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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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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조선 고대 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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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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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이 1, 우랄 어족 2, 지나 어족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한족(漢族) ·묘족 (苗族) ·요족 (요族) 등은 후자에 속 한 것이고, 조선족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 것이다. 조선족이 분화 (分化) 하여 조선·선비·여진·몽고·퉁구스 등 종족이 되고, 흉노족 이 이동하고 분산하여 돌궐 ( 突厥: 지금의 新疆族 ) ·흉아리 ( 匈牙利: 헝가리 ) ·토이기 ( 土耳其: 터키 ) ·분란 ( 芬蘭: 핀란드 ) 족이 되었다.

지금 몽고 ·만주 ·토이기 ·조선의 네 종족 사이에 왕왕 같은 말과 물건 이름이 있음은 몽고 ( 大元 ) 제국 시대에 피차의 관계가 많아서 받은 영향도 있으려니와, 고사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 사이에도 관명 (官名) ·지명 (地名) ·인명 (人名)의 같은 것이 많으니, 상고 (上古) 에 있어서 한 어족이었던 분명한 증명이다.

조선족의 동래(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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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발원지에 대해 1, 파미르 고원 2, 몽고 사막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아직 그 시비가 확정되지 못하였으나, 우리의 옛 말로서 참고 하면 왕성 (王姓) 을 ‘해 (解) ’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한 것이고, 왕호 (王號)를 ‘불구래(弗矩內)’라 함은 태양의 빛에서 뜻을 취한 것이며, 천국(天國)을 환국(桓國) 이라 함은 광명(光明)에서 뜻을 취한 것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不咸山)-- 지금의 백두산을 해와 달이 드나드는 곳, 곧 광명신(光明神)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朝蘇)’이라 일컬으니, 조선도 옛날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조선은 후세에 이두자(更讀字)로 조선이라 썼다.

조선족이 분포해 있었던 ‘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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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옛 말에 오리를 ‘아리’라 하고, 강을 ‘라’라고 하였다. 압록 강·대동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과 만주 길림성 ( 吉林省 ) 의 송화강 ( 松花江 ), 봉천성 ( 奉天省 ) 의 요하 ( 遼河 ), 영평부 ( 永平府 ) 의 난하 ( 난河 ) 등을 이두자로 쓴 옛 이름을 찾아보면, 아례강 ( 阿禮江 ) ·아리수 ( 阿利水 ) ·욱리하 ( 郁利河 ) ·오열하 ( 烏列河 ) ·열수 ( 列水 ) ·무열하 ( 武列河 ) ·압자하 ( 鴨子河 ) 라 하였으니, 아례 ·아리 ·욱리 ·오열 ·열 ·무열은 다 ‘아리’의 음역 ( 音譯 ) 이고, 압자 ( 옛날에 오리를 아리라 함 ) 은 ‘아리’의 의역 ( 意譯 ) 이요, 강 ·하·수는 다 ‘라’의 의역이다. 위의 여러 큰 강들은 다 조선족의 조상이 지은 이름이다.

조선 고대의 문화는 거의 이 큰 강들의 강변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삼국지에도, ‘고구려는 큰 물을 의지하여 나를 만들어 산다 ( 句麗作國依 大水而居 ). ’라고 하였다 .’나라’는 옛 말의 ’라라’이니, 라라는 본래 진도 ( 津渡 ), 곧 ‘나루’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국가를 가리키는 명사가 된 것이다.

고대 지명의 끝에 붙은 나 ( 那 ) ·라 ( 羅 ) ·노 ( 如 ) ·루 ( 婁 ) ·누 ( 누 ) · 양 ( 良 ) ·양 ( 浪 ) ·양 ( 穰) ·양 ( 壞 ) ·강 ( 岡 ) ·양 ( 陽 ) ·아 ( 牙 ) ·야 (야) 동은 다 ‘라’의 음역이고, 천 ( 川 ) ·원 ( 原 ) ·경 ( 京 ) ·국 ( 國 ) 등은 거의 ‘라’의 의역이며, 두 가지가 다 ‘라라’의 축역 ( 縮譯 ) 이니, 강이 어렵 ( 漁獵 ) 자원이 되고, 배를 교통하는 편의가 있으므로 상고 문명이 거의 강변에서 발원한 것이다.

조선의 최초를 개척한 부여(夫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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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인민이 강의 물고기와 산과 들의 짐승과 풀 ·나무의 열매 같은 여러 가지 천산물 ( 天産物 ) 로 양식을 삼다가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 그 천산물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목축업과 농업이 발생하였다. 농업은 대개 불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태워서 들을 개척한 뒤에 발생하였으므로 옛 말에 야지 ( 野地 ) 를 ‘불’이라 하였다.

