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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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서유(西遊)와 그 혁명[편집]

연개소문의 출생과 소년시절의 서유(西遊)[편집]

연개소문은 1)고구려 9백 년 이래로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의 구제도를 타파하여 정권을 통일하였고, 2)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 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하여 남수서진(南守西進)의 정책을 세웠고, 그래서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죽여 자기의 독무대로 만들고, 서국(西國) 제왕 당태종(唐太宗)을 격파하여 지나 대륙의 침략을 시도했는데 그 선악 현부(善惡賢否)는 별문제로 하고 아무튼 당시에 고구려뿐 아니라 동방아시아에 전쟁사 중에서 유일한 중심 인물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의 사실은 겨우 김유신전(金庾信傳) 가운데 “개금(蓋金 : 연개소문)이 김춘추(金春秋)를 객관(客館)에 머무르게 했다.”는 한 마디가 있을 뿐이고, 그 외에는 오로지 신 · 구 두 당서(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지나사를 뽑아 기록한 것뿐인데, 저 지나사는 곧 연개소문을 상대해서 혈투하던 당태종과 그 신하들의 입과 붓에서 나온 것을 재료로 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매우 적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서부(西部)의 세족(世族)이요, 서부의 명칭이 연나(淵那 : 涓邦)이므로, 성이 연(淵)인데, 삼국사기에 성을 천씨 (泉氏)라 한 것은 당나라 사람이 그 고조(高祖)의 이름 연(淵)을 피하여 천으로 대신한 것을 그대로 가져다 기록한 것이다.

당의 장열(張悅)이 규염객(규髥客)의 사실을 기록하여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으로 중국에 와서 태원(太原)에 이르러 이정(李靖)과 친교를 맺고 이정의 아내 홍불지(紅佛技)와는 남매의 의를 맺고자 중국의 제왕이 되려고 도모하다가 당공(唐公) 이연(李淵)의 아들 세민(世民 :唐太宗)을 만나보고는 그의 영기(零氣)에 눌려 이정더러 중국의 제왕 될 것을 단념했노라 하고 귀국하여 난을 일으켜서 부여국 왕이 되었다.”고 하였는데(규髥客傳의 大意), 선배들이 “부여국은 곧 고구려요, 규염객은 곧 연개소문이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의 영기에 눌려 지나의 제왕되기를 단념한 것은 제왕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요 구구 한 지략있는 자가 엿볼 것이 아니라는 저네 소설가의 권선징악적(勸善懲惡的) 필법일 뿐이거니와 연개소문이 지나를 침략하려 하여 그 국정을 탐지하기 위해 한 번 서유(西遊)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중국에 전하는 갓쉰동전(傳)은 이것과 같은 소설이니 그 대강이 다음과 같다.

연국혜라는 한 재상이 있었는데 나이 50이 되도록 슬하에 자녀가 없어서 하늘에 제사를 올려 아들의 점지를 기도하여 한 옥동자를 낳아 이름을 갓쉰동이라고 하였다. 갓 쉰 살 되던 해에 낳았다는 뜻이었다. 자라나매 용모가 비범하고 재주가 월등하므로 연국혜가 손 안의 구슬 같이 사랑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갓쉰동이가 7살 되던 해에 문 앞에서 장난을 하고 노는데 어떤 도사(道士)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아깝다, 아깝다.” 하고 갔다. 연국혜가 그 말을 듣고 뒤쫓아가 도사를 붙잡고 그 까닭을 물으니 도사가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고 말하지 아니 하다가 나중에 하는 말이 이 아이가 자라면 부귀와 공명이 무궁할 것이지마는 타고난 수명이 짧아서 그때를 기다리지 못할 것이오.” 하였다. 그러면 그 액을 면할 방법이 없느냐고 물으니까 “십오 년 동안 이 아이를 내버려 부모와 서로 만나지 못하면 그 액을 면할 것이오.” 하였다. 연국혜는 차마 못할 일이었지마는 도사의 말을 믿고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하인을 시켜서 갓쉰동이를 멀리멀리 산도 설고 물도 선 어느 시골에 데려다 버리게 하였는데, 다만 훗날 도로 찾을 표적은 만들기 위해 먹실로 등에다가 ‘갓쉰동’이란 석 자를 새겨서 보 냈다. 갓쉰동이가 버려진 곳은 원주(原州) 학성동(鶴城洞)이었다 그 동네의 장자(長者) 유씨(柳氏)가 그날 밤 꿈에 앞내에 황룡(黃龍)。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새벽에 앞내에 나가보니 한 준수한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길렀는데 그 등에 새긴 글자를 보고 이름을 그대로 ‘갓쉰동’이라 불렸다.

갓쉰동이 자랄수록 미목(眉目)이 청수하고 용모가 영특하나 그 내력을 알 수 없어 온 집안이 천한 사람으로 대접하였다. 장자는 그들 사랑하기는 하였으나 남의 시비를 싫어하여 그 신분을 높여주지 못하고, 다만 글을 약간 가르쳐 자기 집 종으로 부렸다.

하루는 갓쉰동이가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는데 난데없는 청아한 퉁소 소리가 들리므로 지게를 버티어놓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가니 한 노인이 앉아서 퉁소를 불고 있었다. 노인이 갓쉰동이를 보더니 “네가 갓자쉰동이가 아니냐? 네가오늘에 배우지 아니하면 장래 어찌 큰공을 이루겠느냐?” 하고 학문의 필요함을 이야기해주었다 갓쉰동이는 그 이야기에 취하여 해 지는 줄도 모르고 듣고 있는데 노인이 석양을 가리키며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오라고 하며 어디로인지 획 가버렸다.갓쉰동이가 그제야 깜짝 놀라 내가 나무를 하러 왔다가 빈 지게를 버 티어놓고 해를 다 보냈으니 주인의 꾸중을 어찌하나, 하고 내려와 보니 누구의 짓인지 나무를 베어 지게에 지워놓았다. 갓쉰동이가 그이튿날 부터 나무를 하러 가면 반드시 그 노인을 만나고 만나서는 검술(劍術)·병서(兵書)·천문(天文)·지리(地理)등을 배우고, 그리고 내려오면 반드시 그 지게에 나무가 지워져 있어서 지고 돌아올 뿐이었다. 장자는 아들은 없이 딸만 셋을 두었는데 문희 · 경희 · 영희라 하였다. 세 사람이 다 뛰어난 미인인데 영희가 더욱 뛰어났다. 갓쉰동이가 l5살 되던 해 봄 어느날, 장자는 갓쉰동이를 불러 세 아가씨를 가마에 태워가지고 화류(花柳) 구경을 가라고 하였다. 갓쉰동이 그의 말에 따라 교군(轎軍)을 가지고 문희의 방 앞에 가서 “아가씨, 가마를 대령했습니다·”라고 했다. 문희가 버선발로 마루 끝에 나서더니 “아이고 맨 땅을 어떻게 디디겠느냐? 갓쉰동아, 네가 거기 엎드려라.”하여 갓쉰동이의 등을 밟고 내려와 가마에 들어갔다. 경희를 태울때 경희도 그러는지라 갓쉰동이 노하여 한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었지마는 장자의 은혜를 생각하여 꾹 참고, 영희의 방에 가서는 이 년도 그 년의 동생이니 별다르겠느냐 하는 생각이 나서 가마를 대령하였습니다·” 한 마디 하고는 미리 뜰에 엎드렸다. 영희가 문에서 나와 보고는 놀라 “갓쉰동이, 이것이 무슨 짓이야·” 하였다. 갓쉰동이가 말했다 “갓쉰동이의 등이야 하느님이 아가씨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까? 이 등으로 나무를 져다가 아가씨들의 방을 덥히고, 이 등으로 쌀을 실어다가 아가씨들의 배를 불리고, 아가씨들이 앉고 싶으면 갓쉰 둥이의 등을 자리로 쓰시고, 아가씨들이 걷고 싶으면 갓쉰동이의 등을 다리로 삼으시고- - -” 말이 채 끝나지 아니하여 영희가 달려들어 “아서라, 이게 무슨 짓이냐? 사람의 발로 사람의 등을 밟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고 갓쉰동이를 일으켰다. 갓쉰동이는 일어나 영희의 꽃같은 얼굴, 관옥 같은 살결과 정다운 말소리에 마음을 잡지 못하며, “나도 어렴풋이 어릴 때의 일을 생각하면 너와 결혼할 만한 집안 인데- - - ”라고 말하며 눈물이 글썽해졌다.영희도 갓쉰동이의 용모가 범상치 아니하고 음성이 우렁참을 보고 이같은 남자가 어찌하여 남의 집 종이 되었을까 생각하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뒤로부터 갓쉰동이는 영희를 생각하고 영희는 갓쉰동이를 사랑하여 두 사람 사이의 정의가 점점 두터워졌다. 갓쉰동이가 “내가 일곱 살때 집을 떠나던 일을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아마 우리 부모가 도사의 말을 믿고 나를버려 훗날다시 찾으려 한것 같다. 나도 집에 돌아가면 귀한 집 아들이니 너 나하고 결혼하자·”라고 하니 영희는 “나는 귀인의 아내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의 아내가 되기를 바란다 만일 네가 사나이가 아닐진대 귀한 집 아들이라도 내 남편이 못될 것이고, 네가 사내라면 종이라도 나는 너 아니면 아내가 되지 않겠다. 그러니 너는 그 회포를 말해보아라·” 하였다. 갓쉰동이 “달딸이는 늘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백성을 괴롭히는데 우리는 다만 침입하는 달딸이를 물리칠 뿐이요 달딸국에 쳐들어가지 못했으니 나는 이것이 분하여 늘 달딸이의 땅을 한 번 쳐서 백 년의 태평을 이룩하려고 생각 한다.” 하고 요즈음 나무하러 가서 어떤 선관(仙官)에게 날마다 검술 · 병서 · 천문 · 지리 등을 배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영희는 크게 기뻐하며 “그렇지만 적국을 치자면 적국의 형편을 잘 알아야 할 것인데 네가 친히 달딸국에 들어가 그 산천을 두루 돌아다녀서 국정을 살펴보아 훗날 성공할 터를 닦아가지고 오면 나는 너의 아내가 못되면 종이 되어서라도 네 앞에서 백 년을 모시려 한다.”고 하였다. 갓쉰 동이가 쾌히 허락하고 장자의 집에서 달아났는데 영희는 제가 가진 금가락지와 은그릇 등을 주어 노자를 만들게 하였다.

