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새는 안개/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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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영숙의 집에서는 조석(朝夕)때면 전가족이 모두 안방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항례(恒例)였다. -전가족이라 하여도 행랑 사람 겸 드나하인 겸으로 있는 할멈의 내외를 QO고 보면 영숙의 양친과 영숙이와 창섭이 네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이 네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상(床)은 단 둘뿐이니, 창섭은 삼촌과 겸상이었고 영숙은 어머니와 겸상이었다.

이렇듯이 단촐하고 따뜻한 가족이건만 평상시엔 피차에 별로 교섭이 없었다.

부친은 어디인지 노상 출입을 하고, 모친은 안방에서 바느질을 하든지 담배를 태우든지 한숨을 쉬든지 하고, 영숙은 학교에 가든지 건넌방에서 공부를 하든지 하고, 창섭은 아랫방에서 누우락앉으락 책을 보든지 몽상을 하든지 하였다.

제각기 저대로 흩어졌던 그들이 밥때에야 한자리에 모여 앉아 서로 얼굴도 보고 담소도 하는 법이었다.

관립(官立) 일어학교의 최초의 출신으로 일본 공사관서기도 지내고 어전역관(御殿譯官)도 지낸 영숙의 부친은 이미 예순이 다된 노인이었다.

마흔이 넘어서 아내를 잃은 그는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연하(年下)인 처녀에게 장가를 들었었다.

전실(前室)에는 소생(所生)이 없고 영숙은 후처의 몸에서 난 외동딸이었다.

그도 한창 서슬이 푸를 때엔 첩을 셋씩 넷씩 두고 굉장하게 거들거렸었다. 그 허연멀끔한 얼굴빛과 노인답지 않게 시꺼먼 눈썹에 시방도 오히려 젊던 날의 풍도(風度)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일어(日語)로 입신(立身)을 하였으되 어쩐지 일본 사람을 싫하였다. 그 탓으로 세상이 변하자 제 수하에 돌던 사람들은 도장관(屠場官)이다, 참여관(參與官)이다, 무엇이다 떵떵하였건만 그 홀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묵은 정치가의 기풍으로 금전을 대수롭게 알지 않은 그는 재산이 -뿌리는 깊지 않아도 끌어만 모았으면 꽤 많았을 재산이 온곳 간 곳 모르게 되었다.

형편이 글러감을 눈치빠르게 알아본 첩들은 정분이 좋을 제 지나치게 정해놓은 제 몫을 떼어가지고 선선히 갈라섰다.

먹고 입는 것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가 쌀이 없다 옷이 없다 하는 후처(後妻)의 바가지조차 듣게 되었다.

줄행랑집을 팔아 단행랑집을 사고 단행랑집을 또 팔게 되자 더 작은 집엔 들 수 없다 하여 차라리 한 달에 백원돈이나 내가며 큼직한 셋집을 얻기로 하였다.

시방 들어 있는 집은 백원짜리 셋집이 또 줄어서 사십원짜리 사글세 집이었다.

이렇게 궁해 들어가면서도, 몇 달만 지나면 동양척식회사(拓殖會社)에게 억울하게 빼앗긴 동대문 밖 땅을 되찾는다는 둥 일본서 기계를 들여와 밀양 근처의 개포에 논을 풀면 여러 수천석(石) 추수를 할 수 있다는 둥 어디 큰 금광을 경영한다는 둥 왕청뛰게 큰소리만 하면서 밤잦으로 바쁜 듯이 돌아다녔다.

기실 가끔 가다가 큰돈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돈은 며칠 안되어 또 간곳 없이 사라졌었다. 그 돈의 간곳을 영숙의 모친은 어느 계집년의 집이어니 한다. 모친의 말을 빌면 제버릇을 개 못주어 백발을 흩날리면서도 제 손녀뻘이나 되는 계집한테 미쳐 날뛴다는 것이었다.

이런 비난을 받아도 그는 조금도 괘념(掛念)치 않는 것 같았다.

희끗희끗 센, 자[尺]가 넘는 수염을 쓰다음으며 껄걸 웃고만 있었다. 그 모양은 마치 대장부의 배포를 아녀자가 어찌 알까보냐 하는 것 같았다.

과연 그 돈이 간 곳은 계집의 집이 아니었다.

큰일을 하는데 사이에 든 사람, 부리는 사람의 여비, 생활비 및 그 외의 이루헤일 수 없는 잔잔한 부비로 말미암아 손가락 사이로 물이 흐르듯 덩이돈이 흘러내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 하고, 일본 사람을 싫어하는 그는 영숙을 미국인이 세운 XX여학교에 넣었다. 그리고 옛날 녹의홍상(綠衣紅裳)의 마음을 쏠리게 하던 그 눈매는 이제 자애가 넘쳐흘렀으되 자녀-자녀라 해야 영숙이 하나뿐이지만- 에게는 절대로 방임주의였다.

낡은 개화당의 일인인 그는 시대사조의 변천을 남먼저 알아야 될 줄 안다. 자녀를 제 자유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새로운 사상인 줄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제 몸이 분주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것이 딱 귀찮았음이었다.

그럼으로써 썩 긴급한 일이 아니면 일부러 부르는 법이 없다.

할 말이 있으면 밥을 먹으면서도 하고, 밥상이 막 들어오기 전이나 또 막 끝난 뒤에 하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아들이 없는 그는 창섭을 매우 사랑하였다. 성질이 온공(溫恭)하고 영리한 창섭이라 물론 그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지만.

