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을 나와서/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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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이는 흥분된 끝에 한 말이나 대번에 뒤가 켕기는 말이 다.

자기의 우정으로 한다면 결코 그리 못할 것이 아니지만, 그의 남편인 구가는 노라에게 대 하여 결코 진심으로의 호 감은 가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노라가 그렇게 하기를 승낙 하고 같이 가서 있는다고 하더라도 오래지 못하여 부처간에 불화가 생길 것이요, 결과는 노라가 다시 나오는 수밖에 없 이 될 것이다. 그러 지금의 혜경이는 그런 것 저런 것 뒷일 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정다운-이 세상에 둘도 없 이 정다운 동무가 타락의 구렁에 빠져 있다는 그 위험을 우 선 임시로 구해야 하겠다는 열정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라가 아무 대답도 없이 묵묵히 있는 것을 보고 혜경이는 초조히 재촉을 한다.

자, 잔말 말구 어서 짐을 꾸려요. 우리 집으루 가서 있 게…… 그리다가 어데 마땅한 벌이자리가 생기면 달리 변통 허더래두……

노라는 고요히, 그러나 힘있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의 외롭고 막막한 품으로는 그러고 싶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혜경이의 우정이 고마운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하다하다 못해서 최후로 카페에까 지 굴러들어갔다가 다시 동무를 등대고 그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혜경이 그가 다정하고 고마운 동무인만큼 더구나 그리 하기가 어려운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어느 모르는 딴 사람이 그처럼 다정하고 고 맙게 굴었다면 그는 섬뻑 받았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한 외에 또 한가지 노라는 모든 일에 정망이 되고 자 포자기가 된 것이다.

혜경이를 따라가 그에게 의탁하고 있은들 무슨 그리 신통 할 것이 있을것이냐? 벌써 여급질을 해먹었으니 처음 생각 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인제는 아무리 마음이 결백하여도 타 락된 계집이란 낙인이 찍히지 아니하였느냐! 기왕 내친 걸 음이니 가지는 게따기 가 보겠다.---그 뒤에야 무엇이 오든 지 상관할 것이 없고.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 것이다.

왜?

혜경이 다가 묻는다.

그렇게까지 헐 필요가 없어.

어째서 그럴 필요가 없단 말이야?

아니 아직 들어갔다면 모르지만 발써 한 달이나 가서 있었 는데 지금 그만둔다구 그 허물이 씻어지나?

누가 지난 이야기를 허잔 말인가? 앞으루 말이지.

괜찮어…… 카페에 가서 있는두가 저마다 다 타락헐래서 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구, 자 일어나요.

혜경이는 일어서서 벽에 걸린 옷도 떼어놓고 이부자리도 만지면서 집을 챙기려 한다.

그러나 노라는 종시 꼼짝도 아니하고 앉아 있을 뿐이다.

정 이러구 앉었을 테야?

혜경이는 짐 챙기던 손을 멈추고 돌아서서 따진다.

혜경이 정만은 고맙소만 한동안 내대루 두어두어요.

그대 다시 카페에를 나가겠단 말이지?

응.

응이라께! 아니 그래 카페에 가서 한 달쯤 있더니 맘까지 변했수?

변했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설익은 고기같이 설뚱거리며 고집을 쓰는 노라가 혜경이는 쥐어뜯고 싶게 미웠다. 그는 몇 번을 입술을 물었 다 놓았다 하다가다시 한번 눅여서 달랜다.

이거 보아요, 노라. 내 정을 보아서라두 그러지 말구 우리 집으로 가자구…… 글쎄 노라를 그렇게 두어두구 내가 맘이 아니 뇌여서 어떻게 살란 말이냐?

별루 걱정할 것 없어…… 내 좀더 있어 보다가 정 못견디 겠으면 찾어가께.

안 돼. 지금 곧 가요.

지금은 안돼.

엑 모르겠다.

혜경이는 손에 들었던 옷가지를 홱 내던지고 쿵쿵 마루로 걸어나간다.

생전 서루 맘나지 맙시다.

그는 이렇게 해던지고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노라에게서 한 가지가 또 없어졌다. 가장 정다운 동무 혜 경이가 영영 가고 만 것이다.

혜경이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노라는 그만 터져나오는 눈물에 그대로 엎드러져 울었다.

우노라니 다시 이 설움 저 설움이 복받쳐올라 때가 가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

남수 어머니와 또 늦게 돌아온 남수는 드나들이로 들어와 서 위로를 하여주나 본시 우는 사람의 속을 모르고 하는 위 로니 위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울다가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울고 아무리 하여도 눈으로 나오는 것은 눈물뿐이요, 입으로는 한숨밖에 나오지 아니한 다.

열시나 되어서 화장도 아니한 채 옷을 걷어 입고 카페로 나왔다.

노라가 울어서 눈이 부은 것쯤은 웃는 얼굴보다 더 환히 보는 것이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한다.

누구 낯익은 손님이 왔으면 가 앉아서 술---그동안 조금 맛을 들인 술이라도 얻어먹고 울분이나 풀려니 생각하고 위 아래층을 둘러보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이층 층계에서 마침 에미꼬를 만났다.

또 울었구려?

울 때는 울어야지…… 그런데 에미꼬, 누구 신문기자 아는 사람 있어?

노라는 병택이가 언제 경성으로 압송이 되어 오는가 알아 보고 싶었다.

신문기자? 글쎄 더러 있지만…… 왜 그래?

물어볼 말이 있어서.

흥, 설운 사정이나 신문에 내달랠 테가?

미친 소리 말구 어서 누구 하나 대주어요.

글쎄, 가만 있자.

에미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곧 도로 올라와서 노라의 손목을 잡아끈다.

끄는 e로 끌려가서 보니 젊은이 두 사람이 있는 데다가 붙 잡아 앉힌다.

자, 이 선생님 두 분은 --일보사 기자시구, 이 사람은 카 페 사탄의 꾸인(女王) 유리꼬상…… 소개합니다.

에미꼬가 이 연극 같은 소개를 하니까 두 사람은 역시 연 극조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어민다.

아, 사탄의 여왕.

인도 여왕이라구두 허신다지요?

앉으시요.

지금은 인도 미인 아니야.

에미꼬가 반박을 한다.

쳤에는 볕이 글은 것이 아니 벗겨져서 그랬지만 지금은 얼 굴이 저렇게 하얀데…… 그런데 선생님, 이 유리짱이 신문 사 계신 이한테 여쭈어볼 말씀이 있대요.

응, 무어요?

