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새는 안개/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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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주사위는 던져지고 말았다.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창섭은 번민하면서도 오뇌하면서도 밤이고 낮이고 정애애게로 날아가는 그 편지를 꿈꾸고 있었다.

그렇다, 그 편지는 날아가고 있었다. 날짐승이나 무엇 같이 그 편지는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누른 복장을 하고 검은 가방을 떨렁거리는 체부의 꼴이란 이상하게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창섭의 눈에는 공중을 술렁거리고 떠나가는 흰종이조각이 보일 뿐이었다. 이제 그의 머리에 떠도는 것은 그 어여쁜 입모습도 아니었다.

언제든지 쫓을 수 없고 물리칠 수 없던 그 생글거리는 눈동자도 아니었다.

오직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떠나가는 편지를 꼭 붙잡는 보얀 손이 얼씬거릴 뿐이었다.

어젯밤부터 그는 자기에게 날아노는 편지를 눈뜨고 낮아서 꿈꾸기 시작하였다.

아니다, 가는 종이조각을 꿈꾸는 동시에 오는 종이조각도 꿈꾸었다. 함이 마땅할는지 모르리라.

쌍쌍이 나는 제비 모양으로 방향을 달리하여 다 같은 속력으로 내닫는 편지 두 장을 눈앞에 그리기도 하였다.

시방도 그는 자기에게로 날아오는 글발의 상상에 얼을 잃고 있었다. 편지를 띄운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으니 정애가 답장을 한다면 오늘쯤은 회신을 받기도 할 때다.

그는 오늘 온종일 방안에 꼭 들어앉아 있었다. 오직 한 일을 기다리기에 심신이 더할 수 없이 피로하였으되 그의 신경은 칼날같이 날카로왔다.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나도 편지가 오는가 하며 쓸데없이 가슴을 두근거렸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서향(西向)인 그 방 미닫이의 옷머리에 머물렀던 마지막 햇발조차 사라지려 하건마는 기다리는 편지는 감감하게 소식이 없다.

"창섭이!"

문득 문간에서 이렇게 부르는 소리가 난다. 그의 머리에 (편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그의 머리에 번쩍였다. 체전부가 「창섭이!」하고 부를 리 만무하였으되, 기다림에 지친 그의 넋은 이런 터무니없는 환각조차 하게 되었다.

문간에는 다 해어진 고구라양복에 추물이 다 된 캡을 쓴 학생 하나와 옥양목 두루마기에 역시 캡을 쓴 학생인 듯한 청년 둘이 서 있다.

창섭은 꿈에도 생각지 않은 무슨 기막힌 일이나 딱 당한 모양으로 놀란 듯 얼빠진 듯 눈을 멍하게 뜨고 있다.

창섭의 이 얼빠진 모양에는 조금도 상관치 않은 듯이 그 코쿠라양복 입은 청년이 뚜벅뚜벅 창섭이 가까이 들어서더니 부서지라고 손을 쥐어 흔든다.

떡 벌어진 어깨판, 거무튀튀한 얼굴빛, 얼른 보기에는 매우 위엄스럽게도 건강스럽게도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알맞은 코 높이로 동그스름한 턱이 이쁘장도 한 생김새로되 진한 먹으로 「一」자를 쭉 그은 듯한 시커먼 눈썹이 얼굴에 늠름한 기운을 돌게 하여 또 그 눈썹과 어울리지 않게 조그마한 눈은 「그까짓 것」하는 세상을 넘보는 듯하다.

그리고 또 건강은 해 보이지만 기실 검누른 살이 시들시들 한 것과 벌써 이마에 그려진 두어 줄 주름을 보면 얼마나 신고간난(辛苦艱難)에 부대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말이 났으니 그의 성격마저 대두리만 따두자.

그는 윤치국(尹致國)이란 청년인데 남에게 달려 지내고 매여 지내기를 딱 싫어한다. 얼른 말하면 그는 구석을 싫어한다. 제 행복보다는 제 목숨보다도 자유를 사랑한다. 그는 고통과 곤핍(困乏)의 비싼 값으로도 자유를 사지 않고 견디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는 제 자유를 압박하고 구석하는 모든 것과 싸왔다, 또 싸우리라. 그리고 옳든 그르든 제가 한번 주장한 일이면 뻑뻑하게 세운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고집이 하늘을 찌른다고 탱천(?天)이라는 별명조차 들었다.

창섭과 치국은 고향이 같아서 사귄 지도 오래지만 그 비례로 우의도 두터웠다. 누구누구하여도 창섭이와 가장 친한 사람은 치국이었고 치국의 가장 좋아하는 벗은 창섭이었다.

