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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제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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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임유관(臨愉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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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隋) 전쟁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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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다.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비록 수많은 족속이 대립하였지마는 다 무무하고 미개한 유목의 야만족들이라 혹 한때 정치상 세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붕괴하는 날에는 다시 일어날 터까지 없어지거니와, 토착(土着)한 민족으로 오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와 조선이었다.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파탄과 불안이 있어서 각기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였을 것이다.

상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구려 건국 이래로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 상태에 있어 여러 나라가 서로 번갈아 침범하므로 외정(外征) 할 힘이 없고 지나는 한(漢)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한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다. 태조(太祖) · 차대(次大) 두 대왕 때에는 고구려가 비록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는 거의 대적할 세력이 없었으므로 한을 쳐서 요동(遼東)을 점령하는 동시에 직예(直匠) · 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 안에 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아니하여 왕위 쟁탈의 난리가 거듭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을 들어 공손도(公孫度)에게 항복해서 고구려는 가장 인민이 많이 모여 사는 기름진 땅을 잃어 약한 나라가 되었다. 고구려가 그 약한 나라의 지위를 변하려고, 조조(曺操) 자손의 위(魏)며 모용씨(慕容氏)의 연(燕), 곧 지나 북방의 나라들에 향 하여 도전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쪽에서 일어나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이루었다. 고국양(故國壞) · 소수림(小獸林) · 광개토(廣開土) 세 대왕이 일어나서 요동을 치고, 또 서북으로 글안을 정복하여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였으며, 장수왕(長壽王)이 70년 동안 백성의 힘을 길러 인구가 크게 불고 나라의 힘이 팽창하여 지나와 맞서 싸울 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쪽 네 나라의 고구려에 대한 공수동맹이 이루어져서 뒤에서 견제를 받아 장수왕 이래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쪽 통일에 힘썼고, 지나도 남북으로 나뉘어서 산해관(山海關) 동쪽을 엿볼 겨를이 없으므로 위(魏)의 척발씨(拓跋氏)의 백제 침입(제8 편 제2장 참고), 주(周)의 우문씨(宇文氏)의 고구려 침입(곧 溫達이 격퇴한)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의 흥망을 다투는 계속적 혈전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경에 이르러 우문씨의 제위(帝位)를 빼앗은 수(隋)의 문제 (文帝) 양견(楊堅)이 진(陳 : 지나 江南 6국의 하나)을 아우르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어(수의 황가와 장국이나 재상들이 거의 다 鮮卑族으로 지나에 同化된 지 오래임)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깔보았는데 북쪽의 돌궐(突厥)이나 남쪽의 토욕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였고, 오직 동쪽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저 오만하고 자존(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을수 있는 일이랴.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첫째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 년 동안 서로 풀지 못할 원수를 맺었지마는 갑자기 옹서(翁壻)간의 나라가 되어서(제9편 제1장 참고) 피차 화호(和好)하고 두 나라가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각기 사신을 수(隋)에 보내서 고구려 치기를 청하고 또 가끔 고구려 국정의 허실을 수에 알려주어 수의 임금과 신하의 야심을 조장시켰다. 이것이 수가 고구려를 침노한 둘째 원인이었다. 뒤에 신라가 당(唐)에게 망하지 않고 구구한 반 독립국이나마 지녀 내려온 것은 고구려의 오랜 동안 끈덕진 저항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맹렬한 진공(進攻)이 있었던 때문이니, 만일 고구려가 수에게 망했더라면 백제나 신라도 다 수의 한 군현(郡縣)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사를 읽을 때에 신라 · 백제 가 수에 대해 응원을 청한 사실을 보고는 책을 물리고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이다.