그 중 키 작은 사람이 선선하게 묻는다.

저, 오병택이라는 사람이 신의주에서 잽혔다지요?

노라는 좀 거북하나 이렇게 물었다.

오병택이? 오병택이?

이렇게 더듬으면서 그의 동행인 좀 뚱뚱한 사람을 건너다 본다.

오병택이가 누구야?

있어 있어. ---재건사건으루 피해 가다가 신의주서 잽혔다 구 우리 신문에두 석간에 났지.

응 응, 그래그래…… 그런데 왜?

키 작은 사람은 다시 노라더러 묻는다.

애인이요? 그렇다면 이거 켕기는걸……

아니여요. 한고향인데 잽혔다길래 정말인가 허구……

응, 그렇다면 모르거니와.

서울로 압송헌다는데 언제 오나요?

글세 그건 사회부 기자의 영역이 돼서…… 정 알구 싶다면 지금이라두 알어다 줄 것이구……

미안합니다만 좀 알어보아 주세요.

그러지.

그는 선선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사회부에 사람 있겠지?

있겠지.

이렇게 자기네끼리 문답을 하고는 한편 구석에 있는 전화 실을 향하여 아장아장 걸어간다.

그런 지 한참 만에 키 작은 신문기자는 방글방글 웃으면서 전화실에서 돌아와 앉는다.

한턱 해야겠는걸.

왜요? 언제 온대요?

한턱 해야 해.

허지요.

그럼…… 내일 밤 아홉시 이십오분차로 경성역 도착.

노라는 반가운 것을 숨기고 천연스럽게 고마운 치사를 하 였다.

한턱 헌다는 것을 인제 해야지?

키 작은 사람은 연해 샐샐거린다.

허지요. 무얼 낼까요?

글쎄... 무엇이 좋을까?

술을 한턱 낼까요?

글세 술이야 우리가 사먹으러 왔으니까 그럴 것은 없구, 또 여왕에게 손해를 끼쳐 드려서는 미안헌 일이구 하니, 여 보, 여왕님의 키스나 한턱, 응?

아이 망칙해라. 키스가 무슨 턱이 됩니까?

되건 아니 되건 내기만 했으면 됐지.

몰라요.

아니 이런 법이 있나? 턱을 내기로 해놓구 인제는 안 내겠 대?

그러면 여보 유리꼬상.

뚱뚱한 신문기자가 중간을 타고 나선다.

턱 대신 이야기나 좀 헙시다.

네.

오병택이 소식을 어찌 그렇게 자세허게 물으시우?

키 작은 신문기자와는 달라 그 사람은 묵직하기에 말대꾸 가 조심이 된다.

한고향 사람이라 그래요.

한고향이면 한고향이지 그렇게 압송되는 것까지 알려구 애 쓰는 것이 좀 달러 보이는걸……

그에게 속을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노라는 얼굴이 붉어지 려 한다.

아니에요. 별일은 없구 그저 궁금해서……

궁금뿐이 아닌 모양인데…… 저거 봐, 얼굴이 저렇게 붉어 지는걸……

한참 시달림을 받는 판에 마침 번이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김이 와서 혼자 오꼼 앉아 있었다.

노라는 뜨윽하였다.

결혼하자고 조르는 것을 후려뗀 뒤에 몇 번 만나고는 그 뒤 십여 일이나 만나지를 못하였다.

영 단념을 한 줄 알았더니 다시 찾아와서는 흘끔함 눈으로 치어다고보 앉았는 것이 또 한바탕 시달림을 받을 것만 같 았다.

병택이의 압송되는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나 김한테 시달림 받을일을 생각하니 부질없이 나왔다 싶어 후회도 났 다.

잘 있었소?

앞에 마주 앉는 노라를 보고 적의를 머그믄 것도 아니요 노한 것도 아니건만 이상스럽게 평온치 못한 눈으로 바라보 는 것이다.

네. 안녕허셨으요? 한동안 못 뵈었읍니다…… 웬일이세요?

웬일이라니? 내가 못 올 데를 왔단 말이요?

어쩌면! 왜 그렇게 트집을 잡으려 드서요…… 한동안 아니 오셨길래 왜 아니 오셨느냐는 말씀인데……

둘러댈 심은 용허우……. 그러나 염려 마시우. 보기 싫은 놈 꼴을 인제는 아니 보게 되었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어데 가세요?

그다지 놀라운 소식도 아니건만 말로라도 이렇게 인사를 아니할 수가 없다.

네. 멀리 가우…… 억만 년 가기만 허구 오지는 아니하는 데로 가겠소.

호호……. 그런 데가 어데 있어요?

있으니까 간다지…… 내가 거짓말인 줄 아우? 못 미덥거든 인제 보구려…… 자, 인젠 작별이요. 그렇지만 내가 아모리 가는 마당에 당신을 원망허지 아니하자면서두 아니헐 수가 없소. 나는 가서 당신을 저주허는 귀신이 되겠소.

노라는 몸서리가 치었다.

김의 그 무덤에서 도로 나온 것 같은 형용이며 방금 불길 이 튀어나올듯한 눈의 이상한 광채.- 전율을 느끼며 멍하니 앉았는데 어느 겨를에 김은 종이봉 지에 싼 가루 약을 따라놓은 맥주잔에 털어 부어가지고는 들이켜고 있다.

노라는 엉겁결에 김의 입에 닿은 유리잔을 손으로 쳤다.

잔이 탁자에 떨어지며 술이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김은 접 치는 듯이 자리에 쓰러진다.

여급들이 와 몰려오고, 처음에는 술주정으로 알았던 손님 과 카운터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남자들이 울력으로 김을 떼메어다가 죠뀨베아에 뉘는 한편 의사를 불러오고 김에게는 개숫물을 길어다가 먹이었다.

그러나 독은 조금 입에 대었을 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는 아니하였다.

약이 모르핀인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의사가 왔어도 별로 치료도 하지 아니하였다. 독을 먹을 뻔하였지 먹지는 아니하였으니까.- 총망중에도 둘러보니 아까 아래층에서 만났던 신문기자라 는 사람들도 축에 끼여 구경을 하고 있다.

파출소에서 순사가 달려왔다.

노라는 순사가 김과의 관계를 묻는 대로 그동안 사실을 숨 기지 아니하고 전부 이야기하였다.

무엇보다도 독을 먹으려다 말아 일이 무사하게 되었기 때 문에 별로 말썽은 없이 되었다. 다만 김이 순사를 따라갔을 뿐이다.

여왕님, 횡액을 당했구려?