어디까지나 굳세고 우락부락한 치국이와 어디까지나 보드랍고 얌전한 창섭이는 그 대차적 성격에 있어 서로 합한 것이리라.

창섭의 손을 흔들고 있던 치국은 다짜고짜 없이,

"나는 내일 떠나겠네."

쉰 듯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한다.

치국은 집안이 구차한 탓으로 겨우 제 고장 고등보통학교 二년급밖에 치르지 못하였다.

향학열이 불같이 타오른 그는 주머니에 쇠천샐립없이 서울로 뛰어올라와 갖은 곤란을 무릅쓰고 강습소에 다니어 가까스로 중급 정도의 지식을 얻었다.

서울 있으나 동경에 가나 돈 없기에 매한가지고 곤란하기도 매한가지라 하여 그는 일본에 건너가기로 작정하였다.

내일 떠나겠단 말이 곧 이 뜻이다.

"응? 내일 떠나?"

창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무안새김으로 과장스러운 표정을 하였다.

"잠깐 들어가세 그려."

하다가 조선옷 입은 키 좀 큰 청년을 보더니

"어이구 박공(公) 오섰습니까?"

하며 인사를 했다.

"김공 뵈온 지 퍽 오래이었습니다."

하고 키 좀 작은 청년이 창섭과 박(朴)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창섭에게 말을 건넨다.

"강공, 참 오래간만입니다. 왜 한번도 놀러 오시지 않았어요, 한번 가뵈옵자, 뵈옵자 하면서도……."

"김공, 어서 두루막을 입고 나오시지요."

성미가 괄괄한 듯한 박은 김과 강의 인사를 가로막으며 조급한 듯이 재촉을 한다.

"참 치국이가 떠나는데 하도 섭섭해서 오늘 저녁이나 같이 먹으려 하였습니다. 옷을 입고 나오시지요."

차근차근한 강은 이렇게 설명한다.

창섭은 아니 나갈 수 없었다.

네 청년은 어느 조그마한 청요리집으로 왔다.

"우리 오늘 저녁에 흠뻑 먹읍시다."

박이 미리 선언을 한다.

"얼마든지 먹지."

치국이가 쾌할하게 찬성한다.

"그런데 우리, 술은 무엇으로 할꼬?"

나중에 제일 주머니가 넉넉해서 치국의 일본가는 여비도 보태주고 또 오늘 저녁 쓰임도 네가 도맡아내려는 강세창(姜世昌)이 이런 제의를 한다.

"우리 오늘 배같을 먹세, 먹고 좀 취해야지."

오늘 저녁에는 꼭 먹고 취해야 될 일이 있는 것처럼 박이 서슴지 않고 대답을 한다.

창섭은 놀란 듯이 박을 쳐다보았다.

박이 넷 중에서 술이 가장 세었다. 그의 이름은 사천(思天)이니 공업전문학교를 한 일년 다니다가 공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학교를 집어치우고 요사이는 일정한 공부도 하지 않으며 다만 이따금 연설회와 토론회에 나가는 것을 학과 겸 놀이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무엇이든지 좋지."

치국은 그 조그마한 눈을 번쩍이며 부르짖었다.

"정종으로 합시다."

세창이가 이의(異議)를 한다.

정종과 재갈에 대하여 사천과 세창 사이에 한참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사천이가 꿋꿋이 세움으로 하는 수 없이 배갈로 정하게 되었다.

어깨가 앞으로 굽고 선잠을 깬 듯한, 퉁명스러운 얼굴을 가진 중국인 보이가 치렁치렁하게 딸면 네 그릇과 요리 몇 접시와 배갈 반 근을 들여왔다.

첫 잔은 세상 없어도 최후의 일적(一適)까지 단숨에 말리는 법이라 하여 모두들 배갈 한 잔씩 마셨다.

여기저기서 카아 카아 하는 소리가 난다. 창섭은 목구멍이 쇠-함을 느끼자, 뱃속에서 난데없는 불이 활활 일어나는 듯하였다. 제 얼굴이 붉은가 급려(急慮)하며 그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세창의 얼굴은 주홍을 부은 것 같고 치국의 얼굴은 다갈색으로 번쩍인다. 오직 사천만 늠름하게 눈 가장자리가 잠깐 발그레할 뿐.

술은 또한번 돌았다. 술이 세 번째 돌자 사천은 넘을 듯 넘을 듯한 술잔을 들고 일어선다.

