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16장~20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十六[편집]

『옥체 만강하옵신지 아옵고자 신 정 원용이 대령하왔읍니다.』

고희(古稀)를 지난 지 이미 구 년, 여든이라는 나이를 눈앞에 보는 늙은 대신 정 원용이, 대조전 마루에 끓어 엎디어 문안을 드릴 때에, 상감은 지밀(至密)에서 방금 아침 수라를 끝내고 대조전에 납신 때였다.

등극한 이래, 재상 가운데 상감이 믿고 힘입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정 원용 한 사람뿐이었다.

강화에서 농사를 짓고 세를 베는 한 개의 초동으로 지내다가, 갑자기 입궐하여 보위에 오른 상감은, 사면 모두 어마어마하고 서투르고 무서운 가운데에서, 처음에는 김 대비 한 분을 믿고 지냈다.

다른 재상 대신들은 모두 상감께는 무섭고 위엄성 있게만 보였다. 대신들이 당신 앞에 꿇어 엎디어 말씀 아뢸 때는 거북하기만 하였다.

그 가운데서 김 대비 이외에 다만 한 사람 백발 재상 정 원용뿐은 상감도 친애함을 느꼈다. 귀인답게 굵은 주름살이 박히고, 그 위에 허연 머리와 허연 수염으로 장식된 정 원용의 얼굴은 역대 사조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저절로 임금께 대해서는 무조건하고 복종하겠다는 온화한 표정이 새겨져 있었다. 이 온화한 얼굴의 재상은 위엄과 위의로써 장식한 다른 재상들과 달라서, 겁먹은 상감과 친애의 염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군신의 사이라기보다도―상하의 사이라기보다도―오히려 부자의 사이에 당연히 가져지는 친애와 존경의 염을, 정 원용에게 대하여 품고 있는 것이었다.

정종―순조―헌종―이렇게 삼 대의 임금을 섬기고 또한 사 대째의 임금을 모시러 강화로 왔을 때, 처음 대한 이 노재상은, 상감 재위 십 수 년 간을 통하여 인종과 굴복과 존경의 한결같은 태도로써 새 임금을 섬겼다.

그런지라, 명리와 욕아 때문에 섬기는 다른 재상들과 달라서, 상감은 정 원용에게뿐은 어버이로 섬기고 싶은 친애감조차 느끼는 것이었다.

다른 재상들이 무슨 말씀을 아뢸 때에는, 상감은 늘 황황하여서 당신의 몸조차 마음대로 가지지를 못하였다. 무슨 마음에 먹었던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유유낙낙 그들의 아룀에 혹은 옥새를 찍고 혹은 승낙을 하고 하였다.

그 일이 지난 때마다 당신으로서도 그 때 왜 이렇게 처단하지 않았는가 하는 후회를 하고 하였지만, 재상들과 당면하기만 하면 다음에 먹었던 생각은 모두 잊고 유유낙낙할 뿐이었다. 더구나 김 대비의 친척이자 또한 당신의 인척(姻戚)이 되는 김씨 일문에 대해서는 더욱 황황한 태도를 취하고, 「강화 도령」이라는 멸시를 받지 않으려고 거기 마음을 쓰노라고, 마음에 없는, 뜻에 안 맞는 일을 웃음을 보이고 하였다.

그러나, 정원용에게뿐은 그렇지 않았다. 본시 어질기 때문에 백성에게 대하여 가진 착한 정책을 정원용에게 뿐은 의견을 물으며 가졌던 의향을 그대로 말하고 하였다.

역대의 네 임금을 섬기는 원용은, 또한 임금을 섬길 줄을 알았다. 본시부터 대궐 안에서 귀공자로 자란 분이 아니고, 비천한 가운데서 그 십 구 년 전생을 보낸 상감이, 갑자기 대궐에 들어와서 얼마나 서먹서먹할지, 그 점도 짐작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원용이 상감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긴다는 것보다, 오히려 늙은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훈도하듯 하였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상감은 더욱 이 늙은 재상을 믿고 힘입고 하였다. 말하자면 상감은 정원용을 신으로 보지 않고 스승으로 섬긴 것이다.

『근래 언관(言官)들이 민사를 진언하지 않음은 웬일이옵니까?』

많은 대신 가운데 다만 한 사람 신임하는 재상을 지척에 부르고, 상감은 마음에 먹었던 말을 물었다.

원용이 황송히 허연 머리를 마룻바닥에 조았다.

『황공하온 하교이옵니다. 언관은 어전에 진언하는 것이 그 직책이오매 어찌 추호라도 게으르오리까?』

이 때에 상감은 수일 전의 사건을 분명히 머리에 그려보았다.

수일 전에 부호군(副護軍) 신태운(申泰運)이 「근일 민간에 소위 왜역수본(倭譯手本)이라는 것이 돌아서 혹세무민을 하는데, 그 장본인을 잡아서 엄벌하면 좋겠다」는 상소를 한 일이 있었다.

신태운은 간관(諫官)이 아니었다. 언책을 가지지 않은 한 개의 무변(武弁)도 나라를 위하여 이런 상소를 하거늘, 소위 간관들은 일체 그런 일은 모른 체하고 오로지 국록을 도식하기에만 급급한 것이 매우 불쾌하였다.

『아니외다. 내가 우매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근일같이 언로가 막혀 본 일이 종전에는 없었읍니다. 나는 비록 어보를 몸소 잡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촌부에 지나지 못하는 사람―여러 대신 재상들의 끊임없는 보좌가 있어야지 않겠소이까? 그런데……』

상감은 말을 끊었다. 좀 과한 말이 하마터면 나올 뻔한 것이었다. 대각(臺閣)에서 일체 진언이 없음은, 아 나, 국왕을 무시함이 아니냐―이렇게 상감은 하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역대 사조의 임금을 섬겨서, 임금의 마음을 촌탁하기에 밝은 원용은 상감의 하려던 말을 짐작한 모양이었다.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전하, 수대(首臺─大司諫) 임 백수(任百秀)를 찬배(竄配)하도록 처분이 계시옵기를 바라옵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러한 마음의 불평을 막연하게나마 발표할 수 있는 재상은 정 원용 한 사람뿐이었다. 영의정 김 좌근을 비롯하여 상공 육경, 누구든 상감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네의 생각을 가지고 와서 이렇다 저렇다 상감을 귀찮게 하는 뿐, 상감을 위하여 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에 상감은 이 높고 귀한 보위조차 불편하였다. 지나간 철 없는 시절―마음대로 자유로이 벌판을 뛰어 다니며,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로이 하던 「강화 도령」의 시절이 한없이 그리웠다.

지금, 한 번 옥체를 일으키면 내관들이 달려와서 부액(扶腋)을 한다. 한 말씀 구중에서 내면 여관들이 처분 내리기가 무섭게 거행을 한다. 그러나 얼마나 부자유롭고 답답한 생활이냐? 하고 싶은 일을 여기 기이고 저기 기이기 때문에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지금의 처지는 이것이 과연 행복된 처지일까?

몸은 지존의 위에 있어서 백성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임금」이라 하나, 상감은 즉위한 이래로 아직 백성들의 소식을 들은 일이 없었다. 이전 「강화 도령」시대에 겪은 바와 같이 지금도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아래서 도탄에 괴로움을 맛볼 것이로되, 당신의 귀에는 아직 그런 소문이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맞은편 늙은 재상을 굽어 보고 있는 동안, 용안에는 차차 적적한 표정이 흘렀다. 구중에서는 약한 탄식성까지 새어 나왔다.

『그것뿐이 아니라, 이즈음 보자면 각 지방의 수령의 천전(遷轉)이 빈번하고 내왕이 분분하니, 그것은 또한 웬일이오니까?』

노신 정 원용에게 대한 두 번째의 하문이었다.

『아무리 공사 삼일이라는 속담이 있기로, 이즈음은 너무 심한가 봅디다. 지방 수령은 그 곳에 오래 머물러서, 그 땅 지리 인정 풍속을 다 안 뒤에야 비로소 선정을 베풀 수가 있는데, 이즈음같이 천전이 빈번하면 백성은 다만 맞고 보내기에만 바쁠 것이 아니오니까?』

사색 당쟁이 심할 때에는, 어제는 노론, 오늘은 소론, 내일은 남인, 모레는 북인―이렇게 정부의 수뇌자가 바뀌었는지라, 수뇌자가 바뀔 때마다 지방 수령들은 따라서 바뀌게 되었다. 그런지라 「공사 삼일간」이라 하는 속담까지 생기고, 사흘만 지나면, 오늘은 사건도 그 때는 「비사건」이 되고, 오늘의 죄도 그 때는 공이 되게―이렇게 변화가 심하였다.

지금의 「공사 삼일간」은 그 시대와 같은 당쟁의 결과가 아니다. 매관 매작이 너무도 심하기 때문에, 수령자리를 이만 냥에 샀던 사람은 삼만 냥 내는 사람에게 앗기고, 김 병학에게 수령 자리를 샀던 사람은 김 병기에게 돈 내는 사람한테 앗기고, 약채전을 적게 보내는 사람은 수많이 보내는 사람에게 앗기고」이리하여 지방관의 변동이 무상하였던 것이다.

『황공하옵신 하문이옵니다. 질치(?痴) 미처 눈이 돌지 못하와 성념에까지 및게 하온 것은 죄당만사이옵니다.』

『듣건대 지방 수령들은 상세정공(常稅正供) 이외에 남징(濫徵)이 심해서, 백성의 곤란이 자심하다니, 그것은 또한 웬일이오니까?』

『황공하옵니다. 모두 이 우질(愚?)의 죄로소이다.』

『관서(關西)의 제읍에서는 공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조(田租)를 예징(豫徵)한다 하니, 그것은 또한 웬일이오니까?』

『황공하옵니다.』

『환곡(還穀)의 폐해 또한 적지 않다는 말이 있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 그 제도를 그냥 답습하셨음은 백성들의 곤핍함을 돕고자 하심이어늘, 탐관들이 그것을 악용을 한다니 그것은 또한 웬일이오니까?』

『너무도 황공하옵신 하교이옵니다.』

궁중 깊은 곳에 있고 호위하는 무리들 역시 지금의 악정의 장본인들이어늘, 그러한 환경에 있는 당신에게까지 악정의 가지가지가 새어 들어오니, 민간에서는 그 원성이 얼마나 크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이 들고 들어오는 문제는 어떤 것인가?

어떤 지방에 화재 혹은―수재가 있으니 상감께서 기도를 드립사, 군대의 조련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하니 조련을 정지하게 해 줍시사, 어느 능(陵)에 누구를 참봉으로 명하여 줍시사, 어느 누구는 어느 때의 명유(名儒)이니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게 해 줍시사, 어디 낙뢰(落雷)가 있음은 하늘이 노하심이니 상감께서 감선(感膳)을 합시사, 어느 제사에는 상감은 어떤 의대를 잡수시고 중전은 어떤 의대를 잡수셔야 하는 것이 격식이오매 그렇게 합시사, 옛날의 어느 선비에게 증작을 합시사―아무 이익도 없는 이런 문제만 들고 들어오니, 이것은 재상들의 어리석음이냐, 혹은 재상들이 상감 당신을 깔보고 하는 것이냐?

다른 대신들에게 하고 싶으면서도 못 하였던 말씀을 상감은 오늘 정 원용의 앞에 죄 피력하였다.

하교마다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늙은 대신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구슬같이 흘렀다. 이 지당하고 지당한 하교에 무엇이라 올릴 말씀이 없었다. 복종과 존경의 표시 이외에는, 나타낼 다른 말씀이 없었다.

간관(諫官) 몇 사람은 진언하지 않은 죄로 혹은 찬배, 혹은 삭관(削官)을 당하였다. 그리고 시시로 민정을 진언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어진 상감이었다. 일찍이 민간에서 장성하기 때문에 민간의 온갖 고초도 통촉하는 상감이었다. 그 위에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거느릴지도 짐작하는 상감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어질고 또한 그 전신이 초라하기 때문에, 권문들의 승세에 압도되어 먹은 마음을 발표할 기회가 없었다. 다만 권문들을 보면 어릿어릿하며 빨리 무사히 피하기만 도모하느라고 다른 겨를이 없었다.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은 무론 모두가 대비의 정치였지 상감의 정치가 아니었으며, 상감이 친정한 뒤에도 대비 재세할 동안은 일일이 대비께 여쭌 뒤에야 정사를 행하였으니 그 역시 김 대비의 정치였으며, 김 대비 하세한 뒤에 있은 몇 가지의 정치가 즉 상감의 정치인데, 그것은 모두 노신 정 원용을 통하여 행한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재상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문제는 모두 시시하고 너절한 「수속」에 지나지 못하는 문제이며―그것도 그 위에 자기네가 해결까지 죄 지어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지, 문제가 정치에 및는 일이 없었다.

그런지라, 후일에 가객(歌客)이 철종 재위 십 사 년 간의 태평상을 노래하고 가로되,

錦繡江山春似海

鶯花巷陌日中天

이라 한 것은, 그 십 사 년의 태평상을 노래하였다기보다도, 오히려 아무 정치도 없이 무사히 지나간 양을 비웃었다는 편이 옳을는지도 알 수 없다.

능(陵)을 고치며, 능에 행행을 하며, 옛날 유신(儒臣)에게 증직을 하며, 순조, 순조비, 헌종 등 선왕이며 대비께 존호를 추상(追上)하며, 혹은 조례(朝禮)를 받고, 혹은 사를 내리며, 연하여 옥새를 찍는 뿐―그 이상 특별한 정치라 하는 것이 얼마 없었다.

하문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알고 시은 일도 많았고, 고치고 싶은 제도며 법률도 많았지만, 너무도 어질고 내기(內氣)하기 때문에 모두 은밀히 생각한 뿐, 그 의사를 발표하여 보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그 발표하지 못하는 모는 정책을 그냥 삭여 버리기 위하여, 자연히 음일에 흘렀다. 하릴없는 대궐 안에서 적적함을 풀기 위하여는 그리로밖에는 호를 길이 없었다.

후일에 사가(史家)가 이 임금을 가리켜 용주(庸主)라 한 것은, 결과에 있어서는 그렇게 비평을 할 밖에 없었겠지만, 본질에 있어서 그 이가 그렇듯 용주이던 것이 아니고, 환경이 그 이로 하여금 그렇듯 어릿어릿하게 한 것이었다.

본시 미천한 가운데서 생장하고, 보위에 오른 것도 유년 시대가 아니요 열 아홉이라는 장년 시대인지라,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당신의 과거 때문에, 당시의 제상(유년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명문 공자로서 장성한)들에게 자연히 마음에 있는 대로 처분을 못 내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 어질고 내기한 상감을 두고, 권문 거족들은 마음대로 자기네의 길을 걸었다. 세상이 자기네뿐을 위하여 생겨난 듯이 아무 기탄 거리낌이 없이―간관들도 이 임금께 진언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었다, 진언을 한달사, 임금에게는 당신의 마음에 있는 처단이 그대로 내리지 못할 것을 간관들도 잘 알고 있으므로―그리고 섣불리 하다가는 척신 거족들에게 미움을 사서 큰코를 다칠는지도 알 수 없으므로.......

十七[편집]

일찍이 성하와 동반하여 대비께 들어가 뵈옵고 나온 이래, 흥선의 몸가짐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집에 있는 날이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하여 집에 돌아오더라도 있는 시간이 극히 적었다. 곧 다시 밖으로 나가고 하였다.

흥선의 난행은 과시 놀랄 만하였다. 천 희연, 하 정일, 장 순규, 안 필주―소위 후일의 「운현궁의 천하장안」이라는 일컬음을 들은 이 네 사람의 관속은, 흥선의 난행에 가장 좋은 짝패였다. 이 네 사람의 오입장이를 앞장 세우고, 흥선은 투전판이라 기생집이라 술집이라를 마구 돌아다녔다. 당시의 마음 있는 사람들은 이 흥선의 너무도 과한 난행에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영락되었기로서니 몸이 왕가의 친척으로 태어나고, 그 위에 그다지 먼 친척도 아닌 이상에는 왕가의 체면으로라도 좀 몸을 삼갈 것이지, 기생집을 공공연히 다니는 것조차 과한 일이거늘, 「천하장안」과 짜 가지고 기생집으로 몰려 오는 시골 오입장이를 알겨 먹기가 일쑤이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투전을 하여 그 사람의 돈을 속여 먹기가 또한 예상사였다.

그런지라, 좀 결기 있는 몇몇 사람이 부러 흥선의 흔히 다니는 기생집에 지켰다가, 트집을 잡아 가지고 흥선을 두들겨 준 일까지 여러 번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것도 흥선은 탓하지 않았다. 매를 실컷 얻어 맞고 코통이 모두 터져서 코피를 쿨쿨 쏟으며, 그의 작다란 몸집을 팔팔 날뛰며 결이 나서 그러는 양을 보면, 다시는 기생집에 발길도 안 할 듯하지만, 그 집에서 매맞고 쫓겨나서는 얼굴의 코피를 씻고 또 다른 기생집으로 찾아가는 흥선이었다.

