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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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호(尹光浩)는 동경 K대학 경제과 2학년급의 학생이라. 금년 9월에 학교에서 주는 특대장(特待狀)을 받아가지고 춤을 추다시피 기뻐하였다. 각 신문에 그의 사진이 나고 그의 약력과 찬사도 났다. 유학생간에서도 그가 유학생의 명예(名譽)를 높게 하였다 하여 진정으로 그를 칭찬하고 사랑하였다.

본국에 있는 그의 모친도 특대생이 무엇인지는 모르건마는 아마 대과급제 같은 것이어니 하고 기뻐하였다. 윤광호는 더욱 공부에 열심할 생각이 나고 학교를 졸업하거든 환국(還國)하지 아니하고, 3·4년간 동경에서 연구하여 조선인으로 최초의 박사의 학위를 취하려고 한다. 그는 동기(冬期)방학 중에도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였다. 친구들이

"좀 휴식을 하시오. 너무 공부를 하여서 건강을 해하면 어쩌오."

하고 친절하게 권고한다. 과연 광호의 얼굴은 근래에 현저하게 수척하였다. 자기도 거울을 대하면 이런 줄은 아나 그는 도리어 열심한 공부로 해쓱하여진 용모를 영광으로 알고 혼자 빙긋이 웃었다. 그는 전 유학생 계에서 이러한 칭찬을 받을 때에는 13, 4년 전의 과서를 회상치 아니치 못한다. 그때에 자기는 부친을 여의고 모친은 재가하고 혈혈(孑孑)한 독신으로 혹은 일본 집에서 사환 노릇을 하며 혹은 국숫집에서 멈살이를 하였다. 그때에 자기의 운명은 비참한 무의무가(無依無家)한 하급 노동자밖에 될 것이 없었다. 그냥 있었더면 24세 되는 금일에는 아마 어느 국숫집 윗간에서 때묻은 저고리를 거꾸로 덮고 허리를 꼬부리고 추운 꿈을 꾸었을 것이라. 그러나 지금은 동경 일류대학의 학생이 되고 비복(婢僕)이 승명(承命)하는 하숙의 깨끗한 방에서 부귀가(富貴家)의 서방님이나다름이 없는 고상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겸하여 전도에는 양양한 희망이 있다. 그는 동경 유학생 중에 최고급으로 진보된 학생 중의 일인(一人)이라, 수년이 못하여 조선 최고급의 인사되기는 지극히 용이한 일이라. 이렇게 광호가 자기의 소년시대와 현 생활을 비교할 때에는 희열의 미소를 금치 못할 것은 물론이라.

그러나 광호의 심중에는 무슨 결함이 있다. 보충하기 어려울 듯한 크고 깊은 공동(空洞)이 있다. 광호는 자기의 눈으로 공동을 보고 이것을 볼 때마다 일종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적막을 감(感)한다. 이 공동은 광호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전충(塡充)하기 불능하다. 여하한 인(人)일지는 모르거니와 이 공동을 전충할 자는 광호 이외의인인 것은 사실이라.

광호는 집에 혼자 앉았을 때에 혹은 찬 자리에 혼자 누웠을 때에 또 혹은 혼자20여분이나 걸리는 학교에 가는 길에 형언치 못할 적막과 비애를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친구와 노상의 행인까지라도 유심하게 보며 더구나 전차 속에서 맞은편에 앉은 당홍치마 입은 여학생들을 볼 때에나 혹 13, 4세 되는 혈색 좋고 얌전한 소년을 대할 때에는 자연히 심정이 도연(陶然)히 취하는 듯하여 일종의 쾌미감(快美感)을 깨달아 정신없이 그네의 얼굴과 몸과 의복을 본다. 혹 이렇게 황홀하였다가 두어 정류장을 지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라서 전차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면 즐거운 꿈을 꾸다가 갑자기 깬 모양으로 더욱 정신의 공동이 분명히 보이고 적막과 비애가 새로워진다.

혹시 교실에서도 전과 같이 선생의 강연에 주의할 힘이 없이 망연히 앉았다가 하학(下學) 종소리를 듣고야 비로소 자기가 교실에 있는 줄을 깨닫는다.