갓쉰동이 가 달딸국에 들어 가서는 달딸의 말도 배우고 달딸의 풍속도 익히고, 또 그 내정을 알기 위해 이름을 돌쇠라 고치고 달딸국왕의 가노(家奴)가 되었는데 행동이 영리하므로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영매하고 또 사람을 잘 알아보아 갓쉰동이는 비상한 영걸이요 또한 달딸의 종자가 아니니 죽여서 그 후환을 없애자고 그 아비에게 고하여 철책 안에 잡아가두고, 음식을 끊어서 굶겨 죽이려고 하였다. 갓쉰동이는 곧 자기의 몸이 위태로움을 깨달았으나 계책이 없어 답답히 앉았다가 자기 곁에 매를 길들이려고 잡아넣은 새장을 보고 와락 달려들어 새장을 부수고, 그 안에 있는 매를 다 날려보냈다. 이때 마침 달딸왕 부자는 다 사냥을 나가고 달딸왕의 공주가 그를 지키고 있다가 놀라 “네가 왜 매를 놓아 보내느냐? 더욱 우리 아버지와 오빠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냐?” 하였다. 갓쉰동이가 말했다.“내가 나 갇힌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갇힌 매를 보니 곧 매가 답답해 할 것을 생각하였다. 나를 풀어주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면서 내 곁에 갇혀 있는 매를 풀어 보내지 못한다면 매가 얼마나 나를 원망하랴. 차라려 매를 위해 죽을지언정 매의 원망을 받지 않으리라 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갇혀 있는 매를 놓아주었다.” 공주가 그의 말을 듣고 측은히 여겨 “내가 우리 둘째 오라버니에게 들으니 네가 우리 달딸을 멸망시키려고 생긴 사람이라 하던데 네가 어찌하여 달딸을 망치려고 하느냐?”라고 하였다. 갓쉰동이가 말했다. “하늘이 나를 달딸을 망치려고 내셨다면 너의 오라버니가 나를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것이고, 또 나를 죽일지라도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올 것이다. 너의 오라버니에게 이렇게 잡혀 죽게 된 몸이 어찌 달딸을 멸망 시킨단 말이냐 ? 공주가 만일 나를 풀어주면 나는 저 매와 같이 산으로 물로 훨훨 날아다니면서 ‘나무아미타불’을 불러 공주를 사랑하고 보호해달라고 외울 뿐이요, 다른 생각이 없겠다. ” 공주가 더욱 측은히 여기는 빛이 있더니 “오냐, 내 아무리 무능한 여자인들 우리 아버지의 딸이요 우리 오라버니의 동생이니 어찌 너 하나를 살려주지 못하겠느냐? 얼마 안가 우리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돌아오시거든 너의 무죄함을 아뢰어 너를 돌아가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갓쉰동이 공주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공주는 애쓰지 말라. 돌쇠 한 놈 죽는 것이 무슨 큰일인가 나는 들으니 부처님은 사람을 구할 때에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고한 일이 없다던데- - -.” 공주가 그 말에 얼굴빛이 더욱 변하더니 내전(內殿) 불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열쇠로 철책의 문을 열어 갓쉰동이를 내보냈다. 공주가 손목을 잡고 “내가 너를 처음 보았지마는 너를 보내는 데 내 마음도 따라간다. 네 몸은 매같이 휠훨 날아서 가더라도 네 마음일랑 나를 주고 가거라.” “공주가 나를 잊을지언정 내가 어찌 공주를 잊겠는가? ” 하고는 갈길이 바빠 걸음아 날 살려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도망하여 성문을 나와 풀뿌리를 캐먹으면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달딸의 국경을 벗어나 귀국하였다. 달딸의 둘째왕자가 돌아와 공주가 갓쉰동이를 사사로이 놓아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칼을 빼서 공주의 목을 베었다.

이 이야기는 계속해서 갓쉰동이가 귀국한 뒤에 책문(策文)을 지어 과거에 급제한 일이며 영희와 결혼한 일이며 달딸을 토평한 일이며 그 밖에도 이야기들이 많으나 다 생략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연개소문이 지나를 정탐한 전설의 일단(一段)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갓쉰동 은 곧 개소문(蓋蘇文)이니 개(蓋)는 갓으로 윈고 소문(蘇文)은 쉰으로 읽을 것이며, 국혜는 곧 남생(男生)의 묘지(墓誌)에 보인 개소문의 아버지 태조(太祚)니, 하나는 그 이름이고 하나는 그 자(字)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국혜가 혹 소설의 작자가 사사로이 지은 이름일 것이다. 달딸국왕은 곧 당고조(唐高祖)요 둘째 왕자는 곧 당고조의 둘째 아들 태종이니, 어찌하여 당고조와 태종을 달딸왕이라 달딸왕자라 하였는가 하면 이는 여러 백 년 이래 사대주의파의 세력에 눌려 언문책(諺文冊) 이라고 천대하던 우리 글로 쓴 여염집 부녀자가 읽는 책에서도 당당히 지나 대륙의 정통 제왕을 공격 혹은 비난하지 못하였으므로, 당(唐)을 달딸로 당고종을 달딸국왕으로 태종을 달딸국 둘째 왕자로 고친 것이다. 연개소문이 병력으로 그 임금과 대신과 가족 등 수백 명을 죽인 사실이 왜 갓쉰동전에 빠졌는가? 이것도 구소설의 권선징악(勳善徵惡)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고친 것이다.

연개소문의 시대에는 조선에 과거(科學)가 없던 시대라 책문(策文) 을 지어 과거에 급제한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이를 천선(天仙)같이 본 이조의 습관에 의해 덧붙인 것이다. 갓쉰동전은 이 같이 옛 전설을 고치고 새 관념으로 첨삭하여 지은 소설이니 그 본래 것의 신용가치의 여하를 말할 수 없음이 아깝다.

규염객전과 갓쉰동전 두 책의 기록이 좀 다른데, 이제 두 책의 기록의 진위(眞僞)를 추론하건대, 이때에 고구려가 새로 수양제(隋煬帝) 의 수백만 군사를 대파하여 전 지나가 크게 놀라 떨고, 당고조(唐高祖)의 부자는 수양제 치하(治下)에 있는 태원(太原)의 소공국(小公國) 이요, 이정(李靖)은 태원의 한 작은 벼슬아치였다. 태원이 옛날부터 많이 고구려의 침략을 받던 지방이므로 더욱 고구려 사람을 경계하였을 것이며, 당태종은 안으로 전 지나를 평정하고 밖으로 고구려를 토멸할 야심을 가져 늘 고구려나 고구려 사람들의 행동을 주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여러 노복들 중에서 변장한 고구려 사람 연개소문을 발견한 것이니 얼마나 놀랐으랴? 하물며 당서(唐書)에도 연개소문은 모습이 괴이하고, 의기가 호매(豪邁)하다고 하였으니, 당태종이 이를 발견하자 곧 자기네 장래의 강적이 자기네 수중에 잡혔음을 알고 비상한 요행으로 여겼을 것이고, 또한 얼마나 좋아하였으랴?

그 놀라움, 그 좋아함 끝에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을 것도 불을 보는 것과 같이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이치로 미루어보아 갓쉰동전은 믿을 만한 점이 많고, 신구 두 당서에 당태종의 말을 기록하여 “개소문 은 방자하다. ” “개 소문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 “개 소문은 이리 같 은 야심- - -.” 이라고 한 말들이 비록 개소문을 미워한 말이지마는 반 면에 개소문을 꺼렸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위공병서(李衛公兵書)에 “막리지(寞離支) 개소문은 스스로 군사병법을 안다고 하였다.”고 한 문구가 또한 개소문을 모멸하였다느니 보다 두려워 공경한 뜻이 엿보 인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만나보고 영기(英氣)에 눌려 동으로 나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두 기록을 대조해봄에 있어 규염객전 은 의심할 만한 점이 많으므로, 본서에는 규염객전을 버리고 갓쉰동전을 취하였다.

연개소문 귀국 후의 내외 정세[편집]

연개소문이 지나로부터 귀국한 것은 대개 기원후 616년( ? )경이다. 연 태조(淵太祚) 부부는 등에 새긴 이름을 증거삼아 아들을 찾았고, 만리 밖 미혼부(未婚夫)를 기다리던 유씨 집의 영희는 신랑을 맞아 한때 기이한 이야기로 고구려 국내에 널리 퍼졌다고 하였다. 이는 다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 못 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거니와 개소문이 귀국한 뒤에 수(隋)의 양제(煬帝)는 신하 우문화급(宇文化及 : 살수에서 패해 돌아간 장군 宇文述의 아들)에게 참살당하고, 군웅(群雄)이 우우 일어나 서로 힘을 다투어 지나 전국이 끓는 물같이 부글부글하다가 오래 지 않아 앞에서 말한 당공(唐公) 이연(李淵)의 아들 이세민(李世民 : 곧 당태종)이 아버지 이연을 협박하여 또한 반란군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오히려 수(隋)에 대하여 신하의 예를 취하다가 마침내 군웅을 말끔히 토멸하고는 드디어 아버지 연을 추대하여 당황제 (唐皇帝)를 삼고 또 오래지 아니하여 당태종은 형 건성(建成)과 아우 원길 (元吉)이 권력 다툼함을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건성 · 원길을 죽이고 아버지 연을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스스로 섰다.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고 15년 동안이나 정치와 전쟁에 애쓰며 이름난 신하와 어진 재상을 등용하여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국가 사회주의를 행하여 국내의 땅들을 모두 공전(公田)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대략 공정하게 분배하였으며, 16위(衛)를 세우고 고구려의 징병제(徵兵制)를 참작하여 상비군 이외에 예비병을 두어 전국 백성이 해마다 농사의 여가에 말타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이정(李靖) 후군집(候君集) 등 여러 장수들을 내보내서 돌궐(突厥)---지금의 내몽고와 철륵(鐵勒)의 여러 부(部)--- 지금의 외몽고와 토독혼(묘 짜軍)---지금의 티베트를 정복하여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이 다 혁혁하니 이것이 지나사에 가장 떠드는 정관의치(貞觀之治)라는 것이다.

그러면 연개소문이 귀국한 이듬해 수가 망한 뒤로부터 정관 15년까지 26년 동안 고구려의 내정은 어떠하였던가? 왕의 아우 건무는 을지 문덕과 함께 수의 군사를 쳐 물리친 두 대원훈(大元勳)이지만, 을지문덕은 북진남수(jE隻南守) 주의를 지키고 건무는 북수남진(北守南進) 주의를 주장하여 두 사람이 서로 정견을 달리했는데, 영양왕(영陽王)이 돌아가고 건무가 즉위 (기원후 618년)하고부터는 더욱 북수남진 주의를 굳게 지켜 수 · 당이 일어나고 망하는 사이에 을지문덕 일파의 여러 신하들이 그 기회를 타서 북으로 강토를 늘리자고 주장했으나 왕이 억제하여 듣지 아니하고, 당에 사자를 보내서 화호(和好)를 맺고 수의 말기에 사로잡은 지나인을 다 돌려보내고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을 다시 써서 자주 군사를 내어 신라와 백제를 쳤다.

연개소문이 이를 반대하고 “고구려의 우환이 될 것은 당이지 신라와 백제가 아니다. 지난날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하여 우리 나라의 땅을 침노해 빼앗은 일이 있으나 이제는 형편이 이미 변하여 신라와 백제가 서로 원수로 여김이 이미 깊어져서 여망(餘望)이 없으니, 국가에서 남쪽에는 견제책(牽制策)을 써서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막거나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막거나, 두 계책 중에서 하나를 쓰면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통에 우리 나라는 남쪽의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이 틈을 타서 당과 결전하여 다투는 것이 옳다. 서쪽 나라는 우리 나라와 언제나 양립하지 못할 나라이니 이것은 지나간 일에 경험하여 보아도 분명한 것이므로 국가에서 왕년에 몇백만 수나라 군사를 격파했을 때 곧 대군을 내어 토벌하였더라면 그 평정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웠을 것인데, 그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잃었음이 이미 뜻있는 이의 통분히 여기는 바요, 오늘날도 좀 늦기는 하였으나 저네의 형제가 화목하지 아니하여 건성은 세민을 죽이려 하고 세민은 건성을 죽이려 하는데, 이연(李淵)이 혼암(昏暗)하여 두 사람 사이에서 어찌하지 못하니 이러한 판에 만일 우리가 대군으로 저네를 치면 건성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거나, 세민이 모반하여 우리에게 붙을 것이요, 설혹 그렇지 못할지라도 저네가 수의 말년에 우리에게 크게 패하고, 또 여러 해 난리가 뒤를 이어 백성의 힘이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으므로 반드시 전쟁을 할 여력이 없을 것이니 이것도 비상한 좋은 기회이거니와 만일 저네 두 형제 중 한 사람이 패해 죽고 한 사람이 전권(專權)하여 세력이 통일된 뒤에 폐정(廳政)을 고치고 군제(軍制)를 바로잡아 우리 나라를 침범하면 땅의 크기와 백성의 많기가 다 저네에게 미치지 못하는 데, 고구려가 무엇으로 저네에게 대항할 것인가? 국가 흥망의 기틀이 여기에 있는데 모든 신하와 장수들이 이를 아는 이가 없으니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랴?” 하여 극력 당의 정벌을 주장하였으나 영류왕 (榮留王)과 다른 신하들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다.