「이애, 이것 너두고 써라」하면서 이따금 돈을 二원(園)씩, 많을 때는 一O원씩 창섭을 주기도 하였다.

창섭이가 막 저녁을 다 먹은 때였다. 삼촌은 숭늉으로 양치를 한두번 하고 나더니 창섭을 보며

"너 요사이 무엇을 하니?"

하고 다짜고짜로 묻는다.

"뭐, 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고 창섭은 고개를 숙여 장판을 내려다보며 대답하였다. 이것은 창섭의 어른을 뫼시고 이야기할 때의 버릇이었다.

"그래 놀기가 심심치 않으냐?"

"네……."

창섭은 모호하게 어물어물하며 겸연쩍게 해줄 웃었다.

"그래 노는 맛이 어떻단 말이야. 설탕맛이냐 소태맛이냐, 응?"

하고 삼촌은 껄걸 웃는다.

그는 제 자질을 데리고도 이런 우스개를 잘 부쳤었다.

창섭은 무어라고 말해야 옳을지 몰라 묵묵히 있었다.

"왜 아모 말이 없느냐, 응? 놀기가 설탕맛도 아니고 소태맛도 아니고 심심하게 물맛이냐."

하고 늙인이는 또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고 또 머뭇머뭇해하는 것을 보고

"너 신문기자 노릇 좀 해볼 터이냐?"

라고 인젱야 생각난 듯이 정작 제 물을 말을 물었다.

"신문기자요?"

창섭은 놀란 듯이 재우쳤다.

2[편집]

신문기자! 창섭이가 속으로 은근히 의망하던 직업이었다.

붓 한 자루를 휘둘러 능히 사회를 심판하여 죄 있는 놈을 베고 애매한 이를 두호하며, 세계의 정세를 추축하여 능히 선전(宣戰)도 하고 능히 강화(講和)도 하는 무관제왕(無冠帝王)이라는 존호(尊號)를 가진 신문기자! 젊은이의 가슴을 뛰게 하는 직업이었다.

더구나 청섭으로 말하면 동경유학을 반둥건둥하고 서울에 있는 동안 문학서 유를 탐독하였다. 볼수록 그의 문학에 대한 취미는 깊어갔었다. 따라서 그는 시인으로나 문사(文士)로 몸을 세워보려고 하였다.

문사와 기자가 그 성질에 있어 아주 다른 것이건만 창섭의 생각에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것 같았다.

문사는 그만두더라도 훌륭한 기자가 되었으면 그뿐이란 생각도 그에게 없지 않았다.

만만장야(漫漫長夜)에 단코를 고는 우리 겨레를 깨움에도 신문의 힘이라야 되리라.

황무(荒蕪)한 폐허에 새로운 집을 세움에도 신문의 힘이라야 되리라 하였다.

그러므로 거기 붓을 드는 이들은 모두 인격이 고결(高潔)도 하려니와 의분의 피가 끓는 지사(志士)들이어니 한다. 자기가 그들과 같이 있게 되면, 그들의 하나가 되면 이에 더한 영화(榮華) 어디 있으랴!

삼촌은 말을 이었다.

"응, 신문기자 말이다. 오늘 예전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에 있던 유택근(柳澤根)이를 만났는데 그의 말이, 반도일보(半島日報)가 일년동안이나 발행정지를 당하였다가 이번에 해금(解禁)이 되었는데 자기가 거기 편집국장이라더라. 내일 모레로 신문은 시작해야 되겠고 적당한 기자들은 들어서지 않고 해서 걱정이라기에 내가 네 말을 했다. 그래 너 거기 다녀볼 마음이 있니?"

"네 될 수 있는 대로 다녀보았으면 좋겠읍니다마는 제가 신문기자 노릇을 할 자격이 있을까요?"

창섭은 눈을 번쩍이며 이런 말을 하였다.

"반편이 같으니, 할 자격이 뭐냐? 사내로 생겨나서 이 세상에 못할 일이 다 뭐람. 내가 석 달 일어 공부를 해 가지고 어전역관 노릇도 하였는데."

하고 지난날을 추억하는 듯이 한번 수염을 쓰다듬고,

"세상 일이란 생각할 때는 어려워도 다 닥쳐보면 쉬우니라. 다녀볼 생각이 있거든 내일 그 사람들을 한번 찾아보아라."

창섭은 이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분의 댁이 어데인가요?"

"응, 그 집이 어데든가 잘 생각이 안 난다마는 그는 낮에는 노상 신문사에 있다더라."

"그 신문사가 어데인가요?"

"왜 저 장교(長嬌) 근처에 있는 그 신문사를 네가 모르니? 그러면 광충교(廣沖嬌)는 아나? 알아? 광충교에서 왼손편 개천으로 들어서 남쪽 천변(川邊)으로 얼마가지 않아 「반도일보사」란 큰 간판이 붙었느니라."

"네 그렇습니까."

"그러면 내가 내일 명함을 줄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을 찾아가서 한번 수작을 해보아라."

"네"

삼촌 앞을 떠나오는 창섭은 기쁜 기대에 가슴이 뛰었다.

3[편집]

그 이튿날 열한점즘 되어 삼촌의 명함을 받아가지고 나선 창섭은 어렵지 않게 그 신문사를 찾아내었다.

