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탑/33장
33. 春鶯의 怨讐
검사정 유동운의 굉장한 저택은 청운동 고개 중턱에 있다. 뒷뜰에는 수목이 울창한 넓은 정원이 있는데 이 정원을 사이에 끼고 저택은 앞채와 뒤채로 나뉘여 있다.
앞채에는 유동운 부부와 그의 아들 경일이가 살고 뒤채에는 중풍으로 전신불수가 된 그의 아버지 유민세 노인이 손주딸 영란과 함께 살고 있다.
영란은 금년 잡아 열아홉살, 유동운의 전처의 소생이다. 다시 말하면 기미년 二월 二十八일 유동운 검사대리가 진남포 동명관에서 약혼피로연을 한 오붕서씨의 딸 정숙의 소생이다.
기미년 만세운동 직전 열열한 혁명투사이던 유민세씨에게 암살을 당했다는 신상욱 판사의 아들 신영철 청년― 작년 성탄젯날 아침 송준호 청년과 상해에서 헤어져 중지 북지로 노루사냥을 떠난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신영철 청년과 약혼한 사이에 있는 영란이었다.
그러나 이 혼사는 주로 유동운 부부가 거의 강제적으로 맺은 것이고 본인인 영란이나 또는 조부 유민세 노인은 이 혼사에는 애당초부터 반대였다.
그러나 전신불수로 말조차 자유로이 하지못하는 유민세 노인이 제아모리 반대의 의사를 품고 있댓자 산 송장처럼 밤낮 누어만있는 폐인의 몸으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한편 영란은 또 영란대로 번민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구슬처럼 어여쁜 맘씨를 가진 가련한 영란은 아모리 생각해도 돌아가신 어머니 오정숙이의 그 청아하고 고운 핏줄기를 그대로 물려받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웬만만 하면 부모가 정해준 이 혼사에 반의를 표하지는 않었을 것이지만, 영란에게는 그보다 먼저 백년해로를 굳게 맹세한 한사람의 독실한 청년이 있었던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독신으로 있는 젊은 의학박사 모인규였다.
그렇다. 생각하면 유동운이가 이 모인규 청년을 달갑게 여길 리는 만무하다. 작년 학위논문이 통과되어 사진과 함께 모인규의 기사가 신문지상에 보도되었을 때 유동운은
『흥, 뱃놈의 아들이 출세를 했는걸!』
하고 코웃음을 하던 광경을 영란은 옆에서 본적이 있다. 모영택씨와는 「이봉룡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누차 대면한적이 있었으나 어딘가 자기 아버지 유민세씨에게서 느끼는것 같은 일종의 압력(壓力)을 느끼고 불쾌해 한 일이 한두번이 아닌 유동운이었다.
영란은 하루종일 외로운 할아버지의 병 간호를 하다가는 피곤한 몸을 곧잘 정원 수목 새로 옮기곤 한다.
「어머니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제 몸에서 난 경일이가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어머니는 분명히 내 재산을 무척 탐내하는 눈치야!」
영란은 봄새가 우는 수목 사이를 거닐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다. 계모에게는 자기에게 소속한 이렇다할 재산이라는것이 없다. 그러나 영란에게는 죽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막대한 유산과 아직도 진남포에서 생존해 계시는 외조부 오붕서씨의 재산이 멀지않은 장래에 영란의 수중으로 들어올것이었다.
계모는 그런것을 생각하면 귀여운 자기 아들 경일이가 가엾이 보이었고 미운 전처의 소생 영란이가 무척 부러웠던 것이다.
백진주 선생은 저번날, 맹목적인 모성애를 가지고 경일이를 귀여워하던 이 유동운 부인이 특히 독약에 대한 만만치 않은 관심을 갖고있는 사실을 분명히 눈치 채었다.
그러면 부인이 독약에 대하여 그처럼 만만치 않은 관심을 갖고있는 촛점은 과연 어디 있을 것인가?...... 서울 장안의 권력가인 유동운 검사정의 가정도 결국에 있어서는 결코 행복한 그것이 못된다고 생각한 백진주 선생의 결론은 과연 여기 있었던것이다.
