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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국사(상) (6차 교육과정)/Ⅶ. 양반 사회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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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사회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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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말, 고려 왕조는 국내외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고려 왕조는 끝내 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조선 왕조가 성립되었다.

조선 왕조는 유교 정치 이념을 내세워 왕권을 확립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면서 민생의 안정과 부국 강병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양반 관료 중심의 지배 체제가 확립되고, 민족 의식의 성장과 학문의 숭상으로 민족 문화가 꽃피었다.

한편, 조선 왕조는 영토의 확장에도 힘써 4군과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남쪽 지방 사람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1. 조선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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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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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중심 세력은 새로운 사회를 추구하던 신진 사대부와,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내는 데 공을 세운 무인들이었다.

조선은 건국 후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왕권을 크게 강화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여 갔다.

조선 사회는 고려 사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즉, 고려가 문벌 귀족 중심, 불교 중심의 사회였음에 비하여, 조선은 양반 관료 중심, 유교 중심의 사회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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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 건국의 중심 세력은 어떠한 과정에서 성장하였는가?
  2. 조선 사회가 고려 사회에 비하여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3.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은 어떠한 의의를 지니는가?

위화도 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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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기에는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안으로는 권문 세족들의 횡포로 사회 기강이 해이해지고, 경제 질서가 문란해져 국가나 농민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밖으로는 북으로부터 홍건적이 침입하고, 서남 해안 일대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무장으로서 남북으로부터 침략해 오는 외적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이 무렵, 명은 한때 원이 차지하였던 철령 이북의 땅을 돌려 줄 것을 고려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려에서는 최영 등이 이를 거절하고, 명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까지 수복하고자 군사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요동 공격을 반대하던 이성계는 출정 도중에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 등 반대파를 몰아 내고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새로이 과전법을 공포하여 그들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어서 신진 사대부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조선의 건국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고려에 비해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고려가 문벌 귀족 사회,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음에 비해, 조선은 양반 관료 사회, 유교 사상이 정치 및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 사회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한양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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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왕조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였다. ‘조선’이란 곧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뜻이며, 단군에게서 민족의 독자성을 찾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국호에는 유구한 문화 전통과 민족 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민족사에 대한 주체적 자각이 포함되어 있다.

조선은 건국 후, 곧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이를 한성부라 하였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읍지로서의 자연 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고 교통이 좋아 고려 시대에도 남경이라 하여 크게 중요시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가 이 곳을 주목하여 도읍지로 정한 것은 나라가 크게 융성하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뜻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한양을 중심으로 정치적 발전과 사회⋅경제적 안정을 이룩하여 5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왕권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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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 후에 왕권을 튼튼히 하고, 나라의 터전을 닦는 데 주력하였다.

조선 왕조는 밖으로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하고, 여진이나 일본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평화 유지에 힘썼다.

태종은 과단성 있는 개혁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집권층이 개인적으로 거느린 사병을 없애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사원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국가의 재산으로 삼았다.

세종은 우리 나라 역사상 보기 드문 위대한 왕으로서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학문을 연구하게 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영토의 확장에도 힘써 조선 왕조의 국토를 압록강, 두만강 유역까지 넓혔다.

그 후, 단종을 폐하고 즉위한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직전법을 실시하여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려 하였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동북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고 북쪽의 여진족을 물리치는 등 북방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성종 때에는 문물을 정비하고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나라의 모든 제도가 정비되고 통치 기반도 강화되어 유교적 법치 국가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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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진 사대부 계층과 무인 세력은 고려 말의 사회 혼란과 이민족의 침입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하였다.
  2. 고려가 문벌 귀족 사회이고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음에 비하여, 조선은 양반 관료 사회이고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라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3. 조선은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며, 경국대전으로 유교적 법치 국가의 통치 조직을 확립하였다.

2. 제도의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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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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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건국 후 약 100년간에 걸쳐서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조직을 완성하였다. 중앙의 통치 조직은 의정부와 6조가 중심이었고, 지방은 전국을 8도로 구분하여 그 밑에 부⋅목⋅군⋅현을 두었다.

또, 국토 방위를 위한 군사 조직을 갖추었으며, 관료 조직의 효율화를 위하여 교육 및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 재정의 확보와 민생의 안정에 역점을 두어 토지 및 조세 제도를 정비하였다. 특히, 조선 왕조에서는 과전법을 마련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양반 관료들의 생활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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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의 중앙 정치 제도와 지방 행정 제도는 어떠하였는가?
  2. 양반 관료는 어떻게 선임되었으며, 그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제도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3. 조선의 신분 제도는 어떠하였는가?
  4. 국가의 재정 기반은 무엇이었으며, 국가에 대한 농민의 부담은 어떠하였는가?