좀 정신을 가다듬느라고 한편 구석에 앉아 있노라니까 아 까 그 신문기자 두 사람이 앞에 가 버티고 섰다. 키 작은 사람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빈정거리는 말인지 장난하는 말 인지 모르게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횡액은 무슨 횡액이어요?

글쎄 횡액이 아니라면 되려 다행이겠지만…… 거 누구요?

저두 몰라요.

몰라? 잡어떼지 말구려. 어느 미친 녀석이 모르는 여자 앞 에서 자살을 허러 들이쟈 않을 텐데……

그도 그럴듯한 말은 말이다. 그러나 실상 노라는 김이 누 구인 줄을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이 있다면 어느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것과 성이 김가라는 것밖에는 더 알지 못한다.

응? 그렇잖어? 생판에 알지도 못허는 여자 앞에서 실연 자 살을 허러 들지야 않겠지?

키 작은 신문기사는 재우쳐 묻는다.

그렇지만 저는 정말 모르는걸요.

언제부터 알었소?

한 달 가랑 되었나 봐요.

그새 매일 만났소?

아니요. 처음 메칠 동안 다니더니- 아까 순사더러 하든 이 야기 다 들잖어셨어요? 생판에 결혼을 허자구 조릅디다그 려! 그래 약혼한 사람이 있다구 잡어떼었더니 한 열흘 아니 오다가 오늘 저녁에 글쎄……

그래서……

자기는 영영 가기만 허구 오지는 아니허는 곳으로 갈 텐데 나를 원망헌다구 그러더니 그랬어요.

승겁다.

뚱뚱한 사람이 픽 웃고 돌아서 버린다.

이름이 무엇인지는 몰르우?

키 작은 사람이 그대로 서서 묻는다.

몰라요.

명함두 아니 받었나?

아니요.

집은 어덴지?

그것두 몰라요.

갑시다. 내일 경찰서 간 사람이 알어보겠지.

뚱뚱한 사람이 동무를 추겨 가지고 가버린다.

노라는 짜증이 나서 견elf 수가 없다. 신수가 궁하면 넘어 져도 코가 깨진다고 저녁때 혜경이와 그러게 갈린 끝에 또 다시 연극 같은 시달림을 받고 나니 누구 한 사람 붙잡고 물어 주고 뜯어 주고 실컷 몸부림을 치고 해서 분풀이를 해 주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 나 지금의 노라에게 는 아무도 그런 만만한 사람이 없다.

차라리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집에 돌아가 잠이나 일찍 자려고 문간으로 나오는데 또 붙잡히고 말았다.

어, 우리 유리꼬상 어데 가나?

이주사가 팔을 벌리고 껴안을 듯이 길을 막는 것이다.

노라는 그만 아득하여 어쩔 줄을 모르면서 직업의식이라 할지 인사는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데 가나?

몸이 좀 고단해서 일쯔 돌아갑니다.

노라는 일부러 괴로운 듯이 이마를 찌푸려 보였다. 그러나 이주사는 그런 것은 상관치 아니하고 팔을 벌린채 덤벼든 다. 그것을 피하려고 노라는 할 수 없이 문안으로 뒷걸음질 을 쳐서 물러 들어섰다.

삼십 분만, 아니 이십 분만, 응. 나 술 두 잔만 부어 주어 요. 이십 분만 응, 이십 분만, 자.

아이구 몸이 괴로워서 죽겠어요. 제발 내일 저녁에 오세요.

어 안될 말……괜히 꾀병을 허느라구…… 응, 애인이 기다 리지?

아니예요. 애인이 다 무업니까?

아니야. 애인은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슬뭇이 잠이 들 었을 때 그옆에 가서 살포시 앉어야 정말 응, 정이 진진헌 법이야…… 자, 자, 올라가……응, 이십 분만…… 술 두잔 만……

아니예요. 저 그러시면 다시 아니 뵙겠읍니다.

헹, 거 무슨 섭섭헌 소리! 그러지 말어. 내가 남의 사랑을 방해허진 아니해..... 자,그러지 말구 응, 유리꼬상, 우리 유 리꼬상.

노라는 할 수 없이 이층으로 끌려 올라갔다.

이주사는 요새 몇 번은 최주사도 아니 데리고 혼자 다니었 다. 이번에도 혼자다. 술은 그전대로 미리서 얼큰히 취하였 다.

유리꼬상, 응. 나는 유리꼬상이 좋아서 죽겠는데…… 이렇 게 사랑을 하는데…… 유리꼬상은 왜 그렇게 쌀쌀해 응, 유 리꼬상.

이주사는 자리에 앉아 자기 옆에 노라를 바싹 다가앉히고 는 손을 주무른다.

제가 어쩌길래 그리세요?

헹 , 말로는…… 입으로는 아주 안 그런 체허면서 속은 속 은 딴청을 대여!

그런 말씀 마시구 어서 술이나 잡수세요. 이십 분이 다 갑 니다.

어 참 그렇지..... 가쿠테루허구 페파민허구.

저는 못 먹습니다.

노라는 술이라도 좀 집어먹었으면 하는 생각- 더구나 한 달 전에 먹어본 페퍼민트에 대한 유혹을 느꼈으나 어쩐지 그 술이 마성을 가진 것 같아 와락 먹히지 아니하였다.

못 먹을 게 어데 있어? 잔말 말구 가져와…… 애인을 만나 자면 한잔 얼클ㄴ 게 더 좋단 말이야.

괜히 애인 애인 그러세요!

허허허허……. 애인이 그러면 없나?

있을 게 어데 있어요!

그렇다면 되려 다행이지. 자, 위선 술 가져와, 아부상 가쿠 테루허구 페파민허구.

노라는 시키는 대로 칵테일과 페퍼민트를 한잔씩 가지고 와서 앉았다.

자, 감빠이.

이주사는 한 손으로는 노라의 손을 쥐고 한 손으로 칵테일 잔을 높이 든다.

노라도 잔을 집어들었다. 하자는 대로 잔을 마주뜨린 후에, 에라 어떠랴 하는 생각으로 죽 들이켰다.

아, 그래야지.

이주사는 빈잔을 내려놓으면서 싱그레 웃는다.

그래야 해.- 그래야만 우리 유리꼬상이란 말이야.

인제는 이십 분이 다 되었읍니다.

실상 그다지 일어서고 싶지는 아니하나 뭉개뭉개 뭉개고 앉았다가 또 무슨 단련이나 받을까봐 그냥 떼쳐버리려는 것 이다.

