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Ⅶ. 개화와 자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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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편집]

⋅ 흥선 대원군의 왕권 강화 정책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알아보자.

⋅ 개화파의 개혁 정책이 어떻게 추진되었는지 조사해 보자.

⋅ 동학 농민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1. 흥선 대원군의 정치[편집]

학습 개요[편집]

흥선 대원군은 안에서는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봉기하고, 밖에서는 서양 세력이 통상 수교를 요구하며 위협적으로 접근하는 상황에서 집권하였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내정을 개혁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서양 세력의 침략에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단호하게 대응하였다.

[1] 흥선 대원군은 무엇을 개혁하려 하였나?[편집]

⋅ 흥선 대원군이 집권할 무렵의 국내외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 흥선 대원군의 내정 개혁은 어떤 방향으로 추진되었는가?

나라 안팎의 정세[편집]

18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 왕조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안으로는 60여 년간 계속되어 온 세도 정치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 기강이 무너졌다. 또, 삼정의 문란으로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이 무렵에 창시된 동학은 현실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사회를 기대하고 있던 농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아 빠르게 퍼져 나갔다. 천주교도 국가의 금지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널리 전파되었다.

한편, 밖으로는 서양 여러 나라의 선박이 우리 나라 연해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며 위협하였다. 이 때, 중국은 서양의 침략을 받아 베이징이 함락되었으며,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 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백성들은 서양의 침략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은 나라의 정치가 바로잡히고,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가 안전하기를 원하였다.

내정 개혁[편집]

나이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하에서 흐트러진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잘못된 정치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은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크게 환영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오랫동안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 내고,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리고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려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고 농민을 괴롭혀 오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이 때, 흥선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치 않는다.”는 단호한 결의로 47개소만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또,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비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치는 세도 정치 때문에 어지러워진 정치를 안정시켰고, 국가 재정을 늘렸으며, 백성들의 기대에도 어느 정도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대하여 일부 양반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특히, 서원을 정리하는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양반이 많았다. 한편,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다시 짓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고,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을 거두었으며, 도성 문을 드나드는 백성들에게 문세를 거두어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 당백전의 사용으로 물가가 올라 백성들의 생활과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기도 하였다.

서원의 특권

서원에 속한 유생들은 면역의 특권을 누렸으며, 서원의 토지는 면세되었다.

도움글

⋅ 왕권 강화를 위한 흥선 대원군의 의지 ⋅

흥선 대원군은 외척 세도 정치의 그늘에서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에 눌려 살아야 했던 그는 왕실의 허약함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정권을 장악한 후에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집권 후 그는 “나는 천 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고,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제공(諸公)은 어떠시오?”라고 하였다. 여기서, “천 리를 끌어다가 지척으로 삼겠다.”는 말은 왕실의 종친을 왕족답게 우대하겠다는 것이고,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로 만든다.”는 말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뜻이며,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인다.”는 말은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의미이다.

사창제

각 지방 군⋅현에 설치된 곡물대여 기관에서 가난한 사람을 구호하도록 한 제도

도움글

⋅ 서원 철폐 ⋅ 흥선 대원군은 고종 2년(1855) 3월에 서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만동묘의 철폐를 명하였다. 그러나 서원 철폐는 경복궁 중건 공사와 병인양요를 치르는 동안 실행이 지연되다가,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명을 내려 문묘에 모신 인물에 한하여 각각 서원 1개소씩만 남기고 모두 폐쇄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유림은 크게 반발하였으나, 명령을 위반하는 군⋅현은 그 수령을 엄벌하고, 반항하는 유생들을 강경하게 추방하여, 결국 오랫동안 백성들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던 서원은 철폐되고 토호와 유생들도 스스로 근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약화된 왕권의 강화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유림 세력의 반발은 계속되었으며, 흥선 대원군은 결국 이들 유림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한 까닭은?[편집]

⋅ 흥선 대원군은 왜 천주교를 박해하였나?

⋅ 서양의 함대가 강화도 해역으로 침입해 온 까닭은 무엇인가?

