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Ⅱ. 삼국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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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편집]

  • 삼국 및 가야의 성립 과정을 알아보자.
  •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알아보자.
  • 삼국의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살펴보자.

1. 삼국의 형성[편집]

학습 개요[편집]

삼국은 연맹 왕국에서 발전하여, 왕위를 세습하고 행정 제도 등을 정비하면서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와 함께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낙동강 유역에서 성장한 가야 연맹은 삼국과 함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 고구려는 어떻게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나?[편집]

  • 고구려는 어떻게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나?
  • 고구려가 만주 대륙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은 어떠하였나?
  • 고구려는 넓은 영역을 어떻게 통치하였나?

고구려의 성장[편집]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나라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구려의 지배 세력은 부여 계통의 이주민이었으며,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토착민들과 힘을 합하여 나라를 세웠다(기원전 37).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통구 지방)으로 천도하면서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평야 지대로 진출하는 데 힘쓰는 한편, 중국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발전하였다.

고구려가 성장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태조왕 때부터였다. 이 때, 고구려는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였으며, 요동 지방으로도 진출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에 힘입어 계루부 출신의 고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할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 후,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 전통을 가진 5부족을 동, 서, 남, 북, 중의 5부로 바꾸었다. 그리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남으로 대동강 유역을 확보한 후,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그 후 고구려는 서북쪽의 전연과 남쪽의 백제의 침략을 받으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이전의 다양한 신앙을 불교 중심으로 통합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어 태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길렀으며,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정치 제도[편집]

고구려에서는 왕족을 포함한 5부족의 귀족들이 최고 지배층을 이루었으며, 이들이 왕과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 중에서 왕족인 고씨는 계루부 출신으로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절노부에서는 왕비를 배출하였다.

중앙의 정치는 대대로를 비롯하여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나누어 맡았다. 행정 구역은 수도와 전국을 각각 5부로 나누었으며, 각지에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지방 장관은 중앙에서 파견하였는데, 행정과 군사를 함께 맡았다.

수상의 위치에 있는 대대로는 귀족들이 선출하였고, 귀족 대표자회의인 제가 회의에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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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성과 환도산성 ⋅

고구려는 주로 성을 쌓고 그 안에 거주하면서 외적의 침략에 맞섰다. 성은 평지성과 산성으로 나눌 수 있는데, 평지성은 평상시에 생활 중심지로 이용하였고, 산성은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수도 역시 평지성과 산성이 하나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국내성은 평지성, 환도산성(산성자 산성)은 산성에 해당한다.

[2] 백제의 성장 과정은?[편집]

  • 백제의 건국 과정은 어떠하였나?
  • 백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어떻게 가능하였나?
  • 백제의 통치 방식은 어떠하였나?

백제의 건국[편집]

백제는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들이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자리잡으면서 마한의 한 나라인 백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기원전 18). 한강 유역은 일찍부터 철기 문화와 농경 문화가 크게 발달한데다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나라가 빨리 발전하였다.

백제의 건국 설화를 보면, 백제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고구려계의 유이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왕실이 부여씨를 칭한 것이나, 서울 석촌동의 돌무지무덤이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무덤과 관련이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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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조와 비류 ⋅

백제의 건국 과정은 시조 온조의 설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아들 유리가 부여에서 졸본으로 주몽을 찾아오자, 비류와 온조 형제는 그를 피해 남쪽으로 무리를 이끌고 내려와 각각 미추홀(인천)과 위례성(서울)에 자리를 잡았는데, 뒤에 비류의 세력이 온조의 세력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성장[편집]

백제는 성장 과정에서 중국 군현의 압력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백제가 중국 세력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치면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였다. 고이왕은 밖으로 마한의 중심 세력인 목지국을 병합하고, 한반도의 중부 지역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안으로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관리의 복색과 중요한 법령을 제정하는 등 국가 조직을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백제가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였다. 이 때, 안으로 왕위의 부자 상속이 이루어졌으며, 밖으로는 북으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으로는 마한 전 지역을 확보하였다. 이렇게 영토가 크게 확대되자, 백제의 국제적 지위도 한층 높아졌다.

