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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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구려의 대(對) 중국과의 전쟁에서의 패배[편집]

발기(發技)의 반란과 제1의 환도(丸都) - 현 개평(蓋平)의 잔파(殘破)[편집]

기원후 197년에 고국천왕이 돌아가고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왕후 우씨 ( 于氏 ) 가 좌가려 ( 左可慮 ) 의 난리 이후로 정치에 입을 벌리지 못 하고 답답하게 대궐 안에 있다가, 왕이 돌아가니 정치무대에 다시 나타날 열망을 품게 되자, 애통보다 기쁨이 앞서 국상을 숨겨 발표하지 아니하고 그 밤에 미복으로 비밀히 왕의 큰아우 발기 ( 發岐 ) 에게 가서 발기더러, “대왕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뒤를 이을 사람이 아닌가” 하고 유혹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발기는 순나 ( 順那 ) 의 고추가 ( 古鄒加 ) 로서 환도성간 ( 丸都城干) 을 겸하여 요동 전체를 관리하고 있어서 그 위엄과 권세가 혁혁할 뿐더러 또한 고국천왕이 돌아가면 왕위를 이을 권리가 당당하므로 우씨의 말을 새겨듣지 않고, 엄정한 말씨로 우씨를 나무랐다. “왕위는 하늘이 명하는 것이니 부인이 물을 바가 아니고, 부인의 밤나들이는 예가 아니니 왕후의 행할 일이 아닙니다.” 우씨는 크게 부끄럽고 분하여, 그 길로 곧 왕의 둘째 아우 연우 ( 延優 ) 를 찾아가서, 왕이 돌아간 일과 발기를 찾아갔다가 핀잔 본일을 낱낱이 호소하였다. 연우는 크게 기뻐하고 우씨를 맞아들여 밤잔치를 베풀었다. 연우가 친히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치니 우씨가 치마끈을 잘라서 싸주었다. 손목을 마주 잡고 대궐로 들어가 함께 자고 이튿날 고국천왕이 돌아간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왕의 유조 ( 遺詔 ) 를 꾸며 연우로 왕의 후계를 삼아서 즉위하게 하였다.

발기는 연우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격문을 띄워서, 연우가 우씨와 몰래 통하고 차례를 건너뛰어 왕위를 빼앗은 죄를 폭로하고 순나의 군사를 일으켜서 왕궁을 포위 공격하였다. 사흘 동안 격전이 벌어졌으나 나라 사람들이 발기를 돕지 아니하므로 패하여, 순나의 인민 3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 전토 ( 全土 ) 를 들어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항복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공손도는 한말 ( 漢末 ) 의 효웅 ( 梟雄 ) 이니, 기원190 년에 한이 어지러워지는 징조를 보고 요동태수가 되기를 자청하여 요동에서 왕노릇 하기를 꿈꾸었는데, 이때 요동의 본토는 차대왕이 점령한 뒤였으므로 고구려의 땅이었고, 한의 요동은 지금의 난주에 옮겨다 설치하여, 땅이 매우 좁아서 공손도는 항상 고구려의 요동을 엿보고 있던 참이라, 발기의 투항을 받자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정병 3 만을 일으켜서 발기의 군사로 선봉을 삼아 고구려에 침입하여, 차대왕의 북벌군 ( 北伐軍 ) 의 본거지이던 환도성 ---제 1 의 환도에 들어가 마을을 불태우고 비류강 ( 沸流江 ) 으로 향하여 졸본성 ( 卒本城 ) 을 공격하였다.

연우왕 ( 延優王 ) 이 계수 ( 계須 ) 로 '신치 ( 전군 총사령관 )'를 삼아서 항거해 싸워 한의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좌원 ( 左原 ) 까지 추격하였다. 발기가 다급하여 계수를 돌아보고, “계수야, 네가 차마 너의 맏형을 죽이려 하느냐? 불의의 연우를 위해 너의 맏형을 죽이려는냐? ”고하자 계수가 말했다. “연우가 비록 불의 하지만 너는 외국에 항복하여 외국 군사를 끌고와서 조상과 부모의 나라를 유린하니, 연우보다 더 불의하지 않느냐? ” 발기가 크게 부끄러워 뉘우치고 배천 ( 裵川 : 곧 沸流江 ) 에 이르러 자살하였다. 발기가 한때 분함을 참지 못하여 나라를 판 죄를 지었으나 계수의 말에 양심이 회복되어 자살함에 이르렀지마는, 그 팔아버린 오열홀 ( 烏列忽 ) ---요동은 회복하지 못하고, 공손도의 차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공손도는 드디어 요동왕이라 자칭하고 요동 전역을 나누어, 요동 ( 遼東 ), 요중 ( 遼中 ), 요서 ( 遼西 ) 의 셋으로 만들고 바다를 건너 동래 ( 東萊 ) 의 여러고을 ---지금의 연태 ( 煙台 ) 등지를 점령하여 한때 강력한 위염을 자랑하였다. 이에 연우왕은 지금의 환인현 ( 桓仁縣 ) 혼강 ( 渾江 ) 상류 ( 지금의 安古城 ) 에 환도성을 옮겨 설치하고 그곳으로 서울을 옮기니 , 이것이 곧 제2의 환도였다.

동천왕(東川王)의 제1 환도성(丸都城) 회복과 오(吳)·위(魏)와의 외교[편집]

연우왕이 형수 우씨의 손에 왕위를 얻고 우씨로 왕후를 삼았는데, 오래지 않아 우씨가 나이가 많음을 싫어하여 주통촌 ( 酒補村 ) 의 아름다운 처녀 후녀 ( 后女 : 이름 ) 에게 몰래 장가들어 소후 ( 小后 ) 를 삼아서 동천왕 ( 東川王 ) 을 낳았다.

