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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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삼조선(三朝鮮) 총론[편집]

삼조선(三朝鮮)이란 명칭의 유래[편집]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삼조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기자·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삼조선은 신·불 ·말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신한'은 대왕 ( 大王 ) 이요, 불·말 두 한은 부왕 ( 副王 ) 이다. 삼한이 삼경 ( 三京 ) 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 ( 辰韓 )·변한 ( 弁韓 ) 이라 기록된 것이고, 신·말 ·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 ( 眞 ) · 막 ( 莫 ) · 번 ( 番 )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 ( 音譯 ) 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 ( 用字 ) 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에는 고전 ( 古典 ) 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지나사 ( 支那史 ) 에는 왕왕 보인다. 사기 ( 史記 ),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한 것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고, 주 ( 註 ) 에 “번 ( 番 ) 은 일에 막 ( 莫 ) 으로도 쓴다 ( 畵一作莫 ). ”고 하였는데, 번자를 막자로 대신하면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 된다. 진막조선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니, `진막번조선 ( 眞莫番朝鮮 ) ' 혹은 그대로 써서 신·말·불 삼조선을 다 말하지 않고, 혹은 막자를 빼어버리고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빼어버리고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라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지나인이 외국의 인명·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예 ( 文藝 ) 의 평순 ( 平順 ) 을 위하여 축자 ( 縮字)를 쓰는 버릇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

목천자전 ( 穆天子傳 ) 의 한 ( 韓 ) 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관자 ( 管子 ) 의 `발조선 ( 發朝鮮 ) '과 대대례 ( 大戴禮 ) 의 `발식신 ( 發息愼) '은 불조선을 가리킨 것이요, 오직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 이외에는 다른 책에 보이는 것이 없다.

삼조선(三朝鮮)의 위치와 범위[편집]

한 ( 韓 ) 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삼한이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말함이고, 삼조선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어니와, 그 세 도읍의 위치와 강역 ( 疆域 ) 의 범위도 기술할 수 있을까?

삼한의 도읍은 1) 제 1 편에 말한 '아스라' ----지금의 합이빈, 2) '알티'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옛 터, 3) '펴 라' ----지금의 평양, 이 셋이다. 삼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불·말 두 한이 그 부왕 ( 副王 ) 이었으므로, 신한이 '아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불 두 한은 하나는 '펴라'에, 하나는 '알티'에 머무르고, 신한이 '알티' 혹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불·말 두 한은 또한 다른 두 서울을 나누어 지키다가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 ( 三京 ) 의 하나를 차지하고,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부분을 상고하건대, 만주원류고 ( 滿洲原流考 )에,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 ( 番汗縣 ),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 ( 弁韓 ) 의 고도 ( 古都 ) 이다.”라 했는데,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삼국유사 ( 三國遺史 ) 에, “마한(馬韓 ) 은 평양의 마읍산 ( 馬邑山 ) 으로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마읍 ( 馬邑 ) 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나,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평양 곧 '펴라'가 ( 말한 ) 의 옛 서울일 것이요, 신한은 비록 상고할 곳이 없으나 '알티'와 '펴라'의 두 서울이 불·말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삼한'이 합이빈 곧 '아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없다.

이에 삼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릴 수 있으니, 지금 봉천성 ( 奉天省 ) 의 서북과 동북 ( 開原 이북, 興京 이동 ) 과 지금 길림 ( 吉林 ) ·흑룡 ( 黑龍 ) 두 성 ( 省 ) 과 지금 연해주 ( 沿海州 ) 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이고, 요동반도 ( 遼東半島 : 開原 이남 , 興京 이서 ) 는 불조선의 소유이며,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그러나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많이 늘었다 줄었다 하였을 것이다.

기록상 삼조선(三朝鮮)의 구별 조건[편집]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 '불조선' '말조선' 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이미 놀랄 것인데, 하물며 전사 ( 前史 ) 에 아무 구별없이 쓴 '조선 ( 朝鮮 ) '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이라 하고,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이라 하고 ,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이 누구랴 ?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 본기 ( 本紀 ) 에 동·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씌었고, 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은 등 다섯 가야 ( 加耶 ) 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만일 전사 ( 前史 ) 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 ( 加耶史 ) 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 일이니,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 ( 緖論 ) 을 얻지 못할 것이니, 어찌 습견 ( 習見 ) 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삼조선의 사적 ( 事蹟 ) 을 구별하지 않으랴?

