의 말이 그냥 계속되었다.

『만약 받으러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으면 내게 좀 전수를 하시오. 오늘 당장부터라도 써 먹어야겠소.』

눈만 삼박거리리던 영초(潁樵) 김 병학은 싱겁게 씩 웃었다. 그리고 기생에게 흥선이 놓은 술잔을 눈짓하였다.

『자, 약주나 드세요.』

『아니, 술이 아니라 하 이상해서 그러오. 대목이면 빚쟁이들이 대문이 메어서 들어오는 법인데, 이 댁에는 아무리 보아야 그런 기색도 없으니 말이외다. 보아하니 대감네 가사 비용은 우리 따위보다는 퍽 많이 들 게외다. 술도……』

흥선은 잔을 들었다. 그리고 코로 술의 냄새를 맡아 보고 혀 끝으로 맛을 보았다.

『우리 먹는 먹걸리보다는 훨씬 비쌀 게야. 안주도―이건 뭐요? 해파리? 이건 또 비철의 오이? 톡톡히 걸렸을걸! 이런 건 나 같은, 조상이나 잘 둔 사람을 위해서 따로이 마련한 것은 아니겠지요? 대감 댁에서 보통 쓰시는 것이겠지요? 그 많은 가사 비용을 빚 안 지고야 어떻게 당하겠소? 빚은 나보다 몇 천 곱 몇 만 곱 되리다. 한데 빚쟁이가 안 오니 웬 일이오? 못 오게 하는 묘책이라도 있소?』

주정군의 헛소리로 넘기기에는 너무도 쏘는 말이었다. 진정한 질문으로 듣기에는 너무도 기경한 말이었다. 영초는 이 잘못하다가는 재미 없는 시비가 일어날 듯한 장면을 뚫고 나아가기 위하여 연하여 미소를 그의 얼굴에 나타내었다.

『대감, 그런 농담은 차차 하시고 잔이나 드세요. 오래간만에 대감과 대작을 하게 되니 퍽 반갑소이다. 자, 어서 잔을 드세요.』

영초의 눈짓에 기생은 흥선을 위하여 다시 권주가를 뽑아 내었다.

그러나 흥선은 완강히 잔을 들지 않았다. 공복에 독한 술을 먹었기 때문에 검붉게 된 얼굴에다가 기괴한 미소를 띠고, 정면으로 영초의 낯을 바라보면서 완강히 「묘책 전수」를 요구하였다.

『―게다가 나 같은 사람은 호구지책으로 변변치 않은 난초 장도 그려서 팔고, 투전판에도 뽑이나 하거니와, 대감은 그런 재간도 있다는 소문도 없으니 돈 생길 데가 없어. 그러면서 이 많은 비용을 어디서 구해 내시오?』

『하하하하, 대감도 농담도 너무 심하시구료.』

『농담? 내가 농담이오?』

흥선은 정색을 하였다. 그리고 획 기생을 돌아보았다.

『야, 너의 집에는 빚쟁이가 안 오느냐?』

기생도 미소하였다.

『왜 안 올 리가 있읍니까?』

『와? 오며는 그럼 너는 어떻게 하느냐?』

『그러기에 이런 대감 댁에 와서 숨어 버리지 않습니까?』

『여기 숨는다? 그걸 보오. 이 댁에는 빚쟁이가 못 오게 하는 무슨 묘책이 있기에 여기 피신까지 하는 게 아니오? 자, 대감 응? 그―그―어 취한다.』

휙 지독한 취기가 한 번 그의 머리를 덮고 지나갔다. 그 취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몸을 그냥 팔꿈치로 상에 기대고 흥선은 푹 머리를 수그렸다. 과세 비용의 걱정이 술 때문에 무섭게 확대되어 갑자기 그의 가슴을 눌렀다.

『에, 가 봐야겠군?』

잠시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흥선은 갑자기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러나 공복에 독한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온 몸이 마비된 흥선은, 자기의 몸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반만큼 일어나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허허, 몹시 취했군! 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담? 대감! 영초! 영초! 나 여기서 한잠 자겠소.』

흥선은 몸을 번 듯이 거기 뉘었다.

『한송정 솔을 베어 조그맣게 배를 무어―어, 취한다! 우리 늙은 마누라 쌀이나 좀 바꾸어 왔나……』

흥선은 거기서 혼혼히 잠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거기서 혼혼히 잠은 들었으나 흥선의 잠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커다란 수심 때문에,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못하여 번쩍 눈을 떴다.

『으…ㅁ!』

소리 기지개와 함께 흥선은 사면을 살펴 보았다. 처음 한 순간은 부드러운 처네와 뜨뜻한 넓은 방이 낯설었지만, 그것이 영초의 집 사랑 정침(正寢)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흥선은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매 아까의 기생이 시중을 들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흥선에게 수정과 한 대접을 바쳤다.

『응, 한잠 잘 잤군! 어서 집으로 가야겠군.』

흥선은 양치를 한 뒤에 자기의 의관이 어디 있는지를 살필 때에, 침방 문이 열리며 거기서 주인 영초가 나타났다.

『벌써 다 주무셨소?』

『아이구, 잘 얻어먹고 낮잠까지 자고……인젠 가야겠소.』

『왜 좀더 천천히 가시지요. 해정이나……』

말을 계속하는 것을 흥선은 가로막았다.

『해정이 뭐요? 어서 가야지. 집에서는 눈이 빠지게 기다릴 터인데―』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영초는 거기에는 대답지 않고 가까이 내려왔다. 그리고 흥선이 자리를 비키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고 자기는 발치에 물러앉았다.

『가신다 해도 그 옷이 모두 구겨져서 어떻게 그냥 가십니까? 저 방에……』

영초는 손을 들어서 제 침방 쪽을 가리켰다.

『잠깐 가 보세요. 변변치는 못하나마 갈아 입으실 옷을 준비했읍니다.』

흥선은 눈을 들어서 영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주 자기를 돌아다보는 눈―그것은 결코 당대의 권문 대제학 김 병학의 눈이 아니요, 한 개 사람―서로 접근할 수가 있는 「사람」 김 병학의 눈이었다. 흥선은 잠시 영초의 눈을 바라보다가 말 없이 일어섰다. 영초의 눈에 조금이라도 불쾌한 자위가 있으면 여니와 흥선은(까닭을 모르지만) 호의로 찬 영초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침방에 들어가 보매 시동(侍童)이 의복 일습을 보료 아래 녹이고 있었다. 갓에서 버선 대님, 허리띠며 주머니에 이르기까지, 의복 일습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흥선은 거기서 시동의 손을 빌어서 옷을 갈아 입었다. 벗어 놓고 보니 자기의 낡은 옷은 구기기는커녕 때도 꽤 많이 끼어 있었다. 그것을 벗어 던지고 흐늘어지는 비단 옷을 입고 나니, 가난에 젖은 이 공자의 몸은 마치 하늘로 날아 올라라도 갈 듯하였다.

『우화 등선―그러나 몸이 헤픈 것이 옷을 입은 것 같지를 않소.』

이것이 이 좋은 새 옷을 준 데 대한 흥선의 인사였다. 영초는 미소하면서 대답했다.

『변변치 않은 옷이외다.』

『과연 변변치 않소이다. 대감께는 많이 있는 옷이니 변변치 않을 것이고, 내게는 입어도 입은 것 지 않으니 변변치 않고―나 같은 사람에게는 주어야 그럴 듯한 인사도 못 받는 법이외다. 하하하!』

이 자기에게 극진한 호의를 보여 주는 영초에게 대하여 얼마의 조력을 청하고 싶은 생각은 뒤를 이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의 위에 더 무엇을 청구할 만한 용기까지는 생겨 나지를 않았다. 영초는 자기의 초헌(?軒)까지 등대하여 두었다가 돌아가는 흥선으로 하여금 타게 하였다. 비단 옷에 잠긴 몸을 초헌에 싣고 구종 별배를 앞뒤에 단 이 공자―세상일 것 같으면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일일지나, 흥선은 마치 위압된 듯이 몸을 초헌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초헌에 몸을 싣고 구종 별배를 뒤에 단 이 호화로운 공자가 마음 가운데는 당장의 끼니와 쌀 걱정까지 하는 사람이라고는 알 사람이 없었다. 호화로운 초헌에 대하여 길 가는 사람들은 경의를 표하였다.

이리하여 흥선은 표면으로는 위세 좋게 자기의 댁으로 돌아왔다. 집에까지 돌아온 흥선은 대문 밖에서 영초의 하인들을 돌려 보냈다. 그리고 마치 피하듯이 몰래 사랑으로 들어갔다. 비록 가난은 하나마 자존심이 지극히 높은 그, 아침에 부인에게 부탁을 받고 나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변명을 하기가 귀찮았다. 팽 경장에게 눈물나는 수모를 받았다는 말은 체면상 못 할 일이었다. 김 병학에게 술을 얻어 먹고 옷을 얻어 입고 왔노라는 말도 역시 못 할 말이었다. 이 모는 못 할 말들을 피하기 위하여 흥선은 몰래 사랑으로 기어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에는 뜻밖의 광경이 그의 눈을 둥그렇게 되게 하였다. 당연하게 추울 사랑이었다. 해어진 보료며 해어진 장침(長枕)이며 해어진 안석이 놓여 있을 사랑이었다. 아침에 자기가 나갈 때도 그러하였다. 다시 돌아온 지금에도 당연히 그러하여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 방 안에서 첫 번 주인을 맞은 것은 뜨뜻한 공기였다. 서늘하고 음침하여야 할 방에 뜨뜻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고, 아랫목에는 비단으로 꾸민 새로운 보료며 안석이며 장침 사방침들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멍이 여기 저기 뚫려 있을 문창도 어느 틈에 모두 깨끗이 발리었다. 이 (영초에게 얻어 입은 것이나마) 비단 옷에 감긴 공자에게 그다지 손색이 없는 방으로 어느덧 변하여 있었다.

『?』

아직 술이 채 깨지 않은 흥선은 눈을 이리 그리고 저리 찡그리며 살펴보았다. 틀림없는 자기의 집이었다. 내다보면 쓰러져 가는 아래채며 거미줄 천지의 추녀며―자기의 집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 쓰러져 가는 집의 방 안뿐은 아침과는 형태를 완전히 달리한 것이었다.

흥선은 이것을 부인이 한 일로 알았다. 자기를 내보내기는 하였지만, 아무리 하여도 변통해 올 듯싶지 않아서, 부인이 직접 다른 방면으로 활동을 하여 과세의 준비를 넉넉히 한 것이어니, 이렇게 생각하였다. 궁핍하여 부인에게까지 이런 수고를 끼치는 것이 더욱 마음에 불안하였다.

오늘 두 개의 인정을 보았다.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구박만 듣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수모만 받아서, 울분과 반발성만 마음 속에 잔뜩 길렀던 흥선은 오늘 본 두 개의 인정 때문에 눈물겨워졌다. 잠시 두 자리에 서 있다가 흥선은 갓과 웃옷을 벗어 걸고 안방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모든 자기의 자존심을 벗어 버리고, 부인에게 미안하노라는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겸하여 김 병학의 호의를 말하고 팽 경장의 횡포를 말하여 같이 분해하고 같이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안뜰에 들어서 보니 아침까지도 쓸쓸하기 짝이 없던 안뜰에 활기를 띠었다. 부엌이며 뜰이며 쪽마루며 할 것이 없이, 하인들은 과세의 음식을 차리느라고 욱적하고 있었다. 세찬 한 군데 들어올 곳이 없는 이 가난한 공자의 집에도 하인들이 뜰에 우글거리고 다니니, 겨우 대목 같기도 하였고 사람 사는 집 같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서 흥선은 자기의 몸에 감기운 비단 옷을 서투른 듯이 굽어 보며 댓돌 위에 올라섰다.

『백구야 훨훨 날지를 마라.』

이런 싱거운 때의 기분을 감추기 위하여 노래를 코로 부르면서 안방으로 들어오는 흥선을 부인은 일어서면서 맞았다. 이 부인을 따라서 일어서서 아버지의 귀택을 맞는 소년―애명을 개똥이라 하는 이 재황(李載晃)이었다.

『사동 김 판서가 새찬을 보내 주셔서……』

부인이 흥선에게 이 말을 할 때는 부인의 눈에는 눈물까지 있었다. 모든 것이 영초의 보낸 물건이었다. 명색은 세찬이라 하되, 그것은 세찬이 아니요 당분간의 흥선 댁의 생활비와 생활 필요품 전부였다. 금전, 미곡, 그 밖에 생활품이 몇 짐, 영초에게서 새찬이란 명목으로 흥선에게 온 것이었다. 흥선은 눈을 감고 생각하였다. 아까 팽 경장에게 욕을 보고 추운 겨울의 거리를 지향 없이 돌아다닐 때에, 길에서 영초의 행차를 만나서 억지로 자기의 집으로 데리고 가던 영초―그 뒤 정성을 다하여 자기를 환대하던 영초―자기가 돌아올 때에 격식에 벗어나서 중문까지 자기를 보내 주던 영초―세력 없고 돈 없는 자기인지라, 거리의 마바릿군 하나도 자기에게 호의를 보여 주는 사람이 없는 이 기박한 세상에서, 당대의 권문인 영초 김병학이 이렇게 호의를 보여 준 것에 대하여 흥선은 감사하기가 짝이 없었다.

