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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집에서 나고 집에서 살고 집에서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집이란 가장 편리한 발명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집에서 나고 집에서 살고 집에서 죽고 하게만 마련인 것은 가장 불편한 생리(生理)의 하나일 것이다.

1[편집]

그렇게 해서 세 번을 거듭 물난리를 치렀다.

마지막 손바닥만큼 남았던 마당 조각이 그것마저 패어 달아나고는 이제는 주춧돌 밑으로 개천이 흐른다.

가뜩이나 초라하게 생긴 오두막집이, 갈씬하니 집만 무너져가는 냇둑에 가 빠듯이 발붙임을 하고 조촘 멈춰 섰는 양이라니, 누가 옆에서 큰 소리를 지를까 조심스럽다.

집은 역시 못쓰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왕 아주 쓰러져버렸다거나 형지도 없이 영영 떠내려갔다거나 차라리 했더라면 섭섭한 대로 오히려 시원했을 뻔한 것을, 이건 훌비워 내던지고 일어서자니 그래도 뒤가 돌려다보여 못할 노릇이고, 또 좀처럼 그렇게 요만 것이나마 새로이 마련을 하여 척척 옮아앉고 할 가량도 없는 형편이고, 그렇다고서 차마 이 모양이 된 걸 그대로 지니고 살잔 말도 안 나오고.

이러잔 말도 안 나오고 저러잔 말도 안 나오고 뜨윽 그만 을씨년스러 무시로 입맛만 다셔진다.

평생 처음으로 집이라고 생긴 것을 한번 천신해 본 것이 막상 이렇게 마음과 경황을 번거롭게 한다. 단지 성가신 것이 아니고, 노인 자제처럼 얼뚱스럽다. 정을 골몰케 하는 것이다.

집이라고 하는 것이 이다지도 맹랑한 물건인 줄은 몰랐었다. 다직 까치둥우리 쇰직한 한 채의 오두막집이. 재물로 치자면야 그러니 지극히 약소한 것이면서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화폐가격만으로는 능히 환산을 할 수가 없는 다른 한 벌의 가치를, 직접 마음에 통하여 정을 지배하는 일종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 줄은 몰랐었다.

다 늦게야 인생을 조그마한 또 한 과(再一課) 배웠다고 할는지, 비로소 집이라는 것을 발견한 셈이다.

2[편집]

초가삼간이라더니, 다섯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2백 70원에 샀다. 매칸에 2백 70원이 아니라, 모두 해서 집값이 2백 70원이다.

땅은 제 땅이 아니고 하천 가로 묵어자빠진 국유지였으나 그렇더라도 서울 같으면 웬만한 집 반칸 값도 채 못된다.

그것이 서울과는 겨우 24킬로 상거요 정거장(安養驛에서) 도보로 10분이 걸릴락말락한 곳이니 대단히 어수룩하고 헐한 거리라고도 하겠지만, 또는 서울 가직이 교통 편코 살기 좋은 전원 한적한 자리에다가 정갈한 초가삼간을…… 하고 보면 자못 운치 있어 들릴 법도 하겠지만, 실상인즉 두루 그렇질 못했다. 애초부터 물이 염려스러웠다. 그리고 필경 일이 저질러져 끝끝내 이 지경을 했으니,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시방 이 집 이것을 단돈 백 원은커녕 누구더러 공으로 차지하란댔자 와락 긴해할 사람도 없게쯤 버린 것이 되고 말았는데, 최초에 사가지고 수리한 비용과 한물통에(결국 아무 효과도 없는 방천을 쌓느라고) 허비한 비용 기타를 통 합하면, 도리어 집값보다 더 먹힌 계산이다.

진소위 싼 것이 비싼 것이란 푼수요, 많으나 적으나 재물을 들여 횡액 덩어리를 장만한 폭인데, 가령 그러한 흠결은 우선은 아무려나 미지수에 드는, 따라서 아직까지는 눈앞에 보이지 않고 나중 가서 튕겨질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므로 종차 일후의 근본문제에 속하리라고 하더라도……

옆집 꼽꼽이 긴상네 집을 사이에 두고 20미터가 못 되는 지점엔 덩시러니 상여집이 좌정을 하고 있다.

맞은편으로는 공동묘지가 빠안히 바라다보인다.

여우가 밤이면 우는 공동묘지다.

호랑이가 나온다는 첩첩 장산 수리산이 덮쳐 누르듯 바로 전면을 가로막고 있어, 벽과 코를 대고 앉았는 것처럼 답답하다. 큰비가 온다 치면, 이 수리산으로부터 쏟아지는 물이 경사는 급한데 수류는 짧아, 한꺼번에 와짝 저 앞 개천으로 몰려 닥치느라고 그 변고를 다 내곤 하던 것이다.

개천이라곤 하지만 하상(河床)은 평지나 진배없이 높고 바싹 마른 건천으로, 평상시엔 한가운데로 난 가느다란 옴팩이를 이끼 앉은 물줄기가 소 침 흐르듯 말다 할 뿐, 좌우의 질펀한 냇바닥 일대는 자갈 섞인 모래바탕에, 작년과 재작년이 연하여 가문 덕분이든지 온갖 잡초만 무연히 우거졌다.

이 임자 없고 황폐한 하상을 부락 백성들이 제마다 한 조각씩 파헤치고 호박이야 채마야 콩이야 메밀이야 귀퉁이 귀퉁이 심어먹기에 그 걸찍한 비료 냄새는 애꿎은 타방 사람이 죄다 맡아야만 한다.

안양역에서 시작하여 집 건너편 냇기슭을 지나 수리산 뒷골 병목안으로 뻗쳐 들어간 히끼꼬미 선이, 이 부락 명물인 자갈을 운반해 내느라고 쉴새없이 시끄럽게 구는 도로꼬와 기관차란 자가, 귀중한 낮의 수면을 함부로 방해를 놓는다.

이렇듯 그 살기 좋은 전원, 한적한 거리……

운운의 운치 있는 말과는 심히 인연이 먼 지대요, 그러한 지대에 알맞추 집 또한 좀 기구하니 생긴 게 아니다.

옴통만한 오두막집이, 아랫방 부엌 안방, 고패져서 마루와 건넌방…… 꼽고 보니 신통하게도 있을 건 죄다 있기는 하다. 그 죄다가 쓰러둥 한칸씩이고, 도통 다섯 칸짜리 집이 그래서 도통 다섯 칸살이다.

아랫방과 건넌방은 각기 부엌으로 반칸씩 까재기를 달아냈다지만, 서울 가쾌나 청하지 않고는 여섯 칸 행세란 안될 말이다.

대지가 함할 뿐만 아니라 본시도 그리 높질 못한 촌 농막을 걸려다가 짓느라고 기둥을 다시 또 잘라냈다더냐 어쨌다더냐 해서 더욱이나 춤이 나찹디나찹다. 집을 들어서 산 지 장근 석 달이로되, 별반 큰 키도 아니건만, 일찍이 허리를 꼿꼿이 하고, 방 문턱을 어느 방이건 넘어본 적이 없다.

맞은편짝 율림으로 매일같이 산책을 가는데, 갔다가 문득 더러 건너다보든지 하노라면, 여승 그 게딱지처럼 납작하니 땅바닥에 가 착 눌어붙은 형상이 하도 그만 민망스러 못하곤 하던 것이다.

근처에서 제일 나찹고, 겸하여 작기도 하다.

근처라야 무슨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나 들뭇들뭇한 집들이 있는 바 아니요, 촌락 80여 호가 거진 다 고 또래로 올망졸망한 오막살이 판이지만, 그런 축에서도 제일 작고 납작하다. 그게 또 위치가 동네 바로 초입이요, 외딴 맨 앞이 되어서 잘 눈에 뜨이기까지 한다.

처음 이사를 와서는 그래서 간혹(서울서) 흉허물 없는 친구를 만나 혹시 놀러오라고든지 놀러오겠다고든지 할 적이면, 이러저러하고 이러저러하다면서 노순을 가르쳐 주는 끝에 으례껏 토를 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와 가지고는 마을로 들어서자 곧 제일 작은 집만 찾아내면 틀림없느니라고.

박(朴)군 같은 사람은 그리고 멀지 않아 가을에 결혼을 하거들랑 살림일라컨 요새날 서울바닥에서 그 무선 삭월세집을 얻어 살자고 생악형을 당할 것이 없이, 게다 그다지 숫두룸하다니 서울서 보증금 내는 정도면 족할 모양인즉, 저도 부디 나와 이웃하여 고만한 걸로 한 채 사도록 할까보다면서 겸사겸사 쉬이 한번 구경을 오겠노라고 만나는족족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해서, 자연 그 '제일 작은 집'이란 말도 번번이 입에 서로가람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러자 어느날이든가 하루는 안해가 마침 밖에서 체부가 찾는 소리를 듣고 나가더니, 별안간 혼자서 까알깔 우편물을 받아가지고 쫓아들어오면서 구르듯 웃어쌓는 것이었었다.

필시 또 알뜰한 체부 양반이 아마 무슨 던둔바릿질을 한 거지야고쯤 여기며 건으로 고소를 했으나, 보자하니 아니었다.

하도롱 봉투의 봉서편지를 한 장 따로이 바른손에 갈라 쥐고서, 들여다보고는 웃고, 그러다간 짐짓 등뒤로 감추면서 나를 바라다보고는 웃고.

그러면서 툇마루 앞으로 다가오더니 펄썩 걸터앉으면서

"아따아, 박선생님이……"

하다가 말고 또 재그를……

그러고서야 겨우 다른 서신들과 함께 맨 위에다 포개서 들여놓는 그 봉서가, 필적이 벌써 박군의 글씨임을 알겠는데, 아닌게아니라 웃을 만도 했다.

┌──────────────────┐
│ 安養驛前陽智村 第一큰집 │
│ X X X 仁 兄 │
└──────────────────┘

이렇게 겉봉을 써놓았었다.

"망할 것이, 어디서!……"

웃으면서 이윽고 가위로 피봉을 자르다가 문득

"그래? 체부가 두런거리지 않어?"

그렇지 않아도 얼뜬 얼굴이 작히 딱한 표정이었으려니 하는, 실없은 구상(構想)을 해보고는 피씩 또 실소를 하면서 묻는 것을, 고정하게 안해는

"벌쭈욱벌쭉 웃든걸!"

"울상을 않구우?"

"자아, 양지말서 제일 큰집요오, 헤엠……

그리믄서 하하하아!"

"이 담에 오거들랑 그럼 담배라두 한대 권해야 할까 보군?"

오죽하니 집을 두고서 이런 이야기거리가 다 빚어지고 할 만큼, 두루 알량하디알량한 집 시늉이었던 것이다.

무릇 그의 빈약한 덩치하며 촌스런 꾸림새랄지, 더욱이나 그 육중하게도 많은 집값이며가, 매양 집을 샀느니라고 집을 지니고 사느니라고 하기가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노상 시쁘디시뻤다.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한편 이 가난해빠진 오막살이를 이름이나마 집이라고 장만을 함으로써 아무튼지 나는 내 집에서 살 수가 있었으니! 남의 집을 빌어서 사는 셋집이 아니라, 실로 '내 집'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리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내 집을 지니고 내 집에서 살기라는 게 실없이 좋고 무던한 것임을 제법 재미볼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심에 차지 않는 초막 몇칸 푸달진 것이라서, 끄은히 앉아서 흉이나 하고 까탈을 피우고 하는 이 교만과 객기 이것은 갈 곳 없는 나의 소시민적인 허영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속절없이 나는 한낱 간구한 역시 소시민이었다. 눈만 무단히 높았지, 정작 생활의 실제에 다들려서는 착실히 그 소심하고도 적빈(赤貧)한 생태(生態)의 서글픈 노현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자이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이러니저러니 타박을 하고 탐탁해하지 않고 하기는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한옆으로는 오막살이 그걸 소위 '내 집'이라고 지니고 삶으로써의 즐거움을 부지불식간 아무튼지 그만큼이나 느끼게 되었던 것이고, 겸하여 느끼지 않고는 능히 배기지 못했던 것이다.

구차한 타협임엔 틀림이 없으나, 일변 고맙고 솔깃한데야 또한 무가내한 노릇이었다.

3[편집]

집을 사리란 생각은 당초에 했을 턱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던 일이었었다.

지난 4월 중순 어느날이었다. 이날도 가형은 내가 거접할 집을 구하러 아침나절에 안양 행보를 했고, 온종일 나는 궁금히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새까지는(開城서) 가형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가, 이를테면 세간을 따로 나는 일례었었다.

누누이 벼르기도 벼르던 터이지만, 때마침 시급한 사정이 생기고 해서 드디어 나는 서울로, 그렇지 못하면 서울 가직한 근교라도, 거급 자리를 옮아앉기로 상의가 된 터이었었다.

서울은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역시 방이나 두어 개 있고 명색이 딴채같이 씀직한 것이면 으례 월세가 3,40원에 4백 원씩 5백 원씩 보증금을 부르고 하여, 가형이 몇 차례 헛걸음을 하고는 그만 단념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의논을 한 결과, 그러면 자기가 안양에 전자부터 면분 있는 사람 하나가 있으니, 오늘은 게라도 허실삼아 좀 가서 알아보고 오겠노라면서 떠난 길이었다.

자초지종을 가형이 나서서 정성껏 다 서둘러 주었다. 공교롭게 나는 안해의 중병으로 그 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원체 겨를이 없기도 했거니와 통히 그런 방면의 일에는 잡이가 아닌 사람이었고, 하나 그와 같은 특별한 구애가 아니더라도, 일반이 지차가 이윽고 분가를 하는 경우를 당하여, 손위에서 나서서 모든 것을 분별하며 마련시켜 주고 하는 것은 우리네의 한 정다운 풍속이었던 것이다.

따로이 세간을 나서 독립한 일가를 이룩하는 그날이, 사람은 부형네의 아늑한 거천으로부터 마침내(苦樂間 스스로 인생을 부담해야 할) 세상살이의 초참자로서 운명 미지의 사바에 출발하는 첫날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할진댄 부형 되는 이가 몸소 요량을 해서(전장도 물론 전장이지만) 집을 짓고 혹은 사들여서 쓸모 있이 수리를 하고 도배도 하고 주련장도 붙이고, 우물도 없으면 새로 하나 파고, 두루 이렇게 알뜰살뜰 거처할 곳을 장만해놓아 주는 것도, 해놓아 주는 그이들로는 경난 없는 자제네를 인생 행로의 노두에 전별하는 그날임을 여겨, 일변 즐거운 수고일지요, 그렇듯이 수고로이 차려놓아 주는 집을 옹색스럽게 보고만 가만히 있다가 몸만 가서 퐁당 들어앉는 것도 당자들로는 마지막 그날의 호강일지요 할 것이다.

