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1장
해는 이미 서으로 넘어가고 가게의 문은 모두 첩첩이 닫혔는데, 동으로부터 서으로 향하여 길게 비끼어 있는 대로는 고운 비로 쓸어버린 것같이 티끌 하나이 날리지 아니하며, 고요하고 적적하여 내왕이 끊어지고 사람의 그림자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는데, 다만 간간이 인력거 지나가는 소리만 혹은 급하며 혹은 천천하여 명절 술을 과음하였는지 인력거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도록 취한 사람도 있는데, 동안동안이 먼 곳으로 좇아 학교 종소리가 뎅뎅 들리니 이는 음력 명일은 관계치 아니하고, 야학교까지라도 휴학을 하지 아니함이러라.
때는 정월 십오일이니 낮부터 춥던 날이 황혼 때 이르러서는 더욱 한기 더하며 북악으로 쫓아 내려오는 찬바람은 길 위의 티끌을 몰아서 한편으로 물리치며, 길가의 전선에서는 잉잉하는 소리 울려나오는데 높은 하늘은 물로 씻은 듯이 구름 한 점도 보이지 아니하고 구슬 같은 별은 여기 저기 깔리었는데, 그 영롱하고 날카로운 광채는 찬 기운을 더욱 돕는 것 같아서 어둑어둑하여 가는 시가(市街)가 거의 얼음 속에 묻힌 것 같다.
이날 낮에는 완연히 솥 안의 물 끓듯이 아이와 어른이 찬찬 의복으로 취한 사람, 노래하는 사람, 희롱하는 사람, 웃는 사람, 즐기는 사람, 각각 제 흥을 찾아서 종일토록 즐기다가 밤이 이슥한 후부터는 그림자 하나이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사방이 고요하여 잠든 것 같은데, 교번소 앞에서 번 서 있는 순사의 왔다갔다 걸음 걷는대로 칼소리만 데그럭데그럭하여, 그 소리 찬밤에 멀리 울려 들린다. 홀연 이때에 소리 없는 인력거에 등불 하나이 보이더니, 그 불이 어떠한 골목으로 들어간 후는 다시 보이, 지 아니하며 살을 에이는 듯한 바람은 적적한 비인 밤에 요란히 불 뿐이라. 어떠한 골목 안에서 늦게 온 손님을 대접하느라고 장국을 끓이는지 길가로 난 굴뚝에서 연기가 일어나는데 여름에 구름 피어오르듯 한다. 그 연기가 좁은 골목 모퉁이에서 일어나자 그 인력거는 당도하여 서로 피치 못하고 그 속을 지나온다.
『어, 매워! 인제 저녁 군불을 때나?』
하며 인력거 탄 사람은 급히 그 연기 속으로 지나가는데 먹고 있던 여송연 타고 넘어지를 인력거 위에서 내어버리는데, 땅에 떨어지더니 빨간 불에서 연기만 몰신몰신 나고 있다.
『그거, 웬 연기가 그다지 매우냐?』
『네, 지금 뉘집 행랑에서 군불을 때나 보오이다.』
하며 인력거군이 대답한 후에는 그 후로는 탄 사람이든지 끄는 사람이든지 다시 말이 없고, 다만 인력거군의 발자취 소리만 턱턱하며 인력거는 살 닫듯 닫는 그 인력거 위에 앉아 있는 신사는 나이는 이십사오세나 되어 보이며, 임바네스를 몸에 두르고 수달피 목도리를 깊이 귀 바퀴까지 둘렀으며, 인력거와 등에는 영서(英書)로 케이(K)자를 썼는데, 그 인력거가 풍우같이 앞에서 끌며 뒤에서 밀어가더니 다방골 어떠한 골목 들어서서 남향으로 난 와가 평대문 집으로 가서 인력거를 내려놓는다.