백제는 중국의 동진, 가야, 왜와 외교 관계를 맺고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백제는 황해를 건너 중국의 요서⋅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진출하여 활동 무대를 해외로 넓혔다.

이 무렵, 백제는 동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사상을 통일하고자 하였으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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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복 군주 근초고왕 ⋅

근초고왕은 체격이 크고,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정복 군주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다. 그는 남쪽으로 영산강 유역에 진출하여 마한 세력을 통합하고, 이어 낙동강 유역의 가야 지역과 연결하여 이를 백제 세력권으로 끌어들였다.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으로 진출하여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쳤으며,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 무렵, 백제는 한반도의 중부와 남서부 지역에 걸치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삼국의 세력다툼에서 힘의 우위를 지켜 나갔다. 이러한 위업을 달성한 후, 근초고왕은 황색 깃발을 휘날리면서 군대를 사열하여 승리를 과시하였다. 이 황색 깃발은 중국 황제가 쓰는 것이었는데, 백제의 왕이 삼국을 대표하는 황제의 위상에 있었음을 과시한 것이다.

백제의 정치 제도[편집]

백제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면서 왕족인 부여씨와 8개의 귀족 가문이 왕과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 중 귀족들은 정사암에 모여서 재상을 선출하였는데, 이는 귀족 회의의 전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중앙에는 왕 밑에 좌평을 비롯한 16등급의 관리가 있어 나랏일을 맡아 보았는데, 그 중에서 상좌평이 최고 책임자였다. 사비로 천도한 후에는 6좌평 외에 새로 22부의 실무 관청을 두어 행정을 분담하였다. 그 후 수도는 5부로, 지방은 5방으로 각각 나누었으며, 지방에는 중앙의 관리를 보내 행정과 군사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지방의 요지에는 한때 22개의 담로를 두고 왕족을 보내 다스렸다.

담로

백제가 방, 군, 성의 지방 제도를 마련하기 이전에 설치한 제도로서,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왕자나 왕족으로 지방의 요지에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

읽기자료

⋅ 백제의 중국 진출 ⋅

중국 역사서(‘양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나라 시대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유하니, 백제는 요서, 진평 두 군을 점령한 후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3] 신라가 국가 체제를 정비해 간 과정은?[편집]

  • 신라의 성장이 늦은 까닭은?
  •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해 간 과정은?
  • 골품제란?

신라의 건국과 성장[편집]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 가운데 경주 평야에 있던 사로국에서 시작하였다(기원전 57). 신라는 박, 석, 김 3성의 시조 설화에서 보듯이, 여러 세력 집단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적 통합이 비교적 늦었다.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은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였다. 이 때,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 종래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이 때부터는 김씨가 왕위를 계속 이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왕호도 대군장이라는 뜻을 가진 마립간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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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건국 이야기 ⋅

신라의 건국 과정은 시조 박혁거세의 설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사로국에 살던 6촌의 촌장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박혁거세를 추대하여 왕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신라가 박혁거세와 6촌의 촌장들이 서로 연합하여 세운 나라라는 사실을 반영해 준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서 건국의 주인공이 태양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선민 사상을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지배자의 칭호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의 순서로 바뀐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몇 단계의 과정을 거쳐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골품제와 정치 제도[편집]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독특한 신분 제도인 골품제를 마련하여 통치 기반을 정비해 나갔다. 골품제는 각 지방의 부족장들을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등급을 두어 중앙 귀족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성립하였다. 왕족은 성골, 진골에 속하고, 일반 귀족들은 6두품 이하의 각 두품에 속하였다.

