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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새는 안개/제2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밤은 자정을 넘은 지 오래다. 태양의 광선을 따라 대지를 입맞추던 이른 봄의 입김도 얼어버리고 새맑은 하늘이 검은내 가물거리는 공간을 서늘서늘하게 덮고 있었다.

무덤 같은 침묵이 쓸쓸하게 미닫이를 대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평일의 습관대로 열점이 되자 불을 끄고 누운 창섭은 입때껏 암만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모로도 눕고 바로도 누우며 잠을 들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눈이 보송보송 해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무슨 생각에 잦아져 있었다.

하되 만일 누가 그더러 「시방 네가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고 물으면 아마 그는 대답하기 어려웠으리라.

그의 머리엔 지난 일, 닥칠 일이 연달고 잇대어 치밀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다가도 한번 깜박하면 앞 생각 뒤 생각이 무슨 연기나 안개 모양으로 한데 엉기고 서로 어우러져 뿌옇게 뒤범벅이 되는 까닭이다. 줄여 말하면 그의 머리엔 무심한 포장에 활동사진이 어른거리듯 갖은 영상이 제멋대로 나타났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나타났다.

그런데 한 영상이 지나가고 다른 영상이 새로 그어림에는 반드시 그 처녀의 모양이 한번 서언하게 그의 눈꺼풀 속으로 들어왔었다. 그러면 그의 심장이 찡하고 소리를 치자 고동이 그치는 듯하였다.

그는 오늘 그 처녀를 보았다.

아무 기대와 아무 예감없이 우연히 자연히 그는 그 처녀를 보았다. 본 그 찰나부터 그 여성은 솜씨있는 재인바치가 끌로 새긴 듯이 그의 가슴에 자리를 잡고 말았다.

그가 건넌방에서 영숙이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미닫이 밖에서

"영숙이"

하며 탄력있는 고운 목소리가 불렀다. 영숙은,

"누구야?"

하고 창경(窓鏡)으로 내다보더니 급히 청섭을 향하여,

"제 동무가 왔어요."

하였다.

창섭은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안방으로 건너가면서 그는 목소리 나던 곳에 슬쩍 일별을 던졌다. 거기 여학생 둘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보았다느니보다 알았다는 게 옳을는지 모르리라. 뒷사람은 앞사람에 가리었고 그의 안계에 들어오긴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것도 그야말로 전광의 일섬 같은 짧은 찰아니기 때문에 똑똑히 보았다기는 억울하다. 다만 까만 머리와 보얀 타원형이 어른하고 그의 시선을 스쳤을 뿐이다. 하건만 그 순간에 그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을 본 듯 싶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하게도 열 번 스무 번 보아알던 이 같기도 하였다.

창섭은 안방에 무료히 앉아 있다가 두 처녀가 영숙의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려 자기가 거처하는 뜰아랫방으로 내려왔다. 그는 두 처녀의 옆을 거쳐서 제 방에도 못 내려올이만큼 여성적이었다.

여성적이라면 부끄럼 많은 것을 물론이려니와 그 희고도 섬세한 살결이라든지 갸름갸름한 손가락을 가진 조그마한 손이라든지 하릴없는 여성적이었다.

어쩐지 가슴이 야릇하게 수선수선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무의식한 가운데 날아가려는 새 모양으로 몸을 움츠린 채 쓸데없이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말끔 귀로 몰렸다. 그의 온몸이 통으로 귀에 쏠렸다. 그귀엔 세 처녀의 담소(談笑)가 미묘한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수작은 간격도 멀고 말낱도 가늘건만 또렷또렷이 창섭의 이막(耳膜)을 울렸다.

눈에 아니 보이는 세 처녀의 심리와 거동을 따라 그의 얼굴도 흐리락 빛나락 하였다.

쾌활하고도 삼가로운 웃음이 건넌방의 미닫이 틈으로 새어나오자 청섭의 입술에도 웃음이 흘렀다.

그러는 사이에 아까 본 그 처녀를 또 한번 보았으면 하는 갈망, 그래 모시 목마른 이가 입술을 물에 대다 만듯한 갈망이 불같이 일어났다.

(아까 좀 자세히 보았으면 좋았을 걸갖다가……)

그는 후회하였다.

그러나 후회는 끝끝내 후회일 따름이다.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지나간 그때가 다시 올 것은 아니다. 시방은 시방으로 다시 볼 방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안으로 향한 미닫이를 가만히 열었다. 그리고 영숙의 방 창경에 눈살을 쏘았다. 하건만 검푸른 창경이 져가는 햇빛에 번쩍번쩍 반사될 따름이고 그 안에 있는 이의 그림자도 얻어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그 방 곁에 가볼까 하였는지 모르리라. 얼마나 교묘한, 영숙이에게 물어볼 말을 생각해내었는지 모르리라. 하되 그것은 얼럴뚱땅에 좀된 그가 능히 할 바 아니었다.

그는 미닫이를 말끔히 열어둔 그대로 제자리에 와 앉았다. 아무리 시방 애를 쓴대도 속절없음을 깨달은 그는 차라리 그들이 돌아갈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어쩌면 그동안이 이다지도 지루하랴! 이 얼마 안되는 시간이 창섭에게는 여러 달포와 비겨 떨어질 것이었다.

이야기는 그쳤다 이었다 하였다.

이야기가 그칠때마다 창섭은 인제 가는가보다 하고 헛되이 가슴을 두근거리었다.

마침내! 그들이 돌아갈때가 왔다. 그 처녀를 다시 볼 기회가 왔다.

그들의 옷 단속하는 소리가 바스락바스락 하였다. 영숙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리었다.

창섭은 열어놓은 문 틈으로 눈을 내놓았다.

뒤섰던 처녀는 마루에 걸터앉아 구두를 신고 있고, 앞섰던 처녀는 제 동무의 신 신기를 기다려 마루 끝에 서서 영숙이와 그래도 미진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침 불 같은 구름을 멍에하고 서(西)으로 서으로 기울어지는 석양이 광선의 빛발을 아낌없이 그 처녀의 온몸에 내렸다. 그는 한 팔을 이마에 얹어 빛을 가리며 눈을 내리감고 있다. 이같이 아름다운 그림이 어디 있으랴! 만일 있다고 하면 성모 마리아의 그것이리라. 검은 양사단으로 위아래를 감은 그 처녀는 참말 그림에 있는 성모 마리아를 상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명화라도 이 산 그림을 따르지 못할 것은 말하는 게 실수일 것이다. 더구나 광선의 바다에 멱감고 있는 그는 미(美)의 나체를 드러낸 듯하였다.

