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새는 안개/제5장
1
[편집]어느 겨울날 저녁이었다.
생선 눈깔 모양으로 퀭하게 흐려진 하늘만 보아도 사람은 음산한 기운에 몸을 떨었다. 게다가 살점을 오려내는 듯한 매운 바람이 맹수와 같이 호통을 치며 두꺼운 옷자락을 할퀴고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려는 듯하였다.
창섭은 이 불어닥치는 차디찬 맹수를 쫓는 부적이나 외우는 것처럼「엣 추워, 엣 추워」하면서 새빨간 코끝을 실룩거리며 탑동공원의 담을 끼고 돌아 교동(校洞)을 향하여 달음질한다.
그의 가는 곳은 명원관이었다. 그는 그날 새로이 취임한 광고부장 유만풍(劉萬豊)의 초대를 받은 까닭이다.
그런데 이 유만풍이란 자가 광고부장이 된 것은 무슨 학력과 경험이 있음이 아니었다. 그는 광고에 대한 경험은커녕 광고란 문자까지 해석지 못하였을이만큼 무식꾼이었다. 그는 아무 가격없는 휴지와 다름이 없는 반도일보 주(株)를 천 원어치 사고 이 광고부장을 얻어 한 것이다. 그것은 옛날 벼슬사던 본새이었다. 그를 끌어들인 이는 주운해이니 운해는 「사(社)를 위하여 제 지위를 희생」하고 서무주임이란 이름으로 십원 증봉(增俸)의 되었었다.
창섭은 거의 발이 땅에 닿지 않을이만큼 종종 걸음을 쳤다. 그것은 온전히 추운 까닭일까? 그러면 그의 가슴이 울렁거림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거기서 기생을 만날 수 있다. 천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한 서너 번 요리점에 갔건만 갈 적마다 무슨 애인을 밀회나 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가서는 번번이 기생에게 말 한번 건네보지 못하고 고작해야 옆눈질이나 하다가 헛되이 돌아왔었다.
(오늘은, 오늘은 꼭 기생 하나를 친하리라.)
그는 여러번 하던 결심을 또 한번 되풀이하며, 가슴이 또 다시 두근두근 하였다.
그가 막 명월관 문턱에 다다른 때였다. 저와 반대방면으로부터 들이닥친 인력거 한 채가 슬쩍 제 옆을 지나쳤다. 그때에 그는 맵시있는 발을 담은 듯항 어여쁜 운헤신 코끝을 얼른 보았다. 그 신코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도 저도 모르면서 걸음을 재게 걸어 그 신코의 임자가 수레에서 내리기 전에 앞질러서 요리점 마루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그 인력거 닿는 데에 시선을 던졌다.
그 어여쁜 신코의 임자는 방장 수레를 내리고 있었다. 그이는 살짝 몸을 굽히고 한 발을 막 땅 위에 놓는 인물이었다. 그 서슬에 외씨 같은 발의 버선목까지 재빛 망토와 속옷이 치켜지며 종아리의 보얀 살이 살짝 내다보였다. 가냘픈 허리가 날씬하자 그이는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을 보자 창섭은 「아!」하고 경악에 가까운 외마디 소리를 쳤다. 그는 기절이나 할 듯이 단박에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이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음일까? 아니다, 그이의 얼굴이 낯익음 까닭이다. 그이의 얼굴이 하릴없는 정애의 얼굴이었다.
창섭은 무에라 형용할 수 없이 가슴을 셀레며 이 경이(驚異)의 대상을 더욱 자세히 살피려 할 제, 그이는 누구를 보았는지 방긋 웃고는 창섭의 얼없는 모양엔 눈도 거들떠보지 않고 쪼르르 사무실로 그림자를 감추었다.
「어느 방으로 오셨어요?」하는, 거의 노기(怒氣)를 품은 듯한 보이의 억센 목소리에 창섭은 깜짝 정신을 차렸다. 아마도 이 보이가 아까부터 이 말을 물었건만 창섭이 미쳐 대답을 안했기 때문에 홪으을 낸 것이리라.