과연 삼촌의 말마따나 한 간이 넘을 듯한 큼직한 간판에 문짝 같은 굳은 글자로 「반도일보사(半島日報社)」라고 씌어 있다. 이 엄청난 간판에 창섭은 일종의 위협을 느꼈으되 여기저기 칠먹이가 떨어진 허술한 목제(木製)이층은 굉장한 건축물을 상상한 그에게 조금 실망도 주었다.

문앞에 딱 다다르매 웬일인지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선뜻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앞에 어물어물하고 서 있는 사이에 사람이 몇이나 그 문으로 드나들고 하였다.

사람이 올 적마다 저 섰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서며 흠칫하고 몸을 피하였다.

이 모양으로 얼마를 망설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는 섰다. 문을 연즉 거기가 곧 방이었다. 장판방은 아니라도 사방으로 판벽(板璧)이 둘러 있고 여기저기 테이블이 서너 개 놓이고 사람이 六, 七인이나 웅긋둥긋이 서고 앉고 하였으니 방이 아니고 무엇이랴.

창섭은 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느 사람을 붙잡고 말을 물어야 옳을지 알 수 없었다.

또 한동안 어줍게 서 있노라니 그 중에 큼짛난 검은 네모테 안경을 쓰고 배가 터질 듯이 뚱뚱한 사람 하나가 힐끗 창섭을 바라보더니 건방지게 반말로,

"누구를 찾아?"

라고 묻는다.

옥양목 두루마기에 캡을 쓴 창섭의 모양이 초라도 했고 겸연쩍게 기웃기웃하는 양이 서툴기도 하였음이리라.

창섭은 자존심에 조금 상채기를 입으며,

"저어 편집국장 되시는 이를 좀 뵈러 왔습니다."

"댁은 누구요?"

하고 이게 다 편집국장을 찾는다 하는 듯이 (창섭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위아래로 훑어본다.

"나는 김창섭이란 사람이올시다."

창섭은 불쾌한 생각이 와락 일어나 조금 성낸 소리로 대답하였다.

"무슨 일로 왔소?"

그 사람은 창섭을 노리다시키 보며 으르듯이 묻는다.

창섭은 이 분이 편집국장인가 하였다. 그래서 나는 성을 꿀꺽꿀꺽 참으며,

"저어………… 편집국장 되십니까?"

이 말에 그는 분명히 당황해하는 빛을 나타내었다. 그래도 여일하게 위엄있는 소리로

"그래, 무슨 일로 오셨단 말이요?"

창섭은 그 사람이 제가 찾는 이가 아님을 깨닫고 숨을 내쉬며 이것 봐라 하는 듯이 삼촌의 명함을 내주었다.

그 뒤에는 창섭의 간단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그 뒷곁을 보더니 창섭에게 대한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시방껏 저는 앉고 창섭은 서서 말을 주고받고 하였는데 갑자기 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리 앉으시지요."

라고 은근히 자리를 권한 후 친절한 목소리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하고 제 뒤에 있는 조그만 문을 열고 나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신문 발송이었다.

한 二, 三분 기다린 뒤이리라.

그 사람이 도로 나와 그 조그마한 문으로 대가리를 내밀며 창섭을 보고

"이리 들어오시지요."

한다.

그 말대로 그 문을 나서니 왼편으로 그을음이 뒤룽뒤룽한 목제(木製) 공장집이 있고 그 맞은 편에 십여 간이나 될 듯한 조선집 한 채가 있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큰 마루가 있는데 문들은 모두 열려 있었다.

창섭은 그 안에 너저분하게 책상과 교의가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곳은 휑뎅그렇게 비었고 한편 구석 이전 안방구석이었던 곳에 커다란 책상을 해놓고 사람 하나가 앉아 있다.

저이가 내가 찾는 편집국장인가 하매 창섭의 가슴은 새삼스럽게 흔들렸다.

인도하는 이를 따라 그의 앞에 들어서니 그이는 아까 그 사람과는 아주 반대로 매우 정답게 눈웃음까지 띠며 자리를 권한 후

"노형이 김창섭씨 되십니까?"

한다. 그이는 한 사십 되어보이는데 바싹 마른 가냘픈 몸집이고 불이 빠르고 입이 합죽한 사람이었다.

창섭은 이 친절로 말미암아 아까 받은 불쾌가 일시에 풀리는 듯하였다.

"XX씨의 함씨 되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참,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할 말을 저 편에서 먼저 해버림에 창섭은 또 어찌할 줄을 몰라 무밋무밋하며 얼굴을 붉히었다. 이 창섭의 도련님같은 태도가 더욱 그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는 사교에 익은 미소를 눈에 입에 연해연방 띠며 동경유학을 하였느냐, 무슨 학교를 마쳤느냐, 한문을 많이 읽었다지, 문필을 좋아한다지…….여러가지로 물었다. 그리고 맨끝으로

"신문에 취미가 계십니까?"

하였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좀 얼떨떨하였으되 창섭은

"네."

하고 고개를 숙이며 빙그레 하였다.

책상 물림의 수줍어함과 어려워함이 만만한 제 사람을 얻으려는 이에게 만족을 주었음이리라.