중앙 정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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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관료는 문반인 동반과 무반인 서반으로 구분되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양반 관료 사회를 이루었다. 관직은 다시 경관인 중앙 관직과 외관인 지방 관직으로 나뉘었다.

중앙 정치 조직에서 가장 기본이 된 것은 의정부와 6조였다. 의정부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3정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나라의 중요 정책은 먼저 이들의 합의를 거치도록 하였다. 의정부 밑에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조가 있어 행정 실무를 나누어 맡았으며, 그 장관을 판서라 하였다.

이 밖에, 특별 관청으로서 관리들을 감찰하고 풍속을 단속하는 사헌부, 국왕에게 간쟁하는 사간원, 그리고 국왕의 자문을 맡은 홍문관 등이 있어서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세 기관을 3사라고 하였다. 또,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 국왕 직속의 사법 기관인 의금부, 나라의 역사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 등이 있었으며, 국왕과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학술과 정책 문제 등을 토론하는 경연 제도를 두었다.

지방 행정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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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목⋅군⋅현을 두었다.

각 도에는 중앙으로부터 관찰사가 파견되어 도의 행정을 맡았다. 감사라고도 불리는 관찰사는 그 권한이 막중하여, 행정뿐 아니라 군사 및 사법권까지도 장악하였다.

부⋅목⋅군⋅현에는 중앙으로부터 수령이 파견되어 이 곳을 다스렸다. 수령은 지방 행정의 책임자로서, 원님이라고도 불렸다. 수령은 농업의 장려, 교육의 진흥, 공정한 재판, 군역 및 부역의 부과 등의 일을 맡았다. 특히, 조세를 징수하고 수송하는 데 힘썼다.

각 고을에는 면, 리, 통을 두고, 지방의 토착 인사 중에서 그 책임자를 뽑아, 수령의 지시에 따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에는 나라의 통치권이 지방 말단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지방의 행정 실무는 그 지방 출신의 향리들이 6방에 소속되어 수령을 보좌하면서 이루어졌다. 한편, 각 고을에는 덕망 있는 지방 양반들로 구성된 향청(유향소)이 있었다. 향청에는 좌수, 별감 등이 있어 수령을 도와 자문에 응하는 등 지방 행정에 참여하면서 향리를 감찰하고, 지방의 풍속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지방 행정은 수령과 향리, 그리고 그 지방 양반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수령의 책임하에 다스려지도록 조직되어 있었다. 이는 곧 지방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여 중앙 집권적인 정치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군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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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초기부터 국방 강화에 주력하여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였다. 군역 제도에서는 농민 장정은 누구나 군인이 되거나, 군인의 비용을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군인은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었다. 중앙군은 5위가 중심이 되어 궁궐 수비와 수도의 방비를 담당하였다. 지방의 각 도에는 병마 절도사(병사)와 수군 절도사(수사)가 파견되어 각각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였으며, 국방상의 요지에는 진과 보를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특히, 함경도에는 병영을 두 곳에 설치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수영을 두 곳에 두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세조 이후에는 전국의 군⋅현을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로 편성한 진관 체제를 마련하여 국토 방위에 힘썼다.

지방의 군대는 대부분이 의무적으로 군역에 복무하는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중앙군은 시험에 의하여 선발된 사람, 고급 관리의 자제, 그리고 농민 의무병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봉수 제도가 있어서 국경 지대에서 발생하는 국방상의 주요 연락 사항을 횃불이나 연기로 신속히 중앙에 전달하였다.

교육과 과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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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교육의 주요 목적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므로 학교 교육은 관리의 양성을 위한 과거 시험의 준비 과정에 불과하였다. 교육 내용은 과거 준비에 치중하여 유교 경전과 한문학이 중심이었다.

상민들도 교육을 받을 길이 있었으나, 실제로 학교 교육은 양반 자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양반 자제들은 7, 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초보적인 유학 지식을 쌓았으며, 그 후에 4부 학당 및 향교에 입학하였다. 4부 학당은 한양에, 향교는 각 군⋅현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성균관이 최고의 학부로 설치되어 수준 높은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의학, 법학, 외국어, 천문학 등의 기술 교육은 별도로 전의감, 형조, 사역원, 관상감 등의 해당 관청에서 각기 맡아 실시하였다.