기원후 227년에 연우왕이 돌아가고 동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지나가 네 세력을 나뉘어 1) 은 위(魏)의 조씨(曹氏)니 업--- 지금의 직예성(直匠省) 업현에 도읍하여 지금의 양자강(揚子江) 이북을 차지 하고, 2) 는 오(吳)의 손씨(孫氏)니 건업(建業)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南京)에 도읍하여 양자강 이남을 차지하고, 3) 은 촉(蜀)의 유씨(劉氏)니 성도(成都) --- 지금의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도읍하여 지금의 사천성을 차지하고, 4) 는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니 양평(襄平) --- 지금의 요양(遼陽)에 도읍하여, 지금의 난하 동쪽과 요동반도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공손씨와는 적국이었고, 촉과는 길이 너무 멀어서 교통할 수 없었거니와, 위 ( 魏 ) · 오 ( 吳 ) 두 나라와도 왕래가 없었는데, 기원후 233년에 공손연 ( 公孫淵 : 공손도의 손자 ) 이 간사한 꾀로 위 · 오 두 나라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오의 임금 손권 ( 孫權 ) 에게 사신을 보내 표 ( 表 ) 를 올려 신하라 일컫고, 함께 위를 공격하기를 청했다. 그러니까 손권이 크게 기뻐하고 사신 허미 ( 許彌 ) 등으로 하여금 수천의 군사를 주어 공손연에게 보냈다. 공손연이 허미로 위와 사귀는 미끼를 삼으려고, 먼저 허미의 보호 장사 진단 ( 秦旦 ) 등 60 여 명을 잡아서 현도군 지금의 봉천성성 ( 奉天省城 ) 에 가두어 죽이려 하였다. 진단 등이 성을 넘어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가서 거짓말로, “오제 ( 吳帝 ) 손권 ( 孫權 ) 이 고구려 대왕께 올리는 공물이 적지 않았고 또한 고구려와 맹약하여 공손연을 쳐 그 토지를 나누어 가지자는 도서 ( 圖書 ) 도 있었는데, 불행히 배가 큰 바람을 만나 바닷길의 방향을 잃고 요동의 바닷가에 도착하였다가 공손연의 관리에게 알려져서 공물과 도서는 다 빼앗기고 일행이 다 잡혀서 갇혔습니다. 다행히 틈을 얻어 범의 입을 벗어나 이렇게 왔습니다.”고 하였다. 동천왕이 크게 기뻐하여 진단 등을 불러 보고 조의 25 명에게 명해 바닷길로 진조 등을 호송하였는데? 초피(貂皮)의 1천 장과 갈계피 10 장 등을 손권에게 선사하고, 고구려의 육군과 오의 수군으로 공손연을 함께 쳐서 멸망시키자는 조약을 맺었다.

이듬해 3년에 손권이 사굉 ( 謝宏 ) · 진굉 ( 陳宏 ) 등을 사신으로 보내서 많은 옷과 보배를 바치니 동천왕이 또'일치' 착자 ( 窄咨 ) · 대고 ( 帶固 ) 등을 보내 약간의 예물로 답사했는데, 착자가 오에 이르러 1)오의 수군이 약하여 바닷길로 공손연을 습격 할 수 없으면서 오가 다만 큰소리로 자랑하여 고구려로부터 후한 물건을 받고자하고, 2)손권이 고구려를 볼 때에는 비록 공손하였으나 그 내용을 그 국내에 선포할 때에는 동이 ( 東夷 ) 를 정복하여 그 신민 ( 臣民 ) 을 속이고 있음을 발견하고,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동천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위제 ( 魏帝 ) 조 ( 曹 ) 에게 밀사를 보내서, 고구려와 위가 오와 요동에 대해 공수동맹 ( 攻守同盟 ) 을 체결하여 고구려가 요동을 치면 위는 육군으로 고구려를 돕고, 위가 오를 치면 고구려는 예 ( 濊 ) 의 수군으로 위를 도와서, 두 적을 토멸한 뒤에는 요동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오는 위가 차지하기로 하였다. 그 이듬해 오의 사자 호위 ( 胡衛 ) 가 고구려에 오자 그 목을 베어 위에 보내서, 고구려와 위 두 나라의 교제가 매우 잦아졌다.

공손연(公孫淵)의 멸망과 고구려·위(魏) 양국의 충돌[편집]

기원후 237년에 동천왕이 '신가' 명림어수와 '일치' 착자 · 대고 등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내어 양수 ( 梁水 ) 로 나아가서 공손연을 치니, 위는 유주자사 ( 幽州刺史 ) 관구검 ( 母丘險 ) 에게 명하여 또한 수만의 군사로 요수 ( 遼水 ) 로 나오므로, 공손연은 곽흔 ( 郭昕 ), 유포 ( 柳蒲 ) 등을 보내 고구려를 막고, 비연 ( 卑衍 ) · 양조 ( 楊祚 ) 등을 보내 위를 막았다. 오래지 않아 위의 군사는 패하여 돌아가고, 공손연은 연왕 ( 燕王 ) 이라 일컬어 천자의 위의를 강추고 전력을 다하여 고구려를 막았는데, 이듬해 위가 태위 ( 太慰 ) 사마의 ( 司馬懿 ) 를 보내 10 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먼저 관구검으로 하여금 요대 ( 遼隊 ) 를 쳐 공손연의 수비장 비연 · 양조 등과 대치하게 하고, 사마의는 가만히 북쪽으로 진군하여 마침내 공손연의 서울 양평을 갑자기 포위하였다.

