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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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도장[편집]

1[편집]

사실 신수가 좋은 영민이었다. 모두 매를 맞기는 했으나 콧등쯤 터지고 만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

「선생님, 미안합니다.」

「토일렛」으로 가서 영민은 세수를 하고 야마모도 선생이 인도하는 대로 트렁크를 들고 二[이]등 선실로 왔다.

「전 三[삼]등인데요.」

「괜찮어. 인젠 차표 조사가 없으니까.」

「그래두 어쩌다가 조살 오면……」

「그땐 이등으로 고치지.」

교실에서 보던 야마모도 선생과는 전연 딴판의 인상을 받는 영민이었다.

「어이, 보이상.」

야마모도 선생이 지나가는 보이를 불렀다.

「헤이.」

보이가 왔다.

「술 없나?」

「헤이. 술은 그만 방금 다 나갔는뎁쇼. 헤이.」

「삐루는?」

「삐루도 없는뎁쇼. 헤이.」

그때 야마모도 선생은 보이의 얼굴을 빙글빙글 쳐다보면서 먼저 十원 한 장을 보이에게 쥐여 주며

「이건 넣어두구, ──」

그리고 이번에는 十[십]원 두 장을 내어 주며

「저녁두 아직 안 먹었어.」

하였다.

「헤이. 어디 가 봅죠.」

보이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바아텐더」가 있는 데로 가 버렸다.

조금 있더니 없다던 정종 한 병과 삐루 네 병을 가져 왔다. 그리고 다음에 오징어 두 마리와 「치킨ㆍ라이스」두 접시를 갖고 왔다.

「스페샬(특별)입니다.」

하였다.

「오ㆍ케이!」

맞장구가 제법이다.

조금아까 취조실에서 영민을 빼느라구 취한 그 책임성 있는 교육자로서의 태도도 그러면 하나의 가식인가?……영민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학교에서의 야마모도 선생은?……국수주의자로서의 영어 선생을 울리고 학생들을 때려주던 야마모도 선생은 또 어디로 갔는고?……」

영민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나 또는 소설에 등장하는 하나의 「모던ㆍ 보이」 같은 야마모도 선생을 멍하니 바라다 보았다.

어느것이 야마모도 선생의 참된 자태인지를 영민은 좀처럼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뭘 그리 멍하니 앉았는가? 자아 한 잔 들게.」

사양하면 도리어 쑥스러울까 보아 영민은 삐루를 쭉 들이켰다.

「이께루노!(잘 먹는데) ── 자아, 먹었으면 내 잔에두 따라야지.」

야마모도 선생은 연거퍼 석 잔을 마시고 나서

「백군, 없다던 술이 어째 나온 것 같애?」

「선생님이 돈을 十[십]원씩이나 주셨으니까요.」

「돈이 아니야. 돈은 돈이래두 그런 돈은 「팁」!이라구 그런는거야.

「팁」! 「팁」! 경관을 둘러 메따친 백군이 어째 무사히 나올 수 있었는지 아는가!」

「선생님이 우연히 나타나셔서……」

「아니야. 교사만 갖구는 안되지 안돼.「팁」을 쥐여 줬기 때문이야.」

「그럼 선생님이 돈을……?」

「「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어. 머리를 숙이는 것두 일종의 팁이거든. 백군들의 생활은 말하자면「팁」없는 생활이야! 나에게도 그런 생활이 있었거늘…… 아아, 청춘이여! 어여뻤던 나의 꿈이여」

야마모도 선생은 얼근히 취했다.

「아아, 「팁」없는 삶을 살아 보려다가 살지 못한 야마모도ㆍ히데오는……」

몇 잔 고뿌 술에 흐뭇하니 취해 버린 야마모도 선생은 깊은 감상에 젖어 변사의 어투로 영탄을 한다.

영민은 예고없이 나타난 이 돌연한 변모(變貌)의 원인을 좀처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오늘 밤이 연락선 안에 야마모도 선생이 나타난 것부터가 하나의 기적과도 같았다.