삼조선의 사적 ( 史的 ) 재료는 오직 사기 ( 史記 ), 위략 ( 魏略 ), 삼국지 ( 三國志 ) 등 지나사 ( 支那史 ) 뿐이지만 저 지나사의 저작자들이 그들의 유전적인 교오병 ( 驕傲病 ) 이 있어서,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 그 자체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와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하였고, 그나마도 왕왕 피차의 성패와 시비를 뒤바꾸어 놓았음이 그 하나요, 조선의 나라 이름·지명 등을 기록할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디의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동부여 ( 東扶餘 ) 를 불내예 ( 不耐濊) 라 하고, 오열홀 ( 烏列忽 ) 을 요동성 ( 遼東省 ) 이라 하는 따위의 필법 ( 筆法 ) 이 많음이 그 둘이요, 조선은 특수한 문화가 발달하여 왔는데, 매양 기자 ( 箕子 ) 나 진 ( 奏 ) 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허다한 거짓 증거를 가짐이 그 셋이다.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에 연 ( 燕 ) 의 멸망이 오래지 않았으니 연과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의 상고할 만한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한무제 ( 漢武帝 ) 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삼경 ( 三京 ) 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고도 ( 文化故都 ) 를 점령하였으니,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 ( 朝鮮傳 ) 은 조선의 문화적·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오직 위만 ( 衛滿 ) 과 한병 ( 漢兵 ) 의 동침 ( 東侵 ) 을 썼을 뿐이니,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의 소전 ( 小傳 ) 이요, 한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 ( 略史 ) 이다. 위략, 삼국지 등의 책은 관구검 ( 母兵檢 ) 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으로 재료를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지고 이것이 신조선이니, 말조선이니, 불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사기 조선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 ( 朝鮮 ) 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 ( 東胡 ) 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 ( 遺事 ) 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초출 ( 抄出 ) 하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마한 ( 馬韓 ) ·백제 ( 百濟 ) 의 선대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삼조선(三朝鮮) 분립의 시작[편집]

대단군 ( 大檀君 ) 의 정제 ( 定制 ) 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머물렀으나,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으로서 겸하여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말·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안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삼한이 분립한 뒤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삼한이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사기에 보인 진막벌조선은 전연시 (全燕時 ) 곧 연의 전성 시대라고 하였는데, 연의 전성 시대는 지나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이고, '발조선 ( 發朝鮮 ) '을 기록한 관자 ( 管子 ) 는 관중 ( 管仲 ) 이 지은 것이 아니고 전국시대의 위서 ( 僞書 ) 이며 '발숙신 ( 發肅愼 ) '을 기록한 대대례 ( 大戴禮 ) 는 비록 한인 ( 漢人) 대승 ( 載勝 ) 이 지은 것이지마는, 발식신 ( 發息愼) 운운 한것은 제인 ( 齊人 ) 추연 ( 鄒衍 ) 이 전한 것인데,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신·말·불 삼조선의 명사가 이같이 지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삼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 전국시대의 일이요, 지나 전국시대는 기원전 4 세기경이니 , 그러면 기원전 땅 4세기 경에 신·말·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겠다.

신조선은 성이 해씨 ( 解氏 ) 니,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불조선은 성이 기씨 ( 箕氏 ) 니 기자 ( 箕子 ) 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니 그 선대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왕부 ( 王符 ) 의 잠부론 ( 潛夫論 ) 에, “한 ( 韓 ) 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 ( 韓 ) 인데 위만 ( 衛滿 ) 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 ( 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고 하였으니, 한서 ( 韓西 ) 는 대개 말조선에 딸린 곳이므로,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인가 한다.

위략 ( 魏略 ) 에, “기자 ( 箕子 ) 의 후손 조선후 ( 朝鮮候 ) 는 주 ( 周 ) 가 쇠해지고 연 ( 燕 ) 이 자존 ( 自尊 ) 하여 왕이 되서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배후에서 쳐 주실 ( 周室 ) 을 높이려고 하다가 대부례 ( 大夫禮 ) 가 간하여 그만두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을 설득하여 연은 공격하지 않았다 ( 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大夫禮 諫之乃止 使禮西說燕以之止 不攻 ). ”고 하였는데,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 ( 大秦 ) ·로마 ( 羅馬 ) 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록한 가장 지나식의 자존적 ( 自尊的 ) 병심리 ( 病心理 ) 를 발휘한 글이니, 그 글의 전부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으나 '신한',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마한·변한으로 음역한 이외에 '신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 ( 辰王 ) ', '태왕 ( 太王 ) '이라고 하였으니 ( 다만 辰王의 辰은 음역 ) '신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 ( 朝鮮王 ) 이라 하였을 것이요, '말한',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 ( 左輔 ) ·우보 ( 右輔 ) 라 하였으니, 한자로 쓰면 조선후 ( 朝鮮候 ) 라 하였을 것이므로 기자가 이 때에 '불한'의 지위에 었었으니 조선후라 일컬음이 또한 옳다.

'불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 조선왕 개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사기 에 주 ( 周 ) 에 신정왕 ( 愼王 ) 46 년, 기원전 323 년이니 신·말·불 삼조선의 분립이 기원전 4 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 ( 謨士 ) 니,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연과 결탁하여 동·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곧 신조선의 '신한'이 그 하나요,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곧 대왕 ( 大王 ) 이라는 뜻이다.

