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11장~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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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편집]

헌종이 승하한 것은 기유년(己酉年) 유월(십 이 년 전―흥선의 나이 한창 장년인 서른을 겨우 넘은 때)이었다.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덟 살 때에 보위에 오른 헌종은 십 오 년 간을 지존의 위에 있다가, 보수 이십 삼에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승하한 헌종께서는 왕제(王弟)도 왕자(王子)도 없었다. 뿐더러 헌종의 아버님 익종(翼宗)께도 동기가 없고, 또 그 아버님 순조도 외로운 몸이었다. 헌종의 증조한아버님 정종께야 몇 동기가 있었을 뿐, 그 다음 순조 때부터 삼 대째는 겨우 대(代)만 끊이지 않고 내려왔다. 그런지라, 헌종 재세시에도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야 칠촌숙이나 팔촌형제지, 그보다 더 가까운 혈기는 없었다.

헌종이 아직도 이십 삼의 청년이기 때문에, 친척 중에서 따로이 동궁을 책립하지도 않고 왕자 탄생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런지라, 이 삼천리의 강토는 지배자를 잃음과 동시에 새로운 지배자가 누가 될지도 예측할 수가 없게 되었다. 승하한 헌종의 칠촌숙이나 팔촌형제 가운데서 선왕이 영립이 될 것이었다. 흥선도 헌종의 칠촌숙이었다.

이 때에 헌종의 한아머님 대왕대비 김씨(숙종비)가 신하들을 궁으로 불러 들였다. 상감 없는 지금에 있어서, 김 대비는 종실의 어른이요, 따라서 이 나라의 어른이었다. 나라로 보자면 상감 대리요, 종실로 보자면 사당 받들 후계자를 지정할 권리를 잡은 이는 김 대비 밖에 없었다. 대왕대비의 부름에 영중추 조 인영(領中樞 趙寅永), 판중추(判中樞), 좌의정 김 도희(左議政 金道喜) 등이 희정당(熙政堂)에 들어왔다. 상감을 갑자기 잃고 그 후계자까지 못 가진 신하들은 목이 메어서 발(廉) 뒤에 있는 대왕대비께 호소하였다.

『신등이 무록(無祿)하와 이 봉척지통을 만났읍니다. 나라에는 잠시도 용상을 비일 수 없사오니 하교 계오시기를 바라옵니다.』

비록 친히 당신의 소생은 아니지만, 가꾸고 기른 애정을 끊을 수가 없는 김 대비는 목이 메어서 잘 말을 이루지를 못하였다. 발 안에서 대비의 무슨 하교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너무 작고 어읍 상반(語泣相半)이기 때문에 신하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 대의 임금을 섬기고 이제 바야흐로 또 네 대째의 임금을 섬기게 된 노신 정 원용이 무릎걸음으로 조금 나갔다.

『대비전마마! 막중막대한 일이옵니다. 봉사교청(奉辭敎請)뿐으로는 안 되겠사오니 언교(諺敎)를 내려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윽고 발 뒤의 대왕대비에게서 언교가 나왔다. 미리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도승지 홍 종응(都承旨 洪鍾應)이 받아서 폈다.

『영묘(英廟)의 혈맥은 금상(今上)과 강화(江華)에 있는 원범(元範)뿐이라, 이에 종사를 부탁하도록 정하노라.』

그리고 「원범」이란 이름 곁에 ×지제삼자(×之第三子)라 주가 달렸는데, 맨 윗 자는 잘 알아볼 수가 없이 되었다. 대신들은 돌려 보았다. 돈인이 다시 물었다.

『대비전마마! 광(廣)자의 변이 무슨 변이오니까?』

『구슬옥 변에 넓을 광!』

―강화 이광(李珖)의 셋째아들 원범으로 이 종실의 후계자를 삼는다―하는 것이었다.

즉일로 원범을 덕완군(德完君)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노신 정 원용을 시켜서 강화로 가서 신왕 덕완군을 모셔오게 하였다. 즉 현 상감 철종―당시의 보령 십 구. 종실 공자지만 영락되고 영락되어서 강화도에서 초동(樵童)으로 지내던 노총각―

세 임금을 먼저 보내고 네 번째의 임금을 봉영하러 늙은 재상 정 원용은 도승지 홍 종응(洪鍾應)과 몇 시위 장사들을 인솔하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강화도에서 겨우 농사를 짓고 새를 베어다가 보리밥이나 굶지 이러고 지내던 전계군(全溪君) 댁에서는, 조정의 백발 재상이 장사를 인솔하고, 앞으로 연(輦)을 모시고 왔는지라, 망지소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족으로 태어났다가 잘못하다가는 역모로 몰려서 화를 보기가 쉬운 시절이라, 이 뜻 안 한 관원들의 행차에 모두들 숨고 뛰고 야단하였다. 동리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가 났다고 멀리 모여서 서로 수군거렸다. 이 삼천리 강산의 최고 지배자의 위에 오르게 된 원범은,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때 새를 베러 뫼에 올라가 있었다.

일변 피한 가족들을 도로 데려 오고, 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러 오고, 그들에게 오늘 조정에서 재상이 이리로 오게 된 까닭을 알리고 이해시키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설명하여 주어야. 이 청천벽력 같은 길보를 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고 몸만 벌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집안 사람들이 겨우 오늘의 행운을 이해하고 동리 사람들도 겨우 눈치채서, 이 가난하고 또 가난하던 이씨 댁이 오늘부터는 대원군 댁이 된다고 서로 눈을 둥그렇게 하고 수군거리며, 가족들은 어서 산으로 가서 오늘의 주인공을 찾아 오라고 야단할 때에, 이런 괴변(?)도 모르는 행운의 총각은 새를 한 짐 하여 지고 유월 염천에 땀을 벌벌 흘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시위 장사가 문 밖에 늘어섰고, 뜰에는 백발의 재상이 역시 높은 관원을 데리고 서 있으며, 가족들은 한편에 모여서 욱적거리는 양에, 이 총각은 서먹서먹하여 들어서면서 샛짐을 벗어 놓고 몰래 도로 피하려 하였다. 그것을 먼저 발견한 것이 전계군 부인이었다.

『원범아, 이리 오너라.』

지금은 아무리 어머니라도 휘(諱)를 감히 부를 수 없는 지존임에도 불구하고, 향속에 젖은 부인은 습관대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정 원용이 그 편을 보았다. 짐작이 갔다. 원용은 멀리서 그 총각께 절하고 가까이 가서 그 앞에 엎디었다.

『전하! 판중추 신 정 원용(判中樞臣鄭元容)이 봉영차로 왔읍니다.』

총각은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다.

어려서 천자문을 좀 배우다가 가세가 가난하기 때문에 학문도 중지하고 아직껏 초동으로 지낸 총각은, 오늘의 일이 무슨 일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네? 저―나―소인은……』

무엇이라 대답은 했지만 아무도 알아 들을 사람이 없었다. 짐작하건대 총각 자신도 몰랐을 것이었다. 이 총각에게 오늘의 행운을 이해시키기는 매우 힘들었다. 더구나 붙들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계상(啓上)하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더욱 힘들었다. 그것을 겨우 노력하여 이해하게 하고, 이 총각에게 천담포(淺淡袍)를 입히고 복건(幅巾)을 씌워 가지고, 정원용이 그 곁에 배종을 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이리하여 신왕은 뭇 종친이며, 문무 백관의 출영으로 돈화문으로 하여 빈전(殯殿)에 돌아서 대행왕의 영해를 모셨다.

사흘 뒤에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즉 철종―대행왕의 칠촌숙이요 흥선의 육천동생이었다. 어린 왕께 대한 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왕의 보령 십 오까지로 그만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상감께 있어서는 그 예를 취할 수가 없었다. 즉위가 보령 십 구 때였다. 그 생장과 환경이 너무도 낮아서, 정사는커녕 우중의 의식에도 너무나 앎이 없었다. 그런지라, 보령 십 구 세의 상감께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승지 김 문근(承旨金汶根)의 따님, 김 병학의 종매(從妹)를 왕비로 책한 것은 즉위한 지 이태가 넘어 지난 신해년 구월이었다. 대왕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중지된 것은 즉위한 지 사 년째(만 삼년나마)되는 임자년 섣달이고, 계축년 정월부터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유년에 즉위하여서 신유년까지 만 십 이년간, 왕비를 맞은 지 만 십 년 간, 친정을 한 지 만 구 년 간 한낱 강화의 초동으로부터 팔도 삼백여 주의 통수자로 올랐지만, 그것은 철종에게 있어서는 결코 행복된 일이 아니었다. 보리밥과 굳은 채소에 젓은 총각의 위에는 국왕으로서 수라는 너무 기름져서 잘 소화가 되지를 않았다. 매일 산으로 벌로 새 베러 다니던 총각의(안일한) 궁중 생활은 너무도 평안하여 체력이 나날이 줄었다. 대신들이 가져다 바치는 책은 골치 쏘기 여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강화 총각으로서 갑자기 보위에 오른 상감은,

―이것은 왕자로서의 당연한 의무거니.

여기고 싫다고 하는 뜻을 나타내지도 못하였다. 소화는 잘 안되지만 보리밥보다 맛있는 음식, 안일한 생활, 아리따운 비, 빈, 상궁 나인―이러한 가운데서 철종의 거간을 나날이 쇠약하여 갔다.

강화의 초동으로 보위에 오른 철종인지라, 오랜 수양으로서야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자기 비판안」과 「자제력(自制力)」을 못 가졌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아리따운 궁녀며 향그러운 술이며 맛있는 음식인지라, 당신의 건강이 그 때문에 쇠약해 가고 두뇌는 몽롱하여 가는 것을 짐작은 하지만 나날이 더욱 침혹하였다. 당신의 위에 만약 의외의 행운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 일생을 강화도에서 보냈더면, 여생의 한편 모퉁이에는 이런 환락경이 있다는 것도 짐작도 못 하고, 흙과 먼지에 싸인 일생을 보낼 뻔하였는지라, 느지막이 만난 이 행운을 즐기고 또 즐겼다.

아리따운 후궁의 부어 올리는 푸른 술에 약간 취하여 과거를 회상할 때에는, 철종께는 지나간 날의 초동 생활이 마치 꿈과 같았다. 만약 과거의 그 때가 꿈이 아닐 것 같으면 현재가 필시 꿈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생활의 사이에는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너무도 넓고 큰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옛 말에나 나오는 생활과 같은 안일한 생활의 십여 년 간, 이전 강화에서 단련된 총각의 건강은 없어지고, 지금은 약하디 약한 몸이 되었다. 용상에서 일어나다가 그냥 혼도하여 모셨던 신하들로 하여금 망지소조하게 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신하들과 무슨 의논을 하다가 그냥 정신을 잃은 일도 간간 있었다.

노염, 비애, 환의―경우를 가리지 않고 때를 가리지 않고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나는 이런 감정들 때문에 돌발적으로 행한 기행(奇行)―아니 괴변도 적지 않았다. 혹은 어린애같이 까닭 없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

대궐에서는 이러는 사이에도 여러 번 아기의 탄생이 있었다. 그러나 탄생한 아기는 모두 수가 짧았다.

나날이 체력이 쇠약하여 가는 임금의 앞에서 권신들은 또한 암투를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쇠약하고 너무도 무규칙한 생활을 하는지라, 언제 어떠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날지 예측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승통자(承統者)가 없는 임금인지라,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겨나는 날에는, 승통자 영립문제로 한번의 분규가 생겨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 상감의 척신이자 또한 권신인 김문(金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중히 고려해야 할 처지였다.

불행히 상감이 승하하는 날에는 그 승통자를 지정할 권리는 오로지 대왕대비 한 분에게 있다. 아무리 권문 김씨일지라도 「진주 종반 이씨」의 가문의 사자(嗣子)에까지 간섭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종반 이씨」의 가문에 사자되는 분이 또한 마땅히 이 나라의 지존이 될 분이다. 그러므로 현 상감 승하한 뒤에 신왕 영립에 대하여는 아무리 척신이요 권문인 김씨 일파일지라도 용훼할 권리가 없다.

이런지라, 김씨 문에서는 여기 대한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대왕대비로서 엉뚱한 종친을 신왕으로 지적하여 놓으면, 김문의 세력에 큰 흔들림이 생길 뿐만 아니라, 잘못 하다가는 멸족의 참화를 볼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불행히 현 상감이 승하하고 그 뒤에 영립되는 신왕이 김씨 일문을 밉게 보는 분이면, 김씨 일문의 오늘날의 권세는 하룻밤 사이에 꺾어져 버릴 밖에는 도리가 없다. 이 불행을 피하고 자기네의 권세를 자자손손이 누려 먹기 위하여는 여기서 비상한 수단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그들이 택한 방법이 소위 이 하전 역모 사건(李夏銓逆謀事件)이었다.

도정(都正) 이 하전은 종친 가운데 꿋꿋한 사람이었다. 선조(宣祖)의 아버님인 덕흥 대원군의 정통 후계자(장손 줄기)인 이 하전은, 마음이 굳고 활달하고 그 정치안이 또한 비범한 사람이었다. 다른 종친들이 모두 시정에 숨어 버리거나 낙향을 하여 버릴 동안, 이 하전은 그냥 가운데 버티고 권문 김씨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뿐더러 선왕 헌종이 승하하고 그 승통자가 없어서 종친 회의가 열렸을 때에 신왕의 후보자로 꼽히었던 사람이었다. 권 돈인(權敦仁)은,

『이 분이야말로 이 삼천리의 지배자로서 가장 적당한 분이다.』

고 역설하여, 하마터면 이십 오대의 조선 국왕이 될 뻔한 사람이었다.

불행히 그 때의 대왕대비 김씨의 의견 때문에 강화의 초동이 새 왕으로 영립되고, 이 하전은 여전히 그냥 종친의 한 사람에 지나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 때의 신왕이던 현 상감이 승하하는 날에는 새 승통자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하전은 김씨 일문의 방자를 미워하는 사람이며, 마음 꿋꿋한 사람이며, 김씨 일문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인지라, 이 하전이 여차하는 날에는 김씨 일문은 근본적으로 망하여 버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거기 대한 대책으로 김씨 일문에서는 손을 먼저 걸기로 한 것이었다. 화근을 미리 없이 하여 한을 천추에 남기지 않도록 하려 함이었다.

『제 계획이 제일일 줄 압니다.』

이렇게 말하며 얼굴에 날카로운 미소를 나타낸 것은 김병필(金炳弼)이었다.

―김씨 일문의 회의였다.

좌장 격으로 하옥 김좌근이 있었다. 부원군 김 문근은 몸이 편하지 않아 참석하지 못하였다. 하옥의 양사자 김병기며, 김 병학, 김 병국, 김 헌근, 생질 남 병철 모두 한 좌석에 모였다.

그들의 의논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한 먼 곳에 하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가까이는 이 일족 이외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이 하전에 관한 의논을 하는 것이었다.

병학은 좀더 기다려 보자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니 갑자기 말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거기 대하여 병필이 맹렬히 반대하였다. 오늘 내일 미루어 가다가 여차하는 날에는 땅을 두드려도 번복하지 못할 일이니, 의논이 시작된 이 기회에 결말을 내자는 것이 병필의 의견이었다.

이 하전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 몇 명을 금부로 잡아다가 독한 국문을 가한 후에, 그들이 토사하였다는 구실로서 이 하전을 없이하여 버려서 화근을 미리 씻어 버리자는 것이었다.

하옥은 이 의논에 자기의 의견은 말하지 않았다. 얼굴에 호인다운 미소(이런 긴한 회의에 있어서도 하옥은 호인다운 미소뿐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나타내는 것이다)를 띄고 잠자코 조카들의 격론을 듣고 있었다. 병국이 병학의 편을 도와서 천천히 일을 진행시키는 편이 좋겠다 하면, 남 병철은 병필의 의견에 찬동하여 즉시 결행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두 가지의 의논이 서로 타협되지 못하고 그 재단을 좌장 하옥에게 구하게 되었다. 호인다운 미소로써 의논을 듣고 있던 하옥은 자기의 아들 병기를 돌아보았다.

『네 의견은 어떠냐?』

자기 아버지와 같이 먹먹히 듣고만 있던 병기가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는지는 지금 미리 짐작할 수가 없읍니다. 혹은 이 도정이 그냥 있더라도 아무 관계도 없게 될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불행히 재미 없는 일이 생길 때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하전을 없이했다고 우리에게 불리한 일은 없을 테니, 없이하여 손해 없고, 그냥 두었다가는 혹은 불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이 하전, 결행해 버리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합니다.』

병기의 의견이 병필에게 가담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왕족 이 하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 뒤에 다른 왕족들에 대하여도 그들은 물색하여 보았다. 물색하는 가운데는 흥선의 이름도 나왔다. 그러나 흥선의 이야기가 나온 때는 이 척신 일동은 그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시정의 무뢰한―술 잘 먹고 투전 잘 하고 생일집 잘 찾아 다니는 흥선과, 「장래의 국왕」과의 사이에는 너무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흥선을 영립하게 되면 재미있겠읍니다.』

『용상 앞에 막걸리 병을 가져다가 놓고……』

『정전에 투전판을 차려 놓고……』

『하하하하!』

『하하하하!』

이리하여 종친들의 위에 엄중한 검토의 눈을 붓고 있는 김씨 일문도, 흥선에게뿐은 감시의 눈을 던질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이름은 종친이라 하나, 흥선의 인격은 그들의 눈에는 너무도 비루하게 보였으므로 종실의 강아지에게까지 경계의 눈을 붓는 김씨 일문에서도, 흥선군 이 하응에게뿐은 절대의 안심을 느끼고 있었다.

용산서 친한 친구들과 뱃놀이를 하다가 이 하전은 참변을 만났다.

배에서는 한창 연락이 벌어졌을 때에, 수십 명의 나장(羅將)이 강 언덕에 나타나서 이 놀잇배를 불렀다.

그들은 이것이 무슨 오해거니 하였다. 아무 죄도 없는지라, 나장에게 불릴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사공을 재촉하여 그냥 모른 체하고 배를 저어 갔다.

이 그냥 달아나는 배를 나장들은 다른 배를 얻어 타고 쫓아왔다. 그리고 배가 맞닿게 되자 나장들은 이 배에 난입하였다.

『웬일이냐? 무슨 일이냐?』

하전은 무례한 나장들에게 귀공자답게 고요히 호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명이다! 왜 도망하느냐?』

이리하여 사공을 재촉하여 다시 배를 갖다 대었다.

배가 언덕에 닿으매 나장들을 지휘하던 금부당상이 가까이 이르렀다. 그 금부당상까지 출장을 한 모양을 보고 하전은 비로소 일이 심상하지 않은 줄을 알았다.

하전은 직각하였다. 자기 몸뿐 아니라, 자기 때문에 자기의 친구들까지 무서운 죄명에 직면했음을―

한 사람 한 사람 배에서 내리는 사람마다 오라로 결박을 지었다. 다만 하전은 종친의 한 사람이라는 명색 때문에 결박만은 면하였다.

『무슨 일이냐?』

『어명이올씨다. 우리는 모릅니다.』

『누구를 잡으라는 명이냐?』

『도정 이 하전과 및 같이 의논하는 역적을 모두 잡으라는 명이올씨다.』

하전은 결박진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죄명은 역모(逆謀)였다. 역모에 대한 벌은 극형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죄 없는 자기가 이런 죄명을 쓰게 되었는지는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다. 자기와 함께 배를 타고 봄날의 하루를 즐기던 밖에는 아무 죄도 없는 친구들도, 당연히 「하전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를 쓸 것이었다.

안 하였노라고 변명을 하여도 쓸데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에는 고요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박진 친구들을 돌아보다가 하전은 빙그레 미소하였다. 가슴에 엉긴 피를 속이는 미소였다.

『사태는 글렀네. 내세에서나 다시 만나세. 나하고 사귄 죄일세. 그 사죄도 내 내세에서 함세.』'친구들에게는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나장에게,

『나는 집으로 간다. 어명이면 승지를 보내라.』

하고 그 곳서 발을 떼었다. 거기서 나장에게 잡힌 친구들을 작별하고 지나가는 가마를 하나 잡아 타고 돌아오는 동안, 하전의 마음은 자기로도 어찌하여야 할지 분간하지 못하였다. 죽음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그의 앞에서 어릿거릴 따름이었다. 피할 수 없는 그 그림자―그것은 단지 자기가 왕족의 한 사람이며 왕족 가운데 좀 두드러진 인물로 생긴 때문에 받지 않을 수 없는 쓰디쓴 잔이었다. 왕족으로 태어났거든 바보가 되거나, 지금의 권신들한테 머리를 땅에 대고 아첨을 하거나 하여야 할 것이어늘, 그렇지 못한 죄밖에는 아무 죄도 없었다.

그 죄 때문에 지금 자기의 위에 임한 잔―그것은 너무도 과한 잔이었다. 억지로 씌우는 잔인지라, 피할 길도 없다. 이 잔은 너무도 잔혹한 잔이었다.

송구히 설렁거리는 가슴을 부둥켜 안고, 하전은 가마를 몰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영문을 모르는 자기를 맞는 가인들이며 가족들을 손짓으로 물리치고, 하전은 하인을 시켜서 관복을 내다가 갈아 입고 급급히 그의 그림자를 가묘(家廟) 안에 감추었다. 선조 대왕의 아버님 덕흥 대원군과 영전에 가문의 위급을 봉고할 사손(嗣孫)의 지위로서―

『이전에 임금이 될 뻔하고 못된 그 벌충을 하기 위하여 이 하전은 부량한 장사들을 모아 역모를 의논하였다. 도당들은 모두 잡았다. 하전은 집으로 돌아가서 어명을 기다린다.』

사건은 이렇게 만들게 되었다.