이마에 비스듬히 걸린 말씬말씬한 손목엔 살속 깊이 파묻힌 깁올이 같은 힘줄이 파름파름 떠 보인다.

처녀다운 혈색 좋은 뺨은 아늘아늘한데 손만 대면 터질 듯, 연붉은 입술은 방싯방싯 열릴 때마다 소리없이 기어드는 빛물과 마주쳐 하얀 이빨이 반짝반짝하였다.

두 처녀의 발자취는 벌써 대문 밖으로 사라졌건만 창섭의 눈엔 그 입상(立像)이 언제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공상의 바다에 허우적거리는 그이 가슴에도 이 꽃다운 모양이 선연이 떠돌았다.

(세상에 그런 여성도 있던가.)

창섭은 그 명징(明澄)하고 적막하면서도 웃음의 그림자가 떠도는 듯한 눈매와 애교의 그것 같은 입모습을 또 한번 가슴에 그리면서 혼자 소곤거렸다.

갑자기 그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까맣게 놓은 가을하늘에 번쩍이는 별을 쳐다볼 때 모양으로 그는 속절없음을 느꼈다. 정신이 점점 말똥말똥 해오며 언제나 잠이 들지 알 길이 없었다.

창섭은 새파란 인광같은 게 흐르는 가운데 여기저기 눈부시게 번쩍이는 흰나비가 춤추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구나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게 아니라, 시방 햇발이 내 눈꺼풀을 쏘아 이런 작용을 일으키고 있구나 하였다.

벌써 일어날 때가 지났다. 시방 곧 기동(起動)을 하여야 될텐데 하면서도 어젯밤의 잘 못잔 피로에 그의 몸은 백길 천길 되는 바다속으로 자꾸자꾸 가라앉는 듯하였다.

이럴 즈음에 그는 제 어깨가 가볍게 흔들림을 깨달았다. 누가 나를 깨우는구나 하고 눈을 뜨려 하였다.

풀로 조아붙는 듯한 눈을 간신히 벌린 그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어제 보던 그 보오얀 타원형이 여전히 자기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내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구나. 그는 번개같이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찰나(一刹那)였다. 그 다음 찰나에 그는「오빠!」하며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자 제 사촌누이 영숙이가 자기를 깨우고 있는 줄 깨달았다. 그는 무슨 죄나 범한 듯 얼굴을 붉히었다.

"오빠, 오빠! 오늘은 웬일입니까? 어데 몸이 편찮으셔요?"

영숙은 오빠가 잠 깨는 기척을 보자 걱정스레 물었다.

영숙은 얼굴이 둥굴고 납작한 코끝이 오목한 처녀였다. 그 조금 짧은듯한 윗입술엔 언제든지 웃음의 그림자와 어린 맛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큼직한 눈은 항상 에그머니 하고 놀라는 빛이었다.

"아니, 아모데도 아프지 않아."

창섭은 부신 듯이 눈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왜 일어나지 않으셔요?"

"어젯밤에 좀 늦게 자서……"

"또 밤새도록 책을 보셨구면."

"아니……"

하고 창섭은 영숙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아무데도 아프잖으십니까! 신색이 아주 좋지 못한데, 뭐."

영숙은 또한번 근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여섯점이면 반드시 일어나는 제 오빠가 오늘은 아침밥때가 되어도 기척이 없어서 웬일일까 하고 내려와 보았다. 오빠는 이불을 뚤뚤 감은 채 요를 내어버리고 맨방바닥에 가로 누워 있었다. 그 식은 땀에 젖은 얼굴이 적지 않게 그를 놀라게 하였다. 그 좀 들어간 눈이 더욱 옴팍해 보이며 그 언저리에 검푸른 힘줄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정말 아무데도 아프지 않아."

창섭은 귀찮은 듯이 한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금 눈을 스스로 감으려 하였다. 그 모양은 마치「내 아픈 데를 네게 알려주어도 쓸데가 없고 또 알려줄 필요도 없다. 당초에 나는 말하기가 귀찮으니 이대로 내버려다고」하는 것 같았다.

"에그, 왜 저러시나."

영숙은 생각하였다. 언제든지 자기에게 다정하고 싹싹한 오빠가 오늘은 어찌 대꾸하기두 싫어하는가 하고 스스로 의아히 여겼다.

"오빠! 왜 또 눈을 감으셔요?"

영숙은 또 말을 이었다.

"아츰 아니 잡수렵니까?"

이 말에 아무 대답이 없기는새로 감은 눈도 뜨지 않았다. 영숙은 한동안 무료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창섭은 눈을 슬며시 떴다.

"저어……."

창섭은 무겁게 입을 떼었다.

"저어……. 어제 온 여학생이 누구야?"

"네? 제 동무예요."

"이름이 무엇이야?"

"하나는 박화라 라는 애고, 하나는 이정애라는 애이야요."

"저어…… 검은 옷 입은 이가 누구야?"

영숙은 놀란 듯이 창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언제 보셨어요?"

"아니…… 저어……"

창섭은 어물어물하며 또한번 하염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 애는 이정애야요.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창섭은 또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 눈이 이상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 후부터 정애의 환영(幻影)은 이따금 창섭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흔히 펴놓은 책의 자가 아물아물해지며 황홀이 넋을 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번 본 인상이 조금도 어그러짐 없이 며칠 몇 달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서녘의 붉은 놀이 해의 넘어갊을 따라 차츰차츰 걷히는 모양으로, 그의 정애에 대한 기억도 날이 감을 쫓아 엷어지기는 하였다.

그러나 멋있는 거문고 곡조가 머리올같이 가늘고 가늘어져 끊길 듯 끊길 듯 할 때에는 타는 이가 다시 줄을 튀기는 것같이, 정애의 환영이 사라지려 말려 할 즈음에 그의 소리가 영숙의 방에서 나기도 하고 그의 모양이 길거리에서 마주치기도 하였다.

