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제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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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구려 · 백제 양국 관계의 유래[편집]

남낙랑(南樂浪) · 동부여(東扶餘)의 존망(存亡)과 고구려 · 백제 양국의 관계[편집]

고추모(高鄒牟: 고주몽)와 소서노(召西奴) 부부가 갈라져서 고구려 · 백제의 남·북 양 왕국(王國)을 건설한 이후에, 고구려는 북방 열국을 차차 정복해 들어가 북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백제는 온조왕(溫祚王)이 마한(馬韓) 50여 나라를 통일하고 진(辰) · 변(弁) 양한(兩韓), 곧 신라·가라(加羅)를 정복하여 남방의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음은 이미 제4편 · 제5편에서 간략히 서술하였다. 두 강대국이 이와 같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수백 년 동안 피차간에 한 차례의 접촉도 없었던 이유는 남낙랑(南樂浪)과 동부여(東扶餘)가 양국간의 중간에서 장벽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양국간의 접촉 사실을 말하려 하는바, 먼저 남낙랑과 동부여의 존망(存亡) 관계부터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남낙랑(南樂浪)과 동부여(東扶餘) 열국이 고구려 대주류왕(大朱留王: 大武神王)의 정복을 받은 뒤에 고구려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늘 중국의 지원을 빌어 이를 보복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대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 次大王)이 한(漢)과 싸워 이겨 요동과 북낙랑을 회복하자, 남낙랑과 동부여가 고구려의 위력에 두려워 복종하며 준동(蠢動)하지 못하였음은 물론이고, 백제 또한 고구려에게 신하로서 복종하며 그 요구에 응하여 기병(騎兵)을 내어 고구려의 서정(西征)에 참가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제4편과 5, 6편에 이미 말하였다. 백제사(百濟史) 역시 중간에 연대(年代)의 삭감이 있어서 고구려 태조왕 때가 백제의 어느 왕 어느 대(代)에 상당하는지는 아직 발견할 수 없고, 백제 초고왕(肖古王) 이후에야 그 연대를 겨우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초고왕 32년은 곧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원년(기원후 197년)이니 , 고구려가 발기(發岐)의 난으로 인하여 요동과 북낙랑을 한인(漢人) 공손씨(公孫氏: 제 5 편 제 1 장 참조 )에게 빼앗기자, 남낙랑과 동부여는 고구려를 배반하여 자립하였다. 그리고 남낙랑의 남부에 위치한 대방(帶方: 지금의 장단(長圖) 내지 봉산(鳳 ) 등지)에서는 호족(豪族) 장씨(張氏)가 또 남낙랑을 배반하고 대방국(帶方國)을 세웠다. 백제도 이를 기회로 고구려와 관계를 끊고 자립하였으며, 초고왕(肖古王)의 아들 구수왕(仇首王)은 예(濊)가 쳐들어오는 것을 물리쳐서 나라의 형세가 더욱 강성해졌다.

백제의 고이왕(古爾王)은 초고왕(肖古王)의 동복아우(同母弟)로서, 기원후 234년에 구수왕이 죽자, 구수왕의 태자(太子: 고이왕의 종손(從孫)인 사반(沙伴))의 나이가 어린 것을 기회로 그 왕위를 빼앗았다.

이때 고구려가 관구검에게 패하고 나서 낙랑국(國)을 습격하여 남낙랑구의 옛 수도인 평양을 빼앗아 도읍을 옮기고, 남낙랑국은 풍천원(楓川原: 지금의 평강(平康)과 철원(鐵原) 사이)으로 옮겼는데, 고이왕은 남낙랑국의 변경을 침략하여 그 백성들을 약탈하였다.

이때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이 남낙랑과 한편이 되어 동부여를 쳐서 이기고 회군하였다. 고이왕은 아직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백제로서 위(魏)를 대적하여 싸울 수 없음을 알고, 그가 약탈해온 백성들을 돌려주고 화의를 청하였다.

그러나 유무(劉茂) 등이 듣지 않고 신라 북부의 여덞 개 나라를 다 남낙랑에게 떼어 붙이려 하였다. 이에 왕이 화를 내며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대방의 기리영(畸離營 : 지역 미상 )을 거쳐 가서 궁준(弓遵)의 목을 베고 위(魏)의 군사들을 물리치니, 대방왕 장씨(張氏)가 이에 백제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그 딸 보과(寶菓)를 고이왕(古爾王)의 태자 책계(責稽)에게 시집보내어 백제와 대(對) 북방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었다. 그리고 기원후 285년에 책계왕(責稽王)이 장인과 사위간의 정과 동맹국 간의 의리를 생각하여 대방을 구원하니, 이것이 백제와 고구려가 충돌하게 된 시초이다. 그 뒤에 고구려는 선비 모용씨(幕容氏)의 발흥(勃興)으로 인하여 서북 방어에 급급하여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남낙랑과 동부여는 백제의 강성해짐을 시기하여 기원후 298년에 두 나라가 진(晉)의 원병과 함께 쳐들어갔는데, 책계왕이 나가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책계왕의 아들 분서왕(汾西王)이 즉위하였으나 7년 만에 남낙랑의 자객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뒤를 이어 비류왕(比流王)이 즉위하였다.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이 북으로 요동과 북낙랑을 격파하여 선비를 쳐서 물리칠 뿐 아니라 또 남방 경영에도 힘을 써서 남낙랑과 대방을 멸망시키고, 얼마 후에는 또 백제와도 결전을 하게 되었으나, 그 때 미천왕이 죽어서 이 문제는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이 즉위하여 선비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전편(前篇)에서 말하였는데, 고국원왕이 북방 경영을 포기하고 남진주의(南進主義)를 취하여 자주 백제를 침벌하다가 마침내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을 만나 패배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남북 혈전의 형국이 이루어졌는데,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이를 서술하려고 한다.