이 이 하전을 두고 권신들 가운데서는 하전의 처치에 대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하전의 친구들을 금부로 잡아다가 때리고 두들기고 별별 악독한 고문을 다 하여, 소위 토사라 하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역모를 하였소이다. 이 하전을 추대하기로 하였읍니다. 용산서 거사의 의논을 하다가 잡혔읍니다.』

이만한 토사를 만들어 내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처형에 있어서 원배를 보내자, 사약(賜藥)을 하자, 멸족(滅族)을 하자, 여러 가지의 의논이 났다.

이제 왕통 승계자가 작정되기까지의 기간을 이 종친 중의 위물(偉物)인 하전을 경이원지하여 먼 곳에 정배를 보내자는 의논이 가장 세력이 있었다. 자기네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 하전에게 역모의 죄명은 씌웠으나나, 뻔히 죄 없는 줄 아는 하전을 극형에까지 처하기는 그들도 좀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대하여 김 병필이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화근을 없이하는 기회에 철저히 없이할 것이지, 그런 뜨뜻미지근한 방책은 쓸 것이 아니라고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리하여 의논이 분분한 뒤에, 드디어 두 가지의 의견의 가운데를 취하여 역적 이 하전에게 사약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재단을 구하러 영의정 하옥 김 좌근이 배알하였다.

관복을 갖추고 황황히 입궐 배알한 하옥이,

『덕흥 대원군의 사손 도정 이 하전이 역모를 했사옵니다.』

이렇게 계달할 때에, 상감은 안석에 몸을 의지하고 몽롱히 하옥을 건너다 볼 따름이었다. 재위 십 이 년 간 아직 한 가지도 새 일을 못 기억하는 상감은, 덕흥 대원군이 누구이며 이 하전이 누구며 역모가 무엇인지 똑똑히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용산서 수상한 장정 몇 명이 무슨 밀의를 하옵는 것을 금부에 잡아다가 국문을 했더니, 의외에도 역모를 하던 것이 탄로되옵고 수괴는 이 하전이옵니다.』

상감은 비로소 이 하전이라는 인물이 못된 일을 하다가 잡힌 것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흥, 그 놈 잡아다가 매를 쳐야겠소그려? 곧 잡아 오도록 하시오.』

자리가 불편한 듯이 연하여 비비적거리며 왕은 이렇게 하교하였다.

『그래서 신들이 의논하온 결과, 이 하전이 아무리 역천의 죄를 지었삽기로, 덕흥 대원군의 자손이매 선성(先聖)의 공을 보아, 멸족까지는 과심하옵고 사약을 하옵는 것이 지당하올까 하옵니다.』

『그렇지! 옳은 일이외다. 매를 칠 수가 있소? 사약―약을 주면 그것을 먹고 죽겠다. 하하하하! 그 약이 몹시 쓰오?』

『역적 이 하전도 전하의 관대한 처분에 감읍할 것이옵니다.』

『감읍하여야지요. 대감, 이 하준이―하전이?―를 보시거든 감읍하라고 그러서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만수무강하옵소서.』

―이리하여 봉명 승지는 그 하나는 약원(藥院)으로 약을 짓기를 명하러, 또 하나는 금부 도사에게로 하전의 최후를 감시하기를 명하러 갔다.

좀 뒤에 금부 도사와 의관은 구슬픈 사명을 띠고 하관들을 거느리고 도정의 댁으로 갔다.

『―더럽히지 않았읍니다. 아직 더럽힌 일이 없읍니다. 가문의 명예, 소손(小孫) 저의 대에서는 조금도 더럽힌 일이 없읍니다. 지금 이것을 이대로 소손의 사자(嗣子)에게 물려 주옵고, 소손은 대대의 조선(祖先)이 계신 나라로 가고자 하옵니다. 용납하여 주시옵소서.』

가묘에 마지막 봉고를 하는 하전―

사모 관복 품대, 도정(都正)의 정장(正裝)으로서 하전은 최후의 봉고를 하였다.

중종(中宗) 때부터 군가(軍家)를 갈라져서 덕흥 대원군의 대에서 선조 대왕을 왕실로 바칠 뿐, 명예 있는 종친의 일가로 전면히 내려온 대대의 위패 앞에 꿇어 앉은 하전의 눈 좌우에는 눈물이 흘렀다.

사당에서 정침으로 돌아온 때는 하전의 마음은 얼마만큼 가라앉았다. 그가 청지기에게 대궐서 봉명 승지가 오거나 금부도사가 오면 여니와, 그 밖에는 집안 사람이라도 방에 들이지 말라고 엄명한 뒤에 사후의 처리에 착수하였다.

유훈을 썼다.

유언을 썼다.

서류를 전부 정리하였다.

사후를 위한 정리가 죄 끝난 뒤에 하전은 비로소 내실로 들어갔다.

예복을 갖춘 채로 내실로 들어오는 하전을 의아한 눈으로 부인이 우러러 볼 때에, 하전은 아랫목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부인!』

『네?』

『조선 봉사, 후손 양육―어려운 일이외다. 잘 맡으시오.』

『네?』

부인은 영문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 의아하여 쳐다볼 뿐이었다.

『역모에 몰렸소이다.』

청천의 벽력이었다. 종친, 종친 가운데도 꿋꿋하게 태어난 이의 가족은 언제든 조마조마하여 이런 일이 오지나 않을까 하고 조심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듯 급격히 이를 줄은 꿈도 안 꾸었던 부인은, 이 청천의 벽력 같은 한 마디에 잠시도 입만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다. 그러나 겨우 이 무서운 비극이 이해될 때에, 와락 달려들면서 통곡을 시작하였다.

『아이고 나으리! 이 일이 웬일이서요?』

그러나 통곡하는 부인을 도정은 고즈너기 밀었다.

『벌써 십 이 년 전에 당했을 일이외다. 십 이 년 간을 더 살았으면 넉넉지 않소?』

왕의 물망에 올랐던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십 이 년 전 헌종 승하했을 때에 왕의 물망에 올랐던 도정은 그 때 왕이 못 된 이상에는 마땅히 죽었어야 할 것이었다. 오늘날까지 산 것은 횡수였다. 부인의 통곡에 대하여 하전은 이렇게 고요히 위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망극한 일에 부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그냥 통곡할 때에 하전은 몸을 피하여 일어섰다.

『뒷일은 맡으시오. 피할 수 없는 길이외다. 금부도사가 오기까지 나는 산 송장이오, 유언 유훈은 정침 문갑 서랍에 들어 있소.』

하고는 듯 몸을 빼어서 사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요히 아랫목에 앉았다.

밖에서는 나비―혹은 풍뎅이인지가 한 마리 방 안으로 날아 들어 오려는 문창을 뚱뚱 두드리고 있었다. 때때로 날아서 저편까지 갔다가는 다시 문창으로 돌아와서 창을 두드리고 하였다.

―무얼 하러 이 방에 들어오려느냐?―

하전은 고요한 마음으로 나비―풍뎅이인지―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한 사람의 낭패는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죽음」이라 하는 상서롭지 못한 사명을 띠고 금부도사의 일행이 도정 댁에 이르렀을 때는 하전은 금부도사의 일행을 맞을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때였다.

목숨을 뺏을 독약이 한시 바삐 온 몸에 퍼지게 하기 위하여 방에는 불을 처때어서, 웃목까지 발을 들여 놓기가 힘들도록 뜨거웠다. 아랫목 두터이 깐 보료는, 속에서 타는 내까지 났다. 그 위에 이 하전은 도정의 정복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양을 달일 숯불도 마루에 준비되어 있었다.

청지기의 인도로 죽음의 사자의 일행이 들어오는 것도 하전은 눈 까딱하지 않고 고요히 맞았다.

문 밖에서 부글부글 약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바야흐로 죽음의 길을 떠나려는 하전과, 그 죽음을 감시할 금부도사와, 죽음을 판단할 의관은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방이 너무도 덥기 때문에 그들의 이마에서는 구슬같은 땀만 뚝뚝 떨어졌다.

드디어 약은 다 졸았다. 다 존 약을 앞에 받아 놓은 뒤에야 하전은 비로소 금부도사에게 한 마디 물어 보았다.

『내 친구들은 다 어떻게 되었소?』

금부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조금만 지나면 알 일이지만 궁금해서 물었소. 아마 새남터로 갔겠지요?』

거기 대해서도 금부도사는 침묵으로 응하였다.

하전은 질문을 중지하였다. 그리고 아직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약 그릇을 한 번 굽어 본 뒤에, 몸을 고즈너기 일으켜서 북향 사배하였다.

북을 향하여 절한 뒤에 도로 몸을 제자리에 바로하고, 약이 뜨거운지 어떤지를 새끼손가락을 넣어 둘러서 짐작을 본 뒤에, 고요히 약 그릇을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독을 푼 그릇을 쳐들 때에도 하전은 손도 떨지 않았다. 이미 피할 수 없는 길인 줄 각오한 이상에는, 깨끗이 자기 위에 임한 괴로운 잔을 받기로 결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관복을 단정히 하고 엄숙한 태도로 약을 든 하전은 눈을 고요히 감고 입을 그릇에 갖다가 대었다. 꿀꺼덕 꿀꺼덕 꿀꺼덕! 세 번 소리를 내어서 약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릇을 도로 고요히 놓은 뒤에 도사에게,

『복명하오.』

침착한 소리로 말한 뒤에 자기의 몸이 어지러이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장침과 사방침을 좌우편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이리하여 하전은 고요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와 역모를 같이 하였다는 죄목으로 금부에 잡힌 친구들은 그 전날 벌써 가지각색의 악형을 다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성종(成宗)의 비 한시(韓氏)는 불행히 성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세하였다. 후궁으로 있던 윤씨(尹氏)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하였으므로, 성종은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윤씨의 몸에서 난 왕자가 후일의 연산군(燕山君)이었다.

윤씨는 시기심이 많고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서, 왕도 더 볼 수가 없어서 드디어 윤씨를 폐하고 사사(賜死)를 하려고, 그 의논 때문에 신하들을 전정(殿廷)으로 불렀다.

그 때의 재상 허 종(許琮)은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던 도중에, 시간도 좀 이르고 하므로 자기의 누님 댁에 들렀다. 그리고 누님에게 지금 입궐하는 까닭을 말하였다. 그러매 누님은 허 종의 말을 다 듣고 생각한 뒤에 허 종에게 향하여 한 가지의 비유로서 말하였다.

―어떤 집의 하인이 주인의 명령으로 마님(주인의 마누라)을 죽였다. 하인은 주인의 영을 충실히 복종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주인의 아들(주인의 아들이면 또한 마님의 아들이다)을 섬기게 될 때에도 그 하인은 새 주인에게 총애를 받을까?

이 누님의 현명한 비유에 허 종은 깨닫는 바 있었다. 그래서 누님 집에서 나와서, 입궐 도중 돌다리를 건널 때에 부러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하고, 그것을 핑계삼아 입궐하지 않았다. 따라서 윤씨 폐비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위에 오른 뒤에, 연산군은 어머님 윤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때 그 회의에 열석하였던 재신을 전부 살육할 때에, 허 종은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덕으로 화를 면하였다. 사직골에 있는 종침교(琮沈橋)가 즉 허 종이 부러 낙마한 다리다.

왕실의 후사에 관한 의논에는 누구든 용훼하기를 꺼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용훼하여 자기의 의견이 성공되는 날이면 이어니와, 실패에 돌아가는 날에는 그의 몸에는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이를 것이었다.

허 종의 사건은 한 기묘한 예에 지나지 못한다. 영사를 뒤적이자면 종친의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낸 사람은 지극한 영화를 보든가 지극한 참화를 보든가, 극단에서 극단에의 운명을 반드시 보았다.

이 하전이 역모로 몰려서 해를 본 뒤에도, 거기 대하여 비평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침묵을 지켰다.

정당한 승계자가 없는 상감인지라, 장래를 예측할 수가 없으매, 누구나 거기 대한 비판을 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비판하였다가 후일 어떤 일을 겪을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종친 가운데서는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신하들 가운데서도 한 마디의 비평도 없었다. 모두들 그 사건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이런 사건에 대하여 비평이라는 것은 금물이었다. 비평을 피하기 위하여 모두들 그런 사건이 있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듯이 분주히 그 날의 저녁을 준비하고, 내일 아침의 조반감을 준비하였다. 모른 체하는 이상의 상책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이 하전의 역모 사건은 적지 않은 사람의 희생자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비평도 듣지 못하고 무사 평온한 가운데 처결되었다.

그들의 근친들이 남몰래 통곡을 하고, 남몰래 억울하다고 가슴을 몇 번씩 두드릴 뿐이었다.

그 일을 결행한 권신들도 자기네들의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비평을 꺼리고 침묵을 지켰다. 그들도 많은 말을 하기가 싫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표면은 한 번의 비평도 받지 않고 무사히 전 국면이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종친들의 가슴에 부어진 커다란 반향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귓결에 듣고 종친의 한 사람인 흥선은 가슴이 서늘하여, 상세한 내막을 들을 용기도 없이 집으로 달려 돌아왔다.

무론 없지 못할 일이었다. 김문의 방자함을 짐작하고 종친들의 무력함을 짐작하는 흥선은, 스스로 가슴의 피가 끓는 것을 죽여 가면서, 한낱 바보로서의 행동을 계속하였다. 이 하전이 권문들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행동을 보고서, 흥선은 반드시 오늘날이 있을 줄을 짐작하였다. 그러나 급기 그 일을 당하고 보니, 흥은 가슴이 서늘하고 치가 떨려서, 거리에서 상세한 후보를 듣고 있을 수가 없다.

집으로 달려 돌아온 흥선은, 신발도 벗는 둥 마는 둥 점침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서도 안절부절 손을 비비며 서 있다가,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 모양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의관도 그냥 한 채로, 마치 누구한테 쫓기듯 내실로 허둥지둥 들어오는 흥선의 모양에 부인이 놀라서 일어섰다.

『대감, 왜 이러세요?』

『도정이 역모에 몰렸소. 목릉 참봉 이 하전이가……』

역모―

종친에게 있어서는 이렇듯 놀라운 명사가 없었던 것이었다. 부인의 안색도 순간에 창백하게 되었다.

『이 일을 어쩝니까? 그래 누구누구가 걸렸읍니까?』

『자세히는 못 들었소. 윤 승지, 홍 참판 몇몇 사람이 들었다는 듯합니다.』

『그래……?』

우리는 그 축에 끼지 않았습니까 하는 뜻이었다.

『우리야 무사허지.』

아아, 이런 때에 무사하다고 장담을 할 보장을 얻기 위하여, 혀를 깨물고 피눈물을 쏟은 적이 몇십 몇백 번이나 되나? 상갓집 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래도 얼굴에 개가죽을 씌우고 그냥 기신기신 권문들을 찾아 다닌 것은, 이런 때의 방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옇든 이 일을 어쩝니까? 그럼 도정 잭은 멸족이겠구료?』

『아직 모르겠소.』

『아이구! 가슴이 서늘해.』

『요 다음은……』

흥선은 여기서 기다랗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뉘 차롈까?』

『맙시사, 하느님! 너무도 심하시외다.』

생후 사십 년―부인이 흥선을 안 지 이십 유여 년, 오늘같이 낭패한 흥선을 부인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다. 겁에 뛴 커다란 눈을 좌우로 두르며 앉지도 못하고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창망한 경우에서 흥선은 문득 자기의 둘째아들을 생각하였다.

『이 애, 작은애는 어디 갔소?』

『저 방에서 글 읽나 보이다.』

흥선은 소리를 높여서 소년을 불렀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여 온 소년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글을 읽고 있었읍니다.』

『무슨 글이냐?』

『「좌씨전(左氏傳」이올씨다.』

『내버려라! 나가 놀아라! 건넛집 행랑애들과 돈치나 해라. 글은―글은……』

아아 무엇보다도 목숨을 보전해야 할 것이다.

글? 「좌씨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시키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떨립니다.』

『에익! 고약한! 천도도 너무도……』

흥선은 말을 끊었다. 너무도 억하기 때문에 목이 메려 하였다. 그것을 부인에게 속이기 위하여 흥선은 두어 번 헛기침을 하였다. 그런 뒤에 이 너무도 기막히는 일에 가슴이 답답한 듯이 주먹을 들어서 자기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부인은 창백한 얼굴로 흥선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소위 공모자들은 서소문 밖에서 참하였다. 이 하전에게는 사약을 하였다. 이러한 「이 하전 사건」의 후보(後報)를 가지고 흥선을 찾은 사람은 조 대비의 조카 조 성하였다.

이런 비상시에 종친 중의 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그 일이 드러나서 후일 어떤 박해를 받을는지, 그것은 예측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하는 흥선을 찾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찾은 것이었다. 이 때는 흥선은 한때의 흥분을 다 삭이고 그의 평온을 회복한 뒤였다.

『종친 중의 인물이 또 하나 없어졌네.』

성하가 가져온 후보를 듣고 한참 뒤에 흥선이 한 말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더 있다가 그 말을 보태어서 토하는 서이 말하였다.

『마지막 인물―인제는 종반에는 인물은 없다. 김씨의 세상이다. 안심하고 잘들 놀아라.』

『?』

성하는 힐끗 흥선을 쳐다보았다. 이젠 종친에는 인물이 없다. 마음대로 놀아라 하는 흥선의 말이 성하에게는,

『종반에 너희가 모르는 「인물」이 여기 또 하나 있다.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는 것과 같이 들렸으므로―

성하는 흥선을 찾았다.

『대감!』

『?』

『그분의 원죄를 울릴 북은 없겠읍니까?』

『없겠지! 올리려면 채가 부러지겠지.』

『그 분의 원사를 조상할 술은 없겠읍니까?』

『없겠지! 헛죽음이겠지!』

『대감!』

『왜?』

『하나 여쭈어 보겠읍니다. 만약 종친 중에 김문에서 알지 못하는 「인물」이 있으면, 이번의 불상사를 다행으로 여기겠습니까, 불행으로 여기겠습니까?』

무슨 깊은 뜻을 머금은 듯한 성하의 질문에, 흥선은 낭패한 표정으로 대하였다. 성하가 자기의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만약 다른 「인물」이 있다손 치면, 이번의 불상사는 그분에게는 도리어 경쟁자 하나이 없어져서, 장래 목적을 달하기에 좀더 가능성이 많아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깐 그런 분이 있다 하면 이번의 불상사가 그 이에게는 도리어 복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흥선은 알아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그가 성하의 말에 분명히 낭패하였음을 나타내었다. 성하의 말이 분명히 그의 마음을 찌른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를 못하겠네.』

『대감? 이번의 불상사가 대감께 있어서는 도리어 전화위복의 격이 아닙니까? 장래의 기약에 한층 더 가능성이 많아지지를 않았습니까?』

그러나 흥선은 알아 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이며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담배를 담으며 성하에게,

『아까운 인물―마지막 인물이 없어졌다. 인제는 종친 중에는 천치나 부랑자나 헌놈밖에는 남지를 않았다. 쓸 인물은 하나씩 하나씩 다 없어지고…… 여보게 성하, 나도 인물 못나기가 되려 다행일세 그려! 잘났더면 견디어 배기질 못할걸. 자네는 조문(趙門)에 태어나길 잘했지. 자네가 이문(李門)에 태어났더면 이번은 자네 차례일세. 다행이야.』

한 뒤에 싱겁게 껄껄 웃었다. 그리고,

『잘났다 못났다 말이나 말게,

잘나기 못나기는 보기 탓이지.』

잡가 한 마디를 코로 흥얼거리면서 담배를 붙여 물었다. 성하는 멍하니 흥선을 우러러볼 따름이었다.

十二[편집]

『이 하전이 역모를 하던 것이 발각되었사와 사약을 하였다 하옵니다.』

내사가 들어와서 이 보고를 올릴 때는, 종실의 어른되는 조 대비는 나인(內人) 최씨에게 머리를 빗기우고 있던 때였다. 벌써 여기저기 잡혔던 얼굴의 주름살이 한 순간 쭉 펴졌다.

『이 하전이란 인손(仁孫)이 말이냐?』

『목릉 참봉(穆陵參奉) 도정 이 하전이올씨다.』

툇마루에 끓어 엎드린 내시는 황공히 아뢰었다. 내시의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대비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내시를 굽어 볼 뿐이었다. 잠시 뒤에야 대비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의 한 일이로구나!』

『어명이올씨다.』

『아니로다. 상감마마가 무엇을 아시느냐? 교동(校洞) 대신의 한 일이로다.』

그리고 거기 대하여 내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내리 씌우듯이,

『상감마마께 내가 즉시 뵈옵겠단다고 아뢰어라.』

고 명하였다

내시는 절하고 나갔다. 최씨는 다시 빗을 들었다. 그리고 벌써 드문드문 흰털이 보이는 대비의 머리를 빗기면서 말하였다.

『대비마마! 소인도 들었사옵니다.』

『응, 너도 들었느냐? 들으면 왜 일찍이 말하지 않았느냐?』

『왕대비마마(현종비 홍씨)께옵서도 친히 국청에 납시와 옥초(獄招)를 보셨다 하옵니다.』

『?』

최씨의 손에 잡히여 있던 머리를 홱 뽑으며 대비는 최씨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창백하여졌다. 눈에는 충혈이 되었다. 망칙하고 해괴한 일―왕대비의 몸으로 몸소 국청에 나가서 옥초를 보았다는 것은 웬일이냐?

『그게 언제 일이냐?』

『어젯일이올씨다.』

『그럼……』

대비는 말을 끊었다. 뒷말은 너무도 하기가 어려운 말이었다.