"말씀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하고 카악 기침을 하더니,

"여러분! 누가 낙을 싫어하며 고(苦)를 좋아하겠습니까?"

라고 연설조로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 있은 뒤에 낙이올시다. 고 없이 얻은 낙은 값없는 낙이올시다. 많은 가격, 많은 희생으로 얻은 낙이면 그 낙도 무상한 낙이겠지요. 장갑(裝甲)자동차와 같은 의지와 폭발탄 같은 감정을 가진 윤군이…………."

듣는 이의 입술에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하는 이도 제 말씨에 스스로 만족한 듯이 빙긋 웃었다.

"여보게, 앗게 앗어! 자네는 무슨 연설회에나 나온 줄 아나, 장갑자동차란 어데서 주워들은 문자인가?"

세창은 웃음을 참지 못하여 이렇게 제지하였다.

사천은 엄연(奄然)하게 얼굴빛을 바루며

"그게 무슨 버릇없는 소리야. 남의 말이 끝도 나기 전에……. 그 윤군이 모든 가난을 무릅쓰고 멀리멀리 동경에 부급(負?)하랴 합니다. 그는 맨주먹으로 이역수토에 고학하러 가는 길이올시다. 우리는 그의 튼튼한 몸과 꿋꿋한 뜻이 반드시 크게 이름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의 광명이 찬란할 장래를 미리 축복하며 또는 그의 건강을 비는 뜻으로 다같이 이 잔을 마십시다."

"히여! 히여!"

모두들 일종의 감격으로 그 잔을 말렸다. 그런 뒤에 비틀비틀 하며 치국이가 일어선다. 그는 말도 하기 전에 팔부터 내두르며,

"박군의 말씀은 감사하게 들었습니다. 과연 나의 주머니는 텅 비었읍니다마는…………."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한층 소리를 높여

"이 주먹과 팔이 있으니 어데를 가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한 신고(辛苦)와 여하한 곤란이 있더라도 박군의 말과 같이 장갑자동차와 같은 의지로 같아 없애겠습니다."

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앞뒤로 굽혔다 폈다 하면서 남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한동안 지껄인다. 그의 눈에는 희망에 타는 불꽃이 주렁주렁 흩어지는 듯하였다.

이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창섭의 가슴은 취중에도 말할 수 없이 쓸쓸해짐을 느꼈다. 남은 맨주먹으로 동경 유학을 기운차게 해보려 하거늘 학비가 떨어졌다고 울며 불며 그만 집으로 돌아온 저 자신이 내뱉고 싶었다.

남은 동경(憧憬)에 뛰고 희망에 타거늘 저는 방구석에 의기소침하게 처박혀 풋사랑에 속을 썩이는가 하매, 부끄러워 얼굴도 들 수 없었다.

(그런데 편지는 왔는가, 안왔는가?)

문득 창섭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2[편집]

그날 밤 거기서 취흥에 겨워 곡조도 안된 창가를 함부로 외치기도 하고, 되지도 않은 춤을 추었다기보다 뛰기도 하며 요리 담은 접시를 장구삼아 두들기다가 셋이나 깨어도 놓고 열두점이나 되어 그들은 각각 제 숙소로 헤어졌다.

난생 처음으로 술이 잠뿍 취한 창섭은 평일의 얌전한 걸음걸이와는 딴판으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길을 휩쓸며 삼촌의 집으로 돌아왔다.

제 방에 왔을 제 (편지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또 번개같이 번쩍였다. 그는 핑핑 돌리는 시선을 책상위에 던졌다. 그의 눈은 열병환자와 같이 빛난다.

그는 그 위에 얹힌 소쇄한 분홍봉투를 본 까닭이다.

「市內 安國洞 一七番地 金昌燮 先生앞」이라 쓴 철필글씨가 그의 핏발이 선 눈에 아름답게 비치었다.

그는 허전허전하는 손으로 봉투 웃머리를 찢었다. 편지와 함께 봉해 넣은 듯한 향수 냄새가 소르르 창섭의 단내나는 콧구멍을 엄습하였다. 취한 술이 일시에 깨는 듯하였다.

주신 편지는 반갑게 뵈았습니다. 저를 그렇게도 사랑하진 단 말씀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알 길이 없사외다. 저도 선생님에게 숨은 사랑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녁 일곱 점에 남산공원으로 갈까 하오니 여기서 뵈옵게 되오면 저의 가슴에 맺히고 맺힌 회포를 저저히 아뢰올까 하옵내다.