그치려던 악기가 새로운 가락을 노래함과 같이 사라지려던 환영도 새로운 색채를 띠고 창섭의 머리에 살아왔었다.

하루날, 창섭은 영숙을 데리고 진고개를 가게 되었다.

영숙의 공책과 연필도 사야 되겠고 또 벌서부터 주문하였던 교과서가 일한서방(日韓書房)에 왔는지 안 왔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혼자 가기가 무얼하다고 제 오빠를 조르매 창섭이도 책 구경할 겸, 흔연히 그 청을 들어주었다.

형매(兄妹) 둘이 그 서사 문어귀에 들어서렬 때였다.

누가 뒤에서

"영숙이!"

하고 불렀다. 영숙은 불현 듯 고개를 돌렸다. 창섭이도 무심코 돌아보았다. 두어 칸 떨어진 곳에 화라와 정애가 걸어온다.

해후의 반김에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다소곳하고 재츰재츰 걸어오는 정애의 모양은 아름답고 살아왔다.

그들은 한데 다가들었다. 다 알면서도 서로 온 까닭을 묻고 책 사러 온 것을 치아에 말한 뒤 용하게 만남을 서로 기뻐하였다.

"그래 혼자 온담!"

화라는 그 독특한 나무라는 듯한, 굵어 잡아당기는 듯한 어조로 영숙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약간 붉은 기가 도는 실눈을 살짝 흘겼다. 그 숱 많은 눈썹은 새까맣다. 그 붉은 물이 똑똑 든는 듯한 입술은 마치 육회(肉膾)덩어리 같았다. 이것이 들어서 그의 얼굴에 너무 난(爛)한 기운이 떠돌게 하였으되 그 둥글게 살찐 어깨의 윤곽과 솔직한 허리가 매력에 넘쳐 있었다.

"왜 너희들은 둘이만 오니?"

영숙이도 지지 않고 대항하였다.

"우리는 둘이고 너는 혼자니까 말이지."

하고 화라는 딱따글 웃었다. 그리고 제 웃음소리가 지나쳐 큰 것을 무안히 여기는 듯이 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시선은 창섭의 시선과 마주쳤다. 창섭은 처음엔 놀란 듯하던 그 실눈이 점점 자기를 향하여 대담스럽게 빛남을 보았다.

一초! 二초! 둘의 시선은 마주 쏘고 있었다. 그러나 먼저 시선을 피하긴 창섭의 편이었다.

그는 몸을 돌이켜 처녀들과 반대방향으로 이편 책장에 꽂힌 책을 뒤적거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책에 있지 않았다.

정애가 제 가까이 움직이고 있다는 의식이 그로 하여금 더할 수 없이 흥분케 하였다.

왜 화라는 나를 보지 않는가! 왜 정애도 나를 보지 않는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는 웬일인지 정애에게 제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다만 한번이라도 오직 일(一)찰나 동안이라도 정애가 자기를 보아주었으면 하였다.

그는 제 얼굴이 제 모양이 주마등같이라도 번개같이라도 정애 시선에 스치는 얼마나 바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방 정애가 자기를 보고 있을지 모르리란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따.

(나와 그는 서로 등을 지고 있으니 설마 그가 나를 본다 한들……)

창섭은 제 뒤통수에 근실근실 기어다니는 정애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돌이켰다. 아아 이 어씬 공교한 일인가? 그는 제 얼굴에 흐르는 정애의 맑은 눈동자를 확실히 발견하였다. 그럴 사이도 없이 정애는 당황히 외면하고 말았다.

창섭은 온 몸의 피가 일시에 얼굴에 오름을 느꼈다.

왜 정애가 나를 보고 있었는가? 그는 금방 한 제 생각은 씻은 듯이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여기 무슨 큰 이유가 없지 못할 듯 싶었다. 무슨 깊은 의미가 없지 못할 듯 싶었다.

"오빠 아니 가서요?"

하는 소리가 찬물을 끼얹는 듯이 뒤숭숭한 창섭의 귀를 울렸다.

깜짝 놀란 창섭의 눈은 바로 제 곁에 서 있는 제 누이 동생을 보았다. 그럴 동시에 이 편을 보고 웃는 듯한 두 처녀를 보았다. (창섭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응, 가지."

잠꼬대 같은 대답을 하고 그 책사(冊肆)를 나온 창섭의 발길은 허둥허둥하였다.

따스한 별이 금빛으로 번쩍거리면서도 반투명체의 실안개 같은 것이 사라지려는 새벽꿈 모양으로 어슴푸레 하게 조으는 어느 공일이었다.

창섭이 홀로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정신없이 읽고 있노라니 "오빠!"하며 부르는 영숙의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이것을 보아요, 이것을!"

"무엇을?"

창섭은 급히 밖을 내다보았다. 영숙은 장독간 뒤에 제가 가꾸는 개나리나무 앞에 서있는 듯하였다.

"어서 이리 나오서요, 꽃이 피었어요, 꽃이!"

"응, 꽃이!"

창섭은 놀란 듯이 몸을 소스라쳐 뛰어나왔다. 며칠 전부터 그 개나리가 노릇노릇이 봉오리를 맺기 시작할 제 오빠와 누이는 날마다 그 불어가는 누런 점을 헤아리면서 어린애 모양으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피어나오기를 기다림이 그들의 즐거운 바람의 하나였었다. 어제 저녁까지도 움츠리고 있던 그것이 어느새 피었단 말인가.

"이것 보서요, 예쁘게도 피었지요?"

오빠가 제 옆 가까이 들어섰을 제 누이인 살가와 못견디겠다는 듯이 꽃에 거의 닿은 입을 떼며 감탄하였다.

파르스름하게 봄 입김이 통한 회초리에 조그마한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네 송이나 노란 입술을 방싯 열고 있었다.

"참 예쁘게도 피었군!"

창섭이도 감탄을 마지 않으며 그 꽃낱을 손으로 건드리려 하였다.

"에그, 가만 두세요 떨어질라요."

하고 영숙은 창섭의 손을 가볍게 밀쳤다.

남매는 그윽한 꽃향기를 받으며 이윽히 거기 서있었다.