창섭은 오히려 꿈자취를 찾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멀뚱거리며 네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딱 보이를 쳐다보았다. 보이는 또한번 물었다. 그제야 반도일보사에서 온 것을 말하고 그때까지 벗지 않았던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바꿔 신고 자기 놀 방을 찾아갔건만 자꾸자꾸 고개가 뒤로 돌려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 그 기생이 누구인고…………?)
2
[편집]반도일보사측의 노는 방은 바로 입구에 있는 희너른 제 一번이었다. 모이자는 시간은 여섯점이었으되 일곱점이 지난 이때에도 사람들은 삼분지 일도 오지 않았다.
사회에 물든 그들이라 정한 시간에 으레 에누리가 있는 줄 알고, 남이 아니지키는 시간을 저 혼자 지키는 것은 반편이나 할 일이지 자기네같이 똑똑한 어른의 할 일이 아니었다.
딴 때와 다랄, 더군다나 요리점 같은 데 때맞추어 가는 것은 제 권위를 상할 염려가 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이 많아서 이런데 참례할 수가 없었으되 XX(요리내는 이)의 낯을 보아 만부득이 왔지요」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 두어 시간은 늦춰 올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삼분지 일이라도 온 사람은 어떤 이들일까.
첫째로 이날 밤의 연회의 주인인 유만풍, 둘째로 이 많이 요리점의 정조(情調)에 몸을 담그고도 싶고 또 끽주생면(喫酒生面)으로 과히 체면에 관계치 않으면 저 천한 기생을 불러보려는 홍군수, 한세환이었다. 그리고 또 기생 셋이 와 있었다.
그 중 둘은 벌써 노기(老妓)란 이름을 들을 낫세인데 그 신문사의 놀음에 단골로 불려다니는 홍련이와 산호주(珊瑚珠)였다. 남도산(南道産)인 그들은 안색은 아주 호색이로되 소리에 이르러서는 거의 광대에 가까웠다.
홍련은 우뚝하게 큰 코, 얼마 아니되어 머리 뒤꼭지까지 밀어갈 듯한, 훨렁 벗겨진 이마, 一자로 길게 찢어진 눈, 여기다가 눈썹이 길고 검어서 <수호지>에 나올 듯한 여걸의 풍도가 있었다.
산호주란 것도 그만 못하잖게 엉성긎게 생겼다. 살이 저대로 노는 축 처진 볼, 둘이나 되는 턱을 괸 나무둥지 같은 굵직한 목, 허리띠를 바싹 치켜서 맨 보람도 없이 도리어 그 탓으로 바람이 가득 찬 공이나 무엇같이 터질 듯이 불룩한 젖가슴, 육(肉)이 부글부글 끓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 방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목청은 바로 꾀꼬리소리처럼 맑고 가늘었다. 그리고 신이 나서 장고를 치고 우쭐거릴 떼엔 그 안반짝 같은 궁둥이가 바람개비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고 돌리고 하였다.
그 외에 또 한명은 명옥(明玉)이라 부르는데 기생으로는 한창낫세였다. 조금 좁은 듯한 이마, 있는 듯 마는 듯 한 눈썹이 그리 잘났다고는 못할망정 두 노기의 대조로 어린 맛과 또 도화분(桃花粉)의 힘인지는 모르겠으되 봉선화 물을 들인 듯한 뺨이 사람의 눈을 끄는 점이었다.
군수는 연해연방 싱그부리한 웃음을 띠우며 명옥이를 쓸어안고 무에라고 소곤거리고 있다. 명옥이도 그에게 몸을 반이나 실리고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기도 하며 이따금 목을 놓아 눈물이 나도록 웃기도 하였다. 그 모양은 「나는 이렇게 손님에게 친절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웃음을 가졌습니다. 제발 노시는 족족 나를 불러 주십시오」하는 듯하였다.
이때에 창섭이가 들어왔다.
"이커, 미남자가 들어오시는군."
군수는 창섭을 보며 부르짖었다.
"여보게 이리로 오게, 이리로 와!"