기원후 626년에 이르러 세민(世民 : 당태종)이 그 무덕(武德) 9년에 아버지의 황제의 자리를 빼앗을 때 신라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서로 전 쟁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오래지 않아 다시 을지문덕의 전승 기념 으로 쌓은 경관(京觀)이 두 나라 평화에 장애가 된다 하여 철회를 요 구해왔다. 영류왕은 크게 놀라 오래지 않아 당의 침입이 반드시 있을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오히려 북수남진의 정책을 그대로 지켜 남쪽 의 침략을 그만두지 않는 동시에 국내의 남녀를 징발하여 북부여성 (北扶餘城)에서 지금의 요동반도(遼東半島) 남쪽 끝까지 1천여 리의 장성을 16년이나 두고 쌓으니 그 역사(役事)가 전쟁보다 더 거창하여, 남자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여자는 누에를 쳐 길쌈을 하지 못하여 국력이 크게 피폐해졌다. 삼국유사에는 그 장성을 연개소문의 주청(奏請)에 의해 쌓은 것이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연개소문이 노자상(老子像)과 도사(道士)를 청해왔다.”고 하는 말과 한가지 거짓말이다.

연개소문의 혁명과 대살육(大殺戮)[편집]

기원후 646년경에 서부(西部)의 살이(薩伊) 연태조(淵太祚)가 죽으니 아들 연개소문이 살이의 직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늘 격렬하게 당을 치기를 주장하므로, 영류왕과 모든 대신과 호족(豪族)들은 다 연개소문을 평화를 파괴할 인물이라고 위험시하여 그가 직위 물려받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이는 곧 연개소문의 정치 생명 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연개소문은 자기의 소신이 아주 굳어서 “내가 아니면 고구려를 구할 사람이 없다.” 하고 자처하는 인물이었지만 또한 어릴 때 타향과 외국에서 두 번이나 종 노릇한 경력이 있어 굽혀야 할 때 굽힐 줄을 아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다. 직위를 물려받지 못하자 곧 사부(四部)의 살이와 그 밖의 호족들을 찾아다니며 “개소문이 불초하나 여러 대인들께서 큰 죄를 가하지 않으시고 다만 직위 계승만 못하게 하시니 이것만도 그 은혜가 지극하여, 오늘부터 개소문도 힘써 회개하여 여러 대인들의 교훈을 좇으려 합니다. 바라컨대 여러 대인들께서는 개소문으로 하여금 직위를 계승케 하셨다가 불초한 일이 있으면 직위를 도로 빼앗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여러 대인이 그의 말을 애처롭게 여겨 서부 살이의 직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서울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여 북쪽으로 쫓아내 북부여 장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서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할 날짜까지 정하였다.

전에 당태종이 고구려의 내정을 탐지하려고 자주 밀사를 보냈는데 당인(唐人)은 번번이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발각되므로, 남해 가운데 있는 삼불제국(三佛齊國)의 왕에게 뇌물을 주고 고구려의 군사 수효와 군대의 배치와 군용 지리와 그 밖의 내정을 탐정해주기를 부탁하였다. 삼불제국은 남양(南洋)의 한 조그만 나라로 옛날부터 고구려에 호시(互市 : 국제 무역)를 하고 조공을 바쳐 그가 오면 마음대로 각지 를 돌아다닐 수 있었으므로, 삼불제국의 왕이 이를 쾌히 승낙하고 조공한다 일컫고 정탐할 사선을 고구려에 보냈다. 그래서 사신이 와서 여러 가지를 정탐하여 귀국한다고 하고는 바다로 나가 당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바다 가운데서 고구려의 해라장(海羅長)---해상경찰장(海上警察長)에게 잡혔다. 해라장은 강개(糠慨)한 무사요, 연개소문을 천신(天神)같이 숭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늘 조정이 연개소문의 계책을 써서 당을 치지 아니함을 분개하다가 이제 당의 밀정 삼불제국의 사신을 잡으니, 그 비밀 문서는 빼앗아 조정에 올리고 밀정은 옥에 가두려다가 “아서라, 적을 보고도 치지 못하는 나라에 무슨 조정이 있단 말이냐?” 하고 문서는 모두 바다속에 던져 버리고 사신은 먹으로 얼굴에다가 다음과 같이 글자를 새겼다. “해동 삼불제(三佛齊)의 얼굴에 자자(刺字)하여 내 어린아이 이세민(李世民)에게 이른다. 금년에 만약 조공이 오지 않으면 명년에 마땅히 문죄하는 군사를 일으키리라. (面刺海東三佛齊 寄語我兒李世民 今年若不來進貢 明年當起問 罪兵)”라는 한시 한 편을 새기고 다시 “고구려 태대대로(太大對盧) 개소문의 군사 아무개 씀(高句麗 太大對盧 淵蓋蘇文 卒 某書)”이라고 덧 붙였다. 얼굴은 좁고 글자 수는 많아 먹의 흔적이 흐리어 알아볼 수가 없다하여 다시 그것을 종이에 베껴서 그 사신에게 주어 당으로 보냈다. 당태종이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곧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침노하려고 하니 모시고 있던 신하가 간하였다. “대대로(大對盧)는 연개소문이 아니니, 이제 사신의 얼굴에 자자한 연개소문이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고, 하물며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연개소문의 부하 군사의 죄로 맹약을 깨뜨리고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먼저 사신을 보내서 밀서(密書)로 왕에게 알아보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당태종이 그의 말을 좋아 사실의 진위(眞僞)를 알려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영류왕이 밀서를 보고 군사를 보내 해라장을 잡아다가 문초하였다. 해라장이 강개하여 자백하고 조금도 기탄하지 아니 하니 영류왕이 크게 노하여 서부살이 연개소문 한 사람만 빼놓고 다른 여러 살이와 대대로 울절(鬱折) 등 여러 대신을 밤에 비밀히 소집하였는데, 해라장이 당의 임금을 모욕한 것은 오히려 조그만 일이거니와 그 끝에 태대대로도 아닌 연개소문을 태대대로라 쓴 것과 또 허다한 대신들 가운데 다른 대신을 말하지 않고 홀로 연개소문을 들어 그의 휘하군사로 일컬은 것을 보면 저들 연개소문을 따르는 자들이 그를 추대하는 것이 분명하고 또한 연개소문이 항상 당나라 칠 것을 선동해서 조정을 반대하여 인심을 사니, 이제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후환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으니 벼슬을 박탈하고 사형에 처함이 옳다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전일 같으면 한 번 명령하여 군사 한 사람을 보내서 연개소문을 잡아오면 되겠지만 지금은 연개소문이 서부 살이가 되어 많은 군사를 장악하고 있으니, 그 억센 천성이 체포를 받지 않고 열에 아흡은 반항할 것이 틀림없으니, 조서로 연개 소문을 잡으려면 한바탕 국내가 소란해질 것이었다. 이제 연개소문이 장성의 축조 역사 감독의 명을 받아 떠날 날이 멀지 아니 하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러 올 것이니, 그때에 그의 모반한 죄를 선포하고 잡으면 한 장사의 힘으로도 넉넉히 그를 잡을 수 있으리라 하여 여러 대신들은 왕의 앞에서 물러나와 비밀히 그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사람의 예상대로만 되지 않는다. 아침 저녁 시시각각으로 의외로 돌변하는 것이다. 어전회의의 비밀이 어떻게 누설 되었는지 연개소문이 알았다· 그래서 그는 심복장사들과 비밀히 모의하고 선수를 칠 계교를 세워서 떠나기 전 어느 날,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한다고 하고 왕과 각 대신들의 참석을 요청하고 각 부(部)에도 알렸다 각 부의 살이와 대신들은 가기 싫었지만 않가면 연개소문의 의심을 사서 큰일에 불리하다 하여 일제히 참석하기로 하고 오직 왕은 존엄을 지켜 시위병을 거느리고 그대로 왕궁에 있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면 연개소문이 비록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왕의 위엄에 눌려 감히 어찌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날이 되자 모든 대신들이 연개소문의 열병식장에 이르러 유량히 울려퍼지는 군악 아래 인도되어 군막 안에 들어 자리에 앉았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 연개소문이 갑자기 “반적(反賊)을 잡아라· ” 하고 외치고, 주위에 대령하였던 장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칼 · 도끼 · 몽둥이로 일제히 외치니, 참석한 대신들도 다 백전노장이었지마는 겹겹이 포위되었고 게다가 수효가 너무도 적어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대신과 호족(豪族) 수백 명이 한꺼번에 어육이되고 온 식장이 피로 물들었다. 이에 연개소문이 부하 장사를 거느라고 왕의 긴급 명령이 있어 왔다고 일컫고 성문을 지나 대궐문으로 들어갔다. 막아서는 수비병을 칼로치고 궁중에 뛰어들어서 영류왕을죽여 그시체를 두 토막 내어 수채에 던져버렸다. 시위병들은 연개소문의 늠름한 위풍과 신속한 행동에 놀라고 질려서 한 사람도 대항하는 자가 없어 20년 전 패강(浿江) 어구에서 수나라 장수 내호아(來護兒)의 수십만 대군을 일격에 섬멸하여 천하에 이름이 진동하던 영류왕이 의외에 무참히도 연개소문에게 죽음을 당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곧 왕의 조카 보장(寶藏)을 맞아들여 대왕을 삼고 자기는 ‘신크말치 ’라 일컬어 대권을 잡았다. 보장은 비록 왕이라 하나 아무런 실권이 없고, 연개소문이 실권을 가진 정말 대왕이었다· ‘신크말치’는 곧 태대대로(太大對盧)다. 고구려가 처음에 세 재상을 두어 ‘신가’ ‘말치’ ‘불치’라 일컬었는데 이것을 이두자(更讀字)로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라고 썼다. ‘신가’는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다 장악하였는데 그 뒤에 ‘신가’가 권력이 지나치게 크다고 하여 그 이름까지 폐지하고 ‘말치’ ‘크말치’라 일컬어 병권은 없이 오직 황을 보좌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수석(首席) 대신 일 뿐이었는데, 이제 연개소문이 ‘크말치 ’의 위에 ‘신’ 자를 더하여 ‘신크말치’라 일컬어 정권과 병권을 다 맡아보았으며, 살이의 세습을 폐지하고 모두 연개소문의 무리로 임명하였으며, 4부 살이의 평의제(評議制)를 폐지하여 관려의 출척(黜陟)과 국고의 출납과 선전(宣戰) · 강화(講和) 등 큰일을 모두 ‘신크말치’의 전단(專斷)으로 하고, 왕은 옥새만 찍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 9백 년 동안의 장상 대신들뿐 아니라 고구려 9백 년 동안의 제왕도 가지지 못한 권력을 쥔 사람이 되었다.

연개소문의 대당(對唐) 정책[편집]

당에 대적하여 이를 쳐 없애고 지나를 고구려의 부용(附庸 : 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은 연개소문의 필생의 목적이었다. 연개소문이 젊을 때 서유(西遊)한 것은 물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거니와 혁명적 수단을 써서 왕을 죽이고 각 부의 호족을 무찌르고 정권과 병권을 한 손에 거두어 잡은 것도 또한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은 땅의 크기와 인구의 많기가 다 고구려의 몇 갑절이므로 연개소문은 이를 침에 있어서는 고구려 혼자의 힘으로 하느니보다 여러 나라의 힘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와 당 이외에 몇몇 나라가 있었으니 첫째 고구려의 동족인 남쪽의 신라 · 백제가 있었고, 둘째 고구려의 이족(異族)인 돌궐 (突厥 : 지금의 내몽고) · 설연타(薛延陀 : 지금 서부 몽고 등지 ) · 토곡혼(吐谷渾 : 지금의 티베트) 등이 있다.

