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1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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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 장 부여성충(扶餘成忠)의 뛰어난 전략과 백제의 영토 개척[편집]

부여성충(扶餘成忠)이 계책(計策)을 건의함[편집]

부여성충은 백제의 왕족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모(智謀)가 뛰어나서 일찍이 예(濊)의 군사가 침략해오자 고향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가 산보(山堡)에 웅거하여 지키는데 늘 기묘한 계교로 많은 적을 죽이니 예의 장수가 사자를 보내 “그대들의 나라를 위하는 충절을 흠모하여 약간의 음식을 올리오. ” 하고 궤 하나를 바쳤다. 사람들이 모두 궤를 열어보려고 하였으나 성충이 이를 굳이 못 하게 말리고서 불 속에다 넣게 하였다. 그 속에 든 것은 벌과 땡삐 따위였다. 이튿날 또 예의 장수가 궤 하나를 바쳤다. 모두 이것을 불에 넣으려 하니까 성충은 그것 을 열어보게 하였다. 그 속에는 화약과 염초(焰硝) 따위가 들어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적은 또 궤 하나를 보내왔는데, 성충은 그것을 톱으로 켜게 하였다. 그러니까 피가 흘러나왔다. 칼을 품은 용사가 허리가 끊어져 죽었다.

이때는 기원후 645년 무왕(武王)은 죽고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해 있었는데 의자왕은 그 말을 듣고 성충을 불러 물었다. “내가 덕이 없어 대위(大位)를 이어 감당치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중이오. 신라가 백제와 풀 수 없는 큰 원수가 되어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키지 못하면 신 라가 백제를 멸망시킬 것이니 이는 더욱 내가 염려하는 바요,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범려(范려)를 얻어 10년을 생취(生聚)하고 10년을 교육하여 오(吳)를 멸망시켰으니 그대가 범려가 되어 나를 도와 구천이 되게 해주지 않겠소?” 성충이 대답하였다. “구천은 오왕 부차 (夫差)가 교만하여 월에 대한 근심을 잊었으므로 23년 동안 생취 교육하여 오를 멸망시켰지마는 이제 우리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 남으로 신라의 침략이 쉬는 날이 없어서 전쟁의 승패가 순간에 달려 있고 국가의 흥망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으니 어찌 한가롭게 20년 생취 교육할 여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구려는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이 바야흐러 불측한 뜻을 품고 있어 오래지 않아서 내란이 있을 것이 라, 한참 동안 외국에 대한 일을 경영하지 못할 것이니 아직은 우리나라가 근심할 바가 아니지마는, 신라는 본래 조그만 나라로서 진흥왕(眞興王) 이래로 문득 강한 나라가 되어 우리 나라와 원한을 맺어 근자에 와서는 더욱 심하여 내성사신(內省私臣) 용춘(龍春)이 선대왕 (백제의 武王)과 혈전을 벌이다가 죽고, 그의 아들 춘추(春秋 : 다음 장 참고) 가 항상 우리 나라의 틈을 엿보았으나 다만 선대왕의 영무(英 武)하심이 두려워서 얼른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이제 선대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저네가 반드시 대왕을 전쟁에 익숙하지 못한 소년으로 업 신여기고, 또한 우리 나라의 상사(喪事 : 武王의 죽음) 있음을 기회하여 오래지 않아서 침략해올 것이므로 이에 반격의 대책을 연구함이 옳을까 합니다. ” 왕이 물었다. “신라가 우리 나라를 침범하면 어디로 해서 오겠소?” “선대왕께서 성열성(省熱城 : 지금의 淸風) 서쪽 가잠성 (가岑城 : 지금의 槐山) 동쪽을 차지하시니 신라가 이를 원통해한 지 오래이므로 반드시 가잠성을 공격해올 것입니다·” 하고 성충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가잠성의 수비를 증강시켜야 하지 않겠소? ” 하고 왕이 다시 물으니 성충은 “가잠성주 계백(階伯)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여 비록 신라가 전국의 군사로 포위 공격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깨뜨리지 못할 것이라 염려할 것이 없고, 갑자기 나가서 적의 허를 찌르는 것이 병가의 상책이니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공격해오거든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군사를 내어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다시 “그러면 어느 곳을 치는 것이 좋겠소?” 하고 물었다. 성충이 대답하였다· “신이 들으니 대야주(大耶州 : 지금의 陜川)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이 김춘추의 사랑하는 딸 소랑(炤娘)의 남편이 되어 권세를 믿고 부하와 군사와 백성을 학대하고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서 원한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데, 이제 우리 나라에 국상(國喪) 있다는 말을 들으면 수비가 더욱 소홀해질 것이고, 또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는 때이면 대야성이 위급 해지더라도 갑자기 이를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이긴 여세를 몰아 공격하면 신라 전국이 크게 소란해질 것이니 이를 쳐 멸망시키기는 아주 쉬울 것입니다.” 왕은 “그대의 지략은 고금에 짝이 드물겠소.” 하고 성충을 상좌평(上佑平)에 임명하였다.

대야성(大耶城)의 함락과 김품석(金品釋)의 참사[편집]

이듬해 3월에 신라가 과연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가잠성을 치게 하니 계백이 성을 의지하여 임기응변으로 응전하여 여러 달 동안에 신라 군사가 많이 죽고 다쳤다. 7월에 의자왕이 정병 수만 명을 뽑아 가잠성을 구원한다 일컫고 북으로 향해 나아가다가 갑자기 군사를 돌이켜 대야주로 향하여 미후성(獼猴城)을 포위 함락시켰다. 대야주는 신라 서쪽의 요긴한 진(鎭)이요, 관할하는 성과 고을이 40여 리 되었다. 김춘추는 공주 소랑을 사랑하여 대야 주의 속현(屬縣)인 고타(古陀 : 지금의 居昌)를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어 고타소랑(古陀炤娘)이라 일컫고, 소랑의 남편 김품석으로 대야주 도독을 삼아서 그 40여 성과 고을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품석이 음란하고 난폭하여 군사와 백성을 구휼하지 아니하고, 재물과 여색을 탐내어 가끔 부하의 아내나 딸을 빼앗아 첩을 삼았다.

품석의 막장(幕將) 금일(黔日)이 그의 아름다운 아내를 품석에게 빼앗기고 통분하여 늘 보복하려고 하다가 백제가 미후성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사람을 보내 내응(內應)하기를 청하였다. 의자왕이 부여윤충(扶餘允忠 : 성충의 아우)으로 하여금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백제의 군사가 성 아래 이르자 금일이 성 안이 술렁이고 두려워서 나가 싸울 뜻이 없었다. 품석 부부가 하는 수 없이 그 막하의 서천(西川)으로 하여금 성 위에 올라가서 윤충에게 우리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성을 내주겠노라고 청하게 하였다. 윤충이 이 말을 듣고 좌우를 돌아보며 “저희 부부를 위해 국토와 백성을 파는 놈을 어찌 살려두겠소. 그러나 허락하지 않 으면 성 안에 그대로 웅거하여 지켜 얼마 동안을 더 싸울지 모를 일이니 차라리 거짓 허락하고 사로잡는 것이 좋겠소.” 하고 “해를 두고 맹세하여 공의 부부가 살아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겠소.” 하고 가만히 복병을 두고 군사를 물리니 품석이 먼저 그 부하 장사들로 하여금 성 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백제가 복병을 내어 습격하여 죄다 죽이고 품석 부부는 금일에게 살해당하였다. 이리하여 백제의 군사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왕이 미후성에 와서 윤충의 작위를 높여주고 말 20마리와 쌀 1천 섬을 상주었으며, 그 이하의 장사들에게도 차례로 상을 내려 칭찬하고 나서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각 고을을 공략하게 하였다. 대야주는 원래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땅이었으므로 그 지방의 백성들이 옛 나라를 생각하고 신라를 싫어하다가 백제의 군사가 이르니 모두 환영하여 40여 성과 고을이 한 달 안에 죄다 백제의 차지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7월에 의자왕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키고, 8월에 윤충을 보내서 대야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고,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대야성을 함락시킨 뒤에 40여 성을 항복받았다고 하였는데, 뒤의 것이 사리에 가까우므로 여기서는 이를 좇았다. 대야(大耶)는 ‘하래’ 로 읽는 것이니 낙동강 상류를 일컫는 말인데, 김유신전에는 대야를 ‘대량(大梁)’이라고 기록하였다. ‘야(耶)’ ‘양(梁)’ 등이 옛날에는 다 ‘라’ 혹은 ‘래’로 읽은 것이고, 대야를 신라 말엽에 협천(陜川)으로 고쳐 후세에는 이것을 ‘합천’이라 읽었으니 당시에는 합(陜)의 첫소리 ‘하’와 내(川)의 뜻 ‘래’를 따라 ‘하래’로 읽은 것이었다.

고구려 · 백제 동맹의 성립[편집]