그 신사는 인력거 위에서 내려서더니 닫혀 있는 대문을 떼밀고 들어서서, 중문 앞에 이르러 안 대청을 향하여 본다. 등촉을 돋우고 방안에서는 소년 남녀 사오 인이 둘러앉아서 윷을 노느라고 요란하다. 신사는 다시 중문을 지나고 마당에 들어서서,
『아주머니 계십니까?』
하며 소리치나 방안에서는 윷이야, 모야, 넉동문이, 석동문이 하며 웃고, 들리는 소리에 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속히 알아듣지 못한다. 그 신사는 다시 두어 번 큰 소리로 부르니, 그때야 비로소 방안에서 오십 가량이나 되어 보이는 부인 하나이 유리로 내다보다가 다시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본다.
『그게 누구야? 시커먼 사람이.』
신사는 모자를 벗고 가까이 댓돌 위로 올라와 공손히 예하며,
『저올시다. 컴컴해서 아마 자세히 모르시나 보이오다 그려.』
그 부인은 미처 대답치 못하는데 그 방안 웃간에서 둘러앉아 윷노느라고 정신없이 분주하던 중에 한 십사오세 된 처녀 하나가 윷 가락을 집어던지려 하다가 뜰 앞에 손이 와 서 있는 기색을 듣더니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손에 가졌던 윷을 내려놓고, 몸을 벌떡 일으켜 지게문을 펄떡 열고 밖으로 나아가며,
『아이, 오라버니 오셨구려. 어서 들어오세요. 어머니는 오라버니도 그렇게 몰라보시고, 누구냐고 자꾸만 물기만 하시요, 응?』
하며, 그 신사의 외투 자락을 붙들어 마루 위로 인도하며 올리니, 그제야 늙은 부인도 알아보았는지 마루로 쫓아 나아가며,
『오, 너 왔구나. 하도 캄캄한데 검은 옷을 그렇게 입고 왔으니까 늙은 눈에 어디 알아보겠니? 그래서 새해에는 소원 성취하고, 또 여러 해 만에 부모를 모시고 과세를 하였으니 오죽 든든하였겠니?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그 신사는 가장 주저하며,
『안손님이 아마 많이 계신 모양인데 어떻게 외인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늙은 부인은 앞을 서서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며,
『아니, 천만에 못 볼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 모두 항열을 차리면 남은 아닐라. 이리 들어오너라.』
이 집은 김소사라 하는 사람의 집이요, 지금 맞아 들어온 신사는 그 집 주인 김소사의 친조카 되는 사람이니,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경응의숙 이재과(慶應義塾 理財科)를 졸업하고 집에 돌아온 지 수월에 지나지 못하며, 아직 성취지 못하였으나 조선의 구습으로 부모가 정하여 주는 아내는 얻지 아니하고 친히 눈으로 보고, 지덕(智德)도 있거니와 용모도 아름다운 여자를 택하여 아내를 삼고자 하는데 문벌과 학식을 보니보다 차라리 얼굴이 어여쁜 사람을 취코자 한다.
이날 그 고모 김소사집을 방문함은 다만 세시일배를 하고자 하여 이름이 아니라 그 은근한 가운데에는 다른 일이 또 한 가지 감추어 있음이러라.
김소사의 집은 이십여간 되는 와가이라. 과거(寡居)한 부인의 살림으로 비록 사랑은 없으나 안방이 삼 간이요, 마루가 사 간이요, 건넌방이 이 간이요, 그 외에 뜰 아래로 또 조그마한 방이 있으며 생활하는 정도도 과히 곤란치는 아니한 모양이라. 삼 간 안방에는 남포를 크게 켜서 한가운데 놓았으니 밝기는 백주 같아여 사람의 얼굴까지 눈이 부시도록 광채가 난다. 남녀 오륙 인은 그 방 웃목으로 돌아앉아 물불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윷노는 데에 정신이 가리웠다. 등잔불의 온기와 화로에 피워 놓은 숯불의 열기(熱氣)와 여러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훈증(薰蒸)한 기운이 서로 얽히어 삼 간 방안에서 배회(徘徊)한다.
