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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을 나와서/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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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뒷문으로 마주치는 시원한 바람에 노라는 누운 채 잠이 들었다가 석양때에 깨어났다. 혜경이는 어느 겨를에 살며시 가버리고 없다.

여름날의 석양은 고요하다. 몇 집 건너서 값 헐한 레코드 소리가 새 졸음이 오게 감감히 들리어온다.

좁다란 뜰에 장독대가 있고 그 좁은 옆을 비집고 조그마한 화단이 있다.

화단에는 백일홍이 한창 어우러졌고, 도라지는 망울을 맺 고 있다. 국화 화분이 두어 개나 장독대로 올려놓여 있다.

모든 것이 살림 차림새가 오밀조밀하여 이 집안 사람들의 마음의 여류를 보이는 것 같다.

남식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짓는지 가끔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드린다.

조금 있다가 대문간에서 저벅저벅 사람 걸어 들어오는 소 리와 동시에 어머니.

하고 어리광 섞여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제본소 에 다니는 남식이의 동생 남수가 돌아온 것이다. 남수라는 이름까지도 노라는 안다.

오냐, 인제 오니?

어머니가 대답하는 소리다. 노라는 남의 인자스러운 어머 니와 딸을 보니 갑자기 시골 어머니 생각이 불현듯이 난다.

저녁 멀었수?

좀 멀었다.

흐응, 배고파!

오냐, 배고프겠다. 조곰만 참어라.

참 어머니, 저게 웬 구두야? 아! 저 언니가…… 온다든……

그는 비로소 노라가 벗어놓은 구두를 발견한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컸다.

쉬, 이년! 그렇게 떠들지 마라. 손님이 주무신다.

자박자박 소리가 나더니 그가 앞문 앞으로 와서 꺄웃이 굽 어다보다가 일어나 앉은 노라와 마주쳤다.

무렴해서 혀를 날름하고 고개를 숙여버린다.

들어오우.

노라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네가 그예 손님 잠을 깨놓았구나!

아니예요. 발써 잠이 깨었읍니다…… 들어와요, 응.

들어가서 인사나 여쭈어라.

남수는 들어와서 한편 구석에 어리고 앉는다. 모습은 남식 이같이 어머니를 닮았으나 그들보다는 영악하게 생기었다.

그러나 안색은 좋지 아니하였다.

편히 앉어요. 더웁지요?

갠찮아야요.

며시에 갔다 며시에 돌아오우?

일곱시에 갔다가 다섯시에 파해요.

아이구! 퍽 고단하겠수? 어느 인쇄손데?

고려인쇄소예요…… 관촐동 있는.

여자들도 많수?

그럼요. 사십 명이나 되는데.

모다 처녀들인가 아니요. 어머니 같은 이두 있는데.

어떻게 해야 들어가나? 일이 까다럽소?

아니요. 퍽 쉬어요. 기계에서 박어 올려온 것을 접는데 아 주 쉬어요.

우리 같은 사람도 가서 허면 되나?

아이그 참.

남수는 노라가 농담을 하는 줄 알고 웃는다. 그러나 노라 는 결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다.

나 거짓말 아니우. 정말이야…… 나도 좀 들어갔으면 좋겠 어." "정말 그러세요? 나 그럼 주임더러 이야기해 보아요?

정말…… 좀 해봐요.

그렇지만 되야도 곧은 안될 거야요.

응, 그래도 좋아…… 이야기해 봐요, 응.

남식 어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고 와서 굽어다본다.

원! 애들더러 해봐요가 무엇이유? 해라하지…… 저년은 그 냥 듣고있어! 너도 언니라고 그래, 응. 네 성도 언니라고 그 러니.

아이구! 안 그러면 어떤가요. 아무래도 좋지요.

노라는 사양은 하였으나 세세한 데까지 더구나 오는 첫날 부터 이렇게 알뜰히 맘 써주는 것이 기뻤다.

그리하여 목전에 크나큰 걱정이 닥쳐는 있으나 그새까지의 정원네와 지내던 서먹서먹하고 둥둥 뜬 생활보다는 안존하 고 감칠성 있게 정이 끌리었다.

