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Ⅳ. 고려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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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편집]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제도를 정비한 과정을 알아보자.
  • 고려 중기 이후, 사회가 변화하면서 어떠한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보자.
  • 몽골의 침입에 대한 고려인의 끈질긴 항쟁과 원 간섭기 고려 사회의 변화 모습을 알아보자.

1. 고려의 발전[편집]

학습 개요[편집]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후 통일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성종 때에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다졌다. 고려는 건국 직후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자 노력하였다.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는?[편집]

⋅ 고려 태조 왕건은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나?

⋅ 고려 왕조 성립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고려의 건국[편집]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우세한 군사력으로 신라를 압박하였다. 한편,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꾸었다. 태봉은 한때 지금의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의 일부까지 영역을 넓혀 세력을 떨쳤다. 그리하여 태봉, 후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였다.

송악 출신의 왕건은 궁예의 신하였는데. 후백제의 배후 지역인 금성(나주)을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시중의 지위에 올랐다. 반면에, 궁예는 미륵불로 자칭하면서 주변 사람을 의심하고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어 갔다.

이에 신하들이 궁예를 내쫓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나라 이름을 고려로 고치고 연호를 천수라 하였으며(918), 이듬해에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미륵불

미래의 어느 시대에 나타나 중생을 구원한다는 부처이다.

후삼국의 통일[편집]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와는 달리 확고한 토착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군대의 규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므로 곳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가혹한 세금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세금을 줄이는 등 민심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후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썼다. 후백제의 공격으로 쇠약해진 신라의 경순왕은 더 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어 스스로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었다(935).

한편,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의 큰아들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위를 빼앗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로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려는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태조의 정책[편집]

태조가 국가의 기반을 다지고, 이 토대 위에서 후삼국을 통일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태조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마침내 통일을 달성하였다. 통일을 위해 태조가 추구한 정책의 방향은 다음과 같았다.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북방 진출을 꾀하여 북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나라 이름도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고려라 하였다. 태조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중시하여 이 곳을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태조는 이 곳에 자주 들러서 북방 지역을 순시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또,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한 거란을 무도한 나라로 여기고 적대시하였다. 이러한 북진 정책은 뒤에 압록강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태조는 지방 세력을 포섭하기 위하여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그들에게 관직과 토지를 주거나 성씨를 내리는 등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민족 통합을 위하여 다양한 지방 세력을 지배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는 통일 신라뿐만 아니라, 옛 고구려나 백제 출신의 지방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태조는 발해의 유민들까지 적극적으로 포섭하였고, 이들을 고려의 지배 세력으로 참여시켰다.

태조는 불교, 유교, 도교, 풍수지리설 등 다양한 사상이 공존하게 하는 정책을 펼치고자 하였다. 또,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그대로 따르지 말고 우리의 풍속에 맞게 수용하라고 하여, 개방적이면서 도주체적인 관점에서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였다.

태조의 영토 확장

태조는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선까지 영토를 넓혔다.

발해 유민의 포섭

고려 태조는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발해 유민을 이끌고 망명해 오자 ‘왕’씨 성을 내리고 후대하였다.

훈요 10조

⋅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할 것.

⋅ 도선의 풍수 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 것.

⋅ 왕위는 맏아들이 잇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맏아들이 어질지 못하면 그 다음 아들에게 전해 주고, 그 아들도 어질지 못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자에게 전해 줄 것.

⋅ 우리 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의관 제도는 따르지 말 것.

⋅ 서경을 중요시할 것.

⋅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 것.

⋅ 왕이 된 자는 바른 말을 받아들이고 남을 헐뜯는 말을 멀리할 것.

⋅ 차령 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사람들은 쓰지 말 것.

⋅ 관리들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고, 농민들의 부담을 가볍게 할 것.

⋅ 왕은 근심이 없을 때에는 경계하고 옛 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할 것.

‘고려사’

고려 건국의 의의[편집]

후삼국 통일의 의의는 단순히 고려가 다른 두 나라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계기로 한민족이 완전하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큰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 왕조를 수립한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통일 신라 말기부터 성장한 지방 세력이 고려 왕조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고려 건국의 주역은 왕건을 포함한 지방 세력이었다. 고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여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 통일의 출발점이라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옛 삼국 출신의 다양한 세력과 발해인까지 포용한 실질적인 민족 통일의 완성이었다.

[2] 고려의 정치 제도 정비 과정은?[편집]

⋅ 중앙의 정치 기구에는 어떠한 것이 있었나?

⋅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과정은 어떠하였나?

⋅ 과거제의 목적과 특징은 무엇인가?

왕권의 안정[편집]

혜종이 즉위하자, 여러 왕자와 외척들 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이에 정종은 왕권에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서경 천도를 추진하였다.

정종의 뒤를 이은 광종은 여러 가지 시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펴 왕권을 안정시켰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노비들을 양인으로 해방하였다. 이 정책은 호족세력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켜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운 관리 등용법인 과거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여 유교의 학식과 능력에 따라 새로운 인재를 채용하였다. 또, 이들을 국왕에게 충성하는 관료로 삼아 정치와 행정의 실무를 맡겼다. 광종은 이러한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신과 호족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는데, 그에 따라 중앙에서 이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성종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정치사상을 통치의 근본 이념으로 삼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노비안검법

원래 노비가 아니었는데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강제로 노비가 된 자를 파악하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한 법이다.

정치 제도의 정비[편집]

고려의 중앙 정치 기구는 당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지만, 고려의 실정에 맞게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2성으로 운영하였다. 중서문하성은 국정 전반을 관장하고 정책을 심의, 결정하였고, 상서성은 6부를 거느리고 행정을 담당하였다.

