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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제4편/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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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 연대(年代)의 정오(正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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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 · 신한 · 말한 · 불구래 등의 참람 ( 僭濫 ) 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열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열국사 ( 列國史 ) 를 말하려면 전사 ( 前史 ) 에서 열국의 연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해야겠다.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8년 ( 기원 668 년 ) 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 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9 백 년에 마치지 못한다 ( 不及九百 年 ). ”라고 한 비기 ( 秘記 ) 가 유행했는데,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이때 ( 문무왕 8 년 ) 에 고구려의 연조가 8 백 몇십 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본기 ( 本紀 ) 의 705 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고구려 본기로 보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 ( 鄭후王 ) 의 13 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문에, “ 17 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게 전하였다 ( 傳之十七世孫 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 세손이 아니라, 17 세손이다.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그 705 년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본기로써 상고하면 고구려 건국이 위우거 ( 衛右渠 ) 가 멸망한 지 72 년만이지마는, 북사 ( 北史 ) 고려전 ( 高麗傳 ) 에는 막래 ( 莫來 ) 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한 ( 漢 ) 의 무제 ( 武帝 ) 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 ( 四郡 ) 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 ( 縣 ) 이라고 하였다. 막래는 해동역사 ( 海東繹史 ) 에, “모본 ( 慕本 ) 의 잘못인가? ” 하였으나,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우박〔雹 〕이라는 뜻이고, 신 ( 神 ) 이라는 뜻이다 .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의 이름 `무휼 (憮恤 ) '과 음이 같을 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막래는 모본왕 ( 幕本王 ) 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요,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고구려 당시의 비기 ( 秘記 ) 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 ( 北史 ) 가 또한 증명하니,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 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안순암 ( 安順庵 : 安鼎福 ) 선생이 고구려 족자 ( 族子 ) 인 안승 ( 安勝 ) 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햇수 거의 8 백년 ( 年將八百年 ) ”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 들었음을 일정하였으나, 실은 8 백을 9 백으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 백을 8 백으로 고쳐 고구려의 향국 ( 享國 ) 이 705 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 ( 先後 ) 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 ( 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 ) 가 있으므로,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 보다 뒤짐을 부끄러이 여겨,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 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동부여 · 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 년이나 줄였으니,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 · 백제의 부조 ( 父祖 ) 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 · 백제의 형제뻘인 가라 ( 加羅 ) · 옥저 ( 沃沮 ) 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전사 ( 前史 ) 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넘어, 기원전 190 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부여 · 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 ( 列國史 ) 를 서술하고자 한다.

열국의 강역(疆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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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둘이 아니다.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신라 경덕왕 ( 景德王 ) 이 북쪽의 땅을 잃고, 그 북쪽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여 전대 ( 前代 ) 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어, 조선의 지리 전고 ( 典故 ) 가 말할수 없이 뒤바뀌어, 비록 근세의 한구암 ( 韓久庵 : 韓百謙 ) · 안순암 등 여러 선유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 ( 退縮 ) 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첫째는 부여다.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하나는 북부여이다.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 삼국지에 “현도의 북쪽 천 리 ( 玄之北千里 ) ”라 하였으니,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 ( 開原 ) 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동부여는 갈사나 ( 曷思那 ) 에 도읍하였다. 대무신왕 ( 大武神王 ) 이 동부여를 칠 때, `북벌 ( 北伐 ) 한다. '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지금의 훈춘 ( 揮春 ) 등지가 동부여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강릉 ( 江陵) 이라고 하였다.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곧 남부여다. 동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여는 문자왕 ( 文姿王 ) 3 년 ( 기원 494 년 ) 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동부여 · 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그 명칭조차 몰랐다.

둘째는 사군 ( 四郡 ) 이다. 위만 ( 衛滿 ) 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의 만반한 ( 滿潘汗 ),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選東郵 ) 문번한 ( 沈睡규 ), 곧 지금의 해성 ·개평 등지이니 헌우란 ( ) 이 옳다. 한나라 무제 ( 武帝 ) 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위만의 옛 땅이니,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데,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 · 강원 · 함경 등 여러 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 ( 桓仁 ) 등지에서 찾았다.

셋째는 낙랑국 ( 樂浪國 ) 이다. 낙랑국은 한 ( 漢 ) 의 낙랑군 ( 樂浪郡 ) 과 각각 다른,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그 밖에 고구려 · 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 · 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주군 ( 州那 ) 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지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