제 2 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신조선'[편집]

신朝鮮의 서침(西侵)과 연(燕)· 조(趙)· 진(秦)의 장성(長城)[편집]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 ( 某甲 ) 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 ( 東蒙古 ) 둥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 우북평 ( 右北平 )---- 지금의 영평부 ( 永平府 ) 와 어양 ( 漁陽 )---- 지금의 북경 ( 北京 ) 부근과, 상곡 ( 上谷 )---- 지금의 산서성 ( 山西省 ) 대동부 ( 大同府 ) 등지를 다 차지하여 불리지 ( 弗離支 ) 의 옛 땅을 회복했다. 연왕 ( 燕王 ) 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 ( 歲輪 ) 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걷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를 삼게 하였는데, 모갑이 죽고 모을 ( 某乙) 이 왕이 된 뒤에는 연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 ( 秦開 ) 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진개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 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을 습격, 신 ·말 ·불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곧 전자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한 상곡·어양·우북평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 ( 遼西 )--- 지금의 노룡현 ( 盧龍縣 ) 과, 요동 ( 遼東 )--- 지금의 요양 ( 遼場 ) 부근을 함락시켜,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5 군을 두고, 2 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으니, 사기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 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 ). ”고 한 것과 흉노열전에, “연의 어진 장수 진개 ( 秦開 )가 호 ( 胡 ) 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돌아와서 동호 ( 東胡 ) 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동호는 1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 ( 造陽 ) 에서부터 양평 ( 襄平 ) 에까지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 (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 ). ”고 한 것과 위략에,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 ( 滿潘汗 ) 에까지 이르렀다 ( 燕乃遺將 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 ). ”고 한 것이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신조선이 아니므로,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록하였으나, 진개의 볼모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이때 지나 북쪽의 나라로서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는 연 한 나라뿐 아니다. 조 ( 趙 : 지금의 直匠省 서쪽 절반과 河南省 북쪽 끝과 山西省 ) 의 무령왕 ( 武靈王 ) 의 장성 ( 지금 山西의 북쪽 ) 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 ( 屬民 ) 인 담림 ( 澹林 )·누번 ( 樓煩 )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진 ( 秦 : 지금의 陝西省 ) 소왕 ( 昭王 ) 의 장성은 의거 ( 義渠 ) 를 토멸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지마는,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 ( 甘肅省 ) 에 옮겨가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농사가 발달하여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었고 병력이 강하여 진 ( 秦 ) 을 압박하였다. 진의 선태후 ( 宣太后 : 秦始星의 高祖母 ) 는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의거가 진을 토멸할까 두려워서 의거왕을 꾀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하고는 의거왕을 불러다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 죽여버려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철퇴와 진시황의 만리장성[편집]

신조선이 연·조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진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한 ( 韓 )·위 ( 魏 )·조 ( 趙 )·연 ( 燕 )·제 ( 齊 )·초 ( 楚 )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멸하니, 한인 ( 韓人 ) 장량 ( 張良 ) 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하였다. 왕 모병 ( 某丙 ) 이 장사 여씨 ( 黎氏 ) 를 소개해 주어, 진시황의 순행 ( 巡幸 ) 을 기회하여 120 근 철퇴를 가지고 양무현 ( 陽武縣 ) 박랑사 ( 博浪沙 ) 가운데서 그를 저격하다가 잘못 부거 ( 副車 ) 를 부수고 성공치 못하였다.

사기에 장량이 창해군 ( 滄海君 ) 을 보고 장사를 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이는 창해를 강릉 ( 江陵 ) 이라 하고,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 ( 郡長 ) 이라고 하며, 장사 여씨를 강릉 출생이라 하였지마는, 창해는 동부여의 딴 이름이고, 동부여 두 나라는 1) 북갈사 ( 北曷思 : 지금의 琿春 ) 2) 남갈사 ( 南曷思 : 지금의 咸興 ) 에 도읍했으니, 창해는 이 두 곳 중의 하나요, 강릉이 창해라는 설은 근거없는 말이다.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염려하여 옛날의 연·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건축하는데, 전 지나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군 몽념 ( 寒恬 ) 으로 하여금 30 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케 해서 동양 사상 유명한 이른바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기원전 210 년에 진시황이 죽고, 이세 ( 二世 ) 가 즉위하매, 이듬해에 진승 ( 陳勝 )·항적 ( 項籍 )·유방 ( 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이두산 ( 李斗山 ) 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진 ( 秦) 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만성 ( 萬成 : 모든 사람 ) 이 바야흐로 시황을 천신 ( 天神 ) 으로 우러러보는데, 난데없이 벽력 같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여섯 나라 ( 한 ·위 ·조 ·연 ·제 ·초 ) 의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날렸으니,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니랄 수 없다.”고 하였다 .

흉노 모돈(冒頓)의 동침(東侵)과 신조선의 위축[편집]

지나의 항적·유방 등의 8 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왕 모정 ( 某丁) 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 ( 上谷 )·어양 ( 漁陽 ) 등지를 회복하고,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의 항복을 받아서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 ( 冒頓 ) 의 난을 만나 국세가 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흉노는 제 1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어계 ( 語系 ) 가 같고, 조선과 같이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었는데,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였다.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의 북부를 짓밟고, 신조선에 대하여도 배반과 귀부 ( 歸附 ) 가 무상하였는데, 기원전 200 년경에 두만 ( 頭曼) 이 흉노선우 ( 匈奴單于 : 흉노 大酋長의 호 ) 가 되어, 맏아들 모돈 ( 冒頓 ) 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小子〕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죽고 모돈이 대신 선우가 되었다.