저녁 먹을 때에 남식이도 왔다. 그는 오늘이 번날이지만 노라가 처음 옮겨오고 해서 잠시 다니러 온 것이다.

넷이 둘러앉아 남식 어머니가 솜씨껏 장만한 저녁을 먹고 나서 남식이는 바로 병원으로 돌아가고 노라는 남수를 데리 고 근처 약국에 가서 지네 말린 것을 사왔다.

병원에 있을 때에 같이 있던 신장염 앓는 부인도 그런 말 을 했고, 구가도 그랬고, 오늘 남식 어머니도 역시 늑막염- 내종-에는 닭에다가 지네를 넣어 삶아먹으면 씻은 듯이 낫 는다고 하여 시험삼아 먹어보려고 한 것이다.

닭은 될 수 있는 대로 묵은닭이 좋대서 이튿날 남식 어머 니가 일부러 장에까지 가서 닭을 사서는 아주 말쑥하게 잡 아까지 가지고 왔다.

달여 가지고 먹으려니까 그 흉허게 생긴 지네가 방금 입으 로 기어들어오는 것 같이 질리기는 하였으나 금계랍을 맨으 로 먹는 셈 치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 뒤로 사흘에 한 마리씩 지네를 넣어서 삶은 닭물을 계 속하여 먹은지 보름이 되었다. 이 보름 후에 노라는 기적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

그것은 병이 병원에 삼 주일이나 누워 있는 동안에 나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은 때문이다.

효과는 물론 그 약에 있다고 믿었다.

혜경이 같은 사람은 당초부터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노라가 그처럼 병이 급속도로 회복되는 것을 보고는 두말 더 아니하고 기뻐만 하였다.

인제는 병중에 있던 증세가 거진 다 없어졌다. 퇴원할 때 까지도 몸을 조금만 무리하거나 애를 쓰면 녕리 오르고 옆 구리가 결리고 하던 것이 아주 없은 듯이 개어버렸다. 구미 도 훨씬 당기고 얼굴에 화색도 돌았다.

인제는 몸도 이만큼 성하게 되었으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다.

더구나 그동안 절약해 쓰느라고 하기는 하였지만 이십 원 돈에서 십 원을 우선 주인에게 주었고 나머지가 십 원이었 었는데 약을 먹느라고 반이 없어졌다.

우 원이 수중에 남아 있다. 이 오 원을 손에 들고 바라볼 때에 노라는 다뿍 배 주린 사람이 밑바닥에 한 숟갈쯤 남아 있는 밥그릇을 대한 때같은 시장하고 한심함을 느꼈다.

시험삼아 남수더러 가끔 물어보기는 하나 그것을 믿고 천 연세월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되기만 한다면 처음 에라도 눈치빠르게 잘만 서두르면 한달에 이십원은 받을수 없다니까 일이 수나로운 깐으로 보아 우선 괜찮겠지만 미덥 지 아니한 것을 믿고만 있을때가 아니다.

혜경이도 무한 애를 쓰는 눈치다.

그는 어디 사립보통학교 교원 자리를 얻어보든지, 그렇잖 으면 은행이나 가정교사 자리를 물색하는 모양기나 그런 것 이 곧잘 걸리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가정교사는 노라가 지금보다도 더 궁하여지면 모르 지만 지금 당장은 필운도으이 일을 생각하여 그다지 내키지 아니하였다.

구월달로 들어서서도 열흘이 초조한 중에 지나갔다.

노라는 아침부터 침울하여 앉았는데 밧켓을 든 여인 하나 가 화장품 사시요.

하고 들어선다.

화장품이야 그런 사람의 것이 아니라도 사려면 상점에 좋 은 것이 많지만 노라는 비누 한 개를 사고 이런 이야기 저 런 이야기 묻고 나서 그를 돌려보낸 뒤에 이 날 온종일 궁 리에 골몰하고 밤에도 편히 잠을 자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는 일찍이 쓰던 손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서울거리에 화장품 행상하는 여자가 한 사람 더 늘었다.

얼굴이 갸름한 게 해맑아 신경적이고 날씬한 코가 준수한 게 여왕이 노블한 때묻지 아니한 여인이다. 옷이 비록 값 헐한 감이요, 얼머얼멍한 가제 양말에 운동화를 신었으나 어딘지 범키 어려운 용모이면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노라다.