의자왕이 대야주 40여 성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않아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정권을 잡았다. 의자왕이 성충(成忠)에게 물 었다. “연개소문이 남의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는데 고구려 전국이 두려워서 그 죄를 묻는 자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고구려가 서 국(西國 : 지나를 가리킴)과 전쟁을 한 지 여러 백 년 만에 처음에는 여러 번 서국에서 패하다가 근세에 이르러 날로 강대해져서 요동을 차 지하여 그 세력이 요서에까지 미치고 물에서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뿐 아니라 바다에까지 드나들어 영양왕 때에는 세 번이나 백만의 수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나라의 위염이 크게 떨쳐서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 이 서국과 맞서려는 기염(氣焰)이 하늘을 찌르려 하는 판인데 건무(建武 : 영류왕)가 도리어 이를 압박하고 서국과 화친하여 군사와 백성들의 노여움을 산 지가 오래였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여러 대의 장상(將相)으로 이름난 집안으로서 왕의 정책에 반대하고 정당론(征唐論)을 주장하여 국민들의 마음에 호응하고, 그리하여 건무를 죽였으므로 고구려 전국이 연개소문의 죄를 묻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바야흐러 그 공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고 성충이 대답하였다. 왕이 다시 “고구려와 당이 싸우변 어느 나라가 이기겠소” 하고 물으니, 성충은 “당은 비록 땅이 고구려보다 넓고 백성도 고구려보다 많지마는 연개소문의 전략은 이세민(李世民 : 당의 太宗)이 따를 바가 아니니 승리는 반드시 고구려에 돌아갈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또 물었다. “이세민은 네 나라의 여러 영웅들을 토벌하여 통일된 중국의 황제가 되었고 연개소문은 아무런 싸움의 경력이 없는데 어찌 연개소문의 전략이 이세민보다 낫다고 하오?” 성충이 대답하였다. “신이 왕년에 일찍이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연개소문이 아무런 직위도 없고 다만 명문의 한 귀소년(貴少年)이었지마는 모습이 우람하고 의기가 호탕하므로 신이 그를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함께 이야기하다가 말이 병법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신은 연개소문의 지혜와 계략이 비상함을 알았습니다. 이번의 일로 말하더라도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은 지 오래지 않아 아무런 기색도 없다가 하루 아침에 대신 이하 수백 명을 죽이고, 패수(浿水)의 전 쟁에 수(隋)의 군사를 격파하여 위명을 떨친 건무왕을 쳐 이기고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으니 이는 이세민이 따를 바가 아닙니다·” 왕이 또 “그러면 고구려가 능히 당을 멸망시킬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물으니 성충은 “그것은 단언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연개소문이 10년 전에 고구려의 대권을 잡았더라면 오늘날에 당을 멸망시켰을는지 모르지만, 연개소문은 겨우 오늘에 와서야 성공하였는데 이세민은 이미 20년 전에 서국을 통일하면서 나라 다스리는 규모가 정밀하여, 백성을 사랑하여 민심을 열복시킨 지 이미 오래이므로 연개소문이 설혹 싸움에 이긴다 하더라도 민심이 갑자기 당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당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한 가지 이유입니다. 연개소문이 비록 고구려를 통일하였지마는 그것은 겉모양이고 그 속에는 왕실과 호족들의 남은 무리가 날로 연개소문의 뜻을 엿보고 있어 만일 연개소문이 당을 멸망시키기 전에 죽고 그 후계자가 옳은 감[人材]이 아니면 사방에서 바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당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또 한 가지 이유입니다 그러니 두 나라의 흥망을 미리 말하기 어렵습니다 ” 하고 대답하였다. 왕이 물었다· “우리 나라가 이제 대야주는 차지하였으나 아주 그 근본을 뒤집어 엎지 못하였으므로 신라는 보복할 마음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오 고구려가 당을 멸망시키거나 당이 고구려를 멸망 시키거나 반드시 남침(南侵)해올 것이니 그때에 우리 나라는 북으로 고구려나 당의 침략을 받고, 동으로는 신라의 반공을 받을 것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 ” 성충이 대답하였다 “지금의 형세로 보건대 고구려가 당을 치지 않으면 당이 고구려를 쳐서 서로 대립할 것인데 이것은 연개소문이 뻔히 알고 있을 것이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자면 반드산 남쪽 백제와 신라와는 화친하여야만 뒤돌아볼 염려가 없을 것도 연개소문이 환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는 피차 원한이 깊어 고구려가 이 중 한 나라와 화친하면 다른 한 나라와는 적국이 될 것도 연개소문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장차 두 나라 중에서 어느 한 나라와 화친하여 당과 전쟁을 할 때에 남쪽 두 나라가 서로 견제해서 고구려를 엿보지 못하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제 백제를 위해 계책을 세운다면 빨리 고구려와 화친하여 백제는 신라를, 고구려는 당을 맡아 싸우는 것이 옳을 줄 암니다. 신라는 백제의 적이 못 되니 틈을 타서 이로움을 따라 나아가면 모든 편의가 고구려보다 백제에 있습니다. ” 왕이 그의 말이 옳다고 하고 성충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냈다.

성충이 고구려에 가서 이해를 따져 연개소문을 달래서 동맹의 조약이 거의 맺어지게 되었는데, 연개소문이 갑자기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성충이 의심이 나서 탐지해보니 신라의 사신 김춘추(金春秋 : 뒤의 태종 무열왕)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막고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충은 곧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 “공이 당과 싸우지 않으면 모르지만 만일 당과 싸우고자 한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요 왜냐하면 서국이 고구려를 칠 때에 번번이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하였으니 수나라가 그 분명한 본보기요. 이제 백제가 만일 당과 연합하면 당은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침노할 뿐 아니라 배로 군사를 운반하여 백제로 들어와서 백제의 쌀을 먹어가며 남에서 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니, 그러면 고구려가 남과 북 양면으로 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위험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라는 동해안에 나라가 있 어서 당의 군사 운반의 편리하기가 백제만 못할 뿐더러 신라는 일찍이 백제와 화약하고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竹領) 밖 고현(高峴) 안의 10군을 함부로 점령하였음은 공이 잘 아는 바이니, 신라가 오늘에 고구려와 동맹한다 하더라도 내일에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땅을 빼앗지 않으리라 어떻게 보증하겠습니까?” 하였다. 연개소문이 이 글을 보고는 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밖 욱리하(郁里河) 일대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성충은 마침내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안시성 전투 때의 성충(成忠)의 건의[편집]

기원후 644년에 신라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죽령을 념어 성열(省熱) · 동대(同大) 등 여러 성을 공격하므로 백제의 의자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응전할 계획을 의논하였는데 성충이 “신라가 여러 번 패한 끝에 스스로 보전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이제 갑자기 침략을 시도하니 이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김춘추가 딸 고타랑 (古陀娘) 잃은 복수를 하기 위해 여러 번 가만히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다고 합니다. 당의 임금 이세민이 해동(海東) 침략할 뜻을 품은 지 오래 였으므로 반드시 신라와도 고구려 · 백제 두 나라에 대한 음모를 꾸였을 것인데 헤아리건대 아마 당은 고구려를 치는 동시에 수군으로 백제의 서쪽에 침입하고, 신라는 백제를 쳐서 고구려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대군으로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 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성열 · 동대 등의 성을 차지 하기 전에는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시키지 못할 것이고, 당이 요동을 차지하기 전에는 수로로 양식 운반하기에 급급하여 백제에 침입할 병선이 없을 것이니, 이제 백제로서 계책을 세운다면 당분간 성열 등의 성을 신라에게 내맡기고 군사를 단속하여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당과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 격렬한 전투를 벌여 서로 손을 뺏기가 어렵게 될 것인데 신라는 백제를 염려하여 군사를 많이 내지 못할 것이지 마는 당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고구려에 침입할 것이니 백제는 그틈을 타서 배로 정병 수만 명을 운반하여 당의 강남(江南)을 친다면 이를 점령하기가 아주 용이할 것이고, 강남을 점령한 뒤에는 그 물력 (物力)과 민중으로 나아가 공략한다면 서국의 북쪽은 비록 고구려의 차지가 되더라도 남쪽은 다 백제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라가 비록 백제를 아무리 원망하더라도 하잘것없는 조그만 나라가 어찌 하겠습니까? 오직 머리를 숙여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그때에는 백제가 신라를 쳐 멸망시킬 수도 있고 그대로 존속시킬 수도 있어서 아 무런 말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자왕이 그의 말을 좇아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변경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듬해에 과연 당이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에 침입하였는데 안시성을 포위하고 싸웠으나 몇 달 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한편 신라는 13만 대군을 내어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여 그 후방을 교란시키려고 하므로, 의자왕은 계백(階伯)에게 명하여 신라의 후방을 습격하여 성열 등 일곱 성을 회복하고 윤충을 보내 부사달(夫斯達 : 지금의 松都) 등 10여 성을 점령하고, 수군으로 당의 강남을 습격하여 월주(越州 : 지금의 紹 與) 등지를 점령하여 착착 해외의 척지(拓地)를 경영하다가 임자(任子)의 참소로 성충이 마침내 왕의 박대함을 당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하 였다.

제 2 장 김춘추(金春秋)의 외교와 김유신(金庾信)의 음모[편집]

김춘추의 복수(復讐) 운동[편집]

김춘추는 신라내성(內省) 김용춘(金龍春), 곧 백제의 무왕(武王)과 동서전쟁 (同婚戰爭)을 한 사람의 아들이다. 김용춘이 죽으니 김춘추 가 그 직위를 이어받아 신라의 정치를 도맡아 처리하였고 백제 무왕과 혈전을 벌였다. 무왕이 죽은 뒤에 의자왕이 성충의 계교를 써서 대야주를 쳐 김품석(金品釋 : 김춘추의 사위) 부부를 죽이고 그 관내(管內)의 40여 성을 빼앗으니, 김춘추는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나 통분하 였던지 기둥에 기대서서 그 앞을 사람이나 개가 지나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붉게 상기한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주먹으로 기둥을 치며 “사나이가 어찌 보복을 못하랴?” 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신라는 나라가 적고 백성이 적으니 무엇으로 백제에 보복을 하랴 ? 오직 외국의 원조를 빌 수밖에 없다는 것이 김춘추가 궁리궁리끝에 결론지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고구려로 들어갔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격파한 여위(餘威)를 가진 유일한 강대 국이요,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유일한 거인이니 연개소문만 사귀면 백제에 대해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 하여 신라, 고구려 두 나라 동맹의 이로움을 들어 연개소문과 거의 동맹이 이루어지게 된 판에, 백제의 사신 상좌평(上좌平) 성충이 이것을 알고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내어 연개소문은 마침내 김춘추를 잡아 가두고 욱리하(郁里河) 일대의 땅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김춘추가 이에 가만히 종자로 하여금 고구 려왕의 총신 선도해(先道解)에게 선물을 주고 살려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세상인 판에 총신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래도 선 도해는 선물을 탐내어 그것을 받고 “내가 공을 살려줄 수는 없으나 공이 살아 돌아갈 방법을 가르쳐주리다.” 하고 당시 고구려에 유행하던 거북과토끼 이야기〔龜兎談〕란책을주었다. 김춘추가 그책을 읽어보니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토끼가 거북의 꾐에 빠져서 등에 엽혀 용왕국(龍王國)으로 벼슬을 하려고 들어갔다. 들어가보니 벼슬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용왕이 병이 들어 토끼의 간이 병에 약이라 하여 거북을 보내서 저를 꾀어온 것이었다. 토끼가 얼른 꾀를 내어 용왕에게 “신은 달의 정기의 아들이 라 달을 보고 잉태하였으므로 선보름에 달이 찰 때에는 간을 내놓고 후보름을 달이 기울 때에는 간을 다시 넣어두는데, 신이 대왕의 나라 에 들어올 때에 마침 선보름이라 간을 내놓았었으므로 지금은 신의 간이 신의 뱃속에 있지 않고 금강산 속의 어느 나무 밑에 감추어두었습 니다. 신을 다시 내보내주시면 그 간을 가져오겠습니다.” 하고 속여 마침내 다시 거북의 등에 업혀 나와서 물에 닿자 “사람이나 짐승이나 간을 내었다 넣었다 하는 일이 어디 있더냐? 아나 옜다, 간 받아라.” 하고 깡충깡충 뛰어 달아났다.