이 밖에 중추원, 어사대, 삼사 등의 관청을 두었다. 한편,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에 소속된 고관이 함께 모여 중요한 정책을 의논하는 기구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이라는 회의 기구도 있었다.

고려 초기의 지방 행정은 중앙 정부가 인정한 지방 세력이 주로 맡았으나, 점차 중앙 정부가 지방을 장악하면서 성종 때에는 12목을 설치하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수령으로 내려가 지방 행정을 맡았다. 이에 따라 지방 제도도 점차 정비되어 현종 때에 그 골격이 완성되었다.

고려는 전국을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이민족과 국경을 이룬 지역을 각각 동계와 북계라 부르고 양계 지역이라 하였다. 이 지역의 주요한 군사 요충지에는 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방어군, 진 등의 군사적인 행정 기구를 두었다.

수도인 개경과 주변의 군, 현을 묶어 경기 지역이라 하였다. 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동경이라 하여, 개경과 함께 3경이라 하였다.

양계 이남 지역은 5도로 나누었는데. 그 중에서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에는 목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군, 현 등을 두었다. 이러한 여러 행정 단위에는 수령을 파견했는데, 수령은 행정 단위의 격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였다.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수령이 파견된 주현의 행정 지배를 받았다.

뒤떨어진 지역을 개발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향, 부곡, 소 등의 특수 행정 구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수륙의 요충지에는 진과 역이라는 교통 행정 기관을 두었다.

하나의 주현에는 여러 개의 속현과 향, 부곡, 소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넓은 행정단위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과거에 합격한 자를 속관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보좌하게 하였다. 지방 행정의 실무는 속관과 향리층이 담당하였다.

군대는 중앙의 2군 6위와 지방의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2군은 왕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고, 6위는 개경과 국경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지방의 주현군은 치안 업무와 잡역을 맡았고, 양계의 상비군은 변경 지역의 방비를 맡았다.

읽기자료

⋅ 최승로의 개혁안(시무 28조의 일부 요약) ⋅

⋅ 우리 나라에서는 봄에 연등회를 개최하고 겨울에는 팔관회를 열어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힘든 일을 많이 시키니, 원컨대 이를 줄여서 백성들이 힘을 펴게 하십시오.(13조)

⋅ 임금께서는 날마다 근신하시어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는 공손함을 생각하며, 혹시 죄지은 자가 있거든 벌의 가볍고 무거움을 법에 따라 결정한다면 태평의 대업을 저절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14조)

⋅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내세에 복을 구하는 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오늘은 아주 가까운 것이요 내세는 지극히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한 그릇된 것이 아니겠습니까?(20조) ‘고려사’

도병마사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면서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 사항을 담당하는 최고 정무기구로 발전하였다.

12목 설치

최승로의 건의로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3경

개경, 서경, 동경이었으나, 뒤에 동경 대신 남경(서울)으로 바뀌었다.

향, 부곡, 소

향, 부곡의 주민은 농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은 수공업에 종사하였다.

교육과 과거 제도[편집]

고려 시대에는 문관을 뽑는 과거 시험으로 제술과와 명경과가 있었다. 또. 과거 외에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이나 고위 관료의 자제를 시험 없이 관리로 뽑는 음서 제도도 발달하였다. 그 밖에 기술관을 뽑는 잡과와 승직자를 뽑기 위한 승과도 있었다. 한편, 무관을 뽑는 무과는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무예나 신체 조건이 뛰어난 사람을 따로 뽑아 무반으로 충원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능력이 있는 관료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개경에는 국자감, 지방에는 향교를 세웠다.

[3] 고려의 북진 정책이 거둔 성과는?[편집]

⋅ 북진 정책은 어떻게 추진되었나?

⋅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는 어떠하였나?

동북 아시아의 정세[편집]

10세기 초, 중국 대륙과 만주, 한반도에는 크고 작은 여러 왕조가 들어섰으나, 이후 송, 거란, 고려가 각 지역의 강력한 통일 왕조로 등장하여 동북 아시아 세계를 주도하는 다원적인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거란이 만리장성 이북 지역을 점령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자,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고려의 북진 정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은 사신을 보내어 고려와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야만의 나라로 여겨 이를 거절하였다.

한편, 송과 거란은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둘러싸고 대치하고 있었다. 거란은 고려가 송과 연합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송은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관계 개선을 꾀하였다. 고려는 이러한 대륙의 정세를 이용하여 외교적으로 송과 관계를 맺고 거란을 견제하였다. 정종 때에는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국경 지대에 성을 쌓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광군

고려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직한 특수 부대이다. 정종 2년(947)에 설치하였는데, 설치 당시의 병력은 30만이었다.

정안국

926년에 거란의 기습 공격으로 발해가 망한 후 그 땅에 세운 나라이다.

거란의 침입과 격퇴[편집]

거란의 원래 공격 목표는 송이었다. 그러나 먼저 배후 세력을 없애기 위하여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정벌하고, 이어서 성종 때 고려를 침략해 왔다. 거란이 1차로 침입했을 때, 고려 조정에서는 서경이북의 땅을 거란에 주고 화평을 맺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거란의 침략 의도가 고려와 송과의 관계를 끊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서희는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는 대신, 거란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동쪽 280리 지역을 돌려받기로 하고 화약을 맺었다.

고려는 이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 내고 6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강동 6주를 회복하였고,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대하였다. 거란은 나중에 이 지역이 전략의 요충지임을 알고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거부하였다.