수문제(隋文帝)의 모욕적인 언사의 국서(國書)와 강이식(姜以式)의 북벌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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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文帝)가 진(陳) 을 병합하여 지나를 통일한 지 17년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고구려에 대해 자웅을 다투고자 무망 (誣罔)이 심하고 패만(悖慢)하기 이를 데 없는 모욕적인 글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짐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기는 것은 교화(敎化)를 드날려서 원로방지(圓로方趾)로 각기 그 천성 (天性)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 해 마다 조공 (朝貢)하니, (다른 나라가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함은 지나 춘추시대 이래의 상례로 그들의 역사책에나그렇게 썼을뿐 대등한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한 번 싸우고자 고의로 쓴 것임) 비록 번부(藩附)라 일컫기는 하지마는 정성이 미흡하다. 왕이 이미 짐의 신하이니 짐의 덕을 본받음이 옳은데, 왕은 말갈(靺鞨)을 구축하고 글안을 가두어 왕의 신첩 (臣妾)을 만듣고 짐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 착한 사람이 의를 사모함을 밉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해독이 심하냐? 짐의 태부(太府)에 공인 (工人)이 적지 아니하니 왕이 쓰고자 할진대 아뢰면 얼마든지 보낼 것인데, (부강함을 과장한 말) 왕이 지난번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을 이용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이 무엇을 하려 함이 냐.-----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는 이제 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 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랴.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 揚子江)과 어찌 비하 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陳國)과 비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을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리니 무슨 큰 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삼국사기에는 수의 문제가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기원후 590 년)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에는 문제의 개황(開皇) 17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원왕 32년은 문제 개황 17년 이 아니니‘ 삼국사기에는 연조를 잘못 기록하였고,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돌아간 지 7년 뒤이니, 수서에는 왕의 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웃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양 그 사실을 보고해온 해에 기록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발생한 연조를 틀리게 고쳐 쓰는 것은 지나의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므로 수서에 그러한 잘못된 기록이 생기게 된 것인데, 삼국사기는 평원(平原) · 영양(慶陽) 두 본기의 연대는 고기(古記) 를 좇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서에서 뽑아 기록하여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사기에 그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사실에 관계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姜以式)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하고 곧 개전(開戰)하기를 주장하니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를 삼아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臨愉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 (濊 : 隋書의 靺鞨) 군사 1만으로 요서 (遼西)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게 하고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것은 수서만을 뽑아 기록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薩水戰爭) 때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쫓는다.

임유관(臨愉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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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 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喉)로 수군총관(水軍總 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하니, 수의 군사는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 ”고 하여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 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薩水)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 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에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피차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 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 었다.