제 2 장 근구수왕(近仇首王)의 영무(英武)와 고구려의 쇠퇴(附: 백제의 해외 정벌)[편집]

백제의 대방(帶方) 병합(倂合)과 반걸양(半乞壤) 전쟁[편집]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처음에는 왕후 진씨(眞氏)를 총애하고 왕후에게 푹 빠져 왕후의 친척인 진정(眞淨)을 신임하여 그를 조정의 좌평(佐平 : 형벌과 옥에 관한 일을 담당)을 삼았는데, 진정이 세도를 믿고 함부로 날뛰어 여러 신하들을 억압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서 20여 년 동안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이때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영명하여 마침내 진정을 파면하고,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대방(帶方)의 장씨(張氏)를 항복시켜 그 땅을 군(郡) · 현(縣)으로 만들고, 육군의 군 편제를 개량하고, 해군을 처음으로 설치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을 침략할 야심을 품었다.

이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환도성(丸都城)를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하여 선비(鮮卑)에게 실패한 치욕을 남방에서 보상받으려 하여 자주 백제를 침입하여 압박하였으며, 기원후 369년에는 기병과 보병 합하여 2만의 군사를 황 · 청 · 적 · 백 · 흑 다섯 가지 색깔의 기(旗)로 나누어 거느리고 반걸양(半乞壞: 지금의 벽란도(碧瀾渡: 예성강의 한 나루))까지 이르렀다. 근구수가 나가서 싸울 때, 전에 백제의 국영 목장의 목자(牧者)였다가 잘못하여 국마(國馬)의 말굽을 다치고는 죄를 얻게 될까봐 겁을 내어 고구려로 달아났던 사기(斯紀)가 고구려의 군인이 되어서 이 싸움에 참전하였는데, 그가 은밀히 빠져나와 근구수를 찾아와 만나보고 고(告)해 바치기를 “저들의 군사 수가 비록 많으나 거의 다 남의 눈을 속이려고 숫자만 채워 넣은 의병(疑兵)들일 뿐이고, 오직 적기병(赤騎兵)만이 용맹하니, 그들만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스스로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근구수가 그의 말을 좇아 용감한 정예병들을 뽑아 적기병을 습격하여 개뜨리고 나서, 고구려의 군사를 전부 쳐서 뿔뿔이 달아나게 하여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신계(新溪)) 서북까지 진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다 돌을 쌓아 기념탑을 만들고 패하(浿河: 대동강 상류, 지금의 곡산(谷山), 상원(祥原) 등지 ) 이남을 거두어 전부 백제 땅으로 만들었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전사와 백제의 재령(載寧) 천도[편집]

반걸양(半乞壞) 전쟁 후 3년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그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고, 정예병 2만으로 패하(浿河)를 건넜는데,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근구수(近仇首)를 보내어 미리 강 남쪽 언덕에 복병하였다가 불의에 맞아 싸워서 고국원왕을 사살하고 패하를 건너 수도인 평양을 함락시키니, 고구려가 이에 다시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집안현(輯安縣))으로 도읍을 옮기고, 고국원왕의 아들 소주류왕(小朱留王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세워 백제를 방어하였다. 근초고왕이 상한수 ( 上漢水 )---지금의 재령강 ( 載寧江 ) 에 이르러 황기 ( 黃旗 ) 를 세워 크게 열병식을 행하고 서울을 상한성 ( 上漢城 ) 지금의 재령 ( 載寧 ) 으로 옮겨 더욱 북방 진출 을 꾀했다 . 삼국사기 고구려 지리지 ( 地理志 ) 에는 고국원왕의 평양 천도를 기록하고 소주류왕의 국내성 재천도는 기록하지 아니하여 , 역대의 사학가들이 모두 고국원왕 이후에는 고구려가 내처 평양 등지에 서울한 줄로 안다 . 그러나 고구려가 국내성을 고국천 ( 故國川 ) · 고국양 ( 故國壞 ) · 고국원 ( 故國原 ) 이라 일컬었으니 , 고국원왕의 시체가 그 천도의 역사 ( 役事 ) 를 따라 북쪽에 옮겨 장사지내졌으므로 고국원왕이라 일컬은 것이다 . 이는 이때 고구려가 국내성에 환도 ( 還都 ) 한 한 증거다 . 광개토경평안호태왕 ( 廣開土境平安好太王 ) 의 비문에 의하면 평안호태왕은 국내성에서 생장하여 국내성 부근에 장사지냈음이 분명하니 이는 평안호태왕의 전대 ( 前代 ) 에 국내성에 환도한 또 한 증거다 . 국내성 환도는 곧 백제의 침략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 또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 ( 漢城 ) 에 도읍하였다 .”고 하였고 , 지리지에는 한성을 곧 남평양 ( 南平壞 ) 이라 하였으며 , 이 밖에도 삼국사기 가운데 한성을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친 데가 대여섯 군데나 된다 . 그러나 지금의 한성은 오직 장수왕 ( 長壽王 ) 이 한 번 함락시킨 일 이외에 그 이전에는 어느 해 어느 달에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는 기록이 전연 없으니 북평양 ( 北平壞 ) 은 북낙랑 ( 北樂浪 ) 곧 요동의 개평 ( 蓋平 ) · 해성 ( 海城 ) 등지요 , 남평양은 곧 지금의 평양이니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 ( 서울 ) 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한 증거요 , 지리지에 중반군 ( 重盤君 : 지금 재령의 딴 이름 ) 이 한성 ( 漢城 ) 이라 하였으니 , 백제가 이미 평양을 함락하고 북진하여 지금의 재령에 도읍하였을 것이 사리에 맞을 뿐더러 만일 근초고왕이 쳐 빼앗은 평양이 지금의 한성이라고 한다면 어찌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아 도읍하였다 .”고 기록하거나 “고구려의 한성을 빼앗아 도읍하였다 .”고 기록하지 않고 구태여 평양과 한성을 갈라서 “고구려의 평양을 빼앗고 물러나 한성에 도읍하였다 .”라고 기록하였으랴 ? 이것은 근초고왕이 빼앗은 평양이 한성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인 또 하나의 증거이다 . 본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이 물러난 한성 부근에 한수 ( 漢水 ) · 청목령 ( 靑木領 ) 등 지명이 있으므로 어떤 이는 위의 한수를 지금의 한강 ( 漢江 ) 이라 하고 , 위의 청목령을 지금의 송악 ( 松嶽 ) 이라고 하지마는 대개 고대에 서울을 옮기면 그 부근의 지명도 따라 옮겼으니 위의 한수 · 청목령 등은 다 근초고왕이 전도할 때에 따라 옮긴 지명이요 , 지금의 한강과 지금의 송악이 아니다 . 백제에 원래 세 한강이 있었으니 지금 한성에 가까운 한강이 그 하나요 , 앞에 말한 재령 ( 載寧 ) 한성의 월당강 ( 月居江 ) 한강이 그 둘이요 , 나중에 문주왕 ( 文周王 ) 이 천도한 직산 ( 稷山 ) 위례성 ( 慰禮城 ) 한성에 가까운 지금 양성 ( 陽城 ) 의 한내가 그 셋이다· 이 책에서는 그 구별의 편의를 위하여 제 1 은 중한수 ( 中漢水 ) · 중한성 ( 中漢城 ) 이라 하고 , 제 2 는 상한수 ( 上漢水 ) · 상한성 ( 上漢城 ) 이라 하고 , 제 3 은 하한수 ( 下漢水 ) · 하한성 ( 下漢城 ) 이라 한다 .