그러나 이주사는 잡은 손을 끌어앉힌다.

그러지 말어…… 애인도 없다면서 무얼 그래…… 내 오늘 저녁에 긴히 헐 이야기가 있어서 벼르구 온 거야…….

긴한 이야기라니 알조다.

아니예요. 놓아주세요.

노라는 사정을 하였다.

정 가야 하겠나! 그럼 가야지.

그러나 껴안은 허리는 놓아 주려고도 아니한다.

정말 어데가 아픈가?

네.

허, 그렇다면 안됐는걸!

노라는 뿌리치려고 하지만 이주사는 되레 허리를 허리를 끌어안고 덤빈다.

어데가? 머리가 아퍼?

네.

그렇다면 내가 짚어 주지.

이주사는 껴안은 허리를 놓고 머리를 만져본다.

멀 그래! 괜찮구만…… 자, 술이나 한잔 더…… 가쿠테루에 페파민.

아이 저는 더는 못 먹어요.

괜찮어, 두 잔까지는…… 자, 어서어서 가져와.

칵테일과 페퍼민트를 또 한잔씩 마시었다.

술이 술을 청한단 말은 옳은 말이다.

노라는 석 잔째의 페퍼민트를 마시었다.

알콜 기운으로 취한 것이 아니다. 그 속에 섞여 있는 딴 성분으로 해서 정신은 마비가 되 거, 한편으로 야릇하게 흥 분되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물며 난숙한 삼십대의 건강한 여자임에랴.

유리꼬상.

이주사는 수염 까슬거리는 턱을 노라의 볼에 비비면서 허 리를 어루만진다.

네?

술(?)에 취한 여자는 양과 같이 유순하다.

애인이 있어?

애인은 무슨 애인!

정말?

응.

집에 누구누구 있지?

어머니허구.

또?

여동생 둘허구.

여동생들은 무얼 허나?

학교에 다니지요.

살림은 유리꼬상이 버는 것으루 해나가구?

그렇지요.

어, 참 기특허다…… 그래서 카페에를 나왔구려?

어쨌거나 벌어먹구 살려니까……" "돈만 있으면 이런 데 와서 있지 않지?

돈을 두구 어느 미친 년이 이런 데를 와요.

이주사의 손이 어름어름하고 가슴 근처를 만지려고 한다.

노라는 놀라 몸을 빼쳤다.

그것은 정숙하던 인처(人妻)다운 본능도 본능이려니와 그곳 은 한번 만져봄으로써 지금 까지 노라가 나이와 소성을 숨 기던 것이 그만 탄로가 되는 위험 구역이다.

처녀요-법률상의 것이라고만 여기겠지만-나이 스물을 갓 넘었다는 것이 그래도 노라의 인기의 밑천이다. 그런데 아 이를 셋이나 기른 가슴 양편의 부분이 드러나고 보면 그건 망신이다.

노라가 놀라 빼쳐나가는 것을 보고 속을 모르는 이주사는 느것이 숫색시의 본능인가 싶어더욱 황홀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본다.

그래, 아니 만질 테니 와서 앉어…… 술이나 더 가져오구.

많이 취허셨는데?…… 저두 취했어요…… 아이 내가 미쳤 나! 왜 이렇게 술을 먹을까! 참.

이렇게 말하면서 노라는 페퍼민트이ㅡ 포로가 되어 버렸 다.

또 한자, 또 한잔. 그리하여 도통 여섯 잔이나 먹고 난 노 라는 정신이 아주 몽롱하여졌다.

더구나 나중의 석 잔에는 이주사가 자기의 잔에서 그 독한 위스키를 첨작까지 시켰었다.

노라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사탄에 온 뒤 처음으로 노래-유행가를 불렀다. 동무 여급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노 라가 정말 여급이 된 것을 환영하였다.

이주사가 노라의 뒤를 부축하듯이 따라섰다.

이것을 본 여급들은 다시 한번 박수로 환호를 불렀다.

유리꼬상, 어데를 이러구 가는 거야?

이주사는 연해 싱글벙글 웃으며 노라를 부축한다.

집에 집에 집 에 가 야 지.

노라는 혀가 잔뜩 꼬부라졌다.

집에? 그러면 내가 바라다 주지.

택시를 불러 노라를 태우고 그 옆에 앉는 이주사는 운전수 의 귀에 대고 남산장.

이라고 속삭인다.

새벽에 정신을 잃은 채 자동차 운전수에게 안기어 들어와 이내 혼혼히 잠을 자고 있던 노라는 오정이 지나셔야 다시 젖ㅇ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남수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옆에 가 쪼글뜨리 고 앉아있었다.

노라는 목이 타는 것같이 말랐다.

나 물.

남수 어머니는 재치있게옆에 준비해 놓은 밀수 그릇을 들 어 대우준다.

노라는 몸을 반쯤 모로 일으키어 소가 냇물을 들이켜듯이 한 대접의 밀수를 벌컥벌컥 다 마시어 버린다.

인제 정신이 좀 드나?

남수 어머니는 맘 놓이는 한숨을 호 내쉰다.

잠을 잤고 또 찬 밀수를 들이켜고 나니 비로소 정신이 또 렷이 든다.

정시이 들매 희미한 어젯밤의 낯모를 그곳 그 일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으응.

소리를 치고 보지 아니하려는 듯이 노라는 눈을 감는다.

노라에게 남기어진 마지막 것 하나마저 없어지고 만 것이 다. 그것을 가져간 사람은 어젯밤에 노라에게 페퍼민트라는 야릇한 술을 권하던 이주사다.

남수 어머니는 또 야단이 0나나 하고 어둥댄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노라는 다시 눈을 떴다.

괜찮아요……어머니,이렇게 걱정시켜서 미안헙니다.

원 별소리를 다 허네……이렇게 정신을 차렸으니 그것만 다행이지 …….약국에 가서 병론허구 역이라두 한 첩 지어 오께?

약이요?

노라는 쓸쓸하게 웃었다.

그만두세요. 약 먹을 병이 아니랍니다.

그래두 오늘 아침에는 여간 놀란 게 아니라네…… 사람이 다 죽어서 안기어 들어왔으 니!

눈가 안어 들여왔어요?

자동차 허는 사람이.

딴 사람은 ?

없어.

노라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잠잠하였다.

미음 쑤어놓았으니 좀 먹지?

셍각없어요.

그래두 좀 먹어야지 어떡허나!

인제 차차 먹지요.

그러면 어서 잠이나 푹신 자게……아이구 원 하두 놀래서.