『사약도 벌써 하였겠구나!』

『어제 즉인로 하였다 하옵니다.』

어제 즉일로―그러면 벌써 저질렀다. 도정 이 하전이는 벌써 죽었을 것이었다.

『잘들 한다.』

한참 뒤에 대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잘들 한다. 종실의 어른되는 당신이 이 곳에 있거늘, 한 번 품도 하여 보지 않고 종친의 한 사람인 이 하전에게 죽음을 준 것이었다.

그로부터는 대비는 입을 꼭 봉한 채,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최씨가 머리를 다 빗기도록―그리고 방안을 다시 다 정돈하도록 대비는 입을 꼭 봉하여 버렸다.

커다랗게 뜨고 앞만 바라보는 대비의 눈에는 노염이 서리어 있었다.

너무도 방자하고 외람된 일이었다. 인손이―인손이―이제는 벌써 저세상으로 갔을 인손이의 어렸을 때의 모양이 차례로 대비의 머리에 떠올랐다. 꼬리를 땋아 늘인 시절의 사랑스런 도령이던 인손이의 모양―그 인손이가 이 하전이라는 튼튼한 청년이 되어서, 지금 무력한 종친들 틈에 일단의 이채를 발할 때에, 대비는 그에게 얼마의 촉망을 붙이었던가? 모든 종친들이 지금의 외척들에게 감히 손가락질도 못 하고 멀리서 엎디어 절할 때에, 인손뿐은 왕족의 위신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지 않았나?

눈을 멀거니 뜨고 있는 대비는 머리로는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의 일을 회상하여 보았다. 조 대비의 아드님되는 헌종이 아직 재위 때―그리고 대비의 시어머님이시오 헌종의 조모님되는 순조비 김씨의 재세 시대―

조 대비의 아드님 헌종이,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즉위한 것은 여덟 살 되던 해였다. 열 한 살 되는 해에 승지 김 조은의 따님을 왕비로 맞았다. 그 왕비는 헌종 열 일곱 살 되던 해에 마마에 걸리어 사랑하는 지아버님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 이듬해에 판서 홍 재룡(洪在龍)의 따님으로 두 번째의 비로 맞았다. 이리하여 왕비를 두 번 맞고 위에 있기를 십 오 년 간, 불행히도 왕자를 보지를 못하였다.

나라에는 왕이 없으면 안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이치로, 동궁(東宮)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람의 일이란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서, 여차하는 날에는 상서롭지 못한 어떤 일이 생겨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대궐에서는 장래 불행한 날의 방비를 하기 위하여, 은근히 종친 가운데 똑똑한 도령을 물색을 하여, 헌종이 왕자 없이 불행하는 날의 방비를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기 선택된 이가 덕흥 대원군의 사손 이 하전이었다.

하전은 대궐로부터 인손(仁孫)이라는 이름까지 받았다. 인릉(仁陵―순조의 능)의 손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만약 헌종이 왕자를 못 보고 불행하는 날에는, 헌종의 뒤를 이어 이 존귀한 사직을 물려받기로 내정이 되었다.

조 대비의 지아버님되는 익종은 동궁(東宮)으로 하세했기 때문에 위에 올라 보지를 못하였다. 익종의 아드님 되는 헌종은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위에 올랐다. 그런지라, 익종은 비록 헌종의 생친(生親)이라 하나 후사를 잃은 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조 대비는 당신 아드님 헌종을 시아버님 순조의 후사로 드렸는지라, 조 대비(익종)의 대는(아드님을 두고도) 절사(絶嗣)가 되게 되었다.

조 대비는 이 새로운 공자 인손으로 하여금 절사가 된 지아버님 익종의 대를 잇도록 하게 하려 하였다. 그런지라, 조 대비는 매우 인손을 사랑하여 늘 인손을 대궐로 불러 들여서 궁중의 예의며 행실을 가르치신 것이었다.

만약 그 동안에라도 헌종이 왕자를 보면 이어니와, 그렇지 못하고 왕자 없이 만세하는 날에는 인손이는 익종(헌종의 아버님, 조 대비의 지아버님)의 대를 이어서 즉위할 귀하고 귀한 몸이었다.

이러한 동안에 드디어 헌종의 불행하는 날이 이르렀다. 한아버님 순조의 뒤를 이어서 여덟 살에 등극을 하여 재위 십 오 년, 왕자를 못 보시고 기유년(己酉年) 오월에 창덕궁 중회당에서 병환이 중하게 되었다.

헌종의 어머님인 조 대비의 심통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지아버님 되는 익종을 스물 세 살 때에 잃은 이래로, 이 쓸쓸한 인생을 아드님의 장성과 건강뿐을 축수하면서 살아오던 조 대비는, 지금 그 외아드님의 중환에 세상 만사를 잊고 간호하였다. 성년인 아드님을 만날 무릎에 붙안고, 대비는 마치 그 옛날 어린 시절과 같이 등을 두드리며 간호하였다. 인생에서 낙원을 겨우 만나 본 스물 세 살에 지아버님을 잃고 여기서 또 외로운 여생의 유일의 촉망이던 아드님의 중환을 만난 조 대비는, 오뉴월 염천의 더위를 잊고 오로지 성심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그러나 천명은 조 대비의 성심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월달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환후는 다시 가망이 없도록 되었다. 누구의 눈으로 볼지라도 금명간 국상이 날 것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조 대비뿐은 아직도 그렇게 보기가 싫었다. 눈에 분명히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을 부인하고, 되지 못할 일이라도 만들어 보려는―그것은 극진한 모성애였다. 애통의 날은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만약 여기서 헌종이 승하하고 특별한 책동만 없었더면 그 뒤를 이어서 보위에 오를 이는 인손이 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순탄히 진행되기에는 당시의 세태는 너무도 어지러웠다. 당시의 종실의 어른은 조 대비의 시어머님되는 순조비 김씨였다. 그 김 대비의 세력을 근거삼아 궁중 부중에는 벌써 김문 세력이 단단히 벋어 있었다.

김 대비는 김 조순(金祖淳)의 따님이었다. 김 좌근(金左根)은 김 조순의 아들이요 김 대비의 오라비였다. 김 무슨 근(根) 무슨 근 하는 「根」자 항렬이며, 김 병(炳) 무엇 병 무엇 하는 「炳」자 항렬이 정부의 귀한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김문의 세력은 벌써 하늘을 찌를 듯하게 뇐 때였다. 그런데 여기 만약 인손이가 헌종의 뒤를 이어서 장래의 임금이 된다 하면, 그 김씨의 세력은 한풀 꺾이고, 인손이를 배경으로 조 대비의 일가 조씨의 세력이 일어설 것이다.

이 기미를 본 김문에서는 헌종의 중환을 앞에 하고 책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당시에 있어서는 한 가지의 세력이 꺾이고 새로운 세력이 설 때에는, 낡은 세력이던 김씨 일문은 세력만 꺾일 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것이었다. 그러매 그들의 책동은 맹렬하였다.

지금 이 종실의 승계자를 지정하여 새 승계자를 종료에 봉고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종실의 어른인 김 대비 한 사람뿐이다. 누구를 후사고 정하든 간에, 그 후사를 종묘에 봉고하여 정식으로 후사로 만들 사람은 김 대비 한 사람밖에 없다. 이런지라 아무리 인손이가 승계자로 내정이 되었다 할지라도, 김 대비가 이를 종묘에 봉고하기 전에는 정식으로 왕통을 이을 수가 없다. 그 김 대비의 권한을 김문에서는 이용하고자 하였다.

많고 많은 낙척 종친 중에서 한 무명하고 그다지 슬기롭지 못한 사람을 선택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헌종의 대를 잇게 하도록 만들려고 물색한 결과, 그들이 발견한 것은 강화도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어 겨우 연명을 하는 통칭 「강화 도령」이라는 전계군의 둘째아들 원범이었다.

하옥 김 좌근은 자기의 누님 김 대비를 궁중에 찾았다. 그리고 장시간 밀의한 바가 있었다. 인손이를 폐하고 전계군의 아들 원범을 세우기에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즉 원범이는 영종의 고손이요, 사도세자의 종손이며, 순조왕비 김씨에게는 오촌 시조카로서 영종의 직계 혈통이되, 인손이는 종친은 종친이라 하나 덕흥 대원군의 후손으로서 영종의 혈통과 좀 멀었다. 종친 가운데 가까운 직계 혈통이 있음에 불구하고, 다른 갈래에서 승통자를 맞아 옴은 이치에 어그러진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서 김 대비께 여쭈어 김 좌근과 김 대비 남매의 사이에는 장차 헌종 승하하는 날에는 「강화 도령」을 모셔다가 계통을 잇게 하자는 굳은 밀약이 성립되었다.

그 밀약의 덧붙이로서 「강화 도령」을 영립한 뒤에, 자기네 일족 김 문근(金汶根)의 딸로써 신왕의 비를 삼게 하자는 계획까지 성립이 되었다. 이리하여 순조에서 신왕까지 삼 대째 김문의 딸로써 내리의 어머니를 만들고, 밖으로는 그 외척되는 김 무슨 근이며, 김 병 무엇에서 영세하도록 영화를 누리고 권세를 누리자는 계획과 약속이 든든히 성립이 되었다.

김 대비의 며느리 조 대비(헌종의 어머님)는 이런 일이 진행되는 줄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유월 초엿샛날이었다.

중하던 헌종은 그 날 여러 번 정신을 잃었다. 그 곁에서 조 대비는 아드님의 중환을 간호하고 있었다. 상감은 어머님의 무릎을 베개삼아 고요히 누워 있었다. 그 아드님을 굽어 보며 조 대비는 눈을 깜박일 줄도 잊은 듯이 앉아 있었다.

『어머님!』

상감의 말이었다. 이 분의 입에서 어머님이란 말을 들은지도 벌써 십 오 년이다. 어머님은 아드님을 전하라 부르고, 아드님은 어머님을 대비전마마라 부르는 십 오 년 간, 비록 모자지간의 정애는 죽일 수 없다 하지만, 표면 얼마나 쓸쓸한 생활이었던가? 아드님에게 향하여 신분이 서로 갈리기 때문에,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하고 한 번 불러 보지도 못하고 외로운 공규를 지켜 온 조 대비에게는, 헌종의 이상 말이 가슴에 콱 질리었다. 상감은 고요히 눈을 떴다. 눈물어린 눈이었다.

『어머님?』

『오냐, 좀 어떠냐?』

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감정의 속에서 저절로 뛰쳐 나온 「어머니」의 말이었다.

오냐! 나 여기 있다. 너의 어머니가 여기 있다. 지금의 너는 이 삼천리 강토의 임금이 아니요, 오직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로다―조 대비는 손을 들어서 아드님의 이마 위에 얹었다.

십 오 년 만에 처음 듣는 「오냐」에 대하여 상감도 감격된 모양이었다. 잠시 어머님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다가 기쁜 듯이 미소하였다. 굽어 보는 눈과 쳐다보는 눈―그것은 임금과 대비의 눈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아들의 눈이었다. 그 사이 십 오 년 간을 차디찬 의식적 생활에 싸여서, 서로 죽이고 죽었던 모자로서의 정애의 눈이었다.

『어머님! 저것을 조금 저 편으로―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 놓아 주서요.』

『무얼?』

조 대비는 상감의 가리키는 편으로 눈을 돌려 보았다. 거기는 이 나라의 최고 존엄(尊嚴)을 자랑하는 어보(御寶─옥새)가 찬연히 놓여 있었다.

그것이었다. 그것이 사이에 막히기 때문에, 십 오 년 간을 어머님은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드님은 어머님을 어머님이라 부르지 못한 것이었다. 바야흐로 승하하려 함에 임하여, 지금은 국왕과 대비의 사이가 아니요, 단지 한 아들과 한 어머니의 사이로, 최후의 순간의 평화를 보지하려매 상감께는 어보가 장애가 된 것이었다.

대비는 조금 그것을 밀어 놓았다. 상감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그러는 사이에 대비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나왔다.

『어머님! 소자는―소―소자는……』

숨이 찬 모양이었다.

『그간 불효했읍니다.』

『무슨 말씀을 하서요? 아니 무슨 말을 하느냐? 얘야!』

십 오 년 만에 서로 부르고 불리는 이 모자의 모양은 곁에서 부채질하고 있는 여관(女官)의 눈에서까지 눈물을 자아내었다.

『답답하옵니다. 가슴을 쓸어 주서요.』

『오냐! 어서 나아라. 천만 백성이 기다린다.』

모자는 십 오 년 만에 공(公)으로서의 지위를 벗어나서 모자로서의 정회를 풀고 있었다.

대왕대비 김씨가 김좌근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표면으로는 손자님 상감의 환후 문안이라는 명색으로 여관 몇 명을 데리고 이 중희당(重熙堂)에 온 것은 바야흐로 이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여름날의 긴 해도 거의 인왕산으로 넘고 황혼이 가까운 때였다. 창경궁의 숲에서는 깃을 찾아 돌아오는 새 소리들이 어지러이 여기까지 들릴 때―

시어머님 김 대비가 들어오기 때문에 조 대비는 황급히 아드님의 머리를 괴었던 무릎을 뽑았다. 그리고 조금 물러 앉았다.

『상감 환후가 좀 어떠시오?』

상감은 대왕대비께 인사를 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이려 하였다. 그것을 김 대비는 손짓으로 제의하고 좀 가까이 내려왔다. 그리고 수척한 상감을 굽어 보았다.

김 대비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히 나타났다. 이젠 절망이었다. 가마이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오늘―늦어야 내일일 것이다.

한참을 수척한 상감을 굽어 보다가 얼굴을 들 때는, 김 대비의 입에서도 기다란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과 함께 모시고 온 명부(命婦)를 돌아보았다.

『저 보(寶)를 들어라.』

이 김 대비의 명령에 여관은 나아가서 어보를 양손으로 받들었다. 아까 조 대비가 아드님의 간청으로 조금 멀리 밀어 놓았던―

『이리 모셔 오너라.』

이 강역의 존엄을 표현하는 어보는 김 대비의 손으로 들어갔다.

조 대비는 깜짝 놀랐다. 상감 만세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손을 대지를 못하는 어보였다. 승하하면 새로운 승통자뿐이 또한 손을 댈 권리가 있는 어보였다. 아무리 대왕대비며 왕대비라도 상감 계실 동안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할 것이었다. 조 대비는 시어머님께 공손히 물었다.

『어보를 어떻게 하시렵니까?』

통상시라면 대왕대비며 시어머님되는 김씨께 이런 대담한 질문은 할 염도 못 낼 일이었다. 비상시인 지금에 있어서도 좀 도가 넘친 질문이었다. 김 대비는 마땅하지 못한 듯이 잠시 며느님을 보다가 대답하였다.

『종사를 받들 분이 오시기까지 내가 맡아 두는 것이오.』

『그러면 인손이를 부르시옵니까?』

김 대비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인손이는 덕흥 대원군의 봉사손, 상감은 영묘의 직손, 인손이가 무슨 관계가 있겠소?』

조 대비가 여기서 커다란 음모의 움직임을 직각하였다. 아직껏 승통자로 내정되었던 인손이며, 대왕대비도 응낙을 했던 일이어늘, 여기 별안간 그 일이 번복이 된 것이었다. 조 대비는 온갖 예의와 절차를 잊었다. 그리고 조급히 물었다.

『흥녕군이오니까? 흥인군이오니까? 흥선군이오니까?』

갑자기 머리에 떠오른 영묘의 직손 가운데서 시재 생각나는 몇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러나 김 대비는 머리를 여전히 가로 저었다.

『그러면 누구오니까?』

『강화 전계군(全溪君)의 셋째아들―전하께는 칠촌숙이 되는 분이오.』

『인손인 어떻게 되옵니까?』

『인손이는 인손이지, 덕흥 대원군의 봉사손이 아니오?』

이것은 왕위 찬탈의 크나큰 음모였다. 상감이 아직 계신데 상감의 뜻도 알아보지 않고 아무리 대왕대비기로서니 너무도 남월된 일이었다.

조 대비는 여기서 이 일을 아드님되는 상감께 호소하고 싶기가 끝이 없었다. 그러나 임종의 상감께 이런 귀찮은 세상사를 호소하려 마음을 어지럽게 하기는 어머니로서 도저히 못 할 일이었다.

동기며 원인이며 경로가 분명한 이 음모를 조 대비는 눈을 감고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보를 받들고 유유히 돌아가는 시어머님의 등에 던진 조 대비의 눈에는 원망이 사무쳐 있었다. 사랑하는 아드님의 마지막 안정을 위하여 모든 일을 꾹 참을 뿐이었다.

감 대비며 김씨 일문의 의견대로 강화 도령이 헌종 승하한 뒤에 신왕으로 영립되었다. 조 대비는 이 마음에 맞지 않는 신왕을 묵묵히 맞아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월은 끊임없이 흘렀다. 십수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대왕대비 김씨도 정사년(丁巳年) 팔월에 드디어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로부터 이 년 후에 조씨는 대왕대비가 되었다.

김 대비 없는 지금의 조 대비는 이 종실의 최고권위자였다. 종실의 동향에 있어서는 조 대비께의 자문이 없이는 행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은인(隱忍) 십 년, 이제 온갖 굴레를 벗은 조 대비는 비로소 그 세력을 펴려고 책동치 않을 수가 없었다. 권력은 가졌지만 아직 세력은 못 가진 조대비는, 세력 방면으로의 활동을 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때문 김씨 일문의 세력이 너무도 강대하였다. 대왕대비 김씨는 하세하였다 하되, 그의 동생 김 좌근이며, 현 왕비 김씨의 아버지 김 문근이며, 숙부 김 수근이며, 오빠 김 병필, 그 밖에 김 무슨 근 무슨 근 하는 근자 항렬이며, 병 무엇 병 무엇의 병자 항렬의 세력은 너무도 커서, 조 대비의 권력으로도 당할 염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김문에서는 큰 근심의 재료요, 조대비께는 희망점 되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신왕도 후사가 없는 점이었다.

신왕이 왕자를 탄생하면 그것은 별문제였다. 그러나 만약 종친 가운데서 동궁을 간택한다 하면, 조 대비의 승낙이 없이는 못 하는 일이다. 여기 김문의 약점이 있고 조 대비의 장점이 있다.

김문에서는 왕자 탄생을 축원하고 또 축원하였다. 그러나 김씨의 운이 진한 탓이든지, 몇 번 왕자가 탄생은 되었지만 모두 조서하였다. 김문에서 이를 걱정하여 김문의 뜻에 맞는 종친 공자로서 동궁을 책립하자는 의논도 몇 번 났었지만, 이 문제에는 권한을 잡은 조 대비가 거부하였다.

십수 년 전 조 대비의 사랑하는 아드님 헌종 말년과 흡사한 이즈음이었다. 그 때의 대왕대비 김씨에게 눌려서 마음에 맞는 「인손」이를 맞지 못하고, 마음에 없는 「강화 도령」을 묵묵히 맞아들인 조 대비는, 지금 「강화 도령」의 대에 있어서는 종실 봉사자를 지정할 절대 권리자였다. 그 때 김씨 일문에게 받은 쓰디쓴 잔은 지금 또 한 조 대비에게서 김씨 일문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자가 없고 몸이 약한 현 상감의 앞에서 김씨 일문은 이 난문제를 해결하려고 갈팡질팡할 동안 조 대비는 정관하고 있었다.

『인손이의 것은 인손이에게로……』

십수 년 전에 헌종에게서 당연히 인손이에게로 갔어야 할 어보가, 지금은 뚱딴지 강화 도령에게로 가 있다. 그러나 필경은 인손이에게로 돌아올 운명을 가지고 있다. 김문 때문에 빼앗겼던 어보는, 지금 바야흐로 새 주인을 물색하고 있다. 새 주인을 지정할 권리를 잡은 조 대비는, 그 어보를 원 주인 인손이에게로 돌리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김문들의 갈팡질팡하는 꼴을 보면서 조 대비는 속으로 늘 미소하고 있던 것이었다. 건강이 좋지 못하고 후사가 없는 「강화 도령」의 뒤에는, 인손이가 당연히 어보의 소유자가 될 것이며 행사자가 될 것으로 조 대비는 단단히 작정하고, 김문의 득세를 여름 날 꽃과 같이 바라보던 것이었다.

그 인손이가 홀연히 모라는 명목 아래 사약이 되었다. 어보의 장래 소유자를 지정할 권리가 있는 유일인인 조 대비에게 「장래의 어보의 소유자」로 내정이 되어 있던 인손이―자라서 이 하전이가 의외에도 역모에 몰려서 죽음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분노라 할지 불쾌라 할지 분간하기 힘든 괴로운 감정 때문에, 조 대비의 얼굴은 잔득 찌푸린 채 펴지지 않았다.

아까 내관에게 향하여 상감께 뵙겠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이 하전이가 아직 죽지를 않은 줄 알고, 즉 아직 사약까지는 하지 않은 줄 알고, 대사를 저지르기 전에 「종실의 어른」이라는 당신의 권병으로서 그것을 삭여 버리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이미 하전이에게 사약을 하였음을 안 이상에는, 나가서 뵈옵는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처치할 수 없는 울분―김문의 방자함이 오늘날 여기서 이 하전이를 죽였다. 그것이 어명에 의지한 처단인지라, 아무리 종실의 어른인 조 대비라 할지라도, 그 김문의 방자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거기 대한 끝 없는 울분만 연하여 마음 속에서 일어날 따름이었다.

이미 절기는 여름―창문을 열어젖힌 그리고는 밭을 통하여 손님(女官房의 下女)들이 무엇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양이 보였다. 조 대비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어렴풋이 그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여관 하나이 승전빛(承傳色─임금의 말을 전하는 내시)을 인도하여 가지고 왔다.