왕위는 처음에는 성골에서 차지하였으나 무열왕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고, 3두품 이하는 평민 신분이 되었다. 신라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은 골품에 따라 결정되었다. 진골은 최고 귀족으로서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였고, 6두품은 6등급 아찬까지의 벼슬만 할 수 있었으므로 정치보다는 주로 학문과 종교 쪽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신라는 귀족 대표들이 모인 화백 회의에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화백 회의를 주재하는 상대등은 귀족 세력의 대표자로서 수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강화되면서 집사부의 중시(시중)가 행정을 총괄하였다. 행정 구역은 수도를 6부, 지방을 5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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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품과 결혼 ⋅

골품제 아래에서는 같은 신분끼리 결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같은 진골이라도 경주 출신과 지방 소국 왕족의 후예들과는 차별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금관가야의 왕족으로 진골 신분이 되었지만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의 딸 만명과의 결혼이 어렵게 이루어졌다.

또, 경주 출신 진골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와 결혼하여, 한때 동료 진골 귀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였다.

[4] 가야가 연맹 왕국 단계에 머무른 까닭은?[편집]

  • 철 생산이 가야의 성장⋅발전에 미친 영향은?
  • 가야가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멸망한 이유는?

철의 나라 가야[편집]

낙동강 하류 유역의 변한 땅에서 가야의 여러 나라가 일어났다.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서 국가 조직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에 가야는 연맹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해상 활동에 유리한 입지 조건과 철의 생산 및 교역 활동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김해 지방에는 질 좋은 철이 많이 나서 각종 철제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덩이쇠를 만들어 화폐와 같은 교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가야는 낙동강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신라에 가로막혀 번번이 좌절되자, 백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를 견제하였다.

고구려가 왜군과 싸우는 신라를 돕기 위해 5만의 군대를 보내어 가야 지역을 공격해 오자,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어 맹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 후, 낙동강 서쪽의 여러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연맹체를 이루었다. 고령의 대가야는 질 좋은 철을 많이 생산하였고, 좋은 농업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대가야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5세기 이후 금관가야를 대신하여 가야 연맹체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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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가야 ⋅

건국 설화에 의하면, 시조인 수로왕은 부족장 9명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고 한다(42). 금관가야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철을 중국의 군현과 왜에 수출하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누려 낙동강 하류의 여러 가야를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등장하였다. 김해 대성동 유적이나 부산 복천동 유적 등에서 나온 많은 유물은 당시 가야의 국력과 왕권이 강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고구려의 가야 연맹군 공격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신라 내물왕의 구원 요청을 받아 백제, 가야, 왜의 연합 세력을 낙동강 중⋅하류 지역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연맹 왕국 가야의 멸망[편집]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은 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하여 그 세력 범위를 소백 산맥 서쪽까지 확장시켰다. 또,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교통하였으며,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백제와 함께 구원하기도 하였다.

6세기에 이르러 가야 연맹은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서 두 나라의 압력을 계속 받아 위축되었다. 이는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그 보상을 가야 지역에서 찾으려 하였고, 신라도 이에 자극을 받아 가야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백제와 신라가 이미 중앙 집권 체제를 마련한 것에 비하여 가야 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했으므로 그 지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가야 연맹은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가야 연맹은 두 나라의 침략으로 영토가 점차 축소되다가 신라 법흥왕 때에는 금관가야(532)가, 진흥왕 때에는 대가야(562)가 멸망하였다. 국력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던 가야 연맹은 결국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멸망한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던 가야 문화는 뒤에 신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 가야의 일부 세력이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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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륵이 가야 음악을 신라에 전하다 ⋅

우륵은 대가야의 음악가로서 가야 음악 12곡을 지었는데, 대가야가 멸망하기 직전인 신라 진흥왕 때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는 국원소경(충주)에서 여러 제자를 길러 가야의 음악을 신라에 전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고구려의 건국과 성장

  • 태조왕 때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펴 옥저, 동예 및 요동 지방을 정복하였다.
  • 4세기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설립하였으며, 율령을 반포하였다.

