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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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에서 생긴 일[편집]

1[편집]

파출부(波出婦)로서 출장 간호를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약 삼 주일 동안 청량리 三[ ] 밖 어떤 환자의 집으로 출장 명령을 받은 운옥이었다.

운옥은 만반의 준비를 채리고 김 준혁 박사가 돌아 오기를 기다렸으나 한 시간 후에 돌아 온다는 준혁은 두 시간이 넘어도 돌아 오지를 않는다.

간호에 대한 상세한 주의는 오늘 아침 준혁에게 받은 운옥이니까, 운옥이가 지금 준혁을 기다리는데는 다만

「그럼 다녀 오겠읍니다.」

하는, 수핫 사람으로서의 인사가 남았을 따름이다.

운옥이 진찰실로 들어가 처방지에 간단한 글자를 남겨 놓았다.

「선생님 돌아 오시길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어서 그만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선생님이 주신 주의의 말씀, 명심하여 정성 다 하겠읍니다. 상세한 보고는 때때로 전화로 연락하겠읍니다. 허 운옥 올림 ─」

병원을 나선 운옥은 검은 가방을 들고 광화문통에서 동대문행 전차에 바로 올라 탔을 때, 유경 모녀와 준혁을 실은 자동차가 「김 준혁 외과」 앞에서 멎었다.

처음에는 대학 병원에 입원을 시켜서 과장의 수술을 받으려고도 생각해 보았으나, 임상(臨床)에는 자신이 있을 뿐더러 사랑하는 유경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보이고 싶지 않은 준혁이기도 하였다.

이윽고 유경은 수술대에 오르고 어머니는 식모 밖에 없는 안방으로 들어가 누었다.

흰 「까운」에 「가 ─ 제·마스크」를 한 준혁이가 진찰실을 나오다가 문득 운옥의 글씨를 처방지 위에 보았다.

이런 때 운옥이처럼 착실한 간호부가 자기 옆에 없는 것이 뉘우쳐 졌다.

간호부라기 보다도 준혁의 비서요 가정부(家政婦)인 운옥이었다.

수술실로 들어 갔다. 세 사람의 간호원이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담 절반과 바닥에 「타일」을깐 수술실 한복판에 유경은 고스란히 누워서 천정을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준혁이가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나 죽음 어떻거나? ─」

조용한 방안 ─ 「타일」위에 맑은 물이 한 방울 툭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한 마디였다. 그 희고도 싸늘한 「타일」처럼 이지적인 유경에게도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 죽음 화장을 해 주세요.」

「쓸데 없는 말 좀 그만 해요.─ 서양선 먼 여행을 갈 때 맹장 수술을 하구 떠난다는 말 못 들었어요?」

「하긴 그렇기두 ─」

흰 「가 ─ 제」가 유경의 눈을 가리웠다. 코와 입에도 두터운 「가 ─ 제」가 올려 놓인다.

「에 ─ 텔」이 한 방울 한 방울 「가 ─ 제·마스크」위에 떨어진다.

「하나, 둘,─ 하고 세시요.」

「하나, 둘, 셋 ─ 거 냄새 지독한데!…… 넷, 다섯, 여섯, 일곱……」

「에 ─ 텔」의 강렬한 냄새에 기가 탁탁 막힌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의식이 점점 희박하고 몽롱해져 가는 것을 유경은 깨달았다.

「스물 하나, 스물 둘, 스물 셋……」

눈을 가리운 「가 ─ 제」를 홱 잡아 벗기고 죽기 전에 한번 더 세상을 보고 싶은 충동이 무섭게 일어났다.

「스물 일곱……스물 여덟……난…죽음…몰라……」

「어서 세요! 스물 아홉, 설흔 ─」

「설흔 하나……설흔……둘……설…흔……」

거기서 유경이의 희미하게 남았던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죽은 듯이 고요한 방안 ─ 유경의 숨소리 만이 쌔액쌔액 들린다.

2[편집]

신경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다만 하나의 육체로서의 유경의 몸뚱이가 죽은듯이 수술대 위에 조용히 눕혀져 있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가리운 백포(白布) 사이로 대리석처럼 희고 알린 알린 한 피부를 가진 복부(腹部)의 일부분이 밝은 전등 밑에서 호흡을 할 때마다 아래 위로 조용히 움직인다.

아직 남성을 모르는 이 신선하고도 신비로운 처녀의 육체의 일부분을 비록 동성인 간호원들에게도 준혁은 보이고 싶지 않도록 아끼는 것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노출 부분을 좁게 하느라고 준혁은 애를 썼다.

「메스 ─」

준혁은 간호원의 손에서 「메스」를 받아 지고 바른편 복부 불뚜덩 위를 한 치 반가량 빗비스이 내려쨌다. 순결한 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내려 「가 ─ 제」를 적신다.

준혁은 재빠른 솜씨로 혈관 대여섯 개를 「코헬」로 꼭꼭 집어 놓은 후에 절개(切開) 부분에 손가락을 쓸어 넣어 맹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맹장은 곧 손에 잡혔다 꺼내보니 . 손가락만한 맹장이 절반이나 신멀툭하니 곪아 있는 것이다.

준혁은 곧 환부를 가위로 짤라 낸 후에 맹장이 붙어 있던 대장을 바늘로 꿰맸다. 그리고는 절개부분의 일부만 남겨 두고 복막과 근육과 피부를 꿰매기 시작하였을 때였다.

죽은 듯이 숨결만 쌕쌕 들리던 유경이가 뭐라고 중얼거리지를 않는가.

