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Ⅰ. 우리 나라 역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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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편집]

  • 선사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도구를 발달시켜 왔는지 알아보자.
  • 고조선의 성장 과정과 사회 모습을 알아보자.
  •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립한 여러 나라의 생활 모습을 알아보자.

1. 선사 시대의 생활[편집]

학습 개요[편집]

우리 민족의 생활 무대였던 만주와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수십만 년 전이다. 우리 민족은 인종적으로 몽골인종에 속하고, 어족으로는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을 통해 볼 때, 선사 시대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순으로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국가가 성립하였다.

[1] 언제부터 한반도에 사람이 살았을까?[편집]

  • 과거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우리 민족의 기원과 삶의 터전은?

과거로 떠나는 여행[편집]

지나간 과거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은 여러 가지 기록이나 그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 또는 목격자로부터 전해 들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먼 과거의 일은 문자로 기록된 당시의 역사책이나 오래 된 문서, 비석에 새겨진 기록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선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문자가 쓰이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에 관해서는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을까? 그들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 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과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들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의 흔적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그들이 살았던 집 터나 쓰레기더미, 시신을 묻었던 무덤, 그리고 비바람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바위그림 등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통해 과거로 여행을 떠나 보자.

우리 민족의 기원과 삶의 터전[편집]

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였다. 구석기 시대에는 추운 빙기와 따뜻한 간빙기가 여러 차례 번갈아 나타났다. 이러한 자연 환경의 변화는 인간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빙기에는 지구 북반구의 일부가 빙하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의 해수면 높이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타이완 등이 모두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빙기가 끝난 후, 해수면이 높아져 해안선이 변화되자,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북쪽으로는 대륙과 연결되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대한 해협을 건너 일본과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황색 피부, 검은색 머리 등의 신체적인 특징을 지녔으며, 인종적으로는 몽골 인종에 속하고, 어족으로는 터키 어, 퉁구스 어, 몽골 어와 함께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남방계보다는 북방계와 관련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북 아시아 지역에 넓게 자리잡았던 우리 민족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민족의 기틀을 형성하고, 주변의 여러 민족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2]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의 차이는?[편집]

  • 도구, 주거 형태 등은 어떻게 달랐을까?
  • 그들은 자연과 영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편집]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여러 곳에서 유적들이 발굴되었고, 많은 유물이 나왔다. 돌로 만든 도구를 주로 사용한 시기를 석기 시대라 하는데, 이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나눈다.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는 약 7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함경 북도 웅기군 굴포리와 충청 남도 공주시 석장리를 비롯하여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처음에는 돌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다가, 점차 쓰임새에 따라 여러 가지 뗀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짐승과 물고기를 잡아먹었으며, 식물의 열매나 뿌리도 채취하여 먹었다. 또,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생활을 하면서 동굴에서 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다. 연대가 가장 이른 곳이 제주도 고산리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늘 등의 뼈 도구가 있다. 그리고 빗살무늬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조개를 캐었고,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취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뒤에는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재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또, 가락바퀴로 실을 뽑고, 뼈바늘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움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같은 핏줄의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자연과 영혼에 대한 생각[편집]

선사 시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이나 영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해, 달, 산, 강, 동물, 큰 나무 등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특정 동물을 자기 부족의 수호신으로 생각하여 숭배하였다. 또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예술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3] 청동기 시대에 달라진 사회 모습은?[편집]

  • 청동기는 주로 어디에 사용하였을까?
  • 청동기 시대에 사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청동기 시대의 시작[편집]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처음으로 청동을 사용하여 도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청동기는 만들기가 어려웠고, 대량으로 만들 만큼 재료도 충분하지 않아서 지배 계급의 무기나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청동기 시대의 생활 도구는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다.

달라진 생활 모습[편집]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강을 끼고 있는 야산이나 구릉 지대에 살았는데, 이는 구릉 주위의 골짜기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집은 직사각형이나 원형의 움집으로, 움은 신석기 시대보다 낮아졌고, 집의 크기는 훨씬 커졌다. 그리고 마을의 규모도 신석기 시대보다 커졌다.

이들은 농경을 주로 하였는데, 단단한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하여 농경지를 넓히고, 또 고랑을 내고 김을 매어 생산량을 늘려 나갔다.