⋅ 서양에 대한 통상 수교거부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까?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편집]

흥선 대원군이 집권할 즈음 국내에는 상당수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으며, 프랑스 선교사도 각지에서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그런데 1860년에 청의 베이징이 서양 세력에 의해 함락되고,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조선에서는 서양 세력 및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흥선 대원군도 러시아에 위협을 느끼고, 국내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 세력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국내에서 천주교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지자, 흥선 대원군은 그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프랑스는 선교사의 죽음을 구실로 삼아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하여 강화 산성을 점령하였다.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1866). 이 때,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각종 서적과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래 군사 제도를 정비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왔던 조선 정부는 각지의 포수를 뽑아 한강 연안의 수비를 강화하였고, 양헌수 부대는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병인양요 후 오페르트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거세어졌다.

읽기자료

⋅ 프랑스 공사의 위협 ⋅

우리 정부는 이와 같은 유혈의 폭행(1866년의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된 사건)을 용서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을 죽인 그 날이 바로 조선 국왕의 최후가 될 것이다. 나는 오늘 엄숙히 그가 최후를 맞게 되었음을 선포한다. 이제 수일 내로 우리 군대는 조선 정복을 위해 떠날 것이다.

- 주청 프랑스 대리 공사 벨로네의 조선 원정 보고서

신미양요와 척화비[편집]

병인양요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다. 이 배에 탄 서양 사람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관리들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잡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의 관민은 제너럴 셔먼 호를 불살라버렸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1871). 프랑스군을 격퇴한 후,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도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있던 조선 정부는 이에 맞섰으며,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대하는 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한편,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 체제를 갖춘 일본도 통상 수교를 요구해 왔으나, 그 외교 문서에 일본 국왕이 조선 국왕을 낮추어 보는 표현과 종래의 외교 관행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어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서양과 일본에 대한 조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늦어지게 한 문제점도 있으나,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 한 자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의 국내외 정세

⋅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 서양 세력의 접근과 통상 수교 요구로 백성들 사이에는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나.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 세도 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 침략적인 서양 세력의 통상 수교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다. 서양 세력과의 갈등

⋅ 천주교 선교사들의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 흥선 대원군은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입을 물리친 후, 척화비를 세워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밝혔다.

2. 주요 용어

이양선 | 서원 철폐 | 병인양요 | 신미양요 | 척화비

흥선 대원군 | 고종 | 양헌수 | 어재연

3. 탐구 활동

1.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중에서 백성(농민)들의 지지를 얻은 것과 원성을 산 것을 대비하여 정리해 보자.

2.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대다수 백성들이 지지한 까닭을 생각해 보자.

2. 개항과 개화 운동[편집]

학습 개요[편집]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이어서 서양 각국과도 수교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서양 문물과의 접촉이 활발해지고 개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는 개화파와 전통 질서를 지키자는 척사파의 대립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 강화도 조약의 내용과 성격은 무엇인가?[편집]

⋅ 일본은 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는가?

⋅ 강화도 조약의 주된 내용은 무엇인가?

⋅ 강화도 조약이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

운요호 사건[편집]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지 10년 만에 물러나면서 조선의 정권은 왕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다. 집권 세력이 바뀌자 외교 정책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 때, 일본이 조선에 교섭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해 왔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마련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통상을 강요하기 위하여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1875).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조선에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하였다. 이는 서양 열강이 군사력을 앞세워 아시아 국가들에 강요한 방식을 본뜬 것이었다.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이유
  • 고종의 성장
  • 서원 철폐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
  • 외척 민씨 세력의 등장

강화도 조약[편집]

일본은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어 위협적인 행동을 하면서 회담을 열자고 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행위를 야만적이고 침략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들과 대화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일부 관리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과 통상을 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적 상황 속에서 강화도에 두 나라 대표가 모여 조약을 맺으니,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1876).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부산, 원산, 제물포의 세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의 일정 지역에 일본인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강화도 조약에서는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밝혔지만, 조선에 불리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자유로이 측량하는 것을 허용하고, 치외법권을 인정하여 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도 일본의 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 불평등한 내용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 후, 조선은 미국, 영국 등 서양 열강과도 차례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 개방을 확대하고, 세계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서양 각국과 맺은 조약도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미국과의 수교

청은 일본의 조선 침투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알선하였다.