돈 오원을 가지고 어제 만난 그 여자에게 배운 대로 화장 품 제조소에 가서 다 팔면 십 원어치의 정가가 붙은 물건을 산 것이다. 이것을 모조리 팔기만 하면 동갑장사다.

노라는 손가방에 물건을 넣어가지고 도가집 문을 나설 때 발길이 저절로 멈추어졌다.

직업은 신성하다.

발길을 멈추고 서서 차마 거리로 나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 을 노라는 이렇게 격려하였다. 아니 격려라는 것보다 속이 었다.

그는 부끄러웠다. 그리고 창피하였다.

다른 사정은 다 젖혀놓고 변호사 현석준의 안해요, 현재는 동양은행의 지배인 현석준의 역시 안해이었던 임노라가 화 장품 장수로 나섰다는 것이 남이 부끄러웠다. 이 부끄러움 을 속이려고 전에 누구에게선지 얻어들은 직업은 신성하다.

를 속으로 외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째서 직업이 신성한지 모른다. 생각에 먹기 위하여 직업을 가지는 것이 신성하고 아니하고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남이 한 말이니 그대로 둘러대자는 것이다.

노라는 길로 나섰다. 앞에서 오는 사람, 뒤로부터 오는 사 람, 모두가 아는 사람인 것만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급 기야 대하고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그 사람들이 모두 화장품 장수!

하고 입을 삐죽거리는 것 같다.

어디 이마에다 화장품 장수라고 써붙인 바 아니요, 단지 손가방을 들고 체조 시간에 나선 시골 보통학교의 여훈도처 럼 가제양말에 운동화를 신었을 뿐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화 장품 장수로 알아채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러나 노라는 그 사람들 중에 가령 노라를 화장품 장수로 알았다면 그것은 화장품 장수 치고는 드문 얼굴이라는 생각 으로 치어다보는 줄은 알지 못하였다.

노라는 혜경이를 찾아갈까말까 하고 망설였다.

설마 혜경이에게도 물건을 팔아 달라고 찾아간 것이 아닌 줄은 저편에서 알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다. 아주 영락이 된 것 가아서 부끄럽다. 더구나 혜경이는 전날에 도리어 이편 에서 뒤를 거들어 주려던 사람이요, 구가는 어쨌거나 현의 수하로 있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처지가 아주 바뀌었다. 그러니까 더구 나 창피하다.

그러나 한 가지 혜경이에게 대한 우정-미리서 상의도 아니 하고 이런 일을 시작했다는 미안할 말도 하고, 또 이렇게 모든 것을 초탈하고 나설 수가 있다는 기운도 자랑할 겸 그 의 발은 혜경이의 집으로 향하였다.

날은 따갑게 쬐고 몸에서는 땀이 사뭇 흐른다. 손에 든 것 은 차츰차츰 무거워진다. 길바 닥에서는 먼지가 부옇게 일 어난다.

노라는 혜경이의 집에 가는 길에 우선 장사를 한번 해볼 생각이 났다.

그래서 물건 판 돈을 혜경이 앞에 내놓고 한바탕 웃을 양 으로- 큰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주택이 들어선 뒷골목으로 들어섰 다.

성명 쓴 문패가 붙고 번지가 붙었다. 들어갈까? 말까?

들어갔다가 아니 산다고나 하면 어떻게 하나? 더구나 연갑 의 젊은 여자나 있으면 더욱 창피하지……

그러나 어때? 직업은 신성한데..... 병신 글 가르쳐 주다가 창피본 것보다 낫지..... 형식만 남편이요 사랑 없는 동거를 하면서 산 인형 노릇을 하고 얻어먹는 것 보다 낫지……

노라는 이렇게 스스로 용기를 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마침내 그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요 다음 집으로나 가보지.;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고는 그 다음 집 문앞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역시 못들어가고 다시 그 다음 집으로……

노라는 미룸미룸 대여섯집이나 미루어가다가 필경 한 집 문앞에 가서는 눈을 딱 감고 지친 대문을 밀었다.

중문 안으로 들어서니 얼굴이 확확 단다.