그 후,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다. 거란의 2차 침입 때에는 개경이 함락되기도 하였으나,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3차 침입 때에는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켰다(1019). 이 승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두 나라는 전쟁을 중단하고 강화를 맺어 사신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다. 현종 때에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았고, 그 후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아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강조의 정변

1009년(목종 12)에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으로, 거란의 제2차 침입의 원인이 되었다.

읽기자료

⋅ 서희, 소손녕을 설득하다 ⋅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식하였고,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였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을 섬기므로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자, 서희가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 나라가 곧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니, 만일 국경으로 논한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은 다 우리 경내에 있거늘 어찌 침식이라 하리요? 그리고 압록강의 안팎 역시 우리 영토 내에 있는데, 여진이 도적질하여 차지하고 있다. ……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영토로 만들어 성을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하면, 어찌 관계를 맺지 않겠는가?” ……

‘고려사’

나성

내외성 중에서 도시 전체를 둘러싼 외성

동북 9성의 축조[편집]

12세기에 거란이 쇠퇴하자, 여진족이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점차 강성하기 시작하였다. 여진족은 원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말과 화살 등을 바쳤고. 고려는 식량과 농기구 등을 주어 그들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완옌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그 세력이 천리장성부근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는 숙종 때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자, 별무반이라는 특별 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예종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9성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이 잃은 땅을 돌려주기를 간청하는데다 방비하기도 어려워 9성을 돌려주었다.

그 뒤 강성해진 여진족은 금을 세우고, 거란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금과 싸우기 위해 고려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고려는 이를 거절하고, 금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여 거란이 점령했던 압록강 유역의 보주(의주)를 획득하였다.

금은 거란을 멸망시키고 만주와 몽골, 중국의 북부를 지배하게 되자, 고려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해 왔다. 이에 고려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과 사대의 예를 맺어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북진 정책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별무반

여진족과의 충돌에서 보병 부대 중심의 고려군은 기병인 여진족 군대에게 번번이 패하였다. 이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항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을 편성하였다.

활발한 대외 교류[편집]

고려는 건국 이후 문호를 열고 송을 비롯하여 거란, 여진 등 외국인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대외 정책을 폈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 대외 관계가 안정되면서, 고려는 송과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고려는 사신, 학자, 승려들을 송에 보내어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각종 제도를 완비하였다. 반면에, 송은 고려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주변의 이민족을 견제하려 하였다.

한편, 고려는 대외 무역을 장려했으므로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무역을 하러 고려에 왔다.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당시에 국제 무역 항구로서 크게 번성하였다.

우리 나라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도 고려 왕조의 이러한 개방적인 대외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의 외교 정책은, 거란과 송 등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서 온건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실리적인 대외 정책을 통해 국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벽란도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무역항으로 중국, 일본, 남양 및 서역의 상인이 드나들며 교역을 한 곳이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후삼국의 통일

⋅ 진골 귀족의 왕위 쟁탈전으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 세력이 성장하였다.

⋅ 왕건은 세력을 키워 고려를 건국하고, 민심을 수습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나. 정치 제도의 정비

⋅ 정치 제도는 태조 때부터 성종에 이르는 시기에 점진적으로 정비되었다.

⋅ 중앙 정치 기구로는 2성 6부와 중추원, 어사대, 삼사 등이 있었다.

⋅ 지방 행정 제도는 지방 세력을 억제하고 집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정비되었다.

다. 북진 정책의 추진

⋅ 태조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 거란과의 충돌 과정에서 강동 6주를 획득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하였다.

⋅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으나, 결국에는 방비가 어려워 돌려주었다.

2. 주요 용어

노비안검법 | 과거제 | 음서 제도 | 귀주 대첩

왕건 | 최승로 | 서희 | 강감찬 | 윤관 | 양규

3. 탐구 활동

다음의 글과 앞에서 학습한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를 참고로 하여 ( ) 안에 관련된 나라를 써 보자.

서희가 돌아와 왕(성종)에게 말하기를, “제가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고 옛 땅을 회복한 연후에 국교를 통하기로 하였는데, 지금은 겨우 압록강 아래쪽 땅을 회복했을 뿐이므로 이후 강 너머의 땅까지 되찾을 때를 기다려서 거란과 국교를 맺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1. 거란이 고려에 침입한 것은 ( )을 침공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2.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 ) 세력이 있었다.

3. 고려는 ( )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문화의 교류에 힘썼다.

4.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후 고려, ( ), ( )의 3국간에는 평화관계가 성립되었다.

2. 무신 정권의 성립[편집]

학습 개요[편집]

고려 중기에 이르러 여러 가지 사회 모순이 쌓이면서 사회 생활에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났으며, 마침내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고려 중기 이후 여러 가지 사회 모순 아래서 고통을 겪던 농민과 천민들은 무신 정권기에 적극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1]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왜 일어났는가?[편집]

⋅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가?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추진된 배경은 무엇인가?

사회 불안[편집]

고려 사회는 12세기 이후 점차 변동하였다.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한 관료 가운데 일부는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뛰어난 학문으로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이나 가문의 사람들을 중요한 관직에 앉혀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따라서,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유능한 신진 세력은 정치에서 소외되어 불만이 많았으며, 이로 인해 불안한 정치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일부 관리와 권세가들은 국가에서 전시과로 받은 토지를 자기 것으로 만들거나 고리대 등을 통해 일반 백성들의 땅을 빼앗는 등 경제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백성들은 권세가들에게 토지를 빼앗겨 생계가 어려운데다가 여진 정벌로 인한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려야 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현상이 전국에 걸쳐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개경은 지덕이 쇠하여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풍수지리설이 성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위기 의식이 널리 퍼졌다.