경패라 하는 약방 기생의 집에 흥선이 자주 다닐 때의 일이었다. 경기 감영의 호방으로 있는 박모라 하는 사람이 그 경패의 집에서 흥선을 만났다. 본시 흥선의 인물이 덜 났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있는 박모는 흥선에게 향하여,

『대감이 소인께 곡배를 한 번 하면 수석(首席)자리를 대감께 내어 드리리다.』

고 제의를 하여 보았다. 그러매 흥선은 서슴지 않고 일어나서 곡배를 하였다. 그러나 곡배를 할 동안 박모는 일어서면서 흥선의 옆구리를 발길로 찼다.

『이 더러운 자식!』

임금에게밖에는 못하는 곡배를, 왕가의 친척이 한 천리(賤吏)에게 하는 무슨 일이냐? 박모는 그 절을 받지를 못하고 황황히 일어서서 흥선을 발길로 차고, 흥선의 엎드린 등에 침을 뱉고, 소매를 떨치고 기생의 집에서 나갔다.

박모의 발길에 채어서 굴렀던 흥선은, 박모가 나나 뒤에 일어나서 발에 채인 옆구리를 두어 번 쓸어 보고, 도포를 벗어서 박모의 침을 더러운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씻어 버린 뒤에 예사로이 경패의 곁으로 내려갔다. 경패도 이 꼴을 좋지 못하게 보았던 모양이었다. 경패도 소피를 보러 간다고 나갈 뿐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한참을 경패의 방에서 혼자 담배만 빨고 앉았다가, 그래도 경패가 돌아오지 않으매, 흥선은 하릴없이 그 집에서 나왔다.

『에익, 헛 절을 했군!』

절을 했지만 그 절의 효력을 보지 못했다는 불평이었다. 이렇듯 흥선은 끝 없는 난행을 거듭하였다. 담뱃대를 가로 문 채 술에 취하여 길모퉁이에 구겨 박혀서 잠을 자다가, 통행인의 발길에도 흔히 채였다. 얼굴이 반반한 계집종이라도 지나가면, 뒤를 따라가면서 무엇을 달라고 조르기가 또한 예상사였다.

「무뢰한」이라는 이름조차 이 때의 흥선에게는 도리어 너무 거룩한 이름이었다.

포교들은 차차 흥선의 일행을 알아보고 그 일행을 피하게쯤 되었다. 아무리 난행을 거듭한다고 할지라도, 정일품 현록대부 흥선군 이 하응을 체포할 권한을 갖지 못한 포교들은, 차차 흥선을 알아보고 흥선을 피하였다.

흥선은 몇 번 붙들려서 포청까지 잡혀 간 일이 있었다. 만약 흥선으로서 체포당하는 그 때에 정신이 있었다면 호통을 하며,

『나는 흥선군인데, 어떤 놈이 나를 붙드느냐?』

고 호령을 하였을 것이로되, 에 과취하여 정신을 잃고 행패를 하다가, 몇 번 포교들에게 붙들리어 포청까지 잡혀 갔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젠 포도청까지 그 얼굴이 알리운 흥선은 더욱 자유로이 횡행하였다.

천, 하, 장, 안―이 네 사람의 참모는 흥선의 곁을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이 장난꾸러기의 무뢰한 일패는 때때로 월장을 하여 남의 집 내청까지 들어가서, 문창을 침 발라 뚫고, 그 안에서 여름날의 저녁의 서늘함에 취하는 미녀들의 교태를 도규(盜竅)하는 취미까지 느꼈다.

누구인지 모르고 잡으러 따라오는 포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남의 집 뒷간에 몰아 넣고 달아나기가 일쑤였다.

물동이를 이고 가는 계집 하인들의 옆구리를 간지럼시키기가 일쑤였다.

술이 취한 뒤의 그들이 하는 장난은 끝이 없었다. 마치 어린애들과 같았다. 어깨를 겨루고 큰 길을 좁히며 돌아 다니는 꼴―침을 뱉지 않고는 보지 못할 꼴이었다.

관가에는 연하여 이 네 사람에 대한 소장이 들어왔다. 내정 돌입을 하였읍네, 투전을 하여 돈을 빼았읍네, 술먹고 돈을 안 냈읍네, 성군작당하여 공연한 사람을 두들겼읍네, 별의별 소장이 다 들어왔다. 그러나 관가에서 처분할 수 없는 흥선이었다. 돈 없고 세력 없고―그러나 정일품 현록대부라 하는 명색을 가진 흥선은 처치하기 귀찮은 존재였다. 직접 관가에 손해나는 일은 하지 않는지라, 관가에서는 눈 감아 버리는 것으로 최상책을 삼았다.

『에쿠, 흥선 대감 행차하신다.』

『어디? 참, 얼씨구, 얼씨구! 이건 갈지(之)자 걸음이 아니구, 머뭇거릴착(?)자 걸음일세. 호이호이, 어이구 죽겠다. 꼴 좋다! 저게 군(君)이 다 뭐야?』

『우리 집 개 황귀(黃耳)도 황귀군(黃貴君)이라고 붙일까?』

『흥선군이라고 붙이고 말우.』

거리의 시민(市民)들의 이런 조소를 받으면서 흥선은, 천 이방, 하 영찰 등과 어깨를 겨루고 나날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여보게 원!』

『여보게 형!』

『여보게 이!』

『여보게 정!』

천, 하, 장 안을 흥선군은 원, 형, 이, 정으로 불렀다. 천 희연은 「원」이라, 하 정일은 「형」이라 불렀다. 장 순규는 「이」라 불렀다 안 필주는 「정」이라 불렀다. 이 천하장안의 원형이정과 흥선의 일행이 밤의 거리를 횡행할 때는, 맨 하류 부랑자들도 도리어 피하고 하였다. 맨 하류 무뢰한이 기세를 뽑는 연유는, 저 편 쪽에서 자기네의 체면을 지킨다는 핸디캡이 있기 때문이어늘, 흥선군이며 천하장안은 자기네의 체면을 돌아볼 만한 고급 무뢰한이 아니었다. 삯군들과도 상투를 마주 잡고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리였다. 여기는 맨 하류 무뢰한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백강(白江)의 후손, 참판이 용은(參判 李容殷)은 괄괄하고 억세고 성미 급한 사람이었다. 이 용은이 어떤 때 하인들을 시켜 어떤 부민(富民)을 하나 잡으러 보냈다. 하인들이 주인의 명으로 그 부민을 잡으러 부민의 집에 이르러 보니, 자기네보다 먼저 판서 윤 정구(判書 尹正求) 댁 하인들이 그 부민을 잡으러 와 있었다. 거기서 하인들끼리 충돌이 되었다.

이 용은의 하인들은 주인을 닮아서 괄괄한 무리들이었다. 그 괄괄한 세로서 부민을 자기네가 잡아 가려 하였다.

그러나 선착권(先着權)을 가진 윤 판서 댁 하인들이 손쉽게 내어 줄 까닭이 없었다. 그 부민을 잡아 가기만 하면 주인도 한 몫 잘 보려니와, 하인들에게도 얼마만큼의 여경(餘慶)이 돌아오는지라, 하인들은 제각기 부민이라는 고기를 자기네가 잡으려고, 마지막에는 윤 판서 댁 하인과 이 참판 댁 하인의 사이의 격투까지 일어났다.

기운으로 이 참판 댁 하인들이 세었던 모양이었다. 이 참판 댁 하인들은 격투에 승리를 한 뒤에 부민만 잡아 가지 않고 「정당한 전리품(戰利品)」으로서 윤 판서 댁 하인들까지 잡아 가지고 위세 등등히 개선을 하였다.

『이 놈들아! 우리를 누구로 알고 잡아 가느냐? 우리는 윤 장작 댁 하인이로다.』

가련한 전패자들은 잡혀 가면서도 연하여 뽐내고 호통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당시 「윤 장작 댁」이라 하면, 「윤 판서」라기보다는 「윤 정구」라기보다는 더욱 유명하고, 온 근린의 부민들의 공포의 적(的)이었다. 윤 판서는 부민들을 잡아다 장작으로 두들겨 주고 하기 때문에 「윤 장작」이라는 별명을 듣던 것이다. 그리고 윤 장작 댁 하인이로라고 호통을 하면, 다른 재상가들은 슬며시 놓아 주던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이 참판을 본받아서 괄괄하기 짝이 없는 이 댁 하인들은 「윤 장작」쯤에 놀랄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민과 아울러 잡아 온 이 포로들을 주인 참판 영감께 바쳤다. 그 포로들을 받으면서 주인 참판의 호령이 이러하였다.

『그 놈들 윤 장작 댁 하인이라느냐? 그 놈들을 모두 묶어서 도끼 자루로 웅덩이 살이 해지도록 쳐라. 제가 장작이면 나는 장작을 패는 도끼로다.』

이 일 때문에 이 용은은 그 뒤부터 「이 도끼」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다.

이 이 도끼와 어떤 날 어떤 집 제사에서 흥선을 만났다. 본시 흥선의 행사를 아니꼽게 보던 이 도끼는, 처음에는 흥선과 대하기조차 귀찮아서 외면을 하고 있었다.

이런 좌석에서 먹기에 급급하여 염치를 돌아볼 줄을 모르는 흥선은, 여기서 한 잔 저기서 한 조각 끊임없이 먹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도 먹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의 옷에 장이며 술을 마구 뿌렸다. 이 도끼는 처음 한동안은 차차 옴쳐 들어가며 그것을 피하고 있으나, 정 참을 수가 없어서 드디어 고함을 질렀다.

『대감, 며칠 굶으셨소?』

한참 먹기에 정신이 팔렸던 흥선은 도끼 영감의 말에 눈이 퀭하여, 어리석은 웃음을 띄고 도끼를 바라보았다.

『대감! 속 좀 차리오. 대감 댁 할아버님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속 좀 차리오. 그렇게 시장하거든 이따가 우리 집으로 오시오. 그러구 대감 댁에 모신 위패는 모두 묶어서 다른 데로 가져다 모시시오.』

잠시 어리석은 미소로써 도끼를 바라보면 흥선은 겨우 입을 열었다.

『다른 데 모시려두 누가 받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지. 영감 드리리까?』

『에이! 사람 같지 않은 것!』

도끼는 뒷발로 방바닥을 차면서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였다.

이렇듯 더욱 난행을 거듭하는 동안, 흥선의 성격이 이전과 다르게된 또 한 가지의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전엔 예사로이 받던 일도 지금은 성을 잘 내는 것이었다. 대관 댁을 기신기신 찾아다닐 때에, 이전에도 많고 많은 수모를 받았지만, 한 번도 얼굴에 나타내어 성내어 본 적이 없는 흥선이었다. 그런데 이즈음은 차차 노여워하는 일이 많아졌다.

작다란 몸집, 뾰족한 얼굴을 새파랗게 하여 가지고, 노여운 듯이 중얼거리고 돌아가는 양이, 도리어 권문들에게는 재미스러워서, 그들은 일부러 전보다 더 많이 흥선을 놀렸다.

어떤 날 흥선은 김 병기의 내종사촌 되는 남 병철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남 병철은 역시 그의 외숙을 배경으로 삼고 당당한 세력을 잡고 있는 권문이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맏아들 재면이를 종친부(宗親府)의 무슨 관직이라도 하나 부탁하고자 왔읍니다.』

이 날은 흥선은 술도 안 먹은 모양이었다.

병철은 잠시 흥선의 얼굴을 보다가,

『대감 댁 맏도령은 대감과 달아서 좀 어릿어릿하답디다 그려?』

하였다. 「대감과 달라서」라 하는 말은 「대감과 같이」라는 반어(反語)였다.

『네, 좀 어리석기는 하지만 다 큰 녀석이 뻔뻔히 놀고 있는 꼴이 보기에 민망해서……』

『게다가 대감, 대감께 은밀히 충고하거니와, 이즈음 대감 좀 주의하시오. 이번 이 하전이 역모에 대감도 한 몫 끼었다는 세평입니다. 그러니까 대감 댁 도령을 어떻게 주선을 하겠소?』

흥선은 이 말을 들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되었다.

『에익! 그게 무슨말이람……』

흥선은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가지고 흥선은 입술을 떨었다.

병철은 여기서 큰 소리로 웃었다.

『무얼, 대감도 참예했지? 나도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아직껏……』

흥선은 그 뒷말을 듣지를 않았다. 그리고 발로 방을 차고 중얼중얼 무슨 저주의 말을 퍼부으면서 작별도 고하지 않고 나갔다.

『대감! 대감!』

말 없이 돌아가는 흥선의 등을 향하여 병철은 몇 번 고함쳐 보았다. 그런 뒤에 그 성나서 돌아가는 꼴이 우스워서 하하하! 웃었다.

이전 같으면 이런 일에 성낼 흥선이 아니었다. 이보다도 더 크고 역한 수모를 받고도, 정 참을 수가 없으면 돌아 앉아서 한참을 참아 가지고는, 도로 얼굴에 비굴스런 미소를 띄고 바로 앉고 하던 흥선이었다. 이 급작스러운 「성격의 변화」를 권문들은 재미있게 여기었다. 그리고 흥선이 오기만 하면 성낼 소리를 부러 하고, 성나서 투덜거리며 돌아가는 흥선은 웃으며 보고 하였다.

『차차 늙어 가면 노염도 많은 법이야. 흥선도 올해 벌써 마흔 둘이지? 분명히 경신생이지? 노염도 차차 많아 갈 나이야.』

『철을 팔아서 노염을 바꾼 셈인가? 노염을 알기 전에 철을 좀 알지. 이젠 들 나이도 됐는데……』

『철은 연년이 줄고, 노염은 연년이 는다. 주책 없는 인물!』

중인은 중인대로, 상놈은 상놈대로, 양반은 양반대로 모두 한결같이 흥선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연년이, 다달이, 지각이 줄어 가는 흥선을, 권문 거족들은 한 때의 심심풀이를 하기에는 아주 적당한 어릿광대로 여기었다. 흥선이 가는 곳마다 웃음의 꽃이 피고 하였다.

밖에서도 이전과 달라진 것과 같이, 가정 안에서도 흥선도 또한 이전과 달라졌다. 흥선이 가정에 돌아오는 시간은 극히 짧았지만, 그 셋은 시간 사이에는 아주 엄하고 규율 있는 가장이었다. 본시부터도 가정에서는 비교적 엄격한 가장이었지만, 난행의 돗수가 더하여 가면서 그 엄격함도 더하였다. 사랑에서는 천하장안의 네 사람의 친구를 모아 놓고 집이 무너질 듯 떠들다가라도, 발이 내실에만 들어서게 되면 얼굴에 나타났던 경한 표정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순식간에 엄하고 규칙 있는 가장으로 변하고 하는 것이었다.

『재황아!』

『네?』

흥선이 불러서 작은아들이 이렇게 대답하면, 흥선은 그의 눈을 힐책하는 듯이 굴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소년은 황급히 자기의 말을 정정하는 것이었다.

『불러 계시오니까?』

『오냐! 두멘 묘 오너라.』

그러면 소년의 의장에 가서 갓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옷벌 의대도 갈아 입으십니까?』

『아니로다. 입는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옷도 잡수신다고 해야 한다.』

이 무뢰한 이 하응이 무슨 필요로 제 작은아들에게 대궐에서 밖에는 통용되는 곳이 없는 궁화(宮話)를 가르치나?

『수건(手巾)이 아니라 수긴이로다. 바지는 봉지라야 한다. 저고리는 등의대라 한다. 머리는 마리, 눈은 안정, 코는 비중, 손은 수장, 발은 족장, 어깨는 견부, 허리는 요부, 상투는 치, 이빨은 어치, 혀는 설상, 귀는 이부, 젖은 유도―진지는 수라, 차는 다탕, 약은 탕제……』

소년은 까닭을 몰랐다. 자기의 지금 아버지에게 배우는 기괴한 언어가, 어느 나라에서 혹은 어떤 속에서 사용되는 말인지 그것조차 몰랐다. 그리고 단지 아버지가 가르쳐 주니 배울 따름이었다.

그 언어, 동작, 마음―모든 점에 대하여 작은아들에게 대해서는 감독과 감시가 여간 심하지 않았다. 거리에 나가서 동리 허튼 애들과 돈치기를 하며 노는 것은 괜찮으되, 가정 안에서 하인을 부린다든가 다른 가인들에게 대하여 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사소한 일까지도 감독하고 주의하였다.

어질고 현명한 부인은 지아버니의 하는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만약 가정에서도 흥선이 밖에서와 마찬가지의 난행을 한다 하면, 부인은 당장 어린아들의 훈육을 아버지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별별 망칙한 소문을 다 내는 흥선이로되, 가정에 들기만 하면 엄격하고 규율 있는 가장이 되는지라, 부인도 흥선의 훈육을 방임하였다.