관리를 선발하기 위한 과거 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이 중에서 문관 시험인 문과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문과에는 주로 양반 자제가 응시하였고, 무과에는 일반 평민이나 향리 자제들도 응시할 수 있었으며, 잡과에는 주로 중인이 응시하였다.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었는데, 소과는 다시 생원과와 진사과로 구별하여 시험을 치렀고,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얻고 대과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대과에는 소과 합격생과 성균관 학생들이 응시하여 최종적으로 33명을 뽑았는데, 이 때 1등을 한 장원 급제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대하였다.

과거는 정기적으로 3년마다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구실로 시험이 수시로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뒤에는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얻지 못하는 숫자가 늘어나 큰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신분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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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신분 제도가 매우 엄격하여 신분에 따라 그의 사회적 지위나 직업이 달랐으며, 형벌에서도 차별을 두었다. 심지어 의복, 혼인, 거주지 등과 같은 일상 생활에서도 신분에 따라 제약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신분은 법제적으로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졌는데, 지배층은 양반과 중인, 피지배층은 상민과 천민이 이에 해당되었다.

양반이란, 원래 문반과 무반을 합쳐 부르던 말이었으나, 뒤에는 벼슬할 수 있는 신분을 일컫는 뜻으로 변하였다. 이것은 양반이 관직을 거의 독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양반은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을 차지하였으며, 나라에서 녹봉과 토지를 지급받아 경제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는 등 조선 사회에서 가장 우대받는 특권층이었다.

중인은 관청에서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거나, 역관, 의관 등과 같이 기술 관직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양반보다는 대접을 받지 못하였지만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상민은 농업, 상업, 수공업 등 생산 활동에 종사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농민은 대체로 이주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서 자기 고장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국가에서는 상민들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고 이를 잘 활용하기 위하여 호적 제도를 정비하였다.

최하위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노비, 무당, 백정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 중에서도 노비는 가장 천한 신분층으로서 그 신분이 세습되고, 매매, 상속, 양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노비 중의 일부는 가족을 거느리고, 재산을 가질 수도 있었다.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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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농업을 국가 경제의 기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무엇보다도 토지의 관리를 중요시하였다.

조선의 토지 제도는 과전법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과전법에서는 현직 관리는 물론, 퇴직 관리에게까지 토지를 지급하였다. 관리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경작시켜 생활하였다. 과전은 경기도 지방에 한하여 지급되었고, 원칙적으로는 자손에게 세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가 사망한 어린 자식이나 남편과 사별한 부인에게는 과전의 일부를 세습하도록 하였다.

점차 관료의 수가 늘어나고 세습되는 토지가 확대되면서, 자연히 토지의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세조 때에는 그 해결 방안의 하나로 과전법을 폐지하고, 현직 관료들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 역시 임시 조치에 불과하여, 마침내 성종 때에는 국가가 직접 농민들로부터 조를 거두어 관료들에게 주는 관수 관급제를 실시하였다.

조선 왕조는 주로 조세 수입으로 나라의 재정을 충당하였는데, 상민들이 부담하는 전세, 공물, 역이 그 기본이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민의 부담을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도 조세 제도를 정비해야 하였다. 세종 때에는 농토가 좋고 나쁜 정도에 따라 전분 6등법을, 풍년과 흉년을 참작하여 연분 9등법을 제정, 실시하였다. 또,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 대장을 만들고 이를 조세 징수의 기준으로 삼았다.

연분 9등법에 의한 1결당 전세액
구분 전세액
상상년 20 말(두)
상중년 18 말
상하년 16 말
중상년 14 말
중중년 12 말
중하년 10 말
하상년 8 말
하중년 6 말
하하년 4 말

공물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것이다. 그리고 역에는 정남이 의무적으로 져야 하는 군역과 나라의 토목 사업 등에 동원되는 요역의 두 가지가 있었다.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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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농업은 천하의 대본’이라 하여 국초부터 농업을 보호, 육성하려는 농본 정책을 써 왔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경지 면적을 넓히고, 저수지, 보 등의 수리 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종자의 개량과 농업 기술의 개발에 힘썼다. 그 결과 건국 초에 약 100만 결에 지나지 않던 농토가 세종 때에는 약 160만 결로 늘어났다. 그리고 남부 지방의 일부에서는 모내기법도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또, 국가에서는 양잠, 양봉을 권장하고, 과수, 약초와 같은 작물과 목화 등 특수 작물의 재배를 장려하였다. 특히, 목화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일반 백성들의 의생활이 크게 향상되었다. 국가는 또 농민들의 경작권을 보호하고, 의창, 상평창 제도를 마련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도왔으므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상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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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농업을 중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상공업은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한양의 중심지인 운종가에는 시전이 세워져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면서 정부의 보호 아래 상업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비단, 무명, 명주, 모시, 종이, 어물을 파는 시전의 비중이 가장 컸다.

