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Ⅵ. 조선 사회의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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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편집]

⋅ 조선 후기에 붕당 정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자.

⋅ 실학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어떻게 노력했는지 알아보자.

⋅ 조선 후기에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까닭을 조사해 보자.

1. 붕당 정치와 탕평책[편집]

학습 개요[편집]

영조와 정조 때에는 붕당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고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치로 영조와 정조 때에는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문물 제도가 새롭게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 실학자들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모색하였다.

[1] 붕당 정치의 전개 과정은?[편집]

⋅ 붕당 정치는 어떻게 운영되었나?

⋅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어떤 폐단이 생겼나?

붕당 정치의 운영[편집]

사림은 공론(公論)을 무엇보다도 중시하였으며, 공론의 형성은 언론 기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삼사의 관리들은 홍문관을 중심으로 뭉쳤고, 지위에 관계 없이 정치를 비판하면서 토론을 통해 공론을 형성할 수 있었다.

붕당은 처음에는 상대 당의 존재와 비판을 인정하는 가운데 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우고 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붕당 정치 초기에는 붕당 간에 견제와 비판이 용인되어 건전한 정치가 이루어 졌다.

붕당은 학문의 경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풍이 다양해질수록 붕당도 많아지게 되었다. 자연히 붕당 간에는 학문적인 경쟁과 함께 정책 경쟁도 벌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는 매우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서인⋅남인⋅북인의 학통

북인은 서경덕과 조식의 학통을 이었으며, 서인은 이이, 남인은 이황의 학통을 이었다

붕당 정치의 전개[편집]

임진왜란 이후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북인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무너진 후에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도 바뀌었다. 중종 때 국방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두었던 비변사가 붕당 정치의 전개와 함께 17세기 이후에는 최고 정치 기구로 자리를 굳혔다.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되고, 왕권도 위축되었다.

비변사

본래 국방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둔 임시 기구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최고 정치 기구가 되었다.

붕당 정치의 변질[편집]

붕당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붕당 정치는 점차 변질되어 갔다. 현종 때 두 차례의 예송과 숙종 때 여러 차례의 환국을 겪으면서 상대 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그리하여 붕당 정치는 이제 합리적인 주장과 민심에 의거하기보다는 자기 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을 띠었다.

17세기 말부터 붕당 정치는 자기 당을 절대시하면서 반대 당을 정계에서 내쫓고자 하는 치열한 정쟁으로 변하였고, 마침내 서인 정권의 전제화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남인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주로 노론이 정치를 주도하다가 노론 중에서도 소수의 특정 가문이 중심이 되어 정치를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가문은 권력을 독점하고, 그 지위를 세습하여 장기 집권을 하게 되었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예송(禮訟)

예송은 왕실의 의례 문제, 즉 상복 입는 기간을 문제로 하여 일어난 학문적 논쟁이며, 정치적인 다툼이었다.

환국(換局)

집권 세력이 급격히 교체되는 상황을 말한다.

읽기자료

⋅ 붕당 정치가 전개된 원인은? ⋅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 관계에서 생긴다. 이해 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이 깊어지고, 이해 관계가 오래 될수록 붕당이 견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형세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 조정의 붕당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 대개 과거를 자주 보아 인재를 너무 많이 뽑았고, 총애하고 미워함이 치우쳐서 승진과 퇴직이 일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이 밖에도 벼슬에 드는 길이 어지럽게 많으니, 이것이 이른바 관직은 적은데 써야 할 사람은 많아서 모두 조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곽우록’

[2] 탕평책을 실시한 목적은 무엇인가?[편집]

⋅ 붕당 간의 다툼으로 어떤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었나?

⋅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탕평론의 대두[편집]

붕당 사이의 정치적 대립이 심해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에 숙종은 격렬해지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탕평책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아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붕당 정치의 폐해를 직접 경험한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붕당 대립의 완화와 왕권 강화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생각하고, 이를 위해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영조는 각 붕당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탕평책은 붕당 사이의 심한 대립을 막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시한 정책이었다.