전시과

고려 시대에 관리를 지위에 따라 18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일정한 토지와 땔감 채취지를 나누어 준 토지 제도였다.

풍수지리설

산세나 지형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상으로, 신라 말에 중국에서 전래되어 고려 때 크게 유행하였다.

이자겸의 난[편집]

경원 이씨 일족은 왕실과 거듭된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유력한 외척 가문이 되었다. 특히. 이자겸은 딸들을 예종과 인종의 왕비로 두어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였다. 이자겸은 왕실에서 많은 토지를 받은데다가 백성들의 토지까지 빼앗아 백성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다. 이자겸의 권력은 국왕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다.

이에, 왕위 유지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불타는 등 위기에 처했다.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 한다(1126). 그러나 얼마 후 인종은 이자겸의 부하인 척준경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하였다.

대표적 문벌

⋅ 경원 이씨 - 이자겸

⋅ 해주 최씨 - 최충

⋅ 경주 김씨 - 김부식

⋅ 안산 김씨 - 김은부

⋅ 파평 윤씨 - 윤관

도움글

⋅ 이자겸의 생활 ⋅

이자겸은 경원 이씨로서 예종의 장인이요, 인종의 외조부였다. 당시 고려의 대표적인 외척 세력으로서 정치적으로 막강한 역할을 했던 그는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비슷한 때에 또 하나의 유력했던 가문 중의 하나가 경주 김씨인 김부식 가문이었다.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 형제들도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화를 모으고 향연 등을 열었다. 심지어 이자겸의 경우는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사방에서 바치는 물건이 넘쳐 썩은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고…….”라고 ‘고려사’에 전하고 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편집]

이자겸의 난으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특정 가문이 정치를 독점하는 현상에 대한 반성의 기운도 일어났다. 또, 이자겸의 주도 아래 고려가 금과 사대의 예를 맺은 데 대한 불만도 상당하였다.

이 때, 서경 출신의 승려 묘청과 문신 정지상 등은 이러한 민심을 이용하여 인종에게 ‘고려를 황제국이라 칭하고, 독자의 연호를 사용하며. 금을 정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서경으로 수도를 옳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인종은 이들의 말에 따라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자주 행차하였다.

그러나 개경의 정치 세력이 서경 천도에 반대하자, 묘청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135). 이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을 사령관으로 한 중앙군이 서경을 공격하여 반란은 1년여 만에 진압되었다. 묘청 등의 서경 천도 운동은 개경 정치 세력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을 통해 당시의 민심이 문벌 세력의 정치적 독점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으며, 고려인의 자주 의식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묘청

묘청은 서경 길지설을 내세우며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난을 일으켰다.

정지상

서경 출신으로, 척준경을 몰아낸 공로로 출세하였다. 묘청과 함께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다.

[2] 무신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은?[편집]

⋅ 무신정변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가?

⋅ 최씨 정권의 권력 기반은 무엇이었나?

⋅ 무신 정권의 변천 과정은 어떠하였나?

무신정변[편집]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진압되었으나, 문신 중심의 정치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무신들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차별 대우와 문신 위주의 정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낮은 대우와 각종 잡역에 시달린 하층 군인들의 불만도 컸다.

인종의 뒤를 이은 의종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책을 폈다. 이로 인해 국왕과 문신들 사이에 정치적인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의종은 문신 세력의 견제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말년에는 측근들에 의지해서 왕권을 겨우 유지하였다. 정치에 뜻을 잃은 의종은 놀이와 연회를 위해 별궁과 정자를 지었고, 백성들은 이를 위한 공사에 동원되어 노역에 시달렸다.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길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마침내 정변을 일으켰다(1170). 정중부 등은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귀양 보낸 다음 정권을 독점하였다.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자 김보당 등 일부 문신 세력이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봉기했으나 실패하여, 도리어 의종과 많은 문신들이 살해되었다. 그 후, 무신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정중부가 피살되고,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문무의 차별 대우

군대의 최고 지휘권마저 문신들이 차지하였고, 무신들은 토지 분배에서도 차별 대우를 받았다. 강감찬, 윤관 등도 문신이었다.

최씨 정권의 성립[편집]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4대 60여년간 최씨 정권이 지속되었다. 최씨 정권은 다른 정권에 비해 비교적 안정된 전형적인 무신 정권이었다. 당시에도 국왕은 있었으나, 무신 집권자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좌우하였다. 종래의 정치 기구도 있었으나, 무신들이 만든 새로운 권력 기구가 정책을 집행하였다. 최씨 정권 이전에는 중방이 최고 권력 기구였으나, 이 때부터는 교정도감이 대신하게 되었다.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고, 이 기구가 각종 정책을 집행하였다.

최씨 정권은 사병으로 조직된 도방과 함께 삼별초를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방을 두어 정부의 모든 인사 행정을 처리하였다.

교정도감

인재 천거, 조세 징수, 감찰, 재판 등의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읽기자료

⋅ 최씨 정권의 인사권 행사 ⋅

최충헌은 임금을 폐하고 세우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였으며, 항상 조정 안에 있으면서 자기 부하들과 함께 가만히 정안(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매긴 것)을 가지고 벼슬을 내릴 후보자로 자기 당파에 속하는 자를 추천하는 문안(문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승선이라는 벼슬아치에게 주어 임금께 아뢰게 하면 임금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쫓았다. 그리하여 최충헌의 아들 우(후에 이), 손자 항, 항의 아들 의의 4대가 정권을 잡아 그런 관행이 일반화되었다. …… 그들이 모이는 곳을 정방이라 한다. 이것은 조정 안에서 사사로이 부르는 칭호이다. ‘역옹패설’

[3] 무신 정권기에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까닭은?[편집]

⋅ 농민과 천민들이 저항 운동을 일으킨 시대적 배경은?