연개소문은 처음에 영류왕에게 아뢰어 고구려 · 백제 · 신라 세 나라 가 연합하여 당과 싸우려 하였으나 영류왕이 듣지 아니하였고, 김춘 추(金春秋 : 뒤의 신라 무열왕)가 고타소랑(古陀炤娘)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구려에 와서 구원을 청하니 (제12편 참고)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하고 서로 천하의 대세를 이야기하고, 이어 춘추에게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조선 세 나라가 제휴하여 지나를 칩시다.”라고 하였으나 김춘추는 한창 백제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때였으므로 또한 듣지 아니하였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김춘추의 내빙(來聘)을 보장왕(寶藏王) 원년(기원 642)이라 하였으나 이것은 이 사기가 늘 전왕(前王) 몰년 (沒年)의 일을 신왕 원년으로 내려쓴 때문이고, 김유신전(金庾信傳) 에는 태대대로 개금(蓋金)이 김춘추를 객관에서 묵게 하였다고 했으나, 이는 연개소문의 훗날의 직함을 가져다 미리 쓴 것이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으니 신라는 이미 당과 동맹하였으므로 드디어 백제 의자왕(義慈王)과 사신을 통하여 백제가 신라와 싸우면 고구려는 당을 쳐서 당이 신라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가 당과 싸우면 백제는 신라를 쳐서 신라가 당에 응하지 못하게 하자 하는 교환 조건으로 동맹을 체결하고 연개소문은 또 오족루(烏族婁)를 돌궐(突厥)등 여러 나라에 보내서 고구려가 당과 싸우게 되면 저들로 하여금 당의 배후를 습격하도록 운동하였으나 이때에 돌궐 등 여러 나라가 이미 당에게 정복되어 세력이 미약해서 겨우 설연타(薛延陀)의 진주가한(眞珠可汗)이 이를 허락하는 외에는 감히 응하는 자가 없었다. 연개 소문은 탄식하며 “고구려가 남진책을 굳게 지키다가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 적지않다. ”고 하였다.

제2장 요수(遼水) 전쟁[편집]

요수 싸움은 전사(前史)에 몽땅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신당서(新唐書) 고려전(高麗傳)에 신라가 구원을 청하므로 황제(당태종을 가리 킨 것)가 오선(吳船) 4백 척을 내어 양식을 운반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였는데, 이는 분명히 기원후 645년 안시성 (安市城) 싸움 전에 요수에서 큰 싸움이 있어서 당이 완전히 패했으므로, 당의 사관(史官)들이 나라의 수치를 숨기는 춘추(春秋)의 필법을 써서 이같이 모호하고 간략한 몇 구절의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이는 대개 당태종이 연개소문의 혁명 뒤에 고구려 인심이 위태로이 여기고 의심함을 기회하여 신속히 수군을 내어 침노하다가 고구려 수군에게 패한 것이다. 기록이 넉넉지 못하므로 그 실제를 자세히 적을 수 없으나 이것이 안시성 싸움의 초본(草本)이요, 두 나라 충돌의 첫 째장이므로 이제 그 눈동자만 보여둔다.

제3장 안시성(安市城) 전투[편집]

안시성 싸움 전 피차간의 교섭과 충돌[편집]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의 수(隋)와 당(唐)과의 두 번 싸움의 사실이 거의 수서(隋書)와 당서(唐書)를 추려 기록한 것이고, 그 두 싸움에 관한 수서 · 당서의 기록이 거의 거짓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수서는 수가 그 싸움 뒤에 곧 멸망하고, 그 싸움을 기록한 자가 수의 사람이 아니요 당의 사람이므로 거짓이 오히려 적거니와, 당서는 당의 연대가 오래 계속되어 고구려와 싸운 기록은 곧 당 때의 사관 (史官)이 적은 것이기 때문에 시(是)와 비(非)와 이기고 짐을 뒤집어 꾸며서 거짓이 얼마인지를 알 수 없다. 이제 신구 당서 · 자치통감(資 治通鑑) · 책부원귀 (冊府元龜) 등에 보인 두 나라의 교섭 · 충돌의 경과를 대강 기록하여 그 진위(眞僞)를 분별한 다음 당시의 실정을 논술 하려고 한다.

1) “정관(貞觀) l7년 6월----태상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려(고구려)에 사신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에 수비병을 더 두어 고구려를 압박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먼 곳의 사람이 복종하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할 것이요 1,2백 명의 수비병으로 능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위복(威服)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소. (貞觀十七年六月 ----太常丞鄧素 使高麗還 請於懷遠鎭 增置戌兵 以逼高麗 上曰 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 未聞 一二百戌兵 能威絶域者也)” 하였다. 등소가 고구려를 보고 온 결과 고구려의 강석함을 두려워하여 수비병을 증가시키기를 청한 것인데 그 수가 단 몇백을 청한 것이 아닐 것이니 이는 한갓 업신여겨 쓴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2) 윤(閏) 6월 양제(煬帝)가 방현령(房玄齡)에게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독단하니 진정 참을 수 없는 일이오. 지금의 우리 병력으로 쳐서 빼앗기가 어렵지 아니할 것이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어 우선 글안[契丹]과 말갈(靺鞨)로 하여금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閏六月 煬帝渭房玄齡曰 蓋蘇文 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以忍 以今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且使契丹靺鞨 擾 之 何如)” 하였는데 말갈은 곧 예(濊)이니 고구려에 복속(服屬)한 지가 이미 여러 백 년이요, 글안도 장수태왕(長壽太王) 이후에 고구려에 속하였으니 당태종이 어찌 예와 글안을 시켜 고구려를 침노하게 할 수 있으랴? 당태종이 비록 망령이 들었더라면 이 따위 실제에 맞지 아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도 대개 사관의 망령된 기록이다.

3)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고려(고구려)를 치기를 권하였으나 황제는 상 중(喪中 : 영류왕의 죽음)이라 하여 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或勸帝 可隧討高麗 帝不欲因喪伐之)”라고 하였는데,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인 적이라하여 이를 치려고 하였다면 춘추의 의리로 보더라도 상 중에 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당태종이 도리어 상 중이라 하여 치려 하지 않았다고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당태종이 이때에는 아직 동침(東侵)의 방략을 완전히 정하지 못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 것이니 사관의 해설은 당치도 않은 것이다.

4) 신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고려가 백제와 동맹하여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합니다----하여 당제(唐帝 : 태종)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를 타이르기를, 신라는 우리에게 나라를 맡겼으니 너희와 백제는 각기 군사를 거둘것이다. 만약 다시 공격하면 내년에 군사를 일으켜서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라고 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현장이 평양에 이르니 막리지(연개소문)는 이미 군사를 내어 신라를 쳐서 그 두 성을 깨뜨렸었다. 현장의 요구로 고구려 왕이 막리지를 불러 돌아오자 현장이 그를 타일러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옛날 수(隋)가 우리 나라를 침노하자 신라는 우리의 허를 틈타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으니 원래 우리가 땅을 침노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다. 군사를 일으키기가 두려워서 아직까지 못했을 뿐이다. (新羅 遺使言 高麗百濟聯和 將見討- - - -唐帝 命司農承相里玄奬 霽?書 諭高麗曰 新羅委質國家 爾與百濟 各宜즙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牟 翌年正月 玄奬至平壞 莫離支己發兵 擊新羅 破其兩城 高麗王使召之 乃還 玄奬諭使勿攻新羅莫離支曰 昔隋人入寇 新羅乘虛 奪我地五百里 白非歸我侵地恐兵未能已)”고 하였는데, 상리현장이 이와같이 오만한 국서를 가지고 왔다면 훗날 장엄(蔣儼 : 아래 글에 보임)과 같이 잡혀서 옥에 갇혔을 것인데 어찌 무사히 돌아갔으랴? 또 연개소문이 이때 신라 정벌 중에 있었다면 어찌 당의 사신 현장의 청에 의해 소환될 수 있었으랴? 신라 본기에 의하면 수가 침노해왔을 때 허를 타 5백 리 땅을 빼앗은 일도 없고 또 연개소문이 두 성을 격파한 일도 없었으니, 이것은 대개 당태종이 현장의 사신갔다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출병의 구실을 만들어 나라 안에 선포하려고 조작한 말일 것이다.

5) “황제가 고구려를 치고자 고구려를 속일 사자(使者)를 모으는데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니, 장엄(蔣儼)이 분연히 나서서 천자의 위무 (威武)에 사이(四東)가 다 두려워하는데 어느 나라가 감히 명을 받들고 간 사람을 도모하겠느냐 ? 만약 불행한 일이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마침내 자기가 가기를 청하여 갔다가 막려지에게 구금되었다. (帝將伐高句麗 募僞使者 人皆憚行 蔣儼奪曰 以天子威 武 四夷畏威 최爾國 敢圖王人 如有不幸 固吾死所也 遂請行 僞莫離支 所因”고 하였는데 장엄이 무슨 사명을 띠고 갔는지 역사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으나 만일 그전에 연개소문에게 잡혀서 죽은당의 사신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모두 가기를 꺼려하기에 이르렀으랴? 이로써 당의 사관(史官)들이 그 나라의 치욕을 숨기기 위하여 교섭의 전말을 많이 빼버렸음을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당은 서로의 강약을 다투는 양립(兩立)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태종은 너 나의 우열을 내기하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인데, 이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두 나라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실이었다. 만일 연개소문의 집권이 몇 해만 더 일렀더라면 당태종이 동침하기 전에 이미 연개소문의 서정 (西征)이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다만 당태종이 지나를 통일 한 지 30년, 또 제왕이 되어 모든 시설을 재지(才智)껏 정비한 지 20 년, 또 돌궐 · 토곡혼 등의 나라를 정복한 지 l0년이 된 뒤에야 연개소문은 겨우 혁명을 성공하고 ‘신크말치’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당태종이 먼저 침입한 것이다. 연개소문은 자기가 고구려 내정과 외교의 모든 큰 사건을 다 정리한 뒤에 전쟁을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마는 이는 사세(事勢)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둘러서 남으로 백제와 동맹을 맺고 서북으로 설연타(薛延陀) 등을 선동하여 여당(與黨)을 만들 뿐이었다. 당태종은 수의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망했음이 징계되었으나 또한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있음을 자각했으므로 연개소문의 내부세력이 아직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이를 꺾으려고 서둘러서 군사를 동원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양편의 형세였으니 이 밖의 저네의 역사의 춘추필법적 기재와 우리의 역사의 노예 근성적 편집은 거의 믿을 수 없는 망령된 말뿐이다.

당태종의 전략과 침입(侵入) 노선(路線)[편집]

당태종의 고구려 침입은 일조일석(一朝一夕)의 일이지마는 그 경영의 거의 20년 동안의 일이었다. 진(奏) · 한(漢) 이후에 흉노(匈奴)가 쇠하고, 위(魏) · 진(晋) 이후도 오호(五胡)는 다 지나에 잡거(雜居)하였으며, 그 밖에 돌궐 · 토곡혼이 가끔 지나의 서북에서 일어났으나 다 오래지 않아 잔약해지고, 오직 고구려만이 동남 · 동북에서 지나에 대치하여 척발씨 (招跋氏)의 주(周)와 겨루고 수(隋)에 이르러는 양제 (煬帝)의 수백만 군사를 전멸시켜서 위무(威武)가 일세를 진동하여 놀라게 하는 동시에 지나와 맞서서 ‘신수두’의 교의(敎議)며 이두자 (吏讀字)의 시문(詩文)이며, 그 밖에 음악 · 미술 등이 다 그 고유의 국풍(國風)으로 발달하여 정치상뿐 아니라 엄연한 일대 제국을 형성 하였으므로, 당태종이 지나 이외에 또 고구려가 있음을 시기하여 정관(貞觀)의 치(治) 20년 동안에 겉으로는 편안하고 한가롭게 여러 신하들과 도를 닦고 덕을 닦는 길을 강론하였지마는 그의 머릿속에는 유악(유握)의 모신(謀臣)인 방현령(房玄齡) 등도 알지 못하게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계획이 오락가락하였던 것이다. 그는 고구려를 치려면 먼저 수의 양제가 패한 원인을 구명하여 그와 반대되는 전략을 짜야겠다고 하여 이에 다음과 같은 초안을 작성하였다.