유(柳)씨는 흉금을 풀어헤치고 탁 신임하는 어조로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신문은 일년 정간(停刊)을 하였다가 다시 발간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지면 계속을 하는 것이로되 모든 것이 초창(草創)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곤란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모든 곤란을 무릅쓰고 나가기만 하면 얼마 아니되어 잘도리 줄로 믿습니다. 노형과 같이 순실하신 이와 일을 같이 하게- 만일 허락하신다면- 됨은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일로 생각 마시고 내 일같이 힘을 써주십시오. 내월 초하루부터 신문을 발간하겠으니 그믐날부터 출석은 해주셔야겠습니다."

하다가 어조를 사무적으로 고치며

"그런데 한 달에 생활비는 -신문사가 극히 가난하니까 최소한의 생활비밖의 지불을 못할 형편입니다.- 얼마나 하면 되겠습니까?"

생활비! 삼촌 집에서 밥을 거저 얻어먹는 터이니 내 생활비는 십 원만 있으면 족하리라 하였다. 할 수만 있으면 한푼도 아니 받고라고 이린 위대한 사업에 헌신적 노력을 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유씨는 벌써 그 눈치를 알아채었던지 말을 이어

"얼맛동안만 견디면 물론 보수도 상당해지겠지만……."

다른 사람이 들을까 두려워하는 듯 텅빈 그 곳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워,

"위선은 극소한도로 한 六O원만 갖다 쓰게 하시오."

六O원이나! 창섭은 제 귀를 믿을 수 없었다. 한동안 입을 벌릴 수도 없었다.

창섭의 좋아하는 꼴을 번연히 알아보았건만 유씨는 더욱 보수가 적음을 괴탄(愧歎)하는 듯이

"신문사가 여간 가난해야지요. 어떻습니까, 그것이면 최소한도의 생활비나 되겠습니까?"

하고 아까의 말을 되풀이한다. 창섭은 더할 수 없이 감격하였다. 그래 떨리는 소리로

"그것은 너무 많습니다."

유씨도 만족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러면 오실 때 이력서 한 장을 가져오십시오. 형식이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고 그믐날 하루는 호의로 그저 보아주십시오."

일은 벌써 다 되었다. 만일 처음 보는 이 앞에 아니련들 창섭은 득의(得意)와 환희 춤이라도 추었으리라.

4[편집]

창섭은 반도일보사에 다니게 되었다. 자기가 일찍이 도경하던 직업을 얻게 된 그는 하는 일에 감격적 열심을 가지기 때무에 실연(?)으로 하여 입은 상처조차 아물어 갔었다.

그의 하는 일은 대개 번역이었다. 아침 열점에 가면 오후 네시나 다섯시까지 한자리에 꼭 붙어앉아 일본신문의 키리누키와 각 전보통신을 우리말로 옮기기에 눈코뜰 사이가 없었다.

그가 번역한 가운데 비교적 긴 것은 一면에, 짧은 것은 二면에 실렸다. 그래도 그는 주로 二면 내근이었다.

편집을 맡지 않은 다음에야 향용 외근을 하는 법이언만 그 신문사는 외근보다는 내근에 힘을 썼다. 우선 지면을 채우기에 골몰하였다. 그것은 아직 사람이 째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은 째이지 않았다.

二면을 맡아보는 사람은 윤창운(尹昌雲)이라고 위아래가 괴인 얼굴이 둥그스름한 사십 남짓한 사람이었다. 그도 황성신문 시대부터 오늘까지 십유여 년을 조고계(操?界)에 종사한 분이었다. 바닷물에 갈리고 갈린 조각돌이 동글동글한 바둑돌이 되는 것 모양으로 티끌세상에 앓고도 닳은 그는 제 얼굴과 같이 인격도 둥그스름하였다.

창섭의 재능을 제일 먼저 인정한 이는 그이였다.

아무 경험도 없고 이력도 없는 창섭이가 처음 들어와서 어느 면에 가야 마땅할지 모를 때에 그이가 한두번 번역을 시켜보고 그만 二면으로 끌어갔었다.

"창섭인 번역을 매우 잘합니다. 그리고 한문도 유여한가 봅니다. 창섭씨는 二면에 있게 하지요."

창섭이가 일주일쯤 되어 편집회의가 열렸을 제 그이는 이렇게 제의하였다. 창섭은 일변으로 기쁘고 일변으로 고마웠다.

그이는 일본신문의 키리누키할 것과 각 통신의 쓸 만 한 것을 골라서 자기가 하기도 하고 창섭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줄 때면 그이는 반드시 빙그레 웃으며

"이것 좀 해주시려요?"

하였다. 창섭은 거의 감지덕지로 그것을 바다 일시반시 놀지 않고 해내뜨려 한 장이라도 제가 더하려고 애를 썼다.

그이는 창섭이가 번역한 것을 받아서 읽어보다가 고칠 데를 고치면서 창섭에게 그 번역을 가르쳐주었다. 그럴 적에도 제 의견 비슷하게

"이런 것은 이러는 편이 좋아요."

하였다. 그러므로 창섭은 조금도 감정이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속으로 모르는 자기를 가르쳐주는 그의 호의에 감사했다.

그러나 기자 생활이 그에게 만족을 장구히 주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가고 두 달이 지나감에 따라 제 하는 일에 대한 열이 점점 식어짐을 느꼈다.