그들의 가스에는「봄이다!」하는 느낌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오빠, …………. 저어…… 저어……."

영숙은 무엇을 물으려는 듯이 입을 떼었다가 스스로 부끄러운 웃는다.

"왜 그래?"

하고 창섭이도 멋모르면서 빙그레 하였다.

"저어……. 저어…… 꽃이 어째서 피어요?"

영숙은 제 물음의 어처구니 없음을 엄벙하는 듯이 또 스스로 웃었다. 그 얼굴은 매우 진국이었다.

"봄이 되었으니 피지."

창섭은 웃으며 대답하였다.

"봄이 되면 사람은 어때요, 사람에게도 피는 게 있어요?"

창섭은 놀란 듯이 영숙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붉게 빛나고 있다.

"그것은 왜 물어?"

"저어……. 봄이 되면 사람에게도 무슨 피는 게 있을 듯 싶어서요."

"있고 말고, 그것은 젊은이의 가슴에 피는 사랑의 꽃이지."

이런 말이 불쑥 입술에 떠올라왔으나 창섭은 덤덤히 입을 다물고 멀거니 봄하늘을 쳐다보았다. 영숙이도 제 오빠의 기색을 살피자 더 물으려 들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즈음에 문득

"영숙아,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니?"

하는 소리가 그들의 덜미를 짚었다.

남매는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화라와 정애가 어느 곁엔지 중문(中門) 앞에 들어서 있었다.

창섭은 정애를 보았다. 그 순간에 속에서 무엇이 탁 하고 터지는 듯하며 온몸이 핑그르르 돌아가는 듯하였다.

정애는 제 시선이 창섭과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남자와 불의(不意)에 시선의 마주침을 부끄러워함이다.

하건만 창섭은 제게 인사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는 굽실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영숙이가 「언제 왔던?」하고 뛰어가는 바람에 창섭의 이 어설픈 인사가 두 처녀에게 들키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세 처녀는 영숙의 방으로 사라지고 창섭은 홀로 제방에 돌아왔다.

말소리 웃음소리는 또 문틈으로 새어흘렀다. 또 창섭은 넋을 읽고 말았다.

「오빠!」하고 부르는 영숙의 소리는 듣기는 들었건만 창섭을 가슴만 울렁거리고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뒤미처 그는 영숙의 두번째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제야 간신히「왜 그래?」하였다.

「이리 좀 오서요.」란 말에 일어는 서되 그의 발길이 비틀비틀할이만큼 창섭은 흥분되었다.

살엄음 위에나 걸어가는 것같이 간이 오그라붙는 듯하며 얼굴의 근육하나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끔 제 뜻을 어겨 손이 머리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앉음앉음이 제격에 맞지 않은 것 같기도 하여 그는 겸연쩍어 견딜 수 없었다.

제법 말을 건네고 수작을 붙이기는새로 숨도 크게 쉬지 못하였다. 그래! 제 숨소리가 유난히 쌕쌕거리는 듯해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호흡조차 조용조용히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랐다.

이런 지경일진대, 한시바삐 그 자리를 떠났으면 좋으련마는, 모르면 모르되 누가 등채를 밀어낸다 하더라도 그는 정애가 있는 방에서 나오기 싫었으리라.

온실에나 들어온 듯이 꽃냄새 같은 것이 떠도는 그곳의 공기가 그에게 알 수 없는 쾌감을 주었다. 봄날의 볕 같은 따스하고 보다라운 그 무엇이 속으로 스며흐르는 듯하였다.

여간 용기와 노력이 들지 않았으되, 그 애닮은 모양을 슬쩍슬쩍 곁눈질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곁눈질같이 사람의 애를 말리는 것은 없으리라.

어느 때는 앵두같이 하늘하늘 터질 듯 터질 듯한 앳된 뺨, 어느 때는 보얀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듯한 목, 혹은 까만 치마 위에 질쩍하고 미끄러진 듯한 은어 같은 흰 손, 혹은 푸스스한 풍정(風情)있는 머리, 어찌하다간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모양으로 피할 곳을 몰라하는 눈자위, 어찌하다간 무안새김으로 웃음이 떠도는 귀염성 있는 입모습, 이 모든 미(美)의 편린(片鱗)을 늘어지게 오래오래 보기를 요구하였건만 슬쩍 던졌다가 황망히 피하는 그의 눈에서 얼른 하고 사라짐은 참말이지 감질날일이었다.

그만큼 이 모든 것이 실물(實物) 이상의 매력으로 그의 가슴을 궁성거리게 하고 그의 눈을 쉴 새 없이 잡아당기었다.

며칠 후에 화라와 정애는 정말 영어책을 가지고 왔다.

권수(卷數)로는 3권이라도 <내셔널> 二권 정도가 될 까말까한 여자용 영어독본이었다.

창섭이로 말하면 동경서 중학교도 마쳤으려니와, 더구나 영어에 취미를 붙여서 배워야겠다는 결심이 억지로 위미를 나게 하였는지는 모르나 따로 영어 정칙야학교(英語正則夜學校)에서 영어를 공부한 까닭에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영어책을 줄줄 내려보는 터이니 이런 것을 읽고 새김에샤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련마는, 남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느지라 속으로 환하게 알면서도 말을 발표하기가 곤란하였고, 또 각별히 유창한 음독(音讀)과 교묘한 번역을 해보려 애쓴 결과는 도리어 헛읽게도 되고 더듬거리게도 되었다.

이 뜻아니한 병신구실은 짜증도 내며 하염없이 얼굴을 붉히게도 하였다.

"선생님! 저희들을 그렇게 어려이 아실 거야 무엇 있어요. 그대로 죽죽 새겨주십시오 오그려"

화라는 창섭의 무밋무밋 하는 양이 딱하다는 듯이, 민망하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어가며 그런 말을 하였다.

창섭은 더욱 무안해하며 슬쩍 정애를 보고 웃었다. 정애도 그 속눈썹 긴 눈을 치떠 창섭을 바라보며 쌍긋 웃는다.

