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Ⅷ. 주권 수호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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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원에서 배울 내용[편집]

⋅ 독립 협회가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전개하였던 자주 운동을 알아보자.

⋅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 전쟁의 모습을 조사해 보자.

⋅ 애국 계몽 운동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 알아보자.

1. 독립 협회와 대한제국[편집]

학습 개요[편집]

일본과 러시아가 우리 나라를 사이에 두고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삼국 간섭과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 때 독립 협회가 조직되어 민족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민의 자주⋅자강 운동에 힘입어 성립한 대한제국은 국가의 면모를 새롭게 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외세의 간섭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1] 을미의병이 일어난 까닭은?[편집]

⋅ 삼국 간섭은 어떠한 배경에 의해 일어났나?

⋅ 일본은 명성 황후를 왜 시해하였나?

⋅ 국민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까닭은?

삼국 간섭[편집]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일본의 더욱 심한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에 고종과 명성 황후는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으로부터 요동 반도를 빼앗았다. 이는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중국 대륙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찍부터 남하 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는 이 지역에 오래 전부터 이해 관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요동 반도를 청에 돌려줄 것을 일본에 요구하였다. 이를 삼국 간섭이라고 한다.

일본은 삼국의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굴복하였다.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 세력의 우위가 드러나자, 일본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삼국 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은 요동 반도를 찾게 해 준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각종 이권을 얻어 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편집]

조선에 대한 침략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은 조선의 이러한 움직임에 크게 당황하였으며. 명성 황후는 일본의 조선 침략에 방해가 되는 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는 일본군과 일본인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궁궐에 침입하고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한다(1895).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는 조선의 주권을 짓밟은 것으로, 국제 사회에서도 일본을 비난하는 여론이 드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였다.

한편, 일본의 압력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은 그 동안 지지부진하였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음력 폐지와 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우편 제도 실시, 건양 연호 제정, 단발령발표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를 을미개혁이라고 한다(1895).

을미의병[편집]

일본의 명성 황후 시해와 내정 간섭으로 우리 민족의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단발령은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단발령은 겉으로는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내세운 것이었으나, 여기에는 한국의 전통을 끊음으로써 한국인의 민족 정신을 약화시키기 위한 일본의 정략이 숨어 있었다.

단발령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단발령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관직에서 사직하거나 학생들이 학교를 자퇴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 이를 훼손하는 것은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므로,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고 하면서 반발하였다. 개항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의병 운동은 그전부터 서양과의 교섭, 특히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반대하면서 그들의 침략을 경계할 것을 주장하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이 때에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이항로의 영향을 받은 이소응, 유인석 등이 있었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 운동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민족 운동의 한 흐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읽기자료

⋅ 이건창 등의 연명 상소문 ⋅

20일에 일어난 참변(명성 황후 시해)은 적이 시해하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지만, 그것이 적의 소행인지 우리 나라 사람의 소행인지 아직 판명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면 관직이 있는 사람은 그를 살해하여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임금과 부모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으므로 병사를 되돌리지 않고 싸운다.” 라고 하였습니다. ……

아! 그 변란이 일어난 지 열흘이 지났습니다. 위로는 왕세자로부터 아래로는 관원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통곡 한 마디 못 하고 상복 한번 입자는 말 한 마디 없으니, 천하의 이치와 인정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

아! 슬프다. 신 등이 대대로 국록을 받고 후한 은덕을 입은 사람으로서, 이 흉변을 당하여 당연히 죽어야할 사람이 죽지 않고 궁벽한 시골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상도 하지 못한 채 하늘을 우러러 끝없이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매천야록’

[2] 독립 협회의 지도층이 만들고자 한 사회는?[편집]

⋅ 독립 협회가 펼친 자주⋅민권⋅자강 운동이란 무엇인가?

⋅ 만민 공동회가 개최된 이유는?