공손연의 정예군이 다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양수로 나가고 양평은 텅 비어 있었으므로 비연 등이 돌아와 구원하다가 크게 패하고 공손연이 성안에 포위당한지 30여 일에 굶주려 엄중한 포위를 뚫고 나오려다가 잡혀 죽으니, 공손씨가 요동에 웅거한지 무릇 3세 50년만에 망하였다. 위가 이렇게 공손씨를 쉽게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해준 때문인데, 삼국지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에, “태위 사마선왕 ( 司馬宣王 ) 이 무리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쳤는데 궁 ( 宮 ) 이 주부 대가 ( 大加 ) 를 보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 ( 太慰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遺主 簿大加 將數千人助軍 ). ”고 한 기사 이외에는 위의 명제본기 ( 明帝本紀 ) 나 공손도전 ( 公孫度傳 ) 에는 한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저네의 역사가 고유의 '국내 일은 자세하게, 외국과의 일은 간략하게 ( 詳內略外 ). '라는 필법을 지킨 것이어니와, 고구려 본기에는 “위의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가 이를 도왔다 ( 魏太傳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宮遺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 ”고 하였으니 사마의를 사마선왕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삼국지 동이열전의 본문을 그대로 옮겨다 적었음이 분명한데, 수천 명을 1천 명이라 고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저네와 우리의 역사의 사실에 관한 기록의 시말을 참작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위가 공손연을 토멸하여 요동의 전부가 항복하자, 위는 고구려에 대한 맹약을 배반하고 땅 한쪽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아니하므로, 동천왕이 노하여 자주 군사를 일으켜서 위를 토벌하여 서안평 ( 西安平 ) 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전사 ( 前史 ) 에 지금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라 하니, 이것은 한서지리지에 의거한 것이지마는, 공손연이 왕성할 때 고구려와 오 · 위의 교통이 늘 서안평 때문에 바닷길로 통하였으므로 이때의 서안평은 대개 양수 부근임이 옳다. 고대의 지명은 매양 천이 ( 遷移 ) 가 잦았던 것이다.

관구검의 침입과 제2의 환도(丸都, 지금의 안고성) 함락[편집]

기원후 245년경에 위가 동천왕의 잦은 침입을 걱정하여,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서 수만의 군사로 침략해오므로 왕이 비류수 ( 沸流水 ) 에서 이를 맞아 싸워서 관구검을 크게 격파하여 3천여 명을 목베고, 양맥곡 ( 梁貊谷 ) 까지 추격하여 또 3 천여 명을 목베었다. 왕은,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 하고, 이에 여러 장수들은 후방에서 싸움을 구경하게 하고 왕이 몸소 철기 ( 鐵騎 ) 5 천을 거느리고 진격 하였는데, 관구검 등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을 벌여 전진해오므로, 왕의 군사가 퇴각하니 후군이 놀라 무너져서 드디어 참패하여 상한 군사가 1 만 8 천을 넘었다.

왕이 1천여 기병을 거느리고 압록원 ( 鴨錄原 ) 으로 달아나니 관구검이 드디어 환도 ( 九都 : 지금의 安古城 ) 에 들어와서 대궐과 민가를 다 불태워버리고 역대의 문헌을 실어 위로 보내고는, 장군 왕기 ( 王기 ) 로 하여금 왕을 뒤쫓게 하였다. 왕이 죽령 ( 竹嶺 ) 에 이르렀을 때에는 여러 장수들이 다 달아나 흩어지고, 오직 동부 ( 東部 ) 의 밀우 ( 密友 ) 가 왕을 시위하고 있었다. 뒤쫓는 군사가 급히 달려들어 형세가 매우 위급하게 되었는데, 밀우가 결사대를 뽑아 죽음으로써 위의 군사와 싸우고, 왕은 그 틈을 타서 도망하여 산골짜기에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험한 곳을 지키고, 군중에게 영을 내려 밀우를 구원하여 오는 자는 큰 상을 내릴 것이라고 하니, 남부 ( 南部 ) 의 유옥구 ( 劉屋句 ) 가 이에 응하여 싸움터로 갔다. 밀우가 기진하여 땅에 엎드러져 있음을 보고 들쳐업고 돌아오니, 왕은 자기의 넓적다리살을 베어 밀우에게 먹여 한참만에 깨어났다. 이에 왕은 밀우 등과 함께 남갈사로 달아났다. 그러나 위병의 추격은 다급해졌다. 북부 ( 北部 ) 의 유유 ( 紐由 ) 가, 국가의 흥망이 달린 이같이 위급한 판에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위태로운 판국을 돌이킬 수 없다 하고, 음식을 갖추어 가지고 위의 군사들 가운데 들어가서 거짓 항복하는 글을 바치고, “우리 임금께서 대국에 죄를 해변에 이르러 다시 더 갈 곳이 없으므로 항복을 비시고, 먼저 얼마 안 되는 음식으로 군사들을 호궤하고자 합니다.”고 하니, 위의 장수가 그를 불러보았다. 유유는 음식 그릇 속에 감추어 갔던 칼을 빼어 위의 장수를 찔러 죽였다. 왕이 군사를 명하여 위의 군사를 반격하니 위의 군사가 무너져서 다시 진을 이루지 못하고 요동의 낙랑으로 달아났다.

이 싸움에 대한 기사는 김부식이 삼국지와 고기 ( 古記 ) 를 뒤섞어서 고구려 본기에 기록해 넣었으므로 앞뒤의 기사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많다. 이를테면 1) “관구검이 군사 1만 명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하고 “왕이 보기 ( 步騎 ) 2만 명으로 거역해 싸웠다. ”고 하였으니 고구려 군사가 위의 군사보다 갑절인데, 그 아래 동천왕의 말을 싣되, “위의 많은 군사가 우리의 적은 군사만 못하다.”고 하였음은 무슨 말인가? 2)비류수에서 위의 군사 3천 명을 목베고, 양맥곡에서 또 위의 군사 3천 여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를 목베었다고 하였으니, 1 만 명의 위병이 이미 6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어 다시 군대를 이룰 수 없었겠는데, 그 아래에 “왕이 철기 ( 鐵騎 ) 5천으로 추격하다 크게 패했다.”고 한 건 무슨 말인가? 관구검 전에 그 결과를 기록하여 “논공행상 ( 論功行賞 ) 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출사한 군사의 많음과 싸움의 크기를 가히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인데, 어찌 겨우 1만 명의 출병 이었으랴? 다만 저네가 역사에 상내약외 ( 詳內略外 ) 의 예를 지켜 그 기재가 이에 그쳤을 뿐이다. 고구려 본기에는 이 싸움을 동천왕 20년 ( 기원후 245년 ) 이라 하였으니, 동천왕 20 년은 위의 폐제 ( 廢帝 ) 방 ( 芳 ) 의 정시 ( 正始 ) 8년이요, 삼국지 관구검전에는, “정시(正始)중에 현도의 군사를 내어 고구려를 치고 6 년에 다시 정벌하였다 ( 正始中 ---出玄토討句魔---六年復征之 ). ”라고 하였으므로 해동역사 ( 海東歷史 ) 에는 정시 5 년과 6 년의 두 번의 전쟁으로 나누어 기록하였는데, 정시 5 년과 6 년은 동천왕 18 년과 l9 년이다. 그러나 삼국지 본기에는 정시 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 ( 幽州刺史母丘儉 討高句麗 ). ”고 하여 고구려 본기와 맞는다. 어느 쪽을 좇음이 옳은 것인가?