창섭은 제 얼굴이 타는 듯이 화끈거림을 어찌할 수 없었으되 정애의 웃는 얼굴로 말미암아 자릿자릿한 쾌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러구러 날이 감을 따라 그들은 친숙해지고, 친숙해감을 따라 그런 어색함과 어려움이 한겹 두겹 벗겨져 갔었다.

넷이 한자리에 모여 재미난 담소에 때 가는 줄을 모르게도 되었다.

하루는 화라가 창섭에게 물었다.

"저어, 내일 저녁 청년회관에서 고학생(苦學生)들이 각복 「격야(隔夜)」를 한다는데, 그것이 어때요, 자미(滋味)있어요?"

"매우 자미있는 것입니다. 노서아 문호(文豪) 투르게네프가 지은 소설인데 각색은 아마 일본사람이 한 게지요."

"그 책을 보셨어요?"

"네, 한번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골자를 이야기해주실 수 없을까요?"

"글쎄요, 벌써 거진 닞은걸요. 그리고 나는 입담이 없어서……"

"입담이 없다손 치더라도 말씀이야 못할 게 무엇이얘요. 누가 변사(辯士)의 설명을 듣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가 급히 말을 변하며

"대강만 이야기해 주세요."

"지금 당장 말입니까?"

"그러먼요."

"퍽도 급하십니다그려.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시겠군."

창섭은 처음으로 농담 한 마디를 하고 영숙이와 정애를 돌아보며 웃었다. 세 처녀도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한동안 긴장한 침묵이 거기 있었다. 세 처녀의 눈동자는 창섭의 입술로 몰렸다.

"오빠, 어서 해요!"

영숙은 참다 못하여 한번 졸랐다. 창섭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웃고만 있었다.

"선생님, 좀 이야기해 주세요, 네?"

정애도 마침내 한번 재촉하였다. 그 눈동자는 무엇을 알겠다는 열심에 맑게 빛나고 있었다. 창섭의 가슴은 다시금 방망이질하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정애를 바라보는 그 눈은

"당신의 청이면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야 하고 말고요, 하고 말고요."

하는 듯하였다.

이윽고 창섭이는 그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말하기가 매우 거북살스러운 듯이 따듬따듬 하다가 차츰차츰 신이 나서 스스로도 놀랄 만한 웅변으로, 엎어진 조국을 건지려고 이국수토(異國殊土)의 망명객이 되어 심혈을 뿌리는 발아리(?牙利)혁명당 수령 인사릅과 그에게 뜨거운 사랑을 바치는 노서아의 아름다운 처녀 에레나 사이에 얽히고 설킨 비장하고도 농염(濃艶)한 연애소설을 얘기했다. 그리고 에레나가 인사릅을 사모하는 대문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엔 더욱 힘이 있고 열이 있었다.

"에레나는 불 같은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었습니다. 고국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내일 같이 발아리의 흙을 밝게 되자 오늘 저녁 같이 인사릅은 폐병으로 말미암아 조국의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에레나의 애써 간호한 보람도 없이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섭은 스스로 흥분되어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부르짖는 소리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숨소리를 죽이고 손가락 하나 꼼짝도 안하며 온몸을 귀로 삼아 듣고 있던 세 처녀의 눈에도 눈물이 괴었다.

창섭은 눈물이 어른어른하는 정애의 눈을 바라볼 제 웬일인지 그를 부여잡고 목을 놓아 실컷 울었으면 하는 충동을 느꼈다.

어슴푸레한 저문 빛이 어느 결엔지 방안의 긴장된 공기를 검게 물들였다.

"벌써 늦었네."

이윽고 화라는 혼잣말같이 한마디 하고 몸을 일으킨다.

그때껏 이야기에 나온 인물과 정경의 환영(幻影)을 제 눈앞에 그리면서 모두들 멍하게 앉아 있었다.

화라의 일어남을 보자 세 사람도 잠을 깬 듯이 따라 일어선다.

"선생님, 참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를 듣겨주셔셔."

화라는 이런 인사를 잊지 않았다.

"천만에요."

창섭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면 또 뵈옵겠습니다."

하고 화라는 허리를 굽힌다. 정애도 말없이 상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 보얀 목덜미가 야릇하게 창섭의 시선을 찔렀다. 두 처녀는 문간을 향하고 걸어간다.

창섭은 마루 끝에 서서 정애의 치마 뒷자락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것이 스르르 중문지방을 스쳐 넘어가버리자 창섭은 갑자기 제 가슴이 한그믐 밤같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정애는 가버렸다. 정애는 가버렸다!」

하는 의식이 뼈끝까지 사무치는 듯하였다.

"오빠! 거기 왜 그러고 서 계서요?"

동무들을 문간까지 보내고 돌아온 영숙이가 괴이쩍다는 듯이 물을 때까지 창섭은 돌로 만든 부처나 무엇같이 섰던 그 자리에서 넋을 읽고 있었다.

그날 저녁밥은 웬일인지 달지 않았다. 두어 술을 끄적끄적하고는 갈증든 사람 모양으로 숭늉만 두 대접을 켜고 아랫방에 내려온 그는 쓰러지듯이 책상을 의지하고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는 「격야」의 일판이 얼씬덜씬 지나갔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노서아 소설에 있는 일이 아니고 마치 자기가 친히 겪은 것 같았다.

(그렇다! 인사릅은 꼭 저였다. 에레나는 누구가 될꼬?)

창섭은 스스로 눈을 감았다. 고국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애인을 따라나서는 에레나의 돌올한 모양, 너울치는 물결, 비틀거리는 배안, 깜박거리는 등불 밑에, 제 남편의 병구완하기에 골몰하는 에레나의 가련한 모양이 역력히 나타난다.

그러다가 문득 인사릅과 에레나가 서로 쓸어안고 키스하는 광경이 보인다. 처음엔 인사릅은 얼굴빛이 거무튀튀하고 어깨판이 떡 벌어졌으며, 키가 후리후리한 훤한 장부이고 에레나는 머리올이 금실 같고 코끝이 뾰족한 서양여자이더니, 어느 곁엔지 인사릅은 얼굴이 핼쓱하고 몸피도 별로 굵지 않은 사내로 변하고 에레나 또한 머리가 검으며 코도 그리 높지 않은 여자로 변하였다.