김춘추는 선도해의 뜻을 알고 고구려 왕에게 거짓 글을 올려 욱리하 일대의 땅을 고구려에 바치겠노라고 하였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김춘 추와 약속을 맺고 그를 석방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김춘추는 국경에 이르자 고구려의 사자를 돌아보며 “땅이 무슨 땅이란 말이냐? 어제의 맹약은 죽음을 벗어나려는 거짓말이었다.” 하고 토끼처럼 뛰어 돌 아왔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가서 실패하고 돌아오니 이에 신라가 고구려 · 백제 두 나라 사이에 고립된 한낱 약소국이 되어 부득이 새로이 해서 (海西)의 당에 동맹을 청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춘추는 바다를 건너 당에 들어가서 당태종을 보고 신라의 위급한 형편을 말하고 힘 닿는 데까지 자기를 낯추고 많은 예물로 구원병을 청하는데, 당나라 조정의 임금과 신하의 뜻을 맞추기 위해 아들 법(法敏 : 뒤의 문무왕)과 인 문(仁問) 등을 당에 인질로 두고, 본국의 의복과 관을 버리고 당의 의복과 관을 쓰고, 진흥왕 이래로 일컬어오던 본국의 제왕과 연호를 버 리고 당의 연호를 쓰기로 하였다. 또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 (晉書)와 그가 보태고 깎고 한 사기 (史記) · 한서 (漢書) · 삼국지 (三國志) 등에 있는 조선을 업신여기고 모욕한 말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본국에 유포 시켜 사대주의의 병균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김유신의 등용(登用)[편집]

김춘추가 한창 복수운동에 분주한 판에 그를 보좌하는 한 명물이 있었으니 곧 김유신이었다. 당시에 연개소문을 고구려의 대표 인물이라 하고 부여성충을 백제의 대표 인물이라 한다면 김유신은 곧 신라의 대표 인물이라 할 것이다. 고구려 · 백제가 망한 뒤에 신라의 역사가들 이 그 두 나라 인물의 전기적(傳記的) 자료를 말살해버리고 오직 김유신만을 찬양하였으므로 삼국사기 열전에 김유신 한사람의 전기가 을 지문덕 이하 수십 명의 전기보다도 양이 훨씬 많고, 부여성충 같은 이는 열전에 끼이지도 못하였다. 그러니까 김유신전에 화려하고 아름다 운 말이 많음을 가히 미루어 알 수있다. 이제 그 사리에 맞는 것만을 추려보기로 한다.

김유신은 신가라 국왕 구해(仇亥)의 증손이다. 다섯 가라국이 거의 다 신라와 싸우다가 망하였으나 신가라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나라를 들어 귀부해왔고, 신라처럼 골품(骨品)을 다투는 나라이므로 왕은 구 해에게 감사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준귀족(準貴族)으로 대우하였다. 구해는 또 장병대원(將兵大員)이 되어 구천(狗川) 싸움에서 백제왕을 쳐 죽인 전공도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귀골(貴骨)들이 김무력(金武 力 : 仇亥)을 외래(外來)의 김씨라 하여 세 성의 김씨와 구별하여 세 성들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김무력의 아들 서현 (舒玄)이 일찍이 출유(出遊)하다가 세 성의 김씨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 (萬明)이 몹시 아름다움을 보고 정을 금치 못하고 추파로 뜻을 통하여 야합해서 유신을 배었다. 숙흘종이 이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만명을 가두니 만명이 도망하여 금물내(今勿內---지금의 진천(鎭 川)의 서현이 있는 곳으로 가서 부부의 예를 이루고 유신을 낳았는데 아버지 서현은 일찍 죽고 어머니 만명이 유신을 길렀다.

유신이 처음에는 방탕하여 행동을 조심하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울며 타이르는 말을 듣고 감격하고 깨달아서 학업에 힘썼다. 나이 17살에 화랑(花郞)의 무리가 되어 중악산(中岳山) · 인박산(咽薄山) 등에 들어가서 나라를 구하려는 기도를 올리고 검술을 익혀 차차 이름이 났다. 그러나 유신이 가라국의 김씨이기 때문에 여간한 연줄이 없이는 중요하게 쓰이지 못할 줄을 알고, 당시의 총신인 내성사신(內省私臣) 김용춘의 아들 춘추와 사귀어 훗날 현달(顯達)할 발판을 만들려고 하였다. 하루는 자기 집 부근에서 두 사람이 제기를 차다가 유신이 일부러 춘추의 옷을 차 단추를 떨어뜨리고, 춘추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가서 자기의 막내 누이를 불러 단추를 달게 하였다. 누이 문희 (文姬) 가 엷은 화장에 산뜻한 옷차림으로 바늘과 실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 아름다움이 춘추의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춘추는 마침내 흔인을 청하여 춘추는 유신의 매부가 되었다.

용춘이 죽고 춘추가 정권을 잡으니 유신은 그 장재 (將材)로 뿐 아니라 춘추의 도움이 있어 마침내 신라의 각 군주(軍主)가 되고, 춘추가 왕이 되자 소뿔한(舒弗翰 : 벼슬 이름으로 將相을 겸함)의 직위를 얻어 신라의 병마(兵馬)를 한손에 쥐었다.

거짓이 많은 김유신의 전공(戰功)[편집]

삼국사기 김유신전을 보면, 유신은 전략과 전술이 다 남보다 뛰어나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그의 패전은 가려 숨기고 조그만 승리를 과장한 것이 기록이다.

진덕대왕(眞德大王) 원년(기원후 647년)에 백제 군사가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세 성을 공격하므로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으로 항거하였는데 고전을 하여 힘이 다했다. 유신이 비녕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능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격발시키겠는가?” 하였다. 비녕자는 두 번 절하여 응낙하고 적에게 돌진하는데, 그의 아들 거진(擧眞)과 종 합절(合節)이 그 뒤를 따라 세 사람 모두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신라의 삼군(三軍)이 감동하여 앞을 다투어 진격해서 적병을 크게 깨뜨리고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유신이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慶山)군주가 되어---대량주(大梁州 : 곧 大耶州)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하니 왕이 “적은 군사로 큰 군사를 대적함이 위태롭지 아니하오?” 하니 유신이 “---지금 우리들은 한마음이 되었으니 백제를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하여 왕이 출병을 허락하였다. 유신이 고을의 군사를 조련하여 대량주 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항거해 싸우므로 유신은 거짓 패하여 옥문곡(玉門谷)으로 들어가니 백제 군사가 가벼이 여겨 크게 몰려왔다 유신은 복병을 내어 앞뒤로 쳐서 크게 깨뜨려 백제의 장군 8명을 사로잡고 군사 1천여 명을 베었다. 그리고 사자를 백제의 장군에게 보내서 “우리 군주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희 옥중에 있으니---네가 죽인 두 사람의 뼈를 보내면 나는 살아 있는 여넓 사람을 돌려주겠다·”라고 하니, 백의 유골을 돌려보내므로 유신은 사람을 돌아가게 하고 이긴 기세를 타 백제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빼앗고서 1만 명을 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이 공으로 유신은 이찬 (伊飡)의 작위를 받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總管)이 되었으며, 진례(進禮) 등 9성을 도륙하여 9천여 명을 베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2년(기원후 648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石吐) 등 7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유신 · 죽지 (竹旨) · 진춘(陳春) · 천존(天存) 등 장군 에게 명하여 삼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백제군을 치게 하였는데, 서로 지고 이기고 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리지 아니하여 시체가 들에 널리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었다. 유신 등이 도살성 (道薩城) 아래에 주둔하여 말과 군사를 쉬게 해가지고 다시 공격하려고 하는데 마침 물새가 동쪽에서 날아와 유신의 군막 위를 지나갔다. 군사들이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하니 유신이 말했다. “오늘 백제의 정탐이 올 것이니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라·” 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수비를 견고히 하여 움직이지 말아라. 내일 구원병 오는 것을 기다려 싸울 것이다·” 하였다. 백제의 정탐이 돌아가 은상에게 이 말을 고하여 은상은 구원병이 오는 줄 알고 의심하며 두려워했다. 유신 등이 일시에 내달아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달솔(達率) · 정중(正仲)과 군사 1백 명을 포로로 하고, 좌평 ·은상·자견(自堅) 등 10명과 군사 8,980명을 베 고, 말 1만 마리와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고 그 밖에 기계도 수없이 노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므로 놓아주었다. 본기의 기록도 이와 비슷한데 악성 (嶽城)은 연혁을 알 수 없으나 진례 (進禮)는 용담(龍潭) · 진안(鎭 安) 사이의 진잉을(進仍乙 : 고구려의 본 이름인데 신라에서 진례라 하였음)이므로 악성도 그 부근일 것이니, 이것은 전라도의 동북지방 이 신라의 위협을 받은 것이고, 석토(石吐)는 연혁을 알 수 없으나 도살성이 곧 청안(淸安)의 옛 이름이므로 석토도 그 부근일 것이니, 이 것은 충청도의 동북지방을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신이 이처럼 늘 승리를 거두었다면 백제의 국토가 몹시 쇠퇴했을 것인데 당 서(唐書)에는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의 구원을 청한 말에 “큰 성과 요긴한 진(鎭)이 다 백제가 차지한 바가 되어 국토가 날로 줄어들었습니다---다만 옛 땅도 도로 찾는다면 강화를 청하겠습니다.

(大城重鎭 竝爲百濟所竝 疆宇日蹙 ---但得古地 卽請交和)”라고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태종대왕이 백제를 정벌하고자 당에 군사를 청하였는데 일찍이 혼자 앉아 있으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太宗大王 欲伐百濟 請兵於唐 嘗獨坐 憂形於色)”고 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성충(成忠) · 윤충(允忠) · 계백(階伯) · 의직(義直) 등 어진 재상과 이름난 장 수가 수두룩하고, 사졸들은 숱한 싸움을 겪어서 도저히 신라의 적이 아니었으니, 김유신이 몇 번 변변찮은 작은 싸움에서는 이겼었는지 모르지마는 기록과 같이 공이 혁혁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김유신 특유의 음모[편집]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유신의 전공이 거의 거짓 기록이라면 김유신은 무엇으로 그렇게 일컬어졌는가? 김유신은 지혜와 용기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가요, 그 평생의 큰 공이 싸움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사람이다. 그 실례를 하나 들겠다. 신라 부산현(夫山縣 : 지금 송도 부근) 현령(縣令) 조미곤(租未坤)이 백제의 포로가 되어 백제 좌평 임자(任子)의 집 종이 되었는데, 충실하고 부지런하게 임자를 섬겨 자유로이 밖에 드나들게 되자 가만히 도망해서 신라에 돌아와 백제 국내의 사정을 고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임자는 백제 왕이 사랑하는 대신이라니 내 뜻을 알려 신라에 이용되게 하면 그대의 공이 누구보다도 클 것인데, 그대가 능히 위험을 무릅쓰고 내 말대로 하겠소?” 조미곤이 말했다.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이에 조미곤은 유신의 밀령을 받고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이 나라의 신민이 되어 이 나라의 풍속을 모른다는 것은 안 될 일이기에 미처 아뢰지 못하고 나가 다니다가 돌아 왔습니다.”라고 하니, 임자는 이 말을 곧이듣고 의심하지 않았다. 조미곤이 틈을 타 임자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실은 고향을 생각하여 신라에 갔다 왔고 먼젓번 말은 한때 꾸민 말이었습니다. 신라에 가서 김유신을 만나보았는데 유신의 말이 백제와 신라가 서로 원수가 되어 전쟁이 그치지 아니하니,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인데 그러면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지금의 부귀를 잃고 남의 포로가 될 것이니 원컨대 우리 두 사람이 미리 약속하여 신라가 망하면 유신이 공에 의지해 백제에서 다시 벼슬을 하고 백제가 망하면 공이 유신에게 의지해 신라에서 다시 벼슬을 하기로 합시다. 그러면 두 나라 중 어느 나라가 망하든지 우리 두 사람은 여전히 부귀를 보전할 것이 아니겠소 하는 자기의 뜻을 말씀드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 임자가 잠자코 아무 말이 없자 조미곤은 송구스러워하며 물러났다.