불의 이용의 발견은 한갓 농업을 유발하였을 뿐 아니라 불로 굴을 태워서 맹수도 죽이고, 그 가죽을 녹여 옷과 신을 만들고, 진흙을 구워 성벽을 쌓고, 쇠를 달구어 기구를 만들고 그 밖에 생활의 일용에 모든 편의를 주어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였으므로, 근세의 일반 사학가들이 고대 불의 이용의 발견을 곧 근세의 증기 ·전기의 발견과 같은 사회 생활의 대혁명을 일으킨 대 발견이라고 한다. 동서를 물론하고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 ( 火神 ) ·프 러시아의 화교 ( 火敎 ) ·지나의 수인씨 ( 燧人氏 ) 등 전설이 있고, 우리 조선에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것이 많으니, 부루 ·품리 ( 稟離 ) 등이 다 불의 음역이요, 불이라 지은 지명도 적지 아니하여, 부여 ( 夫餘 ) ·부리 ( 夫里 ) ·불내 ( 不耐 ) ·불이 ( 不而 ) ·국내 ( 國內 ) ·불 ( 弗 ) ·벌 ( 伐 ) ·발 ( 發 )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고기 ( 古記 ), 고사기 ( 古事記 ) 등을 참고하면 조선 문화의 원시 ‘수 두’의 발원이 거의 송화강가의 합이번 ( 哈爾賓: 만주 하얼빈 ) 부근인데, 합이빈은 그 고대의 부여이다. 그러니 송화강은 조선족이 처음으로 근거한 ‘아리라’요, 합이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야지 ( 野地 )곧 ‘불’이요, 그 이외의 모든 부여 ·부리동은 연대를 따라 차례로 개척된 야지 --불이다.

제 2 장 대단군(大檀君) 왕검(王儉)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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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일반 신앙인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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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족이 각 ‘아리라’에 분포하여 각 ‘불’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 커다란 공동의 신앙이 유행하였으니 이른바 단군이다.

원시 인민은 우주의 형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 가상적으로 우주에 신이 있다 정하고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려 신을 숭배하는 동시에 각기 천연 환경을 따라 혹은 모든 물건을 다 신으로 인정하여 이를 예배하고, 혹은 모든 물건 위에 한 신이 있다 하여 이를 예배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종교요 원시 시대 각 민족 사회에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진 실재 ( 實在 ) 이다.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 ( 제 1 장 참고 ) 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백산 ( 太白山 ) 의 숲을 광명신 ( 光明神 ) 이 살고 있는 곳으로 믿었는데, 그 뒤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하매 각기 그 살고 있는 곳에 숲을 길러서 태백산의 숲을 모상 ( 模像 ) 하고, 그 숲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였으 니, 수두란 신단 ( 神檀 ) 이라는 뜻이다. 해마다 5 월과 10 월에 백성들이 수두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데, 한사람을 뽑아 제주 ( 祭主 ) 를 삼아서 수두의 중앙에 앉히고 하느님 천신 ( 天神 ) 이라 이름하여 여러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수두의 주위에 금줄을 매어 한인 ( 閔人 ) 의 출입을 금하였다.

전쟁이나 그 밖의 큰 일이 있으면 비록 5 월과 10 월의 제사 지낼 시기가 아니라도 소를 잡아 수두에 제사 지내고, 소의 굽으로 그 앞에서 길흉을 점쳤는데, 굽이 떨어지면 흉하다 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의 팔패 (八卦 ) 음획 양획 ( 陰劃陽劃 ) 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강적이 침입하면 수두 소속의 부락들이 연합하여서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첫째로 받들어 신수두’라 이름하니, ‘신’은 최고 최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밖의 각 수두는 그 아래 딸려 있었으니, 삼한사 ( 三韓史 ) 에 보이는 ‘소도 ( 蘇塗 ) ’는 ‘수두’ 의 음역이고, ‘신소도 ( 臣蘇途 ) ’는 ‘신수두’의 음역이요, 진단구변국도 ( 震檀九變局道 ) 에 보이는 ‘진단 ( 震檀 ) ’의 진은 ‘신’의 음역이고, 단 ( 檀 ) 은 수두의 의역이요, 단군은 곧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수두 는 작은 단〔小檀〕이요, 신수두는 큰 단〔大檀〕이니, 수두에 단군이 있었으니까 수두의 단군은 작은 단군〔小檀君〕이요, 신수두의 단군은 큰 단군〔大檀君〕이다.

대단군(大檀君) 왕검(王儉)이 창작한 신설(神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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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환군제석 ( 桓君帝釋 ) 이 삼위 ·태백 ( 三危 ·太白: 둘 다 산 이름 ) 을 내려다보고 널리 인간 세상에 이익을 끼칠 만 한 곳이라 하여, 아들 웅 ( 雄 ) 을 보내 천부 ( 天符 ) 와 인 ( 印 ) 세 개를 가 지고 가 다스리게 하였다. 웅은 무리 3 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 神 檀 樹 )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 ( 神市 ) 라 일컬으니, 이른바 환웅천왕 ( 桓雄天王 ) 이다. 웅은 풍백 ( 風伯 ) ·우사 ( 雨師 ) ·운사 ( 雲師 ) 를 지휘하여 곡식〔穀〕 ·명 ( 命 ) ·병 ( 病 ) ·형벌 ( 刑罰 ) ·선 ( 善 ) ·악 ( 惡 ) 등 세상의 360 여 가지 일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 범 한 마리가 있어 한 굴 속에 살면서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양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범은 그대로 하지 못하고, 곰은 삼칠일 동안 그대로 하여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할 남자가 없으므로 매양 신단을 향해 아이 가지기를 원하므로 웅이 남자의 몸으로 가화 ( 假化 ) 하여 이와 결혼해서 단군 왕겸 ( 檀君王檢 ) 을 낳았다. ”고 하였다.