⋅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은 무엇을 추구하였나?

저항 운동의 배경[편집]

고려 중기 이후 권세가, 지방관, 향리 등은 백성들에게 조세를 거둔다는 명목으로 각종 생산물을 지나치게 빼앗았다. 또, 고리대 행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일도 많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유민이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무신 정권이 수립된 후 무신 집권자들은 백성들을 심하게 수탈하였다. 또, 무신 집권자 가운데에는 노비 출신도 있어서 신분 질서가 흔들리고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부곡이나 소 등 특수행정 구역에 사는 주민들은 일반 백성에 비해 더 많은 세금과 부역에 시달렸는데, 이에 반발한 하층민들이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노비 출신의 집권자

이의민은 천민 출신으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농민과 천민의 봉기[편집]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 농민, 천민 등 하층민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서북 지방 일대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들 농민의 저항 운동은 수년 동안 지속되다가 진압되었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였다.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켜 연합 세력을 형성하였고, 경주와 강릉 지역 또한 연합하여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경주 지역에서 신라의 부흥을 내세운 이후 서경, 담양에서도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을 외치면서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부곡, 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의 주민과 노비의 봉기가 활발하게 일어난 점도 하층민 봉기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특히, 신분 해방을 꿈꾸며 개인이나 관청에 예속되어 각종 잡역에 시달리던 노비들의 저항 운동이 유례 없이 치열하게 일어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그들의 저항 운동이 신분 해방을 부르짖은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주에서는 지방관의 가혹한 사역에 반발하여 관노비들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30여 년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신분 해방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읽기자료

⋅ 봉기의 여러 모습 ⋅

망이⋅망소이의 난

망이 등이 흥경원을 불태우고 그 곳에 있던 승려 10여 명을 죽인 다음, 주지승을 협박하여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고을을 승격하여 현으로 만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시키더니,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와서 치고 우리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른 연후에 그만둘 것이다.” ‘고려사’

만적의 난

만적 등 6인이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를 불러모아 모의하기를 “국가에서 경계년(무신정변) 이래로 천한 무리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일어났으니,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우리는 고달프게 일하면서 채찍 아래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하니 모든 노비가 그렇게 여겼다. …… 약속한 날이 되어 모두 모였으나 무리가 수백에 지나지 않으므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보제사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명령하기를 “일을 비밀히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삼가여 누설치 말라.” 하였다. 율학 박사 한충유의 집안 노비인 순정이 이를 주인에게 밀고하니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고하였고, 최충헌은 만적 등 100여 명을 잡아 강에 던졌다. ‘고려사’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문벌 가문의 권력 독점과 백성들의 궁핍으로 사회 불안이 커졌다.

⋅ 이자겸의 난은 경원 이씨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개경 중심의 정치에 대한 반발, 대외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났다.

나. 무신정변

⋅ 무신정변은 문신 위주의 정치, 국왕과 문신 세력의 정치적 갈등, 무신 및 하층 군인들의 불만으로 일어 났다.

⋅ 무신들은 중방, 교정도감, 정방 등의 기구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다. 농민과 천민의 저항 운동

⋅ 농민들은 무겁고 차별적인 조세 부과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 천민층의 저항 운동은 신분 해방을 목표로 일어났다.

2. 주요 용어

이자겸의 난 | 서경 천도 운동 | 무신정변 | 신분 해방 운동

묘청 | 김부식 | 최충헌 | 망이 | 만적 | 이의민

3. 탐구 활동

다음 내용을 바탕으로, 무신 집권자들이 백성에게 끼친 폐해를 이야기해 보자.

(의종을 폐위한 후)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의종이 개인적으로 축적한 재산을 모두 나누어 가졌다. …… 정중부는 원래 성질이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재산모으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시중이 되어 널리 전원(농장)을 확장하매, 그의 가동과 문객이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하여 모든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여겼다. ‘고려사’

최충헌이 자기 집을 지을 때 민가 백여 채를 허물고, 되도록 크고 화려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집 둘레가 몇 리나 되었으며, 규모는 대궐과 비슷하였다. 또, 별당을 짓고 ‘십자각’이라 하였는데, 부역 동원이 심해 국내에 불평이 많았다. ‘고려사’

3. 몽골과의 전쟁과 자주성의 회복[편집]

학습 개요[편집]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받자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40여 년간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특히, 농민과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고려 정부가 몽골과 강화를 맺자 삼별초는 몽골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고려는 원과 강화한 뒤 원의 압력과 간섭을 받았으나, 공민왕은 원과 명의 교체기를 틈타 원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주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1]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어떻게 맞섰는가?[편집]

⋅ 몽골이 고려에 침입해 온 배경은 무엇인가?

⋅ 몽골군의 침입에 우리 민족은 어떻게 대처하였나?

⋅ 삼별초의 항몽 전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몽골과의 접촉[편집]

13세기에 접어들면서 중국 대륙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 금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이 몽골이 금에 침입해 온 것을 계기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몽골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해 왔다.