돌아보건대 현 상감의 직접 인척되는 김씨의 일족은 물론이요, 심모 남모 이모 홍모를 막론하고 동석(同席)하기조차 창피하다고 피하는 자기에게, 영초는 무슨 호의로서 이런 것을 보내었는가? 받을 가망이 없는 빚은 절대로 주지 않는 이 기박한 세상에서 영초는 무슨 까닭으로 자기에게 이렇듯 호의를 쓰나?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그 눈을 뜨면서 흥선은 이렇게 말하였다.

『응, 영초를 정승(政丞)을 시켜 주지.』

부인이 미소하면서 흥선을 쳐다보았다.

『정승은커녕 대감께 녹사(錄事) 하나를 시킬 권한이 있읍니까?』

『시켜 주지, 시켜 주어. 하다 못해 꿈에라도 시켜 주지.』

『그렇지요. 꿈에나 시켜 주지 생시에야 어떻게 시키겠읍니까?』

흥선은 잠시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때때로 각하는 망상이 또 다시 그를 엄습하였다. 그 망상 가운데 나타나는 자기는 오늘과 같은 폐의파립의 가련한 공자가 아니요, 이 삼백여 주의 큰 나라를 호령할 대원군인 자기였다. 지금 영초가 보내 준 새 옷을 갈아 입고 아랫목에 기쁜 듯이 앉아 있는 재황은, 그 때는 아들이라는 명칭으로는 부르지도 못할 이 나라의 지존이었다. 그 때는, 그때야말로―

『부인!』

흥선은 눈을 감은 채로 부인을 찾았다.

『대왕대비마마(먼젓 번 임금 헌종의 어머니) 조씨(趙氏)께 진상할 무슨 세찬이라도……』

『아, 참 깜빡 잊었읍니다. 무슨―어떤 것을 하리까?』

『무엇이고 대비마마께서도 우리가 곤핍한 줄은 다 잘 아시니까 ××을 팔아서라도 대비께 세찬뿐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왕대비(이 종실의 가장 웃어른)―비록 지금 낙척하여 조석의 끼니까지 부자유를 느끼는 형편이지만, 종의 한 사림이요 영특한 아들을 가지고 있는 흥선은, 거기 대하여 어떤 야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사가 없으시고 몸이 약하신 현 상감―상감 불행히 승하하신 뒤에는 신왕을 지정할 권리는 종실의 어른되는 대왕대비가 가지게 될 것이다. 야심과 패기를 마음 속에 가득히 가지고 있는 흥선은, 아무 보잘것이 없는 지금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뚫고 나갈 계획뿐은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런 필요상 대왕대비뿐은 자기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늘 환심을 사 두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흥선은 고요히 눈을 다시 떴다.

『영초는 영의정(領議政)의 재목은 못 돼. 우의정이나 주지.』

그리고 이 말에 미소로써 자기를 바라보는 부인을 흥선도 또한 미소로써 마주 보았다.

[편집]

옛날 명종(明宗) 때의 일이다.

그 때 기 효원(金孝元)이라는 사람이 이조전랑(吏曹銓郞)에 뽑히었다. 이조전랑이라는 것은 조정의 백관을 전형하여 쓰고 안 쓰는 것을 고선하는 권리를 잡은 지위였다.

그런데 명종비(妃)의 오빠되는 심 의겸(沈義謙)이라는 사람이 거기 대하여 반대를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는 심 의겸이 이전 어떤 날 당시의 재상 윤 원형(尹元衡)의 집에 가 보니까, 김 효원이 그 집 문객으로 있었다. 김 효원은 깨끗한 선비의 신분을 지키지 않고, 청년 선비로 재상가의 문객 노릇을 하는 것은 비루한 일이라, 이런 사람을 전형관을 시키면 벼슬이 공평하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들어 반대를 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 효원은 심 의겸을 매우 속으로 밉게 여겼다.

이로부터 얼마 뒤에 심 의겸의 아우 심 충겸(沈忠謙)이 전랑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매 이것을 본 효원이 가만히 있을 까닭이 없었다. 충겸은 사림(士林)에 아무 명망도 없는 사람―단지 궁중의 척권을 자세삼아 이런 벼슬에 뽑힘은 가당하지 않다고 효원이 또한 들고 일어섰다.

이리하여 심씨는 김씨를 가리켜 이전 원한을 이런 곳에 풀려는 소인이라고 일컫고, 김씨측은 심씨를 가리켜 뒷힘을 입는 비루한 사람이라 하여 서로 시비가 분분하였다. 이 시비가 차차 벌어져서, 단지 심씨 김씨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심씨 편을 돕는 패와 김씨 편을 돕는 패가 생겨서, 차차 두 패가 서로 맞서서 시비를 하게까지 되었다. 즉 벼슬아치 집안과 사림의 대립이었다.

선조(宣祖) 때에 이르러서 이 시비는 더욱 커졌다. 당시에 이름 있는 사람들이 이 파 저 파로 붙어서 서로 시비하기 시작하였다. 이 발(李潑), 유성룡(柳成龍) 등이 김씨파가 되고, 윤두수(尹斗壽), 박 순(朴淳), 정 철(鄭澈) 등이 심씨의 파가 되었다.

김씨는 동촌(東村)에 살았으므로 김씨피는 동인(東人)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심씨는 서촌(西村)에 살았으므로 심씨파는 서인(西人)이라 불렀다. 이 때에 서로 맞서서 군자라 소인이라 하는 시비가 생겨나니, 동인과 서인이 차차 벌어지고 또 벌어져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잡아 먹는 큰 불집이 되는 당쟁(黨爭)을 낳게 된 것이다.

동인과 서인은 서로 갈라져서 국사에는 생각을 두지 않고, 심지어 사소한 일까지라도 모두 「당파」라 하는 안경으로 내다보면서, 반대파에서 하는 일이라면 좋고 그르고 잘하고 못하고를 막론하고 반대하고, 시비를 생각지 않고 반대파에서 하는 일의 반대되는 일을 자기네의 정책으로 쓰고 하였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나라의 정치라 하는 것은 모두 하나도 행하여지는 것이 없고, 오로지 머리를 모으고는 반대파를 거꾸러뜨릴 의논만 거듭하고 하였다.

동인이 세력을 잡을 때는 서인 중에 아무리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녹사 하나를 얻어 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서인의 세상이 되면 어제까지의 재상망현이던 동인들은 모두 원배를 하거나 혹형을 당하고, 조그만 당하관까지라도 모두 서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고 하였다.

왕의 전권 시대라 왕의 총애를 사는 파이면 득세하였다. 왕의 총애를 잃은 파이면 실세하였다. 그런지라 그들은 오로지 왕의 총애를 얻으려고 별별 천한 음모까지도 다 하였다. 그리고 그래도 왕의 총애를 받기가 어렵게 되면 그들은 다른 묘책(―즉 그 왕을 폐하고 자기네를 총애하는 새 왕을 만들어 세우려는)을 꾸며 내기까지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쟁의 폐는 나날이 다달이 더 심하고 심각하여 갔다.

당시의 명유 이 이(名儒 李珥)가 이 당쟁을 근심하여 어떻게 하여서든 두 파를 조정을 시켜 보려 하였다. 그리고 누누히 상감께 그 일을 계달하였다.

이 이 이의 노력이 성공을 하여 나라에서는 두 파의 사람을 조정시키기 위하여 두 파의 근원인 심 의겸과 김 효원을, 심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김은 경흥부사(慶興府使)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정책이 오히려 두 파의 대립을 더욱 크게 한 것이었다.

개성은 이 나라의 중요한 고장이요, 경흥은 함경도 한편 구석에 달린 외따른 색북이라, 그러니 개성 유수라는 것은 영직이려니와, 경흥 부사라는 것은 개성 유수에 비기건대 창피한 벼슬이다. 이 조처는 두 파를 조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인을 높여 주고 동인을 낮추어 주는 것이라―동인측에서 이러한 반대성이 일어다. 그리고 이 조처의 장본이 되는 이 이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동인측의 송 응개(宋應漑), 박 근원(朴謹元), 허 봉(許?)의 세 사람을 정배를 보냈다. 이것이 소위 계미 삼찬(癸未三竄)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이 이는 어느덧 중립자의 저러기에도 위에서 서인의 거두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동인 가운데서도 또한 그 안에서 파가 갈리어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의 구별이 생겼으니, 그것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즉, 이 이의 조정으로 말미암아 정부에는 동인과 서인이 아울러 서게 되었는데, 동인 가운데서 정 여립(鄭汝立)이라는 사람을 쓰는 데 대하여 동인 가운데 이 발(李潑)과 우 성전(禹性傳)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씨의 당인 정 인홍(鄭仁弘)이 상감께 우 성전을 공격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 때문에 우씨를 옹호하는 유 성룡(柳成龍) 이 덕형(李德馨) 등과 이씨를 옹호하는 파와의 사이가 또한 벌어졌다. 우씨는 남산동에 살았으므로 남인(南人)이라는 지명을 받았고, 이씨는 북촌에 거하였으므로 이씨파는 북인(北人)이라는 지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지만, 본시는 같은 당이므로 서로 모함하고 죽이고 하는 일은 없이 그렁저렁 지냈다.

유명한 기축 옥사(己丑獄事)도 동인 서인의 당쟁이었다. 서인 정 철(鄭澈)이 동인 정 여립(鄭汝立)의 대역죄를 다스렸는데, 그 때 동인으로 지목받은 명사들도 죄없이 벌 받은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동서의 당쟁은 이 뒤에는 도저히 조정할 수가 없도록 서로 원한은 크게 되었다.

그 뒤 광해군(光海君)의 조에 이르러서 광해군을 가운데 두고 북인 가운데 대북(大北) 소북(小北)이 갈리우고 대북에는 또한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의 파가 생겨서, 대북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가 인조의 반정(仁祖反正)으로 대북파는 역모로 몰려서 전멸하여 버리고, 소북만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원체 소북은 그 사람 수효도 적고 세력도 없었으므로, 정권 쟁탈의 제일선에는 나서 보지를 못하였다.

동인의 한 갈래인 남인과 서인과의 정쟁만 계속되었다.

인조 등극 후에 정권을 잡은 것은 서인이었다. 그러나 남인 가운데서 이 원익(李元翼) 같은 명사를 기용하여 한때 남인과 서인의 다툼이 주춤하게 되었다. 정치의 실권은 서인이 잡았다. 남인들은 자연히 명목만 있고 실권은 없는 벼슬로 몰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표면적이나마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쟁탈전은 한때 식어진 듯이 보였다.

효종(孝宗)이 등극하였다.

효종은 세자 시절에 심양(瀋陽―奉天)에 잡혀 가서 욕을 본 일이 있는지라, 그 철천지한을 잊을 수가 없어서 나라를 독려하여 예의로 국력 배양에 힘썼다. 그 위에 당시의 명신이요 유명한 학자인 우암 송 시열(尤庵 宋時烈)은 서인의 거두라,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일어날 겨를도 없었고 감히 일으키지도 못하였다.

청국을 정벌한다는 커다란 희망을 품은 채 실행하지 못하고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顯宗)이 등극하였다.

그 때에 효종의 모후(母后)의 복제 문제로 남인 허 목(許穆) 윤 선도(尹善道) 등과 서인 송 시열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겼다. 여기서 한때 죽었던 남인의 다툼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해 예송(己亥禮訟)으로서, 효종이라 하는 튼튼한 돌쩌귀가 없어지기 때문에 다시금 싸움은 시작된 것이다.

다음 숙종(肅宗) 때에는 유명한 「폐비(廢妃) 사건」이 생겼다.

숙종에게는 장씨라 하는 아리따운 후궁이 있었다. 숙종은 그 후궁에 혹하여서 왕비 민씨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데 장씨라 하는 후궁은 본시 음탕하고 간교한 여인으로서, 왕의 총애뿐은 부족히 생각하여 종친 동편군(東平君)과 가까이 하였다. 그리고 왕의 총애를 자세삼아 방자한 행동이 많았다.

숙종, 왕비 민씨, 후궁 장씨―이 델리키트한 관기를 두고 또 여기서 맹렬한 당쟁이 일어났다.

송 시열, 김 수항(金壽恒) 등 당시의 재상들은 모두 서인이었다. 이 재상들은 모두 민왕비의 두호자로서, 사리를 들고 의를 들어서 왕께 후궁 장씨를 멀리 하기를 간하였다. 그러나 장씨에게 깊이 마음을 잡힌 왕은 이 재상들의 간을 즐겁게 여길 수가 없었다.

이 기회를 타서 이 궁중의 애욕 문제를 당쟁에 쓰려고 일어선 것이 남인(南人) 이 현기(李玄紀) 남 치훈(南致薰) 등이었다. 그들은 왕께 품하여 자기네들의 정적(政敵)인 서인들을 모두 극형에 처하고 혹은 정배보내고 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비 민씨는 떨구어서 서인(庶人)으로 하게 하여 안국동 자기의 집으로 내어 쫓았다.

후궁이던 장씨는 여기서 당당한 왕비로 승격을 하였다. 동시에 그 세력이 커짐과 함께 남인들의 세력도 커져서 세상은 남인의 세상으로 변하였다.