남수 어머니는 처네를 두독거려 덮어주고 안방으로 건너간 다.

노라는 눈을 딱 감고 누워서 작년 섣달 그믐날 집을 나오 던 일로부터 죽 돌이켜 생각을 하여보았다.

자꾸만 생각이 흐트러지는 것을 애써 줄거리를 추리면서.- 그리하여 어제 저녁의 일까지에 미쳤을 때에 한 가지 결심 히 떠올랐다.

그는 덮은 처네를 걷어차고 일어나 만년필과 편지지를 찾 아가지고 다시 요 위에 엎이더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혜경이.

어제 저녁때의 일은 퍽 섭섭하게 되었소.

그러나 혜경이가 그렇게 노하여 가지고 돌아간 것이 결코 정말로 노하거나 정말로 내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닌 줄은 나도 잘 아오.

나도 혜경이의 우정을 - 내게 대한 혜경이의 우정!-을 뿌 리치느라고만 그리한 것은 아니오.

내가 지금 혜경이에게 전과 다름없는 정다운 마음을 가지 고 있는 것과 같이 혜경이도 역 시 그러한 마음으로, 그리 고 어젯일이 께름하여 불안중게 있을 줄을 알고 있소. 그런 줄 알기 때문에 나는 이 편지를 혜경이에게 부치려 하는 것 이오. 그러니까 만일 혜경이가 아직도 나에게 대한 노염이 풀리는 때에 읽어 주오. 그리고 영영 노염이 풀리지 아니하 겠거든 차라리 다 찢어 없애어 버리고.- 노라는 잠간 붓을 머추었다. 서두는 이렇게 내놓았거니와 인제 요건을 어떻게 졸가리 잡아 쓸까 하는 것이다.

혜경이.

노라는 다시 이렇게 쓰기 시작한였다.

나는 지나간 일 년 가까운 동안에 내가 한 일, 내가 당한 일을 두루두루 생각하고 그것을 비판하여 한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소.

그것은 이러하오.

나는 안해를 인형으로 여기고 여자를 노예로 생각하는 남 편으로부터 노예가 아니요 한 자유의 인간이 되기 위하여 가정을 나왔소. 이것은 혜경이도 알고 있지요?

그리하여 나는 자유를 얻기는 하였소. 임노라라고 하는 d 자는 아무것도 거리낌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 인간이 되었었소. 그러나 이 자유를얻은 대신 나는 어떠한 대상(代 償)을 치르었소?

얻은 첫날부터 오늘날 이 시간까지 다만 몸뚱이 하나를 거 두어가기 위하여서만 급급하였소.

나에게 만일 충분한 재산이 있었더라면 나는 이미 얻은 자 유를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겠소.

그러나 먹고 살기에 여념이 없어 얻은 자유를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소. 이와 같이 말로는 자유를 얻었지만 먹고 살 힘이 없는 몸이니 나는 할 수 없이 불구자요 저능아에게 가 갸거겨를 가르치러 다닌 것이오. 그러다가 필경은 그 창피 를 보았으니 이러고도 내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소?

그 다음 난 화장품 장사를 시작하였지요.

역시 먹고 살려는 것이었지 별게 없었소.

자유로운 몸이라면서 어찌 그다지도 구구하게 화장품 담은 가방을 들고 문전문전 굽실거리며 하나 팔아 달라는 애원을 하게 되었단 말이요!

그러나 그걸로도 목구멍에 풀칠을 하지 못하게 되어 필경 은 매춘부의 무리가 시끌버끌한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한 가 지로 얼굴과 웃음을 팔게 되었소.

웃음과 아양을 팔 수 있는 자유!

후 하고 한숨을 내어쉬며 노라는 붓을 멈추었다. 그 다음 의 말을 쓸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끝에 그는 입술을 다물고 다시 쓰기 시작한 다.

혜경이.

나는 어젯밤에 아무것도 없이 다 없어진 내 몸뚱이에 최후 로 남은 한 가지 것- 정조를 마지막으로 빼앗기고 말았소.

어느 남자가 나에게 그것을 팔 것을 간청하였소. 만일 내가 앞으로 생활이 더 궁하여 간다면 나는 나의 정조를 자진하 여 팔았겠지요. 사실에 있어서 시간 문제이지 나는 오래지 아니하여 최후의 한 가지인 정조를 팔아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빤히 내어다보이는 사실이었소.

그런데 그 남자는 성급히 구느라고 시기를 기다리지 못하 고 나에게 술과 흥분제를 먹여 반강제로 내 정조를 빼앗았 소. 그러나 결국은 일반이겠지요.

이리하여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것도 남기어진 것이 없소.

사랑하는 자식을!(아! 혜경이! 나는 어린아이들을 생각하면 천지에 용납지 못할 죄를 지었소.) 남편과 가정을 내버리고, 명예와 자존심은 여지없이 짓밞혔고, 가장 정답던 동무는 절교를 선언하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조를 빼앗겨 버렸 고……

자, 그러니 허울 좋은 자유-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는 헛 자유를 얻기 위하여 나는 너무도 크나큰 대상을 치르지 아 니하였소?

배고픈 자유, 외로울 자유, 먹기 위하여 노예가 될 자유, 먹기 위하여 웃음과 아양과 정조를 파는 자유! 그리고 천륜 (天倫)을 짓밟는 자유!

혜경이, 이것이 과연 자유일까?……천만에!

지금 나에게 남기어진 한 가지 수단은 웃음과 아양과 정조 를 팔아서 그것으로 목구멍에 풀칠을 하는 수 밖에 없소.

이렇게 살아가고도 과연 인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노예가 되는 자유, 웃음과 아양과 정조를 파는 자유, 그렇 지 않으면 굶어 죽는 자유, 또 그렇지 아니하면 잣ㄹ을 해 버리는 자유!

이 가운데서 나는 자살을 하는 자유를 택하였소.

왜 자살을 하느냐고?

그러나 무엇하러 살아 있겠소? 내게 무엇이 남은 것이 있 길래 살아 있는 애착을 가지겠소?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이상으로 더 나아가서 이 문제 를 생각할 수가 없소.

조그마하나마 생활의 보장이 있고,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 고 당당히 행세할 존엄과 자존심이 있고, 여자로서 순결성 이 있는 데서만 인생으로서의 생이 의의(意義)가 있지 아니 하겠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하나도 없이 다 빼앗긴 나는 그곳에 서 더 나아간 딴 세상의 딴 인생과 딴 생활이 있으리라고 믿어지지 아니하오. 그래도 그냥 목숨을 연장시켜 나간다면 그것은 산송장이 아니면 금수겠지요.