제2장 살수(薩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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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수(隋) 제2차 전쟁의 원인과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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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장수왕(長壽王) 이래로 남진주의(南進主義)를 취해 서북의 지나와는 친교를 맺고 남쪽의 신라 · 백제에 대하여 군사를 쓰다가 수(隋)가 지나의 남북을 통일하니, 고구려가 이를 두려워하여 우리도 빨리 신라와 백제를 토멸해서 조선을 통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주 남쪽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 신라와 백제는 동서끼리의 전쟁으로 인하여 서로 화합할 여지가 없게 되어 해마다 무력으로 다투는데, 게다가 북쪽 고구려의 침략이 있어 국력이 피폐해져 견디어낼 수 없으므로 두 나라는 제각기 사신을 수에 보내서 고구려 공격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수는 임유관 싸움에 혼이 나서 고구려를 가벼이 대적하지 못할 줄을 알고 이를 거절하였는데 문제(文帝)가 죽고 양제(煬帝) 가 즉위하여서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전국이 부유해지고 각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찼다. 양제는 순유(巡遊)를 좋아하여 지금의 직예성 (直匠省) 통주(通州)에서 황하(黃河)를 건너 지금의 절강성(斯江省) 항주(抗州)에까지 3천 리 긴 운하를 파서 용주(龍舟 : 제왕이 타는 배) 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토곡흔(吐谷渾)---지금의 서장(西藏), 서돌궐(西突厥) ---지금의 몽고(蒙古), 돌궐(突厥) ---지금의 몽고 동부 등 여러 나라의 조공을 받아 이 하늘 아래에는 오직 수만이 강대한 제국이라고 자랑하려 하는데, 동방의 고구려가 있어 조선의 서북쪽---지금의 황해 · 평안 · 함경 세 도와 지금의 봉천(奉天) · 길림(吉林) · 흑룡(黑龍) 세 성을 모두 차지하여 토지는 비록 수보다 좁지마는 인구가 번식하고 군사가 용감하여 수와 겨루려 하니, 일찍이 병마도원수로 강남(江南)의 진(陳)을 토평하여 무공을 자랑하고 허영적 야심이 가득한 양제가 어찌 잠시인들 고구려를 잊으랴? 그 폭발하지 않은 것은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후 607년(양제 즉위 후 3년)에 양제가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유림(楡林)---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영하(寧夏)에 이르러 돌궐의 계민 가한(啓民可汗)의 장막에 들렀다. 이때 돌궐이 비록 수에 대해 신하라 일컫고 있었으나 또한 고구려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하여 두 나라 속국의 구실을 하므로 고구려가 답사(答使)를 보냈는데, 양제가 이것을 알고 계민가한을 위협하여 고구려 사신을 불러보았다. 양제의 총신 배구(裵矩)가 양제를 꾀어 “고구려의 땅은 거의 한사군(漢四郡)의 땅인데, 중국이 이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입니다. 선제(先帝:文帝)가 일찍이 고구려를 토멸하려 하셨으나 양양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전하께서 어찌 이를 잊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양제는 고구려의 사신을 보고 “만일 고구려 왕이 입조(入朝)하지 않으면 짐이 마땅히 출순(出巡 : 침입한다는 뜻)할 것이다.” 하고 을러댔다. 사신이 귀국하여 보고하는 말을 들은 고구려 조정의 의논이 어떠하였던가는 역사책에 빠져서 알 수 없거니와 배구는 동번풍속기(東藩風俗記) 30권을 지어 양제에게 울렸는데 그 가운데 평양의 가려(佳麗)함과 개골산(皆骨山 : 金剛 山)의 영수(靈秀)함을 격찬하여 순수를 좋아하는 양제의 동침(東侵) 할 욕심을 더욱 부채질하여 명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동양 고사상 미증유의 대전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수양제(隋煬帝)의 침입과 그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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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611년 6윌에 수의 양제가 고구려를 치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군사를 이듬해 정윌 안으로 탁군(啄郡)---지금의 직예성(直匠省) 탁현(啄縣)에 모이게 하고, 유주총관(幽州總管) 원홍사(元弘嗣)를 보내 동래(東萊) 지금의 연태(烟台) 해구(海口)에서 병선 300척을 만들게 하고, 4월에 강남(江南)과 회남(淮南)의 수수(水手) 1만 인, 노수(弩手) 3만 인과 영남(領南)의 배랍수(排랍手) 3만 인을 징발하여 수군을 증강하고, 5월에 하남(河南) · 회남에 조서를 내려 병거(兵車) 5만 대를 만들어서 군사와 무기와 군막(軍幕)을 실어 나르게 하고, 7 월에 강남 · 회남의 민부(民夫)와 배를 징벌하여 여양창(黎陽倉) · 낙구창(洛口倉) 등 창고의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게 하니, 강과 바다에는 배들이 1천여 리에 널리고 육지에는 각지의 물건 운반하는 일꾼이 항상 수십만 명이 동원되어 떠들어대는 소리가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양제가 탁군에 이르러 모든 군사를 지휘하는데 좌우 각 12군으로 나누어 한 군단에 대장과 아장(亞將) 각각 한 사람을 두 고, 기병은 40여 대(隊)인데 1대는 100인이요, 10대가 1단(團)이 되어 네 단에 나누고, 보병은 80대인데 20대가 1단이 되어 또한 네 단에 나 누고 치중병 (輜重兵)과 산병 (散兵)도 또한 각각 네 단에 나누어 보병 사이에 끼우고, 갑옷 투구와 기치(旗幟)는 단마다 빛깔을 달리하고 나아가고 물러나고 머무르고 걷는 것이 정연하니 모두 24군단이었다. 하루에 한 군단씩 40리만큼 영(營)을 지어 출발하는데 40일 만에야 다 출발하니 머리와 끝이 서로 닿아 고각(鼓角) 소리가 산하를 뒤흔들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마지막으로 어영군(御營軍)이 출발하는데 또 한 80리에 뻗치니, 정규의 군사가 합 113만 3천8백 명이라 200만이라 일컬었고, 뒷바라지하는 군사는 400만이나 되니 지나 유사 이래의 대 동병 (動兵) 이었다.