탕평의 원리

임금은 항상 치우침이 없이 공평 무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탕평책의 실시[편집]

영조는 정치적 조정력을 통해 어느 붕당이든 간에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영조는 먼저, 붕당을 만드는 자는 영원히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고,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막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몰아 내고 소론과 남인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쳐 나갔다. 그리고 영조는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한양의 성균관에 붕당간의 다툼을 금하는 탕평비를 세웠다.

탕평책의 실시로 소론과 남인이 진출하게 되면서 노론의 독주가 어느 정도 견제되었으며, 붕당에 관계 없이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도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왕권도 강화되어갔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고 국가 재정을 개혁하였다. 또, 형벌 제도를 완화하여 지나친 형벌이나 악형을 금지하고, 신문고를 부활하여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 하였다.

정조와 규장각[편집]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 기구로 삼았다. 규장각에 수만 권의 책을 갖추어 두고, 젊은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규장각은 정조 시대의 문예 부흥과 개혁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정조는 정국 운영을 군주가 주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조는 친위 부대로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에 화성을 쌓았다.

정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민생 안정과 문예 부흥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을 발달시키고, 상업 활동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광산 개발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 도성 밖 곳곳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 되었으며, 한강에는 많은 배들이 드나들면서 포구가 늘어났다. 문화적으로는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등 수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줄이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영조와 정조의 개혁 정치로 정치⋅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고 민생 또한 다소 넉넉해졌다.

장용영

정조 15년(1791)에 서울과 수원에 설치하였던 군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군사적 기반이었다.

도움글

⋅ 정조의 화성 행차 ⋅

정조는 1789년(정조 13)에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묘를 당시 수원 읍성이 있던 지역으로 옮겼다. 그 대신 수원 읍성은 오늘날의 수원으로 옮기고 이름을 화성부라 하였다. 이로써 계획 도시인 화성이 새로 건설 되었다.

수원으로 묘를 옮긴 후, 정조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한다는 명분으로 1789년 이후 11년 동안 12차례나 수원을 찾았다. 지금의 수원에서 의왕으로 넘어가는 경계에는 ‘지지대고개’가 있는데, 지지대고개라는 명칭은 정조의 수원 행차에서 유래되었다.

당시에 이 고개에 서서 수원 쪽을 바라보면 사도 세자가 묻혀 있는 현륭원이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개를 넘어 의왕 쪽으로 가면 현륭원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곳은 먼발치로나마 사도 세자의 묘를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돌아가기가 싫었던 정조는 이 곳에만 이르면 “천천히 가라. 천천히 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훗날이 고개 이름은 늦을 지(遲)자가 두 개 붙은 지지대고개가 되었다.

[3] 실학자들은 어떤 사회를 추구하였는가?[편집]

⋅ 실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 실학자들은 어떤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나?

⋅ 중농 학파와 중상 학파의 주된 관심은 무엇이었나?

실학의 대두[편집]

성리학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정치와 생활의 보편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학자는 물론이고 정치가들까지도 성리학에 몰두하여 성리학만이 옳고 그 밖의 학문은 모두 그르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를 억압하고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기술도 경시하였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성리학 중심의 학문 활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현실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는 데에는 성리학이 제 구실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이론과 형식에만 치우치는 성리학을 비판하고, 현실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정치⋅사회적으로 붕당 정치가 파탄에 직면하고 노론의 장기 집권이 행해지면서 노론의 몇몇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많은 양반들이 몰락하였다.

농촌에서는 농업 기술의 발달로 부농이 생기는가 하면, 가난한 농민들은 농사지을 땅도 없는 지경이 되어 농촌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편, 도시에서는 대상인이 등장하여 상공업을 지배하고 부를 축적한 반면, 영세 상인은 몰락하고 물가가 크게 오르는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이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 현실을 개혁하고자 실학이 대두하였다.

실학은 정치⋅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담고 있었다. 일부 집권 세력도 현실을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는데, 대체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쪽에서 그러한 노력을 더 많이 기울였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정권에서 밀려났던 남인들 중에서 실학자가 많이 나왔다.

실학자들은 주로 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그들의 연구 대상은 그 밖에도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것이었다.

실학의 선구자는 이수광, 김육 등이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을 지어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화 전통을 폭넓게 정리하였다. 김육은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동전을 널리 사용하게 하는 데 힘썼다.