아관 파천[편집]

항일 의병 운동이 전개되면서 나라 안이 소란해진 틈을 타 러시아는 그들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우리 나라 정부 안에 친러 세력을 키우는 한편, 일본의 간섭에 반대하고 있던 고종에게 접근해 왔다.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1896).

고종이 이 곳에 머무른 약 1년 동안 러시아는 재정과 군사 고문을 보내어 우리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이는 독립 국가인 조선의 대외적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러시아를 비롯한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는 경쟁적으로 광산 채굴권, 철도 부설권, 삼림 채벌권 등 많은 이권을 빼앗아갔다.

독립 협회의 활동[편집]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독립 신문을 간행하고 있던 서재필과 개화파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협회를 설립하였다(1896).

초기의 독립 협회에는 정부의 고관들도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나, 점차 민간인들이 이끌어 나갔으며, 지방에도 지회가 조직되어 전국적인 단체로 발전하였다. 독립 협회는 회원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아 학자, 상인, 농민, 노동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계층까지도 참여하였다.

독립 협회의 활동 방향은, 국민을 계몽하여 이들을 정치 활동에 참여시킴으로써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고, 국민들의 권리를 확립하며, 개혁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독립 협회는 앞서 간행되고 있던 독립 신문을 통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며, 토론회와 연설회를 자주 열어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특히, 독립 협회는 국민의 권리를 존중하는 정치가 행해져야 하며, 이것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적인 정치를 주장하였다.

독립 협회는 다른 나라들이 우리 나라의 이권을 빼앗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였다.

독립 협회 초기의 임원

회장 안경수, 위원장 이완용 등 정부 고관과 함께 통상⋅산업⋅기술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읽기자료

⋅ 독립 신문 창간사 ⋅

우리가 독립 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의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 있을 것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터이옴. ……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펴일 터이요, 사사로운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

그러한즉 이 신문은 꼭 조선만 위함을 가히 알 터이요, 이 신문을 인연하여 내외,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조선 일을 서로 알 터이옴. ……

1896년 4월 7일

만민 공동회[편집]

독립 협회의 활동 중에서 가장 활발하였던 것이 만민 공동회였다.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는 일종의 민중 집회로서, 독립 협회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일반 시민들도 참여하였다(1898).

만민 공동회에서는 정치⋅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시민들은 외세에 의존하는 정치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의회 정치의 실시 등 혁신적인 개혁 정치를 요구하는 건의를 국왕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일반 시민들이 중심이 된 만민 공동회의 주장이 점차 강해지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일부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독립 협회의 간부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그리고 보부상들로 조직된 황국 협회를 앞세워 독립 협회와 충돌하게 한 후, 이를 구실로 독립 협회를 해산시켰다.

독립 협회의 활동은 국민들 사이에 자주 독립 의식을 확산시켰으며, 이후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독립 협회를 해산시킨 이유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황제를 폐위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에 놀란 고종이 독립 협회 간부들을 구속하고 독립 협회 해산령을 내렸다.

[3] 대한제국이 자주 국가를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편집]

⋅ 대한제국이 추진한 개혁 내용은 무엇이었나?

⋅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 실패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대한제국의 성립[편집]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나라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국민의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고종은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고종은 그 동안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자주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1897).

광무개혁[편집]

대한제국은 외국 세력이 서로 경쟁하는 정세를 이용하여 나라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산업의 발전과 교육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농민 생활의 안정과 재정의 확보를 위해 토지를 새로이 측량하였으며,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각종 회사와 공장을 설립하였다. 또, 새로운 기술자와 경영인의 양성을 위해 상공 학교, 광무 학교 등의 실업 학교와 의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정책으로, 개인이 생산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사립 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대한제국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적으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제를 개편하여 궁궐과 서울을 지키는 군대를 증강하였고, 지방에도 군대를 주둔시켰다. 대한제국의 개혁은 자주 독립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정부는 개혁을 주장하는 독립 협회를 해산시키기에 이르렀으며, 외세의 침략도 효과적으로 막아 내지 못하였다. 특히, 정부 고관들의 외세 의존적인 태도는 외국의 세력을 끌어들이고 열강에 이권을 침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전국의 주요 광산이 외국인에 의해 경영되고, 철도 부설권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의 민족 자본을 키우고 근대 국가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군제 개편

황제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를 증강하였다. 그리고 고급 장교의 양성을 위해 무관 학교를 설립하였다.