『상감마마께옵서 듭실까 여쭈어 왔읍니다.』

툇마루에 꿇어 엎드린 내시는 이렇게 아뢰었다.

대비는 눈을 돌려서 발을 통하여 끓어 엎드려 있는 내시를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잠시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드디어 대비가 입을 열었다.

『도정은 벌써 사약을 하였다지?』

『하왔사온 줄로 아뢰옵니다.』

『운명하였다더냐?』

『그런 줄로 들었사옵니다.』

죽었다―여관의 말이 아니라 내시의 말로 이미 죽었다 하는 이상에는 죽은 것이 분명하다. 무론 죽었을 것이다. 사약을 한 이상에는 죽지 않았다면 도리어 그것이 기적일 것이다.

『 뵙고 아뢸 사연이 있더니, 몸도 좀 편하지 않고 그래서 그만두겠다.』

대비는 내어던져 버렸다.

그러나 내관이 절하고 나가려 할 때에 대비는 다시 말을 걸었다.

『상감 지금 동온돌(임금의 침실)에 곕시냐?』

『네……』

『아침 수라(점심)는 진어하셨느냐?』

『초조반만 진어하셨읍니다.』

『누구 입시한 대신이 있느냐?』

『영은 부원군(왕비의 친정 아버지)께서 입시하왔사옵니다.』

여기서 대비는 결심하였다. 김문의 수령의 한 사람이 또 무얼 하러 들어왔나? 무슨 음모인지는 모르나 좌우간 대비 몸소 상감께 나아가서 부원군으로 하여금 물러가게 하리라. 이리하여 조 대비는 일단 중지하기로 작정하였던 일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

『중희당서 뵙고 은밀히 아뢸 긴한 일이니, 대신은 물러가고 잠깐 중희당으로 듭시라고 나가서 여쭈어라.』

『황공하옵니다.』

절하고 나가는 내시를 보면서 대비는 최씨에게 명하여 의대를 가져오라 하였다.

『대왕대비마마께옵서 임어하오십니다.』

왕이 중희당에서 기다릴 때에 대비의 임어―

강화의 한 초동으로서 그 이십 년 전쟁을 보낸 상감은 전생의 초라하였음을 감추기 위하여 가장 편복(便服)일 때도 익선관(翼蟬冠)에 강사포 이하를 작용하는 일이 없었다. 조금만 큰 일에도 반드시 면류관이나 통천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었다. 이 때도 상감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착용하고 있었다.

상감은 대비의 거동에 황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절하고 아랫간의 자리를 내었다.

대비는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상감이 비낀 자리에 내려가 앉았다.

『상감마마!』

내관들까지 모두 물리친 뒤에 이렇게 말하는 대비의 말투에는 다분의 위엄이 있었다.

『아까 듣자오매 도정 이 하전에게 사약하라시는 처분이 계셨다니 사실이오니까?』

상감은 낭패한 듯이 마리(머리)를 두르며 두어 번 방안을 살다. 본시 빈한한 가운데서 자라고 왕자의 덕과 왕자의 품위를 배우지 못한 상감은, 종실의 웃어른이나 나이 많은 재상의 말에 대하여는 늘 낭패한 듯이 이런 태도를 취한다. 상감의 말씀이 있기 전에 대비가 겹쳐 나갔다.

『역모로 치죄하셨다는 승전빛(承傳色)의 말인데 허전은 아니겠지요?』

『네. 제가―신이 사약을―이 하준―하전이가―저……』

낭패하는 왕의 말은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비는 이 알아 듣지 못할 말을 귀찮은 듯이 듣고 있다가 한 마디―

『참 잘 허시우!』

한 뒤에는 머리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왕은 끝 없이 낭패하였다. 마치 어른의 꾸중을 들은 어린애와 같이 족장(足掌)을 연하여 움직이며,

『소자가 신이―영의정이―역모―사약……그……』

알아 듣지 못할 말을 또 하였다.

그러나 상감의 구중에서는 「영의정」이라는 한 마디가 나왔다. 소위 역모 사건 제조에는 영의정 김 좌근이 한몫 끼었을 것은 대비도 이미 짐작한 바 있지만, 상감의 구중에서 분명히 나온 이상에는,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이 사건의 배후에는 김씨 일문이 있고, 또 그 배후에는 장래의 승통자(承統者)라 하는 거대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비는 경멸하는 듯한 눈자위로 용안을 보았다. 대비의 입술이 문득 떨렸다. 하마터면 불경한 말이 나올 뻔한 것을 대비는 겨우 삼켰다.

이 상감―대비의 뜻에 거슬려서 인손이를 눌러 버리고 강화도에서 모셔 온 상감께 대하여, 대비는 좋은 감정을 품지 못하였다. 더구나 너무나 어질기 때문에, 김씨 일문의 농락 아래서 행동하는 상감인지라, 야심과 용감과 권세에 대한 동경심이 만만한 대비에게는 답답하기까지 하였다.

『참 잘 하셨소!』

다시 한 번 뇌일 때는, 대비의 마음에는 이번의 일에 대한 분풀이를 반드시 하겠다는 단단한 결심까지 되었다. 김문이 김문의 세력을 이용하여 행동하는 이상에는, 대비는 넷서 한 대비로서의 권병으로서 행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할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대비는 몹시 나무려운 눈자위를 용안에 부은 채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벌써 초로(初老)―아니, 중로에 든 대비는, 밤에 쉽게 잠을 들지를 못하였다. 더구나 그 날은 이 하전의 사건 때문에 마음이 매우 불쾌하여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밤에 자리에 들어서 불 켠 것을 싫어하는 대비는, 촛불을 멀리 대청에 내다 놓게 하여, 겨우 방 안의 어두운 기나 없게 하고 촌의(內衣)뿐으로 자리에 들어서, 두 사람의 시녀를 불러서 다리를 두드리게 하고 있었다. 너무 아프게 두드린다, 너무 가볍게 두드린다, 말이 많았다. 김씨 일문에 대한 노염을 시녀에게 부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김씨 일문의 외람된 행동에 대한 대책을 대비는 강구하고 있었다. 한 따님 밖에는 소생이 없는 상감인지라, 반드시 대비 당신의 권한 아래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는 지금의 현상에 대하여, 대비는 종친 중의 많은 공자들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이 하전이 이미 죽은 지금에 있어서는 다른 새로운 승통자를 내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지라, 새로운 승통자의 인선(人選)에 대비는 골몰하였다.

적어도 새로운 승통자는 대비 당신과 가까운 사람, 대비 당신의 심복인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김씨 일문에서 부수한다든가 동화할 인물이면 안 될 것이다. 대비 당신과 짜 가지고 장래 김씨 일문을 누를 만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김씨 일문에게 대한 대비의 노염을 장래 충분히 풀기 위하여는, 「그 사람」도 김씨 일문에서 원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될 것이다.

그러면 누구?

김문을 미워하는 사람―그리고 대비 당신과 짤 수 있는 사람―또한 그 위에 장래에도 김문과 타협이 안 되고 끝까지 김문과 싸울 사람―이러한 사람이 종친 가운데 있나?

머리로서 종친의 몇 사람을 점검하여 내려가던 대비는 흥선에 이르러서 딱 멈추었다. 흥선군은 대비 당신의 육촌 시동생―말하자면 멀지 않은 종친이다. 흥선은 김문에게 멸시를 받는 인물인지라, 또한 그만큼 김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다. 흥선은 비록 몸은 종친이라 하나, 투전과 술로 소일을 하는 허튼방이라 지벌을 자랑하는 명문 거족인 김씨 일문을 흥선의 절제를 좀체 받지 않을 터이며, 장래에도 김씨 일문과 흥선은 웬만해서는 타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흥선은 대비 당신의 조카 조 성하와 매우 가까이 지내는 모양이매, 장래 흥선이 권세를 잡는 날이 이른다 하면, 대비 당신을 괄시하지 못할지며 조 성하를 괄시하지 못하겠으니, 오늘날의 김씨 일문의 세도는 그 때는 조시 일문으로 당연히 돌아올 것이다. 종친 가운데서 이 하전에 대신할 사람을 골라 내자면 당연히 손가락은 흥선군 이 하응의 위에 멎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장래 흥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오늘날 그렇듯 흥선을 멸시하던 김가들의 꼴도 또한 보기에 통쾌할 것이다.

「종실의 어른」이라는 당신의 권병으로서, 흥선의 아들을 끌어 올려 김씨 일문의 위에 내려씌우면 과연 통쾌한 일이다. 지금 한 없이 뽐내던 김문이 주정방이 흥선의 앞에 그 허리를 굽히는 꼴은 근래에 다시 없는 통쾌한 일일 것이다.

이리하여 김씨 일문에 대한 노염과 증오 때문에, 거리의 주정방이 흥선은 조 대비의 점검(點檢)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너무도 그 인격이 종친답지 못한 점을 조 대비는 김문 복수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수일 후였다.

『제절사연(諸節事緣) 압고저 대령하왔읍니다.』

왕에게서 대비에게 대한 아침 문안―아침 문안이라 하나, 대궐 안의 아침 문안은 거의 오정에 가까운 때였다. 발 밖에서 곡배(曲拜)를 드리는 승전빛에게 대비는 가볍게 대답하였다. 대비를 뵙기를 몹시 거북히 여기는 왕은, 열흘에 엿새 평균 승전빛으로 하여금 대리로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문안을 드리고 내관이 바야흐로 물러 나가려 할 때에 대비가 내관을 불렀다.

『승후방(承候房)에 나가서 승후관 조 성하가 들어왔나 알아보아라. 그리고 들어왔거든 내가 부른다고 전하여라.』

『네!』

뒷걸음을 쳐서 물러가는 승전빛을 대비는 조소(嘲笑)에 가까운 미소를 띈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찍이 홀몸이 된 이래 삼십 년 간을 온갖 불만과 불평을 마음 속으로만 삭여 버리고 지낼 동안, 그의 속에 생장한 성격은 공상과 복수심이었다. 조 성하를 부른 것은 성하에게서 흥선에 대한 사연을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너 이즈음도 흥선군을 만나느냐?』

성하가 들어와서 문안을 드리고 바로 앉기가 무섭게 조 대비가 물은 말이 이것이었다. 승후방에 있다가 대비의 부름으로 갑자기 들어온 성하는, 대비의 첫 질문이 뜻도 않았던 바이므로 눈을 둥그렇게 하고 쳐다보았다.

『잠깐 만나기는 하옵니다마는……』

왜 그 말씀을 새삼스럽게 물으시냐는 뜻이었다. 대비의 질문은 한 걸음 뛰었다.

『흥선군에게 아들이 몇이나 있느냐?』

『직자가 두 분이 있는가 하옵니다.』

『작은도령의 연치는 어떻게 되느냐?』

『금년 열 살이올씨다.』

『열 살이라……』

대비는 잠시 생각하였다.

『아직 총각이지?』

『김 병문의 딸과 정혼은 했단 말이 있읍지만 아직 성례는 안 했읍니다.』

『김……』

여기에도 김문이 있다. 대비는 한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성례한다는 말은 못 들었느냐?』

『못 들었읍니다. 김문에서는 정혼은 해 놓고도 흥선군께 불만을 느끼고, 흥선군도 역시 너무 승한 사돈을 좀 불안히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흥!』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아니, 별 일은 아니로다.』

별 일이 아니라 하나 또한 심상히 지나가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부러 대비가 자기를 불러서 첫 번으로 물은 것이 흥선의 일이며, 더욱 흥선의 아들에 관한 질문인지라 아무리 대비가 별 일이 아니라 하되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혹은 흥선 댁 도령과 맞잡히는 얌전한 규수가 있어서 그 혼사 때문에 묻는 것이나 아닌가, 이렇게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는 성하는, 얼굴을 조금 들고 대비를 쳐다보았다.

『부르신 일은 그 일 때문이오니까?』

『응, 그 일도 있고 또……』

『또?』

『……』

『또―무슨 일이오니까?』

『또―무얼 그다지 신통한 일은 아니지만―며칠 보이지도 않고 하기에 잠깐 불러 보려고……』

대비는 이만큼 하여 속여 버렸다. 대비로 보더라도 섣불리 당신의 마음을 조카에게 보였다가, 일이 그릇되는 날이면 그 화가 조카에게까지 미칠 종류의 서이므로 내심을 말하기가 힘들었다. 대비는 모시는 나인에게 향하여 손가락질하여 담배를 붙여 오라고 명하고, 또 다탕(茶湯)과 생과를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너, 이 도정 사사(賜死)에 관해서 상세히 알면 아는껏 어디 말해 봐라.』

이윽고 대비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성하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되 대비에게서 처음에는 흥선 댁 도령에 관한 질문을 듣고, 그 다음에는 이 하전 사사에 관한 질문을 듣게 된 성하는, 그 두 가지의 사건을 결합하여 가지고 한 가지의 결론을 얻었다.

― 대비가 자기를 부른 것은 두 가지의 일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하나는 이 하전 역모 사건이라는 기괴한 사건의 윤곽을 알아보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흥선에게 적당한 도령이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사건이 합하여 낳은 한 가지의 결론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즉 흥선댁 도령에게 대하여 대비는 호기심을 일으킨 것이었다.

성하는 대비의 영에 의지하여 자기가 아는껏 소위 이 하전 역모 사건의 전말을 대비에게 아뢰었다. 아뢸 동안 성하의 마음은 이상히도 긴장되었다. 만약 지금 자기의 추측으로서 옳다 할진대, 여기에는 커다란 사건이 하나 빚어져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 빚어지는 이 「떡」이 장래 익을 때에는 어떤 모양을 하고 나타날지 그것은 예측도 할 길이 없다. 그러나 온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 하나가 지금 이 평범한 자리에서 빚어져 나아가는 것을 성하는 직각하였다.

이 하전에게 대한 대비의 촉망을 짐작하고, 지금 그 하전을 잃은 대비의 분노를 생각할 때에, 그 자리에서 나오는 한 사람의 왕족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히 간주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성하는 직각하였다.

성하는 눈을 조금 들어서 대비를 쳐다보았다. 무엇이 몹시 불안한 듯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성하의 말을 듣고 있는 이 노파―이 노파의 얼굴이 이 때같이 무섭고 크게 보인 일이 성하에게 없었다.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기 시작하고, 머리에도 간간 흰털이 보이기 시작하는 전형적인 한 개의 노파에 지나지 못하되, 이 노파의 마음 하나로서 장래 삼천리 강토를 지배할 지존을 작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노파는 입으로는 그 때 말도 하지 않으나, 이 하전 사건에 대한 분노 때문에 즉시로 다른 새로운 이 하전을 마음으로 작정하였다가 유사시에 덜컥 내놓아서, 지금 권문인 김씨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려는 복안인 듯싶다.

그리고 그런 필요상 흥선 댁 도령의 일을 캐어 묻는다하면,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댁에서 연을 올리는지 혹은 돈치기라도 하고 있는지 하는 그 소년은, 장래 놀라운 자리에 올라갈 소년이다.

『그래! 그래?』

감탄사인지 질문인지 분간하기 힘든 이런 말을 간간 끼우면서 성하의 말을 듣고 있는 이 노파의 마음은 지금 어떻게 움직이나? 알 길 없는 이 일을 짐작이라도 하여 보려고 성하는 슬금슬금 대비의 얼굴을 쳐다보고 하였다.

이 하전의 사건에 대하여 성하가 자기의 아는 것을 다 말한 뒤에도, 대비는 특별히 당신의 의견이라든가 감상이라든가를 말하지 않았다. 입맛이 쓴 듯이 몇 번 혀를 챌 뿐이었다. 그런 뒤에 남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백두산이 무너지나―동해수 메어지나』

중얼거렸다. 그런 뒤에 성하에게 향하여,

『하전이란 놈은 과시 고약한 놈이로군. 제가 역모를 하다니! 당랑(螳螂)이 수레를 버티는 셈이지. 죽어 싸니라, 죽어 싸!』

하고는 억함을 참을 수가 없는 듯이 양 어깨를 떨었다.

그로부터 며칠, 용무가 바쁘기 때문에 흥선 댁도 찾아보지 못하고 대비께도 들어가 뵙지 못한 성하는, 삼사일 뒤에 대비께 불리어서 들어갔다. 들어가자 대비는 다른 말이 없이 흥선군을 잠시 모셔 오라는 분부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는 너무도 갑갑하니, 흥선 같은 좀 색다른 인물이 들어와서 한참 떠들고 가면 좀 나을 것 같아서 당부하는 것이라는 구실을 들었다.

성하는 대비의 분부를 듣고 즉시로 가마를 몰아서 흥선 댁으로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낮에 집안에 들어 박혀 있을 흥선이 아니었다. 청지기의 말을 듣자면 서촌관속(西村官屬)들과 같이 아침에 나갔다는 말이었다. 관속 누구냐고 물으매 안 필주(安弼周)와 하 정일(河靖一)이라 한다.

후일 흥선이 변하여 대원군이 된 뒤에 대원군의 심복이 되어 활동한 소위 천하장안(千河張安)의 네 사람 가운데 「하」와 「안」과 동반하여 나간 것이었다.

당시의 오입장이를 대표하는 이 관속들과 외출을 한 이상에는, 이 장안 어느 구석에 가 박혀 있는지를 짐작도 할 길이 없었다. 혹은 기생방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벌로 놀이를 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 가서 투전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성하는 잠시 대문 밖으로 나와서 머리를 기울이고 있다가, 다시 몸을 가마에 실으면서 교군군에게 기생 계월이의 집을 일렀다.

계월이의 집에도 흥선은 없었다. 아까 잠깐 들렀다가 곧 수군거리며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월이의 짐작으로는 어디 투전을 하러 가는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 이제는 어디서 찾나?

성하 짐작하건대, 오늘 대비가 흥선을 부르는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다. 대비는 심상히 갑갑하여 부른다 하지만, 아무리 갑갑하기로서니 흥선군을 부른다 하는 것은 너무도 기상천외의 일이다. 무슨 다른 곡절이 필시 있을 것이다.

그 곡절에 대하여 또한 짐작이 없지 않은 성하는, 어디서든 반드시 흥선을 붙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놓쳤다가는 혹은 커다란 일이 틀려 나갈지도 모르며, 그 때문에 장래 또한 어떻게 운명의 변동이 생길지도 모르겠으므로, 성하는 어떤 일이 있든 흥선을 꼭 붙들리라 결심하였다.

계월이의 집에서 나온 성하는 교군을 몰아 가지고 흥선의 갈 만한 곳은 모두 찾아다녔다.

흥선이 지근지근 찾아 다니는 권문 거족들의 댁에도 미심결로 가 보았다.

흥선이 즐겨 다니는 술집도 모두 찾아가 보았다.

그 밖에도 짐작이 가는 집은 모두 찾아 보았다.

그러나 흥선은 찾아 낼 수가 없다.

어디서 투전이라도 하느라고 박혀 있는 것이 분명하였다. 성하가 대비의 분부를 받고 대궐을 나온 것은 오정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 성하가 그 날 자정이 지나도록 장안 구석구석을 찾아 돌아다녔으나 흥선은 찾을 길이 없었다.

여기서 성하는 이젠 집으로 돌아갈까 하였다. 그러나 오입장이 혹은 투전군이 왕래하는 것은 자정 이후에서 아침 밝기까지인지라, 투전군 흥선을 찾기 위하여는 이 시간을 빼어 놓을 수가 없으므로, 연하여 흥선댁까지 가서 흥선의 귀댁 여부를 알아보고는 또 다시 교군을 몰아서 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하였다.

『제기랄!』

마지막에는 역하여 이런 말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지만 성하 짐작에 적지 않은 일을, 일시에 역함으로 모피할 수가 없어서, 밤을 새워서 이튿날 아침 해가 동녘 하늘에서 오르기까지 쉬지 않고 찾아다녔다.

十三[편집]

『쉬!』

『?』

『가만! 이게 무슨 소리냐?』

일동은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헷귄가?』

『자 대감 거시오.』

『걸지. 얼마?』

투전판이었다.

물주를 선 것은 안 필주(安弼周)였다. 흥선, 장순규(張淳奎), 그 밖에 육주비전(六矣廛)의 장사아치가 서너 사람 있었다.

어떤 어둑신한 집 안채였다. 투전에 재간을 좀 피울 줄 아는 안 필주가 몫을 잡고 물주를 서서 상인들을 알겨먹으려는 플랜이었다. 장 순규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웃목에 두어 명 쫑그리고 앉은 것은 차력패였다. 마지막에 상인들이 돈을 잃고 말썽을 부리면 달려들어 부술 장사들이다.

『자, 박 서방도 거시오.』

『걸지요.』

『얼마?』

『글쎄, 물주 손속이 너무 세서―그러니 잃고 적게 걸 수도 없고……열 냥만 겁시다.』

『열 냥? 홍 서방은?』

『나는 열 닷 냥.』

『최 서방은?』

『나도 열 닷 냥.』

『그럼 자……』

또 바싸 하는 소리가 들렸다.

『쉬!』

『?』

분명히 무슨 소리가 밖에서 났다. 모두들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면 아무 소리도 다시는 나지 않았다.

『떡쇠야! 어디 좀 나가 봐라.』

돈은 제각기 제 앞에 놓은 채였다. 필주는 몫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방 안의 모든 사람은 경계하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떡쇠가 가만히 문을 열었다.

『누구요?』

가만히 불러 보았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밖에 누구 왔소?』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좀 나가 보아라.』

흥선의 명령이었다. 떡쇠는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앞에 놓은 돈 위에 손을 덮고 여차하면 달아날 준비를 하고들 있었다. 잠시 후에 떡쇠는 무사히 돌아왔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품이 아무도 없더라는 뜻이었다.