최근 l905년에 청 ( 淸 ) 의 집안현 지사 ( 輯安縣知事 ) 아무개가 집안현 판석령 ( 板石嶺 ) 고개 위에서 발견한 관구검의 기공비 ( 記功碑 ) 의 파편에 ' 6 년 5 월'의 글자가 둘째 줄에 보였으니, 만일 이것이 진정한 유적이라면 정시 6년, 동천왕 19년이 곧 그 싸움의 시작이고, 다시 싸웠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그러나 옛 청조 ( 淸朝 ) 의 인사들이 고물 ( 古物 ) 위조의 버릇이 매우 많아서, 지나 현대에 빛을 보게 된 옛 비석, 옛 기와가 거의 가짜라 하니 그 비석의 파편은 아직 고고학자의 심정 ( 審定 ) 을 요할 것이고, 설혹 이것이 진짜 유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불내성 ( 不耐城 ) 의 명 ( 銘 ) 이요 환도성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집안현의 환도성은 제 3 의 환도성이요, 제 3 의 환도성은 동천왕 때에는 아직 건축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2장에서 자세히 기록하였다.

제2 환도성(丸都城)의 파괴 후 평양(平壤)으로의 천도[편집]

제2의 환도성이 파괴되자 동천왕은 그의 서북쪽 정벌의 웅대한 마음이 찬재 〔冷灰〕가 되어 지금 대동강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니, 이것이 고구려가 처음으로 남천 ( 南遷 ) 한 것이다. 평양 천도 이후 대세가 변한 것이 둘이니, 그 하나는 남낙랑에 딸린 작은 나라들이 비록 고구려에 복속하여 있었으나 오히려 대주류왕이 최씨를 멸망시킨 옛날 원한을 생각하여 복종과 배반이 드리없다가 평양이 고구려의 서울이 되어 제왕의 대궐과 군사의 본영이 다 이곳에 있게 되니, 작은 나라들이 기가 눌러 차차 아주 꺾였고 또 하나는 평양 천도 이전에는 고구려가 늘 서북으로 발전하여 흉노 · 지나 등과 충돌이 잦다가, 평양 천도 이후에는 백제 · 신라 · 가라 등과 접촉을 하게 되어 북쪽보다는 남쪽에 대한 충돌이 많아졌다. 다시 말하자면 고구려가 서북의 나라가 되지 않고 동남의 나라가 된 것은 곧 평양 천도로 원인한 것이다. 그러나 평양 천도는 제2환도성의 파괴로 인한 것이니 그러므로 제 2 환도의 파괴가 고대사상 비상한 대사건이라 할 것이다.

제 2 장 고구려 대(對) 선비(鮮卑) 전쟁[편집]

선비(鮮卑) 모용씨(慕容氏)의 강성[편집]

선비가 늘 고구려에 복속하여, 비록 단석괴 ( 檀石槐 ) 의 용맹으로도 오히려 명림답부의 절제를 받다가, 고구려가 발기의 난을 지나 요동을 잃어버리고 나라의 형세가 약해지니, 선비가 드디어 배반하여 한에가 붙었다. 한말에 원소 ( 袁紹 ) 와조조가 서로 맞섰을때 선비와오환이 원소에게 붙었다가 원소가 망하니, 기원 207년에 조조가 7월의 장마를 기회하여 노룡새 ( 盧龍塞 ) 5백 리를 몰래 나와서, 선비와 오환을 불시에 공격하여 그 소굴을 파괴하였다. 오환은 마침내 망하고 선비는 그 뒤에 가비능 ( 軻比能 ) 이라는 이가 있어 다시 강대해져서 자주 한의 유주 ( 幽州 ) 와 병주 ( 幷州 ) 를 침략하였는데 한의 유주 자사 왕웅 ( 王雄 ) 이 자객을 보내 가비능을 암살하였으므로 선비는 다시 쇠약해졌다.

기원후 250년경에 선비가 우문씨 ( 宇文氏 ) · 모용씨 ( 幕容氏 ) · 단씨 ( 段氏 ) · 척발씨 ( 拓跋氏 ) 의 네 부로 나뉘어 서로 자웅을 다투더니, 모용씨에 모용외 ( 慕容외 ) 란 자가 있어 용감하고 꾀가 뛰어나 부족이 가장 강성해졌는데 창려 ( 昌黎 ) 태극성 ( 太棘城 )---지금의 동몽고 땅 특묵우익 ( 特默右翼 ) 의 부근을 근거지로 삼아서 사방으로 노략질을 하였다. 이때에 지나의 위 · 오 · 촉 세 나라가 다 망하고 진 ( 晉 ) 의 사마씨 ( 司馬氏 ) 가 지나를 통일하였으나 자주 모용외에게 패하여 요서 일대가 소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역사가들이 왕왕 모용씨가 웅거한 창려를 지금의 난주 부근이라고 하지마는, 진서 ( 晉書 ) 의 무제 ( 武帝 ) 본기에, “모용외가 여창을 침노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위의 창려 지금의 난주가 진 ( 晉 ) 의 창려가 아님이 분명하니, 곧 나중의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 ( 募容황 ) 이 서울한 용성 ( 龍城 ) 과는 멀지 아니한 땅일 것이다.

