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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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신라의 발흥(勃興)[편집]

진흥대왕(眞興大王)의 화랑(花郞) 설치[편집]

화랑은 한때 신라가 크게 일어난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한문화(漢文化) 가 발호 (跋扈)하여 사대주의파(事大主義派)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 · 풍속 · 학술을 지배하여 온 조선을 들어 지나화(支那化) 하려는 판에 이에 반항 · 배척하여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이 이 화랑이었다. 송도 (松都) 중엽 이후로는 화랑의 여맥이 아직 없어지지 아니하여 비록 직접으로 그 감화를 받는 사람은 없지마는 그래도 간접으로 화랑의 유풍 여운을 받아 가까스로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 온 것은 화랑이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를 말하려 함은 골을 빼고 그 사람의 정신을 찾음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화랑파(花郞派) 에 스스로 기록한 문헌인 선사 ( 仙史 ) · 화랑세기 ( 花郞世紀 ) · 선랑고사 ( 仙郞故事 ) 등은 다 없어져서 화랑의 사적을 알자면 오직 화랑의 문외한인 유교도(儒敎徒)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와 불교도 무극(無極 : 一然) 의 삼국유사 두 책 가운데 과화숙식(過火熟食 : 생각지 않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유익하게 됨)으로 적은 수십 줄의 기록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데 그 수십 줄의 기록이나마 정확하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 이제 삼국사에 보인 화랑 설치의 실록(實錄)을 말하려 한다. 사기 진흥대왕 본기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 37 년 봄에 비로소 원화 (源花) 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가 모여서 떼지어 놀게 해서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채용해서 쓰고자 하여 마침내 아름다운 여인 두 사람을 골랐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이라 하였다. 그 무리가 3 백여 명이 모였는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억지로 술을 권하여 몹시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이 처형되니 무리들이 불화해 져서 다 흩어져버렸다. 그 뒤에 다시 얼굴이 아름다운 남자를 골라 몸을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여 받드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道義)를 연마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노래와 음악을 즐기기도 하며, 산수 (山水)를 유람하여 아무리 멀어도 아니 가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바르고 그름을 알아서 착한 사람을 골라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래서 김대문(金大門)의 화랑세기(花郞世記)에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하였고,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나라에 현묘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교를 베푼 근원으로 신사(神史)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는데 실로 삼교( 三敎 : 유교 · 불교 · 선교 )를 포함하고 있어 인간을 접화(接化)하며 또한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고 한 것은 노사구 (魯司寇 : 孔子)의 취지요 , 무위(無爲) 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柱史 : 老子)의 종지(宗旨)요,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라고 한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 : 釋迦)의 교화(敎化)이다.'라고 하였다. 당 (唐) 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귀인(貴人)의 자제로서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몸을 단장하게 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여 섬겼다.' 고 하였다. (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學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薦之於朝 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 崔致遠鸞郞碑序曰 ' 國有玄妙之道曰 風流說敎之源 備祥神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傳紛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 ” [편집자 주 1]

글의 끝에 김대문과 최치원의 말을 인용하여 화랑을 몹시 찬미한 듯 하나 자세히 상고해 보면 크게 잘못되고 황당하다. 사다함전(斯多含傳)에 의하면 사다함이 가라 (加羅) 정벌에 참여한 것이 진흥대왕(眞興大王) 23 년이니, 37 년 이전에 이미 화랑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이제 37 년에 화랑이 비롯하였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화는 여자 교사이니 원화를 폐지한 뒤에 남자 교사를 두어 국선(國仙) 혹은 화랑이라 일컬었는데, 이제 원화를 화랑이라 함이 무슨 말인가? 대개 김부식의 때에는 화랑의 명칭도 아주 끊어지지 않고, 화랑의 문적 (文籍) 이 많이 남아 있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지은 소위 사기에는 그 설치의 연대를 모호하게 하고, 그 원류(源流) 의 구별을 가리지 못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김부식은 유교도의 영수(領袖) 로서 화랑파 윤언이(尹彦頤)를 내쫓고 화랑의 역사를 말살한 자이니 그의 마음대로 하자면 삼국사기 가운데 화랑이라는 명사(名詞)를 한 자도 남겨두지 아니하였겠지마는 다만 그는 지나를 숭배하는 사람이라 우리의 이야기가 무엇이고 지나의 서적에 나왔으면 이를 사기에서 빼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아무리 화랑을 시샘하여도 다만 지나의 대중 유사 ( 大衆遺事 ) · 신라국기 ( 新羅國記 ) 같은 글 속에 화랑이라는 말이 실려 있는 것은 사기에서도 빼지 못하였다. 그가 이 장 끝에 인용한 신라국기가 겨우 '택귀인자제 ( 擇貴人子弟 )' 이하 모두 24 자에 지나지 아니하나 도종의(陶宗儀)의 설부(說郛)에 인용한 신라국기에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음을 근심하여 --- 채용하여 쓰고자---”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그 이하의 사실과 김대문 · 최치원의 논평까지도 대개 신라국기의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와같이 신라국기에 있는 화랑 설치의 사적을 인용하고 , 본국에 전해지고 있는 것을 말살해버렸다 . 그 다음 삼국유사에 기록된 화랑의 실록 ( 實錄 ) 은 다음과 같다 . “진흥왕이 즉위하였다---크게 선선을 숭상하여 남의 집 아름다운 처녀를 골라서 원화로 만들었다. 그것은 무리를 모아 선비를 뽑고, 또 효·제 ·충·신 ( 孝悌忠信 ) 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었으니, 또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였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姣貞娘 : 俊貞娘) 두 원화를 선출하니 무리가 3,4 백 명이나 모였다. 교정랑이 남모랑을 투기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남모랑을 취하도록 마시게 하여 몰래 끌어다가 죽이고 북천(경주 북쪽에 있는 내) 물 속에 돌로 눌러 매장시켰다. 무리들이 그녀가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슬피 울며 흘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음모를 알고, 노래를 지어 거리의 아이들을 꾀어 돌아다니며 부르게 하였다. 남모랑의 무리가 듣고 그 시체를 북천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였다. 이에 대왕 ( 진흥왕 ) 은 명령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는데 몇 해 뒤에 왕이 다시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風月道 : 花郞道)를 일으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로서 덕이있는 사람을 뽑아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고치고, 처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 ( 眞興王 - - -卽位 - - - 多尙神仙 擇人家娘子美艶者 捧爲原花 要聚徒選士 敎之以孝悌忠信 亦理國之大要也 乃取南毛娘 · 교貞娘兩花 聚徒三四百人 교貞娘질적毛娘多置酒 飮毛娘 至醉 潛여去北川中 擧石埋殺之 其徒罔知去處 悲泣而散 有人知其謀者 作歌 誘街巷小童 昌於街 其徒聞之 尋得其戶於北川中 乃殺교貞娘 於是 大王下令 發原花累年 王又念欲興邦國 須先風月道 更下令 選良家男子 有德行者 改爲花郞 始奉薛原郞 爲國仙 此花郞國仙之始 ) ”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비하여 좀 자세하나 상말에 이른바 아닌 밤중의 홍두깨같이 나온 소리가 적지 아니하니 이를테면 진흥대왕이 신 선을 숭상하여 원화 · 화랑을 받들었다 하였으니 원화나 화랑이 도사(道士 )나 황관(黃冠 : 野人)의 종류란 말인가? 삼국유사의 작자는 불교도였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작자인 유교도같이 남을 배척하는 섬술을 가지지 아니하였을 것이지마는 그 기록이 모호하기는 매일반이다. 국선 · 화랑 (國仙花郞)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선배'를 이두자(吏讀字)로 선인(先人) 혹은 선인(仙人)이라 썼음은 이미 제 3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선배'를 신수두 단(壇) 앞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을 힘쓰고 수박(手搏) · 격검(擊劍) · 사예(射藝) · 기마(騎馬) · 태껸 · 깨끔질 · 씨름 등 여러 가지 기예를 익히고 사방의 산수를 탐험하며 시와 노래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한 곳에서 자고 먹고 하며, 평시에는 환난(患難)의 구제, 성 · 길 등의 수축 등을 스스로 담당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서 공익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국선(國仙)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 위에 국(國) 자를 더하여 지은 이름이고, 화랑이라 함은 고구려의 '선배'가 조백(조帛)을 입어 조의(조衣) 라 일컬은 것과 같이 신라의 '선배'는 화장을 시키므로 화랑이라 일컬은 것이니 또한 조의와 구별한 이름이다 . 원화는 마치 유럽 중고시대 예수교 무사단(武士團)의 여교사(女敎師) 처럼 남자의 정성(情性)을 조화하기 위하여 둔 여교사이니, 소재만필(昭齋만筆)에 “화랑의 설(說)에 사람이 전쟁 중에 죽으면 천당(天堂)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노인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노인이 되며, 소년으로 죽으면 죽은 뒤의 영혼도 소년이 된다고 하여 화랑들이 소년으로 전쟁에서 죽는 것을 즐겼다.”고 하였으니, 다만 국선(國仙)의 선(仙) 자로 인해 장생불사(長生不死)를 구하는 지나의 선도(仙道)로 알면 큰 잘못이다. 최치원이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교를 행한다고 한 것은 주주사(周柱史)의 종지이다. ”라고 한 것은 다만 국선의 교가 유·불·도삼교의 특징을 갖추어 가졌음을 찬탄한 말이니 국선은 투쟁에서 생활하여 무위나 불언과는 거리가 아주 천만 리나 떨어진 교이다. 앞에 말한 삼국사기의 “나라에 현묘(玄妙)한 교가 있어 풍류라고 한다. ”라고 한 것과 삼국유사의 “득오(得烏)는 이름이 풍류황권(風流黃卷)에 딸려 있었다. ”라고 한 것으로 보면 국선의 교를 '풍류(風流)' 라 이름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고, 앞에 말한 삼국유사의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한 것과 삼국사기 검군전(劍君傳)의 “나는 풍월(風月)의 뜰에서 수행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면 국선의 도를 또한 풍월이라고 하였음을 가히 알 수 있다. 풍류는 지나 문자의 유희풍류(遊戱風流)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류 곧 음악을 가리키는 것이고, 풍월도 지나 문자의 음풍영월(吟風영月)의 뜻이 아니라 우리말의 풍월 곧 시가(詩歌)를 가리키는 것이니, 대개 화랑의 도가 다른 학문과 달라 기술도 힘쓰지마는 음악과 시가에 가장 전념하여 인간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보인 진흥왕이 지은 도령가(徒領歌)와 설원랑(薛原郞) 이 지은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물론 화랑이 지은 것이거니와, 삼국유사에 이른바 “신라 사람들이 향가(鄕歌) 를 매우 숭상했다. 그러므로 왕왕 능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일이 많았다.( 羅人尙響歌者 尙矣---故往往能感動天地鬼神者 非一 ) ”라고 한 향가 또한 거의 화랑의 무리가 지은 것이다.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영)을 보면 이 시가와 음악으로 많이 연극을 행했으니, 부여 사람이나 삼한 사람이나 노래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아니했다 함은 삼국지에도 분명히 실려 있거니와, 신라가 습속(習俗)으로 교도(敎導)의 방법을 세워 시가 · 음악 · 연극 등을 행하여 인심을 고무하였기 때문에, 원래 조그만 나라로서 마침내 문화상 · 정치상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랑의 원류(源流)를 적은 선사(仙史) · 선랑고사(仙郞故事) · 화랑세기(花郞世記) 등이 다 전해지지 않았으나, 선사는 곧 신라 이전, 단군 이래 고구려 · 백제까지의 유명한 '선배'를 적은 것이니, 고구려 본기의 “평양은 선인(仙人) 왕검(王儉) 의 집. ( 平壞者 仙人 王儉之宅 ) ”이라 한 것이 곧 선사 본문의 한 구절일 것이고, 선랑고사 · 화랑세기 등은 곧 신라 이래의 선배를 적은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간혹 그것을 초록(抄錄) 한 것이 있으나 이는 모두 의로운 다툼에 공이 있는 화랑의 졸도(卒徒) 들뿐이고, 3백여 화랑, 낭도(郞徒) 의 스승들은 하나도 적지 아니하였으니 여기서도 김부식이 화랑을 말살하려는 심리가 나타나 있다.