혜경이.

혜경이는 인 비로소 후회를 하느냐고 할 테지? 그러나 천 만에!

나는 결코 후회를 하지 아니하오.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 니까.

사람이 부자유로운 가운데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결과는 도리어 더한 부자유 가운데 서 필경 내 일신을 망쳤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라 고는 나는 생각지 아니하오.

그렇다고 누구의 잘못인지도 나는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하 였소마는.- 혜경이.

내가 이렇게 자결해 버리는 것을 애석히 여겨 서러워하지 는 마오. 나는 결코 울면서 죽지 아니하겠소.

끝으로 몇마디 부탁이 있소.

다음날 우리 어머니가 울면서 쫓아올라올 테니 잘 위로나 해주시오.

그리고 남수네 집에 별로 밥값으로 밀린 것은 없으나 카페 에서 빚진 것이 있으니 내가 가진 세간 나부랭이를 전부 팔 아 그것을 갚고, 장례는 요전 옥순이 때처럼 화장으로 간단 히 해주시오.

그리고 그 다음 어린것들인데, 인제는 이 모양이 된 어미 로서 자식들을 이름조차 부르기도 부끄럽소. 아무것도 뉘우 치지 아니하고, 이러면서도 나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이것 이고 저것이고 도무지 입을 열어 말할 염치조차 없소. 내가 죽일 년이요.

죽는 나의 마지막 소원이니 일후에 어린것들이 자라거든 어미는 일찍이 병들어 죽은 양으로 말하라고 하고, 그리고 나와의 지나간 일은 일장 꿈으로 돌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 리라고나 부탁하시오.

그러면 이만 그치니 부디부디 두분 의좋게 잘 살다가 쉬이 아기나 낳고 재미 보아요.

노라.

노라는 혜경이한테 쓰던 편지를 마치고 붓을 놓았다. 다음 은 어머니한테 해야할 판이다.

노라는 남편과의 파탈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어머니에게 숨 기어 왔다.

어머니가 놀라와할 것이 걱정스러워 미룸미룸 지금나지 미 루어 왔던 것이다.

그는 내심에 생활의 안정이나 얻고 하면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고,그때서 서서히 이야기를 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 하여 그동안 서신 왕래는 종종 있었어도 다만 서로 안부와 문안에 그치었고 그러힌 이야기는 싹도 비치지 아니하였다.

그런 때문에 그는 어머님잔 상사리라고 써만 놓고는 언제 까지나 우두커니 앉아서 자주 한숨을 쉰다.

편지가 가면 어머니가 보고 날뛰고 울고 애통할 전경이 눈 앞에 어리어 차마 편지를 쓰지 못하는 것이다.

노라는 어떻게 하여서든지 이번 일에 어머니가 놀라지 아 니하도록 꾸며놓고 싶었으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별 도리가 없다.

편지를 아니하고 혜경이와 짜고 병으로 죽은 양으로 하였 으면 좀 덜 놀랐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현과의 파탄을 알린 뒤에의 일이겠으니 역시 난처하다.

이궁리 저 궁리 끝에 할 수 없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편 지를 썼다.

어머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늙게 홀로 남아 계신 어머니께 이러한 불초의 짓이 다시 있으리까마는 그저 팔자로 여기시고 너무 서러워 마십시오.

모든 사연은 혜경이에게서 자세히 들으시면 아실 것입니 다.

화장을 한 뒤에 백골을 가지고 내려가서 공동묘지 한 구석 에 묻어 주십시오.

어머니, 내내 몸 편히 오래살아 게시고 얌전한 일가 사람 으로 양자나 하나 들여서 돌아가신 뒤에 제향이나 모시도록 하십시오.

울지 아니하려고 하여도 어머니께 편지를 쓰면서도-더구나 애처로운 마음을 억제하고 흔연한 듯이 쓰노라니까- 눈물이 복받쳐올랐다.

두 장의 편지를 다 써서 각기 봉투에 넣고 우표까지 붙였 다.

편지 쓰는 동안이 꽤 시간이 걸리었던지 벌써 땅거미가 지 고 전등이 켜진다.

병택이가 도착된다는 아홉시 이십오분차를 보자면 그래도 두 시간이 넘어 남았다.

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대강 빗어 올리고 수수한 옷을 찾아 입고 마루로 나섰다.

마루에 언제 가져왔는지 석간신문이 놓여 있다.

병택이에 관한 무슨 기사나 났나 하고 들치어 보니까 그런 것은 없고 어제 저녁에 김이 소동 일으키던 것이 조그맣게 났다.

노라는 경황이 없는 중에도 그래도 자기에게 좋잖은 소식 이나 나지 아니하였는지, 또 자기의 본성이 드러나지나 아 니하였는지 궁금하여 기사를 읽어 보았다.

카페에서 음독소동 십구일 밤 열한시경에 시내 종로 -정목에 있는 카페 사탄 에서는 그곳의 여왕이라고 일컫는 여급 스미레(가명)앞에서 음독을 하려다가 실패한 청년의 용감(?)한 희극이 생기었다.

그 청년은 방금 시내 모 전문학교에 재학중인 김성택(가명) 으로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에 전기 스미레라는 여급에게 짝사랑을 하며 결혼을 하자고 조르다가 실패를 하였다. 그 는 그 뒤 절망과 우울 속에서 지나오다가 드디어 결심을 하 고 전기와 같이 스미레 앞에서 맥주잔에 다량의 모르핀을 타서 마시려는 순간에 스미레가 제지하여 독을 마시지도 못 하고 일장의 웃음거리를 연출한 것이다.

노라는 안심을 하고 신문을 도로 놓았다.

어데 가나?

남수 어머니가 노라의 차리고 나오는 것을 보고 걱정스럽 게 묻는다. 종일 들어앉아서 울고 편지를 쓰고 하더니 전보 다 차림새를 달리하고 나가는 것이 불안하였던 것이다.

잠깐 다녀와요.

이렇게 천연스럽게 대답은 하나 무의식중에 자기의 거처하 던 방안이 한번 돌려다보이나.

시장헐테데……그렇게 먹질 아니해서 어떡허나!

괜찮어요.

그 길로 노라의 발길은 계동을 향하였다.

노라는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들을 만나볼까 하고 계동 옛집 으로 갔다. 내심에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 한번 먼빛으로라도 바라보고 싶었다.

그뿐 아니라, 주저하는 생각이 없던 것도 아니었었다.