며칠 뒤에 임자가 조미곤을 불러 전일에 한 말을 물으므로 조미곤이 다시 유신의 말을 되풀이하고 이어 “나라는 꽃과 같고 인생은 나비와 같은 것인데, 만일 이 꽃이 진 뒤에 저 꽃이 핀다면 이 꽃에서 놀던 나비가 저 꽃으로 옮겨가 사시를 항상 봄처럼 놀아야 할 것이 아닙니 까? 어찌 구태여 꽃을 위해 절개를 지켜 부귀를 버리고 몸을 망치겠습니까?” 하였다. 임자는 원래 부귀에 얼이 빠진 추악한 사나이였으므로 이 말을 달게 여겨 조미곤을 보내 유신의 말에 찬성하였다. 유신이 다시 임자에게 “한 나라의 권세를 독차지하지 못하면 부귀가 무슨 뜻이 있겠소? 들으니 백제에는 성충이 왕의 총애를 받아 모든 것이 다 그의 뜻대로만 되고, 공은 겨우 그 아래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낸다니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하고 백방으로 꾀어 부여 성충을 참소하게 하고, 마침내는 요망한 계집 금화(歸花)를 임자에게 천거하여 백제 왕궁에 들여보내게 해서 부여성충 이하 어진 신하들을 혹은 죽이고 혹은 귀양보내서 백제로써 백제를 망치게 하였다.

제3장 부여성충(扶餘成忠)의 자살[편집]

금화(錦花)와 임자(任子)의 참소와 이간질[편집]

임자는 김유신이 보낸 무당 금화를 미래의 화복과 국가 운명의 길고 짧음을 미리 아는 선녀라 일컬어 의자왕에게 천거하였다. 왕이 이에 혹해서 금화에게 백제 앞날의 길흉을 물었다. 금화는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신의 말을 전한다고 “백제가 만일 충신 형제를 죽이지 아니하 면 눈앞에 나라가 망하는 화가 미칠 것이요, 죽이면 천년만년 영원히 국운이 계속되리라.” 하였다. 왕이 말했다. “충신을 쓰면 나라가 흥하 고 충신을 죽이면 나라가 망함은 고금을 통한 이치인데 이제 충신 형제를 죽여야 백제의 국운이 영원할 것이라고 함은 무슨 말이냐?” 금 화가 말했다. “그 이름은 충신이지마는 실은 충신이 아니기 때문입 니다.” “충신 형제란 누구란 말이냐?” 하고 왕이 물으니 금화는 “첩은 다만 신의 비밀한 맹령을 전할 뿐이고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왕은 성충(成忠)과 윤충(允忠) 형제 가 다 이름에 충(忠) 자가 있어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임자는 왕의 성충에 대한 마음이 흔들렸음을 알고 그를 참소하여 내쫓으려고 하였다. 왕이 마침 임자와 한가로이 술을 마시게 되자 임자에 게 물었다. “성충은 어떠한 사람이오?” 임자가 “성충은 재주와 계략이 또래 중에서 뛰어나 전쟁의 승패를 미리 획책하면 백에 한 번도 실 수하는 일이 없고, 남의 뜻을 잘 짐작하며 말솜씨가 있어 이웃나라에 사신으로 가면 임금을 욕되게 하지 아니합니다.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 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재가 있는 만큼 그를 다루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이 들으니 성충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개소문과 친밀해서 개소문더러, ‘고구려에 공이 있고 백제에 성충이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천하에 얻지 못할 것이 있겠소? ’ 하여 엄연히 백제의 개소문을 자처하고, 개소문은 성충에게 ‘나나 공이 아직 대권(大權)을 잡지 못하였음이 한이오. ’ 하며 성충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성충이 이같이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나라의 권세있는 신하와 정의가 매우 가깝고, 또 그의 아우에 윤충 같은 명장이 있으니, 신은 대왕께서 만세(萬歲)하신 후에는 백제는 대왕 자손의 백제가 아니요 성충의 백제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왕은 윤충을 파면하여 소환하고 성충을 소홀히 대접하였다. 이 때 윤충은 바야흐로 월주(越州 )에서 장사를 훈련하여 당의 강남(江 南)을 온통 집어 삼키려고 하는 참이었는데 갑자기 참소를 만나 파면 돼서 돌아오니 오래지 않아 월주는 당에게 함락되었다. 그래서 윤충 은 울분하여 죽었다.

성충(成忠)의 자살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의 축출[편집]

윤충이 죽고 성충도 물리쳐지니 금화는 더욱 기탄없이 의자왕에게 권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왕흥사(王興寺)와 태자궁(太子宮)을 지어 나 라의 재정이 마르게 하고, 백제 산천의 지덕(地德)이 험악하니 쇠로 진압해야 한다고 각처 명산에 쇠기둥 또는 쇠못을 박고 강과 바다에 쇠그릇을 던져넣어 나라 안의 철이 동이 나게하니, 나라 사람들이 금화를 원망하여 ‘불가살’이라 일컬었다. ‘불가살’은 백제 신화(神話)의 ‘쇠 먹는 신’의 이름이었다.

이에 성충이 상소하여 임자와 금화의 죄를 통렬히 논란하였으나 왕의 좌우가 다 임자와 금화의 심복이었으므로 다투어 성충을 참소하기 를 “성충이 대왕의 총애를 잃은 뒤로 늘 울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오늘날 이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성충을 잡아서 옥에 가두고 좌평 흥수(興首)를 고마미지(古馬彌知 : 지금의 長興)로 귀양보내고, 서부은솔(西部恩率) 복신(福信)을 파면하여 가 두니 이들은 다 성충의 무리였다.

성충은 옥중에서 다시 유언의 상소를 올려 “충신은 죽을지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느니 신이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천시 (天時)와 인사(人事)를 살피건대, 오래지 않아 전화(戰禍)가 있을 것 입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지세를 택하여 위쪽에 처해서 적에 대응 해야만 만전(萬全)합니다. 만일 적병이 침입하거든 육로로는 탄현(炭峴)에서 막고, 수로로는 백강(白江)에서 막아 험한 곳에 웅거해 싸워야 합니다.” 하고는 음식을 끊어 28일 만에 죽으니 곧 고구려 태대대로 연개소문이 죽기 한 해 전이었다.

탄현은 후세 사람들이 지금의 여산(礪山) 탄현(炭峴)이라 하고, 백강은 지금의 부여(扶餘) 백강(白江)이라고 하지마는 백제가 망할 때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고 당의 군사가 백강을 지난 뒤에 계백(階伯)이 황산(黃山 : 지금의 連山 부근)에서 싸우고, 의직(義直)이 부여 앞장에서 싸웠으니 탄현은 지금 보은(報恩)의 탄현이고, 백강은 지금 서천 (舒川) 백마강(白馬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 흥수(興首)의 이른바 기벌포(伎代浦)이다. (다음 장 참조)

제 4 장 신라 · 당 두 나라 군사의 침입과 붙잡힌 백제 의자왕[편집]

신라와 당의 연합군 침입[편집]

기원후 654년 진덕여대왕(眞德女大王)이 돌아가고 김춘추(金春秋)가 왕위를 이으니 그가 이른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태종의 아버지 용춘(龍春) 때부터 이미 왕의 실권은 그가 가지고 있었지마는 다만 동서인 백제 무왕(武王)과의 왕위 다툼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자 왕의 명의는 첫번에는 선덕(仙德), 다음에는 진덕(眞德), 곧 출가하여 여승이 된 두 여인에게 준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두 나라의 갈라진 상처가 다시 아물 수 없게 깊어졌으므로 태종은 왕의 명의까지도 차지 한 것이었다.

태종이 왕이 되자 더욱 김품석(金品釋) 부부의 보복을 서두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백제의 침노가 심하므로 태자 법민(法敏)을 당에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였다. 당은 이때 태종이 죽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여 고구려에 대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여러번 고구려를 공격 하였다가 다 실패하였으므로, 이에 먼저 신라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쳐 없앤 다음에 다시 고구려를 함께 공격하기로 하고 태종의 청을 허락하였다.

계백(皆伯)과 의직(義直)의 전사[편집]

기원후 660년 3월에 신라 왕자 인문(仁問)이 당의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내주(내州)부터 바다를 건너 6월에 덕물도(德勿島 : 지금 南陽의 德勿島)에 이르렀다. 신라 태종이 금돌성(今突城:지금의 陰城)에 진을치고, 태자 법민과 대각간(大角干) 김유신과 장군 진주(眞珠) · 천존(天尊) 등으로 하여금 병선 1백 척으로 맞이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신라 당 두 나라 군사가 수륙으로 나뒤어 신라 군사는 육지로 쫓고, 당의 군사는 물로 쫓아 7월 10일에 백제 서울 소부리(所夫里)에서 집합합시다.” 하므로, 법민 · 유신 등이 다시 금돌성으로부터 돌아와 김품일(金品日 ) · 김흠순(金欽純)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향하였다. 그제야 의자왕은 깊은 밤의 연회를 파하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싸우고 지킬 방법을 의논하는데 좌평 의직 (義直)은 “당나라 군사가 물에 익숙지 못한데 멀리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니 뭍에 내리자마자 돌격하면 깨뜨리기 쉬울 것이고, 당의 군사를 깨뜨리면 신라는 저절로 겁이 나서 싸우지 않고 무너질 것입니다.” 하였고, 좌평 상영(常永)은 “당의 군사는 멀리 와서 빨리 싸우는 것이 이로울 것이므로 뭍에 내릴 때에는 장수와 군사들이 다 용감하게 싸울 것이니 험한 곳을 막아 지켜서 저네가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해이해진 뒤에 싸우는 것이 옳고, 신라는 일찍이 여러 차례 우리 군사에게 패하여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먼저 신라 군사를 쳐 깨뜨리고 다시 형편을보아 당의 군사를 치는 것 이 좋습니 다. ”라고 하여 의론이 분분하였다. 의자왕이 전에는 평시나 전시를 물론하고 용단(勇斷)을 잘 내렸는데, 이때에 와서는 요망한 무당과 여러 소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의외로 흐리멍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홀연히 지모(智謀)로 이름있던 좌평, 일찍이 성충의 무리로 지목되어 고마미지(古馬彌地 : 지금의 長興)에 귀양간 부여흥수(扶餘興首)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서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 흥수는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는 국가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막으면 만 사람이 덤비지 못할 곳이니, 수륙의 정예를 뽑아서 당의 군사는 기별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께서는 왕성을 지키다가 저네 두 적이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로해진 다음에 맹렬히 공격하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길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자가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니 임자 등은 성충의 남은 무리들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서 “흥수가 오래 귀양가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 고 성충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항상 보복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성충이 남긴 상소의 찌꺼기를 주워서 나라를 그르치려고 하는 것이니 그의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의 군사는 기벌포를 지나 들어오게 하고 신라 군사는 탄현을 넘어 들어오게 한 다음에 힘써 공격하면 독 안에 든 자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리하면 두 적을 다 분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험한 데를 막고 적병과 대치하여 시일을 허비해서 군사의 용기를 줄게 합니까?” 하였다. 왕은 그의 말이 옳다 하여 다시 궁녀들로 하여금 술을 올리고 노래를 부르게 하여 전쟁이 눈앞에 있음을 잊었다.

