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Ⅴ. 조선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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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편집]

⋅ 조선은 어떻게 고려 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는지 알아보자.

⋅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배경과 활동 과정을 살펴보자.

⋅ 조선은 어떻게 왜란과 호란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였는지 알아보자.

1. 조선의 성립[편집]

학습 개요[편집]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인 세력과 정도전 등의 신진 사대부 세력은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다. 조선은 건국 후 약 100년간에 걸쳐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하고 편찬 사업을 활발히 하는 등의 민족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1] 조선을 세운 사람들의 국가 운영 방향은?[편집]

⋅ 태조 이성계는 어떻게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나?

⋅ 조선 왕조의 성립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조선의 건국[편집]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사대부들은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손을 잡고, 기울어 가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우왕과 최영을 몰아 내고 실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1392).

새 왕조를 세운 세력은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였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전국을 통치하기 쉽고, 남쪽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 수로 교통이 매우 편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에도 매우 유리하였다.

한양 천도

한양은 고려 3경 중의 하나로 풍수지리설에서도 명당으로 불리던 곳이다. 태조는 즉위 당시에는 개경을 그대로 수도로 삼으려 하였으나, 즉위한 지 한 달 만에 천도를 결심하고 후보지를 물색하여 1394년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조선 건국의 의의[편집]

조선 건국의 의의는 단순히 국왕이 왕씨에서 이씨로 바뀌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와 역사적 발전을 이루었다는 데에 있다.

이는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이 새 왕조 건설 초기부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고, 또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루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왕조는 주로 과거 합격자를 관리로 뽑아 쓴 관료제 사회로서, 정치는 양반 관리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양반들은 국왕을 견제하고 그들의 정치 권력을 확대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일반 백성들의 생활 향상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성리학의 이념과 이론에 따라 덕치주의를 내세워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도 유교 예속을 많이 권장하였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기 약 100년간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평화와 번영을 누리면서 수준 높은 민족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국가 기틀의 마련[편집]

조선 왕조는 왕권을 안정시키고 모든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켜 통치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 원리로 삼았으며, 농업을 적극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 안정에 노력하였다.

태조의 아들 방원(태종)은 군사를 동원하여 나이 어린 세자와 정도전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정종 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 기반을 굳건히 하였다.

태종은 사병을 모두 없애어 군사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전국의 인구 동태를 파악하였으며, 이를 조세 징수와 군역부과에 활용하였다. 이처럼 태종 때에 왕권이 확립되어 나라의 기틀이 다져짐으로써 다음 세종 때에는 정치, 경제, 사회가 안정되고 문화가 융성해졌다.

세종은 여러 분야에 걸쳐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궁중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재주 있는 젊은 학자들을 모아 깊이 있는 학문 연구를 장려함으로써 유교 정치와 민족의 전통 문화를 꽃피웠다.

그 후, 조카 단종을 몰아 내고 왕이 된 세조는 성삼문 등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나라의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직전법을 실시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또, 함경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와 같은 바탕 위에서 성종 때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체제를 ‘경국대전’으로 완성하였다. ‘경국대전’은 조선을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법전으로서, 이 책의 편찬은 곧 새 왕조의 통치 조직 정비가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직전법

과전의 일부가 세습되면서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세조 때에는 현직 관료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편집]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영토를 넓히려는 정책을 썼다. 정도전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군사 훈련과 군량미 비축을 추진하여 명을 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하고, 태조마저 왕위에서 물러나자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고, 사신을 자주 파견하였다. 명과의 친선 관계를 통해 조선은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였다.

한편, 조선 초기의 왕들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백성들을 평안도와 함경도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이 지역은 여진족이 자주 침입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주거지를 마련하여 살기도 하였던 곳이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압록강 방면에 최윤덕을 파견하고, 두만강 방면에 김종서를 파견하여 여진의 무리를 몰아 내고 4군과 6진을 설치하였다. 이후 이 곳은 조선의 영토가 되어 북쪽의 국경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여진족에 대해서는 토벌과 동시에 포섭⋅회유 정책도 함께 추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조선은 수군을 강화하여 왜구의 노략질을 막고, 세종 때에는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그 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은 일본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자 제포(진해), 부산포, 염포(울산) 등 3포를 개항하였다.