군수와 창섭은 벌써 「하게」를 할 만틈 친해졌었다. 마음 좋은 군수는 창섭의 미모와 재화(才華)를 사랑하였다. 창섭이도 그 걸걸한 성질을 밉지 않게 생각하였다.
창섭은 하염없이 웃으며 그의 곁에 가 앉았다. 그때껏 군수에게 몸을 실리고 있던 명옥은 슬며시 따로 안으며 물끄러미 창섭을 보았다.
군수는 명옥에게 창섭을 가리키며,
"자아, 어떠냐, 이 나으리를 보아라. 이만하면 너의 나지미 노릇을 하겠니?"
하자 명옥은 입을 삐죽하며 군수를 꼬집었다.
"좋으면 그냥 좋대지, 남을 꾀집니."
하고 창섭을 보며
"여보게 이런 미인은 자네가 아마 처음 보리. 수심가 잘하고 춤 잘 추고 조선에 제일가는 기생일세."
창섭은 인제 기생과 친할 절호한 기회를 만났건만 이소개해 주는 말도 들은체만체 잠잠히 말이 없었다. 아까 흐르는 별같이 선뜻 나타났더 선뜻 사라진 정애 같은 그 모양이 그의 온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이다.
그 방의 커다란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열린 사이로 보얀 얼굴과 회색치마가 나풀 하며 기생 하나가 한 팔을 짚고 나붓이 인사를 드렸다.
창섭의 눈엔 그 새로 온 이의 얼굴이 햇발같이 부시었다. 그것은 그가 곧 문간에서 본 그 얼굴이었다.
3
[편집]여러 사람의 시선은 이 새로 온 기생에게로 몰렸다.
그이는 미색 하부다이 저고리에 이 또한 하부다이의 일종인 듯한 띄엄띄엄 매화 비슷한 무늬가 있는 진주빛 윤이 지르르 흐르는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한 팔을 짚고 나서 살그머니 일어선 그이는 저를 초점으로 모이는 눈살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고개를 다소곳하고 어디에 가 앉을까요 하는 것처럼 잠깐 서성서성한다. 여기저기서 「이리 오라」하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군수의 목청이 가장 높았다. 그이는 저를 알은체해주는 손님에게 감사해하는 듯이 상그레 웃음을 건네고 발길에 밝힐 듯한 치마를 한 손으로 거두어올려 맵시있는 보얀 버선발을 재게 놀리어 군수의 곁으로 다가온다.
군수는 제가 무슨 승리나 한 듯이 벙글벙글 웃으며
"그러면 그렇지, 이리오게, 이리와."
하고 또 두어 번 청을 하였건만 그이는 군수의 곁이 아니라 제 동무 명옥이 곁에 앉는다.
창섭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숨 한번 쉬지 않고 저에게로 가까이 오는 낮익은 듯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바람이 지나간 뒤의 바다 모양으로, 염통이 고동을 그쳤을이만큼 그는 정신을 모았건만 기실 그의 머리는 더할 수 없이 착란하였다.
반들하게 쪽찐 머리가 생대로 푸수수한 트레머리로도 보이고 치마 밑에서 남실거리는 보얀 버선발이 까만 구두로도 보였다.
"여보게, 자네는 무엇을 그리 골똘히 보고 있나. 설향(雪香)을 보고 넋을 잃은 모양일세 그려."
하며 군수가 무릎을 툭 치는 바람에 창섭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자 무안해지므로 빙그레 웃었다. 그때에 명옥이와 무에라고 소곤거리고 있던 설향이가 잠깐 눈을 들어 창섭을 보았다.
조금 흐린 맛이 있었으되 영채(映彩)가 돌긴 하릴없는 정애의 눈이었다. 창섭은 이 눈을 보자 다시금 당황하였다.