지방에서는 5일마다 장시가 열려 농산물 및 수공업 제품 등의 생활 필수품이 거래되었다. 장시에서는 보부상들의 활약이 컸고, 교역의 매개가 된 것은 쌀과 포목이었다. 이처럼 지방의 장시가 나타났으나, 상업 활동이 크게 발달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조선 사회가 농업 중심의 경제 생활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조선통보, 팔방통보 등의 화폐를 만들어 통용시키려고 했으나,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문 수공업자인 장인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에 소속되어, 일정 기간 그 곳에 머무르면서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바쳤다. 이것은 농민들이 나라에 역의 의무를 지는 것처럼, 장인들도 나라에 대한 역으로 물품을 제조, 납품한 것이다. 따라서, 장인들은 역이 끝난 후에는 자유로운 활동이 허용되어 여러 가지 생활 필수품을 제조하여 판매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기도 하였다.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은 대체로 무기, 화약, 활자, 그릇 등이었다.

농촌에서는 직물을 짜는 가내 수공업이 발달하여 주로 삼베, 무명 등의 옷감을 만들었고, 농기구, 목기, 죽제품 등도 생산하였다.

한편, 광산, 어장, 염전 등도 있었는데, 작은 규모의 것은 개인에게 경영권을 주기도 했으나, 큰 것은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였다.

조운과 역원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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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전국 각 지역에서 거둔 세곡은 내륙의 수로와 바다의 해로를 이용하여 한양으로 운송되었는데, 이를 조운이라 한다.

운송된 세곡은 나라의 재정에 충당되어 국가 경영에 쓰였다. 서남 해안과 한강변 등에는 조창이 설치되어, 인접 고을의 세곡을 이 곳에 임시로 보관하였다가, 선박에 싣고 수로나 해로를 이용하여 한양의 경창으로 옮겼다. 다만, 평안도와 함경도의 세곡은 한양으로 운송되지 않고, 그 지방의 국방비 등에 충당되었다.

한편, 나라에서는 육상 교통을 위하여 역원 제도를 마련하였다. 주요 도로에 약 30리의 간격을 두고 역을 설치하였는데, 역에는 역리와 역졸을 배치하여 역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역에서는 마패를 소지한 공무 여행자에게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숫자만큼의 역마를 여행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과 함께 전국의 교통 요지나 한적한 곳에는 원을 설치하여 여행자들로 하여금 이 곳에서 숙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호원, 사리원 등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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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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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 제도는 횃불과 연기로 국경 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던 일종의 통신 제도이다. 조선 시대의 봉수 제도는 고려 시대의 것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국경의 중요한 군사 정보는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횃불을 이용하여 전달했는데, 정세의 위급한 정도에 따라 그 올리는 횟수가 달랐다. 고려 시대에는 평상시에는 1번, 위급시에는 2번, 적이 침입하여 전투가 임박할 때에는 3번, 적군과 아군이 접전 중일 때에는 4번의 봉수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해상과 육상이 각각 5구분법으로 나뉘어 봉수를 올리게 되어 있었다. 해상의 경우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1번, 외적이 바다 가운데 나타나면 2번, 해안 가까이 오면 3번, 아군 병선과 접전하면 4번, 육지에 침입하면 5번으로 하였다. 육지의 경우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번, 변경에 가까이 오면 3번, 국경을 침범하면 4번, 아군과 접전하면 5번씩 올리게 하였다.

봉수는 경비가 적게 들고 신속히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은 있으나, 적의 상황을 오직 연기나 횃불을 올리는 횟수로만 알리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자세히 전할 수 없었고, 비, 구름, 안개 등으로 인해 중간에 단절되는 불편이 있었다.