도움글

⋅ 운산 금광과 노다지 ⋅

운산 금광은 노다지 금광으로 유명한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운산 금광을 미국인들이 경영하면서 매우 많은 양의 금이 쏟아져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운산 일대의 주민들이 금광 회사의 철조망에 모여들었다. 이때,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인들이 “노 터치(No Touch : 손 대지 말라.)”를 연발하자, 주민들은 이 말을 노다지로 알아들었다. 그 후로 금이 많이 나온다는 말이 ‘노다지’로 통용되었다.

본래, 대한제국이 미국에 운산 금광을 넘겨준 것은 정치적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은 정치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이권에만 관심을 보였다.

운산 금광에서 미국은 40년 동안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하여 총 56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을미의병

⋅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나. 독립 협회

⋅ 독립 협회는 국민을 계몽하여 자주, 민권, 자강을 이룩하고자 노력하였다.

다. 대한제국

⋅ 대한제국은 근대 산업과 교육의 진흥, 군제의 정비를 통해 자주 독립 국가로 발전하고자 노력하였다.

2. 주요 용어

을미사변 | 을미의병 | 아관 파천 | 독립 협회 | 만민 공동회 | 대한제국

명성 황후 | 이항로 | 유인석 | 서재필

3. 탐구 활동

1. 위의 사진은 같은 사람의 모습이다. 복장과 머리 모양을 오른쪽 사진과 같이 바꾼 것은 언제부터일까? 왜 서양식 복장과 머리 모양을 하였을까?

2. 1895년에 내려진 단발령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찬성한 사람들과 반대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걸음 더[편집]

심화 과정

다음은 개화기에 우리 나라에 새롭게 도입된 근대 문물과 시설에 관한 사진이다.

탐구 문제

1. 230쪽의 그림에서 소개하고 있는 근대 문물들의 도입 시기를 조사하고, 이를 연표로 만들어 보자.

2. 전신⋅전화 및 철도가 개통된 지역을 지도에 표시하고, 왜 그 지역에 개통되었는지 알아보자.

3. 이러한 근대 시설은 누가 중심이 되어 설치하였으며, 주로 누가 이용하였는지 알아보자.

2. 일제의 침략과 의병 전쟁[편집]

학습 개요[편집]

대한제국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외교권과 군사권을 차례로 강탈당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력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은 항일 민족 운동의 가장 큰 두 흐름이었다.

[1] 우리 민족은 을사조약에 어떻게 저항하였는가?[편집]

⋅ 을사조약으로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 을사조약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떻게 저항하였나?

을사조약[편집]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는 등 세력을 확대시키고, 우리 나라에도 세력을 침투시키려 하였다. 러시아의 세력이 커지면서 일본과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이 때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은 영⋅일 동맹을 맺어 일본을 도왔다. 이러한 두 나라의 대립은 러⋅일 전쟁으로 이어졌다(1904).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1905). 이 조약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러⋅일 전쟁의 결과

러⋅일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내용

  1. 일본은 한국에 대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특별 권리를 가진다.
  2. 요동 반도의 조차권과 남만주 철도를 일본에 넘겨준다.
  3.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넘겨준다.

을사조약 반대 투쟁[편집]

고종 황제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을사조약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는 민족의 분노가 여러 가지 형태로 폭발하였다. 상인들은 일제히 상점 문을 닫아 저항하고, 학생들은 자진하여 휴학하였다.