부인은 아들이 지금 배우는 언어며, 행동이 어디서 통용되는 것인지 그 점은 짐작이 갔다. 그러나 자기네의 아들이 그것을 배울 필요가 어디 있는지는 알지 못하였다. 배움으로써 손해는 없는 일이며, 더욱 이 왕가의 근친으로 태어난 집안인지라 상식상 가르치는 것이어니, 이만큼 짐작하고 부드러운 미소로써 이 가르치고 배우는 부자를 보고 하였다.

이 나라의 양반 집안의 전형적 현부(賢婦)인 흥선 부인은, 지아버니 흥선이 밖에서 부리는 난행을 책하지 않았다. 밖에서 아무리 난행을 할지라도, 일단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엄숙한 태도로 자손을 훈육하는 그 지아버니를 존경하고 사랑할 따름이었다.

가내는 평온하였다. 단지 가난하여 생활상 부자유가 많은 것뿐이 이 집안의 흉점이지, 그 밖에는 나무랄 데가 없는, 안온하고 점잖은 가정이었다. 이 가운데서 소년은 몸과 영이 무럭무럭 자랐다.

十八[편집]

흥선의 이런 난행을 당시의 명문 거족들은 모두 흥미있게 보고 비웃고 있을 동안 흥선의 난행의 위에 경계의 눈을 붓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훈련대장 영어 김병국이었다.

영어는 일찍 소년 시대부터 흥선을 알았다.

열 다섯 살에 흥선부정(興宣副正), 스물 두 살에 흥선정(興宣正), 스물 네 살에 흥선군―이렇게 봉군(封君)이 되어 스물 일곱 살에는 정일품 현록대부로 되고,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이며,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官) 등을 역임할 동안의 흥선은, 결코 오늘과 같은 술주정군의 흥선이 아니었다. 작다란 몸집의 어디서 그런 큰 소리가 나는지, 흥선이 한 번 호령을 할 때는 부하 관리들은 모두 몸서리치고 하였다. 일 처리에 밝고 염치에 밝고 사리에 밝던 흥선이었다. 종친부며 도총부가 설치된 이래, 흥선이 재임했을 때만큼 일이 민첩히 신속히 명쾌히 처리된 적이 없었다. 위(威)와 은(恩)을 갖추어 상관으로서 부하 관리들에게 위포와 애경을 받고 있던 것이었다.

부산 장죽 길게 물고 호활한 음성으로 담소를 하던 당년의 흥선을 회상하건대, 그 사람이 후년 거리의 부랑자로 영락되리라고는 짐작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의 많은 명문 공자들이 모두 그 몸차림이며 언어, 행동, 동작을 흥선을 본뜨려고 얼마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애썼던가? 초헌에 높이 올라서 구종 별배를 전후 좌우로 거느리고 커다란 상투를 춤을 추이면서 길을 지나갈 때에는, 행객들도 모두 발을 멈추고 이 고귀한 공자에게 멀리서 경의를 표하지 않았던가?

그 흥선이 관직을 내버리고 은퇴할 때에, 세상은 처음은 다만 기이하게 여기었다. 그리고 은퇴한 이상에는 구름이나 희롱하고 학이나 벗하는 한 한가로운 귀인이 되려니 이렇게 알았다. 속세의 관직을 달갑게 생각각지 않아서 은퇴하는 것이어니 이렇게 알았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믿을 수밖에는 없을이만큼 당년의 흥선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렇거늘 그 흥선이 관직을 물러나서 은퇴한 뒤에는 어떻게 되었다. 한 번 떨어지면서 속세에 나왔다. 두 번 떨어지면서 속인과 사귀었다. 세 번 떨어지면서는 무뢰한이 되었다. 일찍이 종실 공자의 여기(餘技)로서 배운 난초는, 후년의 타락된 흥선이 기생집 바람벽에 휘호하는 그림이 되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동안, 이 관계에서 은퇴한 공자는 차차 속세에 발전하였다.

왕가의 친척이기 때문에 정계(政界)에 진출할 수 없는 흥선의 집안은 재산이 없었다. 재산이 없는 흥선이 직업도 없이 속세에 나다니노라니, 집안은 차차 꼴이 될 리가 없었다. 조상 전래의 보물도 하나 둘 차차 없어졌다. 마지막에는 이전에 타던 수레며 몸을 장식하던 관자며 갓끈이며, 집안에 남아 돌아가는 상이며, 항아리 나부랑이까지도 차차 팔아 없이하게 되었다.

일찍이 종실의 공자로서 행세하던 시대에 한성의 많은 명문 공자들과 사귀어 두었던지라, 어느덧 흥선은 당년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구걸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친구들도 그 구걸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도가 넘치게 되매 차차 눈살을 찌푸렸다. 구걸을 완곡히 거절하던 한때가 있었다. 그때가 지나서는 구걸을 노골적으로 물리치는 시대까지 이르렀다. 구걸을 거절을 받으면 누구나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흥선은 그 창피도 몰랐다. 창피를 모르는 것을 세상은 다만 이것이 흥선의 인격이거니 하였다. 왕년의 흥선과 대조하여 보려 하지 않았다. 왕년의 흥선은 벌써 잊은 것이었다.

처음에 차차 흥선이 타락되어 들어가는 것을 볼 때에,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왕족으로서 너무 잘난 체하다가는 그 화가 몸에 및는고로, 그것을 미연중에 피하고자, 혹은 흥선이 부러 타락하는 것이 아닌가―고. 그러나 차차 타락의 돗수가 넘어서 과하게 된 때에는, 모두 흥선을 내버리고 만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흥선과 가까이 사귀던 영어 김 병국도, 다른 사람의 예에 빠지지 않고, 흥선의 은퇴를 단지 벼슬에 마음이 없어서하는 일이거니 하였다.

은퇴한 흥선이 차차 타락할 때에는 처음에는 경이의 눈으로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흥선과 가까이 사귀고 흥선의 사람됨을 아는 영어는, 흥선이 유혹에 이기지 못하여 타락될 인물은 결코 아님을 넉넉히 알았다. 그러는 동안에 김씨 일문에서는 늘 서로 수군수군 의논해 가면서 왕족 중의 좀 똑똑한 인물을 점고하여 처치하고 하였다. 역시 김씨의 한 사람으로 그 수군거림에 참가하고 한 영어는, 비로소 흥선의 타락의 원인을 알았다. 똑똑히 굴다가 화를 보느니, 못나게 굴어서 목숨을 보전하려는 심경을 알았다.

이전에 흥선의 인물을 잘 알던 영어니만큼 흥선의 타락이 눈물겨웠다. 그만큼 잘나고 의지가 굳고 억세던 흥선으로 하여금, 타락을 가식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치 못할 지금의 세태를 밉게 보았다. 흥선이 일부러 타락을 가식하는지라, 구태여 그것을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자기의 모든 친척들이 흥선을 웃고 경멸하고 놀릴 동안도, 영어는 결코 그런 야비한 희롱에 참가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낸 친구로 끝끝내 대접하였다. 가난하고 타락된 흥선에게 대하여, 그래도 호의를 보여주는 사람은 영어 형제뿐이었다. 이제는 거리의 무뢰한 밖에는 찾는 사람이 없는 흥선 댁을, 영어는 일부러 간간 찾았다. 흥선이 영어의 집에 찾아오면, 지나간 시절에 같이 놀던 친구로 여전히 대접하였다.

이제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흥선―가난하나 또한 구걸할 곳도 없는 흥선의 곤경을 짐작하고, 때때로 적지 않은 금전을 보내기도 하였다. 흥선 댁 도령을 위하여서도 「연줄 값」이라는 명목으로 백 냥 이백 냥씩 보내고 하였다. 흥선 댁 작은도령이 이 「사동 아저씨」를 찾아 오기라도 하면, 친조카나 다름 없이 귀애하고 하였다. 당당한 왕손으로서 단지 그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타락된 행동을 하며, 뜻에 없는 비루한 언사를 하며, 가는 곳마다 수모를 받으며 다니는 흥선이 영어에게는 눈물겨웠다.

『상갓집 개!』

『흥설군!』

『먹걸리 대감!』

자기네의 일족이 흥선에게 대하여 이런 이름을 지어 주고 기뻐할 때에, 역시 그런 이름으로 부르며 웃기는 하지만, 내심으로는 흥선에게 대한 동정을 그냥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지라, 흥선도 그것을 짐작하고, 갑자기 어디 갈 일이라도 있으면, 영어에게 행차 하인을 빌어 가기도 하고, 가난한 흥선의 초라한 생일놀이나마, 놀이가 있을 때에는 영어를 반드시 청하고 하였다. 흥선의 작은아들 재황 소년도 영어에게만은 격의가 없이 놀러 다니고 아저씨 아저씨 하며 따랐다.

이 명철하던 공자가 오늘날같이 타락되지 않으면 안될―그 심경에 영어는 끝 없는 동정을 한 것이다. 그 뿐―그 이상 한 걸음 더 들어가서 흥선이 어떤 원대한 음모 아래 표면 타락을 가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까지는 생각이 및지 못하였다. 소위 이 하전 역모 사건으로 김씨 일문이 모여서 의논을 하다가, 지금 남은 종친 중에 똑똑한 인물이 이제는 없는가고 일일이 점고할 적에 흥선의 이름도 그 때 올랐다.

흥선의 이름이 나오매 그 때 모두들 무릎을 두드리며 웃었다. 흥선 따위는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 때 영어는 속으로 커다랗게 수긍하였다. 만약 흥선으로서 내로라고 그냥 접접거리며 다녔으면, 이 날 반드시 흥선의 이름 위에 흑표가 찍혔을 것이다. 눈물겨운 타락 생활을 계속하였기에 그 점고에서 패스한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뒤에 영어는 기괴한 일을 당하였다.

흥선에게서 예에 의지하여 행차를 좀 빌어 달라는 편지가 왔다. 여러 번째 보는 일이라 영어도 행차를 갖추어 흥선에게 보냈다. 행차를 보낸 것은 오정이 좀 지날까 말까 하여서였는데, 그 행차는 저녁 어두워서야 돌아왔다. 돌아온 하인의 말을 듣건대, 그 날 흥선은 대궐에 들어갔었다 한다. 배행으로는, 조 성하가 있었다 한다. 정일품 현록대부의 정장을 하였다 한다.

영어는 먼저 머리를 기울였다.

기괴한 일이었다. 흥선이 대궐에 들어갈 일이 없다. 어명으로 부르셨다 하면 영어 자기가 모를 까닭이 없다. 어명이 아닐진대 정장으로 대궐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흥선이었다.

이튿날 영어도 입궐한 기회에 내관에게 물어서, 흥선이 조 대비께 뵈옵고 장시간 무슨 밀의를 하였다는 것을 알고, 영어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이 놀랐다. 대궐 안의 규율로서 흥선이 제 아무리 종친이기로, 흥선의 뜻으로 대비께까지 가까이 가지 못했을 것은 정한 이치다. 대비의 권병으로서 대비가 흥선을 부르기 전에는, 흥선이 백주 공공연히 대비께 가까이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온 영어는 가슴이 송구하였다.

「조 대비와 흥선의 접근」

때가 때였다. 조 대비를 꺼리기 때문에 이 하전이를 없이한 꼭 이 때, 흥선이 조 대비의 부름으로 입궐한 것이었다.

단지 한 개의 우합(偶合)적 사실로 볼까?

그렇게 볼 수는 도저히 없었다. 조 대비는 혹은 종친의 한 사람으로서의 흥선의 이름은 기억할지 모르나, 대궐로까지 부를 만큼 친히 알 까닭이 없었다. 만약 친히 안다하면 이전에는 부른 일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우합적 사실이 아니다. 더구나 그 날(가난에 쪼들리어 변변한 도포 한 벌도 없는 흥선이) 새로 지은 관복을 차리고 위의 당당히 입궐하였다 하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흥선의 인물됨을 잘 알고, 겸하여 흥선의 지금의 가식적 인격을 간파하는 영어에게 있어서는, 이번의 조 대비와 흥선과의 회견이라 하는 것을 결코 무의미하게 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영어는 몸을 떨었다. 아직껏은 흥선이 단지 목숨을 도모하기 위하여, 마음에 없는 난행을 하거나 하고 그것을 동정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한층 더 깊이 세상의 눈을 감쪽같이 속이어 나아가면서, 그 이면으로는 궁중의 어른 조 대비와 결탁하고 놀라운 음모를 꾀하던 것을 명료히 직각하였다.

대궐에 조 대비를 뵙고 나온 뒤로부터는 흥선의 난행이 예전보다 십 곱 이십 곱 더 하여 가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릴 때에, 영어는 그 의의를 알고 더욱 두렵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영어의 취할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자기네의 일족에게 흥선의 가면을 폭로시켜서, 흥선을 또한 이 하전과 같이 처치하여 버릴까 하는 길이었다. 또 하나는 모든 것을 눈감아 버리고, 끊임없이 그냥 흥선과의 교제를 계속하여서, 이 후 세상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흥선에게 신임을 받을 준비를 해 둘까 하는 길이었다.

몸집이 큰 사람은 어리석다 하나, 영어는 몸집이 큰 비례로 비교적 영리한 사람이었다. 영어는 첫째 길의 위태로움을 알았다.

며칠 전에도 그 이야기가 났었지만, 이제 영어가 자기네의 일족에게 대하여,

『흥선은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사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외다. 흥선은 무서운 배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외다.』

하고 말한댔자, 일족은 용이히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백 걸음을 물러서서 일족이 그 말을 믿게 된다 할지라도, 흥선은 이 하전과 같이 손쉽게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한 사람이었다.

이 하전을 처치한 데 대해서는 지금 민간에서 말이 꽤 많다. 공공연히 이 하의 원죄를 역설하는 사람도 차차 생겨났다.

그런 위에 이제 또한 흥선을 「역모」라 하여 처치하여 버리면, 세상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흥선은 세상이 다 아는 판박이 무뢰한, 이 무뢰한을 역모라 하여도 세상이 믿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김가들이 왕족을 모조리 차례로 없이하려는 행동이다.』

당연히 이렇게 볼 것이지, 흥선 같은 인물이 역모를 하리라고는 삼척 동자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매 흥선의 정체를 들어서 일족에게 호소를 한다는 일의 십중 팔구는 남의 웃음이나 사는 행동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영어는 둘째 길을 밟기로 하였다.

아직껏 자기네의 일족 전부가 흥선을 웃고 수모하고 멸시하고 할 동안도, 영어 형제뿐은 흥선을 그렇게 대접치 않았다.

그런 허튼방이의 생활이 단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고육책인 줄 알고 그 심정에 동정하여, 모든 거만무쌍한 일족과 달리 그냥 우의를 계속한 것은 흥선도 알아 줄 것이다.

그 때는 단지 동정의 염으로서 교제를 계속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장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더욱 친밀히 흥선과 지내야겠다.

비록 일이 흥선의 마음대로 되지 못하여, 흥선이 끝끝내 일개의 무뢰한이라는 가면 아래 그의 일생을 마친다 할지라도 특별히 손해는 없는 일이요, 만약 장래에 마음대로 되어서 이 잠자는 호랑이가 포함성을 지르며 일어나는 일이 있다 하면, 지금의 크지 않은 동정은 그 날 놀라운 열매를 맺어, 영어 자기에게도 돌아올 것이다.

이리하여 영어는 모든 일을 알고도 모른 채,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난행을 하는 흥선과 그냥 따뜻한 우의를 계속하기로 작정하였다.

흥선의 둘째아들 재황 소년에게 대하여 아직껏 무심히(단지 순전한 동정으로) 써 오던 호의가, 장래 어떤 결과로서 자기에게로 돌아올는지, 영어는 그것을 고요히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 놀라운 사건(장래 이 일족의 운명을 좌우할)을 일족에게 피력하지 않고 혼자 알아 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권세의 대립」이라는 것이었다.

김 좌근, 김 병기 부자의 권세와 김 병학, 김 병국 형제의 권세가 차차 대립되어 첨예화하고, 그 때문에 일족의 사이가 좀 벌어진 것도 이 사건을 병국이 혼자서 알아 두고 다른 데 말하지 않은 커다란 이유의 하나였다.

『단언은 할 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점으로 보아서 혹은 그렇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영어였다.