이것저것을 모르는 군수는 아까 명옥을 소개할 때와 똑같은 어조로 설향의 수심가 잘함과 안색의 어여쁨이 서울에 으뜸임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창섭이가 저와 한 사(社)에 다니는 것, 사중의 미암자이고 재주꾼임을 설향에게 자랑하였다. 그이는 「네, 그렇게 훌륭한 분이야요?」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창섭은 새로이 설향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제가 처음에 정애로 속은 것이 우스웠다. 딴은 그 귀염성 있는 입언저리와 기름하고도 둥근 상판이 정애의 그것과 비슷도 하였으되 조금 날카로운 듯한 콧대와 가는 눈썹은 아주 별다른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분바른 보람도 없이 푸른 빛이 도는 얼굴빛이 정애와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였다.
그러나 그것만드로도 기억의 못 깉에 간신히 가라앉았던 정애의 꿈을 불러일으킴에는 충분하였다. 그때껏 정애로부터는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영숙의 입에서도 도무지 정애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영숙은 학교를 마친 후로 어머님께 붙들려 바느질과 음식찌질을 배우노라고 좀처럼 대문 밖을 나가지 못하였고, 혹 나들이를 간대도 일가댁이나 갔지 동무들은 찾지 않는 모양이었다. 학교를 나오자 그들의 사이도 자연히 멀어졌으리라.
창섭은 어째 정애에게 놀림감이 된 듯 싶었다.
제가 만나자고까지 하여놓고 무슨 일로 하여 한번 약속을 어겼다고 하기로니 그렇게 끊고 벤 듯이 발그림자도 않을 까닭은 없을 듯 싶었다. 진정으로 저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장난삼아 그런 편지를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자기의 순실(純實)한 감정이 남에게 놀림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만큼 애닯은 일은 없으리라. 분한 일은 없으리라.
창섭은 정애를 괘씸한 계집애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늘 밤에 정애와 미슷한 설향을 만났다. 그는 정애에게 느꼈던 사랑이 그이에게로 살아남을 느꼈다. 그리고 또 정애에게 느낀 비슷한 미움도 그에게 느꼈다. 그는 정애에게서 채우지 못한 사랑의 욕심, 정애에게 속은 분풀이를 애꿎은 설향에게 하려는 생각이 마음 어디인지 움직이고 있었다.
창섭의 설향을 바라보는 눈은 거의 적의(敵意)를 품은 듯이 날카로왔건만 이를 모르는 설향은 (사내로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흴까!)하고 속으로 찬미하면서 연해연방 호감 있는 시선을 창섭에게 던졌다. 그것은 병아리가 저를 덮치려는 솔개의 좋은 날개를 쳐다보며 부러워하는 격이었다.
4
[편집]여덟점 반이나 되어 손들이 거의 다 모이고, 아홉점이나 해서 요리상이 들어왔다.
손들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요리상을 에두르고 다시 자리를 잡는다.
창섭이도 요리상 곁에 가려다가 문득 설향이가 제 곁에 앉아야 될 것을 생각하였다. 그래서 눈으로 그를 찾아보았다. 눈치 빠른 세 기생은 어느 곁엔지 상머리에 하나씩 또 상 한편의 복판쯤 해서 술병을 들고 갈라서있건마는 창섭의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찌 할 줄 모르는 듯이 서성서성학는 판에 군수가 활발하게 기생 곁에 앉으라 하였다. 남들이 다 앉는데 저 혼자 서있기가 열없던 창섭은 그의 말대로 하였건만 무엇을 잃은 듯이 서운한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러는 즈음에 소피를 보러 나갔던 듯한 설향이가 들어온다. 그는 창섭의 심중(心中)을 살폈음인지 또는 직업적 민감(敏感)으로 제 위치를 알았던지 바로 창섭의 등 뒤에 술병을 들고 선다. 창섭의 등은 벌에게나 쏘인 듯이 욱신욱신하였다.
이내 기생들은 제 가까이 있는 손님들의 청을 따라 내려안제 되었다. 설향이도 군수의 앉으란 말에 치마에 바람을 풍기며 사뿐 내려앉는다. 제 마음 탓인지 모르겠으되 군수에게보다 창섭에게 몸을 실렸다. 그 보들보들한 치맛자락이 슬쩍 창섭의 무릎을 스칠 때, 핫두르막과 핫바지를 격(隔)했건만 제 무릎이 근실근실해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술잔은 돌아간다. 창섭은 무슨 술을 먹어야만 될일이 있는 것 같이 설향의 따라주는 술을 조금도 사양치 않고 주저치 않고 자꾸자꾸 들이켰다.
