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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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만 크면 어른이나[편집]

1[편집]

그렇듯 꿈길에서만 만나보던 성인된 영민을 이렇듯 쉽사리 만나 보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한 분이였다.

「그래 어딜 가시는 길이에요?」

「동경 가드랬읍니다.」

「동경 ── 옳지, 동경유학 가시는 길이로군요.」

「예, 금년 평양 학굘 졸업 했어요.」

「아이, 정말 이젠 훌륭하게 되시겠네! 내 꿈이 맞나 봐!」

「………」

분이의 꿈이 맞나부다는 말을 영민은 이내 헤아릴수가 없었다.

분이는 하이얀 손목이 움푹 파지리만큼 잘라맨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며

「식당에 오셨댔서요?」

「아니……예 ──」

영민은 당황히 대답하였다.

「자, 시간이 되기 전에 어서 들어 가야지. 어서 이리 들어 오세요.」

영민은 모자를 벗어 들고 분이를 따라 머뭇머뭇 식당으로 들어 갔다.

급사에게 식사를 주문하고 나서 분이는 영민과 마주 않았다.

조금 아까 까지도 별세계처럼 휘황찬란 하던 식당이었다. 아니, 그 보다도 한층 더 눈부신 분이의 얼굴이 자기 바로 눈 앞에서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해방된 이 분위기 ── 그처럼 즐거워 보이던 중학 생활이 이 사회와는 전혀 절연된 하나의 침침한 잿빛깔 도는 감옥처럼 희생되는 일순간을 영민은 불연듯 느끼는 것이다.

「나 무척 변했지요?」

「변하긴……」

「나 뭐 같아 뵈요?」

「뭐 같다구…… 이화 전문? ──」

「이화 전문?……호호호……키만 컸지, 아직 어리시네!」

그때 주문한 식사가 온다. 두 사람 분의 「함박스테크」와 삐루 한 병, 사이다 한 병이 쭈루루 식탁 위에 놓인다.

분이가 삐루 병을 들고 영민의 잔에 부으려 하는 것을 보고

「아니, 나 술 못 먹는데요.」

분이는 잠깐 동안 영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나서 이번에는 사이다를 따른다. 거품이 오구구 기어 올라 온다.

「그래서 두 가질 청했죠 뭐. 그래두 사내는 삐루 마시구 여자 사이다 마시는 법이라우.」

그리고 나서 자기에게도 사이다를 따르면서

「영민씬 그래두 날 뭘 하는 사람인지 몰라 보세요?……」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면서

「학생같이 채렸으니까 뭐 이화 전문?……나 기생이예요, 기생 ──」

「?……」

「호호호……왜 그리 놀라세요.」

「………」

「………」

「왜 말이 없으세요?」

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놀음군 박 삼룡의 딸이 기생이믄 무던하지. 이화 전문은 또 무슨 이화 전문이예요? 호호호, 호호호……」

유쾌한듯이 분이는 사이다를 쭉 들이키었다.

「나 삐루 한 잔 따라 주세요. 오늘 같은 날 사이다 마시긴 좀 어굴해요.」

「삐루를?」

영민은 눈이 둥그래지며 하는 수 없이 삐루를 따랐다. 분이는 사이다처럼 이번에도 한 목음에 쭈욱 들어 마신다.

「내일 아침 서울 내려서 하루 놀고 가세요. 재작년 봄에 우리 다 평양서 서울로 이사를 갔다우. 만주 가 있던 오빠가 나와서요. 그래 같이 평양엘 놀러 왔드랬어요. 그 돼지바우 우리 오라버니 말이예요.」

영민은 문득 「포크」를 든 자기 외인편 손등에 희끄무레하니 자리가 난 조그만 흠집을 들여다 보았다.

2[편집]

「우리 오래빈 돼지 바우란다.」

하면서 댕기를 풀어 손등을 동여매 주던 옛날을 생각하며 영민은 분이를 따라 식당을 나와 二[이]등 침대차로 들어 갔다.

「그럼 가서 짐을 가지고 오세요. 하룻밤 않아 새우면 될껄 뭘 그래요?」

자리를 못 잡았다는 말을 듣고 분이는 한사코 영민을 자기 자기로 오라고 한다.

영민은 트렁크 한 개를 들고 다시 분이의 침대차로 찾아 들어 왔다.

비둘기장 같은 침대에는 아직 커튼을 열고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잠이 든 모양이다.

영민과 분이는 휘장을 활짝 열어 제치고 나란히 않았다.

석 잔이나 삐루를 마신 분이였다. 한참동안 말없이 않았던 분이가

「나 영민씨의 꿈을 늘 꾼다우.」

하였다.

「내 꿈을?……무슨 꿈인데요?」

「이 꿈, 저 꿈……청춘의 꿈! 그러나 ──」

분이는 웃는 얼굴로 영민의 옆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다가

「정말 성인이 되셨네! 세월이란 빨라요. 노래에도 있지 않아요. 유수 같은 세월이라구……흐흥!」

자기를 비웃는 것 같은 코웃음이다.