그의 형 영초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영어가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형님도 짐작하시겠지요? 젊었을 때의 흥선군이 얼마나 사람이 분명하고 강직했었는지―그런데 아무런들 사람이 그렇게까지야 갑자기 변하겠습니까?』

이 때야 영초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혹은 자네 말이 옳을지도 몰라. 잘못 생각했는지도 몰라. 옳고 글코를 막론하고, 군가(君家)에 대해서 상당한 대접은 해야느니. 우리 문내에서 모두 흥선군을 수모하고 멸시해도, 나는 아직껏 그래 본 적이 없네. 우리의 이해 관계를 둘째로 두고, 우리가 이 나라에 태어난 이상, 이 나라 임금의 친척되는 이를 어떻게 멸시하겠나? 흥선군이 잘났건 못났건, 나는 상당히 늘 대접하네. 한 때 철없는 때는 내 세도를 자세삼아 수모도 했고 멸시도 했지만, 내가 철든 이래로는 푸대접을 해 본 일이 없네.』

『네, 저도 무론 전에 흥선군에게 푸대접을 하거나 한 일은 없었읍니다. 오죽하면 그 이가 그런 난행을 할까 하고 기회 있을 적마다 생활상의 조력도 하고, 나 보다 앞에서 다른 사람이 흥선군을 욕을 뵈려면 감싸 주기도 했읍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단지 동정심으로만 아니라, 자위책으로라도 소홀히는 대접지 못할까 합니다.』

동생의 말을 듣고 있던 영초는 머리를 들어 동생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흥선군의 작은도령이 무슨 생인가?』

『금년 열 살인 줄 생각합니다.』

『재……?』

『재황이.』

영초는 또 말을 끊었다. 잠시 있다가야 말하였다.

『여보게, 무서운 세상이 나타나리.』

『네……』

『만약―만약 말일세, 자네 추측대로 흥선군의 그 사이의 난행이 오로지 자기의 인물을 감추려는 가면이요, 그 가면 아래서 무서운 꿈을 도모하고 있었다면 장래에는 무서운 세상이 나타나리. 너 나 할 것 없이, 큰코 다칠 무서운 세상이 나타나리. 만약 흥선군이 이전 오위도총관 시대의 그 지력이 그냥 있고, 흥선군이 권력을 잡는 날이면, 필연코 무서운 세상이 나타날 것일세. 나도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이전 도총관 시대에, 뜰의 먼지 하나, 추녀의 거미줄 하나, 그 양반의 눈에 벗어난 것이 없었네. 만약 그 양반이 나라의 권리라는 것을 잡기만 하면, 남으로는 제주로부터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어느 소나무 한 그루, 어느 우물 하나, 그 양반의 손이 가 닿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일세. 가로 뻗은 쓸데없는 가지는 잘라 버릴게고, 맑지 못한 우물은 메워 버릴 게고……찬찬하고 끈끈하고도 왈왈한 성미―자네 말과 같은 세상이 온다면 무서운 세상이 될 걸세.』

『그러면?』

『그러면 무얼, 별다른 일이야 있겠나?』

『그러면 우리 일문은?』

『김가 이가 할 것 있겠나? 전에 제조(提調) 시대에도 본 바여니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무서울 겔세. 그 사람이 인재일 것 같으면 상놈 양반 구별하지 않고 쓰고, 무능할 것 같으면 아무런 좋은 배경을 가졌을지라도 내던지고말고……그 때문에 그 때도 말썽이 많았던 것은 자네도 기억하겠네 그려.』

영어도 몸을 떨었다. 인재 무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씨 일문은 당연히 흥선의 눈으로 보자면 원수일 것이다. 그 원수 일문에 대한 처치를, 만약 그런 날이 온다하면 흥선은 어떻게 하려는가?

『병기는 멋 없어 교만하게만 굴어서 흥선군을 망신 준 일이 여러 번 있지 않습니까?』

『있지.』

『형님!』

『?』

『언제 흥선군을 한 번 아니 찾아보시렵니까?』

『?』

『그 마음을 한 번 떠보면 좋을 듯해서……』

『그 사이 이십 년 간을 그런 수모 멸시를 받으면서도 한 번도 안색을 변한 일이 없는 흥선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갈 듯싶은가? 이러고 저러고 할 게 없이, 우리는 우리 일만 충실히 보세나. 만약 자네 눈이 글러서 흥선군은 사실 한 개의 치인이라면 말할 것이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 마음에 무서운 패력을 감춘 사람이라면, 소위 지금의 당파 문제 같은 걸로 유혈의 참극까지는 내지 않을 것일세. 그러니깐 두고 보세. 자네도 흥선군에게 개인적으로 미움을 사지 않았을 것이고,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원수가 없어. 장래의 일이 어떻게 되리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흥선군이 권세를 잡는 일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 형제게까지야 및겠나?』

형의 말을 들으면서 영어도 생각하여 보았다.

만약 자기와 자기의 형의 추측이 옳다 할진대, 장래 과연 무서운 세상은 현출이 될 것이다. 어떤 세상이냐고 누가 묻는다 하면 거기는 대답하기가 매우 힘들겠지만, 지금의 상식으로 추측하기 힘든 별다른 세상이 현출될 듯하였다.

『대궐에 원자(元子)만 탄생되면 문제가 없겠구만―』

『그러면야 문제가 없지. 그렇지만 나는 도리어 흥선군이 권세를 잡는 날이, 사실 한 번 와 봤으면 좋을 듯이 생각하네.』

『왜요?』

『지금 세상은 너무 타락됐어. 우선 나부터 그런 짓을 하지만, 나라 회계에 문서가 없고, 모든 사무가 혼돈 천지고―그 위에 같은 김문이라 해도 근(根)자 세도가 있고 병(炳)자 세도가 있어서 서로 경쟁하고, 병자 가운데도 교동(김 병기) 세도가 있고 사동(병학 형제) 세도가 있어서 서로 경쟁하면서, 벼슬을 팔고 학정을 하니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든지 힘 있는 이가 하나 생겨나서 위에서 꾹 눌러 놓아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망하네, 망해. 남이 하는 노릇이니 우리도 따라하기는 하지만 속으로 부끄럽기가 짝이 없어. 우리가 망할지도 한 번 세상이 뒤집혀지면 속이 시원하겠네.』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는 종친이 정치에 간섭지 못하고 또 산 대원군이 없지 않습니까?』

『그게야 꾸미면 될 것이지. 법령이란 내기 탓이 아닌가? 종친이 정사에 간섭지 못한다 해도 세조 대왕께서 잠저시에 영의정을 지내신 일도 있고, 선례(先例)가 없는 바도 아니니깐……좌우간 흥선군이 지금 치인의 행동을 하는 것이 가면이라 하면, 장래에 그맛 고생도 예상하지 않겠나? 무슨 수단을 죄 꾸미고 있을 것일세.』

『대왕대비마마를 인연해서 흥선군이 일어선다 하면 조 성하, 조 영하 등 조씨의 세도할 날이 오겠지요?』

『글쎄, 흥선군이 조씨를 중용(重用)할지? 인물이 잘났으면여니와, 그렇지 못하면 경이원지해 버릴걸. 이전부터 벌족(閥族)의 세력을 몹시 미워했으니까―』

『어명으로 하는 일에 대비인들 어떻게 할 수 없지.』

그 날이 분명히 올지 안 올지는 확언을 할 수가 없으나, 지금의 타락된 환경에 앉아 있는 이 형제(그다지 마음이 꾀어 박히지 않은)는 일종의 공포와 호기심이 섞인 마음으로 그 날을 기다렸다. 혹은 자기네 일족이 잔멸할지도 모르는 그 날을―

十九[편집]

조 대비와 흥선의 사이에 맺어진 밀약―그것은 어떤 것이었던가?

김씨 일문에게 인손이를 잃고 거기 대한 복수의 염 때문에 눈이 어두운 조 대비는,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릴 줄을 몰랐다.

『종실 공자 중에 한 영특한 소년을 신이 추천하리까?』

하면서 흥선이 자기의 둘째아들 재황이를 조 대비께 추천할 때에, 조 대비는 그 소년의 학식이 어떤지 인재가 어떤지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흥선이 추천하는 그 소년을 받는다 안 받는다의 말이 없이 제 이단의 문제로 들어갔다. 즉―상감께서 후사가 없이 천추만세하는 날에, 그 다음으로 보위에 오르는 사람은 승하한 상감의 후사가 아니요, 당신의 지아버님되는 익종의 후사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였다. 당신의 아드님 헌종이 순조 대왕의 대를 잇고, 그 뒤에 현 상감조차 순조 대왕의 대를 이어서 그만 절사(絶嗣)가 된 그 아버님의 대를 조 대비는 어떻게 하여서든지 부활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 의견에 대하여도 흥선은 찬성하였다. 이제 새로 들어오는 승계자는 조 대비를 양어머니로 삼고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맞장구를 쳤다.

새로운 상감이 들어오면 그 때부터는 김씨의 세력을 뚝 잘라 버리고, 김씨 일문을 잔멸시켜야 하리라고 이런 의견을 제출할 때에도 흥선은 찬성하였다. 너무도 뻗은 그 세력을 꺾어 버리고, 조 대비를 배경으로 한 조씨 일파와 흥선 자신의 친구들로써 내각을 조직하여 권세를 휘둘러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인정과 기지에 밝은 흥선이 고귀한 노부인의 마음을 꿰어 보고 잡아당기기는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조 대비의 김씨 일문에게 대한 노염이 몹시 큰 것을 보기 때문에, 흥선은 침이 마르고 혀가 닳도록 김씨들을 욕을 하였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김씨 일문의 유에 올라설 날이 오기만 하면, 김씨 일문은 종자도 남기지 않고 잔멸시킬 듯이 말하였다.

이 날 조 대비와 흥선의 사이에 성립된 밀약은 무론 「확실한 계획」이랄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장래 여차한 세상이 이르면, 여차한 수단을 써서 여차한 정책을 베풀겠다는 막연한 의논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비록 막연한 의논이나마 이후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조대비는 다른 모든 왕족을 젖혀 놓고 흥선을 부르고, 그때 불리기만 하면 흥선은 조 대비를 위하여 견마의 힘을 다하겠노라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하늘이 상감께 후사를 주려고 중궁이나 어귀 상궁의 몸에서 원자가 탄생할지는 모를 일이나, 왕실 공자 가운데서 동궁을 간택한다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대왕대비이며 종실의 어른인) 조 대비의 권병으로서 눌러 버려서, 상감 재세(在世)할 동안은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동궁을 간택하지 않겠다는 밀약도 성립되었다.

『대감만 믿으오.』

『대비전마마만 믿사옵니다.』

이리하여 이 날 흥선이 성하의 인도로 입궐하여 조 대비께 뵙는 몇 시간 동안에, 커다란 사건 하나는 여기서 빚어진 것이다. 후사가 없이 상감이 천추만세하는 날에는, 흥선군 이 하응의 둘째아들 이 재황이가 영립되어, 익종의 대를 이어서 제 이십 육대의 조선 국왕이 되리라는 놀랍고도 커다란 사건 하나이, 그것은 마치 지금부터 십여 년 전, 헌종 대왕의 황후가 위중할 때에, 그 때의 대왕대비이던 김씨와 김 대비의 오라비되는 김 좌근이가 헌종 승하한 뒤에는 「강화 도령」을 모시어다가 순조의 대를 이어서 제 이십 오대의 조선 국왕을 만들자고 의논한 것과 마찬가지로―

표면 모든 흥분과 긴장된 감정을 감추고, 그 날 흥선은 천연한 낯으로 조 성하와 함께 자기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감추기에는 너무나 큰 긴장과 흥분이었다. 시정에 영락되어 타락 생활을 거듭한 지도 십 수 년, 웬만한 감정은 모두 감추어 버리고 그런 기색도 나타내지 않는 흥선이었다. 그러나 이 날의 흥분뿐은 감추려야 감추려야 끝끝내 감출 수가 없었다.

그사이 갖은 수모를 다 받으며 갖은 욕을 다 먹으며, 그래도 그 모든 일을 참고, 귀찮고 쓴 세상을 그냥 살아온 것은, 장래 어떤 때 오늘 같은 날이 혹은 이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으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것을 막연히 기다리긴 하였지만, 구체적으로 그 날이 올 줄은 뜻도 안 하였던 바였다. 혹은 올지도 알 수 없는 바라 하는 막연한 희망으로, 모는 쓴 일을 쓰다 하지 않고 받아 오던 것에 지나지 못한다.

돌아보아야 튼튼하고 뿌리 박힌 김문의 세상에서, 언제 자기의 위에 꽃필 날이 올 듯하지도 않았다. 어서 길을 뚫고 어떻게 나아가야 될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막연히 바라며 구체적으로는 스스로도 코웃음치며 기다리던 날이, 이제 돌연히 그의 위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복은 누워서 기다린다는 속담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의 이 복은 흥선에게 있어서도 너무도 급속적이었다. 너무도 의외였다.

바라면서도 또한 스스로 부인하던 이 복이 홀연히 자기의 위에 떨어지기 때문에, 흥선은 아무리 감추려야 자기의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성하를 돌려 보냈다.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알고자 웃목에 읍하고 서 있는 성하에게, 아무 말도 알리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다.

성하를 돌려 보낸 다음에 흥선은 비로소 옷을 모두 편복으로 갈아 입었다.

앉아 있으려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흥분이었다. 그러나 일어서니 또한 어떻게 할 바를 알 수 없는 흥분이었다.

큰 소리로 외쳐서 자기의 이 흥분을 남에게 알리고 싶은 충동이 연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큰 소리는커녕 작은 소리로라도 남에게는 절대 알릴 수가 없는 흥분이었다. 한 번 남에게 알리어서 그 소문이 퍼지기만 하였다가는 자기의 위에 어떤 박해가 미칠지는 잘 아는 바였다.

흥선은 앉았다가는 일어섰다. 일어섰다가는 앉았다. 방안을 거닐다가는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러나 담배가 타기 전에 도로 내어던지고 하였다. 자기로도 자기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분간을 하지 못하였다.

어떤 시골 처녀가 내일이면 시집을 가는 그 전 날, 너무도 기뻐서 자기 집에 기르는 개를 붙들고 「개야, 나는 내일 시집간단다」 하였다는 심리를 이 때 흥선은 맛보았다. 오래 벼르고 기다리던 일―그러나 또한 당분간은 남에게 절대로 알릴 수 없는 비밀한 이 일에 흥분된 흥선은, 자기의 몸을 바로잡지를 못하고 마음이 들떠서 일어났다 앉았다 안돈되지 못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마음이 이렇게 들떠서 돌아갈 때에 누가 흥선을 찾아 왔다면 흥선은 그 때는 그 사람을 붙들고,

『여보게, 대비마마와 밀약이 성립됐네. 나는 멀지 않아서 대원군이 되네.』

하고 자랑을 하였을는지도 알 수 없다.

흥선이 이 놀라운 소식을 자기의 부인에게 알 게 한 것은, 그 날 밤도 깊어서 집안 하인들도 모두 꿈의 나라에 헤매는 삼경쯤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흥선도 극도의 흥분은 좀 삭아져 있었다.

흥선이 오늘 대궐에 들어가서 조 대비를 뵙고, 거기서 의논한 의논이며, 겸하여 그 사이 십 수 년 간을 마음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자기의 심경을 처음으로 자기의 부인에게 피력할 때에도 부인은 놀라지 않았다. 어떤 사건, 어떤 일이라도 이 부인을 놀라게 하지 못한다. 정유년(丁酉年) 겨울 그의 일생을 끝내기까지의 팔십 년 간의 짧지 않은 생애에, 어떤 놀라운 일이 돌발할지라도, 이 착하고 어진 부인은 고요히 그 사건을 맞은 것이었다.

이 날의 이 광희할 만한 흥선의 보고를 듣고도 부인은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한 뒤에 고요히 손을 들어서 이미 잠든 작은아들 재황이를 가리켰다.

『낮에 장난이 심하더니 곤히 잡니다.』

흥선도 그 아들을 보았다. 지금 철 모르고 곤히 자는 이 소년―일의 진행에 그다지 착오만 안 생기면, 장래에는 아들이라는 명칭으로는 도저히 부를 수도 없는 수년이었다. 낮에 장난이 심했기 때문에 얼굴이 모두 덜민 소년은,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간간 입을 뻥싯거리며 깊이 잠들어 있다.

흥선이 자기의 아들의 위에 부었던 눈을 부인의 편으로 돌릴 때에 부인은 말을 계속하였다.

『그 일이 장래 이 애에게 행복되겠습니까?』

그리고 거기 미처 흥선이 대답을 못할 때에 부인의 말이 뒤를 좇았다.