나. 백제의 건국과 성장

  • 고구려계 유이민이 한강 유역에 자리잡아 나라를 세웠다.
  • 3세기에 이르러 마한 지역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 4세기에는 중국의 요서 지방과 왜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다. 신라의 성장

  • 4세기 후반 내물왕 때 낙동강 유역을 정벌하고 왕위를 세습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 신분 제도로는 골품제가 있었으며, 국가의 중대사는 화백 회의에서 결정하였다.

라. 가야 연맹의 흥망

  • 가야의 여러 나라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국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 통일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신라에 흡수되었다.
2. 주요 용어

제가 회의 | 골품제 | 화백 회의

온조 | 박혁거세 | 수로왕 | 태조왕 | 고이왕 | 내물왕

3. 탐구 활동

1.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 이야기를 조사하고 비교해 보자.

2. 삼국이 연맹 왕국에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정리해 보자.

한 걸음 더[편집]

심화 과정

왕권은 어떻게 강화되었는가?

왕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왕에 관한 다음의 기록을 읽어 보자.

가.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신분의 상하가 나타나는 계층 사회가 성립되었다. 부족을 통솔하는 족장(군장)은 농업 생산의 증대로 재산을 늘려 갔으며,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여 이웃 부족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또, 족장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 등 종교 의식도 주관하여 더욱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청동기 시대)

나. 나라에는 군왕이 있었다. 또, 가축 이름으로 정한 마가, 우가 같은 여러 가가 있어 자기들의 세력권인 사출도를 별도로 다스렸다. 부여의 풍속에서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여물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부여)

다. 왕의 은택은 하늘에 미쳤고, 위엄은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들을 쓸어 없애니 백성들이 각기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광개토 대왕릉비)

탐구 문제

44쪽의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 이 자료를 통하여, 왕의 지위와 역할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자.

2. 삼국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시기를 조사해 보자.

3. 오늘날의 대통령과 과거의 왕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2. 삼국의 발전[편집]

학습 개요[편집]

삼국은 서로 대립, 항쟁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고구려는 5세기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만주 지방과 한반도 중부 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였다.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는 6세기 이후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1]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편집]

  •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의 영역은 어디까지 미쳤을까?
  • 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한 까닭은?

정복왕 광개토대왕[편집]

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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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

광개토대왕은 먼저 4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 일대를 차지하였다. 이어 북쪽의 거란을 원정하여 많은 촌락을 파괴하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것은 모용씨가 세운 후연을 공략하기에 앞서 그 배후의 거란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여러 성을 함락한 후,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에 육박하였다. 이에 백제가 굴복하고 일시적이나마 고구려에 복속하기를 맹세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의 땅을 모두 점령하였다. 또,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내어, 당시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쳤다. 남쪽의 후환을 없앤 고구려는 서북쪽의 후연을 격파하여 오랜 숙원이던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동북쪽의 부여와 동쪽의 말갈을 굴복시켰다. 이리하여 광개토대왕은 남북으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촌락을 차지할 정도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편집]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왕은 장수왕이었다. 영토가 넓어지자, 다시 안으로 체제를 정비할 필요를 느낀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였는데,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고구려는 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475).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아산만에서 소백 산맥을 넘어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 5세기 말에 고구려는 한반도의 중부 지방과 요동을 포함한 만주 땅을 차지하여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중국의 북위에서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을 접대할 때에 특별히 고구려 사신을 우대하였는데, 이로써 당시 동북 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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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 ⋅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고구려 사람들은 스스로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왕을 ‘태왕’ 또는 ‘성왕’이라 불렀고,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높였다. 당시 고구려는 그들 나름대로의 천하 세계를 만들어 놓고, 백제와 신라에 대한 우월 의식이나 자존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신라는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으며, 고구려는 신라를 복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놓고 신라와 백제를 그들 천하 세계에 종속된 나라로 인식하였던 것은 바로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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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왕의 평양 천도 ⋅

