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새는 안개/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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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정애(晶愛)는 <신여자(新女子)>란 잡지를 보다가 또다시 미닫이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시름없이 오는 비는 오히려 아니 그치었다. 하늘을 회칠한 듯하던 구름이 히실히실 헤어져서 저리로 저리로 달아나건만는 그래도 푸른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머리올 같은 가랑비가 연기나 안개 모양으로 공중에 가물거리고 있었다.

오늘이 공일이라, 모처럼 동물원 구경을 가자고 동무들과 튼튼히 맞추어둔 것이 원수의 비로 말미암아 하릴없어 수포(水泡)에 돌아가고 말았다. 비가 오거든 펑펑 쏟아지거나 하였으면 단념이나 하련마는 시들지 않은 가는 빗발이 부슬부슬 뿌리기만 하기 때문에, 그는 조금만 있으면 개려니, 얼마 안되어 그치려니, 하는 일루(一縷)의 희망을 품고 미닫이가 닳도록 열어보고 또 열어보았음이었다.

정애의 얼굴에는 그늘이 지며, 혼잣말로 울 듯이,

(그저 비가 오네! 참 속상해 죽겠구먼!)

하고 미닫이를 홱 닫고는 다시금 아까 보던 잡지를 들추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볼꼬? 이것을 볼까? 그런데 이것이 몇 페이지나 되노?) 하고 손으로 책장을 날리며 (한 장 두 장 석 장…… 모다 석 장이구먼, 이것만 다 보고 나면 혈마 비가 그치겠지) 무릎 밑에 깔린 치맛자락을 빼내기도 하고, 눈을 가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기도 하며, 턱 괸 한 팔을 무릎 위에 얹고는 맥맥히 보기 시작하였다.

(벌써 끝일세. 인제는 비가 아니 올거야.)

기쁜 빛이 살짝 얼굴에 퍼지며, 또 손이 미닫이로 가려다 말고 걱정스럽게

(아직도 아니 그쳤으면 어쩌나?)

라고 입안말로 소곤거리었다.

누가 그에게, 여기서 예까지 보기만 하면 비가 아니오리라고 언약한 것도 아니요, 내기한 것도 아니언만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스스로 그러려니 기대하며, 그 정(定)한 페이지를 읽고 날 적마다 인제는 비가 개었거니 하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 것처럼 기뻐하면서 미닫이를 열었다가 그저 비가 오는 것을 보면 누가 그를 속인 것처럼 애닯고 슬펐었다. 이러구러 한 번 속고 두 번 속아 내려옴에, 점점 자기의 결정과 기대에 대한 믿음이 엷어가서, 인제는 미닫이를 열기 전부터 미리 근심조차 하게 되었다.

그의 귀에는 가만가만히 내려지는 빗소리가 그윽히 울리는 듯하였다.

(그래도 혈마 이때껏 올라구.)

그는 문틈으로 눈을 주며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는 벌써 개지 않았을까? 구름조차 벗겨지지 않았을까? 화라(花羅)와 영숙(永淑)이가 나를 더리러 오지 않는가?…….고만 밖을 내다볼까? 아니 그럴 것이 아니다. 비가 오고 아니 오는 것을 통히 잊어버리고 있는 게 상책이다. 무망중에 화라와 영숙이가 쑥 달겨들면 얼마나 기쁠까?)

그는 이렇게 고쳐 생각하고, 또다시 잡지를 집어들다가 오늘 아침에 비오는 것이 하도 속이 상해서 갈아입으려던 옷도 아니 갈아입고 닦아두려던 구두도 아니 닦아 둔 것이 문득 마음에 걸리었다. 그리고 화라와 영숙이가 와서 남이 옷도 못 갈아입고 구두도 못 갈아 신게 재촉을 하면 어찌 할꼬 하였다. 입으려면 지금 입어야 되고 닦으려면 지금 닦아야 되리라. 날이 들고 아니 든 것을 시방 당장 알아두어야 되리라……

정애는 불현 듯 미닫이를 열어보았다. 비는 아니 온다. 회색 장막을 드리울 듯이 음침하던 공기 가운데 밝은 빛에, 해의 그림자조차 하야스름하게 드러나 있었다.

정애는 놀란 듯이 몸을 일으켰다. 기쁨으로 하여 춤추는 듯한 그의 발길은 선뜻 마루를 내려섰다. 마당 여기저기를 자근자근 밟아보았다. 땅은 그리 질지 아니하였다. 시방이라도 구경을 가려면 못갈 것이 아니다.

그는 부랴부랴 구두를 닦기 시작하였다. 구두를 닦기전에 화라와 영숙이가 올까 보아 조바심을 하면서 문소리가 날 적마다 연해 연방 돌아보았다. 그러나 구두를 다 닦을 때까지 동무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는 닦은 구두를 신고서, 또한번 마당을 밟아본 뒤에 다시 한길을 시험해보려고 막 중문(中門)을 나서려 할즈음이었다.

"편지 받으오"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체전부가 편지 한 장을 떨어뜨리었다.

2[편집]

정애는 슬쩍 그 편지를 집어들어 겉봉을 보았다.

「시내 익선동 一九, 이은우(李殷雨)씨 방 이정애 씨 앞」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것 보아, 누가 나한테 편지를 하얐네.)

그는 저도 모를 사이에 이렇게 중얼거리고, 얼른 뒤쪽을 보았다.

「안국동 김영숙으로부터」

(이애가 웬 편지를 하였을꼬? 비가 그쳤는데 오지를 않고…… 아마도 저도 나 모양으로 오늘 아침, 비 오는 것이 속이 상해서 화풀이로 편지를 하였나 보다.) 마음 속으로 소곤거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급히 겉봉을 떼어보았다.

정애씨! 용서하야 주시오.

그 편지의 첫머리는 이러하였다. 가는 웃음이 그의 입술에 흘렀다.

만나면 서로 네니 내니 하면서 편지에다가는 정애씨!라고 끌어올린 것이 우스웠음이다.

이런 편지를 드리는 것은 정애씨의 신성(神聖)을 더럽힘이요, 예절에 틀린 줄 모르는 바 아니외다. 몇 번이나 쓰다말고 부치려다 말았는지요! 그러나 인제는 참을 수 없습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정애의 눈은 호동그래지고 말았다.