설향은 놀란 듯이 창섭을 바라보았다. 창섭이도 맞질러서 그 눈 속을 들여다 보았다. 둘은 한동안 눈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셔요?)
(설향이가 부어주는 술을 아니 먹을 수 있나.)
(그럼 내가 부어드리는 대로 잡숫겠단 말씀이야요?)
(암, 얼마든지 먹고 말고.)
(그러다가 취하시면 어떻게 하세요?)
(취하면 더욱 좋지……)
이 눈으로 주고 받는 말이 매우 재미스러운 듯이 설향은 땍때글 웃었다. 살짝 입술이 양편으로 열려 볼록하게 입가의 살을 모으자 보조개를 지으며 여러 가닥 실금을 그리고 눈이 가무러지는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오히려 웃음의 여파(餘波)를 눈초리에 띠고
"또 부어드려요?"
하고 인제는 법대로 입으로 말을 하였다. 그리고 기울어지는 제 몸을 버티듯이 한 팔로 창섭의 무릎을 짚으며 또 술을 붓는다.
창섭은 이 뜻 아니면 웃음에 놀라기나 한 듯 웃는 이의 얼굴을 뚫을 듯이 바라보다가 저도 싱그레 웃었다. 그리고 부어준 술은 자랑스럽게 비우고는 잔을 탁 놓았다. 설향은 또 웃으며 잔을 채웠다. 창섭은 또 웃으며 잔을 말렸다. 둘은 또 마주보고 웃었다. 또 붓고 도 말리고…….
창섭의 기얼어지는 몸은 설향의 어깨로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아까 눈으로 한 말이 이제 입으로 되풀이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셔요?"
"설향이가 부어주는 술을 아니 먹을까."
"그럼 내가 부어드리는 대로 잡숫겠단 말씀이야요?"
"암, 얼마든지 먹고 말고."
"그러시다가 취하시면 어떻게 하세요?"
"취하면 더욱 좋지."
연회는 한창이었다. 얼근하게 술이 돈 여러 사람들은 제각기 떠들고 있었다.
논설 쓰는 한학대가(漢學大家)는 주홍이 흐르는 듯한 얼굴을 번쩍거리며 수양제(隋楊帝)의 풍류성사를 이야기 하고, 三면주임은 침을 버글거리며 제국신문 만들던 추억담을 지껄이고, 술 잘 먹는 창운은 술잔을 입에 댄 체로 신문 편집 방법을 늘어놓는데 그와 마주 앉은 군수는 편육을 쩝쩝 씹으며 제일류의 신문 경영 방침을 논란하고 있다. 운해는 저와 같은 뚱뚱보 산호주를 한 팔로 엇비슷이 껴안고 무슨 실없는 소리를 소곤거리며, 조그마한 세환은 간 크게도 저보다 갑절이나 큰 듯한 홍련을 불들고 깐죽깐죽하게 놀리고, 찬명은 소사스럽게 생글생글 웃어가며 명옥을 제 무릎에 올려 앉혔다 내려 앉혔다 하고 있다.
택근은 「이 사람들은 내가 모두를 부리고 있구나. 이 사람들이 이렇게 잘 노는 것은 온전히 나의 막대한 덕택이로구나」하는 듯이 웃사람 아랫사람의 잘못을 용사할 때 띠는 미소를 띠고 여러 부하를 내려보고 있다.
이윽고 춤과 노래가 벌어지게 되었다. 기생들은 한자리로 모이게 되었다. 그때껏 창섭이와 붙어 앉았던 설향이도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창섭은 차마 못 놓겠다는 듯이 손을 꼭 쥐었다. 설향이도 떼치기 어려운 듯이 옷 고치는 모양을 하고 치마고름도 만적만적하다가 마침내 제 동무들 있는 데로 가버렸다.