시방은 그러나 거의 다 스러진 고풍이요, 겸해서 집안 사정이 매우 군색한 처지인데다가, 부득이 급박한 필요에 쫓기어 부랴부랴 남의 셋집칸이라도 얻어 아무렇게나 한 포기 자리를 잡고 앉자던 형편이었으매, 자연 옛 풍도대로 기구를 갖추어서 유유히 분가다운 분가를 하고 어쩌고 할 계제도 아니었고 했으나, 그렇더라도 일맥 기분만은 그 비슷한 무엇이 노상 없지는 않았었다.

훨씬 저물어서야 가형은 안양으로부터 돌아왔었다.

마주 나서는 나더러, 병인이 열은 좀 어떠냐고 물으면서, 파근히 마룻전에 가 걸터앉더니

"셋집은 없구!…… 한 칸짜리 방은 간혹 있더구면서두……"

그리고는 한참이나 무얼 곰곰 생각하고 있다가 밑도 끝도 없이

"걸, 어떻게 샀으면 좋긴 좋겠드라마는?……"

하고 자기가 짐짓 웃으면서 나를 건너다보는 것이었었다.

자기는 가늠이 있어서 하던 뜻이었지만, 집을 사다께, 나야 영문을 모를 소리니, 뻐언하고 섰을밖에.

"달라기는 3백 원을 달란다는데, 잘 졸라 떼면, 한……"

"몇칸인데요?"

"다섯 칸……"

"그러니, 1천 5백 원 돈을, 시방 무슨 수루!"

"1천 5백 원은 왜? 토옹 해서 3백 원인데!"

"!……"

"그렇기는 하니깐, 맘이라두 내볼 생각을 하는 거지!"

"무어, 오죽할라구요?"

"오죽잖지! 그야. 아따, 그런 게 아니라, 득수라구…… 너두 알겠구나? 우리게 득수……"

"네!"

득수라면 보통학교도 잠시 같이 다녔고, 열오륙 세까지 네냐 내냐 하며 육장 섭쓸려 놀고 하던 어렸을 적 고향 동무였었다.

"그 사람이 겔 와서 살드구나? 정거장에서 만났어!…… 강서방은 찾아갔더니, 몇 군데 데리구 다니면서 알어보아 주는데, 맨 단칸짜리 방 하나씩뿐이구, 온채집이나 방이 두 개 딸린 건 머어 없구. 그래 할 수 없이 부탁만 신신이 해두구서 도루 정거장으루 나와서 찻시간을 기대리구 앉었는데, 웬 헙수룩하게 생긴 사람이 앞으로 오더니

'아, 어찌 오섰어라우?'

하고 반갑게 인살 해! 그래두, 누구든고 아리수웅하구, 생각이 안 나서 뚜렛뚜렛하구 있으니깐

'저, 새터 살던 득수라우!'

하길래 보니 참 득수야!

깜박 반갑드구먼…… 연전버틈 겔 와서 산다구.

생화는 무얼 하느냐니깐, 과실장수 같은 것두 하구, 그저 이러쿵저러쿵 살어간다면서…… 옷 주제도 추레하구 한 것이 제 말따나, 별 내력 없나 보드군.

그래, 이런 이약 저런 이약 하다가, 막시 몰라 물어보았지. 셋집으루 방이나 두어 개 있구, 딴채면 더욱 좋지만 아래채두 괜찮다구. 그랬더니

'글씨유, 무엇허시게라우?'

내 아우가 있을려구 그런다구.

'그럼 저, XX이유?'

그렇다니깐

'서울서 산담서라우?'

아니라구. 그새 개성서 나허구 같이 있다가, 이번에 그런 사정이 있어서 따루 나는데, 이 근처가 마땅할 상불러서 그런다구. 그래서, 아까 아침차루 와서, 누굴 하나 앞세우군 왼종일 돌아다니면서 보아두 통이 없더라구. 그랬더니

'여기두 셋집은 귀히여라우!'

그리구는, 하안참 서서 깜짝깜짝 무얼 생각하다가

'그러실라 마시구서, 집을 하나 사시지라우?'

우리가 그전 살기 같은 줄 아는 모양이야!

그래, 시방 내가 형편이 두루 각다분해서 집을 사구 어쩌구 할 계제가 못 되노라구 실토정을 해두 곧이가 들리지 안나봐!

'하나 사세유! 집이 마침 쓸 만한 것이 있으니, 그걸 사세유! 값두 헐쿠 허닝개……'

그리믄서, 제가 방금 건넌방을 전세루 들었는데, 걸 제 손으루 재작년에 지었다나. 그래서 빠안히 속을 알지만, 재목두 미류는 하나두 안 쓰구, 적은 깐으룬 얌전하니라구.

얼마 값이나 되느냐니깐

'불르기는 3백 원을 불르지만, 지가 들머는 2백 7십 원에 뺏어내지라우. 지가 그 값에다가 팔었으닝개…… 저두 걸 애탄가탄 지었다가 돈이 옹색히여서, 톡 팔아먹구는 타도 타관에 나와서 집 한칸두 없이 가진 스름 받느니만이라우!'

원, 어떻게 생긴 집인지는 모르겠어두, 3백 원 안짝이라니 맘엔 만만히 들리네마는 시방 같어서는 엄두를 못 내겠으니, 어디 셋집이나 좀 알어보라구 해두, 이 친구가 부두웅부둥

'아무턴지 저허구 같이 가서 구경이라두 허겨라우!'

사지도 않을 테면서 보아선 무얼 하느냐니깐

'그리두라우! 설마 그러구 돈이나 한 3백 원, 걸 못히여 내시겄어라우? 서울 가서 들으닝개루, XX이가 소설책을 맨들어서 돈을 마구 몇천 원씩 번다구, 아주 머 소문이 놀랍게 났더만이라우!'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었더니

'자, 어서 가겨라우! 찻시간두 아직 멀구. 그러구, 저기 가시서 요기나 좀 허시야지, 섭섭히여서……'

'아, 그래, 그 친구한테 끌리다시피 겔 따라가서 보았더니……'

가형은 방금 그 소설책을 써서 돈을 몇천 원씩 번다고 소문이 났단닷 소리를 옮기다가 부지중 나와 한가지로 드리웠던 고미소를 비로소 지우면서, 천천히 담배를 붙여 물고는

'게 가서 보았더니, 세상 근천스럽디근천스럽게 생긴 오두막집인데, 머 참 말할 나위두 없어! 하두우 이렇게 군졸하니깐 궁하다 못해 그런 생각을 다 하는 거지, 적이나 했으면 눈두 거듭떠 보자구 않을 거야!

그리구 또, 바싹 하천 기슭이 돼서 장마가 지든지 하면 물이 다소간 염려스럴 것두 같구. 허긴 그래서, 득수더러 두번 세번 뒤를 다졌더니, 그건 아무 걱정 말라구 장담을 하드구면서두. 그래두 미심쩍기에 강서방에겔 다시 들러서 물었더니 안양 와서 10여 년 살었지만 아직 그 개천이 넘치거나 그런 일은 없었느니라구……'

이 물 일사에 대해서는 가형도 가형이지만, 그리고 두 사람토록 그만큼이나 안전하다는 보장에, 최초부터 나는 그다지 괘념을 하지 않았다. 안전을 보장한다는 가형의 설명 그것을 우선 귀넘겨 들었다고 차라리 할 것이었다.

인간은 순전한 우연보다도, 흔히 사려의 부족이나 무지로 하여 재앙을 입는 수가 많다. 이런 의미로 하건댄 그렇듯 수류가 촉한 장산 밑의 하천 가에다가 한만히 거처를 잡았다는 것이 과시 사람으로 지혜 아닌 노릇이요, 따라서 화를 자취했음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므로, 거기까지는 소위 운명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가형이 그날에 안양 정거장에서 불긴히 득수라는 고향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십상, 이 집은 사게 되지 않았을 것이고, 동시에 나의 물의 위험성에 대한 무지나 부족한 사려로도, 그와 같은 사단이 발생될 파탈의 기회는 없고 말았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 기회라고 하는 복선(伏線) 놓는 자는 역시 우연 즉 운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가형은 잠시 이야기를 중단한 채 조용히 앉아서 담배만 피우다가

"그래, 두루우두루 오면서두 찻속에서랑, 참, 생각을 했지만……"

그러더니, 정면하여 내 얼굴을 건너다보면서, 아까 맨 처음에 그 소리를 할 때처럼 요긴히, 동의를 구하듯

"걸 사두룩 어떻게 변통을 해보았으면 하겠드라?

물은 아마 염려 없을 모양이구 허니……"

"……"

나는 무어라고든 하는 말이 있어야 할 것이었으되, 내키는 줄을 모르겠는 마음이어서 그런지, 막연하여 한참이나 그대로 덤덤히 있은 후에 겨우

"글쎄요?……"

하고, 결국 모호한 대답이 나올 따름이었다.

"……"

"……"

둘이는 각기 각자의 생각에 잠겨 한동안 침묵이 지나고 나서야 훨씬만에 다시 가형이 서서히 입을 열어 이야기가

"그야 도무지 기구하닷 말이야. 이루 형용할 수가 없어! 없지만서두, 그래두 말이다? 그런 거나마 명색이 내 집이라구 이름짓구서 살면 그게 어디냐?

아무런들 남의 집 아래채 낱이나 빌려가지구, 늘 조심스럽게 지나기 같을라구?"

"……"

"하루 한 낄 먹구 앉었을값이라두, 집세돈에 졸리잖구!"

"……"

"나가라 들어가랏 소리 들을 며리 없구…… 서울 가차막하겠다!…… 40분 걸리든가? 그리구, 정거장에선 10분이면 넉넉하구!……"

"……"

"어지빨리, 돈암정이니 회기정이니 하는 동네다가 대면, 이름이 시외지 교통은 되려 게가 편ㅋ드라?"

"……"

"전기 있구, 식수 좋구……"

"……"

"그 동넨 집집마다 우물이야! 그 집에두 마당 귀탱이루 옹당우물이 있는데, 한 길 남짓할까?……

쓰자면 몇 자 더 파긴 파야겠드라만……"

"……"

"생기긴 그렇게 생겼어두, 제법 그래두 새건 새게 돼서 사개가 뒤틀리거나 쓰러져가던 않구, 지붕이랑 벽이랑 번뜻하니 성하구……"

가형은 어느덧 이렇게 재미가 나서는 설명이 차차로 달가와가고, 거기 섭쓸려서 나도 함께

"방은 몇이지요?"

"세엣!…… 아랫방 안방 건넌방 그리구 마루두 있구. 아랫방허구 안방 새루 부엌이 있구. 숭내는 다아 냈어! 올망졸망 죄다 한 칸씩은 한 칸씩이라두……"

"쓸몬 있군요! 터나 좀 넓직해요?"

"참, 터가…… 터가 제 터가 아냐?"

"어쩐지! 그렇다면 별루 헐쿠 멋허구 할 것두 없잖어요?"

"그렇드래두 헐기야 헐지? 꼬옥 고만한 게 또 한 채 있는데, 건 4백 원을 내란대!…… 사실 시방, 어딜 간들 매칸 백여 원 들이지 않구선 그렇게라두 일으켜 세우기 어렵다!"

"땅이 뉘 땅인데요?"

"국유질 누가 대부 맡은 거라구. 백 평까지 쓰구서 1년 도지가 3원이라니, 것두 공것이나 일반이지!"

"한때 저 거시키 동대문 밖 토막민처럼 국유지라구서 퇴거명령이나 내리라구요?"

"시굴이야 어디!…… 국유진 그리고 오래 살면 연고자루 불할 받잖어? 아주 헐한 값으루다가……"

"형님두! 걸 바라구 10년이나 20년을 알량한 그!……"

"심 피는 대루 계제 보아가면서 헐어버리구 새루 짓지? 하필 또 그 터가 아니래두 근방이 지대가 언뜻 보매 교외 주택지구루 괜찮음직하더라! 그러니깐, 일이 시작을 해서 조금만 무엇하거들랑 무때리구 그저, 조강한 자리루 골라서 한 2백 평 사가지구, 집이나 정사하게 몇칸……"

"심을 핀 댐이야 터 없어 집 못 질 며리야 없을 테지만……"

"그야 그렇지만…… 사실 또, 그런 염량은 막상 꿈에 떡 얻어먹길 바라기지 쉬운가! 창창한 노릇인걸.

그러니 종차 여의하는 날 그렇게 할 망정이라두, 우선 상말루 죽느니 까물치는 게 낫드라구, 기구한 대루 그거나마 사서 손이나 좀 대서…… 아 멋이야 3백 원을 주구 사더래두, 서울 집 1년치 사글세 셋돈 푼수나 돼?"

나는 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오락가락 토방을 거닐었다. 아무리 그렇다기로서니 그 돈 3백 원을 구처할 방도가 역시 없는데야 어떻게 하잔 말이 나지 않았다. 실상 나로서는, 그 집 그것을 사고 안 사고는 반드시 결정이 없었다. 돈을 만들어낼 가량이 없으니, 그런 결정은 하고 말고 할 여부가 없던 것이었다. 아마도 마음에 와락 당기지를 않자, 돈 없는 걸 빙자하여 고의로 그 결정을 회피했음일는지 모르지만.

가형은 그제서야, 여지껏 무심히 재미있어하며 이야기에 팔려 있던 이와는 아주 달리, 이윽고 기색이 초침해 앉아서 신명 하나두 없는 음성으로 혼자 말하듯

"허기야 쯧! 부질없은 생각이지! 3백 원은 말구 단돈 백 원두 수중에 지닌 것이 없으면서, 무슨 탁에!…… 집만 사놓면 또 그만인가? 수리두 해야지! 이살 하자구 해두 비용이 조옴 들며……"

"……"

"그럭저럭 쳐 보았더니, 소불하 4백 원 하나는 있어야 하겠는데!"

"……"

"아무리 궁리를 해두, 도무지 무어!…… 웬만해야 그래두 이러쿵저러쿵 변통술 부려볼 생의래두 하는 거지, 시방 당장 같어선 옴낫 달싹인들 하는 재주가 있어야지! 어따 대구 비비기래두 할 언덕인들 있어야지!"

"……"

"혹시 저 일이나 시작을 했다면, 나중엔 삼수갑산을 가더래두 우선 거기서 어떻게 변법을 써서 한 4백 원 둘러대기루 한다지만…… 그런 말이야 백번 해두 소용이 없구……"

"……"

"……"

가형은 우두커니 한눈을 팔면서, 시름 같은 담배 연기만 묵묵히 피워올린다.

