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을 나와서/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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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 들어와 형순이를 여관으로 보내고 노라와 혜경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주검을 치운 집이다. 주검도 예사 주검이 아니요,무참한 형 상을 안 주검이다.

노라는 내키지 아니하는 발길로 강잉하여 중문 안에 들어 서니 방금 옥순이가 나서서 맞이하는 성만 싶다.

어떻허려우? 집을.

혜경이가 마루에 피곤하게 걸터앉으며 묻는다. 노라도 그 옆에 펄씬 걸터앉았다.

글쎄……

그럼 걷어 치우고 필운동에 가서 있지.

싫여…… 그 병신꼴을 더 볼 테니 누가 그것을…… 찬 이 틀이나 아무소리 없이 못 가서 욕하겠다.

내일은 가보구려.

응.

그러면 같이 있을 동무를 얻어 주까?

누군데?

내 조카뻘 되는 여잔데- 일가래도 그런둥만둥하지만- 저의 어머니하고 있는데 방이 몰린다고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 어…… 여자실천상업을 마치고 자금 경성은행에 다니지……

사람들이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래볼까……

그렇게 해요…… 사람은 괜찮어요…… 그런 이렇게 합시 다. 내가 지금 내려가서 저녁때 우리 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걸어 두께. 이따가 들르구려.

이러한 상이를 하고 혜경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남자의 압제와 가정의 질곡에서 벗어져나와 독립생활을 하 는 것이 여자의 자유요, 그것으로 부인은 해방이 되는 것이 라는 노라의 신조에 대하여 이번의 비극은 크나큰 동요를 주었다.

옥순이는 왜 자살을 하였는가?

노라는 찬바람이 휙 돌고 음산하여 보이는 방이나마 들어 가 옥순이의 입던 옷 쓰던 물건들을 챙기면서 곰곰이 생각 에 잠기었다.

화장터에서 형순이가 말한 것처럼 재환이와 옥순이와는 멀 쩡한 남이다. 다만 재환이의 민저에 처(촋)라는 명목으로 옥 순이의 성명 삼 자가 헛되이 쒸여 있을 뿐이지 그들은 이미 안해가 아니요 남편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옥순이는 결혼을 하지 아니한 여자라고도 할 수 있고 남편을 여읜 과부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남편이 없는 사람이니 남편의 압제가 없을 것이 요, 압제가 없는 것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따라서 옥순 이는 완전히 자유인일 것이다.

아무 거리낄 것도 없는 자유의 몸이 무엇에 대끼어 자살을 할 것인가? 옥순이는 미상불 고독을 느끼었다. 그것은 노라 도 동감이었었다. 둘이다 삼십을 바라보는 젊은 여자니 공 교를 지키기가 외롭지 아니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독쯤은 아직까지 노라에게는 찌개 없는 밥상 푼수 밖에는 아니 되었다.

바글바글 끓는 찌게를 놓고 밥을 먹으면 물론 좋다. 그러 나 그것이 없다고 밥을 못 먹을 것은 아니다.

임 남이 된 남편이라는 사람이 공연히 머리채를 껴들고 발 길로 차고 욕을 하였다.

응당 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동리개나 짓느니라 치지도외하든지,그렇지 않으면 이편에서도 그만큼 해 갚으 면 그만이다.

옥순이는 가끔 자식이라도 하나 있으면 그것에라도 낙을 붙여 살텐데……하였다.

그러나 노라의 처지를 본다면 그것은 도리어 고통이리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지내니 어린아이나 하나 있으면 위로가 되지 아니할 것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목매어 자살할 것 까지는 없는 것이다.

또 옥순이는 노상 살아갈 걱정을 하였다.

노라가 언제까지나 둘이 같이 서로 의지하고 지내자고 하 였으며 은연중에 옥순이의 생활까지도 담당하겠다는 눈치를 보이기는 하였으나 옥순이에게는 그것이 미안하다는 것도 있고 또 미다워하지 못하는 눈치였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에 밥을 주릴 지경은 아니었었다.

인습……인습도 그렇다. 이미 한번 출가를 하였다가 남편 에게 버림을 받은 여자에게 팔자 고치기를 허락은 아니헐지 언정 운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수난의 여생을 보내는 데는 아무리 가혹한 인습이라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살을 하였을까. 해방된 몸이니 그 자유를 적 극적으로 누릴 수도 있고 그렇잖더라도 운명에 순종하여 수 난의 여생이나마 고요히 보낼 수가 있으면서, 그러나 자살 을 한 옥순이의 일…… 여기서 무슨 결론이 생기어질 것 같 이 뱅뱅 돌면서, 그러나 역시 아무런 결론도 얻지 못하였다.

노라는 옥순이의 짐을 다 챙겨 놓고 안채로 좀 들어갈까 하는데 성희가 마침 어린아이를 안고 나왔다.

동생을 잃어서 적적해 어떡허세요?……그리고 저녁이랑 퍽 거식헐텐데……

그래도 차마 밤에 무서워 어떻게 하느냔 말은 못한다. 노 라는 어린아이를 받아 안았다. 송이보다는 좀 작고 안나보 다는 좀 큰 계집아이이데 볼때마다 노라는 자기 어린아이들 을 생각하여 귀애하므로 볼때마다 곧잘 따르는 것이다.

심란한 중에 그 아이를 보니 아이들 생각에 더욱 심란스러 워 말대꾸도 잘 하고싶지 아니하였다.

어쩔 수 있나요…… 저녁에 식모나 좀 내보내 주세요.잠동 무나 허게……

그렇게 하지요. 그거야…… 아이그 불쌍해! 얌전한 아 가…… 어쩌면 글쎄 그렇게!

그러게 말이어요.

마침 학교에 갔다가 돌아온 성희의 아들 용석이가 안에서 어머니를 찾다가 달려와서 치마에 매어 달린다. 노라는 마 리아를 생각하고 넋이 나간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다 가 뛰어나오듯이 집을 나왔다.

노라는 재동 네거리의 우체통 옆에 몸을 비켜서서 마리아 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두시가 지났는데 벌써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행여나 하는 생각에 기다려 보았다.

한 삼십분 지나서 낯이 익은 아이들이 한떼 몰려 올라오는 틈에 마리아가 끼여 오는 것이 먼빛으로 보인다.

와락 쫓아가서 그러안고 싶었으나 또 뿌리치고 돌아설 일 이 아득하여 우체통에 몸을 숨기고 바라보기만 하였다.

저희끼리 재재거리며 길 한가운데로 해서 계동 어귀로 행 하고 가는 뒤를 노라의 시선은 연해 쫓았다.

버스가 퉁탕거리고 지나가고 자동차가 달려오고 자전거가 휙휙 지나가고 하는데 아이들을 치지나 아니할까 하여 속이 죄었다.

노라는 마리아의 그림자가 재동 어귀 안으로 사라진 뒤에 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아이들의 사진 일이 생각나 서 교동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사진집에서는 건판을 이내 찾지 못하였다 돈을 도 로 내준다.

그렇게 부탁한 것을 지금 와서 없다고 하는 것이 화도 나 고 섭섭도 하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발길을 돌이켜 허덕허덕 혜경이 집에 당도하니 청했다던 손님이 벌써 와서 혜경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눈이 번쩍 뛰게 훤하였다.

얼굴이 두툼한게 복성수럽고 턱과 입모습이 아주 귀염성 있게 생기었다. 저고리는 흰 생수깨끼저고리나 피르스름한 조세트의 프린트한 치마가 대단 혼란스럽다. 양말도 순견하 다.

과히 숱이지지 아니한 머리에 굵다랗게 눌린 웨이브가 얼 굴과 잘 얼린다.

나이는 스물넷 아니면 셋쯤 되어 보이고.- 혜경이으 소개로 인사를 하고 보니 김정원이라는 것이 그 의 성명이다 말소리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살폿 섞였다.

혜경이가 사이에 앉아 모든 분별을 정하였다.

집은 노라가 전세로 얻은 것이지만 그냥 같이 있기로 하고 비용은 삼분을 해서 정원이가 둘, 노라가 하나의 비례로 물 기로 하고 살림은 정원이 어머니가 맡아보도록 하기로 하고 - 그러나 정원이 어머니에게 살람을 맡긴다는 것은 식모나 안잠자기의 일을 시킨다는 말을 체면 좋게 한 것 뿐이다.

이사는 내일 이라도 하기로 하였다.

방은 간반이지만 세 식구에는 좀 궁색할 거야…… 정원이 짐이 많으니?

끝풀이로 혜경이가 이렇게 묻는다.

머 별로 없어요. 반닫이하구 고리 두어 개하구 이불, 책상 그뿐이지 머.

그러면 과히 좁지는 않겠구만…… 참 결혼식은 가을쯤 하 게 되니?

이 말에 정원이는 얼굴을 조금 붉히고 웃는다.

결혼은 무슨결혼?

약혼했다면서?

약혼? 누구래 약혼해요?

느이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어머니가 괜히 망령이 나서 그래요.

잘한다. 늙지도 아니하신 어머니더러 망령났다구 허구! 넘 고를라 말구 웬만한 데거든 결혼을 해버리렴……잘못하면 노처녀 패차구나선다.

지금도 올드 미스라구허는데.

며 살인데? 스물넷?

셋.

그럼 과히 늦지는 않다만.

늦고 이르구 도제 결혼을 안하겠쉬다.

왜? 실연했니?

피.

그래두 염문이 더러 들리든데……

좀 해보구퍼두 눈에 드는게 없읍디다.

노라는 혜경이가 만류하는 바람에 저녁을 대접받고 집으로 올라오니 형순이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병택이의 소식을 물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을 형순이가 이상하게 여길까봐 망설이다가 그래도 궁금하여 말문을 떠 보았다.

병택씨는 잘 있어요?

말 치고는 모호한 말이었다 .

노라가 시골 있을 때에 병택이와의 사이를 형순이도 의심 한 사람이라면 노라가 묻는 말조가 속이 굽어다보이는 것일 것이다. 말을 물어놓고 노라는 저편의 말대답보다 눈치를 더 살피었다.

네, 그저 여전히 그렇게 지내가지요.

형순이의 얼굴이 신상한 것을 보고 노라는 마음을 놓고 다 시 물었다.

그때 종적없이 나갓다든 병택씨는 그 뒤 소식이 있나요?

모르겠어요…… 잠깐 풍편에 들리기는 서울 와서 있더고 그러는데…… 이번 실상 병택이 백씨한테 가서 돈을 좀 취 해가지고 왔는데, 서울 간다니까 혹 알 도리가 있거든 병택 이 소식 좀 알어다 달라고 그러든데요.

노라는 병택이가 서울에 있다는 말이 처음 솔깃이 반가왔 으나 나중 말을 들으니 헛풍문 이라 싶어 낙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혹 병택이를 만날 수가 있겠다는 희망 을 가지고 싶었다.

형순이는 옥순이의 짐 꾸려놓은 것을 짐꾼을 불러다 지워 가지고 돌아 갔다.

노라는 문 밖까지 나가 작별을 하고 안집 안짐지기를 청하 여막 이야기를 하노라니까 재환이가 찾아왔다.

낮에 홍제원에서 기다려 세어두었던 자동차를 같이 타고 들어오자는 것을 노라는 대답도 아니하였다.

날래 찾아가서 저저히 사과라도 하겠읍니다.