근구수왕(近仇首王) 즉위 후의 해외경략(海外經略)[편집]

근구수왕이 기원후 375 년에 즉위하여 재위 10 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한 번 평양 침입이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을 경략 하여 선비 ( 鮮卑 ) 모용씨 ( 慕容氏 ) 의 연 ( 燕 ) 과 부씨 ( 符氏 ) 의 진( 秦 )을 정벌하여 , 지금의 요서 ( 遼西 ) · 산동 ( 山東 ) · 강소 ( 江蘇 ) · 절강 ( 浙江 ) 등지를 경략하여 넓은 땅을 장만하였다.

이런 기록이 비록 백제 본기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양서 ( 梁書 ) 와 송서 ( 宋書 ) 에 "백제가 요서와 진평군 ( 晋平郡 ) 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 百濟 略有遼西晋平郡 )· ”고 했고, 자치통감 ( 資治通鑑 ) 에는 “부여 ( 扶餘 ) 가 처음에 녹산 ( 塵山 ) 에 웅거하였다가 백제에게 격파당해 서쪽 연 ( 燕 ) 가까이로 옮겼다."(扶餘 初據鹿山 爲百濟所殘破 西徒近燕 ) ”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대개 근구수가 근초고왕의 태자로서 군국 ( 軍國 ) 대사를 대리하여 이미 침입하는 고구려를 격퇴하고, 나아가서 지금의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고는 해군을 확장하여 바다를 건너 지나 대륙에 침입하여 모용씨를 쳐서 요서와 북경( 北京 )을 빼앗아 요서 ( 遼西 ) 진평 ( 晋平 ) 두 군을 설치하고, 녹산 ( 塵山 )---지금의 합이빈 ( 哈爾濱 ) 까지 들어가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여 북부여가 지금의 개원 ( 開原 ) 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으며, 모용씨가 망한 뒤 지금의 섬서성 ( 陝西省 ) 에서는 진왕 ( 秦王 ) 부견 ( 符堅 : 역시 선비족 ) 이 강성해지매, 근구수왕이 또 진과 싸워 지금의 산동 ( 山東 ) 등지를 자주 정벌하여 이를 피곤하게 하였으며, 남으로 지금의 강소 · 절강성 등지를 차지하고 있는 진 ( 晋 ) 을 쳐서 또 한 얼마간의 주군 ( 州軍 ) 을 빼앗았으므로 여러 책의 기록이 대략 이러한 것이다.

그러면 진서 ( 晋書 ) 나 위서 ( 魏書 ) 나 남제서 ( 南齊書 ) 에는 어찌하여 이를 빼버렸는가? 지나 사관 ( 史官 ) 이 매양 국치 ( 國恥 ) 를 꺼려 숨기는 괴상한 버릇이 있어, 지나에 들어가 주인 노릇한 모용씨의 연 ( 蘇 ) 이나 부씨 ( 符氏 ) 의 진 ( 奏 ) 이나 척발씨 ( 拓跋氏 ) 의 위 ( 魏 ) 나 근세의 요 ( 遼 ) · 금 ( 金 ) · 원 ( 元 ) · 청 ( 淸 ) 같은 것은 저들이 자기네의 역대 제왕으로 인정하므로 그 공업 ( 功業 ) 을 그대로 기록하였거니와 그 외에는 거의 이를 삭제하였을 뿐더러 당태종 ( 唐太宗 ) 이 백제와 고구려를 침노하여 핍박할 때 그 장사를 고무하기 위해 양국의 지나 침입 기록을 없애버리고는 조선의 양국 토지의 절반이 본래 지나의 소유였다고 위증 ( 僞證 ) 하니, 진서는 당태종 자신의 저서이므로 말할 것도 없이 백제 근구수왕의 대 지나 전공 ( 戰功 ) 을 뺐을 것이고, 위서 · 남제서 같은 것은 당태종 이전의 것이므로 또한 구수왕의 서정 ( 西征 ) 이야기를 뺐을 것이며, 오직 양서 ( 梁書 ) 나 송서 ( 宋書 ) 의 “백제가 요서를 공략해서 차지하였다. ”고 한 구절은 그 기록이 너무 간단하고 사실이 너무 소략 ( 少略 ) 하므로, 당태종이 우연히 주의하지 못하여 그 문자가 그대로 유전 ( 流傳 ) 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백제 본기에는 이런 일을 빼었는가? 이는 신라가 백제를 미워하여 이를 뺏을 것이고, 또는 후세에 사대주의가 성행하여 무릇 조선이 지나를 친 사실은 겨우 이미 지나사에 보인 것만을 뽑아다 기록하고 그 나머지는 다 빼버린 때문이다.