신조선왕은 그가 사납고 음흉함을 모르고 자주 물건을 요구하였는데, 모돈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주고, 신조선왕이 미인을 구하면 그는 그의 알씨 ( 閼氏 : 선우의 妻妾 ) 를 주니,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믿어 사자를 보내서 두 나라 중간의 천여리 구탈 ( 脫 ) 을 신조선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구탈이란 당시 중립 지대 빈 땅을 일컫는 말인데, 모돈이 이 청구를 받고는 크게 노하여,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하느냐.” 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 흉노의 기병을 모두 내어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의 동부 몽고 등지를 습격하여 주민을 유린하고 선비를 수없이 학살하였다. 신조선은 퇴각하여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 ( 鮮卑山 )---- 지금의 내외 흥안령 ( 興安嶺 ) 부근으로 도주하니, 이로부터 신조선이 아주 미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하였다. 엄복 ( 嚴復 : 淸末의 학자 ) 이 말하기를, “흉노를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이니,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내었으랴? 이는 한갓 사마천의 과장된 글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기, 한서 등을 참고해 보면, 흉노가 음산 ( 陰山 ) 의 험한 목을 빼앗긴 뒤엔 그 지방을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하였다 하고, 연지 ( 燕脂 ) 가 생산되는 언지산 ( 焉支山 ) 을 빼앗긴 뒤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 위로하였으니, 흉노의 토지 수요 ( 需要 ) 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아주 토지에 대한 관념이 없다 함은 편벽된 판단인가 한다.

제 3 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불朝鮮'[편집]

'불朝鮮'의 서북 변경을 빼앗김[편집]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그 잃은 땅이 얼마나 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위략에, “진개 ( 秦開 ) 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 ( 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播汗爲界 ). ”고 하여, 선유 ( 先儒 ) 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 ( 山海關 ) 으로 잡고, 진개가 빼앗은 2 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 ( 從線 ) 2 천여 리로 잡아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마는 이는 큰 착오요 억지 판단이다.

사기나 위략을 참조해보면, 진개가 빼앗은 토지가 분명히 상곡에서 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한서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군현 ( 遼東郡縣 ) 중에 '문 ( 汶 ) · 번한 ( 番汗 )'의 두 현이 있으니, 만반한은 곧 이 문번한이다. 문현 ( 汶縣 ) 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하였으나, 번한 ( 番汗) 은 지금의 개평 등지 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반만한은 지금의 해성 · 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려 함은 무엇에 의거함인가? 대개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후세 진 ( 秦) 나라 때 혹은 한 ( 漢 ) 나라 때의 명칭임을, 위략의 저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 두 나라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 것이며, 번한 ( 番汗 ) 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임으로 하여 이름한 것일 것이다.

사기의 1 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 지적한 것이요, 위략의 2 천 여 리는 신 · 불 두 조선이 잃은 땅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니, 상곡 · 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요동 ( 遙東 ) · 요서 ( 遙西 ) · 우북평 ( 右北平 )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이다. 만반한은 사군 ( 四郡 )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이니, 이 절 ( 節 ) 은 독자가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불朝鮮'의 진(秦)·한(漢)과의 관계[편집]

연왕 ( 燕王 ) 희 ( 喜 ) 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옳기니, 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지금의 헌우란 ( )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했다.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 ( 故秦空地 ) 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위략에 의거하면 이때에 불조선왕의 이름을 '부 ( 否 ) '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문헌으로 자료를 삼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에는 부 ( 否 ) 를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여왕 ( 東扶餘王 ) 이 된 부루 ( 夫婁 ) 를 부 ( 否 ) 로 와전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하지 아니한다.

기원전 200 여 년경에 기준 ( 箕準 ) 이 불조선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 · 항적 · 유방 ( 漢高祖 ) 등이 모반하여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상곡 · 어양 · 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 ( 燕) · 제 ( 齊 ) · 조 ( 趙 ) 의 지나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은지라,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 ( 空地 ) 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한고조 유방이 지나를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공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았다. 사기 조선전 에, “한 ( 漢 ) 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 ( 浿水 ) 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至浿水爲界 ). ”고 하고, 위략에, “한이 일어나자 노관 ( 盧) 으로 연왕 (燕王) 을 삼고,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 乃漢以盧爲燕王 朝鮮興燕 界於水 ). ”고 한 것 ( 先儒들이 는 浿의 잘못이라 했으므로 이를 쫓는다 ) 이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두 책의 패수 ( 浿水 ) 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함은 물론 큰 잘못이거니와, 근일 일본의 백조고길 ( 白鳥庫吉 )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하니 또한 큰 망발이다. 위의 패수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다.

위만(衛滿)의 반란과 '불朝鮮'의 남천(南遷)[편집]

기원전 194 년에 한 ( 漢 ) 의 연왕 ( 鮮王 ) 노관 ( 盧) 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그의 무리 위만 ( 衛滿 ) 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하니, 준왕 ( 準王 ) 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 ( 博士官 ) 에 임명해서 패수 서쪽 강변 ( 옛 중립 공지 )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 ( 舊民 ) 과 연 · 제 · 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위만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만들어 더욱 조선과 지나의 망명 죄인을 데려다가 결사대를 만들어, 그 병력이 강대해지자, “한나라 군사가 10도 ( 道 ) 로 침략해 들어온다.”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보고하고 준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정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하니,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 ( 宮人) 을 싣고 패잔한 군사로 바닷길을 쫓아 마한의 왕도 ( 王都 ) 월지국 ( 月支國 ) 으로 들어가서 이를 쳐 깨뜨리고 왕이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서 준왕을 토멸하였다.