어린아이들을 시골로 보내겠다고 한다는 말은 진즉 병원에 있을 때에 들었으니 그동안에 내려보냈기가 십상일 것이다.

또 현이 집에 있기가 쉬운데 지금 와서는 더구나 마주치기 가 거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것쯤이야 당하더라도 요행히 아이들이 그대 로 있어서 만나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하였다. 계동 어귀에 들어서니 길이 새삼스럽게 낯이 익다.

길바닥의 어디가 높고 어디가 얕았던 것까지 다 발에 익는 듯싶다.

전에 우중충하던 위생소 자리는 말끔하게 헐어버리고 훤칠 하게 집터를 닦아 놓았다. 길 좌우 옆으로 들어선 가가 사 람들이 모두 낯이 익고 방금 웃으며 이사를 하는 것 같다.

집 문앞에 당도하니 우선 혜경이한테 들은 양관이 벌써 준 공이 되어 크림빛 사기벽돌로 화장을 하고 어둠침침한 속에 뚜렷이 서서 있다.

그것을 보니 말할 수 없는 시기가 가슴은 치받친다.

대문은 전처럼 닫기어 있다.

노라는 몇 번이나 문 앞에서 망설이다가 기운을 내어 대문 을 밀치고 다시 중문을 거치어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집안이 빈 집 같이 조용하다. 노라는 우선 낙망을 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없는 것이라고.

대문 소리를 듣고 하인들이 거쳐하는 뜰아랫 방문이 열리 며 낯선 여편내가 고개를 내민다.

누구요?

그는 노라를 보고 이렇게 묻는다.

노라는 집안이 전부 어디로 이사를 해가지나 아니했나 의 심하였다.

노라가 말이 없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그 여편네는- 그 는 어멈인 듯하였다.-툇마루로 나선다.

누구세요?

이게 현변호사댁이지?

노라는 좀 쑥스럽기는 하나 이렇게 물어보았다.

네.

그러면 딴 집이 되지는 아니한 것이다. 또 이만큼 소리를 내는데 현의 기척이 없는 것을 보니 그가 집에 없는 것이 분명하다. 양관에는 불이 아니 켜졌으니까 아직 쓰지 아니 하는 것이니 그곳에도 있을 리 없고,그러면 아이들이 있기 만 하다면 맘놓고 만나고 갈 수가 있다.

나리 어데 가셨어?

노라는 다지느라고 물어보았다.

출입허셨어요.

어제?

저녁진지 잡숫고 나가셨어요.

아주 안심이다.

애기들은?

애기…… 들이요?

응.

애기는 하나두 없어요.

아뿔싸! 그러면 전부 시골로 내려보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그만 주저앉을 듯이 낙망이 된다.

이 댁에 언제부터 와서 있었어?

며칠 아니 되야요.

그전 있든 사람은?……하나두 없나?

침모는 그전 있든 인가분데 지금 말 갔어요.

노라는 그래도 불러다가 아이들의 소식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누구세요?

그 어멈이 등 뒤에 대고 묻는 것이다.

응. 인제 차차 알지.

노라가 왔다가 기왕 목적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굳이 이편 이 왔다 간 것을 알리고 싶지 아니한 것이다.

어멈이 한 말을 듣고 그렇게 짐작하면 하고 말면 말고-.

밖으로 나와서 시간을 보려고 팔을 드니 아무것도 없다.

혜경이의 편지에 쓴 대로 팔아서 빛을 갚도록 시계조차 떼 어놓고 나온 것이다.

노라는 정거장 시간이 어떻게 될지 몰라 종종걸음으로 내 려오다가 우체통에 편지를 집 어 넣었다.

어린아이들이 그리워 이 골목을 찾아올라오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니라 생각하니 자꾸만 뒤가 돌려다보인다.

허둥지둥 정거장에 당고 하니 아직도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아 있다.

누구 카페에서 낯익은 사람이나 만나면 창피할 것 같아 대 합실을 나와 광장 한편 구석에 비껴서서 시간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제가끔 제 일에 분주하여 정신없이 정거장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한다.

자동차가 두 눈을 부라리며 끊이지 않고 들이닿는다. 전차 가 으르렁거리며 달린다.

정신이 아득하게 혼란한 가운데 죽음을 한두 시간만 앞에 둔 노라는 다시 지나간 일을 되풀 하여 생각한다.

아무련 미련도 없다. 애끊는 애착도 없다. 조용히 웃으면서 죽을 것이다.

즉 생각해오던 끝에 이렇게 침착하게 마음을 먹으나 그래 도 실패한 것이 안타깝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재미있게 살 아보았으면 싶었다.

노라는 문득 옥순이의 일이 생각되었다.

그렇다. 남자의 기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는 옥순이나 자기나 다 같이 자유로운 몸이었었다.

그러나 옥순이의 자유도 역시 이 자살을 하는 자유밖에는 아니었었다.

성희도 자유로운 사람이었었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밥 대 신 정조를 양심삼는 자유였었다.

정원이는 결혼도 아니한, 더구나 자유로운 몸이나 역시 돈 에 몸을 파는 자유 밖에는 가지지 못하였다.

노라는 그들을 웃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라 자 신이 그들의 밟은 자국을 밟고 있을 뿐이다.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겨우 시간이 되자 노라는 입장권을 사가지고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차가 식식거리며 들어서자 사람의 뭉치가 토해 내놓는 것 같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

노라는 분주히 내리고 하는 사람들을 물색하면서 묶여오는 사람을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사람의 뭉치가 너무 많고 혼잡하여 정신을 가다듬 어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앞칸까지 가서도 필경 묶이어 오 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도로 돌아서려는데 쾅 하고 요 란스런 총소리가 나며 불이 번쩍거린다.

너라는 혼이 뜨게 놀라 어리둥절하다가 그것이 자기 앞에 섰는 사람에게 대고 사진을 찍느라고 마그네슘을 터뜨리는 것인 줄을 겨우 알았다.

노라의 몇 걸음 앞에서 웬 중국 사람이 순사와 양복 입은 사람의 호위를 받고 섰는 것이다. 그가 병택이인 것은 얼굴 로 보아가지고는 도저히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자세히 보노라니까 그의 뒤에 섰는 순사가 포승줄을 잡고 있다. 또 더 자세히 보니까 겨우 병택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너무도 참혹하게 변하고 수척하였다.

의복은 보기 흉허운 중국사람의 그것이요, 가시같이 야윈 얼굴에는 굵다란 수염이 시커멓게 자랐다.