근구수왕의 무공에 관한 기록만 이같이 삭제되었을 뿐 아니라 문화에 관한 것도 많이 삭제되었으니, 이를테면 근구수왕이 10 여 년은 태자로, 10 년은 대왕으로 백제의 정권을 잡았는데 본기에 근구수왕의 문화적 사업에 관한 기록이라고는 겨우 박사 ( 博士 ) 고흥 ( 高興 ) 을 얻어 백제서기 ( 百濟書記 )---백제사를 지은 것 한 가지밖에 없다 . 그러나 나는 일본사의 성덕태자 ( 聖德太子 ) 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구수의 근 ( 近 ) 은 음이 '검건'이니 백제 때에는성 ( 聖 ) 을 '검건'이라하였으므로, 근초고·근구수·근개루 ( 近蓋童 ) 의 근 ( 近 ) 이 다 성 ( 聖 ) 을 의미하는 것이요, 구수 ( 仇首 ) 는 음이 '검구수', 구수는 마구 ( 馬廐 ) 를 일컬음이므로 일본의 성덕태자의 성덕 ( 聖德 ) 이란 칭호는 근구수의 근 ( 近 ) 을 가져간 것이요, 성덕태자가 마구간 언저리에서 났으므로 구호 ( 廐戶 ) 로 이름했다고 하는 것은 근구수의 구수 ( 仇首 ) 를 본받은 것이다. 이로 미루어 '성덕태자가 헌법17 조를 제정했다. '고 하는 것과 ' 불법 ( 佛法 ) 을 들여갔다. '고 하는 것도다 일본인이 근구수왕의 공적을 흠모하여 이를 본떠다가 저 성덕태자전 가운데 넣은 것이 분명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침류왕 (枕流王 ) 원년 ( 기원후 384년 ) 9월에 “호승 ( 胡增 ) 마라난타 ( 摩羅難陀 ) 가 진 ( 晋 ) 으로부터 왔다. ”고 하였는데, 역사가들이 이를 빙거하여 백제 불교의 시초를 침류왕 원년으로 잡지마는 삼국사기에 매양 전왕의 말년을 신왕의 원년으로 삼고, 인하여 전왕 말년의 일을 선왕 원년의 일로 잘못 쓴 것이 허다하니 이는 따로 변론할 것이거니와 마라난타가 백제에 들어온 해는 근구수왕 말년 기원383년이요, 침류왕 원년 기원후 384년이 아니다.

제 3 장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북진정책과 선비(鮮卑) 정복[편집]

광개토태왕의 북토(北討) 남정(南征)의 시작[편집]

기원후 384 년에 근구수왕 ( 近仇首王 ) 이 죽고 맏아들 침류왕 ( 枕流王 ) 이 왕위를 이은 지 2 년 만에 죽으므로, 둘째아들 진사왕 ( 辰斯王 ) 이 즉위 하였다. 진사왕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용감하다 일컬어졌으나 천성이 호탕하여 근구수왕이 성취한 강대국의 권력을 빙자하여 인민을 가혹하게 부려서 청목령 ( 靑木嶺 ) --- 지금의 송도 ( 松都 ) 로부터 팔곤성 ( 八坤城 )--- 지금의 곡산 ( 谷山 ) 등지까지 성책 ( 城柵 ) 을 쌓고, 다시 서쪽으로 꺾어 서해 ( 西海 ) 까지 이르러 천여 리 장성을 쌓아 고구려를 막게 하고, 서울에는 백제 건국 이래 처음이라 할 만한 장려한 대궐을 짓고 큰 연못을 파서 여러 가지 고기를 기르고 연못 가운데는 가산 ( 假 山 ) 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이상한 풀을 길러서 오락이 극도에 이르러 인민이 원망하고, 해외의 영토는 다 적국에게 빼앗겨 나라의 형세가 점차 쇠약해졌다.