왕검성은 대단군 ( 大檀君 ) 제 1 세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삼은 것인데, 대단군의 삼경 ( 三京 )---- 지금의 합이빈과 지금의 평양과 앞서 말한 불한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평 동북쪽 이 세 곳이다.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었을 것이니,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 이다.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遼東郡 ) 험독현 ( 險瀆縣 : 註에 滿의 도읍이라 했다 ) ”이 그것이요,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 ( 益山 ) 이다.” 라고 하나,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음 장에서 논술할 것이다.

제4장 삼조선(三朝鮮) 분립 후의 '말朝鮮'[편집]

'말朝鮮'의 천도(遷都)와 마한(馬韓)으로의 국호 변경[편집]

말조선의 처음 수도가 평양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는 바, 그 후( 연대는 불명 )에 국호를 말한〔馬韓〕이라 고치고, 남쪽의 월지국으로 천도하였다가, 불조선왕 기준에게 망하였다.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이전 역사서에 보인 곳이 없으나, 대개 신 · 불 양 조선이 흉노와 중국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서 북방의 전운(戰雲)이 빈번하고 급하므로, 말조선왕이 난리에 염증을 느껴서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의 칼 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사는 외국인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바라 하여, 드디어 말조선이란 칭호를 버리고, 지난날에 왕호 ( 王號 ) 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서 이두 로 마한 ( 馬韓 ) 이라 쓰고,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은 이두로 진왕 ( 辰王 ) 이라 써서 '마한국 ( 馬韓國 ) 진왕 ( 辰王 ) '이라고 일컬었다. 똑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을 따서 한 ( 韓 ) 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한 것이다.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 ( 韓氏 ) 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왕의 존재만 아는 고로,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고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본래의 성 기씨 ( 箕氏 ) 를 버리고 한씨 ( 韓氏 ) 로 고친 것이다.

삼국지에, “준 ( 準 )- - -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한 ( 韓 ) 의 땅에서 살며 한왕 ( 韓王 ) 이라 이름하였다 ( 準- - - 走入海 居韓地 號韓王 ). ”고 하였고, 위략에는,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 ( 準子及親 留在國者 冒姓韓氏). ”고 하였다 .

월지국을 전사 ( 前史 ) 에는 백제의 금마군 ( 金馬君 : 지금의 益山 ) 이라고 하였지마는, 이것은 속전 ( 俗傳 ) 의 익산군 마한 무강왕릉 ( 武康王陵 ) 이라는 것을 인하여 무강왕을 기준의 시호 ( 諡號 ) 라 하고, 부근 미륵산 ( 彌勒山 ) 의 선화부인 ( 善化夫人)의 유적을 기준의 왕후 선화 ( 善花 ) 의 유적이라 하여, 마침내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서 금마군 ( 金馬郡) 에 도읍하였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강왕릉은 딴 이름이 말통대왕릉 ( 末通大王陵) 이요, 말통은 백제 무왕 ( 武王 ) 의 어릴 때 이름 ( 무왕의 이름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薯童은 그 의역이고, 고려사 지리지의 末通은 그 음역 ) 이요, 선화는 신라 진평대왕 (眞平大王 ) 의 공주로서, 무왕의 후 ( 后 ) 가 된 아이고, 백제를 왕왕 마한이라 함은 역사에 그 예가 적지 아니하니, 이따위 고적은 한갓 익산 ( 益山 ) 이 백제의 옛 서울임을 증명함에는 부족할뿐더러, 마한 50 여국 중에 월지국과 건마국 ( 乾馬國 ) 이 있으니, 건마국이 금마군 ( 金馬郡) 곧 지금의 익산일 것이므로, 월지국 ----마한의 옛 서울은 다른 나라에서 찾음이 옳다. 그 확실한 지점은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 ( 백제 건국 13 년 ) 의 국경이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州 ) 이니, 월지국이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말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지마는, 그 5,6 백 년 후에도 오히려 왕호 ( 王號 ) 로 쓴 이가 있다. 신라의 눌지 ( 訥祗 ) · 자비 ( 慈悲 ) · 소지 ( 炤智 ) · 지증 ( 智證 ) 네 왕은 다 '마립간 ( 麻立干 ) '이라 일컬었는데, 눌지 마립간 ( 訥祗麻立干 ) 의 주에, “마립은 말 ( 말뚝 ) 이다 ( 麻立也 ) ”라 하였으니, 궐 ( 橛 ) 은 글자 뜻이 '말'이므로, 마립 ( 麻立 ) 의 '마 ( 麻 ) '는 그 전성 ( 全聲 ) 을 취하여 '마'로 읽고, '입 ( 立 ) '은 그 초성 ( 初聲 ) 을 취하 여 ' 己 '로 읽고, '간 (干) '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읽는 것임이 명백하므로 마립간은 곧 '말한'이요, 말한을 왕호로 쓴 증거이다.

