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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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항로[편집]

1[편집]

사 년이라는 세월은 四[ ] 지나고 보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하겠다.

더구나 청년기에 들어서는 무렵에 있어서의 四[사]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은 결코 단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졸업장을 한 장씩 움켜 쥐고 교문을 나설 때,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아름씩 품었던 그 막연하고 커다란 희망이 차차 그의 정체를 나타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제二[이]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미일전쟁이 일어나고 물자는 점점 핍박해지고 인심은 차차 불안해 졌다.

그때까지도 강건너 화재 쯤으로 생각하던 전쟁이 아니었던가.─ 서울 운동장에서 열리는 미일 대항전의 권투 시합 쯤으로 생각하고 일승일패에 일 비일희 하면서 손벽을 쳐가며 구경하던 조선 사람에게도 전쟁이라는 것이 직접 피부가 아프도록 가까이 접근해 왔다.

그것은 「조선 징병제 실시」였다.

三十六[삼십육]여 년 간에 걸친 물질적, 정신적인 노예 생활에는 인제는 어지간히 마비되었던 민중의 덩어리도 직접 자기들의 뼈를 갉아내고 피를 뽑아내려는 이 무서운 제도 앞에 태연자약하였다.

「글쎄, 누굴 위해 죽는거냐?」

하는 증오의 불덩어리가 가슴 속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나 그 증오의 불덩어리는 다만 가슴속에서 타 오를 뿐, 그것을 입으로 힘차게 토해버릴 방도를 모르는 민중의 불덩어리였다.

그러한 四[사]년이 젊은이들에게도 흘렀다. 그래서 자기의 희망이 너무 컸던 것을 느끼고 그것을 수정하는 합리주의자도 있었고 너무 황당했던 것을 깨닫고 전연 방향을 달리하는 단념주의자도 있었고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끝끝내 버리지 않는 이상주의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합리주의자건, 단념주의자건, 이상주의자건, 간에 모두가 한결같이 당면한 초미의 문제 ─ 그것은 청춘이었다. 아니, 청춘의 정열이었다.

젊은이들의 그 타오르는 청춘의 정열을 대체 어떻게 발산시키느냐?─ 참된 의미에 있어서의 인생의 출발은 실로 거기 있었다.

그해 섣달 상순 어떤 날 오후였다.

젊은 개업 의사 김 준혁(金準赫) 박사는 항상 입어오던 국민복을 벗어 버리고 다갈색 중절모에 새 넥타이를 매고 동경서 겨울 방학에 귀국하는 오유경(吳有瓊)을 맞이할 심으로 경성역에 나갔다.

아까 오정때 쯤해서 유경의 부친 오 창윤(吳昌允)씨로부터 유경이가 오후 차로 온다는 전화를 받은 김 준혁이었다. 똑똑히 말은 없었으나 마중 나가라는 뜻임에 틀림 없었다. 오씨댁에서도 짐을 건사할 하인이 한 사람 나간다고 하였다.

그 하인을 개찰구 옆에 세워 두고 김 준혁은 사람을 통하여 손에 넣은 입장권으로 「홈」에 들어 갔다.

「그동안에 유경이가 얼마나 변했을까?」

二[이]년 전 동경 「메지로」 여자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유경을 지난 여름에 보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렸을 적부터 유경의 성장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 준혁이다. 작년까지도 이마에 솜털이 보르르하니 났던 유경의, 어딘가 좀 날카로운 얼굴을 준혁은 생각한다.

차가 우르렁거리며 「홈」 안에 들어 왔다. 준혁은 얼른 二[이]등 객실 앞으로 뛰어가서 들창으로 손을 내젔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번 쭉 훑어 보았으나 유경의 안경 쓴 갸름한 얼굴을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 수상하였다.

2[편집]

준혁은 하는 수 없이 객실로 들어가 볼까하고 한발을 승강구에 올려 놓으면서 무심중 저편 三[삼]등 객실 앞을 바라다 보았다.

「유경이가 아닐까?」

그러나 유경이가 三[삼]등 차를 타고 올 리는 전혀 없었다.

짙은 남빛 외투에 같은 빛 「베레」모를 쓴 호리호리한 여자가 지금 들창문으로 「보스톤·백」을 내어 주는 사각모를 쓴 어떤 대학생과 마주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멀리 보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승강구에 올려 놓았던 발을 내리우며 그리로 걸어갔다.

그때 여자는 학생과 작별의 인사를 다정히 나눈 후에 이리로 깡충깡충 걸어 오다가

「준혁 오빠!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손을 내저으면서 탄력있는 발걸음으로 뛰어 온다.

「아니, 三[삼]등찰 탔어요?」

준혁은 「보스톤·백」을 받아 들었다.

「네.─ 왜요?」

유경은 웃으면서 준혁을 쳐다본다.

「一[일]등찰 안 태워 준다구 밤새도록 울어댄건 누구였지요?」

「후후훗.」

하고, 유경은 웃음을 깨물면서

「어떤 진실한 학도가 말하길요, 二[이]등차만 타구 현해탄을 건너 댕기는 건 비겁한 자의 행동이라구 평했답니다.」

「비겁한 자의 행동……어째서요?」

「인생의 도장을 눈 감구 지난다구요.」

「난 거 무슨 말인지 어려워서 잘 모르겠는데…」

「오빤 거저 사람의 배나 째구 다리 나 째구래야 젤 쉽죠?」

「문학을 하면 사람이 건방져서 큰 일이야.」

층층대를 올라가던 유경이가 준혁의 구두 발등을 「하이힐」로 꼭 밝아 주었다.