여섯 가라(加羅)의 멸망[편집]

김수로 ( 金首露 ) 여섯 형제가 신가라 ( 지금의 金海 ) · 밈라가라 ( 지금의 高靈 ) · 안라가라 ( 지금의 咸安 ) · 구지가라 ( 지금의 固城 ) · 별뫼가라 ( 지금의 星州 ) · 고링가라 ( 지금의 咸昌 ) 에 나뉘어 왕노릇을 하였음과 밈라 · 안라 두 가라가 네 나라 동맹에 참가하여 백제를 도와 고구려를 방어했음은 이미 제4편과 제8편에서 말하였거니와 , 신라의 지증 ( 智 證 ) · 법흥 ( 法興 ) · 진흥 ( 眞興 ) 세 왕이 연이어 여섯 가라를 잠식해 들어가서 진흥왕 때에 이르러는 여섯 나라가 다 신라의 차지가 되어 지금 경상도가 완전히 통일되었다 . 이제 여섯 가라흥망의 약사 ( 略史 ) 를 말하고자 한다 .

신가라는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금관국 ( 金官國 ) 이라 한 것인데 , 시조 수로왕 ( 首露王 ) 때에는 신라보다 강성하여 신라의 파사이사금 ( 婆娑尼師今 ) 이 그 이웃의 조그만 나라인 음집벌 ( 音집伐 : 지금 경주 북쪽 ) 과 실직 ( 悉直 : 지금 三陟 ) 과의 국토 분쟁을 해결짓지 못하여 수로 왕의 중재를 청했는데 , 수로왕이 말 한 마디로 해결을 지으니 세 나라가 다 기꺼이 복종하였다 . 그 결과로 파사왕이 수로왕에게 잔치를 베풀어 사례하는데 , 신라 육부 ( 六部 ) 의 우두머리의 한 사람인 한기부장 (漢祇部長 ) 보제 ( 保齊 ) 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손을 접대하게 하였으므로 수로왕이 노하여 종 탐하리 ( 耽下里 ) 에게 명하여 보제를 죽였다 . 파사왕은 감히 수로왕과는 맞서지 못하고 다만 탐하리를 죄주려 하여 , 탐하리를 숨긴 음집벌국을 쳐 멸망시킬 뿐이었다 . 그러나 수로왕 이후에는 나라의 형세가 날로 미약해져서 밈라가라의 침노를 받다가 신라 법흥왕 19 년 , 기원후 532 년에 그 제 10 대 구해왕 (仇亥王 ) 이 국탕 ( 國帑 : 나라의 재물 ) 과 처자를 데리고 신라에 투항해버렸다 . 안라가라는 그 연대와 사실을 거의 모르게 되었으나 ,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남정 ( 南狂 ) 할 때에 신라와 함께 고구려에 붙어 백제에 대항하고 , 백제 문주왕 ( 文周王 ) 이 구원을 빌었을 때에는 신라 네 나라 동맹에 참가하여 고구려를 방어했으니 , 비록 작은 나라였지마는 당시 정치문제에 빠지지 아니하는 나라였다 .

전사 ( 前史 ) 에 안라가라가 멸망한 연조를 기록하였으나 삼국사기 신라 본기 지증왕 ( 智證王 ) 15 년에 “소경 ( 小京 ) 을 아시촌 ( 阿尸村 ) 에 두었다 .”고 하였는데 , 안라의 이두자가 아시촌이니 , 지증왕 15 년 이전에 안라가라가 이미 멸망한 것이다 .

삼국사기 지리지 ( 地理志 ) 에는 “법흥왕이 대병으로 아시량국 ( 阿尸良國 ) 을 멸망시켰다 . ”고 했는데 , 먼저 임금이 돌아간 해를 새 임금의 원년으로 잘못 기록함은 삼국사기에 여러 군데 보이는 일이라 지증왕 15 년 지증왕이 돌아간 해는 곧 법흥왕의 원년일 것이니 , 안라가라가 법흥왕 원년에 망한 것이 아닌가 ?

제 2 장 조령과 죽령 이북의 10개 군 쟁탈 문제[편집]

---고구려 · 신라 · 백제 세 나라 사이의 100 년 전쟁과 지나 隋 · 唐(수·당) 침입의 끄나풀이 된 문제 ---

무령왕(武寧王)의 북진(北進)과 고구려의 쇠퇴[편집]

백제의 동성왕 ( 東城王 ) 이 비록 반신 ( 叛臣 ) 백가 ( 백加 ) 에게 암살당했으나 그 아들 무령왕이 또한 영특하고 용감하여 곧 백가의 난을 쳐 평정하고 , 같은 해 고구려의 방비없음을 틈타 달솔 ( 達率 ) 부여우영 ( 扶餘優永 ) 으로 하여금 정병 5 천으로 고구려의 수곡성 ( 水谷城 )---지금의 신계( 新溪 ) 를 습격하여 깨뜨리고서 그 뒤 수년 동안에 장령 ( 長嶺 )---지금 서흥 ( 瑞興 ) 의 철령 ( 鐵嶺 ) 을 차지하여 성책 ( 城柵 ) 을 쌓아서 예 (濊 ) 를 방비하니 이에 백제의 서북쪽이 지금의 대동강에까지 미쳐 근구수왕 ( 近仇首王 ) 때의 옛 모습을 회복하였다 . 기원후 505 년에 고구려 문자왕 ( 文咨王 ) 이 그 치욕을 씻으려고 대병으로 침입하여 가불성 ( 加弗城 : 지금 어디인지 미상 ) 에 이르니 , 무령왕이 정병 3 천으로 나가 싸웠다 . 고구려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음을 보고 방비를 베풀지 아니하는지라 왕이 기묘한 계교로 이를 갑자기 공격 , 크게 깨뜨려서 10 여 년 동안 고구려가 다시 남쪽으로 침범해오지 못하였다 .

왕이 그 틈을 타서 안팎의 놀고 먹는 자들을 모아 농토에서 일하게 하고 , 둑을 쌓아 논을 만들게 하여 나라의 창고가 더욱 충실해지고 , 서쪽으로 지나와 서남으로 인도 ( 印度 ) · 대식 ( 大食 ) 등의 나라와 통상 하여 문화도 상당히 발달하니 왕의 재위 24 년은 또한 백제의 황금 시대라 일컬을 만하였다 .

안장왕(安藏王)의 연애(戀愛) 전쟁과 백제의 패퇴(敗退)[편집]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 ( 文咨王 ) 의 태자이다 .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한 번은 상인 차림을 하고 개백 ( 皆伯 ) ---지금 고양 ( 高陽 ) 의 행주 ( 幸州 ) 에 가서 노는데 , 그곳 장자 ( 長者 ) 한씨 ( 韓氏 ) 의 딸 주 ( 珠 ) 가 절세 의 미인이었다 . 안장이 백제의 감시원의 눈에 띄어 한씨의 집으로 도망해 숨었다가 주를 보고 주의 아름다움에 반해 마침내 몰래 정을 통하고 , 부부의 약속을 맺고는 가만히 주에게 “난 고구려 대왕의 태자이니 , 귀국하면 많은 군사를 몰아 이곳을 차지하고 그대를 맞아 가리라 . ” 하고 달아나 돌아왔다 . 문자왕이 죽고 안장왕이 왕위를 이어 자주 장사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늘 패하고 , 왕이 친히 나서서 정벌하였으나 또한 성공하지 못하였다 . 그런데 그곳 태수가 주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주의 부모에게 청하여 결혼하려고 하였다 . 주는 하는 수 없이 “난 이미 정을 준 남자가 있는데 멀리 가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그 남자의 생사나 안 뒤에 결혼 여부를 말하겠다 .”고 하였다 . 태수가 크게 노하여 “그 남자가 누구냐 ? 어찌하여 바로 말하지 못하느냐 ? 고구려의 첩자라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냐 ? 적국의 첩자와 정을 통하였으니 너는 죽어도 죄가 남겠다 .” 하고 옥에 가두어 사형에 처하리라 위협하고 일변 온갖 달콤한 말로 꾀었다 . 주가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 “죽어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 백골이 진토되고 넋이야 있건없건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 하고 노래부르니 듣는 이가 다 눈물을 흘렸다 . 태수는 그 노래를 듣고 더욱 주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 안장왕이 주가 갇혀 있음을 몰래 탐지하여 알고 짝없이 초조하나 구할 길이 없어 여러 장수를 불러 “만일 개백현 ( 皆伯縣 ) 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과 만호후 ( 萬戶候 ) 의 상을 줄 것이다 .”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 왕에게 친누이동생이 있어 이름을 안학 ( 安鶴 ) 이라고 했는데 또한 절세의 미인이었다 . 늘 장군 을밀 (乙密 ) 에게 시집가고자 하고 을밀도 또한 안학에게 장가들고자 하였으나 왕이 을밀의 문벌이 한미하다고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 을밀은 병을 일컬어 벼슬을 버리고 집에 들어앉아 있었는데 , 이에 이르러 왕이 한 말을 듣고는 왕에게 나아가 뵙고 “천금과 만호후의 상이 다 신의 소원이 아니라 , 신의 소원은 안학과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 신이 안학을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주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과 결혼케 하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주를 구해오겠습니다 .”라고 하니 , 왕은 안학을 아끼는 마음이 마침내 한주를 사랑하는 생각을 대적하지 못하여 드디어 을밀의 청을 허락하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다 .