7월 9일에 신라 대장 김유신 · 김품일(金品日 ) 등이 5만 군사를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등야군(黃登也郡 : 지금의 論山 · 連山 사이)에 이르니 의자왕이 장군 부여 계백을 보내 신라 군사를 막게 했다. 계백은 출전에 임하여 “탄현의 천험(天險)을 지키지 않고 5천의 군사로 10배나 되는 적을 막으려 하니 내일의 일을 내가 알겠다.” 탄식하고 처자를 불러 “남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하고 칼을 빼어 다 죽이고 군중에 나아가 군사들을 모아놓고 “고구려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은 5천의 무리로 당의 군사 70만을 깨뜨렸으니, 우리 5천의 군사 한 사람이 열 사람을 당할 것인데 어찌 신라의 5만 군사를 두려워하겠느냐?” 하고는 군사를 몰아 달려가 황등야군에 이르러 험한 곳에 웅거해서 세 진영에 나뉘어 싸우니 김유신 등이 네 번 공격하였다가 네 번 다 패하여 만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김유신은 싸워서 이길 수는 없고 당의 군사와 약속한 7월 10일이 되어 다급해서 품일과 흠순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약속을 어기게 되는데 당의 군사가 홀로 싸우다가 패하면 신라의 수십 년 공들인 일이 헛일로 돌아갈 것이고, 당의 군사가 이기면 비록 남의 힘으로 복수는 하였다 하더라도 신라가 당의 업신여김에 견디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소?” 품일과 흠순이 “오늘 열 갑절의 많은 군사로 백제를 이기지 못한다면 신라 사람은 다시 낯을 들지 못할 것이오. 먼저 내 아들을 죽여 남의 자제들을 죽도록 격려하여 혈전을 벌이지 아니하면 안 되겠습니다.” 하고 흠순은 그의 아들 반굴(盤屈)을, 품일은 그의 아들 관창(官昌)을 불러 “신라의 화랑이 충성과 용맹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제 1만의 화랑으로 수천의 백제 군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화랑은 망하고 또 신라도 망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화랑의 두목이 되어 화랑을 망치고 말겠느냐?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을 다할 것이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다할 것인데,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야만 충과 효를 다했다고 할 것이다. 충효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는 것이 오늘 너희들이 할 일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반굴이 “네.” 하고 그 무리와 함께 백제의 진으로 돌격해 다 전사하였다. 관창은 나이 겨우 16 살로 화랑 중에서도 가장 어린 소년이었는데, 반굴의 뒤를 이어 혼자 서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어가 몇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혔다. 계백이 소년의 용감함을 사랑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신라에 소년 용사가 많으니 가륵하다. ” 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관창은 아버지 품일에게 “오늘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베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하고, 물을 움켜 마셔 목마름을 풀고는 다시 말에 채찍질하여 창을 들고 백제의 진중으로 달려들었다. 계백이 그를 쳐죽여 머리를 말꼬리에 매달아서 돌려보냈다. 품일이 이것을 보고 도리어 기뻐서 뛰며 “내 아들의 면목이 산 사람 같구나. 나라 일에 죽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 ”라고 외치니 신라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용기가 났다. 이에 유신이 다시 총공격의 명령을내려 수만명이 일제히 돌진 하였다. 계백이 친히 북을 쳐 응전하매 두 나라 군사가 참으로 용감하였지마는 수효가 너무도 모자라니 어찌하랴. 한갓 성스럽고 깨끗한 희생으로 전장에서 쓰러져 백제 역사의 끝장을 장식하였다. 신라 군사는 개가를 부르며 백제의 서울로 향하였다.

이때 당의 장수 소정방(蘇定方)은 백강(白江) 어귀 기벌포에 이르러 끝없는 진펄에 행군할 수가 없어서 풀과 나무를 베어다가 깔고 간신히 들어오는데, 백제의 왕은 임자의 말대로 독 안에서 자라를 잡으려고 그곳을 지키지 않고, 수군은 백강(白江 : 지금의 白馬江)을 지키고 육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당의 군사는 이미 진펄을 지났으므로 용기가 갑절하여 백제의 수군을 깨뜨리고 언덕으로 올라 왔다. 의직은 군사를 호령하여 격전을 하다가 죽었다. 의직은 지략이 계백 만은 못하지 마는 용감하기는 비등하여 한때 당나라 군사들의 담을 서늘케 하였으므로 신라 사람이 의직의 죽은 곳을 조룡대(釣龍臺)라 이름 하였으니, 의직을 용에 비유하고 의직을 죽인 것을 용을 낚아 올린 것에 비유한 것이었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는 “소정방이 백강에 이르자 비바람이 크게 일어서 행군할 수가 없으므로 무당에게 물으니 강의 용이 백제를 수호하는 것이라 하므로 소정방이 흰 말을 미끼로 하여 용을 낚아 잡았으므로, 강은 백마(白馬)라 이름하고 그곳을 조룡대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백마강이란 이름이 이미 소정방이 오기 전에 있었으므로 성충의 유언한 상소에도 백강 어귀를 말하였었다. 백강은 백마강의 준말이고, 일본사에는 백촌강(白村江)이라 일컬었는데 촌(村)은 뜻이 ‘말’이니 백촌강은 곧 백마강의 별역(別譯) 이다. 그 이야기 자체가 허황할 뿐 아니라 또한 역사와도 모순되니 해상잡록에 보인 바와 같이 의직의 죽은 곳이라고 한 것이 옳을 것이다.

의자왕(義慈王)의 포로됨과 백제의 두 서울 함락[편집]

김유신 등이 계백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이튿날인 11일에 백마강에 다다르니 소정방이 약속 기일이 지났다고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 (金文穎)을 목베려고 하였다. 유신은 당이 신라를 속국으로 대하려는 것이 분하여 눈에서 불이 떨어지는 듯 어느덧 칼을 빼어들고 여러 장 수들을 돌아보며 백제는 내버려두고 당과 싸우자고 외치니, 당의 장수 중에 이것을 탐지한 자가 있어 소정방에게 말하여 마침내 강문영을 풀어주고 두 나라 군사가 합세하여 ‘솝울’(所夫里)을 공격하였다. 의자왕은 태자 외에 적자가 몇 있고 서자가 40여 명이 있어 왕이 평일에 그들에게 다 좌평(佐平)의 직함을 주어 나라의 큰일에 다 참모하고 심지어 실권도 행사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략 세 파로 나뉘어졌다. 태자 효(孝) 등은 북경 (北京) 곰나루성 [熊津城]으로 가서 웅거하여 전국의 의병을 모으자고 하였고, 둘째 아들 태(泰)는 솝울을 지켜 부자(父子) · 군신(君臣)이 힘써 싸우면서 각지의 의병을 기다리자고 하였으며, 왕자 융(隆) 등은 고기와 술과 폐백을 적군에게 올려 물러가기를 빌자고 하였다. 사오십 명의 적자 서자들이 왕의 앞에서 제각기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떠들어대니 왕이 어느 의견을 좇아야 할지 몰라서 왕자의 말을 다 허락하여 융에게는 강화의 권한을 맡기고 태에게는 싸워 지킬 권한을 맡기고, 자기는 태자와 함께 북경 곰나루성으 로 도망하였다.

융이 소정방에게 글을 보내 퇴군하기를 요청하고 고기와 술을 보냈다가 다 거절당하니 둘째아들 태가 대왕의 자리에 올라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여 방어전을 펴는데,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대왕과 태자께서 생존해 계신데 삼촌이 어찌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가? 만일 일이 평정되면 삼촌을 쫓던 자는 다 역적의 죄로 죽을 것이다·” 하고 좌우를 거느리고 성에서 달아나니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고 군인들도 싸울 뜻이 없었다. 융은 또 화의를 성립시키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겨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하니 신라와 당의 군사가 성 안으로 올라갔다. 왕후와 왕외 희첩(姬妾)과 태자의 비빈(妃嬪)들은 모두 적병에게 욕보지 않으려고 대왕포(大王浦)로 달아나 바위 위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어 낙화암(落花巖)이란 바위 이름이 생겨서 지금까지 그 곧은 절개를 전한다. 다른 여러 아들들은 혹은 자살하고 혹은 달아났다.

의자왕은 곰나루성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는데 수성대장(守城大將)이 곧 임자(任子)의 무리가 왕을 잡아 항복하려고 하였다. 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동맥이 끊어지지 아니하여 태자 효(孝)와 소자 연(演)과 함께 포로가 되어 당의 진영으로 묶여갔다. 당의 장수 소정방은 거의 죽게 된 의자왕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제도 대국에 항거하겠느냐?” 하고 장난거리를 삼고, 신라 태자 법민(法敏)은 왕자 융을 마구 굴리며 “네 아비가 우리 누이 부부를 죽인 일이 생각나느냐?” 하고 앙갚음을 하였다.

신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치사하기 위하여 금돌성(今突城)에서 솝울로 달려갔다. 소정방은 일찍이 당의 고종으로부터 백제를 토벌하면 기회를 보아 신라를 쳐 빼앗으라는 밀명을 받고 왔었으므로 신라의 틈을 엿보고 있는 참이었다. 김유신이 이것을 알고 태종에게 아뢰어 어전회의를 열어 대항책을 강구하는데 김다미(金多美)가 말했다. “우리 군사로 하여금 백제의 옷을 입고 당의 군영을 치면 당의 군사가 나와 싸우면서 우리 군영에 구원을 청할 것이니 그때 불의에 습격하면 당의 군사를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백제 전역을 수복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화친하고 서쪽으로 당에 항거하며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를 길러 때를 기다렸다가 동병(動兵)하면 누가 우리를 업신여기겠습니까?”태종이 말했다. “이미 당의 은혜를 입어 적국을 토멸하였는데 또 당을 치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돕겠느냐?”김유신이 “개 꼬리를 밟으면 주인이라도 무는 법입니다. 이제 당이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 우리의 꼬리를 밟을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를 깨려고 하니 어찌 그 은혜를 생각하겠습니까?” 하고 당을 치기를 굳이 권하였으나 태종은 끝내 듣지 아니하고 군중에 명하여 엄중히 대비만 하게 할 뿐이었다.