매우 어려우리라 생각하였던 번역이 하고 보니 늘 그 문자가 그 문자이고 그 소리가 그 소리였다. 쓰는 문투가 거의 일정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를 번역하려면 한번 읽어 대의를 짐작하고 두 번 읽어 구절을 해석하고야 세 번째 읽으면서 겨우 우리말로 옮겼다. 그러던 것을 인제는 한번도 안 읽어보고 그냥 첫머리부터 쭉 내리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별로 틀림이 없게 되었다. 나중에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무엇을 쓰는지 모르게 써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조금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철필을 놀릴 뿐이었다. 종이에 잉크칠을 할 뿐이었다. 그는 일종의 기계가 되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지닌 감격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멋갈도 맛갈도 느끼려야 느낄 수 없었다.

아무 취미 없이 날이 맟도록 한 자리에 붙어앉아 일을 하니 싫증이 아니 날 수 없었다. 고통이 아니 될 수 없었다.

5[편집]

제가 하는 일에 대하여 흥미를 잃기 시작하였을 때, 창섭은 또 같이 있는 이에게 환멸을 느끼기 비롯하였다.

제가 일찍이 상상하던 고결한 인격과 해박한 지식과 위대한 사상을 구경도 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평범하고 용렬(庸劣)하였다.

거기는 조선 어느 사회나, 아니 인간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로 추종과 이기와 아세(阿世)와 궤휼(詭譎)과 엉터리와 태깔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괴상한 일은 시대에 앞서야 할 그들이 -앞섰다고 자처하는 그들이- 시대에 뒤져가지고 저먼저 달아나는 시대를 저주하고 비방하고 조소하고 시기하도 개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탓도 탓이리라.

그 신문사에서 내로라고 고개짓을 하는 사람은 대개 사십과 오십의 중간의 낫세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로 一면 논설을 맡아 쓰는 이는 방어(?魚)토막 같은 굵직한 몸집과 늘 막걸리 기운이 도는 듯한 시뻘건 얼굴을 가진 위인(爲人)인데, 그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고 땅을 다지기나 하려는 듯이 느리고도 힘있게 뚜벅뚜벅 걷는 모양은 청룡도와 적토마(赤?馬)가 없었기 망정이지 하릴없는 옛날 지나(支那) 삼국시절의 관운장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실 그는 관운장이란 별명이 있었다. 젊은 기자들 가운데서 그의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양을 보기만 하면 「이커, 관운장이 출진(出陣)하시는구마」하고 옆에 있는 동료와 눈을 맞추며 웃는 법이었다. 그러면, 그는 정말 관운장 격으로 호탕스럽게 웃으며 「나더러 관운장이라구, 허허」하다가 그 말을 한 이가 무색해할까 봐 「참 웬일인지 모두들 나를 관운장이라고 그래. 제국(帝國)신문사에 있을 적에도 그런 별명을 들었더니만, 허허」하고는 또 한번 쾌할하게 웃는 법이었다. 그리고 관운장이란 별명에 대하여 자기도 마족하다는 뜻을 말하고 삼국시절에 못난 일, 외양(外樣)만 갖고 그런 웅재대략(雄才大略)이 없어 그야말로 양질호피(羊質虎皮)인 일, 만일 자기가 그때의 관운장이런들 결코 호녀견자(胡女見者)란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손권(孫權)의 청혼을 물리치지 않았을 것이고, 물리치지만 않았더면 후고(後顧)의 우(憂)가 없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중원(中原)을 권석(捲席)하였을 걸 갖다가…… 하면서 수다를 늘어놓는 법이었다.

그는 한문의 대방가(大方家)로 자임(自任)할뿐더러 신지식에 들어서도 그리 남에게 떨어지지 않거니 생각한다고, 그 이유는 자기가 논설을 맡아 쓰는 까닭이며 몇 해 전에 벌써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독한 까닭이다.

세계의 대세를 통찰하기는커녕 열국의 이름도 잘몰랐으되 걸핏하면 「태서제국(泰西諸國)이……」하면서 팔목을 부르걷고 천하사(天下事)를 논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의 쓰는 논설은 조금 국제관계라든가 실사회(實社會)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훈도적(訓導的) 청년 수양론이 아니면 묵고 썩은 센티멘털한 우국개세(憂國慨世)의 문자들이었다. 몇 십년 전의 지사(志士)들이 붓이 닳도록 쓰고 또 쓴 그나마 양계초(梁啓超)를 본뜬 「소년조선론」이라든지 「時勢造英雄耶아 英雄造時勢耶」란 곰팡내 나는 제목을 끄적거리고 어깨바람을 내었다. 그리고 글이란 순 한문으로 써야 웅경(雄勁)도 하고 운치도 있는데

「요사이는 언문을 섞으니 어데 힘이 있어야……」하고 한탄하였다.

사회부장 -곧 三면을 편집하는 이는 또한 그 연갑세의 사람이니 주독으로 해서 여기저기 불긋불긋한 점이 있는 얼굴, 툭 불거진 핏발이 선 흐리멍덩한 눈자위, 어홍한 가슴, 엉거주춤한 허리, 얼른 보면 중병을 치른 사람 같았다. 그는 성근(誠勤)하기 짝이 없었다. 사(社)에만 들어오면 제 책상에 머리를 틀어박고 조선에서 나오는 일자(日字)신문을 키리누키하는 데 정신을 잃었다. 그는 일본 말을 도무지 몰랐다. 아주 쉬운 회화조차 못했다. 혹 전화를 받다가 저편에서 일본말을 하면 질겁을 하고 물러서며 다른 기자들에게 받아달랄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번역의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다만 이 능란한 번역이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오역(誤譯)일 때가 가끔 있었다. 「과감이가 일생을 비탄하얏다.」라고, 우리글로 옮겨 큰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그는 「과감」을 인명(人名)으로 알고 깎듯이 한문글자까지 단 것이다. 그의 일어에 대한 지식은 「?」는 「는」, 「?」는 「가」, 「?」는 「에가」,「?」는 「다」……. 등의 토(吐)를 외울 뿐이었다. 다행한 일은 이 토만 알고 보면 대개 한문글자를 보고 뜻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자를 부드러운 우리말로 고질 줄을 조금도 몰랐다. 쓰이기는 언문으로 씌었으되 한문 모르는 이는 알아보는 재주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한문에 대한 온축(蘊蓄)이 깊은 것도 아니니, 그 무식에 가까운 제목 붙임이 넉넉히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도 「一O유여 년 전부터」 황성신문사에 종사한 「조고계(操?界)의 노장」이다. 술잔이나 취하면 꼬지꼬지 마른 노란 팔뚝을 내두르며