마루에 주인 같은 사나이가 앉았다가 이상한 듯이 눈으로 말을 묻는다. 손가방이랄지 차림새는 무슨 행상인데 얼굴이 그렇지 아니하다는 눈치다.

화장품 사십시요.

노라는 모기만하게 겨우 소리를 내엇다.

안 사우.

사내는 흥 하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린 다.

노라는 얼굴에 모닥불을 끼얹는 것같이 무렴해서 달아나듯 이 그 집을 나왔다.

한숨이 후 내쉬어진다.

그는 더 다른 집에 들르기를 작파하고 바로 혜경이집으로 갔다 혜경이가 혹시 자기를 찾아가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전 방에 있는 구가의 눈을 멀리 피하여 들어가니 마침 집에 있 다.

그게 무어유?

혜경이는 노라의 가방을 보고 첫인사가 이 말이다.

그러구 신발은 또 웬일이야? 옷이랑……

노라는 웃으면서 마루에 펄씬 걸터 앉았다. 혜경이도 노라 의 가방을 빼앗듯 채어서 메글 들어본다.

여기 무엇 들었수?

알어내면 용하다지.

무얼까?

혜경이는 가방을 들어보고 흔들어서 다그락다그락하는 소 리에 고개도 갸웃거리고 그러고 노라의 차림새를 마슬러보 고 하다가 가방 뚜껑을 열어젖힌다.

그는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듯이 싱그레 웃으며 가방안에 가득 찬 크림, 분, 비누 등속과 노라의 얼굴을 번갈아 치어 다본다.

이게 무슨 것이유? 아직 채 몸두 성하지 못하면서……

괜찮아…… 그것찜 가지구 돌아다니는데 어쩔라구?

괜찮언 게 무어야. 그러구 또 이게 셈이 닿나? 괜히 사람 만 밑지지.

이판에 사람 밑지고 아니하고가 어데 있수?

이 소리가 혜경이에게는 처량한 비명으로 들리었다.

그다지도 교기가 많고 결벽이 많던 노라가 지금 와서는 화 장품 행상이 되어가지고 사람 밑지고 아니 밑지는 것을 돌 아보지 아니하게 된 것이 혜경이에게는 동무 하나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같이 서운하였다.

그는 노라가 병원에서 나올 때에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오려 다가 모하고 달리 무슨 도리를 차리어 주리라고 생각한 것 은 첫째 될 수 있으면 하루바삐 일자리를 얻어 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남편과 한가지로 애를 애를 쓰기는 하였으나 아 직도 까마아득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남식 어머니를 조용히 만나 노라가 그 렇지 아니한 집안의 부인인데 잠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 렇게 되었으나 결코 맥맥한 사람이 아니니 병조리 같은 것 도 잘 보아주고 만일 밥값이 밀리거나 하면 그것을 자기가 부담을 하겠노라고 당부를 하여 두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과 말뿐이지 다달이 용처를 남편에게서 정해놓고 타서 쓰는 터이니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런 때문에 화장품 가방을 들고 거리로 나선 노라의 그림 자가 눈에 걸리고 안타까왔으나 덮어놓고 말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노라는 아까 무렴 보던 것은 속에서 사라지고 오늘이 개시 니 어떻게 해서든지 한 가지 팔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국동ㅇ로돌리어 학생 하숙인 듯한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먼저 단련을 받은 덕인지 주저하지 아니하고 쑥 들어섰다.

마당에는 학교에 갔다 온 중학생이 두어 사람 씨꺼먼 웃통 을 벗어젖히고 등멱들을 한다.

화장품 사십시요.

노라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었다. 가슴이 공연히 두근거린 다.

화장품 사서 바르면 연애하나요?

중학생 하난가 빈들빈들 웃으면서 조롱을 건낸다. 그러자 건넌방에 있던 전문학교 학생ㅇㄴ 듯 싶은 젊은이가 노라를 유심히 바라다보고 있는 것을 노라는 비로소 알았다.

네? 화장품을 사서 바르면 연애해요?

그 중학생은 정말 조롱거리가 생긴 줄 알고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섰는 노라를 조른다.