한 소리가 무렴 끝에 한 말인 줄 알았더니 정말- 더구나 오늘 밤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는 주인이 들어오라는 말도 하기 전에 방으로 덥석 들어 앉았다. 하기야 노라는 될 수만 있으면 마루에 선 채 배송 울 하고 싶었으니 들어오란 말은 나올 리가 없었던 것이다.

요전 일이 잘못되었다고 중언부언 늘어놓고 또 옥순이에게 죄를 깊이 졌누라고 그럴 듯하게 참회를 하던 끝에 궁벽스 럽게도 야릇한 제안을 하나 내놓는 것이다.

그래서 머 재라도 좀 올려주고 싶어서…… 그걸 상의도 해 볼 겸……

노라는 침이라도 탁 뱉어주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거야 자량해서 하시지요. 저야 멀 압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게 같이 다정하게 지내시든 터이니 까……

그건 염려 마세요. 맘에 섭섭하면 저는 저대로 할 도리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기왕 무얼 하신다면- 그래도 재를 올려주는게 제일 좋을 듯한데-저도 같이 좀 할까 해서……

저는 재를 어떻게 올리는 것인지 말만 들었지 통히 구경도 못해서요.

저도 모릅니다.

재라께 별것이나요.

긴치 아니하게 안잠자기가 한몫 끼고 나선다.

재환이는 그나마 되었다 싶어 안잠자기를 데리고 한 시간 이상이나 재올리는 문답을 하 다가 차마 아니 떨어지는 것 을 억지로 일어섰다.

내일 형순이 떠나는데 정거장에 나가십니까?

네.

며시찬가요?

그건 내일 알아보아야 하겠지요.

노라는 알면서도 짐짓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안잠자기는 재환이를 따라나가 중문을 걸고 들어와서 그의 송덕을 늘어놓는다.

그이가 요전에 보니깐 그렇게 불량허구 깍정이 같더니맘은 그렇잖은가버요.

왜?

돌아가신이 재를 다 올려줄려구 애를 쓰고 다니잖어요?

노라는 웃고 대꾸도 아니하였다.

주인네 집 이야기를 밖에 나와 털어놓는 것은-만일 주인집 에 불평이 있으면 험까지 첨부해서- 안잠자기네의 없지 못 할 소일거리다.

자리에 누우니 이야기가 벌어져 나온다.

안채에서는 건넌방 학생들을 내일 아침에 다 내보낸데요.

응……왜?

친장어머니는 시골있는 아들한테로 내려가구.

그러고 어쩔 양으루?

시집간대유.

안잠자기는 귓속말을 하듯 가만히 소곤거린다.

응? 시집?

노라는 역시 작은 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호기심도 나려니 와 또 같이 있을 사람까지 청한 터인데 집일이 걱정이 되는 것이다.

가진 않는데유 온대유.

거 무슨 소리요? 시집을 가는데 가진 않다니? 오는 건 또 무어구?

그이가 온대유.

그이라께?

저, 통안서 전당국하는 인데 아주 퍽 부자래유.

그런데 왜 친정어머니는 시골로 내려가시는고?

몰라유…… 단촐하게 지낼려구 그러는 거지요…… 다달이 돈을 보내 주기로 한다는데유…… 그렇지만 그 양반이 여기 와서 노 있지는 않는데유. 가끔 다니지.

그렇다면 소실이 것이다. 노라는 노라이니만큼 생활은 어 렵고 짐은 무거운 젊은 과부 하나가 전당국 영업을 하는 사 람의 첩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심상히 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묻고 싶었으나 안잠자기는 그밖에 더 아는 것이 없어 두고 보리라고 속치부를 하였다.

이튿날 필운동에서 오정때쯤 나와 정거장에 나가서 누이의 백골을 안고 돌아가는 형순이를 혜경이와 같이 작별하고 집 으로 돌아왔다. 혜경이고 같이- 이사해 온 짐이 마루로 대뜰로 그득히 놓여 있고, 정원이 어머니(인듯싶은 이)가 마룻전에 걸터앉아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얼굴이 어제 보던 정원이의 모습과 방사하 다.

나이는 오십이 되었다고 어제 혜경이 집에서 들었는데 머 릿털 하나 희지 아니하고 얼굴에 주름살도 별로 잡히지 아 니한 것이 아직도 기운이 정정하여 보인다.

아이구 형님, 벌써 오셨네!

아이구 동생이로구려! 이렇게 찾아와 주느라구……

이 어른이 정원이 어머니야…… 형님, 이 사람이 같이 있 을 이예요.

혜경이가 번갈아 소개를 한다.

예 그렇수…… 내가 정원이 애미외다. 성씨가 뉘시유?

임갑니다.

예, 님씨요…… 혼자 되었다니요?

네.

노라는 속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어제 혜경이가 정원이와 먼저 만나 역시 과부로 소개하였더니 정원이는 그 어머니한 테 그대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원 저런! 딱한 일도 다 있지! 젊은이가…… 하기야 나두 서 른넷에 혼자 되야서 이내 살어왔지만.

아니, 이 집은 과부 도가청인가! 하하하하.

혜경이가 소리를 내어 웃는다. 노라도 생각하니 우스웠다.

노인은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따라 웃으며 묻는다.

어데 또 과부가 있나?

이 안집에 둘이 있고 또 이 방에 하나가 있었드랍니다.

혜경이는 옥순이가 자살을 하였다는 말은 아니하였다.

노라는 혜경이를 대접하는 요량으로 중국 음식을 시켜다가 성희까지 청하여 점심을 먹었다.

노라는 성희가 다시금 치어다 보였다.

한편 생각하면 사람이 비루한 것도 같으나 한편 생각하면 불쌍도 하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아서 그런지 그는 어 깨가 처지고 낯꽃이 심란스럽고 침울하였다.

그는 평소에는 결코 침울한 여인은 아니었었다. 훤하게 틘 얼굴이 위엄도 있거니와 그만큼 언행이 점잖았지만 어느 편 이냐 하면 명랑한 성격이 있었다. 모습은 전에 미인의 호를 듣던만큼 비록 때아닌 서리에 시들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뚜 렷이 고운 자취가 남아있다. 따라서 중년에 들어선 남자의 마음을 끌기에 알맞다고 할 수가 있었다.

점심을 먹고 이사짐을 대강 치워놓고 있노라니까 다섯시가 지나서 정원이가 돌아왔다. 오되 혼자 오지 아니하고 뒤에 는 따라온 사람이 있다.

좀 일찍 오디 않구. 이사하는 줄 알믄서 이렇게 늦게 오니.

마나님은 이렇게 딸에게 허물없는 푸념을 내놓다가 딸의 뒤에 따라 들어서는 사람을 보고는 말을 뚝 그치고 반겨 웃 으며 인사를 한다.

아구 니선생님 오시누만…… 어서 올라오시요.

네, 안녕하십니까? 이사를 하신다고 해서 짐이나 좀 날러 드릴까 했더니.

이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집과 방안을 둘러보고 마루에 걸터 앉으면서 노라를 힐끔 곁눈질로 본다.

몸과 키가 그리 크지 못하여 정원이와 앞서고 뒤서고 들어 올 때에 정원이의 큰 체격에 비하여 매우 빈약하여 보였다.

양복도 그저 수수하고 얼굴은 검은데다가 표정이 분명치가 아니하였다.

게다가 말소리가 뜸직뜸직한 것이 사람이 내숭스러워 보였 다. 이 사람이 혹 어제 혜경이가 말하던 정원이의 약혼자라 면 그다지 어울리지 아니하는 배필이라고 노라는 생각하였 다.

정원이는 방으로 들어와 이사짐 늘어놓은 것을 이리저리 살펴본 뒤에 문을 닫고 옷을 갈아 입기 시작한다. 반닫이 속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입었다 벗었다 하다가 그 중에 하 늘한 보일 치마에 하얀 단속곳을 받쳐입고 적삼은 어제 입 었던 생수깨끼 저고리를 횟대에서 내려입는다. 마루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방으로 들어가실걸……

여기도 좋습니다. 곧 갈 테니까……

선생님두 원! 이사짐을 날러 주실 테면 좀 진즉 오시지 이 제 오시요?

허허…… 이담 이사하실 때는 일측 오지요, 허허.

누구래 밤낮 이사만 하구 다니나요.

이담에 큰 집으로 이사를 아니하시븼니까?

큰집이 있어야지요! 니 선생님이 하나 사주실래요?

사 드리지요, 허허.

어머니!

정원이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짜증이 난 것이다.

노라가 보기에도 꽤 수다스런 마나님이다.

와 그르니?

괭히 그런 소리를……

하믄 어떻니! 웃느라구 그러는데……

정원이는 문을 열어놓고 마루로 나섰다.

나는 이사가 바쁜 줄 아구 부리나케 쫓아왔지…… 어머니 나 어데 갔다와요.

또 빼빼공 치러 가니?

호호호호.

하하하하.

정원이와 이선생이라는 사람은 같이 소리를 내어 웃는다.

빼빼공이 무어유? 빼비 골푸라고 실컷 가르쳐 드려두……

나는 그런 신식말은 모른다…… 일쯔 와서 저녁 먹어.

가봐야 알지요…… 잠깐 다녀오겠읍니다.

정원이는 노라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서요.

네, 편안히 가시요. 또 오시요.

마나님은 손님을 은근히 배웅하고 벙글벙글 웃으면서 곰방 대에 담배를 붙여 문다.

우리 정원이하고 약혼한 이야요.

네……

노라는 그 말이 미덥지가 아니하였다. 어제 정원이가 한 말도 있거니와 그의 손가락에는 약혼반지도 끼여 있지 아니 하였다.

일본가서 대학교 졸업을 하구 미국 가서도 대학교 졸업을 하구, 참 도저한 이디요. 얌전도 하구…… 재산은 별로 없이 요. 한 삼백석은 하디만……재산이야 없으면 멀 하나요.사람 이 잘 나야디……

묻지도 아니하는데 이런 말 저런 말 늘어놓다가 부엌으로 내려갔다.

정원이는 밤 늦게야 돌아왔다. 저녁 밥상을 그대로 묵히고 자리에 누워 부인잡지를 들여다 보다가 모녀가 다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노라는 여러 날 피곤한 끝이건만 잠이 잘 오지 아니하였 다.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데 듣지 못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었다.다른날 같으면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할 리가 없겠지만 혹 그 전당국 주인이 벌써 왔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반대하신단 말씀이지요?

이것은 성희의 목소리다. 그 말을 받아 걸걸한 남자의 목 소리가 들린다.

반대 여부가 없지…… 없지만 뒷일이 아니 맘이 놓인단 말 이지.

어째서?…… 오라버니가 보시기에는 내가 그렇게 철이 없 어 보이우?

노라는 비로소 시골 있다던 성희의 친정오라버니가 올라온 줄을 알았다. 이렇게 남이 남매간에 모여앉아 일을 서로 상 의하는 것을 보니 노라는 자기도 오라버니나 하나 있었더라 면 오죽 좋았으랴 싶어 부러운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자란 백 살을 먹어도 철이 없기로 들면 없는 법이니까.

성희의 오라버니는 그저 존존하게 이렇게 대답을 하고 성 희 역시 일신의 대서롭잖은 일을 상의하는 자리건만 마치 지날 말 삼아 말을 하듯이 도란도란 아야기를 한다.