소정방은 신라의 경계함을 알고 음모를 중지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함창(咸昌 : 尙州) 당교(唐橋)에서 당의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는 설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사실이 없는 말이라고 변명하였다.

백제는 수없이 전쟁을 한 나라이므로 나라 사람들이 전쟁에 익숙하고 의리에 용감하나 유교를 수입한 이래로는 일반 사회가 명분이라는 굴레에 목을 매여 성충과 흥수가 비록 외적을 평정할 만한 재주와 지략을 가졌으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같이 폭군을 죽일 만한 기백이 없었고, 계백과 의직이 비록 자기 몸과 집안을 희생하는 충렬(忠烈)을 가졌으나 연개소문과 같이 내부를 숙청할 수완이 없어서 마침내 망령된 의자왕을 처치하지 못하여 임자 등 소인의 무리들로 하여금 수십 년 동안 정치상의 중심을 잡고, 평시에는 나라의 재물을 자기네의 몸의 향락에 써서 탕진하고 난시에는 나라를 들어 적국에 투항하게 하였다. 중경(中京)과 상경(上京)이 다 왕자의 투항으로 망하고, 그 밖 에 삼경(三京)과 각 고을들도 또한 모두 반항없이 적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인민의 ‘다물(多勿)’ 운동(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은 의외로 격렬하여 임금과 관리들이 나라를 판 뒤에 분기하여 맨손으로 적병과 싸워 망국의 마지막길 역사를 혈우(血雨)로 끝맺었다.

만일 그들이 유교의 명분설(名分設)에 속지 않고 혁명의 기분을 가졌더라면 어찌 간사한 자들이 나라를 망치도록 내버려두었으랴? 이제 다음 장에 백제의 다물운동(多勿運動)에 대하여 그 대강을 말하려 한다.

제5장 백제 의병(義兵)의 봉기[편집]

의자왕(義慈王)이 포로가 된 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편집]

‘솝울’이 이미 적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잡혀가니 고관과 귀인들은 거의 다 임자 · 충상(忠常) 등 나라를 팔아먹은 무리들이므로 모두 유수(留守)하던 성과 고을을 들어 적에게 항복하였지마는 성충의 무리로 몰려 벼슬에서 물러난 옛 신하들과 초야의 의사들이 망국의 화를 구원하고자 각지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같이 열렬한 다물운동의 의사들은 신라 역사가들이 이를 패잔한 도둑이라 배척하여 그 사적을 지워버려서 그들의 이름조차 묻혀버렸으니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이에 신라본기 · 김유신전 · 해상잡록 · 당서 ·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의 책을 참조하여 보면 당시 백제의 의병이 일어난 지방은 대략 세 군데인데 하나는 백제 남부의 동북 지금의 전라도 동북인 금산 (錦山) 내지 진안(鎭安) 등지요, 또 하나는 백제 서부의 서쪽 절반 지금의 충청도 서쪽 절반의 대흥(大興) · 홍주(洪州 : 지금의 洪城) 내지 임천(林川) 등지 이고, 나머지 하나는 백제의 중부---지금의 충청남도 연기(燕岐) 등지이다. 이제 세 파의 전말을 대강 말하여 백제 말년의 혈전사(血戰史)의 일부를 보이려 한다.

패망한 중 · 남 두 지방 의병과 굳게 지킨 서부(西部) 의병[편집]

서부 의병대장 부여복신(扶餘福信)은 무왕(武王)의 조카인데, 일찍이 고구려와 당에 사신으로 가서 외교계의 인재로 이름났고, 서부은솔(西部恩率)이 되어 임존성(任存城)을 견고히 수리하고 성 안 창고에 양식을 비축해두는 외에, 통주(桶柱)를 세워 그 속에 쌀가루를 감추어두어 훗날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는데, 마침내 임자의 참소를 만나 벼슬을 내놓으니 군사와 백성들이 다 목놓아 울어서 차마 볼 수 없었다.

당의 군사가 중경 솝울과 상경 곰나루를 함락시켜 왕이 잡혀 가니 성 안의 군사들이 현재의 은솔을 내쫓고 복신을 추대하여 은솔을 삼아서 항전하였는데, 전좌평 자진(自進 : 당서에는 道琛)은 주류성(周留城 : 김유신전의 豆率城이니 지금 燕岐의 元師山 ? )을 전좌평 정무(正武) 는 두시이(豆尸伊 : 지금의 茂朱 남쪽이니 신라의 伊山縣)를 습격해서 웅거하여 군사를 합하여 곰나루를 다물(多勿)하려고 복신에게 사람을 보내서 힘을 합하기를 청하였다.

복신은 “이제 적의 대군이 우리의 두 서울과 각 요지를 빼앗아 웅거하고 우리의 물자와 기계들을 모두 몰수하였는데, 우리가 초야에서 흩어진 군사와 양민을 소집하여 대나무 창과 몽둥이로 저네 화살과 칼을 가진 자를 나아가 공격한다면 이것은 반드시 패할 것이니 우리의 병이 패망하면 백제의 운명은 끝장이오. 당이 10여 만의 많은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왔으니 그 양식은 신라의 공급과 우리 국민에게서 약탈한 것을 의뢰할 수밖에 없는데, 신라는 여러 해의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서 능히 오래도록 양식을 공급하지 못할 것이고, 민간의 약탈로는 많은 군사의 양식을 보충할 수 없을 뿐더러 더욱 우리 백성들의 반감이 쌓여서 의병의 수를 증가시킬 뿐인데, 당의 군사들도 이것 을 알기 때문에 며칠이 안 가서 반드시 1,2만의 수비병을 두고 대부분은 철회하여 돌아갈 것이오. 우리가 이제 다만 험하고 요긴한 성을 굳 게 지키다가 저네가 돌아간 뒤에 때를 타서 저네의 수비병을 격파하고 조종(祖宗)의 구업(舊業)을 회복해야 할 것인데 이제 싸워서 요행의 승리를 바라서야 되겠소.” 하였으나 정무 등이 듣지 않고 곰나루성 동 남쪽의 진현성(眞峴城)을 쳐서 잡힌 의자왕 이하 대신들과 장졸들을 빼앗으려다가 실패하고 정무는 두시성으로, 자진은 주류성으로 달아나 웅거하여 지켰다.

오래지 않아 당이 곰나루를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라 일컫고 당의 장수 유인원(劉仁願)은 당의 군사 1만 명으로 신라 왕자 인태(仁泰)는 신라 군사 7천 명으로 함께 지키게하고 그 밖의 각 중요한 성에다가 다 두 나라의 군사 얼마씩을 배치하였다. 각지의 의병들은 신라 태종 이 토평할 책임을 맡고, 당의 소정방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9월 3일에 돌아갔다. 이에 자진이 복신과 군사를 합하여 곰나루성을 치자고 하니 복신이 말했다. “우리 군사가 패망한 이제 한 번 큰 승리가 없으면 인심을 진작시킬 수 없는데, 곰나루성은 지세가 험하여 공격해 떨어뜨리기가 지극히 어려우니 차라리 정예한 군사를 뽑아 신라 군사의 돌아가는 길을 끊는 것이 좋겠소.” 하였으나 자진은 듣지 않고 곧 군사를 지휘하여 성의 동남쪽 진현성과 왕흥사의 영책 (領柵)을 깨뜨려 많은 물자와 기계를 빼앗고 곰나루성의 사변에 네댓 군데 목책을 세워서 신라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으니 일시에 의병의 형세가 크게 떨쳐서 남부의 20여 성이 다 호응하였으나 신라 태종이 태자 법민 · 각간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여례성(黎禮城 : 지금의 茂朱 南界)을 공격하므로 진무(眞武)가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고, 진현성의 의병도 신라 군사에게 습격당해 1천5백 명이 죽고, 왕흥사 영책의 의병도 7백 명이 전사하였다. 이에 신라 군사가 임존성을 쳤는데, 복신의 방어가 면밀하여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뒤따르지 못하므로 11월 1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부여복신(扶餘福信)의 연전연승[편집]

이듬해 2월에 부여 복신이 강서(江西)의 흩어진 군사를 모아 강을 건너가서 진현성을 회복하니 당의 장수 웅진도독 유인원이 정병 1천을 보냈다. 복신이 중로에서 불의에 습격하여 1천 명을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니 유인원이 연방 신라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 여 신라 태종이 이찬(伊餐) 품일(品日)로 대당장군(大幢將軍)을, 잡찬(잡餐) 문충(文忠)으로 상주장군(上州將軍)을, 아찬(阿餐) 의복(義服)으로 하주장군(下州將軍)을, 무훌(武훌) · 욱천(旭川) 등으로 남천주대감(南川州大監)을, 문품(文品)으로 서당장군(誓幢將軍)을, 의광(義光)으로 낭당장군(郎幢將軍)을 삼아서 가 구원하게 하니 3월 5일에 그 선봉대가 두량윤성(豆良尹城 : 지금의 定山)에 이르러 진지를 살펴 보았다.

복신이 대오(隊伍)가 정연하지 못함을 보고 갑자기 나가 습격하여 전멸시키고 그 군계(軍械)를 빼앗아서 몽둥이에 대신하고 성으로 들어와 지켰다.

신라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를 36일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사상자만 많이 내고 돌아가는지라 복신이 사방의 의병 을 지휘하여 좌충우돌 수많은 장수와 군사를 베고 물자와 기계를 모두 빼앗고, 다시 진격하여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러서는 신라가 구원병으로 보낸 김흠순(金欽鈍)의 군사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흠순 등이 홀몸으로 달아나 신라의 군사가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이에 복신은 왕자 풍(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곰나루성을 포위하여 신라에서 양식 운반해오는 길을 끊으니, 복신의 명성이 천하에 떨쳐 백제의 여러 성과 고을이 모두 호응해서 신라와 당이 임명한 관리를 죽이고 복신에게 귀부하였으며, 고구려의 남생(男生)은 구원병을 보내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쳐 멀리 복신을 응원하고, 일본은 화살 10만 개를 바쳐 복신을 도왔다.