이 곳에서 일본인들은 구리, 황, 향료 등을 가져와 식량, 의복, 서적등과 교역하였는데, 일본은 주로 생활 필수품과 서적 등 문화 용품이 필요하였고, 조선은 무기의 원료나 양반들의 기호품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조선은 류큐, 시암(타이), 자와(자바) 등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와도 널리 교역을 하였다.

[2] 조선의 통치 제도와 그 기능은?[편집]

⋅ 중앙의 정치 기구에는 어떠한 것이 있었나?

⋅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과정은 어떠하였나?

⋅ 조선의 통치 제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중앙 정치 제도[편집]

조선은 나라를 다스릴 제도와 규칙을 새 왕조의 실정에 맞게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은 고려 시대에 비해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였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최고의 통치 기관은 의정부이고, 그 밑에 6조와 여러 관청을 두었다. 의정부는 3정승의 합의에 의해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였고, 6조는 국가의 행정을 나누어 맡았다. 6조의 판서(장관)들은 행정만을 맡은 것이 아니라,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에는 의정부의 재상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왕이 바른 정치를 하도록 일깨워 주는 사간원, 관리의 비행을 감찰하는 사헌부, 왕의 정치 자문과 왕명의 대필을 맡은 홍문관을 두었다. 그 밖에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 나라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 역사 편찬을 담당한 춘추관, 최고 학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서울의 행정은 한성부가 담당하였다.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와 함께 삼사라고 했던 기관으로, 국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옥당’이라고도 한다.

지방 행정 제도[편집]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밑에 군⋅현을 두어 수령을 파견하였다. 수령은 그 지방의 행정뿐만 아니라, 사법과 군사에 관한 사무까지도 담당하였다. 수령의 주요 업무는 조세 징수, 농업 장려, 호구 조사, 교육 장려, 재판 및 지역 방어 등이었다.

향리는 수령의 지시를 받아 지방 행정의 실무를 맡았으며, 이들은 6방으로 나뉘어 각기 업무를 맡아 처리하였다. 지방의 각 군⋅현에서는 그 곳의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유향소(뒤에 향청)를 운영하였다.

유향소에서는 수시로 향회를 소집하여 지방의 여론을 모으고,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령에 대한 자문과 함께 수령의 비행을 고발하는 등 오늘날의 지방 의회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의 지방 행정은 수령의 책임하에 수령과 향리 및 지방 양반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이루어졌다.

한편,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백성들이 좋은 의견을 왕에게 올리도록 하였으며, 그 의견을 검토하여 정치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였는데, 후기에는 왕이 행차할 때에 징, 꽹과리 등을 울려 왕의 관심을 끌도록 한 후에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도록 하였다.

6방

중앙의 6조처럼 지방의 관아에도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6방이 있었다.

교육과 과거 제도[편집]

조선 시대의 관리는 주로 과거 시험에 의하여 선발하였으므로 교육 기관은 관리 양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교육은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양반의 자제를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서당에서는 문자를 익히고 초보적인 유학 지식과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서울의 4부 학당과 지방의 군⋅현에 설치된 향교에서는 소학과 사서 등 유학의 경전을 공부하였다.

서울에 설치된 성균관은 최고 국립 교육 기관으로서, 소과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를 입학시켜 높은 수준의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의학, 법학, 천문학, 산학, 외국어 등의 기술 교육은 각기 해당 관청에서 따로 실시하였다.

한편, 관리 등용을 위한 과거 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누어 치렀는데, 3년마다 시행하는 정기 시험과 수시로 시행하는 특별 시험이 있었다. 문과에는 양반의 자제가 주로 응시하고, 무과에는 양반, 향리 및 상민의 자제가, 그리고 잡과에는 중인이 많이 응시하였다.

주로 과거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했지만, 문음이나 천거로 유능한 인물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사서

유교의 경전으로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말한다.

병역 및 군사 제도[편집]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여 16세 이상 60세까지의 양인 남자는 의무적으로 군역을 지도록 하였다.

서울에는 5위를 설치하였고, 지방 각 도에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파견하여 각각 육군과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지방의 중요한 읍에는 읍성을 쌓아 방어를 튼튼히 하였다.

한편, 지방군의 일부를 교대로 서울에 올라와 근무하게 함으로써 중앙군과 지방군의 유기적 연결을 도모하였다. 정규군 이외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병력으로 활용되었다.

조선 시대의 읍성

조선 시대에 쌓은 읍성은 100여 곳에 달하였는데,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헐렸고, 지금은 충청 남도 해미 읍성, 전라 북도 고창 읍성, 전라 남도 낙안 읍성 등이 남아 보존되고 있다.