정부의 중요한 자리, 각 곳 수령 방백은 모두 남인 혹은 남인의 집안 사람이 점령하였다. 한때 찬란한 남인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본래 어둡지 않은 숙종은 오래 혼미한 꿈에만 잠겨 있지 않았다. 장씨의 허물을 겨우 알았다. 동평군과의 사이도 또한 눈치채었다. 그러는 동안에 세력 잃은 서인들의 책동도 여기 가하게 되어 어젯날의 재상이요 권력가들은 오늘 다시 야에 내려가게 되고, 다시금 서인의 천지를 이루게 되었다.

이리하여 여기서 당쟁은 고조에 달해서, 이 때에 맺힌 원한은 서로 풀 길이 없게 되었다.

이 숙종 때에 서인은 또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리게 되었다. 변변찮은 문제로서 또한 서인도 두 파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여기 네 가지의 당파가 생겼다. 본시 서인으로서 지금은 두 파가 된 노론 소론과, 본시 동인으로 지금은 두 파가 된 남인 북인(북인은 또 여러 파로 갈렸지만), 이것이 소위 사색(四色)으로서, 조선 정권의 쟁탈전은 이 뒤로부터 늘 이 네 파에서 하게 되었다.

내려와서 영종(英宗) 때에는 노론과 소론의 다툼이 격렬하게 되매, 영종은 현철한 군주라 탕평 정책으로 두 파를 융화시키려 했지만 잘 가리지 못하였고 오늘은 노론, 내일은 소론, 이렇게 정권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한때는 노론들 때문에 소론은 씨도 없이 전멸될 뻔까지 하였다.

그 때에 당쟁열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아래의 한 예를 보아도 알 것이다.

이 인좌(李麟佐)가 청주 땅에서 반역의 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이 인좌가 소론의 한 사람이라는 빌미로,

「소론의 난리는 소론이 진정시켜라.」

고 대장, 중군에서 영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론 가운데서 내보냈다.

이리하여 그 때는 노론 혹은 소론 가운데 한 사람의 개인적 행동까지라도 모두 당쟁에 이용하고 세력 다툼에 이용하였다. 사도세자의 비참한 최후도 노론 소론의 당쟁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영종은 정궁께 아드님을 못 보고 후궁 이씨에게서 경의군(敬義君)이 탄생하였는데, 영특하고 총명하므로 왕은 이를 세자로 봉하였다.

그러나 세자는 불행히 열 살에 하세하였다.

여기서 노론들은 종친 가운데서 동궁을 한 분 간택합시사는 의견을 내었다. 거기 반하여 소론측에서는 상감이 아직 춘추가 많지 않으시니 기다려 보는 것이 옳은 일이라 반대하였다.

왕은 소론의 말을 옳게 겨이고 기다리는 동안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였다.

이 이가 즉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이 이를 사이에 두고 맹렬한 당쟁과 음모 등이 계속되어, 마지막에는 세자가 부왕의 오해를 사서 뒤주 속에서 굶어서 하세하게 된 비참한 사실까지 생겨난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드님이요 영종의 손주되는 정종(正宗)은 현철하고 명석한 군주였다.

정종은 이 당쟁의 폐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없이하여 버리기는 매우 힘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사색 당인들로 하여금 당쟁에 마음을 두 겨를이 없게 하려고, 그 수단으로서 여러 가지 사업을 일으켰다.

편찬, 효자 열녀의 표창, 과거, 치수 치산, 온갖 일을 안출하여 내어서 당쟁에 마음을 둘 틈이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씨조의 중흥 사업은 성취될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순조(純祖)의 대부터 다시금 당쟁은 시작되었다.

순조의 재위 삼십 사년 간 또한 그 뒤를 이은 헌종(憲宗) 재위 십 오년 간, 한 대 더 내려와서 철종(哲宗)의 대에 이르기까지 순조의 등극한 것이 열 한 살 되던 해요, 헌종은 홑 여덟 살 되던 해며, 철종은 강화도의 한 초동(樵童)으로서 열 아홉 살에 등극을 하여서 그 때부터야 비로서 글을 배웠으니, 이 삼 대의 임금의 군권이 펼 까닭이 없었다. 이 삼 대의 임금의 뒤에서 수렴 청정(垂簾聽政)한 이가 대대의 대비였다. 이리하여 당쟁은 통어할 이가 없어 그 극도에 달하고, 정사는 극도로 어지럽게만 된 것이다. 오늘의 공신이 내일은 역신으로 몰리고, 어제의 역신이 오늘의 공신으로 되고―이렇듯 그 변천이 짝이 없었다. 그리고 또 변천이 무쌍한지라 안정되는 일이 도무지 없었다.

이런 당쟁의 틈에 끼어서 가련한 생활을 계속한 사람은 왕족들이었다. 왕자(王子), 왕형제(王兄弟), 왕손(王孫), 왕숙질(王叔姪)을 무론하고, 왕실의 피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참혹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당쟁에 있어서 자기네의 세력을 펴기에 제일 간단하고 경편한 수단은, 자기네들 가운데서 딸이나, 누이를 궁중에 들여보내서 후궁이나 혹은 왕비를 삼는 것이었다. 척신이 되어 가지고야 그들은 마음대로 세력을 펼 수가 있었고 마음대로 자세를 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세력 잡는 제일의 수단으로서 누이나 딸을 궁중으로 들여보냈다. 그런지라, 당파의 세력의 증장(增長)을 따라서 비(妃)가 빈(嬪)이나 서인(庶人)으로 떨어지고, 빈이나 서인이 일약 비로 승격을 하고 하는 일이 무상하였다. 거기 따라서는 또한 어젯날의 세자(世子)이던 분이 오늘은 역모로 몰려서 극형을 당하고, 어제의 무명한 종친이 동궁(東宮)으로 책립이 되고 하는 일이 무상하였다.

조금만 왕과 촌수가 벌어지는 종친은 누구든 경이원지(敬而遠之)하였다. 왕족의 생명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시대에 있어서 왕족과 친히 하다가는, 만약 어떤 정책상 그 왕족이 역모로 몰리는 날에는, 자기도 애매한 죽음을 하기가 쉬워서 왕족과의 교제는 서로 꺼렸다.

이씨 조선의 역사를 뒤져 보자면, 명료하지 못한 죄명으로 혹은 유배, 혹은 극형을 당한 왕족이 수가 없다. 현왕의 충신으로서 후대 왕께까지 총애를 받으려면 반드시 자기네와 마음이 맞는 이를 세자로 정하도록 책동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자기네와 마음이 맞지 않는 종친은 이 세상에서 존재를 없이하여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런 필요상 가장 손쉽고 중한 벌을 가할 죄명은 역모(逆謀)라 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모라는 죄명에 몰려서 비명에 타계(他界)한 왕족의 수효는 이루 다 셀 수가 없다.

노론이 세력을 잡은 때는 소론측에서 추대하려던 세자는 반드시 해를 보았다. 소론측에서 세력을 잡은 때는 남인은 왼편으로 한 왕자는 반드시 해를 보았다.

이리하여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이 바꾸어 가면서 정권을 잡는 동안 종친은 무수히 해를 보았다.

이 때문에 좀 슬기로운 종친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왕실을 벗어났다. 정계I政界)를 멀리 하였다. 그리고 삼촌이 되고 사촌이 오촌 육촌으로, 왕실과 사이가 벌어져 가는 동안, 이 가련한 종친들은 밥을 위하여 혹은 낙향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락의 지위에서 어떻게 어떻게 능지기라는 소역(小役)이나 얻어서 겨우 그들의 굶주린 입을 쳐 나아가는 것이었다.

왕족이 벼슬을 하는 것은 금하는 바였다. 그 금령 때문에 벼슬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왕족으로서 상인(商人)이나 공인(工人)이 될 수도 없는 영락된 공자들은 자기네의 사촌 혹은 육촌이 팔도 삼백 주를 호령하는 지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갓집 개 모양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 쥐고 헤헤하며 몸소 낫을 잡아 새를 베며 보습을 끌어 밭을 가는 것이었다.

왕족 끼리끼리의 교제도 없었다. 만약 섣불리 교제를 하다가는 어떤 죄명 아래 어떤 형벌이 자기네의 위에 가해질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궁을 떠난 종친―이야말로 고래 싸움에 치인 새우의 격으로서, 당쟁에 희생되어 몸은 당당한 종실 공자면서도 굶주림에 헤매는 가련한 사람들이었다.

흥선군 이 하응(李昰應)은 이씨조 이십 일대 영조의 현손(玄孫)이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증손이었다.

영조의 세손이요 사도세자의 아드님인 정종이 등극을 하고, 그 뒤 순조를 지나서 순조의 세손 헌종(憲宗)이 등극할 동안―흥선군의 집안으로 보자면 흥선의 할아버지 은신군 충헌공(恩信君 忠獻公)의 대에는 지존과는 동기이던 것이, 흥선의 아버지 남연군 충정공(南延君 忠正公)으로부터 흥선에게 이를 동안―궁중에서는 사도세자로부터 사 대째 내려오는 흥선가에서는 사도세자로부터 삼 대째 내려올 동안―동기가 삼촌이 되고 삼촌이 사촌 오촌으로 벌어져서 헌종과 흥선군과는 철종 숙질로 벌어질 동안―궁을 떠난 이 집안은 영락되고 또 영락되었다.

순조의 뒤를 이어서 여덟 살데 등극하였던 세손 헌종의 기 유(己酉) 유월 초엿새날, 보수 스물 셋으로 후사가 없이 승하하였다. 아직 청년이기 때문에 따로이 세자도 책립하지 않고, 헌종의 아버님인 익종도 소년 하세하기 때문에 세제(世弟)도 없었으므로, 종친 가운데서 지존을 모셔 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나이가 좀더 어려서 그 때의 척신인 김씨들에게 좌우될 만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몸가짐이라도 좀 단정하였더면, 헌종의 뒤를 이어서 제 이십 오대의 보위에 올라갈 자격이 넉넉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이 영락된 공자를 돌보지 아니하였다.

헌종이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갑자기 승하하고, 그 세자며 세제도 없었기 때문에 종친 회의가 열리고, 이 사직의 승계자를 지정할 권리를 홀로 잡은 대왕비(순조비 김씨)께 중신들이 후사 지정을 간원할 적에, 대왕대비는 가까이 이 서울에 있는 흥선군을 지적하지 않고, 강화(江華)에 내려가서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철종(哲宗)을 지적한 것이었다. 은 사도세자를 증조부로 하고 삼 대째 내려온 흥선의 육촌 동생이었다.

『영묘(英廟)의 혈맥은 승하하신 금상과 강화의 원범(元範)뿐―그를 모셔다가 이 사직을 잊게 하오.』

이것이 대왕대비의 하교였다.

이리하여 행운의 신은 슬쩍 흥선의 집안을 거저 넘어가 버렸다.

궁중 부중은 그 때 김씨의 천지였다.

순조 왕비도 김씨였다. 순조의 아드님으로, 보위에 오르기 전에 하세한 익종의 비는 조씨(趙氏)이나, 익종의 아드님인 헌종의 비(妃)도 처음은 승지 김 조은(金祖垠)의 따님이었다. 강화도에서 모셔 온 철종도 김 문근(金汶根)의 따님을 비로 삼았다. 이리하여 삼 대째 내려온 김씨의 세력은 궁중 부중을 무론하고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런지라, 벌써 성년자요 대처자(帶妻者)인 흥선은 절대로 보위 후계자의 가운데 손꼽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전 상감은 자기의 칠촌 조카이며, 현 상감은 자기의 육촌 동생이로되, 이 영락된 오자 흥선은 척신 김씨의 세력에 압도되어, 마치 상갓집 개와 같이 주린 배를 움켜 쥐고 투전판이며 술집을 찾아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깨를 겨루고 배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때로 술값이라도 정 몰리면, 붓을 잡아 난초를 그려서 그것을 팔아 달라고 각 대관의 집을 지근지근 찾아 다니는 것이었다. 마음이 끝 없이 교만한 대관 댁 청지기며 하인들에게 갖은 비웃음을 다 받지만, 이 공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폐의파립으로 그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귀찮게 구는 것이었다.

[편집]

신유년(辛酉年) 정월 초하룻날 아침 해가 불그스름히 동녘 하늘에 솟아올랐다. 이날 흥선은 일찍이 깨었다. 초라한 무명 옷이나마 깨끗이 갈아 입고 소세를 한 뒤에, 집안 아랫사람들에게 세배를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맏아들 재면이 들어와서 세배를 하고 나갔다. 그 뒤에 그의 사랑하는 둘째아들 재황(載晃)이 들어왔다. 열 살 난 소년―얼굴은 고치와 같이 타원형으로 예쁘게 생기고 총명한 눈이 반짝이는 소년이었다. 명절이라고 역시 새 옷을 깨끗이 입은 소년은 들어와서 아버지에게 절을 하였다. 흥선은 소년을 굽어 보았다. 흥선의 얼굴에는 명랑한 미소가 떠올랐다.

『응, 개똥이(재황의 애명)냐? 금년에는―금년에는……』

흥선은 말을 주저하였다. 눈자위가 다시 미소가 흘렀다.

『금년에는……』

또 한 번 뇌어 보았다. 장래 숱한 고난을 겪고 숱한 비극을 겪은 뒤에 태조 적부터 면면히 물려 내려온 사직의 소멸까지 친히 눈으로 보고, 왕자로서 능히 겪기 어려운 가지가지의 일을 다 보아야 할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소년이었다. 영특한 눈, 총명스러운 눈으로 잠시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한 말을 듣지를 못한 것이었다.