강화도 조약(12개조)의 주요 내용
  •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 일본 정부는 15개월 후 사신을 서울에 파견한다. 조선국 정부는 언제든지 사신을 일본국 동경에 파견할 수 있다.
  • 조선국 부산의 일본 공관에서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바닷가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소를 앞으로 20개월 내에 개항한다.
  • 조선국 해안을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 관계되는 사건일 때에는 일본국 법에 의거하여 모두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2] 개화와 척사의 대립은 왜 일어났을까?[편집]

⋅ 조선 정부는 어떤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는가?

⋅ 임오군란은 왜 일어났는가?

시찰단과 유학생의 파견[편집]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뒤 조선 정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김기수와 김홍집이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와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국왕에게 보고하였다. 이어서 정부는 젊은 관리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여러 정부 기구와 산업 시설, 문화 시설 등을 시찰하게 하였다.

이들은 귀국 후 각자 여행기와 시찰 보고서를 작성하여 국왕에게 제출하였다. 이는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도움이 되었다. 또, 정부는 청에도 유학생을 파견하여 톈진에서 근대 무기 제조 기술과 군사훈련법을 배우게 하였다.

정부는 개화 정책을 주관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에서 들여온 새로운 무기로 훈련시켰다.

통리기무아문

개항 이후의 정세 변동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한 근대적 행정기구였다.

개화와 척사의 대립[편집]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보다 적극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여 나라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개화파라고 하였다.

그러나 많은 유생들은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우리 고유의 유교 문화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위정척사 운동을 일으켰다.

이처럼 정부의 개화 정책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개화론과 척사론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민씨 세력과 흥선 대원군 세력 사이의 갈등, 일본 세력의 침투에 대한 국민의 반발 등이 얽히면서 정치는 점점 혼란을 겪게 되었다.

개화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구식 군인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구식 군인들이 한동안 밀렸던 급료로 모래와 겨가 섞인 쌀을 받게 되자, 그들의 불만은 일시에 폭발하였다. 구식 군인들은 평소에 미워하던 정부의 고관들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군사 교관을 살해하였다. 이를 임오군란이라 한다(1882).

이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조선에 세력을 침투시킬 기회를 엿보던 청이 군대를 보내 흥선 대원군을 납치해 감으로써 민씨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 때부터 청은 조선에 군사 고문과 외교 고문 등을 파견하여 내정에 간섭하였다.

게다가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압으로 제물포 조약을 맺고 임오군란 중에 일본측이 입은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나아가 일본 공사관의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이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제물포 조약 후 박영효가 일본에 사절로 파견되었는데, 이 때 태극기가 처음 사용되었다.

도움글

⋅ ‘조선책략’의 내용과 그 영향 ⋅

김홍집이 일본에 갔을 때 가지고 온 ‘조선책략’의 배포를 계기로 정부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거세어졌다. 이 책은 황쭌셴이라는 중국의 외교관이 동아시아의 정세와 조선의 외교 정책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쓴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러시아 세력이 남쪽으로 침투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이를 막기 위해서는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의 외교를 추진하면서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이 책의 내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서양과 수교하려는 뜻을 가졌으며, 이를 복사하여 관리와 유생들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반대하는 유생들은 전국적으로 개화 반대의 상소를 올리면서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正)을 지키고(衛), 그릇된 것(邪)을 배척(斥)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바른 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이르고 그릇된 것은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가리킨다.

[3]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통해 이루려 하였던 것은?[편집]

⋅ 갑신정변은 왜 일어났는가?

⋅ 개화당 정부가 추진한 개혁의 내용은 무엇인가?

⋅ 갑신정변은 왜 실패하였으며,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갑신정변[편집]

조선은 임오군란 후 청의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고, 다시 집권한 민씨 세력은 개화 정책에 소극적이어서 근대적인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근대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개화파 세력에게는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파 인사들이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갑신정변이라 한다(1884).

이들은 새 정부를 구성하고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개혁 정책에는 청에 대하여 자주권을 내세우고, 문벌 타파와 조세 제도를 개혁하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 즉, 개화당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를 개혁하여 근대 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변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개화 사상이 국민 속에 퍼지지 못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개혁이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의 방식으로 추진됨으로써 국민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이 개입한 것도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도움글

⋅ 갑신정변의 전개 과정 ⋅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오후 7시경, 우정국 신청사에서 축하연이 베풀어졌다. 이 자리에는 주인격인 홍영식과 손님격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민영익, 한규직, 이조연 등 조선측 인사들과, 외국인으로 미국 공사와 서기관, 영국 총영사, 청국 영사와 서기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및 통역관,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 모두 18명이 참석하였다.

