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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탑/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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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劉 檢事正

三十분 후, 정신을 잃었던 검사부인은 백진주 선생의 아현동 별장 일실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부인, 인제야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하고 묻는 백진주 선생의 부드러운 말에 검사부인은 잠깐동안 비둘기처럼 도록도록 하다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혼도상태에 빠저있는 아들을 미친듯이 껴안으며

『아, 경일(京一)이가...... 경일아! 경일아!』

하고 외치면서 어린애 볼에다 입술을 무섭게 부비었다.

『부인, 염녀 마십시요. 이 조그만 빨간 병에 든 약으로 말하면 우리 중국에서는 가장 진귀히 여기는 생명수 올시다. 부인께서도 지금 이 약을 마시고 정신을 차린것입니다. 자아, 보십시요.』

그러면서 백진주 선생은 그 새빨간 병에 든 물약을 한방울 어린애 입에다 떨어트렸다. 그랬더니 일분도 못되어 어린애가 눈을 반짝 떴다. 이 광경을 본 어머니는

『아, 경일아!』

하고 무섭게 어린애를 껴안으며

『고맙습니다! 죽어도 잊지 못할 이 두터운 신세― 그런데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저희 모자의 생명을 구해주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소한 일을 가지고 과분의 칭송을 마십시요. 여기는 제 별장, 그리고 저는 백진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올시다.』

『아, 당신이 바루 저 유명하신 백진주 선생?...... 오오, 꿈 같은 일입니다! 어제도 장두취 부인과 하로종일 백선생의 이야기를 했었답니다. 집에도 차가 있지만 하두 경일이가 장두취의 차를 타고싶어 하길래, 오늘 빌려타고 드라이브를 나왔다가...... 자동차 한대를 선물로 보내신것은 아마 서울 장안에서도 백선생이 처음일꺼예요. 아아, 이런 말을 들으면 경일이 아버지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겠어요?...... 아, 정말 저희 주인은 유동운이라고 지금 검사정으로 있지요.』

『아까 술취한 그 운전수의 입으로 잘 알아모시고 있습니다.』

『경일아, 이 선생님이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주셨다. 너 고맙습니다 아저씨, 하고 인사를 드려야지, 응?』

그러나 경일이라고 부르는 이 소년은 힐끗 백진주 선생을 한번 바라볼 뿐,

『흥!』

하고 비웃는듯이, 창백한 얼굴에 극히 신경질인듯 싶은 커—다란 눈동자를 껌벅거릴 따름이다.

『댁은 뭐 혜화동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는 그럼 별장이신가요?』

『네, 본집은 혜화동이 올시다.』

『그럼 저희 주인이 선생님을 찾아뵈려면 혜화동으로 가 뵈야겠지요?』

『네, 늘 혜화동에 있습니다.』

그때 정신을 완전히 차린 경일이는 어머니 품에서 쑥 빠져나가면서 아까 그 빨간 약병을 넣어둔 유리장문을 열고 거기 진열되여있는 여러가지 약병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떤것은 병마개를 뽑아들고 코로 맡아보기도 한다.

『아, 약병을 만지면 안된다! 냄새만 맡아도 위험한 약품들이 들어있으니까.......』

백진주 선생은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검사부인은 그말에 호닥닥 일어나 어린애를 끌어 안았다. 그리고는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알수없으나 때때로 그어떤 맹렬한 호기심을 띤 얼굴로 유리장 안에 진열된 약병들을 몰래 바라다보곤 하였다.

백진주 선생은 알고 있다. 유동운 검사정 부인이 여자의 몸으로서 특히 독약물(毒藥物)에 대하여 많은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백진주 선생은 보고도 못본척하고 마음대로 흥미를 가지라는듯이 들창밖으로 외면을 하여준다.

이윽고 백진주 선생은 운전수 배성칠을 불러 검사부인을 댁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명령을 하였다.

『백선생님, 고맙습니다. 저희 주인이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뵐것입니다.』

『찾아주시지 않어도 조금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편 생각하면 이런 기회에 명망이 높으신 유검사정을 사귀여두는것도 저로서는 혹시 영광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인사의 말로서는 적지않게 이상하게 들리는 백진주 선생의 대답이었다.

그날 오후, 혜화동 백진주 선생의 저택 현관 앞에 한대의 자동차가 멎으며 흑장(黑裝)에 단장을 들고 존엄을 표시하는 콧밑 수염과 사람의 가슴속을 들여다 보는듯한 날센 시선을 가진 신사가 한사람 내렸던것이니 그것은

「가치(價値) 있는것 같은 얼굴을 지어라.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그대의 가치를 믿을것이다.」

하는 격언을 二十여년 동안 몸소 실천하여 거기에 막대한 성공을 거둔 검사정(檢事正) 유동운 그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차석검사의 자리조차 주지않은 총독정치 밑에서 검사정이라는 마치 하늘의 별 따기 보다도 어려운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한것은 실로 전대미문의 대우였으며 따라서 거기에는 그어떤 특별한 숨은 공로가 없지 않았을것이니, 그 숨은 공로가 무엇인지를 세상 사람은 좀처럼 알길이 없었다.