수서(隋書)에 양제 출군의 명령을 기록하되, 좌군(左軍) 12군단은 누방(누方) · 장잠(長岑) · 명해(溟海) · 개마(蓋馬) · 건안(建安) · 남소(南蘇) · 요동(遼東) · 현도(玄도) · 부여 (扶餘) · 조선(朝鮮) · 옥저 (沃沮) · 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가고 우군(右軍) 12군단은 점선(점蟬) · 함자(含資) · 흔미(渾彌) · 임둔(臨屯) · 후성(候城) · 제해(提奚) · 답돈(踏頓) · 숙신(蕭愼) · 갈석(碣石) · 동이(東이) · 대방(帶方) · 양평(襄平) 등의 길로 나가서 다 평양에 모이라고 하였다. 명해는 지금의 강화(江華)요, 옥저는 함경도와 훈춘(渾春) 등지요, 임둔과 동이는 지금의 강원도이다, 평양에 모이라는 군사가 어찌 훈춘이나 함경도나 평양 이남의 땅으로 나왔을 것인가? 자치통감(資治通鍵)에 여러 군단의 진행한 실황을 기록하여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宇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가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가고,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가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도道)로 나가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單)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가고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가고,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隊城道)로 나가고 우어위호분낭장 (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가서 다 압록수(鴨錄水) 서쪽에 모였다고 하였는데, 낙랑 · 현도는 한(漢) 이래로 요동에 가설(假說)한 북낙랑 · 북현도도 있으니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함도 옳거니와 옥저가 어찌 압록수 서쪽이 되는가? 그러므로 지명이 거의 임시로 가정한 이름이고 고구려의 본 지명이 아니니, 이로써 그 행군의 노선을 자세히 말할 수 없다. 이제 그 전쟁의 광경에 의하여 미루어 보건대 양제의 작전 계획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24군단을 수륙(水陸) 두 방면으로 나누되 육군은 다시 두 부로 나누었다. 그 하나는 어영군(御營軍)과 그 밖의 10여 군단이니 양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의 여러 성을 치기로 하고, 또 하나는 우익위대장군 우문술 등 9군단이니, 우문술이 사령(司令) 이 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이 참모가 되어, 요수를 건너 고구려 서울 평양에 침입하기로 했으며, 수군이 또한 여러 만 명이니 좌익위대장군 수군총관(水軍總管) 내호아(來護兒)와 부총관 주법상(周法尙)이 양식 실은 배를 영솔하여 바닷길로 쫓아 대동강으로 들어가서 우문술과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개 태조왕(太祖王) 때에 왕자 수성(遂成 : 뒤의 次大王)이 한(漢)의 군사의 식량 보급로를 끊고 이를 격파한 이래 고구려에서 항상 북방의 침입을 방어할 때 수성이 쓴 계책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고 북방의 침입자들도 이것을 가장 경계하였으므로 이제 수의 양제는 육군은 가는 동안의 식량만 가지고 가며, 목적지인 요동 · 평양의 두 성에 이르는 수군에 의뢰하여 운반해온 양식을 먹고 두 성을 포위하여 지구전(持久戰)을 벌여서 뒤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려 함이었다.

고구려의 방어와 그 작전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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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 살수대전(薩水大戰)을 말하는 이가 거의 을지문덕(乙支文德) 한 사람의 계획으로 치고 또 을지문덕이 겨우 수천 명의 군사로 수의 수백만 대군을 격파한 줄로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 말이다.