고구려 고국양왕 ( 故國壞王 ) 은 곧 진사왕과 한때이니 조왕 ( 祖王 ) 피살의 원수와 국토를 깎인 치욕을 갚기 위해 늘 백제 치기를 별렀다. 이때 선비의 모용씨 ( 幕容氏 ) 가 진 ( 秦 ) 에게 망하고 진왕 ( 秦王 ) 부견 ( 符堅 ) 이 강성하여 90 만 군사로 동진 ( 東晋 ) 을 치다가 크게 패하는지라 고국양왕이 이를 기회하여 요동 · 북낙랑 ( 北樂浪 ) · 현도 등 군을 다 회복하였는데, 모용씨 중에 모용수 ( 熹容垂 ) 란 자가 다시 궐기하여 지금의 직예성 ( 直 匠省 ) 에 웅거하여 천왕 ( 天王 ) 의 자리에 나아가 나라 이름을 다시 연 ( 燕 ) 이라 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자주 군사를 내어 요동을 집적거리고, 또 몽고 등지에 와려족 [ 와麗族 : 本紀의 契丹(거란) ]이 강성 해져서 고구려의 신성 ( 新城 ) 등지를 침략하였다. 그래서 고국원왕은 즉위 후에 모용수와 싸워 요동을 회복하고 와려족을 몰아내서 북쪽 경계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남쪽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고국양왕 말년에 이르러 태자 담덕 ( 談德 ) 곧 뒤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병마 ( 兵馬 ) 를 맡아 매양 신속한 전략으로 백제의 군사를 습격하여 석현 ( 石峴 ) 등 10 여 성을 회복하니, 진사왕이 여러 번 크게 패하여 드디어 한강 ( 漢江 ) 남쪽의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광주 ( 廣州 ) 남한산 ( 南漢山 ) 으로 도읍을 옮기고, 담덕의 군사가 두려워서 나아가 싸우지 못하여, 중한수 ( 中漢水 ) --- 지금 한강 이북의 땅이 거의 고구려의 차지가 되고 관미성 ( 關彌城 ) --- 지금의 강화 ( 江華 ) 는 예부터 천험 ( 天險 ) 으로 일컫는 곳이지마는 또한 담덕의 해군에게 함락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전쟁을 기록하였으나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석에는 이런 말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삼국사기는 원래 고기 ( 古記 ) 에 의거한 것인데, 고기가 이제 전하지 않지마는 여러 책에 인용된 고기의 문자를 보면 편년사 ( 編年史 ) 가 아니고 기전체 ( 紀傳體 ) 이기 때문에 연대의 조사가 매우 곤란하다. 김부식이 착실히 조사해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모든 사실을 각 왕의 연조에 분배하였으므로 아라가라 ( 阿羅加羅 ) 의 멸망은 법흥왕 ( 法興王 ) 원년의 일인데 진흥왕 ( 眞興王 ) 37 년의 일이라 하였고, 담덕의 석현 ( 石峴 ) 등 성의 회복과 나려족의 격퇴는 고국양왕 말년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태자 담덕으로 있을 때의 일인데 왕이 된 뒤의 일로 잘못 기록하였다 .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잘 분별한 뒤에 삼국사기를 읽는 것이 좋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과려족(顆麗族) 원정[편집]

고구려 태자 담덕 ( 談德 ) 이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나려가 자주 변경을 침노하므로 즉위 5 년, 기원후 395 년에 원정군을 일으켜 파부산 ( 파富山 ) 과 부산 ( 負山 ) 을 지나 염수 ( 鹽水 ) 에 이르러 그 부락 6, 7 백을 파괴하고 소 · 말 · 양을 노획하여 돌아오니, 파부산은 수문비사 ( 修文備史 ) 에 지금 음산산맥 ( 陰山山脈 ) 의 와룡 ( 臥龍 ) 이라 하였고, 부산은 지금 감숙성 ( 甘蕭省 ) 서북쪽의 아랍선산 ( 阿拉善山 ) 이라 하였으며, 염수는 몽고지지 ( 蒙古地誌 ) 에 의하면 소금기[鹽分]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 ( 吉蘭泰 ) 란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더미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보면 대개 광개토왕의 발자취가 지금의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 이 원정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누락되었고, 광개토왕의 비문에만 기록되었는데 와려가 혹시 본기에 있는 대로 글안[契丹]이 아닌가 하지마는 실은 글안은 선비 ( 鮮卑 ) 의 후예니 광개토왕 당시의 선비는 모용씨 · 우문씨 등이요 , 글안이란 명칭이 없었으니 본기의 글안은 곧 후세 역사가들이 와려를 글안으로 망령되게 고친 것이다. 와려가 글안이 아니면 어느 종족인가? 위서 ( 魏書 ) 나 북사 ( 北史 ) 에 의하면 흉노 ( 匈奴 ) 의 후예인 유유 ( 유유 ) 라는 종족이 지금의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한때 강성하였으니 와려나 유유가 그글자의 음이 '라라'이니 와려는 곧 흉노의 후예이다.

광개토태왕 왜구(倭寇) 격퇴[편집]

왜 ( 倭 ) 는 일본의 본 이름이니, 지금 일본이 왜와 일본을 구분하여 왜는 북해도 ( 北海道 ) 의 아이누 족이요, 일본은 대화족 ( 大和族 ) 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 음에 화 ( 和 ) · 왜 ( 慶 ) 가 같으니 일본이 곧 왜임이 분명한데 저들이 근세에 와서 조선사나 지나사에 쓰인 '왜'가 너무 문화 없는 흉포한 야만족임을 부끄럽게 여겨 드디어 화(和)란 명사를 지어냈다. 백제 건국 이후까지도 왜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일본삼도 ( 日本三島 : 일본의 국토를 이룬 세 섬, 곧 本州 · 四國·九州 ) 에서 고기잡고 사냥으로 생활을 할 뿐 아무런 문화가 없었는데, 백제의 고이왕 ( 古 爾王 ) 이 그들을 가르쳐 인도해서 봉직 ( 縫織 ) 과 농작 ( 農作 ) 과 그 밖의 백공 ( 百工 ) 의 기예를 가르치고 박사 왕인 ( 王仁 ) 을 보내 논어 ( 論語 ) 와 천자문 ( 千字文 ) 을 가르쳐주고 백제의 가명 ( 假名 ) 곧 백제의 이두자 ( 吏讀字 ) 에 의하여 일본의 가나 ( 假名 ) 란 것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이 소위 일본 자라는 것이다. 왜가 이와 같이 백제의 교화를 받아 백제의 속국이 되었으나 천성이 침략하기를 좋아해서 도리어 백제를 침범하여 진사왕 말년에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에게 석현 ( 石峴 ) 등 10 여 성을 빼앗낌을 통분히 여겨 기원후 391 년 ( 광개토왕 원년 ) 에 왕이 진무 ( 眞武 ) 로 하여금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공격하고, 한편으로 왜와 친교하여 함께 고구려에 대한 동맹을 맺었다. 5 년 ( 기원후 395 년 ) 에 광개토왕이 와려 원정에서 회군하여 수군으로 백제의 연해 ( 沿海 ) 와 연강 ( 沿江 ) 의 일팔성 ( 壹八城 ) · 구모로성 ( 臼模盧城 ) · 고모야라성 ( 古模耶羅城 ) · 관미성 ( 關彌城 ) 등을 함락시키고, 육군으로 미추성 ( 彌鄒城 ) · 야리성 ( 也利城 ) · 소가성 ( 掃加城 ) · 대산한성 ( 大山韓城 ) 등을 함락시키고 왕이 몸소 갑옷 투구를 두르고 아리수 ( 阿利水 ) --- 지금의 월당강 ( 月唐江 ) 을 건너 백제 군사 8 천여 명을 죽이니, 백제의 아신왕 ( 阿莘王 ) 이 다급하여 왕제 한사람과 대신 10 사람을 볼모로 올리고 남녀 1 천 명, 세포 ( 細布 ) 1 천 필을 바치고 '노객 ( 如客 ) '의 맹서 ( 盟書 ) 를 쓰고 고구려를 피해 사산 ( 사山 ) ---지금의 직산 ( 稷山 ) 으로 천도하여 '신위례성 ( 新慰禮城 ) '이라 일컬었다 . 그 뒤 고구려가 북쪽 선비와의 싸움이 있을 적마다 백제는 그 맹약을 어기고 왜병 ( 倭兵 ) 을 불러 고구려가 새로 점령한 땅을 침노하고 또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 됨을 미워하여 왜병으로 신라를 침노하였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용병이 신과 같이 신속하여 북으로 선비를 치는 틈에 매양 백제의 기선 ( 機先 ) 을 제어하여 왜를 격파해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임나가라 ( 任那加羅 ) ---지금의 고령 ( 高靈 ) 에서 왜병을 대파하여 선라의 내물왕 ( 奈勿王 ) 이 몸소 광개토왕을 찾아보고 사례함에 이르렀으며, 기원후 407 년 지금의 대동강 수전 ( 水戰 ) 에서 가장 기묘한 공을 세워 왜병 수만 명을 전멸시키고 갑옷 투구 1 만여 벌과 수없이 많은 무기와 물자를 얻으니 왜가 이를 두려워하여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여 남쪽이 오랫동안 평온하였다.