고증학과 실학

청에서 실증적인 학풍을 중시하였던 고증학이 전해지면서 실학의 연구는 그 깊이가 더해졌다.

대동법

특산물을 바치는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민호에 부과하던 토산물 공납 대신 토지 1결당 12말씩 대동미를 부담하도록 세제를 개혁한 것이다.

중농 학파와 중상 학파[편집]

실학은 18세기에 들어와 그 폭이 더욱 넓어졌다. 실학자들 중에는 농업을 중시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상공업 활동을 활발히 하고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농업 문제의 해결을 중시하는 실학자들을 중농 학파라고 한다. 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이 있다. 그들은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농민을 중심으로 그 해결 방안을 생각하여 여러 가지 토지 제도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유형원은 농민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농지를 나누어 주자고 주장하였으며, 이익은 농가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를 주어 이것을 매매하지 못하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약용도 농지의 공동 소유와 공동 경작 및 수확물의 공동 분배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의 토지 제도 개혁안은 구체적으로는 차이가 있으나,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 중심으로 농촌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다른 실학자들은 상공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을 중상 학파라고 한다. 이들은 농촌에서 일생을 보낸 중농 학파와는 달리 한양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학문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중상 학파는 상공업의 발달을 통해 사회의 번영을 이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실학의 새로운 발전이었다.

중상 학파는 상공업 진흥론과 함께 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으므로 북학파라고도 불렸다. 이들 중에서 유수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중상 학파는 그들 스스로 보고 들은 청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청의 문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현실의 개혁에 대한 강한 의욕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저서에는 당시의 양반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담겨 있었다.

특히, 이들은 상공업의 발전을 중시하여 기술 개발로 생산력을 높이는 한편, 수레나 배와 같은 교통 수단을 발전시켜 상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북학파

청의 수도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청의 수준 높은 문물을 목격하고, 이를 수용하자고 주장한 실학자들을 말한다.

국학 연구[편집]

사회 현실에 대한 실학자들의 관심과 비판 의식은 우리의 역사, 지리, 언어, 풍속 등 국학 전반에 대한 연구로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국학 연구가 활발해졌다.

역사 연구에서는 안정복, 유득공 등이 유명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지어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이 책에서,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를 남북국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한국사의 무대가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에 걸쳐 있었다는 생각은 실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지리학에서는 이중환과 정상기, 김정호가 유명하였다. 이중환은 우리 나라의 지리적인 환경과 함께 각 지역의 경제 생활과 풍속을 자세히 조사하여 ‘택리지’를 썼다. 이 책은 특히 자연과 인간 생활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에서 주목된다.

정상기는 최초로 백 리를 한 자로 축소한 ‘동국지도’를 만들어 우리 나라의 지도 제작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산맥, 하천과 함께 도로망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상업의 발달로 상권이 확대되어 교통로 등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면서 지도도 점차 정밀하게 제작되었다.

국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음운 연구서인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와 유희의 ‘언문지’가 나왔다. 이들 연구에는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문화적인 자아 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의학에서도 광해군 때에 허준이 ‘동의보감’을 펴내 우리 나라뿐 아니라 중국 및 일본의 의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은 예방 의학에 중점을 두고 전통 약재를 사용한 치료 방법을 개발한 것이 특색이다. 또, 고종 때의 이제마는 사람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여야 한다는 사상의설을 주장하였다.

안정복

이익의 제자로, 이익의 실증주의적이며 비판적인 역사관을 한층 발전시켜 ‘동사강목’을 편찬하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종래의 중국 중심 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나라 역사 자체의 정통성과 독자성을 내세우는 그 나름의 체계를 세워 훗날 민족 사관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실학의 의의[편집]

실학은 자유로운 비판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실증적인 방법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실생활에 활용하려는 학문이었다. 따라서, 실학자들은 모든 결론을 확실한 증거에 의해 내리려고 하였다. 이러한 자세가 이른바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였다. 실사구시의 특색은 학문 연구에서 객관적으로 사실을 밝혀 내는 것이었다.