한편, 반달 돌칼로 곡식을 자르고, 맷돌로 곡물을 가공하기도 하였다. 주로 재배된 곡식은 조, 보리, 콩, 벼 등이다.

고인돌을 통해 알 수 있는 것들[편집]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을 살펴보자.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하고 있는 거석 문화의 하나로,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이 수십 톤이 되는 것도 있다.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무덤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 조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의 사회 모습[편집]

청동기 시대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신분의 상하가 나타나는 계층 사회가 성립하였다. 부족을 통솔하는 족장(군장)은 농업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재산을 늘리는 한편, 청동제 무기를 이용하여 이웃 부족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족장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 등 종교 의식도 주관하여 더욱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를 제정일치의 사회라고 한다. 족장이 죽으면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을 만들고, 청동검, 청동 거울 등을 함께 묻었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민족의 기원과 한반도의 자연 환경

  • 인종적으로는 몽골 인종이고, 어족으로는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기틀이 점차 형성되었다.

나.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뗀석기를 사용하였고, 사냥을 하여 생활하였으며, 동굴이나 막집에서 살았다.
  •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간석기와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였고, 움집에서 살았으며, 후기에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다. 청동기 시대의 사회 모습

  •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구릉 지대에서 살면서 청동기, 민무늬 토기와 간석기를 사용하였다.
  • 청동기 시대에는 족장(군장)이 출현하는 계층 사회가 성립되었다.
2. 주요 용어

뗀석기 | 간석기 | 청동검 | 고인돌 | 족장(군장)

3. 탐구 활동

다음 도구들은 선사 시대에 사용된 것이다. 그 쓰임새는?

2. 국가의 성립[편집]

학습 개요[편집]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세워졌다. 고조선은 기원전 5세기경에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강성하게 되었다. 고조선의 성립 이후 만주의 한반도 지역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의 나라들이 세워졌다.

[1] 고조선 건국의 역사적 의의는?[편집]

  •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 가지는 의미는?
  • 고조선의 사회 모습은 어떠했을까?

단군의 고조선 건국[편집]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면서 만주 요령(遼寧)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방에는 족장(군장)이 다스리는 많은 부족들이 나타났다. 단군은 이러한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해 준다. 또, 단군의 건국 사실과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에서는 선사 시대에 형성되었던 특정 동물을 숭배하는 신앙의 요소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비, 바람, 구름을 주관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서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가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

당시에는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지만, 나중에 고조선으로 부르게 되었다.

읽기자료

⋅ 단군의 건국 ⋅

옛날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나라를 다스리고 싶어하여 인간 세상을 자주 내려다보았다.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상 세계를 두루 내려다보니 태백산 지역이 인간들에게 큰 도움을 줌〔弘益人間〕 직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그 곳을 신시(神市)라 부르고, 스스로를 환웅 천왕이라 하였다. 그는 바람을 주관하는 어른, 비를 주관하는 어른, 구름을 다스리는 어른들에게 농사와 생명, 질병, 형벌과 선악을 맡게 하고, 인간살이에 관한 360여 가지 일을 다스리게 하여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그 때 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환웅은 영험 있는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톨을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먹으면서 동굴 생활을 시작하였다. 곰은 삼칠일(21일) 동안 잘 참고 견디어 여자의 몸으로 변했지만, 범은 이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인이 된 곰(웅녀)은 혼인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를 본 환웅이 잠시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어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의 성장과 변천[편집]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정치⋅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진의 여러 나라와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어 부강해졌다.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자, 한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위만

연 지역에서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넘어왔다. 준왕은 위만에게 서쪽의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얼마 후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도움글

문헌에 나타나는 고조선은 단군 조선-기자 조선-위만 조선으로 정치적 변화를 거친다. 이러한 변천과 아울러 고고학적 문화도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변화가 이루어진다.

문헌 사료가 부족하므로, 고조선의 영토를 알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자료를 이용해야 한다. 고조선시대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유적으로는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고인돌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비파형 동검의 가장 큰 특징은 비파형으로 생긴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된 조립식이라는 점이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랴오허강을 중심으로 요동과 요서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허베이 성 일대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탁자식)의 분포 지역으로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의 사회 모습[편집]

고조선 사회는 생산력의 증가로 사유 재산이 늘어나면서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지배 계층과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 계층이 생겼다. 통치 조직이 확립되어 왕 밑에는 상, 대부, 장군 같은 여러 관직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제정되었다. 법률은 8개 조항이 있었는데, 다음의 3개 조항만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 갚는다.”