잡색군

내륙 지방을 수호하고, 외침이 있을 때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태종 때 편성하였다.

교통과 통신 제도[편집]

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은 매년 수로와 해로를 통해 서울로 운송하여 나라 살림에 충당하였다. 세곡을 운반하는 것을 조운이라고 하는데, 영산강, 한강 등의 강가에는 강창을 짓고, 서남 해안에는 해창을 마련하여 인접 고을의 세곡을 일시 보관하였다가 선박편으로 서울의 경창까지 수송하였다. 그러나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세곡은 서울로 운송하지 않고, 현지에서 국방비와 사신 접대비로 썼다.

육로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역원 제도를 마련하였다. 도로의 중요한 지점에는 약 30리 간격으로 역을 설치하고 역졸을 배치하여, 마패를 소지한 공무 여행자가 역마를 이용하도록 하는 등의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교통의 요지나 한적한 곳에는 원을 설치하여 여행자들이 숙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호원, 사리원 등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 한 것이다.

한편, 봉수 제도를 마련하여 국경 지대에서 발생한 위급 상황을 중앙에 신속히 전달하도록 하였다.

[3] 15세기에 우리 조상들이 민족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편집]

⋅ 훈민정음 창제의 의의는 무엇인가?

⋅ 과학 기술의 발달 내용은 어떠하였나?

훈민정음의 창제[편집]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세상에 반포(1446)하자 조선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훈민정음의 반포로 우리 나라는 문화 국민으로서 고유한 문자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민족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훈민정음은 매우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며,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우수한 글자로 평가받고 있다. 훈민정음은 28자의 표음문자로서, 웬만한 소리는 거의 다 적을 수 있어 창제 당시에 바람소리나 학의 울음소리까지도 적을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우리의 국문학이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세종 때에 훈민정음으로 지은 ‘용비어천가’는 우리 국문학 작품의 첫 출발이 되었고, ‘월인천강지곡’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익힘으로써 글을 아는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용비어천가

1445년(세종27) 4월에 편찬하여 1447년(세종29) 5월에 간행된 조선 왕조의 창업을 송영한 노래로, 모두 125장에 이르는 서사시이다.

학문과 과학 기술의 발달[편집]

조선 초기에는 학문이 발달하여 여러 분야의 책을 발간하였다. 당시 나라에서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역사책의 편찬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또,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지리 정보를 얻기 위해 ‘팔도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책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국가의 행정 질서 체계와 유교 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삼강행실도’ 등을 간행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 측우기를 만들고, 이것으로 강수량을 측정하여 농사에 활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농토와 현실에 알맞은 농사짓는 법을 소개한 ‘농사직설’을 펴내어 농사를 효율적으로 지을 수 있게 하였다.

금속 활자를 거듭 개량하는 등 인쇄술도 발달하였으며,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혼천의와 시각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 그리고 토지를 측량하는 인지의 등을 만들어 활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우리 나라의 과학 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한문학이 문학의 중심을 이루었고. 양반들은 한문학을 공부하여 이를 생활화하였다. 특히, 한시를 쓰는 일은 그들 생활의 일부였다. 그리하여 많은 한시와 문집이 만들어졌는데, ‘동문선’은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삼국 시대 이래의 유명한 시문을 뽑아 엮은 책이다.

동국여지승람

성종이 노사신, 강희맹, 서거정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지리서로, 성종 12년(1481)에 완성되었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조선의 건국

⋅ 조선 왕조의 건국은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 사대부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

⋅ 건국 세력은 성리학적 덕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왕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 조선 왕조는 ‘경국대전’을 편찬함으로써 법치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나. 통치 제도의 완비

⋅ 의정부와 6조는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였다.

⋅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은 국왕의 통치를 보좌하고, 때로는 이를 견제하였다.

⋅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 관리의 양성을 위해 교육 기관을 설치하고, 관리의 선발을 위해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다. 민족 문화의 발달

⋅ 훈민정음을 반포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 유교 중심의 학문이 발전하였고, 한문학과 국문학이 발달하였다.

⋅ 측우기 제작, 금속 활자의 주조 등 과학 기술이 발달하였다.