또, 평화가 오래 지속되면서 봉수의 기능이 점차 약화되어 을묘왜변, 임진왜란 때에는 전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임진왜란 중에는 말을 타고 소식을 전하는 파발제가 등장하기도 하였으나, 양 난 이후 봉수제는 다시 복구되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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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의 중앙 정치 제도는 의정부와 6조가 중심이었다. 지방 행정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 목, 군, 현의 고을을 두었으며, 각 고을에 수령을 파견하여 지방 행정을 맡게 하였다.
  2. 관리는 원칙적으로 과거를 통하여 등용하였고, 관리를 양성하기 위하여 성균관과 향교 등의 학교를 두었다.
  3. 신분 제도는 법제적으로는 양인과 천인으로 이루어졌으나,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분되었다.
  4. 국가의 재정은 양인들이 부담하는 전세, 공물, 역이 그 기본을 이루었으며, 농민들이 대부분을 부담하였다.

3. 민족 문화의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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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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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건국 후 정치와 사회를 안정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에 성공하여, 안정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민족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로 우리 나라는 고유 문자를 가지게 되었다. 훈민정음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로서 세계에서도 우수한 문자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 문화 발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전통 문화를 정비하기 위하여 국가적 편찬 사업이 활발하였고, 민생의 안정을 위한 실용적인 과학 기술도 크게 발달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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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과 그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2. 조선 초기에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떠한 분야가 주로 발달하였는가?
  3. 조선 전기의 예술 활동은 고려 시대와 비교하여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민족 의식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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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의 침략을 막아 내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애국심과 민족 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민족 의식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되어 전통 문화에 대하여 소중함을 느끼면서 더욱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 분위기에서 민족의 기원과 민족 문화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세종 실록 지리지, 동국통감 등에 단군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었으며, 단군 신앙도 고조되어 평양에 단군 사당이 세워졌고,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가 지어졌다. 또, 조정에서는 한양에 원구단을 세워 국가의 주도로 천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운 애국 명장들에게 제사를 지내어 그들의 공적을 높이 기리기도 하였다.

훈민정음의 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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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화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일은 훈민정음의 창제였다. 우리 나라는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 때까지도 고유한 문자가 없어 중국의 한자에 의존해 왔다. 삼국 시대 이래 이두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은 한문 해독에 편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지배층과 일반 평민층 사이에는 문자를 통한 의사 소통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세종은 우리말과 일치하여 배우기 쉬우며, 자기 생각을 자유로이 적을 수 있는 우리글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세종은 정인지,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노력한 끝에, 마침내 28자의 표음 문자로 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은 이후 3년 동안 용비어천가 등을 지어 시험해 본 후, 세상에 널리 반포하였다(1446).

훈민정음은 민족 의식과 민족애가 반영된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우리 문자이다. 당시의 지배층 일부가 이를 환영하지 않았지만, 훈민정음의 창제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큰 것이다. 이로써 서민들도 문자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시조나 가사 문학 등 국문학도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편찬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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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는 각 방면의 학문 발달에 힘써, 역사, 지리, 법전, 예절 등에 관한 책이 많이 간행되었다. 특히, 세종으로부터 성종에 이르는 시기에는 전통 문화를 정리하여 여러 책을 간행함으로써 민족 문화의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편찬 사업 중 국가가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역사 분야였다. 그것은 역사가 정치의 거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실록의 편찬이었다. 역대 국왕의 실록이 편찬되어 네 곳의 사고에 보관되었으며, 국조보감이 간행되어 정치적 교훈서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동국통감 등의 역사책이 편찬된 것도 이 때였다.

한편,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리 지식을 얻기 위하여 팔도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을 간행하였다. 이들 지리지에는 그 지방의 연혁, 산천, 토지, 교통, 호구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왕조에서는 이미 태조 때부터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여 독자적인 법전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조준은 경제육전을 편찬하였다. 이들 법전을 참고하여 성종 때에는 마침내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규범이 확립되었다. 경국대전은 조선 왕조의 관료 조직, 사회 구조, 경제 활동 등에 관한 기본 법전으로서,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유교적인 질서를 마련하기 위하여 국조오례의, 삼강행실도 등 예절과 풍속에 관한 책을 편찬하였다.