제 6 장 고구려의 당군(唐軍) 격퇴와 백제 의병의 전성(全盛)[편집]

연개소문 사후(死後) 고구려의 내정(內政)[편집]

고구려 말년의 역사는 전사(前史)가 모두 당서(唐書)의 거짓 기록을 가져다 수록하여 1)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연장시켰고, 2) 연개소문이 요수(遼水) 서쪽에서 획득한 땅을 줄여 붙이고, 3) 연개소문의 생전과 사후의 고구려와 당에 대한 관계 사실을 위조하여서 고구려의 멸망한 진상을 잘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와의 관계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기원후 657년에 죽었음은 제11편에서 말한바이거니와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뒤를 이은 자도 그의 아들 남생(男 生)이니, 남생의 묘지(墓誌)에 의하면 “9살 때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 (조衣先人)의 한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선임으로 낭관(郞官)이 되어 중리대형(中裡大兄) · 중리위두대형(中裡位頭大兄)의 요직을 역임하 고 24살에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임하였다.”고 하였으니 연개소문이 죽고 남생이 그 직위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고구려와 당의 관계가 어떠하였는가는 역사책의 기록이 분명하지 않으나, 신 · 구당서의 고려전이나 정명진전(程名振專)에는 당의 고종 영휘(永徽) 6년에 “정명진 · 소정방 등이 고구려를 쳐 5월에 요수를 건너가 귀단수(貴端水)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고 하였고, 구당서 유인궤전(劉仁軌傳)에는 당의 고종 현경(顯慶) 2년에 “유인궤가 정명진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고구려를 귀단수에서 격파하여 3천 명을 베었다. ”고 하였는데,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연개소문에게 패하여 돌아갈 때에 화살에 맞은 눈의 상처가 덧나서 죽었으니 그의 친아들인 고종과 그의 신하인 이적(李勣) · 소정방(蘇定方) 등의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으랴마는 마침내 여러 해 동안 군사를 한 명도 일으키지 못한 것은 연개소문의 위명을 두려워한 때문일 것인데, 이제 갑자기 귀단수의 싸움이 있음은 그럴 만한 기회를 엿본 것일 것이다. 그 기회가 무엇인가 하면 현경 2년은 곧 기원후 657년 연개소문이 죽은 해이니 연개소문이 죽은 기회를 탄 것이다.

그러면 신 · 구당서의 고려전과 정명진전에는 어찌하여 귀단수 싸움을 영휘 6년 곧 서기 655년, 연개소문이 죽기 3년 전의 일로 기록하였는가? 이는 대개 당시 이 싸움의 동기가 당이 연개소문의 죽은 기회를 타려고 한 것인데, 이제 당의 사관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연장해놓고 보니 그 싸움의 동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저네가 그 싸움의 동기 곧 '군사를 일으키는 데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師出有名].'는 구실을 만들고자 하여 신라 태종의 원년 곧 신라 사자의 구원 요청이 있은 해이므로 지나간 해를 각 전기에 그대로 거짓 기록하여 싣고, 오직 유인궤전에 만은 우연히 검열을 잘못하여 싸움의 연조를 그대로 적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싸움은 연개소문이 죽은 후 당이 고구려에 처음으로 침입한 싸움이다. 그 승패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대개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산해관(山海關) 서쪽 땅 곧 당의 옛 땅을 당이 도로 차지하고 다시 나아가 여러 번 요수 동쪽을 침노하다가 패해 물러나서 그들은 당 한 나라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고구려를 이기지 못할 줄을 알고 신라와 연합하여 양쪽에서 협공할 것을 애타게 바랐었다. 그런데 이때에 백제와 고구려는 또한 함께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고 신라의 북쪽 경계에 자주 군사를 내어 공격하므로 신라 태종이 새로 즉위 하자 그 태자 법민을 당에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고, 아울러 백제의 어진 신하 성충(成忠)이 이미 죽고 의자왕이 교만하고 횡포하여 겉으로 는 비록 강성한 듯하나 내용은 텅 비어 있어서 두 나라의 군사가 함께 공격하면 이를 멸망시키기 쉬움을 설명하였다. 당의 임금과 신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13만 대군을 내어 신라와 협력해서 백제를 토멸한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사실은 이미 앞장에서 대강 말하였거니와 백제가 망할 때에 고구려의 남생이 백제에 대하여 구원병을 내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당의 군사가 이미 돌아가고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는 때에 고구려가 수만의 군사를 내어 곰나루 · 솝울 등지로 나아가서 복신 · 자진 등과 연합하여 싸웠더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났을 것이요, 백제가 다시 일어나면 넉넉히 신라를 견제하여 당의 군사에 대한 양식의 공급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고, 신라의 양식이 아니고는 고구려에 연개소문 · 양만춘 같은 영걸이 없더라도 당이 능히 평양까지 침입하지 못했을 것이며 설혹 침입하였다 하더라도 수(隋)의 양제(煬帝)처럼 패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고구려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먼저 백제의 멸망을 구원했어야 할 것인데 신라와 당 두 나라의 군사가 이미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야 소수의 군사를 보내어 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積城)을 함락시키고는 돌아가버렸고, 부여복신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 전군이 거의 회복된 뒤에도 겨우 수천 명을 내어 북한산성의 남녀 합해서 겨우 2천7백여 명의 신라인이 있는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하여 물러났으며 그 밖에는 백제를 구원하는 움직임이 없었으니, 남생은 훗날 나라 망친 죄를 짓기 전에 나라를 그르친 죄도 적지 않았다. 이같이 용렬한 사나이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죽은 연개소문은 또한 어찌 죄가 없다 할 수 있으랴?

평양(平壤)의 당군(唐軍)과 웅진(態津) 신라군의 대패[편집]

기원후 662년 당이 임아상(任雅相) · 계필하력(契苾何力) · 소정방(蘇定方) · 설인귀(薛仁貴) · 방효태(龐孝泰) 등 여러 장수를 보내서 하남(河南) · 하북(河北) · 회남(淮南) 등 67주(州)의 군사를 징발하여 35길로 나누어 평양에 침입하게 하고, 낭장(郞將) 유덕민(劉德敏)을 함자 도(含資道) 총관(總管)에 임명하여 신라로 들어가서 신라 군사와 협력하여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침략하는 동시에 신라의 양식을 평양으 로 운반해 보내게 하였다. 신라는 이때 태종(김춘추)의 상사(喪事)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왕 중종 문무왕(中宗 文武王 : 法敏)이 김유신 · 김인문· 김양도(金良圖) 등 아흡 장수로 하여금 전국의 군사를 총 동원하는 동시에 대거(大車) 20량을 만들어 쌀 4천 섬, 벼 2만 2천 여 섬을 실어다 평양에 있는 당의 군사에게 보내려고 했다. 이때 백제의 의병이 태산(兌山 : 錦山)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고 있었는데 당의 웅진도독 유인궤가 급히 문무왕에게 사자를 보내 고하기를 “만일 태산의 백제 군사를 그대로 두어 세력이 공고해지면 양식 운반하는 길이 끊어져서 주둔해 있는 1만 7천의 두 나라 군사가 다 굶어죽어 웅진이 다시 백제의 것이 되어 백제가 다시 회복될 것이요, 백제가 회복되면 더욱 고구려를 도모하기 어려울 것이니 먼저 태산성을 쳐주시기 바랍니다. ” 하였다. 그래서 문무왕은 김유신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9 월 15일에 태산성 아래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타이르고 부귀로 꾀이니 의병이 큰소리로 “성은 비록 작지마는 장졸이 다 의에 용감하여 싸우다가 죽은 백제의 귀신이 될지언정 항복하여 산 신라 사람이 되지 않겠다.” 하고 외치고는 대항해 싸워 여드레 만에 성 안의 군사 수천 명이 다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었다. 신라 군사는 나아가 우술성(雨述城: 지금의 懷德)을 포위하였다.

이 우술성은 복신이 신라 군량 운반의 길을 끊기 위하여 장수를 보내서 지키게 한 것인데 수십 일을 마주 버티다 성 안의 달솔(達率) 조복(助服)과 은솔(恩率) 파가(波伽)가 적과 내응하여 성 안의 의병 1천 명이 다 전사하고 성이 또한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웅진의 양식 운반하는 길이 열렸으나 평양의 당의 군사가 고구려 군사에게 크게 패해 패강도총관(浿江道總管) 임아상은 유시(流矢)에 맞아 죽고, 옥저도총관(沃沮道總管) 방효태는 그 아들 13명과 함께 사수(蛇水 : 지금의 普通江)에서 패전하여 군사가 전멸하고, 소정방 등의 군사는 한시성(韓始城 : 지금 평양 부근의 西施村)에 웅거하여 있다가 양식이 떨어져 신라의 공급을 애타게 기다리며 연방 사자를 보내므로 신라의 김유신이 군사를 두 군단으로 나누어 한 군단은 김유선이 인솔하여 평양으로 양식을 운반하고 한 군단은 김흠순이 인 솔하여 웅진으로 양식을 운반하게 하였는데,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서는 모든 장수들이 다 두려워서 건너가려 하지 않았다. 김유신이 “고구려가 망하지 않으면 백제는 다시 일어나고 신라는 위태롭게 될 것이니 우리가 어찌 위험을 꺼리겠소.” 하고 사잇길로 하여 강을 건너 는데 고구려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보아 험한 산을 타 수십 일 만에 평양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양식을 전해주었다. 소정방의 군사가 배불리 먹고는 패전한 끝에 다시 나아갈 수 없다 하여 바다를 따라 달아나 돌아갔다. 신라 군사는 머물러 싸우고자 하되 수효가 고구려 군사에 대적할 수 없고 달아나 돌아가자 하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할 것이라 형세가 매우 난처하였다. 이에 유신은 영을 내려 깃대를 그대로 꽂아두고 소와 말의 꼬리에는 북과 북채를 달아매어 서로 쳐서 소리가 나게 하고, 장졸들만 가만히 빠져나와 돌아오는데 날씨가 춥고 굶주려 사상자가 많이 나고 또 칠중하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군에게 추격을 당하다가 요행히 벗어났다. 동시에 웅진에 양식을 나르던 신라 군사들은 돌아가는 길에 큰 눈을 만난데다가 백제군사에게 포위되어 살아 돌아간 자가 백에 하나도 못 되었다. 부여복신이 다시 곰나루성에 이르러 성 부근 사면에다가 목책을 세워서 신라와 당의 군사의 교통을 차단하니 백제 전국이 다 호응하여 신라 · 당 두 나라에서 임명한 새 관리들을 죽이고 백제의 관리를 내어 모두 부여복신의 지휘 아래 속하니 이때는 백제의 다물운동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할 만하였다.

제 7장 부여복신(扶餘福信)의 죽음과 고구려의 내란[편집]

적과 내통하다 붙잡혀서 참수당한 자진(自進)[편집]

부여복신이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킬 때에 어떤 사람이 복신에게 말했다. “남의 제재를 받으면 큰일을 실패하기 쉽습니다. 공은 무왕의 조카요 명망이 안팎에 떨치니 스스로 서서 왕이 되어 전국의 군사를 지휘하시는 것이 옳습니다.”그러나 복신은 “그렇게 하면 그것은 사(私)를 백성에게 보이는 것이니 의가 아니오.” 하고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맞아 왕을 삼고, 또 자진(自進)이 의병을 앞장서 주창한 공이 있고, 일찍이 좌평의 벼슬을 지낸 대신이라 하여 영군대장군(領軍大將軍)이 되게 하고, 복신 자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 되어 강서(江西)의 군사를 전관(專管)하였는데 복신이 신라 · 당 두 나라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곰나루성을 포위 공격하니 당의 장수 유인궤가 감히 나와 싸우지 못하고, 또 소정방 등이 평양에서 패하여 달아나니 저들이 크게 낭패하여 당의 고종은 유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웅진의 외로운 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전군이 곧 바닷길로 돌아오라고 하여 유인궤 등이 도망하여 돌아가려고 하였다.