연회가 거의 끝나 가는 오후 10시경, 별안간 밖에서 불이 났다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지자, 민영익이 재빨리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질 듯 도로 들어와 쓰러졌다. 몸에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는 재빨리 국왕이 있는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궐 문은 미리 내통한 문지기에 의해 열렸으며, 김옥균 등은 취침 중이던 국왕을 만났다.

김옥균은 국왕과 왕비 및 왕세자 일행을 이웃에 있는 경우궁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궁궐 주변을 지키면서 청군의 습격에 대비하였으며, 궐내는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와 군인들이 수비하였다. 김옥균 등은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처단하고,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갑신정변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조선 주둔 청군과 일본군의 수

갑신정변 당시 조선에는 1500여 명의 청군과 200여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결과[편집]

개화당 정권이 3일 만에 무너지자, 고종은 새 내각을 통해 각종 개혁 조치를 무효화하고, 예조 참판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의 정변 개입에 항의하고 김옥균 등 망명자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도리어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이 희생된 데 대하여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무력 시위를 하였다. 이에 정부는 한성 조약을 맺고, 사죄와 더불어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에 비해 정치적으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담판하여 텐진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청⋅일 양국 군대를 철수하고 장차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로 알릴 것을 약속하였다. 갑신정변 이후에도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 간섭은 여전히 심하였다. 청⋅일 두 나라는 서로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강화하면서 경쟁하였고, 10년 후에는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갑신정변 때의 14개조 정강(일부)
  •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우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 토지의 수익에 대하여 매기던 조세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 부정한 관리 중에서 그 죄가 큰 자는 치죄한다.
  •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치상의 명령이나 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강화도 조약

⋅ 강화도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미국, 영국 등과도 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하였다.

나. 개화와 척사의 대립

⋅ 조선 정부는 시찰단과 유학생을 파견하고,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설치하는 등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 보수적인 유생들은 전통적 체제와 유교 문화를 지키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다. 갑신정변

⋅ 개화파 인물들은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근대적 자주 국가를 이루려 하였으나, 청의 간섭으로 실패하였다.

2. 주요 용어

강화도 조약 | 통리기무아문 | 임오군란 | 제물포 조약 | 갑신정변

김기수 | 김옥균 | 박영효 | 김홍집

3. 탐구 활동

다음 강화도 조약의 일부 조항에 담겨 있는 의미를 살펴, 이것이 불평등 조약임을 밝혀보자.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의 바닷가 중 통상에 편리한 항구 2개소를 앞으로 20개월 내에 개항한다.

⋅ 조선국 해안을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 관계되는 사건일 때에는 일본국 법에 의거하여 모두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3.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편집]

학습 개요[편집]

개항 이후 정부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농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농민들은 외국의 경제적 침략으로 더욱 고통을 겪었다. 이에 농민들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갑오개혁이 추진되었다.

[1] 농민들의 생활은 개항 이후 어떻게 변화하였을까?[편집]

⋅ 갑신정변 후 조선을 둘러싼 국제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나?

⋅ 방곡령을 내린 까닭은 무엇인가?

⋅ 농민들은 왜 반일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가?

거문도 사건[편집]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청은 우리 나라의 정치 및 외교에 대해 더욱 심한 간섭을 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러시아와 가까이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남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과 통상 조약을 맺고, 함경 북도 경흥을 조차하였다. 또, 외교관 베베르를 공사로 보내어 조선 정부 안에 많은 친러 인사를 만들고 그 세력을 키웠다.

조선에 대한 열강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세력 경쟁이 치열해졌다. 특히,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하여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제적 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를 거문도 사건이라 한다.