광개토태왕의 환도(丸都) 천도와 선비(鮮卑) 정복[편집]

광개토왕은 야심이 많고 무략 ( 武略 ) 이 뛰어난 인물이지마는 동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만은 대단하였다. 그래서 백제를 공격함은 그가 왜와 결탁함을 미워해서이지 땅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쪽의 강성한 선비를 정벌하여 지금의 봉천성 ( 奉天省 ) · 직예성 ( 直匠省 ) 등지를 차지하려 하였던 것이므로 남쪽에 대한 전쟁은 늘 소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요, 북쪽의 전쟁이 비로소 적극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왕은 제 5 의 서울인 안시성 ( 安市城 )--- 지금 개평 ( 蓋平 ) 부근으로 천도하고, 선비 모용씨와 10 여 년 전쟁에 계속하여 매양 허를 찔러 불의에 쳐서 선비를 격파, 마침내 요동으로 부터 요서 ( 遼西 )--- 지금의 영평부 ( 永平府 ) 까지 차지하니, 상승 ( 常勝 ) 의 명장이라 일컫던 연왕 ( 燕王 ) 모용수 ( 慕容垂 ) 도 패하여 물러나고, 그 뒤를 이은 연왕 ( 燕王 ) 성 ( 盛 ) · 희 ( 熙 ) 등 지나 역사상 일대의 효웅들이 다 꺾여서 할 수 없이 수천 리의 땅을 고구려에게 떼어 주어 광개토왕이란 그 존호 ( 存號 ) 와 같이 국토를 넓혔다. 진서 ( 晋書 ) 에 겨우 “태왕 ( 太王 : 好太王 ) 이 연 평주 ( 燕 平州 ) 의 숙군성 ( 宿軍城 ) 을 침노하므로 평주자사 ( 平州刺史 ) 모용귀 ( 慕容歸 ) 가 달아났다. ”고 기록 하였을 뿐이고, 그 외에는 도리어 연 ( 燕 ) 이 상승한 것으로 기록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춘추 ( 春秋 ) 에 적 ( 狄 ) 이 위 ( 衛 ) 를 멸망시킨 것을 기록하지 않음과 같이 외국과의 전쟁에 패한 것을 숨기는 것은 지나 사관 ( 史官 ) 의 상례거니와 당시 이 모용씨 ( 慕容氏 ) 의 연이 멸망하고 척발씨 ( 拓跋氏 ) 의 위 ( 魏 ) 가 강성하였음도 호태왕이 연을 공격한 것과 직접으로 관계가 있고, 동진 ( 東晋 ) 의 유유 ( 劉裕 ) 가 일어나서 선비족 ( 鮮卑族 ) 과 강족 ( 差族 ) 을 이기고 송고조 ( 宋高祖 ) 가 황제될 터를 닦은 것도 호태왕의 연을 공격한 것과 간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인데, 저들이 그 완고하고 편벽된 상례를 지켜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아니하였으므로, 기원후 5 세기 초의 지나 대국 ( 大局 ) 의 변화한 원인이 가려진 것이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문은 진서 ( 晋書 ) 와 달리 곧 호태왕의 후손 제왕이 세운 것인데, 그 가운데 선비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 ( 輯安縣 ) 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 사람 영자평 ( 英子平 ) 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필담 ( 筆談 ) 으로 한 비에 대한 그의 이야기 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설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영희 ( 榮禧 : 역시 만주 사람 ) 가 이를 발견하였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칼과 도끼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 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적 ( 眞的 ) 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니까 이 비문에 호태왕의 정작 선비 ( 鮮卑 ) 정복한 큰 전공이 없음은 삭제된 때문이다. 아무튼 호태왕이 평주 ( 平州 ) 를 함락시키고 그 뒤에 선비의 쇠퇴를 타 자꾸 나아갔더면 호태왕이 개척한 토지가 그 존호 이상으로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미 말한 바와 같이 호태왕은 동족을 사랑하는 이였으므로 연신 ( 燕臣 ) 풍발 ( 馮跋 ) 이 연왕 희 ( 熙 ) 를 죽이고, 고구려 선왕의 서손 ( 庶孫 ) 으로 연에서 벼슬하던 고운 ( 高雲 ) 을 세워 천왕 ( 天王 ) 이라 일컫고 호태왕에게 보고하니, 호태왕은 “이는 동족이니 싸울 수 없다.”하고 사신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고 촌수를 따져 친족의 의를 말하고 전쟁을 그만두니 호태왕의 북진 ( 北進 ) 정책이 이에 종말을 고하였다. 호 태왕은 기원후 375 년 ( 백제 근구수왕 원년 ) 에 나서 기원후 391 년에 즉위하여 413 년에 돌아가니 나이 39 살이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조각난 비석이 지금 봉천성 집안현 북쪽 2 리쯤에 있는데 길이가 대략 21 척 ( 폭 4 척 7 촌 ~6 척 5 촌 ) 이니, 근세에 만주 사람 영희 ( 榮禧) 라는 이가 발견하여 인행 ( 印行 ) 하였는데 비석에 떨어져나간 글자가 많았다. 그 뒤에 일본 사람이 그 비를 차지하여 인행해서 팔았으나 그 떨어져나간 글자를 혹 석회로 발라서 글자를 만든 곳이 있어서 학자들이 그 진상을 잃었음을 한탄한다.