2. 주요 용어

위화도 회군 | 경국대전 | 의정부와 6조 | 훈민정음

정도전 | 태종 | 세종 대왕 | 세조 | 김종서 | 최윤덕

3. 탐구 활동

1. 조선 사회의 특징을 고려 사회와 비교하여 정리해 보자.

2. 다음 □ 안에 들어갈 기구의 명칭을 쓰고, 조선 시대에 이러한 기구를 설치한 목적을 이야기해 보자.

□□□는 정치를 논평하여 바르게 이끌고 모든 관원을 감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밝히며, 외람된 행위와 허위의 언동을 금지하는 등의 일을 관장한다.

□□□은 임금에게 바른말을 하고, 정치의 잘못을 따져 지적하는 일을 관장한다.

□□□은 철내의 경서와 사적을 관장하고, 문장 등을 다스리며, 왕의 자문에 대비한다.

‘경국대전’

2. 사림 세력의 성장[편집]

학습 개요[편집]

사림은 15세기 말부터 중앙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횡포를 비판하였다. 이에 훈구 세력은 사화를 거듭 일으켜 정치적으로 사림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사림은 향촌에서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며 세력을 키워 나갔다. 그리하여 16세기 후반에는 사림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은 왜 다투었을까?[편집]

⋅ 사림 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한 배경은 무엇인가?

⋅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충돌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가?

⋅ 사림 세력은 집권 후 어떠한 정치 활동을 하였나?

사림의 성장[편집]

조선은 건국 후 약 100년간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으며, 그것은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15세기 말부터 사림이 중앙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면서 기존의 훈구 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은 조선 건국에 협력하지 않고 지방에 머무르며 학문과 교육에 힘썼던 길재의 학통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었다. 이 무렵, 성종 은 합리적이고 온건한 유교 정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신망이 높은 영남 출신의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주로 언론 기관에 배치하고 정책을 비판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점차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여 훈구 세력의 잘못을 예리하게 공격하면서 공론 정치를 유도하였다. 이에 따라 이들 두 세력 간의 정치적 다툼이 점점 심해졌다.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은 무오사화 등을 일으켜 사림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사림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중종반정 후 사림이 다시 등용되어 조광조를 중심으로 유교적 이상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또다시 사화가 일어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왕의 외척들 사이에 사화가 일어나 정치적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로 사림은 큰 피해를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으며, 향촌의 서원과 향약을 바탕으로 꾸준히 성장해 갔다.

사화

‘사림의 화’의 준말. 관리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몰려 참혹한 화를 입었던 일을 말한다.

읽기자료

⋅ 무오사화 ⋅

유자광이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내놓았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중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의 내용을 지적하면서 여러 추관들에게 “이는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악은 모두가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글귀마다 풀이를 하여 왕께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전하(세조)를 헐뜯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부도덕한 죄는 마땅히 대역으로 논해야 하고, 그가 지은 다른 글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마땅치 못하오니, 아울러 모두 불태워 버리소서.”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연산군일기’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는 추천에 의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고, 도덕을 중요시하는 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읽기자료

⋅ 현량과 ⋅

지난번 조광조가 아뢴 바 천거로 인재를 뽑는 일은 여럿이 의논한 일입니다. 각별히 천거하는 것은 한의 현량과와 효렴과를 따르는 것이 가합니다. 이것은 자주 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를 시행할 만한 기회입니다. 혹 뒤에 폐단이 있을까 염려되고, 혹 공평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나, 대체로 좋은 일이니 비록 한두 사람이 천거에 빠진다하더라도 주저할 것 없이 시행해야 합니다. …… 어찌 한두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좋은 일을 폐지하겠습니까? ‘중종실록’

붕당의 출현[편집]

선조가 인격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림을 많이 등용하고 문치주의로 정치를 이끌어 가자,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정권이 등장한 이후 사림 내부의 분열로 붕당의 대립이 생겨났다. 붕당은 인사권을 가진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조 전랑은 삼사의 관리에 대한 인사를 좌우할 수 있었고, 스스로 자기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인 삼사의 관리들은 언론을 통해 이조 전랑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언론기관과 이조 전랑은 붕당 정치 운영에서 공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 자리를 둘러싸고 붕당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붕당의 형성

선조 8년(1575)에 동인과 서인이 분립되면서 붕당이 형성되었다. 붕당은 같은 학통과 성향을 가진 사림의 무리를 말한다. 동인은 김효원을 비롯한 신진 관료가 중심이 되었고, 서인은 심의겸을 비롯한 기성 관료가 중심이 되었다.