북부여(北扶餘)의 파괴와 의려왕(依慮王)의 자살[편집]

북부여는 제3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 여러 나라의 문화 원천의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 · 고구려 이래로 압록강 이북을 잃고는 드디어 북부여를 조선의 영역 밖의 나라라 하여 그 역사를 정리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해모수왕 이후로 그 치란 ( 治亂 ) 과 성쇠를 알 수 없거니와, 다행히 지나의 역사가들이 저희의 정치적으로 관계된 사실을 몇 마디나마 기록하였으므로, 그 대강을 말할 수 있다.

후한 ( 後漢 ) 안제 ( 安帝 ) 의 영초 ( 永初 ) 5년, 기원후 112년에 부여왕 ( 이름은 모름 ) 이 보병과 기병 7,8천 명을 거느리고 한의 낙랑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역사에 보인 북부여의 외국에 대한 용병의 시초일 것이요, 연광 ( 延光 ) 원년, 기원후 121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 ( 尉仇台 ) 를 보내 한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 · 마한〔百濟〕· 예 · 읍루 ( 읍婁 ) 등을 격파하였다고 했으나, 이듬해 한이 차대왕에게 화의를 청하고 배상으로 비단을 바친것을 보면 북부여와 한이 고구려를 격파하였다는 것은 거짓 기록일 것이다. 기원후 136 년에 위구태가 왕이 되어 2만의 기병으로 한의 현도군을 습격하고 그 뒤 공손도가 요동왕이 되어서는 부여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종실 ( 宗室 ) 의 딸로 아내를 삼아서 고구려와 선비에 대한 공수 동맹을 맺었으니, 위구태왕은 마치 고구려의 차대왕처럼 가장 상무 ( 尙武 ) 한 임금이고, 또 그가 왕위에 있던 동안이 해모수 이후 북부여의 유일한 전성시대일 것이다. 위구태왕의 뒤에 간위거왕 ( 簡位居王 )에 이르러서는 적자가 없이 마여 ( 麻餘 ) 가 즉위하였는데, 오가 ( 五加 ) 중의 우가 ( 牛加 : 이름은 모름 ) 가 반역할 마음을 품었으나, 우가의 형의 아들은 왕실에 충성되고 나라 일에 부지런하고 나라 사람들에게 재물을 잘 베풀어주어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우가부자가 모반하니 위거가 이를 잡아 죽이고 그 재산을 압수하고, 마여왕이 죽으니 위거가 마여왕의 아들 의려 ( 依慮 ), 겨우 6살 난 어린아이를 세워 보좌하였다.

위거가 죽고 의려가 왕위에 오른지 41년만에 국방이 소홀해졌는데, 드디어 선비 모용외가 이를 정탐해 알고 무리를 이끌고 북부여와 서울 아사달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외가 침입하니 의려왕은 수비가 허약하여 막아내지 못할 줄 알고 칼을 빼어 자살해서 나라를 망친 죄를 국민에게 사과하고, 유서로 태자 의라 ( 依羅 ) 에게 왕위를 전하여 나라의 회복에 힘쓰게 하였다. 의려왕이 국방을 힘쓰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한 죄는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항복하느니 보다 차라리 죽으리라는 의기 ( 義氣 ) 를 가져 조선의 역사상 처음으로 순국한 왕이 되어 피로써 뒷사람의 기억에 남겼으니, 어찌 성하 ( 城下 ) 의 맹세를 맺어 구차스럽게 생명을 보전하려는 용렬한 임금에 비할 바이랴.

의려왕이 자살하니 의라가 서갈사나 ( 西曷思那 ) ---지금 개원 ( 開原 ) 부근의 숲속으로 달아나 결사대를 모집해 선비의 군사를 쳐 물리치고, 험한 곳을 지켜 새 나라를 세웠다. 아사달은 왕검 이래 수천 년 문황의 고도로써 역대의 진귀한 보물뿐 아니라 문헌도 많아, 신지 ( 神誌 ) 의 역사며, 이두문으로 적은 풍월 등이 있었고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를 가르쳤다고 하는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에 쓴 글도 있었는데, 모두 선비의 만병 ( 蠻兵 ) 에 의해 타버리고 말았다.

고구려의 예란(濊亂) 토평(討平)과 명장 달가(達賈)의 참사[편집]

선비가 북부여에 침입하기 6년 전인 기원후 280년에 고구려는 예 ( 濊 : 本紀의 蕭愼 ) 의 반란이 있었다. 예는 원래 수렵시대의 야만족으로서, 처음에는 북부여에 복속해 있었는데, 북부여가 조세를 과중하게 받자 배반하고 고구려에 가 붙었다가, 고구려가 요동을 잃고 나라의 형세가 쇠약해지자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국경을 침입하여 수없이 인민을 죽이고 가축을 약탈하였다. 서천왕 ( 西川王 ) 이 크게 걱정하고 장수될 인재를 구하니, 여러 신하들이 왕의 아우 달가 ( 達賈 ) 를 추천하였다. 달가는 기묘한 계교로 예의 소굴을 습격하여 그 추장과 6,7 백 집을 포로로 하여 부여 남쪽의 오천 ( 烏川 ) 으로 옮기고 그 여러 부락의 항복을 받으니, 서천왕이 달가를 안국군 ( 安國君 ) 에 봉하였다.

서천왕이 죽고 아들 봉상왕 ( 隆上王 ) 이 즉위하였는데, 왕은 천성이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하여 달가가 항렬로 숙부요, 위명 ( 威名 ) 이 전국에 떨치므로 죄를 얽어 사형에 처하였다. 국민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안국군이 아니더면 우리가 예맥 ( 濊貊 ) 의 난리에 죽은 지가 오래였을 것이다.” 하고 슬퍼하였다.

모용외(幕容외)의 패퇴와 봉상왕(烽上王)의 교만과 포학[편집]

모용외는 일대의 효웅이었다. 진의 정치가 부패하여 지나가 장차 크게 어지러워질 것을 내다보고, 바야흐로 전 지나를 아울러 가질 야심을 가졌다. 그러나 만일 동으로 고구려를 꺾지 못하면 뒷걱정이 적지 아니할 것을 잘 안 그는, 북부여를 격파한 뒤에 그 이긴 형세로 곧 고구려를 침노하려고 했는데, 다만 안국군의 위명을 꺼려 주저하다가 안국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기원후 292년에 날랜 군사 로 고구려의 신성 ( 新城 ) 을 침범하였다. 이때 봉상왕이 신성에 순행해 있었는데, 모용외는 이를 알고 성을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하여 매우 위급해졌다. 신성 성주 북부소형 ( 北部小兄 ) 고노자 ( 高奴子 ) 가 5백 기병으로 모용외의 군사를 돌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리고 왕을 구해냈다. 왕은 기뻐하고 고노자의 작위를 높여 북부대형 ( 北部大兄 ) 에 임명하였다.

