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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국사(상) (6차 교육과정)/Ⅵ. 북방 민족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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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민족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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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는 북방 민족의 활동이 왕성한 시기였다. 고려는 초기부터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거란의 침입을 격퇴하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였다. 12세기 초에는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았으나, 그들이 세운 금의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몽고군의 거센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쟁하였다. 그러나 몽고와 화의를 맺은 후에는 그들의 압력과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공민왕 때에는 몽고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회복하였고,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권문 세족의 반발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고려 후기의 문화는 새로운 경향을 보였다. 불교계에서는 조계종이 성립되어 교세를 크게 떨쳤고, 유학에서는 성리학이 들어와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아 갔다.

1. 거란⋅여진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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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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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건국 직후 북진 정책을 수립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는 거란이 강성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고려는 송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방의 거란이나 여진 등 문화가 낮은 북방 민족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멀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 북방 민족이 강성하여, 한때 고려를 침입하고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려는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막아 내었고, 여진을 정벌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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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의 기본적인 대외 정책은 무엇인가?
  2.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어떻게 물리쳤는가?
  3.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강동 6주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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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야만의 나라로 생각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그 후 고려는 송과 외교 관계를 맺고 거란과의 국교를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국경 지대에 여러 성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비를 엄히 하였다. 이에 송과 대립하고 있던 거란은 고려에 침입하여 왔다.

제1차 침입은 성종 때에 있었는데,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때, 고려의 많은 중신들은 영토의 일부를 떼어 주고 강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외교 담판으로 거란군을 물리치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회복하였다. 이에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까지 확대되었다.

귀주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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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침입은 현종 때에 있었다. 이에 앞서, 고려에서는 강조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우는 정변이 일어났는데, 거란은 이를 구실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왔다. 이 때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후, 거란의 소배압이 다시 침입해 왔다. 이것이 제3차 침입이다. 이 때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귀주에서 이들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1019).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 오랜 전쟁에 지친 두 나라는 평화를 바라게 되어 강화가 성립되고 사신을 교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다. 즉, 현종 때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았고, 그 후 압록강 입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동북 9성의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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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넓은 지역과 고려의 동북 국경 지대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일찍부터 고려와 접촉을 하고 있었다. 여진족은 원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말과 화살 등을 바쳤으며, 고려는 식량과 농기구 등을 주어 그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12세기에 완옌부에 의해 여진족이 통일되면서, 그 세력이 정주의 천리 장성 부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여진 정벌을 위하여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편성하였다. 윤관은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조직된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동북 지역을 점령하고, 그 일대에 9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생활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이 9성을 돌려 달라고 애원할 뿐 아니라, 이를 지키기에 어려움이 있어 9성을 돌려 주고 말았다. 그 뒤, 여진은 나라를 세워 금이라 하고, 거란(요)을 멸망시켰다. 이어서 송을 압박하면서 중국의 북부를 차지하였으며, 고려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하여 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이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의 사대 요구를 들어 주었다. 이로써 금과는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초기에 거란과 싸우던 강건한 기개는 엿볼 수 없게 되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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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2. 고려는 북진 정책을 내세우며 거란과 대결하여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회복하였고, 귀주 대첩으로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 고려는 여진족을 토벌하여 동북 9성을 쌓았으나, 후일 여진족이 세운 금의 압력을 받기도 하였다.

2. 몽고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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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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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무신 정권 시대에 몽고족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제국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중국을 위협하더니 고려에까지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40여 년 간 끈질기게 항전하였다. 특히, 농민과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 정부는 몽고와 강화를 맺었다. 이에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몽고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항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고려인의 자주성과 꿋꿋한 기상을 보여 준 것이었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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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몽고의 침입에 대하여 고려는 어떻게 항쟁하였는가?
  2. 삼별초는 어떻게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는가?
  3. 몽고와 강화한 후 고려는 몽고로부터 어떠한 간섭을 받았는가?