이 모양으로 2, 3삭(朔)을 지나는 동안에 특대생의 기쁨도 거의 소멸되고 마음속에는 그 적막과 비애만 더욱 심각하여진다. 그는 극히 쾌활하고 다변(多辯)한 사람이더니 근래에는 점점 침울하게 되며 될 수 있는 대로 타인과의 교제와 담화를 염피(厭避)하고 자리에 누워도 1, 2시간이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근래에 외국어학 공부도 좀 태만하여지고 흔히 정신없이 우두커니 앉았다. 친구들도 광호의 변화하는 양을 보고 혹 우려도 하며 혹 여러 가지로 그 원인도 촌도(忖度)한다. 혹자는 광호가 특대생이 되어 교만하게 된 것이라 하고 광호를 사랑하는 혹자는 그가과도한 공부에 신경이 쇠약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광호에게 각자의 의견으로 권고도 하더니 근래에는 방문하는 사람도 없게되었다. 광호는 혼자 하숙 볕 잘 드는 방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한숨만 쉰다.

광호의 뜻을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 있다. 그는 광호의 상급동창이매, 동창은 동창이면서도 2, 3년급이나 떨어졌으므로 장유(長幼)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광호는 이 사람을 유일한 친우로 사모하고 이 사람도 광호를 친동생과 같이 사랑한다. 그 사람의 성명은 김준원(金俊元)이니 광호의 통학하는K대학의 대학원에서 생물학을 전공 연구한다.

광호는 심중에 불평이나 번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준원을 방문하여 1, 2시간자기의 소회(所懷)를 말한다. 그러면 준원은 진정으로 광호의 생각에 동정하여 혹여러 가지로 광호를 장려하기도 한다. 이렇게 준원과 담화를 하고 나면 광호의 울민(鬱悶)은 훨씬 풀어지고 일종의 기쁨과 쾌감을 가지고 하숙에 돌아온다. 지나간 6, 7년간 광호는 실로 준원일래 살아온 것이라. 준원은 물질로도 광호를 극력 원조하였거니와 더욱이 정신상으로 항상 광호에게 위안과 희열과 희망을 주어왔다. 그래서 광호는 준원만 있으면 넉넉히 이 세상을 지내어가리라 하였고 준원의 생각에도 광호는 자기의 뜻을 가장 잘 알아주고 자기를 가장 잘 사랑하여주는 친구로 광호를 더욱 사랑하였다.

근래에 준원은 광호가 자기보다 정신력으로 수등(數等)의 차가 있음을 깨달아 광호에게 말하더라도 이해치 못할 어떤 것을 소유한 줄을 의식하여 얼마큼 광호를 후배로 보는 경향은 생(生)하였으나 그래도 준원은 광호를 희한한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애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광호의 정신의 공동은 날로 분명하게 되고 적막과 비애는 날로 심각하게 괴어 이제는 아무리 준원을 대하여 준원에게 흉회(胸懷)를 토로하고 준원의 말을 들어도 전과 같이 위안을 부득(不得)할 뿐 더러 도리어 적막과 비애를 강하게 할 뿐이라. 광호는 자기의 적막과 비애가 준원과의 담화로는 도저히 위안치 못할 정도에달한 줄과 친우의 애정과 위안의 힘은 어떤 정도 이상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준원의 하는 말은 마치 자기의 폐간(肺肝)을 꿰뚫어보고 하는 듯이 자기의 생각하는 바와 부합하더니 근래에는 준원의 말에도 수긍치 못할 점이 생기고 그뿐더러 준원의 위안과 권장이 피상적인 듯이 들린다. 준원도 광호가 전과 같이 자기의 말에 감복하지 아니하는줄을 알고 또 자기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그 이유도 대강 짐작하였다. 한번은 광호가 준원의 말에 대하여 열렬히 반대하였다. 아직 자기의 말에 반대하는 양을보지 못하던 준원은 광호가 이처럼 격렬하게 반대하는 양을 보고 잠깐 경악도 하고 불쾌도 하였으나 곧,

"너도 개성이 눈 뜨기 시작하였구나."

하고 웃고 말았다. 그 후부터 준원은 광호에게 대하여 전과 같이 많이 말하지 아니한다. 광호도 준원이가 근래에 자기에게 대하여 전보다 냉담한 양을 보고 준원이가 일전 자기의 반대에 노하였는가 하여 얼마큼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광호는 그 후부터 전같이 빈번하게 준원을 방문치도 아니하고 준원도 전과 같이 광호를 보고 싶으게도 생각지 아니하였다. 준원은 마치 사랑하던 누이나 딸을 시집보낸 뒤에 그 누이와 딸이 자기보다도 그 지아비를 더욱 사랑하고 자기에게 대하여는 독립 반항의 태도를 취하는 양을 볼 때에 발(發)하는 듯한 일종 서어하고 불쾌한 감정을 깨닫는다. 작일까지는 광호가 내 품에 안겨 있었거니와 금일부터는 광호가 자기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의 품으로 뛰어간 듯이생각된다. 광호도 불식부지간에 준원에게 대한 애모의 정의 희박하게 됨을 깨닫고더구나 준원이가 근래에 자기에게 대하여 냉담하게 하는 것이 불쾌하게도 생각된다. 이리하여 준원과 광호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가고 그러할수록 광호는 더욱더욱 적막을 깨닫는다.