복신이 이것을 알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당군의 돌아가는 길을 공격해서 유인궤를 사로잡으려 했는데, 자진은 본래부터 항상 복신의 재주와 병망이 자기 보다 뛰어남을 시기하다가 이 일을 듣고는 더욱 복신이 큰 공을 이룰까 하여 드디어 유인궤에게 복신의 계책을 밀고하고, 또 인궤에게 “당의 황제가 만일 백제가 한 나라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백제가 길이 당의 은혜를 감사하여 당을 높이 섬길 것이요, 복신 등을 잡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여 인궤는 도망해 돌아갈 생각을 중지하고 자진과 서로 연락이 잦았다. 그러다가 복신의 부장 사수원(沙首原)이 그 밀모의 증거를 잡아 복신에게 알리니 복신이 크게 노하여 연회를 베푼다고 하고 여러 장수들을 모이게 하여 그 자리에서 자진을 잡아 그 죄를 선포하고 풍왕에게 고하여 처형하려고 하였다.

왕은 자진이 비록 죄가 있으나 대신이니 극형에 처함이 옳지 않다고 형을 감해주려고 하였으나, 복신은 나라를 배반한 자는 살려둘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자진을 참형에 처하였다.

피살당한 부여복신(扶餘福信)[편집]

풍왕은 복신에게 옹립되어 왕이 되었으나 항상 병권이 여러 장수들의 손에 있음을 의심하고 꺼리어 왔는데 복신이 자진을 처형하여 전국의 병권이 복신에게 돌아가니 왕의 좌우가 복신을 참소하여 “복신이 전횡(專橫)하여 제멋대로 대신을 죽이니 그의 안중에 어찌 대왕이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복신을 죽이지 아니하시면 복신이 장차 대왕을 해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은 복신을 죽이기로 비밀히 모의하고, 그 해 2월에 복신이 마침 병이 나 굴방에서 치료하고 있는 기회를 타서 왕이 문병한다 핑계하고 좌우의 신임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가서 갑자기 달려들어 복신을 결박하고 왕명으로 좌평 이하 각 대신을 불러 복신의 손바닥을 뚫어 가죽끈으로 꿰고 죄를 논하는데, 풍왕도 복신이 죽으면 적병을 막을 사람이 없을 줄은 환히 아는 터이라 마음 속으로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며 “복신의 죄가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었다. 달솔 득집(得執)이 “이런 악독한 반역자는 죽여도 죄가 남습니다.”라고 하였다. 복신이 득집을 향해 침을 뱉고 “이 개 같은 놈아---.” 하고 마침내 회자수의 칼에 목이 떨어지니 백제 백성들이 복신의 죽음을 듣고 모두 눈물을 뿌렸다.

《구당서(舊唐書)》에는 “용삭(龍朔) 2년(기원후 662년) 7월에 유인궤 · 유인원 등이 유수(留守)하던 진(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신의 남은 무리를 웅진 동쪽에서 크게 격파하여 그 지라성(支羅城) · 윤성(尹城)과 대산(大山) · 사정(沙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다---이때 복신이 병권을 도맡아서 부여풍(扶餘豊)과 서로 차차 시기하다가 복신이 병이라 일컫고 굴방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습격해서 죽이려고 하였는데, 풍이 이것을 알고 신임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서 복신을 엄습해 죽였다[龍朔二年七月, 仁軌 · 仁願等 率留鎭之兵 大破 福信餘衆於態律之東 拔其支羅城及尹城 · 大山 · 沙井等柵---時 福臣旣專其兵權 與扶餘豊 漸相猜貳 福信稱疾 臥於窟室 將候扶餘豊問疾 謀襲殺之 扶餘豊覺而率其親信 掩殺福信].”고 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천지(天智) 2년(기원후 663년) 6윌에 백제왕 풍장(豊章)이 복신의 모반할 마음을 의심하여 가죽끈으로 손바닥을 꿰어 결박하고---달솔 득집이 이런 악독한 반역자는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목베어 소금에 절였다. 8월 갑오(甲午)에 신라는 바로 침입하여 주류(州柔) 취하기를 도모하였다[天智二年六月 百濟王豊璋 嫌福信有 謀反心 以草穿掌而縛------達率得執曰 此惡逆人 不合放拾---斬而해首 八月 甲午 新羅 謀直入國 先取柔州].”고 하여 두 책의 연조와 사실이 서로 다르다. 복신이 죽은 해는 신라본기에 의하면 《일본서기》와 맞을 뿐 아니라 그 사실로 말하더라도 복신이 이미 대군을 장악하였으니 병권이 없는 풍왕을 죽이려면 당장에 죽일 수도 있겠는데 어찌 굴실에 누워 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죽이려고 하였겠는가? 이것이 《당서》의 첫째 의심스러운 점이요, 신라나 당이 복신에게 여러 번 패하여 1만 7천의 외로운 군사로 위태로운 성을 겨우 지키고 있었는데 어찌 아무런 형세의 변동이 없이 갑자기 나와 싸워서 지라성(支羅城) 곧 주류성(周留城: 지금의 宴岐)과 윤성(尹城: 지금의 定山), 대산(大山: 지금의 韓山), 사정(沙井: 지금의 溫陽) 등 각지를 평정하였겠는가? 이것이 《당서》의 둘째 의심스러운 점이요, 의병이 여러 번 승전하여 백제 전역이 거의 회복되었으므로 풍왕이 복신을 죽여 군권(君權)을 확장하려고 한 것일 것이니 어찌 각처의 성책이 거의 다 함락된 뒤에 장차 망하려는 권리를 찾으려고 복신을 해쳤을 것인가? 이것이 《당서》의 셋째 의심스러운 점이다. 그러므로 《당서》를 버리고 《일본서기》를 쫓는 동시에 《해상잡록》의 전설을 취하여 백제 최후의 위인의 사적의 모자람을 보충한다.

복신(福信) 사후 풍왕의 망함[편집]

유인궤가 곰나루성에서 포위되었으나 신라와 당이 다 복신을 두려 워하여 나아가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복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당의 고종은 장군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2만 7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의자왕의 아들로서 당에 포로가 되어 있던 왕자 융(隆)을 백제왕이라 일컬어 데리고 가게 하여 바닷길로 와서 덕물포(德勿浦)에 상륙하여 비밀히 사자를 보내 “풍왕은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아서 자기를 옹립 하고 또 큰 공이 있는 부여 복신을 죽였거니 하물며 다른 장수들이야 오죽하리오. 당은 원래 백제의 땅을 가지려 함이 아니라 오직 백제가 고구려와 한편 되는 것이 미워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친 것이거니와 이제 융은 백제 선왕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능히 대세를 알고 또 황제(당)의 신임을 얻었으므로 백제왕의 작위를 주고 대군으로 호위하여 귀국하게 하였으니, 백제의 총명한 장수와 군사들은 나의 말을 믿고 융을 왕으로 받들면 전쟁의 수고로움이 없이 고국을 회복하고 편안히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마는 만일 대군에게 완강히 항거하다가는 나도 공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공들은 잔인한 풍을 임금으로 받들었다가는 패하면 대군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요, 승리하면 풍의 시기를 받아 복신처럼 참혹하게 죽을 것이니 이 어찌 지혜로운 자의 취할 일이라오?” 하는 조서를 전하여 풍왕의 여러 장수들을 꾀었다. 남부달솔(南部達率)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진현성주(眞峴城主) 사타상여 (沙咤相如)가 풍이 복신을 죽인 것을 원망하다가 마침내 그 관내 2백여 성을 들어 융에게 투항하고 흑치상지는 다시 서부달솔 지수신(遲受信)에게 글을 보내서 풍왕이 잔인하여 백제를 중흥시킬 영주(英主)가 아님을 말하고, 이어 같이 항복하여 함께 일을 하자고 권하였다. 지수신은 “우리들이 상좌평(上佐平 : 복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하다가 불행히도 중도에 간신에게 모해당했으니 이 어찌 우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니겠소마는 상좌평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래 당적(唐賊)을 내쫓으려 함이었는데 어찌 상좌평의 죽음을 아파하여 그 복수를 위해 당에 투항을 한단 말이오 ? 그것은 상좌평을 배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곧 백제를 배반하는 것이니 상좌평의 영혼이 있다면 그 마음 아픔이 손바닥 꿰뚫리던 혹독한 형벌의 아픔보다 더할 것이오. 나는 공이 번연히 후회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오.” 하였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대답을 주지 않고 8월에 신라 · 당 두 나라 군사의 앞잡이가 되어 부하 5만 명을 이끌고 주류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가 두 나라로 나뉘어 지수신이 관할하는 서부는 풍왕에게 속하여 서백제(西百濟)가 되고, 흑치상지가 관할하는 남부는 융에게 속하여 남백제(南百濟)가 되었다. 서백제는 당을 대적하여 싸우는데 남백제는 당의 노예가 되어 그 지휘를 받아 서백제를 치니 아, 백제중홍의 대업을 이같이 창피히게 만든 자는 곧 부여풍---상좌평 부여복신을 죽인 부여풍이니, 부여풍은 곧 중흥하는 백제를 멸망시킨 첫째가는 죄인이다. 풍이 비록 죄인이지마는 풍이 약하다고 하여 백제를 배반하고 당의 노예가 된 흑치상지도 곧 백제를 멸망시킨 둘째가는 죄인이다. 전사(前史)에는 오직 당서의 포폄(褒貶)에 따라 흑치상지를 몹시 찬미하였으니 이 어찌 어리석은 아이의 붓장난이 아니냐? 풍이 복신을 죽이고는 적병을 막을 만한 방략이 없으므로 곧 고구려와 왜(倭)에 사자를 보내서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고구려는 당의 침략을 염려하여 군사를 내지 못하였고 왜는 병선 4백 척을 보내서 원조하였다. 왜병은 백마강 가운데 있고 서백제의 군사는 강 언덕에 진을 쳐 남백제 · 신라 · 당 세 나라의 군사와 대전하는데, 신라의 병선이 강의 상류로부터 왜의 병선을 무찔러 불질러서 죄다 태워버리니 왜병이 패하여 무너져서 다 물에 빠져 죽고 언덕 위 서백제의 군사는 남백제와 당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이에 세 나라의 군사가 총집결하여 주류성을 치니 풍은 드디어 달아나고 장수와 군사들은 다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