(이애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애씨!

보시고 정애씨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뜯어버리시든지 살라버리시든지 뜻대로 하기는 하십시오! 그래도 읽기는 다 읽어주셔야 합니다. 보기는 다 보아주셔야 합니다.

정애씨!

무엇으로 나의 가슴을 형용하며 무엇으로 나의 마음을 비유할는지요! 천 갈래로 흩어진 머리카락 같다 할까, 만 가닥으로 엉클어진 실끝 같다 할까? 이 불완전한 우리 인간의 발명한 글로와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도 없고, 비유할 수도 없습니다.

정애는 그린 듯한 눈썹을 보일 듯 말 듯 찡그리며, (이애가 왜 구슬픈 소리만 하나?……. 그애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하고 다시 그 밑을 보았다.

정애씨!

나는 외롭습니다. 나는 쓸쓸합니다. 바다는 바다를 이었는데 외로이 떠나가는 편주(扁舟)와 같습니다. 사막에서 사막으로 쓸쓸히 걸어가는 행려(行旅)와 같습니다.

정애씨!

나를 외로운 데서 건져주소서, 쓸쓸한 데서 구해주소서!

세상도 넓고 사람도 많지마는 정애씨만 아니면 나는 영원히 외롭고 쓸쓸할 것이외다.

정애씨의 사랑이라야 가을바람이 소슬(蕭?)한, 싸늘한 이 가슴에도 따스한 봄 입김이 들 것이외다. 줄여 말하면, 나는 정애씨를 사랑하노니, …… 열렬히 사랑하노니 정애씨도 나를 사랑하야 달란 말이외다. 그러나 나는 전적으로 정애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외다. 정애씨와 같이 그림자처럼 서로 따르고 거울처럼 마조앉기를 바라야 바랄 수 없는 사람이외다.

봄날 따뜻한 꽃 그림자 밑에 자리를 쓸어안고 가을바람 선선한 달빛 아래 옷깃을 날리면서 꿀 같은 장래의 낙원을 그림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복된 일일까요?

그러나 그보담도 내 마음은 정애씨의 마음에 있고 정애씨의 마음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아니하야 기쁨도 노누고 슬픔도 노눈다고 하면 그뿐일 것이외다.

멀리멀리 서로 떠나 있어, 산 막히고 문 가린 저 편에 있는 정애씨를 생각하고 애닮은 눈물을 흘리다가도 「정애도 지금 너를 생각하고 있나니라」하는 정애씨의 마음소리를 들을 것 같으면 나는 눈물이 걷히기 전에 기쁜 웃음을 웃을 것이외다.

정애는 단숨에 예까지 보고 나서 두 손이 힘없이 그 편지를 무릎 위에 놓으며 한참 황황(恍惶)하였다.

꽃 그림자 밑에 앉은 자기의 모양, 달 아래 선 자기의 모양이 선하게 나타나다가, 서로 외로이 서서 저편 사람을 생각하고 눈물을 짓는 광경이 보이며, 그 거슴츠레한 눈에 스르르 눈물이 괴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였다. 홱 하고 밑창이 열리며 정애의 동무 화라가 들어온다.

3[편집]

살이 삐죽삐죽 내다보일이만큼 팽팽히 양말(洋襪)을 잡아당긴 종아리가 가볍게 문지방을 넘어선다. 솜씨있게 화장한 얼굴엔 흔적 없는 분길이 보얗게 퍼졌고, 삼분의 일로 멋부려 가른 머리엔 윤이 지르르 흐르면서도 힘없이 풀린 두어 올이 뺨 위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정애는 놀란 듯이 몸을 흠칫하며 두 손으로 얼른 그 편지를 움켜쥐었다.

"들어앉아서는 무엇을 하니? 동물원 구경을 아니 갈 터이냐? 땅이 아주 말렀더라."

화라는 앉지도 아니하고 서서, 이런 말을 하다가 정애가 한 발이 넘을 듯한 편지를 움켜쥐고 있는 양을 보고,

"그것은 무엇이냐? 누구한테서 온 편지길래 그야말로 만지장서이냐?"

정애는 고개를 숙이며 몹시 말하기 어려운 듯이

"아니 저어……"

어물어물하고는 귀밑까지 새빨갛게 당홍물이 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영숙이한테서 온 것인 줄 알고 읽었다가 그 사연에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까지 흘릴 뻔하였으나 다만 그 말이 이상하다 할 뿐이요, 그 경우가 가엾다 할 뿐이요, 영숙 아닌 다른 사람의 편지인 줄은 짐잠하지 못하였다. 짐작하지 못하였다느니보다 의심할 어느 겨를이 없었다. 함이 적당할지 모르리라.

그러나, 이제 와서는 직각적(直覺的)으로 영숙의 편지가 아닌 줄도 알았고 또 자기와 같은 여성의 편지가 아니라 어떤 남성의 편지인 줄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하였다.

화라는 몸을 구부려 「너의 하는 양이 괴이쩍구나」하는 듯이 정애의 얼굴을 뚫어지라고 들여다보았다.

불이 붙은 듯한 두 뺨에는 후끈후끈 단김이 나는 듯하고 내리감은 긴 속눈썹엔 젖은 듯 한 듯한 눈물 빛이 은가루같이 번쩍이고 있다.

정애는 화라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를 쓰며,

"이 애가 왜 남의 얼굴을 이렇게 들여다보아!"

라고 안타까운 소리를 떨었다.

화라는 의심을 더럭 내었다.

"울기는 왜 울었니? 대관절 무슨 편지길래 그렇게 숨기려 드느냐?"

이럴 즈음에 그는 정애의 곁에 놓인 편지를 손싸게 집어들었다.

"나는 누가 한 편지라고, 영숙의 편지로구나…… 그 속에 무슨 말이 있건대 나를 아니 보이려 든단 말이냐? 내가 알면 아니될 비밀이 무에냐?"

"비밀이 무슨 비밀이냐, 아모 말도 없어……"

"아모 말도 없으면 왜 아니 보이려고 한담!"

정애는 덤덤히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를 따돌리고 너희들 둘이만 소곤소곤하던 게 인제 아니 무슨 까닭이 있었구나."

하고 화라는 그 눈초리가 길게 찢어진 실눈을 샐쑥하게 깔아메치었다.