고려와 몽고의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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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무신 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몽고에서는 칭기즈칸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때, 만주에 살고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해 왔다. 몽고군에 쫓긴 이들은 서북 지방의 강동성에 몰려 있었다. 고려는 몽고와 함께 이를 소탕하였는데, 이것이 고려가 몽고와 접촉한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몽고는 이를 빌미로 하여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여 왔으므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몽고와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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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공물을 가지고 돌아가던 몽고의 사신이 국경 부근에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는 이것을 구실삼아 고려에 침입해 왔다. 귀주에서 박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몽고군은 길을 바꾸어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였다.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각지에 감시관인 다루가치를 남겨 두고 물러갔다.

이후,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더욱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심하게 간섭을 해 오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대몽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몽고는 재차 침입하여 왔으나, 몽고의 장군 살리타가 처인성에서 김윤후 부대의 화살에 맞아 죽자 그들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 후에도 몽고군은 화의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그러나 고려는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면서 나라를 지켰다. 강력한 반몽 정책을 취한 최씨 정권이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하였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이 몽고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특히, 정부에서는 장기전에 대비하여 농민들을 산성이나 섬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면서 항전하도록 하였다.

민중의 항전은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는 바탕이 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까지도 용감히 싸워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몽고군이 충주성에 쳐들어왔을 때에 지광수 등은 끝까지 성을 지켰다. 한편,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대장경을 조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또 몽고에 잡혀간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경주 황룡사 9층탑과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 판목 등 귀중한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다.

삼별초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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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몽고는 무력으로 고려를 정복하기 어려움을 알고, 육지로 나와 화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항전으로 국력의 소모도 컸고, 항전을 고수해 오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1258), 고려는 몽고와 화의를 맺게 되었다.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된 후에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왕정이 회복되고 뒤이어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 때,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곧 몽고(원)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정부의 환도에 반대하고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결국 여⋅몽 연합군에 의해서 평정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 준 것이었다.

원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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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원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곧 새로운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함의 건조, 군량의 공급, 군사의 동원을 고려에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단행되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이 실패한 뒤에는 원과 고려와의 공적 연락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원은 화주에 쌍성 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관할하였다.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가 관할하던 영역은 곧 회복되었으나, 쌍성 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은 공민왕이 무력으로 탈환할 때까지 원의 지배하에 있었다.

또, 고려는 원의 간섭으로 관제와 왕실에서 쓰는 용어도 격을 낮추게 되었고, 원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 은, 매 등 공물을 요구하여 고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일반 조세 외에 원에 대한 공물도 내게 되어 그 부담이 가중되었다.

한편, 양국인의 왕래에 따라 문물이 교류되어, 고려의 상류 계층에서는 몽고어와 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이 유행하였으며, 원에서도 고려양이라 하여 고려식 생활 풍습이 유행하였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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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풍과 고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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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에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몽고의 여러 가지 풍속이 고려에 들어와 유행하였는데, 이를 몽고풍이라 하였다. 몽고의 풍속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 관리 등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하였고, 그 일부는 민간에까지 파급되어 우리 풍속에 영향을 주었다.

변발과 호복은 당시 왕실이나 관리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대표적인 몽고 풍속이었다. 여자의 족두리, 신부의 얼굴에 찍는 연지,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 등의 몽고 풍속은 일반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 밖에 우리말 가운데 장사치 등과 같이 아치 또는 치가 붙는 말이나 임금의 진지상을 뜻하는 수라라는 말 등도 몽고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고려의 풍속도 몽고에 흘러들어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하였다. 원 왕실과 귀족들은 후궁, 궁녀, 시녀 등에 충당하기 위해 자주 고려의 처녀들을 데려갔고, 또 많은 고려인들이 전쟁 포로로 원에 붙잡혀 갔다. 바로 이들에 의해 고려의 풍속이 원의 왕실과 일반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풍속 가운데 의복, 신발, 모자와 만두, 떡 등의 음식이 몽고 사회에 급속히 전파되었는데, 고려 만두, 고려 떡 등의 용어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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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농민과 천민의 저항 의지는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는 애국심으로 승화되어 몽고와 끈질기게 싸울 수 있었다.
  2. 삼별초는 정부가 몽고와 강화한 후에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가며 최후까지 몽고와 싸웠다.
  3. 고려는 몽고와 강화한 후 일본 원정에 협력을 강요당하고 일부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3. 자주성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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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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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원과 강화한 뒤, 원의 여러 가지 압력과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고려 사회는 이른바 권문 세족들이 새로운 지배층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으며, 이에 대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사대부층이 성장하여 개혁 정치를 추구하였다.