세도가 유동운! 그렇다. 서울 장안에서도 검사정 유동운 하면 쩡쩡 울리는 세도가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세도가 유동운이가 제아모리 금만가랄지라도 일개의 시정인(市井人) 백진주라는 인물을 방문한다는것이 얼마나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를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그러한 검사정이 지금 마치 법정에나 출입하는것 같은 위엄있는 표정으로 백진주 선생이 맞이하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러한 유동운을 맞이하는 백진주 선생으로 말하면 어지간히 흥분하려는 자기 감정을 억제하기에 잠깐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군을 심판하는 재판관이 아니고 군의 이익을 위하여 노력하려는 한사람의 친구다. 그러니까 군은 나를 믿어라! 믿으면 군은 반드시 자유로운 몸이 되어 다시 세상 구경을 할것이다.—」

오오, 그것은 二十여년 전― 기미년 二월 二十八일 진남포 검사국의 컴컴한 일실에서 도산선생의 신서를 불살리면서 정열을 가지고 배앝은 가면의 악마 유동운 검사대리의 한마디가 아니였던가!

그 한마디를 백진주 선생은― 아니, 나 어린 뱃사공 이봉룡이가 그 얼마나 믿고 믿었던고?...... 마치 성서에 기록된 크리스도의 말씀처럼 끝끝내 믿기를 신명에 맹세한, 아아, 어리석은 젊은이 봉룡의 순정이여!

『실은.......』

하고 유동운은 법정에서 변론할 때 가지던것과 마찬가지의 얼굴을 지으며

『오늘 아침 내 안해와 어린것의 위험을 구해주셨다는 말을 듣고 치사의 말씀을 드리고저 찾아 온것입니다.』

말은 비록 정중하나마 인간미를 잃은 하나의 사교어(社交語)에서 지나지 않는 유동운의 인사였다. 뿐만 아니라, 직업적 습관으로서 좀처럼 사람을 신용할 줄을 모르는 유동운의 태도였다.

『듣건대 유동운씨는 총독 이외의 사람은 좀처럼 방문할줄을 모르는 양반이라고 하시는데 이처럼 나 같은 사람을 찾아주시는것을 보와하니...... 하하...... 역시 처자에 대한 정이란 체면과 허세(虛勢)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 내포되여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러히 발견한것 같습니다.』

이러한 태도로 나올줄은 실로 뜻밖이었다. 유동운은 어지간히 놀래는 표정으로 백진주 선생의 태연자약한 얼굴을 멍하니 처다보았다. 그러나 유동운도 좀처럼 얕보지 못할 위인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유동운이가 체면과 허세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밖에는 해석 할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석하시던지, 그것은 자유입니다만, 다만 나로서는 교양을 자랑하는 우리들 인간에 있어서나 또는 우마와 같은 짐승에 있어서나 처자를 귀여워하는 애정에는 별반 다름이 없다는것을 결론지었을 따름이지요.』

유동운은 또한번 놀랐다. 교양과 예의와 법리(法理)를 누구보다도 자랑하는 검사정 자기에게 이와같은 노골적인 인간철학의 한구절을 사양없이 토로하는 상대편이 대체 어떠한 인물인가를 유동운은 무척 알고 싶었다.

『당신이 어떠한 신분을 가진 분인지는 알수 없습니다만 나는 지금 당신의 입으로부터 야생(野生)의 철학을 강의받을 여유를 갖지 못한사람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대단히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동운씨처럼 관찰력이 예민한 분으로서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이 대체 어떠한 인물이라는것을 모르신다면.......』

그 말에 유동운은 잠깐 동안 뚫어질듯이 상대편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그러나 당신은 너무 오만(傲慢)하십니다. 당신은 뭇 사람보다는 뛰여날지 모르나 당신의 위에는 신(神)이 있습니다.』

그순간, 백진주 선생은 몸서림 칠만큼 엄숙한 목소리로 부르짓듯이 대답하였다.

『신은 모든 사람위에 있는것이요! 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오만할런지 모르나 신의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무력한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말씀을 나 역시 존경할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서 유동운은 비로소 선생이라는 존칭을 쓰지 않을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마침내 백진주 선생앞에 머리를 숙인 유동운이였던 것이다.

『언제 틈이 계시거든 제 집을 한번 찾아 주십시요. 집에는 오랫동안 중풍으로 말미암아 전신불수가 된 아버지가 있습니다. 기미년 만셋통에는 열열한 혁명가의 한사람으로서 건장한 체구를 가진 대담무쌍한 위인이지요. 자기의 힘을 믿는데는 아마도 선생에게 지지 않을것입니다. 천명이 자기에게 있다고 맹신(盲信)하는 점도 선생과 의견이 맞을듯 싶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 분을 한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꼭 한번 찾아 주십시요. 이름은 유민세씨라고 부르지요. 과거에는 감옥을 비웃고 단두대(斷頭臺)를 비웃고 총검을 비웃고 자객(刺客)을 비웃던 유민세씨도 지금은 오륙을 쓰지 못하고 누어있는 산 송장이 되어서 손주딸 영란(英蘭)이가 하자는대로 하고 있답니다.』

『손주딸이라니요?』

『네, 영란은 제 전처의 소생이지요— 꼭 한번 오셔서 가엾은 유민세씨를 위로해 주십시요.』

『잘 알았습니다. 꼭 한번 찾아가서 장안의 세도가 유동운 검사정의 춘부장을...... 아, 참 실례를 했습니다. 유검사정의 말대로 「가엾은 유민세씨」를 위로하여 드릴것을 이자리에서 약속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유동운 검사정이 총총한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갔을 때, 백진주 선생은 눈을 감고 부르짖듯이 중얼거렸다.

『아들에게 배반을 당한 늙은 혁명가여! 당신의 그 구슬픈 영혼을 위로하노니, 순정의 청년 이봉룡은, 二十一년 전 상해 부두에서부터 당신의 존명을 기억하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