실학은 민족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실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현실이 바로 조선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또, 실학은 근대 지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사회 모순을 개혁하고, 산업을 발달시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를 원하였다. 이러한 실학의 정신은 개화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실학자들의 개혁안은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실학자들은 대체로 일생을 학문에만 힘써 왔기 때문에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그들의 주장과 생각을 국가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시키기가 어려웠다.

실사구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으로 청의 고증학파가 내세운 표어이다. 실사구시는 실학 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붕당 정치

⋅ 학문의 발달과 정계의 분화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 17세기 중엽까지는 상대방의 비판을 인정하고 공론을 중시하는 붕당 정치가 운영되었다.

⋅ 17세기 말부터는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일당 독재로 치닫게 되었다.

나. 탕평책

⋅ 붕당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왕권마저 이에 휘둘려 약화되고 동요되었다.

⋅ 영조와 정조는 왕권 및 정국의 안정을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다. 실학

⋅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성리학은 실생활과 멀어지면서 공리 공론만을 일삼았다.

⋅ 실학은 실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학문으로 나타났다.

⋅ 실학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2. 주요 용어

붕당 정치 | 탕평책 | 실학 | 중농 학파 | 중상 학파

영조 | 정조 | 정약용 | 박지원 | 안정복 | 김정호 | 허준 | 이수광 | 유득공 | 이제마

3. 탐구 활동

다음은 영조가 내린 탕평 교서의 일부이다. 이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붕당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문(유교)에 소란을 일으키더니, 지금은 한쪽 사람을 모조리 역적으로 몰고 있다. …… 근래에 들어 그 사람을 임용할 때 모두 같은 붕당의 사람들만 등용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하고도 하늘의 이치에 합하고 온 세상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지난 해까지 함께 벼슬하였던 조정이 지금은 왜 전과 같지 않은가?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띠를 매고 조정에 있을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 피차가 서로를 공격하여 바른말이 막히고 역적으로 지목하면 옥석이 구분되지 않을 것이니, 저가 나를 공격할 때 가려서 하겠는가, 가리지 않고 하겠는가? 충성스럽고 강직한 사람을 뒤섞어 거론하여 헤아릴 수 없는 죄과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바로 속담에서 말하는 “입에서 나간 것이 귀로 돌아온다.”는 것이니, …… 이제 귀양 간 사람들은 의금부로 하여금 그 가볍고 무거움을 참작하여……,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해당 부서에서는 탕평의 정신을 받들어 사람들을 거두어 쓰라.

‘영조실록’

1. 윗글로 미루어 볼 때, 붕당 정치는 어떤 폐해를 일으켰을까?

2. 영조가 시행한 정책은 무엇이고, 정국 운영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한 걸음 더[편집]

심화 과정

실학자들은 조선 후기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다음 두 계통의 사상가들의 사회 개혁안을 비교해 보자.

중농 학파의 주장

토지는 천하의 큰 근본이다. 큰 근본이 확립되면 온갖 법도가 따라서 잘 되어 하나라도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만일, 큰 근본이 문란해지면, 온갖 법도가 따라서 문란해져 하나라도 마땅한 것이 없을 것이다. …… 무릇 백 보를 1무라하고, 백 무를 1경이라 하고, 4경을 1전이라 한다. 농부 1명당 농지 1경을 받게 하고 법규에 따라 세금을 받으며, 농지 4경당 병사 1명을 내게 한다. 선비로서 처음으로 지방 학교에 입학한 자에게는 농지 2경을 주고, 사학(四學)에 입학한자에게는 농지 4경을 주고 병역을 면제한다.

관리로서 관직에 있을 때는 9품 이상 7품까지는 6경씩 주고, 품계가 높아질수록 1경씩 더해 주어 정2품이면 12경을 주고 병역을 면제한다. …… 토지를 받은 자가 죽으면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되, 자손이 물려받을 수 있는 자는 당연히 그 토지를 받고, 남은 토지는 타인이 받게 한다.

‘반계수록’

중상 학파의 주장

중국이 재산이 풍족하고 한 곳에 지체되지 않으며 고루고루 유통되는 것은 모두 수레를 쓴 이익이다. …… 영남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며, 서북 사람들은 감과 감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푼을 하니, 이렇게 귀함은 무슨 까닭일까?