낙랑(樂浪)과 남삼한(南三韓)의 대치[편집]

마한이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 ( 崔氏 ) 가 일어나서 그 부근 25 국을 통속하여 한 대국이 되었으니, 전사 ( 前史 ) 에 이른바 낙랑국 ( 樂浪國 ) 이 그것이다. 낙랑이 이미 분리되매, 마한이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70여국을 통솔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북방에서 지나와 흉노의 난리를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 · 불 두 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아지므로,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 백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 ( 自治: 고대에 모임을 계라 하였음 ) 를 세워서 이름을 '진한부 ( 辰韓部 ) '라 하고,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얼마간 떼서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또한 자치계를 세워서 '변한부 ( 弁韓部 ) '라 일컬었다.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섞여 살았으므로 변진부 ( 弁辰部 ) 라고도 일컬었다. 이것이 남삼한 ( 南三韓 ) 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 · 변 두 한을 세운 것은 또한 삼신 ( 三神 ) 에 따라 삼의 수를 채운 것이다. 대단군 왕검의 삼한이 중심 주권자가 되고 말 · 불 두 한은 좌우의 보상 ( 輔相 ) 이 되었는데, 이제 남삼한은 말한 곧 마한이 가장 큰 나라, 곧 종주국이 되고,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두 작은 나라 ( 소속국 ) 가 된 것은, 그 이주민의 계통을 좇아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거니와, 삼한이 다 왕을 '신한'이라 일컬어서 ( 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하였음 ) 신한이 셋이 되니, 대개 앞의 것 ( 신한 셋 ) 은 삼조선 분립 이후에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며, 진 · 변 두 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해 가져서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었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례 ( 創例 ) 이다.

삼한은 우리 역사상에 비상히 시비가 많은 문제로 되었지마는 종래의 학자들이 다만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의 삼한 곧 남삼한을 의거하여,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뿐이고 1) 삼한의 명칭의 유래와, 2) 삼한의 예제(禮制)의 변혁을 알지 못하여, 비록 공력은 많이 들였으나 북방 원유(原有)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삼한과의 상호 관계도 명백히 알아내지 못하였다.

낙랑(樂浪) 25개국과 남삼한(南三韓) 70여국[편집]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보인 것이 25 이니, 조선 ( 朝鮮 ) · 감한( 邯邯 ) · 패수 ( 浿水 ) · 함자 ( 含資 : 貪資라고도 함 ) · 점선 ( 黏蟬 ) · 수성 ( 遂城 ) · 증지 ( 增地 ) · 대방 ( 帶方 ) · 사망 ( 駟望 ) · 해명 ( 海冥 ) · 열구 ( 列 口 ) · 장잠 ( 長岑 ) · 둔유 ( 屯有 ) · 소명 ( 昭明 ) · 누방 ( 鏤方 ) · 제해 ( 提奚 ) · 혼미 ( 渾彌 ) · 탄렬 ( 呑列 ) · 동이 ( 東𦖮 ) · 불이 ( 不而 : 不耐라고도 함 ) · 잠대 ( 蠶臺 ) · 화려 ( 華麗 ) · 야두미 ( 邪頭味 ) · 전막 ( 前莫 ) · 부조 ( 夫租 ) : 沃沮 의 잘못인 듯 ) 등이니 , 위의 25 국은 한서지리지에 한 ( 漢 ) 낙랑군 ( 樂浪郡) 의 25 현 ( 縣 ) 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한서의 본문이 아니라,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려고 할 때에 그 신하와 백성 들의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조선이 거의 다 지나의 옛 땅임을 위증 ( 僞證 ) 하고자 전대 지나의 역사책 중에서 조선에 관계되는 것틀을 죄다 가져다가 많이 고칠 때, 조선 고대의 낙랑 25 국을 낙랑군 25 현으로 고쳐 한서지리지에 넣은 것이니, 이는 제 4 편에서 다시 자세히 논술 하기로 한다.

25 국 중 '조선'과 '폐수'는 다 평양에 있는 나라인데, 조선은 곧 말 조선의 옛 땅이므로 조선이라 일컬어서, 낙랑의 종주국이 된 것이고, 패수는 '펴라'로 읽을 것이니, 24 속국의 하나이다. 조선국과 패수국과의 관계를 비유하면 전자는 평양감영 ( 平壞藍營 ) 과 같은 것이요, 후자는 이에 딸린 각 고을과 같은 것이다.