고구려가 망할 때에도 그상비군이 30만이 나되었으니, 하물며 영양왕(영陽王)의 전성시기일이랴. 이때에는 오히려 30만 명이 넘었을 것이고 또 광개토왕의 비문에 “왕이 친히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갔다. ”고 한 것으로 보거나 양제의 고구려에 대한 선전(宣戰) 조서로 보거나 아무튼 고구려 수군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수군은 대략 수만 명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 30여만 명으로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경계하는 데 몇만 명이 들었을 것이거니와, 그 나머지도 20여만 명이 되니, 이 20만 명은 수에 대항하는 전사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물론 수륙군의 대원수(大元帥)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요 육군의 원수는 을지문덕이었는데, 양제가 수륙 양면의 방어를 다 중히 여기는 가운데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는 것으로 계획의 중심을 삼아 육상의 장사들은 인민에게 명하여 양식을 거두어가지고 모두 성에 들어가 있게 하고, 수군도 각각 요새 항구의 안전지대로 물러나 지켜 싸움을 피하다가 수의 군사가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의 패강(浿江) 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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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수의 군사를 깊이 꾀어들이려고 요하(遼河) 서북쪽에 있던 군사를 거두어들여 요하를 지키니, 그 해 3월에 수의 군사가 요하에 이르러 서쪽 연안 수백 리에 진을 쳤다. 마치 벌떼처럼 우글우글하고 군사의 장비와 군기가 울긋불긋 햇빛에 빛났다. 수의 군사중 첫째가는 용장 선봉의 맥철장(麥鐵杖)이 부교(浮橋)를 매어 동쪽 언덕에 대려고 하므로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맡아 치게 해서 맥철장 등 장사 수십 명과 군졸 1만여 명을 목베고 부교를 끊어버리니, 수의 군사중에서 잠수 잘하는자와 헤엄 잘치는 자가 상을 탐내서 다투어 물에 뛰어들어 격전을 벌이면서 부교를 다시 매었다. 문덕이 예정한 계획에 따라 거짓 패하여 퇴군하니, 수의 양제가 그 전군을 휘몰아 요하를 건너와서 어영군(御營軍)과 좌익위대장군 등으로 하여금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게 하고, 좌둔위대장군 토우서(吐禹緖) 등 10 여 군단으로 하여금 그 부근의 성들을 포위 공격하게 하고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 등 9군단은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평양을 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 10 여만 명을 거느리고 양식 실은 배를 호위하여 동래(東萊)---지금의 연대(烟帶)에서 출발, 창해(滄海:渤海)를 건너 패강(浿江:대동강) 어귀로 들어오므로, 왕제 건무가 비밀히 수군(水軍) 장졸을 후미진 항구에 숨겨두고 평양성 아래 인가에는 집집마다 재물을 내놓고 수의 군사가 상륙하는 것을 내버려두니, 내호아가 정병 4만 명을 뽑아서 패강을 거슬러 올라와 성 아래로 돌진하였다. 재물을 노략질하느라 대오가 어지럽게 무너지니, 이때 건무가 결사대 5백 명을 뽑아 성곽과 빈 절에서 내달아 돌격해서 깨뜨리고 모든 군사에게 호령하여 수의 군사를 추격하게 하였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수군들도 일시에 내달아 함께 공격하니 수의 군사가 강 어귀에 이르러 배를 다투어 서로 짓밟아 죽는 자가 수없이 많았고 양식 실은 배가 모두 바다 속에 가라앉아서 내호아는 단신으로 조그만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 양식 실은 배가 다 없어지니 이미 평양성에 침입해 있던 우문술 등의 대군이 무엇을 먹고 싸우랴? 고구려가 이때에 이미 이길 지위를 차지하였으니 만일 전공의 차례를 따진다면 왕제 건무가 을지문덕보다 앞섰다고 할 것이다. 왕제 건무의 공이 이같이 컸지마는 역사를 읽는 사람들이 흔히 을지문덕만 아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 사마온공(司馬溫公)의 통감고이(通鑑考異)에 내호아가 양식 배를 잃지 아니했더라면 우문술의 살수의 패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옳은 말인가 한다.

고구려군의 살수(薩水)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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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이 요하에서 퇴군하여 수의 군사의 허실(虛實)을 탐지해보고자 하여 거짓 항복을 청하는 사자가 되어, 수의 진중(陣中)에 들어가서 그 내부 형편을 살펴보고 돌아오는데, 우문술 등이 그의 용모와 체구가 위엄있고 건장함을 보고 놀라 이 사람이 고구려의 대왕이나 대 대로(大對盧)인가 보다 하고 사로잡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서 다시 만나기를 청하였다. 문덕은 이때 이미 패강의 승전을 듣고, 우문술 등의 모든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눈치채었으므로, 이미 반드시 이길 기틀을 잡았는데 어찌 다시 범의 굴에 들어가랴? 달려 돌아오면서 수의 군사를 유인하기 위해 요새 (要塞)를 만나면 가끔 머물러 접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하루 동안에 일곱 번 패하니 우문 술 등이 크게 기뻐하여 고구려 군사는 하잘것이 없다고 내쳐 달려와 살수(薩水 : 지금의 천청강)를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