"내가 언제 너를 따돌리고 영숙이와 소곤거리던? 남의 애매한 말도 퍽도 한다"

정애는 말이 딴 길로 나간 것을 마음 그윽히 기뻐하면서 매우 분한 듯이 채쳐 물었다.

"왜 저어 그날-- 영숙의 집에 놀러 갔던 날, 너희 둘이만 무엇 사러 나가지 아니하얐니?"

"원참, 그때 자꾸 같이 가지니깐 저 혼자 책을 보고 있겠다 하구서!"

"그 말은 그만하고 편지나 좀 보여주렴!"

하다가 겉봉의 글씨를 자세히 보더니

"이것은 영숙의 글씨가 아니야! 그애가 웬걸 이렇게 쓸 줄 아나. 이것은 여필이 아니고 남필이야!"

라고 무슨 큰발견이나 한 듯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한동안 그는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멍멍히서 있었다. 그 찰나에 그의 얼굴은 오리알빛같이 해쓱해지고 말았다. 그럴 동시에 정애를 노려보는 시선은 칼날같이 날카로왔다.

"흥, 그래서 아니 보여주랴고 했구나. 그래도 기어기 좀 보고는 말걸!"

하고는 자기를, 또는 남을 빈정대듯이 쓸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속엔 허전허전하는 절망의 울림과 가슴을 짜내는 애닯은 웃음가락이 품기어 있었다.

정애의 곁으로 바싹 다가들며 우격으로 그 편지를 빼앗으려 하였다.

4[편집]

화라가 달려드는 양을 보고 정애의 눈에는 마치 첫날밤에 신랑의 달겨듬을 바라보고 신부의 그것 모양으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섞이어 돌고 있었다.

"남의 편지를 왜 자꾸 보자니?"

정애는 뒤로 쏠리며 들어오는 화라의 손을 밀치었다.

"안 보이겠다는 것을 빼앗기까지 하렬 것은 무에야!"

그 목소리는 벌써 울음을 띠고 있었다.

그래도 화라의 한 손은 힘있게 그 편지 한 머리를 잡았다. 정애는 한 손으로 그 편지를 단단히 움켜쥐고 또 한 손으로는 편지 잡은 화라의 손을 밀어내려 들었다.

바람에 취둘리는 백합화 모양으로 네 송이 보오얀 손은 이리 번뜻, 저리 번뜻 서로 부딪쳤다 서로 떨어졌다 하였다. 그럴 사이에 화라의 한 손이 영악스럽게 그 말썽부리는 종이쪽을 훔쳐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이 정애의 편지 잡은 손을 비틀어돌리기 시작하였다. 엉긴 우유처럼 보얗던 살에 연지빛이 스미며 가늘게 떨고 있다.

"아이구 아퍼! 이 애가 왜 이래!"

정애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그러기에 편지를 좀 놓으란 말이야."

화라는 숨찬 소리로 부르짖었다.

두 처녀는 피차에 숨소리를 씨근벌떡거리고 있었다. 다 같이 상기된 새빨간 뺨들엔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올올이 검은 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주 닿은 두 대가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흔들 춤추듯 하였다.

처음부터 승패는 기정적(旣定的) 사실이었다. 화라는 열아홉 살로 정애보다 이태 맏이었고 또 힘도 세었다.

화라에게 잡힌 정애의 손목은 붉다 못하여 자주빛을 띠어오더니, 마침내 그 손아귀가 맥없이 풀어지고 말았다. 어느 곁에 화라는 그 편지지를 빼앗아들었다.

그 약탈물은 배배 꼬이어 짓비벼 놓은 듯하였다. 화라는 버럭 몸을 일으켜 저리로 가며 개가(凱歌) 대신 씩 웃었다.

"나 좀 보고 주께."

하고는 구긴 것을 살살 펴가며 읽어보려 하였다.

실랑이에 더할 수 없이 지친 정애는 그만 그 자리에 늘어질 것 같았으나 화라의 편지를 펴보려는 꼴을 볼 제 없던 기운이 온몸에 넘치는 듯하였다. 그는 나의 보배를 남에게 빼앗긴 것처럼 분하고 아깝고 애닯아 견딜 수가 없었음이다.

나는 듯이 몸을 소스라칠 겨를도 없이 화라를 뒤로 안으며 잃은 물건을 도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늦었다.

화라는 정애의 일어남을 보고 벌써 어느 곁에 그 약탈물을 몸속 깊이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쉬웁게--------"

하고 화라는 돌아서서 정애를 떠다밀며 어림도 없다는 듯이 빙긋 웃었다.

"이리 주어! 왜!"

정애의 눈에는 핏발이 돌았다.

"주기는 무엇을 주어! 보지도 않고 준단 말이야!"

하고 한 마디 던지고는 빼쳐 밑창을 열고 달아나려 하였다. 정애는 간신히 도주자(逃走者)의 치마 뒤폭을 쓸어잡았다.

"이건 왜 이래! 놓아요, 치마 터지겠다!"

도망꾼이 고개를 돌이켜서 이런 말을 하며 추격자에게 붙들린 치맛자락의 어금을 잡아 휙 뿌리치었다. 손에 잡힌 것이 슬쩍 빠져나가자 정애는 허탕을 치고 기운 없이 쓰러져버렸다.

화라는 나는 몰라, 하는 듯이 밑창을 확 닫치고 번개같이 마루를 내려선 그는 구두 신기가 바쁘게 끈도 맨체만체 무슨 사나운 짐승한테나 쫓겨가는 사람 모양으로 촉급(促急)한 발길을 문간을 향하고 옮기었다.

한편으로, 정애는 밑창이 탁 닫히매 그 엷은 종이와 가는 칸살로 된 것이언만, 그에게는 강철이나 반석(盤石)으로 만든 성문(城門) 모양으로 제 힘 가지고는 열어도 볼 수 없고 밀어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어느 때까지 멍멍하게 쓰러진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문득 가슴이 찌르르해 오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무엇인지 슬픈 듯하였다. 무엇인지 원통한 듯하였다. 무엇인지 궁금한 듯하였다. 흰 물이 돌고 또 도는 그의 눈에는 아까 본 그 편지의 첫머리가 너붓너붓하게 보이는 듯하였다.