사연은 단지 이뿐이었다. 이 간단명료한 글발의 의미를 창섭은 한번 보고는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을 고쳐 보고는 또 보는 가운데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 남산공원에서 만나자는 말이 낙인(烙印)과 같이 그의 머리에 박혔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손에 편지를 편 채로 들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도로 방에 들어와서 그 편지를 차근차근 접어 제 봉투에 넣었다. 넣은 것을 또 집어들고 처치할 곳을 모르는 듯 또 한동안 망설이다가 책상 빼닫이를 열고 그 속에 떨어뜨렸다.

그제야 적이 망므을 놓은 듯이 문지방에 걸터앉아 구두를 신고 나더니 구두 신은 채로 또 방에 뛰어들었다.

책상 빼닫이로부터 그 편지를 꺼내어 이번에는 황급히 제 주머니에 넣는다.

마치 누가 곁에서 그것을 빼앗기나 할 것 같다. 그리고도 미심한 듯이 편지 넣은 주머니를 만져보고 만져보고 하면서 살그머니 대문을 열고 나왔다.

사람 없는 한길을 그는 풍우(風雨)같이 달음질하였다. 숨도 가쁘고 다리도 아파 잠깐 평보(平步)로 걸어 그때마다 축축한 밤바람이 그의 끓는 머리와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혼란하던 머리가 냉정해짐을 따라 약속한 시간은 벌써 지낸 일, 밤이 이렇듯 깊었으니 정애가 지금껏 자기를 기다릴리 만무한 일, 시방 시근벌떡거리고 뛰어가는 것이 헛일이고 우스운 일인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 않았다. 숨만 조금 돌리면 연해 달음박질을 마지 않았다. 시간이야 늦었든지 말든지 애인이야 여기 있든지 말든지 자기는 가보아야 될 의무가 있는 듯싶었다. 더구나 지금 그의 전신에 넘치는 행복의 느낌은 이러지 않고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새로 세시가 가깝도록 그는 헛되이 남산공원, 한양공원을 해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제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편지지를 펼혀 놓았다. 그는 번개같이 편지 한 장을 TJ 가지고 다시금 집을 뛰어나왔다.

정애의 집 애문에 다다르자 그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두근거렸건만 여의(如意)하게 그 편지를 닫혀 있는 문틈으로 멀어넣을 수 있었다.

밀어넣자 그느 무슨 맹수에나 쫓기는 사람 모양으로 달음박질하였다.

실실이 훌린 몸을 요 위에 누일 때는 하늘 한 가에 비스듬히 걸린 지새는 달이 꿈꾸는 듯 조는 듯 광채 없는 오리알 빛으로 사라지려 할 적이었다.

3[편집]

몸은 무슨 무거운 돌에나 지질린 듯이 착 깔아졌건만 암만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윽고 지걱거리는 물지게소리가 들같이 잠잠하던 정적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싸늘싸늘한 새벽 공기가 들어오는 줄 모르게 방안에 스며 흘렀으되 그는 열병에나 걸린 사람같이 온몸에 열이 불일 듯하였다.

그는 참다 못하여 안으로 향한 미닫이를 열었다. 신선한 실바람이 냉수처럼 그의 불덩이 같은 이마를 핥는다. 그느 상쾌하다 하였다.

이윽고 동녘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스르르 헤어졌다. 그러자 구름자락이 눈빛으로, 그렇다 밝고 깨끗한 눈빛으로 피어날 겨를도 없이 해님의 앞길을 밝히는 홍초롱모양으로 붉은 놀로 변하였다. 그 뒤를 이어 싱그러운 해님이 그 광명에 번쩍이는 윤곽을 쑥 나타내었다.

창섭은 눈물이 날 듯한 행복을 느꼈다.

이 밤이 샘을 따라 그의 검은 운명의 밤도 새어가는 듯 싶었다.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세계가 열려가는 듯 싶었다. 환희와 행복과 시(時)와 미(美)가 있는 여태껏 꿈에도 모르던 아름다운 세계가 다가오는 듯하였다. 그 아픔다움 세계의 여왕 모양으로 정애의 환영이 다시금 그의 눈앞에 떠돌았다. 그의 철색진 뺨에 해죽 웃음이 흘렀다.

조금 있노라니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는 상연(爽然)한 기분으로 자리를 떠났다.

온 밤을 잠 한 숨도 못잔 피로도 그에겐 없었다.

그는 제손으로 대야에 물을 떠다 세수를 하였다. 차디찬 물에 얼굴을 씻음이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 절실히 느꼈다. 어째 새로운 생활의 제일보를 내디딘 듯 싶었다. 그는 행복이었다.