『아무도 없더냐?』

『보이지 않으와요.』

『그럼……』

흥선은 필주에게 향하였다.

『몫 돌리게.』

필주는 바야흐로 몫을 돌리려 하였다. 그 때 밖에서는 또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버석 하는 소리가 아니요 덜컥 하는 소리였다. 뒤를 연하여 또 한 번 덜커덕 하는 소리가 났다.

『왔다. 뛰자!』

순간 방안은 분란이 되었다. 차력들은 벌떡 일어서서 문을 지켰다. 흥선, 필주, 순규의 세 사람은 앞에 놓였던 돈을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모두 긁어 각기 제 주머니에 넣으며 일변 불은 꺼버리며 일어섰다.

『내 돈―내 돈……』

상인들은 제 돈이라고 덤비어 대나, 그런 말에 구애될 세 사람이 아니었다. 내 돈 네 돈 할 것 없이 분란통에 흥선과 그의 친구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 때에 콰당콰당 하는 발 소리가 났다. 차력들이 벌써 안으로 건 문을, 잡아 낚는 소리가 들렸다.

『잡아라! 이 놈들 문 열어라.』

포교들이 온 것이다. 포교도 자그마치 오륙 인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포교들이 앞문을 열려고 야단하는 동안에, 흥선의 일행과 상인들의 일행은 뒷문을 박차고 앞뜰로 나와서 담을 넘어 한길로 뺑소니치기 시작하였다.

뒷담을 넘어서는 제각기 사면으로 헤어져서 달아났다.

흥선은 필주와 함께 동쪽 한길로 달아났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서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나므로, 돌아보매 포교 하나가 흥선과 필주의 뒤를 쫓아온다. 눈치 빠른 그 포교는 집 뒤를 보려고 돌아오다가 도망하는 두 사람을 보고 따르는 것이었다.

『이 놈들, 섰거라! 잡아라!』

포교는 함성을 지르며 전속력으로 따라왔다.

흥선과 필주도 죽을 힘을 다하여 뛰었다. 깊은 밤의 골목에서 이 뛰고 쫓는 일 때문에 때 아닌 활극이 일어나고, 집집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었다.

흥선은 왜소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뛰는 데도 속력이 빠르지 못하였다.

『대감, 어서! 자 어서!』

필주가 연하여 손목을 끌면서 뛰었지만, 포교와의 사이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러다가는 필경 잡힐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그때였다. 사람이 죽을 수가 닥치면 살 수가 생긴다고, 숨이 턱에 거의 닿아서, 이제는 더 못 뛰게쯤 되어서 흥선의 눈에는 뉘 집 뒷간(길로 문이 달린)이 하나 띄었다. 흥선은 필주에게 손목을 잡힌 채 그리고 화닥닥 뛰어 들어갔다. 손목을 잡았던 필주도 끌리어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흥선은 안에서 뒷간 문을 잠가 버렸다.

한 걸음 뒤 떨어져 온 포교는 뒷간 앞에 서면서 벌써 걸린 문을 잡아 낚았다.

『이 놈들, 나오너라! 안 나왔다는 문을 부순다.』

위협하면서 문을 발길로 찼다 잡아 낚았다 하였다.

그 포교의 야료를 들으면서 흥선은 주머니를 뒤적이었다. 그리고 돈을 한 줌 꺼내어, 듣기 좋게 절럭절럭 흔들었다. 이 돈 소리에 포교의 야료가 좀 멎었다.

『흥, 열 냥이로군!』

흥선은 밖에서도 들릴 만한 소리로 중얼거리고, 그 돈을 왼손에 바꾸어 쥐며 가만히 문을 걸쇠를 잡아 젖혔다. 그리고,

『이 놈! 칼 나간다. 칼 받아라!』

하면서 문을 좀 열고 그 틈으로 돈 쥔 손을 쑥 내밀었다.

포교는 흥선의 주먹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조심조심히 돈을 받아서 제 몸에 간직하였다. 포교에게 돈을 준 뒤에 주먹을 도로 끌어들이고 이젠 뒷간 밖으로 나갈 차비를 하려는데, 별안간에 포교의 야료가 또 시작되었다.

『이 놈들, 이 속에 숨은 줄을 뻔히 안다. 썩 나오거라.』

그리고는 문은 잠그지는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열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연하여 요란스러이 두드리기만 하였다. 부서져라 하고―.

흥선은 하릴없이 필주에게 돌아서면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여보게, 자네 주머니 톡톡 털어서 열 닷 냥만 내게.』

한 두 번의 경험이 아닌 필주는 주머니를 열고 열 닷 냥을 세어서 흥선에게 드렸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또 멎었다.

『주머니를 톡톡 털었나?』

『인전 한 푼도 없읍니다.』

큰소리로 주고 받은 뒤에 흥선은 필주의 돈을 받았다. 그리고 아까 모양으로 문을 조금 열면서,

『이놈, 총 나간다, 총 받아라!』

하면서 주먹을 쑥 내어 밀었다.

포교는 두 번째의 돈을 또 받아서 몸에 간수하였다. 그런 뒤에,

『에이, 그런 놈들! 어디로 도망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용꿈 꾼 놈들이다. 이 내 눈에는 벗어났담. 헐 수 없군! 인전 가야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차차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뒤에 흥선과 필주는 뒷간에서 나왔다. 그리고 포교가 간 쪽으로 역시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졌다.

『오늘 얼마 땄나?』

좀 뒤에 흥선과 필주는 어떤 내외술집에 마주 앉았다. 필주는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서 다 쏟아 놓고 세어 보았다. 일흔 석 냥이었다.

『일흔 석 냥 있는데 본전이 열 두 냥 있었으니깐 예순 한 냥 땄읍니다.』

『스물 닷 냥 공용이 있지?』

『참, 그럼 여든에다 엿 냥 딴 셈이올씨다.』

『나는 스물 두 냥 밑천이 지금 홑 석 냥 남았네.』

『운 좋은 놈들. 홀짝 알겨 먹을렸더니 그놈들이 뛰쳐 들기 때문에……』

『아마 다 해서 한 삼사백 냥은 갖고 있었을걸?』

『그런 모양입니다.』

흥선은 필주의 앞에 놓인 예순 몇 냥의 돈에서 마흔 냥만은 제 주머니에 집어 넣고 나머지를 필주에게 밀어 보냈다.

『언제 또 걸릴 날이 있겠지. 그 때 톡톡히 알겨 내세나.』

『운수 좋은 놈들―이담에 또 걸렸다만 봐라. 부랄까지 알겨 낼게.』

『자, 어서 몇 잔씩 하세. 곤하군.』

이리하여 그들은 거기서 술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몇 잔씩만 하고 가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이서―단 둘이서 만난 이상 몇 잔으로 끝이 날 수가 없었다. 한 잔 두 잔이 열 잔 스무 잔으로 넘어가고, 스무 잔이 서른 잔으로 넘어가서 그칠 바를 몰랐다.

『이 놈! 그래, 이 놈 필 주야! 그래 네가 이 놈, 나와 마주 앉아서 외람되이 술을 먹는단 말이냐?』

『대감, 그래 대감이나 소인이나 ○○ 두 쪽 밖에 없는 신세야 일반이지, 대감은 무슨 큰 신통한 일이 계시오?』

차차 취하여 가는 그들은 연하여 농을 하면서 주고받았다.

이리하여 밤이 새도록 먹고 마시고―그들이 그 술집을 나선 것은, 봄날 짧은 밤은 다 밝고, 동천에는 벌써 불그스레한 해가 떠오를 때였다.

그 집에서 나온 때는 그들은 정신을 모르도록 취하였다. 그다지 넓지는 못하지만 또한 과히 좁지도 않은 길을, 그들은 어깨를 겨루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돌진(突進)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걸었다. 연하여 소리를 높여서 노래를 불렀다.

『백구야 훨훨―

필주야, 이 놈 필주야! 껑충 뛰지를 마라. 너 잡을 내가 아니다. 어허! 지금이 대체 저녁이냐 아침이냐? 해가 지붕 너머로 보이는데, 저녁인지 아침인지를 모르겠구나.』

『대감, 아마 지금이 아침인 모양이올씨다. 해가 아침하니 지붕 위에 솟아오릅니다. 허허허허!』

『아침하니 솟아오르니 아침이라! 그러면 저녁하니 떨어지는 저녁이냐?』

『하하하하!』

이 대감―지금 바야흐로 그의 일산상의 중대한 운명이 대궐 안에서 극비밀리에 내정되려는 것도 모르고 흥선 대감은 중인(中人) 친구와 함께 아침의 대로상에서 난무(亂舞)를 하는 것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이 이른 새벽 주정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길을 피하였다.

『환장할 놈들! 이른 새벽부터 어디서 저렇게 모주를 쳐다리고 야단이람.』

『낫살이나 든 녀석이 저 꼴이로군.』

이러한 뭇 입을 그들은 듣지 못하고 여전히 동지서지 하여 길을 좁히며 걸었다.

흥선은 문득 누가 자기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것을 알았다. 그 충동으로서 흥선은 비틀하면서 돌아보았다.

『대감, 시생이올씨다.』

웬 젊은 사람이 흥선의 소매를 놓으며 인사하였다.

흥선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술에 과히 취하였기 때문에 눈의 촛점이 모아지지 않았다.

흥선은 눈을 이리 찡그리고 저리 찡그리며 젊은이를 마주 보았다.

『대감! 시생이올씨다.』

『시생이란? 보아하니 나보다 큰데 시생이란? 선생이지?』

『몰라 보시겠읍니까? 조 성하올씨다.』

그것은 조 성하였다. 어제 조 대비의 부름으로 대궐에 들어갔다가 조 대비께서 흥선군을 좀 모셔 오라는 영을 듣고, 어제 낮부터 오늘 아침까지 밤을 새워 가면서, 흥선이 갈 만한 곳은 모두 찾아다니다가, 여기서 겨우 죽게 취한 흥선을 만난 것이다.

『오오, 조 성하라! 누군가 했더니 조 성하라! 웬놈인가 했더니 조 성하라! 자네 이 주부 사윌세그려?』

『네!』

『이 주부께는 아들이 있겠다. 그 아들놈한테 내 딸을 주기로 했네그려. 하니깐 이 주부는 내 사돈이야. 자네는 그 이 주부의 사위니깐 내게는 사돈의 사돈―즉 팔돈일세 그려! 여보게 팔돈!』

성하는 민망한 듯이 허리를 굽혔다.

『대감! 어디서 약주를 과히 잡수셨읍니다그려?』

『허어! 어제 투전해서 돈 땄네그려, 그래서―어―이 사람 어디 갔나? 여보게 필주!』

조금 앞에 담벽을 기대고 건들거리던 필주가 나왔다.

『네이! 여기 대령했읍니다.』

『흥, 자네가 그 모퉁이서 필주! 하니 나오니 이름이 필줄세그려.』

『대감은 소인을 부르시는데 하으―ㅇ 하고 부르시니 하응(昰應)이올씨다그려.』

성하가 가로 들어섰다. 어디웬 놈으로서 아무리 술에 취하고 흠이 없다기로서니, 흥선의 이름을 외람히도 부르는 것을 그저 볼 수가 없었다. 나서는 다음 순간, 성하의 오른손은 필주의 뺨으로 날아 갔다.

『이 놈! 버릇 모르는 놈 같으니. 아무리 네 정신이 아니기로, 너는 죽을 흔히 들었느냐? 고약한 놈!』

필주는 정신을 펄떡 처리는 모양이었다. 눈을 딱 바로 뜨고 잠시 성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흥선의 소매에 늘어지며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대감, 저 양반이 소인의 따귀를 가져가셨읍니다. 소인의 볼이 달아났읍니다. 대감, 대감! 아이고 이런……』

차차 구경군들이 둘러서기 시작하였다.

『볼이 없어졌다? 그럼 자네는 무협필주(無頰弼周)―아니 협비(頰飛) 필줄세 그려! 뺨이 없으면 모두새렷다. 여보게 팔돈! 내 친구의 뺨을 어디다 두었나? 도로 주게.』

『대감! 자, 어서 댁으로 돌아가십시다. 잠시 좀 진정하셔서 예궐을 하셔야겠읍니다. 조 대비마마께서 대감을 부르십니다.』

조 대비―정신을 못 차리던 흥선은 이 한 마디에 펄떡 정신을 차렸다. 이 한 마디는 흥선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청량제였다.

성하가 부른 가마 두 채에, 앞 가마에는 흥선이 타고 뒷 가마에는 성하가 타고, 필주는 그냥 떼어 버리고 가마를 몰아서 흥선 댁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였다.

『자, 대감! 조금 쉬세요. 시생도 대감 계신 곳을 찾노라 밤을 곱게 새웠읍니다. 좀 쉬시고 오시나 지나서 대비께 들어가 뵙시다. 무슨 중대하신 의논이 계신 모양입니다.』

이리하여 성하는 흥선의 웃옷을 모두 벗기고 흥선을 붙안아서 보료 위에 고이 뉘었다. 그리고 드러눕기가 무섭게 즉시로 코를 고는 흥선을 보면서 자기도 잠시 쉬려고 몸을 벽에 기대었다.

밤을 새워서 흥선을 찾으라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성하도 몸이 몹시 곤하였던지라, 벽에 기댄 조금 뒤에는 성하 역시 약하게 코를 골았다. 두 사람은 흥선의 사랑에서 한잠을 잤다.

성하가 잠이 든 지 조금 지나서 흥선이 눈을 번쩍 떴되.

눈을 뜨고 아래 위를 한 번 살핀 뒤에 흥선은 일어났다. 술에 과히 취하였기 때문에 쪼개지는 듯이 골치가 쏘았다. 흥선은 눈살을 연하여 찌푸리며 가만히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 걸터앉아서 두어 번 숨을 깊이 들이 쉬었다.

『여봐라, 이리 오너라!』

성하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청지기를 찾았다. 그리고 청지기에게,

『세수물 떠다가 이 마루에 놓아라.』

고 명하였다.

시원하게 활활 얼굴을 씻고 나니, 골치 쏘는 것은 좀 낮고 취기도 좀 깨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나서 흥선은 대청으로 지필을 내어 오래 가지고 거기서 편지를 한 장 썼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서,

『이 편지를 사동 김 판서 댁에 갖다 드려라.』

하고 편지를 내어 주었다. 사동 김 판서라 함은 영어 김병국을 가리킴이었다.

그런 뒤에 자기는 청지기 응원이를 데리고 침방으로 들어갔다. 침방에서 다시 정침으로 나올 때는, 흥선은 전날의 거리의 부랑자 이 하응이가 아니요, 정일품 현록대부(顯祿大夫) 흥선군 이 하응이었다. 옥색 관복에 서대(犀帶)를 띠고 사모를 쓰고 홀을 든 이 공자―옷에서는 복온(馥溫)한 훈향(燻香)내가 피어오르며, 그 속옷은 비록 무명옷이나마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관복이며 사모며는, 흥선으로 하여금 전날의 거리의 부랑자 이 하응의 흔적을 없이하고, 영종의 고손 왕족 흥선군의 위엄을 갖게 하였다. 가까운 장래에 사용할 것을 예기하고 관복을 새로지어 두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흥선은 아랫목으로 내려가서 곤하게 벽에 기대고 잠자는 성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 미소하였다. 성하가 깨면 반드시 놀랄 것을 예기하고― 잠시 뒤에 청지가가 가만히 문을 열었다.

『다 대령됐읍니다.』

『부족이 없는가?』

『없읍니다.』

현록대부 흥선군 이 하응이 탈 만한 사인가마와 하인들을 (가난하기 때문에) 갖고 있지 못한 흥선은, 김 병국에게 편지하여 가마와 하인들을 빌어온 것이었다.

잠시 뒤에 곤한 잠에서 깬 조 성하는 아랫목의 흥선을 보고 놀랐다. 아랫목에 앉아 있는 흥선―그것은 어제그제 늘 보던 그 흥선이 아니었다. 옷뿐이 아니라, 그 온화한 듯한 가운데도 두 눈 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패기며 위압력이, 무서운 지배자가 아니고는 갖지 못하는 「왕자」로서의 위엄이었다.

『가난한 석파라 환옥 관자며, 호박 갓끈이 없네그려. 그렇다고 초라하게 입고 대비께 뵙기도 너무 황송스럽고, 하릴없이 낡은 관복을 꺼내 입었네.』

그러나 그것은 흥선의 거짓말―그의 관복은 아직 입어 보지 않은 새 것이었다. 흥선은 성하를 재촉하여 소세를 하게 하였다.

소세가 끝난 뒤에 앞뜰로 나가 보니, 거기엔 벌써 행차가 등대하고 있었다. 호피를 깐 사인남여가 준비되어 있고, 여덟 명의 별배가 철릭을 휘날리며 남녀를 호위하고 있고, 요강망태라 영변서랍이나 부산연죽(煙竹)이라 지갑이라 호피방석이라를 든 열 명의 구종이 벙거지에 더그레를 입고 높높이 날뀌고 있었다. 성하의 탈 가마도 준비되어 있었다. 성하는 망연히 이 모양을 바라보았다.

『에이, 물렀거라! 섰거라! 선 놈은 모두 앉거라!』

위풍 당당하게 벽제 소리 요란히 흥선의 댁 대문을 나오는 이 행차를 동리 사람들도 모두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흥선은 이런 행차에 익은 사람같이 단정히 사인남여 안에 앉아 있었다.

「이 일(이 하전 사사 사건)이 대감께는 혹은 전화위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하전의 사건이 돌발된 때 성하가 흥선에게 향하여 던진 이 한 마디를, 흥선은 얼굴의 모든 표정을 죽여 버리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네.」

하고 넘기어 버렸지만, 그 말이 흥선에게 있어서 결코 무의미한 말이 아니었다.

그 날 밤 가인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려서, 홀로 향불을 피워 가지고 가묘의 지나간 오 대의 조상의 위패 앞에 설 때는, 흥선은 기괴한 흥분과 기괴한 기대 때문에 가슴이 떨렸다.

일찍이 성하를 통하여 조 대비께 가서 뵙고, 조 대비에게 미음은 사지 않을 만한 교제를 맺어 놓았지만, 그것으로서 그의 야심이 찰 바는 무론 아니다. 조 대비께 그만 신임뿐으로 야망이 성취된다 하면, 종친 공자로서 야망을 성취 못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흥선도 짐작하거니와 인손이라는 인물이 조 대비의 사랑하는 왕실 공자로서, 상감 불행한 뒤에는 십중 팔구는 사직의 승계자가 인손이가 될 것이다. 이제 얼마만큼 조 대비께 자주 출입하여 흥선 자기가 인손이보다 더 신임을 얻기 전에는 「떡」은 인선이의 것이 될 것이다. 흥선 자기는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지붕만 쳐다볼 인물이 될 것이다.

시정에 배회하면서 권문 거족들에게 멸시를 받을 일을 끊임없이 하는 한편으로는, 흥선은 또한 조 대비께 더욱 가까이하여 인손이보다 더 신임을 얻을 방략을 늘 꾸미고 있던 것이었다. 이제 김씨 일문의 손에 인손이가 없어졌는지라, 흥선 측으로 보자면 또한 강적(强敵) 하나가 없어진 것이었다.

『당신의 후손의 앞에 지금 복의 문이 열리나이까. 혹은 이 일도 특별히 관심할 바가 아니오니까?』

위패 앞에 이런 호소를 할 때는 흥선의 눈에는 찬란한 빛이 났다.

그로부터 흥선의 난행(亂行)은 더욱 심하여졌다. 「천하장안」을 연하여 불러 오며, 대낮에도 이런 잡배들과 큰 소리로 농담을 던지며 거리를 횡행하여, 더욱 사람들의 웃음과 멸시를 사기에 노력하였다. 지금 자기의 몸은 귀한 몸―여차하다가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귀인이 될지도 모르는 몸인지라, 이 몸을 섣불리 김씨 일문에 산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될 일이다.

이리하여, 그렇지 않아도 남이 손가락질하는 난행을 거듭하던 흥선은, 이 하전이 없어진 뒤에는 더욱 어지럽고 거친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 혹은 조 대비가 자기를 부르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여, 그는 그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 신임하던 이 하전을 잃은 조 대비였다. 다른 종친들은 지금 모두 김문의 부하가 되어 있는 중에(멸시 받을지언정) 부하는 아직 되지 않는 유일의 종친―자기는 장래 어떤 날 반드시 조 대비가 부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흥선은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새 관복이며 서대며 사모를 모두 준비하여 두었던 것이다.

―굴러 오는 복!

그것은 과연 굴러 오는 복에 틀림이 없었다. 김씨 일문은 자기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 하전을 없이한 것이로되, 이 하전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 하전에게 내려지려던 복덩어리는 이제 십중 팔구는 흥선 자기에게 굴러올 것이다.

표면 난행을 거듭하면서도 이 날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조 대비의 조카 성하가 대비의 분부로 자기를 데리러 온 것이다. 위풍당당히 성하와 함께 창덕궁으로 가는 동안, 흥선의 얼굴은 희망과 기대로 빛났다. 그리고 어떤 정도까지의 자신도 가지고 있었다.

『왜 그간 한 법도 아니 오셨소?』

흥선의 절을 같이 몸을 일으켜서 받으면서, 대비는 비교적 명랑한 미소를 얼굴에 띄워 가지고 물었다.

『가난한 백성이라, 무사 분주하기 때문에 한 번두 문후를 못 했읍니다. 성하를 통해서 대비전마마의 사연도 늘 알고 있었읍니다마는……』

여전한 호활한 웃음은 그의 얼굴을 장식하였지만, 이날의 흥선은 전날의 무뢰한 이 하응이 아니었다. 호활한 패기와 불기적 기상이 뚜렷이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어디인가 종실 공자다운 단아함과 위엄이 갖추어 있었다.