『재황아!』

『네?』

『좀 가까이 온!』

소년은 무릎 걸음으로 아버지의 앞에까지 다가앉았다.

자기의 앞에 다가앉은 아들의 손을 아버지는 잡았다. 그리고 잠시 아들의 얼굴을 굽어보다가 그 눈을 조금 더 떨어뜨려서 자기의 손에 잡혀 있는 조그만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을 굽어 볼 동안 흥선은 몸을 떨었다. 이 자기의 손 속에 잡혀 있는 작다란 손―이 손은 능히 장래 이 나라라 하는 것을 긁어 잡을 손이 될 것이냐?

돌아보건대, 지금부터 십 이년 전, 헌종이 갑자기 창덕궁에서 승하하였을 때, 하마터면 자기에게 굴러왔을는지도 모르는 그 행운이, 이제 장래에 이 소년의 위에 떨어질 날이 올 것인가?

이 작다란 손이 대보를 잡을 손이 언제 올 것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몽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혹은―혹은……

『재황아!』

『네?』

『네 이 손은 큰 손이로다.』

소년도 얼굴에 자랑스러운 듯한 웃음을 띠었다.

『차손이 손보다 큽니다.』

『차손이?』

『네, 교동 사는―열 다섯 살이라도 제 손보다 작아요.』

『그렇지! 차손이―장손이―김가, 이가 할 것 없이 네 손이 가장 큰 손이라.』

그리고 자기를 쳐다보는 소년을 환희와 긴장으로 찬 마음으로 굽어보았다.

―큰 손이다. 팔도를 잡을 손이다. 삼백 주를 흔들 손이다. 삼천리를 덮을 손이다. 이 아비를 사닥다리 삼고 기어 올라가서 아비의 상투를 잡을 손이다.

아아, 그런 날이 장차 올 때가 있을 것인가? 온갖 것의 위에 올라설 그 날이 이제 올 것인가?

흥선은 소년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소년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려 준 뒤에 다시 제 손을 들어서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새로 빗기는 하였으나 장난 때문에 거칠고 떠 거친 머리였다.

『재황아! 오늘이 이 해의 첫날이니, 금년 신수를 위해서 내 네게 두어 마디 물어볼 말이 있다.』

『네.』

아무런 말이든 대답하겠읍니다 하는 뜻이었다.

『왕자(王者)의 덕은 무엇이냐?』

『서민을 궁휼히 여기는 것이올씨다.』

『또?』

『또……』

소년은 머리를 기울였다.

당시의 각 종친이며 권문들에게 「시정의 한 무뢰한」으로 알려져 있는 흥선은, 자기의 사랑하는 둘째아들을 데리고 집에서는 늘 왕자의 걸을 길과 왕자의 덕을 가르친 것이었다. 열 너덧 살부터 벌써 거리에 나서서 세상의 쓰고 단 온갖 경력을 다 맛본 흥선은, 자기의 경험과 자기의 본 바에서 짜낸 정치관과 도덕관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문자에게 생긴 것이 아니고 많은 경험이 낳은 것인지라, 가장 철저한 종류의 것이었다.

『또―잊었느냐?』

『또―저―가만 계서요. 저―저

네 알겠읍니다. 그―저……』

하며 머리를 기울이는 소년에게 대하여 흥선은 깨쳐 주었다.

『편중 편애(偏重偏愛)를 삼갈 것이다.』

『네. 저도 생각은 났는데 미처 뭐라지 말이 나오지를 않아서……』

『음, 그리고 또 있다.』

『네.』

『또 뭐냐?』

『……』

『처권(妻權)에 눌리지 말 것이다.』

『네?』

소년은 알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년이 알아 듣지 못한 것이 흥선에게는 도리어 다행이었다. 가슴 속에 맺히고 또 맺힌 불만 때문에 불끈 그 말이 입 밖에 나오기는 하였지만, 동시에 그런 말은 지금 가르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소년의 알아 듣지 못한 것을 다행히 여기는 흥선은 자기의 말을 속여 버렸다.

『처세에 밝아야 한다. 그리고 또 있다.』

『네―』

『또 자기의 자격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가장 웃사람이고, 따라서 만인의 표본이 돼야 할 사람인 줄을 알아야 한다. 또 남을 눈 아래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호령할 만한 사람이나 호령할 만한 일이 있을 때는 호령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소년은 무슨 필요로 자기가 이런 학문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하기야 집안이 왕실의 친척인지라, 종친된 자는 반드시 배워 두어야만 하는 것이거니 이만큼 알아 두었다. 만약 이런 장면을 당시의 권문 척신들이 보았으면 그들은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었다. 단지 한 투전군이요 주정군이요 주착 없는 인물로 알아 오던 흥선이 자기의 집에서는 자기의 둘째아들을 옆에 놓고 왕자의 덕이라는 것을 강술하는 줄을 알면, 흥선도 목이 열 개라도 당하지를 못할 것이었다.

표면 세상이 침을 붙이는 창피한 짓을 예사로이 하며 권문집 생일날이며, 제삿날은 반드시 잊지 않고 기신기신 찾아 다니는 흥선은, 집안에 있어서는 남이 예측하지도 못할 규칙바른 가장이며 자애와 엄격을 가진 지배자였다.

무식한 아버지의 아래에서 아무 배움이 없이 길러난 줄로 세상에 알려져 있는 고종이, 후일 무서운 패력으로써 이 삼천리를 지배하고 지도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끊임없는 지도와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써 야인으로 길러난 맏아들은 할 수 없이 내버려 두고, 흥선은 이 둘째아들의 훈도에 전력을 다하였다. 남이 모르는 애, 남이 알았다는 큰일이 날 애를 쓰고 또 썼다.

가묘(家廟)의 다례(茶禮)가 끝난 뒤에 소년은 뜰로 나왔다. 꽤 추운 겨울 날이로되, 바깥에 단련된 소년에게는 그다지 영향되지 않았다. 장난꾸러기의 소년―소년은 앞으로 돌아와서 새벽부터 벼르고 벼르던 연을 날렸다.

알맞추 부는 바람에 연은 소년의 손을 떠나서 둥실둥실 하늘로 올라갔다. 그 연이 꽤 높이 올라서 얼른 보면 알아보지 못할이만큼 되었을 적에야 흥선은 사당에서 나왔다. 어두운 사당에서 나온 흥선은, 눈이 부신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앞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연을 올리는 아들을 본 흥선은, 소년의 손에서 연 달린 줄을 따라서 하늘 높이 너울거리는 연을 잠시 보고 있다가 사랑으로 들어갔다. 막 정침으로 들어가려다가 흥선은 청지기의 방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어 번 발로 마루를 쿵쿵 울렸다. 그 소리에 응하여 청지기가 나왔다.

흥선은, 뒷짐을 지고 머리를 수그린 채 대령한 청지기에게 대하여는 아무 말도 없이 잠시 서 있다가 그냥 휙 발을 도로 떼었다. 그러나 한 발자국 떼고 두 발자국 떼고 세 발자국째 떼려다가, 그는 다시 고즈너기 돌아섰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향하여,

『좀 있다가 이 주부(李主簿)가 오시거든 내 침방으로 모셔라. 그 밖에는 아무 놈……』

흥선은 허투루 나오려던 말을 얼른 도로 삼켰다.

『누가 오시든 간에 대감은 문안 나가시고 안 계시다고 돌려 보내라.』

하였다. 그 「누구든」이란 말의 한계를 똑똑히 몰라서 청지기가 어릿거릴 때에 흥선은 거기 대하여.

『상감이 거동하셨더라도 없다고 그러란 말이다.』

하고는 획 정침으로 향하여 사라져 버렸다. 이 주부라는 것은 이 호준(李鎬俊)을 가리킴이었다.

일찍이 흥선이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로 있을 때에 호준은 흥선의 아래 주부(主簿)로 있었다. 호준의 사람됨이 강하고 직하고, 어디인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호담함이 있었으므로 흥선은 그를 매우 총애한 것이었다. 아첨과 간교함으로써 모든 것을 꾸며 가는 이 세상에 있어서, 벼슬을 달가와하지 않고 자기의 절을 굽히지 않는 호준의 성격은 불우 낙척의 경우에 있는 흥선에게 공명되는 점이 많았다. 그러기 때문에 호준을 매우 사랑하여 자기의 서(庶)딸과 호준의 아들 윤용(允用)과 약혼을 하여 사돈의 의를 맺었던 것이었다.

어제―섣달 그믐날―흥선은 부러 호준의 집까지 찾아가서 무슨 당부를 한 일이 있었다. 오늘 세배에 겸사하여 호준은 어제 당부한 일에 대한 회담을 가지고 올 것이었다. 흥선은 점침으로 들어왔지만 마음이 내려앉지 않는 듯이 안절부절 웃목 아랫목으로 거닐고 있었다.

아랫목 보료 위에까지 내려와서 그냥 주저앉을 듯이 어름거리다가는 도로 뒷짐을 지고 웃목을 향하여 거닐고 웃목에서 주저하다가는 다시 아랫목으로 향하여 내려오고, 이렇듯 몹시 마음이 불안한 듯이 거닐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예사롭지를 못하였다. 어떤 일 때문에 한껏 긴장된 것이 분명하였다. 밖에 발 소리가 나면 그는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하였다. 내다보아서 그것이 기다리던 사림이 아니면 청지기가 돌려 보내기까지 그는 역한 눈으로 그 손을 흘기고 하였다.

비록 주착 없는 인물이며 가난한 주정뱅이로되 명색이 종친인 그에게는, 몇 사람이 새해의 문안을 드리러 왔다. 그러나 흥선에게 영을 들은 청지기는 오는 사람마다 그냥 돌려 보내고 하였다.

이렇게 한참을 정침에서 초조히 기다리다가 흥선은 침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침방으로 들어와서 귀찮은 듯이 보료 위에 번뜻 몸을 던진 흥선은, 문갑 서랍을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골패쪽을 꺼내어 쫙 방닥에 폈다. 그런 뒤에 익은 솜씨로 쪽을 저었다. 골패쪽은 상쾌한 소리를 내며 저어졌다.

―패를 떼어 보자!

투전군으로서 잡기에는 상당한 수완을 가지고 있는 흥선은, 패를 떼는 데도 자기가 발명한 자기 독의 패떼기의 법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좀체 떨어지지 않는 패였다. 한 쪽씩 한 쪽씩 죄어 나가서 거의 떨어질 듯이 보이다가도 필경은 떨어지지 않고 하였다. 자기가 발명한 패떼기라, 골패쪽을 잡을 때마다 그것을 떼어 보고 하였지만, 흥선의 아직껏의 경험으로는 그 패가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껏의 경험으로 좀체 떨어지지 않는 패인지라, 일종의 기괴한 기대를 가지고 그 패를 떼어 보곤 하는 것이었다.

오른손으로 골고루 패를 저은 뒤에 그는 그 가운데서 스물 다섯 쪽을 떼어서 다섯 줄로 지어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의 쪽들을 젖혀 보았다. 젖혀 놓은 쪽들을 잠시 굽어 보고 있다가, 흥선은 손을 펴서 그 가운데 있는 준오를 집었다.

―준오! 이 호준, 호준, 준오, 준호……준오가 떨어지면 호준이 길보를 가져온다.

왼편 머리에 있는 첫 쪽을 먼저 죄어 보았다. 골패쪽에 익은 흥선의 손은 그 귀사기를 만져 볼 뿐으로서 그것은 백륙임을 알았다. 그는 그것을 집어 치우고 왼편 아랫 귀의 쪽을 집었다. 그것은 아삼이었다.

이리하여 한 쪽 한 쪽 죄어 들어갈 안, 유희적 기분으로 시작한 이 놀음이 차차 그의 마음을 긴장시키기 시작하였다. 다섯 쪽 줄고 여섯 쪽 줄고―이렇듯 패쪽이 줄어 들어갈 동안, 이 변변치 않은 놀음에서 받는 기괴한 긴장 때문에 패를 죄는 그의 손끝은 조금씩 떨리기까지 하였다.

처음에는 스물 다섯 쪽이던 것이 열 다섯 쪽으로, 열 세 쪽으로, 열 두 쪽, 열 한쪽으로 줄어 들어갔다. 그러나 흥선이 이미 골라 놓은 준오의 짝인 한 개의 준오는 나오지 않았다. 남은 패는 다섯 쪽이 되었다. 네 쪽이 되었다. 세 쪽이 되었다. 드디어 두 쪽까지로 줄어 들어갔다. 두 쪽을 남겨 두고 흥선은 담배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천천히 담배를 붙여 물었다.

이제 두 쪽이다. 그 두 쪽 가운데 아래쪽이 아니면 위 쪽은 무론 준오인 것이다. 아래쪽이라 하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그 위쪽이 준오라 하면, 아직껏 떨어져 보지 못한 패가 여기서 비로소 떨어지는 것이었다. 담배를 붙여 문 뒤에 흥선은, 마치 쥐를 잡은 고양이 모양으로 잠시 남아 있는 두 개의 골패쪽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렇게 잠시 골패쪽을 굽어보고 있다가, 흥선은 와락 달려들어서 아래쪽을 획 집어서 웃목으로 내어던졌다. 골패쪽이 웃목으로 날아 가는 동안 골패쪽에 익은 흥선의 눈은 그 쪽에 아래 새겨 있는 붉은 점을 보았다. 그러면 그 쪽도 준오는 아니었다. 흥선은 한 개 남아 있는 그 쪽을 들쳐 보지 않았다. 그리고 장침에 번 듯 몸을 누이고 말았다.