전차 속에서 아름다운 소년소녀를 보고 쾌미의 감정을 얻는 것으로 유일의 위안을 삼아 일부러 조석(朝夕) 통학시간에는 전차를 탔다. 광호는 다만 아름다운 소년소녀의 얼굴과 몸과 옷을 바라보기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바로 소년소녀가 자기의 곁에 앉아서 그 체온이 자기의 신체에 옮아올 만하여야 비로소 만족하게 되고 혹 만원인 때에 자기의 손이 여자의 하얗고 따뜻한 손에 스칠 때에야 비로소 만족하게 쾌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래서 광호는 일부러 차가휘어 돌아갈 때를 타서 몸을 곁에 섰는 여자에게 기대기도 하고 혹 필요없이 팔을들었다 놓았다 하여 여자의 살의 따뜻한 맛을 보려 한다.

한번 광호가 전차를 타고 어디를 갈 때에 정전하여 전차가 서고 전등이 꺼졌다. 그리고 조그마한 축전지 전등이 켜졌다. 광호는 곁에 앉은 여학생을 보고 그 조그마한 전등을 미워하였다. 이처럼 광호의 심정은 동요하였다. 광호의 머리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또 잘 때에 꿈에까지 보이는 것이 아름다운 소년과 소녀뿐이었다.그의 눈앞에는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아름다운 소년소녀가 무수하게 왔다갔다 할 뿐이다. 그는 이 환영(幻影)에 대하여 무수히 '나는 너를 사랑한다'를 발(發)하고무수히 입을 맞추고 무수히 포옹을 하였다. 그러므로 광호의 근일의 생활은 몽중의 생활이요 환영중의 생활이라. 그는 공부를 하려 한다. 내년에도 특대생이 되려 한다. 그러나 책을 보아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아니하고 책장(冊張) 위에는 글자마다 아름다운 소년소녀로 변하여 방긋방긋 웃으며 광호를 대하여 손을 내어민다.

광호는 막연히 인류에 대한 사랑, 동족에 대한 사랑, 친우에 대한 사랑, 자기의 명예와 성공에 대한 갈망만으로 만족치 못하게 되었다. 그는 누구나 하나를 안아야 하겠고 누구나 하나에게 안겨야 하겠다. 그는 미지근한 추상적 사랑으로 만족치 못하고 뜨거운 구체적 사랑을 요구한다. 그의 공동은 이러한 사랑으로야만 전충하겠고 그의 적막과 비애는 이러한 사랑으로야만 위안하겠다. 광호도 근래에 이런 줄을 자각하였다. 동경시가에 준준하는 수백만 인류나 밤에 창공에 반짝거리는 무수한 성신(星辰)이나 하나도 광호의 동무는 되지 못한다. 마치 길에 나서면 대한(大寒)바람이 추운 것과 같이 실내에 들어오면 화기 없는 침구가 산듯산듯한 것과 같이 광호에게 대하여 전 세계는 빙세계와 같이 춥고 무인지경과 같이 적막하다. 광호가 반야(半夜)에 적막한 비애를 이기지 못하여 우는 눈물만이 오직 더울 뿐이다.

이 때에 광호는 P라는 한 사람을 보았다. 광호의 전정신은 불식부지간에 P에게로 옮았다. P의 얼굴과 그 위에 눈과 코와 눈썹과 P의 몸과 옷과 P의 어성과 P의 걸음걸이와... 모든 P에 관한 것은 하나도 광호의 열렬한 사랑을 끌지 아니하는 바가없었다. 광호는 힘있는 대로 P를 볼 기회를 짓고 힘있는 대로 P와 말할 기회를 지으려한다.

P는 광호의 하숙에서 2, 30분이나 걸리는 곳에 있었다. 광호는 행여나 P를 만날까 하고 7시 반에 학교로 가던 것을 6시 반이 못하여 집을 떠나서 P의 집 곁으로 빙빙 돌다가 P가 책보를 끼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 자기는 가장 필요한일이 있는 듯이 P와 반대방향으로 속보로 걸어가서 P가 지나가거든 잠깐 뒤를 돌아보고는 일종 쾌감과 수치한 생각이 섞어져 나오면서 학교로 간다. 아침마다 이러하므로 P도 이따금 광호를 잠깐 쳐다보기도 하고 혹 웃기도 한다. P는 아주 무심하게 하는 것이언마는 광호는 종일 그 '쳐다봄'과 '웃음'의 의미를 해석하노라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는 매양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그 의미를 설명하여 'P도 나를 사랑하나보구나'하고는 혼자 기뻐한다. 그러나 그 기쁨에는 의심이 반 이상이나 넘었다.