국내성은 수도로서 안정된 후방 기지를 확보하고 넓어진 국토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데에는 부적당하였다. 반면에, 평양은 고조선 이래 역사적, 문화적으로 발전된 지역으로,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그리고 밖으로는 한강 이남의 백제나 신라에 커다란 위협을 줌으로써 삼국 간 세력다툼의 주도권을 쥐는 데에 유리하였으며, 안으로는 국내성에 세력 기반을 가진 귀족들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2] 백제는 중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가?[편집]

  •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에 어떻게 대항하였는가?
  • 중흥을 위한 성왕의 노력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천도와 국가 재건 노력[편집]

5세기 후반에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직접적인 침략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백제는 중국의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수도인 한성을 비롯한 한강 유역을 빼앗겼으며, 개로왕이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수도를 웅진성(공주)으로 옮겼다(475).

백제는 한강 유역의 상실로 큰 시련을 맞았다.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왕권이 쇠약해지고 국력도 약화되었다. 이러한 때에 백제의 부흥을 꾀한 왕은 동성왕이었다. 동성왕은 신라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하는 한편, 국력의 회복에 힘썼다.

백제는 무령왕 때 중국 남조의 양과 국교를 맺고 문화 교류에 힘썼다. 또, 지방의 요지인 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고,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 국력을 점차 회복하였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많은 유물들은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적으로 세련되었음을 보여 준다.

중흥을 위한 성왕의 노력[편집]

백제가 본격적인 중흥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6세기 중반 성왕 때였다. 성왕은 수도를 비좁은 웅진성에서 넓은 벌판인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이 때, 중앙에 22개의 실무 관청을 두고, 수도에 5부, 지방에 5방을 두어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과 문물을 교류하였으며, 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전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하여. 이전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오랜 숙원을 한때 이루었으나, 곧 동맹국인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에 빼앗겼다.

이에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여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삼국 간 세력다툼의 모습이 달라져, 백제는 고구려와 힘을 합해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관산성 전투

성왕이 이끈 백제군을 격퇴한 신라의 장군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성왕을 포함하여 3만에 가까운 군사를 잃었을 정도로 참패하였다.

[3]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의미는 무엇인가?[편집]

  • 진흥왕의 영토 확장 과정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의미는?

신라의 발전[편집]

신라는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 진흥왕에 이르면서 크게 발전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나라의 면모가 날로 새로워지는 것에 맞추어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였으며, 정치 제도를 더욱 갖추어 나갔다. 이 밖에 전국적인 지방 제도인 주⋅군 제도를 정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이것은 신라가 선진 중국 문화와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 사회의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법흥왕 때에는 나라의 법령인 율령을 반포하고, 17관등과 모든 관리들이 입는 공복을 정하였다. 이것은 다양한 세력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통합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또,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였으며, 골품제를 정비하고 진골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두어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 때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주 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또, 귀족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불교를 공인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였으며,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의 가야 땅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편집]

이렇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신라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진흥왕은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기반을 굳게 다지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다.

이 무렵에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진흥왕은 국력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다.

도움글

⋅ 화랑도 ⋅

화랑들은 원광의 가르침인 세속 5계를 지키며, 산천을 널리 돌아다니면서 무술과 도의를 닦고, 전쟁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웠다. 김대문은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신이 여기서 배출되었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사들이 이 곳에서 생겨났다.”라고 썼고, 중국의 기록에서는 “귀족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 하였다. 당시의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섬겼다.”라고 하였다.

화랑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도움글

⋅ 한강 유역의 중요성 ⋅

농경에 적합한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여러 지역의 문화가 합쳐지고, 또 그 주변에 많은 인구와 물자가 모이는 곳이다. 그리고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에 적합한 지리적 이점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한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백제는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면서 일찍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해외로 진출하여 국력을 과시하였다. 그 후, 백제는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점차 쇠퇴하였다.