들쳐 볼 필요가 없었다. 다른 쪽이 죄 준오가 아닌 이상에는 남은 쪽이 준오일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흥선이 몸소 그 패떼기를 발명한 이래, 떼어 보기 몇십 몇백 번―아직껏 한 번도 떨어져 본 일이 없던 것이 오늘 비로소 떨어진 것이었다. 길보인지 흉보인지 이제 이를 회보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에―

이 호준이 흥선 댁에 온 것은 그 날 날이 이미 어두운 뒤였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 하여 마지막에는 역정을 내어 청지기를 불렀다.

『호준이는 둘째 두고 호준이 아비가 와도 없다고 그래라.』

고 명령을 한 뒤에도 한참을 더 있다가야 호준이가 겨우 흥선 댁을 찾아 왔다.

대감께서 「호준이 아비가 와도 안 만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아침녘부터 진일을 그렇듯 초조하게 기다리던 것을 아는지라, 청지기는 들어와서, 호준이가 온 것을 알게 하고,

『안 계시다고 그냥 보내오리까?』

하고 여쭈어 보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끝에 이제는 결만 잔뜩 난 흥선은 안석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계시기는 왜 안 계셔? 계시지만 만나지 않는다고 나가서 그래라.』

이것이 몸을 일으키면서 청지기에게 내린 흥선의 호령이었다. 청지기는 그러겠노라는 뜻으로 허리를 한 번 굽히고 도로 나갔다.

그러나 나간 청지기가 명령대로 호준에게 전하려 할 때에, 흥선은 다시 큰 소리로 청지기를 불렀다.

『일껏 왔는데 잠깐만 만나 볼 테니 이리로 모셔라.』

아까의 명령은 급히 취소하여 버린 것이었다. 청지기의 인도로 호준은 흥선의 침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해의 문안으로 먼저 절을 하였다.

호준이가 문으로 들어올 동안―그리고 또한 문안을 하는 동안―흥선은 몸을 일으키고 눈을 들어서 먼저 호준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았다. 당부하였던 긴한 일에 대하여 호준은 어떠한 표정을 가지고 돌아왔나―말로써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써 그 대답을 들으려 하였다.

그러나 호준의 얼굴에는 별다른 아무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날이 몹시 차집니다.』

추운 듯이 손을 비비며 호준은 먼저 이런 말을 하였다.

불혹(不惑)을 넘은 흥선이었다. 온갖 마음과 몸의 고생을 다 겪은 흥선이었다. 그러나 흥선의 마음은 이 유유히 날씨의 인사부터 하자는 호준의 태도 때문에 초조하였다. 그가 호준에게 부탁한 일이 심상하지 않은 일―그 대답의 좌우를 보아서는 혹은 운명에 중대한 변화가 생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어늘,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준의 태도는 너무도 유유하였다.

한가로이 날씨의 인사를 하는 호준의 낯을 흥선은 마땅치 못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로라도 쬐라는 뜻으로 화로를 가리켰다.

『아마 무척 기다리셨지요?』

호준의 두 번째 말이었다.

『아니, 나도 어디 나갔다가 인제야 막 돌아온걸.』

무슨 필요로 이런 거짓말을 하였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흥선은 이렇게 말하고 몸을 천천히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흥선은 호준에게 부탁하였던 일이 혹은 틀려 나가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보았다. 만약 마음대로 되었을 것 같으면 이렇듯 호준이 그 말머리를 유유히 꺼낼 까닭이 없기 때문이었다. 호준은 흥선을 따라서 몸을 좌우로 건들건들 흔들었다. 다시 말이 끊어졌다.

흥선이 호준에게 부탁하였던 것은 다른 일이 아니었다. 새해의 문안을 핑계삼아서 조 대비께 가서 뵙기를 호준에게 그 알선을 당부한 것이었다. 흥선은 비록 종친이라 하나, 세력 없고 돈 없는 종친으로서, 궁중에서는 벌써 잊어버린 존재였다. 설혹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한 부랑자로밖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흥선은 남의 알선이 없이는 대비께 가서 뵐 자격이 없는 인물이었다.

궁실의 어른이요 종실의 가장되는 조 대비는 오십을 눈 앞에 바라보는 초로(初老)였다. 경인년(庚寅年) 오 초엿새날 그의 사랑하는 지아비님되는 익종(翼宗―당시 세자)을 잃은 때는 그의 인생의 꽃동산을 겨우 내다본 스물 세 살 되는 해였다. 그로부터 반 오십년 간, 위로는 시어머님되는 순조비(純祖妃)를 모시고, 아래로는 아드님되는 헌종(憲宗)을 거느리고 외로운 공규를 지켜 내려온 것이었다.

기유년(己酉年) 유월 초엿샛날 그의 가장 사랑하는 외아드님인 헌종이 승하를 한 뒤에도 위로 시어머님을 모신 그는 신왕 영립에 대하여 한 마디도 말할 권리도 없이 뜻에 안 맞는 신왕을 묵묵히 맞아 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사년(丁巳年) 팔월, 그의 시어머니되는 순조비 김씨(純祖妃金氏)조차 하세하자 조 대비는 이 궁실의 어른이 되었다.

상감 철종 한 분밖에는 남인(男人)이 없는 궁실이었다. 역대의 군주가 모두 일찍이 승하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 남은 대비, 왕비, 귀비, 상궁, 나인 등 여인만 가득히 차 있고, 남인이라고는 상감 한 분뿐이었다. 이러한 궁실에 조 대비는 그 어른이었다. 위로는 거리끼는 아무 권력도 없고 아래로는 상감 및 많은 여인을 거느린 대비는, 현 궁실의 가장이었다. 궁실의 동태를 종묘에 고할 권리를 가진 유일한 어른이었다. 비록 정치에는 간섭할 권리가 없으나, 종실의 움직임에 관하여는 절대의 권리자이며, 다른 사람의 용훼를 허락하지 않는 최고 권력자였다.

인생의 꽃동산을 겨우 들여다본 때부터 반 오십년 간을 시어머님 순조비를 모시고 인종(忍從)이라 하는 덕을 두터이 쓰고 지내 온 그인지라, 그의 마음 속에 어떤 배포가 있는지는 뉘라서 알 사람이 없었다. 흥선이 이 호준을 통하여 조 대비께 가까이 하고자 함은 궁실의 어른되는 조 대비의 환심을 사서, 장래 입신상 무슨 도움이라도 얻고자 함이었다.

이 호준은 특별히 조 대비께 가까운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호준에게는 사위되는 조 성하(趙成夏)가 있었고, 조 성하는 조 대비의 친조카되는 사람이요, 또한 조 대비의 총애를 매우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결련 결련하여 흥선은 호준을 통하여 조 성하를 사이에 두고 조 대비께 가까이 하여 보고자 한 것이었다. 오늘 새해의 문안으로 당연히 조 대비께 가서 뵈일 기회를 알선하고자 함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시정에 드나들어서 귀인이 경험하지 못할 별별 경험을 다 겪은 흥선은 깊은 궁중에서 쓸쓸한 오십 년 간을 보낸 조 대비를 충분히 기껍게 하고, 따라서 그의 총애를 얻을 만한 자신은 있다. 그래서 더욱 호준의 회보를 초조히 기다린 것이었다. 잠시 좌우로 허리만 건들거리던 호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기다리실 줄은 알았지만 성하가 저녁때가 돼서야 겨우 나왔읍니다.』

『오늘 들어갔더랍디까?』

『네.』

『그래?』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느냐고 흥선은 눈으로 물었다.

『그 말씀은 대비께 조용히 드려야 할 터인데, 원체 오늘이 초하루라 분주하기 때문에 진일을 기다려서 저녁때야 겨우 조용한 틈을 얻어서 뵈었답디다.』

『그래서?』

『그래……』

호준은 눈을 굴렸다. 그 눈으로 흥선을 바로 보았다. 호준의 눈자위에는 미소가 흘렀다.

『대감, 한턱 잘 하셔야 하겠읍니다.』

한 턱 하라는 것은 성공하였다는 뜻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성공하였다는 것은 대비께서 흥선을 인견하겠다는 승낙이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미소를 띠고 자기를 바라보는 호준의 눈을 마주 볼 동안 못마땅하다는 듯이 찌푸리고 있던 흥선의 얼굴도 차차 펴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도 차차 미소가 나타났다.

『한턱 하라시면 언제든 하기야 하지. 하여간 성하는 어떤 회보를 가지고 왔읍디까?』

『초나흗날 저녁에 별저(別邸)에서 안견하시다고―』

『초나흗날?』

흥선은 손을 꼽아 보았다.

『내일, 모레, 글피―글피로구면?』

『네, 글피―그런데 그 날은 대감도 새 옷을 한벌 장만하셔야 합니다.』

『왜?』

『그럼, 그 옷으로 대비께 뵈러 가시겠습니까?』

옷이라 하는 것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는 흥선은, 고소를 하면서 자기의 옷을 굽어 보았다. 명절이라고 깨끗한 옷은 옷이지만, 술주정군의 옷이라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것을 기운 자리가 있었다. 고소로서 자기의 해진 옷을 굽어 보고 있던 흥선은 그만 픽 하고 웃었다.

『별로이 새 옷은 없을걸―새 옷이 있으면 한 벌 좀 주시구료.』

『달라시면 드리기야 하겠지만 대감께는 맞지를 않을걸요?』

『왜? 클까?』

『크지요.』

『크면 좀 높이 입으면 그 뿐이지―』

『도포도?』

『도포는 안으로 단을 꺾어 넣고―내게는 특별히 새 옷이라고 없을 테니까. 명절이라 갑자기 가음을 마련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있대야 돈도 없고……』

호준이 토를 바쳤다. 그것을 흥선은 그렇지 않다는 듯이 자기의 주머니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주머니에서 흥선의 주머니답지 않게 돈 소리가 절럭절럭 났다.

『호! 대감 주머니에 돈 있을 때도 있읍니다 그려.』

『일 년에 하루 이틀쯤이야 있지. 영초의 세찬이외다. 불알 두 쪽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석파(石坡)지만, 무얼보자고 이런 걸 보내는 고마운 인생도 있거든. 그래 내 영의정을 시켜 주마 그랬구료. 하하하하!』

흥선은 유쾌한 듯이 장침을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면 소인도 대감께 진곡이나 좀 보낼게, 하다 못해 호판(戶曹判書) 하나라도 시켜 주십시오.』

『호판은커녕 많이만 보내면 우의정 하나는 시켜 주리다.』

『대감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나? 나야―대원군.』

농담에서 시작하여 말이 여기까지 미칠 때에, 흥선의 얼굴에는 적적한 듯한―그러나 엄숙한 기분이 떠올랐다.

[편집]

대비께 뵙는 것만도 예외인데, 주찬의 하사까지 받는다 하는 것은 과연 예외였다. 가난에 시달리기 때문에 군가가 탈 만한 상당한 남녀도 갖고 있지 못할 흥선은 자기에게 얼마만큼 호의를 보여 주는 영초의 사인 남녀를 얻어다가 타고 대비께 간 것이었다. 대비의 조카 조 성하도 배행을 하였다.

대비는 이 이단자(異端者)를 흥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찍이 궁중에서도 드린 흥선의 소문으로서, 술 잘먹고 투전이라 하는 잡기를 잘 하고 싸움도 꽤 잘 하며, 거리거리는 자유로이 돌아다니며 서인 상놈들과 어깨를 겨누고, 막걸리라는 하등 술을 혀를 채면서 먹는다는 이 이단자는 대비에게 있어서는 흥미 있는 대상이었다.

이러한 이단자에게 대하여 조카 조 성하의 소개가 또한 굉장하였다.

『한 사람뿐이올씨다. 포도가 크옵니다. 종실에 사람이 많지만, 호방하고 뜻이 큰 이는 흥선군 한 분뿐이옵니다. 지금 구름을 못 얻었지만, 구름만 얻는 날엔 능히 하늘로 올라갈 사람이옵니다. 그 포부를 펼 데가 없어서 술로써 생애는 모호히 하고 있읍니다.』

조 성하의 소개는 대략 이러하였다.

궁중에서 일찍부터 들리던 그 소문이 옳은 말인지, 조카 성하의 말이 옳은 말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평범한 인물이 아닌 것에는 틀림이 없는 모양이었다.

미식미의(美食美衣)에는 부족이 없는 대비다. 그러나 일찍부터 외로운 몸이 된 그에게는 인생의 적적함이 늘 마음 속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 좀 색채 다른 것을 보아서 임시로나마 이 너무도 단조로운 궁중 생활의 권태에서 벗어나 보고 싶은 충동이 늘 있던 것이다.

김대왕대비 재세시에는 며느리의 구실을 하느라고 한 때도 머리 들어 본 때가 없었다. 지금은 이 종실의 으뜸 어른의 자리에 오른 대비는, 더구나 초로(初老)의 흠 없는 몸이라, 이 색채 다른 이단자를 불러서 하루의 소일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특별히 예의라는 것을 엄격히 지키고자 하지 않는 흥선의 태도는 대비에게는 더욱 재미스러웠다.

『재재작년 영의정 댁 생신인 이래 이런 만반 진찬은 처음이올씨다.』

나주반(羅州盤)을 움켜 안고 일변 먹으며, 일변 마시며, 일변 이야기하며 하는 흥선은, 이런 말을 하며 하하하하 웃었다.