평양에 이르니 성 안과 성 밖의 인가가 고요하여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개소리 닭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므로 우문술이 의심이 나 서 바로 나가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닫힌 성문을 두드리니 성중에서 대답하기를 “우리가 곧 항복하려고 땅과 인구의 문서와 장부를 조사 하는 중이니 대군은 성 밖에서 닷새만 기다리시오.” 했다. 전보 같은것이 없던 고대이므로 우문술 등은 내호아가 패전한 것을 까맣게 모르 고 내호아가 오기를 기다려서 함께 공격하려고 성 안에서의 요구를 승낙하고 성 부근에 진을 쳤다. 군사들이 시장하여 약탈하려고 하되 집 집이 다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닷새가 지나 열흘이 되어도 성 안에서는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우문술이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공격 하니, 성 위 사변에 고구려의 깃발이 일시에 꽂히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을지문덕이 통역으로 하여금 큰소리로 “너의 양식 실은 배가 바다에 가라앉아 먹을 양식은 끊어지고 평양성은 높고 튼튼하여 넘어올 수 없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외치게 하고 포로로 한 수의 수군(水軍) 장졸들의 도장과 깃발을 던져주었다. 수의 군사가 그제 야 내호아가 패했음을 알고 군심이 갑자기 소란해져 싸울 수가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러나 돌아가는데, 을지문덕은 미리 사람을 보내서 모래 주머니로 살수의 상류를 막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서 천천히 한가롭게 수의 군사를 뒤쫓게 하였다. 살수에 이르니 배가 하나도 없어서 우문술 등이 물의 깊고 얕은 데를 알지 못하여 머뭇거리는데 돌연 일곱 사람의 고구려 중이 다리를 걷고 물에 들어서면서 “오금에도 차지 않는 물이오. ” 하고 건너가니 수의 군사가 크게 기뻐하며 다투어 물에 들어섰다. 채 중류에 미치지 못했을 때 상류의 모래주머니로 막은 물을 터놓아 물이 사납게 내리닥치는데 문덕의 군사가 뒤쫓아와서 맹렬히 공격하니, 수의 군사는 거의가 칼과 화살에 맞아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목숨을 건진 자는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450리나 도망가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 요동성에 이르렀을 때는 우문술 등 아흡 군단 30만 5천 명이 다 죽고 겨우 2천7백 명밖에 안 되었으니 백에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고 무기와 그 밖의 몇만 수레의 물건들이 죄다 고구려의 노획품이 되었다.

고구려군의 오열홀(烏列忽)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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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揚帝)의 어영군과 그 밖의 10여 군단 수십만 명 군사가 오열홀과 요동 각지의 성들을 공격하였으나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했을 뿐 아 니라 3월로부터 7월까지 무릇 4, 5달 동안에 고구려 사람들의 화살에 맞아 죽어서 성 아래에는 해골이 산을 이루었고, 또 양식을 얻지 못하 여 장졸이 굶주리다가 우문술 등이 패하여 돌아감을 보자 더욱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양제는 오히려 최후의 요행을 얻을까 하여 모 든 군사들을 오혈홀 성 아래에 집합시켰는데 을지문덕이 이를 깨뜨려 사람과 말을 수없이 죽이고 노획한 물건이 한없이 많았다.

뒤에 고구려가 망하매 당(唐)의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그 경관(京觀)을 헐고 백탑(白搭)을 세웠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를 당태종(唐太宗)이 안시성(安市城)을 침공할 때 당의 장수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세운 것이라 하지마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다. 수의 24군단 수백 명이 이에 전멸하고, 오직 호분낭장(虎奔郞將) 위문승(衛文昇)의 패잔군 수천이 남아 있어 양제를 보호해가지고 도망하였다.

수서(隋書)에 살수에서의 우문술의 패전을 기록하고 오열홀에서의 양제의 패전은 기록하지 아니한 것은 이른바 높은 이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니, 춘추필법을 알아야만 지나 역사를 읽을 수가 있다.