5[편집]

그 이튿날 학교에서 정애는 화라를 보았다. 보기는 보았으되 그 편지 말을 묻지도 아니하였다. 자기가 묻기는새려 화라가 그 편지 말을 끄집어낼까 보아 그의 곁에도 아니 가고 비슬비슬 피하였다.

정애에게 대한 화라의 태도도 일변하였다. 정애를 보기만 하면 손목도 쥐고 어깨도 누르며 할 말 못할 말 아니하는 것이 없던 그가 오늘은 웬일인지 정애를 힐끗 한번 보고는 고개를 다소곳하고 인사도 아니하였다. 그의 태도는 평일과 아주 딴판이었다. 하학 시간이면 온 학교 안을 울리던 그의 쾌활한 웃음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상학중이든 하학중이든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우두커니 책상머리에 눌러앉아 있었다. 가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은 어푸수수하게 이마에 흐늘거리고 언제든지 봄빛이 무르녹은 듯하던 두 뺨은 새하얗게 혈색이 없었다. 두 관자놀이에는 파릇파릇하게 힘줄이 뛰놀고 있었다.

"이애, 오늘은 웬일이냐! 아주 어른이 다 되어버렸으니……"

하고 동무 하나가 그의 어깨를 누르며 웃을 적에 화라는 괴로운 듯한 얼굴로,

"이애가 왜 이래. 남 귀찮아 죽겠는데."

하고 그 손을 밀어내리었다.

"여보 하이칼라 씨, 오늘은 왜 화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동무 하나가 웃는다.

"유난스럽게 화장을 잘하더니 구라브 백분(白粉)이 동이 난 게지."

다른 동무 하나가 곁에서 말보탬을 하였다.

"아모리 한들 동이야 날라구, 좀 잠이 과하셨든 게지."

또 동무 하나가 조롱을 하였다.

"듣기 싫다! 저리들 가주어. 골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견딜 수가 없다."

하고 화라는 소태나 먹은 듯이 온 상판을 찡그려 부쳤다.

"그러길래 내가 공부를 너무 맙시사고 한두 번 일르지 않았지요."

또 다른 동무가 이렇게 말을 뒤받고 스스로 재치있는 제 말을 기뻐하는 듯이 땍때글 웃었다. 여러 동무도 한번에 웃었다.

"왜들 까짜를 올려!"

화라는 참지 못하여 성을 버럭 내었다.

"성냈다 빗냈다 호박국 끓여라, 하하하……"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라는 세숫물을 떠오라 하였다. 팔뚝을 부르걷고 옷깃을 뒤로 훨씬 젖히고 저고리 고름을 허붓이 풀어 안가슴까지 드러내고는 세수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분으로 씻고 그 다음에는 비누로 씻고 또 그다음에는 분으로 씻었다.

한 시간도 넘도록 늘어지게 물로 얼굴을 대패질하고 방에 돌아온 그는 일본제 경대(鏡臺)의 큼직한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에 비춰가며 희기 백설과 같고 길이 두 발을 넘을 듯한 양수건(洋手巾)을 휘몰아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요모조모를 맵자하게 닦기를 말지 않았다.

늠실늠실 떠나가는 흰구름 사이에 드러났다 숨었다 하는 달 모양으로 그의 얼굴도 거울 하늘에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두어 군데 발긋발긋이 솟은 여드름을 애써 짜내고는 화장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앞에 옹긋쫑긋이 늘어놓인 긴 병 짧은 병 푸른 갑(匣) 흰 갑이 차례차례로 들먹거려지며 한동안 열 손가락이 북같이 얼굴 위로 쏘대었다. 머리를 옆으로 비스듬히 가르고는 일부러 몇 올의 머리칼을 풀리게 하여 귀밑에 남실거리게 하였다. 이러기에 넉넉히 두 시간은 걸렸으리라.

그리고 나서 보얀 숙고사 깨끼저고리와 은옥색(銀玉色) 생수치마를 내어 입었다. 양말은 아니 찢어질이만큼 팽팽이 잡아당기었다.

단장을 마친 그는 거울 속의 제 모양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만족과 기쁨으로 그의 눈자위는 번쩍이었다. 저 스스로도 몰라볼이만큼 어여뻐진 까닭이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그의 시각의 광채는 사라지기 비롯하였다. 흐리멍덩하게 치뜬 그의 눈에는 안타까운 슬픔의 그림자가 그물그물이 졸고 있었다. 이때껏 낼 대로 낸 몸꼴의 속절없음을 생각하매 그의 가슴은 어두웠다.

이렇게 자기의 미화시키기에 갖은 정신을 다 들임에는 무슨 목적이 없지 못할 것이다. 있어야 할 이 목적이 극히 하잘 것 없고 보잘 것 없음을 깨달으매 그의 심장은 난도질치는 듯이 아니 쓰릴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쓰리고 따가운 눈물이 어른어른히 스미고 있었다.

(내가 미쳤나, 울기는 왜 울어) 하고, 손으로 눈을 씻었다.

(네가 미쳤니? 그게 무슨 꼴사나운 눈물이야!)

거울 속의 자기를 손가락질하면서 정말 미친 듯이 때글때글 웃었다.

(가만 있어, 어느 표정이 너한테 제일 어울리나 어데 보자!) 하고 해죽이 웃어도 보고 양미간을 살짝 찡겨도 보았다. 입술을 단정하게 꼭 다물어도 보고 애교있게 방긋이 열어도 보았다. 그리다가 또 한번 미친 듯이 소리쳐 웃었다.

이 모양으로 얼마를 거울과 수작을 하고 있다가 팔뚝시계를 보고 놀란 듯이 몸을 일으키며

(에그, 벌써 여섯점 반일세. 갈때가 되었군!) 하고는 치마를 치키기도 하고 분지(粉紙)로 얼굴을 닦기도 하며 옷고름을 다시 매기도 한 뒤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밤길은 남산공원으로 향하였다.

6[편집]

화라가 남산공원 마루턱에 올라 발을 멈추고, 잠깐 숨을 돌릴 적에는 어느덧 붉은 놀도 잿빛으로 사라지려 할 임물이었다.