을밀이 수군 ( 水軍 ) 5 천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떠나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주를 살려낼 것이 니 대왕께서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쫓아오시면 수십 일 안에 한주를 만나실 겁니다 .”하고 비밀히 결사대 20 명을 뽑아 평복에 무기를 감추어가지고 앞서서 개백현으로 들여보냈다 . 태수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 생일에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오히려 한주가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 사람을 보내 꾀었다 . “오늘은 내 생일 이다 . 오늘 너를 죽이기로 정하였으나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 려줄 것이니 , 그러면 오늘이 너의 생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한주가 대답하였다 .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 내가 사는 날이면 곧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 태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기를 명하였다 . 이때 을밀의 장사들이 무객 ( 舞客 ) 으로 가장하고 잔치에 들어가 칼을 빼어 많은 손님을 살상하고 고구려의 군사10 만이 입성하였다고 외치니 성안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

이에 을밀이 군사를 몰아 성을 넘어 들어가서 감옥을 부수어 한주를 구해내고 , 부고 ( 府庫 ) 를 봉하여 안장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으니 백제가 크게 동요하였다 . 이에 안장왕이 아무런 장애 없이 백제의 여러 고을을 지나 개백현에 이르러 한주를 만나고 , 안학을 을멸에게 시집보냈다 .

이상은 해상잡록 ( 海上雜錄 ) 에 보인 것인데 , 삼국사기 본기에는 비록 안장왕이 개백현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그 지리지의 개백현 주 ( 註 ) 에는 “왕봉현 ( 王逢縣 ) 은 일명 개백현이니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만난 곳이다 . ( 王逢縣 一云皆伯 漢氏美女 迎安藏王之地 ) ”라고 하였 고 , 달을성현 ( 達乙省縣 ) 주에는“한씨 미녀가높은산에서 봉화 ( 峰火 ) 를 들어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뒤에 이름을 고봉 ( 高隆 ) 이라 하 였다 . ( 漢氏美女 於高山頭 點烽火 迎安藏王之處 故後名 高峰 ) ”고 했으니 , 한씨 ( 漢氏 ) 는 곧 해상잡록의 한씨 ( 韓氏 ) 일 것이고 한씨 미녀는 곧 한주일 것이며 달을성현은 지금의 고양 ( 高陽 ) 이니 , 곧 을밀이 개백현 을 점령하고 대왕으로 하여금 한주를 만나게 한 곳일 것이다 . 그리고 개백은 '가맛'으로 읽을 것이니 , '가'는 고구려에서 왕이나 귀족을 일컫는 명사요 , '맛'은 만나본다는 뜻이다 . 개 ( 皆 ) 는 음이 '개'이므로 그 음의 상 · 중성 ( 上中聲 ) 을 빌려 '가맛'의 '가'로 쓴 것이니 , 아래글의 '왕기현 ( 王岐縣 ) 일명 개차정 ( 皆次丁 ) '이라 한 것이 더욱 '개'가 왕의 뜻임을 증명하고 , 백 ( 伯 ) 은 뜻이 '맛'이므로 그 뜻의 소리 전부 를 빌려 '가맛'의 '맛'으로 쓴 것이다 . 그러니까 개백 ( 皆伯 ) 은 이두자 ( 更讀子 ) 로 쓴 '가맛'이요 , 왕봉 ( 王逢 ) 은 한자로 쓴 '가맛'이다 . 가맛 은 곧 한주가 안장왕을 만나본 뒤의 이름인데 , 역사가들이 그 본명을 잊고 또 이두문의 읽는 법을 몰라서 마침내 개백을 안장왕 이전의 이름으로 안 것이다 . 백제 본기 성왕 ( 聖主 ) 7 년 ( 안장왕 11 년 , 기원후 529 년 ) 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 혈성 ( 穴城 ) 을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 혈성은 혈구 ( 穴口 ) ---지금의 강화 ( 江華 ) 니 이것이 곧 을밀이 행주를 함락하는 동시에 점령한 곳으로 생각된다 . 단심가 ( 丹心歌 ) 는 정포은 ( 鄭圃隱 ) 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마는 위의 기록으로 보면 대개 옛 사람이 지은 것 , 곧 한주가 지은 것을 정포은이 불러서 이조 태종 ( 太宗 ) 의 노래에 대답한 것이며 포은의 자작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

이사부(異斯夫) · 거칠부(居柒夫) 등의 집권과 신라(新羅) · 백제(百濟) 두 나라의 동맹[편집]

고구려와 백제가 한창 혈전 ( 血戰 ) 을 하는 동안에 신라에 두 정략가가 나왔으니 , 하나는 김이사부 ( 金異斯失 ) 요 또 하나는 김거칠부 ( 金 居柒夫 ) 다 . 삼국사기 열전에 '이사부는 일명 태종 ( 苔宗 ) '이라고 하였 으나 훈몽자회 ( 訓蒙字會 ) 에 '태 ( 苔 ) '를 '잇'으로 풀이하였으니 , '이사(異斯)'는 음으로 , '태(苔)'는 뜻으로 '잇'을 쓴 것이고 , '황 ( 荒 ) '은 지금도 '거칠황'으로 읽으니 , '거칠 ( 居柒 ) '은 음으로 , '황 ( 荒 ) '은 뜻 으로 '거칠'을 쓴 것이다 . 부 ( 夫 ) 는 칠서언해 ( 七書諺解 ) 에 사대부 ( 士大夫 ) 를 '사태우'로 음해 ( 音解 ) 하였으니 , 그 음이 '우'이고 , '종 ( 宗 ) ' 은 뜻이 '마루'이다 . 그러니까 이두자 읽는 법으로 '이사부 ( 異斯夫 ) ' 나 태종 ( 苔宗 ) 은 '잇우'로 , 거칠부 ( 居柒夫 ) 와 황종 ( 荒宗 ) 은 '거칠우' 로 읽을 것이다 .

이사부는 기지 ( 機智 ) 가 대단하여 젊어서 가슬라 ( 迎瑟羅 ) 의 군주 ( 軍主 : 각 고을 군사의 장관 , 뒤의 都督 ) 가 되었는데 , 우산국 ( 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가 모반하니 모두 군사를 내어 토벌하자고 하였으나 이사부는 “우산국은 조그만 섬이지마는 습속 ( 習俗 ) 이 우둔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굴복시키려면 많은 군사를 가져야 할 것이니 계책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라고 하고는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배에 싣고 가서 우산국 부근에 배를 멈추고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죄다 밟아 죽일 것이다 . ”하니 , 우산국이 두려워 항복하였다 . 그 뒤에 '안라' '밈라' 등 가라를 정복하고 지증 ( 智證 ) · 법홍 ( 法興 ) 두 왕조를 섬겼다 . 진흥왕 ( 眞興王 ) 원년 ( 기원후 540 년 ) 에는 진흥왕이 7 살 된 어린아이로 즉위하여 모태후 ( 母太后 ) 가 섭정하고 , 이사부는 병부령 ( 兵部令 ) 이 되어 전국의 병마 ( 兵馬 ) 를 도맡고 , 모든 내정과 외교에 다 참여하였다 .

거칠부의 할아버지 내숙 ( 乃宿 ) 은 쇠뿔한 ( 신라 宰相의 일컬음 ) 이고 , 아버지 물력 ( 勿力 ) 은 아찬 ( 阿찬 ) 이었으니 , 왕족으로서 대대로 장상 ( 將相 ) 집안이었다 . 거칠부는 젊을 때 큰 뜻을 품고 고구려를 정찰하려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고구려에 들어가서 각지를 정탐하고 법사 ( 法師 ) 혜량 ( 惠亮 ) 의 강당 ( 講堂 ) 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 혜량은 눈치 빠른 중이었으므로 거칠부를 달리 보고 사미 ( 沙彌 : 새로 중이 된사람 ) 는어디서 왔느냐고물었다 . 거칠부가“저는신라사람으로서 법사의 이름을 듣고 불법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라고 하니 , 혜량은 “노승이 불민하지마는 또한 그대를 알아보오 . 고구려 국내에 어찌 그 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소 . 빨리 돌아가오 . ”하고 후일에 거칠부의 소개로 신라에 투항하기를 희망하였다 . 거칠부는 돌아와 한아찬〔大阿찬 : 大官의 이름〕이 되어 이사부와 함께 국정에 참여하여 먼저 백제와 동맹해서 고구려를 깨뜨리고 또 시기를 보아 백제를 습격하여 국토를 늘리기를 꾀하였다 .

이때 백제의 성왕 ( 聖王 ) 이 한강 ( 漢江 )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신라와 동맹하려고 하였는데 , 신라가 동맹하였던 여섯 가라 ( 加羅 ) 를 합쳐버렸으므로 성왕은 동행하는 것이 달갑지 아니하였지마는 당시에 가라가 이미 망하여 동맹할 만한 제삼국이 없으므로 사신을 신라에 보내니 , 이사부가 흔연히 이를 승낙하여 신라 · 백제의 대 고구려 공수 동맹 ( 攻守同盟 ) 이 성립되었다 .