"십 유여 년을 이 노릇으로 입에 풀칠을 하얐습니다. 그때는 단 셋이 신문 한 장을 해내었지요……."

하고 일쑤 제 역사를 꺼내었다.

그리고 가장 안된 일은 외근을 안중(眼中)에 두지 않는 일이리라. 세상없이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자기가 출장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외근기자의 얻어오는 기사조차 홀대하였다. 자기의 키리누키한 것이 차고 남아야만 마지못해서 넣어주었다. 그 신문사엔 三면에 딸린 외근이 단지 둘뿐이고 그들의 활동과 필력(筆力)이 그리 남에게 뛰어나지도 않아 도저히 三면 一 二단을 채우는 수가 없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의 반도일보를 조금 주의해 보는 이면 三면 기사의 거의 전부가, 三, 四일 전 또는 五, 六일 전에 벌써 다른 신문에 났던 구문(舊聞)임을 알 수 있으리라. 또 조금 깊이 신문에 주의하는 이면, 三, 四일은 새려 한 달 전, 두 달 전에 일본의 동경과 대판 등지에서 발행하는 일자신문에 났던 것이 비위좋게 반도일보에 실린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그것은 남의 신문에 난 것을 되풀이한다고 비난을 들은 三면 주임이 조금 전 것보다 오래 전 것이 도리어 새로운, 거의 특별기사(特別記事)같이 보인다는 놀랄 만한 발견을 한 까닭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 재주와 구속 없이 그 신문의 채를 잡았다.

말이 편집국장이지 유씨는 편집엔 아무 관계 없었다.

그 신문은 어떤 단체에서 기관지로 인가를 맡아내어 온 것이나 금력(金力)이 없어 해갈 수 없게 되자 기사를 함부로 과격하게 써서 압수에 압수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발행정지를 당한 것이었다. 이번에 해금(解禁)이 되자 조고계에 성망이 놓은 유씨를 끌어들여 편집상 경영상 전책을 맡기었다.

바꿔 말하면, 유씨가 무슨 노릇을 하든지 돈을 끌어대어 해갈대로 해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씨는 아침 저녁으로 어느 귀족 어느 부호(富豪)를 찾아다니며 신문을 사라고 조르기도 하고 하다못하면 사(社)의 명의로 돈을 꾸어달라고 비대발괄하는 판이라 편집을 돌볼 어느 겨를이 없었다.

6[편집]

젊은 기자 중의 몇몇은 거의 부랑자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대개 서울서 중학교를 치르고 일본에 건너가서 이 학교 덥쩍, 저 학교 덥쩍 하다가 졸업은 한 군데도 못하고 돌아왔든지, 또는 구경차로 한 二, 三주일 동경 일판을 헤매고 왔을뿐이로되 수삼 년을 유학이나 하고 온 척하는 작자들로 一년 혹은 二년 신문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기자임을 막대한 영광인 줄 생각한다.

제 스스로는 자기가 사회의 목탁(木鐸), 무관(無冠)의 제왕과는 얼토당토 않은 인물이며 또 그리 되려고 조금도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남들은 으레 자기네들을 그렇게 우러러보는 줄 믿는다. 더구나 여자, 그 중에도 기생이 그렇게 아는 줄 믿는다. 그렇게 알아야만 자기네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그렇게 믿으려 한다. 상식이 없어 그것을 모르면 행위로 설명으로 알도록 하는 것이 자기네들의 책임이고 의무라고 까지 생각한다.

그래 그들은 첫째로 극장에 대한 기자의 특권을 이용한다. 잘 가지 않으련면 억지로라도 몰고 가서 자기의 표 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인다. 또한 기생의 온습회(溫習會)나 연극회 같은 것이 있으면 청(請)치도 않는데 분장실까지 뛰어들어가서 잘잘못을 비평도 하고 이래라 저래라 시키기도 한다. 그러고 그런 회(會) 있는 것을 신원고를 쓰기도 한다. 심하면 제 좋아하는 기생의 미워하는 사내와 동무의 흠절을 「千里服」이란 허섭쓰레기 난에 캐기도 하고 또는 정면으로 그 기생을 추기도 하였다.

「……XX골 XX는 인물로 절묘하거니와 가무도 능란하며 또 손님 대접을 매우 친절히 한다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어느 기사보다도 소중하고 긴요하였다.

이 짓을 일쑤 잘하는 놈광이는 홍군수(洪君秀)와 한세환(韓世煥)이란 두 사람이었다.