신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중국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기가 어려웠고 나라의 발전이 늦었다. 그러나 진홍왕때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을 끊을 수 있었고, 황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교류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강 유역의 경제력을 확보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장차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성장한 과정

  • 광개토대왕 때 만주 지역과 한반도 중부에까지 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 장수왕은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기고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나. 백제의 중흥

  • 백제는 5세기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 성왕 때에는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활발한 외교 활동을 폈으며, 행정력을 강화하여 부흥을 이루었다.

다.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

  • 법흥왕, 진흥왕 때에 이르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외교가 원활해지고, 한강 유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2. 주요 용어

광개토 대왕릉비 | 남진 정책 | 담로 | 화랑도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무령왕 | 성왕 | 법흥왕 | 진흥왕

3. 탐구 활동

1. 불교가 삼국의 정치⋅문화 발전에 미친 영향을 조사해 보자.

2. 다음은 신라 청년들의 맹세가 담긴 ‘임신서기석’의 내용이다. 지금 여러분이 친구와 맹세하는 글을 남긴다면 어떤 내용을 담겠는가? 친구와 의논하여 써보자.

나라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다.

나라가 불안할 때에는 나가 싸운다.

3년 안에 시경, 상서, 예기, 좌전을 차례로 습득한다.

임신년 ○월 ○일

3. 신라의 삼국 통일[편집]

학습 개요[편집]

7세기에 접어들어 삼국은 치열한 대결을 하였다. 고구려는 수⋅당의 대대적인 공격을 막아 내면서 동북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였다. 백제도 신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빼앗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신라는 당과 연합하였고,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당이 신라까지 지배하려고 하자, 신라는 당을 몰아 내기 위한 전쟁을 치러, 마침내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1]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편집]

  • 삼국의 대외 관계는 어떠하였나?
  • 살수 대첩, 안시성 싸움 등에서 고구려가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삼국의 대외 관계[편집]

삼국은 국가 발전 과정에서 각 나라의 이익과 한반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대립하거나 연합하였다. 삼국의 대외 관계는, 삼국은 물론, 중국을 비롯한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로서 오랜 분열을 겪고 있었는데, 삼국은 이를 외교적으로 잘 활용하였다.

삼국은 중국과 평화적인 교섭을 벌이기도 하고, 중국의 침략에 과감히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 밖에 북방 민족이나 왜 등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자기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치적, 문화적 이익을 얻었다.

6세기 중엽에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고립되었다. 고구려는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백제는 전사한 성왕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신라를 협공하였다. 두 나라는 중국 교류의 관문인 신라의 당항성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 무렵, 오랜 분열과 혼란을 거듭해 온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에, 국가적인 위기에 빠져 있던 신라는 수에 도움을 청하였다. 한편, 수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같은 처지에 놓인 유목 민족인 돌궐과 연합하여 수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신라와 적대관계에 있던 백제는 고구려와 힘을 합쳐 신라에 맞섰다. 이리하여 6세기 말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 백제, 왜, 돌궐을 연결하는 남북 세력과 신라, 수(당)를 연결하는 동서 세력 간 다툼의 양상을 띠었다.

살수 대첩[편집]

고구려는 수의 침입을 미리 막고 전략상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먼저 랴오허 강을 건너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공격하였다. 이에 수 문제가 침공해 왔으나, 고구려는 이를 물리 쳤다.

그 후, 수 양제가 황제에 올라 천하의 최고 통치자임을 내세우고 동북 아시아의 강국 고구려까지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줄기찬 공격을 받아 고전하던 신라는 원광을 수에 보내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612년에 수 양제는 직접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는 데 실패하고 바다를 건너 평양성 부근까지 침략한 수군 또한 참패하자, 초조해진 수 양제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투입하여 평양성을 치게 하였다.

우중문 등이 거느린 별동대는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 평양성 부근까지 진군하였다가 크게 지치고 굶주려 결국 후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 틈을 타서,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그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하여 별동대 30만 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겨우 27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612).

그 뒤에도 고구려는 수의 공격을 몇 차례 더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수는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내란으로 결국 망하고 말았다.