이 무렵,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중립화 주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심해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조차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

방곡령[편집]

갑신정변으로 조선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은 일본은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서 쌀과 콩 등의 곡식을 많이 사 가고 영국제 면제품을 팔았다. 가뜩이나 흉년이 잦은 상태에서 일본으로 곡식이 유출되어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더욱이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의 상인들이 몰려와 일본 상인들과 경쟁적으로 활동을 넓혀 감으로써 조선의 농촌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하여 일부 지방에서는 방곡령을 내려 일본 상인들이 곡식을 사 가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방곡령으로 손해를 보게 되었다며 조선 정부에 배상을 강요하였고, 정부는 이에 굴복하여 더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소작농이 대부분이었던 농민들은 소작료를 바치고 각종 세금을 빼고 나면 항상 빚에 쪼들리며 생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농민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여 농민들 사이에는 일본을 배척하는 기운이 널리 퍼졌다. 게다가 정부가 외세의 침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자 정부에 대한 불신도 높아져 갔다. 이러한 농촌의 분위기는 동학이 널리 보급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도움글

⋅ 방곡령 ⋅

1889년 9월에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그 해에 흉년이 들어 곡식이 부족하게 되자,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들에게 10월부터 콩과 쌀의 수출을 금지한다는 방곡령을 내렸다.

콩은 일본인들의 중요한 식료품인 간장과 된장의 원료로 쓰이는데, 이의 상당 부분을 조선에서 수입하였다. 그러므로 원산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들은 콩 무역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에, 일본측은 방곡령을 해제하고 조병식을 해임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하였다. 아울러 방곡령으로 일본 상인들이 입은 손해를 조선 정부가 배상할 것을 강요하였다.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대로 손해의 일부를 갚아 주었다.

[2]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의의는?[편집]

⋅ 동학이 농촌 사회에 널리 퍼진 까닭은 무엇인가?

⋅ 동학 농민군은 어떤 사회가 건설되기를 바랐는가?

⋅ 동학 농민 운동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동학의 보급[편집]

정부가 동학을 사교로 규정하여 교조인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여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동학의 포교에 힘썼다.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학은 농촌 사회에 널리 보급될 수 있었으며, 교단 조직도 갖추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아 온 동학교도들은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불만이 높아지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삼례 집회 후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으며, 곧이어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는 동학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외세의 배척과 부패한 관리의 처벌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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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 가고 있지만, 우리 나라 곳곳에서 불리던 민요이다. 녹두는 전봉준을 가리키는데, 이는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체포되어 처형된 전봉준의 비운을 마음 속에 두고 농민들이 부른 노래라고 한다.

고부 농민 봉기[편집]

외세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의 혼란으로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지르며 농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전봉준은 “탐관오리를 제거하여 백성을 구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곡식 창고를 풀어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이것이 고부 농민 봉기로서,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이었다(1894).

정부에서는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그들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에 전봉준은 동학 교단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농민들에게 통문을 돌리고 고부의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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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부 군수 조병갑의 비리 ⋅

조병갑은 전에도 고부 군수를 지낸 일이 있어 두 번이나 고부 군수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예부터 사용하던 저수지인 만석보는 그대로 둔 채, 농민들에게 노역을 시켜 새 저수지를 만들게 하고 물값을 비싸게 받았다. 새로 개간한 논에는 세금을 면제해 준다고 약속해 놓고, 개간 후 수확을 하면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갔다. 토지세 12말을 16말로 늘려 그 차액을 챙겼으며, 자기 부친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다고 백성들에게서 빼앗다시피 하여 2만 냥을 모았다.

그는 또 불효죄, 화목하지 않은 죄, 음란한 죄 등의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죄를 씌워 그 대가로 돈을 빼앗았다. 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곤장을 맞았다.

이러한 횡포를 시정하고자 전봉준의 아버지가 군수를 찾아가 농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하자, 조병갑은 고을 군수를 업신여긴다며 매를 때려 내쫓았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이 일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농민군의 전주 점령[편집]

농민군은 황토현 전투에서 전주에서 내려온 관군에 승리한 후 전라도 일대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고, 장성 전투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관군을 격퇴하였다. 각지에서 합세한 농민들은 기세를 올려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도 우리 나라에 군대를 보냈다.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그리고 전주에서 철수한 후 일단 해산하였다.

농민들이 정부측에 제시한 폐정 개혁안은 그 동안의 국내 정치의 모순을 바로잡고,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농민군은 전라도 지방의 각 고을에 집강소라는 자치 기구를 설치하고, 그 동안 잘못된 정치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가려고 하였다.

일본의 파병

조선 정부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텐진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집강소

전라도 지역 53개 고을의 치안 유지와 행정 사무를 담당하게 한 자치 기구이다.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편집]

전주 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이 해산하자,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궁궐을 침범하였으며,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일본군의 침략 행위가 노골화되자, 농민군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일어났다.