황혼은 자욱이 짙어오고.

나는 잠시 그대로 토방을 거닐다가

"그렇게 걱정하실 것 없어요! 돼가는 대루 할 일이지……"

"……"

"군색하나따나, 셋방이래두 한칸 얻어가지구……

당분간!"

"……"

"막막한 거야 지금 새삼스런 노릇도 아니구……

걸 이루 어찌 다아……"

그러자 질녀가 부엌으로부터, 저의 부친의 저녁상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웬만치 말을 맺어

"어서 들어가서 진지나 잡수시요! 차라리 안 가셨더니만 못했구먼요!"

가형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서, 종시 심란한 얼굴을 하고 세월을 잊은 듯 언제까지고 방심해 앉았다가 얼마만에야 푸뜩

"돈이나 아니나 다직 3,4백 원이건만서두……"

하면서 한숨을 짓더니, 그리고는 다시

"그 푸달진 걸, 하 그리 대단스러서 그럴꼬마는, 이왕 네가 살림이라구 차리는 길이니 그런 거래두 시늉이나마 너 들 집을 지니구 살두룩 했으면 조옴 떳떳하구 좋으랴 싶어서…… 쯧! 무린 줄은 알면서두……"

노상 두고 해오던 말이라 그의 심정을 전부터도 짐작치 못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까지 간절히(집이 무엇이며 동기간이 무엇인지) 나로 하여금 집을 가지게 싶어 하는 정성과 열심에 대하여 나는 아무래도 그냥 무관심하고 말게는 되지를 않았다. 집 그것은 여전히 마음에 탐탁스런 줄은 모르겠었다. 그걸 불가불 사려니 하고 작정을 한 줄도 역시 모르겠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나는 그날 밤 자리에 누워서 그 돈 3,4백 원을 구처할 방도를 두루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었다.

물론 묘책은 없었고.

사흘인가 지나서 아침에 가형이 나를 부르더니, 득수라는 그 고향 사람에게서 온 편지를 보여주었다.

차필인 듯, 한자와 서투른 언문을 섞어 달필로 휘갈겨 쓴 내용은……

집은 2백 70원에 살 수가 있다는 것. 저는 요전에도 말을 했지만, 건넌방을 50원에 전세로 든 것을 그대로 눌러 있으면 한고향 사람끼리요 피차 좋겠은즉, 그러니 한 2백 원 각수만 준비를 하면 그만 아니냐는 것. 기다리고 있으니 속히 계약금 걸 것을 가지고 오든지, 좀 더디겠으면 편지를 하든지 하라는 것.

대강 이러했다.

다 읽기를 기다려, 가형은 섬뻑 말이 떨어지지 않아하며 잠지 망설이다가 겨우

"저어, 한 거저 백 원만이라도 좀 주선이 못 될거나?"

"되겠지요!……"

대다가 못댈 값이라도 나는 그 자리가 선뜻 대답을 않는대서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 그러고는 이어서 곧

"그렇지만, 백 원을 가지고서야 탁이 닿나요?

어디……"

"응! 이렇게 했으면 싶어서! 멋이야 득술랑은 제 말대루, 우리가 전셀 준 심 잡구서 그대로 있게 하구.

눈치가 집이 딴 사람한테 팔리면 전방을 내놓아야 하겠는데, 다시 구하자구 해두 전세방은 쉽지가 않구 하니깐, 저두 요량이 있어서 시방 그렇게 서두는 속이야!"

"……"

"넌, 안방허구 아랫방 허구 둘이면 될 테니깐, 좀 구질구질하겠지만, 그런 대루 두어 뒀다가 차차루 형편 보아가면서 달리 처칠 하든지 하구?"

"……"

"우선 당장 그런데, 계약금이 문젠데, 내가 오늘이래두 배천을 좀 갔다가 오마?

셋째형님한테……"

"오온 참! 그 형님이 무슨 여유가 있다구!"

"아니! 누차 날더러 하신 말씀이 있어…… 네가 따루 난다면 당신두 얼마간 마련할 도리가 있으니, 부디 와서 상읠 하라구……"

"그래두 거길라컨 고만두시오! 번연히 아는 속에, 그 형님꺼정 괴롭게 할 건 없어요."

"아따, 널랑은 그런 상관은 할라 말구서 가만 있거라!"

이렇듯, 언청이 콩가루 쥐어먹기같이 어름어름 성산이 되자, 가형은 (그, 기뻐도 하면서!) 내가 재삼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그날로 배천의 셋째형에게 가더니, 이튿날, 70원을 타 가지고 돌아왔었다.

후일에야 알았지만, 셋째형이 끔찍 아끼는 그리고 그의 유일한 값진 물건으로 은딱지 '월삼'시계가 한 개 있었는데 그걸 손쉽게 회사의 동료한테 팔고, 시재를 탈탈 털고 해서 보냈더라고.

가형은 그리하여 다음날 다시 안양을 다녀오더니, 그 돈 70원과 득수의 전세몫 50원을 합쳐 1백 20원을 건넨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50원은 5월 열흘날 집들기까지 백 원은 5월 그믐까지, 두 번에 저절러서 치르기로 아주 매매를 성립시킨 경과를 들려주었다.

일이 이쯤 급작히 어우러지고 보니, 나도 한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서울로 쫓아 올라와서 취대도 하고 빚도 얻고, 원고료의 선대도 받고 하여 납뛴 것이 1백 30원이 겨우 수합되었었다. 욕심깐에는 한 2백 원 요량을 했던 것이나, 기실 나로서는 그만큼이라도 주워 모은 게 용했지, 없는 재간이요 역시 장님 올바로 맡기었었다.

그 1백 30원으로 좌우간 약조한 대로 집값 50원을 더 건네고, 80원은 수리와 이사 비용에 쓰면서, 예정한 5월 열흘날 집을 들기는 들었다.

그러나 끝전 백 원은 기한인 5월 그믐이 닥쳐왔는데도 아무런 방책이 없었다. 못한다고 뻗는 것을, 변리를 쳐서 내마고 살살 달래서 6월 그믐까지 연기를 했다.

원은, 정 다급하거든 집을 저당을 하면 백 원쯤이야 빼돌이를 하게 되려니 했던 것인데 전혀 오산이었다.

물건도 물건답지 않거니와, 소유권 등록이 나지 않은 것이라서 어느 뉘게 말이나마 붙여볼 터문도 없노라는 중개인의 대답이었다. 등록은 나자면 두어 달은 걸려야 한다면서.

기한은 또다시 부득부득 박두하고 할 수 없이 문우 XX더러 통사정을 했더니, 걱정 걱정 애를 쓰다가 마침 어떤 장사 사람에게 청채를 한 것이 요행 여의해서, 그 덕에 겨우 끄터리를 무사히 청장낼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빚은 고슴도치 오이 지듯 졌어도, 하여튼 집은 비로소 옳게 내 집이 되었던 것이고.

삼형제에 타인까지 한 사람 끼여 도합 네 명의 인간이 합재를 하고, 그러고도 다시 4,5인의 돈을 동원시켜서. (그러니 남 같으면 족히 대궐이라도 일으켜 세웠을 거라!)

대범 이러하게 가진 근천 다 피워가면서, 정성도 들여가면서 억지로 장만한 오막살이었었다. 안해의 말로 하면, 퍽도 설리설리 장만을 한 집이었다.

한 것을 갖다가, 몹쓸 물이……

4[편집]

범백을 그렇게, 마지막 솥단지 하나 붙이는 것까지도 가형이 들어서 두루 서둘며 분별껏 배비를 해놓아 주었기 때문에, 종시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집도 집들이를 하기 며칠 앞서서야 처음으로 구경을 했었다. 그도 구태여 유념을 한 것이 아니고, 적자에 그날 다른 소간으로 서울까지 올라갔던 길인데, 일이 그러자 하회를 알자면 반일이나 기다려야 하게 되어서, 그래 무료한 시간을 지울 겸, 그 동안에 잠깐 들러볼 생각이 났었다.

안양이라면 서울과는 지척이요, 여름 한철은 푸울로, 가을 한철은 포도 기타 과실로 이름은 자자했으나, 또 차로는 늘 지나다니고 하면서도 일찍이 한번도 와본 적이 없고, 그게 바로 초행이었다.

초행인만큼 섬뻑은 발길이 좀 생소했으나, 가형에게서 노순을 들은 것이 있고 하여 수월히 향방을 찾아들 수가 있었다.

역전은 시가지라곤 하지만 말뿐이지 생각했던 이보다 지극 한산하고 단조한 곳이었다. 외거리 행길이 좌우로 뻗치고 거기에 가서 촌스런 잡화점과 고무신 가게와 음식점과 이발소와, 그리고 주재소니 우편소니 버스 정류장이니 운송점 등속이 옴닥옴닥 박혀 있을 따름이었다.

장차 내가 이곳 가차이 살고, 이곳에서 생활필수품의 공급을 받아야 하거니 하면, 모든 것이 범연히 보이지를 않았다.

역전의 그 행길을 바른편으로 조금 가다가 왼편으로 '조선직물'의 푯말이 선 짤따란 골을 빠져나가자 이내 바닥이 말라붙은 하천이었다. 암구식(暗溝式)의 꽤 크고 실한 콘크리트 다리로 하천을 건너게 되었고, 건너로는 규모 굉장한 '조선직물'의 공장이 그 넓은 벌판을 좁다시 차지하고 앉았고.

하천은 왼편으로 수원을 향해 히끼고미선과 나란히, 공장 앞을 일직선으로 뻗어 올라갔다. 그러나 뻗어 올라가다가 미구하여 그들먹한 장산이 전면을 탁 가로막자 슬며시 바른편으로 커브를 그으며, 산 모퉁이로 머리를 감추었고.

그 커브 지는 고팽이에 가 하천 이쪽(바른편) 기슭으로 조그마한 촌락 하나가 낮은 구릉을 등지고는 오도카니 놓여 있는 게 4,5백 미터 상거해서 빠안히 바라다보였다.

마치 누가 잊어버리고 간 것처럼 외따른 적막한 촌락이었다. 물론 내가 바라고 찾아가는 '양지말'이란 동네일시 문명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바라다보다가 문득 낼 모레면 저기를 와서 살아야 하거니 하자매, 멀리 원시로 돌아드는 듯 한심해 못하겠었다.

다리를 건너 공장 앞을 지나면서 연해 귀를 기울이며 주의를 했다.

쌍굴뚝이 쉴새없이 뭉글뭉글 연기를 뿜는 것이나 공장은 짝 소리 없이 조용했다. 비로소 직물공장이 되어서 소음이 없을 연유를 깨닫고는 안심을 하는 일변, 혼자서 웃기를 다 했다. 근처에 공장이 있단 말을 듣고, 몹시 시끄럽든지 하면 어쩌나 싶어 그게 한 걱정이었던 것이다.

촌락은 차차로 가까이 볼수록 더 초라했다. 부락 사람들이 거지반 '바라스'라고, 자갈 깨뜨리기로 생업을 삼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입감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동네 그 자체가 흡사 그 하천바닥의 파삭거리는 자갈바탕인 것처럼 메마르고 궁졸한 느낌이었다.

5월이어서 산과 언덕에는 바야흐로 신록이 피어나고, 논은 없어도 보리와 밀이며 채마붙이가 잘 자란 밭뙈기도 없지는 않았다. 더욱이 밤나무가 흔해서 군데군데 숲을 이루고 있어 한결 푸짐했다.

그러나 이 초목의 무성함으로도 마을의 안길성없이 까칠하니 야윈 형상을 다소간이나마 싸게 하진 못했다.

건너편 산속에서 그윽히 우는 뻐꾹새 소리를 들으면서, 이윽고 동네 어귀에 당도했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도 구경을 못하다가, 누렁 개가 컹컹 짖어서 겨우 인간 사는 곳에 온가 싶었다.

집은 서슴을 것도 없이 쉽사리 발견을 했다. 그러나 발견을 안하니만 못한 것 같았다.

마을로 들어서자 곧 2칸 폭의 고샅길을 가운데 두고서, 그 바른편이 집들이 총총 박힌 원 동네요, 지대도 길바닥보다는 한단 높고, 그리고서 길 아래는 집이라야 단 두 가구가 있을 뿐으로, 그중에서도 첫번치 조금 크고 깔끔한 건 말고, 둘째치가 갈데없는 우리 집이었다.

미리미리서 선성을 들었기망정이지, 그만 돌아설 뻔했다. 누가 흘리고 갔다면 주울 생각도 날 것 같지 않았다.

집 생김새가 우습고 근천스런 것은 그러나 둘째였다. 어쩐지 그 우습고 근천스럽게 생긴 정도 이상으로 어설프고 무엇인지 마음에 섭섭하면서, 졸연히 집이거니 여겨지질 않았다.

훨씬만에야 내력을 알았다.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뒤는 길이자 바로 처마 밑이어서, 어디까지가 집이요 어디까지가 토방인지 분간을 할 바가 없었다.

주막이라면 지나가던 행인이 안방 뒷문 문턱에 가 그대로 걸터앉으면서 막걸리라도 청하기 마침이었다.

왼편은 아랫집과 사이에 얼마간 빈 터가 있기는 있으나, 역시 하천으로 난 통로가 버젓했다. 그도 그렇거니와, 동네서 쓰레기란 쓰레기는 죄다 갖다가 버리는지, 무더기 무더기 두엄이고, 누구는 도야지 울까지 지어놓고 했다.

이렇게 부전스럽게 바로 길치에 가서 동네를 등지고 앉아서는 앞과 바른편은 또 어디만큼이 마당이요 집터요, 어디만큼이 냇바닥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고, 그저 허허벌판이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두루마기가 다만(방한이라는) 실용가치 말고도, 항용 예절상 장식적인 효과를 일변 가지는 것일진대, 집에 대한 울타리의 관계도 그와 비슷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울짱 없는 집이란, 밤저녁이 허전한 것 이외에, 동저고리 바람으로 출입을 온 타관 나그네 같았다.

하되 그것이 내 집인데는 나 자신이 동저고리 바람으로 타관 나들이를 간 듯 남 점직한 노릇이었다.

번연히 긴 줄을 알면서도, 혹시 아니었으면 싶어하면서 얼마를 망설이고 섰다가 마침 마루 뒷문을 여는 가형과 마주쳤다. 3,4일째나 와서 수리와 도배 같은 것을 보살피고 있는 참이었다.

"울타릴 어떡허나요?"

절로 이런 걱정스런 소리가 먼저 나와졌다.