…… 이것은 오로지 멀리 운반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렇게 가난한 것은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

‘열하일기’

탐구 문제

위의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 중농 학파 실학자들은 당시의 농민들이 안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하였는가?

2. 중상 학파 실학자들은 당시의 현실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하였는가?

3. 실학자들이 개혁론을 제시할 당시의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었고,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실현 가능한 개혁 방안은 어떤 것이었는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해 보자.

2. 세도 정치와 농민의 저항[편집]

학습 개요[편집]

세도 정치가 행해지면서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벼슬을 사고 파는 일이 성행하였으며, 탐관오리가 기승을 부렸다. 이로 말미암아 삼정이 극도로 문란해져 농민들이 몹시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들의 의식이 점차 성장하면서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농민 봉기로 폭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와 동학이 농촌 사회와 민중들 사이에 널리 전파되었다.

[1] 세도 정치는 어떤 폐단을 가져왔는가?[편집]

⋅ 세도 정치란 무엇인가?

⋅ 세도 정치로 인해 발생한 폐단은 무엇인가?

나이 어린 왕과 외척 세력[편집]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것을 세도 정치라고 한다.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가문은 대체로 노론에 속해 있었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대표적인 세도 가문이었는데, 이들이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국가 정책을 좌우하였다. 왕은 제 구실을 못 하고 이들에게 끌려다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세도 정치는 순조, 헌종 ,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이어졌다.

세도 정치하에서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다. 정치 권력은 세도가가 독점하여, 왕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더라도 세도가의 위세에 눌려 지내야 했다. 세도가를 비판하는 세력은 살아남을 수 없었으므로 다른 양반 가문은 숨을 죽이고 지냈다.

세도 가문
  • 안동 김씨 -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김조순이 왕의 장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안동 김씨는 철종 때에도 세도를 누렸다.
  • 풍양 조씨 - 헌종이 8세로 즉위하자, 왕의 외조부인 조만영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정치 기강의 문란[편집]

세도 정치하에서는 세도가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이 없어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 기강의 문란은 관직의 임명과 과거 시험의 운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뇌물로 관직을 사고 파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으며, 과거 시험에서도 실력보다는 부정에 의해서 합격이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또, 과거에 급제했더라도 세도가에 줄을 대지 않고서는 좋은 관직에 나아가기 어려웠다.

세도가는 벼슬자리를 재물을 모으는 수단으로 삼아, 공공연히 관직을 팔아 재산을 불렸다. 많은 관리들은 세도가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첨함으로써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산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재산을 불렸다.

이렇게 세도 정치가 계속되면서 각종 부정 부패로 인해 나라는 어지러워졌고, 모든 고통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매관 매직의 실태

세도 정치하에서는 정치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관리의 기강이 무너지면서 관직을 사고 파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감사 자리는 보통 5만~6만 냥, 수령 자리는 2만~3만 냥 정도에 거래되었다.

삼정의 문란[편집]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산 관리들은 그 대가를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온갖 이름을 붙여 정해진 액수 이상을 거두어들였다.

당시 농민들이 주로 부담한 세금은 농토에 부과된 전세와 군포, 그리고 환곡이었다. 이를 삼정이라고 한다. 세금의 항목과 액수는 법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관리들은 새로운 항목을 만들어 정해진 양의 몇 배 이상을 거두었다.

환곡은 봄에 관청의 곡식을 농민들에게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약간의 이자를 붙여서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 이자는 원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금처럼 되고 말았다. 여기에 탐관오리들의 토색질까지 겹쳐 실제로는 고리대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 지주들은 환곡을 빌리는 것을 기피하고, 가난한 농민들만 원치 않는 환곡을 떠맡아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다.

[2] 농민 봉기가 자주 일어난 까닭은?[편집]

⋅ 농민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나?

⋅ 농민 봉기 때 농민들의 요구 조건은 무엇이었나?