“도둑질한 자는 잡아다 종으로 삼는다. 용서를 받으려면 많은 돈을 내야 한다.”

이 법을 보면, 고조선 사회는 사람들의 생명(노동력)과 재산을 중시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2] 철기가 보급되어 나타난 사회 변화는?[편집]

  • 철기는 주로 어디에 사용하였나?
  • 철기의 사용으로 인하여 나타난 사회 변화는?
  • 철기 시대의 생활 모습은?

철기의 보급[편집]

우리 나라에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세기경이었다. 처음에는 청동기도 함께 사용되었으나, 기원전 1세기경부터는 철기가 널리 보급되었다. 철은 주로 생활 도구와 무기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에 철을 단단하게 담금질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철도 많이 생산하였다.

농기구로는 이전의 목기나 석기와 함께 삽, 괭이, 낫 같은 철제 농기구들을 사용하였다. 무기로는 칼, 창, 화살촉 등이 있었으며, 공구로는 끌, 톱, 도끼, 자귀 등이 있었다.

한편, 토기의 생산 기술도 발달하였으며,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의 토기를 만들었다.

철기 시대의 생활과 사회[편집]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농업 기술이 발달하고 경작지의 개간도 쉬워져 농업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고, 인구도 크게 늘어났다. 반면에, 부족 간에 서로 많은 식량을 차지하려고 하면서 다툼이 생겼고, 철제 무기를 전투에 사용하게 되면서 부족 간의 전쟁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철을 잘 이용한 부족은 세력을 크게 키워 국가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또, 중국이나 일본과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문화 교류를 하였다.

철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직업의 전문화와 사회의 계층화가 더욱 뚜렷해짐에 따라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는 새로운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철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는 널무덤과 독무덤 등이 있다.

널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을 넣은 것으로,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지다가 남부 지역으로 퍼져 나갔는데, 특히 낙동강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독무덤은 두 개의 항아리를 옆으로 이어 만든 것으로, 철기 시대 전기에는 소형이었다가 점차 커졌는데,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는 대형의 독무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3] 여러 나라의 정치와 사회 풍속은 어떠하였는가?[편집]

  • 어떤 나라들이 일어났나?
  • 각 나라에는 어떤 풍속이 있었나?

여러 나라의 등장[편집]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다가 사라질 무렵, 그 주변 지역에서는 한민족의 또다른 집단들이 부족 단위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각 세력은 다른 부족과의 연합 또는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국가로 발전해 나갔다. 만주 지방에는 부여와 고구려가 자리잡고, 한반도 북부 동해안 지방에는 옥저와 동예가 자리를 잡았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는 삼한이 발전하였다. 한강 이남 황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마한이 자리를 잡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마한에는 54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목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의 왕으로 행세했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개의 소국이 있었다.

여러 나라의 정치 조직[편집]

각 나라는 성장 과정에 따라 나름대로의 독특한 정치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몇 개의 부족이 연합한 연맹 왕국이었다. 부여는 왕 밑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이 있었다. 고구려도 5개 부족이 연합하여 세웠는데, 왕의 권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옥저와 동예에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는 지배자가 없었고, 각 부족을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들이 다스렸다. 삼한의 소국들도 신지, 읍차 등으로 불리는 군장들이 정치를 맡았으며, 제사장은 소도라는 특별 구역에 머무르면서 제천 행사를 담당하였다.

읽기자료

⋅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 ⋅

옛날에 시조 추모왕(주몽)이 나라를 세웠는데, 그는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수신)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웠다.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거쳐 가게 되었다. 왕이 나루터에서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 하였다. …… 그는 강을 건너가서 비류곡 흘본(졸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 - 광개토 대왕릉비

법률과 풍속[편집]

나라마다 사회 관습, 종교 의식 및 법률이 있었다. 사회 유지를 위한 기본법으로는 살인이나 남에게 상해를 입힌 죄, 도둑질에 대한 벌칙 등이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의 법과 비슷하였다.