요하를 건너 OO리에 발착수(渤錯水)가 있는데, 이것을 수(水)라 이름하였지마는, 실은 수(강물)가 아니라 유명한 요동의 200리 진수렁이요 그 일명을 요택(遼澤)이라 하는 것으로, 당태종 요택 매골(遼澤 埋骨)의 조서를 보면, 당시 수의 군사가 이 땅에서 매우 많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도 대개 고구려 군사의 추격에 죽은 것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전쟁은 패강(浿江) · 살수(薩水) · 오혈홀(烏列忽) 3대전(大戰)을 포함한 것으로 으뜸가는 공(功)은 패강의 싸움이고 다음은 살수의 싸움이고 마지막은 비열홀의 싸움이었는데 모두 통틀어서 살수 대첩(薩水大捷)이라 일컬음이 옳지 않지마는, 오랜 동안 씌어온 것이므로 그대로 쓴다.

제3장 오열홀(烏列忽)·회원진(懷遠鎭)에서의 전쟁과 수(隋)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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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제(隋煬帝)의 재침(再侵)과 오열홀(烏列忽) 성주(城主)의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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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양제가 패해 돌아가서는 그 패전의 죄를 우문술(宇文述) 등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파면하여 옥에 가두고, 패전의 치욕을 씻으려고 이듬해 정월에 다시 전국의 군사와 말을 탁군(啄郡)으로 소집해서 요동의 옛성(지금의 永平府니 곧 고구려 태조왕이 요동을 차지한 뒤에 漢이 이 땅에 옮겨다 설치한 것)을 수축하여 군량을 저축해놓게 하고 “제장(諸將)의 전번 패전은 군량이 모자란 때문이요 싸움을 잘못한 죄 가 아니다. ” 하여 전국에 알리고, 다시 장군들의 직위를 복직시켜서 고구려 칠 계획을 세우는데 “작년에 요동을 평정하지 못하고 평양을 공격한 것이 실책이었다.” 하여, 이에 조서로서는 대개 작년과 같이 여러 장수들의 출정할 길을 지정하였으나 내용은 먼저 오열홀을 쳐서 이를 함락시킨 뒤에 차차 그 지리(地理)의 차례에 따라 각 주군(州郡) 을 평정하고 평양까지 내닫자는 것이었다.

이때 수는 크게 패한 뒤라 국고가 텅 비고 군대의 수효가 줄어 많이 모자라고 백성의 힘이 고갈하여 인심이 물끓듯해서 반란을 기도하는 자들이 지은 무향요동낭사가(無向遼東浪死歌)가 유행하였다.

양제는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남자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군사로 삼아서 교련한 지 몇 달 만에 요동으로 향하게 하고, 우문술 · 이경(李更) 등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응원하는 길을 막게 하고, 양제는 몸소 어영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오열홀을 공격하였다. 당시 오열홀의 성주(城主)의 이름은 비록 역사에 보이지 아니하나 대개 지혜롭고 용감하고 침착하고 의연한 인물이요 성 안의 모든 장졸들은 거의 다 수없이 많은 싸움을 경험한 용사들이었으므로 양제가 비루(飛樓 : 이동하는 누각)를 맨다, 운제(雲梯 : 높은 사닥다리)를 세운다, 지도(地道 : 땅굴)를 판다, 토산(土山)을 쌓는다 하여 성 공격하는 방법을 모조리 다 써보았지마는, 성주는 그때그때 알맞는 방어전을 벌여서 서로 대치한 지 수십 일에 수의 군사가 수없이 많이 죽었다.

수의 동도수장(東都守將)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기별이 와서 양제는 무기와 물자와 성 공격하는 기구 등을 다 버리고 밤 이경(二更)에 비밀히 여러 장수들을 불러 황급히 군사를 돌이켰으나 성주에게 발각되어 그 후군(後軍)이 고구려 군사의 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하였다.