제 4 장 장수태왕(長壽太王)의 남진정책과 백제의 천도[편집]

장수태왕(長壽太王)의 역대(歷代) 정책(政策)의 변경[편집]

기원후 413 년에 장수태왕이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491 년에 돌아가니 재위 79 년이었는데, 이 79 년 동안은 조선 정치사상에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기간이다. 무슨 변화인가? 곧 고구려 역대 제왕들이 혹은 북진주의 ( 北進主義 ) 를 쓰고 혹은 남북병진주의 ( 南北幷進主義 ) 를 써왔는데 북수남진주의 ( 北守南進主義 ) 가 장수태왕 때부터 비롯되어 드디어 남방 세 나라 대 고구려 공수동맹을 환기 ( 煥起 ) 시켰다. 남방의 백제는 이미 강성해졌고, 신라와 가라 ( 加羅 : 駕洛 ) 도 차차 강성해져서 전일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니 고구려 정치가가 되어서는 부득이 남쪽을 돌아보지 아니 할 수 없었다.

광개토왕은 다만 외족 ( 外族 ) 여러 나라 지나 · 선비 · 와려 ( 硬麗 ) 등 을 정복하여 동족 여러 나라는 자연 그 깃발 아래 무릎을 꿇도록 하였거니와 장수태왕은 이 정책을 위험시하여 먼저 동족 여러 나라를 통일한 뒤에 외족과 싸우는 것이 옳다고 하여 드디어 광개토왕의 정책을 변경하여 평양으로 천도하고 북수남진주의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에 연 ( 燕 ) 의 신하 풍발 ( 馮跋 ) 이 연왕 희 ( 熙 ) 를 죽이고 고구려의 지손 ( 支孫 ) 고운 ( 高雲 ) 을 세워 황제를 삼아서 광개토왕의 문죄 ( 問罪 ) 를 면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풍발이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서서 천왕 ( 天王 ) 이라 하였다. 제 2 세 홍 ( 弘 ) 에 이르러는 선비 별부 ( 別部 ) 의 척발씨 ( 拓跋氏 ) 가 지금의 산서 ( 山西 ) 등지에 나라를 세워 날로 커져서 황하 ( 黃河 ) 이북을 거의 다 차지하고 군사를 내어 연을 치니 홍의 국토 가 날로 줄어들어서 견디어내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자주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서 구원을 빌었다. 장수왕은 북수남진 ( 北守南進 ) 이 그의 작정한 정책이었으므로 위 ( 魏 ) 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연이 모용희 ( 慕容熙 ) 이래로 백성의 힘을 빼앗아 대궐과 동산을 극히 장려하게 만들 뿐 아니라 궁중에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수없이 모아들여서 음탕과 호사가 모든 나라의 으뜸이었으므로, 비상한 이기심을 가진 장수왕이 이를 탐내어 연의 사신을 속여 “고구려가 남쪽 백제의 난이 있어 아직 큰 군사를 낼 수 없으나 연왕이 즐겨 고구려에 와서 머무르면 마땅히 장사를 보내서 영접하고 일후에 기회를 보아 구원해주겠노라.”고 하니 연왕 홍 ( 弘 ) 이 이를 허락하였다.

기원후 426 년에 위가 기병 1 만과 보병 수만을 내어 연의 서울 화룡 ( 和龍 )---지금의 업 ( 업 ) 을 침노하매, 장수왕이 ' 말치〔左輔〕' 맹광 ( 孟光 ) 을 보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연왕 흥을 맞이하게 하니, 위의 군사가 이미 연의 서울에 이르러 서문으로 입성하는지라 맹광이 급히 동문으로 들어가 위에 항복한 연의 상서령 ( 尙書令 ) 곽생 ( 郭生 ) 의 군사와 싸워 곽생을 쏘아 죽이고 격파하고 대궐에 불을 지르고 진귀한 보물과 미인을 거두어가지고 돌아왔다. 위의 임금은 그 보물과 미인을 빼앗겼음은 나무라지 못하고, 다만 연왕 홍이 고구려에 머무름을 싫어하여 그를 넘겨주기를 청하였으나 장수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환심을 잃지 아니하려 하여 자주 위와 교통하고 또 남지나의 송 ( 宋 ) 을 친히 사귀어 위를 견제하였다.