1) 수의 양제가 패한 첫째 원인은 정병(情兵)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취하여 숫자상의 군사는 비록 4백만에 이르렀으나 전투를 감당할 만 한 자는 수십만에도 차지 못한 때문이라 하여, 10년 양성한 군사 중에서 특별히 정예한 군사 20만을 골라내고,

2) 수의 양제가 패한 둘째 원인은 고구려의 변경(邊境)부터 잠식(蠶食)해 들어가지 아니하고 대뜸 대군으로 평양에 침하였다가 양식길이 끊어지고 후원군이 없었던 때문이라 하여 평양에 침입하지 않고 먼저 요동의 각 고을을 정복하려 하였고,

3) 수의 양제가 패한 셋째 원인은 수백만 육군이 제각기 먹을 양식을 스스로 지고 가 도중의 군량을 삼고 따로 수군으로 하여금 배로 각지 창고에 있는 양식을 물로 운반해서 목적지에 가져다가 머물러 있는 군사의 양식으로 삼게 하였다가 양식 실은 배가 고구려의 수군에게 모 두 격침된 때문이라 하여 배로 운반하는 양식의 위험을 보충하기 위해 국내에 소 · 말 · 양 등의 목축을 장려해서, 전사(戰土) 한 사람에 대해 타는 말과 양식 실은 소 각 한 마리와 양 몇 마리씩을 분배해주어 양식을 군사가 직접 지고 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하여, 도착한 뒤에는 배로 운반해오는 양식을 기다릴 것 없이 양식이 충족하게 하고 또 소 · 양 · 말 등의 고기를 먹게 하려 하였다.

4) 수의 양제가 패한 넷째 원인은 다른 여러 나라의 원조가 없이 오직 혼자의 힘으로 고구려와 싸운 때문이라 하여 , 신라 김춘추가 구원 을 청하자 공수동맹의 의를 맺어 고구려의 뒤쪽을 교란시키게 하려 하였다.

이상과 같은 방략을 주도면밀하게 작성한 뒤 기원후 644년 7월에 각 군대를 낙양(洛陽)에 집결시키고, 군량은 영주(營州)의 대인성(大人城 : 지금의 秦皇島)에 모으게 하고,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에게 명하여 유(幽) · 영(營) 두 주(州)의 군사를 인솔하고 요동 부근을 유격(遊擊)하여 고구려의 형세를 더듬어 알아보게 하고, 장작대장 (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에게 명하여 군량을 대인성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에 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으로 평안도 행군대총관(平壞道行軍大總管)을 삼고, 상하(常何) · 좌난당(左難當)으로 부총 관(副總管)을 삼고, 방효태(龐孝泰) · 정명진(程名振) · 염인덕(염仁德) · 유영행 (劉英行) · 장문간(張文幹)으로 총관(總管)을 삼아서 강 (江) · 회(淮) · 영(嶺) · 협(峽)의 정병 4만 명과 장안(長安) · 낙양(洛陽)의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 말로는 평양으로 향한다 고 하고 실은 요하(遼河)로 향하였다. 또 이적(李勣)으로 요동도행군대총관(遺東道行軍大總管)을 삼고 강하왕(江夏王) 왕도종(王道宗)으 로 부총관을 삼고, 장사귀(張士貴) · 장검(張儉) · 집실사력(執失思力) · 계필하력(契苾何力) · 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 · 강덕본(姜德本) · 오흑달(吳黑달)로 총관을 삼아서 육로로 요동으로 향하여 두 군사가 요동에서 합세하게 하고 당태종은 친히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르기로 하였다.

연개소문의 방어 및 진공(進攻) 전략[편집]

당의 군사가 침입해온다는 기별이 이르니 연개소문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항할 계책을 강구하는데, 혹은 평원왕(平原王) 때에 온달 (溫達)이 주(周)와 싸웠을 때와 같이 기병으로 마구 무찔러서 요동 평야에서 격전을 벌여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은 영양왕 (영陽王) 때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와 싸웠을 때와 같이 마을과 들의 백성과 곡식을 죄다 성으로 옮겨 지키게 한 뒤에 평양으로 꾀어들여 양식길을 끊어서 굶주려 피곤해졌을 때를 타서 쳐 깨뜨리는 것이 옳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다. 연개소문이 말하였다. “전략은 형세에 따라 정하는 것이오. 오늘날의 형세가 평원왕 때나 영양왕 때와 다른데 어찌 그때의 형세와 같이 여겨 전략을 정한단 말이오. 오늘에 있어서는 위치를 골라 방어하고 기회를 따라 진공 해야 할 것이니 옛날 사람의 규정한 것을 그대로 지켜서는 아니되오.” 그리고 그는 명령을 내려 건안(建安) · 안시(安市) · 가시(加尸) · 횡악 (橫岳) 등 몇몇 성읍(城邑)만 굳게 지키게 하고, 그 나머지는 곡식과 말먹이를 혹은 옮겨놓고 혹은 태워버려 적으로 하여금 노략질할 것이 없게 하고, 오골성(烏骨城)---지금의 연산관(連山關)으로 방어선을 삼아 용감한 장수와 군사를 배치해놓고, 따로 안시성주(安市城王) 양만춘(楊萬春)과 오골성주(烏骨城主) 추정국(鄒定國)에게 비밀히 일러 “지금 당나라 사람들이 수나라의 패전한 것을 징계삼아 양식에 특별히 유의해서 장래 군량이 모자랄 때 보충하려고 군중에 소 · 말 · 양을 수없이 가져왔는데,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어 풀들이 다 마르고 강물도 얼어버리면 그 가축들을 무엇으로 먹이겠소. 저들도 이것을 알기 때문에 빨리 싸워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오. 그러나 저네가 수나라의 패전을 징계삼아 평양으로 바로 나오지 않고 안시성을 먼저 공격할 것 이니, 양공(楊公 : 萬春)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다가 저네가 굶주리고 피곤해지기를 기다려 양공은 안에서 나와 공격하고, 추공(鄒公 : 定國)은 밖에서 진격하오. 나는 뒤에서 당의 군사의 뒤를 습격하여 아주 돌아갈 길이 없게 해서 이세민(李世民 : 唐太宗)을 사로 잡으려 하오. ” 하였다.

상곡(上谷)의 횃불과 당 태종의 패주(敗走)[편집]

해상잡록(海上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일찍이 당의 첫째가는 명장 이정(李靖)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으려고 하니까 이정이 사양하며 “임금의 은혜도 무겁거니와 스승의 은혜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에 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웠는데 그 뒤에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한 것이 다 그의 병법에 힘입은 것이니, 오늘에 와서 신이 어찌 감히 전일에 스승으로 섬기던 개소문을 치겠습니까?” 하였다. 태 종이 다시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사람 중의 누구와 견줄 만하오?” 하고 물으니, 이정은 “옛날 사람은 알 수 없거니와 오늘날 폐하의 여러 장수들 가운데는 그의 적수가 없고, 비록 천자의 위엄으로 임하시더라도 이기시기 어려울까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태종은 못마땅해 하면서 “중국과 넓은 땅과 많은 백성과 강한 병력으로 어찌 한낱 개소문을 두려워 한단 말이오?” 하였다. 이정이 다시 말했다. “개소문이 비록 한 사람이지마는 그의 재주와 지혜가 만 사람에 뛰어납니다. 그러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습니까?”이 기록이 사실이라 하면 당태종은 이때 일찍이 누이동생 때문에 연개소문을 죽이지 못하였음을 후회했을 것이다.

기원후 645년 2월에 당태종이 낙양(洛陽)에 이르러 수(隋)의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으로 양제 (煬帝)를 따라 살수(薩水)의 싸움에 참가하 고, 수가 망한 뒤에 벼슬하여 선주자사(宣州刺史)가 되었다가 이때 나 이가 많아 퇴직한 정원도(鄭元도)를 불러 고구려의 사정을 물어보 았다. 그는 “요동은 길이 멀어 양식의 운반이 곤란하고 고구려가 성을 지키는데 능하여 성을 함락시키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신은 이번 길 을 매우 위태롭게 봅니다.”라고 하였다. 당태종은 좋아하지 않고 “오늘의 우리 국력이 수나라와 비교할 바 아니니 공은 다만 결과나 보오.” 하였다. 그러나 만일을 염려하여 태자와 이정(李靖)에게 후방을 염중히 지키라 명하고 마침내 출발하였다.

요택(遼澤 : 지금의 渤錯水)에 이르니 200리 진구렁에 사람과 말이 지날 수 없어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에게 명하여 나무와 돌을 운반해다가 길을 만드는데 수나라 때 장사들의 해골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당태종이 제문(祭文)을 지어 울며 제사지내고,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이 거의 이 해골들의 자손이니 어찌 복수를 하지 않겠소?” 하였다. 당태종은 요택을 지나자 “누 가 개소문더러 병법을 안다고 하느냐? 병법을 안다면 어찌 이 요택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냐?”라고 하였다.

요하(遼河)를 건넌 다음에는 싸움이 순조로워서 요동 곧 오열홀(烏列忽) · 백암(白巖) · 개평(蓋平) · 횡악(橫岳) · 은산(銀山) · 후황성 (後黃城)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다시 이적(李勣)등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사회의를 열고 새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는데, 강하왕(江夏汪) 도종(道宗)은 오골성을 쳐 함락시켰으니 바로 평양을 공격하자고 하였고, 이적과 장손 무기(長孫無忌)는 안시성을 치자고 하였다. 수의 양제가 일찍이 우문술(宇文述) 등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평양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패한 것을 당태종도 경계하는 바였으므로 도종의 의견을 쓰지 않고, 이적의 의견을 따라 안시성을 침노하였다.

연개소문이 안시성주 양만춘과 오골성주 추정국에게 요동의 싸움을 위임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안시성은 곧 ‘아리티’ 혹은 환도성(丸都城)이라 혹은 북평양(北平壞)이라 일컬었는데, 태조왕(太祖王)이 일찍이 서부 방면을 경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발기(發岐)의 난에 이곳을 지나에게 빼앗겼다가 고국양왕(故國壞王)이 이를 회복한 이래로 바다와 육지의 요충이라 하여 성을 더 높이 쌓고 정병을 배치하고, 성 안에 항상 수십만 섬의 양식을 쌓아두었다. 공격하기 어렵고 함락시킬 수 없는 요새로 일컬어 온 지 오래였다.

그 해 6월에 당태종이 이적 등과 함께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안을 향하여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이 함락되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 하고 외치게 하였다. 그러니까 양만춘이 성 위에서 역시 통역자를 시켜 당의 군사에게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성에서 나가는 날에 모조리 죽일 것이다.” 하였다. 당의 군사가 접근하면 성 안의 군사가 이를 쏘아죽이되 헛쏘는 화살이 없으므로 당태종은 성을 겹겹이 엄중 포위하여 성 안을 굶주리게 하려고 했지만, 성 안에는 양식의 저장이 넉넉하고 당의 군사는 비록 가져온 양식이 많았으나 몇 달을 지내니 차차 떨어져가고, 요동의 몇 성을 얻기는 하였으나 아무 저축이 없는 빈성이었으며 수로로 오는 배들은 모두 고구려의 수군에게 격파당해 양식 운반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요동은 날씨가 일찍 추워지므로 만일 가을 바람에 풀이 마르면 소· 말·양들을 먹일 수가없어 굶어 죽을 것이었다. 당태종은 크게 당황하여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안시성의 동남쪽에 토정을 쌓게 하였다. 흙으로 나뭇가지를 싸서 층층이 쌓아올라고 중간에 길 다섯을 내어 왕래케 해서 l0일 동안의 품과 50만의 돈을 들이고군사 수만 명이 날마다 6,7번을 번갈아 교전하여 죽고 상하는 자가 적지 아니하였다. 토산이 이루어지자 산위에서 포석(抛石 : 돌을 던지는 기구)과 당거(撞車 : 냄다 질러 파괴하는 수레)를 굴려 성을 무너뜨리니 성 안에서는 무너진 곳에 목책(木冊)을 세워서 막았으나 당할 수가 없는지라 양만춘이 결사대 100명을 뽑아 성이 무너진 곳으로 갑자기 내달아 당의 군사를 쳐 물리치고 토산을 빼앗아 산 위의 포석과 당거를 차지하여 이것으로 도리어 산 위의 당의 군사를 치니 당태종이 달리 계책이 없어 군사를 철퇴시키려고 하였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 ·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未峰鎭)---지금의 열하(熱河) 부근으로 나가 다시 남으로 나아가 장성(長城)을 넘어 상곡(上谷)---지금의 하간(河間)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 (治)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햇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당태종은 곧 임유관(臨유關)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 좁은 골짜기로 몰려나와서 당의 군사를 돌격하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당의 군사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사람과 말이 서로 짓밟으며 도망했다. 당태종은 헌우란(헌芋란)에 이르러 말이 수렁에 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아 거의 사로 잡히게 되었는데, 당의 용장 설인귀(薛仁貴)가 달려와서 당태종을 구하여 말을 갈아태우고, 전군(前軍)의 선봉 유홍기 (劉弘基)가 뒤를 끊고 혈전을 벌여서 당태종은 가까스로 달아났다. 성경통지(盛京通志) 해성고적고(海城古蹟考)의 ‘당태종의 말이 빠진 곳(唐太宗陷馬處)’이란 것이 곧 그곳이니, 지금까지도 그곳 사람들에게 “말이 수렁에 빠지고 눈에 화살을 맞아 당태종이 사로잡힐 뻔하였다. ” 하는 이야기가 전 해져오고 있다.