신라의 10개 군 탈취와 신라·백제 공수동맹(攻守同盟)의 결렬[편집]

기원후 548년에 고구려의 양원왕 ( 陽原王 ) 이 예 ( 濊 ) 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한북 ( 漢北 ) 독산성 ( 獨山城 ) 을 공격하니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에 따라 장군 주진 ( 朱珍 ) 을 보내 정병 3 천으로 응원해서 고구려 군사 를 격퇴하였다 . 이때에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 ( 戀愛戰 ) 으로 인하여 모두 고구려의 차지가 되어 있었는데 , 이 한북이란 어느 곳인 가 ? 이는 대개 지금 양성 ( 陽城 ) 한래 ( 한자로 번역하면 역시 漢江 ) 의 북쪽을 가리킨 것이요 , 독산성은 지금 수원 ( 水原 ) 과 진위 ( 振威 : 平澤郡 ) 사이의 독산 ( 禿山 ) 고성 ( 古城 ) 으로 생각된다 . 양원왕이 이 보고를 받고 다시 대병을 내어 더욱 깊이 들어가서 이듬해에는 지금의 충청도 동북쪽 일대를 들어왔다 . 고구려는 도살성 ( 道薩城 )--- 지금의 청안 ( 淸安 ) 에 웅거하고 백제는 금현성 ( 金峴城 )--- 지금의 진천 ( 鎭川)에 웅거하여 한 해 남짓 혈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 신라는 백제의 동맹국이었지마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이듬해 기원후 551 년에 돌궐족 ( 突厥族 ) 이 지금의 몽고로부터 동침 ( 東侵 ) 해와서 고구려의 신성 ( 新城 ) 과 백암성 ( 白岩城 ) 을 공격하므로 , 양원왕이 군사를 나누어 장군 고흘 ( 高紇 ) 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는 동안에 백제의 달솔 ( 達率 ) 부여달기 ( 扶餘達己 ) 가 정병 1 만으로 평양을 급습하여 점령 하니 ,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 ( 長安城 ) 을 신축하고 서울을옮겼다 .

장안성은 지금의 평양이라고도 하지마는 만일 평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난 것이 되니 어떻게 말이 되는 가 ? 장안성은 대개 지금의 봉황성 ( 鳳凰城 ) 이요 , 당시의 신평양 ( 新平壞 ) 이니 안동도호부 ( 安東都護府 : 지금의 遼陽 ) 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 8백 리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 고구려 본기 평원왕 ( 平原王 ) 28 년에 장안성으로 서울을 옮겼다고 하였으니 양원왕이 한때 이곳에 천도하였다가 곧 평양으로 환도하고 , 뒤에 평원왕에 이르러 다시 장안성 , 곧 신평양으로 서울을 옮긴 것이다 .

신라가 만일 그 동맹의 의를 다하여 백제와 협력해서 고구려를 쳤더라면 , 고구려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를 것이다 . 그러나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미워하는 터였고 , 또한 백제를 위해 고구려를 토멸하면 그 결과로 백제가 강성해져서 신라로서 대적하기 어려울 것을 아는 터이므로 , 진흥왕이 가만히 백제의 뒤를 습격하여 새로 얻은 땅을 빼앗기로 작정하고 , 병부령 ( 兵部令 ) 이사부 ( 異斯夫 ) 로 하여금 지금의 충청도 동북으로 진군하게 하고 , 한아찬[大阿찬]· 거칠부 ( 居柒夫 ) 로 하여금 구진 ( 仇珍 ) · 비태 ( 比台 ) · 탐지 ( 耽知 ) · 비서 ( 非西 ) · 노부 ( 奴夫) · 서력부 ( 西力夫 ) · 비차부 ( 比次夫 ) · 미진부 ( 未珍夫 ) 등 팔로 ( 八路 ) 의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 ( 竹嶺 ) 이북으로 진군하게 하니 , 백제는 이를 동맹국의 출병 ( 出兵 ) 이라 하여 크게 환영하였다 . 그러나 나라끼리의 투쟁에 무슨 신의가 있으랴 ? 이사부가 백제와 협력 하여 도살성 ( 道薩城 ) 을 도로 빼앗고는 곧 백제의 군사를 갑자기 공격하여 금현성 ( 金峴城 ) 을 함락시키고 , 거칠부는 군시를 나누어 죽령 밖의 백제의 각 군영 ( 軍營 ) 을 쳐 깨뜨려서 백제가 점령하고 있는 죽령 밖 고현 ( 高峴 ) 이내의 10고을을 빼앗으니 , 이에 백제는 닭 쫓던 개 지 붕 쳐다보는 꼴이라 하기보다 독에 든 쥐요 , 함정에 빠진 범의 꼴이 되었다 . 그래서 10고을을빼앗겼을뿐만아니라 평양에 쳐들어갔던 수 만의 대병도 진퇴유곡 ( 進退維谷 ) 으로 패망하였다 .

위의 전황은 신라가 그 맹약을 배신한 행위를 숨기기 위해 백제의 평양 격파를 본기에서 빼버렸고 , 거칠부의 10고을 탈취를 누구와 싸운 결과임을 기록하지 않았다 . 그러나 “백제가 먼저 평양을 공격해 깨뜨렸다 .( 百濟先攻破平壞 ) ”고 한 일곱 자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이것이 거칠부전 ( 居柒夫傳 ) 에 게재되어 그 일을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 었다 .

청안 ( 淸安 ) 의 옛 이름은 도살 ( 道薩 ) 혹은 도서 ( 道西 ) 이니 다 '돌시울'로 읽을 것이고 , 진천 ( 鎭川 )의 옛 이름은 흑양 ( 黑壞 ) · 금양 ( 金壞 ) · 금현 ( 金峴 ) · 금물내 ( 金勿內 ) 혹은 만노 ( 萬弩 ) 이니 , 우리의 옛 말에 천 ( 千 ) 을 '지물' , 만 ( 萬 ) 을 '거물'이라 하였는데 , 진천은 '거물래 '이므로 흑양의 흑 ( 黑 ) 과 만노의 만 ( 萬 ) 은 '거물'의 뜻을 쓴 것이 고 , 금물 ( 今勿 ) · 금물 ( 金勿 ) 은 '거물'의 음을 쓴 것이며 , 양 ( 壞 ) · 내 ( 內 ) · 노 ( 弩 ) 는 다 '래'의 소리를 쓴 것이고 , 금양 ( 金壞 ) · 금현 ( 金峴 ) 의 '금 ( 金 ) '은 금물 ( 金勿 ) 을 줄인 것이고 , '현 ( 峴 ) '은 금물내 ( 金勿內 ) 의 산성 ( 山城 ) 을 가리킨 것이다 .

삼국사기 지리지에 지금의 경기도는 물론이요 , 충청도의 충주 ( 忠 州 ) · 괴산 ( 槐山 ) 까지도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었으므로 근세에 정다산 (丁茶山 ) · 한진서 ( 韓鎭書 ) 등 여러 선생이 다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의 땅을 한 발자욱도 밟아본 때가 없다 . ”고 하여 사기의 잘못을 공격하였으나 , 이 도살성의 점령으로 보건대 고구려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말이 어찌 잠꼬대가 아니냐 ?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한때의 점령이고 오랜 동안은 황해도까지도 늘 백제의 땅이었으니 , 충청북도 각지를 고구려의 고을로 만든 삼국사기가 잘못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 죽령 ( 竹領 ) 밖 고현 ( 高峴 ) 안쪽의10고을은 어디인가 ? 죽령은 지금의 죽령이요 , 고현은 지금의 지평 ( 砥平 : 楊平郡 ) 용문산 ( 龍門山 ) 의 명치 ( 鳴峙 ) 이고 , 10고을은 지금의 제천 ( 堤川 ) · 원주 ( 原州 ) · 횡성 ( 橫城 ) · 홍천 ( 洪川 ) · 지평 ( 砥平 : 楊平 ) · 가평 ( 加平 ) . 춘천 ( 春川 ) · 낭천 ( 狼川 : 지금의 華 川 ) 등지이니 , 뒤에 신라 9 주 ( 州 ) 의 하나인 우수주 ( 牛首州 ) 관내의 군현 ( 郡縣 ) 이 그것이다 .

백제 성왕(聖王)의 전사(戰死)와 신라의 국토 확장[편집]

신라가 10고을을 빼앗고는 고구려와 강화하고 , 어제의 동맹국 백제를 적국으로 삼아서 그 동북쪽을 침략하여 지금의 이천 ( 利川 ) · 광주 ( 廣州 ) · 한양 ( 漢陽 ) 등지를 취하여 신주 ( 新州 ) 를 두니 백제는 패하여 고립되었다 . 그러나 그 분함을 억제하지 못하여 밈라가야의 유민 ( 遺民 ) 을 꾀어 국원성 ( 國原城 ) 지금의 충주 ( 忠州 ) 를 떼어 주어 다시 왕국을 건설하게 하고 , 기원후 554 년에 밈라와 군사를 합쳐 어 진성 ( 於珍城 ) ---지금의 진산 ( 珍山 : 錦山郡 ) 을 쳐 신라 군사를 격파하여 남녀 3만 9천 명과 말 8천 필을 노획하고 나아가서 고시산 ( 古尸 山 ) ---지금의 옥천 ( 沃川 ) 을 공격하니 신라의 신주 ( 新州 ) 군주 ( 軍主 ) 김무력 ( 金武力 ) 과 삼년산군 ( 三年山郡 : 지금의 報恩郡 ) 고우도 ( 高于都 ) 가 대병으로 원조하였다 . 성왕이 정병 5 천을 뽑아 신라의 대본영 ( 大本營 ) 을 야습하려고 구천 ( 狗川 : 음은 '글래'이니 、沃川의 이름이 여기서 생겼는데 , 지금의 백마강 상류 ) 에 이르러 신라의 복병을 만나 패전하여 죽었다 . 신라의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서 백제의 좌평 ( 佑平 : 대신 ) 네 사람과 군사 2만 9천 명을 목베고 사로잡으니 백제 전국이 크게 동요 하였다 .