『지금도 아무 불만이 없이 잘 지내는데요.』

만약 장래 그 일이 행복이 못 된다 하면, 왕위조차 부럽지 않다는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아니, 이 애의 행복 문제가 아니라, 온 국민의 행복 문제외다. 학정, 토색, 외척 득세, 어지럽고 어지러운 세상에……』

『대감,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런 개혁은 모두 대감이 하실 일이지요? 어머니된 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읍니다. 천 사람이 망하고 만 사람이 망할지라도 내 자식 하나만 편안하면 그뿐이지, 남을 잘 살게 하자고 내 자식을 내놓기는 어미의 마음으로는 힘든 일이외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편네로서 대감 하시는 일에 이렇다 저렇다 말씀은 안 하리다마는, 제 생각뿐으로는 그저 이대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으며 지내는 편이 제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외다. 그렇지만 이 애는 부인에게만 아니라 내게도 자식되는 애―낸들 왜 좋지 않은 일에 넣고 싶겠소? 이 뒤에 그런 날이 온다 해도, 책임질 힘든 일은 내가 질 게고, 영예돌아올 일은 이 애에게 돌리고―그래서 거대하고 부귀한 나라의……』

대군주가 되면 오죽이나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흥선은 채 맺지를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공상적이요 너무도 허황한 그 말은 차마 입 밖에 나오지를 않았다.

부인도 아들의 얼굴을 굽어 보았다. 자기의 신상에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 또는 지금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를 위하여 어떤 의논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는, 연하여 무엇이 어떻다고 일을 벙싯거리며 곤하게 잠자고 있었다.

한참을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가야 부인은 머리를 지아버니에게로 돌렸다.

『마음대로 하세요. 대감의 의향에 계시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지 탓하지 않으리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편네가 무슨 참견을 하리까?―마는 이 애의 행불행은 대감께 책임을 맡깁니다. 불행하는 날에는 저도 몇 마디의 불평을 말하겠읍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서 귀여운 듯이 잠든 소년의 윤기 있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뒤로부터는 흥선은 자기의 난행의 방법을 고쳤다. 이 하전이 죽은 뒤부터는 가슴이 송구하여 더욱 난행을 심하게 하기는 하였지만, 대비와의 밀약이 성립된 뒤로부터는 한 가지의 행동을 더 가하였다.

이전에는 어떤 수모를 받고 어떤 눈물나는 일을 당할지라도, 자기의 모든 감정을 죽여 버리고 참기를 위주하였지만, 흥선은 그것은 부족하게 생각하였다. 너무도 용히 참기 때문에 도리어 저쪽의 의심을 살는지도 알 수가 없으므로, 흥선은 차차 성낼 만한 일에는 성을 내었다. 저편 쪽에서 무슨 불쾌한 일을 하면 불끈 성을 내며 혼자서 중얼거리며 자리를 피하고 하였다.

지금 자기의 몸은 귀하기가 짝이 없는 몸이었다. 이전에 막연히 기대할 때와 달라서, 지금은 정작으로 그것을 기다릴 지위에 서게 되었다. 대비와는 굳은 밀약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자기의 몸은 지금은 만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몸이다. 그런지라, 어떤 추태를 연출하면서라도 당분간은 속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전, 막연히 기다릴 때는 김문의 교태가 성도 나고 김문의 수모가 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내정된 지금에 있어서는, 그 교태 그 수모가 흥선에게는 도리어 코웃음밖에는 나지 않았다. 너희의 세도도 며칠이 남지 않았으니, 그 동안 마음껏 놀아 보라는 생각이 늘 들고 하였다. 이 코웃음나는 일을 흥선은 노염으로 대하고, 혼자서 중얼중얼 불평을 말하며 돌아가는 것이었다.

표면 이전보다 더욱 난행을 거듭하면서 이면으로는 흥선은 「그 날」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정에 영락되어 돌아 다니는 몇 해―이 공자는 고귀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시민들의 불평 불만이며, 그 성격이며, 생활 상태며 심리 등을 다 알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며 동기며 경로 등을 다 알고 있었다.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서 그냥 귀한 공자로서 길러난 사람들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모든 제도상의 결함이며 제도 운행상의 결함을 다 잘 알고 있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당연한 일로 알고 행하며, 또 이론상으로 보아서는 당연한 일이 그 실행된 뒤에는 아랫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미치게 되는지―이것은 위엣사람으로도 모르는 바요, 아랫사람으로도 모르는 바요, 다만 위와 아래를 골고루 다녀 본 사람이라야 처음으로 알 일이다. 고귀한 가문에 태어나서 영락된 무리들과 섞이어 논 흥선은 위엣일과 아랫일에 모두 짐작이 갔다. 그리고 어떤 일은 어떻게 하였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 것을, 그러지 않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두 짐작이 되었다.

누가 매관 매작을 한다. 마음이 착하던 사람도 매관 매작을 할 지위에 서기만 하면 반드시 매관 매작을 한다. 그러면 그는 왜 이렇게 갑자기 변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가?

아주 현명하다는 일컬음을 듣던 누가 어떤 곳 수령으로 가게 되면, 거기서는 반드시 명목 없는 세납을 받아 올린다, 많고 적음에 차이는 있을망정,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 그 현명하다던 사람은 왜 갑자기 그렇게 변하였나?

여기 제도상의 결함이 있었다. 학정을 하지 않고는 안 되는 그 원인은 「제도」에 있었다. 제도의 결함 때문에 그들은 자기네들도 자기네의 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인줄 알면서도, 그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도의 결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백성들은 그 관원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자, 이것 보게.』

흥선은 자기 앞에 놓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펴 보였다. 성하는 흥선의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一, 정一품… 쌀 두 섬 여덟 말, 콩 한 섬 닷 말

二, 종一품…쌀 두 섬 두 말, 콩 한 섬 닷 말

三, 정二품…쌀 두 섬 두 말, 콩 한 섬 닷 말

四, 종二품…쌀 한 섬 열 한 말, 콩 한 섬 닷 말

五, 정三품…쌀 한 섬 아홉 말, 콩 한 섬 두 말

六, 종三품…쌀 한 섬 닷 말, 콩 한 섬 두 말

七, 정四품 종四품…쌀 한 섬 두 말, 콩 열 서 말

八, 정五품 종五품…쌀 한 섬 한 말, 콩 열 말

九, 정六품 종六품…쌀 한 섬 한 말, 콩 열 말

十, 정七품 종七품…쌀 열 서 말, 콩 여섯 말

十一, 정八품 종八품…쌀 열 두 말, 콩 닷 말

十二, 정九품 종九품…쌀 열 말, 콩 닷 말

(대군―大君에게는 봄 석 달에 섬을 더 줌)

(흉년에는 더 감할 경우도 있음)

그것은 당시 정일품(正一品부터 종구품(從九品)까지 열 여덟 계급의 녹봉이었다.

『여보게 성하, 이것 보게. 소위 국록이라 하면 얼마나 많은 듯이 생각되겠지만 이게 아닌가? 나도 정일품 현록대부라는 덕에 나라에서 한 달에 쌀 두섬 여덟 말과 콩 한 섬 닷 말씩을 타 먹겠지. 자네도 자네 품계에 따라서 타 먹을 게야. 그렇지만 이 봉록으로 자네 생활이 유지되나?』

녹봉이 이런 것은 흥선이 지적하지 않을지라도 성하도 아는 바였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생활이 유지되느냐는 질문은 성하에게 있어서는 기이한 질문이었다.

『하옥 김 좌근―하지, 「정일품 보국 송록대부 김 좌근」일세그려. 이름은 좋지―그렇지만 나라에서 내어 주는 녹봉은 쌀 두 섬 여덟 말, 콩 한 섬 닷 말밖에는 약간한 직봉(職俸)밖에 없어. 그러나 김 좌근 하면 그 집안의 식구가 얼마나 되나? 청지기가 이십여 명, 별배가 이십여명, 구종도 또 그만하지. 게다가 그놈들의 여편네 자식 모두 있다. 사랑 친솔만 말일세. 내실에는 또 얼마나 하인 비복들이 많은지 몰라. 적어도 영의정의 집에 달려서 먹는 생명이 백 명이 썩 넘을 걸세. 그 백여 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 대감의 녹봉이 얼마냐 하면, 겨우 쌀 두 섬 몇 말 콩 한 섬 몇 말, 여기 현직에 대한 녹봉 약간―말하자면 영상 집 고양이 새끼 한 마리도 먹다 부족할 것밖에는 못되네그려……』

당시의 제도상 무슨 벼슬이든 하면, 종구품의 말직에 지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백주에 보행(步行)으로 길을 못간다. 하다 못해 나귀 한 마리, 마부 하나, 하인 하나, 이만한 하인이라도 있어야지, 그렇지 못하고는 길을 나가지를 못한다. 신분이 초헌(?軒)을 타게 되면, 적어도 초헌이러라는데 부축할 별배 여덟 명 이상과 구종 여덟 명 이상은 가져야 한다.

『재상이 죽은 뒤에 그 장례 비용이 없는 것을 자랑했다는 것은 옛날 일―지금은 한 번 행차에도 그만한 위엄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게―제도가 그렇게 된 이상―그리고 녹봉이 또한 그렇듯 박힌 이상, 매관 매작을 하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가겠나? 제도부터가 벌써 매관 매작이나 학정을 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하게 되었으니깐, 그 사람들만 잘못했다고 책할 것이 아니라네.』

거대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제도를 꾸며 놓고 그 위에 적은 녹봉을 내어 주는 것은, 배면으로 매관 매작을 장려하는 일로 볼 수도 있었다. 아직껏은, 그저 당연히 그런 일이거니 하여 두었던 일에 대하여, 흥선의 지적을 듣고 성하는 미소로 경이의 눈을 떴다. 그리고 흥선의 얼굴을 뚫어져라 하고 쳐다보았다.

흥선은 알아 듣겠느냐는 듯이 머리를 기울여서 성하를 들여다보았다.

외척의 발호라 하는 것이 또한 커다란 문제였다. 이전 대궐에서 조 대비와 흥선이 마주 앉아 밀약을 할 때에, 이제 김씨 일문의 세력을 깨뜨리고, 그 대신 다른 세력을 세움에는 조 대비를 배경으로 삼은 조씨 세력을 주장하마 하는 것이 한 개의 커다란 조건이었다. 그리고 또한 조 대비가 지금 암암리에 활동을 하면서 일변 흥선을 불러들이며 하는 것은, 결코 이 조선이라는 땅 위에 좋은 정치를 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바가 아니요, 오로지 흥선군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면 그 연조로 조씨의 세도가 생길 것이며, 오늘날의 김씨들의 차지한 모든 귀한 자리가 조씨들의 손으로 들어오리라는 야욕 때문이었다.

그러한 조 대비에게 대하여 그 때 흥선은 맞장구를 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흥선은 꿈도 안 꾸고 있는 일이었다. 김씨를 없이하고 조씨를 끌어들이면 무엇하랴? 그것은 이리를 내쫓고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데 지나지 못하는 일이다.

아직까지 왕이 갈리는 때마다 선왕의 신하들은 신왕에게 모두 몰락을 당하였다. 그리고 또, 지금 신왕의 총신이라 할지라도, 신왕의 현중궁이 승하하고 다른 비를 맞아들이기라도 하면 모두 또한 몰락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단지 왕비의 친척이기 때문에 조정의 귀한 자리를 차지한 허수아비들은, 자기네가 시재 차지한 귀한 자리를 자손자손이 누려 먹기 위하여는, 자연히 왕실에 대하여 별별 음모를 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네의 누이 혹은 딸 되는 왕비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되고, 그 왕자가 동궁으로 책립이 되면, 그들도 따라서 다음 왕의 대에까지도 세도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불행히 자기네의 누이나 딸 되는 왕비가 왕자를 탄생하지 못하면, 그 때는 그들은 자기네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종실에 대하여 별별 음모를 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별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누이(혹은 딸)를 잘 두었기 때문에 금관 조복으로 만민의 위에 서서 된 짓 안 된 짓을 다 한다. 그뿐 아니라, 한 번 왕이 천추만세하는 날에는, 뒤 왕을 자기네의 권력 아래서 택하여 내기 위하여 온갖 더러운 짓, 외람된 짓, 창피한 짓을 다 한다. 이것이 모두 외척 발호 때문에 생겨나는 폐단이다.

만약 이 뒤 언제 흥선의 손에 정권이 오는 날이 있을지면, 단연히 외척이라는 것을 눌러 버리는 것이 흥선의 본시부터의 마음이었다.

그 날 대비가, 그 뒤 조씨 세도의 날을 말할 때에 흥선은 맞장구는 쳤지만 속으로는 이 뒤 흥선 자기의 손에 정권이 돌아오기만 하는 날이면 김씨, 조씨, 민씨, 할 것 없이, 인재(人材)가 아닌 사람에게는 한 개의 벼슬도 주지 않으리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 일을 단행하기 위하여는 그 때 조 대비와 정면으로 충돌을 하게 될는지도 알 수 없지만, 정면 충돌을 하여서라도 조 대비를 눌러 버리고 조 대비가 지금 꿈꾸는 「조씨 세도의 날」은 현출시키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다.

지금 자기와 함께 때때로 일을 의논하는 조 성하―조 대비의 조카되는 성하는 흥선의 권세 잡는 날에는 자기도 한 몫 잘 볼 것으로 꿈꾸고 있다. 그러나 흥선의 눈에 비친 성하는 너무도 어렸다. 재간은 있고 지혜도 있고 마음보다 그만하였으면 그다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아직 지배력이 부족하였다. 남의 위에 올라설 수양이 부족하였다. 남의 아래서는 다시 없는 보조자로되, 위에 서서 사람을 지배하고 통괄할 역량이 없다. 만약 성하로서 조 대비의 조카라는 자기의 지벌만 자랑하는 인물일 것 같으면, 아무리 조 대비라는 배경이 있을지라도 흥선은 그를 녹사 하나도 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서원의 횡포―이것이 또한 허수로이 볼 문제가 아니었다.

본시는 옛날 거룩한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언행을 본뜨자는 뜻에서 시작된 서원이나, 그것이 타락되고 타락되는 동안, 지금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사면으로 해독을 끼치는 커다란 암종이 되었다.

옛날 성현들을 존경하자는 뜻으로 그들에게 준 특권을 그들은 악용하여 온갖 횡포한 것을 다 한다. 유교 사상에 젖고 또 젖은 이 땅에서 서원을 모두 철폐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적지 않는 문제이다.

이것은 국왕으로 도저히 행하지 못할 일이다. 국왕의 몸으로서 서원을 철폐시켰다가는 국왕의 지위에 반드시 흔들림이 생길 것이다. 국왕보다도 더욱 큰 권위를 잡은 사람―그리고 또한 국왕이 아닌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행하지 못할 노릇이다.

만약 장래에 자기에게 정권이 돌아오는 날에는, 이 수많은 서원을 모두 철폐하여 버리기로 흥선은 작정하였다.

장래 이 나라의 정권을 잡을 사람으로 내정된 흥선은, 그 날을 위하여 그의 활달한 눈을 온갖 곳에 붓고 비판하여 보았다. 보는 때마다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폐궁 경복궁의 개축 문제―

경복궁뿐 아니라 그 사이 돌보는 사람이 없으므로 무너지고 기울어진 조선 팔도 각 곳의 정자 누각 청사들의 수리 문제―

국고(國庫)와 권문의 사고(私庫)와의 구별이 확연하지 않기 때문에 어지럽고 어지러운 재정 문제―

관리 등용의 방법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섭게 횡행하는 매관 매작 문제―

조세(租稅)에 대해 상세한 법률이 없기 때문에 지방 수령들이 함부로 받아 벗겨 먹는 조세 문제―

무(武)를 너무도 낮추 보기 때문에 지금 근심하게 된 군대 문제―

거처와 활동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의복 문제―

필요 없이 긴 담뱃대며 필요 없이 큰 봉투 등으로 국민 생활의 쓸데없는 비용이 많이 나가는 점―

일일이 세자면 끝이 없는 이 많고 많은 문제를 모두 일시에 꺾어 버리고 다시 새로운 제도를 세우기 위하여 흥선은 그 방책을 세우기에 노력하였다.

이런 일을 모두 서서히 개량하자면 몇 대의 왕, 몇 백 년의 날짜를 가지고도 하지 못할 것이다. 썩어 들어가는 곳은 당연히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불평이 있고 많은 반대가 있을 것이나, 쇠뿔은 단김에 뽑지 않으면 안 된다. 흥선 자기로도 짐작이 안 가는 바가 아니거니와, 자기와 같은 사람이 조선 정계에 언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생겨난 이 기회에 모든 폐단을 단연히 잘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돌아보건대, 태조 건국한 때부터 벌써 움이 트기 시작한 왕위 계쟁 문제가, 지금 구르고 또 굴러서 자기의 아들의 앞에까지 이르렀지만, 이번 이 기회를 타서 그 문제까지도 철저히 해결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국왕이라 하는 것은 결코 종실의 가장뿐이 아니다. 종실의 가장이면서 또한 이 나라 삼백여 주의 주인이다. 그런 국왕을 종실의 연로자(年老者) 한 사람뿐의 의견으로 좌우한다는 이 제도부터가 글러먹은 제도다. 그 제도의 덕에 자기의 위에도 지금 바야흐로 영광이 떨어지려 하지만, 제도는 결코 옳은 제도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지럽고 시끄럽고도 많은 문제이다.