양만춘 등이 당태종을 추격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러 허다한 당의 장사를 목베고 사로잡으니 요택에 이르러 당태종은 말을 몰아 수렁에 처넣어 다리를 삼아서 밟고 건너갔다. 10월에 임유관에 이르러서는 연개소문이 당군의 돌아갈 길을 끊고, 뒤에서는 양만춘이 몹시 급히 추 격하니 당태종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자 마침 눈바람이 크게 일어 천지가 아득해져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이 되어 양편 사람과 말이 서로 엎드러지고 자빠지고 하여 크게 혼란해지니 당태종이 이 기회에 도망하여 돌아갔다.

안시성 싸움은 또한 동양 고사상(古史上)의 큰 전쟁이라, 비록 숫자 상의 군사는 살수싸움에 미치지 못하지마는그러나 피차의 방략이 용의주도함과 군대의 정예 (精銳)함과 물자의 소모는 살수 싸움보다 더 했으며 싸움을 한 시일도 그보다 갑절이었다. 이 싸움이 곧 두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게 한 전쟁이었는데도 당사(唐史)의 기록은 거의가 사리에 모순된다. 이를테면 1) 백제는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는데도 당사에는“백제가 금휴개(金휴鎧:검게 윷칠한갑옷)를 바쳐서 전군이 이것을 입고 출전하니 갑옷이 햇빛에 찬란하게 빛났다.”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맹국인 백제가 도리어 적국인 당의 군사에게 무장을 제공한 것이 아닌가? 2) 당군의 패망은 곧 양식의 결핍에 원인이 있었는데 당의 역사에는 당태종이 백암성(白巖城) 등을 깨뜨리고 양식 10만 섬 혹은 50만 섬을 얻었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운반해온 양식 이외에 얻은 양식이 또한 적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3) 연개소문이 영류왕(榮留王)과 수많은 호족(豪族)틀을 죽이고는 연씨(淵氏)네 무리를 써서 중 요한 직위에 두어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오던 벌족정치(閥族政治)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하였는데, “당태종이 안시성에 이르니 북부누살 (北部누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 · 말 갈(靺鞨 : 濊)의 군사 15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안시성을 구원 하였다.”고 했으니, 왕족 고씨(高氏)가 오히려 남북 두 부(部)를 근거 지로 하여 살이 (薩伊)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군사 수십만을 가졌다니 연개소문의 혁명 이후에 고구려의 상황이 어찌 그러하였을 것인가? 4) 안시성은 곧 환도성(丸都城)으로 고구려 삼경(三京)의 하나로써 해륙(海陸)의 요충이니 개소문이 혁명한 뒤에 이 땅을 다른 파에게 줄 수 없을 것인데, 당의 역사에 “안시성주(양만춘)가 재주와 용기가 있고 성이 험하고 양식이 풍족하므로 막리지(연개소문)의 난에 웅거해 지켜서 항복하지 아니하므로 막리지가 그 성을 주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때에 고구려가 몇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인데 어찌 하나로 단결하여 수십만의 당군을 막았을까? 평양 공격의 계책은 수의 양제가 패해 망한 것인데, 당의 역사에 “이정(李靖)이 이 계책이 쓰이지 아니한 것을 패전의 첫째 원인으로 삼고, 당태종도 또한 이를 후회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래지 않은 양제의 일을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이와같이 사실에 모순되는 기록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인 가? 대개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사방의 모든 나라를 다 당의 속국으로 보는 주관적 자존심에 몰리어 사관(史官)들이 항상 높은 이를 위해 숨기고, 친한 이를 위해 숨기고 중국을 위해 숨기는 이른바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때문이니 백제가 고구려의 동맹국임이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첫째 조항의 망발을 하였고,

2) 요동성 · 개평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게 한 것이 연개소문의 예정한 전략에 빠진 것임을 숨기기 위하여 그 노획품이 많았음을 과장하다 가 둘째 조항의 위증(僞證)을 하게 된 것이고,

3) 당태종이 패해 달아난 것을 승리한 것으로 뒤집어 꾸미다가 고씨(高氏)의 천하가 이미 연씨(淵氏)의 천하가 된 것을 잊고 문득 15만 대군을 가진 고연수 · 고혜진 두 누살이(누薩伊)가 투항했다는 셋째 조항의 망령된 조작이 있게 된 것이고,

4) 당태종이 수십만 대군으로 4,5달에 한낱 안시의 외로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수치를 가려 숨기기 위해 “안시성은 곧 당태종이 공략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본국 고구려의 대권(大權)을 잡은 연개소문 도 어찌하지 못하였다.”는 넷째 조항의 기록을 남겼고,

5) 당이 고구려에게 패한 것은 여러 가지 계책이나 사람이 모자람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어떠한 기묘한 계책이 있어도 쓸 수 없었던 때문이라 하여 “이도종(李道宗 : 江夏王)이 평양의 허를 찔러 공격하자고 하였다.” 하는 다섯째 조항의 어리석은 말이 있게 된 것이다. 이상은 대강을 말한 것이거니와 자세히 상고해보면 거의가 다 이러 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제 당의 역사를 좇지 않고 해상잡록 · 성경통지(盛京通志) 및 동삼성(東三省) 사람들의 전설 등을 재료로 하여 기록하였다.

화살 독으로 인한 당 태종의 사망과 연개소문이 당 정벌[편집]

당태종이 양만춘의 화살에 눈이 빠졌음은 모든 인사들의 전설이 되고 시인의 음영(吟詠)에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 에 올라 “이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더니만 눈이 화살에 떨어질 줄 뉘 알았으랴. (謂是囊中-物耳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였고, 노가재 (老稼齎) · 김창흡(金昌翕)의 천산시(千山詩)에는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 이 규염(규髥)의 눈동자 쏘아 떨어뜨렸네(千秋大膽楊萬春 箭射규髥落 眸子)”라 하였으며 그 밖에도 이런 시가 많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삼국 사기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역사책에는 당시의 전황에 관해 당서(唐 書)에서 뽑아 기록하였을 뿐 이러한 말이 없다. 이는 사대주의파 사학자들이 고대 우리 나라의 외국에 대한승리의 기록을 모두 삭제해버린 때문이다. 이것을 지나의 역사책에 상고해보건대 구당서(舊唐書) 태종본기 (太宗本記) · 신당서 (新唐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이 세 가지 에 당태종의 병에 대한 진단 기록이 서로 달라서, 하나는 당태종이 내종(內腫)으로 죽었다고 했고 또 하나는 한질(寒疾)로 또 하나는 이질 로 죽었다고 하여 일대에 전 지나에 군림한 만승황제(萬乘皇帝)가 죽은 병이 늑막염인지 장티푸스인지 모르도록 모호하게 기록한 것은 대 개 고구려인의 독화살에 죽은 치욕을 숨기려다가 이같이 모순된 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요동에서 얻은 병이라 함은 모든 기록이 일치 하니 양만춘의 화살 독으로 인하여 죽은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송 (宋)의 태종(太宗)이 태원(太原)에서의 화살의 상처로 인하여 그 독이 해마다 재발하다가 3년 만에 죽은 것을 송사(宋史)에 숨겼음과 같은 것이니,(陳霆의 兩山墨談에 보임) 이 뒤 신라와 당의 동맹이 더욱 공고하였음과 당의 안녹산(安祿山) ·사사명(史思明)의 난과 번진(藩鎭) 의 발호(跋扈)가 어느 것이고 당태종이 고구려의 독한 화살에 맞아 죽은사건과 관계없는데, 이제 이를 가려 숨겨서 역사적 사실의 기인(起因)을 모르게 하였으니 춘추필법의 해독이 또한 심하다 하겠다. 연개소문이 지나에 침입한 사실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지마는 지금의 북경(北京) 조양문(朝陽門) 밖 7리 되는 황량대(황糧臺)를 비롯하여 산해관(山海關)까지 이르는 사이에 황량대라 일컫는 지명이 10여 군데인데, 전설에 황량대란 당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 · 직예(直匠) 등지에 드문드문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縣)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당나라 사람 번한(樊漢)의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에 “외딴 곳 성문은 활짝 열렸는데(僻地城門啓) 흰 구름이 성가퀴에 걸렸어라(雲林雉堞長), 물이 맑아지는 해 잠겨 있고(水明留晩照), 모래는 어슴푸레 별빛이어라(沙暗燭星光). 북소리 구름 밖에 퍼져나가고(疊鼓連雲起) 갓 핀 꽃들이 땅을 장식했으려니(新花拂地粧) 문득 세상은 변하여(居然朝市變) 다시는 풍악 소리 울리지 않네(無復管絃장). 가시덤불 먼지 가운데(?刺黃塵裏) 길가엔 쑥대만 우북(蒿蓬古道傍). 먼지 속엔 비취가묻혔는데(輕塵埋??), 거친 무덤 위엔 소돌이 오가 누나(荒?上牛羊). 당년의 일을 이제 와 무어 라 하랴(無柰當年事), 소 조한 가을 기러기 줄지 었구나(秋聲蕭?行)”라고 하였는데 , 이 시로 보건대 연개소문이 한 때 당의 땅에 드나들며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성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켜서 북소리가 구름 밖에까지 울려퍼지고, 땅은 온통 꽃밭인데 거리가 번화하고 음악 소리 유량하며 비취와 보옥 등이 념쳐나서 새로 점령한 땅의 풍성함을 자랑하던 것을 읊은 실록 (實錄)으로 볼 수 있겠다.

당의 역사책을 보면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도망해 돌아간 뒤에 거의 해마다 달마다 고구려 침략의 군사를 일으켜서 “아무 해 아무 달에 우 진달(牛進達)을 보내서 고구려를 정별하여 어느 성을 깨뜨렸다.” “어느 해 어느 달에 정명진(程名振)을 보내서 고구려를 쳐 아무성을 깨뜨 렸다.” 하는 따위의 기록이 수없이 있지마는 이것은 당태종이 고구려 때문에 눈이 빠지고 그의 백성들의 아들들이 많이 죽거나 상하여 천신 (天神) 같은 제왕의 위염이 땅에 떨어진데다가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더욱 안팎의 웃음거리가 되겠고, 또한 만일 다시 대거해서 공격하자면 수의 양제의 꼴이 될 것이므로 이제 교활한 술책을 생각해내서 다달이 여러 장수를 시켜 고구려의 어느 곳을 침략하였다. 고구려의 무슨 성을 점령하였다 하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하여 그 실상 없는 무위(武威)를 국내에 보인 것이다. 당태종이 죽을 때 에 유조(遺詔)로 요동의 싸움을 그만두게 한 것은 한편으로 아들 고종 (高宗)의 아버지의 원수 갚지 못하는 책임을 가볍게 하고 한편으로 백 성을 사랑한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본래 요동의 전쟁이 없었는데 이제 무슨 전쟁을 그만둔단 말인가? 당태종의 일생은 허위뿐이니 역사가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그 기록을 상세히 규명해보아야 할 것이다.