언뜻 깨달으니 시방 키스를 하고 있는 남녀는 다른 사람 아닌 창섭과 정애였다! 이 환상으로 그린 키스로 말미암아 그의 입술이 보드라운 촉감에 가늘게 떠는 하였다.

그는 이 환영을 쫓으려고 한번 머리를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아찔하고 눈앞에 모든 것이 뒤범벅이 되며 책을 짚고 있는 보얀 손이 나타나기도 하고 중문지방을 스쳐 넘어가는 까만 치마 뒷자락이 보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그 눈물에 젖어 윤 흐르는 눈자위가 물끄러미 자기를 바라보는 듯하였다.

창섭의 애는 빠직빠직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만 못견딜만큼 정애가 보고 싶었다. 덮어놓고 보고 싶었다. 지금 만일 정애를 볼 수 있다 하면 물에라도 뛰어들었으리라, 불에라도 뛰어들었으리라. 정애를 보는 값으로 하늘을 주어도 아깝다 않았으리라, 지구를 준대도 오히려 적음을 한하였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하여도 정애를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정애의 집을 찾으려 한길에 나서는 자기, 정애 집 문 앞에 빙빙 도는 자기, 용감스럽게 대문 앞에 쑥 들어섰으나 부를까 말까 망설이는 가운데 어찌어찌하여 정애가 쪼르르 나와 서로 반기는 모양을 현실인지 공상인지 분간을 못할이만큼 또렷또렷이 생각하면서도 속절없이 앉아 있는 것을 깨닫자, 그는 휘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애간장이 조비비는 듯하였다.

(아아,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구나!)

그는 참다 못하여 마침내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아,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구나!)

창섭은 그렇게 부르짖었건만 그는 정애를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에게는 청정(淸淨)하고 신선한 처녀를 사랑할 자격이 없었다. 그는 기혼남자인 까닭이다.

그는 열세 살 되던 봄에 열아홉 살 먹은 색시에게로 장가를 들었다.

물론 제 의사로 든 것은 아니로되 남들이 어른이 된다고 떠드는 바람에 그도 멋모르고 좋기는 하였다. 그리고 색시도 처음엔 그리 밉지 않았었다.

부부가 무엇인지 아내가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였으되 어머님 품에 자던 자기가 인제 그와 한 요 위에 잘 것과 사람한테는 응석을 부리더라도 그에게는 꼭 어른 노릇을 할 것과, 자기보다 나이는 많지마는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톡톡히 꾸짖어서 길을 들여야 될 것을 대강 짐작하였다.

또 그는 자기에게 고운 옷을 해 입히고 맛난 음식을 해주는 침모(針母)나 찬비(饌婢) 같은 것이니, 그에게는 옷 투정 반찬 투정을 막하여도 매도 아니 맞고 꾸중을 아니 모시는 것을 그는 신기하게도 생각하였다. 이런 편으로 보아 전에 없던 그런 사람 하나가 생긴 것이 어린 창섭의 생각에는 그리 해롭지 않았었다.

그때껏 한문을 읽고 있던 창섭은 새로운 공부를 하겠다고 장가들던 이듬해로 상경(上京)하였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야학(夜學)으로 일년 동안 일어와 산술을 배워가지고 껑충 뛰어 XX중학교(시방은 XX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중학교의 二년에 진급하렬 제 일본 명치(明治)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XX군 H은행 부(副)지배인으로 있는 맏형의 주장으로 동경 유학을 하게 되었다.

동경에서 정칙(正則)예비학교에 다니면서 밤낮으로 준비한 결과, 그는 C중학교 二년급의 보결시험에 입격(入格)되었었다.

들기는 들었으나 학과에 익숙치 못한 그는 하기(夏期)휴가를 공부에 이용하노라고 그 해는 집에 돌아오지 못하였다.

四학년에 진급되던 해의 여름에야 그는 오래간만에 정다운 고향의 흙을 밟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그럭저럭 열아홉이나 되었으니 차차 자기의 꿈같은 장래에 있을 아내의 윤곽을 상상도 해볼 적이 있다. 그 시(時) 창섭의 눈에 비친 제 아내의 꼴은 참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구정물이 뚝뚝 듣는 행주치마는 곁에 얼른만 하여도 불쾌한 생각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조금도 가다듬지 않은 우수수한 머리며, 벌써 두어 금 가는 주름이 잡힌 이마며, 그 앳된 빛 하나 없는 시들시들한 뺨을 볼 제 창섭은 저것이 내 아내인가 하였다.

맏누님 뻘이 훨씬 넘는 저 늙어빠진 여자가 내 아내인가 하였다.

이러 생각을 하니 창섭의 가슴은 마치 새침한 가을 밤모양으로 쓸쓸하고 어두웠다. 그리고 무슨 지겨운 짐승처럼 곁에만 와도 몸서리가 침을 어찌할 수 없었다.

몇해 만에 집에 돌아온 창섭이건만 밥숟가락만 뚝 떼면 훌쩍 뛰어나가 밤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몰랐다. 그러다가 부친과 (그는 열두 살에 모친을 여의었다.) 친척들의 만류함도 듣지 아니하고 고만 달아나다시피 동경으로 뛰어갔었다. 그 후부터는 하기방학이 되어도 귀성(歸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흥 이런 사람들은 이런데!)

무슨 대학 졸업생을 신랑으로 어떤 여학교 출신을 신부로 꽃다운 결혼식이 거행되었다는 신문기사가 눈에 띌 적마다 창섭은 화증 나는 듯이 휙 집어 동댕이치며 한숨을 쉬기도 하였다.

(그들은 참으로 행복일다.)

우리 유학생들 가운데도 미혼한 남학생과 미혼한 여학생끼리 꿀 같은 사랑의 단꿈을 꾼다는 소문을 들으면 이렇게 부러워도 하였다.

그래도 그의 낙(樂)은 공부하는 데 있었다. 남이야 구경을 가든지 운동을 하든지 그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거기에 희망이 있고 광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고 싶은 공부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집의 한 사오백 하던 살림이 남의 빚봉수로 말미암아 거덜이 나고 말았음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준비에 골몰하던 그는 그만 고국으로 아니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돌아는 왔으나 답답도 하거니와, 더구나 보기 싫은 아내가 있기 때문에 직업을 구한다고 핑계하고 서울로 뛰어올라 왔었다. 서울 온 뒤에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느 서양선교사를 찾아다니며 영어를 배우기도 하고 또 일상 좋아하는 문학서(文學書)유(類)에 잠착도 하는 형편이다.