과학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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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초기부터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부국 강병을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우리 나라의 과학 지식 위에, 고려 시대에 전해진 중국과 아라비아의 과학 지식을 흡수하여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농업 기술, 천문학, 인쇄술, 의학, 무기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특히, 조선은 농본 정책을 내세웠기 때문에 농업 기술의 발전에 힘썼다. 즉, 우리 나라의 풍토와 실정에 알맞은 농사 기술의 개발과 보급을 위하여 농사직설 등을 편찬하였다. 농사직설은 씨앗 저장법, 토질 개량법, 모내기법 등 농부들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하여 편찬되었다. 한편, 세종은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 각 지역의 강우량을 측정하면서 효과적으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또, 인지의를 만들어 토지 측량에 이용하였고, 천문을 관측하는 간의, 천체 운행을 측정하는 혼천의, 그리고 해시계, 물시계 등을 만들어 일상 생활에 활용하였다.

천문학 분야의 발달은 역법의 발전을 가져와, 중국과 아라비아의 역법을 참조하여 우리 나라의 실정에 알맞은 역법서로서 칠정산을 펴냈다. 이것은 오늘날의 달력과 그 계산법이 거의 비슷하다.

서적의 편찬이 활발해지자 인쇄술도 매우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금속 활자 기술을 계승하여 구리 활자를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태종 때의 계미자와 세종 때의 갑인자가 우수하였다. 특히, 갑인자는 글자 모양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의학 분야도 발달하여, 국산 약재에 대한 연구로 우리 나라 실정에 맞는 향약집성방이 편찬되었고, 또 의학 백과 사전인 의방유취도 간행되었다.

이 밖에, 국방 강화 정책과 관련하여 병서의 간행과 함께 무기의 제조 기술도 발달하였다. 세종 때에 편찬된 병장도설은 군사 훈련의 지침서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는 화포를 제작, 사용하는 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또, 화약을 이용한 화차가 만들어졌고, 전함 제조 등 군사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태종 때에는 거북선도 만들어졌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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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학은 한문학이 중심이 되었다. 한문학은 양반들에게는 필수적인 교양이었고, 한시를 짓는 것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작품인 금오신화는 소설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고, 동문선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은 것이다.

한편, 시조 문학도 발달하여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김종서와 남이는 패기와 자신이 넘치는 호방한 시조를 지었고, 황진이는 순수한 인간의 감정을 꾸밈없이 노래하였다. 신사임당, 허난설헌 등 여류 문인들도 활동하였는데, 특히 신사임당은 시문과 서화에 두루 능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후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의 국문학 작품이 나왔으며, 송강 가사와 같은 가사 문학도 발달하였다.

건축과 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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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예술은 전반적으로 사치하지 않고 실용적이며, 자연스러우면서도 소박하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건축은 한양의 궁궐과 성곽, 성문, 관아, 그리고 학교 건축물이 중심을 이루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 건물로는 숭례문, 창경궁의 홍화문, 개성의 남대문, 해인사의 장경판고 등이 있다.

한편, 공예를 대표하는 것은 자기이다. 초기에는 분청 사기가 유행하였으나, 뒤에는 백자가 발달하였다. 고려자기가 섬세하고 귀족적이었음에 비하여, 조선 자기는 은은하고 소박하며 서민적이었다. 이 밖에, 나전 칠기와 화각 공예도 발달하였다.

음악과 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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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궁중 음악인 아악이 발달하였다. 박연은 세종의 명을 받아 아악을 정리하였으며, 성종 때에 성현 등은 악학궤범을 간행하였다. 민간 사회에서는 농악무, 승무, 무당춤 등의 민속 무용을 즐겼다.

한편, 산대놀이라는 탈춤과 꼭두각시놀이인 인형극이 민간 사회에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산대놀이는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탈을 쓰고 추는 춤이었다.

그림에서는 산수화와 인물화가 널리 그려졌다. 나라에서는 도화서를 두어 전문적인 화원을 양성하였다. 화원 출신의 화가로는 안견, 최경 등이 유명한데, 특히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높이 평가를 받는 걸작품이다. 그리고 일반 선비나 양반 관료들도 그림, 글씨 등을 교양으로 존중하여 이름을 떨친 이가 많았는데, 강희안, 강희맹 등이 유명하였다.