서울을 향해 북상하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할 수 없어 많은 희생을 치른 채 물러나고 말았다.

농민군은 태인에서 최후의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기울어진 전세를 돌이키지 못하였고, 민가에 숨어 재기를 계획하던 전봉준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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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치 전투 ⋅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우리 나라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자, 정부와 화약을 맺고 있던 동학 농민군은 일본을 내쫓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이 때 모인 동학 농민군의 수는 10만여 명에 이르렀다. 전봉준이 거느린 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관군은 농민군의 공격을 받고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우금치로 후퇴하였다. 이후 우금치를 둘러싸고 동학 농민군과 관군⋅일본군 사이에 6, 7일간에 걸쳐 50여 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국, 동학 농민군은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참패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500여 명은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항전하다가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하였고, 피신 중이던 전봉준은 얼마 후 체포되었다.

이로써 고부 봉기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은 뒤에 항일 의병 전쟁에 참전하여 항일 투쟁의 전통을 이어 갔다.

[3] 갑오개혁의 내용과 그 한계는?[편집]

⋅ 갑오개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 갑오개혁에 대하여 국민들이 반발한 까닭은 무엇인가?

근대적 개혁의 실시[편집]

동학 농민 운동은 그 동안 쌓인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조선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들이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부 내에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도 강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민씨 세력을 몰아 낸 후 흥선 대원군을 앞세워 개혁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김홍집을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구성되고, 개혁의 추진을 위해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임시 기관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안을 심의하였다.

이 때 실시된 개혁을 갑오개혁이라고 부른다. 갑오개혁은 조선 후기 이후 새로운 사회를 기대하는 농민들의 움직임에서 시작하여 개화 운동으로 이어진, 전통 사회를 개혁하려는 민족의 욕구가 담긴 개혁이었다. 개혁의 내용에는 이미 갑신정변에서 개화파가 제시하였거나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들이 주장하였던 신분제 폐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정치, 경제, 사회의 각종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는 중요한 내용이 많았다.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면서 그동안 개혁에 소극적이던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각각 일본과 미국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국왕의 이름으로 우리 나라가 독립국임을 내세우고,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개혁의 내용과 정신을 밝혔다. 그리고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근대적 교육을 실시할 준비를 하였다.

교정청

조선 정부가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주로 조세 개혁을 결정하였다.

군국기무처

입법권을 가진 초정부적인 개혁 추진 기구이다

갑오개혁의 중요 내용

1. 정치

  • 개국 기원 사용
  • 왕실 사무와 행정 사무 분리
  • 사법권 독립
  • 과거제 폐지

2. 경제

  • 재정의 일원화
  • 조세의 금납화
  • 도량형의 개정 통일

3. 사회

  • 신분제 폐지
  • 조혼 금지
  • 과부의 재혼 허용

갑오개혁의 한계[편집]

갑오개혁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일본의 침략적인 간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국기무처가 존속한 5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200건이 넘는 많은 개혁안이 발표되어 제대로 실시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우리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서양과 일본에 맞추어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고 했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국방의 강화를 위한 군사 제도의 개혁을 소홀히 하였고, 일본의 조선 침략에 유리한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도 문제였다. 또, 농민들이 절실하게 원하고 있던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이 포함되지 않아 농민들로부터 외면당하였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일본의 경제적 침투

⋅ 갑신정변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 침투를 강화하였다.

⋅ 조선은 일본의 경제 침투에 방곡령을 내려 대응하였다.

나. 동학 농민 운동

⋅ 농민들은 관리들의 부패와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항거하여 봉기하였다.

⋅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집강소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였다.

⋅ 동학 농민 운동은 일본의 군사적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다. 갑오개혁

⋅ 갑오개혁의 내용에는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 때 제기된 문제가 반영되었다.

⋅ 갑오개혁으로 조선은 근대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국민들의 반감으로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2. 주요 용어

거문도 사건 | 방곡령 | 고부 농민 봉기 | 황토현 전투 | 갑오개혁 | 군국기무처

최시형 | 전봉준 | 김홍집 | 박영효

3. 탐구 활동

사발통문에 관한 다음 물음에 답해 보자.