고려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서경 부근의 강동성에서 이들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몽골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고, 이후 몽골은 고려에 많은 물자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몽골에 맞서 싸우다[편집]

고려와 몽골은 한동안 긴장 상태를 유지했으나, 결국 몽골의 침입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1231). 당시 고려는 백성들과 관군이 하나가 되어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켰다.

충주 지방에서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관리들은 도망했으나 관노비들은 끝까지 싸워 성을 지켰다.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초적들도 몽골군이 침입하자 맞서 싸웠다. 최씨 정권은 모든 주민이 섬이나 산성에 들어가서 몽골군에 항전하도록 하고,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같은 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했으나, 광주 주민들은 이에 맞서 몽골군을 격퇴했으며, 특히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이에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몽골은 금을 정복한 후, 남송과 고려 정벌에 본격적으로 나서 여러 차례 고려에 침입하였다. 이 때에도 김윤후는 노비들과 함께 끝까지 충주성을 지켰다.

그러나 고려는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최씨 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16년간의 대역사 끝에 완성되었다. 팔만대장경판은 대몽 항쟁의 산물이며,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 유산의 하나이다.

박서

1231년 서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몽골 장수 살리타가 귀주를 공격하자, 한 달 동안의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팔만대장경의 조판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을 8만여 장의 나무판에 새겨 넣어서 팔만대장경판이라 한다. 팔만대장경판이 보존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은 1995년에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와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읽기자료

⋅ 대장경의 판각 ⋅

옛날 현종 2년에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현종은 남쪽으로 피란하였는데, 거란군은 송악성에 주둔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현종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크게 맹세하고 대장경판본을 새기니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갔다. 대장경은 한가지이고, 그 때나 지금이나 그것을 새기는 일도 한가지이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맹세한 것도 또한 같은 것이다. 어찌 거란 군사만 물러가고 지금의 몽골 군사는 물러나지 않겠는가? 오직 부처와 여러 천인(天人)이 얼마나 보살펴 주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국이상국집’

몽골과의 강화[편집]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피란해 있으면서도,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외면한 채 사치한 생활을 하고 정권 유지를 위해 조세를 더 거두어들이는 등 무리한 정책을 펴 민심을 잃었다. 이러한 때에 최고 권력자 최의가 피살되고 최씨 정권은 무너졌다.

몽골에 대한 항전을 주도해 온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몽골과 강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왕과 문신 세력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무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강화의 조건인 개경으로 환도하는 일을 거부하였으나,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삼별초의 항쟁[편집]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자주 정신을 보여 준 것이었다. 이로써 40여 년간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은 끝났다.

삼별초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일컫는다.

도움글

⋅ 고려의 장기간에 걸친 대몽 항쟁의 결과 ⋅

뒤에 원종으로 즉위한 고려의 태자가 1259년에 강화를 위해 원의 쿠빌라이를 만났다. 그 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만 리나 되는 나라이다. 옛날 당 태종도 몸소 쳐들어갔으나 항복받지 못했는데, 이제 그 세자가 스스로 왔으니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크게 반가워했다. 그는 고려의 끈질긴 항쟁으로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앞으로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존중하겠다는 정책을 밝혔다.

[2] 고려 사회가 원 간섭기에 변화된 모습은?[편집]

⋅ 원과의 전쟁이 끝난 후 고려의 정치는 어떻게 변화되었나?

⋅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 사회에 나타난 변화는?

원의 내정 간섭[편집]

삼별초의 항쟁이 진압되면서 고려는 이후 80여 년간 원의 간섭을 받는 원 간섭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오랜 전쟁의 결과 각각 정치 체제가 크게 변화되었다. 고려에서는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국왕 중심의 정치가 회복되어 국왕과 문신 세력이 다시 정치를 주도하였다. 몽골에서도 권력다툼 끝에 쿠빌라이(세조)가 왕위에 올라 국호를 원으로 바꾸고, 수도를 대도(베이징)로 옮겼다.

이후 원은 고려의 제도와 풍속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에 대해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원은 일본 원정을 계기로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을 통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을 하였고, 태어난 왕자는 원에서 성장하면서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이처럼 원은 국왕을 자기들의 통제 아래에 두고 그를 통해 고려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려는 정책을 폈다.

정동행성

원은 외지의 통치와 대규모의 군사 행동을 위해서 여러 가지 성격의 행성을 설치하였다.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을 위해 충렬왕 6년(1200)에 설치하였다.

개혁 정치의 시작[편집]

고려 국왕은 국내에 정치적인 기반이 없었으므로 즉위 후에는 원에서 자신을 보필했던 측근들을 관리로 임명하는 정치를 폈다. 그러나 원의 간섭으로 왕위가 자주 바뀜에 따라 정치 세력의 교체가 빈번하여 지속적인 정책을 펼 수 없었다. 이에,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군인, 역관, 환관 출신 인물이나 그 친척들이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을 권문세족이라 한다.

권문세족은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경영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어 농장을 경작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세를 내야 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하여 나라의 재정이 매우 궁핍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충선왕은 정치⋅경제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충목왕도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는 고려의 국왕이 원의 조종과 간섭을 받고 있었으므로 개혁을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 세력이 자주 바뀌어 개혁 추진 세력이 미약하였던 것도 개혁이 성공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원인이었다.

성리학의 수용[편집]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는 원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충선왕이 원의 수도에 세운 만권당을 통해 고려와 원의 유학자들이 빈번하게 접촉하여 안향, 이제현 등 고려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유학인 성리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성리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충선왕과 충목왕 등이 시행한 개혁 정치에 동참하면서 고려의 현실에 눈을 뜨고, 비판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세력을 신진 사대부라 한다.