윷노느라 요란히 덤비는 사람들은 얼굴이 모두 벌겋도록 익었으며, 여자는 단장한 분이 땀에 씻기어 여기저기 육색(肉色)이 드러나서 얼룩얼룩한 사람도 있으며, 땋은 머리 쪽진 머리 모두 흐트러져서 귀밑머리는 한 모슴이 빠지었고, 쪽진 머리는 비녀가 거꾸로 섰다. 하물며 입고 있는 옷은 어찌 되었으리요? 남자는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떨어뜨린 것도 알지 못하고 가슴을 펼쳐놓은 채로 있는 사람도 있으며, 두루마기도 벗어놓고 조끼 입은 대로 동저고리로 앉았는 사람이 있다. 그와 같이 숨이 막히는 온기와 방안이 자욱한 연기도 깨닫지 못하고 모두 미쳐 알지 못함과 같이 도리어 즐기어 웃고 지껄이며 서로 싸우며 다투는 소리, 서로 빼앗는 소리, 방안이 뒤엎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소요한 모양은 남녀의 분별과 삼강오상(三綱五常)이 모두 없어지고, 혼돈 세계가 다시 돌아왔는지 다만 수라도장(修羅道場)을 지었더라.
그러나 그 중에 한 여자는 마지못하여 그 윷노는 동무 중에 한 가지로 섞여 장난은 하고 있으나 남과 같이 서로 다투는 일도 없고 다만 단정히 앉아서 있으니 머리는 하사시가미(서양 여편네의 머리)로 쪽지고 국화(菊花) 꽃송이 가화(假花)를 꽂았으며, 자주 모본단 덧저고리에 옥색 삼팔 통치마를 입고, 발에는 털로 만든 양말을 신었으며, 얼굴은 단장도 아니하였으나 해당화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듯한 화려한 용모는 가위 천연 아름다움(天然美)을 발표함이라, 콧날은 오똑하고 눈은 어글어글하며 입은 조그마하여 보는 사람마다 사귀고 싶은 마음이 스스로 생긴다.
그 윷이 끝이 나기 전에 지금 인력거 타고 온 사람은 벌써 서로 척분을 차려 예하고 보았으며, 그 여자의 성명은 심순애(沈順愛)이니 그 신사의 고모 김소사의 시집 생질녀이라. 비록 촌수와 척분을 대기는, 속담의 이른바 사돈의 팔촌이지마는 이 한 방에 앉아서 서로 말 없이 소·닭 보듯 하느니보다 도리어 원척이라도 척분을 차림이 났다 하여 그 심순애라 하는 여자 뿐 아니라 다른 여자와 또는 다른 사나이하고도 인사를 마치니, 지금 들어온 신사의 성명은 김중배(金重培)라. 연기는 이십사오 세 되었으며 키는 상당히 크고 살도 많도 적도 아니하게 알맞추 있으며 얼굴은 관옥 같고 양협(兩頰)에는 홍도색이 나타나며, 이마는 넓고 입은 크며 턱의 뼈는 좌우로 쑥 내밀어 면적(面積) 넓은 얼굴은 정방형(正方形)을 이루었고, 곱슬곱슬하게 지진 머리는 한가운데를 좌우로 갈라서 기름과 찌구를 발라 기름이 듣는 듯이 빗겨 붙이었는데, 많지 못한 수염은 웃입술에 있는 것만 남기어 두었고 적지 아니한 코에는 금테 안경을 걸었더라. 옷은 프록 코트를 입고, 조끼 한가운데에는 손가락 같은 금시곗줄을 길게 늘이었는데 그 고모 김소사와 한가지로 아랫목에 점잖이 앉아서, 좌중을 내려다보는 모양은 짐짓 그 방중에 있는 여러 남녀를 업수이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그 방 중에는 여러 남녀 중에 이 신사와 같이 얼굴도 희고, 모양도 내고, 의복도 찬란히 장식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라.