"허! 거, 울타리가……"

가형은 문턱을 딛고 쪼글트리고 앉다가, 풀 묻은 손으로 담배를 붙여물면서

"득수 말이, 공장에서 인조견 궤짝을 처분하는 게 있다길래 좀 알아보았더니, 여간만 비싸야지! 백 원두 넹겨 먹을 모양인걸……"

"그렇다구, 울타리 없이야 어떻게……"

"그렇다구, 2백 30원짜리 집에다가 백여 원을 들여서 울타릴 할 수야……"

그도 지당한 말이었다.

"섶이나 영두 없어요?"

"영은 원체 작년에 흉년이 들어서 구하재두 없구…… 섶은 묵은 건 못 쓰구, 햇건 잎이 아직 시언틀 않구!"

그러자 등 뒤에서, 다뿍 늘어지게 알짜 우리게 사투리와 악센트로

"훌타리는 히여서 무얼 히여어!……"

하는 소리에, 돌려다보나마나 득수라는 그 사람이었다.

세월과 고생에 찌들어, 어렸을 적의 모습은 많이 변했으나, 변치 않은 것은 예대로의 간구한 양자였다.

해어지고 기운 헌옷이 아니면, 여름 내내 삼베 장방이 하나로 웃통은 벗고, 우리들과 섭쓸려 놀던 여남은살 그 무렵의 기억이나, 시방 저 무릎 나간 국방색 양복바지에, 다 닳아빠진 잠바 조각을 걸친 옷 주제나.

나는 무심코 그의 게다짝을 끄는 맨발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옛일이 미소로왔다. 그는 정히 추운 삼동 한철을 빼고는, 봄, 여름, 가을 버선은새려 신발이란 걸 모르고 노 맨발로만 뛰어다니기 때문에, 쇠가죽같이 굳고 두꺼운 그의 발바닥은 우리들 사이에 아주 유명한 것이었었다. 자갈밭을 달리건 산엘 오르건, 좀처럼 다치거나 가시가 박히는 법이 없고, 우리는 퍽도 그것이 부러워 못했었다.

여러가지 옛일이 한꺼번에 생각히면서, 나는 구회 머금은 웃음을 띤 채 잠시 그의 얼굴을 보고 섰다가, 첫말부터

"자네두 늙었네그려!"

이런 격의 없는 인사를 냈다.

"늙기두 헐 티지! 40인디."

그는 낯가림을 하는 어린애처럼 피식이 웃으면서 고개를 외로 숙이고 대답이

"그래, 멀리 객지에 나와서 고생이 어떤가?"

"쯧!……"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여전히 외면을 하고서 띄엄띄엄

"고생이랄 것 있간디! 그렁저렁 살지!"

"어떻게, 돈이나 좀 모구?"

"헤!……"

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외면은 그대로 하고 띄엄띄엄

"돈은 무슨 돈!"

어찌 보면 비슬비슬하는 듯 어찌 보면 우물우물하는 듯, 도무지 사람이 반편스럽고 분명한 구석이 없었다.

소년 시절엔 매우 똘똘하고 명랑했는데, 그러니 성격도 모습과 한가지로 판연히 변한 것이었다.

더구나 그런데다가 하는 거동이, 그는 나를 대하기가 무척 점직해 못하겠는 눈치 같았다. 내가 보기엔, 나는 입신 영달을 해서(그야말로 소설책을 지어서 돈을 몇천 원씩 벌고, 이름이 나고, 행신을 하고 하는데!) 저는, 가난했을망정 어렸을 적 동무요, 같이 놀고 같이 자라고 하다가 지금 그렇듯이 성명도 없고 미천한 처지인 것이, 차마 부끄럽다는 속인 듯싶었다.

자못 심외(心外)이었다.

가사 내가 교를 뺀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그리 없어서 제게다가 교를 뺄 멋이 없을 것이건만, 진소위 토끼가 제 무엇에 놀라더란 푼수로, 역시 그 사람네들께 고유한 객기와 빙충스런 자굴이 시킴일 것이었었다.

구태라, 그러한 서어함을 즉석에서 풀어주어야 하겠다는 선량한 의사라느니보다도, 좀 하는 양을 보자는 짓궂은 생각으로, 나는 짐짓 더 소탈히 농을 붙였다.

그는 나무에 잘 오르기로도 또한 유명했었다. 봄, 여름이면 새망스럽게도 높다란 나무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새둥우리를 털어서, 까치 새끼니 꾀꼬리 새끼니 하는 걸 꺼내기가 일이었고, 나도 따라다니면서 가끔 얻어가지곤 했었다.

마침, 그러던 일이 거리 좋게 생각이 났었다.

"아, 자네 참, 시방두 남굴 그렇게 잘 타나?"

"히!"

"꾀꼬리 새낄 좀 내려오겠지? 장에 너서 기르게시니……"

"……"

"아무턴, 우리게 까치들이 이 근년은 맘놓구서 새낄 친다구?"

"……"

그는 외면한 얼굴에 가득 퍼지는, 무색한 빛을 건사하지 못해하다가 필경 빗밋이 옆으로 돌아서고 마는 것이었었다.

동기가 다소 심술궂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전혀 그런 내색을 했을 바 없고, 사실이 원은 선머슴 적의 동무를 40에 만나 즐겁던 기억을 옛말삼아서 반가와라고 농담을 하자는 노릇이 아님도 아니었던 것을, 그러나 그는 저를 흉보고 조롱하고 하는 줄만 알아듣는 모양 같았다.

기위 그렇다면 부질없이 남을 괴롭게 할 며리가 없는 것이라 그만하고 말았다.

가형이 그 다음, 울타리 일사를 가지고 혼잣말같이

"그러니, 걸 어떡헌다?"

하고 걱정을 하면서 쩝쩝 입맛을 다시었다.

"훌타릴랑 허지 말랑게라우?"

득수의 참견이었고, 내가 그 말을 받아서

"울타릴 안 해서야 되나!"

"갠찬히여!"

"어째서?"

"여그는 도독놈 벨루 없어!"

"오온!…… 꼭 도적만 막자구 울타릴 하드나?"

"그럼?"

"예끼 사람!"

"헤!"

그리고는 허리를 짚고 서서 한참이나 먼산을 바라다보더니

"그럼, 바자를 사다가 허까아?"

"아, 바자가 있어?"

가형과 나는 반가와서 얼른 한꺼번에 물었다.

"응."

"엮어서 파는 게 있어?"

"응."

바자라면, 싸리를 가지고 삿자리처럼 엮은 울타릿감이었다. 전에 시골서 더러 보았지만, 좀 얼멍얼멍해서 바깥으로부터 울안이 들여다보이는 게 다소 흠이라면 흠이겠으나, 그렇더라도 서투른 토담이니, 섶 울타리, 영 울타리 등속보다 월등 정갈하고 운치가 있었다. 더욱이, 인조견 궤짝이나 뜯어서 조각조각 붙여가지고 판장 울타리랍시고 둘러쳐 놓는 지지궁상과는 말도 안 되게 점잖스럽다.

다만 두메 골짜기나 들어가야 흔하지, 읍이랄지 들녘에서는 일부러 마추기 전에는 용이히 구하기 힘이 드는 귀물인데, 그런 것이 있다니 다행할 도리라곤 없었다.

"십상 좋은 게 있는 걸 그랬군요?"

나는 가형더러 이렇게 찬성을 구하고, 가형은 득수를 칭원하듯

"왜, 진작 그런 소릴 하들랑 않구서!"

"헤!"

"곰이야! 곰."

"뵈기 싫것길래……"

"바자 울타리가 보기 숭해?"

내가 참견을 했더니

"구멕이 수웅숭 뚫려서, 바람이 수울술 새 들오구……"

"잔말 말구…… 지끔이래두 가서 사올 수 있겠다?"

"글씨이……"

"무어?"

"알아보지!"

"있다더니?"

"시안이는 장날이머넌 나구 했넌디 요새는 안 나더만!"

"내, 온!…… 그럼 어떡허는구?"

"츤츤히 허지이?"

"한닷 소리가!…… 자네가 바잘 나아래두 놓게!"

"헤!"

"난 몰라?"

"마추어야 헐랑갑만!"

"마추든지 뜯든지, 아무턴 집 드는 날까지 울타리만 해놓게!"

"못 허머넌 집 들구 나서 허지!"

가형이 별명지은 대로 영락없는 곰이었다. 곰 허구두 지나인 같은 곰.

그 뒤로 차차 더 두고 볼수록 그 흐리멍덩하니 우물우물 굼뜨고, 주변머리 없고 싱겁긴 또 얼마나 싱거우며 고집은 어인 고집이며, 하여튼 농판 해도 그런 농판일 데가 없었다.

그런 줄은 모르고 한 울안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던 것이, 지질힌 성화를 먹였더라니.

제가 들어 있는 건넌방이라는 게 말이 건넌방이지, 마루로 샛문이 나지 않고 막혀서 마냥 딴 집처럼 쓸 수 있게 된 방이었다. 한 것을 다시 부엌이 달린 앞을 갖다가 헌 판자쪽과 가맹이 나부랑이로 삼면을 뺑 둘러 까재기를 치고는, 저편짝 한옆으로 손바닥만한 문 한쪽만 냈을 뿐. 그러니 방은 앞문이 푹 가린 셈이고 겨우 동쪽으로 들창 하나가 달렸을 따름이어서, 딴 방은새려, 완연 딴 세상같이 만들어놓았었다.

그러지 않아도 볼썽 아닌 집 꼬락서닌데, 게다가 또 집 한귀퉁이를 따로이 그렇게, 원수나 진 것처럼 안과는 등을 지고, 칵 둘러막아논 것이, 애여 나는 눈 거슬리고 마땅치가 않았다. 제일에, 그리고 보기만 해도 숨이 답답하고, 그저 성정대로 한다면, 당장 활활 헐어 내버리고 말 것이었었다.

그렇게, 멀쩡한 방을 움집 꾸리듯 생 병신을 만들어놓고는, 자연 방 명색이 어둡긴들 좀 어두며, 그 갑갑하고 굴속 같은 방 속에서 인간들은 어떤고 하면, 어떻게 된 인간 꼴이, 밤이고 낮이고 가시버시 양주가 죽은 듯이 방 안에서 처박혀서는 좀처럼 꿈쩍을 하는 법이 없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끓여나 먹고. 없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질펀히 굶고 누웠고, 영영 배가 고프다 못해야, 여편네가 먼저 푸스스 일어나 나갔다가, 동네집 일이라도 해주고서 한술 얻어 먹었는지 그 깍짓동 같은 몸집에 안반만한 얼굴을 흔들면서 도로 기어들어오고. 얻어 먹는 데 들어선 워너니 여자가 더 손쉽게 마련이 되었으니까.

그러는 걸 보고는 내 안해가 짐짓

"남정은 굶구 있는데 혼자만 나가서 먹구 다니우?"

한다치면, 제 방으로 대고 입을 삐쭉

"배때기가 고파야 정신이 나지라우! 여편네가 사내 벌어다 맥이란 법이간디라우?"

하면서 천연이고.

이 여편네라는 게 실상은 장가처가 아니고, 상처를 하고서 홀아비로 떠돌아다니다가 오다가다 만난 것인데, 득수와는 아주 깎아 맞춘 듯 꼭 같은 인물이요, 가위 천생 배필이었다. 게으르고 무능하고 주변 없고 농탕스럽고 한 품이.

처음 한동안은 금시들 굶어 죽는 듯만 싶어 양식도 덜어서 주고, 급한 대로 찬밥도 있으면 가져다 주고, 또 득수 혼잘 적이면 이걸 억지로 억지로 끌어내다간 밥을 먹이기도 하고 했었지만, 언제까지든 그 수전을 하는 수도 없거니와, 차차로 치르어나느라니 시먹어서 그다지 마음이 걸리거나 민망하지도 않았다.

양식이 돈보다도 더 아까운 시절이라, 사다가 먹으라고 현금으로 돈 원씩이고 준다 치면, 그건 죽어라고 마다면서 받지를 않았다.

단순한 사양인 줄만 알았더니 나중에 안해에게서 이야기를 들은즉, 그 이유가 과연 적절했었다.

안해가 지날말로 득수더러 물었더라고. 어째 쌀이나 보리를 주면 아무 소리 없이 받아다 먹으면서, 돈은 굳이 받질 않느냐고.

했더니, 전세돈 50원 낸 걸 곶감 빼먹듯 한푼 두푼, 솔래솔래 죄다 빼먹어버리면 나중에 가서 방도 없어지고 돈도 없어지고, 게도 구럭도 다 놓치지 않느냐고 하더라고.

궁하기야 제나 내나 일반이지만, 막상 나는 도로 받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라서 지레 그런 타산이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동정스런 소심이기도 했다.

바로 집 앞 개천바닥에서는 매일같이 동네 여자들이며 아이들이며 간혹 장정들도 섞여서 바라스를 하느라고 수십 명씩 나와 또드락거리며 법석을 놓곤 하는데, 수입이 아이들이라도 7,80전이나 1원쯤은 된다고 했다.

한번은 그래서, 일부러 득수를 붙잡아다 앉히고는, 왜 저런 거라도 하지를 않느냐고, 너희 양주가 하루 나가서 벌면 소불하 2원은 될 터인즉 먹고도 남지 않겠느냐고, 지성으로 권을 했더니, 실컷 듣고 있다간 불쑥 한단 소리가

"차라리 굶지, 그걸 히여!"

"어째서?"

"창피허게시니!"

"뭐야?"

"헤!"

"노동으루 잔뼈가 굵었지? 40투룩 노동으로 살었지?

그리구두 노동을 하기가 새삼스럽게 창피하다?"

"여그 와서넌 노동은 안ㅎ어!"

"오라! 그러니까, 굶어두 바라스는 못한다,……

그래, 그새까진 무얼 먹구 살었나? 방 전세돈 50원은 어디서 났으며?"

"과실장사두 허구……"

"것두 큰 장순 못 될 테구…… 매양, 가고에 해 짊어지군, 서울 장안으루 가서 되넹기길 했겠지?"

"응."

"그런데, 그건 양반놀음이구, 바라스하는 건 쌍놈이라아?"

"헤!"

"또오, 가을 한철, 그 짓이나 해가지구서 1년 먹을 게 차나?"

"더러, 뿌로카두 허구……"

"멋이?"

브로커를 했다는 것도 의외려니와, 그 자못 자신 있는 말치며 자랑스런 표정이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뿌로카를 했단 말인고?"

"논이랑, 산이랑, 밭이랑!……"

"뉘 걸?"

"촌놈들……"

"어떻게?"