아침을 마치자 달착지근한 고달픔이 그 상쾌한 기분을 호리고 Em 흐리더니 그만 코를 꾸벅꾸벅 꿈의 나라로 끌어가버렸다.

얼마를 잤는지 저도 몰랐다. 그가 꿈과 현실 사이에 방황하고 있을 때 무슨 힘이 가볍게 제 어깨를 흔듦을 어슴푸레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쉴 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향내를 느꼈다. 그 향기가 노곤한 몸에 사르르 녹는 듯한 쾌감을 주었다.

달착지근한 잠이 다시금 그 철기 같은 날개로 그의 의식을 감기 시작하였다.

그럴 즈음에 아까보다 좀더 강한 동요(動搖)를 억세게 받았다.

잠오는 눈을 비빈 그는 제 앞에 앉아 있는 화라를 보았다. 그 보얀 얼굴이 꿈꾸는 창섭의 눈에 아름답게 보였다.

원원이 그가 화라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었다. 도리어 그 자유자재한 쾌활한 담소를 좋아도 하였었다. 그 가무러지는 듯한 실눈과 새빨간 입술을 미상불 어여쁘게 보았었다. 그러나 정애에게 심신이 쏠린 그이라 화라의 그런 미점(美點)이 그에게 매력을 부릴 어느 겨를이 없었을 따름이다.

창섭은 놀라 몸을 소스라쳤다.

(정애가 같이 오지나 않았는가?)

"단잠을 깨시게 해서 매우 미안합니다."

하고 싱글벙글 웃는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내가 여북해서 웃겠니, 하는 빛이 있었다.

창섭은 무안해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낮잠을 그렇게 주무세요? 아무리 봄말이 고단하다기로서니."

화라는 의미있게 또한번 웃었다. 그속에는 분명히 빈정되는 가락이 있었건만 창섭은 그의 기색을 살피지도 않았고 하는 말에 주의도 하지 않았다. (정애가 같이 왔는가, 오늘 저녁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하였으니 시방부터 올 리가 없는데……)

창섭은 제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애씨하고 같이 오셨습니까?"

창섭은 부지불각(不知不覺)에 불쑥 이런 말을 물었다. 묻고 나서 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말 한마디에 더욱 변한 것은 화라의 얼굴빛이었다. 그 얼굴에는 마치 남에게 더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분노와 살기가 서렸다.

"정애가 오고 아니 온 것을 내가 어찌……"

급히 말을 변한다. 그러나 날카로운 어조로

"정애는 오지 않았어요. 저 혼자만 왔습니다…… 그런데 정애를 왜 찾으서요?"

하는 그 입술은 경련적으로 떨리었다.

화라의 얼굴에 이런 변화가 생긴 줄도 모르고 창섭은 제 부끄러운 생각만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변명하였다.

"아니 늘 같이 다니셨으니 혹 같이 오셨나 하고."

"네에, 그러시겠지요."

하고 입을 삐죽인다. 삽시간에 화라의 얼굴빛은 또 달라졌다. 아까의 살기와 분노가 사라진 대신에 쓸쓸한 비웃음이 다시 자리를 잡고 말았다.

(어데 시방 시작된 일이기에 내가 이렇게 화증을 낸단 말이냐. 참 우스운 일도 있다.)

그 얼굴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째 정애만 사랑하십니까, 저도 좀 사랑해 주십시오."

화라는 눈을 치고 웃는다.

창섭은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일부러 쾌할한체 고개를 번쩍 들며

"원 별말씀도 다 하십니다그려. 무슨 정애씨만 사랑할 리가 있습니까?"

하고 웃음으로 엄벙하였다.

"그러면 저도 정애와 같이 사랑하신단 말씀이오?"

"그야 물론이지요."

창섭은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으되, 내심(內心)엔 거짓말한 것이 불쾌하였다.

"참말일까요?"

하고 재차 묻는 화라의 안색은 다시금 변하였다. 이제 온얼굴이 불이 붙는 듯, 번쩍 빛나는 듯 하였다. 그리고 열기 있게 창섭을 바라보는 눈은 핏발이 선 듯하였다.

(내가 정애를 사랑하는 줄 이 계집애가 아는구나.) 창섭은 생각했다. (그래 시방 나를 놀리는 모양이군. 그런데 인제 몇점이나 됐을까? 거진거진 저녁때가 되었나?)

저대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제 문득 터지는 듯한 상대자의 너털웃음을 듣고 깜짝놀랐다.

