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10장
현해탄
[편집]1
[편집]연락선은 밤배를 탔다.
동라 소리와 함께 (銅.) 부산항을 떠날 때 영민은 멀리 부두 근방에서 명멸하는 큰등, 적은등을 바라 보며 분이 생각했다.
「키만 크면 어른이나? ──」
이 한 마디가 영민에게는 풀리지 않는 하나의 수수께끼 같았다.
향수가 넘쳐 흐르는 항구의 밤 거리가 멀리멀리 적어져 간다. 발동기 소리가 점점 빨라져 간다. 달빛을 헤치듯이 하며 자꾸만 자꾸만 망망대해로 빠져나가는 뱃머리 ── 그 뱃머리에 꽂힌 흰 깃발이 거세인 해풍에 찢어져 나갈듯이 나붓긴다.
「연락선아, 어서 이 좁다란 어구를 벗어나서 현해탄(玄海灘) 한복판으로 빠져 나가라!」
그 넓다란 현해탄 한복판에서 그 무엇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동경에 찬 아름다운 꿈, 커다란 희망, 그리고 황홀한 동화(童話)의 한 토막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현해탄! 현해탄!」
영민은 상반신을 힘껏 뒤로 제끼고 소금 냄새 그윽히 풍기는 거세인 해풍을 피부가 터져나가리 만큼 들이키었다.
바다의 위대함이 영민의 연약한 영혼을 전률시킨다. 거기에는 분이의 타오르는 정열도 없었고, 운옥의 애처러운 눈물도 없었다. 모두가 이 억센 해풍에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한낱 조그만 티끌일 따름이었다.
「어디 인생의 구구함이 있으며 어디 인생의 어둠이 있는고?」
다만 인간의 조그만 예지(慧智)와 우졸(愚拙)한 기교(技巧)를 비웃는 것 같은 하나의 위대한 자연의 힘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우졸을 비웃고 자연의 위대한 힘을 시인처럼 자못 영탄함에 바다를 무섭게 흘겨 보았다.
바다 바람이 너무 차다.
영민은 갑판을 떠나 선실로 내려 왔다. 三[삼]등 선실은 일층에도 있었고 밑층에도 있었다. 밑층은 공기가 탁하고 일층은 그래도 밑층 보다는 좀 청결도 하거니와 공기가 그리 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객들은 앞을 다투듯이 일층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三[삼]등이건만 결과로 보면 일층을 점령한 것은 태반이 일본인이고 밑층은 태반이 조선인이 차지하곤 하였다. 승객들이 와아 하고 선실로 들어오면 그 입구에 머리를 반반히 깎은 양복쟁이가 몇 사람씩 서 있다가 아주 신기하게 조선 사람의 얼굴을 꼭꼭 골라내서는 짐을 뒤지고 주소 성명을 묻고 직업과 연령을 묻는 사이에 일층은 벌써 일본인이 거의 차지해 버린다.
어떤 때는 강제로 조선인을 밑층으로 쫓아버리기도 하였다. 영민도 아까 봇짐 조사를 받았으나 간신히 일층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영민은 선실로 내려왔다. 그랬더니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조선인 노동자 몇 사람이 입구에서 두리번 거리고 섰다. 거기에 머리를 빡빡 깎은 양복쟁이가 두 사람 서 있다가
「밭으로 내려 가!」
하고, 꾁 소리를 치며 노동자의 등을 힘껏 아래로 떠밀었다. 바로 그 앞을 지나면 영민의 등도 그때 함께 떠밀려졌다.
「빨리 내려가!」
하고 이번에는 영민의 등을 떠 민다. 떠 밀려 서너 걸음 비틀거리던 영민이가 홱 돌아서며 양복쟁이 앞에 우뚝 버티고 섰다.
「고노야로오(이 자식아)? ──」
험악한 얼굴로 양복쟁이가 다가선다.
2
[편집]「고노야로오가 뭐요?」
영민도 한 걸음 다가 섰다.
「이 자식이 어쩌자구 이러는 거야?」
하자마자 머리를 박박 깎은 양복쟁이가 영민의 모자를 홱 벗겼다.
「모자는 이리 내요.」
「흥, 꼭대기에 피두 안 마른 자식이……그래 네가 딱 버티구 서면 어쩌잔 말이야?」
「三[삼]등은 밑층이나 一[일]층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어째 一[일]층엔 못 들어간단 말이요? 그리구 사람을 함부로 떠밀긴 왜……」
「고노 나마이끼 이로오가(이 건방진 자식아) ──」
영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었던 영민의 모자로 영민의 얼굴을 철썩 하고 내갈겼다. 그 순간 억제할 기교를 갖지 못한 영민의 분노가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나니윗(무엇이)?……」
영민의 귓 등에서 아직 채 떨어지지 못한 모자를 쥔 양복쟁이의 손목을 재빠르게 부여잡은 영민이었다.