「……인생……인생이란 뭐야?……아름답게……예쁘게 인생은 살아야 해요……」

강렬한 마취에서 깨어날 때 환자들은 곧잘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준혁은 빙그레 웃는다. 간호원들도 쿡하고 웃음을 깨물었다.

「……아름다운 내 인생…… 그걸 좀더 아름답게…

좀더 예쁘게 장식할려는거지 뭐야요?…꿈! 꿈!

내 아름다운 꿈을 담뿍 싣고 그이는 훨훨 북쪽으로 떠나갔지요……」

빙글빙글 웃으면서 수술을 하던 준혁이가 후딱 머리를 돌려 환자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눈과 코에 「가 ─ 제」를 대인 유경의 얼굴은 호수처럼 조용하다.

「……그이는 내 꿈을 송두리채 가져 간 이야요…

글쎄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하는데 뭣이 나쁘담?……꿈이 왜 나빠요 글쎄…… 백 영민!내 아름다운 꿈을 고스란이 가져간 백 영민!……」

준혁은 문득 수술하던 손을 멈추었다. 얼굴 빛이 험악해 진다. 그 험악해진 얼굴로 간호원을 돌아다 보았다.

킥킥하고 웃을려던 간호원들도 준혁의 심상치 않은 안색을 발견하자 꿀꺽 웃음을 삼키며 표정을 가다듬는다.

그 바람에 준혁도 자기 얼굴이 예상 의외로 험악해진 것을 비로소 깨닫고 안색을 부드럽게 풀어 버렸다.

유경은 인젠 말이 없다.

남겨 놓은 구멍으로 약을 묻힌 긴 「가 ─ 제」를 쓸어 넣은 후에 솜을 덮고 간호원들로 하여금 붕대로 배를 동여매게 하였다.

수술은 끝났다.

준혁은 환자의 눈과 코에서 「가 ─ 제」를 치우고 어린애처럼 무심히 잠들어 있는 유경의 조용한 얼굴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섰다.

3[편집]

얼마나 지났는고? ─ 유경은 자기 배 위에 무슨 육중한 기관차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것 같은 둔 통(鈍痛)을 느꼈다.

「기관차가 내 배 위를 지나갈 리는 없는데?…」하는 생각과 동시에 째각째각 하는 무슨 금속성 소리가 멀리서 들리었다. 그때야 비로소 유경은

「아, 저건 가위 소리?……옳지, 내가 수술을 받고 있는게 아냐!」

하였다. 설흔 몇까지 세인 것이 인제 방금 같은데… 구역질 나는것 같은 둔한 아픔이 밑배 위에서 묵처럼 푸들푸들 흔들리기를 또 얼마 동안 ─」

유경은 반짝 눈을 떴다. 눈 위에 올려 놓았던 「가 ─ 제」가 어느덧 치워져 있었다.

「아, 인제 깼어요?」

땀이 구슬처럼 뚝뚝 흐르는 준혁의 웃는 얼굴을 유경은 눈 앞에 발견하였다.

유경은 한참 동안이나 준혁의 그 씩씩한 얼굴을 말똥말똥 바라보다가

「후후!……」

하는 긴 한숨과 함께 백포 밑으로 손을 살그머니 내밀며 준혁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다 땀에 흐뭇하니 젖어 있었다. 그러한 흐뭇한 감정이 유경의 마음까지도 부드럽게 적시는 것 같았다.

간호부들은 물러가고 없었다. 문을 꼭꼭 닫은 수술실 안은 여름처럼 더웠다.

준혁은 정한 「가 ─ 제」로 유경의 땀 방울이 맺힌 흰 얼굴을 닦아 주면서

「기분이 좀 나쁘지요? 구역이 날 것 같지 않아요?」

그러나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고

「수고하셨죠? ─」

감사의 마음이 유경을 사로잡는다. 유경은 당황히 준혁의 손바닥에 쥐어졌던 자기 손을 백포 안으로 거두어 넣었다.

「이걸 보아요.」

준혁은 조그만 놋접시 안에서 새끼손가락만한 무슨 물체를 「핀세트」로 집어 보이었다.

「그거 지금 잘라낸 거야요?」

얼른 보니 신멀툭한 무슨 벌레 같았다.

「다섯 시간만 더 경과했더면 큰일 날 번 했지요.」

조금 아까까지도 자기 육체의 일부로서 자기의 피가 순환하던 그 조그만 물체를 이상한 느낌을 가지며 유경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병실 준비가 됐읍니다.」

간호부가 두 사람 들어왔다.

「그럼 속히 병실로 모셔.─ 유경씨, 절대 움직이면 안돼요.」

「네.」

배가 쑤시듯이 아프다.

간호부 두 사람이 수술대를 밀고 끌고 하여 복도로 나가니 거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수심 띤 얼굴로 서 있다.

「어머니!」

「유경아!」

하는 광경을 내버려 두고 준혁은 오 창윤씨 앞으로 다가 서며

「수술은 잘 되었읍니다.」

「허긴 서양 사람들은 맹장을 짜르고 여행을 떠난 다고들도 허지만……」

최근에 와서 갑자기 늦바람을 핀다는 오 창윤의 정력적인 아래 턱은 조금 불유쾌한 얼굴로 바라보는 준혁이었다.

작년처럼 건강한 벌거스레한 목덜미가 준혁의 도덕적인 감정을 자극한다.

깨끗한 병실이었다. 유경은 침대에 누워서 무심중 준혁을 생각한다.

「그인 내 육체의 절반 이상을 본 사나이!」

자기와 준혁의 사이를 점점 더 가까이 하기를 운명이 강요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