글씨는 서예라 하여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양반들은 서예를 필수적 교양으로 여겼다. 조선 전기의 서예가로는 안평 대군과 한호가 이름을 날렸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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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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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의 대표적인 산수화이며, 크기는 가로 106.5cm, 세로 38.7cm이다. 세종 때에 안평대군이 꿈 속에서 황홀하게 거닐었던 도원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그림인데, 안견은 이 작품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웅대한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도원경을 향해 가면서 점차 고조되어 가는 감정과 도원에 다다랐을 때의 환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반 두루마리 그림과는 달리 웅대한 산수가 왼편 아래쪽으로부터 오른편 위쪽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왼편은 현실 세계를, 오른편은 도원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본 것으로 그려져 있으나, 오른편 도원의 세계는 처음에는 조금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리다가 화면의 오른편 끝에서는 완전히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이러한 표현법을 사용함으로써 도원이 사방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넓게 보이도록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특색은 전체의 경관이 몇 개로 나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산들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고 있어 서서히 웅장감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사람이나 동물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아 중국의 도원도들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특색은 안견이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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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 초기에는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과 단군 신앙이 고조되는 등 민족 의식이 성장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하여 창제된 훈민정음은 민족 문화 발달의 토대가 되었다.
  2. 조선 초기에 국가는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해 과학 기술을 장려하였으며, 주로 농업과 관련된 분야가 발달하였다.
  3. 조선 전기의 예술은 양반 생활과 관련하여 발달하였으며, 특히 공예는 고려 시대에 비해 실용적이고 소박한 특성을 나타내었다.

4. 국토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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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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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주변에는 명, 여진족, 일본이 있었다. 조선은 명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그들의 명분을 살려 주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국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실리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북쪽의 여진족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은 적극적인 정책을 써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여 조선 왕조의 영역으로 확정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고려 말에 심하였던 왜구의 침략이 조선 초기에까지 계속되자, 조선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다시는 약탈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3포를 개항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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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은 명에 대한 외교를 어떠한 방향으로 추진하였는가?
  2. 조선이 일본과 여진족에 대하여 취한 외교 정책은 어떠하였는가?
  3. 4군과 6진의 설치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명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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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고, 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요동 지방의 영토 문제로 양국 간의 관계가 불편한 때도 있었다.

요동 지방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영토이었으므로 이를 수복하기 위한 노력을 꾀하였다. 특히, 정도전 등은 요동 수복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태종 때에는 요동 수복 계획을 보류하고 여진족 토벌에 힘을 썼다. 이에 양국 관계가 호전되고, 양국은 우호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과의 외교는 조선측에서 더 적극적이었다. 조선은 조공을 통하여 명의 명분을 살려 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났다.

여진, 일본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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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여진 및 일본에 대해서 교린 정책을 추구하면서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여진족은 일찍이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귀순하는 여진족에게 벼슬도 내리고, 또 생활을 보장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강경책을 써서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 크게 소란을 피웠던 왜구는 조선 초기에도 우리 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세종 때 이종무 등이 2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왜구 토벌에 나서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일본 정부나 쓰시마 도주가 경제적, 문화적 욕구에서 조선과 다시 무역하기를 간청해 왔다. 또, 조선에서도 왜구의 침략을 막아야 했으므로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가하고, 3포를 개항하였다. 3포는 부산포, 제포, 염포이다. 그 후, 이 곳에서 일본인들이 약속 사항을 잘 지키지 않아,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의 무역 활동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4군과 6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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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국토를 확장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보다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펴, 최윤덕 등은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 내고 4군을 설치하였고, 김종서 등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국토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북쪽 지방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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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진의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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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동북 방면의 여진족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 남안의 종성, 온성, 회령, 부령, 경원, 경흥 등에 6개의 진을 설치하였다.

동북 방면에 대한 진출은 공민왕 5년의 쌍성 총관부 회복에 이어 고려 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성계도 이 방면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 결과 조선 건국 초의 영역은 대체로 두만강 하류에까지 이르렀다.

이성계는 즉위 초부터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경원과 경성에 무역소를 두고 여진족에게 교역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경원을 중심으로 여진족의 침략이 잦아지게 되자, 세종 때에는 “조종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는 적극적인 북진책으로 동북 지방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 후 세종은 김종서 등을 보내어 과감하게 북방 개척을 추진하였다. 10여 년 간에 걸쳐 이루어진 6진의 개척은 서북 방면의 4군 설치와 함께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로써 조선의 북방 영토는 두만강, 압록강 연안까지 뻗치게 되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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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은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는 외교 활동을 폈다.
  2. 조선은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을 써서 무역을 허용하였으나, 때로는 정벌을 단행하여 침입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3. 세종 때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 내고 4군과 6진을 설치하였는데, 이로써 국토가 확장되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선이 정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