'소명'은 지금의 춘천 ( 春川 ) 소양강 ( 昭陽江 ) 이요, 불이는 그 뒤에 동부여가 된 것으로 지금의 함흥 ( 咸興 ) 이니, 낙랑국의 전체가 지금의 평안 · 황해 두 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 함경도의 각 일부분을 차지한 것이었다. 삼한의 여러 나라로서 역사에 보인 것이 70 여국이니, 마한은 애양 ( 爰襄 ) · 모수 ( 牟水 ) · 상외 ( 桑外 ) · 소석색 ( 小石索 ) · 대석색 ( 大石索 ) · 우휴모탁 ( 優休牟탁) · 신분고 ( 臣憤沽 : 臣憤活이라고도 함 ) · 백 제 ( 伯濟 : 伯齊로도 씀 ) · 속로불사 ( 速盧不斯 ) · 일화 ( 日華 ) · 고탄자 ( 古誕者 ) · 고리 ( 古離 ) · 노람 ( 怒藍 ) · 월지 ( 月支 ) . 치리모로 ( 治離牟盧 : 咨離牟盧라고도 함 ) · 소위건 ( 素謂乾 ) · 고원 ( 古爰 ) · 막로 ( 莫盧 ) · 비리 ( 卑離 ) · 점비리 ( 占卑離 ) · 신흔 ( 臣釁 : 占釁이라고도 함 ) · 지침 ( 支侵 ) · 구로 ( 狗盧 ) · 비미 ( 卑彌 ) · 감해비리 ( 監奚卑離 ) · 고포 ( 古蒲 ) · 치리국 ( 致利鞠 ) · 염로 ( 冉路 ) · 아림 ( 兒林 ) · 사로 ( 駟盧 ) · 내비잡 ( 內卑雜 : 內卑離라고도 함 ) · 감해 ( 感奚 ) · 만로 ( 萬盧 ) · 벽비리 ( 辟卑離 ) · 구사오단 ( 臼斯烏旦 ) · 일리 ( 一離 ) · 불미 ( 不彌 : 不離라고도 함 ) · 지반 ( 支半 : 友半이라고도 함 ) · 구소 ( 狗素 ) · 첩로 ( 捷盧 : 첩盧라고도 함 ) · 모로비리 ( 牟盧卑離 ) · 신소도 ( 臣蘇塗 ) · 고랍 ( 古臘 ) · 임소반 ( 臨素半 ) · 신운신 ( 臣雲新 ) · 여래비리 ( 如來卑離 ) · 초산도비리 ( 楚山塗卑離 ) · 일난 ( 一難 ) · 구해 ( 狗奚 ) · 불운 ( 不雲 ) · 불사분야 ( 不斯분邪 ) · 원지 ( 爰池 ) · 건마 ( 乾馬 ) · 초리 ( 楚離 ) 등 54 국을 통솔하였다. 비리 ( 卑離 ) 의 여러 나라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 百濟本紀 ) 의 부여와, 백제지리지 ( 百濟地理志 ) 의 부리 ( 夫里 ) 이니, 비리는 부여 ----지금의 부여이고, '감해비리'는 고막부리 ( 古莫夫里 )---- 지금의 공주 ( 公州 ) 요, '벽비리'는 파부리 ( 波夫里 )--- 지금의 능주 ( 綾州 : 和順 ) 요, '신소도'는 신수두 곧 대신단 ( 大神檀 ) 이 있는 곳이니, 성대호 ( 省大號, 일명 蘇泰 )--- 지금의 태안 ( 泰安 ) 이요, '지침'은 지심 ( 支潯 )---- 지금의 진천 ( 鎭川 ) 등지요, '건마'는 금마군 ( 金馬郡)---백제 무왕릉 ( 武王陵 ) 이 있는 곳이다. 이 밖에도 상고할 것이 많으나 아직 두어둔다.

변한은 미리미동 ( 彌離彌凍 ) · 접도 ( 接塗 ) · 고자미동 ( 古資彌凍 ) · 고순시 ( 古淳是 ) · 반로 ( 半路 ) · 낙노 ( 樂奴 ) · 미오야마 ( 彌烏邪馬 ) · 감로 (甘路 ) · 구야 ( 狗邪 ) · 주조마 ( 走漕馬 ) · 안야 ( 安邪 ) · 독로 ( 瀆盧 ) 등 12 부 ( 部 ) 를 통털어 일컫는 말이다. 미동 ( 彌凍) 은 '믿'으로 읽으니, 수만 ( 水灣 ) 이란 뜻이고, 고자 ( 古資 ) 는 '구지'로 읽으니, 반도 ( 半島 ) 란 뜻이고, 야 ( 邪 ) 는 '라'로 읽으니, 강 ( 江 ) 이란 뜻이다. 위의 12 부는 신라 지리지와 가락국기 ( 駕洛國記 ) 에서 그 유지 ( 遺址 ) 를 찾아보면, '고자미동'은 고자군 ( 古自郡 )--- 지금의 고성만 ( 固城灣 ) 이요, '고순시'는 고령가야 ( 古寧加耶 )--- 지금의 상주 ( 尙州 ) 와 함창 ( 咸昌 ) 사이에 공갈못〔恭儉池〕이니, 공갈은 고령가야의 촉음 (促音 ) 이요, '반로'는 '벌' 로 읽으니, 별〔星〕이란 뜻으로 성산가야 ( 星山加邪 )--- 지금의 성주 ( 星州 ) 요, '미오야마'는 미오마야 ( 彌烏馬邪) 로도 써서 '밈라'로 읽으니, 임나 ( 任那 )--- 지금의 고령 ( 高靈 ) 이요, '구야'는 '가라'로 읽으니 대지 ( 大地 ) 라는 뜻으로 지금의 김해 ( 金海 ) 요, '안야'는 '아라'로 읽으나, 수명 ( 水名 ) 으로서 지금의 함안 ( 咸安 ) 이다. 위의 여섯 나라는 곧 뒤에 가라 ( 加羅 ) 여섯 나라 ( 제 4 장 제 2 절 참고 ) 가 된 것이고, 그 나머지는 자세치 아니하나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

진한은 기저 ( 己저 : 己抵로도 씀 ) · 불사 ( 不斯 ) · 근기 ( 勤耆 ) · 염해 ( 冉奚 ) · 군미 ( 軍彌 ) · 여담 ( 如湛 ) · 호로 ( 戶路 ) · 주선 ( 州鮮 ) · 마연 ( 馬延 ) · 사로 ( 斯盧 ) · 우중 ( 優中 ) · 난미리미동 ( 難彌離彌凍 ) 등 12 부를 통털어 일컬음이니, 위 12 부는 오직 사로가 신라인 줄을 알 수 있고, 그 밖의 각부의 연혁은 알 수 없으니, 이는 신라 말에 한학자들이 그 명사를 모두 전의 이두자를 버리고 한자로 의역하였기 때문이다. 그 자세한 것은 제 4 편 제 4 장에서 논술한 것이다 ( 변한 12 부와 진한 12 부는 책에 따라 서로 드나들어 같지 아니함 ).