연개소문은 무엇으로써 이와같이 외정(外征)에 성공하였는가? 그 근거는 둘이었다. 발해사(渤海史)에 “대문예(大門藝)가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가 성시(盛時)에는 강병(彈兵) 30만으로 당나라에 대항하였다. ’고 했다. (大門藝曰 昔高句麗全盛之時 强兵三十萬 抗敵居家)” 하였고, 당서(唐書)에도 “고려(고구려)가 신성(新城)과 국내성의 보병 · 기병 4만 명을 일으켰다. (高麗 發新城 · 國內城步騎四萬). ” “신성 (新城)과 건안(建安)에는 군사가 오히려 10만 명이었다.(新城建安 之? 猶十萬)” “고구려와 말갈의 군사가 합하여 15만 명이었다. (高麗 靺鞨之衆十五萬)”이라 하였으니 이상의 말에 의하면 고구려의 정규군이 30만 명이 넘었고, 그 밖의 산병(散兵)도 적지 아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최영전(崔瑩傳)에 “당태종이 30만의 무리로 고구려를 침노하니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 명을 내어 이를 격파하였다. (唐太宗 以三十萬衆 侵高句麗 高句麗 發僧軍三萬 擊破之)”고 하였고, 고려 도경(高麗圖經)에는 “재가화상(在家和尙)----조백(皂帛)으로 허리를 동이고----전쟁이 있으면 스스로 단결하여 한 단체를 만들어서 전장에 나아갔다.(在家和尙----以皂帛束?----有戰事 則自結爲一團 以? 戰場)”고 하였으며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개소문은 다 조의 선인(皂衣仙人)의 출신이다. (明臨答夫 蓋蘇文 此皆皂衣仙人出身)’라고 하였으니 이상의 글에 의하면 승군(僧軍)이란 불교의 중으로 편성된 군사가 아니라 곧 ‘신수두’ 단전(壇前)의 조의 (皂衣) 무사요, 연개소문은 조의의 우두머리[首領]였음을 알수 있다. 그러니 수십만의 군대와 그 중심인 3만의 조의군(皂衣軍)은 연개소문의 외정(外征)을 성공시킨 첫째 근거였다.

미수(眉수) 허목(許穆)은 “싸움을 좋아하는 나라로 백제만한 나라가 없다.(好戰之國 莫如百濟)”고 하고,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은 “세 나라(신라 · 백제 · 고구려) 중에서 백제가 가장 전쟁을 좋아한다고 일컬어진다. (三國之中 百濟最以好戰稱)”고 하였으니, 백제는 날래고 사나워서 싸움을 잘하는 나라로서 고구려와 동맹을 하였으니 그것도 연개소문이 외정을 하게 된 근거의 하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라, 북으로 유(幽) · 계(계) · 제(齊) · 노(魯) 등지를 소란하게 하였고, 남으로 오(吳) · 윌(越)을 침략하였다. (高麗百濟全盛之時 强兵百萬 北撓幽계齊魯 南侵吳越)”고 한 것은 연개소문이 백제와 합작한 결과를 말한 것인데 북쪽을 토평했다(北平) 남쪽을 평정했다(南定) 하지 않고 북쪽을 소란하게 했다. 남쪽을 침략했다고 한 것은 이 글이 당을 존숭하는 최치원이 당의 어느 재상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이같이 춘추필법적 말을 쓴 것이요, 실은 이때에 유(幽) · 계(계)-지금의 직예성(直匠省)과 제(齊) · 노(魯)---지금의 산동성(山東省) 과 오(吳) · 윌(越)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 절강성(절江省)이 다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백제와 관계된 사실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서술하고자 한다.

연개소문의 사적(事跡)에 관한 거짓 기록들[편집]

신라 때에는 연개소문을 백제의 원조자라 하여 후에는 그를 유교의 윤리상 임금을 죽인 적신(賊臣)이라 하여 또 사대주의에 위반한 죄인이라 하여 늘 박대해서 그에 관한 전설이나 사적을 아주 없애버리기를 일삼았고, 오직 도교(道敎)의 수입과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를 그 가 한 일이라 하지마는 실은 당서(唐書)에서 부연(敷寅)해온 거짓 기록이고 사실이 아니다. 이제 삼국유사 본문을 실어 그것이 거짓 기록 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삼국유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살피건대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이보다 앞서 수(隋)의 양제(煬帝) 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 싸움이 불리하여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기어코 총신(寵臣)이 되어 저 나라(고구려)를 멸망 시키겠다고 하였는데, 개씨(盖氏)가 조정을 독단하게 되자 성을 개씨 라 하니, 곧 양명의 말이 이에 들어맞은 것이다. (두 글자를 합쳐 盖가 되니 그가 죽어서 盖蘇文이 되었다는 뜻) 또 살펴건대 고려의 고기(古 記)에 이르기를 수의 양제가 대업(大業) 8년 임신(王申)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해왔다.----10년 갑술(甲戌)에 황제가 퇴군하려고 좌우를 돌아보며,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친히 조그만 나라를 치다가 이롭지 못하였으니 만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하니, 이때 우상(右相) 양명이 아뢰기를, 신이 죽어서 고려의 대신이 되어 기어코 나라를 멸망시켜서 황제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돌아가고 그는 고려에 태어났는데 나이 15살에 총명하고 용감하였으므로 이때의 무양왕(武陽王 : 榮留王)이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를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벼슬이 소문(蘇文)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곧 시중(侍中)과 같은 직위였다. 개금이 왕에게 아뢰기를 솥에는 발이 셋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敎)가 있어야 하는데, 신이 보건대 나라 안에는 다만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기고 당에 아뢰어 도교를 청하였으므로 태종이 숙달(叔達) 등 도사(道士) 여덟 사람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로 도관(道觀 : 도교의 寺院)을 만들고 도사를 높여 유사(儒士)의 위에 앉혔다.----개금은 또 동북과 서남에 장성을 쌓기를 청하여 남자는 성을 쌓고, 여자는 농사를 짓기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었는데, 보장왕(寶藏王) 때에 당태종이 친히 육군(六軍, 곧 모든 군사)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按唐書云 先時 隋煬帝征遼東 有裨將羊皿 不利於軍 將死有誓曰 必爲寵臣 滅彼國矣 及盖氏檀朝 以盖爲氏 乃以羊皿是之應也 又按高麗古期云 隋l煬帝 以大業八年任申 領三十萬兵 渡海來征 十年甲戌 ----帝 將旋師 謂左右曰 朕爲天下之主 親征小國不利 萬代之所嗤 時右相羊皿秦曰 臣死爲高麗大臣 必滅國 報帝王之讐 帝崩後 生於高麗 十五聰明神武時 武陽王聞其賢 徵入馬臣 自稱姓盖名金 位至蘇文 乃侍中職也 金秦曰 鼎有三足 國有三敎 臣見國中 唯有儒釋 無道敎故國危矣 王然之 秦唐請之 太宗遺叔達等道士八入 王喜 以佛寺爲道觀 尊道士 坐儒士之上----盖金又秦 築長城東北西南時男役女耕 役支十六年乃畢 乃寶藏王之世 唐太宗 親統以六軍來征)”

양명의 후신(後身)이 개씨가 되었다는 것은 요망한 말이고, 연개소문을 “성을 개, 이름을 금이라 하였고, 벼슬이 소문에 이르렀다. ”고 한 것도 망령된 말이니 변론할 것도 없거니와 그 밖에 도교를 수입했다느니 장성 쌓기를 청했다느니 한 것도 또한 거짓 기록이다. 수의 양제는 기원 617년에 죽고 영류왕 곧 무양왕이 노자교(老子敎 :道敎) 를 수입한 것은 당서에 분명히 당고조(唐高祖) 무덕 (武德) 7년(기원후 624년)으로 겨우 8살이니, 이제 “나이 15살에-----신하가 되어-----당에 아뢰어 청하였다.”고 함이 무슨 말인가? 장성의 축조는 영류왕 14년에 시작하였으니 16년 만에 준공하였으면 곧 보장왕 5년, 당태종이 침략해온 이듬해에 마친 것인데 이제 “16년 만에 역사를 마치고----당태종이 친히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와 공격하였다. ”고 함은 어떻게 된 것인가? 영류왕은 북수남진(北守南進) 주의를 써서 당과는 화친하고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고, 연개소문은 남수북진(南守北進) 주의를 써서 백제로 신라를 견제하고 당을 공략하려고 한 사람이니 당의 황제가 성이 이(李)요, 도교의 시조 노자(老子)도 성이 이씨이기 때문 에 당대(唐代)에는 노자를 그 선조라고 위증하여 극진히 높여 받들었으므로 영류왕이 당과 화친하려고 당의 조상 노자의 교와 그 교도인 도사를 맞아온 것일 것이다. 그런데 종교로는 신수두를 신봉하면서 정책으로는 당을 공략하려는 연개소문이 국교(國敎)를 버리고 적국인 당의 조상 노자의 교인 도교를 맞아들였을 리가 있겠는가 ? 장성은 나가서 치기 위해 쌓은 것이 아니라 지켜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북쪽을 막아 지키려는 영류왕이 쌓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북쪽 공략을 주장한 또 그 주장을 실행한 연개소문이 그같은 국력을 들여 백성의 원한을 살 방어용의 장성을 쌓았을 리가 있겠는가? 이렇게 연조가 맞지 아니하고 이치에도 맞지 아니하니 이 두 가지 사실이 다 거짓 기록임이 의심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유 · 불 · 도 세 교는 솥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 구하였다고 한 것이 보장왕 2년의 일이니 삼국유사에 개금(盖金)의 도교 청래(請來) 운운한 것이 다만 그 연대가 틀렸을 뿐 사실은 확실히 있은 것이 아니냐 ? ”고 하지마는 삼국사기에는 이것을 고려고기 (高麗古記)에서 인용하였다고 했으니, 삼국사기도 고려고기에서 인용하였음이 분명하고, 고려고기에는 “개금이 무양왕 곧 영류왕에게 아뢰어 도교를 당에서 들여왔다.”고 하였으니 삼국사기의 저작자 김부식이 그 연조를 옮겨 보장왕 2년의 일로 기록하였음이 또한 분명하다. 김부식이 각종 고기와 지나사의 사실을 마구 끌어다가 그 사기를 지었는데 가끔 연조가 모호한 일이면 그 사실의 있고 없었음을 자세히 구명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연월을 고쳐넣은 것이 허다하니,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의 수입을 청했다고 하는 것도 한 예이다. 그러니 연개소문이 도교를 들여오고 장성 쌓기를 청했다는 두 사건은 물을 것 없는 거짓 기록이다.

그러니까 그 거짓 기록의 근거가 된 것은 고려고기이니, 고려고기 는 어찌하여 이같은 거짓 기록을 썼는가? 고려고기는 대개 신라말의 불교승이 지은 것인데 지나 위(魏)의 세조(世祖)와 당의 무종(武宗)이 도교를 위해 나라 안의 모든 불교의 절을 파괴하고 모든 불교승을 살해하였기 때문에 당시 어느 나라의 불교승이나 다 도교에 대하여 이를 갈며 분하게 여겼고,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하여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한 인물이므로 신라 당시의 사회가 연개소문을 극구 헐뜯고 욕하는 판이라 고려고기의 작자가 고기를 지을 때 당시의 “영류왕이 도교를 수입하였다.”고 한 것과 “장성을 쌓았다.”고 한 것을 보고, 이에 그 도교를 몹시 원망하는 마음으로 당서에 부회(附會)하여 방편(方便)의 법라(法螺 : 소라고둥, 허풍떤다는 뜻)를 크게 붙어 대고 “도교를 믿지 말아라. 도교를 믿다가는 고구려처럼 나라가 망할 것이다. 도교를 들여와서 우리의 정신상 생명을 없애려고 하고, 장성 쌓는 역사를 일으켜서 우리의 육체상 생명을 없애려 한 자는 곧 연개소문이다. ” 하여 연개소문을 미워하는 사회의 심리를 이용해서 도교를 배척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연대와 사리(事理)가 맞지 아니하니 거짓 기록임이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다.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연개소문은 모든 명사(名詞)와 사실을 거의 다 바꾸어 전한 《갓쉰동전》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거짓말뿐인가? 내 가 20년 전 서울 명동(明洞)에서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란 노인을 만났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자(字)가 김해(金海)이고, 병법 이 고금에 뛰어났었다. 그의 저서 김해병서(金海兵書)가 있어 송도 (松都) 때(고려 때)에도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부임 할 때에 한 벌씩을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그 병서가 아주 없어졌다.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의 이정(李靖)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가장 뛰어난 명장이 되고, 그 이정이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것인데 그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상한 문구가 많았으므로, 당(唐) · 송(宋)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이 외국인을 스승으로 하여 병법을 배워서 명장이 된 것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 하여 드디어 그 병법을 없애버렸고, 지금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세 사람이 위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첫머리에서부터 막리지는 스스로 병법을 안다고 하였다는 연개소문을 헐뜯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원본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선생이 이런 말을 어디에 근거하여 한 것인지 내가 당시 사학에 어두워서 자세히 물어보지 못하였다.