위기승(圍碁僧)의 음모와 백제의 피폐(疲弊)[편집]

장수왕은 외교의 수단으로 지나의 위 ( 魏 ) 와 송 ( 宋 ) 을 견제하고는 백제를 파멸시키기에 전력하였다. 그러나 왕은 부왕 광개토왕과 같은 전략가가 아니라 흉칙하고 악독한 음모가였다. 적국에 대하여 칼이나 활로 정면을 공격하지 않고 먼저 간사하고 악독한 계책으로 심복을 썩인 뒤에 손을 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 비밀히 조서를 내려 백제의 내정을 문란케 할 기묘한 계략을 가진 책사 ( 策士 ) 를 구하였는데, 그 조서에 응하여 불교승 ( 佛敎增 ) 도림 ( 道琳 ) 이 나섰다.

당시 백제의 근개루왕 ( 近蓋婁王 ) 은 바둑의 명수였고 도림도 바둑의 명수였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비밀히 아뢰어 거짓 죄를 지은 사람의 행장으로 차려 백제로 들어가서 근개루왕을 만나보고 바둑동무가 되어 아침 저녁으로 근개루왕을 모시고 바둑을 두었다. 근개루왕은 자기의 바둑 적수가 천하에 오직 도림 한 사람 뿐이라 하여 사랑하기 짝이 없었다. 도림이 몇 해 동안 근개루왕의 곁에 있어 왕의 성격과 행동을 자세히 알아보고는 “신이 한낱 망명해온 죄인으로서 대왕의 총애를 받아 의식 거처를 이같이 사치하고 아름답게 하니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제 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한 마디 대왕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왕의 나라가 안으로는 산을 끼고 밖으로는 바다와 강이 둘러 있어 적병이 백만이라도 어찌하지 못할 천험 ( 天險 ) 이니, 대왕께서 이같은 천험에 의하여 숭고한 지위와 부유한 왕업을 가지고 사방의 눈과 귀를 일으켜 세울 만한 기세를 지으시면 사방의 여러 나라들이 바야흐로 존숭하여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을 높이 쌓지 못하시고 대궐을 크게 짓지 못하시며 선왕의 해골을 작은 뫼에 파묻고 인민의 집은 해마다 장마에 떠내려 보내서 외국인이 보기에 창피한 일이 많으니 누가 대왕의 나라를 우러러보며 높이 받들려고 하겠습니까? 신은 대왕을 위하여 취하실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근개루왕이 그의 말을 달게 여겨 전국의 남녀를 전부 징발하여 벽돌을 구워 둘레 수십 리나 되는 왕성 ( 王城 ) 을 높이 쌓고 성 안에는 하늘에 닿을 듯한 대궐을 짓고 욱리하 ( 郁里河 )--- 지금의 양성 ( 陽城 ) 한래 가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대석관 ( 大石棺 ) 을 만들어 부왕의 해골을 넣고 큰 왕릉을 만틀어서 묻고, 왕성의 동쪽에서 숭산 ( 崇山 ) 의 북쪽까지 욱리하의 제방을 쌓아 어떠한 장마에도 물의 재난이 없도록 하였다.

이 같은 공사를 치르고 나니 국고가 탕진되고 군자 ( 軍資 ) 도 모자라고 백성들의 힘도 쇠잔해지니,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나라 형세가 위태롭기가 누란 ( 累卵 ) 과 같았다. 이에 도림이 성공한 줄을 알고 도망하여 고구려에 돌아와서 장수왕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고구려군의 침입과 근개루왕(近蓋婁王)의 순국(殉國)[편집]

장수왕이 도림의 보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치' 제우 ( 齊于 ) 와 백제의 항복한 장수 재증걸루 ( 再曾桀婁 ) · 고이만년 ( 古爾萬年 ) 등을 보내서 3 만의 군사로 백제의 신위례성 ( 新慰禮城 )--- 지금 직산 ( 稷山 ) 부근의 고성을 치니, 근개루왕이 고구려 군사가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도림의 간사한 계책에 속은 줄 알고 태자 문주 ( 文周 ) 를 불러 “내가 어리석어서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나라가 이 꼴이 되었으니 비록 위급한 환난이 있은들 누가 나를 위하여 힘쓸 이가 있겠느냐? 고구려 군사가 이르면 나는 국가의 희생이 되어 속죄하려니와 네가 나를 따라 부자가 함께 죽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너는 빨리 남쪽으로 달아나 의병을 모으고 외국의 원조를 청하여 조상의 업을 이어라.” 하고 울면서 문주를 떠나 보냈다. 제우 ( 齊于 ) 등이 북성 ( 北城 ) 을 쳐 7 일 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성 ( 南城 ) 을 치니, 온 성중 이 떨고 소동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근개루왕이 친히 나가서 싸우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잡혔다. 결루 ( 桀婁 ) · 만년 ( 萬年 ) 등이 처음에는 전일 군신의 의리를 차려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더니 갑자기 왕의 얼굴에 세 번이나 침을 뱉어 꾸짖고, 왕을 결박하여 아차성 ( 呵且城 )--- 지금의 광주 ( 廣州 ) 아차산 ( 峨且山 ) 에 이르러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해쳤다. 이에 신위례성 지금의 직산 ( 稷山 ) 이북이 모두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아신왕 ( 阿莘王 ) 이 광개토왕을 피해 신위례성으로 서울을 옮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정다산 (丁茶山 ) 이 직산을 문주왕 ( 文周王 ) 남천 ( 南遷 ) 후의 잠도 ( 暫都 : 임시로 잠시었던 서울 ) 라 한 것은 그릇 된 판단이다. 사성 (사城 ) 은 직산의 옛 이틈이고 숭산 ( 崇山 ) 은 아산 ( 牙山 ) 의 옛 이름이니, 이 장 ( 章 ) 을 참고하면 직산 위례성이 문주왕 이전 곧 아신왕이 천도한 곳임이 더욱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