야 이 자식아, 같잖게 네 따우가 연애는 무슨 연애야?

다른 한 중학생이 놈삼아 욕을 한다.

가만 있거라 이 자식아…… 연애한다면 내 크림 한 병 사 겠다.

이 자식아, 호떡도 못 사먹어서 쩔쩔매는 자식이 무슨 돈 으로 크림을 사니?

외상으로 사지……네, 외상도 주지요?

노라는 괜히 서서 희학질만 받기가 창피하여 도로 나오고 는 싶었으나 장사를 하는 터에 속이 옹졸한 것 같아서 얼굴 먼 붉히고 그대로 참았다.

거 뭘 그렇게 농담을 해? 남의 점잖언 이를 데리고…….

이때까지 노라를 뚫어져라고 보고 있던 전문학교 학생이 아주 점잖게 나무란다.

향수 있읍니까?

보매 그다지 상냥한 얼굴도 아닌데 상냥한 소리로 묻는다.

향수는 없었다.

없읍니다.

네…… 그러면 후께도리는 있읍니까?

네.

이만큼 되었으니 항용 장사 같으면 벌써 그의 앞에 달려가 서 물건을 내어 놓고 한바탕 선전 문구를 늘어 놓았을 텐데 노라는 그것을 못하고 말뚝같이 서서 있기만 한다. 저편에 서는 그것이 더욱 뜻에 드는 모양이다.

좀 보여주시까요?

네.

노라는 비로소 마당을 가로질러 건넌방 마루 앞으로 갔다.

가방을 열려니까 손이 떨린다. 겨우 후께도리 한 병만을 꺼 내 놓았다.

그 학생은 집어 들고 레테르를 읽어보고 흔들어보고 비춰 보고 한다.

근화(槿花)화장품회사 것이군요? 이거 신용할 수가 있어야 지…… 잘듣나요?

네. 그러고말고요. 참 좋습니다.

이렇게 침이 마르도록 물건을 자랑해야 할 것이나 노라는 그 말이 나오지를 아니한다.

네.

그저 이렇게 대답할 뿐이다.

얼마예요?

오십 전입니다.

그는 두말 아니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오십 전 은전 한푼을 꺼내다 주면서 하는 말이다.

이담에도 또 오십시요. 좋은 향수 있거든 가지고 오세요.

네.

고맙습니다 한마디 없이 노라는 그 집을 나섰다. 덥기도 하려니와 날이 더운 분수 이상으로 땀이 흘렀다.

손에 쥐인 오십 전짜리 은전의 촉감이 가슴에까지 울리어 온다. 그는 바스라져라 꽉 쥐어보았다.

한번 팔아보니 맛이 들어서 노라는 몇 집을 더 들러보았 다.

그러나 모조리 거절을 당하였다.

노라는 집으로 돌아가서 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남식 어머니 앞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다 지금까지 손에 쥐 고 다니던 오십 전 은전을 올려놓았다.

아주머니, 나 돈 벌었어요.

더운데 어데를 갔다 오우?…… 돈을 벌다니?

그는 바느질 하던 손을 멈추고 가방위에 놓인 돈과 노라를 번갈아 본다.

돈 벌었어요, 오십 전…… 장사했어요.

장사?…… 그새 나가서 무슨 장사를 허우?

노라는 가방을 열어 보였다. 남식 어머니는 놀라 입을 벌 린 채 노라를 바라다본다. 혜경이에게서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 어쩌면……

왜 어때서요?

아니 글쎄…… 몸이 채 성하지 못한데……

남식 어머니는 이렇게 말을 돌리어 버렸다.

그날 저녁에 남식이가 집에 왔다가 노라가 화장품 행상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깡종 뛰었다.

저녁에 노라는 자리에 누워서 큰 공상을 그리어 보았다.

일 원어치를 팔면 오십전이 남는다. 그러니까 잘만 재빨리 서둘러서 매일 오원어치씩만 판다면 하루의 이익이 이원 오 십전, 한달이면 칠십오원이다. 그 중에서 이십오 원만 쓸 요 량을 하고 오십 원씩 저금을 한다면 일 년이면 육백 원이 다.