[2] 사림 세력이 16세기 이후 사회를 주도할 수 있었던 기반은?[편집]

⋅ 사림의 경제적 기반은 무엇인가?

⋅ 사림은 왜 향약을 보급하고자 하였나?

⋅ 사림은 성리학의 발달에 어떻게 기여하였나?

농업의 발달[편집]

조선 시대에 농업은 가장 중요한 경제적 토대였다.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것은 백성들의 생활은 물론 국가의 안정에도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정부는 개간 사업을 장려하여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기술을 향상시켜 수확량을 늘리는 데 힘썼다.

농촌 여러 곳에서 목화를 재배하여 의생활이 개선되었고, 과수나 약초도 재배하였다. 그리고 ‘농사직설’ 같은 농서를 간행하여 농사짓는 기술을 널리 보급하였다. 특히, 새로운 중국의 논농사 기술이 우리 나라의 남부 지방 일부에서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모판에서 모종을 길러 이를 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법이 시행되었다. 이로써 농촌의 중소 지주인 사림도 경제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향상으로 농산물을 사고 파는 장시도 발달하여 16세기 이후에는 장시가 전국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때, 훈구 세력은 권력을 이용하여 광대한 농장과 많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재산을 크게 늘렸다.

향약의 보급[편집]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일부 신진 사대부들은 향촌에 살면서 중소 지주로서 학문과 교육에 힘쓰고 있었다. 이들은 유향소를 구성하여 지방의 백성들을 교화하고 수령의 자문에 응하는 등 향촌의 행정을 도왔다.

사림은 향약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썼다. 이에 따라 중국의 ‘여씨향약’을 번역하여 전국에 보급하고, 점차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향약을 만들어 군⋅현이나 마을 단위로 시행하였다. 아울러 동네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 시행해 오던 계의 운영 방식을 향약 속에 흡수하여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에도 힘썼다.

⋅ 향약의 4대 덕목 ⋅
  • 착한 일을 서로 권한다.
  • 잘못된 것을 서로 규제한다.
  • 서로 예절을 지킨다.
  • 어려운 일을 서로 돕는다.

성리학의 발달[편집]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이를 모든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기본 원리로 삼았다. 성리학을 특히 발전시킨 대표적인 학자는 이황과 이이였다.

사림은 성리학을 주로 공부하면서 불교나 다른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그들은 충과 효를 가장 중요시하여 백성들에게 권장하고, 성리학의 윤리 교과서인 ‘소학’을 널리 보급시켰다.

한편, 사림은 서원을 세워 덕망이 높은 유학자를 기리면서 지방 양반의 자제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처음으로 세운 서원은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면서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영주에 세운 백운동 서원이다. 뒷날 왕이 이황의 건의에 따라 이 서원에 ‘소수 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국가에서는 서원에 토지, 노비, 서적 등을 지급하고, 면세의 특권까지 주었다.

이후 서원은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늘어났다. 서원은 학문과 교육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당파의 결속을 강화하여 붕당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성리학

성리학은 우주의 질서와 인간심성의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주 만물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인간은 본래 선하고 착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등과 같은 철학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그 원리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소수(紹修)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닦게 하였음.”이라는 뜻이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사림의 성장

⋅ 훈구 세력은 성리학을 현실 정치에 반영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 사림은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면서 지방에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 사림은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 사림은 붕당이라는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상호 비판과 견제를 하였다.

나. 사림의 기반

⋅ 사림은 지방의 중소 지주층으로서 경제적인 여유를 지녔다.

⋅ 사림은 유향소, 향약 등을 통해 향촌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 사림은 서원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학문적 소양을 높여 갔다.

2. 주요 용어

훈구와 사림 | 사화 | 붕당 | 유향소 | 향약 | 서원

성종 | 김종직 | 조광조 | 이황 | 이이 | 주세붕

3. 탐구 활동

다음의 밑줄 친 부분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사회적, 학문적 기반을 알아보자.

역사를 담당하는 관리가 논평한다. “김종직은 경상도 사람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으며, 가르치기를 즐겼다. 그에게 배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 경상도 선비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은 그를 우두머리로 모셨다.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제 스승을 칭찬하는 것이 정도에 지나쳤다. 조정에 새로 진출한 무리는 그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함께 어울리는 자가 많았다. 그 때 사람들이 이를 비판하여 ‘경상도 선배 무리’라고 하였다.”