그로부터 광호는 새로 외투를 맞추고 새로 깃도 구두를 맞추고 새로 모직 책보를 사고 새로 상등석검(上等石?)을 사고 아침마다 향유를 발라 머리를 가르고 그의 쇠 잠그는 책상서랍에는 신문지로 꼭꼭 싼 것이 있다. 광호는 밤에 아무도 없을 때에 그신문에 싼 것을 끄집어내어 그래도 누가 보지나 않는가 하여사방을 살펴보면서 그 신문에 싼 것을 낸다. 그리고 휘하고 한숨을 쉬면서 거울에대하여 그 신문에 쌌던 것을 바르고 얼굴도 여러 가지 모양을 하여 보아 아무쪼록얼굴이 어여뻐 보이도록 하였다. 그 신문에 싼 것은 미안수(美顔水)와 클럽백분(白粉)인 줄은 광호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

'사랑은 세월을 허비한다'는 격언과 같이 그렇게 쾌활하던 광호는 졸변하여 아주 내약하고 침울한 청년이 되고 말았다. 광호는 점점 학교에 결석도 하게 되고 출석을 하여도 과업에 주의를 집중치 못하게 되었다. 누구를 찾아가지도 아니하고 누가 찾아오지도 아니하고 광호는 아주 고독한 번민자가 되고 말았다. 다만 아침마다 P의 얼굴을 잠깐 보기로 유일한 일과요, 유일한 위안을 삼게 되었다. 아침에 가다가 혹 P를 만나지 못하면 그날 종일을 앙앙(怏怏)하게 보내고 밤에 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혹 2, 3일을 연해서 못 볼 때에는 병이 들었는가 하여 혼자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올렸다. 그 기도는 참 정성스러운 기도였다. 광호가 일직 올린 기도 중에 가장 정성스러운 기도였다. 그가 일찍 본국에 있는 모친의 병이 중하다는 말을 듣고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처럼 눈물은 흐르지 아니하였다. 모친은 마땅히 죽을 사람이로되 P는 결코 죽어서 못 될 사람이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P는 없어서 되지 못하였다.

광호의 목숨은 P를 위하여서 있고 P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었다. P가 금시에 죽는다 하면 광호의 생명은 순간에 소멸될 듯하다. 광호로는 P를 제하고는 생명도 생각할 수 없고 우주도 생각할 수 없다.

광호는 여러 번 P에게 이 말을 하려 하였다. 그러나 P를 대하면 이런 말을 할 용기가 없어진다. 이튿날은 새벽에 눈을 뜰 때부터 오늘은 기어코 통정(通情)을 하리라 하고 열 번 스무 번이나 결심을 한다. P의 집 모퉁이에 섰을 때에까지도 이 결심을 지키건마는 P의 그림자가 번뜻 보이기만 하면 마치 장마 버섯이 일광을 보매 스러지는 모양으로 스러지고 만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 일이나 하다가 하루는 죽기를 도(賭)하는 결심으로,

"여봅시오, P씨!"

하였다. P씨는 휙 돌아서며,

"왜 그러시오?"

하고 광호를 본다. 광호는 P의 냉담한 말소리와 용모를 보고 낙심하였다. 그러나최후의 용기로,

"나는 P씨에게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 가만히 P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P는 싫은 듯이 손을 뽑으면서,

"무슨 말씀이야요. 얼른 합시오. 학교시간이 급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광호는 죽고 싶으리만큼 실망하였다. 설마 P가 이처럼 냉담할 줄은 몰랐음이라. 그래도 다소는 자기에게 애정을 두었거니 하였다. 이따금 광호를 돌아보며 방긋이 웃는 것은 얼마큼 광호의 애정을 깨닫고 또 광호에게 대하여 얼마큼동정을 하거니 하였다. 그래서 광호가 이런 말을 하면 P가 '나도 그대를 사랑하오' 하지는 아니하더라도 따뜻이 동정하는 말이라도 하려니 하였던것이 이러한 냉대를 당하니 광호는 당장에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다.

그래서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였다. P는 물끄러미 광호를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네? 무슨 말씀이야요?

한다. 광호의 몸에서는 이 추운 날에 땀이 흐른다. 광호는 다시 말할 용기가 없어서,

"안녕히 갑시오."