"연줄이 있으닝개루, 촌놈으루 제 애비 모르게 돈쓸 놈을 데리구 오거든! 그럼 나는 그놈을 서울루 차각구 가서, 집쑥헌 옘집이다가 처박어 두구서넌…… 그 댐은 다아 그러구 어쩌구 허머넌……"

이것이 그의 소위 브로커였었다. 나는 속으로

'네가 다 늦게 길을 잘못 들었구나!'

하고, 다시금 물끄러미 얼굴이 치어다보였다.

그렇다면 자갈 깨트리기쯤, 창피보다도 수입이 시쁘듬함직도 했었다.

그러나 그 주변 그 재치에 또 일자무식도 일자무식이려니와, 위인이 반편스럴지언정 악착하진 않은데, 어쩌다가 그런 못된 궁리가 뚫렸단 말인지.

의뭉한 걸로는 한몫 볼는지 모르지만.

정색하여 타일렀다.

"그 짓일랑 인젠 고만두게?"

"웨?"

뻐언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게 숫제 날부랑당이지 될 말야?"

"어찌서?"

"남의 자식 꼬여다가, 제 부형 몰래 전답 팔어먹으니, 부랑당보담 더 고약하지?"

"지가 팔어먹넌다닝개 중간으서 소개히여 주구, 구문 따먹넌디 그게 웨 못써?"

"그게 어디, 정당한 매매길래?"

"내가 안 허머넌, 다른 놈이 데리구 가서 안 히여먹간디?"

"몹쓸 짓으루 생각이 들지 않나? 정녕?"

"몹쓸 짓은 왜 몹쓸 짓이여? 집 거간이나 광산 거간두, 그럼 죄다 몹쓸 놈이게?"

둘러다 대는 발명이 아니라 썩 태연한 낯으로 하는 말이었다. 진정 그렇게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역시, 무지한테는 악이 선일 경우가 있는 것이라 했다.

노상 그런 바에야, 쇠귀에 경을 읽을 정성도 없거니와, 내게 직접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물난리통에는 정말 무척 속이 상했었다.

두번째 물이 넘쳐 들던 날이었다.

가맹이에다가 흔한 자갈이니 그놈을 넣어가지고 한 30개, 정 많이 넘치는 곳으로 막아놓았으며 쑬쑬히 구급이 될 것 같고, 동네 사람도 그렇게 권을 했었다.

싸다니면서 가맹이는 사 모았으나, 생소한 탓인지, 삯군은 통히 구하는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득수를 찾아서 내세워보려고 집엘 들렀더니 마침 있기는 있는데, 이 위인이 딴청도 분수가 있지, 무슨 부지런으로 진흙투성이의 마룻바닥을 걸레질을 치기에 겨를이 없었다.

집 세간은 물이 몰려들자 말끔 뒷집 최서방네 웃방을 빌어서 옮겨갔고, 식구들도 거기서 임시 거접을 하기로 되었었다. 또 득수 저도 동네 집 방을 얻어서 세간과 더불어 옮아갔고, 그러니 집은 텅 비어 내던진 집이었다. 한 것을, 법석통에 마루가 진흙탕이 되었기로서니 그걸 닦기가 그다지 긴하고 급하며.

그러나마 사람이 여느때라고 바지란바지란하고, 성의로운 구석이 조금인들 있는 사람일새 말이지, 여느때는 고사하고 물이 넘쳐 들어서 방금 집이 뜨게 된 판에도 고작 제 세간이나 날라 내가고는, 그 다음은 삽 한 가락 들고 나와서 남과 섭쓸려 어리대는 시늉도 않는 위인이. 그런 위인이, 선잠을 깬 것처럼 어디서 비어져 나와서는, 중뿔나게 아무 생색도 없고 제게는 상관도 없는 마루 걸레질을 쳐야 번연히 도로 그 꼴이 될 걸 갖다가, 지성으로 걸레질을 치고 있는 화상이라니, 결국 천치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삯군을 서넛이구 좀 사보게?"

화증이 나는 것을 짐짓 참고, 순순한 말로 일렀다.

"……"

저는 또 무엇에 소갈찌가 났는지 팅팅 부어가지고는 얼마를 들은 성도 않고 걸레질만 치더니, 한 서 발이나 늘어지는 소리로 겨우

"삯군을 어디 가서 사넝고!"

"에끼 천하!"

그만 더 참지 못해 성미를 내떨고라야 말았다.

"누가 마루 걸레질 쳐달래드나?"

"……"

"대체, 날 이 고생을 시키는 게 누구길래?"

"……"

"이걸, 괜찮다구, 사라구우 사라구, 쏘삭거린 건 누구야?"

"……"

"가령, 그런 과실 저런 과실 없다구 하드래두, 그래 범 같은 장정 자넨 퍼언펀 돌아다니면서 놀구, 약질 난 물 속에 들어서서 보맥일 하구 그래야 옳아? 그게 사람의 의리야? 되놈의 인정머리지?"

"……"

"집이 떠내려가면 나만 손핸가? 차라리 난 돈이나 한 2백 원 손재해두 그만야! 자네가 낸 전세돈 50원, 물허구 송사해서 찾을 텐가?"

암만 몰아대면서 전접스런 공박을 해야 별반 반응이 없고, 그저 찌르려는 소처럼 찌르투름하고 있다가

"체에!"

그리고는 걸레를 집어던지고, 어슬렁어슬렁 나가버리는 것이었었다.

'귀신덩어리!'

그의 비 가운데로 어슬렁거리고 나가는 뒷모양을 바라다보다가, 문득 속으로 외쳤다.

나를 미워하는, 어떤 심술궂은 것의 의사(意思)의 체현(體現)인 것 같았다.

지지리 나한테 붙어서 흉한 일을 훈수하고, 잘될 일은 작해를 하고, 그러면서 달달 성화를 먹이며 떨어지지 않는 그 심술궂은 것 그것의 의사의 체현.

'에잇! 귀신덩어리!'

나는 재차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5[편집]

그대도록까지 변변치 못한 인물일 줄은 모르고서, 맨 처음 일 부탁을 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 우선 울타리였었다.

그날 그 즉석에서 가서 바자를 마추든지 사오든지 아무튼 재주껏, 집드는 당일까지만 울타리를 하게 하라고, 돈 압량하여 '병목안'이란 곳으로 쫓아보냈었다.

바자는 그러나 집 든 후에도 5, 6일이 지나서야 물건이 왔었다.

제 날짜에 대지 않았다고 바자장수 영감을 지천을 했더니, 어제 아침이야 '전상'이(득수가) 나와서는 급한 소용이라고 졸라싸서, 저희가 쓰려고 장만해 둔 것을 가져온다는 도리어 나더러 탓이었었다.

아무려나 그렇게 해서 뒤늦게나마 울타리를 둘러치기는 겨우 둘러쳤었다.

백 평을 다 잡아넣을 요량이었으나, 바자가 태반 모자라기도 했거니와, 땅을 대부맡았다는 관리인이 응치 않았다. 백 평까지 쓸 수 있다고 한 것은 득수가 종작없이 꾸며낸 소리요, 최대한도 50평이라는 말이었었다.

할 수 없이, 뒤와 왼편 옆은 처마 밑으로 바싹 다긋고, 앞과 바른편으로 여유를 두어, 한정의 50평 범위 안에서 울타리는 둘러야 했었다. 그러고는 울타리 바깥으로 얼마간, 이왕 노는 땅이요 하니 채마밭이라도 붙이게 해달라고 관리인에게 새로이 교섭을 하여 승낙을 받았었다.

울타리를 둘러치고 나니, 그새 며칠 벌판에서 기거를 하는 듯, 몸둘 곳을 모르게 허전허전하던 기운이 일시에 가시고, 심신이 한가지로 아늑히 싸이는 것 같았다. 비로소 집에 들어서 사느니라 싶은 침착과 안도가 생기고 했었다. 동네 이웃이며 지나다니는 남의 앞에 떳떳하고 근천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변(그렇게 울타리를 둘러쳐 놓고 싸리문까지 만들어 달고 그러고는 이제는 다 되었느리라고 집을 한 바퀴 휘이 돌아보다가, 그러다가 푸뜩 따로 나던 생각이었는데) 인간이란 기어코 이렇게 손바닥만하게나마 울을 막아 세상과 한계를 선언함으로써, 저 혼자만의 세계를 가져야만, 그리고 그러한 저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고 남께 당당하고 하도록 도량이 작고 옹색스런 생물이든가 하면, 저 커다란 수리산이며 높고 넓은 대공을 대하기가 어쩐지 민망해 못하겠었다.

울타리를 세우고 나서야 우리들 세 식구는(나, 안해, 시골서 데려온 일가집 소년 경호, 이렇게 셋이서) 총동원이 되어 우리들의 50평짜리 천지를 위하여 한 가지씩 두 가지씩 요조모조 손질을 하고 닦달을 하고 하기에 이윽고 골몰을 했다.

우물을, 속은 벌써 집을 들기 전에 깨끗이 쳐내고 소독을 하고 했던 것이라 더는 손을 대지 않아도 좋았고, 두던만 납작납작한 돌을 많이 주워다가, 한 자 높이는 마당보다 솟게, 두릿하니 쌓아올렸다. 노깡 대신에 판자로 우물 빈지를 짜서 앉혔다. 그렇게만 해도 뱀이나 개구리가 들어갈 염려는 없었다. 두던 바닥을 시멘으로 발라야 할 것이었으나, 뜨내기론 구하기가 임의롭지 못해서 추후로 미루었다.

안해는 연신 두레박질을 시이시, 물을 그야말로 물쓰듯 하면서 좋아했다. 개성서는 우물길이 초원하여 고생스럽던 일도 생각함이겠지만 비단 우물뿐인 게 아니라 집이 생긴 걸 기뻐하며 정성을 들이는 양이란 정히 미소로운 바가 있었다.

중병을 앓고 나서 미처 몸이 소성되지 않은 것도 돌아보지 않고, 억척으로 며칠을 크고 작은 돌을 네모 반듯반듯하고 얌전한 걸로만 수북히 날라오더니, 마침내 마당이 온통 그들먹하게 장독대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 대규모의 훤칠한 장독대에다가, 있는 대로 죄다라는 것이 조막만씩한 단지나 서너 개 벌여놓고는 간간대소를 하고. 장독대가 되자 안해는 그 다음, 이미 철 늦은 꽃밭을 모으기에 또한 바빴다.

이왕 그럴 바엔 서울로 기별을 하여 씨앗을 구해 줄 테니 좀 보암직한 걸로 심게 하라고 말려도, 언제 그걸 기다리고 있느냐면서 작년 가을에 받아 두었다가 잊지 않고 가지고 온 백일홍이니 채송화, 봉선화니 코스모스 등속을, 장독대 가며 마당 귀퉁이 귀퉁이며 울타리 밑이며 상관없이 파고는 뿌리고 했다.

후면이 서향이 되어서 오래지 않아 여름을 당하면 뒷문으로 햇볕이 들겠다 하여 뒤 울타리 밑으로는 전면에 총총들이 아사가오를 모종을 부었다.

이렇게 씨앗을 뿌려놓고는,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앞뒤로 드나들면서 물을 주기에 겨를이 없고, 심지어 거름까지 주고 했다.

나는 나대로 헌 궤짝을 사다가 부셔서 추녀 끝으로 차양도 해 달고 선반도 자르고 했다.

내가 거처하는 아랫방은 뒷문이라는 게 좁다란 하나를 냈을 뿐, 여닫을 수가 없어서 떼어버리고는 목공장에 부탁하여 창을 만들어다가 달아놓았다.

울안 일이 한물 끝나자 이번엔 일제히 울 밖으로 나가서 채마밭을 일구었다.

전에 살던 사람네가 터는 잡아논 것이 있어서 그를 어림하여, 한 다섯 이랑은 되게 범위를 정해 가지고, 그 흉악한 억새 뿌리를 말끔 캐내고, 그 숱한 돌멩이를 말끔 추어내고 했다. 추어낸 돌멩이는 밭 가장자리로 빙 둘러쌓은 것이, 제물 경계도 되고 담도 되고 하여, 추어내느라고 수고한 생색이 났다.

밭에는 무우 배추를 비롯하여 조금씩 조금씩 상치며 쑥갓이며 아욱이며 백종 파며 하는 것을 골고루 심었다. 날은 가물었으나 날마다 석양이면 물을 주고 해서 며칠 후엔 씨앗이 모두 이쁘게 섰었다.

이 우리들의 알뜰한 농사를, 근처에서 놀던 동네집 송아지란 놈이 경계를 무시하고 넘어 들어와선, 저처럼 귀여운 싹인 줄은 모르고 함부로 짓밟곤 하여, 우울할 적도 없지 않았다.

두루 이렇게 오손도손 손이 맞아서 의좋게 일을 했던 것이나, 그러는 동안 꼭 한가지 의견이 달라 가지고는 서로 우기며 고집을 세운 것이 있었다.

안해는 울타리 밑으로 호박과 박을 심어서 덩굴을 울타리로 올리겠노라고 했다.

나는, 박이라면 해질녘의 박꽃이라니 운치를 취해 막시 모른다지만, 호박까지는 볼썽도 흉할 뿐더러 울타리가 상하고 찌부러들 텐즉 절대 불가한 뜻으로 금했다.

안해는 호박덩굴을 올리는데 울타리가 어찌 상하며, 또 운치 보자고 호박 못 심어먹을 거냐면서 듣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먹을 것만 알고 운치도 모르는 여편네보다는, 운치 있는 울타리가 탐탁하니, 못하느니라고 종시 막았다.

안해는 여름에 애호박볶음은 혼자 즐기면서 얻다가 호박을 심으라느냐고 오금을 박았다.

나는 일왈 울타리요, 이왈 호박이요, 삼왈 운치 모르는 여편네인즉, 이녁이 저기 벌판에 가서 서고, 그 주위에다가 호박을 심고, 덩굴일랑 이녁 몸뚱이에다가 올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실없은 말이었으나 하여튼 바자 울타리는 모든 울타리 가운데 으뜸 가게 운치가 있었고, 그만큼 나는 우리 집 울타리라면 행여 누가 어쩔세라 아끼고 소중히 했다.

훨씬 뒤에 사귄 우리 종씨(宗氏) X주사가 한번은 놀러와서 새삼스럽게 울타리를 곰곰 둘러보다간

"거 참, 선비댁 울타리라 다르군요!"

하고 칭찬을 하는 바람에, 나는 겸사 반 자랑 반

"논매, 강경이는(論山江景은) 은진미륵으루 꾸려간다구, 우리 오두막 집은 울타리 하나루 무렴을 면한답니다!"