‘성종실록’

한 걸음 더[편집]

심화 과정

성리학은 조선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음 자료를 보고,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자.

가. 오륜행실도의 효자

누백포호(왼쪽) 고려 때 최누백이 호랑이한테 잡아먹힌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자 15세의 어린 나이에 호랑이를 찾아 도끼로 죽이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이다.

석진단지(오른쪽) 조선 때 고산현의 관리였던 유석진이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리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나오는 피를 아버지께 드려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나. 가묘의 설치

가묘의 법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 부모를 섬기는 자들은 살아 계실 때에는 효성을 극진히 하고, 별세하면 생전에 봉양할 때보다 더 후하게 하여, 섬기기를 생존했을 때와 같이 하되 종신토록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부모를 별세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뜻입니다. …… 조정에 있거나 지방관으로 있거나 모두 사당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분향 재배하고, 출입할 때에 반드시 사당에 고하며, 모든 제례는 한결같이 문공가례에 의하여 아랫사람에게 보이면 힘쓰지 않아도 자연히 교화가 백성에게 미치게 될 것입니다. ‘태종실록’

다. 여성의 재혼 금지

‘서전’에 이르기를 “믿음은 부인의 덕이니, 한번 함께하였으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삼종지의(혼인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한 후에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르는 것)가 있고, 한 번도 어기는 예(禮)가 없더니, 세상의 도가 날로 비속해지면서 부인의 덕이 부정하여, 사족(앙반)의 여자가 예의를 돌보지 않고 혹은 부모가 뜻을 빼앗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중매하여 사람을 따르니, 스스로 집안의 풍속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 이제부터는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사족의 명분에 나란히 하지 않음으로써 풍속을 바르게 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라. 죽은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편지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꿈 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

- 이응태 묘 출토

탐구 문제

위의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 ‘오륜행실도’를 편찬한 목적은 무엇인가?

2. 가묘를 설치하도록 한 까닭은 무엇인가?

3. 여성의 재혼을 금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4. ‘라’의 글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서로 이야기해 보자.

3. 왜란과 호란의 극복[편집]

학습 개요[편집]

왜군의 조선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선은 수군의 승리와 의병의 활약으로 7년 만에 왜군을 이 땅에서 몰아 내었다. 광해군 때에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을 펴 국제 정세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였으나, 인조 때에는 친명 배금 정책으로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다. 호란 후에 조선은 북벌 운동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현하지 못하였다.

[1] 우리 민족은 왜란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편집]

⋅ 임진왜란이 일어난 국내외의 배경은 무엇인가?

⋅ 임진왜란 때 관군은 왜군과 어떻게 싸웠나?

⋅ 임진왜란 때 의병의 활약상은 어떠하였나?

왜군의 침입[편집]

조선이 양반 사회의 분열과 군역 제도의 문란으로 국방력이 약화되어 가던 16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 힘을 키워 갔으며,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00여 년에 걸친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여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다. 도요토미는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자신의 대륙 진출 야욕을 펴기 위해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서양에서 들여온 조총으로 군대를 무장시키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그리고는 명을 정복하러 가는 데 길을 빌리자는 구실을 내세워 20여만 명의 군사를 출병시켰다.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1592년 4월, 왜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으로 침략해 오자, 정발과 송상현 등이 힘껏 싸웠으나 막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쪽으로 쳐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충주에 방어선을 치고 그들의 북상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왜군이 한양 근처에 육박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란하였다. 왜군은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북상하여 한반도 전역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조총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일본에 전해져 철포라는 이름으로 보급되었다.

수군과 의병의 활약[편집]

조선은 육전에서와 달리 해전에서는 곳곳에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거북선을 앞세워 사천, 당포, 한산도 앞 바다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은 수군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 지대와 황해안을 지킬 수 있었다.

수군이 해전에서 승리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향토를 방어하고 조국을 구하려고 하였다. 향토 지리에 익숙한 의병은 그에 알맞은 전술과 전략을 개발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의병

의병은 농민이 중심이 되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료 유학자, 승려 등이었다.

왜란의 극복[편집]

수군이 승리를 거두고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무렵, 명의 원군까지 도착하여 조선은 왜군에 반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 때 김시민은 진주에서, 권율은 행주 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경상도 해안 지방으로 밀려났던 왜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3년간을 끌어 오던 화의 교섭이 실패하자, 왜군은 다시 공격해 왔다(정유재란, 1597).