"내가 미쳤나. 왜 사랑타령을 하고 앉았어. 창섭씨가 무슨 내 애인도 아닌데……"

화라는 스스로 빈정대는 듯이 이런 말을 하며 웃는다.

저펴의 기생기 어떻게 변화하는 것을 도무지 상환치 않는 창섭은 그 웃는 것만 기뻤다. 그의 입은 마칠 사이 없이 벙글벙글 행복된 웃음이 넘칠 뿐이었다.

창섭의 벙글거리는 양을 바라본 화라는 새무룩하게 입을 닫는다. 그 표정은 저편을 해치려다 도리어 이익을 준 사람 모양으로 애닯음과 뉘우침을 나타내고 있었다.

"저어 선생님, 어젯밤 아모 데도 나가시지 않았었습니까?"

조금 있다가 화라가 또 침묵을 깨뜨렸다. 창섭의 얼굴에 박은 날카로운 시선을 옮기지 않으며.

"어젯밤 말입니까? 마침 동경 가는 친구의 송별회가 있어서 거기 갔다가 늦게야 돌아왔습니다."

창섭은 무슨 변명이나 하듯이 바른 대로 외어버렸다.

"네 그렇습니까?"

하고 인제야 알겠구나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다가 제물에 어깨를 으쓱으쓱한다.

제 속에서 치받쳐 오르는 무슨 발작을 참느라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일어서며 많은 실례를 하였다는 말을 한체만체 얼른 미닫이를 열고 나간다.

막 대문을 돌아설 화라는 북받치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건만 창섭은 미닫이를 열고

"아직도 오정(午正)밖에 되지 않았네."

4[편집]

정오밖에 아니되었던 시간이 어느덧 오후 아홉점에 가까워간다.

(어째 이때껏 오지를 않나? 약속한 시간이 지난 지가 오랜데……) 창섭은 남산공원의 음악당 -음악당이라고는 하지마는 여기서 음악을 하는 것은 한번 보도 듣도 못하였다- 곁으로 이리저리 거닐며 초조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마디고 마딘 시간을 보내다 못하여 다섯점이 채 못되어서 집을 뛰어 나왔었다. 만일 길가는 사람들이 주의해 보았던들 그의 걸음걸이는 하릴없이 춤추는 것 같았으리라. 그에게는 남산에 가는 것이 곧 행복의 모뿌리에 오르는 일이었다.

게을한 때의 나래가 나느니보다 기어감을 따라 시가를 점치는 전등도 웃음을 건네는 듯하였다. 우수수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도 풍류를 아뢰는 듯하였다.

그러나 애마르던 정각이 지나고 이제나 오나 이제나 오나 하는 사이에 시간이 얼른 얼른 날아감을 따라 갖은 염려가 그의 머리에 물끓듯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하인이 대문간을 쓸 적에 그 편지를 무슨 헌 휴지쪽만 여겨서 쓰레기통에 쓸어넣지나 않았나? 이 티미한 하인이 그것을 불쑥 정애의 모친에게나 부친에게 전하지나 않았나? 과년(瓜年)의 딸을 둔 부모의 마음은 염려가 많을지니 그것을 떼어보지나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매 창섭의 등에 찬소름이 끼치는 듯하였다.

무서운 친권(親權)을 부릴 대로 부리며 탄식도 하고 책망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울고 쓰러진 정애의 애처로운 모양이 보였다.

(그래도 혈마 그럴 리야 있을라구.)

창섭은 스스로 제 상상을 부정하였다. 그 상상을 믿음에는 그는 너무도 행복의 기대에 발버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도 제 상상의 그릇됨을 증명하려 하였다.

(아모리 부모란들 남의 편지를 함부로 떼어 볼라구.)

그러나 이것만의 이유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또 그 겉봉에 발신인으론 영숙의 이름을 썼으니 누가 보더라도 정애와 같은 동성의 편지인 줄 알고 조금도 의심치 않았으리라.)

이렇게 주워대고 보니 적이 마음은 놓이건만 그러면 아니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끄럼 많고 망설임 많은 처녀의 마음이 그의 발길을 멈춤인가? 차섭은 홀로 싱긋 웃었다. 아니 그런 까닭도 아닐 것 같다.

편지를 하기는 이 편에서 먼저 하였다 할지라도 대담스럽게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먼저 창하긴 저편이었다. 남자 아닌 여자로 처녀로 그런 대담한 청을 할 지경이면 그 연애도 여간 뜨거운 게 아니리라. 백열된 연애의 불꽃에야 수기(羞氣)가 아니 탈 수 없을 듯 싶었다.