먹음먹이의 냄새가 떠도는 그 방의 공기를 장고소리가 흔들기 시작하였다.
나이 어린 탓으로 명옥이와 설향이가 먼저 수심가하게 되었다. 그 노래에는 한숨의 바람이 일고 눈물강이 흘렀다. 불붙는 마음, 애 졸이는 마음, 원수엣 임, 그리운 임, 야속한 임, 못믿을 임, 두견이 우는 황릉(黃陵)의 무덤, 기러기 나는 동정(洞庭)의 호수, 하늘을 걷는 발 없는 달, 나무를 흔드는 손 없는 바람, 강물만 푸르러도 임 없는 설움, 비는 오건만 임 아니오는 한탄……. 청승맞게 구르는 목청은 어두운 밤에 혼자 훌쩍이는 과부의 울음처럼 RJfEjr이고 죽어가는 나비의 나래 모양으로 그윽히 떨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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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뒤숭숭하게 이리저리 위치를 바꾼 접시에는 거의 다비어가는 요리의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뒤흔들어졌으며 되는 대로 집어던진 나무재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어수선하게 떨어져 있다. 보얗던 송보는 흘려진 국물과 장물과 통조림의 홍합조각으로 하여 누른 반점, 검은 반점이 그려져 있다. 졸아붙는 구자가 최후의 비명을 아뢰고 있다.
반넘어 가고 남은 손들도 더러는 술상을 떠나 불 같은 숨을 헐떡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더러는 비틀비틀하며 춤을 추고…… 춤을 춘다느니보다 활개를 펄럭거리며 다리를 지척거리고 있다.
이 춤꾼의 앞에는 홍련이가 장고를 메고 「얼사 좋다, 으흥」하면서 멋들어지게 그 타구 같은 악기를 두드린다. 그라 앞으로 나아갔다 뒷걸음을 쳤다 함을 따라 춤꾼들은 들어섰다 물러섰다 한다. 그 장고머리에는 산호주가 미륵 같은 몸을 흔들거리는데 그 길쭉한 팔이 구렁이나 무엇같이 구불렁거리자 온 얼굴과 목을 뒤흔들어서 「에라 만수」를 찾고 있다.
그런데 술꾸느이 한패는 그래도 요리상 한 모서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취하면 취할수록 수을 들이라 들이라 하는 그 축은 연해연방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곤드레만드레하게 벌써 굴신(屈伸)의 자유를 읽은 고개를 설향의 어깨에 누인 듯이 기대고 창섭이도 그 축에 끼어 있었다. 그는 물론 주객이 아니로되 거기 앉은 어느 뉘보다도 술의 마력을 절실하게 느낀 사람은 그일 것이다.
정애의 추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슬픔, 샛말갛게 높은 가을 하늘의 별을 쳐다볼 때처럼 가슴에 스며흐르는 쓸쓸스럽고 하염없는 비애, 그 별의 그림자가 야트칵한 시냇물에 떨어진 것을 움켜쥐려는 듯한 느낌을 설향에게서 맛보는 얇은 적막, 마른 잎같이 물얼굴에 뜬 그 그림자를 움켜쥠에도 물이 손에 묻을까하는 염려, 옆에서 보는 이가 비웃고 흉볼까 하는 공겁(恐怯)이 모든 감정을 흐리게 하고 살라버리는데, 술의 힘이 필요할 듯 하였다.
술이란 기쁜이에게도 동무일는지 모르겠으되 보다 더 슬픈 이의 친구이었다. 그러나 술을 먹는다고 슬픔이 사라질 리는 없었다. 기쁨을 돋우는 것과 마찬기지로 슬픔도 돋우었다. 싸늘한 슬픔을 따뜻하게 녹여서 윤기를 내고 기름을 흐르게 하는 법이다.
배배 마른 염통에 물이 오라자 꽃 아니 핀 한숨을 걷잡을 길이 없었다.