삼 년만 하면 이천 원은 된다. 이천 원, 이천 원…… 이천 원이면 시골서 어머니를 모셔다가 혜경이네처럼 조그마한 잡화점이라도 내고 편안히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다.

금세 삼 년 세월이 지나가고 이천 원을 수중에 쥐고 선 자 기의 환영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옳다 되었다! 현이 아무리 버티더라도 칼이라도 품고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셋을 다 못 데려오면 둘만이라도 데 려다가 기르고 공부를 시키고.

그렇게 하면 그동안 아이들 내버리고 나온 어미의 죄도 속 량할 수가 있고, 그러나 그렇 것보다도 눈앞에 어린것들을 두고 같이 지내니 좋고.

어머니도 처음은 현과의 파탈을 알면 노여워하시겠지만 필 경 외손자들과 같이 살게 되면 마음이 풀려서 좋아할 것이 고.

그러고 다시 장사가 잘되어서 돈을 더 많이 모으게 되면 현이 보아란 듯이 큰 집을 지어놓고 거드럭거리고 살고.

이러한 장래일을 공상하면서 노라는 빙그레 웃는 채 고단 한 잠이 들었다. 꿈에 그는 생시에 공상하던 대로 잘되어 잘 살아보았다.

이튿날은 기운을 떨쳐 아침 일찍이 가방을 들고 나섰다.

삼 년 동안에 이천 원을 벌겠다는 욕심이 그로 하여금 용기 를 내게 하고 넉살을 부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라의 이천 원짜리 꿈을 짓밟는다. 스무 집 서른 집을 들러야 크림 한 병 비누 한 개 팔기가 어렵 다. 그중에는 물건을 실컷 흥정을 해 놓고 외상을 놓고 가 라다가 도로 내놓는 사람---아낙네들---이 많다.

하루 종일 점심도 굶고 돌아다닌 것이 비누 세 개와 크림 두 병이다.

도통 이익을 따지어 보니 삼십오 전이다.

노라는 이천 원에 대한 환멸의 비애를 느끼면서 허덕허덕 집으로 돌아왔다.

사흘째 되는 날이다. 오늘은 설마 좀더 팔리겠지---아니 어제 못 판 것가지 보충해서 더 많이 팔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성적은 역시 일반이다. 오후 네시까지 헤매었으나 팔리어 수중에 들어온 돈은 도통 일 원 이삼십 전밖에는 아 니된다.

시장도 하고 다리도 아프다. 집으로 그냥 돌아오려고 관철 동 뒷골목을 지나다가 웬 혼란스럽게 차린 단발한 여자 하 나가 들어가는 집을 뒤따라 들어갔다. 아무리 해도 남자보 다는 여자가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흘동안의 경험만 가 지고도 환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여자의 뒤를 따라드러가니 그 집안식구는 아니고 손님 인 듯한데 건넌방으로 들어가서 다짜고짜로 옷을 활활 벗어 내던지고 벌거숭이 됨직한 몸뚱이를 방바닥에다 내던진다.

그가 카페의 여급인 것은 노라는 나중에야 알았다.

화장품 사십시요.

노라는 건넌방 문 앞으로 가서 이렇게 외었다. 인제는 기 계적으로 외어진다.

안 사요.

그는 누운 채 노라를 유심히 바라다본다.

노라는 다리가 아파 마루에 잠깐 걸터앉았다.

어찌 화장품 장사를 하시요?

심상찮게 바라보고 있던 그 여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노라 에게로 가까이 와서 묻는다.

왜? 하면 못쓰나요?

아니, 못쓴다는 게 아니라 이런 장사를 하실 인 것 같지 아니해서 말이어요.

노라는 웃고 아무말도 아니하였다.

나 있는 데로 와보시겠어요?

어덴 데요?

카페에요.

네!

호호호호…… 왜 그렇게 놀래세요? 괜히 남들은 웨이트레 스를 임바이나 화냥년으로 알구 그리지만 실상은 저만 싯까 리하면 아모 일도 없답니다…… 수입이야 화장품 팔러 다니 는 것 같을 거에요!…… 당신 같은이가 오기만 하면 아주 썩 벌이가 졸 건데…… 타락하고 아니하기야 제게 달린 걸……

카페라는 것이 남자들의 환락경이요, 그곳이 있는 웨이트 레스들이 타락된 여자들이라는 것을 노라는 막연하게 알고 있을 따름이었었다. 마치 그것은 노라에게 딴 세상과 같이 인연이 멀었다. 따라서 그곳이 어떠한 곳이라는 것을 생각 하여 보가나 알아볼 일도 없었던 것이다.l "월급을 주나요?