「왜 자꾸만 분인 과거만 생각해요?」

「흥……아마 분이가 늙었나?」

「분이가 몇 살이기에 벌써 늙어요?」

「여잔 스물이 넘으면 남는 건 과거 뿐이래요.」

「왜 장래는 없나요?」

「스물 넘어서 장래 꿈꾸는 건 바보 뿐이래요. 흥……그 어떤 잘난 양반 댁에 그 어떤 잘난 양반집 어여쁜 아가씨가 민 며누리로 들어오는 날, 태극령 도라지탑 앞에서 저고리 고름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눈물 짓던 철 없는 계집애가 가엾어라!」

허 상진이가 죽고 딸 운옥이가 백 초시 댁 민 며누리로 들어 오던 어떤 초가을 날 ── 운옥일 다린 일행이 태극령을 넘어 앞 탑골로 내려올 때,

「도라지탑」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외로이 울고 섰던 분이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꺼질 듯한 한숨을 분이는 짓는다.

「분이……」

영민은 분이의 마음을 그때 비로소 안 것 같았다.

「분이!」

「인젠 분이가 아니야요.」

「분이는……」

「분인 벌써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영민의 얼굴에 뜨거운 입김을 푹푹 퍼부으며

「날더러 인젠 분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춘심이 ── 박 춘심이! 서울 장안에 있는 난봉치구 평양 기생 박 춘심을 모른대믄……바보지, 바보야!」

「춘심이!……」

「봄 맘(心)이 아니구……봄이 깊다구요. 그래서 깊을심(深)자 춘심이 ── 흥, 시굴뚜기 분이는 가엾은 계집애였지만 평양 기생 춘심인 그래두 행복하 다우!」

처음에는 코를 찌르던 분 냄새, 향수 냄새가 차차 영민이의 후각을 그윽하게 하였다. 「파마 넨트」의 한 오락 두 오락이 영민의 귀 밑에 간지럽다.

「행복되기를 바랍니다.」

「늦었어요.」

「분이!」

「춘심이래두 그러셔?」

영민은 그 순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것을 자기 무릎 위에 감각하였다.

뽀둥뽀둥 살찐 분이의 오른편 손이 영민의 외인편 손을 꼭 잡았다.

3[편집]

분이의 매끄러운 손이 영민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순간 영민은 얼굴이 확근하고 달아 올라 왔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강렬하고도 찬란한 감정의 세계였다.

「여자의 손이란 이처럼 강렬한 감정을 주는 것일까?」

이 전혀 계산에 넣지 않았던 새로운 발견에 영민은 눈 앞이 핑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과 숨결이 막힐 듯한 가쁨을 느끼면서

「이상한 일이다!」

하고 마음 속에 외쳤다.

같은 이성이건만 운옥이의 손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 아닌가.

말을 그친 분이의 손등이 더 한층 힘을 주어 영민의 손등을 압박하여 왔다. 그와 동시에 분 냄새가 향그러운 분이의 얼굴이 차츰차츰 가까워 오다가 영민의 입술을 재빠르게 도적질했다.

부끄러움이 일시에 영민을 습격해 왔다. 그 어떤 커다란 위기가 자기를 시험하려는 것 같은 일순간을 영민은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고 무의식 중에 분이의 입술에 응하고자하는 자기의 입술을 힘차게 돌리며 영민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나는 저리로 가겠소.」

목소리가 떨린다. 트렁크를 들었다.

「어디를 가세요? 자리가 뭐 있나요?」

분이는 따라 일어섰다 . 뜨거운 정열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 분이의 눈이였다.

그러한 분이의 정열이 영민에게는 한없이 무서웠다. 아름다운 것만을 꿈꾸고 자란 영민의 단순한 심장에는 너무나 강렬한 자극이며 너무나 짙은 색채였다.

「성 났어요?」

「아, 아니요.」

「훌륭한 지사의 아가씨가 못 되고 불량한 놀음군의 딸이 돼서 그래요?」

「분이는 무슨 말을……」

「그럼 천한 기생이 돼서 그래요?」

「……」

영민은 대답 대신 트렁크를 들고 침대차를 빠져나와 컴컴한 승강구로 나섰다.

확확 닳아 오르던 얼굴이 한결 상쾌하다. 달리는 산과 들을 영민은 달빛 속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여자와도 정을 통하지 말라던 아버지의 얼굴이 눈 앞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여인금단(女人禁斷)의 맹세를 자기는 아버지께 분명히 맹세하지 않았는가!

「아버지, 영민을 믿어 주십시요. 영민은 아직 어리나이다. 그러나 영민은 노력하겠읍니다!」

회오리 바람이 무섭게 얼굴을 두드리고 지나간다.

영민은 트렁크 위에 걸터 앉아서 문득 콘사이스를 생각하고 호주머니에서 군밤 꾸러미를 끄집어 내어 까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등 뒤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나더니 목에 털이 달린 부드러운 외투가 향수 냄새와 함께 영민의 등에 살그머니 씌워진다.

영민은 군밤을 한줌 쥐어 자기 어깨 위로 말없이 삐쭉 내밀었다. 그 삐쭉 내민 영민의 손으로부터 군밤 한줌을 분이도 잠자코 받았다. 그리고 트렁크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분이도 군밤을 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앉아서 얼마 동안을 묵묵히 군밤만 까다가 분이가 한 말 ──

「나 부산꺼정 영민씨 배웅 갈려구 했었지만……그만 둘테야요.」

「………」

이튿날 새벽 경성역에서 분이가 혼자 쓸쓸히 차에서 내리면서 한 말 ──

「한 三[삼]년쯤 더 있다가 만나요, 네? 키만 크믄 뭐 어른이나? ──」