저녁 그림자는 짙푸른 연기를 뿜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들기 시작하였다. 이 연기에 싸이어 하늘이나 땅이나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나 낱낱이 제 빛깔을 잃어버리고 흐리멍덩하게 조는 듯하였다. 어느 곁엔지 시가(市街)를 점(點)친 전등불도 광휘(光輝)가 빛나지 않아 슬픔에 젖은 눈동자 모양으로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지는 해의 밝은 빛이 아직 다 걷히지 아니하고 어두운 밤이 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을 때 흔히 있는 광경이었다.

(그이가 나 먼저 왔으면 어데서 나 오는 것을 볼는지 몰라----)

화라는 찬 숨을 씨근거리며 두리번두리번 이리저리를 살펴보았다.

저녁밥때가 된 까닭인가,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축축히 젖은 실바람이 풀냄새를 날리며 화라의 후끈거리는 뺨과 목을 산산하게 핥을 뿐이었다.

화라는 살 듯이 깊은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직 아니 온 모양이야, 시방 몇 점이나 되었을까!)

하고 시계를 보며

(일곱점밖에 아니 되었네. 여덟시라 하였으니 인제도 반시나 남았구먼>)

속으로 속살거리고 이 편 언덕 소나무 숲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멀리는 조밀한 듯싶은 숲이 다다라보면 뜻밖에 나무가 엉성하여 자기가 환하게 드러날 것도 같고 그렇다고 아늑한 자리를 찾아들어가자니 올라오는 사람을 알아보기가 어려울 듯도 하여, 이도 저도 아닌, 적호(適好)한 자리를 찾기까지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면 그의 꼴을 볼 수 있다. 오지도 않은 애인을 헛되이 찾으면서 애간장을 태우는 그의 꼴을 볼 수 있다……)

포근포근히 잔디 깔린 경사면에 미끄러진 듯이 몸을 뉘고는, 불쑥 솟은 언덕 위 차양치듯 늘어선 소나무둥치틈으로 눈을 내놓으며 화라는 스스로 중얼거렸다. 그 눈에는 잔인한 기쁨이 번쩍이고 있었다.

어두운 빛이 점점 진해 갈수록 전등은 반짝반짝 부신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집도 흐렸고 길도 흐렸고 모든 것이 흐려진 가운데 점점이 빛나는 전등은 수많은 별들이 낮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저 먼 산밑에 두 셋 외딸리 띄엄띄엄 떠 있는 것은 별인지 불인지 분간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이가 그것을 보고 시방 엎어지며 자빠지며 안달박달 달아오렷다……)

화라는 호젓하게 사람 기척 없는 그곳 일판을 연해연방 보살피면서 빙글 웃었다.

(인형이나 무엇같이 그이는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 사람에게 끄을리는 소처럼 내 명령대로 꾸벅꾸벅 걸어오고 있는 중이다.)

이런 짐작을 하니 화라는 가슴이 찌르르하도록 기뻣었다. 그러나 그 찌르르한 맛은 안슬픈 눈물이 북받칠 때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저는 시방 기쁨을 걷잡다 못하여 걷는 발이 춤을 추렷다. 저 말마따나 가슴에 봄 입김이 들어찼을걸. 흥! 그래도 오기만 와보아! 봄 입김을 불어넣을 사람이 있나없나. 그 실심낙담(失心落膽)하는 꼬락서니를 내가 알뜰살뜰히 구경을 할걸!…… 이 공원을 메매여 찾으렷다. 아따 삼산굽이를 헤매며 찾으라지. 밤새도록이라도 찾아보라지. 누가 말리나, 하하하…….)

화라는 자지러지듯이 또 한번 웃었다. 그 웃음이 악 홍소(哄笑) 모양으로 훼덩그렇게 빈 산머리 솔밭에 무시무시하게 울리었다.

화라는 찬물을 끼얹힌 듯이 으쓱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두려운 듯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솟은 때 모르는 둥근 달이 출기청정(??)의 나래 같은 흰구름 자락을 고이고이 뒤로 밀며 이리저리로 미끄러져 나온다. 그 광선의 희고 맑은 물결이 슬쩍 이편 일폭(一幅)을 적시었다. 나뭇잎에는 푸른빛이 새로웠다.

허연 땅바닥 위에는 선지(宣紙)에 흑공화(黑工畵)를 친 듯이 검은 나무 그림자가 가로누웠다. 그 물결이 스르르 밀리어 저리로 퍼지며 푸른 내에 잠긴 서울 시가를 꿈속같이 떠보이게 하였다.

이 아름다운 경치에 화라는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하고 있었다.

7[편집]

망연(茫然)한 가운데 망연한 의식이 돌아오며 이 밤의 경(景)을 호올로 보기가 아깝다 하였다.

정다운 애인과 짝지어 볼 것이라 하였다. 고운 임의 어깨에 정열에 타는 어깨를 엇비슷이 뉘고 꿀 같은 사랑을 속살거리며 상(賞)줄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나의 애인은?…………)

화라의 가슴은 메어지는 듯하였다. 자기의 의중인(意中人)이 자기 아닌 남을 의중에 둔 것을 생각하매, 그는 쓸쓸한 가을 들에 외로이 서 있는 듯한 낙막(落寞)을 느끼었다.

달빛은 은가루같이 나뭇가지에 번쩍이고 있었다.

(그가 오기는 올 것이다. 나 있는 이곳에 오기는 올 것이다. 그와 나와 한갓같이 아름다운 이 경치를 대하기는 대할 것이다.)

이런 의식이 그의 온몸 온마음을 짜릿짜릿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제 목전(目前)에 닥쳐오는 이 행복---- 그렇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성, 그이야 누구에게로 마음이 쏠렸든 그 이성(異姓)과 한 자리에 이 경(景)을 감상할 수 있음은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랴----을 차마 모르는 체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희생할지언정 이 행복만은 그대로 내버릴 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훌쩍거리는 저 자신을 환상(幻想)하였다.

(....옳다, 그러나 그가 오거든 다짜고짜로 그의 가슴에 이 몸을 던지리라. 던지고는 울리나, 울면서 말하리라, 오늘날까지 내가 그를 얼마나 생각한 것을, 남모르게 얼마나 이 속을 태운 것을 눈물 섰어 하소연하리라. 그러면 그도 응당 느끼리라, 느끼어 사랑하리라. 이번 이 일도 뜨거운 정열에서 우러나온 줄 알아주리라. 그리고 신성한 연애가 성립되리라. 화락(和樂)한 가정을 이루리라.)