이 방에서 사내의 웃음 소리가 끊어진 지 그 몇 해련가? 이래 감상적인 여인의 높은 웃음 소리는 간간 울리어 본 적이 있었지만, 우렁찬 사내의―더구나 기탄 없는 웃음 소리는 울리어 본 적이 없었다.

대비는 이 우렁찬 웃음 소리를 미소로써 들었다.

『자 마음껏 많이 잡수세요.』

『대비마마께서 하사하신 진찬―마음껏 먹겠습니다. 본시 야인이 예의를 모릅니다. 삼년 전 그 때에는 만반 진찬을 앞에 보기만 하고 그만 먹지도 못했읍니다. 지금 생각해오 아까운 것을……』

『왜 안 자시었소?』

대비는 미소로써 이렇게 물었다. 흥선에게 술을 따르고 있던 나인이 참다 못하여 얼굴을 새빨갛게 하며 픽 웃었다.

『네? 하아, 팔자가 궁하니깐 앞에 놓은 음식도 먹지 못하게 되옵니다.』

대비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런 명랑한 웃음 소리는 근래에 듣기 힘든 일이었다. 이 이단자의 불규한 언행이 엄격한 규율에 진저리난 대비는 마음에 맞은 것이었다.

흥선은 대비를 위하여 삼 년 전에 영의정 김 좌근(金左根)의 집에서 만반 진찬을 앞에 놓고도 먹지 못한 그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무오년(戊午年) 삼월의 일이었다.

영의정 하옥(荷屋) 김 좌근은 자기의 생신연을 자축하기 위하여, 각 종친이며 권문들을 자기의 집에 초대하였다. 흥선도 종친의 한 사람으로서 그 잔치에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초대를 안 받았을지라도 남의 집 생일에는 잊지 않고 찾아 가는 흥선인지라, 그 잔치에 참예하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철종 왕비의 아저씨요, 세도 김 병기(金炳冀)의 양아버지이며, 벼슬이 수상(首相)에 있는 하옥의 생일날이라, 명문 거족들이 모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뜰에는 이 권문들이 타고 온 평교자며 남녀며 가마 초헌 등으로 송곳 세울 틈조차 없게 되었다. 그리고 잔치의 자리에는 이 나라에서도 내노라는 뽐내는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를 깨어진 갓에 해진 옷으로 꾸민 흥선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비단 옷으로 모두 꾸민 고관들 틈에 이 변변치 않은 행색을 한 사람이 끼어 있는지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만약 그것이 흥선이 아니요 다른 사람일 것 같으면 스스로 창피하여 몸을 숨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기탄하지 않는 흥선은 태연히 그 가운데서도 사람의 눈에 가장 띄기 쉬운 문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흥선의 이 모양을 보고도 다만 본체 만체하여 버렸다. 그러나 주인 하옥이 보기에 꼴이 되지를 않았다. 더구나 옷은 할 수가 없다 할지라도 참대 갓끈이 더욱 눈에 띄었다.

흥선의 지위로 말하더라도(만약 흥선에게 재산만 있으면) 격식상 당연히 호박(琥珀) 갓끈을 하여야 할 것이었다. 관자는 도리옥(環玉)을 붙여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 도리옥 도리금 관자에 호박 금패의 갓끈을 늘인 빈객들 틈에, 송진 관자에 참대 끈을 늘이고 태연히 앉은 흥선의 모양이 꼴이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하인을 불러서 귓속말로 자기의 아들 병기에게 가서 호박 끈을 하나 빌어다가 흥선에게 몰래 주라고 명하였다.

작은 사랑에서 제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 대신의 생신연을 즐기던 병기는 하인에게서 이 전갈을 듣고,

『석파―(石坡―흥선의 호)더러 직접 나한테 와서 빌어달래라고 그래라.』

하여 하인을 그냥 돌려 보냈다. 흥선 따위를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 병기는 제 갓끈이 없어 남의 것을 빌어서 체면을 보지하려는 흥선의 심사가 미워서 망신을 주고자 함이었다. 술이 얼마만큼 취한 병기는 그 독특의 잔혹성까지 발휘한 것이다.

여기서 하옥은 하릴없이 몸소 흥선에게 가까이 가서 흥선의 귀에 입을 대고,

『대감, 내 아들의 방에 좀 가 보시오. 대감 갓끈이 너무 낡아서 병기한테 호박 갓끈을 잠깐 빌려 드리라고 했으니 가시면 드리리다. 가서 갈아 대시오.』

하였다.

흥선으로 보자면 갓끈이 참대가 아니라 종이 노끈이라도 기탄할 바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인 대감의 호의를 무시할 수가 없고, 더구나 주인의 체면도 보아 주어야겠다 싶어, 병기가 있는 작은 사랑으로 찾아 갔다.

흥선은 병기를 찾아서 작은 사랑으로 들어갔다. 병기는 자기의 친구들과 술을 먹고 있다가, 흥선이 들어오는 것을 힐끗 한 눈으로 보았다. 그런 뒤에는 다시는 본체 만체 자기의 친구들과 술을 주고 받고 하였다.

흥선은 문턱을 넘어선 채 먹먹하여 버렸다. 자기가 들어오면 당연히 준비해 두었던 호박 갓끈을 내어 주려니하고 왔던 흥선인지라, 그만 거기 엉거주춤하여 버렸다.

자기의 친구들과 지껄여대면서 술을 먹고 있던 병기에게 향하여, 갑자기 무엇이라고 하여야 할지 말문이 막힌 흥선은, 좀 그 자리에 웅크리고 서 있다가 마침 술을 가지러 나가려는 기생을 붙들어서 갓끈의 사건을 병기에게 전하게 하였다. 병기는 기생에게서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힐끗 흥선을 쳐다보았다.

『호, 흥선 대감 오셨군! 자 약주나 한 잔 받으시오.』

병기는 아랫목에 앉은 채 술잔을 흥선의 방향으로 내어 밀었다.

『갓끈은 무슨 갓끈? 그래 호박 갓끈이 아니면 술 자시지 말랍디까? 하하하하!』

술잔을 내어민 채 병기는 큰 소리로 웃었다. 저기 모여 있던 젊은 공자들도 일제히 웃으며 흥선을 쳐다보았다.

흥선은 이 조소에 칵 눈이 어두워졌다. 그 흥선의 귀에 병기의 계속되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남의 갓끈을 빌어서 체면이나 차리면 뭘 하오? 실속으로 술을 먹어야지. 자, 술은 내 드릴 테니 걱정마시오. 잔으로 시원치 않으면 바리깨로라도 요강 뚜껑으로라도 마음대로 자시오.』

이 너무도 과한 조소에 거기 있던 기생이 무안하여 잔에 술을 하나 부어 가지고 흥선에게로 달려 왔다.

『대감 드세요. 이―술 한―잔―잡―으……』

그러나 흥선은 그 잔을 받지 않았다. 얼굴에 쇠가죽을 대고 창피한 일을 창피하게 여기지 않고 다니는 흥선이로되, 이 병기의 독설에는 자기의 정신을 거의 잃도록 흥분하였다.

일부러 자기가 빌러 온 것은 아니었다. 자기는 아무런 갓끈이든 탓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병기의 아버지 하옥이 그런 호의를 쓰기에 고맙다 하고 온 것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거기 대하여 병기의 응대는 너무나 그 돗수를 넘친 것이었다.

흥선은 그 만반 진찬을 먹지를 않았다. 그리고 소매를 떨치고 하옥의 집을 뒤로 하였다.

이전에 겪은 이 분한 한 토막의 이야기를 흥선은 대비의 앞에 피력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 듯이 허허 웃었다.

대비도 흥선의 이야기에 소리를 높여서 웃었다. 이 폐의파립의 공자가 금라로 꾸민 재상들 틈에 섞여서 같이 담소를 하는 장면을 머리에 그려 볼 때, 오십 년 생애의 그 삼십여 년을 궁중에서 보낸 대비는 일종의 통쾌미조차 느낀 것이었다.

그런 뒤에 대비는 탄식하였다.

『김문(金門)이 너무도 승(勝)해. 과히 승해.』

김문의 과한 방자에 대하여 호소할 곳이 없던 대비가, 거기 대한 원한을 입 밖에 내어 보는 그 첫말이었다.

『세도(병기를 가리킴)가 아무리 세쓴다 하기로서니 종실을 그렇듯 멸시해?』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김문 앞에 가면 종친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합니다. 더구나 흥선 같은 종친 중의 가라지는 말할 것도 없읍니다.』

웃음으로 마음을 속인 말이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맺히고 또 맺힌 분한을 웃음 가운데도 그의 말투에 다분히 섞여 있었다.

대비는 흥선의 위에 부었던 미소의 얼굴을 조카 성하에게로 돌렸다.

『성하, 너도 가면 그런 멸시를 받느냐?』

『받을 것이 싫어서 도대체 가지도 않습니다.』

아직 열 일곱 살의 소년이나 숙성하기 때문에 한 이십살쯤 나 보이는 성하는 귀공자다운 미소를 얼굴에 띄어 가지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이 방 안에는 수십년내로 처음 활기 띈 웃음 소리가 연하게 났다. 구중(九重) 깊은 속에서 삼십여 년을 외로이 보낸 조대비의 낯에도 활기와 화기가 적이 떠 돌았다.

『대감은 투전이라는 것을 꽤 잘 하신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한 토막의 이야기가 끝이 난 뒤에 대비가 미소를 띄고 흥선에게 물은 말이 이것이었다.

이 말에는 흥선도 고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할 것이야 뭐이 있겠습니까? 심심 소일로 장난할 따름이로소이다.』

『난초도 꽤 잘 치신다지요?』

『뉘께서 들으셨습니까? 무재한 흥선―무엇 하나 잘 하는 것이 있겠소이까? 서울서 매맞고 송도서 주먹질이라고, 가슴 속에 엉긴 울분을 종이 위에 뿌려 보는 뿐이옵니다.』

『가야금도 잘 하신다구?』

『대비마마, 너무 추어 주시지 마세요. 본디 재간 없이 태어난 흥선이올씨다. 사십 년 동안을 술로써 세월을 허송한 뿐이올씨다.』

이단자 부랑자로서 궁중에 알려져 있는 이 흥선에게 대하여 대비의 흥미는 차차 더하여 갔다. 내리에 드나드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내시(內侍)들이며 종친들만 익히보고, 그들의 꽁한 태도와 점잔을 빼는 꼴들로서, 세상의 사내라는 것이 모두 그렇게 생긴 것쯤으로 여기고 있던 대비는 여기서 색채 다른 인물을 보았다.

『하하하하!』

흥선이 소리를 높여서 웃을 때에 이 건축한 이래로 문소리 한 번 요란히 여닫겨 본 적이 없는 방을 드렁드렁 울렸다. 대비가 얼굴에 미소를 띄고 이 이단자의 약점을 들어서 물을 때는 사십이 지난 중년 사나이는 마치 어린애와 같이 머리를 긁으며 싱그레 웃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이 날의 이 회견을 기회로 장래에도 늘 대비께 출입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면 그것은 흥선의 성공이었다. 구중 깊은 속에서 너무도 규칙적이요 단조한 생활에 염증이 난 대비는 이 불기호방한 흥선의 언행이 마음에 들었다.

겨울의 밤도 어지간히 깊어서 좀 조급한 닭은 벌써 첫 홰를 보할 때쯤 돼서야 흥선은 대비께 하직하였다.

돌아가는 흥선에게 대하여 대비는, 이 뒤에도 특별히 허가가 없이 자유로이 대비께 뵈러 올 특권을 주었다.

『이 뒤에도 간간 오오. 종반끼리 서로 교제라도 있어야지, 너무도 남같이 지내니까 일가 같지를 않구료.』

아직껏 다른 종친에 대하여 내려 보지 않은 이런 친절한 말을 흥선에게 준 것이었다.

『아아, 실컷 잘 웃었다. 재미있는 사람이지?』

금침을 준비하는 시녀에게 향하여 몇 번을 대비는 미소로써 이런 말을 하고 하고 하였다.

이 호준에게 새 옷을 얻어 입고 오지 않고 헤어진 옷에 깨진 갓으로 왔더면, 흥선은 대왕대비의 흥취를 더욱 돋굴 뻔한 것이었다.

[편집]

『사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왕손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노래가 틀렸다―왕손은 여기 있되 산천은 간 데 없다―이렇게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기생 계월이의 방―고즈너기 장구 소리에 어울리는 계월이의 시조를 듣고 있던 흥선은, 졸음 오는 몸을 조금 일으켜 앉으며 계월이의 노래를 가로막았다. 계월이는 장구를 멈추었다. 그리고 설레발이와 같이 기다란 눈썹 아래 있는 눈을 굴려서 흥선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왕손은 여기 있되 산천은 간 데 없네―다시 반 헌 불러 봐라.』

장구를 조금 밀어 놓았던 계월이는 다시 장구를 끌어당겼다. 땅 하는 장구소리에 연하여 계월이의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다.

『사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왕손은 예대로나 산천은 변하였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왕손은 여기 있으나 왕의 터를 더럽히는 자 누구냐? 얼근히 취한 흥선은, 적적한 미소를 얼굴에 띄어 가지고 노래를 끝낸 뒤에, 장구채로 자기의 버선코를 두드리고 있는 계월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겨울날 밤은 꽤 깊었다. 저 어디선가―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다듬잇소리가 장단을 맞추어서 고요한 밤 공기를 흔들어 들려 왔다.