떠도는 농민[편집]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착취로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매우 궁핍해졌다. 가난에 시달리고 빚에 몰린 많은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 되었다. 그들은 산간 벽지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국경을 넘어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또, 도시나 광산촌, 수공업촌으로 흘러들어가 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농민의 고통은 잇단 자연 재해로 더욱 심해졌다. 헌종, 철종 때에는 거듭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아 농촌 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농촌을 떠나는 사람은 계속 늘어났고, 떠난 사람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은 친척이나 이웃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따라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으며, 농촌 사회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농민들의 분노[편집]

농촌 사회가 어려워지면서 농민들은 점차 자신들의 불만을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농민들의 불만은 처음에는 탐관오리를 비방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나타났다. 관리의 부정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퍼뜨리거나, 벽보를 붙여 부패한 관리들에게 경고를 주는 등의 방법을 썼다.

그러나 사정이 개선되지 않자, 농민들은 세금 납부를 거부하거나, 집단적으로 항의 시위를 하고, 수령에게 모욕을 주는 등 좀더 적극적이고 과격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나아가, 관아를 습격하거나 탐관오리를 폭행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또, 일부 농민들은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기도 하여 사회 불안이 심해졌다. 이에 나라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암행어사의 임무 ⋅
  • 곡물 대여의 잘잘못과 허위를 낱낱이 탐지하고, 부실한 자는 엄중히 다스려 징계하라.
  • 각 고을의 곡물 장부를 살펴서 비리를 적발하도록 하라.
  • 조세 가운데 부정한 명목은 즉시 바로잡고, 큰 것은 보고하도록 하라.
  • 송사와 옥사를 자세히 살피고, 억울한 옥사는 풀어 주도록 하라.
  • 주색이 심한 자는 적발하여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삼도록 하라.

홍경래의 난[편집]

19세기에 들어와 농민층의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홍경래의 난과 진주 농민 봉기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 등이 평안도에서 일으킨 농민 봉기였다(1811). 홍경래 등은 가난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광부, 품팔이꾼까지 끌어들여 세력을 키웠다. 반군은 한때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였으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농민 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진주 농민 봉기[편집]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농민 봉기는 철종 때에 가장 심하여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함흥, 남으로는 제주도까지 확대 되었다.

철종 때에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1862)는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이 시기의 농민 봉기는 대개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일어났으며, 그 규모나 양상도 비슷하였다. 처음에는 관청에 호소하다가,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봉기한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항거는 단순한 반발이 아닌,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횡포에 항거하여 사회적 불만을 드러낸 농민의 자각 운동이었다. 읽기자료

⋅ 진주 농민 봉기 ⋅

임술년(1862) 2월 19일, 진주민 수만 명이 머리에 횐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진주 읍내에 모여 서리들의 가옥 수십 호를 불사르고 부수어, 그 움직임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병사가 해산시키고자 장시에 나가니, 흰 수건을 두른 백성들이 그를 빙 둘러싸고는 백성들의 재물을 횡령한 조목, 아전들이 세금을 포탈하고 강제로 징수한 일들을 면전에서 여러 번 문책하는데, 그 능멸하고 핍박함이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임술록’

[3] 천주교와 동학이 널리 퍼진 배경은?[편집]

⋅ 조선 후기에 널리 퍼진 종교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 각 종교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어떤 것이었나?

새 세상을 꿈꾸다[편집]

세도 정치로 인해 나라의 질서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백성들 사이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정신적 구원을 얻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새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예언 사상과 개인의 구원과 복을 비는 민간 신앙이 널리 퍼지게 된 것도 이때이다.

예언 사상으로는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들어선다는 정감록의 예언 사상, 미래불인 미륵불이 지상 세계에 내려와서 중생을 구원한다는 미륵 신앙, 이 세상이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 개벽 사상 등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러한 예언 사상은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민중의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 그들에게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민간 신앙은 민간에 깊숙이 침투해 있던 무속 신앙을 기본으로 한 것이었다. 무속 신앙은, 천지 만물에 귀신이 있어서 이들의 조화로 인간의 길흉화복이 정해진다는 믿음 아래 무당이 굿이나 풀이로 귀신을 달래어 화를 멀리하고 복을 비는 신앙이었다. 이러한 민간 신앙은 19세기 민중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욱 번성하였다.