그러나 ‘제석 ( 帝釋 ) ’이니 ‘웅 ( 雄 ) ’이니 ‘천부 ( 天符 ) ’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 ( 佛典 ) 에서 나온 명사이고 또 삼국사에 초기의 사회에도 여성을 매우 존중하였다고 했는데, 이제 남자는 신의 화신이고, 여자는 짐승의 화신이라 하여 너무 여성을 낮게 쳤으니,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 아니요, 불교 수입 이후에 불교도의 점철 ( 點綴 ) 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양 ( 平壞 ) 의 옛 이름이 왕검성 ( 王檢城 ) 이요, 신라의 선사 ( 仙史 ) 에도,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 ( 平壞者仙人 王檢之宅) ”이라고 했고, 위서 ( 魏書 ) 에도, “지난 2 천 년 전 단군 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 ( 阿斯達 ) 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乃往二千載 前 有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 고대에 단군 왕검을 종교의 교조로 받들어왔음은 사실이고, 왕검을 이두자의 읽는 법으로 해독하면 ‘임금’이 될 것이니, 대개 ‘임금’이라 이름한 사람이 당시에 유행한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두’에 출현하여 스스로 상제 ( 上帝 ) 의 화신이라 일컫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임금’이라 하고, 역대 서울의 명칭도 ‘임금’이라고 한 것이다.

‘선인왕검 ( 仙人王檢 ) ’이라 함은 삼국 시대에 수두 교도의 단체를 ‘선배’라 일걷고, 선배를 이두로 선인 ( 仙人 ) 혹은 ‘선인 ( 先人 ) ’이라 기록한 것이고 선사 ( 仙史 ) 는 곧 왕검의 설교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후세에 유 ·불 양교가 서로 왕성해지면서 ‘수두’의 교가 쇠퇴하고, 선사도 없어져서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지나의 고서 굴원 ( 屆原 ) 의 초사 ( 楚辭 ), 사마천 ( 司馬遷 ) 의 사기 ( 史記 ),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에 여기저기 보이는 것으로써 오히려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사기의 봉선서 ( 封禪書 ) 의 삼일신 ( 三一神 ) 이란 천일 ( 天一 ) ·지일 ( 地 一) ·태일 ( 太一 ) 인데, 그 중에 태일이 가장 존귀하고, 오제 ( 五帝: 동 서남북중 다섯 방향의 신 ) 는 태일의 보좌 ( 補佐 ) 라 하였으며, 진시황 본기 ( 奏始皇本紀 ) 의 천황·지황 ( 地皇 ) ·태황 ( 泰皇 ) 가운데 태황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으며, 초사에는 동황태일 ( 東皇太一 ) 이란 노래 이름이 있고, 한서예문지 ( 漢書藝文志 ) 에는 태일잡자 ( 太一雜子 ) 라는 책 이름이 있으니, 삼일신 ( 三一神 ) 과 삼황 ( 三皇 ) 은 곧 고기에 있는 삼신 ( 三神 ) ·삼성 ( 三聖 ) 등의 유이다.

삼일신을 다시 우리의 옛 말로 번역하면 천일 ( 天一 ) 은 ‘말한’이니 상제 ( 上帝 ) 를 의미하는 것이요, 태일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 최상이라는 말, 신한은 곧, ‘하늘 위 하늘 아래에 하나이고 둘이 없다 ( 天上 天下獨一無二 ). ’는 뜻이다. 말한·불한·신한을 이두로 마한 ( 馬韓 ) · 변한 ( 弁韓 ) ·진한 ( 辰韓 ) 이라 적은 것이고, 오제 ( 五帝 ) 는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 등 다섯 ‘가’ 곧 오방신 ( 五方神 ) 을 가리킨 것이다.

차례로 말하면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나 권위( 權位 ) 로 말하면. 신한이 신계 ( 神界 ) 와 인계 ( 人界 ) 의 대권 ( 大權 ) 을 모 두 차지하여 말한과 불한보다 고귀하므로 삼일 중에서 태일이 가장 고귀하다 하는 것이고, ‘오제 ( 곧 5 가 ) 는 곧 태일의 보좌이다. ’라 하였으니, 신가가 다섯 가의 수위 ( 首位 ) 임은 ‘신’의 어의 ( 語義 ) 로 말미암아 명백하니, 거북〔龜〕의 삼신 ·오제는 곧 왕검이 만든 전설이다.