이들은 원의 세력을 빌려 권력을 행사하는 권문세족의 불법성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와 사회 건설을 주장하였다. 원이 쇠퇴하면서 이들은 권문세족을 대신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만권당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은 1314년 원에서 만권당을 설치하여, 이제현 등 고려 유학자와 조맹부 등 한족 출신 유학자를 불러모아 서로 교류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의 학문과 사상이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3] 고려 후기의 개혁 정치는 무엇을 추구하였는가?[편집]

⋅ 공민왕이 개혁 정치를 전개하였던 배경은 무엇인가?

⋅ 신진 사대부의 등장 배경과 역할은 어떠하였나?

공민왕의 개혁 정치[편집]

원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는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고려 사회에는 개혁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원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 원의 간섭으로 바뀐 관제를 복구하고, 몽골식 생활 풍습을 금하였다. 이어서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불법적인 농장을 없애고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농장의 노비들을 양인으로 해방시켰다.

공민왕의 개혁 조치는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공민왕도 시해당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실패한 것은, 당시에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세력이 미약했고,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국내외 정세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편집]

공민왕 때에는 홍건적과 왜구가 고려에 자주 침입하였다. 홍건적은 원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이었다.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멀리 안동까지 피란을 가기도 하였으나, 정세운, 이방실 등이 나아가 격퇴하였다.

한편, 왜구는 일본의 쓰시마 섬에 근거를 둔 해적으로, 일찍부터 해안 지방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왜구의 침입으로 조세의 해상 운송이 어려워져 국가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까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최영, 이성계 등이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그 기세를 꺾었다.

이와 같이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최무선

원의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법을 배워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조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전제 개혁과 고려 왕조의 멸망[편집]

원을 멸망시킨 명과 고려는 처음에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명이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그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해오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나아가 명이 차지한 요동 지역까지 수복하려 하였다. 5만의 고려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향해 출정한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을 점령하고, 우왕을 폐위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주도한 최영을 제거하였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한다(1388).

이성계 일파는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사대부 세력과 손잡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회 모순의 근원인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전제 개혁을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권문세족 등 구세력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경제적인 기반을 상실한 권문세족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였고, 정몽주 등 개혁에 소극적인 세력도 제거되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인 세력과 개혁에 참여한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이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어 마침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명의 철령위 설치

원이 쌍성총관부를 두어 지배하였던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명이 주장한 것이다.

과전법

공양왕 3년(1391)에 실시된 토지 제도로, 조선 시대의 기본적인 토지 제도가 되었다.

읽기자료

⋅ 고려 말 토지 제도의 문란 ⋅

“근래에 힘있는 무리들이 마음대로 토지를 빼앗아 좋은 밭과 토지를 모두 자기들의 소유로 하고, 높은 산과 큰 하천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또, 각각의 집에서 보낸 교활한 노비들이 마음대로 빼앗고 거두어 그 폐해가 매우 심해 백성들이 마음놓고 살 수 없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위태로워졌습니다. …… 창고는 비고 나라의 쓰임새는 부족하며 녹봉은 날로 감소하니 선비를 장려할 길이 없습니다. …… 이번의 계책으로 사전을 혁파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민생을 두텁게 하며 널리 축적하여 나라의 쓰임새에 두루 쓰이게 하면 심히 다행이겠나이다.” ‘고려사’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몽골에 대한 항쟁

⋅ 몽골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하층민들이 적극 항쟁하였다.

⋅ 최씨 정권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 삼별초는 정부의 개경 환도에 반발하여 대몽 항쟁을 벌였다.

나. 원 간섭기의 고려

⋅ 원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권문세족이 대두하였다.

⋅ 고려는 원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며,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 사대부가 등장하였다.

다. 고려 후기의 개혁 정치

⋅ 공민왕은 정동행성을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 등 반원 정책을 폈다.

⋅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적으로 소유한 노비를 해방시켰다.

⋅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추진 세력의 미약과 대외 정세의 악화 때문에 실패하였다.

⋅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는 전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2. 주요 용어

팔만대장경 | 삼별초의 항쟁 | 권문세족 | 성리학 | 신진 사대부

김윤후 | 안향 | 공민왕 | 신돈 | 최무선 | 이성계 | 박위 | 정도전 | 조준

3. 탐구 활동

다음 글로 미루어 볼 때, 전민변정도감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신돈이 전민변정도감 두기를 청하여 스스로 판사가 되어 전국에 방을 붙여 알리기를 “요즈음 기강이 크게 무너져 욕심이 많고 마음이 검은 것이 풍속이 되었다. …… 대대로 지어 내려오는 땅을 힘있는 집이 빼앗고, 또는 이미 땅주인에게 주라고 판결을 내린 것도 그대로 가지며, 또는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다. 주⋅현의 역리, 나라의 노비와 백성의 역을 회피하는 자들이 모두 농장에 몸을 숨기니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궁핍하게 하였다. …… 이제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이를 추정케 하되 서울은 15일, 각 도는 14일 기한으로 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며, 기한을 지나 일이 발각되는 자는 조사하여 다스리되 거짓으로 호소한 자는 도리어 죄를 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명령이 나오자 권세가와 힘있는 자들이 빼앗은 많은 땅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므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였다. …… 무릇 천한 무리들이 양인이 되기를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고려사’

한 걸음 더[편집]

심화 과정

다음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고려 시대 관료와 농민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자.