『성하 너라도 좀 모시고 오지?』

대비가 말을 성하에게 돌리는 것을 흥선이 가로받았다.

『그 사이 성하는 여러 번 그 말씀을 하옵니다마는, 여가도 없고―사실을 말하자면 대비마마께 뵈올 만한 의대(衣帶)도 없었읍니다. 하하하하! 벼르고 별러서 가난한 가운데서 뽑아 내서 이 의대 한 벌을 장만했읍니다.』

흥선은 태도를 과장하여 가며 자기의 새 관복 소매를 들어 보였다. 옷이 없다든가 무엇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것을 입 밖에 내기는커녕 생각하기조차 부끄러이 여기는 대궐 안에서, 자기의 소매를 들추면서, 옷이 없어서 그간 못 왔노라고 천연스러이 말하는 흥선의 태도는 도리어 유쾌하였다.

이 불기한 흥선의 태도를 대비는 연하여 상쾌한 미소를 얼굴에 나타내며 보았다.

『대감과 우리와는 촌수로 보자면 육촌 형제―항간에서는 그다지 먼 일가가 아니건만, 우리는 왜 그다지도 소원히 지냅니까?』

왜 소원히 지내느냐? 「저것을 좀 저편으로 밀어 주세요.」―지금부터 십 이 년 전, 사랑하는 아드님 헌종이 대비의 무릎에 누워서 임종시에 어보(御寶)를 가리키며 한 말을 대비는 지금 추상하는 모양이었다. 어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모자지간 근친지간도 그것 때문에 이렇듯 소원해지지 않으면 안 되나? 명랑한 미소 아래서도 이 말을 할 때는 대비의 낯에는 한참 동안 적적한 빛이 흘렀다.

『육촌은 오촌보다 멀고 오촌은 사촌보다 멀지 않습니까? 골육지간에도 서로 다투는 세상이올씨다.』

『제발 우리는 좀더 가까이 지냅시다.』

하하하하! 큰 소리로 웃고 지껄이는 흥선이로되, 오늘 대비가 자기를 부른 데 대하여 좀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는 흥선은 대비의 일언 일구, 일동 일정을 모두 주의하여 보고 주의하여 들었다. 만약 대비로서 흥선의 어리석음을 이용하려면, 흥선은 자기를 어리석게 가장(假裝)할 것이요, 대비로서 흥선의 활달함을 이용하려면, 흥선은 자기를 활달하게 가장할 것이요, 대비로서 흥선의 「김문에 대한 악감」을 이용하려면, 흥선은 또한 그만큼 자기를 가식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이라, 흥선은 대비의 손가락의 조그만 움직임이라도 주의하여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흥선의 주의 가운데서 잠시간 그리하여 담이 계속되었다. 대비도 무슨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흥선은 흥선으로서 바람 부는 대로 혹은 동으로 혹은 서으로 기울어질 따름이었다.

『대감! 종친 중에 인재 하나를 또 잃었구료!』

성하는 승후방으로 나가서 기다리라 하고, 모시는 여관들을 물리치고, 대비와 흥선 단 두 사람이 되었을 적에 대비는 비로소 이 말을 하였다.

흥선은 힐끗 대비를 쳐다보았다. 보다가 대비와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눈을 도로 아래로 떨어뜨렸다.

『대비전마마, 신도……』

이렇게 말하고 잠시 끊었다가 계속하였다.

『그 날 밤―또 그 이튿날 밤을 잠을 이루지를 못했읍니다.』

『대감도 혹은 짐작하시는지? 이 사람과 인손이―하전이의 사이를……』

『짐작하옵니다. 얼마나 심통하실까고. 황송합니다만, 신도 가까이 위로는 못 드리나마 혼자서 마음껏 애탔읍니다..』

인손이의 사건에 나가해서 대비가 받아 보는 처음 조상이었다. 간단한 한 마디의 조상이나마 대비에게는 마음에 드는 조상인 모양이었다. 대비는 눈을 적이 굴려서 한참을 흥선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끊어졌다. 그 뒤에 대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효명익황제(孝明翼皇帝)의 대는 끊어졌구려.』

지금의 상감은 대비의 지아버님인 익종의 뒤가 아니요 당신의 시아버님인 순조의 후사라 하는 뜻이었다. 죽은 인손이가 익종의 대를 이을 사람이었었다 하는 임시였다.

대비의 이 말에 대하여 흥선은 입에서 불끈 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삼켰다가 그냥 고요히 꺼내었다.

『대비마마! 호명황제의 어대를 이을 소년 하나를 신이 추천하오리까? 영특한 소년이옵니다. 제왕의 풍기를 가진 소년이옵니다. 아무 데를 내놓을지라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소년이옵니다.』

대비는 흥선의 이 말에 고요히 재쳐 물었다.

『누구오니까?』

『흥선의 둘째아들 제황이, 금년에 열 살 나는 애올씨다.』

『?』

『자식을 보기에 아비만한 눈이 없고, 제자를 보기에 스승만한 눈이 없사옵니다. 흥선이 비록 미련하오나 자식에 익애(溺愛)되어 그릇 볼 만치 둔하지는 않사옵니다. 사십 년 생애를 술과 허튼 노름으로 허송했읍니다마는, 아비가 그렇게 자난 만치 자식은 그렇게 보내지 않게 하고자 애를 다 쓰고 힘을 다 써서 훈도한 공이 겨우 나타나서, 아비와 다른 영특하고 활달한 소년이 되었읍니다.』

커다란 운명이 그의 바로 한 뼘 앞에 늘어져 있는―지금의 권문 거족에게 짐승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얼굴에 떠오르는 피를 그냥 삭여 버리고 참고 지낸 것은 오늘이 장차 올 것을 얘기하였으므로가 아니었던가? 지금 바야흐로 눈 앞에 걸린 이 운명의 열매를 바라보면서 흥선은 죽을 힘을 다 썼다. 아직 어떤 수모를 받을지라도 눈 한번 껌뻑 감았다가 뜨면 스러져 버리던 흥선이로되, 지금 이 자리에서는 등으로 땀을 벌벌 흘렸다. 표면 아무 기교가 없이 대비에게 대하여 있는 흥선이로되, 한 마디 한 마디의 말도 모두 그 사이 오랜 기간을 닦고 갈고 깎고 하여, 준비하여 두었던 말이었다. 이 자리의 한 마디의 말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형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대비는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뚫어질 듯이 흥선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동으로?

서로?

마음이 너무도 산란하기 때문에 얼굴에 장식하였던 평온한 미소가 사라지려는 것을 억지로 회복하면서, 흥선은 대비의 이 시험의 눈앞에 단정히 꿇어 앉아 있었다. 등과 가슴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만약 두 시간만 이렇게 앉아 있으라면, 흥선은 과도한 긴장 때문에 기절을 할 것이다.

『후!』

흥선과 성하가 대비께 하직하고 물러나올 때에, 흥선은 기다란 숨을 내어 쉴 뿐 아무 말도 안 하였다.

성하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흥선을 따라서 흥선 댁으로 왔다. 남녀에서 내려서도 흥선은 성하를 돌아보지도 않고 주인을 맞는 청지기에게 행차(병국이에게 빌어 왔던)를 돌려 보내라는 간단한 명령을 할 뿐, 빠른 걸음으로 정침으로 들어갔다. 성하도 묵묵히 따라 들어갔다.

흥선은 옷을 갈아 입을 생각도 않고 그냥 아랫목에 내려가 앉았다. 근심스러운 얼굴이라기보다도, 만족하다는 얼굴이라기보다도―단지 평범하고 엄숙한 얼굴이었다.

성하는 문 안에 읍하고 섰다. 무엇이라 흥선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흥선은 성하의 존재도 모르는 듯이 잠자코 앉아 있었다. 숨소리도 고요하고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헴!』

성하는 혹은 흥선이 자기가 온 줄을 모르지나 않나 하여 기침을 하여 보았다. 흥선은 모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는 성하의 기침 소리에 한 순간 성하를 본 뒤에 다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대비와의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어떤 말을 들었으며 어떤 결과를 얻었나? 성하는 알 길이 없었다. 흥선의 표정으로써 짐작하여 보려 하였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평범하고 엄숙한 표정―그것은 일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나타나는 절망의 표정으로도 볼 수가 있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일이 마음대로 된 뒤에 고요히 그 성공을 즐기고 있는 표정으로도 볼 수가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흥선의 표정 앞에 성하는 웃목에 읍하고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성하에게 향하여 앉으란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또한 나가라는 말도 없었다. 마치 낮잠에서 깨어난 사람 모양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예장(禮裝)을 갖추고 묵묵히 앉아 있는 흥선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사람의 미고소(微苦笑)조차 자아내는 것이었다.

이윽고 흥선은 담뱃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담배 서랍으로 쓰는 나무 곽을 끌어당겼다. 흥선의 뜻으로서 보통 연죽보다 썩 짧게 만든 자기의 연죽에 담배를 담으면서야 비로소 흥선은 성하의 서 있는 편으로 머리를 돌렸다.

『여보게!』

『네?』

흥선의 인식을 받고야 성하도 비로소 꿇어앉았다.

『내 마음이 지금 어지러웨. 산란해서 앞뒤를 가릴 수가 없어. 머리가 뒤집히는 것 같아.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네.』

『대비께서는 무슨 말씀을 들으셨습니까?』

흥선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말을 하였다.

『별 말씀하시는 것이 없으시네.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별말씀을 하시겠나? 하여간 내 마음이 어지럽고 산란하고 갈피를 차릴 수가 없으니, 자네는 돌아가게. 언제 다시 와 주게. 그 때 다 말해 줌세.』

성하가 일어나서 하직을 고할 때에 흥선은 변명하듯이 말을 보태었다.

『노엽게 생각하거나 별다르게 생각 말게. 너무 마음이 어지러워서 좀 혼자 생각해 보려고 그러네.』

무슨 중대한 사건, 중대한 결과가 생긴 것뿐은 분명하였다. 그 흥선의 사람됨이 전염되었는지, 성하도 흥선의 집을 나서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가슴이 산란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물어보아도 왜 산란한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十四[편집]

『국구―ㅇ(鞠躬)

바―이―(拜)

흐―ㅇ(興)

평시―ㄴ(平身).』

작년(庚申年) 구월에 경희궁으로 이어하였던 상감은, 모든 궁인들을 인솔하고 금년 사월에야 다시 창덕궁으로 환어하였다. 환어한 뒤의 첫 번 숙배(肅拜)였다. 월대(月臺) 위에는 인의(引儀)가 높이 올라서 있다. 그 아래는 정일품부터 종구품까지의 열 여덟 개의 표석(表石)이 서 있고, 열 여덟 계단의 조신들은 각기 그 품반 품서에 서 있다.

『국구―ㅇ』

기다랗게 뽑은 인의의 호령에 백관들은 모두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바―이―』

두 번째의 호령에 뱍관들은 북향하여 절하였다.

『흐―ㅇ』

세 번째의 호령에 몸을 절반만큼 일으켰다.

『평시―ㄴ』

몸을 고쳐 일으켰다.

다시 국궁, 바이, 흥, 평신―이리하여 사배는 끝이 났다.

승후관(承候官)의 한 사람으로서 조 성하도 이 숙배에 참례하였다.

숙배를 받은 뒤에 상감은 내관들에게 부액을 받고 편전(便殿)으로 들었다.

성하는 승후청으로 나왔다. 그리고 거기서 관복을 편복으로 바꾸어 입고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금호문(金虎門)으로 하여 대궐 밖으로 나왔다. 이 날은 비번이므로 숙배만 끝낸 뒤에는 나와 버려도 괜찮은 날이었다.

궐 밖으로 나오기는 하였지만, 갑자기 갈 데가 없었다. 유난히도 마음이 어지러워서 집으로도 돌아가기가 싫었다. 성하는 하인과 가마만 먼저 돌려 보내고, 잠시 돈화문 밖으로 돌아와서 머뭇거리다가 발을 서쪽으로 돌렸다. 며칠 만에 흥선 댁이라도 한 번 찾아보고자 함이었다.

며칠 전 흥선을 모시고 대비를 가서 뵈온 이래, 성하는 그 뒤 아직 흥선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날의 인상은 성하에게 있어서는 꽤 컸다.

자기의 눈이 결코 잘못 보지 않았음을 성하는 그 날 확연히 알았다. 주착 없는 인물, 상갓집 개―이런 칭호를 들으면서도 탓하지 않는 흥선을, 성하는 아직껏 의심의 눈으로 보고, 흥선의 그런 인격의 배후에는 무슨 커다란 책략이 있지나 않은가고 늘 유심히 보았지만, 너무도 감쪽같이 속이므로 성하로서도 마지막에는 반신반의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날 확실히 성하는 흥선의 진면목과 진인격을 보았다. 표면 어리석은 듯이 꾸미는 그 가면을 벗는 날―그 속에서 나온 흥선은 결코 주착 없는 술망나니가 아니었다. 염치 모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응대, 태도, 언어, 행동, 어느 점에 있어서도 대궐 안에서 생장한 대군왕자에게 지지 않는 단아한 귀인이었다.

이런 일면을 가진 그가 항간에 돌아다니며 하는 행동은 너무도 어지러운 행동이었다. 만약 그것이 김씨 일문을 속이는 가면이라면, 흥선이야말로 고금에 다시 없는 훌륭한 배우였다.

「이 놈, 네가 그 모퉁에서 필주―하니 나오니 이름이 필주로구나.」

흰 옷을 입은 인물(당시에 있어서는 양반은 옥색 기타 물들인 옷이며 평민은 흰 옷) 관속배와 상투를 맞잡고 중인 환시의 대로상에서 희롱을 하는 흥선―이 흥선과 그 날의 흥선과는 너무도 차이가 있었을 뿐더러, 그런 주착없는 일을 한 지 단 두세 시간 뒤에 흥선은 그렇듯 변한 것이었다.

그 기괴한 인물에 대한 위포와 경모의 정이 젊은 성하의 마음에 무럭무럭 일어났다. 이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면 장래 반드시 한 때 그 덕을 볼 것을 성하는 분명히 직각하였다.

『대감 계신가?』

댓돌에 선뜻 올라서는 성하를 흥선 댁 청지기가 맞았다.

『출타하셨읍니다.』

『어디 가셨나?』

이런 질문은 어리석을 질문이었다. 주착 없이 돌아 다니는 흥선인지라, 청지기가 알 까닭이 없었다. 물어보았지만 성하도 스스로 고소하고 다시 내려섰다.

안사랑에서 웃음소리가 나므로 귀를 기울여 들으니, 흥선의 맏아들 재면이가 그 외삼촌 민 승호와 무슨 담소를 하고 있었다.

성하는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흥선댁을 나갔다.

거기서 나선 성하는 갈 곳이 없었다.

―자, 어디로 가나?

이렇게 되면 더욱 집으로는 돌아가기가 싫었다. 성하는 어디로 가겠다는 계획이 없이 발을 옮겼다.

종로에까지 이르렀다. 공랑(公廊)이며 육주비전(六矣廛)의 흥성스러운 흥정을 곁눈으로 보면서, 성하는 지향없는 길을 남대문 쪽으로 향하였다.

『성하! 성하 아닌가?』

누가 자기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가 하고 그냥 가다가, 서너 번째 불리고야 성하는 돌아보았다.

성하는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아이구 이게 뉘십니까?』

그것은 성하의 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이 학사라 하는 늙은 선비였다.

『그렇게 들리지를 않던가?』

성하의 절을 받으며 이 학사는 이렇게 물었다.

성하는 의아한 눈으로 노인을 보았다.

가난하고 또 가난하여 도포 한 벌도 없어서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던 이 학사였다.

삼순구식이 아니라 구순삼식이라고 형용하고 싶도록 가난하던 이 학사였다. 정월에 성하가 문안을 갔을 때오 정월 초승부터 굶고 앉았던 이 학사였다.

그런데 이 날은 그의 머리에서는 통영갓이 어른거렸고 깨끗한 도포에 수띠는 분명히 생활이 넉넉한 선비의 차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학사의 뒤에는 하인까지 하나 어려 있었다. 하인도 깨끗이 차렸으며, 그 하인은 무슨 귀중한 물건인 듯한 네모난 상자를 공단 보에 싸서 들고 있었다.

『아저씨, 아직 그 댁에 계십니까?』

그 오막살이랄 수가 없어서 댁이란 명사를 붙이면서 성하는 속으로 고소하였다.

『아니라네. 이사했네. 나하고 집에 같이 가 보지 않겠나?』

『어디오니까?』

이 학사는 대답 대신으로 입을 삐죽하게 하고 그 입으로 하인의 들고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성하는 학사의 입을 따라 보기는 하였지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彫)라네.』

『네?』

『사충사(四忠祠) 조라네. 내게도 운 틀 날이 굴러 오노라고, 이번에 사충사의 일유사를 하게 되었네그려.』

성하는 겨우 알아들었다.

이 가난한 노선비가 가난에 굴고 또 굴다가, 어떻게 사충사의 유일사를 얻어 하게 된 모양이었다. 하인이 받들고 있는 그 상자는 「조」를 넣은 상자인 모양이었다.

사충사(뿐만 아니라 조선 안 모든 서원)의 조─그것은 이 나라에 있어서는 옥새(玉璽)의 다음 가는 권위 있는 「도장」으로서, 각 지방의 방백의 관인(官印)보다 훨씬 세력이 높은 것이었다.

옥새며 지방관의 관인은 흔히 본 일이 있으되, 조를 처음 보는 성하는 그 공단보에 싸인 네모난 상자를 흥미 깊은 눈으로 굽어 보았다. 그 「조」의 놀라운 권위는 이미 익히 듣고 있었으므로―

노돌 나루를 건너서면, 장청류의 한수를 굽어 보는, 경개 좋은 바위 위에 한 사당이 서 있으니 그것이 사충사이다.

당쟁 때문에 참화를 본 김 창집, 조 태채, 이 의명, 이 건명의 네 유신(儒臣)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서, 그 때 함께 결련되었던 유신들의 후손 가운데서 일유사를 뽑는 것이었다. 이 학사도 그의 오대조가 그 때 그 사건에 원배를 갔던 덕으로, 어떻게 운동을 하여 일유사 자리를 구한 것이다.

『그러면 아저씨도 인젠 생활이 좀 펴셨겠읍니다그려?』

『생활? 암 폈지. 석 달 내에 내 몫으로도 개똥밭이며 수원 논이며가 약간 생겼네그려. 이제 일년 안으로 당대 먹을 게야 생기겠지.』

『호오! 많이 벌으셨읍니다. 그 때 그―심? 석?』

『석 경원이란 놈 말인가?』

『네, 석 이방(石吏房)말씀이외다.』

『암, 그놈도 벌써 잡아다가 가두기를 네 번 했네그려. 내 재산 홀짝 빨아 먹었던 그 놈, 인젠 다시 나한테 홀짝 빼앗기구 거지가 돼서 어디로 떠나 갔다지.』

『시원하시겠읍니다.』

『시원쿠 말구! 좌우간 우리 새 집에 가 보세.』

『그러십시다.』

성하는 이 쾌활한 늙은 선비의 인도로 선비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사충사에서 발행하는 서독(書牘)―일유사의 「조」가 찍힌 그 서독은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지방관의 관인(官印)이 찍힌 영장은 그 관할 구역 이내에서밖에는 통용이 못 된다. 영변 부사의 영장이 안주 땅에서 통용 못 되고, 전라감사의 영장이 경상도에서 통용 못 되고―각각 그 관원의 관할하는 구역 안에서밖에는 통용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 유사의 도장이 찍힌 서독은, 남으로는 제주에서부터 북으로는 백두산까지 통용 안 되는 곳이 없다. 가령 용산 건너 노돌에 있는 사충사에서 「동래 땅에 사는 아무를 잡아 오라」는 서독이 날 것 같으면, 그것을 가진 하인은 동래 땅에 가서 그 지정한 인물을 잡아 올 권한이 있다. 그 곳의 지방관도 이를 금지하지를 못한다.

잡아 오는 데 무슨 명목이나 까닭이 없다. 그저 잡아올 따름이다.

그 잡아 온 죄인을 일유사는 다시 이조(吏曹)나 한성판윤(漢城判尹)에게 곱게 가두어 두기를 촉탁한다. 그러면 이조에서나 한성부에서는 이를 거절하지를 못한다. 일유사에게서 다시 놓아 주라는 부탁이 오기까지는 까닭을 모르는 그 죄인을 곱게 가두어 둘 뿐이다.

본시는, 서원이라하는 것은 옛날의 성현들을 존경하기 위하여, 유인(儒人)들이 모여서 옛날의 성현들의 끼친 학문을 토구하며 성현들의 영을 제사하기 위하여 시작된 것이었다.

그 예절을 장려하기 위하여 서원을 유지할 만한 전장(田庄)을 기부받는 것을 허락하고, 그 서원의 서독의 어떤 정도까지의 권한을 인정하여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수백 년 내려오는 동안 본의는 잃고 말의(末意)만 남아서, 조선의 온갖 더럽고 추한 일은 모두 거기서 생겨나게까지 되었다.

이 서원의 횡포 때문에 당시의 백성들은 얼마나 괴로움을 받았다? 서원에 부속된 많고 많은 유의 유식의 선비들은, 모두 그 근처의 백성들의 고혈을 자기네의 당연히 먹을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원은 서원이라기보다 오히려 악도청이었다.

본(本)을 모르고 말(末)만 아는 선비들이 그 서원을 근거삼아 가지고 행하는 폐단은 여간이 아니었다.