신수두의 삼경(三京) 오부(五部)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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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군 ( 大樓君 ) 왕검이 이에 삼신 ( 크神 ) ·오제 ( 五帝 ) 의 신설 ( 神說 ) 로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그 신설에 의하여 인간 세상 일반의 제도를 정하매, 신한·말한·불한·의 세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 ( 王 ) 이요,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두 부왕 ( 副王 ) 으로 신한을 보좌한다〉

삼경을 두어 세 한이 나뉘어 머무르고 세 한의 아래에 돗가·개가·소가·말가·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 다섯 부 ( 部 ) 에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에, 다섯 부를 나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가 된다.

전시 ( 戰時 ) 에는 다섯 부의 인민으로써 중 ( 中 ) ·전 ( 前 ) ·후 ( 後 ) ·좌( 左 ) ·우 ( 右 ) 의 오군 ( 五軍 ) 을 조직하여 신가가 중군대원수 ( 中軍大元 師 ) 가 되고, 그 밖의 네 가가 전 ·후 ·좌 ·우의 네 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는 윷판이 곧 다섯 가의 출진도 ( 出陣圖 ) 이니,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그림 가운데 도 ( 刀 ) ·개 ( 介 ) ·걸 ( 乞 ) ·유 ( 兪 ) ·모 ( 毛 ) 는 곧 이두 글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도는 돗가요, 개는 개가요, 유는 옛 음에 소’니 소가요, 모는 말가요, 걸은 신가니, 걸로 신가를 기록함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에 견사 ( 犬使 ) 라는 관명 ( 官名 ) 이 있으니, 대개 견사는 신가의 별칭이므로 걸은 곧 견사의 견 ( 犬 ) 을 의역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돗〔猪〕 ·개〔犬〕 ·소〔牛〕 ·말 〔馬〕 등 가축들로 오방 ( 五方 ) 의 신의 이름을 삼는 동시에, 이로써 벼슬 이름을 삼은 수렵 시대가 지나고 농목 ( 農收 ) 시대가 된 증적 ( 證跡 ) 이다.

제 3 장 수두의 홍포(弘布)와 문화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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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夫婁)의 서행(西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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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 ( 夏禹 ) 를 도산 ( 塗山 ) 에서 만났다. ”고 하였고, 또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당요 ( 庸寶 ) 때에 9 년 동안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우 ( 禹 ) 가 8 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 ( 南嶽) ·형산 ( 衝山 ) 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 ( 玄夷 ) 의 창수사자 ( 蒼水使者 ) 라 일걷고, 우에게 말 하기를, 구산 ( 九山 ) 동남쪽의 도산 ( 逢山 ) 에 신서 ( 神書 ) 가 있으니, 석달동안 재계 ( 齋戒 ) 하고 그것을 꺼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 ( 五行通水 ) 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 ( 州愼 ) 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 ( 井田 ) 을 제정하고, 율도량형 ( 律度量衡) 의 제도를 세웠다. ”고 하였다.

현이 ( 玄夷 ) 는 당시 조선의 동 ·남 ·서 ·북 ·중 오부를 남 ( 藍 ) ·적( 未 ) ·백 ( 白 ) ·현 ( 玄: 黑 ) ·황 ( 黃 ) 으로 별칭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 ( 玄部 ) 이니 지나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 ( 玄夷 ) 라고 한 것이요, 창수 ( 蒼水 ) 는 곧 창수 ( 擔水 ) 이고, 주신 ( 州愼 ) ·숙신 ( 肅愼 ) ·직신 ( 稷愼 ) 혹은 식신 ( 息愼 ) 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의 창수사자이니, 이때 지나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 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 ( 滄海 使者 ) 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를 보고, 삼선오제교 ( 三神五帝敎 ) 의 일부분인 오행설 ( 五行說: 水火金土木 ) 을 전하고 치수 ( 治水 ) 의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 ( 禹 ) 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지나에 전포 ( 傳布 ) 하였으며, 정전과 율도량형도 또한 지나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 ’고 하였는가 ? 신성 ( 神聖 ) 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함이니, 이는 상고에 흔히 있는 일이다.

기자(箕子)의 동래(東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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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 ( 夏 ) 라 하고, ‘수두’의 교를 흉내내어 도산에서 받은 신서 ( 神書 ) 를 홍범구주 ( 洪範九疇 )라 이름하여 신봉하였는데 하가 수백 년만에 망하고 상 ( 商 ) 이 뒤를 이어 또한 수백 년만에 망하고 주 ( 周 ) 가 일어나서는 주무왕 ( 周武王 ) 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 ( 股 ) 의 왕족 기자 ( 箕子 ) 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지금 상서 ( 尙書 ) 의 홍범 ( 洪範 ) 이 곧 그것이다.