창섭은 정애가 자기에게 가는 최초의 편지 -이후로는 여러 백, 천번 올것이다-를 쓸 때의 고동하던 가슴과 또 그날 저녁 자기를 기다리던 마음을 한번 상상해 보았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날 발을 헛되이 애를 쓰고 밤바람을 쐰 까닭에 병이 난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올 마음은 간절하건마는 오지를 못하는가?

설령 정애야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려고 애를 쓰건마는 딸의 몸을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이 아끼는 부모가 들어서 어디 무엇하러 가느냐고 미주알고주알 캐면서 달래고 말림인가 하였다.

그러나 꼭 정애를 만나리라 불덩이같은 믿음이 이 모든 불길한 이유를 사르고 녹여버렸다. 그의 눈은 또다시 사람의 올라오는 길목을 바라보았건만 그인 듯한 모양은 보이지 않았다.

반 남아 서(西)로 기울어진 달은 창섭의 외로운 그림자를 땅바닥에 길게 누이며 밤은 자꾸자꾸 깊어간다.

5[편집]

그날 밤을 거기서 거의 밝히었건만 끝끝내 정애는 오지 않았다.

그 이튿날 해도 저물래 행여 집으로 찾아올까 하는 그윽한 희망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루 지나 이틀 지나 사흘, 나흘, 닷새를 지냈으되 실약(失約)에 대한 이렇단 저렇단 연유를 들을 수 없었다.

영숙이가 학교 돌아오면 무슨 소식을 전해줄까보아 기색을 살피기도 하고 또는 그런 말을 옮길 적당한 기회를 일부러 만들어도 봤건만 영숙은 딴청만 부렸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을 썩이다 못한 창섭은 제 편에서 영숙에게 정애의 학교 다니고 아니 다님을 살짜기 물렀건만 정애가 여일령하게 등교한다는 간단한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창섭은 남산공원에서 하던 의심을 다시 한번 되풀이해보았다.

학교에 다닌 것을 보면 병이 났다손 치더라도 이미 쾌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처녀의 조심과 부그럼 탓이라 할까. 아무리 정애를 어리고 깨끗하게 생각하더라도 동이 닿지 않는 수작이니, 사랑을 허(許)하고 밀회소(密會所)까지 지정한 여자에게 그렇듯이 지나치게 부끄럼과 조심이 있을 수 있으랴.

그는 자기한테 온 편지가 정애가 한 것이 아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애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 튼튼히 믿는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그리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 줄 믿는다.

남성에게 공통인 자존심과 자만심이 그에게도 없지 않았다. 외모로든지 재화(才華)로든지 남에게 우월감을 가진 그는 그런 마음이 도리어 많고 장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리라.

정애의 편지를 받을 때에도 (그러면 그렇지!)하는 마음이 그의 속 어디엔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남은 것은 부모에게 들키지나 않았나 하는 염려이로되 이 또한 박약한 이유이니 만일 부모의 엄중한 감시 밑에 대문밖 출입을 못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우편으로든지 또는 영숙을 통하든지 제 소식을 알려줄 기회가 방편은 얼마라도 있을 듯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창섭이 자신도 그 후 한달을 지나고 두 달을 지났건만 우편을 통하거나 또는 영숙을 통하거나 그의 근황(近況)을 묻지도 않고 저의 정열을 하소연하지도 않았다.

이 이상한 수수께끼를 푸느라고 정신도 잃었거니와 한번 꺾인 용기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음이며 또 남성된 사람으로도 용서치 못할 일이었다.

날이 감을 따라 회박은 해졌으되 그는 의연히 정애로부터 소식이 이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따스한 바람에 더운 김이 섞이기 시작한 어느날 밤이었다.

창섭은 며칠 밤의 못잔 잠의 보충을 하느라고 저녁먹던 맡에 이불을 쓰고 누웠는데 한껏 고단한 몸이 흐릿하게 까라지다가도 다시금 정신이 쇄락해지고 맑아지고 해서 깊은 잠이 들지를 않았다.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는 사이에 밤은 아마 열점 가까이 되었으리라.

이때 저 있는 방에서 대문으로 통한 조그마한 중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가만가만히 제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창섭이 저의 착각이 아닌가 하고 더욱 귀를 기울일 사이에 벌써 그 방 뒷문을 두들기며 "김선생님 계세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

창섭은 놀란 듯이 이불을 걷어치고 일어앉을 때 문밖에서 "김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소리가 또 난다.