늙어가시면서 히니꾸는 여전하시군!…… 아무튼 그건 그렇 다구……그러니까 오라버니한테 상의를 할 요량으로 이렇게 올라오시게 힌게 아니예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일은 발써 열에 여덟이나 다 진행시켜 놓고 나서 날더러 상의야?

노상히 그렇지도 않아요.

큰마누라는 지금 어디 있다든?

같이 있지요.

기생첩을 얻어서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자식까지 하나 있는데 갈렸다고 그립디다.

누가 그래? 서씨 당자가?

네.

그거야 종잡을 수 있나!…… 또 위인이 하두 호색한이 되 어서……

이야기 소리는 잠깐 끊기고 잠잠하더니 다시 성희 오라버 니의 약간 목 가다듬은 말소리 가 들린다.

내 생각 같아서는 이렇다…… 십 년 전에 그 사람이 그만 큼 네한테 열중이 되었었는데 너는 그때는 흥! 그 따위 군 천 서무주임! 하고 편지 답장 한 번인들 해 주었니……

그거야 그 사람의 지위를 보니 그랬나요? 그저 사람이 싫 으니까 그랬지.

글쎄…… 그렇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아니했드란 다…… 그래 어쨌거나 그 사람은 군수깨나 지내먹고 또 돈 도 좀 모았고, 그래 이를테면 성공을 하잖었니?…… 그런데 그 사람을 마다고 다른데로 갔든 너는 자, 남편을 앓고 혼 자 되었지…… 자식이 둘이나 달렸는데 살기가 이렇게 어렵 지…… 이찜 처지가 서로 뒤바뀌었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 사람이 지금와서 자기는 십 년 전 그대로 사랑을 하니 같이 살자고 한다고 그래 섬뻑 승낙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났드냔 말이냐?

성희의 대답은 없어 잠시 잠잠하고, 그의 오라버니가 다시 말을 한다.

머 이것은 내가 너를 나무래는 것이 아니다. 나무래는 것 이 아니고 말하자면 그것이 네한테 퍽 불리한 조건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고…… 그래 너는 가난에 좀 시달렸다고 그대도록 자존심이 꺽였단 말이냐? 한심하다!

자존심으로 배가 부른가요?

허허, 옳은 말이다. 그것은 일면의 진리는 된다……그렇지 만 그보다도 그래 지금 네가 그렇게 배가 고프냐?

어떻게 들으면 좀 꼬집어서 말을 하는 듯도 하나 대체로 말하는 목소리며 조백이 있는 사리가 퍽 침착하고 둥근 맛 이 있어 어느 구석인지 인정이 있어 노라에게는 상상이 되 었다. 동시에 그러한 점이 병택이의 일면과 흡사한 듯하여 대체 어떻게 생긴 사람인고? 하는 궁금증도 났다.

이 몇해지간이야 그런데로 지내갈 수 없는 것은 아니예요.

또 이집을 팔면 일천 한 오백원을 받아요. 그놈에서 금융조 합의 빛을 갚고 남은 것으로 하다 못해 반찬가게라도 내었 으면 목구멍이야 얻어 먹고 살테지요.

그랬으면 좋겠구나?…… 금융조합 빛이 얼만데?

육백 원하구 조꼼 더 되는지?

잘 하면 천 원은 남겠구나…… 그러면 그 계획이 좋으데 왜 그러니?

그래도 싫어요.

왜?

그저……

허허허허. 나도 안다. 네가 아직 젊은 줄을 나도 안다. 그 러니까 시집을 다시 가고 싶기도 하겠지.

오라버니는 자꾸만 실없는 소리를 하시느라고……

사실인걸 무얼 인제 세삼스럽게 부끄럼을 타니?…… 그러 니 그건 그렇고…… 그 밖에 또 무슨 이유가 있니? 혹시 너 그 서씨한테 다소간이라도 정이 가는 것이나 아닐거나?

아니,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없고……

없고…… 그러면?

싫여요. 가난이 싫여요.

무슨 대답이 들려오나 하고 있던 노라는 부지중에 혀를 끌 끌 찼다.

가난이 그렇게 싫으냐?

싫다는 것보다 견델 수가 없어요. 오라버니도 아시다시피 제가 몸이 허약해서 고된 일은 못하지요.자식들은 자라나는 데 멕이고 입히고 공부도 시켜야지요. 무얼 가지고 어떻게 해요? 혹 어려서부터 고생에 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살 때는 언제 손 끝에 물이나 묻혀 보았어 요? 그러다가 저애하고 결혼해서 고생을 시작하다가 혼자 된 요 며 해는 참 죽을 고생 다 했답니다.더는 못 견데겠어 요……죽은 사람한테 의리를 지킬게 어데 있어요? 첩이면 어때요? 과부의 수절이니 정조니 하는 그런 낡은 도덕의 노 에가 될게 무어에요?…… 글쎄 오라버니, 이걸 보세요. 우리 사랑채에 전세로 들은 여자가 하나 있는데 시골서 의동생이 라는지 하는 소박데기 하나를 데리고 왔어요.그런데 그저껜 가 그 색시 남편이 오고 또 새로 결혼한 여편네가 와서 야 료를 놓고 갔는데……

왜 야료를 놓아?

그 사내가 큰 여편네한테 다닌다고 작은 여편네가 강짜가 나서 잘려와 가지구는 큰 여편네를 물어뜯고 욕을 했어요.

그러니까 사내는 되려 승겁게 큰 여편네 머리채를 잡아 내 동뎅이 치면 서 욕을 하겠지요. 그랬는데 그날 저녁에 부엌 들보에다 목을 메고 죽었어요…… 에구 끔찍해!…… 글쎄 그런 못생긴 것이 아데 있어요? 왜 죽어요? 그까지 사내녀 석 보아란 듯이 이혼을 해 주고 딴 사람을 얻어서 버젓하게 살잖구!…… 거 묵은 도덕의 노예가 아니유?

노라는 슬며시 결이난다. 옥순이는 가령 묵은 도덕의 노예 라고 치더라도 그것을 비방하고 있는 사람은 돈에 팔리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무얼 남더러 못생겼니 어리석 으니 할 게 없지 아니한가!

남장의 목소리가 다시 계속 되었다.

그래 묵은 도덕에 얽메어 그것이 시키는데로 생사를 끝내 는 사람은 봉건 도덕의 노예라고 볼 수 있고, 또 돈에 얽메 어 돈이 시키는데로 몸을 굴리는 사람은 상품경제시대의 노 예라고 볼 수가 있고……

노라는 이 말이 고소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내 자유로 하 건대……

그거야 자유겠지..... 그렇지만 그건 노예가 되는 자유 야……

자유면 자유고 노에면 노에지 노에가 되는 자유- 난 그런 어려운 말은 몰라요.

이말은 노라에게 역시 어려운 말이다. 그는 노예가 되는 자유.....노예가 되는 자유.

하고 속으로 되풀이 하여 보았다. 알 듯싶고 또 성희의 처 지를 설명하는 적절한 말 인 것 같은데, 그러나 막연하여 그 참뜻은 해득이 아니 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런 것 저런 것을 돌아보잔고 서씨한테로 간다고 그리자…… 그러면 지금 네가 생각하는 것 같이 그 렇게 여의하게 살어가게 될 줄 아니?

아니 될건 무어 있어요? 그 사람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치않고 나를 사랑한다니까 사랑받고 잘 살고 좋잖아요?

글세 그렇게 잘 될 것만 생각을 하지 말고 잘못 될 것도 생각을 해 봐야ㄷ지..... 자,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네가 지 금 이 궁경에 빠져가지고 그 사람에게로 갔다가 다행히 오 래도록 잘 살면 이거니와 그렇잖고 얼마 지내다가 저편에서 탁 차버리면 어쩔테냐? 그렇게 되고 나면 돈을 바라고 군수 퇴물 전당국쟁이의 셋째첩으로 갔든 너를 누가 거들떠 버기 나 하겠니?

그렇게 되어도 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꼭 그렇게 되란 법 은 어데 있나요? 팔자에 맡기지요.

한참만에 성희의 대답이 들리어 왔다.

그렇다면 나도 더 할 말이 없다. 나도 네가 고생이나 덜 하고 후분이나 좋았으면 퍽 안심이 되겠다.

그 담에는 문 여닫는 소리가 두어 번 들리더니 아주 잠잠 하다.

사흘이 지났다. 노라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 세수를 하노라 니까 안채 노인이 새 옷을 갈아 입고 나와 작별인사를 한 다.

안녕히 계시우. 나는 시골로 가우.

노라는 속으로 빨리는 서둔다 싶었다.

어찌 그렇게 갑자기 내려가세요?

네, 그저……. 가까우니까 종종 오지요.

이렇게 심상히 말은 하나 섭섭해하는 눈치가 완여히 보인 다.

저 새로 오신 이랑 노인이랑 안녕히 계시우. 오시자 마자 내가 이렇게 떠나서 섭섭하우.

네, 안녕히 가십시요.

안녕히 가시우.

노라가 보니 중문 밖에는 용식이와 성희가 나서고 있고, 오라버닌 듯싶은 헙스룩한 양복 입은 사람이 돌아서서 있 다. 먼빛으로 보아도 성희의 눈에는 충혈이 되고 눈가가 부 싯부싯하다.

노라는 가서 붙들고 위로를 하여 주고 싶기도 하나, 야지 없이 나무라 주기도 하고 싶었다.

이튿날-일요일이다.

세 식구가 앉아서 조반을 먹노라니까 속달우편 하나가 정 원이에게로 왔다.

정원이는 밥숟갈을 놓고 편지를 뜯어보다가 골을 내어 홱 내던진다.

니 선생님 한테서 왔지?

마나님은 편지를 집어 알기나 하듯 겉봉을 이리저리 뒤져 보며 묻는다.

그렇다우.

메랬니?

오늘 인천 가자구 약속을 해놓고- 인제 와서 못 간다구 그 래! 룸펜이 돌발사건은 무슨놈의 돌발 사건이야.

옆에 있는 노라가 미안할 만큼 그는 골이 나 가지도 투덜 거린다.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오늘 못가면 담에 가렴…… 어서 밥이나 먹어라.

삼어요…… 어머니. 참 혜경 아주머니더러 나 약혼했다구 그랬수?

응.

응이 뭐야! 누구하구?

니선생하구……

참! 난 어머니 따문에 죽겠어! 글쎄 어쩌자구.

정원이는 금방 울 듯하다. 그는 밥상에서 아주 물러 앉아 속달 편지를 박박 뿠는다.

그랬으면 멜 하니?…… 약혼한 거나 일반인데……

머가 약혼한 거나 일반이야! 누가 그따우 룸펜에 바보하구 약혼을 해?

인제는 마나님도 아주 성이 났다.

뎨놈의 에미나이 하는 소리 바라. 누구서 그렇게 버릇없이 말한다든?

하믄 어때? 그따우 바보……<안나오도꼬와 온나노데끼소꼬 나이다>(그런 사내는 계집애가 되려다 사내로 된걸.) 이렇게 해놓고는 저도 서글퍼서 하하 웃어버린다.

노라도 어이가 없어서 따라 웃었다.

뎨년이 미쳤어!

어머니는 망령나구 호호…… 그러니까 시집을 진즉 보내 지!

그러니까 니선생하고 결혼하란빡에.

좀더 두고 봐서.

보기는 무얼 보아…… 나이 스물다섯이나 먹어가지구.

스물다섯인가! 셋이지.