이 많고 어지러운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하여 흥선은 그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자기가 손을 써야 할 날이 이르기만 하면, 맹렬히 일어서고 그 굳센 주먹을 휘두르기 위하여 그 날의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몹시 긴장되고도 또한 명랑한 생활이었다.

조 대비와 자기의 사이에는 물론 단단한 묵계가 맺어졌다. 상감 승하하기만 하는 날에는 지금부터 십여 년 전에 강화(江華)로 굴러 내려갔던 어보가 이번 자기의 손으로 들어오게 약속은 되었다.

그러나 또한 생각하면 맹랑한 문제였다. 국왕의 승하를 기다리는 불충한 일과 다름이 없었다.

김씨 일문의 의심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더욱 난행을 거듭하면서도, 자기를 돌아보고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할 때도 흔히 있었다.

그 어떤 날 흥선이 여전히 잔뜩 취하여 김 병기의 집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 때 병기의 문갑 위에 선원보(璿源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는 그것을 무심히 보았다. 선원보가 한 권 놓여 있거니 이만큼 보아 두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김 좌근의 집을 찾으매 좌근의 정침에도 선원보가 있었다.

여기서 흥선은 이상히 생각하였다. 그리고 속으로 흥흥 코웃음쳤다.

무른 그럴 것이다.

건국 근 오백 년, 처음에는 한 분에게서 퍼진 자손이나 지금은 적지 않은 수효로서, 이 적잖은 왕족은 선원보를 뒤적여 보지 않고는 상고할 수가 없다. 그만큼 왕족들의 존재는 미약하였던 것이다.

표면 태평을 노래하는 그들이었지만, 내심 갈팡질팡하는 꼴이 역연히 보였다. 자기네의 일당의 한 사람인 김 문근의 따님(왕비)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기만 하면 이 이상의 안심되는 일이 없지만, 그렇지 못하면 김씨 일문은 과연 앞길이 막혔다. 왕자가 탄생하지 못할 줄을 미리 짐작이라도 하였지만, 다른 왕족 중에라도 그럴 듯한 사람을 어름어름하여 두었을 것이어늘,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왕족이라는 왕족에게는 모두 고약하게 대접을 하여서 서로 원수와 같이 되어 있는 지금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그래도 자기네 일족에게 그다지 악감을 가지지 않은 왕족이 행여 어디 있지나 않은가 하고 그들은 「선원보」를 상고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선원보를 상고하여 거기서 요행 김씨 일문에게 악감을 가진 듯한 왕족을 발견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동궁에 책립하기에는 조 대비의 응낙이 있어야 한다. 이미 흥선과 밀약이 성립된 조 대비는 김씨 일문의 의견을 응낙을 할 까닭이 없다.

골라 내어도 없을 것이고, 비록 있다 할지라도 조 대비가 응낙하지 않을 일을, 그래도 행여나 하고 선원보를 상고하는 그들의 꼴이 흥선에게는 가여웠다.

『화무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선원보를 곁눈으로 보면서 얼근한 소리로 이렇게 읊고 있는 흥선의 속마음을 김씨 일문은 알 리가 없었다. 더구나 흥선이 이렇게 찾아 다니는 것이 밑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는 행동으로는 추측도 할 수가 없었다. 흥선과 그들은 온전히 딴 나라의 사람이었다.

그 해 가을, 가을 바람이 몹시 산산한 어떤 날 민 치록(閔致祿)이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이 고해를 한 번 다녀 간 기념으로 금년 열 한 살 나는 어린 딸 하나를 남겨 놓은 뿐 쓰러지는 고목과 같이 거꾸러졌다.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없는 그의 임종을 보아 준 사람은, 그의 양아들로 들어온 민 승호와 승호의 누님되는 흥선 부인과 그의 어린 민 소저 뿐이었다.

『조카님. 부탁이오. 이 천애의 고아―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가련한 애를 가꾸고 길러 주시오. 이것이 마음에 걸려 눈이 감기지를 않는구려.』

야윈 얼굴에 두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이 당부를 한 뒤에 얼굴의 주름살을 펴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올 기약이 없는 길을 떠났다.

초라한 그의 장례를 따른 사람은 흥선 내외와 민 승호의 오누이뿐이었다. 이것이 「조선」이라는 거대한 떡을 앞에 놓고 죽기까지 서로 맹렬한 투쟁을 계속한 흥선 대원군과 민 중전의 그 첫 대면이었다.

흥선은 민 소저를 보았다. 숭굴숭굴 얽기는 하였지만 영특하게 생긴 소녀였다.

『몇 살이냐?』

『열 한 살이올씨다.』

『열 한 살, 열 한 살에 오늘부터 집안 주인노릇을 해야겠구나. 애처러워라! 승호야. 네 책임이 크다. 고인의 유탁이려니와 네 친누이보다도 더욱 마음을 써야 한다.』

흥선은 흰 댕기를 늘인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승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 날부터 소녀는 팔 걷고 나서서 이 집안을 다스렸다. 이 날을 상속한 자는 민 승호며, 따라서 민 승호의 아내야말로 이 집안의 주부이거늘, 소녀는 이 집안을 자기의 집으로 여기고 몸소 모든 것을 지휘하고 다스렸다. 이 소녀의 너무도 영리하고 민첩함은 간혹 그 도를 넘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해하는 일까지 흔히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또한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소녀는 스스로 이 집안을 다스렸다.

『작은아주머니!』

이 소녀가 너무도 간섭이 심하기 때문에, 집안 계집하인들은 소녀에게 이런 별명을 바쳤다. 그리고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괴한 환경이었다. 소녀는 이 집안에서의 자기의 입장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이 집안은 무론 자기의 친아버지의 집안이로되, 지금은 딴 집에서 들어온 민 승호의 아내(올케)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소녀에게는 자기의 입장이 불쾌하였다. 불쾌하기 때문에 소녀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권리를 감행하여,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소녀가 즐겨서 읽는 책은 「좌씨전(左氏傳)」이었다. 온갖 현부전(賢婦傳)이며 수신서를 피하고 소녀는 어렸을 적부터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연구하였다. 여자로서는―더구나 소녀로서는 당치 않은 「좌씨전」을 읽노라고, 자기가 참견할 가사에도 참견을 못하는 때까지 있었다.

이 때의 이 소녀의 환경과 입장과 읽는 책과 경험한 경력이, 후일 대원군의 간택을 받아서 왕비로 책립된 뒤에 그가 사용한, 그 놀랄 만한 권모술수적 정치―정치라기보다 오히려 술책―을 낳은 것이었다.

「작은아주머니―」

세상이 모르는 삼청동 한편 구석에서는 한 개의 작은 아주머니가 차차 장성하며, 그의 놀라운 지혜와 술모(術謀)를 기르고 있었다. 그의 양오빠 민 승호는 소녀에게는 좋은 친구요, 동지요, 고문이었다.

가을도 가고 겨울도 갔다.

신유년이라 하는 해는 고요히 과거장으로 감기어 들어갔다. 표면 역시 아무 변화가 없이 지난 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적지 않은 변동이 있었다.

이 하전이가 역모로 몰려서 죽었다.

왕자가 탄생되지 못하고 상감 승하하는 날에는, 이 하전이가 제 이십 오대의 임금이 될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하전이가 죽은 뒤에는 당연히 거기 얽힌 문제가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 대비와 흥선군 사이에는 밀약이 성립되었다. 이러는 가운데서도 상감의 건강은 나날이 좋지 못하여 갔다. 뇌빈혈을 일으키는 돗수가 더욱 잦았다. 용안이 종잇장과 같이 창백하게 되고 늘 수족이 떨리었다.

수라를 진어하는 양도 나날이 줄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아무 까닭도 없이 눈물을 소나기같이 흘리며 혼자서 체읍하는 일도 차차 많아졌다.

원자(元子)를 아직 못 보고 건강이 나날이 쇠해 가기 때문에, 김씨 일문에서는 갈팡질팡하였다. 아직껏 그 세가 너무도 컸는지라, 사면에서 미움만 사고 있는 김문은, 용상의 밑에 숨어서 그 지위를 그냥 보전하는 있었거늘, 이제 여차하는 날에는 그 일족을 잔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표면 무사 태평히 지나는 듯이 보이면서도 이 커다란 문제 때문에 그 일족은 갈팡질팡하였다. 어떻게 이 국면을 타개하려고 모이면 수군수군 의논하였다.

그러나 묘책을 나지 않았다. 수군거리면 수군거리느니만큼 근심만 더욱 커 갈 뿐이었다.

이러한 동안에도 그들은 더욱 급속히 더욱 맹렬히 매관 매작이라, 토색이라, 학정이라 온갖 못된 일을 더 발전시켰다. 어떻게 되면 정권을 잃을지도 알 수가 없는지라, 자기네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에 단 한 푼이라도 더 긁어 들이기 위하여 자기네 일족 안에서도 서로 경쟁을 하여 가면서 갖은 악행을 하였다.

흥선은 또 흥선으로서, 김씨 일문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밤낮을 가릴 것이 없이 허튼 생활을 계속하며, 남에게 손가락질받을 일을 따라다니며 하였다. 남의 침뱉을만한 일은 반드시 행하고야 마는 흥선이었다. 이 모든 일을 하여 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흥선이었다.

표면 특별한 대사건이 없이 지났다.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일로는 겨우 이 하전 역모 사건이라는 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흥선의 둘째도령의 운명이 작정된 해였다. 조선이라 하는 나라의 운명이 작정된 해였다. 김씨 일문의 잔멸의 원인이 생겨난 해였다.

아무런 악정(惡政) 아래서도 반항이라는 것을 할 줄을 모르는 이 어질고 착하고 기운 없는 백성과, 선정(善政)은 베풀고 싶지만 대신들의 낯이 어려워서 행하지 못하는 상감과, 「선정」이라는 말과 「악정」이라는 말의 의의(意義)도 모르는 위정자(爲政者)들과, 「의식(儀式)」이라는 것을 인생의 최대 중요사로 여기고 있는 선비들―이런 사람들의 모임인 조선이라는 나라에 신유년(辛酉年)이 고요히 타고 넘어갔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이 불려는지 예측할 수 없는 임술년(壬戌年)이 이르렀다.

임술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고요한 삼천리의 강토에 조금씩 풍파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반항」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백성에서 조금씩 반항의 움이 돋기 시작하였다.

二十[편집]

신유년에서 임술년에 걸쳐서 정치의 타락은 극도에 달하였다.

태조 건국한 이래 근 오백 년 간, 이 때만큼 정치적으로 타락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 권도를 잡은 김씨 일문은, 자기네의 세력을 그냥 유지하기 위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자기네들의 지금 권세의 근원되는 상감께 후사가 아직 없고, 그 위에 건강은 나날이 쇠약하여 가는지라, 언제 세상이 뒤집힐지 알 수 없으므로, 뒤집히기 전에 넉넉히 준비하여, 뒤집힌 뒤에도 낭패가 없게 하려고 전력을 다하였다.

세상은 어수룩하였다. 세상은 그들의 내막을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그들의 세력이 천만 년이나 가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온갖 일을 그들에게 힘입으려 하였다.

김 병기는 날래고 꾀 많은 사람이었다.

병기의 집에 드나드는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원모(元某)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병기는 특별히 그 사람을 사랑하였다.

원모는 사람됨이 착하고 꾀 없는 사람이었다. 꾀만 있는 사람이면 병기에게 그만큼 총애도 받는지라, 벌써 누만의 재산과 권력을 얻어 잡았을 것이로되, 직하고 꾀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구차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병기로서 마음에만 있으면 원모를 어떤 고을의 수령쯤으로나 보내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병기는 원모의 인물됨을 잘 아는지라, 수령으로 보낼지라도 역시 꾀 없고 직한 원모는, 구차히 멋적게 지내기나 헐 것을 짐작하므로 그냥 버려 두었다.

어떤 날, 병기의 집에 무슨 연회가 있어 사람들이 가득히 모여 있을 때였다. 병기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원 아무개, 원 아무개!』

불렀다. 그리고 들어온 원모를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쳤다. 원모는 가까이 이르렀다.

중인이 보는 앞에서 병기에게 친히 불리어서 가까이 가는 것만 해도 여간한 우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병기는 원모의 귀를 끌어다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였다.

『여보게, 내 오늘 밤 자네 자당 찾아가네.』

음담이었다.

마음이 직한 원모는 벌컥 성을 냈다.

『대감, 그게 무슨 말씀이오? 철 없는 소리를……』

얼굴을 검붉게 하여 가지고 원모는 소매를 떨치고 그만 제 집으로 돌아갔다.

원모가 돌아간 뒤에 병기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하인을 연하여 원모의 집에 보내서 노염을 끄고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모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 소문이 퍼졌다.

―병기가 많은 사람 앞에서 원모를 가까이 불러서 귓속말로 무슨 부탁을 하였다. 그러매 원모는 그것을 거절하고 돌아갔다. 돌아간 원모를 병기는 연하여 하인을 보내어 달랬다. 그러나 원모는 종내 듣지 않았다.

―이런 소문이었다.

그 다음부터 가난하고 직한 원모의 집에는 매일 「청대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병기의 청을 거절하고, 또한 거절당한 병기가 도리어 미안해하는 것을 보매, 원모는 병기에게 여간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라―이런 견해 아래서 원모의 집은 「청하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장마당같이 되었다.

이리하여 김 병기는 귓속말 한 번으로, 고지식하고 돈벌 줄 모르는 원모를 저절로 앉아서 돈이 생기게 하여 주었다.

이것은 병기의 슬기로운 성격을 말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또한 당시 병기―뿐만 아니라, 김씨 일문의 세도가 얼마나 당당하였는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김씨 일문의 일거 일동의 반향은 이만하였다. 진실로 밝은 하늘조차 흐리게 할 만한 세도였다.

당시의 정계(政界)가 얼마나 타락하였는지, 여기 몇 개의 에피소우드로써 그 상황을 말하여 보겠다.

함경도 사람 홍 순필―서울 올라와서 물을 지고 있었다. 순필이의 동생도 역시 형과 같이 물을 져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동생은 나이가 스물, 얼굴이 예쁘장스럽게 생겼다. 그 동생이 우물에서 늘 물을 긷는 동안에, 어느덧 나주 합하 양씨(영의정 김 좌근의 애첩) 집 하인과 사귀게 되었다. 사귀게 되자 그 집 행랑에도 놀러 다니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음탕한 양씨의 총애까지 사게 되었다. 동생이 양씨의 총애를 사게 된 얼마 뒤에 형 되는 홍 순필은 함경도 어떤 고을의 수령을 배수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어젯날까지의 물장수는 당당한 현령이 되어, 양씨의 주인 하옥 김 좌근에게 이끌리어 상감께 사은 숙배를 하러 입궐을 하였다.

몸에 어울리지 않는 관복을 입기는 하였다. 양씨며 하옥에게 말을 많이 들었거니, 꼴은 되었건 안 되었건 곡배(曲拜)를 드리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이 장관이었다.

『노형이 나랏님이오? 처음 뵙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함경도 아무 데 사는 홍 순필이라는 사람이오.』

이 현령은 상감과 통성명을 한 것이었다.

어진 상감이었다. 그 위에 전생을 초라히 지난 상감이었다. 상감은 이 무지를 관대히 보았다. 그리고 쓴웃음만을 웃었다. 당신의 전생을 생각하여 순필의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면의 책임자인 영의정 하옥 김좌근이 가만히 볼 수가 없었다. 유사 이래로 고금 동서를 무론하고, 국왕과 통성명을 한 유일인인 홍 순필을 하옥은 황황히 끌고 도로 나왔다.

임지(任地)에 부임을 함에 임하여, 이 현령은 다시 상감께 하직을 고하러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들어갈 때는 이전의 망신을 미루어, 하옥은 끈끈히 홍에게 말을 주의시켰다.

임금께는 상감이라 하여야 하는 것이며, 자기를 가리켜서는 신이라 하여야 하는 것이며, 온갖 말에 지극히 존경하는 말을 써야 한다고 누누이 일러 주었다. 이리하여 다시 입궐한 때였다.

얼마 전에 창피를 당한 이 현령은, 이번은 그 날의 실패까지 모두 회복하려고 잔뜩 마음을 벼르고 들어가는 참, 하옥이 절하기 전에 먼저 덥썩 절을 하고 주저앉았다.

『여봅쇼 상감, 며칠 전에는 진실로 안 됐사와요. 그 때 내―아니―저……』

말이 막혔다. 「신」을 잊었다. 그, 저, 한참을 어물거렸다. 무슨 발에 신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미투린지 갖신인지 버선인지를 잊었다. 그래서 한참 어름거리다가,

『버선이 그만 알지를 못 했사와요.』

하여 버렸다.