「선생님, 사직원을 내셨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그런 또 누구헌테서 들었나?」

「콘사이스한테 들었읍니다. 아주 정확한 뉴우스라고요.」

「음, 사실이네. 정확한 뉴우슬세.」

「어째 그처럼 갑자기 사직원을……?」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는 누구보다도 백 영민을 사랑해 왔었는데……」

「……?」

그것은 정말 의외였다. 야마모도 선생이 자기를 누구보다도 사랑해 왔었다고? ──

「그 백 영민이가 제일 먼저 나에게 대들었거든. 슬픈 일이야!」

침통한 빛이 야먀모도 선생의 얼굴을 덮어 눌렀다.

「그러면 그 다과회가……?」

「응, 그 다과회가 원인이야. 바루 그 이튿날 사직원을 냈으니까. ── 교육자! 하, 하, 하, 하…… 내가 무슨 교육자야?……五[오]년 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나의 가슴 속에 남은 것은 거 슬픈 공허(空虛) 뿐일세. 주먹을 들고 황국신민이 되라면 될 수가 있을 것 같애?……뭐, 내선일체?……흥, 빛 좋은 개살구지!……그러나 백군, 주먹을 든 것두 말하자면 하나의 인생의「팁」이야! 「제스츄어」야! 가면(假面)이야! 하하하하 ……」

자기의 과거를 조상하는 것 같은 이상한 웃음이었다.

「가면이라구요?」

영민은 또 한 번 눈을 번쩍 떴다.

「젊은 교사의 야망 ── 학교에서 패권을 잡아 보려는 야망을 몰라?……

흥, 참된 애국자가 일본에 몇 되는 줄 알아?」

난무(亂舞)하는 사회의 숨은 일면이 인생 초년병(人生初年兵)인 영민의 눈앞에 처음으로 전개되는 한 폭의 회화(繪.)였다.

「그러나 五十[오십]보 백 보지. 주먹을 들어두 안되고 사탕을 내줘도 잘 안 될걸. 다과회 때 보니, 아주들 깔끔하든데! 이이이……총독정치 三十[삼십] 여 년, 한 사람의 황국신민을 누가 만들어 봤어?……어리석은 일이지.

백군이 아까 그놈들을 왜 메다쳤지?……흥, 자세, 자.」

야마모도 선생이 누어 버렸다. 영민도 따라 그 옆에 누으면서

「선생님, 처음부터 보시구 계셨읍니까?」

「중도에서 봤지. 하하하하……「고시나게」를 했어? 학교 도장(道場)인 줄 알구?…… 하하하하…… 하여튼 유쾌하이!」

「하하하……」

영민이도 같이 따라 웃었다.

「동경 가면 내 「베삔상」(미인)많이 소개해 주지. 조도전?……조도전 대학이랬지?」

「네.」

「조도전은 내 집에서 五[오]분만 가면 돼.……아아, 동경, 그리운 내 고향 동경!」

얼마 안있어 야마모도 선생은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평양을 떠난지 일주야 밖에는 되지 않건만 너무나 많은 것을 한꺼번에 경험한 영민이었다.

키만 크면 어른이냐 「 」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겨 놓고 사라진 분이며 학교 도장인 줄만 알고「고시나게」를 한 사건이며 가면을 벗어버린 야마모도 선생의 인생관이며 ── 그것은 실로 아직 중학교 교복을 채 벗어버리지 못한 영민에게는 너무나 어지럽고도 다채로운 인생화첩(人生畵帖)이었다.

3[편집]

코를 골면서 깊이 잠들어 버린 야마모도 선생의 의장(擬裝) 없는 얼굴을 영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들여다 보았다.

「그처럼 열렬한 애국주의도 결국은 하나의 생활의 방편이었던가?……」

하고 생각하니, 학생들에게 그처럼 미움을 받던 야마모도 선생이 갑자기 측은해 졌다.