신라는 그 뒤 더욱 백제를 공격하여 남쪽으로 비사벌 (比斯伐) ---지금의 전주 ( 全州 ) 를 쳐 완산주 ( 完山州 ) 를 설치하고 북쪽으로 국원성( 國原城 ) 을 쳐서 제 2 의 밈라를 토멸하여 그 땅에 소경 ( 小京 ) 을 설치하였다 . 진흥왕이 이와같이 백제를 격파하여 지금의 양주 ( 楊州 ) · 충주 ( 忠州 ) · 전주 ( 全州 ) 등 곧 지금의 경기 · 충청 · 전라도 안의 요지를 얻고 , 곧 고구려를 쳐서 동북으로 지금의 함경도 등지와 지금의 만주 길림 ( 吉林 ) 동북쪽을 차지하니 이에 신라 국토의 넓기가 건국 이래 제일이었다 .

삼국사기의 진흥왕 본기는 연월 ( 年月 ) 의 뒤바뀜과 사실의 탈락이 한둘이 아니다 . 화랑을 설치한 연대가 틀림은 이미 제1장에서 말하였 거니와 , 14 년 가을 7 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빼앗아 신주 ( 新州 ) 를 설치하였다 ( 取百濟東北都 爲新州 ) 라 했고 , 겨울 10 월에는 “백제의 왕녀 에게 장가들어 소비 ( 小妃 ) 를 삼았다 . ( 娶百濟王女 爲小妃 ) ”고 하였으니 , 아무리 교전이 무상한 때이지만 어찌 넉 달 전에 전쟁을 하여 그 땅을 빼앗고 빼앗기고 하다가 넉 달 후에 결혼하여 장인 사위의 나라가 되었으랴 ? 하물며 이는 고을을 빼앗긴 뒤 3 년밖에 안 되었으니 , 3 년 전에 백제가 신라와 화호 ( 和好 ) 하다가 그렇게 속고 , 3 년 뒤에 또 딸을 주어 그 왕으로 사위를 삼았으랴 ? 진흥왕 12 년에 “왕이 순수 ( 巡狩 ) 하여 낭성 ( 娘城 : 지금 忠州의 彈琴臺 부근 ) 에 이르러 우록 ( 于勒 ) 과 그 제자 이문 ( 尼文 ) 이 음악을 잘 안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불러보았다 . ( 王巡狩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 ”고 하였으니 , 악지 ( 樂志 ) 에 우륵은 성열현 ( 省熱縣 : 지금의 淸風 ) 사람으로 , 그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에 귀순하니 , 진흥왕이 국원 ( 國原 ) 에 안치 ( 安置 ) 하였다고 하였는데 , 대개 우륵은 본래 제1밈라 , 지금의 고령 ( 高靈 ) 사람으로 , 제 2 밈라에 들어와 지금 청주 ( 淸州 ) 의 산수를 좋아하여 그곳에 머물러 살다가 제 2 밈라가 강성해지지 못 할 것을 알고 신라에 귀순하니 , 진흥왕이 제 2 밈라를 쳐 평정한 뒤에 국원 ( 國原 ) 에 안치한 것이다 . 그 뒤 순행하는 길에 우륵을 불러 거문고를 타게 하여 들어본 곳이 지금의 충주 탄금대 ( 彈琴臺 ) 요 , 국원성 지금의 충주가 신라 소유로 된 것이 진흥왕 16 년이므로 진흥왕이 우륵의 거문고를 들어본 것도 16 년 이후일 것인데 , 어찌 12 년에 낭성 ( 娘城 ) 에 순수하여 우륵의 거문고를 들었다고 하였는가 ? 한양 ( 漢陽 ) 삼각산 ( 三角山 ) 북쪽 봉우리에 진흥왕 순수비 ( 巡狩牌 ) 가 있으니 이것은 왕이 백제를 쳐서 성공한 유적이거니와 , 함흥 초방원 ( 草坊院 ) 에도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으니 이것은 왕이 고구려를 쳐서 성공한 유적인 데 , 진흥왕 본기에 이같은 큰 사건이 다 탈락되지 아니하였는가 ?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와 길림유력기 ( 吉林遊歷記 ) 에 의하면 , 길림 ( 吉林 ) 은 본래 신라의 땅이요 , 신라의 계림 ( 鷄林 ) 으로 하여 그 이름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으니 , 이것은 또한 진흥왕이 고구려를 쳐서 땅을 개척하여 지금의 길림 동북까지도 차지하였던 한 증거다 . 박연암집 ( 朴燕巖集 ) 에는 복건성 ( 福建省 ) 의 천주 ( 泉州 ) · 장주 ( 장州 ) 가 일찍이 신라의 땅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 어느 책에 의거한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인용하지 못하거니와 진흥왕이 혹 해외도 경략 ( 經略 ) 하여 그 유적을 끼친 곳이 있지 않은가 한다 .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침략과 바보 온달(溫達)의 전사(戰死)[편집]

고구려는 평양이 백제에 함락될 때 신라의 요청에 응하여 통호 ( 通好 ) 했으나 , 진흥왕이 그 동쪽 변방을 습격하여 남가슬라 ( 南迎瑟羅 ) 로 부터 길림 ( 吉林 ) 동북쪽까지 공격하여 차지하므로 , 부득이 전투를 별여 비열흘 ( 比列忽 )--- 지금의 안변 ( 安邊 ) 이북을 회복했으나 그 나머지 땅---장수왕 ( 長壽王 ) 이 점령하고 안장왕 ( 安藏王 ) 이후에 다시 점령하였던 계립령 ( 鷄立領 ) ---지금의 조령 ( 鳥嶺 ) 서쪽과 죽령 ( 竹嶺 ) 서쪽의 여러 고을은 끝내 찾지 못하고 , 당시 작전상 가장 요긴한 북한산 ( 北漢山 ) 은 신라가 차지한 뒤로 길이 이 땅을 갖자는 생각으로 장한성가 ( 長漢城歌 ) 를 지어 노래하니 , 고구려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거의 해마다 군사를 동원 신라를 침노했으 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하고 평원왕 ( 平原王 ) 의 사위 온달 ( 溫達 ) 의 전사극 ( 戰死劇 ) 이 연출되어 , 당시의 시인 문사들이 이 일을 노래하고 이야기하고 이두문으로 기록하여 사회에 전해져서 , 일반 고구려인의 적개심을 더욱 굳세게 해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신라와는 평화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 이제 전사 ( 前史 ) 에 실려 있는 온달의 이야기를 다음에 말하고자 한다 .

온달 ( 溫達 : 옛 음은 '온대 '니 百山의 뜻 ) 은 얼굴이 울툭불툭하고 성도 없는 한 거지였다 . 그러나 마음은 시원하였다 . 집에 눈먼 노모가 있어 늘 밥을 빌어다가 대접하고 그 밖에는 일이 없어 거리를 오락가락하였다 . 가난하고 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은 사회의 상정 ( 常情 ) 이라 바보도 아닌 온달을 모두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 평원왕 ( 平原王 ) 에게 따님 하나가 있어 어릴 때 울기를 잘하므로 평원왕이 사랑 끝에 실없는 말로 달래기를 “오냐 오냐 , 울지 마라 . 울기를 좋아하면 너를 귀한 집 며느리로 주지 않고 바보 온달의 계집으로 만들 것이다 .” 하고 울 때마다 을렀는데 , 따님이 장성해 시집갈 나이가 되어 상부 (上部 ) 의 고씨 ( 高氏 ) 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 따님은 “아버님께서 늘 저더러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시면 그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아니합니까 ? 저는 죽어도 바보 온달에게 가서 죽겠습니다 . ” 하고 반대하였다 . 평원왕이 크게 노하여 “너는 만승천자 ( 萬乘天子 ) 의 딸이 아니냐 ? 만승천자의 딸이 거지의 계집이 되겠단 말이냐 ? ” 그러나 따님은 듣지 않고 “필부 ( 匹夫 ) 도 거짓말이 없는데 만승천자로서 어찌 거짓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 저는 만승천자의 딸이기 때문에 만승천자의 말씀이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온달에게 시집가렵니다 .”라고 하였다 . 평원왕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너는 내 딸이 아니니 내 눈 앞에 보이지 말아라 . ” 하고 대궐에서 내쫓았다 ,

따님은 나올 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 다만 금팔찌 〔金臂環〕 수십 개를 팔에 끼워가지고 나와서 벽도 다 무너지고 네 기 둥만 남은 온달의 집을 찾아들어 갔다 . 온달은 어디 가고 노모만 있는 지라 그의 앞에 절하고 온달이 간 곳을 물었다 . 노모가 눈은 멀었지만 코가 있어 그 귀한 따님에게서 나는 향내를 맡고 귀가 있어 그 아리따운 미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있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 그 명주같이 보드랍고 고운 손을 만지며 , “어디서 오신 귀하신 처녀인지 모르지만 어찌하여 빌어먹고 헐벗은 내 아들을 찾습니까 ? 내 아들은 굶다굶다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이나 벗겨다가 먹으려고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 따님이 온달을 찾아 산 아래로 가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짊어지고 오는 사람을 만나 곧 온달인 줄 알고 그 이름을 물은 다음 자기가 찾아온 이유---혼인하고자 하는 생각을 말하였다 . 온달이 생각하기를 사람으로서야 어찌 부귀한 집의 아름다운 여자로서 빈천한 거지의 남편을 구할 리 있으랴 하고 소리 쳤다 . “너는 사람 흘리는 여우나 도깨비지 사람은 아닐 것이다 . 해가 졌으니 네가 나에게 덤비는구나 .”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달려 돌아와서 사립문을 꼭 닫아 걸고 들어갔다 . 따님이 뒤쫓아와서 그 문밖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이튿날 또다시 들어가 간청하였다 . 온달이대답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기만 하자 노모가 말하였다 . “내 집같이 가난한 집이 없고 내 아들보다 더 천한사람이 없는데 그대가한나라의 귀인으로서 어찌 가난한 집에서 남편을 섬기려고 하오 ? ” 그러나 따님은 “종잇장도 마주 들면 가볍다고 하였으니 , 마음만 맞으면 가난하고 천한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 ” 하고 , 드디어 금팔찌를 팔아 집과 밭과 논이며 종과 소며 그 밖의 모든 것을 다 사들여서 빌어먹던 온달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되 었다 .