서원에서는 자기의 가진 권한을 이용하여, 시골 돈냥이나 있는 사람을 잡아다 가둔다. 명목은 아무것이라도 좋았다. 성현을 몰라본 죄라든가, 조상께 제사를 정성되게 못한 죄라든가, 하는 막연한 명목으로 잡아다가 가둔다. 그리고 그냥 내버려 둔다.

그러노라면 그 집의 아들이라든가 친척이 찾아와서 흥정을 한다. 서원에 얼마의 장전을 기부할 테니 이번만은 특별히 용서하여 주십사고 애걸복걸한다. 그러면 그 죄인의 재산에 상당한 기부를 받은 뒤에 그 죄인을 특별히 용서를 하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그 근처에 돈냥이나 있어서 선비 노릇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장의를 판다. 사지 않으려면 강제로라도 판다. 이 강제 판매에 응치 않았다는 큰 코를 다치므로, 한 번 서원이 겨눈 이상에는 피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후일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면서, 그의 대 영단으로 전국의 서원을 모두 부수고, 서원에 모셨던 위패들을 모두 없이할 때에, 그 수효 천여 개, 거기 도의도식하던 무리가 수만 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서원을 근거삼아 가지고, 거기 모신 옛날 성현의 옷 소매를 방패삼아 가지고 온갖 더럽고 추한 일을 다하다가, 일이 불여의하게 되면 곧 옛날 성현을 앞장 세워서 이 사대성(事大性)이 많은 국민을 위협하던 것이었다.

사람을 죽일 권리는 없지만 잡아 가둘 권리는 있는 그들에게, 단지 포금죄(抱金罪) 밖에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경옥이며 향옥에 갇혀서 신고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사충사 서독―

화양서원(華陽書院―충청도 청산에 있다)의 화약묵패(華陽墨牌)―

당시의 서원 가운데서도 가장 권위 있는 이런 몇 곳의 서독은 세력이 당당한 곳으로서, 옥새가 찍힌 왕령에 거의 지지 않을 만한 권세를 가졌던 것이다. 이조판서 한성판윤도, 일개 유생이 발행한 이 서독의 영을 거역지 못하였다.

그런지라, 사충사의 일유사 자리를 얻은 이 학사는 의기가 양양하였다. 학자는 권세를 초개같이 여기고 금전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세를 싫어하고 금전을 싫어하는 사람은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교적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의 주인인 이 학사도 역시 권세와 금전을 좋아하는 노인이었다.

이 학사의 집은 목멱산 아래 깨끗이 새로 지은 집이었다. 넉 달 전에 거처하던 단간방에 비기건대, 설초운향, 그 차이를 형용할 말이 없었다. 선비의 집이라기보다 오히려 재상가의 산당에 가까운 집이었다.

『경치 좋고 공기 맑고 아주 좋습니다.』

성하의 이런 치사를 들으면서, 학사는 도포와 갓을 훌훌 벗어 버리고 관을 바꾸어 썼다.

『자, 흠 있겠나. 자네도 도포 벗게.』

하는 것을 성하는 벗지 않았다. 선비와 달라, 도포를 벗으면 창의라도 반드시 입어야 하는 벼슬아치의 집에 태어난 성하는, 동저고리 바람은 거북하기 때문이었다. 학사는 성하를 데리고 산 정자로 돌아갔다.

『인젠 날이 꽤 더워졌네. 정자에서 이야기나 좀 하고 가게.』

정자를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목멱산 기슭―장안이 굽어 보이는 언덕에 팔각으로 지은 얌전한 정자였다. 과시 앉아서 시나 읊고 토론이나 하기에는 적당하게 생겼다. 하인은 마치 학사의 꽁무니에 다린 사람인 듯이 「조」를 들고 따라 왔다.

『유사님, 아까 참 손님이 오셨다가 가셨읍니다.』

성하와 학사가 마주 앉을 때에 하인은 생각난 듯이 말하였다.

『응? 누구더냐?』

『어제도 오셨던 분이올씨다.』

『어제도? 어제도 여러 사람이 왔었는데……』

『―그 육주비전에서 지전(紙廛)을 보시는 분이올씨다.』

『응! 그래 아무 말도 없이 갔냐?』

『저녁에 또 다시 오겠읍니다고요.』

『그 뿐이야?』

『네!』

학사는 성하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승후관이니 혹은 종친 중에 흥선군 이하응이라는 사람을 아나?』

『네, 짐작이나 합니다.』

『주책 없는 인물!』

그리고 하인에게 향하여,

『주안이나 좀 내어 오너라.』

하여 돌려 보냈다.

『왜 흥선군이 어떻게 하셨읍니까?』

『글쎄 말일세. 종친으로 태어나서 그게 무슨 주책 없는 짓이람.』

『왜요?』

『사연이 이러네그려. 흥선군이란 인물이 안 필주라나 하는 관속과 부동을 해 가지고, 지전 보는 홍모를 쇡임 투전에 걸어 넣어 가지고 육백 냥을 빼앗았다나?』

『찾아온다는 사람이 그 홍모랍니까?』

『그렇지! 그 홍모가 매일 찾아와서, 흥선군은 잡아 가두지 못하되 안모라는 사람을 좀 잡아 가두어 달라는구면.』

『그래 어떡허시기로 했읍니까?』

『자네에게니 말이지, 장사아치는 참 더럽데. 지전 주인이 그게 무슨 꼴이람. 처음에는 열 냥 가져왔지. 그 담에 또 열 냥 가져왔지. 쉰 냥도 못 되고야 누가 그걸 잡아 가두어 주겠나? 오늘은 얼마 가져왔는지는 모르지만, 너덧 번 더 헛걸음 해야 될걸. 하하하하!』

『그러면 홍모는 부러 돈을 삭여 가면서 안모를 잡아 가두면 뭘 한답디까?』

『내가 그게야 알겠나. 아마 안모는 흥선군의 막역지우니깐, 흥선군한테 좀 떼내려는 셈이겠지.』

성하는 머리를 수그렸다. 무슨 매우 더러운 물건에 직면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불쾌하였다.

『홍모뿐이 아닐세그려. 이 놈을 잡아 가두어 주오, 저 놈을 가두어 주오, 매일 청 대러 오는 인물들이 부지기술세그려.』

『다 돈냥을 가지고 옵니까?』

『그럼! 거저야 가두어 주나. 그런 것은 내 수입―큰 장전은 사당 재산―그렇게 되는 것일세그려.』

『아저씨, 그 안모라는 관속을 쉰 냥이 차기만 하면 가두어 주시겠읍니까?』

『그럼, 내게 손해나지 않는 일……』

성하는 머리를 수그렸다. 수그리고 잠시 있다가 머리를 들 적에는 그는 자기의 얼굴의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저씨, 제가 고 쉰 냥을 아저씨께 드릴게, 홍모에게 받으신 금전을 도로 내어 주시고 안모는 모를 체해 주십시오.』

『?』

학사는 성하를 보았다. 의아한 듯이 머리를 기울여 보았다.

『자네도 그 안모를 아나? 자네도 아는 사람이라면……』

말을 계속하는 것을 성하는 가로채었다.

『모릅니다. 모르지만 옛날 어느 성현께서 돈 받고 남을 잡아 가두라고 하셨습니까?』

학사는 즉시 대답지 못하였다. 잠시 뒤에 머리를 돌리며 대답하였다.

『그거야, 그런 말씀은 안 하지만, 서원 치고 안 하는 곳이 어디 있나? 서원뿐인가?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내가 시골서는 본시 벼 천 석이나 하던 사람이야. 그게 왜 중년에 그렇게 가난하게 지냈나? 내가 외도를 해서 썼나, 역적 도모를 하다가 관가에 적몰을 당했나, 내 논 밭 삼백 석지기를 향교에 들어가고, 칠백 석지기는 석 경원이란 놈이 앗아 먹고……그래서 중년 삼십 년 간을 삼순구식을 하면서 겨우 연명만 해 오지 않았나?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라네. 자네는 아직 젊어서 그런 일을 모르니깐 그렇게 생각하나보이마는, 사충사 일유사라는 것은 그만한 일을 하라고 나라에서도 권한을 주신 것이 아닌가?』

나라에서 매관 매작―

서울에서도 매첩 매직―

나라에서도 뇌물과 강탈―

서원에서도 뇌물과 강탈―

이 아래 끼운 세력 없고 힘 없는 서민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성하는 다변(多辯)한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서, 더욱 불쾌하였다.

『그럼, 아저씨께서는 그 새 몇 사람이나 가두어 보셨읍니까?』

『나야 일유사가 된 지 석달 밖에 못되니깐 몇 사람 안되지―자, 평양 김모, 해주 최 서방, 또……』

누구누구 잠시 꼽아 본 뒤에,

『일곱 사람 밖에는 못 되네.』

하고 수효가 적은 것을 부끄러이 여기었다.

『일곱 사람에 합해서 얼마나 거두셨읍니까?』

『내야 나 먹자고 거두는 게 아니니깐 얼마 되겠나? 큰 것은 사당으로 보내야 되고, 부스러기나 내게 돌아오는 것일세 그려, 아까 말한 것같이 장토 약간, 돈 얼마, 이집, 그것뿐일세. 한 십 년만 하면 나도 착실해지기는 하겠구면.』

이 선량한 노인은 십 년 간을 조를 맡아 두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여보게 성하!』

『?』

『다른 놈 잡아 가둔 건 그다지 별다르지 않지만, 석 경원이란 놈 잡아 가둔 일을 생각하면 십 년 체기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듯하네. 이 놈이 십 년 전에 내게 대해서 행한 행사를 생각하면 그런 시원한 일이 없데. 이 놈의 아들놈 손자놈 할 것 없이 모두 집으로 몰려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애걸하던 꼴은 지금도 눈에 서언하네. 내 그놈을 한 푼 없이 알겨 냈지. 지금 거지가 돼서 떠돌아 다닌다네.』

『어떻게 잡아 오셨읍니까?』

『듣고 싶은가? 내 이야기할께 들어 보게. 가만, 주안 나오나베. 천천히 먹어 가면서 이야기하세.』

내어 온 주안을 가운데놓고 학사는 성하에게 자기가 철천지한을 품고 있던 석 경원이에게 원수를 갚던 일장 이야기를 꺼내었다. 성하는 안주도 집지 않고 술도 들지 않고, 잠자코 아저씨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학사의 집안은 시골서 벼 천 석이나 하던 집안이니까 부자 소리도 듣는 집안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어디 명색 없는 부자나 없는가고 탐지하는 두 가지의 세력(하나의 관력, 하나는 벌력)이 이 이학사의 집안을 거저 넘기지를 않았다.

먼저 향교에서 이 학사에게 장의(掌議)라는 명색을 주고 삼백 석을 앗아갔다. 천 석 추수에서 삼백 석은 꽤 큰 상처는 상처지만 치명상까지는 안 되었다. 학사는 장의라는 직함을 얻어 가지고 이것이 도리어 행세하는 근거가 된 것으로 여기고, 그다지 애석히 생각지는 않았다. 아직 칠백 석지기가 남았으니 그것을 가졌으면 넉넉한 생활은 할 수가 있으므로―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시골 장의 따위의 칠백 석이 또한 그냥 보전될 수가 없었다. 관력(官力)이라 하는 것이 학사의 칠백 석을 엿보기 시작하였다.

석 경원이라는 인물은 영문 이방(吏房)이었다. 마음이 곱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 때의 그 곳의 장관인 감사도 또한 마음이 좀 검은 사람이었다. 학사―이 장의는 연하여 감찰부에 잡혀 갔다.

『감영 삼문에 사또님을 훼방하는 방을 붙인 것이 너지?』

혹은―

『결전(結錢)을 속였지?』

별의별 명색을 다 붙여서, 이 장의를 옥에 가두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매번을 자손들이 석 경원이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야 놓여 나오고 하였다. 이리하여, 갇혔다가는 뇌물로써 벗어나고, 또 같은 일이 번복되고 하여, 몇 해 후에는 이 장의네 집은 고생은 할이만큼 다 하고도 재산은 홀짝 다 빼앗겼다.

그 때 감사도 먹기는 좀 먹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석 경원이가 먹은 것이었다. 좌우간 겨우 삼백 냥이란 돈을 마련하여 이방 자리를 산 석 경원은, 이방 십 오년 간에 삼천 석이라 하는 거대한 재산을 움켜 잡은 것이었다.

재산 전부를 석 경원한테 앗기운 이 장의 집안은, 그 뒤 십 년 간을 이리저리 굴러 다니면서 숱한 고생을 다 겪었다. 그러다가 금년 봄에 어떻게 어떻게 하여, 집안 오대조를 팔아서 사충사 일유사를 얻어 하게 되었다. 일유사가 되면서, 학사가 제일 첫 번 조를 찍은 것은 철천지 원수 석 경원 압래장이었다. 석 경원은 이 위대한 권세를 가진 종이 조각 때문에 한성부에 갇히게 되었다.

흥정은 시작되었다. 백 석지기를 사총사에 비치리다, 이백 석 바치리다, 삼백 석 바치리다. 석의 아들이 찾아와서 호소호소하는 것을 학사는 대번 고개를 가로 저어서 돌려 보냈다. 드디어 석은 학사의 만족할 만한 토지를 제하고야 백방이 되었다.

그러나 석의 재산을 홀짝 다 빨아서 거지를 만들기 전에는 학사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학사는 비밀리에 이 석을 천주 만동묘(萬東廟)로 넘겼다. 사충사에서 초벌 벗기운 석은 다시 만동묘에 또 한 벌 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동묘에도 만족할 만한 뇌물을 바치고 겨우 백방이 된 때는, 학사의 비밀 활동으로 또한 다른 서원이 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몇 군데 넘어가는 동안, 이방 십 오 년 간에 번 적지 않던 재산은, 모두 이 서원이며 저 서원으로 넘어가고, 하잘것없는 거지가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십여 년에 겪은 원혐을 학사는 사충사의 일유사가 되어 가지고 고대로 갚은 것이었다.

조―

한 개의 뿔 조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 이 학사의 십 년 전 원수를 갚아 준 것이었다.

『어떤가? 내가 못할 일을 했나? 다들 하는 노릇이고, 하게 마련된 노릇을 나 혼자 안 하면 어리석은 짓이라네.』

학사는 성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하는 머리를 조금 들어서 학사의 오른편 옆에 놓여 있는 조를 보았다. 정목으로 만든 위에 명주 끈을 달고 주석으로 장식을 한 그 상자는, 옥새를 간직하는 그릇보다는 약간 손색이 있었으나, 지방 장관(長官)의 관인을 넣는 상자보다는 훨씬 더 치레를 하였다.

『조는 인주로 찍습니까?』

『먹으로 찍는다네.』

『아저씨 말씀은 알아들었읍니다. 그렇지만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읍니다. 세상이 아무리 모두 좋지 못한 일을 하더라도, 남들이 한다고 그것이 좋은 일이 될 까닭이 없읍니다. 옛날 재상은 죽은 뒤에 장례지낼 비용이 없는 것을 자랑했다 하지 않습니까? 그 마음을 아저씨께서는 본받으실 수가 없습니까? 제 소견으로는 높은 선비는 금전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합니다.』

노인은 청년을 굽어 보았다. 못 알아 듣겠다는 모양이었다. 사충사의 일유사가 된 이상에는 자기도 큰 선비일 것이다. 역대의 일유사도 물론 모두 높은 선비였을 것이다. 그 모든 높은 선비들이 아직껏 예사로이 행한 일을,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성하 따위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아니꼽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자네는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런 말을 하지, 남 듣는 데서는 아예 그런 말 다시 말게. 명유(名儒)들의 하신 일을 외람되이 말할 것이 아닐세.』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이 행한 일이니 즉 옳은 일이라고 단정하는 이 단순한 노인을 성하는 결코 악의(惡意)로 볼 수는 없었다.

뿐 아니라, 이 노인의 마음에도 결코 악의가 없는 것은 성하도 잘 아는 바였다. 양기롭고 쾌활하고 단순한 이 노인은, 자기의 행하는 일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지를 못할 따름이었다. 지나간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잘난 사람들이었고, 그 잘난 사람들이 행하던 일이니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행하는 뿐이지, 마음에 악의가 있어서 행하는 일이 아닌 것은 성하고 짐작하였다.

이 단순하고도 지나친 시대의 사람을 절대로 존경하는 노인에게 대하여, 그 일이 그릇된 일임을 이해시키는 것은 지난한 일일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잘못하였다고 지적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뿐더러, 잘못하다가는 순한 노인의 감정난 사기가 십중 팔구일 것이다.

『아저씨, 그럼 그 말씀을 다시 하지 않겠읍니다. 그 대신 제 부탁 하나는 들어 주십시오.』

『무엔가?』

『아까 말씀하시던 그 안모―안 필주는 그대로 넘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부탁하면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자네는 그 안모와 면분이라도 있다.』

『안모가 아니라 흥선군과 면분이 있읍니다.』

『흥선군? 흠! 자네는 명문 거족에 태어나서 왜 그런 주책 없는 인물과 교제를 하나?』

『할 수 있습니까? 이미 한 노릇을 도로 없이할 수도 없고……』

『그럼 내일 홍모가 오면 받았던 것은 도로 내어 줘야겠군.』

「투전해서 돈 땄네, 하하하」 하고 너털거리던 흥선의 모양이 획 성하의 머리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때 함께 가던 인물이 안 필주였다. 그것을 생각하고 홍모의 호소를 연상할 때에, 성하는 스스로 입가에 떠오르는 고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흥선군은 홍모와 사화할 돈도 없읍니다.』

성하가 이렇게 보태었다. 성하가 이 학사의 집에서 나온 것은 거의 황혼 때나 되어서였다.

『간간 오게. 자네 즐기는 평양 감홍로도 마련해 둘게, 심심하면 놀러 오게.』

학사는 동저고리 바람으로 대문까지 따라 나와서 성하를 보냈다. 쾌활하고 양기로운 노인과 하루 진일을 보낸 성하인지라, 당연히 그의 마음은 가벼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노인의 집을 나온 성하의 마음은 여간 무겁고 불쾌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 천진하고 단순하고 유쾌한 노인으로 하여금 의에 벗어난 일을 예사로이 하고 조금의 반성도 하지 않게 하는가?

―첫째로 제도였다. 그런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에 물들기 때문에 그렇듯 유쾌한 노인으로 그렇듯 불쾌스런 행동을 예사로이 하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그릇된 사대 사상(事大思想)이었다. 사원을 신성시(神聖視)하고, 서원에서 하는 노릇은 불가침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나라에 퍼지고 또 퍼진 사대 사상의 산물이었다. 군권과 관권보다도 삼고의 예의를 더욱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이런 불례(不禮)의 일이 산출된 것이었다.

세째로 위정자의 타락이었다. 자기네들도 매나가 매작과 토색과 뇌물을 가장 당연한 일로 여기고 행하는지라, 서원의 횡포를 금할 면목이 없을 것이었다.

「붉은 문의 안에서는 마부(馬夫)가 대추와 밤을 밟으며, 단청한 누각의 아래에서는 나귀가 약식(藥食)을 먹어서 가축이 인식을 먹되 금할 줄을 모르나, 이 나라는 풍년되고 따스한 겨울에도, 전하의 적자는 오히려 굶고 얼어 죽는 사람이 있소이다.」

얼마 전에 간관(諫官) 모의 상소와 같이 고관 거족들의 쓰레기 가운데도 고기 덩이가 그냥 섞여 있는 반면에는, 또한 물고기 먹으라고 강에 뿌리는 밥을 훔쳐 먹으러 위험을 무릅쓰고 물 속에 숨바꼭질하여 들어가는 가난한 백성이 부지기수이니 너무도 모순된 세상이었다.

이러한 모순된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그것은 여간한 과단성과 힘과 패기를 가지고서는 하지 못할 것이었다. 천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하는 위대한 인물의 위대한 손이 아니면 도저히 행하지 못할 노릇이었다.

누구―그런 힘센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지금 성하 자기가 머리를 수그리고 길을 걷는 동안에도, 많고 많은 재물들이 혹은 마바리로 혹은 소바리로 권문들의 집 창고로 몰려 들어갈 것이다. 권문들의 창고로 하루에 몰려 들어가는 재물이라 하는 것은, 또한 시골의 몇 집안이 몇 대를 내려오면서 근검저축을 하여 쌓아 온 노력의 결정일 것이다.

―이런 일을 생각할 때에 이 너무도 어지럽고 혼란된 상태는, 어떤 위인이 생겨날지라도 도저히 펼 수가 없을 듯이까지 보였다.

―흥선 대감! 시생이 본 바의 당신은 분명히 비범한 인물이올씨다. 다른 사람이 감히 손도 못 댈 일을 넉넉히 감당할 분으로 보았읍니다.

―그러나 이렇듯 어지러운 국면을 당신은 능히 개척할 만한 능력을 가지셨습니까? 당신의 힘을 의심함이 아니라, 세태가 너무도 어렵게 됨을 근심함이로소이다. 시기를 놓치면 명의(名醫)라도 병을 고치지 못한다 하지 않습니까?

―대감! 일어서십시오. 만약 당신이 명의의 수완을 가지신 분이라면 하루 바삐 일어서십시오. 시기가 너무 늦어서 대사를 그르치기 전에 어서 일어서십시오.

저녁때라도 제 집으로 돌아들 가는 어지러운 무리의 사이에 섞여서, 성하는 머리를 푹 가슴에 묻고, 마치 술취한 사람 모양으로 고르지 못한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十五[편집]

옥색 무문 갑사 창의(?衣) 정자관―

이런 편의(便衣)로서 김 병기는 자기 침방에서 안석에 기대어 앉아 있다. 그 창 밖 툇마루에 세간 청지기가 치부책을 들고 꿇어 앉아 있다. 금은으로 장식한 부산 연죽(煙竹)에서 피오 오르는 향그러운 삼등초(三登草)의 연기에 상쾌한 듯이 한 번 기다랗게 숨을 내어 쉬고 병기는 말하였다.