임진년과 달리 이번에는 조선군도 군비를 잘 갖추고 명군과 협조하여 왜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또, 물러났던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였다.

마침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전세도 불리해지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격멸하였으나,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이 났다.

왜란의 결과[편집]

7년간의 전쟁은 조선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의 침략 의도는 좌절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항복을 받지도 못했고, 영토를 얻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조선이었다. 전 국토가 황폐하여 경작지가 전쟁 전에 비해 3분의 1 이하로 줄고, 인구도 크게 줄어들었다.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 가기도 하였다. 또, 전쟁 중에 노비 문서가 불태워지고 양반의 위신이 떨어져 신분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문화재의 손실도 매우 커서 불국사, 사고 등이 불에 타 버렸고, 활자, 서적, 도자기, 그림 등 많은 문화재를 일본에 약탈당하였다.

임진왜란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정권이 바뀌었고, 명도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결국 만주의 여진족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으로부터 여러 가지 문화재와 선진 문물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은 문화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읽기자료

⋅ 충무공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

병법에 이르기를 “꼭 죽으리라 결심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꼭 살리라고 마음먹고 싸우면 죽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 사람이 길목을 지켜 내면 넉넉히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모든 장병들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겼을 때에는 군법으로 다스려,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난중일기’

통신사의 파견[편집]

왜란 후,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할 것을 여러 차례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은 승려 유정을 일본에 파견하여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온 뒤, 다시 국교를 맺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동래의 왜관에서만 일을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비해, 통신사는 일본의 에도(도쿄)까지 가서 막부의 장군을 만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다.

통신사는 일본의 요청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의 문화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들이 다녀간 후에는 일본 내에 조선의 문화와 풍속이 퍼질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에서 통신사에 대한 반대 여론이 확산되어, 200여 년간 유지되어 오던 통신사의 파견은 19세기 초에 막을 내렸다.

유정

조선 시대의 승려로 사명대사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승병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1604년에 왕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2] 광해군은 왜 중립 외교 정책을 폈는가?[편집]

⋅ 광해군 때의 국제 정세는 어떠하였나?

⋅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어떤 효과가 있었나?

⋅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까닭은?

동아시아의 정세[편집]

금이 몽골의 침입을 받아 멸망한 후 여진족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던 여진족은 명과 조선에 대하여 이중적인 종속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이 쇠약해지자 다시 성장하게 되었다. 누르하치는 서서히 여진족을 규합하기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이르러 여진족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조공을 바치는 등 명에 대해 순종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초가 되면서 명의 국력이 날로 쇠퇴해 가는 데 비해 여진족은 나날이 강성해져, 누르하치는 ‘대금’이라는 국호로 후금을 건국(1616)하고 명에 대항하였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편집]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업을 일으켰다.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광해군은 명이 점점 쇠퇴하고 북방 여진족이 강성해지고 있는 정세의 변화를 파악하고, 외교적으로 신중하게 대처하였다. 여진족은 조선과 명에 눌려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다가, 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되자, 후금을 세우고 명의 변경을 위협하였다. 명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다.

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으로서는 명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광해군은 새로운 강국으로 등장한 후금과 적대 관계를 가지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강홍립으로 하여금 출병하게 한 후 정세에 따라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이와 같은 중립 외교 정책을 폄으로써 외침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때,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광해군

선조의 둘째 아들로,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1608년에 선조가 병으로 죽자, 왕위를 물려 받았다. 서자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과 관련하여 붕당 정치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결국 서인에 의해 쫓겨났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3]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북벌 운동을 추진한 까닭은?[편집]

⋅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나?

⋅ 북벌 운동을 추진한 까닭은 무엇인가?

⋅ 북벌은 왜 실현되지 못하였나?

병자호란[편집]

인조 때의 서인 정권은 광해군 때와는 달리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펴서 후금의 경계심을 사게 되었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의 군대가 이를 틈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정묘호란, 1627). 그러나 당시에는 후금의 군사력이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정도는 아니어서 일단 화의를 맺고 되돌아갔다.