『아가씨, 아가씨!』
하고 그때 영란을 부르는 시종의 목소리가 수목 사이에 들렸다.
『나 여기 있어. 왜 찾어?』
『저 마님께서 아가씨를 부르시는데ㅂ쇼. 손님이 오셨다고요.』
『손님?...... 어떤 분이신데?......』
『마님께서 그러시는데 아주 훌륭하신 분이시라구요. 무슨 선생이라고 그러시더라?...... 아, 백진주 선생이라는 분이 오셨답니다.』
『백진주 선생?......』
영란은 머리를 기우리며 시종의 뒤를 따라 들어 갔다.
검사정 유동운의 방문에 대하여 그 답례를 하는 형식으로 찾아온 백진주 선생이였다. 그러나 마침 유동운은 모 고관집에 초청을 받아 가고 집에는 없었다.
영란이가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 경일이를 무릎위에 안은 유동운 부인과 백진주 선생 사이에는, 저번날 백진주 선생의 집에서 먹은 그 핏빛과도 같이 새빨간 약병에 든 신통한 물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인은 말을 끊고 영란을 소개하였다.
『얘가 바루 아까 말씀 드린 영란이예요.』
영란은 조용한 태도로 인사를 하며,
『저번에는 어머님과 제 동생을 구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받으며 백진주 선생은 영란의 얼굴에서 어딘가 한없이 고적하고 쓸쓸하여 보이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얼굴에는 눈물을 흘린 흔적조차 뵈이는것 같은 고주낙한 처녀였다.
그때 다섯시를 치는 괘종 소리가 뗑뗑 들렸다.
『아, 영란인 그럼 인사가 끝났으니, 할아버지께 진지를 갖다 드려요.』
『네.』
하고 영란은 물러가면서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였을 때, 경일이가
『흥, 할아버진 누나만 이뻐하지! 난 할아버지 싫어! 송장야, 송장...... 산 송장야!』
하고 영란의 뒷모양에 눈을 흘긴다.
『아이머니나 경일이도깨비...... 무슨 말버릇이, 그래?......』
부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아들을 엄격하게 질책하였다.
『하하.......』
하고 백진주 선생은 귀엽다는 듯이
『경일군은 참 영리한걸요. 보통 애들 같으면 「산 송장」이라는, 그런 어려운 말문자는 좀처럼 알지 못할텐데...... 참 아드님이 신통합니다.』
극히 자연스러운 찬사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가혹한 야유를 의미한다고는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집안에서들은 저 가엾은 늙은 혁명가에게 「산 송장」이라는 대명사(代名詞)로서 불러 왔었던고.......
영란이가 사라지자 두사람의 이야기는 다시 그 신통한 물약으로 돌아갔다.
『그래 백선생님은 그 생명수라는 물약을 먹으면 저처럼 빈혈중으로 기절을 잘하는 사람에게도 효험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단 한방울만 먹으면 곧 소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선생님은 그 생명수의 처방법을 아시는가요? 아신다면 꼭 저에게 좀 가르쳐 주세요.』
『네, 가르쳐 드리지요. 그러나 이것만은 잘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적당히 사용하면 영약이 되지만 분량이 지나치면 도리여 생명을 빼앗는 독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번에도 부인께서 몸소 경험하여 보신것처럼 한 방울을 먹으면 약으로서 효과가 있지만 다섯 방울만 먹으면 생명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아모런 맛도 냄새도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실수하기가 쉽지요. 자아 그러면 독약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하고 그칩시다. 이 이상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혹시 제가 부인께 그 약의 효과를 시험하여 보라는것처럼 들리니까요.』
『원 선생님두 무슨 말씀을.......』
『자아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백진주 선생은 몸을 일으켰다.
『후에도 종종 찾아 주세요. 그리고 돌아가시거든 잊지 마시고 그 생명수의 처방전을 한장 써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인,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유동운의 저택을 나온 백진주 선생은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며 극히 만족한 얼굴을 지었다.