요양(遼陽) · 금주(金州) · 복주(復州) 등지에 연개소문의 고적과 전설이 많고, 연해주(沿海州)의 개소산(盖蘇山)에는 연개소문의 기념비가 서있어서 해삼위(海參威 : 우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블라고베시첸스크로 가려면 바다 가운데서 그 산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니, 후 일에 혹 그 비석을 발견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을 변증(辨證)하고 떨어져나간 기록을 보충할 날이 있을까 한다.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에 관한 착오 l0년[편집]

삼국사기의 연개소문의 사적은 신구 당서(新舊唐書) ·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서 뽑아 쓴 것임은 이마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등에 다 연개소문의 죽은 해를 당의 고종(高宗) 건봉(乾封) 원년이라고 하였는데 건봉 원년은 보장왕 25년(기원후 666년)에 해당하므로 삼국사기에도 보장왕 25년에 연개소문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연개소문이 보장왕 25년인 기원후 666년에 죽었다면 연개소문이 죽기 전에 고구려의 동맹국 백제가 이미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서울인 평양도 소정방(蘇定方)에게 포위를 당했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당태종 · 이정 등이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렸으며, 소동파(蘇東坡 : 蘇軾) · 왕안석(王安石) 등이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허락하였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연개소문을 적어도 백제가 멸망하기 몇 해 전에 죽었다고 가정하였다. 이 가정을 가지고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찾은지 오래였으나 확증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근일에 이른바 천남생 (泉男生)의 묘지 (墓志) 란 것이 하남(河南) 낙양(洛陽)의 땅 속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에 의하면 남생 형제의 다툼이 건봉(乾封) 원년 곧 기원후 666년 이전임이 분명함을 알았다. 그 묘지에는 연개소문이 어느 해에 죽었다는 말은 없으나 남생이 “24살에 막리지에 임명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였으며, 32살에 태막리지 총록군국 아형원도(太莫離支總錄軍國阿衡元道)의 벼슬이 더해졌다. (二十四 任莫離支 兼授三軍大將軍 三十二 加太莫離支 總錄軍國 阿衡元道)”고 하였으며 “의봉(儀鳳) 4년 정윌 19일에 병이 들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죽으니 나이 46이었다. (以儀鳳四年正月十九日 遭疾 遷於安東府之官舍 春秋四十有六)”고 하였다. 당의 고종 의봉 4년은 기원후 679년이요 기원후 679년에는 남생이 46살이고, 그의 24살 때는 기원후 657년이다. 기원후 657년 24살 때 막리지 겸 삼군대장이 되어 병권을 잡았으니 기원후 654년에 연개소문이 이미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이 대신 하였음이 확증된 것이다. 혹은 남생이 32살 대막리지가 되던 해 기원후 665년에 연개소문이 죽어서 그 직위를 남생이 대신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마는 삼국사기 본기나 연개소문전에는 다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되었다고 했고, 삼국사기 김유신전이나 천남생의 묘지에는 다 연개소문을 태대대로(太大對盧)라 하였으며, 개소문전에는 아버지 서부대인(西部大人) 대대로가 죽어 연개소문이 그 직위를 이어 받았다고 하고, 천남생의 묘지에는 증조부 자유(子遊 :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조부 태조(太祚 : 연개소문의 아버지)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고 하여 어느 책의 막리지를 다른 책에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라 하였고, 또 다른 책에는 태대대로 혹은 대대로를 막리지라 하였는데, 대로의 대(對)는 뜻이 '마주'이니 대개 이두문으로 대(對)는 뜻으론 읽으면 ‘마’가 되고 막리지의 막(莫)은 음으로 읽어 ‘마’가 되며, 막리지의 리(離)와 대로의 로(盧)는 다 음으로 읽어 ‘ㄹ’이 되어 막리나 대로는 다 ‘말’로 읽을 것이다· 고구려 말년의 관제(官制)에 ‘말치’가 장상(將相)의 임무를 겸하여 마치 그 초대의 ‘신가’와 같았으니, ‘말치’를 이두문으로 대로(對盧) 혹은 막리지(莫離支)라고 썼다. 대로지 (對盧支)라 쓰지 않고 대로(對盧)라고만 쓴 것은 생략한 것이고, ‘말치’에 임명된 지 몇 해가 되면 태대(太大)의 호를 더하여 태대대로지 (太大對盧之) 혹은 태막리지(太莫離支)라 썼다· 태대막리지 (太大莫離 之)라 쓰지 않고 대막리지라고만 쓴 것은 역시 생략한 것이다· ‘말치’---대로지 혹은 태대막리지가 그 직위는 같으나 ‘신크’---‘태대 (太大)’는 곧 공훈과 덕을 상주는 품질(品秩)이니 삼국사기 직관(職官)에 각간(角干) 김유신의 큰 공로를 상주어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 하여 태대(太大) 두 자를 각간 위에 더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남생이 24살 때 곧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이 된 해, 기원후 657년이 남생이 정권과 병권을 다 잡은 확증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같은 해에 연개소문이 죽은 확증이 된다. 만일 대로와 막리지가 같은 ‘말치’의 이두자라면 어찌하여 남생의 묘지에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막리지에 임명되었다· (曾祖子遊 祖太祚 父盖金 竝任莫離支)”고 하거나 아니면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 아버지 개금이 다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 (曾祖子遊 祖太祚 父盖金 竝任太大對盧)”고 하지 않고 , “증조부 자유, 조부 태조가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 아버지개금은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 (曾祖子遊 祖太祚 竝任莫離支 父盖金竝任太大對盧)”고 하여 막리지와 대대로를 구별하여 썼는가?

묘지의 윗부분에는 남생의 직책을 중리위진대형(中裡位鎭大兄)이라 태막리지(太莫離支)라 쓰고, 아랫부분에는 남생이 당에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태대형(跆大兄)이란 옛작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으니, 태대형은 중리위(中裡位)의 진대형(鎭大兄)을 가리킨 것이거나 태막리지를 가라킨 것일 터인데 이같이 다른 글자로 썼으니 묘지에 쓰인 벼슬 이름은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뿐더러 또한 “다 막리지에 임명되고 ----태대대로에 임명되었다.”고 한 아랫 구절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양야(良治) · 양궁(良弓)으로 다 병권을 잡고 나라의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乃祖乃父 良治良弓 竝執兵금 咸專國柄)”고 한 것 이니, 막리지와 태대대로가 다같이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한 유일한 수석 대신임을 볼 것이고, 당서 고려전에는 “대대로는 모든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大對盧 總知國事)”고 하였고, 동 개소문전에도 “막리지는 당의 중서령(中書令) 병부상서(兵部尙書)의 직위와 같다.(莫離支 獪唐中書令兵部尙書職)”고 하였으니 , 더 욱 그 두 가지가 똑같이 장상 (將相)의 직책을 겸한 유일한 대관임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후 657년에 ‘신크말치’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男 生)이 ‘말치’가 되어 아버지 연개소문의 직위를 상속하였다가 9년 후에 ‘신크’의 호를 더하여 ‘신크말치 ’라 일컬었음이 의심없으니, 구사 (舊史)에 의거하여 기원후 666년에 연개소문이 죽었다고 함은 물론 큰 착오이거니와 묘지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다는 해를 의거하여 기원후 665년에 개소문이 죽었다고 하는 것도 큰 잘못이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는 분명히 기원후 657년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신 · 구당서에 다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늘려 기원후 666년이라 하였고, 천남생의 묘지에 또한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쓰지 아니하였음이 다 무슨 까닭인가?” 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당태종이 눈알이 빠져 죽은 것이 곧 연개소문 때문이고, 당의 땅 일부도 연개소문에게 빼앗겼으니 춘추의 의 (春秋之義)로 말하면 당의 여러 신하들이 마땅히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복수를 강구함이 옳겠는데, 이제 세월을 천연(遷延)하여 연개소문의 생전에는 다만 고구려의 침략만 당하고 고구려에는 한 발자국도 침입하지 못했음은 곧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꺼리어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었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연개소문의 생전에도 당의 군사가 평양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는 표시를 하기위해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10년이나 늘려 역사에 올린 것이니, 곧 다음 편에서 말 하고자 하는 부여복신(扶餘副信)이 죽은 달을 늘린 것과 같은 수단이다. 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고 역사적 서류가 많지 못하여 이웃나라 이름난 이의 생사를 민간에서는 거의 관청의 선포에 의해 서로 전할 뿐이므로 이같이 연개소문의 죽은 해에 대한 거짓 기록이 드디어 지나 안에서는 실록(實錄)으로 유행된 것이었다.

연개소문의 공적(功績)에 대한 간략한 평가[편집]

옛날부터 역사가들은 성패 (成敗) 흥망(興亡)으로 그 사람의 낫고 못함을 정하고, 또 유가(儒家)의 윤리관으로도 남의 잘잘못을 논란하는데, 연개소문은 성공하였지만 못난 아들들이 그가 끼친 업적을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춘추필법을 본받는 자의 배척을 받고 흉악한 적이라 하여 헐뜯고 욕함을 당해왔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 혁명인가 하면 반드시 역사상 진화(進化)의 의의를 가진 변화가 그것이다. 역사란 것이 어느 날 어느 때에 변화의 과정으로 나아가지 않는 때가 없으니 또한 어느 날 어느 때에 혁명없는 때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역사 전부를 혁명이라고 일컫는 것이 옳겠지마는 역사가들이 특히 혁명이라는 명사를 귀중히 여겨 문화상 혹은 정치상 두드러지게 시대를 구분할 만한 진화의 의의를 가진 인위적(人爲的) 대변혁을 가라켜 혁명이라 일컬은 것이니, 이런 의미로 정치사상의 혁명을 구하자면 우리 조선 수천 년의 역사에 몇이 못 될 것이다. 한양(漢陽)의 이씨(李氏)로 송도 (松都)의 왕씨(王氏)를 대신한 것이나 이조(李朝)의 이시애(李施愛) · 이괄(李适) 등의 반란이 그 성패는 다르지마는 실상은 다 정권 쟁탈의 행동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것은 내란이라 역대(易代)라 일컫는 것은 옳지마는 혁명이라 일컬음은 옳지 않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그렇지 아니하여 봉건세습(封建世襲)의 호족공치제(豪族共治制)의 정치를 타파하여 정권을 한 곳에 집중시켰으니 이는 분립의 대국(大局)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그 반대자는 군주나 호족을 묻지 않고 한꺼 번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하 수백 명 대관을 죽이고, 침노해온 당태종을 격파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당을 진격하여 지나 전국을 놀라 떨게 하였으니 그는 다만 혁명가의 기백(氣魄)을 가졌을 뿐 아니라 또한 혁명가의 재능과 지략을 갖추었다고 함이 옳겠다.

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 어진 이를 골라 자기의 뒤를 이어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한 자식 형제에게 대권(大權)을 맡겨 마침내 이룬 공업(功業)을 뒤옆어버렸으니 대개 야심이 많고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역사가 아주 없어져서 오직 적국 사람들의 붓으로 전한 기록을 가지고 그를 논술하게 되어 사실의 전말을 환히 알아볼 수 없으니 경솔하게 그 일부를 들어 그의 전모를 논란 함이 옳지 못할 뿐더러 수백 년 사대(事大)의 용렬한 종이 된 역사가들이 그 좁쌀만한 주관적 눈에 보인 대로 연개소문을 가혹하게 평하여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 (臣事君以忠)” 하는 불구(不具)의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규탄하며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以小事大者 畏天)” 하는 노예적 심리로 그 업적을 부인하여 시대적 대표 인물의 유체(遺體)를 거의 한 점의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대는 것은 내가 크게 원통하여 여기는 바이다. 이제 이를 위해 대략 몇 마디의 평을 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