읽기자료

⋅ 을지문덕의 시 ⋅

을지문덕은 수의 장군 우중문에게 그의 공을 비웃는 오언시를 보냈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어 볼 만하고

오묘한 전술은 땅의 이치를 모조리 알도다.

전쟁에 이겨서 공이 이미 높아졌으니

만족을 알거든 그만 돌아가시구려. ‘삼국사기’

안시성 싸움[편집]

수가 망한 뒤에 중국을 통일한 당은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화친을 꾀하였다. 수와 전쟁할 때 잡힌 포로들을 서로 교환하기로 하여 고구려는 1만여 명의 포로를 송환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이 즉위한 뒤부터는 두 나라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자, 당 태종은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주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는 한편, 고구려에도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구려는 랴오허 강 주위의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당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 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을 제거하였다.

이어 연개소문은 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다.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에 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에 대한 공격을 한층 더 강화하였으며,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당의 간섭을 단호히 물리쳤다.

이에 당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삼아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당 태종은 육군과 수군으로 양쪽에서 공격해 왔다. 먼저, 랴오허 강을 건너 요충지인 요동성, 백암성 등을 차례로 함락한 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은 조그마한 산성이었지만 서쪽 변경의 중요한 요새였다. 안시성은 당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하루에도 6, 7회의 공격을 받았으며, 마지막 3일 동안 총공격을 받았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안시성에서는 성주를 비롯한 모두가 굳세게 저항하여 끝내 당군을 물리치고 성을 지킬 수 있었다(645).

그 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침입을 몇 차례 받았으나, 이를 모두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당과 거듭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잘 훈련된 군대와 성곽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 체제, 탁월한 전투능력 및 요동 지방의 철광 지대 확보, 그리고 굳센 정신력에 있었다.

수⋅당의 침입에 맞서 고구려가 거둔 승리는 우리 역사상 매우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수⋅당은 고구려를 정복하여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들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안시성 싸움

당은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60여 일 걸려서 흙으로 높은 산을 쌓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

[2]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과정은?[편집]

  •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과정은 어떠하였나?
  • 나⋅당 전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편집]

고구려가 중국의 수⋅당군과 치열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백제는 신라를 자주 공격하였다. 의자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싸움이 보다 격렬해져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고,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공격하였다.

위기에 처한 신라는 앞서 고구려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에 구원을 청하였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에 넘겨주겠다는 비밀 약속을 하였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당군과 함께 사비성을 함락하였다(660).

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와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당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잘 방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데다가,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자 지도층 안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 기회를 틈타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도움글

⋅ 계백의 항전 ⋅

계백은 나⋅당 연합군을 맞아 결사대 5천명으로 황산벌(연산)에서 항전하였다.

그는 전쟁터로 가면서 “나라가 살아남을지 알 수 없다. 나라가 망해 나의 처자식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지 모르니 살아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흔쾌히 죽는 게 낫다.”라고 하면서 가족을 죽이고 싸우러 나갔다고 한다.

나⋅당 전쟁[편집]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준다는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군을 몰아 내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먼저,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찾기 위해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고구려 유민들을 이용하여 당 침략군을 몰아 내려고 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왕족 안승으로 하여금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도록 하였다. 아울러, 신라군은 당군이 주둔하고 있던 사비성을 함락하여 웅진 도독부를 없애고,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그 후, 당군은 말갈군과 거란군을 앞세워 계속 침범하였으나, 신라는 장기간의 끈질긴 항쟁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신라군은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크게 물리쳐 군마 3만 마리와 많은 무기를 빼앗았으며,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에서 격파하였다. 이렇게 당 침략군을 계속 물리친 신라는 드디어 대동강 이남 땅에서 당군을 완전히 몰아 냄으로써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중국 세력인 당의 도움을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 지역에 한정되었다는 점에 한계가 있으나, 우리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우리 민족이 이룬 최초의 통일로서, 새로운 민족 문화를 이루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신라가 당의 야욕을 물리치고 통일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인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도움글

⋅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 ⋅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 등 5도독부를 두고 평양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을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먼저,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백제인들은 침략자들을 몰아 내려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은 주류성에서,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각각 군사를 일으키니, 200여 성이 호응하여 그 기세가 드높았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고, 사비성을 포위하여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과 신라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 부흥 운동은 지도층의 내분으로 실패하였고, 이를 도우러 왔던 일본 세력도 백강(금강 하류)에서 격퇴되었다.