『계월아!』

흥선은 기생을 불렀다.

『네!』

장구채로 버선코를 두드리고 있던 계월이는 그 동작을 그냥 계속하면서 머리도 그냥 아래로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대답하였다.

『저기 어디서 다듬잇소리가 들리지. 들리느냐?』

『네. 아직껏 듣고 있었읍니다.』

『저 다듬이질하는 여인이 과부일까?』

아래로 향하고 있던 계월이의 눈은 구을러서 한 순간 흥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웃음의 자취가 그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가 어떻게 그걸 압니까? 대감 아세요?』

『암, 알지! 과부의 다듬잇소리로다. 적적한 소리가 아니냐? 짝을 찾는 소리로다. 올 길 없는 이를 찾는 소리로다. 밤을 새워 가면서―』

똑딱똑딱, 다듬잇소리는 그냥 연하여 들려 왔다. 세상이 모두 잠든 밤중에 규칙바르게 들려 오는 이 다듬잇소리는 흥선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였다. 한참 말 없이 그 다듬잇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흥선은, 자기의 우울한 기분을 한꺼번에 씻어 버리려는 듯이 손으로 툭 한 번 자기의 넓적다리를 쳤다.

『왕손은 예대로되 산천은……. 계월아! 왕손은 지금 영락되고 영락돼서 계월이 같은 기생한테도 구박을 받으면서, 그래도 무얼 찾아 먹자고 기신기신 찾아 다니누나. 그렇지?』

눈을 아래로 향하고 있던 계월이는 한 순간 흥선을 흘겼다. 무슨 말씀을 하시노 하는 표정이었다. 그 눈 흘김을 보면서 흥선은 몸을 조금 움직였다.

『어즈버 태평 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자 계월 아씨! 자리나 하시오. 곤하다! 아무리 왕손이라도 식색에는 이길 수가 없다. 몇 잔 술에 오늘은 지독히도 취하는군.』

그러나 계월이는 그냥 못 들은 듯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저편에서 들리는 다듬잇소리는 이 고요한 장면에 일점의 정취를 더하는 듯이 그냥 끊임없이 들려 왔다. 한참의 말 없이 장구채로 자기의 버선코만 두드리고 있던 계월이가, 귀찮은 듯이 장구채를 앞으로 던졌다. 그리고 머리를 들었다.

『대감!』

『왜 그러느냐?』

『어제 김 판서 댁에 가셨어요?』

『김 판서란? 병기 말이냐?』

『네.』

『음 갔었다. 그래 왜?』

계월이는 흥선을 쳐다보던 눈을 도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무슨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듯 나올 듯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종내 삼켜 버리고 말았다.

『갔으면 어떻단 말이냐?』

계월이는 한참을 입만 우물거리다가 겨우 대답하였다. 듣기 힘들도록 작은 소리였다.

『대감, 왜 그 댁에를 자주 가세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흥선은 계월이를 보았다. 사내의 하는 일은 일개 기생이 참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계월이가 말하였다.

『소인 같은 천비가 그럴 일에 참견을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제발 일 없이는 가시지 마세요.』

『왜 무슨 말들을 하더냐?』

『하다뿐이리까!』

『어떤 말을 하더냐?』

계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구를 끌어당겼다. 장구채는 저편으로 던졌기 때문에 손으로 장구를 두드렸다.

『왕손은 영락되고 김문만 흥성한다―

그 왕손이 무얼 하러 김문을 자주 찾아 다니세요?』

『글쎄 병기가 뭐라더냐?』

『대감 들으시면 좋지 못한 말들을 합지요.』

『어디 아무런 말을 해도 탓하지 않을 테니 말해 봐라.』

『상갓집 개같이 헤헤 해서 다니신다구……』

콱 얼굴에 피가 솟아올랐다. 그것을 흥선은 두어 번의 너털웃음으로 속여 버렸다.

『옳은 말이로다. 병기의 말이로다. 상갓집 개지. 옛 터를 잃고 굶주려 다니는 석파나, 주인을 잃고 구석을 찾아 다니는 상갓집 개나 다를 것이 뭐냐? 인제부터는 석파(石坡)라는 호를 버리구 상가구(喪家狗)라는 호를 쓸가 보다.』

『그러니 대감, 아예 다시는 가시지 마세요.』

『네 듣기에도 싫더냐?』

계월이는 그의 커다랗고 광채나는 눈을 굴려서 잠시 흥선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 뒤에 도로 눈을 떨어뜨려 버렸다.

흥선은 고즈너기 눈을 감았다.

『상갓집 개라!』

이 상갓집 개는 내일도 또한 병기의 집을 찾아보자. 수모를 하면 수모를 하느니만큼 더욱 자주 찾아보자. 살틈으로 기어 나간 한 신이 있지 않으냐? 그만 수모를 무엇을 탓할 것인가? 임시―한때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다. 먼 장래를 위하여 온갖 수모를 참고 온갖 고난을 참자. 한때의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제로라고 우쭐거리다가 큰 일을 저지르면 어리석은 노릇이다. 그들이 자기를 바보로 여기고 속 없는 놈으로 여기면, 자기는 더욱 더 그들에게 그런 눈치를 보여서 당분간의 안전은 도모하여야겠네.

『내일도 또 거기를 가 보아야겠는데……』

『꼭 몸소 가 보셔야 될 일이 아니거든 소인께 대리를 맡기세요.』

『계집으로는 당하지 못할 일이다.』

계월이의 입에서는 약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한숨 소리를 들으면서 흥선은 곤한 듯이 몸을 장침에 기대었다. 그리고 팔다리를 기껏 펴면서 기지개를 하였다.

『어 졸려!』

몇 집 건너 다듬잇소리는 그냥 연하여 들렸다.

이튿날 이 「상갓집 개」는 그의 초라한 모양을 또 다시 세도 김 병기의 집 사랑에 나타내었다. 병기는 출타하고 집에는 청지기가 있을 뿐이었다.

『그럼, 자네 방에 들어감세. 들어가서 대감 돌아오시기까지 기다리지.』

달가와하지 않는 청지기의 표정을 뻔히 보면서도 흥선은 앞장을 서서 청지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도집 청지기라 흥선 따위 영락된 군(君)은 눈꼬리로도 안 보이는 터이지만, 그래도 표면상 종실의 일원에게 대한 예의는 지키지 않을 수가 없는 그는 묵묵히 흥선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세도가 청지기의 방은 흥선의 사랑보다 훨씬 나았다. 그 꾸밈이며 방의 넓고 크기는 둘째 두고, 방바닥이 타도록 불을 뜨뜻이 때어 둔 것부터 흥선의 사랑보다 나았다.

『어, 방 뜨뜻하군! 나이 사십을 넘어서니깐 몸이 오삭오삭 늘 춥거던. 자네 방 참 뜨뜻할세.』

하면서 흥선은 대짜로 아랫목으로 내려가서 보료 아래 손을 넣으며 웅크리고 앉았다. 그 앉은 모양조차도 궁상스러웠다.

청지기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웃목에 종그리고 앉았다. 흥선으로서 만약 제 격식 찾을 자격이 있더라면, 어디서 청지기가 흥선의 있는 방 웃목에 종그리고 앉으랴만, 흥선 따위는 눈 아래 깔고 보는 청지기는 귀찮다는 표정을 감추지도 않고 웃목에 종그리고 앉았다. 흥선은 흥선대로 그것을 탓하지도 않았다.

『대감은 어디 행차하셨나?』

『알 수 없읍니다.』

흥선의 물음에 청지기는 뚝 하니 대답하였다.

『언제쯤 나가셨나?』

『그것도 소인은 알 수 없읍니다.』

청지기가 주인 대감의 출타한 시각을 모른다는 것은 너무도 사람을 무시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흥선은 탓하지 않았다.

『그러면 언제쯤 돌아오실지도 모르겠구면?』

『네, 알 수 없읍니다.』

『언제 돌아오시든지 나도 어차피 한가한 사람이니깐 기다리지. 방도 뜨뜻한 것이 괜찮구면.』

청지기가 분명히 싫어하는 것을 흥선도 모르지는 알고도 모른 채하는지, 보료 아래서 녹이던 손을 뽑고 보료 위에 올라 앉았다. 그리고 담배서랍을 끌어당겼다. 흥선은 담배를 피우면서 연하여 청지기에게 무슨 이야기를 걸었다. 응대하기가 귀찮은 청지기는 되는 대로 대답을 하였지만, 그런 것을 구애하지 않고 흥선은 연하여 신통하지도 못한 질문을 발하였다.

주인 김 병기가 자기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저녁 때가 되어서였다. 세도의 귀택―골목 밖에서부터 벽재 소리가 요란히 울리면서 대문을 위세 좋게 열고 병기의 행차는 제 집으로 들어왔다. 응대하기 싫은 흥선과의 응대를 억지로 하고 있던 청지기는, 주인을 맞으러 흥선을 버려 두고 달려 나갔다. 그 뒤를 흥선은 또한 바삐 따라 나갔다.

댓돌을 올라오는 병기를 청지기가 맞을 때에 흥선도 청지기의 뒤에서 병기를 맞았다.

『대궐에서 나오시는 길이오니까?』

병기는 흥선을 쳐다보았다. 한 순간 귀찮다는 표정이 그의 눈썹 위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 날은 병기는 마음이 매우 유쾌한 날인 듯싶었다. 한 순간 그의 눈썹 위에 나타났던 어두운 그림자는 즉시로 사라졌다.

『대감 언제 오셨소?』

『벌써 왔소이다.』

『들어가십시다.』

병기는 자기의 늦은 것을 변명하면서 흥선을 사랑으로 인도하였다.

그 날은 유달리 병기는 유쾌한 모양이었다. 흥선을 보기만 하면 그의 입에서 연하여 나오던 독설도, 이 날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벗과 같이 흥선과 담소하였다.

이 유쾌한 듯한 병기의 태도 때문에 흥선의 가슴에 뭉켜 있던 덩어리도 얼마만큼 삭아졌다. 병기의 말마따나 상갓집 개와 같이 가는 곳마다 수모만 받고,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구박만 받아 오던 흥선은, 이렇듯 자기에게 격의 없이 대하여 주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비록 어젯날까지의 원수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봄날 눈과 같이 녹아 버리는 것이었다.

『대감, 난초를 잘 그리신다더군요? 그런 기예는 언제 배우셨소?』

병기는 이런 말을 물었다. 거기 대하여 흥선은 겸손하였다.

『잘 그리기야 무얼 잘 그리겠소? 아이들 장난과 같은 것이……』

『어제도 그런 이야기가 났었는데, 탈속(脫俗)을 한 솜씨라던데요? 그런 같았기를 가지셨을 줄은 몰랐소이다.』

『특기가 다 뭐오니까. 노는 틈틈이 장난삼아 배운 노릇―남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럽소이다. 그 서투른 재간을 그래도 보아 주는 이가 있어서 때때로는 술값이나 됩니다.』

『한 폭 이병기를 위해서 휘호해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흥선은 눈을 들어서 병기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를 놀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여서―그러나 병기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대감께서는 그런 서투른 것이 아니라도 벽장 속에 진품이 많고 많을 터인데, 그런 변변치 않은 것은 드리기조차 부끄럽소이다.』

흥선은 이만큼 사양하여 두었다.

그러나 병기는 굳이 흥선에게 한 폭 그려 주기를 당부하였다. 사양하는 흥선에게 부디 그려 달라고 몇 번을 간청하였다. 여기서 흥선은 병기의 간청에 응하였다. 자기를 만나면 독설로서 자기를 늘 비웃기만 하던 병기가 오늘따라 유쾌히 다소를 하면서 그 위에 그런 간청을 하는 것이 흥선에게는 고마웠던 것이다.

『변변치는 못한 재간이나마 일간 하나 가져오리다.』

이렇게 약속하였다.

병기는 흥선의 가사 형편도 물었다. 언제 보니까 매우 총명하여 보이던 둘쨋 도령 재황이 잘 자라느냐고도 물었다. 흥선을 위하여 병기는 주안까지 차렸다. 그리고 흥선이 사랑하는 기생 계월이도 주석의 흥취를 돋구고자 불러 왔다.

어젯밤에도,

『아예 김 판서 댁에는 이후에는 가시지 마세요.』

하고 당부당부하였거늘, 그 이튿날인 오늘 또한 김 판서댁에 와서 술을 얻어 먹는 흥선을 계월이는 몰래 눈을 흘겨보았다. 흥선은 그것을 보기는 보았다. 그러나 모른 체하고 외면하여 버렸다.

흥선은 밤이 매우 깊어서 병기의 집에서 나왔다. 자기의 타는 사인 남녀를 빌려 주려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흥선은 어둡고 추운 밤의 거리에 나섰다.

인정에 약한 흥선은 오늘 몇 시간의 병기의 환대 때문에 그 사이 깊이깊이 마음에 새기었던 병기에게 대한 원한의 절반을 잊었다. 그리고 술에 취한 흥그러운 마음으로 콧소리를 하면서 교동 병기의 집에서 바로 건너편인 자기의 집으로 비틀비틀 돌아왔다. 벌써 거의 반원(半圓)에 가까운 달이 하늘 높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정월 초순 어떤 날이었다.