홍범편 ( 洪範篇 ) 가운데, “초일 ( 初一 ) 은 오행 ( 五行 ) 이요, 차이 ( 次 二 ) 는 경용오사 ( 敬用五事 ) 요, 차삼 ( 次三 ) 은 농용팔정 ( 農用八政 ) 이요, 차사 ( 次四 ) 는 협용오기 ( 協用五紀 ) 요, 차오 ( 次五 ) 는 건용황극 ( 建用皇極 ) 이요, 차육 ( 次六 ) 은 예용삼덕 (乂 用三德 ) 이요, 차칠 ( 次七 ) 은 명용계의 ( 明用稽疑 ) 요, 차팔 ( 次八 ) 은 염용서정 ( 念用庶徵 ) 이요, 차구 ( 次 九 ) 는 향용오복 ( 嚮用五福 ) ·위용육극 ( 威用六極 ) 이다. 첫째 오행은 일은 수 ( 水 ), 이는 화 ( 火 ), 삼은 목 ( 木 ), 사는 금 ( 金 ), 오는 토 ( 土 ) 요, 둘째 오사 ( 五事 ) 는 일은 모 ( 貌 ), 이는 언 ( 言 ), 삼은 시 ( 視 ), 사는 청( 聽 ), 오는 사 ( 思 ) 요, 셋째 팔정 ( 八政 ) 은 일은 식 ( 食 ), 이는 화 ( 貨 ), 삼은사 ( 祝 ), 사는사공 ( 司空 ), 오는사도 ( 司徒 ), 육은사구 ( 司寇 ), 칠은 빈 ( 賓 ), 팔은 사 ( 師 ) 요, 넷째 오기 ( 五紀 ) 는 일은 세 ( 歲 ), 이는 월 ( 月 ), 삼은 일 ( 日 ), 사는 성진 ( 星辰 ), 오는 역수 ( 歷數 ) 요, 다섯째 황극 ( 皇極 ) 은 황건기유극 ( 皇建其有極 ), 여섯째 삼덕 ( 三德、 ) 은 일은 정직 ( 正直 ), 이는 강극 ( 剛克 ), 삼은 유극 ( 柔克 ) 이요, 일곱째 계의 ( 稽疑 ) 는 택건립복서인 ( 擇建立卜筮人 ) 이요, 여덟째 서징 ( 庶徵 ) 은 우 ( 雨 ) ·양 ( 暘 ) ·오 ( 오 ) ·한 ( 寒 ) ·풍 ( 風 ) 이요, 아홉째 오복 ( 五福 ) 은 일은 수 ( 壽 ), 이는부 ( 富 ), 삼은강녕 ( 康寧 ), 사는 유호덕 ( 攸好德 ), 오는 고종명 ( 考終命 ) 이요, 육극 ( 六極 ) 은 일은 흉단절 (凶短折 ), 이는 질 ( 疾 ), 삼 은 우 ( 憂 ), 사는 빈 ( 貧 ), 오는 악 ( 惡 ), 육은 약 ( 弱 ) 이다. ”라고 하였는 테, 이러한 문구는 곧도산 ( 塗山 ) ·신서 ( 神書 ) 의 본문이고, 그 나머지 는 기자 ( 箕子 ) 가 연술 ( 演述 ) 한 것이다. 천내석우 홍범구주 ( 天乃錫禹 洪範 九疇) 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천 ( 天 ) 이라 하고 단군으로 부터 전수받은 것을 천이 주었다고 함이다.

이는 ‘수두’의 교의에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상 ( 商 ) 이 주 ( 周 ) 에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 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서 ( 漢書 ) 에 거북이 문자를 등에 지고 낙수 ( 洛水 ) 에서 나왔으므로 우 ( 禹 ) 가 홍범 ( 洪範 ) 을 연술하였다 했지마는, 역 ( 易 ) 의 계사 ( 擊辭 ) 에 ,“황하 ( 黃河 ) 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 ( 洛水 ) 에서 글씨가 나와,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 ( 河出畵 洛出書 聖人則之 ). ”라 하여 분명히 하도 ( 河圖 ) 낙서 ( 洛書 ) 가 다 역괘 ( 易卦)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는데, 이제 낙수 거북의 글씨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랴 ( 위 일절은 淸儒 毛奇齡의 설을 채택함 ).

오월춘추에 의거하여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음이 옳고, 또 초사 ( 楚辭 ) 에 의거하여 동황태일 ( 東皇太一 ) 곧 단군 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호북 ( 湖北 ) ·절강 ( 浙江 )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대개 하우가 형산에서는 하늘에 제사하고, 도산에서는 부루에 게서 신서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이다.

흉노(匈奴)의 휴도(休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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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두교’가 지나 각지에 퍼졌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사기, 흉노전에 의거하면, 흉노도 조선과 같이 5 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 는데, 천제를 형상한동인 ( 銅人 ) 을‘휴도 ( 休屠 ) 라 불렀으니, 곧 ‘수두’ 의 번역이요, 휴도의 제사를 맡은 사람을 휴도왕 ( 休掉王 ) 이라하여 또 한 단군이라는 뜻과 비슷하며, 휴도에 삼룡 ( 三龍 ) 을 모시니, 용은 또 한 신을 가리킨 것이다. 삼룡은 곧 삼신이니, 흉노족도 또한 ‘수두교’ 를 수입하였음이 의심없다.