『그만했으면 오늘의 수확은 상당한걸, 땅은 지극히 기름지다! 종자만 뿌려두면 싹은 저절로 움틀것이 확실하다!』
이튼날 백진주 선생은 약속한대로 생명수의 처방전을 써서 유동운 부인에게 속달로 부쳤다.
그날 밤 부민관 대강당에는 한국의 세계적 무용가 C여사의 신작무용 발표회가 있었다. 장안의 인사는 물밀듯이 부민관으로 밀려 갔다. 무용회는 일대성황이다.
송준호는 장래 장모가 될 장현도 부인과 그의 딸 옥영을 동반하고 이층 바른편 좌석에 앉아 있었다. 송준호는 마음이 내끼지 않았으나 장현도 부인이 일부러 보내준 입장권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오늘밤의 자리를 같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송준호의 좌석에서 마조 건너다 보이는 외인편 쪽에는 그의 부친 송춘식이가 총독부 고관 몇사람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것은 바루 프로그람이 한둘 진행한 때였다. 이층 바루 정면에 아까부터 비여있는 두개의 좌석을 향하여, 찬란한 중국복장을 입은 절세의 미인 한사람이 점잖은 신사의 인도를 받아가면서 천천히 들어왔다.
그 순간 사람들은 무대를 잊어버린듯이 그 미모의 중국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던것이니, 그것은 아버지의 원수 송만식을 찾고자 한국으로 건너온 춘앵이었으며 동반자는 두말할것 없이 백진주 선생이였다.
「아, 저이가 바루 그 호궁을 즐기던 여인이로구나!」
송준호는 상해 『카세이 • 호텔』 삼층에서 들은 그 절실한 멜로디—를 가진 호궁의 선률을 문득 상상하였다. 자기 옆에 약혼자가 있는것도 잊어버리고 송준호는 춘앵의 얼굴을 핥는듯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이가 백진주 선생의 애인인가?』
그렇게 묻는 장현도 부인의 물음에
『세상에서는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자세한것은 저 역시 알수 없습니다.』
『중국에는 미인이 많다더니, 정말 그림처럼 예쁜 여자야요!』
옥영도 그런 말을 하면서 일종 질투에 가까운 표정으로 춘앵을 바라본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로그람은 쉬일새 없이 진행되고 춘앵은 적지않은 흥미를 느끼는 표정으로 무대를 내려다보고 앉았다. 백진주 선생은 춘앵을 돌아다보며
『춘앵이.』
『네?』
『유쾌한가?』
『무척!』
『음, 그렇다면 잘 됐군!』
그때 제一부가 끝나는 벨이 울리며 관객은 웅성웅성 떠들기를 시작하였다. 그렇다. 사방을 도록도록하던 춘앵이가 갑자기 목멘 소리로
『앗!』
하고 부르짖은것은 바루 그순간이었다.
『춘앵이, 왜 그러는가?』
『저기...... 저기...... 원수가...... 아버지의 원수가 있어요!』
『원수?......』
『네, 송...... 만식이가.......』
그러면서 춘앵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비틀비틀 일어서다가 다시금 힘없이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춘앵이가 그 백어처럼 흰 손가락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가리키는 곳을 백진주 선생은 바라보았던것이니, 중추원 참의 송춘식이가 바루 그곳에 앉아 있었다.
『춘앵이, 그러나 나도 저 사람을 알지만, 저이는 송만식이가 아니고 송춘식이란 사람이다.』
『아냐요! 바루 저이예요! 집의 아버지를 마적단에 팔아먹은 놈! 그리구 아버지의 재산을 약탈한 원수!...... 오오!......』
하고 외치며 춘앵은 온 몸을 키질하듯이 떨었다.
『자아, 춘앵이,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다시 한번 그때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줘요!』
『네 네...... 이 이상 더 여기 앉아 있다가는 저는...... 저는 숨이 막힐것 같습니다! 죽을것 같습니다!』
이리하여 백진주 선생은 쓰러지려는 춘앵을 부축하듯이 하며 총총한 발걸음으로 부민관을 나섰다.
— 「眞珠塔」 報恩篇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