그때까지 옆에서 빙글빙글 웃고 섰던 안경잡이가 다가 서며
「고노 아오니사이가(요, 애숭이가)?…… 해변개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하고 중얼거리자, 찰싹하고 영민의 따귀를 쳤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손목을 잡힌 양복쟁이의 뼈만 남은 몸뚱이가 도리깨질하듯이 허공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유도부 주장 백 영민의 면목이 약동하는 순간이었다.
「으와, 으와……」
선객들이 떠들기 시작하였다. 흰「유니폼」입은 보이들이 달려오고 취조실에서 사복들이 뛰어 나왔다.
「뭐야, 뭐야? ──」
층층대 옆에 보기 좋게 나가 자빠진 양복쟁이를 일으키는 뽀이들 ──
「고이츠다(이 자식이다)!」
「나구레(때려다)!」
영민의 눈자위에서 불똥이 튄다. 아프다는 감각은 전연 없었다. 수많은 손과 발이 자기의 몸뚱이를 무섭게 학대하누나!…… 하는 의식 받엔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 매를 맞으면서 영민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고 발동기 소리를 한가스레 세이고 있었다. 발동기 소리가 이상하게 똑똑히 들렸다.
이윽고 잡아 일으킨 영민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
「이리 와!」
안경 쓴 자가 영민의 팔을 잡아 끌었다.
무슨 큰 살인강도나 체포한 것처럼 떠들고 흥분한 그들이었다.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는 이런 때에 비로소 최고의 흥분을 느끼는 것처럼 ──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이런 우물속의 개구리가 뛰여 나온단 말이야.」
어떤 자는 영민의 턱을 쳐들며
「얘, 너 대체 몇 살이냐? 너 유도 어디서 배웠니?……」
하고 또 딱 따귀를 붙인다.
「이리 와서 나하구 유도 좀 해보자」
「응, 스꼬시ㆍ몬데야레(좀 닥달을 시켜)!」
영민은 보이들이 몰려 있는 방 옆에 좁다란 취조실로 끌리어 들어 갔다.
방 한가운데 긴 테이블이 놓였고 그 위에 재떨이, 찻종지, 담배갑, 벤또 곽들이 너저분하니 널려져 있었다.
3
[편집]영민을 끌고 들어오는 사복들의 등 뒤에서 그때
「고멘나사이(용서하시오) ──」
하고 취조실 문 안으로 들어서는 신사가 한 사람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형사 하나가 투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입니다.」
신사는 명함을 꺼내 주었다. 형사는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평양 ××중학 교유 ── 야마모도ㆍ히데오?……」
그때야 영민은 숙였던 머리를 들고 중절모를 벗어 손에 든 야마모도 선생을 바라보았다.
「아, 선생님? ──」
「………」
야마모도 선생은 말없이 영민을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용건입니까?」
형사는 야마모도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알자 갑자기 어조가 겸손해 진다.
「저 학생은 나의 제자입니다. 이번 중학을 마치고 동경으로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는 학생인데요.」
「그럼 당신과 동행입니까?」
「그렇읍니다. 평양서 쭉 같이 왔읍니다. 내가 잠깐 갑판에 나간 사이에 무슨 실수를 한 모양 같은데 ──」
야마모도 선생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실수도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닙니다. 유도깨나 배웠다구 사람을 함부로 메다치는 법이 있읍니까? 그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모르거니와 민중을 보호하고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는 경관에게 손을 대는 그런 불량 학생을 당신은 대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때 안경 쓴 자가 나서면서
「그러한 불량한 학생을 당신은 교육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더구나 자기의 손으로 교육을 시킨 학생이……」
용서하시오 모든 책임은 「 . 그 학생에게 있다기 보다도 나 자신에게 있읍니다. 면목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선생님!」
하고 영민이가 외쳤다.
「선생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째서 나로 하여금 그에게 손을……」
「잠자코 못 있겠나?」
야마모도 선생이 벽력 같은 고함을 쳤다.
그 고함 소리가 예상 이외로 너무나 컸기 때문에 다시금 감정을 상하려던 형사들의 입을 막아 버리고 말았다.
「하여튼 경관에게 손을 대었다는 이 사실은 실로 중대한 일이요.」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절실히 느끼며 충심으로 사과하는 바입니다.」
야마모도 선생은 또 한 번 머리를 숙였다. 공손히 숙였다. 자꾸만 숙였다.
형사들도 그만 이 일본인 교사 야마모도의 태도에 어지간히 얽혔던 마음이 풀렸다.
「저런 학생은 우리들의 손으로 교육을 시켜서 내보내야만 사람 구실을 할 것입니다만 당신의 뜻이 그러 하다면 당신의 보증을 믿고 ──」
「고맙습니다!」
「당신의 본적은?」
「동경부 우시고메꾸 와까마츠쵸오……」
거기서 야마모도 선생과 영민의 주소, 성명, 출신학교 등을 수첩에 적고 두 사람을 내보냈다.
나올 때 야마모도 선생은 허리를 굽혔으나 영민은 종시 그대로 나왔다.
「너 어젯밤 꿈 잘 꾼줄 알아라. 아예「고시나게」(腰投[요투])를 못하게 허리 뼉다굴 문질러 놀래댔다!」
영민은 그런 소리를 등골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