고대의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상의 제사장이 곧 정치상의 원수이며,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의 속지 ( 屬地 ) 이니,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지나 ·흉노 등의 각 민족에 널리 퍼졌음으로 언하 여 정치상 강역 ( 疆域 ) 이 확대되었음을 볼 것이다.

한자(漢字)의 수입(輸入)과 이두문(吏讀文)의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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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고에 조선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쓴 것이 한자일 것은 틀림없다.

한자가 어느 때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개 땅이 지나와 이어져 있어서 두 민족은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니,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이었음이 명백하다.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에게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이 글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니, 조선이 한자를 익혔음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 것이다.

그 뒤에 한자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국서 ( 國書 ) ’ , ‘향 서 ( 獅書 ) ’ 혹은 ‘가명 ( 假名 ) ’이라 일컫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일컬었으나, 이제 통속 ( 通俗 ) 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이두문이라 하거니와,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 ( 韓聽 ) 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마는 설총 이전의 옛 비석 ( 진흥왕 巡狩碑 따위 ) 에도 가끔 이두문으로 적은 시가 ( 詩歌 ) 가 있으니, 설총 이전에 만든 것임이 의심 없다.

그러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왕 ( 王 ) 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검 ( 檢 ) 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펴라’를 낙랑 ( 樂浪 ) 이라 번역하여 낙 ( 樂 ) 은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펴’로 읽고, 랑 ( 浪 ) 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니, 적어도 이제부터 3천 년 전 --기원 전 10 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 같다.

그림〔圖繪〕이 진보하여 글자 文字가 되고 형자 ( 形字 ) 가 진보하여 음자 ( 音字 ) 가 됨은 인류 문화사의 통칙이니, 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이두문을 만듬은 페니키아 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 ( 偏 傍: 글 자의 한 부분 ) 을 따라서 알파벳을 만듬과 같은 예로 볼 만한 문자사상의 한 진보라 할 것이요, 후세의 거란문〔契丹文〕 ·여진문 ( 女直文 ) 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 문화에 도움을 준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다만 그 모자라고 유감스러운 점은 a. 자음 모음을 구별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가’는 자음 ‘ㄱ’과 모음‘ ㅏ ’의 음철 ( 音綴 ) 이요, ‘라’는 자음 ‘ ㄹ’과 모음‘ ㅏ ’의 음철인데, 이를 구별치 아니하여 한 음철이 한 글자가 되어 ‘가’를 ‘加’ 혹‘家’로 쓰고, ‘라’ 는 ‘良’ 혹은 ‘羅’로 써서 음자 ( 音字 ) 의 수효가 너무 많으며, b. 음표 ( 音標 ) 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예컨대 백 ( 白 ) 자 한 자를 ‘백활 ( 白活 ) ’ 이라 쓰고는 ‘발’로 읽고, ‘위백제 ( 爲白齊 ) ’라고 쓰고는 ‘살’로 읽으 며, ‘이 ( 矣 ) ’자 한 자를 ‘의신 ( 矣身 ) ’이라 쓰고는 ‘의’로 읽고, ‘교의 ( 敎矣) ’라 쓰고는 ‘대’로 읽어 아무런 준직 ( 準則 ) 이 없으며, c. 상음 하몽 ( 上音下蒙 ) 의 이치를 획청 ( 劃淸 ) 하지 않음이니, 예컨대 ‘달이’를 ‘월이 ( 月伊 ) ’라 쓰지 않고 ‘윌리 ( 月利 ) ’라 써서 ‘달이’로 읽으며, ‘바람이’를 ‘풍이 ( 風伊 ) ’라 쓰지 않고 ‘풍미 ( 風味 ) ’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서, 언어의 근간 ( 根幹 ) 과 지엽 ( 技葉 ) 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나 글은 물론이요,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같은 지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득할 뿐이고, 다른 시대, 다른 지방사람은 입을 벌릴 수가 없으니, 문자가 사회 진화에 도움된다 함은 저 사실과 사상을 이에 전달해주기 때문인데, 이제 이 같은 곤란이 있어 갑 시대, 갑 지방의 기록을 을 시대, 을 지방에서 해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문화 발전의 이기 (利器 ) 가 될 수 있으랴 ? 그런데 옛날 사람이 이두문을 쓴 지 1 천여 년 동안에 그 미비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