손에 물이 묻은 들 어떠하리, 남이 비웃고 흉본 들 어떠하리. 부여잡자, 붙안자, 어여쁘고 안타까운 별의 그림자를……
창섭은 한 팔은 설향의 허리로 돌리었다. 단내 나는 코 안으로 기어드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머리향기, 깁 옷의 보드라운 촉감, 후끈거리는 내 손바닥에 옮아오는 저 손바각의 미묘한 온미(溫味)……
창섭은 취한 중에도 일부로 더 취한 듯이 감고 있던 눈을 반만 떠서,
"설향이……."
"네?"
"………………"
설향은 고개를 갸웃이 하여 창섭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기다렸건만 창섭은 눈을 다시 감으며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설향이?"
"네?"
"…………"
"왜 부르셨어요?"
"설향이?"
"네?"
"우리 같이 갈까."
"어데를요?"
"설향의 집에."
"……"
설향은 방그레 웃을 뿐이었다.
"싫어"
"무엇이요."
"같이 가기가……."
"…………"
이윽고 설향의 편에서 물었다.
"참말이야요?"
"그럼!"
"정말?"
"그럼!"
설향은 또 고개를 갸웃이 하며 창섭을 들여다 보았다. 창섭은 두 손으로 움키는 듯이 설향의 볼을 잡아당기어 그 입을 제 입에 대었다.
6
[편집]창섭은 목에 불어 붙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눈을 번쩍떳다.
「물! 물!」하고 외치려다가 그는 의아한 듯이 사면을 둘러보았다.
두 같 반이나 될 듯한 방 윗목에는 화려한 세간이 가득히 놓여 있다. 쌍을 채운 화류 삼층장, 번쩍번쩍하는 유리문 달린 의걸이, 그 안에서 누르게 푸르게 또는 분홍으로 초록으로 이불과 요가 내려다보인다. 자개로 수놓은 문갑 위엔 양 가에 자개물린 큼직한 체경 하나가 얹혔는데, 그것은 마치 햇발이 비친 가을물 모양 전등을 받아 은(銀)으로 번쩍이고 그 옆에 놓인 사기 화분엔 발그스름한 매화 두 송이가 때아닌 웃음을 웃고 있다.
창섭은 여기가 어디인가 하는 듯이 고개를 반쯤 일으켰다.
누가 두루마기와 외투르 벗겼는지 동저고리 바람이고 제가 누운 자리는 모본단 보료 위였다. 그리고 누가 덮어주었는지 묵직하고도 포근포근한 모본단이불이 자기의 하반부에 앉혀 있다. 그리자 저와 머지 않게 잠든 설향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번개같이 어젯밤의 지낸 일을 생각하였다.
연회는 끝장날 때가 되었다. 몇 아니 남은 손들도 허전거니는 손으로 모자를 쓰고 외투를 잆었다. 기생들도 어느 곁엔지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사람은 군수와 창섭이와 설향이 단지 세 사람이었다.
"인제 고만 가세요."
설향은 저를 다시 놓지 않으려듯이 붙들고 있는 창섭을 보며 민망한 듯이 이런 말을 하였다.
"싫어, 나 가기 싫어."
창섭은 어린애 모양으로 응석을 부렸다.
"딴 손님 모두 가셨는데 안가시고 어째요. 우리 같이 가서요."
설향은 달래었다.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할 리가 있어요, 우리 셋이 같이 가서요."
하고 군수를 보며
"나의, 이 나으리하고 같이 가셔요, 네?"
놀기에 연연(戀戀)한 군수는 물론 쾌락하였다.
문간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설향이가 사무실에서 망토를 입고 나왔다. 그가 인력거를 타자 둘도 인력거를 탔다.
앞서 가는 수레를 따라 뒤로 두 수레가 쫓았다. 살을 오려내는 듯한 매운 바람이었건만 취한 이에게는 화창한 봄바람 모양으로 시원하기 짝이 없었다.