수양제(隋煬帝)의 세 번째 침략과 노수(弩手)의 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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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는 비록 양현감의 반란을 평정하였지마는 국력이 피폐하고, 인민의 원한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양제는 오히려 패전의 치욕을 씻고자 하여 국내의 병마(兵馬)를 또 징집하여 회원진(懷遠鎭)으로 나아가는데, 군사들이 전번 두 번의 패전으로 인하여 가면 죽을 줄 알므로 도중에서 도망하는 자가 많고 이미 반란을 일으킨 지방은 징집에 응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양제는 싸우기 어려울 것을 깨닫고 중지하려고 하다가 그러면 더욱 온 나라 안의 웃음거리가 되어 반란을 진압 할 수 없을 것을 생각하고, 어떤 구실이라도 잡아서 휴전을 하려고 고구려에 대해 반신(叛臣) 곡사정(斛斯政)의 인도를 유일한 조건으로 화의를 제출하였다. 곡사정은 곧 양현감의 무리로서 고구려에 투항한 사람이다. 이때에 고구려의 국론이 두 파로 갈리니 한 파는 남쪽의 신라 · 백제를 토멸하기 전에는 지나에 대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물로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 전자에 지나에 대한 교제가 너무 강경하여 여러 해 전화를 일으켰으니 오늘부터라도 다시 정책을 변경하여 수와 화의하자 하였고, 또 한 파는 신라와 백제는 산과 내가 몹시 험하여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우며 또 백성들이 굳세어 좀처럼 굴복하지 않는데, 지나의 대륙은 이에 반하여 넓은 들이 많아서 가장 군사를 쓰기가 좋고, 백성들이 전쟁을 두려워하여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동요하므로 장수왕의 북수남진책 (北守南進策)이 원래 잘못된 것이다, 오늘 부터라도 이 정책을 버리고 남쪽은 방어만 하고 정병을 뽑아 수를 치면 비록 많은 군사가 아니라도 성공하기 쉬우며, 성공한 뒤에 백성을 위무하고 인재를 채용하면 전 지나를 통일하기가 용이하다고 하였다. 앞의 것은 왕의 아우 건무(建武)의 일파이니 많은 호족(豪 族)들이 이에 속해 있었고, 뒤의 것은 을지문덕의 일파이니 일부 무장 (武將)들이 이에 속해 있었다. 두 사람이 다 수에 대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나라 사람들의 신망이 다 같이 높았으므로 따라서 두파의 세력도 거의 비슷하였다. 영양왕(영陽王)은 을지문덕의 주장에 찬동하였으나 고구려는 호족 공화(共和)의 나라였으므로 왕이 또한 건무파의 의견을 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양제가 곡사정의 인도를 조건으로 화의를 제출하자, 나라 안이 건무파에 많이 붙좋아 우세해져서 드디어 망명해온 가련한 곡사정의 인도를 허락하는 동시에 사자가 국서를 받들고 양제의 군영으로 갔는데, 어떤 장사가 이를 몹시 분개 하여 소뇌[弩弓]를 품고 사자의 수행원으로 가장하고 가만히 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양제의 가슴을 쏘아맞히고 달아났다. 비록 이로써 화의를 깨뜨리진 못하고 곡사정의 인도도 중지시키지 못하였으나 양제의 넋을 빼앗고 고구려의 사기가 왕성함을 보임에는 넉넉하였다. 그 화살을 맞고 돌아간 양제는 병도 들고 부끄럽고 노여워서 울분을 참지 못하다가,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져서 몇 해 안가 암살당하여 수는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

안정복(安鼎福) 선생이 이 전쟁을 논평하다가 영양왕이 살수 승전의 위세로 수의 양제의 아비 죽인 죄를 성토하고 을지문덕 장군을 호령하여 수를 합병하지 못했음을 한하였으나, 양제가 아비 죽인 설은 의문이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또한 수의 궁중 비사(秘史)라 고구려 사람이 듣지 못했을 것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그러나 해상잡록(海上雜錄)에는 분명히 이 전쟁 끝에 을지문덕의 일파가 북벌을 주장하였음을 기록했는데, 선생이 이를 그의 저서 동사강목(東史網目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비사(秘史)의 설을 정사(正史) 에 넣을 수 없다 함인 것 같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 · 동국통감 등은 사대주의의 기록이기 때문에 지나와의 전쟁에 대해서는 오로지 저네 의 기록만 인용하였으니 비사의 설이 도리어 정확한 재료가 아닌가하여 본서에서는 이를 채록(採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