「아야, 얏!」

「어디 집에 가서 봐요!」

「거 내발 없었드래면 층층댈 밟을 뻔 했군.」

「근데 왜 자꾸 나 배가 아파요.」

「한 곁이나 닦은 구두 코를 문질른 벌이지요.」

「난 정말 배가 아파서 그러는데……」

「三[삼]등찰 타니까 그런 병이 걸리지. 주제넘게.」

「三[삼]등찰 타서 주제가 넘음 인제부텀 동경꺼정 걸어댕기죠. 아, 정말 아버지랑 어머니랑 안녕하시죠?」

「왜 좀 더 있다가 안불 하시지 않구……너무 이른 걸.」

유경이가 또 구두 발을 들었다.

「안 될걸요 이번엔…… 아까는 기습(奇襲)이니 욕을 봤지 만두……」

「집에 가서 봐요!」

안경 속에서 유경의 눈이 핼긴다. 그러나 두 눈꼬리가 예쁘게 웃는다.

「집에 가서 어디 배나 좀 봅시다.」

「욋과 의사에게 배를 뱄단 또 쭉 째라구요.」

「잘못하면 쨀 밴지두 모르지.」

「아, 정말 맹장(盲腸)이 어느 편에 있죠?」

「바른편 ─」

「?……」

유경이가 놀래는 바람에 준혁도 얼굴을 가다듬는다.

「바른편 불뚜덩 위를 꼭 눌러 봐요.」

「누름 더 아파요.」

「빨리 갑시다!」

이번엔 준혁이 편에서 서둘러 댔다.

개찰구를 나와 짐표를 하인에게 맡기고 두 사람은 택시를 탔다.

3[편집]

아현동 꼭대기에 있는 오 창윤의 집은 으리으리하게 호화로웠다. 양식과 조선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이 저택의 주인 오 창윤은 젊은이처럼 왕성한 정력과 건강을 가진 五十[오십]객이다.

조선에도 징병제도가 실시된다는 기사가 신문지상에 발표되던 날, 바로 그 이면에는 정력이 절륜한 오 창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황송하게도 대군의 부르심을 받은 광영의 빛나는 반도의 젊은이들에게 고함!」

하고, 민중을 전쟁으로 끌고 나간 오 창윤이었다.

그러한 기사를 충혈된 눈동자로 읽는 아들 가진 아버지, 어머니는 눈 앞이 갑자기 아찔해지는 것 같은 공포와 경련을 전신에 느끼면서

「이들은 아들이 없는게지.」

하였다.

그렇다. 오 창윤은 아들이 없다. 무남독녀 외딸이 유경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가난한 친구의 아들 김 준혁을 자기 아들처럼 돌보아 준 오 창윤이다.

별로 이렇다할 정치적 색채를 가진 오 창윤도 아니건마는 금광으로 천금을 얻고 보니 일약 명사가 되었고 명사가 되고 보니 어느듯 민중의 지도자로 떠받쳐진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오 창윤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자기가 별로 노력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도 운인게지 하였다.

유경은 안방 침대 위에 누워서 김 준혁 박사의 진찰을 받고자 옷고름을 끌렀다.

「너 차에서 뭘 못 먹을걸 먹지 않았느냐?」

어머니가 살뜰히 걱정을 한다.

그러나 유경은 딴 생각을 하고 있다.

「여자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건 이 세상에 단 두 사람 밖엔 없잖은가! 남편과 의사와 ─」

유경은 천정을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자기의 밑배를 꾹꾹 눌러보는 준혁의 손바닥에서 하나의 뚜렷한 이성(異性)을 감촉했다.

「그럼 준혁은 뭘까?……단순한 하나의 의산가?……남편 될 인가?……」

유경의 감각이 좀처럼 결론을 못 짓고 망설거린다. 그 두 가지를 다 합한 것 같은 간지러운 피부였다.

그 순간 유경은 아까 정거장에서 헤여진 백 영민의 얼굴을 문득 천정 위에 보았다.

「아야얏!」

준혁의 손이 외인편 쪽을 누를 적엔 가만있던 유경이가 바른편 쪽을 누르니 까무러치게 소리를 쳤다.

「아이구 거기 누르지 말아요. 밸이 터질 것처럼 아파요.」

준혁은 한참동안 유경의 신선한 피부를 묵묵히 어루만지다가 이윽고 머리를 들었다.

유경의 어머니가 준혁의 침통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없이 묻는다.

「수술을 해야겠읍니다.」

「수술을?……아니, 밸 짼다는 말이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놀랜다.

「네,─ 급성 맹장염입니다.」

그러나 유경은 별반 놀래지도 않는 얼굴로 준혁의 그 믿음직한 표정을 빤히 바라볼 뿐이다.

「그럼 사모님, 곧 병원으로 갈 차빌 해 주십시오.

전 사랑으로 나가서 선생님께 여쭙고 오겠읍니다.」하고 걸어 나가다가 유경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네버·마인! 네버·마인!(염려할 것 없으니 안심해요)─」

준혁의 뒷 모양이 오늘처럼 믿음직하고 탐탁해 본 적이 없는 유경이었다.

「아니, 오자마자 이게 웬 일이냐?─」

어머니가 울먹울먹하며 다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