그러나 한 가지 쇠하지 아니한 그의 두 눈은 잔뜩 적의를 머금고 노라가 서서 있는 등 뒤편을 쏘아보고 있다. 그는 미처 노라를 보지 못하였다.

노라가 등 뒤를 돌려다보니 신문기자인 듯한 사람의 한떼 가 우굴우굴 모여서서 무어라고 수군거린다.

그중에도 특히 노라의 주의를 글기는 어젯밤 사탄에서 만 나던 키 작은 신문기자 동관이라는 사람과 또 하나 사진기 계를 든 사람과 서서 노라를 연해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것 이다.

너희가 아무려면 어쩔테냐.

이러한 생각으로 노라는 다시 고개를 돌이켰다.

어!

그때에 바로 노라의 앞에까지 이른 병택이는 이렇게 놀라 는 소리를 가볍게 지르고 발길을 멈추어 선다. 비로소 노라 를 발견한 모양이다.

병택이가 그와 같이 놀라 발을 멈춘 것은 극히 일순간이 다. 그래서 그의 뒤에서 호송하는 순사나 형사들도 그 눈치 를 cowl 못하였다.

병택이는 얼핏 눈을 끔찍하고는 시치미를 떼고 씽씽 걸어 가 버렸다.

그것이 알은 채를 하지 말라는 것인 줄을 노라도 잘 알았 다. 그리하여 딴 사람을 찾는 체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슬쩍 돌아섰다.

막 돌아서자 웬게 또 마그네슘이 탕 하고 터지며 눈이 부 시게 불이 일어난다.

미안합니다.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연기가 사라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키 작은 신문기 자와 그의 동관이 싱글싱글 웃고 서서 있는 것이다.

노라는 성이 슬그머니 난다.

왜 사진을 찍으세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 우리 저 식당에 가서 차나 한 잔 마십시다……인제 참고가 될 때가 있을 것 같아서 사진을 한 장 배겼으니 너무 노여 말구, 자 갑시다.

그는 연해 샐샐거리며 발라맞히려 든다.

노라는 창피한 생각에 누가 보지나 아니하나 하고 둘러보 았으나 그들 세 사람과 늦게 내려서 총망히 지나가는 승객 몇 사람의 뒷그림자밖에는 없다.

저 볼일 있어 그럴 시간이 없어요.

노라는 이렇게 해 던지고 비껴서서 가버리려 하는데, 또 한 사람이 공순하게 모자를 벗고 허리를 굽힌다.

승낙 없이 사진을 찍어서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은근한 게 노라에게는 더구나 얄미웠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좀 물어볼 말씀이 있는데요.

지금 바뻐요.

바쁘시더래두 잠깐만……

여보 유리꼬상.

키 작은 사람이 다시 나서서 다정한 체하고 유리꼬상을 부 른다.

그럴 것 멋 있소? 정 그리 바쁘면 며 마디 대답만 해주구 려.

무슨 말씀인지 저는 별로 신문사 양반한테 할 말이 없을 것 같어요.

오병택씨허구 같은 고향이라지요?

다른 한 사람이 다시 나서서 이렇게 묻는다.

네.

최근에 언제 만났어요?

올 봄에 고향에서 만났구는 통히 못 만났어요.

그럴 리가 있나요. 오씨도 서울 있었구 당신도 서울 있었 는데…….

그래두 못 만났으니 못 만났다지요.

사탄에 가기 전에는 어데 계셨소?

병원에 있었어요.

병원? 간호부루?

입원했었어요.

어느 병원에?

노라는 이렇게 묻는 대로 대답을 하다가는 필경 본성을 조 사할 거리를 장만하여 주겠다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입원하기 전에는?

그것두 말씀할 수 없어요.

그들은 번갈아가며 여러 가지로 꾐수를 써서 노라의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필경 아무것도 더 얻어듣지 못하였다.

정거장 밖으로 나와서 둘러보았으나 병택이는 이미 갈 데 로 실리어가고 보이지 아니한다.

인제는 할 일도 다 해놓았으니 마지막의 남은 일을 결행해 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강가는 전차를 잡아탔다.

밤이 깊었으면 젊은 여자가 단신으로 철교를 향하는 게 수 상스러웠겠으나 아직 열시밖에 아니 되었고, 또 철교 난간 에 서있는 사람도 더러있어 노라는 무난히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달도 없는 그믐밤이다.

어둠 속에서 강물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멀리 철교 아래에서 고기잡이배인지 불 하나가 반짝이다가 그나마 사라져 버린다.

노라는 지나가는 사람이 수상히 여기지 아니하도록 천연덕 스럽게 난간에 기대어 서서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람의 통행이 드문 틈을 얻어 난간을 넘으면 서 그대로 아래를 향하여 거꾸로 떨어져 버렸다.

용산 철도병원 입원실의 한 방……

사방 벽이 하얗고 덮개도 하얀 침대에 혼곤히 잠이 들어 있는 것이 노라요, 그 옆 걸상에 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노 라의 야윈 얼굴을 굽어다보고 있는 것이 혜경이다.

노라가 철교에서 몸을 던지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우연 도 기적도 아니다.

한강건너서 보트 영업을 하고 사는 한 가족이 있다. 그들 은 편의대로 오서방네라고 하여 두자.

그들은 그새 몇 해 동안 철교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사람을 많이 구하였다.

친히 아는 손님이 가면 경기도에서 내린 표상장을 내어놓 고 자랑을 한다.

이러한 명예(?)가 돌아오는 외에 사람 하나를 구하면 돈도 오 원이 생긴다. 그래서 죽은 사람을 건지는 것이 그들에게 는 일종의 부업이 되었다.

어젯밤에도 금년 여름 세나게 해먹은 보트 세놓이의 한산 한 가을몫이 나마 보느라고 그들 일가족 -오서방의 큰아들, 작은이, 셋째, 넷째 모두 보트장에 나와 있었다.

스십 척이나 되는 철교에서 사람의 몸이 물로 떨어지는 소 리는 결코 심상치 아니하다. 고기 뛰는 소리가 그만큼 요란 스럽게 나자면 고래새끼나 올라오지 아니한 이상 결코 나지 아니가 소리다.

철부덕…… 촤르르.

노라가 물에 빠지면서 이렇게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다 리 위에 있던 사람이 우선 아우성을 쳤다.

오서방네 큰이와 둘째는 손재게 보트를 저어 다리 밑에 다 다랐다. 그것이 삼 분도 다 걸리지 아니한다. 큰이는 벌써 잠수질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