그러나 따님은 온달을 한갓 부자로 만들려 함이 아니었으므로 온달 더러 말타고 활쏘기를 배우기 위해 말을 사오라 하였다 . 이때는 전국 시대 ( 戰國時代 ) 였으므로 고구려에서도 마정 ( 馬政 ) 을 매우 중히 여겨 대궐의 말을 국마 ( 國馬 ) 라 하여 잘 먹여 잘 기르고 화려한 굴레를 씌웠는데 , 다만 왕이 말을 타다가 다치면 말먹이와 말몰이를 죄주었으므로 , 말먹이와 말몰이들이 매양 날래고 굳센 준마가 있으면 이를 굶기고 때려서 병든 말을 만들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 따님은 비록 깊은 대궐 안의 처녀였지마는 이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 말을 살 때에 온달에게 “시장의 말을 사지 마시고 버리는 국마를 사오십시오 .”해서 사다가 따님이 몸소 먹이고 다듬어 말이 날로 살찌고 웅장해졌다 . 온달의 말타고 활쏘는 재주도 날로 진보하여 이름난 사람이 온달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

3월 3일 신수두 대제 ( 大祭 ) 의 경기회에 온달이 참예하여 말타기에 우등을 하고 사냥해 잡은 사슴도 가장 많았다 . 평원왕이 그를 불러 이 름을 물어보고 크게 놀라며 감탄하였으나 따님에 대한 분노가 아주 풀리지를 아니하여 아직 사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 그 뒤에 주 ( 周 : 于文氏) 의 무제 ( 武帝 ) 가 지나 북쪽을 통일하여 위염을 떨치고 , 고구려의 강함을 시기하여 요동 ( 遼東 ) 에 침입해와서 배산 ( 拜山 ) 의 들에서 맞아 싸우는데 , 어떤 사람이 혼자서 용감하게 나가 싸웠다 . 칼 쓰는 솜씨가 능란하고 활 쏘는 재주도 신묘하여 수백 명 적의 군사를 순식 간에 목베었다 . 알아보니 그는 곧 온달이 었다 .

왕이 탄식하며 “이는 진정 내 사위로다 .”하고 이에 온달을 불러 대 형 ( 大兄 : 五品쯤 되는 벼슬 이름 ) 에 임명하고 총애가 극진하였다 . 평원왕이 돌아가고 영양왕 ( 영陽王 ) 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 “계립령 ( 鷄立嶺 ) 과 죽령 ( 竹嶺 ) 서쪽의 땅은 본래 우리 고구려의 땅이었는 데 신라에게 빼앗겨 그 땅의 인민들이 항상 원통하게 여기고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주시면 한번에 그땅을 회복하겠습니다 .” 영양왕이 이를허락하 여 출발하게 되었는데 , 온달은 군중에서 맹세하기를 “신라가 한수 ( 漢 水 ) 이북의 우리 땅을 빼앗았으니 이번 싸움에 만일 그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나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하였다 . 온달은 아차성 ( 阿且城: 지금 서울 부근 廣律의 峨嵯山 ) 아래 이르러 신라 군사와 접전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 환장 ( 還葬 ) 하려고 하자 관 ( 棺 ) 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므로 따님이 친히 가서 울면서 “국토를 못 찾고야 임이 어찌 돌아가시랴 . 임이 아니 돌아가시니 이첩이 어찌 홀로 돌아가랴 .” 하고 역시 까무러쳐서 깨어나지 않았다 .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따님과 온달을 그 땅에 나란히 장사지냈다 .

관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리가 있을까 ? 당시에 치상 ( 治喪 ) 하는 사람들이 온달의 관을 가지고 돌아가려 하다가 온달의 애국충렬에 감동하고 , 또 전날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이서를 회복하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말을 생각하고 차마 관을 들 수가 없어 관이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 삼국사기 온달전 ( 溫達傳 ) 끝에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사생은 이미 결정났습 니다 . 돌아가십시다 . ' 하니 마침내 관이 떨어져 장사를 지냈다 . ( 公主來 撫棺曰 死生決牟 嗚乎歸牟 遂擧而 ? ) '고 하였는데 , 그러나 만일 이 같이 공주가 그렇게 말하고 울었다면 공주는 국토에 대한 열정이 없을 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사랑도 담박 ( 淡薄 ) 하다고 할 것이고 , 온달의 관이 이 말에 떨어졌다면 온달은 국토의 회복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고 상사병에 걸려 죽은 것이니 , 공주가 전날에 말을 사다가 온달을 가르친 본의가 무엇이며 온달이 편안한 부귀를 버리고 전쟁에 나선 진정 ( 眞情 ) 이 어디에 있는가 ? 조선사략 ( 朝解史略 ) 에 “국토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공이 어찌 돌아가실 수 있으랴 ? 공이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내가 어찌 흔자 돌아갈 수 있으랴 하며 통곡하고 기절하니 , 마침내 고구려 사람들이 공주를 나란히 그곳에 장사지냈다 . ( 國土未還 公能還 公旣未還 妾安能獨還 一慟而絶 高句麗人 遂竝葬公主於其地 ) ”고 하였으니 , 조선사략은 물론 시대의 차이로 보아 그 믿음성이 삼국사기만 못하지마는 이 대문의 문구는 군국시대 ( 軍國時代 ) 의 사상을 그린 것이므로 본서에서는 이를 채택한다 . 정다산 · 한진서 등의 선생이 온달의 한수 이북 운운한 말에 의하여 고구려가 한수 이남을 차지해본 때가 없음을 증명하였지마는 그렇다면 온달의 계립령 이서가 우리 땅이라고 한 말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 고구려가 장수왕 몇 해와 안장왕 이후의 몇 해에 한수 이남을 점령하였던 것은 분명하니 온달이 말한 한수 ( 漢水 ) 는 지금의 한수〔漢江〕가 아니라 지금 양성 ( 陽城 ) 의 '한래'이다 . 연전에 일본인 금서룡 ( 今西龍 ) 이 북경대학에서 조선사를 강연할 때에 온달전은 역사로 볼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 이것은 참으로 문맹 ( 文盲 ) 의 말이다 . 온달의 죽음으로 인하여 고구려 · 신라 강화의 길이 끊어지고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하여 삼국 흥망의 판국을 이루었으니 , 온달전은 삼국시대의 두드러지게 중요한 문자이다 . 그러나 김부식의 첨삭 ( 添削) 을 지나 그 가치가 얼마만큼 줄어졌음은 올바른 독사자 ( 讀史者 ) 만이 이해할 뿐이다 .

제 3 장 동서전쟁(同壻戰爭)[편집]

백제 왕손(王孫) 서동(薯童)과 신라 공주 선화(善花)의 결혼[편집]

기원후 6 세기 하반에 백제 위덕왕 ( 威德王 ) 의 증손 서동 ( 薯童 ) 은 준수한 도련님으로 삼국 중에 크게 이름이 났었고 , 신라 진평왕 ( 眞平王 ) 의 둘째 따님은 삼국 중에 가장 이름난 어여쁜 아가씨였다 . 그런데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몇을 낳은 가운데 선화가 꽃같이 어여 쁘므로 가장 사랑하여 “신라의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 선화의 아버지된 것이 나의 자랑이다 .”라고 하며 늘 선화를 위해 사윗감을 구했는데 , 서동의 이름을 듣고는 선화의 남편으로 희망하였고 , 위덕왕은 그 증손 서동을 위해 증손부 ( 曾孫歸 ) 감을 구하였는데 , 또한 선화의 이름을 듣고 서동의 아내로 희망하였다 . 가족 제도의 시대라 한 가정의 어른 , 양편의 주혼자 ( 主婚者 ) 로서 하물며 각기 한 나라의 대왕으로서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 결혼이 물론 쉬웠을 것이지마는 그 결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되지 않을 사정이 있었다 . 설혹 누가 그 결혼을 제의한다고 하더라도 진평왕이나 위덕왕이 반드시 크게 노하여 역적놈이라고 처벌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 . 그것은 무슨 사정인가 하면 신라는 여러 대 이래로 박 ( 朴 ) · 석 ( 昔 ) · 김 ( 金 ) 세 성이 서로 결혼 하여 그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여 왔으므로 , 타성의 딸은 혹 세 성의 집으로데려올수 있으나 , 세 성 집안의 딸은 타성에게로 시집가지 못하는 터이었다 . 그렇기 때문에 소지왕 ( 炤知王 ) 이 백제의 동성왕 ( 東城王 ) 에게 딸을 주었다고 하고 , 법흥왕 ( 法興王 ) 이 밈라가라의 가실왕 ( 嘉實王 ) 에게 누이동생을 주었다고 한 것은 실은 친딸 친누이동생이 아니라 , 육부 ( 六部 ) 귀골 ( 貴骨 ) 의 딸이나 누이동생을 준 것이었다 . 그러므로 김씨인 진평의 딸 선화의 장래 남편은 박씨가 아니면 석씨 , 석씨가 아니면 그 동성 김씨라야 하였으니 어찌 신라 사람도 아닌 백제의 부여씨 ( 扶餘氏 ) 서동의 아내가 될 수 있으랴 ? 이는 선화 편의 사정이거니와 , 백제는 신라처럼 결혼에 관하여 성자 ( 姓字 ) 에 엄격한 제한은 없으나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 ( 聖王 ) 을 죽인자가 누구인가 하면 , 곧 진평왕의 아버지인 진흥왕 ( 眞興王 ) 이요 , 진흥왕은 누구인가 하면 성왕의 사위였다 . 증손부 며느리 를 어디서 데려오지 못하여 아버지 죽인 원수의 5 녀를 데려오랴 ? 장인을 죽인 괴악한 사위의 손녀를 데려오랴 ? 엄중한 심리상 ( 心理上 ) 의 꾸중이 있으니 , 서동의 장래 아내가 백제의 목씨 ( 木氏 ) · 국씨 ( 國氏 ) 등 8 대성 (八大姓 ) 의 여자이거나 , 그렇지 않으면 민가의 여자는 될지언정 어찌 전대의 원수인 진흥왕의 자손이 될 수 있으랴 . 이것은 서동 편의 사정이었다 . 백제나 신라의 여러 신하들이 거의가 전쟁에서 서로 죽이던 이의 자손이라 모두 그 결혼을 반대할 것이었다 . 이것도 양편이 결혼할 수 없는 부속된 사정이었다 .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동은 커갈수록 백제 왕가에 태어나지 않고 신라의 민가 자제로나 태어났더라면 선화의 얼굴이라도 한 번 바라볼 수 있을 것을 , 선화의 눈에 내 모습이라도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마침내 백제 왕궁에서 탈출하여 신라 동경 ( 東京 ), 지금의 경주 ( 慶州) 를 찾아갔다 . 가서는 머리를 깎고 어느 대사 ( 大師 ) 의 제자가 되었다 . 이때 신라에서는 불교를 존중하여 왕이나 왕의 가족들이 궁중에 중을 청하여 재도 올리고 백고좌 ( 百高座 ) 도 베풀고 이름난 중의 설법도 듣고 하는 때였으므로 , 서동은 법연 ( 法筵 ) 을 기회하여 오래 그리던 선화와 만날 길을 얻었다 . 만나서 두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선화는 백제의 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나이라지만 아마 저 중만은 못할 것이다 하고 그날부터는 서동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중을 그리게 되었으며 , 서동 또한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할진대 죽어버리리라 .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버리라 .” 하여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맺어졌다 . 그래서 서동이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밤을 타 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통하였다 . 선화는 서동이 아니고는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를 하였지만 , 주위의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데야 어찌하랴 ? 서동과 선화는 의논한 끝에 차라리 이 일을 드러내서 세상에 널리 알려 세상에서 허락하면 결혼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 서동이 가끔 엿이며 밤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과일을 많이 사가지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 본래는 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 서동에게 주고 반쪽은 남겨 가지고 있으나 상사병에 병들어 있다네 . 서동이여 , 어서 오소서 . 어서 와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 아가씨를 살리소서 ” 하고 노래부르게 하여 그 노래가 하루 아침에 신라 서울 동경 ( 東京 ) 에 쫙 퍼져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 그리고 선화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고백하고 ,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 위덕왕에게 바른대로 고하며 ,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 하면 죽기로 반대하였다 . 진평왕과 위덕왕은 처음에는 부모나 조부모 몰래 남녀가 사통한 것은 가정의 큰 변이라 하여 당장 사형에 처할 듯 했지마는 그러나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손자를 어찌하랴 ? 진평왕은 박·석·김 세 성의 결혼 습관을 깨뜨리고 , 위덕왕은 아버지의 원수를 잊고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허락하여 두 나라 왕실이 다시 새 사돈 사이가 되었다 .