부여에는 순장과 껴묻거리를 묻는 장례 관습이 있었고, 횐 옷을 즐겨 입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무예를 중히 여겨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 하였으며, 수렵 대회, 씨름 대회 등을 열어 신체를 단련하였다. 또, 고구려에는 서옥제(일종의 데릴사위제)가 있었고, 무덤 속에 금, 은 등을 묻는 풍습이 있었다.

옥저와 동예의 언어와 풍습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았다. 옥저는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되었으나,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삼베와 소금, 어물 등의 특산물을 바쳤다. 또, 옥저에는 어린 며느리를 맞이하는 풍속(민며느리제)이 있었고, 한 가족의 뼈를 함께 매장하는 가족 공동 묘 관습이 있었다. 동예는 산천을 중히 여겨, 각 부족이 소유한 산천에 다른 부족이 출입하는 것을 막았다. 또, 읍락끼리는 서로 침범하지 않았는데, 이를 어기면 소, 말 등으로 갚아야 했다. 그리고 같은 씨족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삼한에서는 특히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업이 발달하였다. 한편, 변한에서는 철을 많이 생산하여 마한, 한의 군현, 일본 등으로 수출하였으며, 이를 화폐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순장

사후의 세계를 믿어, 지배 계급의 인물이 죽었을 때에 부인, 신하, 노비 등을 함께 묻는 장례법이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단군 건국의 역사적 의의

  • 단군 이야기는 고조선 건국의 역사적 사실을 말해 준다.
  • 고조선의 영역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었다.

나. 철기의 사용과 사회 변화

  • 철기는 주로 무기와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여러 나라가 건국되었다.

다. 여러 나라의 정치와 사회 풍속

  • 여러 나라는 연맹 왕국 또는 소국의 형태였다.
  • 군장은 읍군, 삼로, 신지, 읍차 등으로 불렸다.
  • 각 나라는 법률과 독특한 사회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2. 주요 용어

단군 | 홍익인간 | 철기 문화 | 널무덤 | 독무덤 | 제천행사

3. 탐구 활동
  1. 고조선의 8조 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회 모습을 설명해 보자.
  2. 여러 나라의 고유한 풍속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자세히 조사해 보자.

한 걸음 더[편집]

심화 과정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는 해와 달이 뜨고 지며 별이 움직이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시절의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가.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인간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해, 달, 산, 강, 동물, 나무 등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특정 동물을 자기 부족의 수호신으로 생각하여 숭배하기도 하였다.

나. 족장(군장)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 등의 종교 의식도 주관하여 더욱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를 제정 일치의 사회라고 한다.

다. 부여에는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12월에 영고라는 행사가 있었다. 이 때에는 온 백성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으며, 죄인을 풀어 주기도 하였다.

라. 고구려에는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온 백성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조신에게 감사하는 축제를 벌였다. 또, 나라의 동쪽에 ‘수혈’이라 부르는 큰 굴이 있어, 그 굴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동예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었다.

마. 삼한은 해마다 씨뿌리기가 끝난 5월과 추수가 끝난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 때에는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축제를 벌였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각 나라에는 천신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이를 천군이라고 불렀다. 또, 소도라는 곳이 있어서, 큰 나무를 세워 북과 방울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겼다고 한다.

탐구 문제

위의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 각 나라의 제천 행사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보자.
  2. 이 시대 사람들은 왜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까?
  3. 스스로 제사장이 되어 하늘에 바치는 기도문을 지어 보자.
  4. 오늘날에도 고대의 제천 행사와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행사가 있는지 조사해 보자.

단원 종합 수행 과제[편집]

선사 시대로 여행하기

1. 주제

선사 시대의 생활 모습을 상상화로 그리기

2. 목표

  • 선사 시대의 학습 내용을 종합하여 한 화면에 담아 본다.
  •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하여 구성한다.

3. 내용

각 지역의 선사 시대 유적을 답사하거나 그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상상해 본다.

4. 과제 수행 과정

[1] 조별로 공동 작업(2명~4명 정도)을 한다.

[2] 주제 및 소재는 토의를 통해 공동으로 결정한다.

5. 유의 사항

[1] 그림에 담을 내용은 학습한 내용과 일치하도록 한다.

[2] 그리기의 형식은 자유롭게 선택한다.

6. 보고서 제출

과제 완료 후 작품 및 작업 과정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