마한이 본래 거의 압록강 동쪽 전부를 차지하였으니 따라서 낙랑 · 진한 · 변한 세 나라가 생겨 지금의 조령 ( 鳥嶺 ) 이남과 임진강 이북을 나누어 차지하였으나, 진 · 변 두 한은 이름은 나라로되 설상은 신 · 불 두 조선의 유민의 자치부 ( 自治部 ) 로써 마한에 대하여 조공과 납세를 끊지 아니하여 낙랑 같은 적국이 아니었다.

제5장 삼조선(三朝鮮) 붕괴의 원인과 결과[편집]

삼신설(三神說)의 파탄[편집]

앞의 제 2 · 3 · 4 장에서 대강 서술한 바와 같이, 신 · 말 · 불 삼조선 이 이렇게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1) 삼한은 원래 천일 ( 天一 ) · 지일 ( 地一 ) · 태일 ( 太一 ) 의 삼신설에 의하여 인민이 '말한'은 천신의 대표로, '불한'은 지신의 대표로 '신한'은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큰 우주 유일신의 대표로 신앙하여 오다가 말 · 불 두 한이 신한을 배반하고 각기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 삼대왕이 나란히 서서 지력 ( 智力 ) 으로 지위를 획득하매, 일반 사람들이 계급은 자연적 · 고정적이 아니고 힘만 있으면 파괴할 수도 있고 건설할 수도 있음을 깨달아서 삼신설을 의심하기에 이르렀음이 그 원인이고, 2) 역대의 삼한이 한갓 삼신이 미신으로만 인심을 끌어갈 뿐 아니라, 매양 외구 ( 外寇 ) 를 물리치고 국토를 확장하여 천하가 다 그 위령에 떨게 하였는데, 이제 삼국의 신하들도 흉노와 지나의 잇달은 침략을 저항하지 못하여 국토가 많이 떨어져 나가매, 일반 사람들이 이에 제왕도 사람의 아들이요, 하늘의 아들이 아니므로 그의 성패 흥망도 보통 사람과 같음을 알고, 삼한의 신엄 ( 神嚴 ) 을 부인함에 이르렀음이 그 가까운 원인이니, 삼신설의 기초 위에 세운 삼한이므로 삼신설의 파탄이 생긴 이후 에야 어찌 붕괴하지 않을 수 있으랴?

열국(列國)의 분립[편집]

삼신설(三神說)에 파탄이 생기고 삼한에 대한 신앙이 추락되자, 이는 확실히 조선에 유사(有史) 이래의 큰 변국 ( 變局 )을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일부 인민들이 신인(神人)과 영웅(英雄)들의 허위를 깨닫고, 왕왕 자치촌 ( 自治村 ) · 자치계 (自治 )와 같은 것을 설립하여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시험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에 보인 증적(證迹)은 진한부 ( 辰韓部 ) · 변한부 ( 弁韓部 ) 같은 것이 그 일종이고, 그 이외에도 역사책에 누락된 그와 유사한 시도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신을 타파하여 우주문제, 인생문제 등을 올바르게 해결한 학설이 없었으며, 사방 이웃들에는 조선보다 문화가 낮은 예(濊) · 선비 · 흉노 · 왜 등 야만족들이라 진화에 도움이 될 친구가 없었으며, 중국은 비록 구원(久遠)한 문화를 가졌으나 거의 군권 ( 君權 ) 을 옹호하는 사상과 학설뿐이었는지라, 그 문자의 수입이 도리어 민중의 진보를 방해하였기 때문에 민중의 지력(智力)은 유치하고 옛 세력의 뿌리는 깊고 두터웠다. 이에 제왕의 후예들은 그 조상 전래의 지위를 회복하려 하였고, 민간의 사납고 용감한 영웅들은 사회의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려고 하였는데, 작은 나라는 큰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였고, 큰 나라는 더욱 강토를 확장하려고 햐면서 혹은 신수두님[大檀君]이라 일컫고, 혹은 신한〔辰王〕이라 일컬으며, 혹은 말한[麻立干〕이라 일컫고, 혹은 불구래〔弗矩內〕라 일컬으며, 혹은 하늘에서 내려왔다 운운하고, 혹은 해외에서 표류해 왔다 운운하고, 혹은 태양의 정기로 태어났다 운운하고, 혹은 알 속에서 나왔다고 운운하면서 전통적 미신 세력에 의지하여 민중을 유혹하거나 위협하자 미약한 민중세력의 새싹이라고 할 수 있는 다소의 자치단체는 그 정복을 받아 스스로 소멸해버렸으며, 세력 쟁탈의 전란이 사방에서 일어나 열국쟁웅(列國爭雄) 시대를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