『××부사에게서는?』

청지기는 치부책을 뒤적이었다.

『정월 열 나흗날 삼천 냥, 삼월 스무 이튿날 천 냥이올씨다.』

『○○현령에게서는?』

청지기는 벌걱벌걱 책장을 뒤졌다.

『정월 여드렛날 이천 냥이올씨다.』

『△△군수에게서는?』

『이월 열 사흗날 천 냥뿐이올씨다.』

약채전(藥債錢―각 고을 수령에게서 권문에 보내는 공물)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단 천 냥이라는 데 병기는 한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군수에게서는?』

청지기는 책장을 이편으로 뒤적이고 저편으로 뒤적이고 한참을 뒤졌다. 한참을 뒤적일 동안 병기는 참을성 좋게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온 게 없는가 봅니다.』

병기는 숨을 내어 쉬며 눈을 천천히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병기 자기의 손을 통하여 각 곳에 나간 수령들을 차례로 꼽는 것이었다.

『○○군수에게서는?』

『산삼 열 근과―그……』

청지기는 말을 주저하였다. 병기는 재쳐 물었다.

『그……?』

『그……』

『응!』

생각났다. 산삼 열 근과 몸 심부름이라도 시키시라는 명목으로 아리따운 처녀 한 명을 구해 보낸 것이었다.

『산삼 열 근과 돈 삼만 냥이지, ○○군수에게서는?』

『……』

『?』

『이만 냥을 추송한다 하옵니다.』

병기는 눈을 번쩍 떴다.

『외상이냐?』

『……』

『썩 물러가거라!』

청지기는 자기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코를 마루에 비볐다.

『이 놈! 외상이 무냐? 썩 직전을 가져오너라.』

청지기는 또 한 번 코를 마루에 비볐다.

어디 군수 어디 현령―병기가 주선하여 내보낸 수령들의 점검이 다 끝났다.

병기는 재떨이에 담배를 떨면서 말하였다.

『금년 정월부터 지금까지에 천 냥 미만을 가져온 사람들은 모두 따로이 적어 두어라.』

『네!』

『외상도 미봉 편이다. 응, 그리고 만 냥 이상 가져온 사람도 또 따로 적고…… 그 군수(산삼 열 근과 계집을 바친)는 만 냥 이상 편이다.』

『네!』

『또 그―××현령은 미봉이지만 특별히 눈감는다.』

특별이라는 것은 또한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병기와 그 당자―혹은 당자의 여권(女眷)의 사이에 남이 헤아리지 못할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물러가거라.』

상전에게 하고 물러가는 청지기를 힐끗 보면서, 병기는 비로소 이편으로 향하여 돌아앉았다.

『영감 미안하외다.』

『아니올씨다. 시생이 황공하옵니다.』

거기는 병기의 주선으로 어떤 고을의 수령으로 나가게된 한 중로(中老)가, 부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기에게 하직을 하러 와 있었다. 그 사이의 보는 앞에서 병기는 약채전의 조사를 한 것이다. 장래 수령 영감은 눈이 부신 듯이 병기를 우러러보았다.

『영감! 무엇보다도 백성을 사랑하실 줄을 알아야 하오. 수령이 되어서 백성을 모르면 그 직책을 다할 수 없는 것이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파격(破格)의 예로서 영내(楹內)에 들어앉은 새 군수는 황공한 듯이 허리를 굽혔다.

『××는 산읍(山邑)이지만 산삼이며 돈피(?皮) 많이 나는 곳, 그 곳의 수령은 특별히 백성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하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지당한 말이나 또한 그 뜻을 알아 듣기 힘든 말이었다. 산삼이며 돈피가 생산되니 백성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수령들은 재상가에게 약채전이나 공물이나를 많이 보내는 것으로 주장을 삼지만, 백성의 어른되는 자의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외다. 혹은 공물이 부족하면 인부(印符)를 도로 거두어서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공물을 위주해서는 안 되오. 제 일도 제 이도 제 삼도 백성뿐을 위주하여야 하오.』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그 지방에 부유(富裕)하고 점잖은 사람이 있거든, 그런 인재는 그냥 흙에 묻어 둘 수가 없으니깐, 나라에 상계를 해서 무슨 벼슬을 시키도록 노력하시오. 그다지 많은 황금이 아닐지라도 인재만 있으면 벼슬은 시킬 수가 있으니깐―』

『지당한 말씀이올씨다.』

삼십 미만의 평안 감사를 지낸 일이 있는 병기는, 백성을 긁어 먹는 온갖 방법을 다 경험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백성을 긁어 먹는 수령들을 또한 교묘히 코오치하고 벗길 줄을 아는 사람이었다.

『연전에 △△가 ××감사로 갔을 때에 이런 일이 있었소, ××은 부읍이라, 돈냥이나 가진 백성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을 모두 다 상계해서 벼슬을 시킬 수는 없으니깐, 얼마만치는 벼슬을 시키고 나머지는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써, 그대의 행실이 갸륵하니 나라에 상계를 해서 벼슬을 시키겠노라고 즉 「말 벼」을 주었소. 그러면 그 사람들은 감사에게 대해서 그 상보를 그만두어 달라고 간청을 하지 않겠소? 그 사람들이 처지로 말하면 벼슬을 받자면 오만 냥 이상은 바쳐야 하겠고, 그 벼슬을 삭여 버리려면 감사께 이삼만 냥만 바쳐도 면할 수가 있으니까, 감사께 몇만 냥씩 바치고 벼슬을 구만둡니다 그려. 시속말로 말하자면 벼슬 환퇴금이지. 하하하하! 시골 수령살이를 다니자면 별별 일을 다 겪는 법이외다.』

이 때에 청지기가 왔다.

『대감마님, 김천(金泉) 사는 최 장의라는 선비가 왔읍니다.』

병기는 눈을 들어서 청지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뒷말을 채근하는 뜻이었다.

『도령님 연(鳶)줄 값으로 이백 냥을 갖고 왔읍니다.』

『외사로 모셔라.』

청지기가 도로 나갔다. 병기는 다시 군수에게 향하였다.

『영감, 춘추가 금년에 얼마시오?』

『쓸데없는 나이만 많이 먹었읍니다. 계유생이올씨다.』

『음! 계유라, 마흔 아홉이시군. ××군수로 있을 때 만고 절색을 하나구해 보내 주었더니. 참 ××는 색향이야.』

이런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가진 병기는 이 새 군수에게 대하여 차근차근 군수살이의 비결을 가르쳤다. 세 군수는 연하여 머리를 조으며 병기의 훈화를 들었다. 훈화를 다 듣고 일어나서 절하고 하직을 고할 때에, 병기는 청지기를 불러서 외사에서 기다리고 있는 김천 선비 최 장의를 불러들였다. 병기는 사람 응대를 대개 침방에서 하였다.

두 손을 앞으로 읍하고 황공한 듯이 들어오면서 영외(楹外)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은, 나이는 한 사십쯤 났을 비교적 초라한 옷을 입은 인물이었다. 청지기의 말로는 도령님께 연줄 값 이백 냥을 가져왔다 하나, 이십 냥도 손에 쥐어 보지도 못했을 인물 같았다.

『자네가 최 장의인가?』

병기는 고즈너기 물었다.

이 물음에 그 사람은 몹시 낭패한 모양이었다. 어릿어릿 미처 대답을 못하였다.

『네, 아니―저 소인……』

『김천 사는 최 장의 아닌가?』

『소인은―저, 남, 남산동 살으와요. 성명 삼자는……』

병기는 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렀다.

『이리 오너라.』

그리고 등대한 청지기에게 향하여 잠시 꾸짖는 눈을 붓고 있다가 물었다.

『이 사람이 김천 최 장의냐?』

청지기도 낭패한 모양이었다. 낭패하여 어릿거리는 청지기에게 향하여 연거푸 병기의 호령이 내렸다.

『눈이 눈이 아니고 티눈이기로서니 사람을 바꾼단 말이냐? 썩썩 내몰아라.』

남산동 산다는 모는 청지기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나갔다. 그러나 뜰에 내려서서는 하인과 무슨 승강을 하는 모양이었다. 듣노라니깐 돈 넉 냥이 어떻고 닷 냥이 어떻고 승강을 하고 있다. 잠시 듣고 있을 동안, 병기의 눈살은 차차 찌푸려졌다.

하인과 남산동인과의 승강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남산동인은 대감께 뵈려고 그것을 주선하여 달라고 하인에게 돈 닷 냥을 찔러 주었던 모양이었다. 그 덕으로 대감은 김천 최 장의를 부르는데, 하인이 남산동인을 들여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들어는 왔지만 한 마디도 아뢰어 보지 못하고 도로 쫓겨 나가는 남산동인은, 하인에게 아까 주었던 닷 냥을 도로 내라는 것이었다. 닷 냥을 도로 내라거니 안 주겠다거니 뜰에서는 그것으로 승강이가 났다. 병기가 소리를 높여서 세간 청지기를 불렀다.

『에서 무에 요란스러우냐?』

『잘 알 수 없읍니다.』

『알 수 없어? 대체 누구냐?』

『……』

『누구야?』

두 번째의 힐문에 세간 청지기는 드디어 지금 뜰에서 남산동인과 승강을 하고 있는 청지기의 이름을 대감께 아뢰었다. 동료의 한 일―그리고 또(규모의 크고 작은 구별은 있다 하나) 상전 대감도 만날 하는 일과 꼭 같은 일을 한 동료에 대하여 감싸 주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병기의 두 번째의 힐문에는 대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병기의 가법에, 같은 말을 주인이 세 번째 묻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번에 두 번까지는 질문을 하였지만, 거기 역시 대답하지 않아서 세 번째 질문하게 되는 날에는, 그 벌은 자기에게까지 이를 줄을 아는 세간 청지기는, 두 번째의 힐문에는 솔직하게 지금 뜰에서 승강이하고 있는 청지기의 이름을 알리었다.

병기는 잠시 노여운 눈으로 세간 청지기를 굽어 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씩 끊어서 분한 어조로써 엄명하였다.

『××놈은 광에 가두고 남산동 모는 곤장을 쳐서 내쫓으렷다. 조금이라도 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 고약한 놈들!』

하인은 허리를 굽힌 채 이마 너머로 주인을 힐끗 보았다. 한 번 입 밖에 꺼낸 말은 절대로 번복하는 일이 없는 병기인지라, 힐끗 본 뒤에는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물러갔다.

이 명령이 시행되느라고 뜰에서는 두선거리는 소리를 병기는 역한 듯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듣고 있었다.

김천 최 장의가 병기를 만나게 된 것은 저녁때가 거의 되어서였다. 돈냥이나 있는 듯한 최 장의는 병기의 아들을 위하여 연줄 값으로 이백 냥을 내고, 청지기에게 또한 심부름 값으로 쉰 냥을 내고, 그 쉰 냥의 덕으로 여러 번 대감을 재촉하였지만 대감은 좀체 만나 주지 않았다. 남산동 모를 내쫓은 뒤에는 내실로 들어가서 한 시각이나 있다가, 다시 정침으로 나와서도 좀체 최 장의를 만나 주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 점심 뒤에는 잠시 낮잠을 잔다, 낮잠에서 깨서는 어제 읽던 소설의 계속을 한참 읽는다 하여 저녁때가 되어서야 최 장의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최 장의는 나이는 거의 병기와 연갑이었다. 영외에서 인사를 드리는 최를 병기는 거만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네가 김천 사는 최 장의인가?』

『네, 그렇습니다.』

『거기 앉게.』

병기는 담뱃대로 최의 앉을 자리를 지적하였다.

『선향이 어딘가?』

『△△올씨다.』

『김천읍내 사는가?』

『네!』

『성주는 누구더라?』

최 장의는 성주의 이름을 말하였다.

『응, 정사는 어떤고?』

『선정이올씨다.』

『그래서 나를 찾은 연고는 무엇인고?』

『네,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은 남성사의 장의(掌議)이옵는데, 이번 남성묘에 충문공(忠文公―金祖淳) 어른의 위패를 모시고 선액(宣額)을 받잡고자 대감께 그 소장을―좀……』

병기는 눈을 천천히 굴려서 선비를 바라보았다. 그 소장은 하려면 예조를 통하여 대궐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자기에게로 떠들고 온 그 까닭을 얼굴의 표정으로 써 보고자 함이었다. 충문공 김 조순은 병기의 양할아버지다. 이러한 연줄로 자기에게 부탁함인가? 다른 데로 가져가면 당연히 거대한 황금을 바치고야 성공할 일을, 사손(嗣孫)에게 부탁하여 공짜로 하여 보려는 심정으로 자기에게 가지고 온 것인가? 혹은 자기는 이 나라의 세도인지라, 자기라야 그 일이 성공될 줄 알고 다른 곳을 젖혀 놓고 자기를 찾아 온 것인가?

김천에서 남성사라는 서원이 있다는 말을 병기는 일찍 들은 일이 없다. 그런즉 남성사라는 것은 그다지 유명하지 못한 서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미약한 서원에 충문공(순조비 김씨의 아버지요, 지금 권문 김씨의 조상인)을 모시고, 충문공의 위패의 힘으로써 세력을 펴 보려는 계획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공자를 모시기보다도, 명나라 어떤 천자를 모시기보다도, 권문 김씨의 조상을 모시는 편이 더욱 세 쓰기에 첩경인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충문공의 위패를 모심에 있어서 다른 곳을 찾지 않고 그의 자손되는 병기 자신을 찾은 까닭을 병기는 알아보려고 최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병기는 퉁기어 버렸다.

『그러면 자네는 길을 잘못 들었네. 나는 어떻다고 대답할 수가 없네.』

병기는 담배 서랍에서 삼등 엽초(三登葉草)를 꺼내어 손으로 말면서 고요히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최 장의의 얼굴에는 낙심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만한 인사상의 거절은 미리부터 각오하고 왔던 모양이었다. 최 장의는 도포 자락을 좀더 헤치며 조금 나앉았다.

『대감, 길을 헛들은 줄은 소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올씨다. 그렇지만 다른 데 청을 드리기보다는 그 어른의 사손되시는 대감께 드리는 편이 좋겠읍고, 더구나 만약 그 어른의 사손이 안 계시면여니와, 계실뿐더러 현관으로 계신 이상에야 어찌 다른 곳을 찾게 되겠습니까? 다른 곳을 찾는다 할지라도 순서로서 대감께서 그 곳을 손수 지시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병기는 담배를 대에 담았다. 그리고 부시쌈지를 얻으려고 허리춤을 만졌다. 그러매 최 장의가 영외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들어와서, 어느 틈에 꺼내었는지 자기의 부싯돌로 쑥에 불을 일으켰다. 쑥에 붙였던 불은 유황 성냥으로 옮아 갔다. 그 불을 최장의는 양 손으로 읍하고 기다란 병기의 담뱃대 끝에 달린 대통에 대었다.

뻑 뻑, 힘있게 담배를 빨면서 병기는 눈을 굴려서 최장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쥐와 같이 생긴 얼굴이었다. 노란 수염이 몇 올 코 아래의 턱에 났으며, 하관이 빠른 그의 얼굴은, 사람을 비웃는 듯한, 또는 간사한 듯한, 그렇지 않으면 아첨하는 듯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고지식하지 않고, 꾀 고 간사하게 생긴 이 얼굴을 병기는 만족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진행되려는 일에 있어서는, 고지식한 인물이 제일 다루기 힘들고 어려움을 병기는 오랜 경험으로 잘 알았다.

향그러운 삼등초는 최 장의의 켜 든 성냥 아래서 피어 올랐다. 최 장의는 한 번 엄지손가락으로 담배의 뿌리를 눌러서 자리를 잡아 놓은 뒤에 다시 성냥에 불을 옮겨서 대었다.

눈치 덩어리였다. 병기는 만족하였다. 대감께 담배를 다 붙여 올린 뒤에, 최장의는 그냥 허리를 구부린 채, 뒷걸음쳐서 아까의 자리로 돌아갔다. 병기는 담배를 한 번 힘껏 빨아서, 그 연기로서 제 얼굴 전면을 감추면서 말하였다.

『최 장의!』

『네?』

『내가 그 어른의 사손이니깐 더욱 그런 일을 간섭하기 어렵지 않나? 밟을 길을 밟게. 내게는 귀찮게 굴지 말게.』

이런 말에 떨어질 최 장의가 아니었다. 또한 이런 말에 떨어질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에 병기는 이런 말을 한 것이었다.

『처음 뵙고 너무 조릅니다마는 대감밖에는 이 일을 주장해 주실 분이 안 계십니다. 다른 길을 밟는다 해도 대감께서 지도해 주셔야 할 것이옵고, 그만둔다 할지라도 대감의 지시만 받을 것이옵고……소인은 모릅니다, 대감께 매달려 조르고 억지쓸 따름이올씨다.』

『허! 이 사람, 감질 났네그려. 그럼 내 편지……』

『아니올씨다. 소인은 대감밖에는 모릅니다. 죽여도 대감께서 죽이시고, 살려도 대감께서 살리셔야지 다른 데는 모릅니다. 대감께서 응낙하시기까지는 소인은 열흘이고 한 달이고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병기는 고소하였다. 웃으면 홍소(哄笑)―그렇지 않으면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병기에게 있어서 고소라 하는 웃음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돈―금액에 대하여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병기 측에서는 최 장의가 꺼내기를 기다렸다. 최 장의 측에서는 대감이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금액이라는 문제를 가운데 놓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 주위만 뱅뱅 돌았다.

이런 흥정에 있어서 최 장의는 상당한 수완을 가진 인물인 모양이었다. 천병만마지간을 다 다닌 병기도 그 수완을 넉넉하다 보았다. 그것은 구렁이와 여우와의 승강이였다.

흥정은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동복이 들어와서 백통 촛대에 촛불을 켜 놓고 나가기까지 흥정은 결말이 나지 않았다. 드디어 최 장의가 이런 말을 꺼내게까지 되었다.

『대감, 대감 댁 도령님 지필가(紙筆價)로 남성사서 한 삼천 냥 드리겠읍니다.』

이 말에 담배만 뻐근뻐근 빨고 있던 병기가 번쩍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노염이 타올랐답니다. 병기는 고요히 말하였다.

『여보게!』

『네?』

『아직 젊은 사람이니 용서해 주거니와, 다시는 그런 버릇 없는 말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게. 내 자식은 아직 조상을 팔아서 지필을 살이만치 궁하지 않았네.』

그리고 거기 대하여 최 장의가 놀라서 무슨 변명을 하렬 때에, 병기는 내리 누르듯이 말을 계속하였다.

『아무리 나이가 못 들었기로서니 선비의 처신에 그맛 지각도 없을 까닭은 없겠지. 썩 돌아가게. 오늘 밤으로 김천으로 내려가게. 에이! 고약한 사람 같으니……』

그리고는 담뱃대를 들고 일어서서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병기는 내실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밤은 내실에서 자겠노라는 뜻을 눈짓으로 부인에게 알게 한 뒤에, 천천히 다시 사랑으로 나왔다. 그것은 아까 병기가 최 장의를 버려 두고 내실로 들어갔던 때부터 약 한 시각쯤 뒤로서, 해시(亥時)가 거의 된 때였다.

병기는 나와서 세간 청지기를 불렀다. 대령한 청지기에게 향하여,

『김천 최가는 갔느냐?』

고 물었다.

『아직 외사에 있읍니다.』

『음, 고약한 사람 같으니……』

병기는 아직도 괘씸하다는 듯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문갑 위에 놓여 있는 주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양 두돈 오푼, 양 두돈 오 푼을 몇 번을 놓다가 그것을 멈추고, 천(千) 줄에다가 위에 한 알, 아래 두 알을 놓아서 칠천이라는 수효를 나타내어 가지고 물끄러미 주판을 굽어 보았다. 이 주판은 청지기도 넉넉히 볼 수 있도록 조금 밖쪽으로 젖혀 가지고―

그리고 잠시 가만 있다가, 청지기에게 도로 물러 가기를 명하고, 동복을 불러서 좌초롱에 불을 켜서 앞세우고 내실로 들어갔다. 병기가 내실로 들어간 뒤에 사랑 조용한 한 방에서는 김천 선비와 병기 댁 세간 청지기의 사이에 흥정이 시작되었다.

상의(商議)가 거듭되고 거듭되어 야반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결과 남성사이에서는 김 병기에서 구천 냥(만 냥이 아니면 안 될 것이로되, 청지기가 특별히 대감께 잘 알선하여 구천 냥에 떨구겠다고 장담하고)을 바치고, 남성사에는 충문공의 위패를 모시게 하도록 하여 주겠다는 약속이 성립되었다. 그 구전으로 청지기에게 남성사에서 삼백 냥을 뇌물하였다.

남성사에서는 병기 댁 청지기에게 구천 삼백 냥을 드렸다. 청지기가 맡은 치부책에는 남성사 앞으로 칠천 냥이 적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영의정 김 좌근의 상계로서 김천 남성사에 충문공의 위패를 모시는 사액(賜額)을 할 것이 윤허(允許)되었다.

그러나 그 윤허가 내리기 전에 벌써 남성사의 하인들은 각곳으로 헤어져서, 근린의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을 모두 김천 읍으로 잡아다가 가두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또 다른 상의(商議)가 진행되고 있었다.

윤허가 내린 때쯤은 가난하고 가난하던 남성사는, 어느 덧 천 석에 가까운 제전이며 많은 산림을 소유하게 되었고, 여기저기 비싼 이자로써 빚을 줄 돈도 꽤 많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