1. 이것을 작성한 목적은 무엇인가?

2. 원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무엇을 기록한 것일까? 그리고 왜 원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을까?

한 걸음 더[편집]

심화 과정

다음은 동학 농민 운동에 관한 자료이다.

전봉준의 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뜻이 다른 데 있지 않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고 있는 힘없는 향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다.

폐정 개혁안

1. 동학과 정부 사이의 반감을 없애고 정치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의 죄상을 조사하여 이를 엄중히 처벌한다.

3. 횡포한 부호들을 엄중히 처벌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계한다.

5. 노비 문서를 불태워 없앤다.

6. 모든 천인들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앤다.

7 젊은 과부의 재혼을 허락한다.

8. 규정 이외의 모든 세금을 폐지한다.

9. 관리의 채용은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일본인과 몰래 통하는 자는 엄벌한다.

11, 공⋅사채는 물론이고, 농민이 이전에 진 빚은 모두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골고루 나누어 경작한다. ‘동학사’

전봉준이 마지막으로 남긴 시

때가 이르러서는 천지와 함께 힘을 썼으나

운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꾀할 바가 없구나.

백성 사랑에 온몸을 바쳤으니 내 잘못은 없노라.

나라를 사랑한 붉은 마음을 누가 알아주겠나.

전봉준 공초(재판 기록문)

문 : 너는 전라도 동학의 괴수라 하던데, 과연 그러한가?

답 : 처음에는 의를 주장하고자 기포(起包)하였다. 동학 괴수의 명칭은 없었다.

문 : 고부에서 기포하였을 때에 동학이 많았는가, 원통한 사람들이 많았는가?

답 : 비록 원통한 사람들과 동학이 합세하였으나 동학은 적었으며 원통한 사람들이 많았다.

……

문 : 다시 난을 일으킨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답 : 그 후에 들은즉 일본이 개화라 칭하고, 처음부터 한 마디 말도 없이 민간에게 전달하여 배포하고, 또 알리는 글도 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서울에 들어와 밤중에 왕궁을 공격하여 임금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므로 시골의 백성들이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규합하고 일본인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일차 묻고자 함이었다.

탐구 문제

위의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해 보자.

1. 위의 자료들을 참고로 하여 전봉준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또는 연극 대본)를 꾸며 보자.

2. 동학 농민 운동은 내정을 개혁하려는 반봉건 운동, 외세를 배척하려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폐정 개혁안에서 그러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을 찾아 옮겨 써 보자.

단원 종합 수행 과제[편집]

우리는 조선이 이런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1. 주제

개혁안 작성하기

2. 목표

개혁 세력이 추진한 개혁안의 비교

3. 내용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전개되었던 여러 개혁 운동을 비교해 보고, 가장 절실한 개혁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본다. 이것을 바탕으로 10개항의 개혁안을 만들어 본다.

4. 유의 사항

이 과제는 조별로 토론 과정을 거쳐 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칫 토론이 산만하게 진행될 우려가 있으므로, 자기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교해 보면서, 어느 것이 더 절박한 문제인가를 토론하도록 한다.

5. 과제 수행 절차

[1] 지금까지 학습한 내용에서 여러 세력이 제시한 개혁안을 모은다.

⋅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

⋅ 위정척사파의 개화에 대한 생각

⋅ 온건 개화파의 개화 정책

⋅ 갑신정변에서 제시된 개화파의 개혁안

⋅ 동학 농민 운동에서 제시된 개혁안

⋅ 갑오개혁에서 추진된 개혁 정책

[2] 각 개혁안 비교해 보기

① 각 개혁안의 차이점과 공통점 찾기

② 차이점이 나타나게 된 까닭 생각해 보기

[3] 개혁안 10개항 정하기

⋅ 개별적으로 10개 항목을 정한다.

⋅ 조원 전체의 개혁안을 모아 동일한 항목과 다른 항목을 확인한다.

⋅ 토론을 통해 10개 항목을 정한다.

[4] 개혁 선언문 작성하기

⋅ 지금 조선의 상황은 이러하다(국내 상황과 대외 관계 등).

⋅ 조선이 안고 있는 문제는 이러하다.

⋅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개혁이 필요하다.

⋅ 개혁안 10개항 제시

⋅ 이러한 개혁이 추진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