그 좌중에는 남자가 두 사람 있으니 그 신사가 비록 친조카라 하나, 주인 김소사의 모녀가 그 사람에게 대한 대접이 다른 친척보다 특별한 점이 많은 고로 김중배의 일거일동(一舉一動)을 다른 남자들은 심상히 보지 아니하고 눈여겨 본다.
『그게 웬 자야? 우스워 못 보겠네.』
하며 윷판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사나이 중에 한 사람이 옆에 앉아 있는 학생 복장 입은 사람의 무릎을 꾹 찌르며 눈짓하고 가만히 말한다.
『아이 참, 아니꼬운 놈 다 보겠네.』
하며 옆에 앉았던 학생(學生)은 침을 배앝듯이 말을 하고 고개를 웃간으로 돌이킨다.
김중배라 하는 신사는 이윽히 앉아 좌중에 있는 남녀 여러 사람 중에 심순애의 모로 앉은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그 고모 김소사를 향하여,
『아, 아지머니, 잠깐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조용한 방에서 잠깐 뵈었으면 좋겠는데요.』
김소사는 해사하게 늙은 얼굴에 주름이 여기저기 잡혔고, 눈은 조그마하고 입은 한편으로 비뚤어진 듯하여 꾀 많고 욕심이 있어 보이며, 입에는 장죽을 물고 태우다가,
『응, 그리하지. 이애, 순아, 윷 좀 그만 놀고 심부름 좀 하여라. 건넌방에 불 좀 켜놓아라.』
순이라 하는 여자는 그 김소사의 딸이니 나이 지금 십오세 된 편발 처녀라. 그 모친의 말을 듣고 얼른 일어서며,
『나는 지금 억동 가오. 이따가 공연히 떼들 쓰지 말아요.』
하며 한가지로 윷놀던 동무에게 부탁하고, 방바닥에 있는 성냥을 집어가지고 건넌방으로 간다.
김소사는 담뱃대를 들고 일어서며,
『이애 중배야, 저 방으로 건너가자.』
하며 윷노는 판 한가운데를 헤치고 나아간다. 그 신사도 뒤로 따라 나아간다. 그 신사가 여러 사람 앉아 있는 가운데로 지나갈 때에 그 손 네째 손가락 무명지에 광채 나는 물건이 있는데 심상치 아니하고, 그 굳센 광채는 등불빛과 한가지로 찬란하여 거의 바로 보기 어렵도록 눈이 부시다.
그 신사는 그 방중에 있는 사람으로 일찍이 말은 들었으나 보지는 못하였던 금강석(金剛石) 반지를 끼었더라. 좌중에 있던 여러 남녀는 그 반지의 광채를 보고 모두 한 번은 놀라기를 마지 아니한다.
순이라 하는 처녀는 건넌방에 불을 켜놓기를 마치고 급급히 윷판으로 돌아오더니 말판부터 들여다본다.
『내 말은 다 어디로 갔어. 나 없는 새 모두들 속였지요?』
심순애라 하는 여자는 그 말대답은 하지 아니하고, 순이라 하는 처녀의 무릎을 꾹 찌르며,
『이애, 지금 오신 손님이 끼고 계신 반지는 그게 무슨 반지인데 그렇게 몹시 서기(瑞氣)가 비치니?』
『아이고, 언니도 그것이 무엇인데 그리하오. 그것이 금강석이라오.』
『어, 아 금강석이 그러한가. 나는 처음이야.』
『그게 값이 오백 원 짜리라오. 이만오천 냥.』
그 처녀의 말을 듣더니 그 여자는 기가 막히는지 다시 한참은 말이 없이 심중으로는 그 값 많은 것을 놀라며,
『아이, 그건 참 보배답더라. 값도 많지마는.』
작은 콩알만한 진주(眞珠) 박은 반지를 하나 끼고자 하여 몇 해를 두고서 항상 벼르고 있건마는 오히려 용이히 얻지 못하고 욕심만 가득하던 연소한 처녀의 가슴이라 이와 같은 보배를 보매 홀연 무슨 일을 생각하였는지 가슴만 두근두근한다.