이런 몽상(夢想)의 흐름에 봄눈 슬 듯 몸도 녹고 마음도 사라질 즈음이었다.

무엇인지 자기 옆을 툭하며 스쳐 나간다. 화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옆으로 젊은 사람 둘이 지나간다.

"사람을 왜 떠다밀어!"

청년 하나가 웃는다.

"무얼 좋아서……"

하고 딴 청년 하나의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화라는 몸을 소스라쳤다. 올라온 때 모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드문드문하였다.

(벌써 그이도 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번쩍이며 머리가 휑하고 내둘리는 듯하였다.

핑핑 돌리는 화라의 시선에는 모두 그이 같기도 하고 모두 그이 아닌 듯도 하였다. 어느 것이 그이인 줄은 아무리 달빛이 밝다 한들 분명히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앞앞이 찾아가서 자세히 보아야만 분명히 알겠거든 비록 평일에 당돌하다는 평을 듣는 화라로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고양기가 쥐를 엿보듯 시력이 자라는 대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물색할 뿐이었다. 혼자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모두 둘 아니면 셋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이는 혼자 올 터인데…… 웬일인가? 아직도 아니왔나?) 하고 화라는 산보객이 오르내리는 길목을 지키기로 하였다.

비슬비슬 사람 없는 데로 돌아서 길목의 한편에 서 있는 소나무 뒤에 몸을 감추었다.

얼마 아니되어 밑에서 사람 하나가 올라온다. 옷 입은 것이든지 걸음 걷는 것이든지 하릴없는 그이였다.

(저기 오는구면!)

화라는 하도 반가와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그래도 억지로 그 충동을 참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시력을 그곳으로만 모으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한 걸음 두 걸음 다가들었다. 화라는 온몽의 피가 파득파득 뛰노는 듯하였다. 앞을 지나간다. 아니었다! 그이가 아니었다. 화라의 기다리는 그이가 아니었다. 딴사람이었다.

화라는 더할 수 없이 실망하였다. 이 모양으로 그는 한두 번 속지 아니하였다. 팔뚝시계는 열점을 가리키건마는 기다리는 그이는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달 실은 나뭇잎을 휘날리는 밤바람이 외로운 앙가슴을 싸늘하게 헤칠 뿐이었다.

8[편집]

그날 밤에 정애도 어찌 잠이 깨었다. 방 안이 밝고 미닫이가 허여스름하길래 동녘이 벌써 트는 줄 여겼더니 알고보니 그것은 달 그림자가 어슴푸레하게 깃들인 것이었다.

달을 좋아하는 정애는 이불자락을 고이 밀치고 일어나 미닫이를 열었다.

밤 공기가 선뜩하게 얼굴에 끼치며, 한 줄기 희미한 광선이 소리없이 이불 위에 가로누웠다.

달은 시방 구름 속에 잠겨있다. 구름은 이곳저곳에 멍울멍울 떠 있는데 어떤 것은 희며 어떤 것은 연회색(軟灰色)이다. 그 구름장들의 한복판은 두터워도 양 가장자리는 실실이 풀리어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는 듯하였다. 그리고 구름과구름의 벌어진 틈에 맑은 하늘이 파릇파릇 엿보이며 한 개 두 개 조그마한 별들이 졸음 오는 듯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달은 이 구름에서 저 구름으로 저 구름에서 이 구름으로 바쁜 듯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 흰 몸이 부딪치는 곳마다 구름이 스르르 헤어지기는 하건마는 그래도 구름장이 두터울 때는 밝은 얼굴이 온전히 까므러지는 때도 없지 않았다 이럴 땐 온 천지가 애인을 잃은 듯이 눈물에 어리는 것 같고, 그 장애물을 벗어나 흰 얼굴을 뚜렷이 드러내면 온 천지는 잃었던 애인을 찾은 것같이 기쁨에 떠는 것 같았다.

모은 음향과 모든 동작이 고요하게 잠들고 공기조차 아무런 파동이 없었다.

다만 월색(月色)의 명암을 따라 희었다. 검었다 할 뿐이었다.

(에그 저를 어째. 달이 또 저 구름 속으로 들어가네!)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갈 적마다, 달이 구름에 가리우듯이 정애의 얼굴에도 구름이 끼며 안타까운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다가, 달이 그 구름 속에서 헤어나오면

(인제 나왔다, 인제 나왔다!) 하고 정애의 얼굴 구름도 걷히며 어린애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그러다 사람 볼 겨를도 없이 구름은 연기같이 저편 하늘 가로 몰려버리고 향수로 씻어놓은 듯한 새맑은 창공에 오직 둥그렇게 걸린 달이 옥(玉)가루같이 밝은 빛을 흩날리고 있었다.

정애의 가슴도 갑자기 환하여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달빛을 들이마실 듯이 가슴껏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가스에도 달빛이 수루룩 흘러들어가는 듯하였다. 그리고 이 달빛을 멍에하고 무어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행복이 술렁술렁 날아오는 듯하였다.

정애 자신이 그 술렁거리는 달빛에 실려 공중으로 둥실둥실 떠올라가는 듯도 하였다.

문득 정애는 신성한 연애를 생각해보았다.

신성한 연애!

글자부터 향기롭고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었다. 어째서 연애가 신성한지 무엇으로 신성한 연애인지 정애는 모른다.

아니, 생각도 않았다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신성한 연애는 신성한 연애로 그뿐이 아닌가. 거기 설명을 붙이고 장단(長短)을 캐는 것부터 벌써 틀린 수작이다. 다만 이것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고 행복이 있을뿐이라 한다. 반대로 이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언제든지 슬퍼하고 불행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한다.

우리가 오늘날 말 못되게 된 것도 이 신성한 연애가 없는 까닭이라 한다. 그러므로 신시대(新時代)의 사람들은 이 신성한 연애를 하여야 될 줄 안다.

물론 자기와 같은 꽃다운 처녀는 이 신성한 연애를 할 줄 안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만 연애의 대상이 없을뿐이었다. 연애의 대상은 누가 될꼬?