결혼 후 10년 동안의 두 나라 동맹[편집]

두 사람이 결혼한 뒤에는 두 나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말이 없으니 , 그것은 신라가 나중에 고타소랑 ( 古陀炤 娘 ) 의 참혹한 죽음 ( 다음 절 참조 ) 으로 인하여 백제를 몹시 원망하여 백제를 토벌한 다음에 그러한 기록을 모두 태워버려서 신라 왕가의 여자로서 백제에 시집간 자취를 숨겨버린 때문이다 .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이 선화공주의 아름다움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에 가서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했다고 하였다 , 여지승람 ( 輿地勝覽 ) 에는 무강왕 ( 武康王 ) 이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에 장가들어 용화산 ( 龍華山 ) 에 미륵사 ( 彌勒寺 ) 를 짓는데 진평왕이 여러 공인 ( 工人 ) 을 보내 도왔다고 하였으며 , 고려사 지리지에는 후조선 ( 後朝鮮 ) 무강왕 기준 ( 箕準 ) 의 능을 세상 사람들이 말통대왕 ( 末通大王 ) 의 능이라 한다고 하고 , 그 주 ( 註 ) 에 백제 무왕 ( 武王 ) 은 소명 ( 小名 ) 을 서동 ( 薯童 ) 이라 한다고 하였다 . 서동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받아 42 년 만에 돌아가서 시호를 무왕이라 하였으니 , 무강왕은 후조선의 기준이 아니 ' 라 무왕의 잘못이요 , 서동과 말통 ( 末通 ) 은 이두로 읽으면 서동의 서 ( 薯 ) 는 뜻을 취하고 동 ( 童 ) 은 음을 취하여 '마동'으로 읽을 것이요 말통 ( 末通 ) 두 글자가 다음으로 '마동'으로 읽을 것이므로 , 말통대왕 릉은 곧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를 합장 ( 合葬 ) 한 능이다 . 그런데 말통대왕이 왕이 된 뒤에 곧 신라와 혈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신라가 그 적국에 대해 백공을 보내서 절 짓는 것을 도왔을 리가 만무하다 . 미륙사의 건축은 대개 서동이 왕손 ( 王孫 ) 으로 있어 원당 ( 願堂 ) 으로 지은 것이 고 , 그 원당을 지을 때에는 신라 · 백제 두 사돈의 나라가 서로 환호하여 고구려에 대한 동맹국이 되었으므로 진평왕 원년 내지 24 년까지 , 곧 백제의 위덕왕 26 년 내지 45 년을 지나 혜왕 ( 惠王 ) 2 년과 법왕 ( 法王 ) 2 년을 거쳐 무왕 2 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한 번도 전쟁이 없었고 , 또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수 ( 隨 ) 에 사선을 보내서 고구려를 치기를 청하여 수의 문제 ( 文帝 ) · 양제 ( 煬帝 ) 두 대의 침입 ( 제10 편 참고 ) 을 일으키게 하였다 .

동서전쟁(同婚戰爭)---김용춘의 총애 다툼과 무왕(武王)의 항전[편집]

백제가 위덕왕 ( 威德王 ) 말년이거나 혜왕 ( 惠王 ) 법왕 ( 法王 ) 연간 , 곧 서동 ( 薯童 ) 이 왕증손 ( 王曾孫 ) 이었던 때이거나 왕손 ( 王孫 ) 또는 태자 ( 太子 ) 였을 때에는 늘 신라와 좋게 지내다가 무왕 ( 武王 ) 3 년 곧 서동이 왕이 된 뒤 3 년 ( 기원후 602 년 ) 에 신라와 전쟁이 벌어져서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 ( 阿母山城 : 지금의 雲峰 ) 을 치고 , 신라는 소타이(小陀 ) · 외석 ( 畏石 ) · 천산 ( 泉山 ) · 옹잠 ( 甕岑 : 지금의 德給山 ) 에 성책을 쌓아 백제를 막았다 . 백제는 좌평 ( 佐平 ) 해수 ( 解수 ) 로 하여금 네 성을 공격 하여 신라의 장군 건품 ( 乾品 ) · 무은 ( 武殷 ) 과 격전을 벌여 이 뒤부터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 忠州 ) · 괴산 ( 槐山 ) · 연풍 ( 延豊 ) · 보은 ( 報恩 ) 등지와 지금의 지 리산 좌우의 무주 ( 茂朱 ) · 용담 ( 龍澹 ) · 금산 ( 金山 ) · 지레 ( 知禮 ) 등지와 지금의 덕유산 동쪽 함양 ( 咸陽 ) · 운봉 ( 雲峰 ) · 안의 ( 安義 ) 등지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과 재산을 버려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차극을 연출함에 이르렀다 . 진평왕은 무왕이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니 속담에 아내에게 엎어지면 처가의 밭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였는데 , 무왕이 어찌하여 자기가 왕이 되어 정치의 세력을 잡자 도리어 그 유일한 애처의 아버지의 나라를 말뚝만큼도 여기지 아니하여 날마다 군사로써 유린하려 하였는가 ?

신라에서 왕위를 박 · 석 · 김 세 성 이 서로 전하는 것은 그 시조 박혁거세 ( 朴赫居世 ) 때부터 확정된 명문 ( 明文 ) 의 헌법이 아니라 , 처음 에는박·석 두성이 서로 혼인하여 두성의 아들이나 사위만 왕이 될 권리를 가지다가 건국 3백 년쯤 후에 미추이사금 ( 味鄒尼師今 ) 이 김씨 로서 점해왕 ( 점解王 ) 의 사위가 돼서 두 성에 끼어들어 세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었으니 , 6백 년 후에 부여씨 ( 扶餘氏) 가 세 성에 끼어 네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인가 ? 백제의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 신라는 원래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전왕의 뒤를 이었는데 , 하물며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으며 , 비록 맏딸 선덕 ( 善德 ) 이 있었지마는 그는 출가해서 여승 ( 女增 ) 이 되어 정치에 관여 하지 아니하니 , 선화가 둘째딸이지만 선화의 남편 무왕이 맏사위이므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무왕은 신라의 왕이 될 희망을 가졌었을 것이고 , 진평도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전해줄 생각을 가졌었을 것이다 .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박·석 · 김 ·부여 네 성이 서로 전해주는 판국이 되어 신라와 백제가 합쳐져서 한 나라가 되어 두 나라 인민의 뜻없는 혈전을 면했을 것이다 .