그러지 말구 올 갈에 성례를 하려마…… 사람 잘나고 학문 있고 무에 부족해서 그래?

돈이 있으면 며푼이나 있어요.그까짓 벼한 삼백석 하는 것? 일년에 시세가 좋아야 삼천 원.

삼천 원이 적은 돈인가? 저는 삼백 원도 없으면서……

그래두 인제 봐요.

인제 보다니 네가 무슨 수가 있느냐?

이렇게 마나님이 묻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말도 아니하였다.

그 말 대답을 정원이가 어떻게 하나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 다.

정원이는 도로 밥상으로 다가 앉아 먹던 밥을 꺽꺽 판다.

선ㅅㅇ님, 오늘 창경원 갑시다.

선생님이란 노라더러 하는 말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지- 아마 달리 무어라고 물을 말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정 원이는 선생이라고 불러버릇 하였다. 노라는 듣기가 어색하 였으나 그것도 귀에 익으니 그만하였다. 그리고 노라는 정 원이더러 그냥 정원씨라고 부르고,마나님 더러는 어머니라 고……마나님 불렀다. 마나님은 처음 오던 날 밤에 고향을 묻다가 전라도라고 하니까 그러면 호남이구려 하더니, 그 이튿날 부터는 호남댁으로 지정을 한 것이다.

노라도 실상 오늘은 혜경이나 청하여 가지고 교외 어디로 나아가 바람도 쐬고 그동안 어수선 하여진 머리도 가다듬고 할 생각이었으나 창경원은 그다지 내키지 아니하였다.

글세 어쩔까……문밖이 좋잖어우?

창경원이 좋아요. 지금 작약이 한참이라던데.

작약? 작약 같으면 한번 볼만은 하지…… 그럼 창경원을 다녀서 어디로 갈까?

그래도 좋지요……그런데 참 오늘 오재환씨가 마작 가지고 와서 배워 준다고 한거……

글쎄……

그이가 무엇하는 이요?

마나님이 내달아 묻는다.

재환이는 정원네가 이사해오던 이튿날 저녁때에 찾아와서 옥순이의 재를 올리라고 돈 오십 원을 주어 절에다가 부탁 했다고 보고를 하였다.

정원이와는 그 자리에서 인사를 저희끼리 어떻게 어물어물 하다가 하였다. 마작 이야기가 우연히 났었는데 정원이가 퍽 재미있다더라고 하며 배우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본 그는 그러면 오는 일요일에 가지고 와서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마작은 노라도 심심풀이로 배우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면 재환이가 아주 제 집 드나들 듯할 테니 그것이 뜨악하여 찬 성도 못하고 반대도 아니하였다.

마나님이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데 노라는 대답할 말이 없다. 실상 무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전에 옥순이더러 물었으면 알았겠지만 그것은 묻지도 아니하였고 옥순이가 이야기도 아니하였던 것이다.

글쎄요. 자세 모르겠는데요.

한 고향이 아니요?

한 고향이 아니어요. 이번에 그이 부인이 죽었는데 나하고 퍽 가까워서 알게 되었어요.

예…… 부자로 잘살디요?

네. 한 칠천 석 한다지요.

참 숱한 부자다!

마나님의 입에서는 저절로 감탄하는 말이 흘러 나왔다.

나이 며이래요?

스물다섯이라든지요.

한참때로구려! 이번 상처힌 뒤에 아직 장가 아니 들었겠지 요?

이것은 속이 빤히 굽어다 보이는 말이다. 노라는 밉광스러 운 생각이 나서 지금 고르는 중이라고 하려다가 그래도 죄 스러운 것 같아서 인제 정실로 들어 앉을 여자가 있었다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혜경이가 올라왔다. 노라를 놀러가자고 청하러 온 것이다.

정원이는 재환이가 오거든 같이 가자거니, 노라와 혜경이 는 그가 싫단 말은 하지 못하고 그저 그냥 가자거니 서로 우기면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안채 마당에서 캑캑하고 남자 의 담 뱉는 소리가 들린다.

용식으 외삼촌은 어제 아침에 내려갔으니 없을 테고, 그러 면 분명히 전당국한다는 서(-)가 이거나 생각하고 노라는 뚫어진 들창문으로 안채를 내어다보다가 움칫 놀라며 혜경 이더러 오라고 손짓을 한다.

혜경이는 노라가 비켜주는데 서서 문구멍으로 안채를 내어 다 보았다.

이편으로 향하여 앞마루에 웬 사십이 좀 넘어 보이는 사나 이가 앉았는데 어디선지 한번 본 듯한 얼굴이다. 그러나 확 실한 기억은 나지 아니한다.

혜경이는 돌아서서 노라의 약간 놀란 얼굴을 이상히 여기 면서 물었다.

누구야? 영감 얻었나?

응.

언제?

첨 봤어…… 그런데 저게 올 정월 초하룻날 황산여관에서 매 맞든 사람이야!

엉?

혜경이는 놀라 다시 문구멍으로 내어다 보았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분명히 그 사람이다.

가냘픈 몸에 특징있게 되똥 튀어나온 이마와 광채가 심상 치 아니한 두 눈, 그리고 좌우로 뽀족하게 벌어진 자가사리 수염- 그때에 언 듯 보았지만 사단이 요란했던만큼 인상은 깊이 남아 있었다.

"정말 그렇구려!

옳지?

그래. 그 쑥이야…… 그런데 어떻게 되서?…… 시골 군수 라고 하잖앴수?

지금은 통안서 전당국을 한대…… 군수는 그만둔 게지.어 떻게 그렇게 자세 아우/ 노라는 지나간 사흘 전 밤에 듣던 이야기를 대강 들리어 주었다.

혜경이는 흥미있게 이야기를 듣고나서 다시 한번 들창구멍 으로 내어다 보았다. 사내는 보이지 아니하고 건넌방에서 작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자 방안에서 푸시시 흐트러진 성희가 문을 열고 건너간다. 아이들은 안잠자기와 같이 건 넌방에서 재우는 모양이다.

잘 되었구먼…… 나허구 처지가 같에서 동정도 하고 싶고 또 불쌍도 한걸 ……

혜경이가 돌아서서 웃는다.

같은게 무어야 아주 반대지……세째첩이래요.그러고 혜경 이는 그때 둘이서 서로 다 사랑했잖앴수? 그러다가 돈 때문 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지?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런게 아 니래요…… 성희는 아주 첨부터 저 사람을 거들떠 보지도 아니했데요.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서 헤어졌다 가 돈 때문에 다시 만난 곳이고, 혜경이는 돈이 없어서 헤 어 졌다가 사랑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된거 아니요?…… 그러 고 하나는 셋째첩인데 하나는 정실이구.

이야기를 하는 동아에 정원이가 쫓아와서 들창구멍으로 내 어다보다가 사내를 발견하고는 허겁스럽게 목안엣 소리로 묻는다.

과부라더니 없던 사내가 동저고리 차림으로……. 저게 무 어야?

노라와 혜경이는 손님이겠지하고 웃어버린다.

세 사람이 준비를 하여가지고 막 밖으로 나서는데 재환이 가 허덕거리면서 들이닿는다.

어데를 가세요?

그는 세 여자를 번갈아보면서 묻는다. 노라는 눈치가 어떠 한가 하고보니 전 같으면 모인중에 자깅게로 제일 시선이 자주 왔겠지만 인제는 그것이 정원이에게로 옮아버렸다.

그는 속으로 잘 되었다 싶어 숨이 내쉬어지기는 하나 섭섭 하기도 하였다.

아무도 대답이 없는 것을 상관치 아니하고 재환이는 제 말 을 늘어 놓응다.

마작을 가지고 올랴다가 날도 좋고 하길래 여러분 모사고 교외로 나갈 양으로 그만두었지요……어데 놀러들 가세요?

그는 이번에는 정원이를 보고 묻는다. 남자가 있는 곳에서 의 정원이의 태도는 딴 사람이 된다. 그는 마지못하여 겨우 대답을 한다.

네.

어데로 가세요? 제가 타고 온 택시가 있으니까 같이 타고 가시지요?

아무도 대답을 아니하고 서로 얼굴만 치어다본다.

펑.

도이멘에 앉은 성희가 홍중을 타패한 것을 정원이가 펑을 하고 집어온다.

정원이의 윗손인 혜경이가 쓰모를 하려다가 움칫한다. 정 원이의 등 뒤에서 패를 굽어다 보고 있던 재환이가 발광을 한다.

부-펑 부-펑……거 왜 펑하십니까? 패가 좋은데……옥당을 꾸미세요. 부-펑 부-펑.

그는 자기 손으로 홍중쪽을 도로 판에 내어놓는다.

한번 뒤집잖애요?

정원이는 아까운 듯이 펑하였던 홍중 두 쪽울 도로 일으켜 세운다.

혜경이가 쓰모를 하여다가 넣고 구통을 던지니까 정원이가 이것 먹어야지요?

하고 재환이에게 묻는다.

그건 왜! 쓰모 쓰모…… 옳지.마작이 서고 홍중 내버리시 요.

노라가 쓰모를 하다가 끼고 더듬더듬하다가 타패를 한다 재환이를 선생으로 모시고 노라, 정원이, 성희, 혜경이 이 렇게 네 사람이 마작을 배우기 시작한 지 한달이 되어온다.

마작은 처음엔 재환이가 쓰던 것을 가지고 하였으나 몇일 후에 새로 만든 탁자와 한가지로 재환이는 새 마작 한 벌을 선사 하였다.

혜경이는 살림을 하는 때문에 매일 오지는 못하였으나 전 에 조금 익힌 적이 있어서 그다지 축에 빠지지는 아니한다.

그중에 제일 빠지는 것은 성희다.

약혼을 하였다고도 하고 아니하였다고도 하는 이선생이라 는 사람은 베이비 골프와 한가지로 정원이에게서 멀어졌다.

그 대신 마작과 한 가지로 이선생이 정원에게서 멀어진 그 거리만큼 재환이와는 가까워졌다.

정원이는 은행에서 일이 끝이 나면 누눈도 팔지 않고 집으 로 달려온다.

그러면 대개는 재환이가 와서 앉아 있기, 그렇잖으면 정원 이가 돌아와서 옷을 다 갈아 입는 시간이 다 가기 전에 으 레 오곤 한다.

그것은 비바람과 더위를 초월한 매일 행사다.

혜경이가 참례하는 날이면 재환이는 코치로 물러 앉는다.

말은 이 사람 저 사람 돌아가면서 보아준다는 것이나 대개 는 정원이의 뒤에 붙어 앉아 있다.

혜경이가 아니오는 날에 재환이도 한 축에 끼인다.

네시 반에 판을 벌이고 앉으면 초대들이 되어서 저녁먹기 가 저문다.

한짱이 끝이 나면 혜경이는부랴부랴 내려가기도 하고 같이 저녁을 먹고 게속하기도 한다. 재환이도 같이 밥을 먹는다.

그는 그것이 미안하다고 쌀 한가마니를 들여다 주었다. 그 러나 그는 귀여운 마작 제자들을 위하여 사흘에 한 번쯤은 런치나 대관원의 북경요리를 불러온다. 어느때는 올때에 미 리 시켜놓고 여덟시고 일곱시 반이고 가져오라고 한다.