예까지는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 뒤의 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불같이 타는 몸을 가볍게 흔들리며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면서 잠에 떨어졌음이다. 수레가 그 문에 닿은 때야 잠깐 잠을 깨고 이 방에 들어올 수가 있었으되 또 그만 쓰러졌음이리라……
설향은 불을 등져서 창섭의 편을 향하고 누워 있다. 슬쩍 그의 귀밑을 스친 광선은 그의 얼굴을 밝은 그늘로 감추었다. 희미한 곡선으로 그려진 그 윤곽엔 몽환에 가까운 아름다움이 떠돌았다. 더운 듯이 한 팔로 가슴에 얹힌 이불을 걷어치웠는데 하붓이 풀린 저고리 자락속으로 보야스름한 젖가슴이 무리에운 달처럼 내다보였다.
깨는 이의 얼굴은 자는 이의 얼굴에 가까워갔다.
창섭은 다시금 정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그림자를 부여잡는 듯이 설향을 부퉁켜안았다.
자는 이는 괴로운 듯 고개를 돌리고 기지개를 켜더니 반 눈을 떠서 사내를 보며 힘없이 웃었다.
"언제 깨셨어요?"
"시방 깨었어."
사내는 슬며시 계집을 놓고 부끄러운 듯 중얼거렸다.
"시방 몇 시나 되었어요?"
계집은 정신을 차리는 듯이 몇 번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몰라"
"몇 시나 됐을까, 아직 날이 새지 않았지요?"
계집은 이런 말을 하며 미닫이를 바라보고 몸을 일으켜 제 팔목시계를 본다.
"아직 세시밖에 아니 되었구면, 그런데 시장치 않으셔요?"
"시장치는 않아도 물이 먹고 싶어."
계집은 장 밑에 있는 자리끼를 내어주었다. 사내는 살았다는 듯이 무을 켜고 있었다. 그 동안에 계집은 보료를 걷고 다시 요와 이불을 내려 깔았다.
"무슨 술을 그렇게 잡수셔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피차에 한시바삐 눕기만 바라면서도 물끄러미 마주보고 있었다. 달착지근한 침묵이었다. 웬일인지 양편 가슴에서는 맞추기나 한 듯이 거의 한 때에 휘하고 한 숨이 나왔다.
"왜 한숨을 쉬셔요?"
"설향은?"
둘은 웃었다. 전등불은 검둥치마로 가리워졌다.
X X
삶아서 껍질을 벗겨놓은 계란같이 매끈한 갈결의 보들보들한 솜의 느낌, 말씬말씬한 고무의 탄력, 손안에 가볍게 흔들리는 자릿자릿한 젖통의 무게…… 맞서리는 두 숨결, 붉어가는 두 입술, 서로 빨아당기는 두 몸의 사라지는 듯한 접촉……, 전존재를 뒤흔드는 아찔한 도취, 둘이 하나로 녹은 황홀, 이 홍로(紅爐)……
밤이다, 어두운 밤이다, 공단 같은 밤이다. 길이길이 새지 말과저, 길이길이 깨지 말과저……. 눈감고 속살거리는 달콤한 말씨, 서로 자랑하는 사랑의 깊이, 언제든지 새로운 감격을 자아내는 맹세. 계집의 눈물 묻은 팔자타령, 사내의 한숨겨운 위로. 못 믿겠다고 앵돌아지는 교태. 잔 싸움을 푸는 헤일 수 없는 키스. 一분을 못 넘는 애틋한 졸음. 한결같이 걸어가는 우단의 꿈길, 깜박 졸다가 깜빡 깨어서 서로 찾아다니는 따스한 팔뚝.
전등불은 꺼졌다. 밤은 새어나간다. 무슨 단단한 결심이나 한 듯 사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기 시작하였다.
"왜 벌써 가시려고 하서요?"
다 늦게야 오는 잠에 조아붙는 눈을 비비며 계집은 물었다.
"그럼 가야지."
사내는 향락의 뒤에 오는 적막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벌써 가신단 말이야요?"
하고 계집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얼음으로 흰꽃을 수놓은 창경(窓鏡)을 가리키며 밖의 날이 저렇게 추우니 해가 오르거든 가라 하였다.
처음에는 몇 번 고개를 흔들다가 사내는 다시금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