그 후, 국력이 더욱 커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을 압박하여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청의 태종은 10여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다시 쳐들어왔다(병자호란, 1636). 한양이 청군에 의해 점령되자, 인조는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결국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

두 차례의 호란은 왜란에 비하여 전쟁 기간은 짧았지만. 서북 지방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이괄의 난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북벌 운동[편집]

두 차례의 호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정부나 백성 모두가 청에 대한 적대 감정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을 쳐서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는, 청이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중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으로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청과의 관계 개선이 불가피하였고, 이에 따라 경제적, 문화적 교류도 빈번해졌다. 그런가 하면, 18세기 후반에는 청의 발달한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이 무렵,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임진왜란의 극복

⋅ 조선은 수군의 승리와 의병의 활약으로 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 조선은 왜란으로 인적,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 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정권이 바뀌었고, 중국에서는 명이 쇠퇴하고 여진족의 후금이 등장하였다.

나. 광해군의 중립 외교

⋅ 광해군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잘 대처하였다.

⋅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 배금 정책을 취하였다.

다. 북벌 운동의 추진

⋅ 여진족(후금)의 침입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 조선은 청의 침입에 항쟁하였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었다(병자호란).

⋅ 효종은 민족적 수치를 씻기 위해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2. 주요 용어

임진왜란 | 의병 | 통신사 | 병자호란 | 나선 정벌

이순신 | 권율 | 곽재우 | 송시열 | 이완 | 정발 | 송상현

3. 탐구 활동

다음 글을 읽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까닭을 말해 보자.

역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그의 악행을 부추겨 형(임해군)과 아우(영창 대군)를 섬에 가두어 죽이고, 연흥 부원군 김제남을 멸족하는 등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살육하였다. 왕의 막내아우인 능창군도 무고를 입고 죽으니, …… 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대비의 존호를 삭제하는 등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 왕조의 옛 신하들로서 다른 뜻이 있는 자는 모두 추방하여, 당시 어진 선비가 죄에 걸리지 않으면 초야에 숨어 버려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였다. 또,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도가 없이 가혹하게 거두어들임으로써 백성들이 수화(水火) 속에 든 것과 같았다. 임금이 윤리와 기강이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난을 제거하고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

‘인조실록’

단원 종합 수행 과제[편집]

갈림길에 선 두 인물

1. 주제

역사적 인물 평가하기

2. 목표

조선 시대의 특정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인물에 관해서 판단해 본다.

3. 내용

(가) 정도전과 이방원

⋅ 정도전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학자. 호는 삼봉.

고려 말기의 신진 사대부 출신으로서, 성리학적 관점에서 불교 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이성계의 오른팔로서, 조준과 함께 전제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1390년에 조민수 등 구세력을 몰아 내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다.

⋅ 이방원 -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1418). 태조의 5남으로, 어머니는 신의 왕후 한씨. 비는 민제의 딸 원경 왕후.

태조가 방원의 이복 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7)에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을 귀양 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였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 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둘째 형인 방과에게 사양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없애고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업무를 6조에서 나누어 맡게 하는 등 관제 개혁을 통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나) 성삼문과 신숙주

⋅ 성삼문 -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호는 매죽헌, 시호는 충문.

1455년에 세조가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자 예방 승지로서 아버지 승,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성사가 안 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밀고하였다. 이에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처형당하였다.

⋅ 신숙주 - 조선 전기의 학자, 문신. 호는 보한재, 희현당, 시호는 문충.

1452년(문종 2)에 수양 대군이 사은사로 명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부승지로 계유정난에 참여, 정난 공신 2등이 되었다. 1454년(단종 2)에 도승지에 오르고,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 공신 1등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고, 1459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으며, 1462년(세조 8)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세조 때에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학자였으나,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했다고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다) 김상헌과 최명길

⋅ 김상헌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청음, 석실산인.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 다섯 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 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예조 판서로 있던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송하여 선전 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학가산에 들어가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과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두문불출하였다.

⋅ 최명길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지천, 시호는 문충. 영흥 부사 기남의 아들.

후금 및 그 뒤의 청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입장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하자고 못 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위아래가 어육(魚肉)이 되면 종사를 어디에 보전하겠느냐?”는 입장에서 강화를 주장하였지만, 자신이 쓴 항복 문서를 찢는 척화파 김상헌의 행동에도 의미가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4. 방법

특정 인물을 선택하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여 그 사람의 선택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본다.

5. 과제 수행 방법

[1] 제시문을 읽는다.

[2] 관심 있는 인물을 선택한다.

[3] 백과 사전이나 전기문 또는 인터넷 자료를 이용하여 조사한다.

[4] 자신이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