하고 학교에 가기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왔다. 광호는 실망도 되고 부끄럽기도 하여 감기가 들었노라 하고 이불을 쓰고 누웠다. 종일을 번민하고 누웠다 벌떡 일어나서 면도로 좌수(左手) 무명지를 베어 술잔에 선혈을 받아가지고 P에게 편지를 썼다. 선혈로 쓴 글씨는 참 전율할 만큼 무서웠다. 그 뜻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자기가 P에게 전심신을 바치는 것과 P에게서 사랑을 구한다 함이라. 이 편지를 부치고 광호는 한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이 편지의 회답 여하로 자기의 생명은 결정되는 것인 듯하였다. P에게 대한 사랑이 자기의 생명의 전내용이거니 하였다. 그리고 P의 사진에 입을 맞추고 또 이것을 밤낮 품에 품으며 이따금 못 견디게 P가 그리울 적에는 그 사진을 앞에 놓고 눈물을 흘려가며 진정을 한다.

하숙의 하녀도 근일에는 광호의 고민하는 눈치를 알고 한번은 농담 삼아,

"상사(相思)하는 이가 있어요?"

하였다.

익일에 편지 답장이 왔다. 그 속에는 광호가 자기를 사랑하여 줌을 지극히 감사하노라 하여 훨씬 광호의 비위를 돋군 뒤에 이러한 구절을 넣었다.

"대저 남에게 사랑을 구하는 데는 세 가지 필요한 자격이 있나니, 차(此) 삼자를 구비한 자는 최상이요, 삼자 중 이자를 구비한 자는 하요, 삼자 중 일자만 유한 자는다수의 경우에는 사랑을 얻을 자격이 무하나이다. 그런데 귀하는 불행하시나마 전자에 속하지 못하고 후자에 속하나이다."

하고 한 줄을 떼어놓고,

"그런데 그 삼자격이라 함은 황금과 용모와 재지(才智)로소이다. 차 삼자 중에귀하는 오직 최후의 일자를 유할 뿐이니 귀하는 마땅히 생존경쟁에 열패(劣敗)할 자격이 충분하여이다. 극히 미안하나마 귀하의 사랑을 사양하나이다."

하고 혈서도 반송하였다. 광호는,

"옳다, 나는 황금과 미모가 없다."

하고 울었다. 울다가 행리(行李) 속에서 특대장과 우등졸업증서를 내어 쪽쪽 찢었다.

"재지는 최말(最末)이라, 재지는 사랑을 구할 자격이 없다."

하고 그 찢어진 종이 조각을 발로 비비고 짓밟아 돌돌 뭉쳐서 불에 태웠다.

광호는 하녀를 명(命)하여 맥주 일 타(打)와 청주 일 승(升)을 가져오라 하였다. 광호가 이 하숙에 3년째나 있으되, 아직 술 먹는 것을 보지 못한 하녀는 눈이 둥그레지며,

"그것은 무엇하게요?"

하고 농담인 줄만 여긴다. 광호는 성을 내며,

"먹지 무엇을 해, 어서 가져오너라."

한다. 하녀 양인(兩人)이 명대로 술을 가져왔다. 광호는 병을 입에다 대고 함부로 들이켠다. 맥주를 반 타나 마시고 일본주 6, 7홉을 들이켰다. 3, 4일 식음을 폐하던 광호는 눈에서 술이 흐르도록 취하였다. 그리고는 책장에 끼인 책을 끄집어내어 말끔찢어버리고 깔아놓았던 이불과 방석도 온통 찢어버렸다. 그러고 광인 모양으로 P의 이름을 부르며,

"그래 나는 황금과 미모가 없다."

를 염불하듯이 부르짖는다. 하숙주인인 노파는 깜짝 놀라 광호의 방에 뛰어 올라왔다.

"이게 웬일이오니까?"

"하하."

하고 광호는 미친 듯이 웃으며,

"당신은 얼굴이 곱구려. 나는 얼굴이 밉고 돈이 없어요."

하며 찢다가 남은 책을 쪽쪽 찢는다. 노파도,

"실연이로구나."

하고 불쌍한 마음이 생겼다. 그러고 경찰서에 고할까 말까 하고 한참 주저하다가전부터 아는 준원에게 엽서를 띄워 속히 오소서 하였다.