가. 고려 전기의 관료 모습

고려는 땅은 넓지 않으나, 사람이 많다. 사⋅농⋅공⋅상의 직업 중에서 선비를 귀하게 여긴다. 그런 까닭에 이 나라 사람들은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고려도경’

비록 높은 벼슬의 사람들이라 하여도 반드시 과거의 과목 이외에 또 숨어 지내는 사람들의 추천과 문음을 통한 서용, …… 벼슬길에 나아가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었다. ‘고려사’

중앙과 지방의 관료로서 녹을 받는 현지 관료는 3천여 명이다. 그리고 벼슬은 있고 직무가 없는 자로서 녹이 없이 토지만 지급받는 관료가 또한 1만 4천여 명이다. 그 토지는 모두 지방 고을에 있다. 전군(농민)이 농사지어 시기에 맞추어 가져다 바치면, 그것을 나누어 준다. ‘고려도경’

나. 무신 집권자 최우의 관리 등용

최우는 일찍이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서 학문에 능하고 행정 실무에 능한 사람을 첫째로, 학문에는 능하나 행정 실무에 능하지 못한 사람을 그 다음으로, 행정 실무에 능하나 학문에 능하지 못한 사람을 그 다음으로, 학문도 행정 실무도 능하지 못한 사람을 최하로 하여 인사 관리의 기준으로 적용하였다. ‘고려사절요’

다. 농민의 처지

햇곡식 푸릇푸릇 아직 논밭에 자라는데 아전들 벌써 세금 걷는다 야단이네.

힘써 농사지어 나라를 살찌우는 것은 우리이거늘

어째서 이리도 극성스럽게 침탈하는가.

……

붉은 알몸 짧은 갈옷으로 가리고 하루에도 밭갈기를 얼마였던가?

벼싹 파릇파릇해지면 가라지 피매기에 괴로울 따름.

풍년 들어 천 종의 곡식을 거둔다 해도 한갓 관청에 바치는 것일 뿐

어쩌지 못하고 다 빼앗긴 채 돌아오니 가진 것이라고는 한 알도 없네.

‘동국이상국집’

라. 백성의 생활 모습

처음 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역에 동원된 사람들은 각기 양식을 가져왔는데, 한 사람은 몹시 가난하여 양식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일하는 사람들이 밥을 한 술씩 나누어 주어 먹게 하였는데. 하루는 그 처가 음식을 준비해 와서 먹이고 또 말하기를, “친한 분을 불러서 같이 드십시오.”라고 하니, 역에 동원된 사람들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데 무엇으로써 준비하였소? 다른 사람과 친해서 얻은 것인가, 아니면 남의 것을 훔친 것인가?”라고 하였다. 처가 “내 모양이 추하니 그 누가 나와 친하겠습니까?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도적질을 하겠습니까? 머리털을 깎아 사 왔을 따름이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보여 주니 사람들이 흐느껴 울며 먹지를 못하였다.

‘고려사’

탐구 문제

위의 자료를 읽고, 다음 문제를 생각해 보자.

1. 관료가 되는 주된 방법은 무엇인가?

2. 관료를 평가하는 기준은 무신 정권 이후에 어떻게 달라졌는가?

3. 관료들은 주로 어떻게 생활하였는지 생각해 보자.

4. 농민들의 생활은 어떠하였는지 이야기해 보자.

단원 종합 수행 과제[편집]

“신문이오, 신문!”

1. 주제

고려 시대에 관한 신문 만들기

2. 목표

고려 시대에 관해 학습한 내용을 종합하여 신문을 제작해 본다.

3. 방법

6~8명을 한 조로 편성한 후, 조장이 조별 활동을 끌고 나가면서 서로 협력하여 신문을 만들어 나간다.

4. 신문 제작 요령

[1] 분량 : 도화지(4절지) 4쪽 이상

[2] 필수 구성 요소 : 주요 사건에 대한 기사와 삽화, 사설, 만평, 인물, 광고, 기타

[3] 교과서와 참고 자료를 통해 고려 시대의 역사적인 흐름과 주요 사실을 파악한다.

[4] 각 조원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분야별로 주요한 사건을 조사한다.

⋅ 분야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문물 교류, 기타

⋅ 참고 자료 : 교과서, 인터넷 사이트, 백과 사전, 기타 관련 도서

[5] 조사한 내용을 서로 발표하고 토론하여 고려 시대의 성격과 역사의 흐름을 파악한다.

[6] 기사와 삽화, 사설의 논조, 만평의 주제, 인물의 주인공, 광고의 내용 등을 함께 의논하여 결정한다.

[7] 각각의 기사가 가진 중요성을 따져서 기사의 분량을 정하고, 지면의 배치를 결정한다. 특히, ‘큰 주제와 기사’를 선정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

[8]각각의 역할을 분담한다.

⋅ 기사와 삽화 : 3~4인

⋅ 사설 : 1인

⋅ 만평 : 1인

⋅ 인물 탐구 : 1인

⋅ 광고 : 1인

[9] 각각 맡은 부분의 내용을 준비한다. 기사와 사설, 인물 탐구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자료를 이용하여 원고를 작성하고, 만평의 경우에는 그림을 그린다. 광고의 경우에는 광고 내용과 그림을 함께 정리한다.

[10] 정리된 내용에 대해 서로 토론하여 불필요한 내용은 자르고, 부족한 부분은 보완한다.

[11] 신문을 제작한다. 도화지에 직접 쓰기보다는 지면 배치만 정해 놓고 다른 종이에 정해진 크기로 내용을 작성한 다음, 도화지에 오려 붙이는 방법이 적당하다. 또, 신문 제목도 정해서 넣으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