이듬해 3년에 모용외가 또 공격해와서 졸본 ( 卒本 ) 에 침입하여 서천왕의 무덤을 파다가 구원병에게 격퇴당했다. 왕이 모용씨가 자주 침노해옴을 걱정하니, '신가' 창조리 ( 倉助利 ) 가 아뢰었다. “북부대형 신생의 성주 고노자는 지혜와 용맹이 다 완전한 장수인데, 대왕께서는 고노자를 두고 어찌 선비를 근심하십니까? ” 하고 왕에게 권하여 고노자로 신성의 태수를 삼았다. 고노자가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여러번 모용외의 침략군을 격퇴하여 국경이 안정되고 모용외의 군사가 다시 침노하지 못하니, 봉상왕은 그만 교만하고 방자해 져서 여러해 흉년으로 국민이 굶주리고 피로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라 안의 인부를 징발하여 대궐을 지으니, 국민이 달아나서 인구가 자꾸 줄어들었다. 기원 300년에 이르러서는 왕이 여러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다 물리치고 나라 안의 15살 이상의 남녀를 죄다 징발하여 건축에 부리니 '신가' 창조리가 간했다“천재(天災)가 잦아 농사가 되지 않아서 나라 안의 인민이 장정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는 구렁에 빠져 죽는데, 대왕께서는 이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의 역사를 시키시니, 이는 임금의 할 일이 아닐 뿐더러, 하물며 북쪽에는 강적 모용씨가 있어 날마다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으니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백성을 아끼지 아니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아니하면 충(忠)이 아니므로, 신이 이미 '신가' 의 자리에 있어 말할 것을 숨길 수 없어서 아룁니다.” 그러나 왕은, “임금은 백성이 우러러보는 것이니 임금이 사는 대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백성이 무엇을 우려러보겠소? '신가'는 백성을 위해 명예를 구하지 마오. 죽지 않으려거든 다시 말하지 마오.” 하였다. 창조리는 봉상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줄을 깨닫고, 동지들과 비밀히 의논하여 왕을 폐하였다.

봉상왕(烽上王)의 폐위와 미천왕(美川王)의 즉위[편집]

봉상왕은 처음에 그 숙부 달가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 ( 돌固 ) 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 ( 乙弗 ) 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 줄 알고 달아났다. 봉상왕은 그 뒤에 여러번 을불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을불은 도망하여 성명을 갈고 몸을 팔아, 수실촌 ( 水室村 ) 사람 음뢰 ( 陰牢 ) 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음뢰가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켜, 낮이면 나무하고 밤이면 쉴 사이 없이 그 집 문앞늪에 돌을 던져 개구리를 울지 못하게 해서, 그 집 식구들이 편안히 자게 하였다. 을불이 견디다 못하여 1년만에 또 도망하여 동촌 ( 東村 ) 사람 재모 ( 再牟 ) 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소금을 사서 배편으로 압록강으로 들여와 소금짐을 강동 ( 江東 ) 사수촌 ( 思收村 ) 사람의 집에 부려놓았다. 그 집 노파가 공짜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1 말쯤이나 주었는데도, 노파는 마음에 차지 않아 더 달라고 보채었다. 을불이 주지 않았더니 노파는 도리어 꽁한 마음을 먹고, 해치려고 소금점 속에다가 몰래 신 한 컬레를 묻어놓았다가, 을불이 그 집을 떠나오자 뒤쫓아와서 소금을 뒤져 신을 찾고, 을불 등 두 사람을 절도로 몰아 압록재 ( 鴨綠宰 ) 에게 고소하여, 을불은 태형 ( 笞刑) 을 맞고, 소금은 빼앗아 노파에게 준다는 판결이 내렸다. 을불은 이에 소금장사도 할 수 없고 머슴살이 할 곳도 얻을 수가 없어서, 숱한 마을 온갖 동네로 돌아다니면서 걸식하여 날을 보냈다.

옷은 너덜너덜 찢어지고 얼굴을 보기에도 무섭게 파리하여 아무도 옛날의 왕손 ( 王孫 ) 인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이때 '신가' 창조리 ( 倉助利 ) 등이 봉상왕을 폐하면, 임금 될 인재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이 가장 합당하다고 하여, 북부 ( 北部 ) 의 '살이 ' 조불 ( 祖弗 ) 과 동부 ( 東部 ) 의 '살이' 소우 ( 蕭友 ) 등으로 하여금 을볼을 찾게 하였다. 그들은 비류수에 이르러 을불을 만났다. 소우가 을불의 어릴 때 모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나아가 절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여러 대신들이 외논하여 지금 임금을 폐하고 왕손 ( 王孫 ) 을 세우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이 품행이 단정하시고 성격이 인자하시어 조상의 업을 이을 만하다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왕손은 의심치 마십시오. ” 하고 데리고 돌아와 창조리의 동지 조맥남 ( 鳥陌南 ) 의 집에 숨겨두었다. 가을 9월에 창조리가 봉상왕을 따라 후산 ( 候山 ) 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고 외쳤다. “나를 좋으려는 이는 나와 같이 갈 대잎을 따서 갓에 꽂으시오.” 하니 모든 사람이 다 창조리의 뜻을 알고 일제히 갈대잎을 갓에 꽂았다. 이에 창조리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딴 방에 가두니,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을불이 왕위에 오르니 곧 미천왕 ( 美川王 ) 이다.