'윤광호 씨에 대하여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사오니'한 주인의 엽서를 보고 동물발생학을 보던 준원은 놀랐다. 그 동안 2, 3주일에 한 번 광호를 만나지 못한 것과 또 광호가 근래에 정신상 일대 동요가 생한 모양이 보임을 종합하매 무슨 범상치 아니한 사건이 발생한 줄을 짐작하고 즉시 숙소를 떠나 찬바람을 거스르면서 본향구(本鄕區) R관을 방문하였다. 주인노파는 한훤(寒喧)도 필(畢)하기 전에 광호가근래에 전에 없이 침울함과 작일에 학교에 가다가 1시간이 못하여 돌아온 것과 어제 종일 자리에 누웠던 것과 금조에 무슨 편지를 받더니 술을 먹고 책과 침구를 찢은 것을 말하고 나중에,

"실연이 아닐까요?"

한다. 준원은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글쎄요."

하면서 이층 광호의 방에 들어갔다. 광호는 몽롱한 눈으로 물끄러미 준원을 보더니, 똑똑치 아니한 말로,

"당신이 김준원이라는 사람이오. 옳지 잘 오셨소, 앉으시오."

하고 술병을 들어,

"자 한잔 잡수시오. 우리같이 황금도 없고 미모도 없고 생존경쟁에 열패한 자는 술이나 먹여야지요."

하며 떨리는 손으로 강제하는 듯이 준원에게 술을 권한다. 준원은 사양치 아니하고 두어 잔을 마셨다. 그리고 말없이 광호의 얼굴을 본다. 광호의 얼굴에는 고민한 빛과 세상을 조롱하고 자포자기하는 빛이 보인다. 광호는 미친 듯이 껄껄 웃으며,

"나도 근일에 서양철학사를 보았습니다... 헤, 헤, 보았어요. 탈레스라는 사람이 세상은 물로 되었다고 그랬습디다. 그런 미련한 놈이 어디 있겠소. 우주가 물로 되었으면 불을 무엇으로 해석하려고 그러는가요. 하하 그따위 놈이 다 철학자라고...하하 게다가 철학자의 시조라고..."

하고 맥주 한 병을 통으로 마시더니 손으로 입을 씻으며,

"그것이 말이 되오... 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던가."

하고 생각한다. 준원이가,

"탈레스 공격."

하고 웃는다. 광호는 이제야 생각이 나는 듯이 무릎을 툭 치며,

"옳지, 옳지, 탈레스. 탈레스. 그런 미련한 놈이."

하고 탈레스가 우주는 물로 되었다는 말과 그러고 보면 불을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을 두어 번 더 하고 무수히 '미련한 놈'이라고 질욕(叱辱)한 뒤에 일단(一段) 소리를 높이고 고개를 번쩍 들며,

"나는 - 이 윤광호 씨는 말이야요 - 나는 우주는 '돈'으로 되었다 합니다."

하고 또 맥주 한 병을 잡아당기며,

"이 좋은 술도 돈만 주면 옵니다그려. 돈만 있으면 가지지 못할 것이 없고 하지 못할 일이 없구려."

하고는 자긍(自矜)하는 듯이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며 껄껄 웃더니, '당신도 찬성하라'는 듯이 준원을 보다가 준원의 잠잠함을 보고,

"왜 말이 없소. 그렇지요? 내 말이 옳지요?"

하고 몸을 흔든다. 준원은 광호가 이처럼 격변한 것을 보매 한끝 불쌍하면서 한끝 흥미 있게 생각하여,

"대관절 무슨 일이오? 왜 이 모양이 되었소?"

하는 말소리는 떨린다.

"하하. 돈이 없어서, 네 돈이 없어서."

하고 무지(拇指)와 식지(食指)로 환(環)을 작(作)하여 준원의 코를 지를 듯이 쑥내밀며,

"이것이가 없어서. 네 그러고."

하고 환을 작하였던 식지로 거무데데한 자기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또 이것이 잘못 생겼어요, 하나님이 이것을 만들 때에는 좀 싫증이 났던지 눈과 코를 되는 대로 만들어서 되는 대로 붙이고... 글쎄 이렇게 못되게 만들 것이 무엇이오."

하는 조물주를 맹책(猛責)하는 듯이 분노하는 안색과 어성으로,

"글쎄, 이렇게 못되게 취하게 만들 법이 어디 있어요."

하고 주먹으로 두 빰을 탁탁 때리고 엉엉 울더니 다시 하하하하고 웃으며,

"좀 하얗게 닦아주지야 왜 못하겠소."

하고 고개를 숙인다. 준원은 광호의 검고 좁은 눈은 크고 코는 넓적하고 여드름 많이돋은 얼굴을 보고, 또 광호가 조물주의 솜씨를 공격하는 말을 들으매 우스움을 참지 못하여 하하 웃었다. 광호도 하하하고 웃더니 갑자기 시치미를 뚝떼고, 준원의 팔을잡아채며,

"왜 웃소? 응 왜 웃어요. 내 이 얼굴이 우습소. 이 조물주의 싫증이 나서 되는대로 만들어놓은 이 얼굴이 우습소?"