앞에 펴 놓은 명주―

그 앞에 단정히 앉아 있는 것은 흥선이었다.

붓에 먹을 듬뿍이 묻혀 가지고 한참 명주 폭만 내려다 보고 있다가 흥선은 왼손으로 방바닥을 짚으며 오른손에 잡았던 붓을 명주폭 위에 놀렸다. 손은 뛰놀았다. 위 아래 좌우로, 혹은 천천히 혹은 급속히―흥선의 손에 잡힌 붓이 노는 동안 한 포기의 난초는 명주 위에 그려졌다.

바위, 나무등걸―그 틈으로 벋은 길고 짧은 잎이며 점점이 빛을 자랑하는 몇 송이의 꽃―흥선의 정신을 모은 한 포기의 난초는 명주 위에 나타났다. 거기 낙관을 하고 흥선은 조금 물러앉아서 자기의 휘호한 난초를 굽어보았다. 기교보다도, 화법보다도 오히려 힘으로 찬 난초였다. 알지 못함이 아니며, 자각하지 못함이 아니로되, 패기에 난 그의 손끝은 기교를 무시하고 화법을 무시하고, 때때로 힘있게 길게 벋는 것이었다.

『싱거운 그림이로다!』

입으로는 이렇게 중얼거리지만 그의 입 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 기교를 무시하고 벋어 나간 난초 잎의 힘―만약 당시의 권문 가운데 참으로 난초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더라면 홍선을 단지 한 주착 없는 부랑자로 보아 넘기지 않았을 것이었다.

법에 벗어나서 길게 벋어 나온 잎이 있었다. 법에 벗어나서 가로 두드러진 나뭇등걸이 있었다. 이 법을 무시한 자기의 의기를 자랑스러운 듯이 잠시 굽어 본 뒤에 그 폭을 고즈너기 걷어 치웠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명주를 자기의 앞에 펴 놓았다.

흥선이 걷어 치운 난초를 청지기 김 응원(金應元)이 굽어 보았다. 흥선이 다른 명주폭 앞에서 다른 난초의 구상을 하고 있는 동안, 응원은 흥선이 그려 던진 난초를 굽어 보고 있었다.

이 기괴한 난초 앞에 응원의 마음은 차차 혼란되는 듯하였다. 한 포기를 휘호하면 휘호하느니만큼 주인 대감의 필법은 나날이 법을 무시한다. 나날이 그 기교가 더하고 완벽에까지 도달하여야 할 것이로되, 흥선의 난초는 그와 반대로 나날이 법을 무시한다.

그러나 그 법을 무시한 난초의 위에 흐르고 넘치는 「힘」을 응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법을 무시하였으면 그것은 당연히 「싱거운 난초」일 것이다. 이러한 응원의 상식적 판단을 거슬려서 법을 무시한 흥선 대감의 난초에는 그 힘은 여전히 있을뿐더러 필법을 무시하면 하느니만큼 힘은 더 늘어가는 것이었다.

기교 극치가(技巧極致家)로서의 응원의 상식을 무시하고, 응원의 알지 못할 길을 걸어나아가는 이 난초의 앞에 응원은 혼란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되지 않았다고 튀겨 버리기에는 너무도 힘으로 찬 난초였다. 그렇다고 훌륭한 난초라고 칭찬하기에는 너무도 기교를 무시한 그림이었다.

잠시 굽어보고 있다가 응원은 탄식하였다. 이 탄식성에 명주폭을 내려다보고 있던 흥선의 머리는 응원에게로 돌아왔다.

『싱거운 난초지?』

이 질문에 대하여 응원은 손을 들어서 난초의 잎 한 개를 가리켰다.

『여기가 너무 굵게 되지 않았습니까?』

흥선은 응원의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잠시 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동시에 오른손에 잡고 있던 붓이 응원의 가리키는 곳에 와 떨어졌다. 순간―그렇지 않아도 응원이 굵다던 잎은 마치 뭉치와 같이 굵게 변하였다.

『자 인제는 어떤가?』

악연히 흥선의 붓만 보고 있는 응원에게 대하여 흥선은 하하하하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여섯 간 병풍―

크고 작은 난초가 규칙 없이 벌여져 있는 병풍이다. 그 병풍 앞에 흥선은 청지기 응원과 함께 앉아서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 김 병기에게서 난초에 대한 칭송을 들은 흥선은 그 돌아온 즉시로 자기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재료를 준비하여 몸소 그린 여섯 장의 난초로 한 개의 병풍을 만든 것이었다. 낙척 종친 흥선이 세도 김 병기에게 보내는 선사―아첨물이었다.

병풍 앞에 앉은 흥선의 얼굴에는 득의의 표정이 역연히 나타나 있었다. 그 곁에서 보고 있는 응원의 얼굴에는 마땅치 못하다는 듯한 불만의 표정이 있었다. 흥선은 의견을 묻는 듯이 응원을 돌아보았다. 응원은 즉시로 대답지 않았다. 잠시 더 무거운 눈을 병풍에 던지고 있다가야 겨우 대답하였다.

『×판서 댁에 보낸 병풍보다 못하게 되었읍니다.』

『그것보다 밑천이 적게 들었거든.』

응원은 병풍의 난초가 못하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흥선은 병풍 자체가 못하다고 들은 모양이었다.

『밑천도 적게 들었거니와 공력도 적게 들었읍니다.』

『?』

『휘호도 ×판서 댁 것만 못하게 되었읍니다.』

흥선은 눈을 굴려서 응원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병풍을 보았다.

분명히 난초 그것의 기교는 이전 것만 썩 못하다. 흥선 자기로도 그것은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기교 그것이 전엣 것만 못하다 할지라도 전엣 것보다 흥선의 마음에는 더 드는 병풍이었다. 이것보다 더욱 좋은 난초를 보낼지라도 알아볼 병기가 아니요. 단지 되는 대로 먹으로 끄적거리어 보낸다 할지라도 역시 알아볼 병기가 아닌지라, 아무런 병풍을 보낼지라도 「보냈다」는 명색 이상은 될 것이 없으되, 그림 자체로 보아서 ×판서 댁에 보낸 병풍보다 썩 낫게 되었다. 그것을 못하다 감정한 응원을 흥선은 다시 미소로써 돌아보았다.

『못해도 할 수 없지. 또 다시 새로 만들자면 돈이 또 삭고……』

흥선은 몸을 일으켜서 병풍 가까이 가서 한 번 다시 병풍을 훑어 본 뒤에 찬찬히 접었다. 그리고 응원에게 명하여 잘 싸게 하였다. 겨울 날의 짧은 해는 차차 서편 창으로 기울어졌다. 부엌 며느리들은 저녁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설 때다. 병기에게 난초 병풍을 보낸 삼사 일 뒤에 흥선의 작다란 몸집은 또 다시 병기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며칠 전에 그렇듯 자기의 난초를 칭찬하던 병기인지라 병풍을 보냈으면 당연 기뻐할 것이며 그것이 기쁠 것 같으면 당연히 자기를 환대할 것이며, 자기를 환대하면 그 꼬리에 무슨 좋은 떡이라도 달려 있지나 않을까―이런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병기의 댁을 찾게 된 것이었다.

『일간 무양하시오?』

이런 때에 늘 얼굴에 떠오르는 비굴한 미소를 또 띄어 가지고 흥선이 이렇게 인사할 때에 병기는 책상을 앞에 놓고 앉아서 무슨 글을 읽고 있다가 머리를 조금 들어서 흥선을 본 뒤에 같이 상례도 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읽던 책으로 눈을 떨어뜨렸다.

가련한 공자 흥선―그는 며칠 전에 병기에게 난초 병풍을 선사하였는지라, 자기가 오기만 하면 병기는 당연히 기뻐서 맞아 줄 줄 알았다. 예기에 반하여 들어서는 참 차디 찬 눈찌를 본 흥선은 얼굴에 나타내었던 비굴한 미소를 걷어 치웠다. 그리고 주인이 지시도 하기 전에 발치로 들어가서 덜썩 주저앉았다.

병기는 눈을 굴려서 다시 한 번 흥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눈을 급히 도로 보던 책으로 옮겼다. 한참 책만 들여다보고 흥선의 존재는 모른 체하고 있던 병기의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흘렀다. 책에 무슨 미소할 만한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기회를 기다리던 흥선은 이 모시에 달려 늘어졌다.

『무슨 책이오니까?』

병기는 눈 가에 그냥 미소를 띈 채 힐끗 흥선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으로 책을 조금 들어서 그 뚜껑을 흥선에게 보여 주고는 눈을 도로 책으로 떨어뜨렸다.

「금병매(金甁梅)」였다. 손님이 와도 모른 체하고 병기가 일심불란히 들여다보고 있는 책은 무슨 귀중한 학문 경전이나 시서가 아니요, 한 개의 소설 비사였다. 그 소설에 열중하여 손님이 와도 모른 체하고 그냥 버려 둔 것이었다. 병기에게 있어서는 흥선 따위는 보통 사람의 축에 넣을 가치조차 없었다. 며칠 전에 조롱삼아 흥선의 난초를 칭찬은 하였지만, 그 뒤에 곧 그것을 잊어버린 그는, 그 뒤 흥선에게서 난초의 병풍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 병풍을 청지기에게 주어 버리고, 벌써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치 그에게 매일 들어오는 많은 선사품을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흥선의 온 정신을 박은 병풍 따위는 벌써 그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흥선의 얼굴에는 다시 비굴한 미소가 나타났다. 그 비굴한 미소에 어울리는 비굴한 말조차 그의 입에서 나왔다. 병기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맞추어 보려고, 마음에 없는 말로 「금병매」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두어 마디 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 때에 병기는 흥선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가지고 「금병매」를 읽었다. 병기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중얼거리는 흥선의 말은 단지 병기의 독서를 방해하는 데 지나지 못하였다.

한 두어 마디 헛소리를 하다가 이 낌새를 보고 흥선도 입을 봉하여 버렸다. 묵연히 앉아서 소설을 읽고 있는 병기의 곁에 흥선도 묵연히 앉아서 허리만 좌우로 젖고 있었다.

불쾌한 기분이 흥선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호소할 곳이 없는 불쾌였다. 제 아무리 병기가 소설만 읽고 자기를 안 돌아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나무람은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석양녘까지 흥선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병기도 때때로 담배를 붙일 때만 몸을 움직이고는 다시 책을 보고 하였다.

흥선은 드디어 병기에게서 병풍에 대한 사례를 못 들었다. 사례가 나오면 거기 매달려서 무슨 다른 말을 꺼내려던 흥선은 그 말을 꺼낼 기회조차 없었다. 석양녘까지 묵묵히 앉았다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킬 때는, 흥선은 울고 싶은 듯한 또는 노여운 듯한 기괴한 감정 때문에 (작별에 임하여 반드시 나타내야 할) 비굴한 미소조차 안 나타났다.

병기에게 작별하고 문을 열려던 흥선은 거기서 드디어 자기의 가장 귀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독서에 정신이 팔려서 병기는 혹은 자기의 난초 병풍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오늘 이렇듯 냉담한가 하여―

『대감, 일전에 변변치 않은 물건을 하나 보냈더니 받으셨는지요?』

『아 참!』

병기는 머리를 기울였다. 이즈음 수일 간 받은 수많은 물건 가운데서, 흥선이 보낸 물건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여 보는 모양이었다.

『감사하게 받아서 잘 먹었는데―그……』

병기는 병풍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흥선의 얼굴에는 우는 듯한 미소가 나타났다.

『가난한 사람은 무사분주라, 휘호도 잘 되지를 않아서 부끄럽습니다.』

병기는 비로소 생각난 모양이었다.

『참 좋습니다. 석파께 그런 재주가 있는 줄은 참 몰랐소이다. 잘 골방에 싸 두었지요. 우리 집 가보외다.』

이 입에 발린 치사에 대하여 흥선은 우는 듯한 얼굴로 대답을 하고 병기와 작별하고 나왔다. 내오던 흥선은 자기를 보내려고 제 방에서 나오는 청지기와 마주치자, 청지기의 방 안에 눈을 던졌다. 동시에 그의 발걸음은 그 곳에 붙은 듯이 딱 멎었다.

청지기의 방 발치에는 한 개의 병풍이 서 있었다. 그 병풍이야말로 아까 병기가 한 번은 잘 먹었노라 하고, 그 뒤에는 잘 싸서 골방에 비장하였노라던 병풍―흥선 자기가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감을 마련하여 정력을 다하여 흥선이 정성을 다하여 그려서 보낸 이 선물은, 병기의 댁 청지기의 방의 바람을 막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찬바람이 얼굴을 쏘는 한길에 나서서야 흥선은 비로소 이를 갈았다. 그의 양 뺨으로 흘러 내리는 눈물―그것은 단지 찬바람 때문뿐이 아니었다. 그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감정―그것은 단지 김 병기에게 대한 이 하응의 억분이 아니라, 일개 세도에게 이렇듯 모멸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무력한 종친」의 억울함을 대표한 감정이었다.

『으―ㅁ!』

한 잔의 술로 그의 목을 적시지 못하였으되,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몸의 중심을 잡지를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흥선은 저물어가는 거리를 자기의 집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겨울날 혹혹 쏘는 찬바람이 이 불쌍한 중로(中老)를 놀리는 듯이 그의 옷소매며 자락을 휘날리며, 머리를 푹 가슴에 묻은 채 종친답지 못한 상걸음으로 흥선은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