미천왕(美川王)의 요동(遼東) 전승과 선비(鮮卑) 몰아냄[편집]

기원후 197 년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고 부터 기원후 370년경인 고국원왕 ( 故國原王 )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의 중엽 시대인데, 미천왕의 일대는 이 중쇠 ( 中衰 ) 시대 중에서 가장 왕성한 때이다 . 저자가 일찍이 환인현 ( 桓仁縣 ) 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지방의 문사 왕자평 ( 王子平 : 본래 만주인 ) 의 말을 들으니, “고구려의 고대에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을 할 때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은 '우굴로 ( 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 ) '라 함은 그 대왕의 이름으로 이름 지은 것입니다.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하도록 곤궁하였지마는, 늘 요동을 되찾을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요동 각지를 돌아다닐 때, 산과 내의 험하고 평탄한 것,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가지고 다니면서 길가에 뿌려 그 지나간 길을 기억했으므로, 지금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가 을불뿐이니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이 한미할 때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미천왕은 기원후 300년부터 331년까지 무릇 31년 동안을 왕위에 있은 제왕이고, 그 31년 동안의 역사가 곧 선비 모용씨와 혈전한 역사다. 간략하고 허술한 고구려 본기와 허황하고 과장된 진서 ( 晉書 ) 를 합하여 그 진실에 가까운 것을 뽑아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l) 현토(玄토)의 회복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에 또 한의 소유가 되었음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하고는 그 제 2 년에 곧 현도성을 격파하여 8천여 명을 포로로 하여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현도성을 점령하였다.

2) 낙랑(樂浪)의 회복---낙랑도 또한 한나라 무제 ( 武帝 ) 4 군 ( 郡 ) 의 하나 로서 대대로 드리없이 옮겨졌지만, 대개 역시 요동 땅에 가설 ( 假說 ) 한 것이고,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동천왕 ( 東川 王 ) 본기에, 위군 ( 魏軍 ) 이 낙랑으로 불러 갔을 때 동천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위 · 진 ( 魏晉 ) 의 태수는 여전히 존재하였으니, 만일 지나의 낙랑이 곧 조선의 평양---남낙랑이라 한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왕도인 동시에 또 지나 낙랑군의 군치 ( 君治 ) 가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같이 모순 당착 ( 撞着 ) 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으랴? 미천왕의 낙랑 점령은 그 재위 l4년, 기원후 313 년의 일이니, 진 ( 晉 ) 사람 장통 ( 張統 ) 이 낙랑 · 대방 두 군 ( 대방도 요동의 假設郡이요, 長湍 혹은 鳳山의 帶方國이 아념 ) 에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이를 공격하니, 장통이 항거할 힘이 없어 모용외의 부하 장수 낙랑왕 모용준 ( 幕容遵 ) 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모용준은 그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마침내 장통을 꾀어 백성 1 천여 집을 몰아가지고 모용외에게 투항하여, 모용외는 유성 ( 柳城 ) --- 지금의 금주 ( 錦州 ) 등지에 또 낙랑군을 가설하여 장통으로 태수를 삼았으니 이제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3) 요동에서의 전승 ---요동의 군치는 양평 ( 襄平 ), 다시 말하여 지금의 요양 ( 遼陽 ) 이니, 진서 ( 晉書 ) 에 의하면, “미천왕 ( 美川王 ) 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하고 물러나고 도리어 맹약을 청하였다.”고 하였으나 양서 ( 梁書 ) 에는 “을불 ( 乙佛美川王 ) 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되 모용외가 제어하지 못하였다 ( 乙佛頻寇遼東 團不能制 ). ”고 하여 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책이 서로 모순 된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이 지은 것이고, 당태종은 요동이 아무쪼록 지나의 요동임을 거짓 증명하여, 저희 나라 신하와 백성들을 고무해서, 고구려의 요동에 대한 전쟁열을 일으키려 하여, 전대의 역사책인 사기 ( 史記 ), 한서 ( 漢書 ), 후한서 ( 後漢書 ), 삼국지 ( 三國志 ) 등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열국 ( 列國 ), 그 중에서도 특히 고구려에 관계되는 문구를 많이 고쳤으니, 하물며 그 자신이 지은 진서 ( 晉書 ) 에서야 더 말할 나위 있으랴. 그러니 양서 ( 梁書 ) 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도리어 진실하고, 현도와 낙랑이 이미 차례로 정복되었으니 겨우 몇 현 ( 縣 ) 밖에 남지 않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되돌아왔을 것이지마는,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만하여 둔다.

4) 극성(棘城) 전쟁 --- 기원후 320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 ( 宇文氏 ) 와 단씨 ( 段氏 ) 와 진 ( 晉 ) 의 평주자사 ( 平州刺史 ) 최비 ( 崔毖 ) 와 함께 연합하여서 모용외의 서울 극성으로 쳐들어갔다. 모용외가 네 나라의 사이를 이간시키므로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가 모용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서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하성 ( 하城 ) 에 웅거해 있다가 모용외가 장수 장통에게 패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서 ( 晉書 ) 에 전해진 것으로서 거의 사실인 듯하며, 여노자는 고노자 ( 高奴子 ) 의 잘못인 듯하나, 고노자는 모용외를 여러번 격파한 명장이니 이제 장통에게 붙잡혔다는 말이 자못 의심스럽고, 또한 고노자가 봉상왕 5 년 이후에는 다시 본기 ( 本紀 ) 에 보이지 아니하니 그 동안에 이미 죽었을 것인데, 근 40년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매우 의심스럽다. 아마도 거짓 기록인가 싶다.