하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땅을 치며 말끝을 돌려,

"우주는 돈으로 만들었다 하는 내 말이 어때요. 내가 탈레스보다 용하지요. 이놈이무엇이 어째."

하고 탈레스가 자기의 앞에 앉았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우주가 물로 되었어? 불은 무엇으로 설명하고? 우주는 돈으로 되었나니라 하하."

하고 무지와 식지로 환을 작하여 내어두르며,

"이놈아 우주는 이것으로 되었어!"

하고 껄껄 웃는다. 준원은 광호가 미치지 아니할까 하고 염려하였다.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도 졸변하는가 하고 놀랬다. 준원의 보기에 광호는 이제 다시 완인(完人)이 될듯하지 아니하였다.

겨우하여 준원은 광호의 이번 발광(준원은 이렇게 부른다)은 P에 대한 실연이 원인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준원은 12, 3년 전 일을 생각하고 쪽 소름이 끼쳤다.

준원이 처음 동경에 왔을 때에는 준원을 사랑하는 어떤 일본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모대학의 영문과를 졸업하고 독어와 한어(漢語)와 조선어까지 능한 23, 4세 되는 명사로 사회의 촉망도 다대하였다. 그가 우연히 13, 4세 되는 준원을만나 준원을 열애하게 되었다. 그때에 준원은 홍안미소년이라는 조롱을 들을 만한 미소년이었다.

그 소년은 날마다 준원을 아니 보고는 견디지 못하고 보면 손을 잡고 쓸어안고혹 입도 맞추려 하였다. 처음에는 그 청년의 친절함을 기뻐하던 준원도 이에 이르는 그 청년에게 대하여 염피하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준원은 아무쪼록 그 청년과 회견하기를 피하였다. 그 청년은 매일 4, 5차씩 전보도 놓았다. 그러나 준원은 더욱 염증이 나서 가지 아니하였다. 그 청년은 그때마다 차렸던 음식을 방바닥에 뒤쳐 엎고 되는 대로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견디다 못하여 하루는 면도를 품고 준원의 집에 갔다. 준원은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아니, 면도를 가지고 온 것은 그대를 죽이려 함이 아니요, 내가 죽으려 함이로다.내 생명을 끊을지언정 차마 사랑하는 그대의 손가락 하나인들 상하랴."

하고 준원에게 자기를 사랑하여주기를 간구하였다. 그러나 준원은 명답(明答)치 아니하였다. 이에 그 청년은 주먹으로 수십 차나 자기의 가슴을 때려 마침내 다량의 토혈을 하고 객혈이라는 병명으로 5주일간이나 입원치료하였다.

입원중에는 준원도 그 청년이 불쌍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가끔 위문하였다. 준원의 얼굴만 보면 병상에 누운 그 청년은 기쁜 듯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퇴원 후에는 준원은 일차도 그 청년을 방문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하숙을 옮기고 번지도 알리지 아니하였다. 그 후 일년이 지나서 준원은 그 청년이 지망 모중학교 교유(敎諭)로 갔다는 말을 듣고 또 주망(酒妄)꾼이 되어 학교에서 배척을 당하여 친지간에도 망가자(亡家子)라는 칭호를 듣는단 말을 들었다. 그 후 7, 8년간 소식이 막연하다가 재작년 준원이 신의주에 여행할 때에우연히 그 청년을 만났다. 그 용모는 초췌하고 의복은 남루하였다. 여름이언마는 그는 동절 중절모를 쓰고 술이반쯤 취하였으며 나막신도 다 닳아진 것을 제가끔 신었다. 준원은 그때에 몸에 소름이쪽 끼쳐 한참이나 말이 막혔다. 주소를 물어도 그는 다만,

"천지가 내 주소요."

할 뿐. 준원은 요리점에 들어가 서양요리와 맥주를 향응하였다. 그 청년은 반가운 듯이 수염 난 준원의 얼굴을 보며 사양도 아니하고 주는 대로 술을 마시나 피차에 아무 말이 없었다.

차시간이 되어 준원의 탄 차가 떠날 때 그 청년(이제는 삼십이 많이 넘었다)은차창으로 준원의 손을 잡으며,

"내 생활을 이 방향에 넣게 한 것은 노형이외다. 나는 성공도 없고 희망도 없고 일생의 행색이 이 모양이외다. 준원군! 사랑하는 준원군! 나는 진정으로 그대의 성공과 행복을 비오."