공민왕은 원과 명의 교체기를 틈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여, 밖으로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고,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다. 한편, 안으로는 신진 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에 걸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권문 세족의 반발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 등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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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 후기의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 계층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2. 고려 말 권문 세족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어떠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는가?
  3.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어떻게 추진되었으며,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권문 세족과 신진 사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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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이후, 고려 사회의 지배층에는 변동이 일어났다. 즉, 고려 초기 이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문벌 귀족들은 무신 정변을 계기로 대부분 몰락하고, 고려 후기에는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권문 세족이 대두하였다. 권문 세족들은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친원적인 성격을 띤 보수 세력이었다.

한편으로, 신진 사대부 계층이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신진 사대부 계층은 대체로 하급 관리와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들로서, 유교의 학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과거를 통하여 중앙 정계에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보수적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권문 세족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진 사대부 계층은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혁 정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의 힘은 아직 미약하여, 그들의 개혁 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농장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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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 시대 토지 제도의 기본을 이루고 있던 전시과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문벌 귀족들이 함부로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대토지 소유 현상은 더욱 심해져 전시과 제도는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다. 몽고와의 전쟁이 끝나고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시기는 물론,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대토지의 집중은 계속되었다. 권문 세족들은 토지를 국가로부터 합법적으로 급여받거나 개간에 의해 확대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불법적인 방법으로 차지하였다. 농장은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산과 내를 경계로 하거나 주, 군에 걸쳐 있을 정도로 광대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권문 세족의 가혹한 수탈에 견딜 수 없어, 가족을 거느리고 그들에게 의탁하기도 하였다. 이들 농장에서는 각종 조세와 역을 부담하지 않았으므로 국가 재정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공민왕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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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은 새로 일어난 명에 의하여 북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는데, 공민왕은 이 틈을 타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공민왕은 먼저 정동행성의 기능을 폐하여 원의 간섭을 물리치고, 쌍성 총관부를 무력으로 쳐서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 관제를 복구하고, 몽고식 생활 풍습을 금하였다. 이어서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한편,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 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많은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양민으로서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해방시켜 주었다.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은 일반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아직도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권문 세족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공민왕이 시해되어 개혁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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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있을 때,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가 침입해 왔으며, 중국에서는 원과 명이 바뀌면서 대외 관계에 큰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먼저, 대륙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을 받았다. 원이 쇠퇴하자, 중국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홍건적은 그러한 반란군의 한 무리였다. 중국 북쪽 지방에서 일어난 홍건적은 두 차례나 고려에 침입해 왔다. 고려에서는 최영, 정세운, 이방실, 이성계 등이 나아가 이를 격퇴하였다.

한편, 왜구는 쓰시마 섬 등에 근거를 둔 일본의 해적들로서, 일찍부터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조세의 해상 운송이 어렵게 되어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에까지 왜구가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고려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일본과 외교적 교섭도 벌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무력으로 토벌하였다. 최무선은 화포를 만들어 진포 싸움에서 왜선을 불태웠고, 최영과 이성계는 각기 홍산과 황산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이어서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그 기세를 크게 꺾었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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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과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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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은, 중국에서는 이미 12세기 북송 때에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상의 비밀로 다른 나라에 전파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우리 나라에 화약의 폭발력이 알려져 중요한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로 추측된다.