제3 환도(丸都) - 지금의 집안현(輯安縣)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의 함락[편집]

기원후 331년에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 쇠 ( 釗 ) 가 왕위를 이었다. 이 듬해 3년에 모용외도 죽고 그의 세자 황 ( 皇+光 ) 이 왕위를 이었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했으나 재략이 그에 미치지 못했고, 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아버지 외보다 뛰어난 효웅일 뿐더러, 그의 서형 ( 庶兄 ) 한 ( 翰 ) 과 그의 두 아들 준 ( 儁 ) 과 각 ( 恪 ) 등이 다 절세의 기재 ( 奇才 ) 였다. 고국원왕이 평양의 서울을 서북 ( 西北 ) 경영에 불편하다 하여 지금의 집안현 홍석정자산 ( 紅石頂子山 ) 위에 새로 환도성을 쌓아 서울을 옮겼다. 이것이 제 3 의 환도성이니, 태조왕 ( 太祖王 ) 때에 왕자 수성이 쌓은 제 1 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 ( 東川王 ) 이 쌓은 제 2 환도도 너무 적국에 가까이 있으므로, 나아가 싸우기에 편하고 물러나 지키기에 용이한 지방을 가려 서울로 하려고 이 제3의 환도성을 쌓은 것이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제3의 환도성에 천도하였다는 말을 듣자, 고구려가 장차 북벌할 것을 알고, 먼저 고구려에 침입하여 타격을 주는 동시에, 겉으로는 고구려를 피하여 멀리 달아날 곳을 가장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하려고, 극성 ---모용한 ( 慕容翰 ) 이, “우문씨는 비록 강성하나 실로 지킬 뜻을 가졌을 뿐인데, 고구려는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가 만일 우문씨를 쳤다가는 고구려가 우리의 뒤를 엄습할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먼저 고구려를 치는 것이 옳습니다. 고구려를 치자면 두 길이 있으니 , 하나는 북치 ( 北置 ) 로부터 환도성으로 향하는 북도 ( 北道 ) 요, 또 하나는 남협 ( 南협 ) 과 목저 ( 木底 ) 로 하여 환도성으로 향하는 남도 ( 南道 ) 인데, 북도 는 평탄하고 넓으나 남도는 험하고 좁아서 고구려가 남도보다도 북도를 더 엄중히 방비할 것이니, 우리가 먼저 일부 군사를 내어 북도로 침입한다 일컫고, 가만히 대군을 내어서 남도로 공격하면 환도성을 깨뜨리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여, 황은 한의 계교를 채용하였다.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군사가 북도로 침입해온다는 보고를 듣자 저들의 계교를 모르고 아우 무 ( 武 ) 를 보내 5 만의 군사로 북도를 방비 하게하여, 무는 황의 장군 왕부 ( 王富 ) 를 목베고 그 군사 1만5천을 전멸 시켰으나, 왕은 적은 군사로 남도를 방어하다가 황의 대군을 만나 크게 패하여 단기 ( 單騎 ) 로 도망하니, 환도성이 드디어 적병에게 함락되어 왕태후 ( 王太后 ) 주씨 ( 周氏 ), 왕후 모씨 ( 某氏 ) 도 다 적병에게 잡혔다. 모용황은 환도성을 얻고 다시 왕을 쫓으려다가, 황의 장군 한수 ( 韓壽 ) 가, “고구려의 왕이 비록 패해서 달아났으나, 여러 성의 구원병이 다 모여들면 넉넉히 우리 대군의 적수가 될 것이고 또 고구려의 국내에는 험한 산이 많아 추격하는 것이 위험하니,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무덤을 파서 해골을 가지고 그 모후 ( 母后 ) 와 아내를 잡아가면, 그는 죽은 아버지와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할 수 없이 항복할 것이니, 그런 다음에 은혜와 믿음으로 무마하여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장래 우리의 중원 ( 中原 ) 경영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이 그의 말을 쫓아 국고 ( 國庫 ) 에 들어가 역대의 문헌을 불태우고 모든 진귀한 보물과 재산을 약탈하고, 성곽과 대궐과 민가를 모조리 파괴하고, 미천왕의 능을파 그시체와 왕태후 주씨, 왕후 모씨를 싣고 돌아갔다. 적병은 비록 돌아갔으나 죽은 아버지와 생모가 적국에 잡혀갔으므로, 고국원왕은 부모를 찾아오기 위해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모용씨와 교제하고, 하는 수 없이 지나 대륙에 대한 경영을 포기함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약한 나라가 되었다.

환도성의 세 번의 천도는 고구려 상대 ( 上代 ) 의 성쇠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이니,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 ( 遂成 : 뒤의 次大王 ) 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의 환도성을 지금의 개평 부근에 처음으로 쌓던 때가 고구려의 가장 강성한 때이고, 발기가 모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에게 항복하므로 산상왕 ( 山上王 ) 이 제2의 환도성을 지금의 환인현 부근에 옮겨 쌓았다가 이것까지 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파괴당하려 하던 때가 고구려의 쇠퇴해진 시기이고, 미천왕이 선비를 구축하여 낙랑 · 현도 · 요동 등 군을 차례로 회복하여 중흥의 실적을 올리다가 중도에 죽고,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가지고 제3의 환도성을 지금의 집안현 부근에 다시 쌓았다가 또 모용황에게 파괴당하니, 이때는 고구려의 가장 쇠미해진 시기였다. 삼국사기에는 비록 이러한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지 못하였으나, 본기 ( 本紀 ) 의 지리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그 대강을 얻을 수 있고 삼국지 ( 三國志 ) 에 이이모 ( 伊夷謨 ) 가 다시 새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 것은 곧 제 2 의 환도성 신축을 가리킨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조선사략 ( 朝蘇史略 ) 과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어니와, 진서 ( 晉書 ) 는 이미 대략 말한 바와 같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헐뜯고 욕하기 위해 허다한 사실 아닌 기사를 거짓으로 만든 것이 많은 글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사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아니 하니, 예를 들면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갔다고 하였으나, 미천왕 때의 고구려 서울은 평양이었고, 미천왕이 돌아간지 12 년만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천도하였으니,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다 당시 왕도 ( 王都 ) 부근에 있었으므로, 미천왕은 돌아간 뒤에 반드시 평양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성에 묻히지 않았을 것인데, 환도성을 침략한 모용황이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의 능을 파갈 수 있으랴? 그러므로 미천왕의 능을 파갔다는 말이 극히 의심스러운 동시에, 그 이하에 기록 된 왕태후와 왕후를 잡아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다만 이 뒤에 고구려가 30 여 년 동안 곧 모용씨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다시 지나 대륙을 경영하지 못했음을 보면 모용씨에게 크게 패하여 불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은 사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