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차가 떠나갈 때에 준원은 차창으로 머리를 내어밀고 초연히 섰는 그 청년을 향하여 모자를 흔들었다. 그러나 준원의 눈에도눈물이 흘러 얼마 아니하여 그 청년의 모양도 아니 보이게 되었다. 이것을 생각하고 지금 광호의 처지를 보니, 그 청년의 일생이 과연 준원 자기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듯하고 또 광호의 일생도 그 청년과 동양(同樣)의 궤도를 취하는 듯하여 준원은 전율함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시 광호의 얼굴을 보니 광호의 웃는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준원은 생각하였다. 광호는 세상에 온 지 24년간에 따뜻한 애정이란 맛을 보지 못하였다. 모친의 애정이나 자매의 애정도 맛보지 못하였다. 그의 일생은 참 빙세계의 일생이었다. 인생에서 애정을 떼어놓으면 차마 어찌 살랴. 만일 애정 중에서 살던 사람을 갑자기 애정 없는 세상에 잡아 넣는다면 그는 일일(一日)이 못 하여서 동사(凍死)하리라. 그러나 광호는 아직도 애정 맛을 보지 못하였는고로 지금토록 살아왔다. 마치 극해(極海)에서 생장한 동물은 빙설 중에서도 생존할 수 있음과 같이. 그러나 광호는 적도의 난류를 맛보았다. 한 번이 난류의 따뜻한 맛을 본 광호는 도저히 다시 빙세계에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난류를 구하고 구하다가 득(得)하면 살고 부득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의생명은 오직 P의 향배에달렸다. 그런데 P는 광호를 돌아보지 아니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광호는 소리를 내어 울며,

"나는 죽을랍니다."

하는 소리는 마치 패군한 장사가 자문(自刎)하려 할 때에 부르는 노래와 같이 비창하였다. 준원은 더욱 광호를 불쌍히 여긴다. 만일 지금이라도 어떤 부드러운 여자의 손이 비분과 실망으로 파열하려 하는 광호의 가슴을 만져주면 광호는 소복(蘇復)할 여망(餘望)이 있으리라. 그러나 준원 자신은 이미 광호에게 위안을 줄 힘이 없는 줄을 알았다.

"세상에는 따뜻한 여성의 손이 많기는 많건마는."

하고 준원도 눈물이 흐른다. 준원의 눈물은 다만 광호를 불상히 여기는 생각뿐이 아니요, 동시에 자기를 불쌍히 여김이었다. P는 익조(翌朝)에 신문을 보았다.

"R관지숙 K대학생 윤광호는 작일 오후에 단도로 자살하였는데 그 지기 김준원을 방문하건대 실연의 결과라더라."

하는 말을 보고 P는 깜작 놀랐다. 그러나 설마 자기를 위하여 죽은 것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이 신문을 본 조선 유학생들은,

"흥, 특대생!"

하고 광호를 조소하고 그 박지약행(薄志弱行)함을 질욕하였다. P가 신문을 들고 망연히 앉았을 때에 준원은 황망히 P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P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여보 P씨. 그대는 우리 친구 한 분을 죽이셨소."

하고 눈물을 흘린다. P는 놀랐다. 그러나 암만해도 광호가 자기 때문에 죽었으리라고는 믿지 못한다.

"설마 저 때문에 죽었겠어요?" "아니오, 당신 때문에 죽었지요. 당신도 살아가노라면 광호의 죽은 뜻을 알리다."

두 사람은 잠잠하게 광호를 생각하였다. 광호의 시체는 경찰의(警察醫)의 검사를 받은 후에 청산묘지의 일우(一隅)에 묻혔다. 그는 일생에 오직 하나 '특대생의 기쁨'을 맛볼 뿐이요, 빙세계의 생활을 보내다가 우연히 적도의 난류를만나서 그만 융해되고 말았다. 만인의 조소 중에도 그의 묘전(墓前)에 열루(熱淚)를 뿌린 자 수인이 있더라. 준원도 무론 그중에 하나이었다.

겨울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살을 베는 찬바람이 청산 연병장의 먼지를 몰아다가 올올한 묘비를 때릴 제 마포연대 병영에서는 석반(夕飯) 나팔이 운다.

혼자 십여 년 사귀어오던 광호의 묘전에 섰던 준원은,

"에그 춥다."

하고 몸을 떨었다. 광호의 목패(木牌)에는,

'빙세계에 나서 빙세계에 살다가 빙세계에 죽은 尹光浩之墓.'

라고 준원이 손수 쓰고 그 곁에,

'눈이 뿌리고
바람이 차구나
발가벗은 너를
안아줄 이 없어
안아줄 이를 찾아
영원히 침묵에 들도다.'

하였다. P는 남자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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