하여서 같이 껄껄 웃은 일도 있었다. 좌우간 그렇게 하여, 집 안팎을 요모로 조모로 손질을 하고 닦달을 하고 꾸미고 하는 동안, 집은 하루 이틀 차차로 차차로 때가 벗고 쓸모가 있어가고 했다. 말하자면 아름다와졌다.

물론 제아무리 아름다와졌대야, 게딱지 같은 다섯 칸짜리의 촌스런 초가 집이라는 푼수가 있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날 턱이 없는 것으로, 겨우 그저 촌에서 어설프디어설픈 땔나무꾼 아이놈 한 놈을 붙잡아다간 이발과 목간을 시켜서 헌것이나마 빨아 다린 옷을 입혀논 형용이요, 편지는 우체통에 넣고 담배는 담배가게에서 사고 할 줄을 알게쯤, 길을 들여논 셈이요 했다.

그럭저럭 5월은 건듯 가고 6월도 다시 중순이 지나자, 처음으로 우리집엔 꽃소식이 왔었다. 맨 먼저 장독대 언저리의 채송화가 아롱이다롱이 여러 가지 빛을 겨루며 어우러져 피었다.

종씨네가 모종을 준 영생화도 봉오리를 맺고 백가지도 하얀 놈이 조래조래 열렸다. 봉선화, 백일홍도 하마 피게 되고, 앞 울타리 밑으로는 코스모스가 반 길 넘겨 수북 자랐다.

때를 같이하여 텃밭에 농사한 채소는 가난한 내 식탁을 조금은 푸짐하게 해주었다. 상치쌈을 먹었고, 열무김치도 모처럼 맛보았고, 아욱국에 시금치 나물도 좋았고.

여름은 바야흐로 무르녹아 가고, 그러한 여름을 위하여 뒤 울타리는 아사가오 덩굴이 제법 넓은 잎을 달고, 줄기줄기 뻗어 올라갔다.

석양이면 뻐꾹새가 수리산 허리를 울며 돌아가고, 밤이면 밤새껏 건너편 숲에서 두견이 울고.

일변 나는 몸이 이윽고 한가하여, 조용히 앉아서 봄부터 여러 달 번졌던 집필을 다시 시작했고.

편안했다.

그야 집값 끝전을 치르지 못한 것이며, 여기저기서 끌어다 댄 빚을 미처 갚지 못한 것이며 두루 걱정이 아닌 것은 아니었으나, 집 그것으로 마음 거리낄 무엇은 없었다.

개성서처럼 오래 밀린 집세돈 독촉을 와서는 시침 뚜욱 따고

"이거 다아 낡었으니 헐어서 화목으루나 쓸까 봐!"

하던 사이고오 다까모리공같이 생긴 오오야상에게

"에이 여보! 소설을 쓴다믄서, 그래 고만걸 못해내다께 말이우? 아마 술을 과히 자시나 보지?"

이런 농담을 들으며 단련을 받을 불안이 없으니 그만해도 여간한 호강이 아니었다.

그 사이고오 다까모리공 같은 오오야상은 영원히 나를 승강이하러 여기를 올 일이 없을 터이었었다.

이제는 그리고, 양식과 나무와 담배만 있으면 만날 아무 근심 없을 것같이 든든했다. 이 50평의 천지 안에서는 며칠이고 잠을 자지 않고 있어도, 며칠이고 잠만 자고 있어도 다 상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임의롭고 그렇게 아늑했다. 그렇게 나는 집과 정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까막히 모르고 지나다가 안해에게 그 속을 들키고 말았다.

석양만 하여, 그날도 막대를 끌고 건너편 율림으로 산책을 가는데, 안해가 그러자, 산나물을 뜯는다면서 바구니를 끼고 뒤를 따라나섰다.

율림은 한참 밤꽃이 피어 독할이만큼 향기가 숲으로 흥건했다. 소가 날이 가문 덕에 아직도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비쪼비가 비쪼롱 비쪼롱 방울같이 우는가 하면, 저 깊이서는 궁상맞은 꾸껭이(산비둘기)가 구구우 구구우 울고.

우리는 율림을 두루 거닐다간 어쩌다가 함께 집을 돌려다보고는 서로 웃었다. 신통해하는 웃음이었다.

"참!……"

그 끝에 안해가 마침 생각이 나서 하는 말이었다.

"건넌방 전서방넨 어떡허우?"

"어떡허다니?"

알아듣지 못해서 되묻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꺼정이구, 그냥 둬두우?"

"글쎄에……"

전세돈 50원도 해주어야 하려니와 그보다도 일껏 내 욕심만 채우고 나서는, 톡 퉁겨버리는 것 같아 나가라고 하기가 차마 박절한 노릇이었다. 물론 내보냈으면 좋을 생각이야 없지 않은 터이었지만.

"그리구, 방이 어서 나야 않우? 방이 나야 어머님 아버님 두 분 중 한 분이래두, 좀 모셔오지 않우?"

"건 못해!"

나는 짐짓 허겁스럽게 고개를 설설 흔들었다.

안해는 속고서, 하도 어이가 없는 모양으로

"머요?"

"만일 절러루 아버질 모셔와 봐요! 들어서시는 멀루 담박!……"

"왜애?"

"에라 이 변변치 못한 자식! 그래 내가 널더러 이런 걸 집이라구 꾸리구 살라더냐? 끌끄을!"

"난 들으니깐, 아 우리 막둥이가 집을 장만해 가지구 살림을 다 한다니, 거 참 희한하다구, 인젠 그놈이 맘을 잡은 모양이라구, 그리시믄서, 내 수이 한번 가서 보아야 하겠다구, 그리시드라던데요?"

"글쎄, 그리시믄서 와보시군, 날 변변치 못하다구 걱정하실 테래두! 이놈아, 나는 20에 당가산을 해서, 초년엔 지질히 간구하게야 살었다만, 느일 이런 집에다가 길르던 않은 걸 너두 알지?

그리시믄서…… 말이야 바루 말이지, 저게 집야?

옛날 우리 산지기네 집두 저보담은 나었지!"

"그, 남한테 속 뵐 소린 작작 해둬요?"

"그리게, 마누라한테 간혹 하질 않나!"

"난 머, 숭 안 보나?"

"옛날에, 나만침이나 미련한 미련둥이 한 녀석이 장갈 갔는데……"

막 찔레꽃 덤불이 있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가서 시꺼멓게 엉켜서는 꽃을 죄다 갉아먹는 풍뎅이 떼를 막대를 휘저어 쫓아주었다.

나는 이사를 오던 멀로, 이 율림에서 분홍빛 찔레꽃을 발견했었다. 찔레꽃이면, 으례히 흰 빛으로만 알았는데, 분홍 찔레꽃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퍽 신기하게 여겼었다.

또, 흰찔레도 이곳 치는 꽃이 탐스럽고 클 뿐 아니라, 덩굴을 뻗는, 그러므로 야생의 '덩굴장미'라고 할 것이었다. 안해더러 그런 설명을 하고 나는 다시

"아 그때, 조금만 철이 더얼 늦었어두, 많이 좀 떠다간……"

"많이 좀 떠다간 무얼 허실 양으루?"

안해는 빙긋이 무슨 딴 의미가 있이, 내 얼굴을 짯짯 보아싸면서 일부러 묻는 것이었다.

"명년 봄일랑, 내 일찌감치 나서서 떠다 심을라!…… 이걸 분홍허구 흰 거허구 사이사이 섞어가믄서, 울타리 밑으루 빙 둘러 심어놔 봐요!

5년만 지나면 그때 버젓한 꽃울타리가 되질 않나!"

"저 알량스런 집이다가요오?"

"어떻나! 머……"

"하하하하아!"

안해가 별안간 이렇게 손뼉이라도 칠 듯 자지러져 웃는 바람에, 나는 영문을 몰라 잠깐 두렷거렸으나, 아무튼 무엇인지 흉을 잡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거봐요! 글쎄……"

웃고 나더니, 그제서는 나를 놀리자고 드는 것이었다.

"무얼?"

"하하하?"

"?……"

"집이 머 근천스럽네, 점잖은 사람은 도무지 살 수가 없네, 또오 누구나 줘 버리군 내년일랑 이살 허네, 밤낮 그리시믄서……"

"허허!…… 아니이, 그런 게 아니라……"

끝까지 들으나마나 알아들을 소리요, 생각하니 나도 모르던 사실이었고, 그걸 꼼짝 못하고 들킨 맥이었었다.

"무어가 아녜요?…… 집은, 속으루 혼자 재밀 붙이시구두!…… 인전 나 듣는 데서 큰소리 못해요!"

"그런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꽃을 무척 사랑하셨거든! 그중에서두, 꽃울타릴……"

노상이 빈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애당초에 그 어른을 즐겁게 해 드리자는 생각이 먼저 나가지고 그래서 유념한 꽃울타리는 아니었었다.

6[편집]

연 3년째 올해도 이 날이 큰일을 저지르나 보다고 상하 없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미우를 펴지 못하던 끝에, 다 늦게 6월 스무날 그 무렵부터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무던힌 오기도 싫어하던 비가 한번 시초를 잡자, 그 다음엔 또 그칠 줄을 모르고 무작정 퍼붓기만 하려 들었다. 7월 스무날께까지니 한 달이 넘는 장마요, 그러하되 예사 지짐지짐하는 장마가 아니었다. 10여 일씩을 매일 두고 밤이나 낮이나 그냥 노박이로 호우가 쏟아지고 했다. 마치 작년 재작년에 못 온 비까지 한목 보를 빼려고 서두는 것 같았다. 미상불 을축년보다도 더한 비라고 하니, 3, 4년 치가 한꺼번에 오니만 결코 못하지 않았다.

맨 처음 물이 넘친 것이 7월 초닷새날.

이 첫번 물은 뒤꼍 길로 넘쳐 내려와가지고 집으로 달려들었다. 집 뒷길이 조금 올라가다가 하천과 맞닿는 곳이 유난히 얕아서 그리로 해서 넘쳤다.

첫번 물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놀란 것이 컸던 반대로, 소위 상하침수(床下浸水) 정도에 멎었고, 따라서 집의 피해는 별반 없었다. 그러니 잠자코 있었더라도 아무 상관 없었을 것을, 놀라서 납뛰느라고 도리어 위경을 치르고 손실을 당하고 했다.

거들어 주러 온 종씨네 사위와 안해와 경호와 이렇게 셋이어 한짐씩을 머리에 이고 막 나간 뒤였었다. 물이 허리를 넘었단 말을 들은 터라 이제는 위험해서 안되겠으니 그만들 오라고 고함을 친 후 웬만한 세간 나부랑이를 벽장 속에다 몰아넣고 있는데, 그러자 느닷없이, 숨 막힌 비명과 더불어 여럿이 다급히 들레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가슴이 더럭 단걸음에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방금 짐짝들을 이고 나가던 그 세 사람의 인간이 농짝 같은 급류 속에서 팽팽히 켕긴 밧줄 한 가닥에 가(낚시에 한몫 걸린 물고기처럼) 조란히 셋이 매달려 가지고는 사정 없이 쏟히는 물살에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휘둘리면서, 하마 떠내려갈 듯 떠내려갈 듯, 과시 죽음과 백지 한 장을 격한 최후의 승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옆집 긴상네 울지렁과 맞은편 언덕의 전신주에다가 밧줄을 비끄러매놓고는, 그걸 붙잡고 물 넘친 뒷길을 건너다니곤 했는데, 이편 치 한끝이 끊어졌든지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만일 저편 치 한끝이 마저 끊어졌든지 풀어졌든지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만일 저편 치 한끝이 마저 끊어지거나 또는 누구든 손을 놓치거나 하는 날이면, 시체조차 찾을 바가 없는 살판이었다.

줄을 놓지 말라고 미친 듯 외치면서 그야말로 물불 헤아리지 못하고 쫓아들어가는데, 언덕 위에서 무어라곤지 부르짖던 소리가 들려 퍼뜩 멈춰 섰다.

보니, 장정 하나가 밧줄로 허리를 동이고는 뒤에서 여럿이 붙잡고 늦추어 주는 대로, 벌써 저만치 내려가고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감격했다.

사람은 셋을 다 무사히 구했고, 그것만이 천행이요 고마왔지, 종씨네 사위가 이고 가던 내 책 한 부담과, 안해가 이고 가던 제 옷 한 부담과 경호가 이고 가던 교자상 하나와, 이런 것은 죄다 떠내려보냈어도 그 당장은 실수땜이거니 할 뿐이었다.

그러고서 지금 와서야 나는, 그때에 떠내려간 책 한 부담과 둘쨋번에 또 분실을 당한 한 부담과 도합 3백 권의 책을 잃어버린 것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고 아까와 못한다. 죄다 처분을 하면서도 마지막 그것 3백 권만은 죽어라고 틀어잡고 내놓지 않던 책이요, 하루라도 신변에 없어서는 안될 책이었었다. 시방은 그 덕에 사전 한 권 변변히 책상머리에 놓인 게 없다.

나는 그래서, 잃어버린 책타령을 한다 치면, 안해는 잃어버린 옷 한 부담을 노래하고.

장산 밑의 급수가 되어서 사흘 후엔 도로 집을 찾아들 수 있을 만큼 물이 다 빠졌었다. 그러나 그러한 지 1주일 만에는 다시 물이 넘쳐서 다시 집을 쫓겨나야 했다.

첫번 물때에 뒷길의 그 얕은 목쟁이를, 옆집 긴상네와 추렴을 하여 보막이를 했었다. 두번째에는 그래서 뒷길 그리로는 대단치가 않았으나, 그 대신 바른편 옆으로 해서 넘쳐들었다.

둘쨋번에도 물은 마룻전이 잘름잘름했을 뿐, 그 이상 달리 집이 상하거나 한 것은 역시 없었다.

그러나 울타리 바깥의 빈터가 형지도 없이 죄다 패 달아나고 말았다.

상전벽해라고 이르거니와 참말 무서운 변화였다.

울타리에서 원 냇줄기까지엔 넉넉 3, 40칸의 거리가 있었고, 첫번 물에도 얼마쯤 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그다지 심할 지경은 아니었다. 했던 것이 첫번의 범람으로 물머리가 훨씬 이리로 돈 관계인지 둘쨋번에 가서는 바른편과 천면 일대의(족히 4, 5천 평은 될, 하천 기슭의) 공지가 깊이 한 길도 넘게 몽땅 다 떠내려가고서, 울타리 바깥은 울타리자 그대로 낭떠러진 냇갈이었다. 우리들의 정성을 들여 개간한 텃밭도, 즐거운 채마 농사도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다.