재환이가 이와 같이 향락의 사도가 되기에는 한편 그만한 대가(代價)를 치르지 아니치 못하였다. 그는 문제의 히스테 리 여인을 결혼신고를 하고 민적에 올려주고는 산삭이 가까 워 오는 것을 구실삼아 친가로 내려보내었다. 정원이에게 정신이 쏠리기 전의 일이다.

저편에서 생각하면 서울같은 곳에 남편을 혼자 두어두는 것이 위험은 하나 as적 수속이 되었겠다 다소 방탕하더라도 무기는 이편에 있는지라 안심을 한 것이다.

정원이는-이라느니보다 등 뒤에서 코치를 하고 있는 재환 이가-애가 쓰였다.

넉 자 중에 한 자만 쓰모하면 옥당방이 달리는 것이다. 다 른 데는 보니 그렁저렁 방이 달린 눈치다.

그러자 정원이는 남풍쓰거화를 떠다 놓고 영상에서 쓰모를 하니 팔만이다. 육칠만과 삼사통이 있었으니 인제는 양오통 방이다. 정원이도 비소 다뿍 긴장이 되어가지고 타패하는 것만 똑바로 보고 있는데 중문 밖에서 정원씨!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선생이라는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정원이는 맛있게 먹던법을 돌이나 씹은 듯이 이맛살을 찌 푸리고 마나님을 돌아본다.

마나님은 이것이 한 달 전이라면 두말없이 뛰어나갔을 것 이다. 그러나 그의 딸의 심정의 변화를 청우게보다도 더 잘 짐작한다.

정원이 없시요.

내어다 보지도 아니하고이렇게 대답을 한다.

노라와 혜경이는 무심결에 서로 치어다보았다.방문이 환하 게 열리었으니 중문간에서 조금만 고개를 들이밀어도 방안 이 굽어다 보인다. 대뜰에는 정원의 구두가 또렷이 놓여있 다. 입때까지 짓걸이던 목소리가 밖에까지 응당 들렸을 것 이다. 노라는 자기 얼굴이 화끈 다는 것 같아 정원이를 바 로 보지 못하고 외면을 하였다.

아니 왔어요?

한 달 전에 큰 집을 사 달라는 말에 사 드리지요 하고 친 숙하게 대답하던 그 말씨 그 음조 그대로다.

아니 왔어요.

이 대답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그대로다.

밖에서는 한참 있다가 뚜벅뚜벅 발자죽 소리가 멀어진다.

노라는 재환이가 어떠한가 하고 돌려다보니 기쁨을 감추다 못하여 남은 미소가 입 가장자리로 흥건히 흘러져 나오고 있다.

그러자 혜경이가 양통을 쓰모하여 가지고 만지작거리다가 내놓자 패가 떨어지기가 바쁘게 정원이와 재환이의 훌라.

하는 음향 쌍주곡이 요란히 울린다. 얼결에 혜경이는 아이구머니!

소리를 치고 던진패를 도로 집어가려다 만다.

젖원이가 양통을 집어다가 딱 맞추어 놓는다.

구백서른 일천팔백예순……

재환이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한다.

아즈머니가 짱이지? 아직 바가지가 남었수?

정원이가 혜경이를 놀린다.

걱정마라…… 재환시는 가마 좀 계시우! 둘이 하는걸 당할 수가 있어야지.

허허…… 미안합니다. 그러면 김선생 코치를 해드리지요.

제발 싫여요…… 가만히 앉어나 계서요.

돈 닷돈 내놓고 저차저차 한다는데 속이 쑤셔서 가만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나 무렴을 당한 재환이는 뒤로 물러 앉았다. 네시 반 에 시작한 마작인데 서풍초에 여섯시가 거의 되었다. 마나 님은 피우던 담뱃대를 재떨이에 털고 일어섰다.

저녁밥이나 짓자…… 해가 좀 짧아졌는지……

재환이는 노인이 일어서서도 주춤주춤하고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는 눈치를 잘 안다.

저녁밥 짓지 마시지요. 마작이 끝나면 진고개나 같이 가서 저녁들 잡숫게……

그래서 쓰나요……늘 그렇게 용처를 쓰시게 해서……

천만에요……그만두고 앉어서 구경이나 하세요……나는 나 가서 자동차부에전화나 걸고 오지요.

나가신 길에 선생님 심부름 좀 해주세요.

정원이가 패를 굽어보다가 앉아서 정말 심부름 시킬 듯이 청을 한다.

네.

아이스크림 좀 시켜주세요…… 아이스크림이 없으면 밀크 세키.

사실 마작에 열중되어 덥다고 하는 사람은 없어도 모두들 땀을 퍼흘리고 있다.

음식 같은 것을 불러오면 그것이 재환이 자발적으로 한 것 이면 말할 것도 없비만 정원이 주문하는 것도 으레 재환이 가 선뜻 나서서 치러 준다. 정원이는 형식으로 돈지갑을 꺼 내들기만 한다.

그런 속을 잘 아는 혜경이는 조롱하기를 잊어버리지 아니 한다.

이기고도 한턱 내니?

그럼…… 이긴 턱으로…… 그 대신 이따가 아주머니는 진 턱을 내시요.

나는 구서방이 구두쇠가 되야서.

이 말에 다른 사람은 웃는데 정원이는 새촘 하였다.

마작을 마치고 정원이, 노라, 성희, 재환이 해서 네 사람은 불러놓은 택시를 탔다. 혜경이는 집안 일을 생각하고 돌아 갔고, 마나님은 전에 하듯이 따로이 깃을 보내 주기를 기다 리며 집을 지키고 있고- 청목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정원이는 날름날름 맥주를 두 곱뿌나 들이키더니 얼굴이 홍당무 같이 새빨개가지고 색색 가쁜 숨을 쉰다.

회계를 하는데 성희가 자꾸만 자기가 내겠다고 하는 것을 재환이가 겨우 만류하였다.

나무 양식 대어주고 시골 어머니한테 삼십 원씩 보내주는 것가지 합해서 한 달에 백 원씩 대어준다는 말을 노라는 안 잠자기에게서 잠깐 들은 적이 있다.

미상불 요즘은 마작판에서 청요리도 더러 청해오고 옷 입 는 것도 훤치르르하게 그럴 성싶었다.

그러고 보니 노라는 자기 혼자만이 어깨통이 점점 좁아지 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아니하더라도 죽은 옥순이를 생각해서든지 재환이 에게 대한 자기의 감정 상태를 생각해서든지 이러한 경우를 피해야 할 것인줄을 알면서 그래도 반은 권면에 반은 마작 으로 인해서 질질 끌리어가게 되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나서 진고개로 들어가 정원이는 오래간만에 베 이비 골프를 쳤다.

노라와 성희는 자꾸만 치자고 하는 것을 마다고 재환이와 정원이만 쳤다.

오락이라고는 손을 아니 댄 것이 없는 재환이도 오래다녀 손속이 난 정원이에게 여지없이 지고 나섰다.

그곳에서 나와 악기점에 들렀다.

아무 때라도 정원이와 있으면 유쾌해하여하는 재환이지만 오늘은 더욱 좋아서 못견디어한다.

하나 사까요?

측은기를 하나 사잔 말이다. 그가 정원이더러 하는 그 말 씨는 갈 때 없이 부부와 같다.

댁에 있잖아요?

우리 집에는 있어요…… 마나 사서 마작회에다 선사를 하 지요.

그는 차마 정원이를 사주겠다고는 아니하였다.

아이구 천만에! 그건 무얼 그러세요.

멀요! 네? 아즈머니, 하나 사가지고 가지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글쎄올시다.

노라는 그러라고는 할 수 없고 정원이 때문에는 반대를 할 수도 없다.

구십오 원짜리 콜롬비아 한대를 흥정하고 레코드를 골랐 다. 정원이는 대개 양곡이요 재환이는 남도 소리다.

노라와 성희더러도 좋은 놈으로 고르라는 것을 그냥 옆에 서 구경하였다.

내일 배달을 하여 달라고 하여도 좋을 것을 정원이가 우기 어 그 자리에서 배달을 시키고 우리 네 사람은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것은 마나님이다.

재환이에게 치하와 측음기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음과 수심가가 한 장도 없는 것이 유감이라고 한 다.

한참 레코드를 걸어놓고 노는데 안에서 안잠자기가 나왔 다.

아씨, 나리님 오셨어유.

성희는 이맛쌀을 찌푸렸다.

오셨으니 어떻단 말이야! 그만두구 들어가요.

쫓겨 들어갔던 안잠자기는 되짚어 도로 나왔다.

나리님이 걱정하세유.

머라고 걱정을 하셔!

그러자 안에서는 취한 중에 성이 나서 하는 긴기침 소리가 들리어 나왔다.

한 달 전 그날 아침에 혜경이가 문틈으로 성희의 영감-서 가를 발견한 뒤로 그는 하루 건너 한 번, 혹은 이틀 건너 한 번 오곤 하였다.

대개는 밤이 늦어서 오고, 간혹 초저녁에도 왔다.

정원이와 마나님도 안잠자기의 방송으로 소식은 다 알았 다.

성희는 번번이 마작을 중판메고 나가서 영감을 맞아 같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밤을 지내고 나면 이튿날은 오정이 되어야 안잠자기를 시 켜 인력거를 불러다 타고 돌아가곤 하였다.

이날 밤은 성희가 나갔다가 바로 노라네 방으로 들어와서 있었기 때문에 대문이 잠기지 아니하여 그가 오는 것을 성 희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희는 여러 사람에게 무안한 듯이 작별을 하고 안으로 들 어갔다. 일어선 길에 재환이도 돌아갔다.

나머지 식구는 측음기를 치워버리고 잠자리를 보느라고 전 등불을 마루로 내어걸고 모기장을 치고 있는데 안채에서 심 상찮은 소리가 들리어 왔다.

머 어째?

이것은 무슨 말 끝엔지 서가가 버럭 내지르는 소리다 세 .

사람은 손을 멈추고 귀를 귀울였다. 바로 이어서 성희의 쌀 쌀하게 쏘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왜 괜히 역정을 내고 그러시우!

노라와 정원이는 살그머니 들창문으로 다가섰다. 마침 전 등불을 마루로 내걸었기 때문에 안에서는 이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게 되었다.

안에는 안방 전등이 마루로 환히 내어걸리어 있고 서가가 마룻전에 걸터앉아 부채질을 활활 하는 것이 보인다.

성희는 왼편으로 있는 건넌방 툇마루 앞에 돌아서서 있다.

문이 열린 안방과 건넌방에는 모기장이 치어 있다. 그 안방 중의의 것은 멀리 보아도 생초다.

아이들은 둘 다 잠이 들었는지 보이지 아니하고, 안잠자기 는 조심스럽게 한편 구석에 조그맣게 비켜섰다.

성희의 말대답에 버럭 성이 난 서가는 야윈 바탕에 땀과 술기운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얼굴에 핏대를 세워 가 지고 다시 소리를 친다.

내가 괜히 역정이야?

괜한 역정이 아니고 무어여요? 그새는 아무말도 아니하다 가왜 오늘 저녁에 이렇게 기승을 부려요? 내가 무슨 뉘 주 정받인 줄 아우?

내가 몰라서…… 그것이 장한 짓이래서 아무 말도 아니하 고 있었는 줄 알았던가? 본체만체하고 참어 온 줄은 모르 고……

아니 글쎄, 참고 아니 참을게 어데 있소? 마작을 했으니 그것이 무슨 죄며, 다른 사람하고 같이 좀 놀았으면 그것이 하나 큰 죄란 말아요? 내가 딴 사내하고 행실 굳은 짓을 했 소?