이상설, 최익현 등 전직 고관과 유생들은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친일 대신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당시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대한매일신보나 제국신문도 을사조약 반대 운동의 소식을 자세히 보도하여 민족의 항일 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민족의 움직임이 전개되는 가운데 고종 황제는 조약 체결이 무효임을 선언했으며, 국제 사회에 독립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호소하였다. 특히, 미국에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상호협력 조항을 근거로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제2차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1907). 그러나 이러한 고종 황제의 외교적 노력은 열강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있던 세계 정세 아래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을사조약 이후에는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이 때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을 들 수 있다.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은 평해, 울진, 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제까지는 대부분의 의병장이 전직 고관이나 유생들이었는데, 신돌석이 평민이었다는 것은 의병 운동이 전 민족적인 국권 수호 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 준다.

읽기자료

⋅ 시일야방성대곡 ⋅

지난날 이토 후작이 한국에 옴에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서로서로 모여 말하기를 “이토 후작이 평시에 동양 3국의 안정과 안녕을 맡아 주선하던 인물이라, 금일에 한국에 옴에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하게 세울 방략을 권고하리라.” 하여 항구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크게 환영하였더니, 세상일이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

이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분열하는 조짐을 만들어 낸 것인즉, 이토 후작의 본래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 …… 아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장지연

읽기자료

⋅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서 ⋅

슬프다. 나라와 민족의 치욕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속에서 멸망하리라. 삶을 원하는 자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 살아갈 수 있으니, 이는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나 (민)영환은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를 갚고 2천만 동포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황천에서 동포들을 돕고자 하니, 우리 동포 형제들이여, 천만 배 기운을 떨쳐 힘써 뜻을 굳게 가지고 학문에 힘쓰며 마음을 합하고 협력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한다면, 나는 지하에서 기꺼이 웃으련다. 아! 슬프다.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 동포에게 마지막으로 고별하노라. 1905년 11월 4일

민영환

을미의병과 을사의병

을미의병 때 ‘국모(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자’는 구호를 내건 것과 달리, 을사의병은 ‘일제를 몰아 내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목표를 내세웠다.

도움글

⋅ 헤이그 특사 ⋅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고종 황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점과 일본의 침략 사실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세 특사는 헤이그에서 그들이 머무르던 집에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 국가의 외교 사절단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들은 각국의 대표들에게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주장하였으며, 만국 기자 협회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는 등 우리 나라의 사정을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심한 방해 공작으로 세 특사는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못한 데 대해 통분해하던 이준 열사는 그 곳에서 순국하였다.

의거 활동[편집]

전국 각지에서 의병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침략의 원흉이나 매국노를 처단하여 민족의 원한을 풀고 침략을 막으려는 의사와 열사들의 의거 활동이 국내외에서 계속되었다.

미국에 살고 있던 전명운과 장인환은, 일본의 추천으로 우리 나라에 외교 고문으로 와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으로 돌아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그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였다.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1909).

이재명은 일본의 앞잡이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나철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 5적 등 매국노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을사 5적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2] 군대 해산 이후 의병 전쟁의 확산 과정은?[편집]

⋅ 1907년 이후 의병 항쟁이 더 활발해진 배경은 무엇인가?

⋅ 의병 전쟁은 항일 운동에서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고종의 강제 퇴위[편집]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일본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고종 황제를 군대로 위협하여 강제로 퇴위시켰다(1907).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민들의 저항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일본은 무력으로 이를 억누르면서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인이 행정 각 부의 차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일본인 통감이 대한제국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한⋅일 신협약의 주요 내용
  • 한국 정부는 시설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 한국 정부의 법률 제정 등은 사전에 통감의 승인을 받는다.
  • 한국 고관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는다.
  •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한다.

의병 전쟁의 확산[편집]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을 붙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군인들은 이에 저항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이를 계기로 시위대는 서울 시내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며, 원주, 진주 등지의 진위대도 일본군과 싸웠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이제 범국민적인 대일 전쟁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어 갔다.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각지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1만여 명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관동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각지에서 항일전이 계속되었으나, 무기와 전투 경험면에서 일본군에 비해 열세인데다 일본군이 대규모 작전을 벌여 의병 활동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의병의 무기

군대 해산 이전에는 의병의 다수가 재래식 화승총이나 창, 칼,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반면, 일본군은 최신형 소총이나 기관총까지 동원하였다.