물만 조금 넘쳐 들여보내서 사람만 무단히 놀래 주고는, 집일랑 성하게 남겨놓아 둔 채, 집이 섰는 땅바닥을 연해 갉아먹으며 들어오는 행티라니, 단숨에 차라리 집을 무너뜨려 버리든지, 둥둥 떠가지고 내려가든지 하느니보다도 더 심술궂고 악착스런 소조였다.

그렇더라도, 두번에 그치고 말기만 했어도 집이 폐옥은(멀쩡한 채로 폐옥이) 되지는 않았을 터이었었다.

그러나 설마 세번토록이야 하고 탄탄 마음을 놓았던 것이 그만……

생각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설마에게 속아서 그 봉변이었었다.

설마 어떠랴 했던 것인데 첫번도 그렇게 뽄새 있이 물은 넘쳤었다.

설마 두번째야 했던 것인데 역시 그러했고.

그러고는 설마 이번이야 했던 것인데 보아란 듯이 세번째 또다시……

7[편집]

7월 스무날 밤으로부터 이튿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흉흉한, 그러고 가뜩이나 곤란스런 밤 동안이었다.

연일의 줄기찬 호우가 오후부터서는 냇물이 더럭더럭 급격히 부는 품새가, 이미 두 차례의 경험을 미루어 정녕코 일은 다시 또 나둔 것 같았다. 하되, 당장 박두하는 밤으로 밤 사이에 일을 당하고라야 말 형세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절벽으로 어둔 우중의 철야에 그 북새 그 위험을 겪어내기도 겪어내기려니와, 황차 다들 잠이 들었다가는, 그건 아닌말로 어떤 불측한 화까지도 보게 될는지 모를 터이었었다.

설혹 별 탈이 없이 무사할 때 무사할 값이라도, 그러니 한만히 잠을 자고는 있을 수 없는 노릇이요, 역시 경계를 하느니만 못하리라 싶어, 헌잡지와 화투 조각을 벗해, 한 시간만큼씩 바깥을 나가 둘러보곤 하면서, 초저녁부터 꼬바기 밤을 새우던 참이었다.

한갓 여럿이 함께 건철야를 할 것까지는 없겠기로, 안해와 경호는 잘 안심을 시켜 웬만큼 각기 자리에 들도록 한 후, 나만 혼자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세간 같은 것도 미리서 중요한 물건 낱이면 수침을 꺼리는 의복과 내 원고 등속은 제각기 방안엣 것은 방안에다가 부엌과 마루엣 것은 마루에다가 대강 챙겨넣을 건 챙겨넣고 묶을 건 묶고 담을 건 담고 해서 다급할 때라도 손에 잡히는 대로 한두 가지씩이고 가뿐가뿐 집어들고 나가기에 순편하도록, 그리하여 건져낼 수 있는껏 건져내도록, 마침 다 그렇게 당시라니 채비를 해놓고는, 이제나저제나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난을 할 속으론 그만큼 이력이 난 셈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변 물이 정히 심해서 중방이 차고 마루 위에 넘쳐 상상침수(床上浸水)가 되어오기까지엔, 그래서 정녕코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까지엔 이번일랑 절대로 서둘러대지 말고 앉아서 버티려니, 마음을 도사려 먹기를 마지않았다.

쏟아지는 빗소리와 농울 치며 내리닫는 요란한 물소리가 서로 엉클어져, 밤은 깊어갈수록 악몽같이 뒤숭숭하고 불안했다. 여름밤이 길기는 어찌 그다지 길며, 바람도 약간 이는 듯 가다 오다 빗발이 문을 두드렸다. 약간 정도라면이거니와 모진 폭풍까지 불어쳐서는 더욱 곤란이 아닐 수 없었다.

방안은 7월 한여름이라곤 해도 오랜 장마에 겸해서 새벽녘이 되어오니 싸늘한 찬 기운이 돌고, 코끝 손끝이 시릴 지경이었다.

실상은 어제 일찌감치 몸만이라도 어디로든 피해 앉았어야 할 것이었고, 또 그럴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막상 머리를 두르고 감직한 곳이 없었다. 동네가 근처로 빈 방이라도 쉽사리 있지를 못했고, 오직 그동안 두 차례나 방을 빌려준 뒷집 최서방네가 집과는 이내 길 하나 사이요 해서 두루 마찹기는 했지만, 아직은 아무렇든 물이 들기도 전인데 세번째나 가서 방을 달라고 청할 염치가 차마 없었다.

무모한 짓인 줄 알면서도, 그러한 사정이어서 부득이 모험을 하던 노릇이었다.

아슬아슬한 밤이고, 가던 중 진땀이 빠지는 고패였었다.

그러고서 가까스로 새벽이 와서 여섯 시도 지나고 다시 반…… 깜박 전등불이 나가면서 어둠침침한 속으로 앞문 창살이 어슴푸레 비쳐 올랐다. 광명이 반갑고 고마왔다. 잊어버렸다가 문득 도로 찾은 듯 반갑고 고마왔다.

밤을 그리하여 이럭저럭 무사히 밝히고 나서, 자칫 오밤중에 그 사나운 물이 와르르 달려들고 보았으면 어떻게 갈망을 했을 것인고 하여, 새삼스럽게 정신이 나는 것 같았다.

제풀 그렇게 무사했으니, 헛되이 지키며 수고한 보람이 없은 셈이나, 무릇 그 수고를 하고 혹은 정성을 들이고 한 보람이 없은 것이 도리어 생광이요 다행일 적도 더러는 이렇듯 없지가 않은 것이, 비컨댄 맥주에 탄 쓴맛처럼, 인간 살기의 역시 한 맛이 아니런가 싶었다.

아무려나 밤은 그런 대로 무사히 넘겼다지만 비는 종시 악수로 내리고 조금도 뜸하는 기미가 없고 꼭 한대중이었다. 그런 깐으로 하면, 전번이나 전전번의 경과에 비추어, 여지껏 물이 넘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수상쩍은 일이었다.

매양 그러므로 밤 동안이 어떻게 해서 면급이 되었을 따름이지, 즉 파국이 시간적으로 다소간 천추가 되었을 따름이지, 혹여 그것이 해소가 된 것은 아닐 터이었다. 바야흐로 시방 각일각 닥쳐오며 있는지도 몰랐다. 시방 이 시각쯤, 그 절저일는지도 몰랐다. 아깟번 다섯 시 반에 정각하여 나가 보았을 때, 목천 한 자로부터 두 자 가량이 남기는 남았었다.

그렇지만 물이 제대로 불기를 들면, 다직 목척이나 한두 자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30분이면 족했다.

기적은 있을 바가 만무하고, 짐작컨대 노적봉 아래 커브에서 히끼꼬 미선의 철둑이 암구(暗溝)가 터졌을 게 십상이었다. 거기가 터지면(전번에도 그랬지만) 어느 한도의 물은 그리로 해서 딴 골로 돌아 빠지게 마련인즉, 그 한도가 차기까지의 시간 동안은 급격한 증수가 없을 수도 있었다.

으스스 춥기도 하고, 마침 군불이나 따끈히 땐 아랫목 생각이 간절하면서, 아예 꾀가 나서 못하겠는 것을, 그렇더라도 한 차례는 더 다녀 들어와야 하느니라고, 다녀 들어와서 눅눅한 구들 바닥이나마나 그런 대로 잠깐 꼬부리고 누워 눈을 붙이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하느니라고 주엄주엄 채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다리는 너벅지까지 바싹 추고, 헌 누더기 외투를 떨쳐 입되 루바쉬카 본으로 중동을 질끈 동이고는 웃도리 자락을 뽑아올려서 허리 아래로 겹쳐뜨리고, 그러고는 낡은 쇼트 벙거지를 푹 눌러쓰고 전지등(電池燈)일랑 날이 밝았으니 그만두고…… 여기에다가 이제 다 닳아빠진 게다짝을 꿰고 한 가락의 삽을 짚고 하고서 척 나서는 것인데 대저 우리네 풍속엔 없는, 그러므로 누구 속 알고도 사정 모르는 친구한테로 들킬 말이면, 인사를 하자고 들까 무선 그런 심히 괴상 야단스런 메이크업이었다.

말끔히 치워버린 책상 복판에 홀로 놓인 사발시계가, 춤춤하는 동안, 어느덧 일곱 시를 가서 가리키는 바늘이 똑똑히 보이고, 그만큼 날은 훨씬 더 밝았다. 공장 싸이렌도 때맞춰 감감히 울고.

문을 밀치고 나서자 바깥은 처음 비롯한 것은 아니지만 하여커나 일대 장관이라 않을 수 없었다.

이 끝에서 저 끝 철둑 밑까지 실히 2백 미터는 되는 폭원이었다. 거기를 싯누런 탁류가 벙벙히 차가지고 웅웅 소리를 치면서 무서운 속도로 휩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그 하도 급한 수세가 냇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폭포에 가깝다 할 것이었다.

횡으로는 그러는가 하면, 위로 하늘에서는 살대 같은 빗줄기가 한꺼번에 대지를 두려뺄 듯 좍좍 들이 퍼붓고 있고, 정히 입체전(立體戰)이었다.

그러면서 비는 격류를 기세 돕고 격류는 비를 기세 돕고 서로 부르짖으며 서로 회답을 하며, 조그마한 빈틈도 없이, 아무것의 개재와 항거도 용납함이 없이 저희만의 독단장을 이루고 저희만을 주장함이었다.

적실히 사나운 파괴요 무지스런 행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요 사실이었다.

넋을 놓고 섰던 나는 문득 짚었던 삽을 짜증스럽게 내던지면서 ㅌ마루에 가 펄썩 걸터앉았다.

오직 삽 한 자락의 힘 밖에는 가지지 못한 나는 저 극성스럽고도 다이내믹한 자연의 위력 앞에 나설, 진실로 권리가 없는 자이었다. 약비한 근력에 이 한 가락의 몽당삽을 연장삼아 한 줌 두 줌 흙을 파서 저렇듯 큰물을 지극히 적은 일부분이나마 물막이를 한다는 것은 결코 자연의 정복도 이용도 아니요, 다만 무력한 타협 구차한 아첨일 따름이었다.

이윽고 안방문이 열리면서 안해가, 진작 잠이 깨었던 모양으로 곰곰 근심 서린 얼굴을 하고 마루로 나왔다.

나오다가 먼저 내 기색이 편안치 않음을 알고는 묵묵히 팔짱을 끼고 기둥에 지여 홍수와 비에 잠긴 천지를 바라다보면서 말이 없었다.

얼마만인지 그러자 푸뜩 혼잣말처럼

"저어 위가 터졌나보우?"

하면서, 뒤미쳐서 팔을 들어 건너편으로 철둑을 가리키는 것이었었다.

그제서야 나도 속으로

'참,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면 마주 보이는 곳으로 철둑이 30칸 넓이나 뭉떵 뚫어지고는 철교 놓이듯 레일만 걸린 그리로 숱한 물이 쏟쳐 나오고 있었다.

노적봉 앞의 암구가 뚫어지지 않은 이상 저 물은 달리는 근원이 없는 물이었다. 그 물이 철둑 저편으로 일단 흘러오다가 빠질 곳을 찾지 못해 필경 저기서 또 한번 철둑을 무너뜨리고는 재차 이리로 쏟아져내려 원줄기와 도로 합수가 되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간밤에 물이 넘치지 않은 것도 짐작했던 대로 역시 그 때문이었음은 물론이었다. 뒤꼍으로 돌아나가서 물 가늠을 보았다. 밤 사이보다도 부는 속도가 많이 빨라진 것 같았다. 앞으로 두어 시간 지탱을 할 성도 싶었다.

건너편 철둑 너머로 보선구(保線區) 사람인 듯, 검정 우장을 한 그림자가 하나둘 얼찐거렸다. 그들도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는지 삽을 짚고 서서는 우두커니 바라다보기나 할 따름, 그 양자가 한결 더 인간의 미약함을 느끼겠었다.

"험, 캐애액……"

이런 유명한 양반기침을 하면서 골목쟁이에서 나오는 종씨를 만났다.

시방은 속절없이 면에 주재한 35원짜리 군 농회 기수로 떨어졌지만 한시절 돌이켜서는(득수의 말을 빌면) 공장의 인사계 주임으로 있으면서 크게 세도를 하던 당시부터 생긴 기침투라는 것이었다.

"험, 캐애액……"

골목을 지날 적마다 이렇게 긴 기침을 빼기를 잊지 않는데 그 뜻인즉은

'여봐라, X주사 행차시다아!'

하고 동네 사람들더러 들으란(듣고 무서워하라는) 노문이더라고.

득수는 우리 종씨를 어디서 그런 귀떨어진 종씨가 생겼느냐고, 사람 싱겁고 못나기로 동네서 아주 호가 났느니라고 노상 입버릇같이 비양을 했다.

종씨는 또 득수를, 어디서 그런 알량한 한고향 사람이 생겼느냐고, 사람 싱겁고 못나기로 동네서 아주 호가 났느니라고 노상 입버릇같이 비양을 했다.

안양으로 와서 살면서 그 둘이가 나에게는 유일한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둘이의 말이 다같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결국 나는 못난 사람만 둘을 골라서 사귀는 셈쯤 되었었다.

그러나 우리 종씨를 못났다고 하다니 그건 득수의 괘씸한 방언일 것이고, 다만 종씨가 양반 자랑은 무던히 잘 하는 종씨는 종씨였었다.

"아, 첨에 여길 왔더니, 아 눔들이 날 타관쇠라구 쌍눔 괄셀 할 양으루 들겠죠? 내 그래, 호령을 했죠.

임들 느인 임들, 느이 조상 할애비가 아무리 양반이기루서니 지끔 와설랑은 자갈이나 파먹는 눔들이 쥐뿔이나 양반은 뭐가 양반이냐구. 난두 임들 우리 X대조께선 XX판설 지나시구, X조께선 XX감살 지나시구, 다아 그랬은깐 조상 뼉따구 자랑으로두 느이만 못할 거 없다구. 난 그리구, 이래뵈두 증왕에 판임관 9급을 다녔은깐 양반이면 당장 내가 양반이지 느이 같은 자갈꾼이 양반이냐구. 들입다 호령을 했죠.

하하, 그랬더니 그댐버틈은 연성, X주사 X주사 하믄서 꿈쩍 못하든군! 흐흐!"

우리 X씨는 일본으로, 한 할아버지의 자손인데 댁의 문패를 보고 동성이길래 반가와서 찾아왔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이런 이약 저런 이약하던 끝에 종씨는 그런 기염을 토했었다.

그렇게 사귄 후부터, 하루 걸러큼씩 혹은 매일같이 밤이면 마을을 와서는, 서너 시간씩 나의 시간을 빼앗기, 그러다간 그대로 쓰러져서 코를 드을들 골기, 좀 염치가 적은 양반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어리석을지언정(득수와 일반으로) 선량한 편이지 악인은 아니었다.