조선으로, 만주로, 북지로 등을 쳐 먹으러 갔던 하나의 사깃꾼, 갈보, 장사를 갔던 하나의 뚜쟁이가 뜻을 달하지 못하고 표현히 돌아오는 낙오자의 쓸쓸한 모습을 야마모도 선생의 얼굴 위에 그릴 수가 있었다.

영민은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튿날 아침 하관(下關)에 내렸다.

역 앞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선생이 고쳐 끊어준 二[이]등 차표를 가지고 「노보리」열차를 탔다.

선생의 얼굴은 어젯밤과는 딴판으로 무척 피곤하고 침울해 보였다. 그 침울을 물리치려는 듯이 반 병쯤 남은 정종 병을 꺼내 나팔을 불기 시작하였다.

「학굘 그만 두시면 선생님은 뭘 하시나요?」

「자아, 뭘 할까?……만주로 건너가서 마적 노릇이나 할까?」

「옛?……」

「그렇지 않으면 시(詩)나 읊지.」

「시라구요?」

「왜 나는 시를 모르는 줄 알아?」

「그러나 선생님은 문학하는 사람을 그처럼 낮추 평가하시면서……」

「아, 저 콘사이스 말이가?……핫, 핫, 핫……그건 말하자면 나의 제스츄어야.」

「제스츄어라고요?……」

「교장이 문학을 극도로 싫어하거든. 그래서 교장에게 보조를 맞추노라고…… 아니, 실토를 하면 나는 문학에 실패를 한 사람이야. 그래서 문학 한다는 사람을 보면 공연히 눈에 횃불이 서서……」

「선생님이 문학을요? ──」

영민은 또 한 번 놀랐다.

「예쓰! 리테렛츄어ㆍ워즈ㆍ올 마이ㆍ팻슌!(그렇다! 문학은 나의 정열의 전부였다) ──」

영민은 또 눈을 크게 뜨면

「아니, 선생님은 영어 폐지론자가 아니세요?」

「응? 아, 핫, 핫……」

하고 한바탕 웃어대며

「모두 시국의 요청에 응한거지 뭐야? 아니, 실상을 말하면 나는 학교쩍부터 영어를 잘 못했어. 그래 영어 교사들이 영자 신문 같은 것을 들구 댕기는 걸 보고 화가 치밀어서……」

야마모도 선생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또 병나팔을 분다. 아아, 웃어 버리지 못할 가면의 인생이여, 투쟁의 생활이여!

이튿날 아침이다.

「요꼬하마」를 지나면서부터 창 밖의 소음(騷音)이 보이는 듯이 갑자기 어지러워 졌다. 그림엽서로서만 보던 대동경의 한 토막 한 토막이 드높은 삘딩들을 배경으로 마치「파노라마」인 양 눈 앞에 전개된다.

「아아, 동경! 문화의 도시 대동경!」

영민의 가슴이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윽고 동경역에 내린 영민은 그 홍수처럼 밀려나가는 어지러운 사람의 물결 속에서 눈물 젖은 운옥의 가엾은 자태를 문뜩 환상에 그림 그려 보았다.

「운옥이 용서하라!」

그러나 그 운옥이가 캄캄한 절망 속에서 애국가를 부른 사상범으로서, 박준길을 죽인 살인범으로서 관헌의 눈을 피하여 정처없는 유랑(流浪)의 길손이 된 줄을 영민은 물론 몰랐다.

「백군, 저것이 고히노 ㆍ 마루비루(사랑의 丸內 [환내]삘딩)……아노마도ㆍ 아다리(저 들창가에)……나이떼 ㆍ 후미가꾸 ㆍ 히도모 ㆍ 아루조(울면서 사랑의 편지를 쓰는 사람도 있다) ──」

야마모도 선생은 자기 중학 시절에 유행하던 「동경 행진곡」의 한 구절을 빌어 그 거대한 건물을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