의병의 피해

1907년 8월부터 1909년 말까지 일본군에 의해 학살된 의병의 수는 16,000여 명, 부상자는 36,000여 명에 달하였다.

읽기자료

⋅ 의병장 민종식이 의병들에게 알린 글 ⋅

슬프도다. 이제 우리 나라는 일본에 강제로 삼켜졌으니, 나라 없이 자기 집과 자기 몸의 영예가 있을 수 없고, 망국의 설움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없다. 애달프다. 우리 집 재산을 다 팔아서, 국난을 당하여 일어난 의병의 병기와 군량에 보충하리라.

[3] 간도와 독도는 어떻게 되었나?[편집]

⋅ 어떤 사람들이 간도를 개척하였나?

⋅ 일본이 간도를 청에 넘겨준 까닭은 무엇인가?

간도 문제[편집]

간도는 고구려와 그 뒤를 이은 발해의 땅으로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그러나 발해가 망한 뒤에는 말갈족이 거주하였으며, 여진족이 청을 건국한 뒤에는 이 지역을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하여 다른 민족의 이주를 금지하였지만, 조선인들이 곳곳에 살고 있었다.

조선 숙종 때 조선과 청은 국경선을 정하면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하였다. 그 후 많은 조선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에 청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철수를 강요하며 간도가 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으나, 조선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조선에서 건너간 사람들을 보호하며 다스렸다.

특히, 19세기 말 이후에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간도로 이주하는 우리 나라 농민들의 수가 늘어났다. 간도로 이주한 우리 민족은 간도의 각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을 실시하여 뒷날 독립 운동의 터전으로 삼았다.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안동(단둥)과 봉천(선양) 간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가 청의 영토라고 인정하는 간도 협약을 청과 체결하였다(1909). 이로써 간도 지역은 대한제국의 관할에서 떨어져 나갔다.

안봉선 철도

일본이 안봉선 철도를 부설한 것은 남만주에서 세력을 확보하여 만주를 침략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도 문제[편집]

독도는 울릉도에 딸린 섬으로서, 일찍부터 우리 나라의 영토로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초기에 유민을 막기 위해 울릉도민들을 본토에 옮겨 살게 하여 한때 정부의 관리가 소홀하였으나, 우리 어민들은 고기잡이를 하는 거점으로 줄곧 활용해 왔다.

특히, 조선 숙종 때에는 동래에 살던 안용복이 이 곳을 왕래하는 일본 어부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 나라의 영토임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그 후에도 일본 어민들이 자주 울릉도 부근에서 불법으로 고기를 잡아갔다. 이에 정부는 울릉도에 관청을 두어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고, 독도를 관할하였다. 그 후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일방적으로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으나, 광복과 함께 되찾았다.

독도의 강탈

1905년 2월,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 이름짓고, 이른바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라는 것을 통해 일방적으로 일본에 편입하였다.

읽기자료

⋅ 독도 ⋅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의 두 섬은 현(울진현)의 정동쪽에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우산국이라 칭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을사조약

⋅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나. 의병 전쟁

⋅ 해산된 군대가 가담함으로써 의병 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 의병 부대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편성하고 서울 진격전을 폈다.

다. 간도와 독도

⋅ 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 협약으로 간도가 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 독도는 일본이 러⋅일 전쟁 중에 일방적으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2. 주요 용어

을사조약 | 통감부 | 헤이그 특사 | 군대 해산 | 13도 창의군 | 독도 문제

민영환 | 장지연 | 이상설 | 이준 | 최익현 | 신돌석 | 안중근

3. 탐구 활동

1.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우리 민족이 전개한 항일 민족 운동의 형태를 조사해 보자.

2. 유학자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 항쟁을 주도하는 애국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이 성리학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다고 볼 때, 그들의 활동에는 어떤 한계가 있었을까?