백제에는 부여씨 아래 진 ( 眞 ) · 국 ( 國 ) · 해 ( 海 ) · 연 ( 燕 ) · 목 ( 木 ) · 백 ( 백 ) · 협 (협) 의 여덟 대가 ( 大家 ) 가 있었으나 , 실상은 부여씨가 정권을 독차지하여 고구려의 벌족공화 ( 關族共和 ) 와 다르고 , 신라는 원래 박 · 석 · 김 세 성의 공화 ( 共和 ) 의 나라였으나 , 이때는 김씨 한 집안이 거의 그 왕위 상속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두 나라의 왕만 마음이 맞으면 양국의 결혼적 연합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그렇게 평순하게 진행되랴 ? 두 나라 여러 신하들은 거의 다 이를 반대했겠지마는 그 중에 가장 반대의 의견을 품은 이는 김용춘 ( 金龍春 ) 이었을 것이다 . 김용춘은 누구인가 ? 곧 진평왕의 셋째딸 문명 ( 文明 ) 의 남편이다 . 선화가 멀리 백제로 시집가서 떨어져 있으니 진평왕의 애정이 자연 이 문명에게 쏠리고 , 따라서 첫 째사위 선화의 남편 서동보다 둘째사위 용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 용춘은 만일 신라의 왕위가 서동에게 가지 않으면 곧 자기에게 돌아올 필연성을 가졌으니 , 왕위가 서동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이를 저지하였을 것이다 . 그 반대가 성공하여 진평왕은 드디어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끊고 , 그리고 출가해서 중이 된 맏딸 덕만 ( 德曼 ), 곧 선덕여대왕 ( 善德女大王 ) 을 불러다가 왕태녀 ( 王太女 ) 를 삼았다 . 그리고 왕은 용춘을 중히 써서 장래 명색은 선덕여왕이라도 실권은 용춘에게 있게 하였을 것이다 . 용춘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지 않고 덕만에게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융화시키려 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서동도 총명한 인물이라 어찌 그런 수단에 속으랴 ? 그러므로 그는 즉위 후에 용춘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 용춘이 처음에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참모가 되어 있다가 나중에는 내성사신 ( 內省私臣 ) 으로 대장군을 겸하여 직접 전선에 나타나서 악전고투가 해마다 계속되었으니 ,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 ( 同壻戰爭 ) 이다 .

동서전쟁(同壻戰爭)의 희생자[편집]

이 전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동서 사이의 신라 왕위의 쟁탈전이었으니 , 두 사람의 비열한 이기주의의 충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지마는 명의는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내걸어 피차 그 나라 안의 인심 을 고동 ( 鼓動 ) 하고 명예 와 벼슬로 결사의 군사를 동원하니 , 한편에 비애에 우는 인민이 있음에 불구하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군사가 적지 아니하였다 . 그러므로 여지승람 ( 與地勝覽 ) 합천 ( 陜川 ) 부자연 ( 父子淵 ) 의 고적에 의하면 신라가 전쟁이 지루하게 오래 가서 민가의 장정들이 전쟁에 가면 몇 번을 돌아올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했는데 , 어떤 늙은 아버지가 여러 해 만에야 아들이 전장에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마중나가 이 소 ( 沼 ) 위의 바위 위에서 부자가 서로 껴안고 울며불며 오래 그리던 자애의 정희와 생활의 곤란을 하소연하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서 이 소에 장사지냈으므로 부자연 ( 父子淵 ) 이라 이름하였다고 했고 , 삼국사기 설씨녀전 ( 薛氏女傳 ) 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 설씨녀는 집이 가난하고 일가도 없었으나 얼굴이 아름답고 행실이 정숙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했지만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진평왕 때의 그의 늙은 아버지가 먼 곳에 수자리를 가게 되어 그녀는 크게 걱정하고 이웃집 소년 가실 ( 嘉實 ) 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 가실은 자기가 대신 가기를 자청하였다 . 그녀의 아버지가이 말을 듣고크게 기뻐하며 가설과 딸을 결혼시키려고하니 그녀는 가실에게 전장에 가서 3 년이면 돌아올 것이니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하므로 가실이 허락하고 자기의 말을 그녀에게 주고 , 훗날의 신표 ( 信表 ) 로 거울을 둘로 나누어 두 사람이 한쪽씩 가졌다 . 가실이 수자리를 나가서는 3 년을 곱하여 6 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일을 민망하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 그녀는 듣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억지로 보내려고 하였다 . 그녀가 도망하려고 가실이 준 말을 타고서 막 떠나려고 하는데 이때 가실이 달려왔다 . 의복이 남루하고 형용이 여위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 가실이 깨어진 거울을 꺼내서 맞추어보고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였다 .

위의 두 가지 기록이 비록 당시 전국시대의 정황 ( 情況 ) 의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아니하나 또한 그때 인민들의 근심과 괴로움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 그러나 무사 ( 武士 ) 의 사회는 이와 전혀 다르니 아래 에 그 몇 가지를 기록하려고 한다 .

1) 귀산 ( 貴山 ) 은 파진간 ( 波珍干 ) 무은 ( 武殷 ) 의 아들이요 , 사량부 ( 沙梁部 ) 사람이었다 . 어릴 때 추항 ( 추項 ) 과 친하게 지내 함께 원광법사 ( 圓光法師 ) 에게 나아가서 가르침을 청하니 , 법사가 말하기를 “불교에 열 가지 계행 ( 戒行 ) 이 있는데 , 너희들은 남은 신하로서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려니와 화랑 ( 花郞 ) 의 다섯 가지 계행에 있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며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싸움에는 용감하게 나아가며 생물을 살상함에는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 너희는 이것을 받들어 행하여라 .” 하였다·진평대왕 ( 眞平大王 ) 건복 ( 建福 ) 19 년 ( 기원 602 년 ) 에 백제가 침노하여 아모산성 ( 阿母山城 : 지 금의 雲峰 ) 을 포위하고 공격 하므로 왕이 파진간 ( 波珍干 ) 건품 ( 乾品 ) · 무은 ( 武殷 ) 등을 보내서 방어하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따라갔다 . 그런데 백제가 거짓 패하여 천산 ( 泉山 : 지금의 咸陽 ) 으로 퇴각하여 복병으로 신라의 추격하는 군사를 격파하고 쇠갈구리로 무은 ( 武殷 ) 을 얽어매어 사로잡으려 하였다 . 귀산이 “우리 스승이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싸움에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하셨으니 어찌 감히 물러나랴 .” 하고 추장과 함께 창을 들어 죽기로 싸워서 적 수십 명을 죽이고 , 아버지 무은을 구원하였는데금창 ( 金瘡 : 갈이나 창에 찔려서 난 상처 ) 이 온몸에 가득하여 중도에서 죽었다 .

2) 찬덕 ( 讚德 ) 은 모량부 ( 牟梁部 ) 사람이었는데 용기 와 절개가 있 었다 . 진평왕 건복 ( 建福 ) 27 년에 가잠성주 ( 가岑城主 ) 가 되었는데 , 이듬해 10 월에 백제가 공격해와서 포위당한 지 백여 일이 되었다 . 왕이 상주 ( 上州 ) · 하주 ( 下州 ) · 신주 ( 新州 ) 의 군사 5 만 명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 찬덕이 분개하여 군사들에게 “세 주(州)의 군사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못하고 , 성이 위태로움을 보고도 구원하지 못하니 그것은 의 ( 義 ) 가 없는 것이다 . 의가 없이 사는 것은 의가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 .” 하고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이듬해 정월에 다시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머리로 괴목 ( 塊木 ) 을 들이받아 골이 깨져서 죽었다 . 가잠성은 지금의 괴산 ( 槐山 ) 이니 , 괴산은 찬덕이 머리로 괴목을 받은 까닭으로 하여 생긴 이름이다 .

3) 해론 ( 奚論 ) 은 찬덕 ( 讚德 ) 의 아들이다 . 진평왕 건복 35 년에 금산당주 ( 金山幢主 ) 로서 한산주 ( 漢山州 ) 도독 ( 都督 ) 변품 ( 邊品 ) 과 함께 가잠성 ( 가岑城 ) 을 회복하려고 하였고 , 싸움이 시작되자 해론은 “여기는 우리 아버지가 전사하신 곳이다 .” 하고 단병 ( 短兵 ) 으로 달려나가서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시인들이 장가 ( 長歌 ) 를 지어 그를 조상하였다 .

4) 눌최 ( 訥催 ) 는 사량부 ( 沙梁部 ) 사람이다.---진평왕 건복 41 년( 기원후 614 년 ) 에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속함 ( 速含 ) · 앵잠 ( 櫻岑 ) · 기잠 ( 岐岑 ) · 봉잠 ( 峰岑 ) · 기현 ( 旗縣 ) · 용책 ( 冗柵 ) 등 여섯 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상주 · 하주 · 귀당 ( 貴幢 ) · 법당 ( 法幢 ) · 서당 ( 誓幢 ) 의 다섯 군사에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 다섯 장군은 백제의 진영이 당당함을 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그 중의 한 장군이 말했다 . “대왕께서 오군 ( 五軍 ) 을 우리 여러 장군에게 맡기시어 나라의 존망 ( 存亡 ) 이 이 싸움에 달려 있지마는 가하면 나아가고 어려우면 물러나라는 것이 병가 ( 兵家 ) 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 이제 적의 형세가 저렇듯 강성하니 만일 나아갔다가 패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 ? ”모두들 그 말이 옳다하여 돌아가기로하였는데 너무 면목이 없어서 노진성 ( 奴珍城 ) 을 쌓고 돌아갔다 . 이에 백제는 더욱 급히 공격하여 속함·기잠·용책 세 성을 함락시켰다 . 눌최는 앵잠·봉잠·기현 세 성을 굳게 지키다가 다섯 장군이 다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분개 하여 군사들을 돌아보고 “봄이 되면 초목이 다 무성해지지마는 겨울이 되면 소나무 잣나무만이 홀로 푸르다 . 이제 구원병은 없고 세 성이 심히 위태로우니 , 이는 지사 ( 志士 ) 와 의부 ( 義夫 ) 가 절개를 세울 때이다 . 너희들은 어찌하려느냐 ? ” 사졸들이 다 눈물을 뿌리며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 성이 함락되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못 되었지만 끝까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

이상 네 전쟁은 곧 신라의 파진간이며 도독이며 다섯 장군들이 출동한 동서전쟁에 관한 충신 의사의 약사 ( 略史 ) 이다 . 백제에 있어서는 큰 전쟁이었으므로 역사에 특기한 것이고 , 이 밖에도 자질구레한 싸움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 백제사 ( 百濟史 ) 는 거의 다 없어져서 알 수 없게 되었으나 백제가 신라보다 강하고 사나운 호전국 ( 好戰國 ) 이었으니 그 희생된 충신 의사도 신라보다 많았을 것이다 . 그러나 두 동서 , 곧 두 개인의 이기주의를 성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민을 죽이는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니 이 시대의 충신 의사도 또한 가치없는 충신 의사들이라 할 것이다 .

편집자 주[편집]

  1. 삼국사기/권04/진흥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