그 소위 말동무 하나도 없고 적막강산이더니, 나를 만나 것이 재밌어서 그러는지 아무튼 나한테는 하느라고 했다. 면에 다니는 관계로 식량을 구하는 주선도 해주고 색다른 음식도 보내든지 대접을 하든지 한다치면, 안에서는 채소며 꽃모종도 나눠주고.

안양으로 이사한 수필 토막을 썼더니, 신문에서 그걸 보았는지 아무나 붙잡고는

"아, 우리 종씨가, '안안양을 소설 썼어! 안양을 소설 써!' 목간집이 없구, 뿌우루에 가서 땔 씻는다구, '안양을 소설 썼어' 허어 허허허!……"

하고, 내 직업도 선전을 해주고.

그 우리 종씨가 마침, 만년묵이의 쇠뿔 빨부리를 삐뚜름히 물고, 당꾸바지를 잡숫고 뒤통수에서부터 벗어지는 '궁상대머리'를 살 부러진 우산 조각으로 보호를 하며, 아직 출근 시간은 아닌즉 채마밭을 둘러보러가는 길일 게고, 점잖이

"험, 캐애액……"

하면서 골목쟁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밤새 괜찮었수?"

헤벌쭉 웃으면서 걱정의 인사였다. 항렬이 대부항이요, 나이도 10년을 솟는대서, 말이 항용 반거충이로 나오는 것도 그 사람다운 면목이었다.

"오온, 비두 무슨 비가 이렇다암!"

그러다가, 거진 넘칠 듯 물이 넘실거리는 내 집 울타리께를 바라다보고는 질겁을 하여

"저거어! 큰일났구료, 또!"

"큰일이야 무슨!…… 집 떠내려갈 테죠!"

"제서 그래, 밤을 지나섰수?"

"……"

"우리 집으루 오시들랑 않구서!"

"걸, 무얼……"

"지끔이래두 오시우?…… 기애넨 안방으루 몰구서, 거넌방 벼드리께?"

"보아가믄서……"

"아, 우리 종씬 줄 알았으믄, 내 나서서 못 사게 말렸지이! 아, 저런 데다가 집을 사는 돼지가 어딨드라암!"

"집 진 사람이 도야지라면, 그런 집을 산 나두 도야지보담 슬기러울 건 없지요!"

"허허허허! 그럼 내가 종씨더러두 돼지라구 욕한 거 됐네? 허허허허허!"

"……"

"내 참, 도에서 이번 수해상황 조사 보고하란 공문이 나왔길래, 종씨네서껀 잘 말했지?"

"건 무얼 하게?"

"혹시 아우? 구제금이나 두둑히 좀……"

"바라지두 않소마는 신문에서 보니깐 도에서 본부 사회과로 수해구제금 7천 원 상신했습니다. 그게 경기도 전부에 대한 이번 수해구제금이니 나한테로 몇전 가량 돌아오죠?"

"거 참 그렇구운?"

"구제야 하나마나 이 면에선 무얼들 하며, 동네 구장이란 양반은 어떻게 된 셈이요? 백성들은 물난릴 만나서 집이 떠내려간다, 죽을 곤경을 당하구 있는데, 도무지 코빼기두 볼 수가 없으니! 우리 종씨만 빼놓구서 모두 곤장 백도 감들야?"

"허어허허허!…… 그래, 구장두 와 보아주지 않어?"

"와서 보아주긴새려 어젠 좀 만날려구 술집으루 제집으루 매구 다녔어두, 구경도 못한걸!……

삯군을 몇을 구하자니 세상 있어야지? 그래 그 청을 할 양으루……"

"쉬이! 호랭이두 제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오는군!"

국방색 골덴 쓰메에리를 입고는, 다리는 나만큼이나 추어올리고 고무신을 신고, 골통대 물고, 노랑수염에 눈짜는 심술깨나 있어 보이고, 주독으로 코는 빨갛고, 50대의 우락부락한 양반이었다.

어쩐지 장히 아니꼬와하는 일별을 나에게 던지고는, 굉장히 떠듬거리는 콧소리로 우리 종씨와 또 한 사람 같이 오던 동행과 셋이 둘러서서 공론이 자자했다.

듣자니, 웃날만 들거든 동네를 풀어서 부역으로 저어 윗목에다가 방천을 하리, 물길을 돌리리 등속의 창창한 이야기였다.

그제서야 내가 구장더러 한마디 건넸다.

"거 부역두 좋지만 날라컨 삯군을 몇 좀 구해 주십시요?"

"……"

웬일인지 눈을 잔뜩 지릅뜨고는 노려보더니, 그러다간 성이 나면, 떠듬는 사람은 한결 더 떠듬거리는 법이라, 버럭 소리는 커도

"대 댁은 머 머야?"

"……"

영문을 몰라 뻐언하고 섰을밖에.

"머 머야? 댁이……"

목을 빼어 핏대를 세우고 얼러매는 서슬이 약차하면 한대 갈길 기세였다.

"아니, 여보?"

"나 날, 누구루 알구? 내 내가 누구야?"

"구장 아니요?"

"그 그래! 구 구장은, 뉘 고쓰까니야?"

"누가 고쓰까이랬어?"

"빠가! 기 기사마!"

"무엇이 어째?"

"남 남의 동네 와서 사 살믄서, 이 인사두 않구!

인사두 않구!"

'옳거니!'

겨우 나는 내평을 알았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허허!'

하고 웃어야 할 것인지, 따잡고 나서서 직성껏 시비를 캐야 할 것인지 스스로 분간을 할 길이 없었다.

내가 생장한 호남지방에서는, 동네의 구장이라면 백성의 가장 임의로운 동무였다. 남의 진일, 궂은일 죄다 맡아서 살뜰히 보아주는 게 구장이었다.

그러므로 낮게 말을 하자면 그는 동네 고쓰까이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끔찍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는 백성의 가장 임의로운 동무일 수가 있었다. 그러고, 구장은 반드시 그러한 구장이라야 했다. 따라서, 저의 동네로 살러 온 백성이 인사 문안을 드리지 않았대서 꽁꽁 옹심을 먹었다가, 어느 고패를 당하여 그 앙갚음으로 꾸중 꾸중 죄진 놈 잡도리하듯 잡도리를 하고 하는 구장은 나의 개념에는 없던 구장이었다.

그러고 아울러 생각했었다. 선량하고 좋은 구장, 동무 같은 구장만 알지 개똥양반 구장이나 용렬스런 구장을 모르고 사는 호남 백성들은, 적어도 구장 하나엔 혜택 입은 백성일러라고.

가뜩이나 짜증스런 신경인데, 이러저래 상하느니 심정뿐이었으나, 무지한 사람과 상지를 하기보다 종씨가 만류하는 대로, 집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단 10분을 잤는지 몇 시간을 잤는지 밖에서 경호가 아저씨 소리를 치며 불러대는 설레에 화닥닥 놀라 깨었다.

마루로 뛰어 나서면서 보니, 물은 마침내 넘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잘름잘름 넘치는 게 아니라, 흡사 큰 독을 엎지른 듯 한꺼번에 왁 하고 높은 물결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었다. 번번이 그랬었다.

순식간에 물은 마당으로 부엌으로 마루 밑으로 벙벙히 차서 연해 뒤꼍으로 흘러나가고. 그러면서 점점 불어올랐다.

내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 전에는 부등갬이 하나라도 들어내갈 생각을 말라고 어제부터 몇번 다져둔 터라 안해와 경호는 발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윽고 우지직하더니 바른편치 울타리가 두둥실 떠내려가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물이 넘치기까지는 땅이 패지 않다가도 한번 넘치고만 보면 그때는 하잘것없이 뭉떵뭉떵 떨어져나가곤 하는 것이었다. 울타리가 떠내려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울타리가 없어지자 물은 더욱 좋아라고 밀려들었다.

물에 덮여서 보이지는 않으나 장독대와 우물 두덩이 반은 넘겨 무너져나간 성싶었다. 그 속도로 가다가는 주초를 범할 시각도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는 어떡할꼬 어떡할꼬, 조마조마하면서도 진득히 ㅌ마루에 앉아서 버티었다.

물은 드디어 안마루의 마룻전을 스치며 빠져나갔다.

어디선지 조그마한 조선 나막신 한짝이 떠들어와서는, 마룻전에 부딪치며 뱅뱅 감돌고 있었다. 무엇인지 모르게 마음이 처량하면서 잠깐 현실을 잊어버리고 나막신짝만 바라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뒷집 학생이 철부덕철부덕 헐떡거리며 쫓아들어왔다. 일을 당하는족족, 맨먼저 달려와서는 세간도 날라주고 하며 고맙게 구는 학생이었다.

"아, 왜 이러구 기세요?"

"쯧! 괜찮을 상불러서……"

나는 미소를 하면서 천연스럽게 대답을 했다.

"오온! 괜찮은 게 다 뭡니까? 어서 내노세요!"

그리고는 휘휘 둘러보다가, 다짜고짜 마루 앞으로 뛰어가더니 세간을 담아논 궤짝 하나를 불끈 둘러메고는 철벅거리며 나가는 것이었다.

그제는 안해와 경호도 방에서 부담과 보따리를 하나씩 집어내다가 이고 안고 허둥지둥 달려나가고.

그와 엇갈려, 종씨네 아주머니와 사위가 앞서거니뒤서거니 쫓아 들어오고, 뒷집 한서방은 지게를 지고 들어오고. 들어와서는 제각기 닥치는 대로 한 개씩 들어내가고.

떠버리라는 별명을 듣는 웃집의 공장 십장은 삽을 둘러메고 달려들더니, 사립문으로 짐을 내가기가 옹색하고 더디대서 뒤꼍의 울타리를 부서뜨려 터놓아버리고.

다른 사람도 몇이 더 와서 울력을 해주었고, 10여 명이 어울려 뻔질나게 들락날락한 동안 순식간에 집안은 말끔하니 죄다 치워졌다. 그 거진 죄다 치워졌을 무렵하여 문득 나는 언제적부터인지 그들과 함께 이리 닫고 저리 닫고 하면서, 세간을 날라 내가기에 정신없이 납뛰며 있는 나 자신을 비로소 발견했다.

8[편집]

사흘 밤, 사흘 낮을 종씨네 건넌방에서 지냈다.

날도 들고 비도 들었다. 석양 햇빛이 고요하니 쬐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 어칠어칠 집으로 내려왔다.

냇물은 탁류가 다 빠지고 수정 같은 맑은 물이 정강이나 닿음직하게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극성으로 운하가 끼여 비를 몰아오곤 하던 수리산 봉우리는 씻은 듯 푸르고 개운스러웠다. 맑은 하늘엔 서녘으로 엷은 노을이 덮이고.

진작 내려왔던지 안해가 혼자서 사립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밥일랑 인전 집이서 해먹읍시다? 잠 자는 거허구……"

"글쎄에……"

이 폐허를 도로 또 찾아들기란 참으로 내키지 않는 노릇이었다.

집 그것이야 종시 아무렇지도 않고 생생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성해도 이 모양이 되고서는 도저히 집일 수는 없었다. 남 보기에도 창피스러웠다.

사각형을 대각선을 그어가지고, 그 바깥치 한쪽을 싹독 잘라버리고는, 나머지 삼각형 한쪽만 남긴 형용이었다. 아랫방 부엌 머리에서 건넌방 득수네 부엌 기둥밑까지 일직선을 그으면 곧 사각형의 대각선인데, 그 선을 경계로 바깥쪽이 완연 칼로 벤 듯 몽땅 떨어져나가고는, 거기가 그대로 낭떠러진 냇갈이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도 몹시 밭게 잘라졌으면, 가맹에 돌을 넣어서, 이 머리 저 머리의 주춧돌 밑으로(더 무너지지나 말라고) 몇 덩이 처박아놓았기망정이지, 발을 딛고 집 전면으로 돌아나갈 발붙임조차 없었다.

두번째까지만 했더라도 울타리 밖으로 실직하니 방천이나 쌓고, 다시 치마방천이나 몇 폭 뻗쳐놓고 했으면 아쉰 대로 상관이 없을 뻔은 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주춧돌 밑이 냇갈이고 말았으니 방천을 했자 소용이 닿지도 않을 터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른편 옆이 바로 급한 커브 목이 되어놓아서 아무리 든든히 방천을 한다더라도 위서부터 무너질 모양이니, 아래가 성할 이치가 없었다. 만일 그 위서부터 무너지는 걸 막자면, 훨씬 50여 간이나 올라가서 강습소 앞 근처를 기점으로 방천을 해 내려와야만 하겠으나, 그건 2백 70원짜리 오두막집 열채 값도 더 먹을 판이었다.

발가숭이 아이들이 냇물에서 희희낙락 멱을 감으면서 무심히 노는 양을 우두커니 바라다보고 섰는데, 옆에서 안해가 한숨을 흐르르, 그러고는 입안엣말로 뇌사리던 것이었다.

"우리 우물은 어디만침 있섰든구?"

그러면서 연해 냇갈을 내려다보고. 나도 생각 없이

'그, 어디만침이드라?'

싶어 가늠을 하려고 하는 것이나, 물만 한결같이 흐르고 있을 뿐 짐작이 되지 않았다.

이윽고 뒤꼍으로 돌아가보았다. 울타리는 웃집 떠버리가 삽을 휘둘러 악살을 낸 곳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하다는 부분도 모두 쓸리고 처지고 오그라들고 해서, 차마 볼썽이 아니었다. 나의 그다지도 자랑스럽던 그 바자 울타리가.

물과 비료로 제법 길러놓았던 아사가오도 흔적이 없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고 없었다. 그러고는 어쩌다 저편 아랫방 뒤창 바로 한 포기가, 더도 아니요 꼭 한 포기가 남아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우리는 끌리듯 그리고 가까이 갔다.

뿌리가 죄다 드러나고는, 두어 올의 실낱 같은 실뿌리만 가까스로 땅에 가 붙어가지고 갈씬갈씬, 그러고서는 생명이 있는 표적으론 파아란 잎을 단 덩굴이 울타리를 기어오르기를 마지않았다.

드러난 그 하얀 뿌리의 애련함이 흡사히 아기의 뾰족 나오는 젖니를 보는 느낌이었다.

"시상으! 쯔쯔! 시상으!……"

그래싸면서 안해가 쪼글트리고 앉아 손끝으로 땅을 허비고 뿌리를 다독다독 묻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다 이윽고 고개를 들 제 두 눈이 젖은 것을 나는 못본 체 외면을 했다. 어디서 뻐꾹새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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