3. 군대 해산 이후 각지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을 조사해 보자.

3. 애국 계몽 운동[편집]

학습 개요[편집]

우리 민족은 항일 민족 운동으로 의병 전쟁과 함께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 지사들은 여러 애국 계몽 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나라의 부강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에 진 빚을 갚아 국가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위해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였다.

[1] 신민회가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을 추진한 까닭은?[편집]

⋅ 을사조약 이후에 어떤 애국 계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는가?

⋅ 애국 계몽 운동 단체는 주로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가?

⋅ 신민회가 다른 애국 계몽 운동 단체와 다른 점은?

애국 계몽 운동[편집]

나라의 자주 독립을 목표로 활동하던 독립 협회가 보수적인 집권층에 의하여 해산되고 밖으로 외세의 침략이 거세어지면서, 민족의 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지식인들과 전직 관리들이 앞장서서 국민들을 계몽하는 활동을 펴 나갔다. 이러한 활동은 정치 단체, 교육, 언론, 학문, 종교, 경제 등 각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 단체[편집]

독립 협회가 해산된 후에 가장 먼저 조직된 정치 단체인 보안회는, 러⋅일 전쟁 중에 일본이 우리 나라의 황무지 개척권을 강요해 왔을 때 이에 반대하는 국민의 여론을 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결국, 일본은 황무지 개척권을 포기하였고, 보안회도 일본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보안회가 해산되자, 독립 협회 출신의 인사들이 헌정 연구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였다. 그들은 근대적인 입헌 의회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에 의해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자, 헌정 연구회의 중심 인물들은 새로이 대한 자강회를 조직하였다. 대한 자강회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펴 나갔다.

신민회의 활동[편집]

정치 활동에 대한 통감부의 억압이 날로 심해져 정치 단체들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비밀리에 신민회가 조직되었다(1907). 신민회는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주로 교사와 학생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신민회는 비밀을 철저하게 유지하면서 조직을 운영했기 때문에 통감부의 눈을 피해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신민회는 활동 목표를 민족의 자주 독립을 확립할 수 있는 국민 역량을 기르는 데에 두었다. 특히, 민족 교육의 추진, 민족 산업의 육성, 민족 문화의 개발에 중점을 두어 추진하였다. 신민회는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를 설립하였고, 자기 회사와 태극 서관을 운영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민 계몽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한편, 신민회의 간부들은 민족의 독립 역량을 기르기 위해, 아직 통감부의 감시가 미치지 않은 만주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신민회는 조국의 독립 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을 만주 삼원보에 이주시켜 한인들의 집단 거주 지역을 만들었다. 신민회의 인사들은 이곳에 농장을 가꾸어 경제력을 기르는 한편, 신흥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에도 힘썼다. 또,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 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등 독립을 위한 힘을 기르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신민회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총독 암살 음모를 꾀하였다고 사건을 조작하여 민족 지도자 수백 명을 체포, 투옥하고, 그 중에서 105인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신흥 학교

신민회가 만주 삼원보에 세운 학교로서, 뒷날 신흥 무관 학교로 개편되어 수많은 독립군을 배출하였다.

[2] 근대 교육과 언론 활동이 민족 운동에 미친 영향은?[편집]

⋅ 우리 근대 교육의 특징과 보급 과정은 어떠하였나?

⋅ 언론 기관은 근대 민족 운동 과정에서 어떤 구실을 하였나?

근대 교육의 보급[편집]

근대 학교는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면서 민족 정신을 키워,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개화 운동이 진행되면서 정부에서 영어 강습 기관을 세우고, 함경도 덕원에서는 주민들이 원산 학사를 세우고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는데, 이는 우리 나라 근대 교육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후, 정부에서는 육영 공원을 세우고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세 사람을 초빙하여 주로 양반 자제들에게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한편,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배재 학당, 이화 학당, 정신 여학교, 경신 학교, 배화 학당 등을 세워 신학문과 서양 문화 및 영어 등을 가르쳤다.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교육 개혁도 이루어졌다. 외세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애국심을 기르면서 신학문과 신기술을 익혀야 했다. 그러므로 근대 교육의 실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정부는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소학교 등을 차례로 세워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에도 중학교와 각종 실업 학교들을 세웠다.