노라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 여자가 권하는 대로 카페에 를 가겠다는 생각은 아니나 알고는 싶었다.

아니요. 손님이 짓뿌를 주어요…… 잘허면 하룻밤에 두 며 십 원씩 생기는 때가 있는데요…… 그런 건 예외라구 허더 라두 인물만 좋구 서비스가 우바이해서 인기만 있으면 하룻 바에 평균 십 원은 돼요. 그것두 요새같이 후게이끼허니까 십 원이지 세월이 좋으면 이십 원 평균은 되는걸……

이 말에는 노라도 구미가 당기었다.

들어가자면 시험을 보나요?

그 여자는 하하 하고 웃었다. 노라는 무렴해서 얼굴이 붉 어졌다.

시험이 다 무어유! 그저 아무라두 되는데 가서 하기는 무얼 하나요?

손님하구 이야기허구 술 따러 주구 그것뿐이지요.

그것쯤이면 아무것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타 락 여부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그렇게 좋은 벌이가 있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카페가 나쁘고 여급이 나쁘다고 하는가?

전수히 나쁘지 아니한 것을 터무니없이 나쁘다고 할 리는 없는 것이고, 어쨌거나 여급인 장자 말만 신용할 수가 없으 니 딴데 알아보리라고 생각하고 그 집을 나왔다.---날새 다 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그 뒤 노라의 머리는 여전히 매일 오륙십 전의 이익 외에 는 더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육십 전이면 한 달 평균 십팔 원이다.

십팔 원이면 밥값 십오 원을 제하고 삼 원이 남는다.

삼 원을 가지고 옷을 해 입어야 하고 신발을 사 신어야 하 고 그리고 약도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아니 될 말이다. 이천 원의 꿈은커녕 당장 살아갈 수가 없는 것 이다.

더구나 또 한가지 어려운 것은 남수가 여러 번째나 월급을 받아오지 못한 것이다.

전에는 인쇄소에서 그믐날과 보름날---한 달에 두 번씩 회계를 해주었는데, 지난 유월부터 통히 월급을 받지 못하 였다는 것을 노라는 요새와서야 비로소 알았다.

남수의 말을 들으면 인쇄소가 경영이 곤란하여 어느 은행 에 빚을 많이 지고 어쩌면 파산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주인집이 넉넉하고 아니하고 간에 다달이 밥값은 또박또박 내야 할 것이지만, 그래도 주인과 손님이 둘 다 군색해서는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혹시 밥값이나 밀려서는 큰일이다. ---이런 불안이 늘 머 리를 눌렀다. 동시에 노라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남수를 통 하여 인쇄소에 들어가겠다는 희망을 크게 가졌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따라서 적지 아니하게 절망이 되었다.

생활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커가는 반면 하루 평균 십 원 을 번다는 카페 여급에 대한 유혹이 차차 머리를 들게 되었 다.

노라는 며칠 전 관철동에서 그 여자를 만나 카페와 여급에 대하여 약간 이야기를 듣기는 하였으나 그것쯤의 지식은 백 지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가 있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날로 더하여 갔다.

구월도 보름이 넘었건만 아직도 남은 더위는 싱싱하다.

기계적으로 온종일 화장품 가방을 들고 이집 저집 기웃거 리다가 지친 노라는 따가운 노양을 등지고 광화문 네거리에 서서 망설이었다.

혜경이를 찾아가서 상의도 하여 보고, 또 구가더러 카페에 대한 것을 들어도 보고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말을 낸다면 혜경이가 덮어놓고 말릴 것이요, 없는 말을 만들어서라도 카페나 여급을 나쁘게 말 을 할 것이다.

에라!

이러한 단념도 아니요 결심도 아닌 생각으로 노라는 관철 동으로 방향을 정하고 발길을 옮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