정감록

조선 후기에 민간에 성행한 예언서로 조선 이후의 흥망 대세를 예언하였다. 이씨의 한양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그 다음에는 조씨의 가야산이 흥할 것 등을 예언하였다.

천주교의 전파[편집]

천주교는 중국을 통해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 중국에 간 사신들이 그 곳에 와 있던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얻어 오면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천주교를 접한 양반들은 처음에는 서양 학문의 한 부분으로 이를 연구하였다. 그러던 중 정조 때에 몇몇 학자들이 신앙으로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고, 이승훈이 청에서 서양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에 조선 교회가 창설되었다.

초창기에는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양반과 중인들이 주로 천주교를 믿었으나, 점차 서민층과 여성들도 믿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신도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정부는 천주교를 금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천주교가 유교의 제사 의식을 무시하였고, 천주교의 인간 평등과 내세 사상이 조선의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조 때에는 천주교를 심하게 금지하지는 않았으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치 부패와 사회 불안으로 서민들과 여성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전파되어 교세가 크게 확대되었다.

신유박해(1801)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잡은 보수 세력은 천주교도와 진보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승훈, 이가환 등이 처형당하고, 정약용 등이 유배되었으며, 박지원, 박제가 등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동학의 성립[편집]

사회가 혼란하고 민심이 불안한 가운데 당시의 종교는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였다. 불교는 산중에 머물러 사회와 떨어져 있었고, 유교도 농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새로 전래된 천주교가 서민과 여성들 사이에 전파되고 있었으나, 서양 세력의 침략 위협으로 대외적 위기감이 높아 가고 있었던 데다가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였기 때문에 경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때에 경주 지방의 몰락한 양반인 최제우가 전통적인 민간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를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의 사상은 후에 ‘동경대전’, ‘용담유사’로 정리되었다.

동학은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과 천주교의 전파가 우리 것을 해치고 우리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는 믿음에서, 우리 것을 지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동학 운동은 단순한 신앙 운동이 아니라, 어지러운 정치와 어두운 사회를 바로잡고 어려운 민중의 생활을 구제하려는 사회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동학은 서학, 즉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라는 등 반외세적인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동학이라는 이름도 서학인 천주교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동학의 교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인심은 곧 천심이요,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동학이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농민들에게 환영을 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동학은 이와 같은 교리를 바탕으로 하여 농촌 사회에 급속히 퍼져,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동학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종교라 하여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고 동학을 탄압하였다.

동학의 중심 사상

인내천 사상, 현세 구복 사상, 후천 개벽 사상, 보국 안민 사상 등이 동학의 중심 사상이다.

읽기자료

⋅ 동학의 창시 ⋅

몸이 매우 떨리고 추우며, 밖으로 신령에 접촉한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을 내려 가르침이 있었으나,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기(氣)를 바르게 하여 “어째서 그러합니까?” 하고 물으니, (한울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 사람들이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하늘과 땅은 알면서 귀신은 알지 못한다. 귀신이라고 하는 것도 나다.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주노니, 닦고 단련하여 글을 지어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라. 그러면 너로 하여금 영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동경대전’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세도 정치의 전개

⋅ 순조, 헌종, 철종 때에는 외척이 정권을 독단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다.

나. 농민 봉기의 발발

⋅ 탐관오리의 착취와 삼정의 문란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지배층에 저항하였다.

⋅ 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등의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 농민의 봉기는 양반 사회 체제를 붕괴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다. 새로운 종교의 대두

⋅ 조선 후기의 사회 불안 속에서 예언적인 민간 신앙이 널리 퍼져 나갔다.

⋅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내세 사상은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 동학의 평등 사상과 구복적인 성격은 농민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2. 주요 용어

세도 정치 | 진주 농민 봉기 | 천주교 | 동학

홍경래 | 최제우

3. 탐구 활동

다음과 같은 종교가 농민들 사이에 퍼질 수 있었던 까닭을 알아보자.

철종 11년(1860) 4월 또 말하기를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보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서도(천주교)로써 사람을 가르쳐야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아니다. 나에게 영험스러운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신선의 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며 궁궁(弓弓)이다. 나의 이 영험스러운 부적을 받아 사람들의 질병을 고치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 나와 함께 되게 한다면 너 또한 장생하여 천하에 덕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 또한 그 말에 감동하여 그 영험스러운 부적을 받아 글씨로 써서 물에 타 마시니 몸이 윤택해지고 병이 나았다.