민족의 자주 독립과 민권의 확립을 이룩하는 데에는 교육이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교육을 통하여 민족 정신과 민족 의식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아졌으나, 정부에서 세운 학교만으로는 교육열을 충족시킬 수 없었으므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국민들이 스스로 기금을 모아 사립 학교들을 세웠다.

원산 학사

1883년에 덕원의 주민과 관리들이 뜻을 모아 세운 최초의 근대적 사립 학교였다.

읽기자료

⋅ 대성 학교 이야기 ⋅

1907년에 대성 학교 설립의 보도가 세상에 알려지자, 입학 지원자가 조수와 같이 밀려 순식간에 5, 6백 명의 청년이 모였다. 당시에 많은 학생들은 입학 시험을 거쳐 거의 전부가 예비반으로 편입되었다. 1학년은 50명이었으며, 교장으로는 윤치호를 추대하고 안창호는 스스로 대리 교장이 되었다.

…… 중학교 학생이라 하지마는 당시 대성 학교 학생들은 20세, 30세의 청년 유지들로, 입을 벌리면 나라를 걱정하였고, 행동은 모두 민족의 지도자를 자부하였다. 학교의 과정은 중등 학교라고 하지만, 그 정도가 높아 4학년 과정은 어느 전문학교의 3학년 과정과 대등하였으며, 학교의 설비도 중등 학교로서는 유례가 없을 만큼 잘 갖추었다. …… 이 학교는 ‘애국 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학교였으므로, 매일 아침 엄숙한 조회를 하여 ‘애국가’를 부른 후 ‘애국’에 관한 훈화가 있어 학생들은 이를 마음 속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체조 시간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 당시 체조 교사는 군대의 사관으로 뜻이 높던 철혈의 사람 정인목이었던바, 그는 군대식으로 학생들을 교련하였다. 눈이 쌓인 추운 겨울에 광야에서 체조를 시켰으며, 쇠를 녹이는 폭양 아래에서 전술 강화를 하였고 이따금 야간에 비상 소집령을 내려 함산 계곡에서 담력을 기르게 하였으며, 달빛이 비치는 얼어붙은 강에서 ‘장하도다. 우리 학도(군대 행진가)’를 부르며 행진을 하여 활기를 길러 주었다.

‘안도산 전서’

언론 활동[편집]

교육과 함께 근대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 신문이었다. 최초로 민간에서 간행한 신문은 독립 신문이었다(1896). 서재필이 한글과 영문으로 간행한 독립신문은 국민을 계몽하고 자주 정신을 일깨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나라의 소식을 전해 주는 일도 하였다.

독립신문에 이어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이 간행되었다. 황성신문은 한글과 한문을 섞어 간행하였으며, 애국적인 논설과 국민들의 애국 활동에 관한 소식을 많이 실어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을사조약이 발표되자, 황성신문은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장지연의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이 발행인으로 참여하고 있어서, 통감부의 극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논설을 실을 수 있었다. 특히, 의병 활동 등 민족 운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민족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한편, 제국신문은 주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간행되었는데, 한글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국민 계몽과 민족 정신의 고취를 위한 논설과 기사를 많이 실었다.

대한매일신보

일본은 영국과 동맹 관계였으므로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이었던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3] 국채 보상 운동은 왜 일어났는가?[편집]

⋅ 우리 나라는 왜 일본 정부에 많은 빚을 지게 되었나?

⋅ 국채 보상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왜 실패하였나?

경제 자립 운동[편집]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애국 계몽 운동이 교육, 언론, 등 문화 분야에서 전개되는 한편, 경제적 자립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개항 이후 외국의 경제 침투에 대항하여 민족 자본을 육성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 운수, 은행, 광산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인 경영 체제가 도입되었다.