군수는 키가 설멍하게 큰데다가 얼굴이 허여멀겋고 떡 벌어진 어깨판, 길고 곧은 다리의 임자이니 세비로나 입고 금테안경이나 버티고 단장이나 두르고 나서면 그 풍채의 훌륭하기가 바로 무슨 회사의 사장이나 취체역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훌륭한 체격의 어디엔지 꼭 맺히지 못하고 픽서글 헤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는 싱겁다 할 만큼 호인물(好人物)이었다. 결코 남을 비꼬든지 해치지 않았다. 혹 남이 제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여도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들었다. 그는 일하나 말을 하나 얼렁뚱땅이었다. 그는 총독부 출입기자인데 아침에 들어오면 모자를 쓴 채로 단장을 휘휘 내두르며 편집실을 왔다갔다 하다가 물체 물탄 듯한 웃음을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르게 씽긋 웃으며 「인제 또 가보아야지」하며 휙 나가버린다.

두어 시간 쯤 해서 들어와서는 한두 가지 발포(發布)한 것을 二면주임 윤창운(尹昌雲)을 주며 「어데 자료가 있어야지요, 빌어먹을 놈들, 겨우 이게 발포랍니다.」하고 머리를 긁적긁적하고는 제 책상에 돌아앉는다.

그의 책상은 바로 전화통 밑에 있었는데 그는 전화 받기와 원고 쓰기에 주체를 못하는 듯이 바빠해 한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썼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의 쓴 기사는 좀처럼 신문에 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연해연방 오는 전화를 받았으되 그것은 사(社)의 일이 아니고 저의 일이었다. 그래도 사의 일이나 되는 듯이 분주히 서두르며 또 저의 총망한 것을 전화 가운데에서 여러번 탄식하였다.

이따금 매우 피로한 듯이 만년필을 동냉이치고 휙 나간다. 한번 나가면 예사로 삼십분이나 한 시간이나 되어 들어온다. 그럴 때 그를 주의하는 이면 그 쾌활한 목소리를 영업부에서 들을 수 있고 또 뒤뜰을 서성서성하는 그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럭저럭 편집이 끝나면 기사를 쓰려다가 잘못된 것을 하증이나 내는 듯이 그때까지 열심히 끄적이던 원고를 박박 찢어버리고 휙 뛰어나가 세수를 하고 와서 시방 곧 나갈 듯이 모자를 쓰고 단장을 팔에 걸고 교의에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철철댄다. 그중에는 기생 이야기가 그 태반을 점령하였다. 군순히 오입하는 설명도 하였다. 누구 누구 웃음파는 이의 역사도 늘어놓았다. 그리고 제 염복(艶福)과 식복(食福)을 자랑하였다. 요리점에 갔던 일, 등선각(登仙閣)에 오른 일…….

그의 주위에는 여러 동료들이 모여 부러워하면서도 경멸해하는 눈으로 그의 입술을 바라보는 법이었다.

그는 사(社)에 들어선 이런 화류장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화류장에 들면 사(社)에 대한 불평 불만, 자기의 개혁 안과 포부를 거의 비분(悲憤)한 어조로 떠들었다.

세환(世煥)은 군수(郡秀)와 정반대로 키도 짤달막하고 몸피도 가냘펐다. 얼굴빛까지 가무잡잡하되 새까만 눈썹과 오뚝한 코며 얼굴의 짜임짜임이 제 체격과 어울리게 매우 조직적이었다. 대가리를 까불까불 하며 궁둥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다니는 모양은 일본사람으로 속게 되었다.

그는 경찰서를 돌아다니는 기자인데 군수와 달라 자료를 다부지게 수집도 하고 기사도 곧잘 만들었으되, 제 쓴 것이 실리지 않는다든지 귀에 거슬린 말을 듣는다든지 하면, 온종일 입을 꼭 다물고 쌔근쌔근 하다가 기사 한 줄 안쓰고 휙 뛰어나간다.

그도 신이 나면 화류장 이야기를 잘 하였으되 군수와 같이 철철대지 않고, 남을 비웃고 저를 비웃는 어조로 깐죽깐죽하게 말을 하였다.

그와 군수는 부부와 질배 없는 단짝이었다. 사(社)만 파하면 어디를 가도 꼭 같이 다녔다. 세환이가 군수의 어깨에 찰랑찰랑 하며 같이 가는 모양은 마치 미국 희국 활동사진에 잘 나오는 「함」과 「지내」와 같은 골계미(滑稽味)가 있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돌려세워 놓고 흉을 보고, 맞대해서도 「싱거운 자식」「패리한 자식」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이상하게 둘의 사이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 두사람 외에 一면주임 노릇을 하는 강찬명(姜讚明)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도 그런 방면에 들어서는 남의 뒤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호리호리한 몸피, 갸름하고 해사한 얼굴의 임자로, 얼른 보면 나이가 퍽 어려 보였지만 그 주름이 여러줄 잡힌 이마와 앙상한 뒤꼴이 나이박이 태(態)가 없지 않았다.

그의 나이는 서른 여섯이었다. 그는 법관양성소 출신으로 일찍이 변호호사 노릇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그는 한번 잘놀았었다. 제 말이 어느 밤 요리점에 아니 가본 일이 없고 기생첩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한다.