화약의 제조에 가장 기본적인 원료인 염초는 바닷가나 냇가의 뻘흙에서 뽑아 내는데, 그 제조법이 비밀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화약의 제조와 기술의 개발이 어려웠다. 최무선은 왜구를 무찌르는 데 화약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중국에서 온 상인 이원으로부터 염초를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웠다.

화약 제조에 성공한 최무선은 먼저 화약을 이용한 불화살 등을 만들어 시험하였다. 최무선은 시험에 성공하자, 우왕에게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거기에서 20여 종의 화기를 제조하였다. 우왕 6년에 왜구가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금강 하류의 진포에 쳐들어오자,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화포 등 각종 무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싸워 큰 공을 세웠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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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문 세족은 권력과 농장을 소유한 보수적 집권층이었고, 신진 사대부들은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으로서 개혁을 주장한 신진 세력이었다.
  2. 권문 세족의 경제적 기반은 농장이었고, 이들의 농장 확대로 국가 재정은 궁핍해지고,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3.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면서 권문 세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개혁 추진 세력이 미약하여 결국 실패하였다.

4. 고려 후기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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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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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문화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불교계는 선종을 중심으로 융합되어 조계종이 성립되었으며, 원으로부터 새롭게 수용된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끄는 사상으로 자리잡아 갔다.

문학에서는 자주 의식이 강한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귀족이나 민중의 삶을 노래한 작품도 나타났다. 역사에서는 민족의 자주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역사서가 나와 민족의 자각과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발명하여 우리 민족의 슬기를 보여 주었으며, 밖으로부터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여 이것을 실제 생활에 활용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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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 후기의 불교와 유학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가?
  2. 고려 후기의 문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나타난 특징은 무엇인가?
  3. 고려 후기의 과학 기술은 어떤 분야가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적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불교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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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변 이후, 고려의 불교계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문신 귀족들의 보호를 받아 왔던 교종이 쇠퇴하고, 그 동안 침체해 있던 선종이 조계종으로 통합되어 교세를 크게 떨쳤다.

조계종의 교세를 크게 떨친 이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그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불교 이론을 세워 선종 중심의 불교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눌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을 계속하여야 하며,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참선은 물론 불경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융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조계종이 확립되었다.

한편,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에서 항전하면서 팔만 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이것은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굳은 신앙심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의 무신 정권은 이것을 구심점으로 삼아 백성들의 단합을 꾀하였다. 오랜 전란 속에서도 세계 불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우수한 대장경을 조판한 것은 불교의 높은 수준과 함께 왕성한 민족 의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사원은 권문 세족의 후원을 받아 넓은 농장을 차지하고, 고리대업이나 장사를 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등의 비행으로 인하여 사회의 강한 비난을 받았다. 이리하여 불교는 고려 말의 어지러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잃고 말았다.

성리학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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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 정권 때 큰 타격을 받은 유학은 충렬왕 때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 뒤, 충선왕은 원의 수도에 만권당을 세우고, 고려와 원의 학자들을 교류하게 하여 고려의 유학을 발전시켰다.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유학의 발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대성한 것으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 문제를 밝히려는 유학이었다.

성리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이는 충렬왕 때의 안향이었다. 그 후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배워 와 이제현 등에 전수하였고,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이 이를 발전시켰다.

성리학을 받아들이자, 사상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고려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하고, 불교를 신앙으로 삼아 두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받아들여 불교를 비판하였다. 처음에는 사원의 폐단과 승려들의 비행을 공격하였으나, 정도전 등은 불교가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하였다. 그리하여 일상 생활에서 불교 의식 대신 주자가례에 의한 예속을 장려하였다.

문학과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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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에는 문학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문학을 주도한 계층은 사대부들이었다.

전통적인 향가 형식을 계승하고 사대부 계층의 생활상을 반영한 작품으로 한림별곡, 관동별곡 등이 있으며, 새로운 시가 문학으로서 사대부들의 한적한 전원 생활을 나타낸 작품으로 어부가가 있다.