특히, 대한제국은 적극적인 상공업 진흥 정책을 실시하여 새 기술을 도입하고 공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경제 발전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 자립은 어려웠다.

국채 보상 운동[편집]

일본은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도로와 수도 시설을 갖추고, 은행,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시설은 우리 나라에 와 있는 일본인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필요한 시설비는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차관을 얻어 부담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는 일본에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라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서상돈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시작되었다(1907).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이 운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경제의 자주성을 찾으려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으나, 통감부의 방해로 중지되고 말았다.

차관

정부나 기업 등이 외국 정부나 공적 기관으로부터 자금을 빌려 오는 일

읽기자료

⋅ 국채 1천3백만 원 보상 취지 ⋅

지금 국채가 1천3백만 원이 있으니, 이것은 우리 나라가 존재하고 망하는 것에 관계되는 일입니다.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형세상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현재 국고로 갚을 형편이 못 되니, 삼천리 강토는 장차 우리 나라의 것, 백성들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

2천만 민중이 3개월 기한으로 담배를 피우지 말고, 그 대금으로 1인당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거의 1천3백만 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원하여 1환, 10환, 100환, 1000환을 특별 출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 우리 2천만 동포 중에서 정말 털끝만큼의 애국 사상이라도 있는 자라면 반드시 두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여기서 감히 발기하여 취지를 알리고 피눈물로 호소합니다. ‘대한매일신보’

학습 정리[편집]

1. 내용의 요지

가. 애국 계몽 운동

⋅ 애국 계몽 운동은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나. 신민회

⋅ 신민회는 교육과 산업의 진흥, 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다. 근대 교육

⋅ 민족 지사들과 개신교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근대 지식을 보급하고 민족 의식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다.

라. 언론 활동

⋅ 독립신문은 한글로 간행된 최초의 신문으로 국민 계몽에 크게 공헌하였다.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마. 국채 보상 운동

⋅ 국채 보상 운동은 국민의 힘으로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경제 구국 운동이었다.

2. 주요 용어

애국 계몽 운동 | 신민회 | 배재 학당 | 황성신문 | 국채 보상 운동

안창호 | 이승훈 | 양기탁 | 남궁억

3. 탐구 활동

1. 신민회의 애국 지사들은 왜 의병장들처럼 일제에 총칼로 맞서 싸우지 않고 민족의 힘을 기르는 데에 더 큰 역점을 두었는가?

단원 종합 수행 과제[편집]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일어서자!

1. 주제

구국 방안 글 쓰기

2. 목표

구국 운동에 나섰던 여러 민족 운동 세력의 움직임 알아보기

3. 내용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개되었던 우리 민족의 구국 운동을 이해하고, 그 운동을 추진했던 당시 사람들의 처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 본다. 이를 통해서 당시 우리 민족의 주권 수호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생생하게 파악한다.

4. 유의 사항

이 과제는 당시 애국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원에서 배운 내용을 상기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를 먼저 파악한다. 그런 다음, 자기가 가장 공감하는 활동을 전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개혁안을 제시한다. 자기의 주장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한다.

[1]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다음에서 선택한다.

⋅ 독립 협회의 활동에 가담한 사람

⋅ 대한제국에서 개혁을 추진한 관리

⋅ 의병 활동에 나선 의병장

⋅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던 교육자

⋅ 단체를 조직하여 계몽 활동에 나선 지식인

⋅ 농촌에서 일상 생활에 종사하던 농민

[2] 자기가 서 있는 상황에 대해서 서술한다.(그 때 있었던 사건과 연결시켜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3] 자기의 주장을 제시한다.

[4]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기의 입장을 밝힌다.

2. 애국 지사들이 사립 학교를 많이 세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3. 우리 민족이 국채 보상 운동을 전개하여 일본에 진 빚을 갚으려 했을 때, 일제는 왜 이를 방해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