어슴푸레한 저 머릴 연애의 대상이 선연(鮮然)하면서도 흐리멍덩하게 나타나는 듯하였다. 그것은 뚜렷한 남성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성도 아니었다.

세상에도 아름답고 세상에도 깨끗한 그 무엇이 나비나래 같은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하느적하느적 자기에게 걸어오는 듯하였다.

정애는 이 몽상으로 그린 환영(幻影)을 안을 듯이 저도 모르게 두 팔로 제 가슴을 안았다. 과연 무엇이 슬쩍 안기는 듯하며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러다 제 손이 하염없이 제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음을 깨달을 때 달착지근한 비애(悲哀)가 봄아지랭이 모양으로 황홀하게 가슴이 스미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밤이 새는 듯한 발긋발긋한 환희를 느끼었다.

이윽고 정애는 몸이 노곤해지고 으쓱으쓱 추운 증(症)이 들어서 미닫이를 닫고는 이불을 쓰고 누웠다.

이때 씻은 듯이 잊어버렸던 그 편지 생각이 일어났었다.

「대관절 그 편지는 누가 한것인 고?」

이것이 적지 않게 그를 궁금케 하였다. 웬일인지 이날 밤에는 그 편지 생각을 하는게 몹시 부끄러운 듯싶었다.

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그기 자김껏 생각한 꽃다운 사랑의 빗깔 모양으로……

이불 속에서도 한동안 무슨 생각을 하다가 정애는 그만 나무둥치같이 잠이 들고 말았다.

9[편집]

"이애, 이게 무슨 잠이야! 어데가 아프니?"

하면서 어머니가 흔드는 바람에 정애는 간신히 잠을 깨었다. 그때는 벌써 붉은 햇발이 미닫이를 쏘고 있을 때였다.

정애는 잠오는 눈을 비비며

"지금 몇점이나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딸이 병난 게 아니라 잠을 지쳐잔 줄 깨닫자 어머니는 자애(慈愛)의 웃음을 띠며

"몇점이 다 무에냐, 벌써 열점이다."

정애의 눈은 휘둥그래지며

"벌써 열점이야요?"

하고, 자칫하면 꾸벅꾸벅 잠의 나라로 끌려가려는 몸을 급작스럽게 일으켜 얼른 책상 위에 놓인 좌종을 보았다. 열점은 아니라도 일곱점 반은 지나 있었다.

정애는 총총히 옷을 입고 마루 끝에 나와 할멈의 세숫물 떠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루 끝에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정애는 무심히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때 키가 짤막하고 몸치가 똥똥하게 방어(?魚) 토막 같은 할멈이 세숫물을 떠나 놓으며

"저어 오늘 아침에 대문을 열러 가보니 이 편지가 외있어요"

하고, 그 편지의 유래를 설명한다.

정애의 가슴은 이상하게 흔들리었다.

그 편지는 화라가 빼앗아간 그 이상한 편지와 똑같은 것이었다. 그 봉투며 그 글씨며 하릴없는 그 편지이었다. 다르긴 그 일부(日附)뿐이었다.

정애의 당황해하는 빛이 얼굴에까지 드러났음이리라. 할멈도 그 편지를 기웃기웃 들여다보며 의아한 상판으로

"어째 이 편지엔 우표가 없어요? 누구한테 온 편지에요?"

정애는 얼굴이 화끈하며

"응? 나한테 온거야."

하고는 세수도 한체만체 불현 듯 방으로 들어왔다.

한참 무엇을 생각하고 있던 정애는 결심한 듯이 그 편지의 웃머리를 떼었다.

사연은 보지도 않고 접은 것을 속히 폈다. 누가 한 것임을 알고자 함이다. 그 편지의 맨끝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새벽 바람이 촛불을 날릴제 -김창섭(金昌燮)은 올림」

김창섭이? 정애는 선뜻 생각이 아니 남인지 잠깐 눈썹을 찡그리고 있더니 얼마 아니되어 두어번 고개를 끄덕였다.

(오옳지! 영숙의 오빠로구나!)라고 입안말로 중얼거리었다. 그리하여 창섭이와 자기가 서로 알게 된 일을 얼른 생각하였다.

벌써 두어 달 전의 일이다.

어느 날, 화라와 정애가 영숙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영숙의 방에서 청년 하나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이는 갈샹갈샹한 가는 몸피에 얼굴이 새하얀 청년이었다. 그때 화라가 영숙에게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시골 있는 우리 사촌오빠야. 동경 유학을 하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돌아오셨다. 지금 여기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영어 공부를 하신다니 우리처럼 무슨 독본(讀本)이나 배우는 줄 아니? 아주 어려운 문학책만 보신단다. 혹 모르는 게 있으면 서양사람한테 물으러 다니실 뿐이야. 그리고 또 한문도 넉넉하시겠지. 젊으신 이로 신구(新舊) 학문을 그렇게 가지신 이는 참말 드물어. 그뿐이 아니야, 어떻게 다정하고 싹싹한지------나참, 그런 이를 처음 보았어."

이렇게 훌륭한 사촌오빠가 네게 있니, 하는 듯이 자랑과 기쁨으로 영숙은 입에 침이 없이 제 사촌 오빠의 칭찬을 마지않았다.

영숙의 말이 끝ㄴ나자 화라가 웃으며 이런 소리를 했다.

"응, 그러기에 저번 학기에 네 영어 성적이 좋더라."

"이애, 저번 학기에는 우리오빠가 오시지도 않았단다."

"따로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네가 재조가 좋아서 영어 성적이 좋았단 말이지. 나도 너같이 재조나 좀 있어 보았으면 좋겠다."

라고 화라는 말을 비꼬았다.

"원참, 너는 걸핏하면 남을 꾀집어 말하더라."

하고 영숙의 얼굴은 새무룩하였다.

"웃음엣소리를 성낼 거야 무엇있니. 그 말은 그만두고 나도 네 오빠한테 영어나 좀 배웠으면 좋겠다."

하고 화라는 선웃음을 치며 정애를 향하여,

"우리 같이 배워, 응. 그래가지고 영숙이를 한번 이겨보자."

"왜, 정애의 성적이 나보다 못하길래?"