장가라고 불리는 민중의 노래도 유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청산별곡은 토속적이고 민중적인 감정을 읊어 우리 나라 시가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한문학에서는 이인로의 파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과 같은 수필 문학이 발달하였다. 한시도 발달하여 이인로, 이규보 등이 유명하였다. 이규보는 고구려의 건국을 노래한 동명왕편에서, 종래의 한문학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체를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 세계를 추구하였다.

역사에 관한 저술로는 삼국유사가 가장 유명하다.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불교의 역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 등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자주 의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고대사에 관한 귀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몽고의 침략으로 쓰라린 시련을 겪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자각과 자부심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이 밖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각훈의 해동고승전도 남아 있어,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속 활자와 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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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대장경을 새기는 등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속 활자가 발명되어 활판 인쇄술도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때에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는데(1234), 이는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1377년에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고려 말에는 화약 제조법도 개발되었다. 화약 만드는 법을 배워 이를 발전시킨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거기에서 화약과 각종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무찌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화약은 우리 나라의 무기 제조 기술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또, 고려는 원과 문화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천문, 수학, 의학 등 발달된 아라비아 문화를 받아들였다. 아라비아 문화는 고려의 과학 기술 발달에 큰 영향을 주어 천문학과 의학 기술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화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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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는 벼농사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수리 시설이 많이 확충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다. 또, 원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받아들여 농업 기술도 개량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는 목화를 심어 우리 나라 의복 재료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목화의 재배는 공민왕 때에 원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무명은 중요한 옷감으로 이용되었다.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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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는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수덕사의 대웅전 등이 유명하다. 이들 건물의 기둥은 가운데를 불룩하게 만들어 안정감을 준 배흘림(엔타시스)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석탑으로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와 혜허가 그린 양류 관음도가 유명하다. 글씨로는 신품 4현의 한 사람인 최우가 뛰어났고, 서체로는 전기에 유행한 구양순체와 왕희지체 대신에 조맹부체가 유행하였다.

음악에는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인 향악과 중국 음악인 당악이 있었으며, 송에서 대성악이 수입되어 궁중 음악으로 발달하였다. 향악곡으로는 동동, 대동강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산대놀이라는 가면극도 유행하였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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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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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대장경은 최씨 정권이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고종 때에 시작된 대장경의 조판은 16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모두 81,258장의 경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팔만 대장경’이라고도 하고, 강화도에 있다가 조선 태조 이후 해인사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해인사 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대장경판의 크기는 가로 72.6cm, 세로 26.4cm, 두께 3cm이다. 목재는 남부 지방에서 많이 나는 박나무와 자작나무를 사용하였다. 판목이 뒤틀리거나 벌레가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소금물에 쪄서 진을 뺀 다음 그늘에 말렸다.

글자를 쓴 종이를 판목에 뒤집어 붙이고 글자를 새겼는데, 판목의 앞뒷면에 대개 1줄에 14자씩 23줄을 새겼다. 글자가 새겨진 판목에 옻칠을 하고 네 귀퉁이에 청동 마구리를 대어, 판면의 손상과 뒤틀림을 막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팔만 대장경은 이처럼 정성들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7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팔만 대장경은 5천만 자 이상의 글자를 8만여 장의 경판에 새긴 것이다. 그런데 새긴 글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틀린 글자가 거의 없다. 글자를 한 자 한 자 새길 때마다 절을 했다고 하니 글자를 새기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팔만 대장경은 그 내용이 정확하고 완벽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대장경에는 보이지 않는 경전들까지도 수록하고 있어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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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려 후기에는 조계종이 지눌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고,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사상이 되었다.
  2. 고려 후기에는 민중의 감정을 읊은 시가 문학이 대두하였으며, 민족 의식을 일깨워 주는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3. 고려 후기에는 인쇄술과 화약, 무기 제조술 등의 과학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팔만 대장경의 조판과 금속 활자의 발명은 우리 민족의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