엿을 보고 있던 노라와 정원이는 비로소 싸움의 원인을 알 았다. 정원이는 노라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인다. 마나님 은 모기장 속에 편안히 드러느워 졸음 청하는 담배를 피운 다.

그러면 그게 잘한 것이야? 어느 때고 내가 와 보아서 집에 붙어 있는 때가 있었나? 노는 것도 분수가 있지…… 밤이고 낮이고 집구석은 비워 놓고 마작만 하고 앉었기 아니면 젊 은 사내놈 따라서 빙빙 쏘다니기…… 무얼 잘 한게 있어?

내가 젊은 사내하고 다녔으면 화냥질을 했어? 화냥질을 했 어? 눈으로 보았어? 눈으로 보았어?

성희는 악을 올려가지고 서가에게로 다가서며 들이댄다.

건넌방에서는 자던 아이들이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깨어 큰 아이는 모기장을 떠들고 휘휘 들러보고, 작은 아이는 모기 장 속에서 엄마를 부르고 소리쳐 운다. 안잠자기가 방느로 모기장을 걷고 들어간다.

이쪽에서는 마나님도 싸움이 크게 벌어지는 줄을 알고 일 어나서 내어다 보며 중얼중얼 무어라고 중얼거린다.

서가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어 걸음 성히 옆으 로 다가 서서 그래도 잘했다고 요렇게 앙탈이냐? 이년!

무슨 거조를 낼 듯이 딱 얼러멘다.

이년?

소리를 되받아 외치면서 성희는 와락 서가에게로 덤벼 그 앞에 바뼥 마주 선다.

이년이라니? 이놈, 누구더러 이년이냐?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서가의 손이 번쩍 들리며 딱 소 리와 동시에 성희가 왼편 볼을 우디더니 이어 남녀의 몸뚱 이는 한데 어울어진다.

성희의 비단을 뿠는 듯한 악쓰는 소리와 그의 몸에 서가의 주먹과 발길이 다 들리는 퍽퍽 소리.- 용식이는 뛰어나와 와들와들 떨며 울고,불에 덴 듯이 우는 작은아이를 안은 안잠자기는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맨다.

와 몰려나온 노라와 정원이와 마나님이 덤벼들어 성희의 머리채를 움켜진 서가의 손과 서가의 멱살을 움켜쥔 성희의 손을 떼느라고 모두 함께 어우러진다.

노라는 주저하는 생각이 언뜻 나기도 하였으나 목전의 관 경이 너무도 급하여 덮어놓고 뛰어나온 것이다.

한참동안 부스대다가 겨우 떼어 말려가지고 마나님이 서가 를 데려다 마루에 앉히야T다.

참으시요, 참으시요. 너그런 바깥양반이 참아야디요. 참으 시요.

네네. 이것 참 미안합니다. 부끄러워 뵐 낯이 없습니다.

서가는 곧잘 마나님의 달래는 말을 듣고 순순히 되레 사과 를 한다.

성희는 노라와 정원이에게 끌리어 이편 건넌방 마루로 와 앉아서 색색 분한 숨을 쉰다.

마나님은 서가와 같이 마루에 걸터앉아 성희의 변명-다시 말하면 자기네의변명을 내어놓는다.

그런게 아니예요……저 농식 어머니를 나두 잘 알디만 그 런 이가 아니예요. 그저 심심하면 나와서 놀고 했디요. 그러 고 우리 집에 오는 이는 우리 딸하고 약혼을 한 사람이예 요……머……

노라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하고,정원이는 이맛살 을 찌푸렸다.

네네, 알겠읍니다. 머 별로 머……그저 화가 나길래 좀 나 무라느라고 했는데 저못된 년이……

머 어째 이놈아…… 네가 나무라느라고 그랬어? 네가 나를 얕보구 그랬지……

성희가 발악을 하고 일어나는 것을 노라와 정원이가주저 앉혔다.

흥!네가 무어길레? 네까짓 년을 얕잡어 보았으면 어때?

너는 무어야 이놈! 관변으로 아첨하면서 군수깨나 살어먹 다가 전당국 해먹는 더러운 고리대금업하는놈이!

서가는 그 말을 물끄러미 듣고 있다가 도리어 유쾌한 듯이 한바탕 웃는다. 그러나 유쾌한 듯한 그 너털웃음에는 날카 로운 칼날이 품기었다.

너 말 잘했다. 참 잘했다 그래. 그렇다. 나는 벼슬아치를 살어먹고 지금은 전댕국쟁이다…… 그래, 그렇지만 네년은 십 년 전에는 개새끼만치도 못보고 네 존 데로 갔다가 죽게 된 오늘날 네가 더럽다고 침이라도 뱉을려던 군수 퇴물 전 당국 고리대금업하는 그놈한테로 한 달에 돈 백원씩에 팔려 왔으니……

그러나 서가의말이 RMx나기 전에 헉!

소리를 내고 성희는 노라의무릎에 엎드려 울었다.서가는 통쾌한 듯이 말을 계속한다.

흥! 분하냐? 서러우냐? 인제 생각하면 분하기도 할 것이다.

섧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보담 며 곱절이나 분했 고 설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고 어찌 되었든 간에 너하고 나하고 다시 만난 이상 너는 내게 계집답게 해 야 옳을 일인데, 지금 와서는 개값에도 못가게 명색이 없어 진 계집이 잔뜩 거만스런 생각만 배지 속에 가득차 가지고 는 나를 사람답잖게 보고…… 이년아, 너는 말하자면 내게 팔린 계집이야! 팔려왔으면 팔려온 값을 해야지?……네게 무엇이 남은 것이 있어서 도도한 체하니? 하기를.... 세상에 돈을 내면 계집이 썩고 남는데 내가 너더러 그따우 버릇을 하라고 가만 있을 줄 알었드냐?

노라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때처럼 구가가 있어서 또 한번 코피를 터뜨려 주었으면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던 정원이는 버쩍 일어서서 서가의 앞으로 갔다.

아니 여보시요, 그건 어떻게 하시는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 까?

그는 서가를 똑바로 내려보면서 입술을 바르르 떤다. 담배 를 붙여 물려던 서가는 잠시 정원이를 뻔히 치어다본다. 보 다가 가볍게 실소를 한다.

네. 무엇 말씀입니까?

당신이 한 말을 모르세요? 여기 적어도 여자가 며이 있읍 니까? 어쩌니 돈을 내면 계집이 썩고 남도록 있단 말씀이여 요? 여기 있는 여자들을 모조리 쓸어넣고 모욕하는 게 아닙 니까?

마나님이 일어서서 딸을 나무라나 듣지 아니한다.

말씀을 하세요. 대답을 하세요.

대관절 당신이 누구길래 남이 여편네를 데리고 쌈을 하건 죽이건 두어두잖고 쫓아와서 시비를 하시요? 나는 그 말 먼 점 듣고 싶소이다.

그렇지만 당신을 여성 전체를 모욕하지 않었읍니까?

마나님은 욕을 하며 정원이를 잡아끄나 그는 듣지 아니하 고 어머니를 뿌리치며 승벽을 부린다.

지금까지 노라의 무릎에 엎디어 울고 있던 성희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일어섰다.

가, 이놈아! 가 가 가, 당장에 나가!

그는 열병 앓는 사람같이 목을 높여 악을 쓴다.

서가는 마루에서 일어섰다.

오냐 간다. 네가 제발 있으라고 떡을 해놓고 비선을 하면 내가 있을줄 아느냐?

서가는 성희에게 뜯긴 조끼와 적삼을 잘 여미고 마루 구석 으로 밀려간 두루마기를 집어 입고 모자를 쓰고 유유하게 밖으로 나가버린다.

정원이는 그의 하는 양을 노리고 서서 보다가 바깥채로 통 통 걸어나갔다.

노라는 다시 엎드려 우는 성희를 부축하여 방에 데려다 뉘 어 주었다.

무어라고 위로라도 하여 주고 싶으나 어떻게 말을 해야 그 것이 성희에게 위로가 될지 몰랐던 것이다.

작은아이는 안잠자기에게 안기어 자고 있고, 용식이는 그 대로 마루에 앉아 있다.

노라는 어린아이들이 불쌍하였다. 그는 용식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식아.

내?

속 모를 풍파를 만난 어린아이는 아직도 겁이 가라앉지 아 니하였는지 비실비실한다.

어서 들어가 자거라.

내.

어머니 옆에 가서 자…… 내가 데려다 주까?

용식이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왜? 어서 자야지…… 응, 어서 가서 자자, 응?

용식이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가 발딱 일어나더 니 그의 어머니가 누워있는 안방을 연해 돌려다보면서 건넌 방으로 들어가 모기장을 떠들고 제자리에 눕는다.

노라는 침묵의비극을 보는 것 같아서 눈가가 더워 왔다.

용식이는 의붓아비를 맞이한 뒤에부터는 안방-어머니의 옆 에 가서 아니 될 곳인 줄을 안 것이다.

철없는 용식이지만 이다지도 어린 마음의 델리키트한 상처 를 보니 노라는 그것이 결코 남의일이니라 싶지 아니하였 다.

의붓아비나 의붓어미나 일반이다. 현이 오래잖아 결혼을 한다는 말을 혜경이한테 들었다.

다행히 마음 착한 여자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아니하다가는 마리아나 송이 아안나가 모두 저렇게 가엾이 자랄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부르짖고 나선 노라 자신이나 자유로운 몸으로써 돈에 몸을 판 성희나 자식에게 대하여 죄를 짓기 는 일반이다.

노라는 옥순이 때의일을 생각하고 안잠자기더러 깊은 잠을 자지 말라는 주의를 시킨 뒤에 바깥채로 나왔다.

이틔날부터 마작판이 쓸쓸해졌다.

성희는 그 일이 있으면서부터 일체 얼굴을 내어보이지 아 니하였다.

성희가 아니 나오는 때문도 있었지만 그러나 실상은 재환 이가 오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는 안집에 파란이 있던 이튿 날 왔다가 정원이와 밖에 나가놀면서부터는 아주 발걸음이 떠졌다. 급한 일이 있으면 속달우편으로 정원이에게 편지를 하든지, 어찌하다가 찾아와도 마루에 앉아 잠깐 이야기를 하다가는 정원이를 데리고 나가곤 하였다.

정원이는 아침에 나가면 자정 전에 집에 돌아오는 적이 별 로 없었다.

대개는 열두시가 지나서, 그렇잖으면 한시 두시에 돌아오 기가 예사였었다.

일요일에도 늦잠을 자고는 오정이 되면 나가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재환이가 와서 같이나가든지 하였다.

재환이가 잘 오지 아니하는 것과 딸이 육장 늦게 돌아오는 것을 마나님이 다른 때 같으면 근심도 하고 딸을 나무라기 도 하였겠지만, 그러나 그러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노상 싱글벙글 웃고 지내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속이 있는 줄은 노라도 진즉 짐작을 하였다.

노라가 효정이를 가르치기는 소를 가르치기보다 더 힘이 드는 일이었었다.

언문 다섯 줄을 가르치기에 오월 유월 두 달이 걸리었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히 깨우치지는 못하였다.