그 여자는 망연히 윷놀기도 잊어버리고 거의 내 몸까지 잊어버리며 온전한 정신은 별건곤(別乾坤)에서 서로 배회할 때에 벽력 같은 소리에 번개같이 윷가락이 떨어지며 한 남자의 손이 윷판으로 오며,
『이것 두 동문이는 죽고 나는 인제 막 간다.』
순이라 하는 처녀는 말 죽인 것을 분히 여겨 순애의 무릎을 탁탁 치면서,
『아이 언니, 무엇을 그렇게 정신없이 앉았소. 두 동문이가 저 오빠 말에 죽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 여자는 비로소 공상(空想)의 꿈을 깨었는지라, 능히 미치지 못한 일이라고 자기가 스스로 단념하였으나, 그러나 한 번 금강석의 현황한 광채에 홀린 마음은 얼마간 지각(知覺)을 잃은지라, 지금까지 흥기있이 놀던 윷이 스스로 손이 어지러워지고 용맹이 조금도 일어나지 아니한다.
그 방중에 모인 여자는 그 신사의 사치함과 그 신사의 부요(富饒)함을 찬탄치 않을 이 없으며 남자 등은 모두 그 신사의 거만함을 미워하지 않을 이 없다.
이제 그 집 건넌방에서는 숙질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조용조용하게 한다.
『아지머니, 저는 이번 음력 새해에 꿈을 아마 잘 꾸었나 보오이다. 오늘은 가위 소원을 성취하였습니다, 아주머님 덕택에』
『아이, 소원성취를 하였다니 고맙다. 그러나 오늘은 네가 일 많은 줄도 알건마는 일부러 잠깐 오라고 기별을 하였더니, 와서 보니 허행은 아니한 모양이냐?』
『허행만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평생 소원을 마치었습니다.』
그 고모는 비뚤어진 듯한 입으로 깔깔 웃으며,
『네 눈에 드는 사람이 다 있으니 인제는 우리 집에 경사 났다. 날도 춥고 하니 술이나 한잔 먹어보려니?』
『술을 어디 먹을 줄 압니까? 그러나 오늘은 하도 마음이 흡족하니 한 잔 주시면 먹겠습니다.』
김소사는 소리쳐 그 딸 순이를 부른다.
『순아, 순아.』
하나 안방에서는 윷을 다투어 놀아들 내는 소리에 속히 알아듣지 못한다. 고모는 화가 와락 나서 문을 열고 안 방으로 건너가더니 지게문을 덜컥 열고 담뱃대로 그 딸의 어깨를 쿡 찌르며,
『아따, 요년아, 아무리 윷에 미쳤기로 귀조차 먹었단 말이냐? 오래간만에 오라비가 우리 집에 왔으니 와서 이야기나 하고 인사를 더러 차려야지, 사람이 어찌해서 그렇단 말이냐? 오라비가 술 한 잔 먹겠다고 하니 술 두어 잔만 얼른 데워가지고 오너라.』
하며 은근히 딸을 꾸짖어 경계하고 다시 건넌방으로 건너간다.