한편,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들도 곳곳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검모잠은 보장왕의 아들 안승을 왕으로 받들고 당군과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패하였고, 그 유민들은 신라에 포섭되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안승을 금마저에 머물도록 하였다. 요동 지방에서도 보장왕과 그 손자 보원이 부흥 운동에 힘썼으나 당의 회유와 이주 정책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 유민들의 대부분은 발해에 통합되었다.

주류성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 운동 근거지로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고구려의 수⋅당 침략 격퇴

  •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수의 백만 대군의 침략을 막아 냈다.
  • 안시성에서는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을 격퇴하였다.

나.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

  • 고구려, 백제의 협공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는 당과 연합하였다.
  • 나⋅당 연합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끈질긴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 신라는 당을 몰아 내고 한반도 중⋅남부를 통합하였다.
2. 주요 용어

살수 대첩 | 안시성 싸움 | 백제⋅고구려의 부흥 운동

을지문덕 | 연개소문 | 계백 | 김유신 | 김춘추

3. 탐구 활동

1. 삼국의 대외 관계를 나⋅제 동맹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도표로 그려 보자.

2. 다음 글은 김춘추가 고구려와 당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에 관한 기록이다. 김춘추의 외교 활동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발표해 보자.

김춘추가 고구려 보장왕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이제 백제가 탐욕이 심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므로, 신라의 왕이 고구려의 군대를 얻어 그 치욕을 씻으려 저로 하여금 돌아가 몸을 의지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고구려 왕이 이르기를, “죽령은 본래 우리의 영토이니, 만일 네가 죽령 서북쪽의 땅을 돌려준다면 구원병을 보내겠다.”라고 하였다. 김춘추가 대답하기를, “신은 왕의 명을 받고 군사를 청하거늘, 왕께서는 남의 근심과 재난을 구하여 이웃과 친선하려 함에는 뜻이 없으시고, 단지 저를 위협하여 국토의 반환만을 요구하시니, 신은 죽올지라도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하자, 왕은 노하여 김춘추를 별관에 가두었다.

왕이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을 당에 보내었다. …… 김춘추가 당 태종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바다 귀퉁이에 치우쳐 있어 당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인데,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여러 번 마음대로 침략하고, 더구나 선덕왕 11년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공격, 함락시켜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의 군사를 보내시어 백제를 없애 주지 않으면, 우리 백성들은 전부 사로잡혀 조공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깊이 동정하여 군대의 동원을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단원 종합 수행 과제[편집]

역사 사실을 지도와 연표에 표시해 봅시다.

1. 주제

백지도, 연표 작성

2. 목표

사건과 영역 등을 하나의 지면에 나타내어 보기

3. 내용

삼국 시대의 주요 사실과 영역을 단순화하여 명료하게 표시해 본다.

4. 유의 사항

이 과제는 교과서의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담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간결하게, 그리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즉 시각적인 효과를 최대화 할 수 있도록 각자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잘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1] 주요 사실과 상황을 지도에 표시해 보기(다음과 관련된 지역을 표시해 보자.)

① 삼국의 수도

② 여러 가야의 위치

③ 5세기경 삼국의 영토

④ 삼국 간의 전쟁터

⑤ 중국과의 주요 전쟁터

[2] 주요 사건 연표 작성하기(연표에 써 보자.)

① 삼국의 건국

② 영토를 크게 넓힌 왕들의 활동 시기

③ 중국과의 전쟁

④ 고구려, 백제의 멸망

⑤ 나⋅당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