상감도 알아 듣지 못하였다. 하옥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리고 그 장면은 어름어름 지났다. 이리하여 무사히 하직을 고하였다. 이 현령이 대궐에서 나와서 자기의 동생에게 한 술회―

『임금에게는 저를 기껏 낮추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나」라지를 않고 「버선」이라고 기껏 낮추 한단 말이로다.』

이러한 조제 남조의 방백 수령들이 팔도 삼백 주로 퍼져 나갔다. 그들에게 선정(善政)이 있을 까닭이 없다. 이 땅의 옛 말의 대부분이 무지한 원님의 넌센스한 정사를 비웃음에 있음이 그 근원이 여기 있다. 진실로 전무후무한 수령 조제 남조의 시대였다.

강생(姜生)이라는 사람과 옥생(玉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같은 고을에서 같이 배우며 자란 젊은이었다. 얼마만큼 배운 뒤에 이제는 배움을 중지하고 벼슬이라도 하기로 하였다.

『난 내 고을 수령 노릇을 하겠네.』

『나도 내 고을서 하겠네.』

같은 고을서 자란 두 사람이 제각기 제 고을의 수령을 별렀다. 그들이 경쟁을 하다시피 벼르기만큼, 그들의 자란 고을은 부읍(富邑)이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꼭 같은 목적을 가지고 묏산자 보따리를 하여 지고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한 사마이 앞에 돈 만냥씩 지녀 가지고―

『누가 먼저 성공하나 어디 봄세.』

이렇듯 경쟁이 시작되었다.

강생은 어떻게 어떻게 하여 김 병기에게 가까이할 기회를 얻었다. 그 동안에 옥생은 역시 어떻게 어떻게 하여 김 여기의 아버지의 애첩 나합 양씨에게 가까이할 기회를 얻었다. 병기에게 가까이한 강생은 병기에게 드나들 동안 병기의 인물을 알았다.

교만하고 혈기 있고 뽐내기를 즐겨하고 체면을 매우 지키면서도, 또한 아첨을 좋아하고 돈을 좋아하는 병기의 인물을 알아본 강생은, 병기가 알 듯 모를 듯이 뇌물을 드리며 알 듯 모를 듯이 아첨을 하며, 이리하여 얼마를 지내는 동안, 병기에게 사랑을 받게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러한 얼마 뒤에 강생은 목적하였던 바와 같이 자기의 고향의 군수를 벌었다.

이러는 동안, 옥생도 또한 목적하였던 바와 같이 양씨의 마음까지 사게 되었다. 옥생이 양씨의 마음을 산 지 얼마 뒤부터, 양씨는 하옥 대신에게 밤마다 옥생을 모군 군수로 시켜 달라고 졸랐다. 양씨의 청이면 아무 것이라도 듣는 호인 하옥 대신은, 양씨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그러마고 승낙을 하였다.

이리하여 양씨에게 승낙을 한 하옥은 자기의 아들 병기를 불렀다. 그리고 옥생을 모군 군수로 임명되도록 주선을 하라고 명하였다.

병기는 딱하였다.

강생을 모군 군수로 임명시킨 지 불과 사오 일인데, 이제 또 다른 사람을 주선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는 병기는, 유유낙낙하고 물러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군에는 현재 군수가 있다. 그런데 병기는 강생을 보내기 위하여 그 군수를 「수령이 심하여 민원이 크다」는 구실로써 파면하도록 죄상을 하여 그렇게 꾸민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또한 옥생을 어떻게 임명하도록 운동하나?

수단은 한 가지밖에는 없었다. 이제 취소는 못할 노릇―강생을 또한 파면하고 옥생을 임명하도록 할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모군 군수 강모는 수령이 심하와 민심이 동요되옵고, 그대로 방치하였다가는 불상사가 생길 줄로 아뢰옵니다.』

예궐을 하여 이렇게 상감께 아뢸 때는, 병기의 등에서도 식은땀이 흘렀다. 이리하여 강생은 파면이 되었다. 돈 만 냥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병기를 알아 가지고 운동한 강생은, 원하던 바대로 군수를 얻어 하기는 하였지만, 하여금 씨에게 운동한 옥생에게 밀려서 닷새 만에 파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강생은 임지(任地)를 향하여 출발을 한 뒤였다. 군수에 임명이 되기가 바쁘게 어서 금의환향을 하고자, 강생은 이튿날로 고향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었다. 자기의 직이 파면된 것은 알지도 못하고―

서울서 이미 파면된 강생은, 그런 줄도 모르고 호호탕탕이 여행을 계속하였다. 하루 바삐 금의로 환향을 하여 뽐내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또한 내려가는 길에 거드럭 거리며 산천 유람도 하고 싶었다. 이리하여 강생은 이 고을 정자에서 하루, 저 고을 누각에서 이틀, 놀아 가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거의 다달았다. 한 놈의 사령은 길을 앞서서 신관 사또의 부임을 보하러 달려 갔다.

그러나 달려 갔던 사령은 부시시 도로 돌아왔다. 신관이 벌써 어제 부임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강생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구관이 아직 있다면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자기 이외에 신관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강생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어떤 협잡배놈이 자기 이름을 도적해 가지고 못된 일을 하는 것이어니 그리고 또 이렇게 밖에는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호령 호령해서 배행하는 하인놈들을 모두 먼저 보내서,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흉한을 잡아 가두라고 한 뒤에, 가마를 몰아서 고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는 사실 벌써 신관이 부임을 한 것이었다. 강생이 멋이 들어서 산천 유람을 하면서 천천히 내려오는 동안, 옥생은 길을 채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생은 임지에 도착도 하기 전에 벌써 구관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사태를 짐작하는 옥생은, 머리 관속에서 분부를 하여 구관 사또를 영문에 맞았다.

『구관 사또 행차요―』

위세 좋게 영문으로 달려 들어오던 강생의 행차가 이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

옥생이 벙글벙글 웃으며 강생을 동헌에 맞았다. 먼저 부임한 신관이 지금 부임하러 오는 구관을 맞는 것이었다.

신관이자 또는 구관인 강생을 환영 겸 송별하는 성대한 연회가 그 고을 강변 누각에 열렸다. 마지 못하여 거기 출석한 강생의 얼굴에는, 연하여 싱거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강형, 미안할세!』

『아니, 그럴 것 없지!』

자기도 역시 구관을 몰아 보내고 이 곳으로 온 강생인지라, 옥생뿐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강생은 깨달은 바 있었다. 벼슬의 욕망이 앞설 때에는 돌아볼 여유를 잃었거니와, 지금 이렇게 되고 보매, 현재의 벼슬의 허황함이 절실히 느껴졌다. 강생은 그 고을을 떠나서 산골로 이사 갔다. 자기의 발잔등을 밟고 앞서 온 옥생이 또한 며칠이나 군수 노릇을 하다가 남에게 자리를 앗기울지, 그것을 생각해 보매, 지금 좋다고 덤비어 대는 옥생이 도리어 가련해 보였다.

이리하여 수령 방백들의 채변이 무상하였다.

조제 남조의 방백!

지위의 보장이 없는 수령!

조세 남조의 수령 방백이라 할지라도 한 군데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 곳 지리 풍속에 익어져서, 혹은 후일에는 명관이 될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흘이 멀다 하고 갈아 내는지라, 명관도 생기지 않을뿐더러, 명관이 있다 하더라도 명관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할 도리가 없다.

그런지라, 많은 돈을 써서 수령의 자리를 산 그들은, 자기가 부임하여 있는 (언제 갈릴지 모르는) 짧은 기간 안에 자기의 밑전을 뽑고, 그 위에 얼마간 더 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인부를 차고 부임하는 수령 방백들은, 부임하기가 무섭게 벌써 돈 긁어 올릴 방법을 도모한다. 천 년 묵은 여우와 같은 관속들은 이런 수령들의 고문으로는 또한 능한 인물이었다. 이리하여 별별 기괴한 학정은 전개되어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제 남조의 방백 수령들이, 도임해 있는 짧은 기간 안에 자기의 밑천을 뽑기 위하여는, 어떤 수단을 취하며 어떤 방법을 취하나?

무론 그 수단 방법에 있어서는 일정하지 않다. 여기 그 한두 가지의 이야기를 적어 보자. 평안도 어떤 촌에 돈냥이나 가지고 있는 과부가 하나 있었다. 혈혈 단신의 과부였다. 다만 그의 남편이 적지 않은 재산을 남기고 죽었으므로 그것으로 생활만은 부족 없이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 집에는 개를 한 마리 치고 있었다. 집 지키기 겸, 가족 겸, 동무 겸 하여, 꽤 종자도 좋은 개 한 마리를 치던 것이다. 그 개는 몸집은 희고 발은 누러므로 황발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애지중지하였다.

그 까닭으로 그 동리에서는 그 집을 가리켜 황발이네 집이라고 하였다. 사내 주인이 없고 다른 일가가 없는지라 흔히 있는 예대로 그 집에 기르는 개의 이름을 따서 그 집을 황발이네 집이라 일렀다.

재산이 넉넉하여 그 근처에 토지도 많은지라, 그 집은 그 근처에서는 꽤 유명한 집이었다. 「황발이네 집, 황발이네 집」하여 소문난 집안이었다. 황발이네 집이 돈냥이나 있다는 소문이 그 고을 원님에게 들어갔다.

읍내의 부민을 샅샅이 고르던 원님은, 이 황발이네 집을 놓칠 까닭이 없었다. 그리고 곧 나라에 상계하였다.

『소관의 관내에 황 발이라 하는 한 기특한 백성이 있사와 여사여사하고 여사여사한 일을 하여 표창할 만하오니, 황발이에게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합시면 성은(聖恩)이 이 위에 없겠나이다.』

하는 상계였다.

이리하여 모군 모동에 사는 황 발(黃潑)이에게 선공감 가감역을 시킨다는 직첩이 내리게 되었다.

한 개의 희극은 전개되었다. 군속들이 나라의 직첩을 받들고 풍악이 자지러지게 황발이의 집으로 왔다. 그리고 황발이의 기특한 행동이 위에까지 달하여, 선공감 가감역을 시키라는 분부가 내렸다는 말을 전하였다.

불러 보니 황발이는 사람이 아니고 한 마리의 개였다. 일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제 「황발이는 사람이 아니요 개」라고 도로 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군속들은 연지구지하였다. 그런 뒤에 한 가지의 방책을 안출하였다.

황발이의 집에 언젠가 도적이 든 일이 있는데, 그 때 황발이가 몹시 짖어서 도적은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군속들은 이 소문을 캐내어 가지고, 이것을 구실삼아 어리석은 과부를 속였다. 이 황발이의 기특한 소문이 나라까지 올라가서 성은(聖恩)이 금수에까지 미쳤다는 기괴한 결론을 빚어 낸 것이다.

이러한 기괴한 말은 과부를 몹시 기쁘게 하였다. 재산은 있으나 미천하던 자기의 집안이, 이제는 개의 덕으로 이 근린의 당당한 명문이 되려니 하였다. 그래서 흔연히 벼슬을 받기로 하였다.

상납전(上納錢) 팔천 냥, 중비(中費) 삼천 냥을 지출하였다. 그리고 황발이는 가감역이 되었다.

그 뒤부터는 과부는 개에게 비단 옷을 지어 입히어 가지고 자랑스러이 늘 나다녔다. 그 뒤부터는 그 집을 뉘라서 감히 황발이네 집이라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당당한 「황 감역(黃監役)의 댁」이었다.

이 양반 개는, 그 뒤 몇 해를 더 살다가 늙어 죽었다. 개는 죽은 뒤에도 그 집은 역시 「황 감역의 댁」이라 불렀다.

성은이 금수에게까지 미친 것이었다.

××감사 모는 재임 일곱 달 동안에 수십만의 재산을 만든 사람이었다.

당시의 방백들이 행한 온갖 일을 다한 뿐 아니라, 지혜 많은 그는 그의 독창적 취재법까지 발명한 것이었다.

관내의 부민들을 모두 긁어 먹는데, 혹은 벼슬을 갖다 씌워 주고 상납전을 벗겨 먹고 중비를 받아 먹으며, 혹은 명목 없는 죄를 씌워 가지고 잡아다 옥에 가두고 뒤를 두드려서 뇌물을 받아 먹고, 혹은 한협으로 받아먹고―이런 별별 짓을 다 하여 벗겨 먹을 대로 벗겨 먹기는 하였는데 아직도 먹지 못한 부민들이 많았다.

너무도 자꾸 벼슬을 시키거나 잡아다 가두기도 어색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연구한 끝에 한 가지의 묘책을 안출하였다.

가사는 어떤 날 한 부민(富民)을 불렀다. 그리하여 첫째로는 그 백성이 덕이 많음을 칭찬하고, 그런 뒤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나라에서는 이즈음 재정도 곤핍하고 강기도 매우 퇴폐되었으므로, 그 진흥책으로 각 곳에 덕 있고 재간 있는 재산 있는 사람들을 모두 골라서 벼슬을 시키기로 하여, 그 가운데는 당신도 끼었으니, 치하 드리노라―이런 뜻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좀 상세히 변역하자면, 「나라에서는 재정이 곤핍하여 지금 재산 있는 백성들에게 벼슬을 팔려는데, 당신도 그 축에 끼었다.」하는 뜻이었다.

벼슬을 하나 하자면 상납전이라 중비라 하여ㅡ적어도 이삼 만냥은 걸린다. 그래서, 백성은 감사에게 재쳐서 얼마쯤이나 들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감사는 미리 조사한 바 그 백성의 재산이 합계 삼만 냥쯤 되는 줄을 짐작하면,

『아마 못해도 이만 오천 냥은 걸리겠소.』

대답하였다.

부민에게는 그것이 걱정이었다. 이만 오천 냥을 내고라도 어떤 고을 수령이라도 되면 밑천 뽑을 길도 있겠지만, 감사의 말하는 벼슬은 명예직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 벼슬을 한달사 혹은 뽐내기는 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생활은 파멸이 되고 말 것이다.

백성은 제 집으로 돌아가서부터는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누웠다. 나라에서 벼슬을 주신다는 것은 감사하지만, 그 벼슬을 하면 이튿날부터는 굶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나라에서 주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이리하여 누워 있는데 어떤 날 호방(戶房)이 이 백성을 찾아왔다.

여기서 상의(商議)는 거듭되었다. 백성은 자기의 진심을 토로하였다. 벼슬은 고맙지만 벼슬을 하면 그 날부터 굶어야 할 지경이니, 이 딱한 사정을 어찌하리까고 사정하였다.

호방도 매우 동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호방도 머리를 수그리고 한참 생각한 뒤에, 이 난경을 모면할 묘책을 하나 강구하였다. 즉, 지금 사또는 나라에서도 매우 세가로서, 사또가 잘 주선하면, 혹은 그 벼슬을 모면 할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겠다고―

며칠 뒤에, 이 백성은 호방에게 삼천 냥의 뇌물과 감사에게 만 냥의 뇌물을 바치고, 그 벼슬을 모면하기로 하였다.

그 뒤부터 감사는 관내의 부민들을 차례로 불러서 이 「말 벼슬」을 시켰다. 그리고 벼슬 모면비로서 그 백성의 재산의 약 절반쯤씩을 거두어 올렸다.

마달잇벼슬―

『이제는 마달이가 없느냐?』

벼슬을 마달 사람―즉 「마달이」였다. 이 마달이를 차례로 들추어 내서 이 감사가 긁어 올린 재산이, 재임 일 곱 달 동안에 육십여 만 냥이었다. 눈 뜬 사람의 코를 베는 것과 다름이 없는 교묘한 정책이었다.

군포(軍布)라 하는 것이 있었다.

첨정(簽丁―지금 이름으로 微兵)은 상민들의 의무제였다. 상민으로 태어난 이상에는 첨정에 뽑힐 의무가 있었다.

먼저 군적(軍籍)에 등록이 된다. 그런 뒤에는 붙들리어 가서 병대에 복역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한 집안에 장정이 첨정에 나가게 되면, 그 뒤는 그 집안은 호구지책이 없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모면하는 방책으로 일정한 세반을 관가에 바치고 피하는 것―말하자면 첨정 모면비가 「군포」였다.

군포는, 베 두 필이든가, 돈 넉 냥이든가, 쌀 열 두 말이든가, 이러한 것이 원 제도였다.

그러나 첨정의 제도에 일생에 한 번이라든가 일 년에 한 번이라든가 하는 제한이 없었다. 이 점을 악관들은 악용하였다. 그 집안이 돈냥이나 있는 백성이면, 일년에 두 번 세 번 첨정에 넣었다.

뿐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일정한 액수를 작정하여 제정한 바이지만, 차차 흐리게 되어서, 되는 대로 그 집안의 재물을 압수하여 가게 되었다. 소고 말이고, 반닫이고 무엇이고를 막론하고 쓸만한 물건이 있으면 거두어 갔다.

그 위에 첨정에는 나이의 제한이 없었다. 이것 역시 악관들의 이용하는 바가 되었다. 늙은이, 어린애를 막론하고 돈냥이나 있는 집안에 사내라고 생긴 것이 있기만 하면 군포를 징수하였다.