김중배는 두 손을 화로에 얹고, 화로의 불피어 오르는 모양을 정신없이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다가, 그 고모가 들어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며,
『그러나 아지머니, 그 여자가 아지머니 생질녀라 하니까 그 신분(身分)은 다시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마는, 그 집안은 지내기는 어떠하며 부모도 다 계십니까?』
『그 집은 바로 이 동리에 있는데 살기도 그리 어렵지는 아니하고 늙은 내외가 규모로 간신 간신히 지내나 보더라. 전에는 저의 아버지 심택(沈澤)이라 하는 이가 벼슬깨나 다니었는가 보더라마는 지금은 놀고…….』
『그러나 당자의 위인은 어떠한지요? 제일 첫째 문제가 그거올시다.』
『위인은 다시 말할 것 없다. 내가 담당이라도 할 터이다마는, 단지 하나가 염려되는 일은 그 아이 부모가 십여년 전부터 데릴사위를 한 사람 얻어다가 두고 지금껏 학교에도 보내어 공부시키는데 아마 올 봄은 성례를 한단 말을 들었으니, 그 부모가 말을 잘 들을는지를 모를 듯하다.』
『그야 아지머니께서 힘쓰시게 달렸겠지요. 또는 바른 대로 말씀이올시다. 데릴사위라 할 제는 그 사람은 필연 고단(孤單)한 사람인 게올시다그려. 이왕 사위를 얻는데 그런 무 밑동 같은 사람을 얻느니 보다, 저와 같은 재산도 있고 학문도 있는 상당한 사위를 얻는 것이 낫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달래 보시면 되겠지요.』
『오냐, 염려 마라. 내가 어떻게든지 힘써서 주선하여 보마.』
『그러나 만일 이 일이 성사치 못하면 저는 아지머니를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며 양복주머니를 뒤적뒤적하더니 돈 오십 원을 내어 고모를 주며,
『아버지께서 아지머니 갖다 드리라고 하여서 가져왔습니다. 세미쳐서는 총요(忽擾)하여서 못 보내었다고.』
김소사는 반가이 받으며,
『돈은 무얼 보낸단 말이냐? 쓰기는 잘 쓰겠다마는.』
이 즈음에 그 딸 순이는 술상을 가지고 들어오는지라 고모는 하던 의논을 뚝 그친다. 순이는 술을 앞에 놓으며,
『오라버니 약주 한 잔 잡수시오, 안주는 없어도. 그런데 오라버니는 나하고 윷 한 번 놀지 아니하시료?』
김중배는 손을 들어 웃수염을 좌우로 쓰다듬어 올리는 손에는 금강석 반지에서 찬란(燦爛)한 광채 난다.
『허허, 내가 윷을 놀 줄 아는가? 그러나 누이가 가르쳐주면 장난으로라도 놀아보지.』
하며 따라 놓은 술잔을 집어 마실 때마다 금강석 광채에 눈이 부시다.
김중배의 부친은 김형순(金瑩淳)이라 하는 사람인데, 경성에서 유명한 재산가로 실업계(實業界)에 웅비(雄飛)할 뿐 아니라 각처에 은행을 설립하며, 그 아들 김중배는 누대 독자로 일찍이 동경에 유학하였으며, 귀국한 후는 어진 배필을 사방으로 구함에, 재산을 보든지 또는 신랑 재목으로 말하든지 조금도 흠절 잡을 데가 없는 고로 각처에서 통혼이 다투어 들어온다. 그러나 모두 김중배의 뜻에 맞지 못하므로 반대하여 퇴각하고 오늘까지 적당한 제목을 얻지 못하여 은근히 구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그 고모 김소사는 그 생질녀 심순애의 인물을 항상 흠모하던 터이라, 그런 고로 이날 순애가 마침 와서 늦도록 노는 것을 기회를 삼아서 그 조카 김중배를 불러 선을 보게 함이니, 과연 이날 순애의 얼굴이 김중배의 마음에 들어 주목함에 이르렀더라.
김중배는 귀국한 후로 그 부친이 설립한 은행(銀行) 지점(支店)이 평양(平壤)에 있는 고로 그곳 지점장으로 천거하여 보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따로이 크게 집을 지어 그 아들로 하여금 거처케 하였으나, 다만 안주인을 정치 못하여 고루거각(高樓巨閣)이 공연히 햇빛에 걸고 빗물에 씻기어 다만 행랑채에 수지기로 들려 둔 늙은 하인 내외만 적적한 큰 집안에서 서로 향하여 앉으면 옛날에 지낸 이야기로 두런두런 날을 보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