‘동경대전’

단원 종합 수행 과제[편집]

삼가 어사로서 명을 받아 처리한 일을 전하께 아뢰옵니다.

1. 주제

암행어사를 통해 본 19세기 사회

⋅ 암행어사 제도를 통해 19세기 삼정의 문란상을 파악한다.

⋅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다.

⋅ 민중의 고통의 원인과 해결책 모색을 통해 당시 백성들의 처지를 공감한다.

2. 과제 수행

19세기 중반 어느 때, 암행어사의 임무를 맡아 각 지방에 파견되었다. 파견된 지역의 실정을 살피고 암행어사의 권한에 따라 일을 처리한 후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라.

[1] 각 도의 감찰 지역 선정(군⋅현 단위)

[2] 그 지역의 사정 파악

[3] 처리 및 결과 보고(왕에게)

3. 암행어사의 권한과 임무

[1] 권한 : 국왕이 파견할 때 내린 문서에 따른다. 일반적으로, 수령의 비리를 확인하면 수령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국왕에게 보고한다.

[2] 암행어사의 출두(신분을 밝히고 공식적인 조사 시작)

⋅ 출두는 파견 대상 주현의 관아에 하며, 시간의 제한은 없다.

⋅ 출두하여 문서를 점검하고 창고를 검열한다.

⋅ 불법을 확인하면 향리의 사실 확인, 수령의 확인을 받아 창고를 봉한다.

⋅ 죄수 점검, 형 집행 도구 등이 규격에 맞는지 점검한다.

⋅ 양민의 고발장 등을 심사한다.

⋅ 효자, 열부, 어진 인재를 발탁, 추천한다.

[3] 결과 보고 : 임무 종료 후에 조사 내용과 대책을 작성하여 왕에게 보고한다.

참고 자료 1. 암행어사 수행 임무 목록(경기도의 예)

178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각 도의 특성에 따라 암행어사가 살펴야 할 주요 사항을 기록한 문서

그대는 도내 각 지역의 폐단과 백성들의 어려움을 널리 찾아 내어 짐에게 보고 하도록 하라.

⋅ 토지 조세 대장은 정확하게 되어 있는가?

⋅ 아전들이 백성들의 세금을 받아 이용하는 경우는 없는가?

⋅ 환곡계는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 수령이나 아전들이 부호들에게 뇌물을 받고 갚아야 할 환곡을 면해 주거나, 허위로 장부를 만들어 관청의 곡식을 빼돌리는 경우 등은 없는가?

⋅ 형벌 제도는 백성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적용되고 있는가?

⋅ 토호들이나 지방 향리들이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경우는 없는가?

⋅ 죄수들의 관리는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는가?

⋅ 충효로 이름이 높은 사람,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으면 찾아 낼 것.

⋅ 감찰 대상 지역의 수령들이 다스리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밝혀지면, 그 범행의 경중에 따라 창고를 폐쇄하고 보고문을 작성하여 올릴 것이며, 죄과에 대해서는 반드시 아전이나 수령의 확인 도장을 받을 것.

⋅ 어사로서 활동할 때 절대적으로 신분을 감추고 신중하게 할 것이며, 신분을 이용하여 한 읍에서 오래 머무르며 대접을 받지 않도록 할 것.

참고 자료 2. 어느 암행어사의 보고서

신이 지난 3월 7일 왕의 비밀 명령을 받아 왕께서 지명하신 황해도 내 12고을을 돌았습니다. 지나는 길에 민가에 들어가 이야기를 듣기도 했으며, 관청 주변 지역을 왕래하면서 왕께서 살펴보도록 명령하신 항목을 자세히 확인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자기 고을 수령에 대해 비방하거나 칭찬하는 말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말이 같은 경우에만 받아들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각 고을의 여러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을 정리하여 보고드립니다. …… 신계 현령 심릉은 이 지역의 현령으로 임명된 후 한 가지도 잘 한 일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