(나는 정애를 사랑한다, 불같이 사랑한다! 그러하건만 나는 그를 사랑할 수가 없다. 사랑하여서는 아니된다!) 이렇게 생각하매 창섭은 그야말로 흉격이 막히는 듯하였다.

(나는 기혼남자다! 나는 뚜렷한 아내 있는 사람이다. 나의 몸은 이미 더러워졌으니 어찌 바닷속 깊이 잠긴 진주보다 더 맑고 깨끗한 처녀의 사랑을 바랄 수 있으랴! 얻을 수 있으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린다. 얼마나 쓰리든지 얼마나 아프든지 나는 그 채찍을 달게 받아야 할 사람이다.)

창섭은 또한번 곱삶아 보았다. 그리고 정애의 사랑을 아주 단념하리라 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물고 그는 책에 재미를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전자(前者)엔 뜻맞는 벗이나 정다운 애인에나 질배 없던 책이 인제는 보려고 하면 할수록 펴들기조차 염증이 난다. 한 대문을 가지고 몇 번 읽어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책을 저 갈 대로 집어동댕이친 그는 흔히 끝 모를 공상의 바다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일어났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일어나는 큰물꽃 잔물꽃 가운데 정애의 환영이 가끔 물결에 어른대는 달그림자 모양으로 번쩍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정애가 오는 날이면 그의 번민은 더욱 심하였다. 사랑하는 이의 발자취소리를 남먼저 듣건마는 짐짓 방문을 굳이 닫고 있는 그의 마음이야 어떠하였으랴!

한두 번 그느 책상에 머리를 쓰러뜨리고 쓰리고 따가운 눈물을 짜내지 않았다.

어느날 오후였다.

화라와 정애가 영숙을 찾아오더니, 얼마 후에 화라 혼자만 남아 있고 정애와 영숙은 어디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화라가 창섭의 방으로 내려온다.

시방껏, 정애가 제 앞에나 있어 눈만 뜨면 보일까 두려워하는 듯이 잔뜩 눈을 감고 누웠던 창섭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화라는 웬일인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말없이 창섭을 바라본다. 창섭이도 놀란 듯이 마주보고 있었다.

"왜 혼자 꼭 들어앉어 계서요?"

이윽고 화라는 이런 말을 하며 격에 맞지 않은 웃음을 웃는다. 그 얼굴은 일시에 불이 확 붙는 듯이 붉어진다. 그러다가 창섭의 덤덤히 대답 없음을 보고 조금 무밋무밋하더니 얼굴빛을 바루려고 애를 쓰며 갑자기 놀라는 표저을 한다.

"왜 신관이 저렇게 못되어습니까? 어데가 편찮으서요?"

라고 근심스럽게 묻는다.

"아니예요, 내 얼굴이 그렇게 못되었나요?"

그제야 창섭이도 지어웃으며 면경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관자놀이가 움쑥 들어가고 얼굴이 백짓장같이 핼쓱하다.

화라는 매우 걱정되는 듯이 창섭을 거들떠보며

"암만해도 무슨 병환이 있는 듯한데요?"

"병환은 무슨 병환입니까?"

하고 창섭은 하염없이 웃었다.

"그러면 무슨 걱정되시는 일이 있어요?"

"아모 걱정도 없는걸요."

"그러시다면 만행이겠습니다. 어쩌면 신색이 저렇듯 그릇되실까요"

"낸들 알 수 있습니까. 아마 봄을 타느 게지요."

"왜 그렇게 말씀을 데면데면하게 하서요? 다정히 하시지를 못하고……"

하며 화라는 원망스럽게 눈을 살짝 깔아메친다.

창섭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화라를 바라보았다.

"왜 남을 보시기만 하세요. 하하하……. 제가 실언(失言)을 하얏는가 봅니다. 철없는 생도(生徒)의 말이니 선생님, 행여 노(怒)혀 마세요."

이 계집애가 나를 놀리는 셈인가 하고, 창섭은 불쾌한 생각이 와락와락 났으되 억지로 좋은 낯을 지으며 농담 비슷하게

"원 천만의 말씀도 다 하십니다. 실언이 무슨 실언예요. 화라씨도 딱하시지."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런 실언을 용서해주신다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번엔 화라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벙어리 모양으로 눈이 빛나고 입술이 움직이면서도 정말 벙어리 같이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럴 사이에 영숙이와 정애의 돌아오는 기척이 나매 화라는 얼른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선생님 계시니?"

아름다운 정애의 목소리가 묻는다.

창섭의 머리는 다시금 회오리바람에 내둘리는 듯하였다. 그러자 미닫이는 소리없이 열렸다. 열린 밑창 사이로 정애의 안타까운 모양이 나타난다.

"선생님 안녕하서요?"란 말과 함께 정애는 부끄러운 듯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나직이 숙인다.

창섭은 부신 것이나 본 듯이 눈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인사를 해야 되겠다고 느끼는 순간에 이미 때가 늦은 줄도 깨달았다. 답례를 그만두려 하면서도 제 뜻을 어겨 머리가 꾸벅하고 말았다. 창섭은 더할 수 없이 무안했다.

"에그, 오빠가 담배를 먹네."

영숙이가 뜰아랫방에 내려왔다가 시커먼 연기를 후후 뿜고 있는 창섭은 핏기 하나 없는 핼쓱한 얼굴에 쓸쓸한 웃음을 띈다.

"안잡수던 것을 잡수시니 말이지요."

"그야 안 먹던 것을 먹는 수도 있고 먹던 것을 안 먹을 수도 있겠지."

창섭은 심술궂게 담배 연기를 영숙의 얼굴에다 보낸다.

"에그, 오빠도!"

영숙은 연기 들어간 눈을 비비며 원망하였다.

"왜 연기가 그렇게 싫어. 나는 담배 먹는 것밖에 낙이 없는데."

"그게 무슨 약이예요?"