"더 나으면 더 좋지……"

하고 화라는 무엇이 기뻤던지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후, 둘이 영숙의 집에 놀러를 가면 그 청년과 한두번 만나지 않았다. 그 청년은 두 처녀만 보면 언제든지 몸을 피하였다.

하루는 화라가 웃으며 영숙이더러,

"너 오빠가 우리보고 내외할 거야 무엇 있니…… 이리 좀 들어오시래라. 친해가지고 영어나 좀 배우자."

"정말 그럴까?"

영숙은 기쁜 듯이 다지었다.

"그건 왜 그래."

하고, 정애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혔다.

"이애, 신시대여자람 남자교제를 잘해야 된다. 학교다니는 애가 그렇게 부끄럼을 타서 무엇에 쓴단 말이냐?"

하고 화라는 매우 분한 듯이, 벙애를 반박하였다.

영숙은 제 동무를 자랑하고도 싶고 제 오빠를 자랑하고도 싶어서

"그러면 오시랄까? 오시랄까?"

"그래, 오시라고 해요."

화라는 재촉하였다.

"오빠!"

하고 영숙은 마침내 소리내어 부르고 제 동무를 보며 웃었다.

정애는 고개를 숙이었다. 화라는 가장 엄전한 체하며 시치미를 떼었다.

"응, 왜 그래?"

"이리 좀 오세요."

그 말에 아무 대답이 없고, 뜰아래 방문 열리는 소리가 씨그등 하였다. 그의 발자취는 마루에 올라 세 처녀의 있는 방문에 다다르며

"나를 불렀니?"

라고 묻는 그 소리는 조금 떨리는 맛이 있었다. 두 처녀는 숨소리를 죽이었다. 영숙은 얼른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무에라고 소곤소곤하며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미소를 띤 영숙이가 문을 열고

"자아, 들어가세요."

하였다.

두 처녀는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화라는 일부러 애교있는 웃음을 띠고, 정애의 얼굴은 당호박같이 되고 말았다.

창섭이도 조금 상기된 얼굴로 웃으며 들어온다.

"이애는 이정애, 이애는 박화라, 모두 제 동무예요."

영숙은 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며 먼저 동무를 소개했다.

"이이는 우리 사촌오빠……"

간신히 예까지 말하고는 그만 웃고 쓰러졌다.

그 뒤부터 가끔 화라에게 졸리어 정애는 영숙이한테 놀러 갔었다.

가면 흔히 창섭을 만나고, 창섭을 만나면 그냥 반갑게 인사만 할 적도 있고 같이 앉아 놀기도 하였다.

점점 얼굴이 익어갈수록 두 처녀는 창섭에게 모르는 것을 묻기도 하고 창섭이는 두 처녀에게 서양 소설의 경개(梗槪)도 이야기하였다.

10[편집]

정애는 그 편지 끝을 뚫을 듯이 들여다보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 사이에 그의 눈은 멍하게 바람벽의 한 군데로 모이었다. 그 눈에는 지난 날의 온갖 영상(影像)이 어른어른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정애는 그 편지를 끝으로부터 한 칸씩 차근차근히 접기 시작하였다. 맨 첫머리의 한 칸조차 두툼한 종이의 접은 밑으로 들어가려 할 제 그의 접어들어가는 손이 자재스럽게 멈추어지며 가늘게 떨렸다. 저도 모르게 거기 있는 글자가 또렷또렷하게 그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정애씨!

먼저 무에라고 사죄할 말씀이 없습니다. 오직 정애씨의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빌 뿐입니다. 헛되이 기다리시노라 얼마나 애를 쓰셨겠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매 이 가슴은 칼로 에어내는 것 같습니다.

정애는 또 아니 놀랄 수 없었다. 자기는 꿈에도 염에도 그를 기다린 사실이 없거든 이게 또 무슨 말인가.

그 편지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로 가는 것인가까지 의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기계적으로 그 편지를 펴고, 그 편지가 펴지는 대로 그의 눈은 줄을 따라 옮기었다.

정애씨!
그 편지가 왔을 제 나는 없었습니다. 호사다마로 나는 공교히 무슨 일이 있었습니다. 밤 늦게야 들어와 쓸쓸하게 비인 방에 싸늘한 이불자락을 펼치려다가 책상머리에 놓인 그 편지를 급히 떼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몇 번을 읽고야 겨우 그뜻을 알기는 알았습니다. 그리고 꿈이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생시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정애씨가 나에게 사랑을 허(許)하시고 만나기까지 약속하심은 참말 꿈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꿈으로 정애씨의 아름다운 환영(幻影)을 몇 번이나 만났을까요? 정애씨의 꿈 같은 사랑을 몇 번이나 받았을까요?! 꿈이 아니고는 길이 아닌 생시에 이런 기쁨과 이런 생복을 맛볼 줄은 참으로참으로 믿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기쁘다 못하여 두 줄기 눈물이 소리없이 꽃다운 편지를 더럽히고 말았습니다.
정애씨!
나는 허둥허둥한 발길로 갈팡질팡 남산공원으로 올라가기는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새로 두점이 지난 적이외다. 공원에는 사람이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밤바람에 흔들리우는 소나무 그림자가 밝은 달빛에 어지러울 뿐이었습니다.
마음이 어린 위라 몇 번이나 바라에 스치는 풀잎의 속살거림을 정애씨의 옷 끄으는 소리로 속았는지요. 달빛에 희어진 나무등걸을 정애씨의 안타까운 입상(立像)으로 알았는지요!
정애씨!
그러다가 저 먼 지평선이 훤하게 새어올 때야 나는 속절없이 끓는 가슴을 식히며 힘없는 발길로 숙소(宿所)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채 자리로 잡기 전에 이 글월을 적었습니다.
정애씨!
딴 말은 다 그만두려고 합니다. 엎친 물을 다시 담을수 없고 지난 일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까닭이외다.
오늘 저녁 여덟점에 나는 또 남산공원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정애씨 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끝으로 이 편지는 체전부를 수고로이 할 것 없이 내가 댁에 전하겠습니다. 조조(躁躁)한 이 마음으로는 도저히 체전부의 지지한 걸음에 맡길 수 없는 까닭이외다.
총총히 적으므로 사연에 어룰한 데 많을 듯 깊이 용서를 비는 바이외다.
새벽 바람이 촛불을 날릴 제 - 김창섭(金昌燮)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