이 순간에 정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종의 전율이 되어 그의 몸에 끼쳤다. 그는 조심조심 쌍바라지를 열었다. 문밖에는 웬 나이가 열너덧 되는 아이가 서 있었다.

"김선생님이십니까? 저어 김창섭씨라는…………"

창섭의 기색을 살피며 그 아이는 미심한 듯이 또 한번 따진다.

"왜 그래?"

"김선생님이십니까?"

"그렇다."

그 아이는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허리를 굽혀 무엇을 집어든다. 그것은 조그마한 사기화분에 불그스름한 꽃방울이 조롱조롱 맺힌 월계화 한 포기를 심은 것이었다.

창섭은 어리둥절 그애의 하는 양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애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들어 말없이 창섭을 준다.

"이것은 누구한테 오는 것이냐?"

창섭은 화분에 손을 내밀며 물었다.

그 애는 그 말엔 아무 대답도 않고 손을 늘여 뒤꽁무니에서 편지 한 장을 내준다. 그러자 마자 「이것을 누가 보내더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그 애는 쏜살같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아이의 달아나던 뒤꼴을 보던 의아해 찬 시선이 제 손에 든 편지에 돌아왔을 제 온몸을 뒤흔드는 기쁨이 거기 있었다.

앞에는 간단히 「김선생님 앞」이라 쓰고 뒤에는 부친이의 이름이 없었으되 한번 그 연분홍 봉투를 다시 볼제 묻지 않아도 정애의 정찰(情札)인 줄 깨달았다. 너무도 돈담무심하다 하여 정애를 얼마큼 미흡하게 생각하던 감정은 멀고먼 옛날 꿈속에서 생각한 것 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정애가 가만 있을리 있나? 과연 그는 나를 사라하였군. 수줍게 뜨겝게 사랑하였군! 밤을 타서 나의 애졸이는 마음을 위로하려고 이 꽃을 보낸 것 이로다! 불가피의 사정으로 못 오는 저를 대신하여 이 꽃을 보낸 것이로다!)

그는 눈물이 핑 돌이만큼 감격하였다. 그렇다. 서양 소설에나 있을 법한 고요한 밤에 남몰래 꽃을 보내는 이 시적(詩的) 행위에 그는 한껏 감격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편지도 보기 전에 그 환분을 안는 시늉을 하며 꽃에다 입술을 대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 눈물이 걸씬거리는 눈엔 웃음이 떠돌았다. 애인이 보낸 꽃에 키스한제 싯적 행위가 더할 수 없이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그는 올래야 올 수 없는 무슨 싯적 사정을 상상하면서 그 겉봉을 뜯었다. 그러나 그 편지의 사연은 그야말로 천만의외(千萬意外)였다.

선생님의 존안(尊顔)을 못 뵈온 지 어느덧 두 달이 가까웠읍니다. 그 사이 선생님 기체후일향만강(氣滯候一向萬康) 하셨는지요. 저는 그동안 졸업시험인지 무엇인지 치르느라 죽을 애를 썼습니다. 그 후에는 여러 가지 뒤숭숭한 사정이 있사와 오뇌(懊惱)와 번민으로 그날그날을 보내느라고 선생님을 가 뵈올 틈도 없었습니다그려. 그런데 저는 내일 식전꼭두로 어데를 좀 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 일주일 걸릴 것도 같사오나 어쩌면 여달포가 될는지도 모를일이 외다. 오늘 저녁으로 꼭 선생님을 한번 뵈옵고 싶은 마음은 불같습니다마는 벌써 아홉점이 지났으니 안에서 주무시기도 쉬울 것이고 처녀의 몸으로 밤 늦게 선생만 찾아뵈옵는 것도 어째 무얼한 듯 싶어서 그만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선생님! 한동안 가르침을 듣자올 수 없게 되지 않아요? 이것이 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섭섭하였습니다. 마치 무엇을 잃은 것 같애요. 제 마음 탓인지는 모르나 선생님께서도 혹 어째 아니 오나 하고 기다리며 궁금해 하실 듯 하와 생각다 못한 저는 외로운 객창(客窓)에 조그마한 위로나 될까 하고 이 꽃을 보내나이다. 저는 빛깔이 아름답고 송이가 틈스러운 이 꽃을 사랑합니다. 선생님도 행여나 사랑해 주실는지요? 총총히 두어 자로 줄이오니 못 뵈옵는 동안 내내 안녕하세요! 네!

화라는 올림

편지 보기를 마친 창섭은 얼 없이 바람벽을 바라보며 (화라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정애하고 남산공원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날의 낮에 다녀간 후로는 화라도 발을 끊고 오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