그러는 즈음에 무슨 불미한 일이 있었던지 변호사가 떨어지고 오늘날 기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군수가 늘어놓는 말을 들으면 아랫입술을 턱으로 잡아당기며 웃었다. 그 모양은 「흥, 미친 몸, 저 혼자만 놀아본 줄 아나봐 」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화류계에 대한 그 신문사의 권위는 따로 있었다. 그는 기자가 아니고 창섭이가 처음 유씨를 찾아갔던 날에 만난 신문 발송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주운해(朱雲海)이니 일찍이 백만장자의 외동아들이었다.

전하는 말을 들으면, 그는 열세 살부터 오입길에 들어서 수십 명의 홈팽이를 거느리고 그야말로 굉장 뻑적지근하게 놀았었다.

어느 미인을 꼭 하룻밤 상관하고 돈 십만 냥을 주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그 덕택으로 많은 재산이 알알이 없어지고 집 한 간 남지 않았다. 그는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었다. 거의 거지꼴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어째 이 신문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몇 만금으로 얻은 것으로 노래 마디나 하고 춤깨나 추는 것이었다. 또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뼈골에 사무치게 느꼇음이리라.

제 웃머리에 있는 이에게도 무조건으로 허리를 굽실거리며 첨도 잘하고 보비위도 잘하였다. 다만 무신한 탓으로 그 방법이 너무 척칙하고 노골적이었다.

웃사람이 담배를 먹을 줒치를 보이면 그는 얼른 제 담배를 빼어 바치고 성냥까지 그어댔다. 여송연 갑과 혹은 비단필을 유씨에게 바치는 것을 기자들에게 한 두 번 들키지 않았다. 이럴 때 세력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사정없이 거절도 하며 선물 주는 것을 구경한 사람에게 대하여 그를 비웃고 흠점을 캐며 모욕이나 당한 듯이 노기 등등 하였건만, 당장 내쫓을 듯이 그의 무자격한 것을 타매(唾罵)하였건만 그는 언제든지 제 지위를 보전 할 수 있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광고에 대한 아무 경험도 지식도 없는 그가, 창섭이 들어간지 넉 달 만에 먼저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광고부장이 된 일이었다. 그도 때때로 편집국에 올라와 서 군수 패와 어울려 기생타령을 하였다.

7[편집]

이 썩은 내, 더러운 내, 곰팡 내, 음탕한 내가 떠도는 분위기를 처음으로 마실 제 창섭은 구역이 날 것 같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의 집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돼지우리에나 빠진 것 같이 놀랐다.

(이럴 리가 있나, 이럴 리가 있나) 하며 눈을 닦으면 닦을수록 질퍽거리는 벌레를 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돼지우리야말로 사람의 집인 줄 깨달을 제 그의 놀람은 몇 곱절이었다. 기막히는 환멸이었다. 차라리 돼지우리에 잘못 들어왔던 들 뛰어라도 나가련만 이것도 사람의 집인 줄이야! 이 오예(汚穢), 이 추악, 이 암흑! 이것도 사람의 집인 줄이야! 그러나 사람의 집임에 어찌하랴!

그렇다, 그것도 틀림없는 사람의 집은 집이었다. 제아무리 처음에는 구역이 나고 머리가 둘리더라도 사람이라면 얼마 동안 살려면 살 수도 있는 집이었다. 그 악취가 코를 찌르고 오P가 눈에 띄는 처음이 곧 냄새에 젖고 더러움에 물드는 버릇이었다.

시방껏 알지 못하던 세계가 어두운 밤의 인광(燐光)모양으로 번쩍인다.

제 스스로 나아가 애걸복걸하며 그 국해를 몸에 바르려고도 하는 것이다. 백문(白紋) 같은 마음에 엉겨붙은 구더기, 씹어드는 벌레.

창섭이도 五, 六개월을 지내는 사이에 같이 있는 이에게 동화를 하고 말았다. 늙은이축보다 젊은이축에게 동화를 하고 말았다.

배실배실 돌아서 일을 한 가지라도 적게 하러 들었다.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고 마치 글방에 다니는 아이 모양으로 수도 없이 소변 보러 들고 나고 하였다. 마지못해 하는 번역이나마 그리해서는 아니될 줄 뻔히 알면서도 애써 고치기가 싫었다. 남먼저 하던 입사(入社)를 남 나중 하려 하고 할 일이 끝나도 끈적끈적 늦추잡던 퇴사도 될 수만 있으면 일찍 하려고 들었다.

그것은 그리한다 하더라도 그로 환멸의 비애가 삭여질리는 없었다.

정애에게 걸었던 사랑이 저문 하늘의 놀처럼 흐지부지스러지자 망상에 가까운 희망을 신문사 생활에 매었더니 그 또한 수포에 돌아가고 만 그는 제 마음을 어디에 지접(支接)해야 옳을지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은 분다, 물결은 흔들린다. 노를 잃은 조그마한 배는 비틀거린다. 불리어 가거라, 밀리어 가거라! 어디로든지.

창섭이가 군수 일파의 화젯거리가 되는 기생에게 동경하기는 이때부터였다.

이전엔 남자의 몸을 망치는 사갈(蛇蝎)이나 악마로 미워하던 그들이 인제는 이상야릇한 광채로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남국의 포도주처럼 방렬(芳烈)한 자극성, 요염한 신비성을 가진 듯 싶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 가까이만 오면 세상없는 근심도 풀리게 하고 슬픔을 잊게 하진 듯 싶었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하나에 매달리듯 절망적 노력으로 이 기생이란 알 수 없는 물건에 매달리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