당시에는 늘 적국의 외환 ( 外愚 ) 으로 인해서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 글을 적국 ( 敵國 )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고 삼조선 (三朝鮮) 이 무너지자 여러 나라가 병립하매 한조선 안에도 서로의 적국이 많아서 한 명사나 한 동사나 한 토거리를 더욱 가지각색으로 써서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며, 신라 사람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두문의 그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정한 방식으로 되었음이 학적 재지 ( 才智 ) 가 부족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지(神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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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 前史 ) 에 단군 때에 신지 ( 神誌 ) 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 ( 史官 ) 이 됐다 하였으나, 사실은 신지는 곧 ‘신치’의 번역이요, ‘신치’는 ‘신크 치’의 약자요,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 ( 首席 ) 대신이니, ‘신치’ 곧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 ( 祭日 ) 에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 ·용사 등이 행한 일과 예언, 유 의,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예가 되었는데, 후세에 문사 ( 文士 ) 들이 그 노래를 거두어 한 책을 만들고, 그 벼슬 이름 ‘신치’로 책 이름을 한 것이니, 이른바 신지가 곧 그것이다.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서 그 가치의 어떠함을 알 수 없으나, 그 책 이름이 이두문으로 지은 것이니,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재한 것일 것이다.

고려사 김위제전 ( 金謂 傳 ) 에 신지비사 ( 神誌秘詞 ) 의 ‘여칭추극기 ( 如秤錘極器 ) ·칭간부소량 ( 秤幹扶蘇樑 ) ·추자오덕지 ( 錘者五德地 ). 극기백아강 ( 極器百牙岡 ) ·조항칠십국 ( 朝降七十國 ) ·뇌덕호선정 ( 賴德 護神精 ) ·수미균평위 ( 首尾均平位 ) ·흥방정태평 ( 興邦定太平 ) ·약폐삼 유지 ( 若廢三 諭地 ) ·왕업유쇠경 ( 王業有衰傾) ’의 1O 구를 싣고, 부소량 ( 扶蘇樑 ) 은 지금의 송도 ( 松都 ), 오덕지 ( 五德地 ) 는 지금의 한양, 백아 강 ( 百牙岡) 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도 ·한양 ·평양은 고려의 삼경 ( 三京 ) 이고, 단군의 삼경은 하나는 지금의 합이빈이니, 고사에 부소갑 ( 扶蘇岬) ·비서갑 ( 非西岬 ) 혹은 아사달 ( 阿斯達 ) 로 기록한 것이고, 하나는 지금의 해성 ( 海城 ) ·개평 ( 蓋平 ) 등지이니, 고사에 오덕지 ( 五德地 ) ·오비지 ( 五備地 ) ·안지홀 ( 安地忽 ) 혹은 안시성 ( 安市城 ) 으로 기록한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의 평양이니, 고사에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혹은 평양 ( 平穰 ) 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두문 읽는 법에 부소 ( 扶蘇 ) ·비서 ( 非西 ) ·아사 ( 阿斯 ) 는 ‘ 아스’로 읽고, 오덕 ( 五德 ) ·오비 ( 五備 ) ·안지 ( 安地 ) 안시 ( 安市 ) 는 ‘아리’로 읽고,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평양 ( 平穰) 은 ‘펴 라’로 읽는 것이니, 위의 비사 1O 구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 ( 漢學 ) 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전에 이두문 으로 기록된 시와 글을 한시와 한문으로 번역함을 시도하였으니 ( 최치원의 鄕藥雜詠 향약잡영 따위 ), 신지의 한시 번역도 그 한 예이다. 어찌하여 비사 ( 秘詞 ) 라 일컬었는가 ? 고대의 역사 종류를 성서 ( 聖書 ) 라 하여 대궐 안에 비장해두어 민간에 유행함을 허락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신지와 신지비사 따위가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는가 ?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 왕궁의 비장이 불에 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어 이조에 와서는 이를 서운관 ( 書雲觀 ) 에 두었었는데, 역시 이조 임진왜란의 불에 타 버린 것이다.

조선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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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 세기 경으로 부터 그 뒤 약 5,6 백 년 동안은 대 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이다. 수문비고 ( 修文備考 ) 에 고죽국 ( 孤竹國: 지금의 永平府 ) 은 조선종 ( 朝鮮種 ) 이라 하였는데 백이 ( 伯夷 ) ·숙제 ( 寂齊 ) 형제는 고죽국의 왕자로서 왕위 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지나의 주 ( 周: 지금의 陝西省 ) 를 우람하다가 주무왕 ( 周武王 ) 에게 격렬히 비전론 ( 非戰論 ) 을 주장하였으며, 고대 지나의 강회 ( 江淮 ) 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옮겨가 살아서 숱한 소왕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중 서언왕 ( 徐偃王 ) 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인의 ( 仁義 ) 를 행하여 지나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이상은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 ( 殖民 ) 중의 한두 호걸의 행동이거니와, 기원전 5,6 세기경에 불리지 ( 弗離支 ) 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직예 ( 直匠) ·산서 ( 山西 ) ·산동 ( 山東 ) 등지를 정복하고, 대현 ( 代縣 ) 부근에 한 나라를 세워 자기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삼아 불리지국 ( 弗離支國 ) 이라 하니, 주서 ( 周書 ) 의 ‘불령지 ( 弗令支 ) ’와 사기의 ‘이지 ( 離支 ) ’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 불리지는 또한 그가 정복한 지방을 그 성 ‘불 ( 弗 ) ’의 음으로써 지명을 지었으니, 요서 ( 遺西 ) 의 ‘비여 (肥如)나 산동 ( 山東 ) 의 ‘부역 ( 鳧繹 ) ’이나, 산서 ( 山西 ) 의 ‘비이 ( 卑耳: 管子라는 책에 보임 ) ’가 ‘불’의 번역이다.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땅이 연이어져 있었고, 발해는 하나의 큰 호수였는데, 발해의 발 ( 渤 ) 도 음이 ‘불’이고, 또한 불리지가 준 이름이니, 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검은 원숭이 〔 〕 ·담비〔짧〕 ·여우〔孤〕 ·삵〔狸〕 등의 털가죽옷과 비단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하여 상업이 크게 떨쳤었다.