가갸 거겨를 가지고 며칠 승강이를 하다가 겨우 오우고 쓰 고 하게 해놓고 고교구규를 가르치노라면 앞서 배궁 가갸 거겨는 벌써 잊어버린다.

그러면 또 다시 가갸 거겨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

그러한데다가 아이가 변덕이 어떻게 많던지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번은 으레껏 공연한 생트집을 잡아 가지고 이짐을 부리다가는 울곤 한다.

처음은 그래도 낯이 어려워서 선생님인 노라에게 직접 그 러지는 아니하던 것이 차차 얼굴이 익어가니까 걸핏만 하면 말도 듣지 아니하고 글도 읽지 아니하고 끄윽 앉았다가는 안방으로 건너가서 왕하고 울곤 하였다.

그러면 주인마나님은 그걸 등에 걸터업고 건너와서 좋게 말은 하나 노라가 그 애의 비위를 거슬러 준 것으로 허물을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러할 때마다 노라는 그만두라고 털고 일어서고 싶었으나 번번이 참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보다도 좀 더한 이러한 일도 있었다.

성희 집에 풍파가 생긴 지 이삼 일이 지난 뒤니까 바로 칠 월 초생이다.

효정이는 언문은 읽으려고도 아니하고 아침부터 풍금만 짚 어 달라고 졸랐다.

노라는 할 수 없이 걸상에 앉아 동요를 한 곡조 짚노라니 까 안방에서 주인마나님이 건너왔다.

이년! 공부는 아니하고 그 소리만 듣고 있어?…… 썩 이리 와서 글 읽어!

주인 마나님이 손녀를 이렇게 나무라는 것은 노라가 보기 에는 처음이다.

그는 결코 손녀를 그렇게 엄한 말과 얼굴로 나무랄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왜 공부는 시키지 아니하고 풍금만 짚느냐?

하고 노라를 책하는 소리다.

이러한 노골적 질책은 역시 처음 당하는 일이다.

노라는 잘못한 것도 없이 이런 일을 당하기가 억울하였으 나 좋은 낯으로 걸상에서 일어섰다.

거봐라, 할머니가 걱정을 하시잖니?……인젠 그만 하고 공 부하자.

노라는 변명삼아 이렇게 말을 하고, 그러나 또 그 애가 고 집을 쓸까봐서 좋은 말로 달래었다.

그 애가 그렇게 아니할랴구 하더래도 선생님이 알어서 잘 공부를 시키서야지! 어린것들이야 놀 양으로만 하지 멀 아 우?

아이가 어떻게 되었든지 그것은 아랑곳이 아니요 전책임을 결국은 선생인 노라에게 지우자는 것이다.

좀더 자기네의 어린아이가 얼마나 속이 안 되었으며 얼마 나 저능한가를 알았으면 그런 무리한 요구는 아니하련만, 생각하니 사십 원의 돈에 매여 그러한 어거지를 받는 것이 분하였다.

이년, 책 내놓고 읽어봐.

주인마나님은 오르간을 잡고 섰는 효정이를 붙잡아 옆에 앉히었다.

그는 이상스럽게 울음이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골난 볼때 기만 처뜨리고 앉아 있다.

노라는 효정이 앞에 책을 펴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읽 으려고 아니 한다.

어디까지나 배웠수?

마나님은 노라더러 묻는다. 노라는 그것이 아무리 자기의 허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en 달 동안에 겨우 언문 두 줄을 가지고 허덕거렸다고 하기는 얼굴이 따가왔다.

그러나 여차직하면 그만 내던져 버릴 결심을 한 터라 사실 대로 말을 하였다.

언문 두 줄 밖에 못배웠답니다.

진보다 더딘 줄은 알았지만 그러나 너무 의외였던 것이다.

무어요? 언문 두 줄이요?

네……아무리 알켜 주어도 밤을 지내고 와서 보면 잊어바 리고 잊어바리고 해서……

주인마나님은 손녀딸을 흘겨보았다.

네라끼년! 돈 팔십 원을 들여서 국문 두 줄을 배웠단 말이 냐?

주인마나님은 여지없이 손녀를 나무랐다 이년, 아모리 둔하기로니 그래 두 달 동안에 겨우 언문 두 줄을 배우고 말어?…… 그럴 테면 왜 공부를 시키라고 안달 을 해 ? ……. 남이 시킨 것도 아니고 제가 한다고 졸라서 시작한 것이니 좀 정신을 차려야지 …… 나이 열두 살이나 먹은 년이 !

퉁히 그러한 나무람을 듣지 아니하던 효정이라 처음은 실 상 그것이 나무람인지도 잘 몰랐다가 필경 울음이 터졌다.

노라가 달래려고 하나 아무 때라도 할머니가 굽히기를 기 다리고 그리지 아니한다.

생각하면 무리가 아닌 말이다. 두 달 동안에 돈 팔십 원을 들이어 언문 두 줄-스무 자를 매웠으니 그거나마 똑똑히 익 히지도 못하였지만 사흘에 한 자씩이요, 한 자에 사 원씩이 먹힌 셈이다.

노라는 이렇게 따지어 보고 무안한 생각이 드는 중에도 그 러나 돈을 팔십원이나 들여서 언문 두 줄을 겨우 배웠느냐 는 주인마나님의 말이 눈칫밥을 먹는 것같이 목에 걸리었 다.

노라는 비로소 남에게 돈을 받고 부리우는 사람의 처지가 어려운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혜경이 집에 들러 그런 이야기를 하고 어디 딴데 직업을 구할 상의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 그만두면우선 막막할 뿐만 아니라 또 어는 때나 직업이 구해질지 모르는 것이니 그대로 계속하여 다니기로 하였다.

칠월 중순.

비로소 참더위에 들어서는 때다. 수은주는 나날이 높아가 고 서울장안의 모든 사람은 헉헉하고 허덕거린다.

사오 일이나 지독한 더위가 계속이 되던 끝인데 오정이 지 나자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리기 시작하더니 소낙비가 퍼붓 는 듯이 쏟아진다.

노라는 효정이의 학과를 마치고 막 돌아오려고 하다가 비 에 막혀 주저 앉았다.

창자 속까지 시원한 바람이 활활 불면서 댓줄기 같은 하얀 빗발이 퍼붓는 것이 시원한 것도 시원한 것이거니와 보기에 도 통쾌하였다.

노라는 시달리던 더위 끝에 비내리는 것을 바라보노라니 몸이 노곤하여짐 조속조속 잠이 오기 시작하였다.

사실 그는 요즈음 잠이 부족하였다.

좀 돌이켜서는 옥순이의 죽은 일, 그러고 나서 마작, 그러 고 나서는 무더운 방과 빈대에 보채어 밤이면 변변히 잠을 자지 못하였다.

더구나 빈대는 그에게 대적이다.

원체 물 것을 몹시 타서 벼룩 한 마리 빈대 한 마리만 생 기어도 잠을 자지 못한다. 그런데 집이 낡은 집이라 빈대가 유난스럽게 많다.

옆에서 정원이와 마나님이 뱃심 좋게 식식하고 잠을 자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짜증도 났었다.

비는 소낙비로 시작하였으나 곧잘 멈추려고 아니한다.

마침 잠도 오고 비도 오고 해서 노라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팔을 꼬부려 베고 드러누웠다.

안심하고 한잠 잘 수가 있다.

방은 새하얗게 도배를 해놓았는데 빈대 한 마리 눌러 죽인 흔적도 없다.

방바닥은 비워 두는 방이지만 누지면 못 쓴다고 가끔 불을 넣기 때문에 차기는 차면서도 둑둑하지는 않다.

차라리 옥순이도 없고 하니 이 집에 와서 아주 있을가 하 는 생각을 하면서 노라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효정이는 순서없이 짚는 오르가느의 소리가 멀리멀리 가는 듯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낮잠은 조금 자도 오래 잔 것 같다.

노라는 얼마 동안 자다가 숨이 갑갑하여 어렴풋이 잠이 깨 었다.

그러나 잠이 아직 완전히 깨지는 아니하고 그대로 좀 더 잤으면 좋겠는데 덥고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다.

그는 집에서 흔히 정원이가 잠결에 다리를 들어 얹는 것만 여겨 손으로 몸에 눌리는 것을 치우려고 하는데 곧잘 떨어 지지를 아니하여 눈을 떠보았다.

으악.

너무나 놀란 노라는 겨우 이 한 마디를 지르고 숨이 탁 막 혔다.

노라의 누워 있는 위에 덮어 누르고 있는 것은 말썽자리 반신불수이었다.

흉허운 중에도 가뜩이나 큰 얼굴은 무슨 탈바가지 같은 것 으로 노라의 얼굴을 가린 것 같았다.

헤 하고 벌린 입에서 흘러내린 침이 노라의 볼에 흥건히 묻었다.

노라는 숨이 탁 막히고 정신이 아질하는 것을 이래서는 아 니 되겠다고 기운을 가다듬어 두 손으로 그의 아래턱을 힘 껏 떼밀치고 벌떡 일어섰다.

쿵 하고 그는 저편 풍금 걸상에 머리를 부딪치고 뒤로 쓰 러졌다. 그러나 그의 바른손아귀에는 노라의 치맛자락이 단 단히 움켜쥐인 채 그대로 있다.

처음에 노라가 으악 학 외치는 소리에 안방에서 주인마나 님이 뛰어 나오고 효정이도 외다리로 따라나왔다. 주인마나 님도 축축히 내리는 비에 아랫목에 누워 잠이 들었던 모양 이다.

노라는 붙잡힌 치맛자락을 홱 잡아당겼으나 그 병신이 어 디 그러한 손아귀힘이 있는지 팽팽하게 당기기만 하고 놓지 아니한다. 좋지 아니하고 도리어 기어 덤벼들었다.

주인마나님은 방으로 들어와 말리려고는 아니하고 문턱에 결쳐서서 나무라기만 한다.

아 이놈아, 저게 무슨 짓이냐 ! 놓아라.

그것이 노라에게는 홧증이 났다. 그는 치맛자락을 잡은 채 기어드는 병신의 앞가슴을 죽어라 하고 발길로 내질렀다.

캑 소리와 함께 그는 치맛자락을 놓치고 굴러 떨어진다.

그러자마자 등 뒤에서 누라 노라를 홱 옆으로 떠밀고 고함 을 치며 나선다. 주인마나님이 상을 무섭게 하고 노라를 노 려보다 가 덥석 병신을 안고 다둑거리듯 어루만져 준다.

이게 무슨 짓이요 ! 병신을 그렇게 함부루 …… 엥 !

노라는 이것저것 돌아볼 것도 없고 더 참을 수가 없이 되 었다.

무엇이 어째요?

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얼 무엇이 어때 ? 당신은 아무리 여인네라도 성한 사람 이 아니요? 그런데 이건 한쪽을 통히 쓰지 못하는 병신이 아니요 ? 그래 병신이 설사 좀 잘못된 일이 있기로니 !

…… 좋게 놓아달라고 달랠 것이지 그렇게 사정없이 걷어찬 단 말이요? 그러다가 죽으면 어쩔 테요?

노라는 너무도 분하여 와들와들 떨리고 눈에서 불이 튀어 나올 것 같다.

죽어도 좋아요.

노라는 대도 내쏘았다.

무어 어째?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아요 …… 병신이라면서 그래 남의 젊은 여자가 누워있는데 와서 덮어눌어? 그게 잘한 거요?