무론, 억지로라도 피하려면 피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어린애게 무슨 군포냐고 억지로 거절하려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거절하였다가는 이 뒤에 반드시 무슨 다른 벌이 그 집에 내렸다. 그리고 그 때 내리는 벌은 군포 징수의 몇 곱이 되는 혹독한 종류의 것이다.

그런지라, 뒤가 무서워서 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이 악제도에 복종하는 것이다. 「불알이 원수」라는 유명한 속담이 이 때 생겨난 말이었다. 그것 있기 때문에 이 곤경을 겪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집에 사내가 나면 그것을 관가에는 감추어 두었다.

놀라운 악정이었다. 상납미(上納米)를 벗겨 먹는다. 환곡미(還穀米)를 속여 먹는다. 경주인(京主人), 영주인(營主人)이 가운데서 잘라 먹는다. 그 고을에 좀 낡은 정자나 누각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각호에 얼마씩 거두어서 벗겨 먹는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핑계를 만들어 내어 가지고는 벗겨 먹는다.

당시에 있어서 가장 업적(業績)이 많았다는 수령 방백은, 가장 많이 벗겨 먹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상관이 벗겨 먹노라면 그 수하에 달린 많고 많은 속관들이 또한 그만큼 벗겨 먹는 것이었다. 한 상관이 십만 냥을 벌었다 하면, 속관들이 먹은 것까지 합하면 이십 만냥은 넘을 것으로서 백성의 곤란은 그만큼 컸다.

이렇게 오중 육중 칠중 팔중으로 벗기우는 백성들은, 이 학정 아래서 허덕허덕 그들의 삶을 계속하였다. 한 마디로 크게 고함도 치지 못하였다. 고함을 칠지라도 들어 줄 위(上)가 없는 가련한 백성들이었다.

위로는 삼공 육경으로부터 아래로는 말청의 천리(賤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백성을 좋은 봉(鳳)으로 여기고 벗겨 먹기만 위주하지, 굽어 보고 보호하여 주려는 어진 상관을 못 가진 이 가련한 백성들은, 숨 한 번 못 쉬며 숨이 박혀서, 가들의 가늘고 참혹한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의 백성의 위에는 아직껏 인군(仁君)이 임하여 본 적이 적었다. 여러 분의 명군은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임금은 진실로 드물었다. 놀랄 만한 문치(文治)의 업적을 남긴 세종이며, 국토 확장에 그 거둠이 적지 않은 세조며, 모두 현군이며 명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런 분들의 큰 업적까지라도 겨우 향대부의 위에까지 미쳤지, 그 이하의 백성에게까지 미친 적이 적었다. 그런지라, 이 나라의 백성들이 자기네의 통치자에게 가지는 바 관념은 지극히 모호하고 약한 것이었다.

옛날 단종이 선위를 하고 세조가 등극할 때에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고 이 방계(傍系)의 임금―좀더 혹심하게 말하자면 탈위한 새 임금을 묵묵히 맞고 그 아래 공손히 복종한 백성이었다.

그로부터 세 대 더 내려와서 제 구대의 임금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오른 뒤의 일이었다.

연산군은 무론 많은 선비를 죽였으며 음탕한 일을 많이 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이씨 수백 년 간에 연산군보다 더 많이 선비를 죽이고 더 많이 황음하였던 임금이 없는 바가 아니다. 더구나 연산군의 그 모든 정도에 어그러진 행동은, 어떻게 보자면, 횡사한 당신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행동으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연산군의 아드님이 그 다음의 위를 잇고―이리하여 전면히 내려왔으면, 연산군은 지금은 연산군이 아니라 무슨 종(宗)이든가 무슨 조(祖)로서 역사상에 뚜렷이 여러 가지의 업적이 특필되었을 것이다. 왜? 연산군은 정당한 왕통이거니, 연산군을 배반하는 사람은 당연히 역적일 것이다.

그러나 일이 순조로이 진행되지 못하였다. 연산군 제위 십 이 년 뒤에 성 희안(成希顔), 박 원종(朴元宗) 등이 의논을 하고 임금을 폐하기를 도모하였다. 말하자면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는 역모였다. 그리고, 그 일이 성공이 되어 진성군(晋城君)이 영립되어 신왕이 되었다. 소위 중종(中宗)의 반정이었다.

일이 성공이 되었기에 무론 「반정」이라 하는 빛 좋은 명색이 붙었다. 만약 실패로 돌아가기만 하였더면 역모로 모두 함몰했을 것이다.

이 놀랄 만한 역모의 성공에 대하여서도, 이 백성은 눈 까딱 아니 하고 방관하였다. 역모가 실패로 돌아갔을지라도 이 백성은 역시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왕위는 왕족이 잇(繼)는 것―

이런 평범한 생각으로서 백성은 이 변동을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이 사건도(역사의 이면이 증명하는 바에 의지하건대) 결코 연산군의 실정을 들추어 낸 것이 아니고, 단지 재상들의 권력 다툼에 연산군이며 중종 대왕이며는 그 한 역할을 맡은 바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몇 대 더 내려와서 또한 광해군(光海君)의 사건이다.

광해군은 연산군과 같이 황음하지도 않았다. 단지 신하들을 지배하기에는 시대가 험악했기 때문에, 그의 재위 십 오 년 간은 대북(大北)과 서인(西人)의 굉장한 당쟁(黨爭_으로 종시하다가, 이 당쟁의 결말로서 소위 「인조(仁祖)의 반정」이 생기게 되었다. 말하자면 몇 대 전의 「중종의 반정」과 꼭 마찬가지로, 놀라운 역모 사건이 여기서 또 다시 성공이 된 것이었다. 선왕을 위하여 떨구어 군(君)으로 강봉하고, 종친 중의 한 사람이 위에 오른 것―말하자면 왕위 찬탈이었다.

그러니 이 때의 왕위 찬탈에 있어서도, 이 나라의 백성은 역시 이전 연산군의 때와 꼭 마찬가지로 아주 냉담한 태도로 나왔다.

인조의 반정은 곧 뒤를 이어서 또한 이괄(李适)의 난이 있었다.

인조의 반정에 그 일등공은 이 괄에게 있었는데, 그는 논공행상(論功行賞) 때에 일등공에 들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겨서 거기 불평을 품었었는데, 그 가운데는 또한 이간하는 무리까지 있어서, 이 괄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나라에 등장을 들었으므로, 그 때문에 나라에서는 이 괄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여기서 이 괄은 비로소 자유행동을 취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몰아 가지고 일사천리의 세로 서울을 짓부쉈다.

신왕 인조는 놀라서 신하들을 거느리고 공주로 피하고 서울은 이 괄의 세력 범위 아래 들어갔다. 서울에 입성을 한 이괄은 선조의 열째 아드님이요 선왕 광해군의 동생되는 흥안군(興安君)을 모셔서 왕으로 추대를 하고 새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리하여 일이 여기서 그쳤으면 무슨 「흥안군의 반정」이라 하고, 인조는 그 이름조차 역사상에 올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괄의 반정(혹은 반란)에 대하여도 이 나라의 백성은 아주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또 임금을 추대하게 되거니 이쯤 생각하고 열심히 신왕 환영의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주로 난을 피한 인조의 신하들이 군사를 몰아 가지고 다시 왕위 회복의 난리를 일으켰다. 이 난리에 있어서 이 괄 일파가 이겼으면 「인조의 반란」이라 일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 괄이 참패를 하여 서울을 내어 버리고 달아나다가, 이천(利川)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죽은 바 되고 다시 인조 복위의 세상이 되었다. 이리하여 이 괄의 것은 「반정」이 아니고 「반란」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머리가 어지럽도록 왕위가 변동될 동안도, 이 나라의 백성은 아주 무관심히 이를 보았다.

―웃사람은 웃사람.

―우리는 우리.

이렇게 갈라 붙이고 거기 대하여 참견을 하든가 간섭을 하든가 할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자기네의 조반과 저녁에 분주하였다.

이 백성의 의견을 듣자면, 웃사람은 웃사람이요, 자기네는 아랫사람이거니, 무엇이든 명령을 하면 복종할 것이요, 또한 웃사람대로 존경을 하면 그뿐이지, 서로 아무 유기적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아직껏 자기네들을 사랑해 주는 인군(仁君)을 가져 보지 못한 이 백성에게는 웃사람에게 대하여는 당연히 바쳐야 할 존경의 염밖에는, 친애라든가 애모라든가 하는 관념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자기네 집 광의 쌀 항아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기네들의 쌀 항아리들을 긁어 가는) 웃사람에게 대하여 친애의 염이 생겨날 까닭이 없었다.

그런지라, 이 백성에게 있어서는 웃사람의 심부름꾼인 수령 방백들에게 대한 관념도 아주 담박한 것이었다. 웃사람의 심부름꾼이라 하는 노릇이거니 한다. 이 이상 별다른 관념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유유복종」―이것이 이 백성의 유일의 모토였다. 하라는 대로 하고―하기 싫으면 몰래 피하고―그뿐이지, 소위 거역을 하여 보지 않았다.

이 순하고 근하고 직하고 온화한 국민은, 몸이 비록 역경(逆境)에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단지 팔자로 돌려 버리고, 웃사람에게 대하여서는 절대 복종으로 종시하였다. 지금의 이 놀라운 학정의 아래서도 이 백성들은 연하여 자기의 팔자를 혀를 차며 조반과 저녁에 분주하였다. 누구를 원망하든가 불복을 한다든가 거역을 한다든가 하는 일은 알지도 못하는 순량한 백성이다.

그러나 온순함에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웬만한 곤란은 모두 팔자 소관으로 단념하여 버리는 이 백성이로되, 참을 수 없게까지 곤란이 심해질 때는 드디어 들고 일어서는 것이었다.

임술년(壬戌年) 이월에는 진주에서 드디어 민요가 일어났다. 백성들은 모두 몽치와 대창을 가지고 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진주 이방을 박살하고 병사 백 낙신(白樂辛)을 잡아 내려고 돌아다녔다. 백 낙신의 횡포가 너무도 심하여, 이 온량한 백성으로도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 보도가 조정에까지 이르른 때, 조정에서는 망지소조하였다. 아무런 짓을 하더라도 그냥 참는 이 백성의 이번의 봉기는, 궁중만 놀라게 하였을 뿐 아니라, 대신들도 어쩔 줄을 모르도록 놀랐다. 부호군 박 규수(副護軍朴珪壽)를 안핵사(按?使)로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시켰다.

그런데 이 안핵사가 조정에 들어오기 전에 사월에 전라도 익산에서도 또 민요가 일어났다.

수천의 군중은 군청으로 달려 가서 군수 박희순(朴希淳)을 찾아 내려다가 찾지 못하고, 그 대신 박의 어머니를 찾았다. 박의 어머니를 찾아 낸 군중은 옷을 모두 찢어서 벌거벗기고 물과 비(?)를 가지고 박의 어머니의 하문(下門)을 닦으면서,

『이 구멍이 못되어서 못된 자식을 낳았다.』

고 야단들을 하였다.

이 보도가 조종에까지 들어온 때는 어진 상감도 종래 당신의 노염을 감추지 못하였다. 재상들 앞에서도 하고싶은 말씀도 못하고 어릿어릿하기만 하던 상감도, 이 때 뿐은 영의정 김 좌근을 힐책하였다.

『수상, 이게 웬일이오니까? 어제는 진주, 오늘은 익산 백성에게 죄가 있는지, 방백 수령에게 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무슨 일이오니까? 모두 내가 불민한 탓일까?』

여기 대하여 좌근은 아무 말도 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부호군 이 정현(副護軍李正鉉)을 안핵사로 즉시 파견을 하였다.

그런데 그 사월달에 또 경상도 개령(開寧)에 민요가 일어났다. 개령과 때를 같이하여 전라도 함평(咸平)서도 또한 민요가 일어났다.

연달아 일어나는 이 민요에 조정에서도 어찌하여야 할지 그 방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진주 사건은 병사 백 낙신을 고금도(古今島)에 정배를 보내어 이렁저렁 결말을 짓고, 익산 사건은 군수 박희순을 벌을 하여 이렁저렁 결말을 짓기는 지었다. 그런데 그 해 동짓달에 함경도 함흥에도 또 사건이 생겼다. 민요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문제가 적지 않게 벌어져서 안핵사로 호군 이 참현(李參鉉)을 파견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서 계해년 정월에는 제주도(濟州島)에서 또 민요가 일어났다. 일 년이 못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여섯 번의 사건이 생겨난 것이었다. 위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다만 유유복종하던 이 온화하고 순한 백성의 속에도, 정도가 넘는 학정에 대하여는 맹렬히 반항하는 끊는 피가 있었던 것이다. 존경하면서도 또한 반항하지 않을 수 없는 자기네들의 기괴한 운명과 환경을 탄식하면서도, 이 백성들은 분수가 넘는 학정에 대하여는 드디어 반항을 하였다.

반항할 줄을 모르는 백성이 아니었다. 오직 착하고 어질고 순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 대하여는 눈을 꾹 감고 참아 두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참다 참다 못하여 정 참을 수가 없게 되는 때에야 비로소 반항을 시험하여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순간 반항하여 본 뒤에는 또 다시 방관자의 태도로 돌아서고 마는 백성들―

이 일 년이 못 되는 짧은 기간 안에 여섯 군데서나 분요가 일어난 일 때문에 당시의 정부의 주인인 김씨 일문은 쩔쩔매었다. 백성과 집권자의 사이의 의가 이렇듯 좋지 못하니 이 것이 웬일이냐고, 상감은 연하여 김 좌근에게 꾸중을 하였다.

그것은 전대 미문의 일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한 곳에서 민요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책임이 적지 않거늘, 여섯 군데서나 일어난 것은 정치가 얼마나 퇴폐하였는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바로서, 그의 전 책임은 정부의 요로자가 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팔도 삼백여 주에 내보낸 방백 수령들은 모두 김씨 일문의 세력 아래서 나갔는지라, 그 책임 문제는 더욱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씨네들은 연하여 머리를 모으고 회의를 하였다. 자기네들에게도 짐작이 안 가는 바가 아니어서, 이대로 버려 두었다가는 삼백여 주가 한 군데도 떼지 이러고 모두 한번씩 들고 일어설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자기네들의 세력에 흔들림이 기지 않을까 하여 내심 공황 중에 있던 그들이라, 이 민요 문제는 어떡허든 삭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회의를 거듭한 결과 그들은 한 가지의 방책을 얻어 내었다.

백성들이 분요를 일으킴은 오랫동안 한 사람의 학정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학정이 그냥 계속된다 치더라도 학정하는 사람만 연하여 바꾸어서, 오늘은 이 사람의 학정, 내일은 저 사람의 학정, 모레는 또 다른 사람의 학정―이렇듯 학정하는 인물만 갈아 대면, 백성들은 누구에게 반항을 하여야 할지 분간하지를 못할 것이다. 즉, 갑 군수의 학정에 견디지 못하여 반항을 하여 보려고 서로 수군거릴 동안에, 갑 군수를 벌써 갈려서 다른 곳으로 가고 을 군수가 오게 되며, 또 병 군수로 갈리듯―이렇게 끊임없이 군수를 갈아 대기만 하면, 반항의 상대자를 얻지 못하여 백성들은 분요를 일으키지 못하리라, 이런 방책을 세우기로 하였다. 선정하는 사람을 보내서 어지러운 세태를 정돈시키려 하지 않고, 어지러움은 어지러움대로 두고 백성들이 들고 일어설 기회만 없게 하도록 방책을 세운 것이었다.

가뜩이나 잦던 수령들의 체변이 더욱 잦게 되었다.

조선 역사에 있어서 그 때만큼 지방관의 변동이 많은 때가 과거에 없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 고종 황제 때에, 민 중전을 배경으로 민씨 일파의 매관 매작 때에 또한 그 때와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과거에 있어서는 그 때같이 변동이 잦던 때가 없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갈아 대었다. 신관의 환영연을 준비할 동안은 벌써 그 뒤에 다른 신관이 부임을 하여, 환영 준비를 하던 신관은 벌써 구관이 되어 버리고―그 새 신관도 또한 그렇고, 이렇듯 눈이 뒤집힐 지경으로 체변되었다.

그런지라, 많은 밑천을 들여서 수령 자리를 산 그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므로 최대 스피이드로 긁어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임하러 내려가는 도중에서부터 벌써 착수를 하여, 부임하는 그 날부터 긁어 올리기를 시작하고 하였다.

녹아나는 자는 백성들뿐이었다. 그러나 김씨들의 예측과 같이 분요는 일으킬 겨를이 없었다. 일으키려면 벌써 다른 수령이 부임하게 되므로, 행여 이번이나 이번이나 하면서 이 놀라운 학정을 감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달아서 일어나는 각 곳의 민요는 이리하여 좀 머츰하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