"그 약을 누이야 알 수 있나. 한 모금 두 모금 빨 적에 빠짓빠짓 타들어가는 것도 자미있고, 더구나 후 내뿜을 때는 내 가슴 안에 서린 연기조차 덩달아 나가는 듯 해서 속이 시원하단다."

"왜 오빠 가슴에 불을 땝니까? 무슨 연기가 나와요."

창섭은 제 말이 너무 지나친 것을 후회하는 듯이 입을 다문다.

영숙은 헤죽이 웃으며

"그런데 오빠한테 물어볼 말이 있어요."

"응! 무슨 말이야?"

"저어……. 오빠가 정애를 피하세요?"

창섭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내가 정애를 피할 리 있나."

하고 딴청을 부렸다.

"그러면 왜 정애가 오면 꼭 방에 들어낮아 계시고 올라오시지 않아요?"

"그것은…….저어…….무슨 정애씨를 피하는 게 아니라 요사이 좀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위선 어제도 올라가지 않았던?"

"어제만 해도 화라가 그렇게 조르지 않았으면 아니 올라오셨을걸 뭐. 그뿐예요? 넷이서 트럼프의 조우커 잡기를 할 적에 우리들은 먼저 떨어지고 오빠하고 정애하고 둘이만 남았는데 정애의 손에 있는 조우커를 오빠가 빼앗아 갈 때에 정애가 웃지 않았어요? 그때 오빠의 얼굴빛이 어떠한 줄 아십니까? 화라 말 마따나 기막힌 고뇌가 떠돌았어요. 그리고 판도 마치기 전에 「내가 졌습니다.」하고 휙 뛰어나가시지 않았어요."

"그것은……저………….그것은…………."

창섭은 떠듬거리었다. 그 움쑥 들어간 관자놀이에 거미줄같이 드러난 푸른 맥이 펄떡펄떡한다.

"화라가 그래요, 암만해도 오빠의 태도가 수상하다고……."

이렇게 말끝을 맺고 영숙은 제 오빠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창섭은 덤덤히 대답히 없었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있은 후

"누이!"

문득 창섭은 소리를 떨었다.

"네, 왜 그러서요?"

영숙은 심상치 않은 부르짖음에 깜짝 놀랐다.

"누이…………누이……내 태도가 수상하다고?"

창섭의 목소리는 벌써 울음에 껄떡인다. 호동그랗게 뜬 영숙의 눈에 제 오빠의 뺨에 스치는 눈물이 비쳤다.

"오빠! 왜 우서요, 네?"

영숙이가 이런 말을 물을 겨를도 없이 창섭은 허전거리는 손으로 덥석 누이의 손을 잡았다. 영숙은 제 오빠의 손이 불같이 뜨거움을 느꼈다.

"누이! 누이! 누이는 내가 왜 우는지 모를 것이다. 누이는 이 눈물 맛을 모를 것이다. 이 쓰고 떫은 눈물 맛을 모를 것이다. 나의 뼈와 살을 깎고 저미는 이 슬픔을 누이는 모를 것이다……"

하면서 창섭은 흐느껴 운다. 영숙은 그 큼직한 눈을 더욱 더욱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10

[편집]

세차게 흐르는 물결은 어설픈 방축(防築)으로 막을 배 아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열은 낡은 도덕관념에 눌릴 배 아니다. 눌리면 눌릴수록 안으로 붙고 속으로 타들어가다가 마침내 이런 헌누더기 도덕관념을 녹이고 마는 것이다.

도덕이 인조(人造)인 다음에야 사람의 생각을 따라 언제든지 가치를 전도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새로운 도덕을 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할래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 사랑하면서 사랑하여서는 안되는 고통, 이 고통으로 하여 살이 여의고 피가 마르던 창섭은 마침내 정애를 사랑해도 괜찮다는 이유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에게 아내가 없다는 증명이었다.

창섭을 그의 남편이라 하고 그를 창섭의 아내라고 남들이 부르는 여자 하낙 창섭의 시골집에 있기는 있다.

법률상으로 보든지 민적(民籍)상으로 보든지 창섭에게는 뚜렷한 아내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가 만일 창섭의 아내일진대 창섭의 의사로 정할 것이 아니냐. 그러하거늘 시방 남들이 부르는 창섭의 아내는 창섭의 의사로 정한 것이 아니다. 아무 철모르는 열세 살된 어린아이가 어른 시키는 대로 사모관대를 하고 어떤 집에 가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처녀와 절을 주고받았을 따름이요, 그렇게 하면 자기가 그의 남편이 되고 그가 자기의 아내가 되는 줄 몰랐으며, 또 피상적으로 남편이란 명칭과 아내란 명칭을 들어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함인 줄 알지 못하였다.

의지 있은 뒤의 행위라야 효력이 있는 것인즉 의지 없는 행위에 어찌 책임을 질 수 있으랴. 다만 그것은 허수아비의 장난에 불과한 일이다. 그렇다, 창섭은 허수아비로 그의 남편이 되었고 그도 허수아비로 창섭의 이내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창섭은 마음이 있고 살아 있는 사람이어든 어찌 허수아비의 아내 있는 것으로 아내가 있다 하랴! 그러므로 창섭은 아내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결론을 얻으매 창섭의 가슴은 갑자기 환해지는 듯하였다. 이 환해진 것은 사랑하는 이를 사랑할 수 있는 기쁨의 탓도 탓이려니와 지질렸던 정화(情火)가 거리낌없이 타오르는 까닭도 까닭이었다.

지질렸던 그때는 시꺼먼 연기에 숨이 탁탁 막히는 듯 하더니 활활 이는 이때는 새빨간 불길에 애가 절쩔 끓는 듯 하였다.

그때도 견딜 수 없었지만 이때도 견딜 수 없었다.

(이 사랑을 정애에게 고백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문제였다.

(정애가 오거든 꼭 붙들고 나의 마음을 저저히 말해버리리라.)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가 없었다.

(에라, 편지로 해버릴까 보다.)

그는 밤중에 이불을 걷어치우고 일어나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몇 장을 버리고 몇 장을 고쳐 썼다.

(이것을 보면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염려로 얼마를 망설이다가, 어느날 저녁 몹시 열이 띤 그는 이것저것 불계하고 그 편지를 우체통 속에 들이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