주인마나님은 시상 그것을 몰랐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 편이 성을 낸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도 할 수가 있지만 지금 은 화가 난 판이라 굽은 것도 바르다고 우길 판이다.

무척 장한 년의 몸뚱인가부다! 좀 그랬으면 어때? 오직 여 편네가 칠칠찮으면 대낮에 남의 집에 와서 퍼버리고 낮잠을 자 ? 그런 여편네가 무엇이 그리 장하다고 그래 ……

노라는 그렇게 듣고 생각하니 방심을 하고 잠을 잔 것이 잘못인 것도 같아 후회가 났다. 그러나 역시 지고 싶지는 아니하였다.

원 별 빌어먹을 꼴을 다 보겠네…… 아모리 제 자식새끼가 귀엽기로니 그래 저 병신을 놓고 남을 나무래요? 좀 생각을 해봐요…… 고 모양 다리를 해가지고 남의 젊은 여자를 벌 건 대낮에 흉측스럽게……

병신이라도 병신 아닌 늬들하고 바구러 가질 않는다. 염려 마라……아모리 병신이요 못났어도 양반의 씨다.

흥 ! 양반 ! 참 양반 구경답다. 저 골을 해가지고 양반의 씨야? 양반이니 어떻단 말이야? 골백번 양반이라도 내야말 로 바구러 오잖겠다.

큰소리는 잘한다! 돈 사십 원식 받고 병신 글 가르치느라 고 쫓어다닌건 누군데 ?

그것이 노라에게는 뼈끝까지 울리게 아픈 말이다.

그는 직업을 얻되 이따위 직업을 얻었던가 이것이 안타가 와 가슴을 쾅쾅 찧고 싶었다.

분이 나는 대로 하자면 달려들어 늙은이의 흰머리를 오독 오독 뜯어 주어도 오히려 속이 풀릴 것 같지 아니하였다.

아이구 ? 더럽고 아니꺼워 ! 내가 이만 멀쩡한 년이 어데 가면 그 벌이 못할까?

노라는 마지막 이렇게 해대고 뛰어나섰다.

비가 그래도 오고 흰 구두가 진흙에 철벅거리고 아까 훑어 잡혔던 치마가 골이 아니다.

노라는 아랫마을까지 내려와서야 비로소 인력서를 잡아 타 고 혜경이 집으로 몰아세웠다.

혜경이는 마침 여편네같이 모양을 해가지고 들이닿는 노라 를 보고 필시 무슨 일이 있었느니라 하여 그다지 놀라지도 아니하였다.

웬일이야 ?…… 비를 이렇게 맞고 …… 저 구두가 저게 머 야.

노라는 새삼스레 분한 생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혜경이는 노라에게 오늘 당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나 서 노라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도리어 싱글벙글 웃었다.

남은 분해 죽게는데 웃고 있어요!

그는 뾰롱해서 벌떡 일어선다. 혜경이는 여전히 웃으면서 붙잡아 앉히었다.

거봐요, 글쎄…… 왜 남편 마다고 자식 버리고 뛰어나와서 그런 일을 당해요?…… 누가 시켰수?

시키다나? 누가…… 그 늙은 년을 왜 내가 그냥 두어 두고 왔어! 흰 터럭을 아득아득 뜯어 줄걸……

세상이 그런 법이야…… 남편 없고 돈 없으면 아모리 고 뛰는 재조가 있어도 별 수가 없어…… 덮어놓고 만만하게 보는걸……

왜 만만하게 보아 ? 남편 없고 돈 없으면 사람이 아니든 가?

글쎄 그거야 이녁 생각이고 세상이 그렇게 되어먹은 것 어 떡게 해?

그러니까 그런 세상하고 사워볼 테란 말이야.

그렇거든 울지를 말어요.

울지 않어…… 나니 울어.

노라는 눈에 눈물이 괸 채 웃었다.

결심만은 좋소마는…… 살어갈 일이 걱정이 아니요? 그거 나마 벌이를 놓쳤으니 인젠 어떻게해?

혜경이는 정말 걱정스러웠다. 도리어 세상을 아는 만큼 당 자인 노라보다도 더 근심이 되는 것이다.

혜경이는 발 넓이 알아보고 남편더러도 알아보아 어디 직 업자리를 알아보려고 속으로 작정은 하였으나 그것이 한 달 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또는 일 년이 걸릴지 모르는 것 이다.

더구나 노라는 취직전선에 나서기에 퍽 불리한 조건이 있 다.

인물이 잘나서 화장을 잘하고 나서면 스물여섯이라지만 네 살은 어리어 보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중년을 바라보는 여자로, 따라서 백화점 의 여점원이라든가는 도저히 바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밖에 은행이나 회사 같은 데는 전문의 지식이 없으니 길 이 트일 수가 없다. 훨씬 방향을 돌리어 버스걸이나 제제직 공이 되자 해도- 아직까지 노라에게 그러한 생각은 없었지 만- 역시 연령 관계로 자격 상실이다.

할 수 없이 지금 당장은 노라가 현재 전세 들어 있는 집을 처치하고 그 돈 백 원을 가지고 우선 취직할 동안 살아갈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런데 성희가 갑자기 더구나 얻었던 영감까지 놓치었는데 그렇게 돈이 도로 빠져나올지가 걱정이 되었다.

성희가 돈을 내지 못한다면 누구 딴 사람에게 넘기었으면 좋겠지만 마침 그러한 자리가 있을지도 또한 모르는 일이 고.- 이러한 상의와 걱정을 하면서 둘이서 같이 점심을 먹고 집 을 나섰다.

비는 개고 햇볕이 쨍쨍하여 눈이 부시다.

혜경이는 노라의 반 달치 월급을 찾으러 간다고 필운동으 로 갔다. 노라가 창피하니 그만두라는 것을 듣지 아니하였 다.

노라는 마나님도 청하여 한 자리에 앉아서 필운동 가정교 수 자리를 작파한 이야기를 대강 하고, 앞으로 직업을 얻기 까지 집 전세 얻은 것을 찾아서 생활을 해가야 할 터인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상의하듯이 말을 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나님은 무엇을 까마가막 생각하다가 묻는다.

백 원이지요?

네.

그거 내가 맡지요.

이것은 노라에게나 성희에게나 생각도 못하던 것이다.

노라가 마나님까지 청해 앉히고 그 이야기를 한 것은 그에 게서 돈이 나오리라 싶어 그리한 것이 아니라 어쨌건 같이 있는 터인데 알리지도 아니하고 집을 처리하기가 무엇해서 그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생각지도 아니한데서 성큼 나서니 반갑기도 하였거니와 의아롭기도 하였다.

우리 정원이하구 상의해서 어떻게 해보지요. 그렇잖애두 어데 방을 하나 얻으려구 했드랬으니까요.

그러면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읍니다. 나도 갑자기 어데서 돈이 날 데가 없고 걱정이 되얏는데……" 성희는 매우 다행히 여기었다.

마나님이 재환이를 등을 대고 하는 말인 것은 깊이 생각지 아니하여도 노라나 성희나 다같이 짐작은 하였다.

성희가 들어간 뒤에 노라는 어쩐지 몸이 찌부드하고 오한 이 나는 것 같아서 베개를 내려 베고 드러누웠다. 아마 낮 잠을 자다가 학질을 붙들렸나 보다고 생각하고 별로 대끼지 아니하였다.

혜경이가 필운동서 돌아왔다. 그는 돈을 이십 원하고 또 몇 원 찾아가지고 왔다.

옛수……이걸 괜히 내버려?……손복할 일이지.

노라는 그 돈이 끔찍이 더럽기도 하고 한편 소중하기도 하 였다.

이 집은 어머니가 돈을 내고 맡기로 했수.

응……잘했구먼……형님 부자 되었습니다그려? 정원이가 저금해둔 돈이지요?

혜경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하는 소리나 옆에서 듣고 있는 노라가 되레 미안하였다.

그러나 마나님은 아주 심상하다.

응……돈 백 원이나 져금한 게 있어서……

혜경이는 입가에 웃음을 띠고 아무 말도 더 하지 아니하였 다.

이날 정원이가 돌아오는 것을 마나님이 밖에 나가 한참 소 곤거리더니 사오 일 후에 돈이 되겠다고 아주 확정해서 대 답을 해주었다.

밤새도록 노라는 열이 오르고 사족이 아팠다. 그리고 왼편 옆구리도 따금따금 결리었다.

이튿날 아침에는 열이 조금 내리더니 저녁때는 다시 오르 고 옆구리도 더 결리었다.

이튿날 노라는 무거운 몸을 일으키어 근처 한약국에 가 약 을 두 첩 지어왔다.

병세를 이야기하니까 학질인가 보다고 하고 임신 여부를 물은 뒤에 약을 지어주었다.

약을 달여서 바로 한 첩 먹고 또 저녁에 한 첩 먹으니까 조금 차도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몸이 아주 가벼워진 것은 아니다.

그는 약간 몸이 편치 아니한 것보다는 더 애가 쓰이는 데 가 있었다. 달랑 남은 돈 백 원이 없어지기 전에 취직이 되 어야 하겠다는-그보다도 하루바삐 취직이 되어서 백 원은 그대로 아껴 두고 싶다 하는 초조한 생각으로.- 취직을 하자면 여기저기 알아보고 돌아다니고 해야 할 터 인데……

노라에게는 그러한 반연이 없었다. 전에 사귀던 사람을 찾 는다면 반연도 없는 것은 아니 나 그 사람들은 모두 현과 가까운 때문에 찾아가기가 창피하였다.

그리하여 막연하나마 혜경이 내외가 어떻게 주선을 하여주 기를 기다리는 것밖에는 딴 도리가 나서지 아니하였다.

몸은 종시 쾌하지가 아니하였다. 심하지는 아니하여도 저 녁때면 으레 오한이 나고 외편 옆구리는 점점 더 결리었다.

그리고 몸이 나른하여 양말꿈치 하나를 꿰매재도 바늘이 손에 잡히지를 아니하였다.

입맛도 떨어졌다. 밥을 먹지 못하니 더구나 몸이 날로 쇠 하여 가는 것 같았다.

그렁저렁 칠월도 거의 다 지나간 그믐께 어느 날이다.

정원이는 사오일 전부터 은행에도 가지 아니하고 밤 늦게 돌아와 늦잠을 자고는 오정때에 나가고 하더니 석왕사로 피 서를 간다고 떠났다.

전세돈 백 원도 이날 마나님께서 받았다.

노라는 이튿날 아침 일찍 혜경이 집으로 내려갔다.

그냥 마나님과 같이 있으면 비용도 절약되고 하겠으나 이 왕 돈을 다 찾은 터인데, 그때까지는 저편에서 집세를 부담 하지 아니한 대신으로 마나님이 식모노릇을 은연중에 하여 왔지만 인제는 도리어 처지가 바뀌어 적어도 같이 밥도 해 먹고 해야 할 터인데 몸이 성하지 못한 노라는 용기가 나지 를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혜경이더러 어디 기식하고 있을 방을 구하여 달라고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혜경이는 방보다도 여러 날 못 본 동안에 노라의 얼굴이 더욱 수척한 것을 보고 놀랐다. 아직 아침 나절이라 그다지 덥지도 아니하건만 노라는 소격동서 안국동까지 내 려오는 동안에 땀이 후줄근하게 배고 몸이 솜같이 비곤하였 다.

혜경이는 여간 놀라와하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