조선의 쇠약(衰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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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 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 ( 孤竹 ) 을 의거해서 불리지국 ( 弗離支國 ) 과 합하여 연 ( 戀 ) 과 진 ( 晉) 을 치니, 연과 진이 제 ( 齊 ) 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 제의 환공 ( 桓公 ) 이 어진 재상 관중 ( 管仲 ) 과 이름난 장수 성부 ( 城父 ) 를 얻어 지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조 ( 曺 ) ·위 ( 衛 ) ·허 ( 許 ) ·노 ( 魯 ) 등 10 여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연을 구원하고자 태행산 ( 太行山 ) 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연을 지나서 고죽과 싸워 이겼으므로 조선은 후퇴하여 불리지의 옛 땅을 다 잃었다.

지나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 ( 保全 ) 함을 얻었으므로 공구씨 (孔丘氏: 孔子 ) 가 관중의 공을 칭찬하여, “관중이 피발 ( 披髮 ) 좌임 ( 左 ) 을 징계하였다. ”고 하였는데, 피발은 조선의 머리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고, 좌임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관자 ( 管子 ) 》에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는데, a) 지나의 문자가 부과 ( 浮誇: 부화하고 과장함 ) 가 많으며, 이러한 대외 전쟁에 더욱 심하고, b)《관자 》 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 戰國時代 ) 말엽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므로, 직접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 었었던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단군 연대(年代)의 고증(考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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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 前史 ) 에는 단군 왕검 1220 년 후에 기자 ( 箕子 ) 의 왕조선을 기재하였으나,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기원전 323 년경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으니,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기술하겠거니와, 이제 사실 ( 史實 ) 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또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 ( 九月山 ) 으로 옮기고,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지마는 이도 또한 근거없는 망령된 말이다.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 ( 抄綠 ) 한 위서( 魏書 ) 의,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한 구절로 인하여, 아사 ( 阿斯 ) 를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달 ( 達 ) 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 ( 文化縣: 지금의 信川那 ) 에 있는 산인데,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 ( 弓忽 ) 이요,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을 것이니,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마치 개홀 ( 皆忽: 音 개골 ) 에 있는 산이므로,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 ( 阿斯達山 ) 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아사달은 이두문에 l ‘ 아스대’로 읽는 옛 말 소나무를 ‘ 아스’라 하고, 산을 대라 한 것이니, 지금 합이빈 ( 哈爾濱 ) 의 완달산 ( 完達山 ) 이 곧 아사달산이다.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왕검의 상경 ( 上京 ) 이요,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의 고허 ( 古噓) 인 ‘아리티’가 중경 ( 中京 ) 이요,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 ( 南京 ) 이니,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 아스대’인데,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함이 어디에 닿은 소리인가 ?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 ( 元年 ) 무진 ( 戊辰 ) 을 당요 ( 唐堯 ) 25 년이라 하였지마는, 지나도 주소 ( 周召) 공화 ( 共和: 기원전 841 년 )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 년인지를 알수 있으랴 ?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아니한다. 고기 ( 古記 ) 에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 세 혹은 1,908세 등의 설이 있으나,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 ( 震檀) 으로, 환국 ( 桓國 ) 을 환인 ( 桓因 ) 으로 고쳐서 불전 ( 佛典 ) 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락한 불교도들이, 인도 고전의 3 만 년, 3 천 년, 5 백 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 ( 佛祖 ) 의 기록을 본받아서 만든 말이라,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조 초에 권근 ( 權互 ) 이,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해를 거듭하 여 천 년이 지났네 ( 傳世不知幾 歷年會過千 ). ”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이는 다만 불가 ( 佛家 ) 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 할 수 있으나, 또한 단군의 시말 ( 始末 ) 을 모르는 말이다.

옛날 2 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검의 원년이요, 삼국 중엽까지도 ‘신 수두’를 받들어,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 ( 半主權 ) 을 가져 그 처음에서 끝까지 2 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어찌 1 천 년만으로 헤아리랴.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 ( 敎政 ) 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